강남-누가복음 10장 17절 (탄로 난 악마) 220308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0장 1절.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그렇게 4절까지 보았습니다.
여기 칠십 인을 보낸다. 보내심의 그 반대가 4절에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보내심의 반대말은 소유성, 뭐를 갖고 있다는 거에요. 인간이 뭐를 갖고 있으면 내가 어딜 밖에 나가도 후딱 갖고 있는 그것이 소중해서 후딱 자기에게로 되돌아와요. 보내심이 성립이 안 됩니다.
모든 인간에게 보내심이라는 것이 왜 이루어지지 않는가. 내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것을 중심으로 해서 반경 아무리 멀리가도 다시 정들었던 그리고 소중한 나의 것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내가 잠시 떠나는 건 되지만 누구로 인하여 보내심이라는 것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내가 나를 어디 다녀올까? 갔다 올까? 이것은 본인이 본인을 보내심이기 때문에 다시 본인 자리로 오기 때문에 이것은 진정한 보내심이라 할 수 없어요. 진정한 보내심이 성립될려면 내 것이 내 것으로 돌아오지 않는 방식으로 누군가에 의해서 보내져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 보내심을 받을 때 “전대나 배낭이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이것은 상당히 청빈해보이죠. 가난해 보이잖아요. 그것은 새로운 나라의 원리를 보내심을 통해서 구성을 합니다. ‘원리 구성’. 이 사람들의 특징은 이 새로운 나라에 가격은 기존의 가치와 가격으로 셈할 수 없을 정도. 셈할 수 없을 정도.
기존의 갖고 있는 소유성을 가지고 갖고 있음을 가지고 새로운 나라의 가치를 표현할 수가 없다 그런 뜻입니다. 그럼 새로운 나라, 영생의 나라의 가치, 가격은 뭐로 표현 하느냐? 빈손으로 표현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빈손으로.
빈손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빈손으로 표현되면 어떤 점이 좋으냐 하면은 빈손이기 때문에 여기는 무엇이 성립되지 않느냐 하면은 이익 혹은 손실이 빈손한테는 여기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내가 이익을 봤다 손해 봤다 빈손한테는 할 소리가 아니지요.
아무 재산이 없는 어린아이 6개월이나 1년 된 어린아이. 돌 지난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자기 명의의 통장이라든지 부동산이 전혀 없잖아요. 재벌 같으면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은 없잖아요. 그런 아이에게 네가 만약에 2021년도에 작년에 2월 달에 태어난 아이, 그러면 원래는 올해 3월달 되면 돌 막 지났잖아요.
그러면 아이에게 물어보는 거에요. 네가 1년 동안 인생을 살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이익을 봤고 얼마나 많은 손실을 봤느냐 물으면 그 아이는 뭐라고 하겠습니까? “까까. 엄마.” 이럴 거에요. 손실과 이익은 어린아이한테는 전혀 해당이 안되지요. 어린아이한테는. 이익이냐 손해냐 하는 생각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거죠.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70명을 둘씩 짝 지어서 주님이 다닐 그 동네에 미리 이렇게 보낸다는 것은 특이한 인간들을 배후에서 주님이 조종한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거에요. 배후에서 주님이 조종한다. 그러면 이 칠십 인의 집단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새로운 나라의 원리, 원리 구성을 칠십 인의 집단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에요. 기존의 세상 말고.
그냥 보내심 자체로만 구성이 되는 나라. 내가 마음먹고 어디 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에 의해서 보내심 그것으로 그 나라의 빈손이라도 괜찮을 정도로 충족되는 것. 모든 요소가 충족이 돼요. 주님이 보냈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 새로운 나라에서는 더 필요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보내심’의 반대말은 뭐라고 했습니까? ‘소유성’이죠. 내가 내 것 갖고 있는 것. 소유성은 다시 누가 누굴 보낸 게 아니고 내 가진 것으로 이렇게 귀환하지만 보내심은 누군가에 의해서 보내졌기 때문에 결국은 나의 삶이란 그 속에 뭐만 가득 들어 있느냐 하면은 보내심의 취지로 가득한 거에요 취지로. 보내신 자의 보내신 뜻만 가득한 것. 이게 보냄을 받은 자의 배짱이죠. 전혀 꿀릴 게 없어요.
그래서 보냄을 받은 자는 뭐가 날라가느냐. ‘내 인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지요. 빈손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가져가기 때문에 이익이나 손실 같은 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한 평생 회계, 계산해서 인생이 다 끝난 지점에서 나는 내 인생을 돌아보니까 나한테 얼마나 이익이 되었고 얼마나 손해가 되었느냐 그런 것을 따질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은 아무도 나를 보낸 적이 없다는 그것을 그냥 티를 내는 거에요. 그러면 이들이 따로 모여서 누구한테 가지 말고 산 같은데 칠십 인들 보내서 너희들끼리 살아라 이러면 될텐데 왜 칠십 인들 기존의 세상에 각처에 왜 둘 씩 해서 보내느냐. 그것은 바로 이게 오늘 강의에 제일 어려운 대목인데요, ‘타인과 나를 교환시키기 위해서’. 타인과 나를 교환시키는 거에요.
주님이 보낼 때는 이미 보내기 전에 나는 기존 세계의 일원이에요. 구성원입니다. 우리는 그냥 진공 상태의 내가 아니라 이미 구성된 기존 세계의 일원으로서 한 사람으로서 이미 나 라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있어요. 그때는 주님이 우리를 보내지 않을 때에요.
보내지 않을 때는 기존 세계 안에 들어있으면서 그 세계 안에 하나의 시민으로 살 뿐이에요. 그런데 보내심을 받아버리면 이것은 보낸 쪽이 기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분, 예수님에 의해서 보냈기 때문에 기존의 세계의 모든 세계는 전부 다 뭐냐 하면은 ‘타인’, 남이 돼요. ‘남’.
남이 되고 그 남 중에 내가 바로 그 기존 세계의 일원이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남이 되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남이 되는 거에요. 산 속에 도 닦는 게 아닙니다. 기존 세계에 나가서 정 들었던 내가 나 답게 살려고 애썼던 그 동네에 그 나하고 똑같은 나의 분신들, 나를 빼다 박은 나, 또는 그들을 닮고자 애썼던 나를 기존의 보내심의 나로 교환을 하는 과정을 몸소 체험케 하는 거에요.
그들은 소유 가지고 사는 보람을 느끼며 사는 반면에 우리는 주님의 보내심 가지고 버티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거에요. 그런 차이를 느끼게 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교환이에요. ‘교환’. 전에 나였던 것을 전혀 예상 못한 새로운 나로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걸 어디서 하느냐? 기존 세계 속에서 하는 거에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구원받아 놓고도 아직도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새삼스럽게 바꾸어라가 아니라 이미 바꿔진 것이 기존의 세상 속의 나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그걸 몸소 체험케 하는 거에요. 그래야 체험해야 보내심의 이 특별함이 날이 갈수록 우리에게 계속해서 올라오기 때문에. 감격스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보내시는 분, 우리를 보내신 분 자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늘에 속한 분이 오셨기 때문에 이 보내심을 받을 때는 무엇을 빼야 되느냐 하면은 웃음과 울음 또는 기쁨과 슬픔을 쏙 빼야 돼요. 이런 감정적인 요소를 빼야 됩니다.
마치 길거리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신정네거리에 가면 뭐 있느냐 하면은 트럭에 통닭해가지고 기름 쫙 빼가지고 바짝 굽는 통닭 기계 있잖아요. 그처럼 우리에게 웃음과 울음 그런걸 다 빼야 돼요. 슬퍼하지도 말고 기뻐하지도 말아야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옛날에 우리 내 소유가지고 기뻐했고 내 소유가 달아날 때 울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야 교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당히 냉정하고 차갑지요.
그런데 기쁨과 슬픔 자체가 이 감정적인 요소를 뺄 때에 이게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4절에 보면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이게 왜 그러느냐 하면은 기존의 기쁨과 슬픔 이게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이렇게 표현될 수가 있어요.
일상 속에는 탄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는 멈추기가 힘든 탄력이 있어요. 살아왔던 습관 같은 것, 관행 같은 것이 강력하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일상속의 탄력은 어디서 탄력을 받느냐 하면은 내가 그동안 모은 지식. 왜 인간은 자꾸 지식을 모으느냐 하면은 지식을 모아야 살 수 있기 때문에.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요양사 자격증. 지식이 있어야 누가 요양사로 써주니까. 그동안 내가 모은 모든 지식의 총량은 내가 만나야 될 타인이 내가 모은 지식을 타인이 능가해요. 능가한다고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내가 이 땅에 살기 위해서 모아 놓은 모든 지식은 주께서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마주치는 그 타인의 탄력한테 우리가 이기지를 못해요.
사람들은 도 닦기를 원하지 남 만나기를 싫어해요. 이 세상에 기술도 없고 배운 재주도 없을 때 특히 여자분들이 일거리 해서 용돈이라도 좀 벌고 30대 여자분들은 자기 시집 갈 미천이라도 할려면 제일 쉽게 할 수 있는게 뭐냐 하면은 콜 센터. 콜 센터. 콜 센터 알지요? 안녕하십니까! 이런 거. 뭘 도와드릴까요?
카드 회사 콜 센터에다가 물류회사 콜 센터, 은행 콜 센터 많지요. 그 콜 센터, 상담센터, 보험회사 상담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아무 기술 없어도 그 전화 그냥 하면서 그 힘든 직업을 하는 이유가 그들이 제일 정면으로 타인과 타인의 목소리와 만나요. 아주 이게 심리적으로 힘든 직업이죠. 술 먹고 무슨 소리를 다 지껄일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과 상대하는 것.
그래서 고급인력일수록 직접 사람과 만나지를 않습니다. 대통령같은 거. 장관, 경기도 지사, 검사. 직접 사람과 안 만나요. 수사관들 통해서 대충 다 하고. 그중에 하나 포함하면 목사. 큰 교회 당회실에 갈려면 비서를 거쳐야 해요. 어중이 떠중이 오면 안되니까 비서 거쳐야 되고 재벌 회장님. 그런 것은 전부 비서실이 있잖아요. 미리 예약 안하고 오면 안 만나주고 이런 거요. 사람 만나는 게 그렇게 힘들어요. 사람 만나는 게.
그래서 돈 좀 있고 좀 살면 집을 어떤 동네에 집을 사느냐 하면은 사람을 안 만나는 동네에다가 집을 지으면 됩니다. 사람이 눈에 안 띄는. 길 거리에도 사람이 없는. 외판원부터 해가지고 고물 사세요 이런 것도 못 들어오는.
그리고 못 사는 사람일수록 왜 그렇게 부딪히는 사람이 많은지. 한 집에 왜 그리 많은지. 아가씨가 밤 11시에 가면 뒤 따라 오는 사람이 왜 그리 많은지. 가방 들고 가면 뒤에 막 따라 오는 거에요. 옆집에 사는 줄도 모르고 “왜 자꾸 따라오는데요!” “나 우리집에 가는데” 이런 식으로. 왜 그 동네는 조용할 날이 없어. 3층에서 부부싸움하면 1층에서 애 울고 아이고 돈 벌어서 빨리 탈출하든지 해야지.
그래서 사람 만나는 게 타인은 내가 그동안 끌어 모았던 모든 지식의 힘을 가볍게 넘겨버립니다. 초과해버려요. 사람 만나는 게. 직장에서도 영업 사원들이 제일 힘들어요. 실적 해야 되고 사람 꼬셔가지고 성과 얻어야 되고요. 그러면 주님께서 보내시면 영업사원도 힘들고 상담 직원도 힘든데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우리는 힘들어서 얼마나 고생이 되느냐.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그러면 우리가 너무 힘들지 않느냐 생각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누굴 만나느냐 하면은 이걸 만나요. 타인을 만나는데 무슨 타인을 만나느냐? 악마, 귀신을 만나기 위해서 보내심을 입는 겁니다. 시시한 사람은 가라. 너 말고 너 배후자.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10장 17절부터 나옵니다. 17절부터 20절에 보면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세상의 기쁨과 슬픔은 다 쏙 빼야 된다 이 말이죠. 세상적인 기쁨과 슬픔은 일상에서 보면 탄력이에요. 내 것이 증가하고 내 것이 잘 된다는 것으로 기뻐했던 그 일상적인 습관, 그것을 정돈하는 명목으로 그걸 기대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사람에게 문안하지 말라는 말은 인기 있는 것. 인기 있는 것 이런 거 원하지 말라는 이 말이거든요.
유명한 것과 인정받는 것과 차이를 줘야 되는 겁니다. 유명하다는 것은 여기에 뭐가 있느냐? 여기에 속임수가 가미될 수가 있어요. 유명하다는 말은 나의 추종자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추종자의 증거는 숫자로 표현되겠지요. 그럼 이 숫자를 전에 있던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슨 수작을 부릴지 우리 자신도 알 수 없어요.
유명해야 된다는 것은 타인에게 많이 알려진다는 것이고 그러면 내가 타인과 교환할 필요는 없고요 오히려 타인이 나에게 매료될 조치만 생각하는 거에요. 숫자에 신경을 쓰는 거죠.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 다음부터는 온갖 수작을 다 부린다 이 말이죠.
인정받는다는 것은 나 자신부터 과연 나를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가를 타인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물어보는 겁니다. 이게 인정이에요. 그러니까 인정은 뭐냐 하면은 다 떠나도 지금 내가 처해 있는 것에 대해서 내가 감사하는 것이고 유명하다는 것은 다 떠나버리면 이게 절망하고 원망하고 슬퍼하는 거죠.
그러니까 인정받는 것하고 유명한 것하고 어떻게 됩니까? 정반대지요. 너희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더라도 보람을 느끼는 것은 인정 쪽이지만 유명이라고 하는 것은 유투브나 이런데 ‘좋아요’ 많이 올라오고 SNS 거기에 팔로워가 많고 교회 목사는 교인들이 점점 늘어나서 자기 알아주는 사람들 많을 때 그렇게 되어버리면 진정 스스로 자기 인정이 거기서 날라가버립니다.
그래서 가정주부 같은 경우에 나이 50 넘도록 애들 둘이고 셋이고 키워놓을 때 남들 보기에는 ‘아이고 아이 잘 키웠습니다’ 하고 칭찬들 하지만 그 자식들이 엄마를 엄마의 수고와 애씀을 인정하지 않으면 굉장히 어떤 허무함을 느끼죠.
대외적으로서는 동네에서 자식 잘 키웠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정작 자식들은 이제 엄마한테 더 배울게 없고 엄마한테 더 뜯을 돈이 없고 엄마한테 노동력이 더 필요치 않을 때 엄마는 소외됐다는 느낌이 안 들겠어요? 들지요. 그럴 때 엄마는 그 자식들부터 인정받을 생각하지 말고 그 인정하는 그 스스로의 기준을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 과연 나를 인정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봐야 되겠지요.
예수님의 칠십 인 같은 경우에는 보내실 때 원칙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마귀를 만나라. 귀신을 만나라. 이거는 세상 사람들은 귀신, 마귀 그런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요. 이것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칠십 인이 만나야 될 것은 낯선 것, 같은 말로 다른 것. 기존의 세계에서 없는 것. 기존의 세계에서 없는 것. 낯선 것, 다른 것, 없는 것.
이런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가서 만나라는 거에요. 그러면 만날 때 안녕하십니까. 혹시 이 세상에 없는 것 갖고 계십니까? 이럴 수는 없고 뭘 하느냐 하면은 주께서 보내실 때 악마와 귀신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칠십 인들에게 부여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말씀’, 주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보낸 거에요. 주님의 말씀으로.
주의 말씀 보내가지고 저 사람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런 이야기하지 말고 그 사람이 우리한테 항복하는 거 말고 그 사람을 그동안 배후에서 지배했던 귀신과 마귀가 자기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걸 보라고 주의 말씀을 주신 거에요. 그걸.
그러면 여기 칠십 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라고 하시는지 그게 누가복음 10장에는 안 나타났는데 같은 누가복음 10장 이야기를 마가복음 9장에서도 미리 나옵니다. 마가복음 9장 38절에서 40절에 보면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이게 마가복음 9장 39절에서 40절까지 나오는 이야기가 누가복음에 보게 되면 누가복음 9장 49절에서 50절까지 딱 나옵니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칠십 인들에게 이야기한 그 내용이 누가복음을 통해서 그걸 전제로 해서 그 뒤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누가복음 10장에 나온 그들에게 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너무 길기 때문에 제가 혼자 후딱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짧게 보게 되면 마가복음 9장 43절에 보면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7절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라는 이야기를 세상에 나와서 한번 전해봐라 이 말입니다.
전해 보게 되게 되면 그동안 인간 세계를 장악했던 그 귀신과 악마가 발작을 일으키면서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반응을. 쉽게 말해서 극단적이다. 극단적이다. 우리의 소박한 삶의 행복을 당신은 모독한다. 예수님께서 칠십 인들 보낸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뭐냐 하면은 생태계 파괴에요. 정신적 생태계를 파괴하는 겁니다. 정신적 생태계를 파괴하는 거에요.
생태계라는 것은 이게 안정적으로 유지되야 우리는 일관된 삶의 원칙을 구성할 수가 있어요. 편안하게. 그리고 심리적 안정을 원하고 있는데. 이렇게 극단적인 발언. 네 눈을 빼라. 손을 찍어 버린다든지. 발을 찍어버린다든지. 만약에 그걸 찍지 아니하면 그것도 그냥 불이 아니고 영원히 죽지 않게 타는 불. 불 타면 속 시원하지요. 그게 아니고 죽지도 않으면서 계속 타들어가는 그런 고통. 그 지옥불에 네가 들어간다.
자, 이런 이야기를 할 때에 참다 참다 숨어 있는 귀신들이나 마귀들이 나오는 겁니다. 이걸 뭐 마태복음 10장에서는 그 결과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그 지역 동네에 너희들이 내 말을 듣고 회개했으면 너희들이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가 너희들보다 더 나을 지경으로 너희들은 내 말을 강력하게 거부한다.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칠십 인의 생태계의 파괴잖아요. 파괴. 이 말씀 말고 예수님의 전체 말씀이 다 제자들 입을 통해서 칠십 인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그대로 다 쏟아졌지요. 파괴라는 것은 이것은 협상이나 양보 그런 것은 전혀 없거든요. 그냥 멸망 선언입니다. 일방적인 멸망선언이에요. 소련 탱크나 러시아 탱크가 와서 밀어버리는 것과 똑같은 거에요. 칠십 인들이 외쳐야 될 이 일이.
다시 이야기합니다. 칠십 인들을 보내는 목적이 뭐냐 하면은 “숨어있지 말고 나와 이 귀신아. 숨어있지 말고 나와 이 악마야” 그 이야기에요. 말을 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어 나오게 말씀 앞에서 나오도록 하는 거에요.
그래서 주의 말씀은 능력이 있다는 말은 꽁꽁 숨어 있는 악마와 귀신이 튀어나오게 하는 능력, 그 능력이 바로 말씀의 능력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의심하게 만들어요. 같은 말로 생태계 파괴, 멸망선언. 멸망 선언의 결과로서 그들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세상에 대해서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의심하게 만들어라.
의심이 믿음의 시작이다. 의심한다는 것은 이미 믿음이 시작된 거에요. 의심한다는 것은. 그 의심이 세상에 대해서 의심한다는 말은 세상의 일원으로서 자기의 꿈과 희망을 펼칠 그 미래의 무지개 꿈에 놀아나고 있는 나 자신부터 의심의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지. 이게 지금 옳은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 사람들은 전부 다 저게 천국 가는 길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 길이 옳은지. 지금 생태계 파괴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인간의 삶을 조립할 수 있도록 모든 재료가 다 구비되어 있는 생태계, 이 정신적 생태계를 파괴한다. 이 생태계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이게 많아요. 길. 길들이 많아요. Way. 길이죠. 길이 많아요. 이리 가야 되고 저리 가야 되고.
그러나 파괴는 모든 길을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길은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너희들이 지나간 그 흔적이 바로 새로운 길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가고 난 뒤에 생기는 것이 길이고요 그 내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보내심,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은 이 땅에 길이 없어요. 그냥 예수님 자체가 길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고난 뒤에 돌아보면 거기에 없던 길이 새로 생긴 겁니다. 그래서 “나는 길이요” 라고. 이 길은 주님이 가신 그 길은 기존의 모든 길을 무시해버리는 겁니다. 인간들의 길은 길이 아니었었습니다. 길이 아니었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마는 뭡니까? 인간보다 악마가 뛰어나니까 악마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서 뭐로 보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는 말씀이 유일하게 천국 가는 길인 것을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귀신과 악마는 알잖아요. 그래서 귀신과 악마는 바로 그들이 그렇게 감추고 싶고 막아서고 싶은 거에요. 그 길을 들키고 싶지를 않은 거에요.
왜냐하면 악마는 예수님을 아니까요. 귀신이 예수님 만날 때 뭐라 했습니까? “우리를 멸망하러 왜 일찍 오십니까?” 이 말은 이미 자기는 멸망하게 될 것은 끝장나는데 그 전에 인간들 많이 꼬셔서 자기 세계로 가고 싶은데 미리 왔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땅에 길이 많다는 것은 악마는 알아요.
그 어떤 길도 천국으로 통하지 않는 길이라는 것 때문에 악마는 인간들이 길을 만다는 것에 대해서 흔쾌히 그냥 동의하고 그걸 후원해준 겁니다. 길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전부 다 사적인 길이거든요. 부분으로 하면 다 희극이고 전체로 보면 비극이라고. 인간은 자기 전체가 비극인 것을 모르고 코 앞에 있는 어떤 성과 잘되고 회사 잘되고 가정 행복하면 자기는 웃어도 되는 줄 알고 있어요.
그러다 코로나 걸리면 울어야 되는 줄 알아요. 코로나 걸려서 울었어요? 그게 길인 줄 알고 있는 거에요. 이 땅에 길은 없습니다. 전부 다 막혀있는 거에요. 길인 줄 알지만 길 끝에 가면 전부 다 막혀서 없어요. 그냥 몸부림쳐본 거에요. 악마는 알아요. 천국 가는 길이 없다는 걸. 악마는 알고 있어요. 그런데 없는데 예수님의 그 말씀이 유일하게 천국 가는 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어느 길로 가면 천국 가는 길입니까? 그게 말이 안돼요. 왜? 애초부터 천국 가는 길은 없어요. 세상에서 지옥 가는 길이 마련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오셔서 세상에서 천국 가는 길이 열렸잖아요. 주님 자신이 길이기 때문에.
따라서 세상에서 지옥 가는 길이 아니고 세상 자체가 지옥입니다. 세상 어디에 갈 필요 없어요. 지옥 가는 길로 안 갈 때 그냥 살아. 그냥 살면 지옥 가요. 그냥 살면 지옥 가요. 자동이에요. 무슨 나쁜 짓해서 지옥 간다. 아니에요. 그냥 살면 그게 지옥 가는 길이에요. 새삼스럽게 지옥 가는 길은 없습니다. 일상에 탄력 받아 살면 그게 지옥이에요. 벌써 지옥생활 시작했고요.
제가 문제를 하나 낼게요. 어떤 문제냐 하면은 어떤 사람이 딱 죽어보니까 천사 둘이 서 있는 거에요. 하나는 거짓말하는 천사, 악마지요. 또 하나는 진실만을 말하는 천사에요. 그럴 때 그 사람에게 조건이 뭐냐? 천사에 대해서 두 개의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으면서 그 다음부터는 천국 가는 길을 찾아야 돼요. 문제가. 질문을 두 개만 해야 돼요.
그런데 질문을 똑같이 하는데 거짓말만 하는 천사와 참말을 하는 천사가 둘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인지 몰라요. 자, 어떤 질문을 던져야 그 사람은 천국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이에요. 머리 쓰는 질문이에요. 여러분들은 머리 쓰지 말고 제가 답변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 손으로 해가지고 “이 길이 천국 가는 길입니까?” 질문 두 개 중에 한 개를 써먹는 거에요. “이 길이 천국 가는 길입니까?” 라고 묻는 거에요. 물으면 진짜 둘 중에 하나는 진짜 천사는 “예”라고 이야기할 거고 그중에 악마도 거짓말하기 때문에 “예”라고 거짓말 할 거란 말이죠. 둘 다. 그러니까 질문 한 개 가지고는 몰라요. 분명히 둘 중에 하나는 거짓말인데. 둘 다 “예” 하니까 모르잖아요.
그때는 카드가 하나밖에 안 남았어요. 질문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 길이 천국 가는 길입니까라고 할 때 ‘예’라고 답변할겁니까?” 와 어렵다. “이 길이 천국 가는 길입니까라고 할 때 ‘예’라고 답변할겁니까?” 라고 할 때 악마 천사가 곤란하게 된 거에요. 거짓말하는 천사가. 진짜 천사는 “예”라고 할 거고 악마 천사는 “아니요”라고 하지요.
그러면 내가 지적한 방향은 천국 맞아요. 만약에 하면 반대쪽이 되는 것이고. 참 그런 식으로 말 잘해서 논리적으로 하면 좋겠는데 문제는 성경에서는 어떤 인간도 이미 그 거짓말하는 악마와 한 패이기 때문에 내가 어느 쪽이 천국 가는 쪽입니까? 물을 자격조차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복음적으로 복음적인 질문을 제가 할 테니까 이거는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다리를 건너는데 여기 파수꾼이 있어요. 파수꾼이 굉장히 다리 건너는 사람에게 겁을 주면서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이 다리를 건너고 싶어도 내가 허락한 사람만 건너지 만약에 허락하지 않은 사람이 건너버리면 당신은 교수형에 처하겠다 하고 기세등등하게 파수꾼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답변 한 개만 해가지고 어떻게 무사히 다리를 건널 수 있느냐. 질문은 뭐냐? 그건 복음적으로 답변하면 돼요. 답변은 이겁니다. 나는 지금 저 교수형 당하기 위해서 저 다리를 건넙니다. 이러면 파수꾼이 할 말이 없어요. 죽겠다는데 뭐.
다시 할게요. 네가 내 허락 없이 건너면 교수형에 처한다 이렇게 하니까 예 나 교수형 당할라고 이 다리를 건너고자 합니다. 허락해주세요. 허락해도 안 해도 곤란하게 되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은 우리가 나 같은 인간은 지옥가야 됩니다 라는 답변을 내놓으면 돼요. 그게 우리 모습이고 이제 답변됐지요. 저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식으로 저는 매일 살아갑니다. 이 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죽어 마땅한 걸로.
그러니까 제 말은 뭐냐 하면은 그동안 악마와 귀신들이 인간을 장악하고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 하면은 옳고 그름과 그리고 선과 악을 주님 쪽에 일임한 게 아니고 그걸 내 쪽에서 내가 처리할려고 그걸 유혹받아서 그렇게 됐다는 게 그게 화근이 된 거에요.
선과 악을 내가 처리해야 돼요. 내가 말을 어떻게 말하고 내가 질문을 어떻게 던지고 이런 생각 자체가 이미 선과 악을 내가 인수했다는 그 자체에 대해서 나는 가치 있다고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거에요. 그게 바로 마귀 들린 상황입니다. 따먹지 말아야 될 것을 따먹은 상황이 존재가 그 상황이에요.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주님의 대처 방법은 이제는 여러분도 아셔야 돼요. 거기에 대한 주님의 대처 방법은 뭡니까? 내 결정과 내 선택과 내 행함과 내가 선과 악을 판단해가지고 옳은 길로 가는 그것이 배후에 누가 있다? 악마가 있는 것을 악마가 있다는 것을 그것을 발췌시키는 말을 칠십 인에게 담아서 보내야 돼요.
왜? 그 보낸 자리에 주님이 길이 되시기 위해서 가시기 때문에. 보낸 자리에 가시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선과 악을 내가 판단해서 내가 옳은 길로 가겠다는 이 자체가 마귀 들린 모습이다라는 것을 일깨워주게 하는 겁니다. 이 모습이 뭐냐? 내가 판단하겠다는 것은 뭐가 없다? ‘보내심’이 없는 거에요. 내가 판단하니까 내가 시작점이니까 내가 판단하니까.
그러면 주님의 방법은 뭡니까? 자, 내가 문제를 던질테니까 이걸 네가 선과 악으로 해가지고 이걸 실제로 행할 수 있는가 한번 보라. 네가 오른 눈이 범죄하거든 어떻게 하라? 빼버려라. 오른 팔이 범죄하거든 손을 잘라버려라. 오른 발이 범죄하거든 찍어버려라. 그래야 나머지라도 지옥불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 말은 주님의 말씀에서 지금 우리가 무엇에 초점을 두어야 하느냐 하면은 결국은 이 지옥불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거에요. 그리고 이 지옥불에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 인간 세상, 이 세상에 주님께서 지옥불이라는 그 단어를 개념을 언급했다는 자체가 이 세상과 지옥불이 관련성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옥불 속에 우르르 지금 침몰되고 있다는 거에요 이 세상이. 이 세상이 너희들 옳은 판단하면 지옥불 안 간다는 말은 지옥불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문제는 옳은 판단인데 문제는 옳은 판단을 하겠다는 그 순간 무엇이 날라가버립니까? 누군가로부터 보내심이 없다는 것이 완전히 들통이 나버린 거에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면 나는 교환할 타인이 없잖아요. 교환할 타인이. 지금 궁극적으로 칠십 인이 뭐라고 하느냐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지요. 너희 이름이. 그 기록된 것이 뭐냐? 누구의 생명책이냐? 예수님의 이름의 생명책이에요. 그럼 예수님이라는 그 타인과 교환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는 겁니다.
누구를 보냈다는 말은 사람하고 싸워서 승리해서 쾌감을 느끼라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하고 싸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 현재 이런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것이 자기밖에 모르게 만드는 그 배후에 숨어 있는 그 영적 사람들, 영적 존재들 그것을 어차피 주님이 만날 거니까 칠십 인 보고 너희들이 먼저 만나봐라. 그리고 그 만나는 그 과정이 내가 해야 될 그 길과 일치되는 길이라고 하는 거에요.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0장 17절 (탄로 난 악마) 220308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지금 전쟁 중이다. 영적 전쟁 중이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 전쟁이 났는데 거기서 군사들이나 의용군들이나 전쟁하게 되면 거기서 귀신이나 마귀를 만납니까? 안 만나지요. 자신의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는 전쟁이기 때문에 악마와 못 만납니다. 그들은 탱크 집어넣고 비행기 집어넣고 미사일 집어넣고 하지만 복음은 안 넣잖아요. 복음이 들어가지 아니하면 영적세계가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를 않습니다.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대 인간의 친목 단체가 되고 말아요. 그래서 이 누가복음 10장에서 13절에 나오지만 13절 한번 봅시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또,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여기 화 있을진저 심판 때에 아까 말한 그 지옥 불, 그리고 11절에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자,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 칠십 인들이 뭐를 전했는지 그 전한 내용의 안에 어떤 그 영적 요소가 담겼는지를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꼭 있습니다.
그냥 여호와 증인처럼 성경 구절 외워가지고 해가지고 될 문제가 아니거든요. 그런 거 외운다고 귀신 안 나타나고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것은 귀신들도 언제든지 할 수 있어요. 귀신이 하지 못하는 것을 칠십 인들이 전할 수 있어야 그게 진정 예수님이 보내신 칠십 인. 그냥 자기가 알아서 결심해서 나온 칠십 인이 아니고 주님이 보내신 전도자라는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주님이 보내실 때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보냄을 받습니다. ‘보내심’, 자신의 의사와 생각과 무관함. 그러한 내용에 대해서 우선 구약의 내용을 보고 그 다음에 신약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구약 내용을 다니엘을 보겠습니다. 다니엘 1장에 보게 되면 1장 1절을 보게 되면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거 누가 이렇게 했습니까? 누가 바벨론을 격동시켜서 하나님이 계신 예루살렘을 포위토록 했습니까? 이건 하나님이 하신 거죠. 예루살렘 본인들의 의견 모아서 한 게 아니지요. ‘야 바벨론아 우리 좀 포위해서 우리 좀 박살내줘’ 이러지 않았단 이 말이죠. 이거는 선지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세상 돌아가는 것이 주님에 의해서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그래놓고 2장을 한번 봅시다. 다니엘 2장 1절에 “느부갓네살이 다스린 지 이 년이 되는 해에 느부갓네살이 꿈을 꾸고 그로 말미암아 마음이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잠을 이루지 못한 게 뭐 다니엘이 일부러 굿을 해서 잠을 못 잤습니까? 아니지요. 다니엘은 자기 잠 자고 느부갓네살도 자기 잠 자고 각자 자기 잠 자고 있었어요. 주님께서 이렇게 번민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이 말이죠.
그 다음에 다니엘 2장에 그 다음부터 신기한 일이 벌어집니다. 다니엘 2장 5절에 “왕이 갈대아 술사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명령을 내렸나니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의 집을 거름더미로 만들 것이요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그런즉 꿈과 그 해석을 내게 보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신명기 28장 같은 경우에 내 율법을 지키면 율법을 준수하게 되면 뭐가 오고? 복이 오고 율법을 위반하고 못 지키면 뭐가 온다고 했습니까? 저주가 오지요. 이게 율법이 갖고 있던 속성이 이거에요.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요구한 적이 없어요. 율법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쳐들어온 겁니다.
느부갓네살에게 꿈은 그냥 쳐들어온 거에요. 마치 뭐와 같습니까? 율법적 기능과 마찬가지에요. 율법이 왜 오느냐? 여기 지금 바벨론 나라에 누가 와 있느냐 하면은 언약의 백성, 다니엘과 세 친구가 와 있지요. 다니엘+3. 다니엘 밴드라고 하는데 여기 다니엘 밴드가 와 있잖아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죠.
그렇다면 여기서는 반드시 무엇을 유발한다? 율법이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의 기능이 뭐냐 하면은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 거에요. 율법의 기능이. 그러면 이방나라든 이스라엘이든 모든 어느 시대든 간에 그 시대는 율법이 율법답기 위해서 형성되야 될 그 환경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환경을. 이게 구약에서 말하는 거에요.
자, 인간이 사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다? 율법에 의해서 장악된 세계다. 이게 바로 구약에서 말해주는 겁니다. 그건 다른 나라는 모르지만 이스라엘은 그걸 먼저 혹독하게 체험했던 겁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약속의 땅에서 살지 못하고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이면서도 바벨론 땅에 포로 잡혔다는 것. 그것은 역시 율법은 자신의 취지를 포기한 적이 없다. 그걸 명확하게 보여주잖아요.
인간의 결심, 인간의 각오 그것은 다 헛된 짓거리다. 이 세상에 일관되게 변치 않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원칙이다. 그래서 비록 다니엘과 세 친구가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포로 잡혀갔지만 율법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찾아오는 거에요. 어떤 식으로? 느부갓네살의 꿈으로.
그러니까 이 느부갓네살이 인간적으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거에요. 꿈은 지가 꿔놓고 남이 자기 꾼 꿈 밝혀내면, 다니엘 2장에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보이면 너희가 선물과 상과 큰 영광을 내게서 얻으리라. 만약에 밝혀내지 못한다면. 너희가 만일 꿈과 그 해석을 내게 알게 하지 아니하면 너희 몸을 쪼갤 것이며 너희의 집을 거름더미로 만들 것이다” 이거는 횡포도 이런 횡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성적인 신하들이 그 신하들이 얼마나 이성적입니까. 그래서 7절에 보면 그 신하들이 협상을 내놓습니다. 일단 임금님이 자기 꿈 꾼 내용을 우리한테 이야기하시면 우리가 해석해드리는 선으로 우리가 딜합시다. 그렇게 협상합시다. 이렇게 하니까 임금님은 요지부동. 이거는 인간 대 인간의 관한 꿈이 아님을 본인이 직감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것은 자기도 어쩔 수 없는 꿈에 장악당하는 그 모습을 보여준 겁니다.
사실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는 이스라엘 왕이 해야 되는데 그리고 그 혜택은 백성에게 돌아가야 되는데 지금 이스라엘 왕이 없잖아요. 망했으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있잖아요. 백성은 있으니까 그 왕의 역할을 누가 하느냐? 이방 나라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의 남은 자들이 구원하도록 조치를 일관되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왕이 이렇게 억지 같은 소리를 하니까 10절에 “왕이 꾼 꿈을 알아낼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도사라도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신들 외에는 그것을 보일 자가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니까 임금님이 “그 말이 곧 내 말이야” 신하들에게 임금이 답답해서 하는 이야기가 지금 나 좋아라고 이런 지시 내리는 게 아니라 나도 지금 눌려있다. 나도 지금 당하고 있다. 알 수 없이 나타난 신의 꿈에 나도 지금 혼나고 있다. 너희 선에서 좀 해결해봐라.
만약에 그러면 내가 지금 임금이 꿈 때문에 번민하고 있잖아요. 그럼 임금님이 화가 난 이유가 임금님은 지금 낯설게 나타난 엉뚱하게 나타난 그 신에게 지금 휘둘리고 있고 괴로워하고 있는데 내 부하되는 내 신하들은 내 아픔에 참여하지 않고 희희낙락거리는 꼴을 도저히 자기는 못 보겠다는 거에요. 너희는 나 없이도 좋다 이 말이지?! 에라이 이 참에 너 죽고 나 죽자 이러는 거에요.
그 임금 말이 맞아요. 임금 말이 맞는 이유가 그 당시에는 국가의 힘으로 살아가는 동네에요. 개인의 주권과 인권이 살아있는 데가 아닙니다. 국가 자체 대표하는 왕이 힘들면 이거는 그 나라의 운명이 힘들다는 뜻이거든요. 왕은 거기에 대한 책임자고요.
그 자기에 속해 있는 나라를 평안과 안전으로 이끌 책임이 있고 그런데 책임자가 이렇게 당하고 있는데 책임을 혜택을 입는다는 인간들이 나 몰라라 하고 있을 때는 그거는 나도 죽지만 너도 죽어야 된다는 거에요.
옛날에 순장제도라고 해가지고 신라시대 때도 그런 게 있었답니다. 임금 죽으면 임금의 유력한 최측근과 그리고 부인들까지 종들까지 100일치인가 150일치인가 양식주고 거기 무덤에다가 같이 살게 만들어요. 그래서 옛날 왕들이 무덤이 커요. 노아 방주도 아니고 큽니다. 그 안에 이미 시한이 결정된, 살 날이 결정된 그 안에서 먹고 죽으라는 거에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어떻게 임금이 죽었는데 임금과 함께 동거동락을 했던 사람이 임금 죽었는데 네가 산다는 것은 결국 임금 따로 너 따로 밖에 안 되니까 임금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면 임금 죽을 때도 네가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같이 무덤에 집어넣은 거에요. 이것이 그 당시 국가제도의 세계관이었습니다. 임금 없으면 산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을 뭐라고 합니까? 우리의 뭐라고 해요? 우리의 왕이라고 하지요. 왕이 죽었으면 우리도 죽어야 하고 왕이 부활하면 우리도 살아야 될 그러한 운명이 같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예수 안이 형성돼요. ‘예수 안’. 독단적이고 독립적이고 자립적인 개별자라는 의식은 예수님 나라에 통하지도 않고 심지어 이 악마의 나라에도 통하지 않아요. 악마의 나라도 악마의 운명과 같이 하게 되어있어요. 이 세상 전체가.
왜냐하면 악마는 이 세상의 신이니까요. 신의 운명이 곧 이 세상의 운명입니다. 신이 지옥가면 나머지 다 덩달아 다 나머지 인간은 다 지옥가야 돼요. 방금 이게 뭐냐 하면은 방금 율법적인 속성이고 기능이에요. 이게 구약이거든요. 신약의 칠십 인,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잖아요. 자기 백성 같으면 여기에 어떤 요소가 와야 돼요? 율법적 요소가 그대로 그들의 입을 통해서 이 세상에 전달해야 돼요.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지.
이걸 지키면 복 받고 안 지키면 저주 받는다는 그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이 있는지. 꿈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해석도 안 되고 누가 이런 문제를 냈는지 알 수가 없잖아요. 문제는 현실이 왕이 괴롭다는 거에요. 누가 문제를 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푸는 해답이 뭔지도 모르는데 문제는 내가 꿈 때문에 시달린다는 이 실제에 대해서는 부정을 할 수가 없는 거에요.
마치 식구 다섯 명이 있는데 이 다섯 명이 어느 교회 가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네 명은 뭐 성경에 기독교 이론이 그렇구나 이랬는데 한명은 그 십자가 복음에 꽂혀가지고 이 십자가 복음에 의해서 자기가 전에 살던 나와 십자가 안의 나를 새로운 나를 바꾸고 싶은 그러한 갈망이 생긴 겁니다. 이거 얼마나 특이한 현상이에요. 이게 인간의 힘으로 안 된다 이 말이죠.
십자가 그건 기독교 교리 중에 하나야. 이것은 이 율법에 의해서 세상이 조성된다는 것은 일체 이걸 거부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 성경대로 세상이 움직인다는 것을 일체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에요. 시답지 않아요.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이런 식으로.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 이런 겁니다.
성도가 시험에 든다는 것은, 악마가 있으면 악마의 시험이라는 게 있잖아요. 예수님도 베드로에게 시험 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악마의 시험이란 바깥 세상의 기준으로 이 세상, 복음 또는 언약 안의 세상을 평가받는 것. 이게 바로 시험입니다. 이 그리스도 안에는 그리스도의 기준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바깥의 세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들이 이러쿵 저러쿵 이쪽을 마치 모르면서 아는 척하면서 평하는 게 이게 시험이고 유혹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제가 어느 강의 끝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은 중요해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어요. 어떤 목사가 전남과 광주 지역에서 활동하는 어떤 목사가 내가 아는 사람이 세운 교회에서 담임을 했는데 그 교회에 장애자도 있고 노인들도 있는데 계속 365일 복음만 전하더라. 그래서 우리 아는 사람이 그 목사가 와가지고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혹시 그 이야기 들어본 적 있어요? 그 이야기한다고요.
그럼 그 쪽에서 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라는 것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하는 것처럼 장애자를 돌보고 어려운 사람 돌보는 그게 교회다. 그게 교회가 교회다운 것이다.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위로해줄 때 그게 교회의 할 일이다 라는 기준은 어디서 나온 기준입니까? 세상에서 나온 기준이죠. 그게 유혹이라는 거에요. 그게 시험이에요. 시험.
아버지가 되었으면 자식을 죽이는 게 아니야. 이게 아브라함의 시험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도 미워하는 자식이 아니고 네가 사랑하는 아들을 내게 바쳐라 했잖아요.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신 이 특이한 것, 이 세상에 악마에 속한 인간들 아이디어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그 일을 하셨거든요.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거에요. ‘십자가’.
십자가를 안다고 하면서 교회 붙드는 것 보면 나는 납득이 안돼요. 납득이 알지요? 납득이. 십자가 안다면서 자기 가정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사람 보면 이건 나는 웃기지도 않아요. 교회 잘 다니면 가정이 행복해야지 무슨 그런 이론이 있어요. 느부갓네살은 낯선 것에 공격을 받고 있어요. 낯선 것에 예상 못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칠십 명이 이야기할 이야기가 이런 이야기에요. 율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구약 율법의 완성.
대구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 인간들은 하나의 톱니바퀴에 맞물려서 돌아가는 하나의 부속품이라는 것. 단독으로 떨어져 나온 부속품이 아니고 서로가 서로에게 맞물려 돌아가는 ABCDE 모든 관계와 관계 속에서 독자적으로 떨어져나갈 수 없고 갖다붙여야 같이 돌아가는 것.
이걸 가지고 사회학 용어로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체’라고 합니다. 주체라는 것은 사회가 나를 호명해줄 때 발생되는 것 이게 주체에요.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사회가 말을 걸 때 반응하는 나, 이게 바로 주체라는 겁니다. ‘주체’. 사회가 뭐라고 할 때 나타나는 것. 사회가 뭐라고 할 때 인간은 뭐로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언어, 말과 글로 이야기하거든요.
말과 글을 못 배우면 사회에서 제대로 반응을 못하지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재판장에 있는데 판사가 이야기합니다. 어이 피고의 변호인 일어나 보세요. 이 사람이 갑이 을에게 돈을 빌려주고 어떻게 계약서 쓰고 이렇게 하는데 그러면 변호사는 이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할렵니까 하면 변호사 법을 공부한 적도 없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변호할 수 있겠어요? 판사가 말하는 언어와 여기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낼 수 없잖아요.
그러면 “당신 변호사 아니지? 나가!” 이렇게 되는 거에요. “나가!” 이렇게 된단 말이죠. 작은 중소기업이라도 작은 회사에서도 사장이 조금 있으면 감사 들어오는데 장부정리 해놓으세요. 엑셀이 어떻고 하면 엑셀이 자동차 발로 밟는 건가? 경리를 볼려면 거기에 대한 개념과 그것이 감사가 요구하는 언어와 말에 대해서 문장에 대해서 해독력이 있어야 해석할 수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 반응 나타날 때 그 사람은 그 중소기업에서 뭐냐 하면은 경리로서 톱니바퀴 하나가 될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이 회사 망하면 톱니바퀴 물려있기 때문에 같이 망하는 거에요. 같이. 이 세상은요 따로 노는 게 없어요. 러시아 쳐들어오는데 자기는 그리스도정교 안에서 우크라이나 공격해도 성부 성자 그리고 기도하게 되면 안 잡혀갑니까? 미사일이 날라오다가 아이고 러시아 정교 교회구나 피해가야지 알아서 피해갑니까? 그런 게 있습니까? 없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을 하든 놀든 전부 다 남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어요. 남 탓. 나는 열심히 할려고 했는데 회사 사장이 돈으로 골프치고 다른데 투자해서 회사 망했기 때문에 이것은 내 탓이 아니고 운영을 잘못한 우리 회장님 탓이다. 전부 다 네 탓이에요. 나는 가정적으로서 알뜰살뜰 콩나물 값 아껴가면서 자식하고 살려고 하는데 이 남편이라는 인간이 도박해가지고 다 날려가지고 네가 내 인생 조져놨다고 남편 탓하잖아요. 나는 가정주부로 살려고 했는데. 그게 과연 율법 앞에서 통하겠는가. 율법 앞에서 통하겠는가.
자, 여기서 공식 하나 나갑니다. 물론 일방적으로 내가 만든 공식이기 때문에 신뢰는 하지 마세요. 인간은 기계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은 기계에요. 인간은 사회에서 벗어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뭐라도 해야 돼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고 했잖아요. 뭐라고 해야 된다고. 이 사회 돌아갈 때 같이 돌아가요.
레미콘 있지요. 레미콘 안에 들어갔다고 봐요. 그 레미콘은 잠시도 쉬지 않고 운전할 때도 자기 혼자 빙빙 돕니다. 콘크리트 굳지 말라고 섞이면서 돌잖아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본인이 던져진 존재에요. 사르트르의 말로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그냥 던져진 존재에요. 어떤 사람은 재벌 아들로 어떤 사람은 그냥 가난뱅이로. 그냥 던져진 거에요. 기계입니다.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데 그 기계가 인간이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로마서에서 나오는 이야기에요. 로마서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그때는 기계로 여기지 않게 하고 이걸 하나의 인간으로 여겨버려요. 인간으로. 왜? 배후에 마귀가 인간을 인간다움을 새로 조성해냈기 때문에 그래요.
선악과를 집어넣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냥 선악과 모르는 인간이 아니고 선악과 알게 된 인간으로 배후에서 악마가 조정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가지고 하나님의 그 언약을 가지고 “너 나와! 너 나와!” 잘 알지요? 노래 자랑할 때 일대일 배틀할 때 아무나 찍어서 “너 나와!”
악마가 인간을 선악과 아는 인간을 창조하지 않은 인간을 가짜 인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주님께서 진짜 인간을 비추기 위해서 “너 나와!” 할 때 그때 율법으로 인간을 찾아옵니다. 로마서 2장 3장에서. 율법에서 여기서 뭘 보느냐 하면은 네가 법정에서 말하는 네가 의로우냐를 따져요. 법정에 설 때.
제 탓입니다 너 탓입니다 하지 말고 너 나와! 피고 나와. 딱 세워놓고 법을 갖다가 개인적으로 일대 일로 법적으로 물어봅니다. 이 율법을 네가 지켰느냐? 느부갓네살아 네 꿈을 네가 아느냐? 누가 알아요. 아무도 모르지요. 느부갓네살은 자기 꿈을 몰라요. 왜? 율법적이니까. 너무나 이방 나라 적이니까. 율법과 상관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딱 모든 구약에 있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 산상수훈의 모든 말씀, 사도 바울의 모든 말씀을 딱 들이대가지고 네가 율법으로 의로운가 한번 보라. 로마서 3장 10절의 말씀처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러면 게임 끝났어. 그러니까 남 탓을 하지 말란 말이에요. 남 탓. 나는 뭐 성경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 그런 소리하지 말란 말이죠.
주님께서 인간 내부를 이야기하거든요. 네 양심 자체가 율법적이니까. 남 탓이고 내 인생 너 때문에 조졌다 나는 착했는데 저쪽에서 어떻게 했습니다 그런 소리하지 마. 장애자고 나이 들고 많고 어린아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율법으로 딱 들이댑니다. “네가 오른 눈 범죄 할 때 오른 눈 뺀 적 있느냐?” 다시 말해서 내가 한 말이 장난으로 보이냐. 내가 전도하면서 하는 말이 농담으로 여겼어? 그걸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끝까지 밀어붙여요.
그러면 이런 예를 들 때에 제가 자주 드는 예가 있는데 여기에 이제 옛날 언덕에 집을 짓게 되면 축대를 삼잖아요. 대. 옛날에 서울에 높은 지대에 보면 축대 있잖아요. 축대 있고 허름한 옛날 집 있고 그게 자기 연인의 집이고 남자는 밤 늦게 위험하다고 차로 데려다주면서 꼭대기 그 문 앞에 또 그게 있어요. 가로등이 있어요.
있을 때 차에서 내려가지고 잘가 집에 잘가 이게 아니고 내려가지고 할 말이 있는 거에요.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에요. 그럼 여자가 겁을 내가지고 오빠 왜 이래 하겠지요. 이렇게 점점 밀리잖아요. 밀리잖아요. 끝까지 밀어붙이는 거에요. 너 날 사랑하느냐고. 너 나 사랑해? 끝까지 밀어붙여버려요.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얼마나 율법적입니까. 저주라는 말이 나온다는 자체가 율법적이에요. 이거는 그냥 빈 말이 아니고 이거 내가 그대로 실행에 옮기겠다는 뜻이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에요. “너 말이야.” “왜요?” “너 왜 내 말 지켰어 안 지켰어? 너 나 사랑해 안 사랑해?” 희미한 가로등 밑에서 끝까지 이야기하지요. 엄마는 ‘바깥에 누가 왔나?’ 이러고.
축대를 이야기한 이유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이런 뜻이에요. 물러갈 곳이 없는 거에요. 주의 말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우리의 마지막 도달점, 우리가 물러설 데가 없는 끝점이 주의 말씀 안에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안 가봐도 우리의 미리 끝을 경험토록 하시는 거에요. 이 복음 안에, 십자가 안에.
그래서 로마서 3장에 “율법을 주신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막고” 어디 아래 있게 함이라?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율법이 얼마나 율법답게 나오는지요. 그래서 느부갓네살로 인하여 나라가 완전히 심하고 뭐고 다 죽여버린다고 이렇게 나온 거에요. 그러니까 느부갓네살의 뜻이 아니고요 자기도 그렇게 몰린 거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느부갓네살이 너무 괴로워서 이 신하들 다 죽이고 싶은 거에요. 이 가짜들. 신도 모르면서 신을 아는 척하는 위선자들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이유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창세기 3장에 그들이 수치스러워서 뭘 만드느냐 하면은 옷을 만들죠 옷. 치마를 만들잖아요. 이것은 인간들이 뭘 모르느냐 하면은 옷을 만드는 것은 옷 위에 옷을 입은 거에요. 옷은 뭐냐? 인간의 몸 자체가 옷인데 거기에다가 옷을 입어버리면 이 몸 자체가 갖고 있던 옷의 아름다움이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옷에 의해서 다 가려져버리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가리지 않는 옷 자체를 하나님이 원하는 몸 자체를 보여주는 옷을 입혔죠. 치마 입은 그 옷을 뭐로 바꿔치기 했습니까? 짐승의 가죽옷으로 바꿔요. 이 가죽옷은 여기 가죽옷이 옷이 아니라 이 몸 자체를 그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몸으로 만들겠다는 것으로 이 가죽옷을 만든 겁니다. 인간이 만든 치마라는 옷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인간적인 요소가 하나님의 요소를 가리는 그런 옷 말고 하나님의 하신 그 자체가 옷이 된다는 사실을. 몸 자체의 변화를 예시하시면서 가죽옷을 입힌 겁니다. 여기에 느부갓네살 경우에 누가 등장합니까? 바로 다니엘이 등장하지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역전이에요. 역전 이상의 역전이 등장합니다.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을 포로로 잡았는데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누가 누구의 포로가 되었느냐 하면은 다니엘의 계시에 느부갓네살이 포로가 되는 겁니다. 이게 칠십 인이 해야 될 일이에요. 영적 싸움이니까.
다니엘이 알고 있던 세계는 육의 세계가 아니고 영적 세계에요. 영적 세계만이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 영적 세계의 정체를 들추어낼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게 두 세계의 공시성. 공시성이란 말 어렵습니까? ‘동시성, 공시성’. 같은 장소에 같이 있다는 뜻이고 동시에 같은 시간에 같이 있다 같은 말인데. 공시성이 등장해요.
물리학 양자역학에서 칸막이가 되어있고요. 한 개 입자 전자가 A라는 지점과 B라는 지점 둘 다 다 들어있다. 이게 양자역학에 나옵니다. 신기하지요. 하나의 전자가. 왼쪽 오른쪽 두 양쪽에 다 있다 이 말입니다. 두 양쪽에 다. 둘 중에 어디 있지? 하고 뚜껑 여는 순간 한쪽은 사라지고 한쪽만 나타나야 된다는 거에요. ‘불확정성 원리’. 굉장히 신기하지요. 이게 바로 공시성이고 또는 동시성이에요.
이 두 별 사이에 거리가 엄청나게 수억 광년 수백억 광년 떨어진 여기에 작은 전자 하나 있다고 합시다. 전자가 회전을 하거든요 회전. 왼쪽으로 돌던지 아니면 오른쪽으로 돌던지 해야 되는데 만약에 왼쪽으로 도는 전자가 있다면 그 쌍이 되는 것은 반드시 오른쪽으로 돈다는 거에요. 거리가 엄청난데. 너 왼쪽이야? 나 오른쪽으로 할게. 자기들끼리 서로 통하고 있다는 거에요. 이걸 가지고 양자 얽힘이라고 해요. ‘양자 얽힘’.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뭔가 인간들이 관찰하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 그걸 의도해서 거기에 보조 맞추는 식으로 세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인간들은 그걸 이해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모든 게 인간 위주 인간이 파악하기 위해서 세상은 존재한다는 식으로 세상 과학과 철학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든 간에 우리가 납득이 돼야 비로소 의미가 되는 그런 자들이 인간들이에요.
그렇다면 여기에 언약이라는 것, 십자가라는 것, 복음이라는 것 그게 얼마나 오늘날 교회에서 잘못되게 해석됩니까. 우리는 몰라도 돼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식으로 설명해주세요 하나님, 예수님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성경을 보고 왔다는 거에요. 우리는 느부갓네살 같은 발작도 없어 우리는. 내 납득대로 해석하면 그게 정답이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뭐가 발각이 안 됩니까? 내 등짝에 악마가 있고 내 등짝에 귀신이 있는 것이 내가 발견이 안 되는 거에요. ‘나는 오류가 없다. 나는 정상인데’ 이렇고 있다 이 말이죠. 뭐 설치 미술 한다고 하고 어떤 망나니 남자하고 이혼하고 소송한 그 여자 있지요. 여자 미술가. 기독교 방송에서 사회 보고 하는 거 있어요. 이름 뭡니까? 낸시랭. 그 사람 나올 때 꼭 고양이 어깨에 메고 나와요. 고양이 어깨에 있어요. 고양이가 어깨에.
이 세상이 전부 다 자기 잘났다 할 경우에 무엇이 해답이라는 게 없고 전부 다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놓고 해답이라고 우기는 그런 세상이면서도 그게 자아거든요. 자아인데 자아가 돈벌이 나갈라고 하면 뭐라고 했습니까? 자아가, 주체로 변해요. 주체는 알지요. 남 눈치 보면서 살아가는 것. 눈치 안 볼려고 하면 뭐하면 됩니까? 집에서 살림만 하면 돼요. 자아가 되지요. 자아가 되는 게 코로나 걸려버려. 세상이 내 마음대로 안돼요.
세상은 자꾸 섞여서 숨어들어가는데 언약과 율법과 십자가는 우리를 뽑아내는 거에요. 기계이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이걸 인간으로 행세했던 율법과 마주해서 그걸 나중에 기계로 바꿔버려요. 너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너는 네가 주인공이 아니다. 생명책은 네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의 생명책. 그걸로 기뻐하라. 너는 주님을 위한 기계였다. 처음에는 네가 악마의 기계였지만 지금은 주님의 기계다.
그러나 중간에 거쳐야 될 과정은 뭐냐? 네가 인간으로서 행세할 때 하나님의 율법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묻는 거에요. 제가 노래 가사를 해볼 테니까 이 불신 세계에서도 뭔가 동시성, 모호함, 확증되지 않는 진리 여기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가사를 쓴 게 있어요. 가사를 한번 적어 보겠습니다. 가사 보면서 이게 무슨 노래인지 맞춰보세요.
‘검푸른 바다 위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요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요 무엇이 죽었소.’ 검푸른 바다 위에 비가 내리거든요. 비도 액체지요. 바다도 액체지요. 액체와 액체가 만날 때 어디가 하늘이고 바다 위가 하늘인데 뭐가 하늘이고 뭐가 물인지를 모호하다는 거에요.
이것은 뭐냐?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지 분간이 안되는 거에요. 이 가사를 지은 사람은 이겁니다. 무엇이 정의요 무엇이 불의인지 모르겠다는 거에요. 불의, 잘못인지 모르겠다는 거에요. 확정되지 않는 이 정치 바닥이 너무나 원망스럽다 이 말입니다. 왜냐 하면은 친구가 고문당해서 죽었으니까.
이 사람이 서울대학에서 데모한 사람이거든요. 이 노래 제목이 ‘친구’에요. 이거 작사 작곡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김민기입니다. 이 노래 한번 들어보세요. 1971년도에 나온 노래. 여기 보면 무엇이 산 것이요 무엇이 죽은 것인지 혼재되어있는 모든 가치가. 종잡을 수 없다. 김민기가 이럴 때는 뭐냐 하면은 자기를 극명하게 주체임을 거부하는 거에요.
이 세상에 나는 편승하지 않겠다. 나는 내 나름대로의 진리관과 주관에 따르겠다. 인생 그렇게 살겠다. 그러니까 서울대 미대 학생으로서 데모하는 거에요. 이 불의한 정권, 반대하는 거에요. 김종철 뭐 맞고 죽는 것 그걸 감추는 턱 치니 억하고 죽었다 뭐 이런 것. 거기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겁니다. 세상의 정의를 찾으면서.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 보세요. 영적 전쟁입니까? 육적 전쟁입니까? 육적 전쟁이죠. 육적 전쟁이지만 그 의지, 조국을 살려야 된다는 그 의지. 이게 우리 가정의 문제라면 가정에 어떤 사기꾼이 와서 사기를 친다면 이거는 교회 다니고 안 다니고 관계 없이 온 식구가 한 마음이 되어가지고 그 사기꾼을 고발하고 그것도 안 되면 청와대 청원하고 하지요.
그 법 만들고. 김민식 법 있잖아요. 내 귀한 자식 죽었으니까 국가적으로 법을 만들어라 이렇게 요구하는 것. 회사에서 혼자 일하다가 톱니바퀴에 죽었을 때 노동법 만들라고 하는 것. 청원하는 것. 이 싸움. 세상에 대한 나의 마지막 최후의 자존심 걸고 싸우는 것. 이거 영적 전쟁입니까? 육적 전쟁입니까? 육적인 전쟁이죠.
육적인 전쟁이면서 다시 한번 세상에 대해서 어느 게 하늘이고 어느 게 물이고 어느 게 사는 것이고 어느 게 죽는 것인지 분간 못하겠다. 그러니까 김민식은 진리를 몰라요. 진리가 뭔지를 몰라요. 계속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면서도 어느 것이 가장 인간의 존엄성을 살릴 수 있고 인권을 살릴 수 있고 내가 이 땅에 삶을 살 수 있는 그 맛을 제공하는 그런 정치 제도 그런 사회는 무엇일까 그걸 고민하고 고민하는 거에요. 남들 보기에는 아주 거룩한 고민처럼 보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너 이리와. 이리와. 네가 범죄하면 너 지옥 가도 좋으냐? 이걸 묻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십자가 영에 시달려야 돼요 우리가. 느부갓네살처럼. 내가 살아온 이 세상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이게 내가 정상인지를 의심해 봐야 되는 겁니다. 의심이 믿음의 시작이에요.
내가 지금의 나를 우리의 영원한 타자되신 주님과 바꿔치기 해야 됩니다. ‘바꿔치기’. 주께서 그렇게 해주셔요. 세상관으로부터 악마적 세상관으로부터 유혹을 받으면서 시험을 받으면서 네 속에 있는 말씀이 이기느냐 아니면 이 세상의 세계관이 이기는가를 직접 현장에서 경험케 하는 겁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이렇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 로마서 1장 덮지 마시고 오늘 본문 누가복음 10장 4절 다시 봅시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했지요.
자, 제가 묻습니다. 약하고 병들고 약하고 가난하고 죽으면 그게 수치입니까? 부끄러운 일이에요? 방금 로마서 1장 16절 뭡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지요. 복음이 복음 세계가 내가 지금 속해 있는 세계가 복음의 세계에요. 나를 죽이고 만든 세계.
나를 그쪽에서 나를 부르심을 보내서 내가 이 세상에 살게 만든 그 원천이 바로 복음의 세계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셨어요. 어떤 것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어떤 것도 경솔하게 웃지도 말고 울지도 말고. 오직 복음이 복음 되게 하기 위해서 너희들을 보냈단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시험이란 뭐라고 했습니까?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바깥 세계에서 이 하늘 나라에 대해서 평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왜냐하면 이거는 인간은 몰라요. 다른 사람도 모르는데 악마는 알아요. 귀신은 안다고요. 자꾸 시험하는 거에요. 네 병들었잖아. 아프잖아. 너 가난하잖아. 너 이렇게 죽으면 인생, 보람 없잖아. 네가 행복하게 살아야지.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걸 수치스러운 걸로 공격을 해대는 것이 바로 악마, 귀신입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드디어 네 정체를 드러내는구나 잘 만났다 인간아. 복음이 있으니까 마귀가 그런 식으로 우리를 놀려대고 또는 쑤시고 들어오는 겁니다. 복음을 딱 전하게 되면 상대방이 네 복음 아는데 너 한 달 수입 얼마 올랐나? 복음 아는 네가 하나님의 복을 받는 네가 몇 평 짜리 집에 사는데? 네 아들 아직 백수지? 뭐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때 마귀 이 마귀 이거 요것 봐라 요거 요거 요것. 내가 옛날에 살던 시대 한번 봐라 이거. 우크라이나 전쟁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위해서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마귀가 하는 말을 비로소 마귀가 하는 말로 귀신이 하는 말로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받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으로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되는데 우리가 왜 세상을 향하여 자꾸 수치와 좌절을 느끼는지 주여 다시 한번 십자가의 말씀 앞에서 얼마나 우리가 복된 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