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육의 해석

아빠와 함께 2022. 5. 23. 23:27

강남-누가복음 11장 22절 (육의 해석) 220510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11장 14절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여기에 예수님께서 벙어리가 아니고요 벙어리 귀신을 쫒아냈지요. 그러면 이거는 귀신을 쫒아낼 때 귀신이 나가기 전에 그 귀신은 벙어리 된 사람의 일부입니다.


이 말은 그 벙어리 귀신마저 인간들은 자기 것이에요. 내 것이에요. 내 것이 뜯겨져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것은 다 귀한 거에요. 다 아끼고 싶고 빼앗기기 싫고 잃어버리기 싫은 겁니다. 그런데 자기 안에 나는 벙어리 귀신이 있다고 스스로는 모르지요. 왜냐하면 인간에게 귀신이라는 것은 ‘내가 귀신’이라고 우길 위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 안에 귀신 없다’는 식으로 자기를 이해하고 그동안 해석해왔던 겁니다. 내 안에 귀신 없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시커먼 귀신을 떼어냈단 말이죠. 그러면 내 것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다. 저게 내 안에 있었어? 이렇게 하는 순간 나는 둘로 나뉘어지겠지요.


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 오셔서 떼어내니까 떼어낸 이것에 애초부터 내 안에 함께 있었다가 나타나는 거에요. 함께 있었다가. 이렇게 될 경우에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귀신이 나갔으니까 나는 이제 멀쩡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게 벙어리 귀신을 쫒아냈잖아요. 만약에요 주님께서 다음에 빼낼 때는 절뚝발이 귀신을 빼내어버리셨어요. 뭐 귀신 하나씩 나갈 때마다 나는 멀쩡하다고 자부했는데 계속해서 뽑아낼 귀신이 있다면 도대체 이 사람이 멀쩡한 경우가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단 한 번도 멀쩡한 게 없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벙어리 귀신을 쫒아낸 것은 너는 저주 받은 자이고 너는 귀신의 나라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거에요. 만약에 드라마에 그런 내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못된 동생이 자기 언니한테 언니 내가 오늘 미팅 가는데 언니 스웨터를 좀 빌릴 수 있느냐. 그래 스웨터 빌려줄게.


그러니까 언니가 자기의 새로 산 스웨터를 동생에게 미팅하는데 입고 가라고 주니까 그 현장에서 가위 들고 동생이 언니 보는데서 스웨터를 다 찢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좀 엽기적입니다만은. 무슨 뜻이에요? 나는 언니를 가위로 찢어죽이고 싶다 그런 뜻 아니겠습니까. 이걸 찢어버리겠다는 거에요.


그걸 보고 바보 같은 언니는 아휴 이제 나한테 동생이 싫어하는 요소가 떨어져나갔으니까 나는 동생의 사랑을 받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바보 같은 언니는 없단 말이죠. 그러면 나머지 이것조차 찢어버릴려고?! 이렇게 나온단 말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벙어리 귀신을 쫒아낸 것은 너는 저주의 대상이라는 것을 밝히는 겁니다. 나머지는 멀쩡한 게 아니에요. 그 증거가 25절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11장 25절.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4절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더러운 귀신은 일단 나갔어요. 나갔는데 그 귀신이 돌아다니다가 들어갈 데 없으니까 깨끗하게 청소되고 수리되었으니까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더 심하게 되었지요.


그러니까 귀신을 쫒아낸 게 아니고 귀신을 흩어버렸지요. 잠시. 귀신을 흩어버린 거에요. 귀신을 사라지게 하지를 못한 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귀신과 인간은 같이 공생하고 있기 때문에. 귀신과 인간은 같이 공생하고 있기 때문에요 귀신이 어디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귀신 쫒아내서 구원받은 사람 있겠어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귀신 쫒아내는 게 복이 아니에요. 복은 어디에 있는가? 28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 이 말은 귀신이 지배하는 대상에서 말씀이 지배하는 대상으로 바뀌는 경우에만 이미 복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복의 모델, 전형적인 복을 보여주시는 그 원형은 누구십니까? 여기서? 예수님 본인뿐이죠. 왜?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자기의 말씀이 계속 나오니까요.


사람이 구원받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구원받는 상태는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말씀이. 말씀이 말씀대로 나오면 돼요. 내가 구원받을려고 하면 그 사람은 오히려 저주를 자처한 셈이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나를 지키기 위해서 자기를 구원받은 상태로 본인이 관리해야 돼요. 무슨 수로 관리합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자기 관리 덕으로 살았습니까? 아니거든요.


인간이 자기 관리에서 구원받고 복된 사람이 아닌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귀신을 쫒아낸 겁니다. 그 마술사들이 마술할 때 아무나 불러내요. 사실 아무나가 아니라 다 짜고 불러내는데 하여튼 우리 보기에는 아무나 불러내요.


아무나 불러내가지고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자,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예 약사입니다. 약사 요즘 바쁘지요?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등 뒤에 뭘 끄집어내느냐? 비둘기를 끄집어내는 거에요. 그 약사가 비둘기 키우는 사람입니까? 아니지요.


어떤 마술사가 데려온 인물을 통해서 그 사람에게 없다고 인정되는 것을 그 사람의 몸에서 끄집어내지요. 마치 그 사람이 비둘기 속에 함께 있는 것처럼 눈을 속여서 관중들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물론 비둘기 끄집어내는 게 재미없으면 돈 100만원 짜리 수표를 끄집어내게 되면 어?! 저거 내 건데 하면서 지갑 들여다보지요. 저거 내거 아니야? 아니거든요.


우리에게는 귀신이 없다고 자부함으로서 우리는 복 있는 사람이 되지를 못하고 있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내가 나를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기어이 천국 갈려고 시도하는 그 관리. 그래서 병 고쳐주고 벙어리 귀신, 절름발이 귀신 쫒아내는 것은 귀신을 쫒아내는 것은 이게 같은 말이에요.


저주가 당신을 덮치고 있습니다. 저주가 당신을 덮치고 있습니다를 알려주기 위한 당신은 저주와 함께 있습니다. 벙어리 됐다고 벙어리 안 됐다고 천국 가는 거 아닙니다. 벙어리로 하여금 벙어리 귀신을 쫒아냄으로 일시적으로 이제부터는 말을 한다고 한다면 그러면 벙어리 안 된 사람은 귀신의 지배를 안 받는 거에요? 마귀의 지배를 안 받는 겁니까? 받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벙어리 귀신 쫒아내고 하는 것은 사람들은 뭐냐 하면은 인간 세계에서 귀신이라는 것은 재수 드럽게 없는 거니까 인간 세계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 하면은 멀쩡한 인간들은 남기고 멀쩡하지 않는 인간들은 벙어리는 벙어리 귀신 쫒아내고 이렇게 해가지고 우리 멀쩡한 대다수의 사람으로 편입시켜서 온전한 사회로서 하나님께 메시아를 기다리고 복을 받는 그 노력을 인간들이 평소에 했던 거에요.


그런데 주님은 그게 바로 너희들이 하는 그 짓이 바로 악마가 하는 짓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벙어리 귀신을 쫒아낸 거에요. 그 짓이.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그들이 귀신을 쫒아낸다 라는 그것을 주님에게 그대로 해버려요.


그대로 해왔을 때 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아이고 그렇지 않아도 우리 취지가 우리 사회에서 병든 귀신을 쫒아내는 운동을 벌리는데 당신이 이렇게 협조해줬으니 예수님 당신 참 고맙습니다 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까? 내가 하면 옳지만 네가 하면 그건 귀신들렸다고 보는 거에요. 내로남불이라고 요새. 우리가 귀신 쫒아내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고 네가 귀신 쫒아내는 것은 악마가 하는 짓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벙어리 귀신을 쫒아낸 것은 일종의 마귀의 세계를 정체를 들추어내는 미끼였던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귀신을 쫒아내면서 귀신의 세계에 그 중심부를 주께서는 쳐들어가시는 겁니다. 귀신을 쫒아내면서 진짜 귀신을 부리는 악마는 어디에 있는가를 내가 보여줄게 하고 귀신의 나라에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방식 중에 하나가 귀신을 쫒아내는 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귀신의 나라가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여기 15절 봅시다.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이런 말을 할 때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잖아요. 이런 말을 할 때 말한 사람의 뜻은 이래요.


절대로 우리는 귀신의 나라가 속하지 않았다. 그걸 지금 자기증명을 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는 멀쩡한 나라다. 귀신은 재수 옴 붙은 것이지 우리가 본질적으로 귀신하고는 무관한 동네다. 왜? 거룩하니까. 지금 그걸 주장하는 거에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쫒아내는 귀신과 내가 쫒아내는 귀신이 질이 다른 귀신이냐를 묻는 거에요. 점점 복잡해지지요. 네가 쫒아낸 귀신과 내가 쫒아낸 귀신이 질이 같은가 다른 귀신인가를 묻는 겁니다.


똑같은 귀신이라면 너희는 도대체 예수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칭찬하고 고맙다고 해야 된단 말입니다. 이 멀쩡한 우리나라에 재수 없는 귀신이 붙었는데 당신이 청소해주니까 고맙다 이렇게 돼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뭐라고 합니까? 네가 귀신 쫒아낸 것은 귀신의 왕의 힘으로서 귀신을 쫒아낸 것이다 라고 이렇게 그쪽에서 예수님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일종의 청문회라고 보면 돼요.


한동훈 청문회. 한동훈 청문회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어떤 여자 국회의원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윤석열의 아내라면, 윤석열의 아내라면. 내가 우리 아내하고 결혼했는데. 뭐 동성애인가? 그 사람이 왜 그런 질문을 굳이 해야 되느냐 하면은요 질문하는 내 쪽의 하등 문제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를 지적할 것 같은 한동훈 법무장 후보를 이용하는 거에요. 당신이 누구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는 멀쩡하다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를 비판하는 쪽이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그렇게 질문을 한 거에요.


17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진다” 했지요. 주님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내가 쫒아낸 귀신도 귀신이고 네가 쫒아낸 귀신도 귀신이라면 내가 쫒아낸 귀신으로 인하여 너희들의 통합된 합체된 나라는 더는 아니라는 거에요. 분열됐다고 이거는 스스로 황폐된 내부 분열이 일어난 나라가 너희 나라라는 것입니다. 너희 나라.


설명하는 제 말이 더 어렵게 느껴지지요. 지금 따라가면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어렵게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이왕 어렵게 한 거 더 어렵게 하겠습니다. 인간은 전체를 전체답게 구성할 재간이 없다. 인간은 자기를 포함해서 전체를 구성할 재주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이게 모순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성경에 나오는데요. 디도서라는 성경책이 있어요. 디도서 1장 12절에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에피메니데스라는 사람이에요. 이 철학자가. 기원전 600년 전에. 에피메니데스 라는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그 사람 출신이 뭐냐? 바깥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그레테스 철학자에요.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고 그레데스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그레데스 사람이. 그 중에 일부가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러면 이 에피메니데스 이 말이 진짜가 될려면 우리 그레데스 사람은 항상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거짓말이여야 진짜가 돼요. 그렇지요? 거짓말이여야 진짜가 돼요.


인간은 나 빼놓고 나머지는 거짓말이다. 나 빼고 나머지는 거짓말이다 이러한 권한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이 유대 나라 보고 뭐냐? 너희들은 귀신의 악마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다 라고 이야기하실 때에 예수님은 어느 세계에 속합니까? 자기 빼고 나머지가 되는 거에요. 예수님께서는.


시식할 때에 시식한다는 핑계대고 마트 시식할 때에 만두 같은 것 조금씩 내어놓잖아요. 이쑤시개로 이렇게 해놓는데 배고프다고 그거 다 먹으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일부만 먹는다고요. 예수님은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니에요. 바깥분이기 때문에 저쪽을 객관화할 수 있는 겁니다. 대상화해서 한꺼번에 말할 수가 있는 거에요.


그중에 일부를 떼어놓는데 그 일부가 뭐냐? 벙어리 귀신이 되는 거에요. 벙어리 귀신 되는 거에요. 그들이 유대인들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은 귀신 빼놓고 나머지 우리는 멀쩡하기 위해서 귀신을 쫒아내는 겁니다. 우리 집단이 어떤 집단인데 이 귀신들린 거 나가! 이미 우리 집단은 있고 귀신을 쫒아내면서 나머지 정결하고 깨끗하고 거룩함을 유지하고자 하는 거에요. 그 방법을 쓴 겁니다.


애들 자식 한 셋 중에서 말썽쟁이 하나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너 나가! 너는 호적에서 뺐어! 너는! 우리 연 끊자! 이렇게 하잖아요. 왜 그렇게 합니까? 나머지라도 살자 이 말이거든요. 주님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너희들의 일부 그들이 아이스크림이라면 아이스크림의 일부를 찍어먹는 거에요. 너희들의 일부를 찍었는데 그것이 뭐다? 그것이 귀신이었다. 그게 귀신이었다.


그런데 너희들도 귀신 쫒아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거는 뭐냐? 너희들의 나라가 스스로 지금 앞뒤가 안 맞아 가지고 스스로 지금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거에요. 그 증거를 내가 귀신 쫓아내면서 어떤 특정인의 벙어리를 낫게 하는 게 아니고 전체를 한꺼번에 규정하는 겁니다. 너희 나라 망했어. 다 망했어.


너희들 귀신 쫓아내는 거 쫓겨났지? 쫓겨난 게 아니야. 흩어진 거야. 잠시 여기 있다가 저기 있다가 여기 있다가 저기 있다가 하는 거야. 왜? 너희 나라보다 누가 더 쎄냐? 악마가 더 쎄기 때문에. 너희들은 왜 그걸 모르느냔 말이죠. 너희들이 악마를 관리해? 귀신을 관리해? 택도 없는 소리.


악마의 나라는 너희들 나라는 무너져도 악마의 나라는 버티고 무너진 적이 없다. 왜? 무너질려면 악마와 악마 사이가 균열이 일어나는데 악마의 나라는 그런 균열이 없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이야기가 무지무지하게 복잡한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은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악마와 싸웁니다. 악마와 싸우는데 악마의 하수가 누구냐? 인간들이거든요. 인간들을 내세워서 예수님을 지금 내로남불처럼 지금 공격하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뭐가 안보여요? 악마가 우리를 통치하겠다는 것은 안보이고 우리 인간들끼리 단결하고 융합하고 잘 통합하면 괜찮은 하나님의 메시아 나라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오늘날 그냥 교회라고 보면 돼요. 교회. 우리끼리 거듭난 사람만 다 모여. 이거 뭡니까? 무슨 교회입니까? 지방교회 아닙니까. 거듭난 사람만 다 모여. 위트니스 그쪽, 거기 워치만 니 그 쪽이잖아요. 우리끼리. 주님께서 그것이 뭐냐? 그게 바로 악마의 일이라는 거에요. 그게.


인간은 인간을 관리할 수 없다. 왜냐 하면은 인간은 자기를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능력이 없다. 내가 누구인지를 인간은 모르게 되어있어요.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는 거에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자기 관리한다. 이게 말이 돼요? 인간이 관리할 수 있는 것은 언어 체계에서만 관리해요. 언어 체계. 언어, 말 체계.


예를 들면 필라테스 같은 것. 똥배. 똥배 나오면 관리돼요. 눈에 보이잖아요. 똥배 나오면 똥배 귀신입니까? 물론 똥배 귀신도 코로나 걸리면 낫긴 낫는데. 밥맛이 없어서. 밥 못 먹으니까 빠질 수도 있겠어요. 몸무게 3kg빠지면 그렇게 필라테스 해도 안 빠지던 똥배를 코로나 걸리면 바로 빠지죠. 그렇게 빠질 수도 있고 손자 손녀 오면 빠질 수도 있고 그래요.


인간은 뭘 모르느냐 하면은 언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거거든요. 사물한테 지게 되어있어요. 사물이 언어를 퇴출합니다. 빨간 꽃을 장미라고 하면은 장미가 싱긋이 웃지요. 네가 장미에 대해서 알아? 인간이 장미라는 언어를 붙이는 것은 자기의 유용성 때문에 붙이는 것이지 장미한테 물어보고 하는 게 아니에요.


장미야 이름 뭐로 붙여줄까? 물어보고 하는게 아니에요. 일방적이에요. 자기의 편리를 위해서 하는 겁니다. 자기에게 가치와 의미를 위해서 장미를 이용하는 것이지 장미 본연의 모습은 몰라요. 알 수가 없어요. 이거는 장미뿐만 아니라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이 마귀로부터 어떻게 다루어지는지 모르고 몸이 거울에 비치니까 내 몸이 아는 나의 전부라고 여기고 자기가 자기 관리하는 거에요. 그런데 몸이 아프고 있으니까 귀신 나가라고 해서 나가면 자기가 멀쩡한 줄 알고 있어요.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를 모른다고요.


인간은 스스로 주님 보시는 그 대상의 일부라는 사실, 이 역설을 인간은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 같은 것. 십계명을 인간이 지킨다 합시다. 그거 지키면 십계명 지켜서 구원받은 사람 있습니까? 십계명은 인간을 모순 존재로 들추어내고 저주받게 하는 거에요. 십계명 전체가.


한 두 계명이 아닙니다. 거짓말하지 마 살인하지 마 모든 계명이 인간으로 하여금 저주 아래 이미 놓여있다는 거에요. 저주 아래. 그 저주를 받은 행태, 저주 받았기 때문에 비로소 나타나는 그 행동이 뭐냐 하면은 우리 통합하자에요. 우리 건전한 조직 만들자. 이거에요. 가만 있지도 않아요. 설쳐요. 온전한 거룩한 교회 만들자. 이게 저주의 모습이에요.


자기가 자기를 해석 못하는 겁니다. 인간의 육신과 관련된 예술, 문화, 스포츠, 종교 그 어떤 것도 귀신을 나가게 하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귀신이 나갈 수 있습니까? 물으면 그게 바로 그 질문 그 의도가 곧 귀신 들린 거에요. 그 질문 자체가.


마귀한테 묶이면 묶인 것이지 그걸 왜 굳이 나갈려고 하느냔 말이죠. 아직 자기 주제를 모르기 때문에. 그럼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인간의 본성이 뭐냐? 그게 21절에 나옵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누가 강해요? 누가 약한 자고 누가 강한 자입니까? 누가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까?


강한 자는 악마, 약한 자는 인간. 그러면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가 오기 전까지는 게임 끝났어요. 희망 없어요. 그러면 귀신보다 강한 자가 주님이잖아요. 주님이 올 때는 어떻게 오는가? 귀신을 파헤치면서 귀신 속에 들어가요. 왜? 그 속에 자기 백성이 있으니까.


자기 백성은요 벙어리 낫는다고 자기 백성 되는 게 아니에요. 귀신의 근원적인 그 모든 것을 파헤쳐버려야 돼요. 뭐 몸 건강하고 주님 덕분에 눈뜨고 이걸로 될 문제가 아니에요. 귀신 나라가 허물어져버려야 돼요. 그러나 귀신 나라는 허물어지지 않지요. 인간들은 잘못된 논리를 갖고 있는 거에요.


귀신 나라는 악마의 통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자기 나라가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귀신 나라 오야붕 악마가 그걸 허용한 적이 없어요. 아주 단단한 조직입니다. 어느 누구도 귀신 나라의 안전성을 부정할 수가 없어요. 인간들이 백날 흔들어봐야 끄덕도 하지 않습니다.


귀신 또는 악마가 인간을 다루는 방식은 환원이에요. 환원. 환원이라는 것은 본래의 나의 자리로 되돌리는 것. 본래의 나의 자리가 뭐냐 하면은 악마의 통솔 받는 자리. 약한 자가 약한 자 자기 자리 찾는 것. 아무리 몸부림쳐도 인간은 모든 만사가 다 환원됩니다.


복음을 50년 받았다. 50년 하면 뭐합니까? 죽을 때 “복음이 뭐지? 더 오래 살고 싶어요.” 아무리 그럴싸하게 종교적인 모습을 띄어도 결국 인간은 자기의 욕망과 자기가 남한테 인정받고 싶은 충동에서 인간은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 그 한계에 대해서 인간 세계에서 나름대로 연구하는 사람이 있어요.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 그게 바로 프로이트라는 사람입니다. 프로이트. 이 사람은 뭘 하느냐 하면은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정리한 사람이에요.


정신분석학은 뭐냐 하면은 생물적인 인간, 다른 말로 하면 사물로서의 인간. 인간은 그 자체가 세포 덩어리 과학적으로 사물이잖아요. 사물로서의 인간에서 정신은 어떻게 출현하는가? 인간의 정신. 문화, 예술, 종교 이런 거 다 포함한 거에요. 인간의 정신은 어떻게 출현하는가? 이걸 정리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주장의 기초는 정신이겠습니까? 육체겠습니까? 육체지요. 육체가 돼야 과학적으로 욕을 안 얻어먹잖아요. 욕을 안 얻어먹는다고요. 과학적으로 아무리 진단해도 몸은 멀쩡한데 여자가 노이로제 걸리고 히스테리 걸리고 발작을 하더라. 그러면 이 문제는 인간의 육체의 분석에서는 이게 나올 수가 없지요.


그러면 그 사람에게 뭐가 문제가 있다? 정신의 문제잖아요. 그 정신이 어디서 어떻게 육체에서 만들어내서 정신이 저 모양인가? 그걸 연구한 사람이 정신분석학이에요. 요즘 모든 상담 오은영 박사 사자머리 박사 전부 다 여기서 나온 거에요. 정신에서.


종교가 해결 못하는 것 정신분석학으로 하겠다는 거에요. 왜? 정신분석학은 기초가 생물학적 인간 과학에 기초하기 때문에 과학 요즘 시대에 진리 아닙니까. 비논리가 아니고 미신적이 아니고 굿하는 게 아니라 과학적인 실험 데이터에 의해서 정확하게 정신을 밝혀 내줄게. 이게 정신분석학이에요. 사람들 구미 당기지요.


조사를 해봤습니다. 그 사람이 열심히 조사를 해가지고 어떤 조사를 했느냐 하면은 이 생물학적 인간이 평소에 느끼는 게 있는데 그 느끼는 게 뭐냐 하면은 의식이다. ‘의식’. 의식하는 것은 어떤 경우라도 의식이 진리에요. 왜냐 하면은 의식한다는 것은 의식하는 나를 의식 안 한다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게 책이냐 아니냐는 이건 논쟁의 여지가 있고 이게 컵이냐 아니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게 컵이냐고 묻는 내가 여기 있음은 이거는 뭐 말할 것도 없이 분명하지 않느냐 하는 거에요. 한번 보세요. 아무리 속여도 지금 내가 속일까 안 속일까 의식하는 이 의식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어서 이걸 부정하지 못한다 이 말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게 나온 거에요. 데카르트 그거부터 나왔는데. 이건 부정할 수가 없다는 거에요. 그런데 의식이 모든 걸 의식하느냐? 아까 노이로제, 히스테리 아무리 진찰해도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 문제없는데 문제 있다. 그럼 그거는 뭐냐 하면은 의식이 있는데 의식이 못 다루는 게 있는데 그걸 가지고 뭐냐? 무의식으로 봐요. ‘무의식’.


의식에 의해서 압박받아서 내부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는 의식한테 핍박 받아서 너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어! 하고 다루어지는 그 무엇. 그게 무의식인거에요. 이 무의식을 연구한 사람이에요. 이 무의식을 연구해보니까 인간의 평소의 의식 가운데서 나오지 마! 기어 나오지 마! 나오지 마 라고 밟은 게 있어요. 그 밟은 게 뭐냐 하면은 두 가지였습니다. 이 사람의 조사에 의하면.


수만 번의 꿈을 가지고 조사한 거에요. 꿈이 왜 좋으냐? 꿈은 잠 잘 때 의식 안 할 때 나오는 여러 가지 영화 같은 거니까 이거는 내가 의식 안했거든. 꿈에 막 슈퍼맨으로 돌아다니는 것 이거 의식 안했잖아요. 잠자가다 돌아다니는 거 그거 아니잖아요. 내가 의식 안했지만 뭔가 내가 의식으로 미진한 것 손 못 댄 게 내가 잠자는 그 기회를 통해 자기가 활개를 치고 있으니까 그걸 잡자. 이걸 무의식 세계를 잡은 거에요.


두 가지인데 한 가지는 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뭐냐? 생물학적으로 번식 본능이 있다. 그냥 본능 정도가 아니라 충동. 그냥 번식하는 거에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걸 에로스라고 하고 리비도라고 이야기하는데 인간이 번식을 할 때는 기본적으로 번식할려면 남자 혼자 번식합니까? 여자 혼자 번식합니까? 안 돼지요. 그럼 남자 여자 서로 끌리는 게 있겠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그게 바로 성욕이라는 겁니다. 너무 추잡하기 때문에 의식 세계에서는 이걸 계속 누르고 있는 거에요. 성욕을 왜 하느냐? 자식 낳아야지요. 자식을 낳는 거에요. 아버지가 아들 낳고 아버지가 아들 낳고 누가 누굴 낳고 누굴 낳고. 이 번식 본능은 생물학적으로 인간뿐만 아니고 모든 심지어 해바라기까지 모든 동식물이 번식 본능을 갖고 있는 거에요. 인간도 그 중에 하나고.


그러니까 번식 본능이 육체의 번식 본능에서 정신적으로 뭐 했다? 성욕이 나왔고 인간이 하는 그 모든 행위, 정치, 예술, 문화, 스포츠 그거는 뭐냐 하면은 적절한 번식의 상대자를 찾는 구애의 모습이죠. 나 어때? 괜찮은 남자지? 이게 뭐냐 하면은 아이 낳자. 애기를 가지자.


이게 프로이드의 이론이라고 되어 있는데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있어요. 이러한 번식 본능 이게 창세기 3장에 벌써 나옵니다. 나오는데 그 번식하는 그 장소가 여자와 남자에서는 하체라고 되어 있어요. 하체. 그런데 인간에게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가 하체를 치마를 만들어서 가렸지요.


이렇게 해서 인간 내부에 같은 인간의 전체 신체 가운데서 일부를 특화시킴으로서 신체 일부가 나머지와 이게 분열되고 마는 거에요. 통합이 안 되는 거에요. 통합이. 이 말은 나에게 일어나는 이 번식 본능을 나머지 신체가 자제와 통솔 관리가 안 되는 거에요.


관리하는데 어떻게 하느냐? 이걸 가려야지요. 그 가리는 그게 뭐냐? 그게 바로 문화고 정치고 경제고 예술이에요. 자기의 성욕을 다른 스타일로 그걸 발산함으로서 내부적으로 그 자체가 하나의 치마가 되는 거에요.


아 저 사람은 공부를 너무 잘해. 중학생이 어떻게 논문을 해외 논문에 기재를 하느냐 말이죠. 야 천재다 천재. 갑자기 머리 좋은 여학생, 같은 동급의 남학생들에게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매력을 느끼겠지요. 매력이라는 것은 어디의 일부다? 짝짓기의 일부가 되는 거에요. 짝짓기의 일부. 나는 다른 여자 갖기보다 저 여자를 갖고 싶어.


중학교 때 아빠찬스 안 쓰고 해외논문에 잡지에 그것도 영어로 논문을 인공지능에 관한 논문을 우울증에 관한 논문을 기재할 정도로 물론 그 논문은 자기 이 모 교수하고 같이 했지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청문회 보고 정치 볼 때에 어떤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느냐 보는 것이 프로이드적 안목이에요.


그 사람이 시장에 나가면 시장에서 가격이 올라가요. 우리 가문의 사람. 내 사람 되어서 저 DNA가 탐난다. DNA 뭡니까? 어디에 관여합니까? 번식이죠. 그래서 여자들이 다소곳이 뜨개질하는 것을 프로이드는 그걸 간음이라고 한 거에요. 논리가 너무 비약해도 너무 비약했죠.


제가 왜 귀한 성경공부 시간에 되지도 않는 프로이드 이론을 왜 이야기하느냐?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출발했지요. 벌써 이것 자체가 잘못된 거에요. 생물학 과학을 믿는 게 잘못이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이런 의식 문제도 진리다. 이것도 거짓말이고요.


인간은 뭐냐? 인간은 영물입니다. 인간은 영물이에요. 지금 현대 와서 프로이드가 어떻고 데카르트가 어떻고 하지만 그 시대의 철학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신체를 주시고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마음은 따로 주셔서 육과 혼이죠. 이분설 또는 삼분설. 주셔서 육체는 우리가 정신적으로 말씀을 지키는 이 말씀으로 인하여 우리 육체가 구원을 받는 효과를 한다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따라서 우리는 열심히 번식하자. 왜? 번식하는 것을 가지고 구약성경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복이라고 했어요. 아이 못 낳으면 저주고요 애 낳으면 복이에요. 애를 낳는다는 말은 육에서 뭘 낳는다? 육에서 육이잖아요.


그런데 요한복음 3장에서 뭐라고 되어 있어요? 니고데모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육으로 낳은 것은 육이다” 이 말은 육을 긍정했다는 말입니까? 육을 부정했다는 말입니까? 육으로 백날 해봐야 하늘나라 갈수 없다. 하늘나라 볼 수가 없다는 이 말은 육이 육인 주제에 기껏 생각하는 것 자체가 육에 범주 안에서 생각한다면 아무리 영적인 생각해도 육을 포기 못하기 때문에 너는 하늘나라 갈수 없다는 걸 분명히 하는 겁니다.


하늘나라는 영으로 와서 영이 태어나야 돼요. 오후설교 때 제가 약간 언급을 했습니다. 영이 누구신가? 예수님이잖아요.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어디로 환원됩니까? 육으로 환원되고 육의 배후에 누가 있어요? 악마가 있는데 육보다 강한 자가 있는 거에요. 이미 인간이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인간이 악마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기껏 번식하는 거에요. 그냥 번식하는 것.


가인의 후예들이 도시를 만들고 문화 활동을 했지요. 가인의 후예들이. 창세기 4장에 나오잖아요. 예술, 문화 했잖아요. 그 목적이 뭡니까? 목적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 우리 가인의 족속을 번식하는 거에요. 번식하는걸 복이라고 여기는 거에요. 도중에 절단되면 저주로 보고.


그걸 프로이드가 이걸 다른 방식으로 설명한 거에요. 프로이드의 설명 다시 보게 되면 인간은 생물학적이다. 고상해보이지요. 성경에서는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한 자로 이야기합니다. 육이에요 ‘육’. 육이라니까요. 육의 특징은 뭐냐? 내가 나를 관찰해서 결론 얻는 거에요.


내가 나를 관찰 현미경으로 관찰하든 망원경으로 관찰하든 저기에 외계인이 있을까? 하여튼 어떤 식으로 관찰하든 별이 몇 개냐? 관찰하든 그 관찰한 눈은 그 자체가 육이에요. 그 육은 강한 자, 악마의 하수인입니다. 악마가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인간이 문화 활동 나는 여자고 남자고 관심 하나도 없고 오직 나는 어떤 법학에 학문에 전념하겠다. 굉장히 정신적에 치중한 것처럼 보이지요. 그거 육입니다. 육, 환원. 결국 모든 인간은 육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이 되돌아오는 이것을 끊는 방법은 뭐냐? 육을 잃어버리면 됩니다. 누가 우리를 가져가면 돼요. 육을. 어느 쪽에서? 인간 세계 악마 강한 자보다 더 쎈 강한 자가 우리를 뺏어가면 돼요. 22절 봅시다.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23절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의 육을 강한 자 속에 있는 악마 속에 있는 육을 뺏기 위해서. 뺏기 위해서 주님이 뺏겨버려요. 악마의 세계에. 인간들은 악마의 세계에서 못 벗어난 주제에 빠져나올려고 노력하지요. 우리의 육은 상당히 더러운 성욕이지만 우리는 정신적으로 신학으로 이걸 구원해보겠다. 복음적으로 구원해보겠다. 몸부림치고 있는 거에요.


복음으로 구원받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 복음의 지식의 주체가 누구인데요? 본인이잖아요. 본인은 본인을 해석 못해요. 환원되지 않는 분이 우리를 구원해야 돼요. 육으로 환원되지 않는 분. 그걸 바로 죽고 난 뒤에 육으로 죽으시고 사흘 만에 영으로 부활했잖아요. 육체로 새로운 육체. 그래서 첫째시간 마치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환원을 끊는 방법은 ‘새로움’. 새로움이 우리의 육에서 솟아나면 됩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1장 22절 (육의 해석) 220510b-이근호 목사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오셔서 귀신이 나감으로서 귀신이 노출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싫어해요. 왜냐하면 본인들이 귀신을 이미 장악한 걸로 그렇게 알려져야 되기 때문에. 자기가 귀신에게 눌려있는 게 아니고 자기가 귀신들을 마음대로 나가라고 하면 나갈 수 있다고 봄으로서 귀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걸로 자신의 거룩함과 성결함과 온전한 구원을 자랑질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냄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허락도 없이 귀신을 쫓아냄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귀신 쫓아내는 주도권 싸움에서 예수님이 쎄냐? 자기들이 쎄냐? 새로운 경쟁이 붙어버린 거에요.


그들은 귀신 쫓아낸 것이 구원이지만 주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귀신 쫓아내도 나머지 자체가 귀신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거에요. 귀신은 항상 되돌아온다. 귀신한테는 실종이 없다. 왜? 귀신의 나라는 분열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귀신의 나라를 분열할 수 있다고 바리새인들은 생각하는 거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논리라면 귀신의 나라는 스스로 무너져야 돼. 무너지게 되면 너희들이 귀신 쫓아내지 않더라도 귀신은 스스로 없어지게 되어 있는데 귀신이 생긴 다는 이 말은 귀신은 절대로 스스로 무너지는 법은 없다는 이 사실을 너희들은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에요. 귀신을 무너뜨릴려면 귀신보다 더 강한 자가 와야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내가 귀신 쫓아내는 것에 대해서 지금 귀신의 왕이 쫓아낸다고 할 수밖에 없는 자기 한계를 드러내는 것은 너희들에게는 새로움이 없기 때문에. 환원이라고 하는 것은요 자기 역량대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자기 역량대로.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재주는 다 피우는 게 그게 환원이에요. 환원. 재주.


그래서 환원된다는 말은 결코 자기로부터 자기가 벗어나는 길은 없습니다. 20절에 봅시다. 너희들이 하는 귀신 쫓아내는 것은 쫓아낸 게 아니고 잠시 자리를 옮겼을 뿐이고 귀신 일곱이 다시 올 수 있는 그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말이죠. 깨끗한 자리가 남아 있으니까 이게 무슨 귀신 나간 거에요. 귀신 보고 잠시 자리 비켜주시기 바랍니다 이랬을 뿐이지. 네가 쫓아낸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귀신이 알아서 자기가 잠깐 비켰다가 필요할 때는 일곱 귀신 다 데려와서 다시 올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20절에 보면 “내가”에요 “내가”. 너희들 말고 내가.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이미 귀신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했다”는 거에요. 왜? 이미 나는 귀신보다 유일하게 더 강할 수밖에 없는 귀신으로 뒤덮어진 이 세상 바깥에서 오신 분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이게 뭐냐? 이게 진정한 영이에요. ‘진정한 영’.


그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는 영이라고 하는 것은 육이에요. 저희들은 육인지도 모르고 영이라고 우기고 있어요. 그러면 새로움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가. 그것이 두가지인데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하고요. 요한복음에서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올 때를 한번 생각해봅시다.


첫 번째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이삭이 참으로 아브라함에게는 소중한 존재에요. 하나님의 약속의 집결체라고 보지요. 너의 씨가 하늘의 별만큼 많아질 것이다. 약속해서 주신 이삭이거든요. 그러면 약속이 멀쩡하게 살아있지요. 유지되지요.


멀쩡하다면 이삭도 다칠 리 없고 죽는 일은 없어야 되지요. 이삭이 갑자기 죽는 일은 없어야 되지요. 이삭이 자식을 낳기 전에 죽는 일은 없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이삭에서 하늘의 별 만큼 자식이 나올 때까지는 이삭은 사라지면 안돼요. 왜? 약속이 멀쩡해야 되니까. 약속의 내용이.


그러면 약속은 뭐냐 하면은 약속은 내 씨가 아브라함의 씨가 하늘의 별만큼 많다 했지요. 여기에 대해서 주께서 묻는 것은 아브라함이 이걸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 뭐 해석할 게 뭐 있어요. 내 자식이 하늘의 별 만큼 많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많다는 말은 약속의 자식을 줬으면 이거는 계속 그대로 발전하고 성장하고 계속해서 나아가야 되지요. 중간에 사라지는 경우가 없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너한테 믿음이 있느냐를 보는 거에요. 너한테 믿음이 있는가를 시험하는 겁니다.


이 말은 이삭이 올 때 이삭이 등장함으로서 아브라함의 해석에 아브라함의 약속 해석에 변화가 생겨야 되는 것이 약속이 약속답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육에서 와서 계속 육으로 가고 있는 거에요. 그럼 보통 육의 사람 같으면 이삭을 해석할 때 이삭이 중간에 죽는 일이 없이 계속 유지되야 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무슨 해석이다? 육적인 육의 해석이에요. 육의 해석이요. 육의 해석은 번식이에요.


아까 프로이드 본능을 이야기한 게 두 가지 이야기했는데 한 가지 이야기 안 한 게 있어요. 하나는 번식본능 또 하나는 뭐냐? 무기물이 되는 내가 먼지가 되는 죽음 본능 두 가지 있다는 겁니다. 안되면 자살하면 되지. 내가 번식할 자신이 없으면 살 이유가 없기 때문에 마포대교에 빠져 죽으면 되지요.


사람이 자식을 낳을 때 자식이 육에서 나온 생물체가 아닙니다. 자식은 내 정신을 이어받아야 돼요. 그럴 때 자식이라고 하는 거에요. 아버지는 교회 장로인데 자식은 술 먹고 더러운 짓하면 너 호적판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가만있자 너 세포가 있나? 없나? 이거 보는 거 아니잖아요. 나의 같은 정신 세계를 네가 공유하고 있나 이걸 본다고요.


그러면 자식이 받을 것은 내 신체만 받는 게 아니에요. 내 정신도 함께 받을 때 내 자식답다고 인정하는 것이 인간의 육적인 본능입니다. 본성이에요. 왜냐하면 내 자식을 번식할 때 아무 자식이 번식하는 게 아닙니다. 나의 정신 사상을 받아줄 때에요. 이거는 인간의 육체적 자식보다 정신적 자식을 인수인계 받는 것을 인간은 더 원하고 있어요.


그래서 양자라도 좋다. 내 사업체를 물려받을 수 있는 정신만 또렷하다면 나는 자식 대신 양자에게 줄게. 정 양자도 안 되면 강아지한테 준다. 아 강아지는 안되겠다. 인간이 이 정도로 육적입니다. 이게 영물인데 약한 영물이죠. 마귀에게 속한 거죠. 마귀의 뜻은 인간이 육으로 남는 거에요. 육으로 계속 남는 겁니다. 파멸될 걸 알기 때문에. 악마가 알거든요.


마귀는 영이기 때문에 육이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요. 귀신은 실종되지 않습니다. 다시 자기 집으로 다시 돌아와요. 약속이 이삭을 줄 때에 아브라함 자손이 육으로 해석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이삭 입장에서 해석할 것인가? 자, 아브라함은 이삭이 없는데서 생겼지요.


그러면 있음의 세계에서 이삭은 외부인입니다. 외부인. 외부인은 새로움이에요. 새로움. 다시 있음으로 환원될 이유가 없습니다. 있음이 환원될 곳은 사라지는 거에요. 그 사라지는 자손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걸 사라지는 장소를 지정해주는 거에요. 모리아 산에 가서 네 아들 바쳐라. 그래서 그게 믿음의 내용이 되는 영적인 사건이 터집니다.


어떤 사건이냐 하면은 아버지가 아들을 잡는 사건 말고 외부적이라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건너뛸 수 없는 논리적으로 건너뛸 수 없는 다른 경우를 있어요. 그게 뭐냐? 옆에 수풀에 숫양이 생겨난다는 것은 이것은 아브라함의 육의 능력을 뛰어넘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뭘 믿는가? 이번 일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제가 믿은 게 아니고 믿음의 주인이 저보고 믿음 안에 저를 집어넣은 일입니다. 그분이 누구냐? 요한복음 8장에 아브라함이 내 때를 보고 기뻐했느니라. 아브라함이 벌써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거에요. 나와는 다른 분. 나 육 말고 다른 육의 세계에 속하지 않은 다른 분.


마치 누구와 같이? 이삭과 같이. 육의 세계에 없는 존재가 나타나서 나로 하여금 육의 세계에서 나타나신 그분의 세계로 전환시켰느냐를 증명해주기 위해서 아들 이삭을 잡으라는 일을 시킨 것을 아브라함은 받아들인 거에요. 그 사건이 양이 대신 죽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의 세계에 파고 들어오신 거에요. 주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귀신의 오야붕까지 끝까지 가보겠다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보고 너희 아비는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다. 그리고 가룟 유다라는 제자가 있지요. 가룟 유다는 어디에 속했습니까? 사탄에 속했지요.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너 할 일 해야지. 너 할 일 해야지. 네 할 일이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사탄이 사탄답게 해야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잡아 죽였을 때에 그때 정리할 수 있는 멘트는 뭐냐? 가룟 유다가 가룟 유다 했다.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사탄이 사탄한 거에요. 그 사건이 꼭 필요한 사건이에요.


그리고 모든 제자들은 도망쳤습니다. 가룟 유다의 행위를 저지하거나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 모르니까. 마귀에 대해서 모르니까. 악마에 대해서 아는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인간은 통합을 원하고 융합을 원해요. 평화를 원하고. 그 속에 내가 일부니까. 내가 평화로운 사람, 내가 화평한 사람, 행복한 사람 되기 원해서. 자기의 번식 본능을 자기가 버릴 수가 없어요. 육의 본능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삭, 아브라함, 예수님 공통점은 전부 다 이 땅에서 부재죠. ‘부재’. 부재의 존재. 없는 존재. 부재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제가 4가지로 한번 정리를 해봤습니다. 제가 적어드릴께요. 부재 증명. 우리 자신이 과연 이 땅에서 부재인가 외계인인가? 부재의 존재냐 증명하는 것. 첫 번째, 유용성으로부터 bye bye. 유용성으로부터 bye bye. 나한테 얼마나 이익이 있느냐로부터 bye bye.


두 번째, 세상에 있는 것 다른 것으로 대체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지금 남편하고 이혼하고 다른 남편하고 결혼해서 팔자 고쳐볼까? 아이고 그 자가 그 자에요. 차마 놈이라는 말을 못하겠다만. 그 자가 그 자에요. 갈아봤자 역시에요 역시. 이 세상에서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고 귀신 안 따라갑니까? 이거는 세상 부러울 것 없다는 거에요. 세상에 부러울 것 아무것도 없어요.


세 번째, 언어 공동체에서 벗어난다. 이게 설명이 필요한데 언어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요 언어로 구성된 커뮤니케이션 사회에요. 커뮤니케이션, 의사소통. 인간이 사회에 가입하는 거에요. 교회 등록하는 것부터 해가지고 동호회라든지 하는 것은 그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인정받기 위해서.


특히 교회는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하나님은 안 보이시니까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신앙 좋다고 하면 내가 신앙 좋은 줄로 아는 거에요. 그게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은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내 욕망이 생겨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그러느냐 어릴 때부터 우리는 말을 배울 때 어린애가 욕하면 부모가 가만히 있습니까? 말립니까? 어떻게 합니까? 안돼! 그 말은 안돼. 이렇게 해야 돼. “할아버지 밥 먹었어?” “아! 안돼 안돼. 할아버지 진지 잡수셨어요?” 라고 해야 돼. 언어의 세계에요.


그러니까 어느 날 할아버지 밥 먹을려고 할 때 가만 들으면 “할아버지 진지 잡수셨어요?” 하니까 할아버지 감격해가지고 오만원 줘가지고 아이고 가정교육 잘 받았다 하면서 돈을 주니까 돈 주고 머리 쓰다듬어 주니까. 개 훈련할 때 사료주고 머리 쓰다듬잖아요. 사회를 배우는 거에요. 언어 공동체에요. 남들로부터 좋은 존재로 인정받는다는 것.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하는데.


또 반대말도 가능해요. 언어,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 욕설이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들어버려요. 인터넷에 댓글 달 때 인터넷 안하면 되는데 그 댓글 보고 죽은 연예인이 한둘이 아닙니다. 한둘이 아니에요. 많습니다. 연예인 자체가 바로 언어 공동체의 희생물이에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살 맛을 느끼는 괴상한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괴상한 존재.


그냥 조용히 자기만 살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남들의 인기에 유투브 조회수에 울고 불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게 예술이에요. 예술 또는 연예, 연예 세계, 스포츠 마찬가지입니다. 정치, 경제 다 마찬가지에요. 이걸 사람들은 정신 세계라고 해요. 그 정신 세계 어디서 나왔는가? 육이에요 그게. 육적 본능에서 벗어난 정신 세계는 없습니다. 특히 언어 공동체가 이스라엘이잖아요.


여러분들이 언어 공동체에 대해서 좋은 예가 있으니까 그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질문을 하나 할 테니까 성경을 한번 같이 봅시다. 사도행전 5장 34절부터 40절까지 제가 읽고요 제가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사도행전 5장 34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베드로하고 사도를 체포했다 이 말인데요. 예수 전하는 사람 체포했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이 사람 가말리엘이 나선 거에요.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았으니”


보셨지요?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요? 질문 들어갑니다. 이 가말리엘 사람 구원받은 사람입니까?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이야기해보세요. 첫 번째 구원받은 사람이다. 두 번째 구원 안 받은 사람이다. 어느 쪽입니까? 어느 쪽이에요? 구원 안 받았지요. 구원 안 받은 사람 맞지요?


그런데 이 사람이 뭐를 거론해요? 하나님 거론하지요. 하나님이라는 용어만 거론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리까지 거론합니까? 원리까지 거론하지요. 가만 두어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스스로 무너진다. 이 사람은 신자입니까? 신자 아닙니까? 신자 아니지요.


왜 오늘날 교회에 이런 신자 아닌 사람이 왜 이리 많습니까? 칼빈의 주권사상 언급 하면서. 왜 그렇게 많은 거에요? 이게 육입니다. 이게 마귀의 생각이에요. 그러면 질문합니다. 무엇이 이 사람으로 신자 아닌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은 자기가 환원되는 되돌아가는 자리가 있어요. 그 자리가 뭐냐? 하나님 자리에요.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자리에요.


사실은 마귀의 뜻인데. 뭐가 없는가? 새로움이 없어요. ‘새로움’. 새로움이 없으니까 통합하고 융합하는 거에요. 우리 하나님 믿는 사람끼리 통합하고 융합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새로움입니까? 환원되는 거에요. 예수님이 십자가 죽을 때 한결같이 그들은 의견일치를 봤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신자 맞습니까? 아니잖아요. 의견일치가 의견일치로 인하여 너희 아비는 악마다가 증명되어 버린 거에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어떻게 하면 신자 됩니까 라고 질문을 한다면 오늘 강의 헛들은 거에요. 아무도 신자가 될 수가 없어요. 그 누구도. 아무도 신자가 될 수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신자 나옵니다. 네 번째 부재증명, 이름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요. 부재하니까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 땅의 이름은 의미 없습니다. 이름이 없어요. 이름이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이제 말합니다. 어떻게 신자 되느냐? 이름을 떼어버립니다. 빼앗아가요 주님께서.


빼앗는 자리가 뭐냐? 주님께서 인간이 악마한테 속한 인간이 악마한테 사로잡힌 그 감옥, 감옥 같은 세상 제일 바닥에 가서 거기에 있는 자기 백성의 이름을 떼어버립니다. 그 이름을 떼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주의 이름으로 바꿔지지요.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 말은 더는 내 이름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자인하는 겁니다.


주의 이름은 나한테 찾아온 활동성을 내가 인정하는 거에요. 주님은 쉬지 않고 활동할 그 결과물로 내가 만날 수 없는 주님을 지금 이 허접한 악마한테 속해가지고 구원받을려고 이 난리도 아닌 나를 헛짓하고 있는 나를 이게 얼마나 육적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더러운 곳까지 오셨습니다. 그걸 자인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돼요.


이 말은 더 이상 자기 이름에 어떤 의미와 목적을 두지 않는 거에요. 그것을 아브라함에서는 뭐냐? 죽여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삭 죽이고 아브라함 죽이고 둘 다를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 누가 죽느냐? 하나님 자신이 죽어버립니다. 우리 다 같이 죽자.


이불 뒤집어쓰고 우리 소주 까고 죽자. 아버지 부도났다 남매들아 이리 오너라. 오늘 너희들 미안하지만 학교 가야 되고 친구들 있는 거 알지만 아빠 부도나서 쫓겨나 더 이상 못 산다. 아빠 오기 전에 우리 약 먹고 다 같이 죽자. 엄마 싫어요. 내일 소풍가는데. 소풍이고 뭐고 소풍이 중요한 게 아니고. 삼모자 집단 자살.


주님이 우리와 함께 죽습니다. 죽으면 우리한테는 믿음의 내용이 내가 믿을 내용은 어디에도 없지요. 예수도 못 믿고 하나님도 못 믿고 십자가도 못 믿고 내가 믿을 내용은 하나도 없어요. 주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안 믿어도 되는 안 믿는다는 게 믿음이 되는 놀라운 기적이 더 이상 나의 어떠한 행함도 믿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외부에서 온 믿음이라는 사실. 너의 믿음은 내가 일체 안 받는다 라는 사실을 일깨워지는 그 내용. 그걸 믿는 거에요.


도마가 자기 쪽의 믿음을 먼저 제시했지요. 나는 보고 믿겠다. OK! 콜! 네 식대로 보여줌으로서 도마는 내가 신앙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믿는 자가 되고 말았어요. 이게 주의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는 방법이에요. 죽지 아니하면 부재의 존재가 될 수 없는 거에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제는 내가 살았다고 너희들 이야기하지 마라. ‘주님이 내 안에 있다’고 이야기해라. 네가 살아 있다고 하지 말고 나는 죽은 걸로 보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것으로 봐라. 이거는 인간의 언어 공동체에서 해석이 불가능합니다. 신학은요 마귀가 만든 거에요. 인간의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이라든지 교리라든지. 주님이 언제 신학보고 구원합니까. 그러면 신학교 다 갔겠다.


제가 소위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네가 복음을 안다면, 진짜 복음을 모르지만 복음을 안다면 개척교회하지 신학 교수 안합니다. 신학 교수해도 벌써 쫓겨나오지요. 언어의 공동체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너는 고백할 뿐이고 자백할 뿐이고 목격할 뿐이지 해석할 문제가 아니에요. 해석한다고 설득될 문제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2장 4절의 말씀에 나오잖아요. 내가 말한 것은 사람을 납득시키고 설득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오직 성령의 나타남이 성령 그대로만 성령께서 하셨다는 것 주님이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한다. 따라서 성령 안 받은 사람은 해석할려고 하지도 마 이런 뜻이에요. 어딜 감히 해석할라고.


또 한 가지 두 번째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 거지 나사로 말고요. 마르다 오빠 그 나사로가 부활될 때 다시 태어날 때 다시 살아날 때 자기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나사로가 무덤에 들어간 것은 나사로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그 절차, 나사로가 한 절차를 예수님 본인의 절차로 미리 보여준 거에요. 내가 나사로처럼 무덤에 들어갔다 나온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나사로가 부활될 것을 믿지 말고 네 오빠 살아난 것을 믿는 게 아니고 너 오빠가 부활이 아니고 내가 부활이라는 거에요. 내가 부활이에요. 예수님 본인이 부활이에요. 본인이 생명이고 나사로가 생명이 아니고. 오빠 그러다 또 죽었어요. 예수님이 부활이고 예수님이 생명이에요. 그런데 마르다 마리아는 육의 번식관계에 가족 관계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가 언제 남의 집 오빠 남의 집 아는 아저씨 죽었다고 그렇게 예수님께 달려듭니까? 자기 오빠 죽었다고 달려들지요. 자기 오빠 죽었다는 말은 오빠하고 자기는 한 가족이고 오빠가 죽은 것은 무엇에 대한 빼앗김? 나의 행복에 대한 빼앗김이죠.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는 빼앗겨야죠. 하나의 역할은 죽어서 나흘 동안 무덤에 있는 역할.


지금 연극 무대를 생각해보세요. 연극무대 한쪽에 무덤을 만들어 놓고 나사로한테는 무슨 역할을 맡겼다? 병들어 죽는 역할, 이쪽의 두 여동생 역할은 뭡니까? 예수님 보고 멱살 잡고 달려드는 역할. 그 셋 중에 구원받는데 기여된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그냥 역할이죠. 그때 등장한 인물이 있는데 예수님. 각본대로 갑니다. 예수님 오자마자 예수님 멱살 잡는다.


자기가 아는 자기 육에서 나오는 해석을 해요. 해석을.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나는 내가 다시 살아난다고 했잖아 했을 때에 예~~ 압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 오빠 살아날 줄로 제가 잘 믿습니다. 그때 당신 나 비꼬는 거지? 청문회에 나왔던 것처럼. 너 비꼬는 거지? 예~~ 압니다. 꼬라지 좋다~ 예수 믿고 마지막에 다시 사는 것 그게 뭔데 우리 오빠를 죽입니까?


주께서는 네 해석이 문제다. 네가 마지막 때 내가 부활한다는 그 부활을 예수님이 부활시켜주는 걸로 해석한 거에요. 여전히 자기 자신이 자기한테 빼앗기지 않았어요. 아까 다시 봅시다. 1번 뭐라고요? 유용성에서 부터 bye bye. 안녕이에요 안녕. 자기 이익을 벗어난 거에요. 왜? 자기는 부재하니까.


다시 말해서 없는 존재인데 누구 때문에? 영원히 계시는 예수님의 존재 때문에 이 땅에서 몇 년도에 태어났어야 했어요. 이 없는 존재가 있음이 된다면 있음의 환원됨은 어디로 환원되야 돼요? 있음으로 환원돼요? 없음으로 환원돼요? 주님으로 환원되고 세상의 모든 것은 주로 말미암아. 주님 안으로 환원되야죠.


그래서 성도끼리는 상호익명성. 상호익명성. 주의 이름으로만 연락을 취하고 주의 이름으로만 사귀는 사이. 주의 이름 때문에 도와주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거에요. 주님의 종이라는 이유로 참아낸 세월이 너무 길어요. 이런 노래 있지요.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울고 싶어도 못 울고 참은 세월이 너무 길다’고 했잖아요.


주의 이름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물 한 그릇 대접하는 것이 곧 누구한테 대접하는 것이다? 나한테 대접하는 것이다. 주님은 부재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부재하기 때문에 보이는 거에요. 늙어죽을 때까지만 코로나 걸려 죽을 때까지만 보여요. 보이는 거에요.


그러나 죽을 때 그 사람이 죽은 게 아니에요. 주의 이름대로 그 사람은 살은 거에요. 죽은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잠자는 거에요. 그래서 살아 있을 때부터 내 이름으로 하게 되면 죽음이 성립되지만 주의 이름으로 하게 되면 죽지 않습니다. ‘죽어도 살겠고’가 되는 거에요. 나사로가 그걸 보여준 거에요.


시작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자기가 육으로 아는 해석을 뒤엎어버려야 돼요. 나의 해석이 아니고 앞으로 오실 주님의 역할을 미리 보여주는 식으로 해석되야 돼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은 따로 계시고 그 주인공이 주인공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자식을 잡아 죽이는 이 절차를 보여주는데 주님이 오시는 절차에 미리 우리가 합류한 거죠. 성도가.


그래서 성도의 인생의 길은 이미 이루어진 다 이루어진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시는 거에요. 이게 영적 해석입니다. 이게 영적 존재의 활동이에요. 23절 한번 봅시다.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누구 이야기하는 거에요? 지금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자가 이미 확정되었지요. 이미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벌써 공격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주님께서 반대라는 말은 뭐냐? 너희들 집합에 나를 포함시키지 말라는 뜻이에요. 그게 반대에요. 그렇다면 그 뒤에 봅시다. 나와 함께 하는 자 있지요. 함께 하는 자는 주님 때문에 어느 공동체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다만 거기에 출현된 사람이지 나타나서 같이 사는 사람이지 거기에 소속될 수가 없어요. 성도는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


주께서 소속을 달리 했습니다. 세상 부러운 거 없이 살아요. 세상 부러운 거. 그건 마귀에게 속한 거에요. 악세사리같은 거 뭐 그리 탐이 납니까? 아무리 이재용 부자가 되도 그거는 하늘나라의 것처럼 악마 안에 악마 밑에 있는 하수인인데 악마 하수인이 그렇게 김중배의 다이아가 그렇게 좋던가요? 젊은 사람들은 김중배가 누구인지 모를 거에요. 돈 가지고 심순애 꼬실려고 한 사람이 김중배에요. 옛날 신파극에 나왔던 일부입니다.


26절에 보면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왔지요. 이 말은 악마가 인간에게 지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제는 알고 싶다. 알려주마. 뭐냐? 악마가 인간에게 쫓겨나는 경우는 없었다 이 말이죠.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인간들의 소원은 자기 관리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나쁜 요소를 제거하게 되면 나머지는 멀쩡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거는 악마를 몰라도 귀신을 진짜 개무시한 거에요. 악마를 개무시한 겁니다. 인간에게 멀쩡하지 않은 게 없어요.


꼭 치과에 온 환자 같애. 이빨 하나 빼고 선생님 감사합니다. 멀쩡하지요. 한 달도 안 되서 이쪽 이빨 임플란트. 그 다음에 이쪽. 나중에 25개 다 해야 돼. 견적 나오면 수천만원 나와요. 63세는 세 개밖에 안돼. 나머지 자비, 자기 돈 내야 돼요. 그러지 말고 이삭처럼 죽지 차라리. 자기 몸을 죽여야지 몸을. 뭘 딴걸 해요.


그래서 주님께서 마태복음 10장 보면 주님께서 인간의 한계, 소위 영적이라는 것 정신적이라는 한계를 주님께서는 그걸 질타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와요. 유명한 말씀인데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5장 29절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이게 지금 예수님이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겁니까? 바리새인 보고 이야기하지요. 바리새인 누구냐 하면은 그 당시 하나님 믿는 사람 중에 제일 높은 경지에 인격 도약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소문난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을 보고 얼마나 주님께서 지금 조롱하듯이 이야기하는 거에요. 지킨 것 90%, 못 지킨 것 10% 해가지고 그렇게 하지 말고 잘라버려라 이 말이죠. 왜 그걸 못 하냐 이 말입니다. 눈, 오른손, 오른눈 얼마나 귀합니까? 잘라버려라.


얼마나 귀하냐 하면은 마태복음 10장을 보겠습니다. 10장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그러니까 이게 뭐냐? 네 몸이 너 지옥 가는 것을 방해한다는 생각을 왜 못하고 있느냐 하는 거에요.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니까 이 말이 뭐냐 하면은 인간들이 귀신들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추호도 못해요. 이게 인간이 무능해서 그래요. 해석 못해서 그래요.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이든 철학이든 악마가 우리보다 쎄다는 생각을 언어에 생물학을 하든지 인공지능을 연구하든지 컴퓨터를 연구해도 이게 악마가 나보다 더 쎄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어쨌든 간에 멀쩡하게 멀쩡하게. 조폭들도 차카게 살자. 그냥 착하게 살고 멀쩡하게 복 받을거다. 자기 존재 증명이죠. 부재 증명이 아니라 존재 증명이에요.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자, 27절 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이 여자가 또 쓸데 없는 소리를 하는 거에요. 이게 패밀리 의식이거든요. 패밀리 의식. 이게 생존 본능 아닙니까. 아이고 예수님 엄마 참 좋겠습니다. 당신 가정 참 좋겠습니다. 왜? 이렇게 똑똑하고 총명한 자식을 낳아서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말은 부러워라 부러워라 우리 집안은 당신 같은 자식 왜 없습니까. 이게 무슨 경쟁입니까. 인정받고자 인정 투쟁이에요. 우리 가정이. 내가. 전체의 일부는 결코 전체를 볼 수 있는 더 큰 전체의 안목이 없습니다. 내 새끼 내 자식은 남의 새끼보다 더 잘났다 할 때는 이거는 전체를 본다고 생각하는데 만약에 그 자식이 맘에 안 들면 나가라 하잖아요. 그 자식 나가면 나머지 멀쩡한 자식들하고 전체를 이룬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게 멀쩡하다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까? 그걸 더 높은 데서 그걸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요 인간은? 전부 다 자기 위주지요. 더 높은 안목을 악마가 가르쳐주지 않았어. 가르쳐주지 않았어. 그래서 주님의 방법은 뭐냐? 그냥 죽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죽어버려. 전체 안목을 볼 때 너는 죽어야 돼. 그게 최종 해답이에요. 멀쩡하게 할려고 하지 말고. 그냥 죽어. 그냥 부재해. 존재하지 말아.


그럼 자살하겠습니다. 가만 있어. 내가 죽일 때까지 가만 있어. 아이고 나이 많아 죽어야 돼. 가만히 계세요. 더 사세요. 지금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권사님 한 120세까지. 내가 욕을 한다 욕을 해. 욕을 한다 정말. 만약에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으면요 주님께 어떻게 하겠습니까? 분노하겠지요. 내 패밀리니까. 내 새끼잖아요. 남의 새끼는 죽여도 내 새끼는 못 죽인단 말이죠. 못 죽이잖아요. 분노하잖아요.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은 주님께 분노하잖아요. 복음에 분노하잖아요. 아마 이 강의에도 분노할걸요. 듣는 사람이 싫어요 막 누르고. 분노할걸요. 왜 분노하는 줄 알아요? 나는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 누구세요? 그거 당신의 목소리 아니에요. 악마의 목소리입니다. 마귀의 목소리죠. “나는요.”


믿음 없는 사람은 주님께서 문 앞에 오라면 오고 내 속 안에 들어오지 마라는 거에요. 내 속에 무의식이 들어있기 때문에. 나의 본능이 있어요. 내가 어쩔 수 없는 본능이 있어요. 나도 어쩔 수 없는 본능이 있어요. 내 새끼 잘되고 우리 집안 잘 되는 것 이거 본능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 이길 수 없는 자식을 죽이는 것을 요구할 때 해석 제대로 하고 해석 새로 하라 이 말이에요. 살아있는 너로 해석하지 말고 죽은 네 손에 죽은 자식의 입장에서 새로 해석하라. 그 죽은 자식 입장이 바로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의 입장입니다. 이 여자가 또 철딱서니 없는 이런 발언을 한 거에요. 좋겠네 저렇게 똑똑한 사람.


28절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자, 복이 있다는데 이 복은 이미 구약에서 복이 나왔습니다. 복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는가? 말씀, 율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시편 1편 복 있는 사람은 뭐를 보여주는 사람이다? 율법과 말씀을 바깥으로 보여주는 사람이죠. 내가 말씀을 지켰다가 아니라 이게 바로 말씀이 나를 이렇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라는 거에요.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고 주께서 예수 믿게 했습니다. 왜? 그게 주의 일이니까요. 당신이 어떤 식으로 그걸 알아? 내 식으로 몰랐지요. 나는 주님이 나를 믿게 했다는 것을 나는 몰랐는데 그 전에는 당신하고 똑같은 생각 갖고 있었지. 그전에 당신 같은 소리했다고.


주님 어떻게 하면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으니까 저에게 믿음을 주시고 제가 어떻게 믿으면 됩니까? 믿을만한 것을 주시옵소서 이런 식으로 철딱서니 없게 내 존재 중심으로 해석했는데 내가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존재하지 않는 분이 계셨고 실은 내가 존재 아니고 그분이 존재했는데 그분이 나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주님 믿게 하셨다는 거에요.


우리를 어떻게 우리를 X표 침으로서 너 아니야 너 행함과 실천력과 너의 의와 너의 목적 아무것도 아니야. 이걸 제거함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하신 사람으로서 다루어지게 했다는 것, 이게 바로 오순절 날 성령 왔던 의미입니다. 무서워서 도망치는 그들, 성령 오니까 그들이 이방인의 말을 하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의 언어 공동체에서 해석되지 않는 다른 이야기를 해버리는 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것 재림하는 것 이거는 인간 중심이 아니고 예수님 중심의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은 ‘지키라’가 아니라 주께서 지금 지키고 말씀하시고 주께서 실행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통보하는 겁니다. 우리의 허락을 받는 게 아니고 그냥 통보하는 거에요. 그 통보의 결과가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고 복음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이게 복 있는 사람이에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원했던 기도했던 복이 아니라 주께서 준비된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이 드러나게 말씀대로 되게 쓰여지는 그래서 말씀이 영원히 말씀대로 완성되었음을 알리는 그 증인 일에 우리가 늘 감사하고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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