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10장 21절 (섬) 220322a-이근호 목사
성도의 적은 악마입니다. 그래서 인간하고 상대하지 마세요. 만나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어떤 인간에게 의미 둘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씨름은 공중 권세 잡은 자와 싸운다. 에베소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다.
그 말은 사람하고 상대해가지고 뭐 이기고 지고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거에요. 이재명이냐 윤석열이냐 그게 의미가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의 적은 악마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사람하고 상대하지 마세요. 상대할 필요 없다. 이 말은 상대를 무시하지 마세요 하고 같은 말이에요. 상대를 무시하지 마세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상대는 무시할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무시할 만한 가치도 없어요. 너 대로 사세요 그대로 사시면 되는데 상대를 무시하겠다는 것은 내가 무시하는 쪽에 서서 잠시나마 내가 승자, 나는 너보다 더 낫다는 승자가 되고 싶은 심보가 작동하고 있어요. 이 무식한 것. 내가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무시해주겠다. 만화영화에 그런 거 나오지요.
무시하겠다고 하면서도 의식하는 건 또 뭐에요 그건. 그거는 자기 속이는 거잖아요. 무시할 것 같으면 생각도 안해야 되지 무시하겠다 하면서도 자꾸 의식이 되가지고. 우리의 상대는 악마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인간에게 뭘 했는가를 알면 돼요. 그러면 적을 알면 악마를 이길 수 있지요.
그러면 악마가 우리 인간에게 뭘 했는가. 그것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만은 제가 이야기해야 될 책임이 있기 때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악마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너는 존재한다. 그리고 늘 존재하라.’ 악마가 인간에게 부추기는 것은 지금 네가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있음’이죠. ‘있다’ 있는데 계속 있어줘. 계속 있어라.
이게 바로 악마가 인간에게 그런 식으로 접근한 거에요. 너는 도중에 죽으면 안돼. 계속 살아있어야 돼. 계속. 우리의 적은 악마인데 악마는 우리를 부추기는 거에요. 너는 죽으면 안돼. 굶어 죽으면 안돼 뭐하면 안돼 아프면 안돼 늘 건강해야 되고 늘 잘 돼야 돼. 그러면 성도가 여기에 대하는 방법은 요한복음 12장 25절에 잘 나와 있어요.
이게 뭐냐 하면은 너 자신을,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했지요. 성경은 ‘너 자신을 미워하라.’ 나 존재 안 할래, 나 여기서 그만 은퇴할래 또는 연극무대에서 나는 그냥 여기서 퇴장할래 또는 나는 여기서 사라질래 또는 나는 여기서 없어질래. 전부 다 같은 말이죠. 나 여기 존재 안 할래. 없어질래. 은퇴할래. 퇴장할래. 여기서 그만 사라질래. 전부 다 같은 말이죠.
성경을 해석하는데 왜 제대로 해석을 못하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12장 25절, 너 자신을 미워하는 쪽으로 파고 들어가면 성경 해석 다 돼요. 성경 해석 안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은 성경을 통해서 악마와 하나님과 싸우기 위해서 제공된 책이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성경의 편에 선다는 것은 그 안에 들어가면 되는 거에요.
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악마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그게 뭐냐 하면은 너 자신을 미워하는 쪽으로 하게 되면 성경은 해석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건 뭐 족집게 일타강사도 안 가르쳐 주는 거에요. 우리 자신만 미워하게 되면 성경 해석이 안 풀리는 게 하나도 없어요. 반대로 우리 자신을 안 미워하게 되면 해석되는 게 하나도 없게 되어있어요.
만약에 여러분 넓은 집이 소문에 의하면 그 집에서 자살한 사람이 12명이고 그 집에서 귀신이 들어왔다 나갔다 해서 원래 집값이 7억인데 집값이 600만원 된 것은 하도 귀신이 너무 왔다 갔다 해서 그런 집이라고 칩시다. 뭐 귀곡 산장 비슷하게 각종 유령들은 다 오는데 수맥 재면 막 돌아요. 수맥이 막 흘러. 축축해.
퇴마사 한 12명 왔다 갔다 한 그런 집에 우리가 산다면 거기에 귀신이 우글거린다면 그런 집에 여러분들이 밤 한 10시 되서 누웠다 합시다. 어떻게 하면 잠을 푹 달게 잘 수 있겠습니까? 지금 아이디어 다 제공했는데요. 자신을 뭐하면 된다고요? 자신을 미워하게 되면 잠만 잘 자더라 이렇게 돼요.
나 여기서 사라질래. 나 여기서 존재 안 할래, 그만 은퇴할래, 없어질래, 퇴장할래. 그렇게 하게 되면 눈 떠보면 아침 10시. 늦잠 잤어. 너무 잠을 달게 자가지고. 그 귀곡 산장에 누워가지고 자꾸 마귀하고 싸울라고 하면 안 되는 거에요. 마귀하고 싸울 필요가 없어요. 이러면 마귀가 맛이 안 나서 간다니까요. 뭐 싸울 맛이 안나. 싸울 맛이 안 나거든요.
옛날에 저 어릴 때 레슬링을 하는데 일본에 그 레슬링 선수하고 유명한 세계 헤비급 챔피언 누굽니까? 타이슨 있잖아요. 타이슨. 타이슨하고 돈 많이 준다고 일본의 유명한 레슬러하고 하는데 타이슨이 이렇게 주먹 들고 칠려고 하는데 안토니오 이노키가 어떻게 하느냐? 타이슨은 서서 붙자 이렇게 하고 있는데 안토니오 이노키는 그냥 누워버려요.
때릴려는데 앞에 누워버리는 거에요. 누워서 하자. 그래서 그 자리에서 타이슨이 막 화를 냈어요. “너 창녀야 뭐야!” 그게 신문에 나와 버렸어요. 왜 권투를 안 하고 눕냐 이 말이죠. 성경을 해석할 때 자기를 미워하라 그러면 생명을 얻으리라 되어있거든요.
‘내가 왜 나를 미워해야 됩니까’ 쪽으로 성경 보세요. 성경 해석 그대로 다 됩니다. 하나님 뜻이 그냥 확 다 들어와요. 마귀 이기는 것은 이건 뭐 기본이고요. 세리와 창기가 그 바리새인보다 천국 먼저 가는 것 아시지요? 주께서 이야기했잖아요.
그래서 그냥 한국 교회는 그냥 사기 단체다. 사기 집단이라고 보면 돼요. 왜냐하면 거기에 교회 가는 사람들이 자기를 더욱 더 사랑하기 위해서 빛내기 위해서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갖고 있던 걸 뽑아내는 거에요. 능력, 주특기, 지혜 이런 걸 뽑아낼려고 가는 거에요. 뽑아내서 자기한테 꽂아가지고 자기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어떻게 됩니까? 나는 존재하고 더 존재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 돌리는 방법은 딱 하나만 하면 돼요. 뭐냐 하면은 모든 일에 감사하면 돼요. 모든 일에. 여기 물이 있네. 아 고맙다. 컵이 있다. 고맙다. 컵 없으면 물 그냥 나발 불 뻔했구나. 고맙다. 모든 일에 감사하면 됩니다. 눈이 침침하네. 오 안경 있네. 고맙다 안경아.
모든 일은 주님이 주신 것이고요 주님이 주실 때 너는 너 자신을 미워해야만 하는 마땅한 인간이다. 그런데 이런 것 이런 것 준비했잖아. 햇빛 공기부터 해가지고 모든 게 무엇을 더욱 더 감사해야 됩니까. 감사만 하면 되는 거에요. 그 전제는 나 자신의 감사를 훼방하니까.
내 자신의 이러한 나름대로의 자기 성깔이 자기의 생각이 감사를 방해하고 있으니까 나를 미워하는 순간 미워하면서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되면 주님께서는 기뻐하시고 마귀는 짜증내고, 화내고. 주님은 좋아하시고.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그게 제일 입구에요. 입구. 성경에 들어가는 입구가 자기를 미워하는 거에요.
그럼 미워할 수 있도록 뭐했느냐 하면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아담이 마지막 아담을 죽였거든요. 첫 번째 아담이 두 번째 아담을 죽였잖아요. 그럼 첫 번째 아담에 속한 인간들은 두 번째 아담 예수님 입장에서는 원수가 되는 거에요. ‘하나님의 원수’.
‘원수를 사랑하라’ 이 말이에요. 로마서 5장에. “내가 하나님께 원수 된 자였으나 하나님의 피로 의롭게 됐다”는 그 구절 나오는 거에요. 내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니까 입장을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는 거에요.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게 되면 나는 하나님의 원수니까 이게 하나님의 원수라는 그 생각이 각인되게 되면 하나님의 원수 노릇하고 있는 나 자신이 얼마나 밉겠습니까. 밉지요.
십자가 앞에서 나를 세울 때 내 앞에 면전에 나를 세우게 되게 되면 내가 저런 존재밖에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감사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고집부리고 내가 기어이 살아나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 때문에 주께서 억울하게 죽으셨구나를 안다면 우리는 충분하게 미워할 수 있습니다.
뭐 다른 모임 같으면 따라하세요 하겠는데 그런거 하면 안돼요. 자! 따라하세요. “할 수 있다. 미워할 수 있다!” 뭐 이런 식으로. 나 혼자 할게요. 나 혼자. 하지마세요. 꼴 사납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자기 자신을 미워할 수 있고 그 십자가를 앞장 세워서 미워함을 통해서 들어가보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해석 안 되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666 맞으면 그건 마귀에 속했다라는 구절 나오잖아요. 요한계시록 13장인가 나오잖아요. 내가 맞을게요. 내가 맞을게요. 해석 다 됐잖아요. 해석 금방 됐지요? 666 안 맞고 내빼겠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는 존재하고 싶다는 뜻이에요. 나 오래 더 살고 싶다는 뜻이잖아요.
그래서 어디까지 이어진다? 영생까지 이어지고 싶다는 그 뜻이거든요. 영생에까지. 밥이죠 밥. 누구 밥입니까? 누구 밥이에요? 마귀의 밥이죠. 귀신의 밥이 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 귀곡 산장에 못 살아요. 마귀가 달려들까 싶어서. 그럼 자기 집에는 삽니까? 잠이 안와. 살아야 되니까. 심지어 어떤 걱정하느냐 하면은 잠 안 오면 죽겠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이거 왜 세는 거에요? 잠 못 자면 다크써클 생겨서 죽겠지. 죽으면 안 되는데.
그러니까 그 자체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는 거에요. 미워하면 될 걸가지고 자기 자신이 주님 앞에서 미움의 대상이잖아요.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에.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은요 그거는 시체 위에 주의 성령을 새로 주셔서 새로 만든 피조물을 사랑하는 것이지 기존 인간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죄인을 사랑하사 건진다는 것은 죄인에게 사랑할만한 게 있는 게 아니고 죄인에게 덮치는 예수님 자신의 포개져 있는 자신의 희생한 것, 예수님 자신의 피를 가지고 사랑하는 거에요. 주님이 자기 제자를 사랑할 때 ‘그래 사랑할게 와!’ 이게 아니고 그 제자들에게 뭔가 미리 먹이는 게 있어요. 맥이는 거 말고 먹이는 것.
그럼 뭘 먹이겠어요? 자신의 그 피를 먹이고 자신의 살을 먹이는 거에요. 제가 이번 주일날 설교할 때 뭐냐 하면은 ‘헌금’이라는 제목으로 했거든요. 혹시 들어봤습니까? 하나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주시는 분이거든요.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에요. 예수님은 주시는 분이에요. 죄인 것 더러워서 안 받아요.
예수님의 자기의 피를 주고 그 피를 땡기면 딸려오는 거에요. 찢은 살을 주면 자기 것을 잡아당기면 그 살은 죄인을 위해 흘리고 찢긴 살이기 때문에 그 죄인이 있어줘야 예수님의 찢기신 살의 그 취지가 사니까 붙어서 잡아당기는 거에요. 자기 피와 자기 살을 도로 회수하게 되면 그게 붙어 들려 나오는 자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영체의 확장인 겁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기 백성을 번식해요.
뭐 결혼해서 확장되는 거 아닙니다. 자기의 이 세상의 육은요 남녀가 결혼해서 번식을 하지만 주님은 그런 식으로 번식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살과 피로서 번식해요. ‘그러니까 너는 내 피에 동참하라’ 내 피에. 동참한다고 저도 죽겠습니다 이런 거 하지 말고요.
야쿠자가 연대감을 할 때 야쿠자가 부하들과 할 때 하나의 의식이 있어요. 손목에 그어서 피 흘려서 같이 마시는 거 있잖아요. 알지요? “느그 서장하고 같이 밥 먹고 마!” 하는 거 있잖아요.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민식이 했던 거에요. “다 하나야” 이런 것처럼. 우리 형제라서 피를 나누는데 주님은 우리 피를 안 받아요. 우리 순교를 안 받습니다. 더러워서 안 받아요.
우리 죽음을 왜 받습니까? 자신의 피를 그냥 회수한다니까요. 그 피 흘림이 죄인을 위한 피 흘림이기 때문에 죄인이 필요했던 거고 우리는 다 양 같아서 제 갈 길로 가는 양이 필요했던 거에요. 그래야 예수님의 자기희생이 빛이 나는 겁니다.
참 그러니까 여러분이 속해 있는 세상 한번 보세요. 세상의 특징이 뭐 말로는 악마가 이 세상의 신이고 이렇게 말로 하는데 구체적으로 여러분 살아가면서 온 몸으로 느끼잖아요. 이 세상은 여러분 일가친척이나 주변 사람들, 여러분 아는 사람들, 소위 여러분들을 사랑한다는 사람들, 여러분에게 뭐라고 자꾸 부추깁니까?
‘너는 너를 사랑해야 돼.’ 그걸 부추기잖아요. 저도 많이 부추겼습니다.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뭐 이런 식으로. 저도 많이 부추긴 거 맞습니다만은 그건 주의 일 하라고 했지. 밥 먹고 더 건강하라고 한 거지 놀라고 그렇게 부추긴 것은 아니고요. 건강해야 주의 일도 하기 때문에, 밥도 잘 먹고 그렇게 하시라고 한 거고.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오래 살아라.” 욕도 그런 욕이 없어요. “아버님 오래 사셔야 됩니다.” 그런 세상에 그런 쌍욕을 해야 되겠어요? 그래? 이 지옥인데 거기서 무슨 낙을 보겠다고 오래 살아요 그래. 진짜 미운 사람 떡 하나 더 준다고 누구 미운 사람 있거든 그런 덕담을 하세요. “오래 사셔야 됩니다. 건강하게.” 나중에 뒤에 괄호 열고 (가봤자 지옥입니다, 당신은.)
지옥은 뜨거운 불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마귀가 거기에 가도록 결정되어 있고요. 마귀는 혼자 가지 않고 어떤 연대감을 가지고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를 다 꼬셔서 데려가는데 악마는 실패가 없습니다. 악마가 도사거든요. 반드시 악마는 악마의 일을 성공합니다.
그런데 이 지옥이 뜨거운 불로 되어 있다고요. 뜨거운 지옥불. 이건 뭐 뜨거운 지옥불 체험 학습할려면 사우나하면 됩니다. 요새 목욕탕 자주 안 가지만 사우나 가던지 안 그러면 밤에 주무실 때에 보온매트 있잖아요. 최고로 올려보세요. 최고 7도. 처음에는 좀 이 세상 삶처럼 기분 좋아요. 뜨근뜨근하니. 그러나 계속 해보세요. 도저히 뜨거워서 못 견디죠. 그 잠시 그것도 못 견디거든요. 1,2분도 못 견뎌요.
그런데 지옥은 뭐냐 하면 뜨거운 불에서 영원히 있어야 돼요. 퇴소하는 날이 없어요. 한번 들어갔다 하면 나올 줄을 몰라요. 영원하니까. 그 지옥 불, 뜨거운 지옥 불 어떻게 하면 안 들어가느냐 이 지옥 불에. 살아있을 동안에 행동을 지옥 안가기 위해서 행동을 똑바로 하면 지옥 갑니다.
그러면 지옥에 안 가는 방법은 이 지옥에 뜨거운 불을 모든 일에 항상 잊지 않고 있으면 돼요. 그러면 뭐가 나오겠어요? 뜨거운 불이어야 하는데 왜 갑자기 안 뜨겁지 하잖아요. 그럼 여기서 뭐가 나오지요? 감사가 나오지요. 모든 일에 아무리 혜택이 있고 아무리 아버지 빽 써서 군대 안가고 어떻게 해서 갑자기 주식해서 대박 나고 땅값이 몇 배 오르고 아무리 행운을 누려도 결국은 지옥가게 되면요 그게 소용없잖아요.
지옥 가는데 먼지 쓸 때 쓰레받기를 똑바로 놓으면 쓰레기가 안 들어가지면 이렇게 기울이면 매끈하게 쏟아지잖아요. 이 땅에서 지옥으로 그냥 연결되어 있어요. 그냥 가속도. 나중에 나이 60,70 되면 가속도가 더 빨리돼요. 미끄러져 내려가요. 브레이크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 땅에서 돈 벌었다고 감사하고 건강하다고 감사해 봐야 그거는 지옥불만 하겠어요? 지옥불에서 빠진 것만 하겠습니까? 행동 똑바로 한다고 지옥불에 안 빠지는 게 아니라 지옥불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을 때에 그 사람은 이미 지옥 불을 의식하기 때문에 반대쪽으로 가고 있는 사람이에요.
왜? 한시도 감사가 끊어질 새가 없어요. 한시도. 어깨 수술했다 해도 지옥에 안 간 것만 해도 어딥니까. 그런 생각 좀 하셨지요? 그러니까 지옥불이라는 것은 24시간 잊으면 안 되는 거에요. 그러면 지옥불과 연결되어 있는 게 뭐냐? 내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 십자가를 죽게 한 피를 흘리고 살을 찢기게 만든 원수니, 내가 얼마나 주님 보시기에 내가 밉겠느냐 하는 그 자기 미움의 생각.
자기 밉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 지옥불 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 생각 이 모든 것이 저쪽 편, 이미 영생을 얻은 편에 속했기 때문에 그런 내 모든 만사가 매사에 감사로 이어지는 겁니다. 감사의 근거는 십자가 그리고 그 결과로 주어지는 지옥불 이것이 항상 밤부터 새벽까지 아니 밤새도록 24시간 항상 그게 유지가 돼줘야 돼요.
이게 유지가 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이 세상에 나가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잖아요. 많이 만나지요? 많이 만나잖아요. 만나면서 상대방이나 누굴 만나도 그 사람을 뭐하지 말라고 했어요? 상대하지 않는 상태에서 만나기 때문에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어있어요. 상대방에게.
상대방하고 한판 싸울까 이게 아니기 때문에. 상대가 너 나하고 한판 싸울까? 너 누구 찍었어? 나하고 한판 싸울까? 하면 속으로 너는 무시할 가치도 없어. 우리의 싸움은 악마지. 혈과 육이 아니야. 이것이 그 사람의 모든 행동과 태도와 표정 속에서 상대방에게 안정감을 줘요. 정서적으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기 것을 가지게 되면 이거는 공포가 자동적으로 온다고요. 자기 것을 갖게 되면. 성경 해석할 때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자기를 미워하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됩니다. 그리고 성경에 주신 모든 완성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홀로 다 이루어내시는 거에요.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 10장 21절에 이제 본문 들어갑니다. 이제. 밑밥 깔고 이제 본문 들어갑니다. 누가복음 10장 21절에 예수님은 누구 보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아버지보고 이야기하지요. 예수님 누구하고 상대 안 합니까? 인간하고 상대 안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자기 거에요.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말씀을 주었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다 자기가 지키고 십자가에서 그걸 다 이루었어요. 그래서 인간의 추가적인 행함이 말씀 성취에 기여하거나 가담할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 목사들이 당신 이 말씀 안 지키면 당신은 이제 망한다고. 계속 자꾸 말씀 지키는데 당신이 해야 될 것은 해야 되지 않겠느냐. 말씀을 들으면 뭐해 실천에 옮겨야지 자꾸 그런 식으로 추구하라고 자꾸 집어넣는 거에요.
인간은 말씀을 지키고자 나설 때 이미 그건 자신을 미워하는 태도가 아니에요. 자기를 사랑하는 태도고 내 인생은 내가 지킨다는 태도에요. 그거는 벌써 동네방네 일곱 귀신 다 들어옵니다. 지나가는 귀신이 그거 보고 다 기어들어와요.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정말 어리석어요.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성령으로 한다는 것은 아버지하고 대화했다 이 말입니다. 성령 안에서만 이렇게 대화가 되고 아버지와 하나가 돼요.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서 또 이 대목 보고 저 어린 아이같이 될래 또 손 들지 마세요. 이거는 자기를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지금 제가 몇 번을 이야기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자기를 미워하는 식으로 성경 속에 들어올 수가 있어요. 자기를 사랑하면 들어오면 안돼요. 어린 아이 할래 이러지 마시고 나 슬기롭고 지혜롭고 우기는 게 내 쪽이구나 라고 하면서 들어오면 돼요. 주께서 싫어하는 바가 나, 우리 쪽이에요.
그리니까 우리는 더 가속해서 우리를 미워하는 즐거움을 가져야 돼요. 미워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을 혜택주신 것을 감사해야 된다고요.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대상인 나를 주의 성령에 의해서 미워하게끔 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주님께서 숨기시고 이렇게 한다면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는 누구냐? 우리 자신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이제부터는 설명을 합니다.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설명할 때 좀 어렵더라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감당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이는 어디 있느냐 하면은 아이는 섬이에요. 섬이고 섬은 물로써 둘러싸일 때 섬이 되잖아요.
이 물이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공백’. ‘비워있음’. 비워있음을 건너지 아니하면 섬에 도달할 수 없어요. 그러면 여기는 육지가 되겠지요. 육지.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 이 아이의 반대편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로 하나로 묶었어요.
여기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바보에게 나타났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아이에게 나타났다. 아이에게. 아이에게 나타난 거에요. 그러면 여기는 뭐가 되느냐. 아이의 반대말이니까 서로 대척 관계니까 반대말은 뭐가 되겠어요? 이거는 뭐냐? 어른이 되는 겁니다.
어른 또는 어른이 되고자 하면서 지금도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는 아이들. 어른들의 특징이 뭐냐? 어른들의 특징은 도로 아이가 될 수 없어요. 도로 아이가 될 수 없습니다. 이미 아이의 선을 넘었으니까. 어린이 그때 그 시절을 이미 지나갔어요. 도로 그걸 되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시간이 역전되는 것도 아니고.
아이 때가 그리운 것은 맞지만 “다시 아이 될래?” 하면 다 싫어해요. 왜? 그만큼 무엇이 축적되어 있는가? 나름대로의 지혜와 슬기가 축적되어있거든요. 이게 아까운 거에요. 슬기, 지혜라고 하는 것은 슬기 지혜가 어디 동원되느냐 하면은 여기 공백이라고 했지요. ‘공백’.
제가 왜 섬으로 했느냐 하면은 공백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없음’을 뜻하는 거에요. 지혜롭고 슬기로운 어른들에게는 아이는 없습니다. 없음이에요. 어린 아이가 몇 살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 몇 년 지나면 다 어른 돼요. 가는 방향이 아이로 멈춰있는 게 아니에요.
세계 노벨문학상 받은 소설이 있어요. 퀀터 그라스의 양철북 있어요. 양철북이라는 그 소설은요 어른들이 저질러놓은 2차 대전의 그 모순점을 자라지 않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그걸 평가한 책이에요. 자라지 않는다. 자라지 않는 인간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 없어요.
인간은 날이 갈수록 계속 나름대로의 슬기와 지혜가 축적이 되기 때문에 자라지 않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리고 도로 뒤로 어른 됐다가 도로 아이로 가는 인간도 없어요. 거듭난다고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올 수 없고요. 그래서 이 ‘지혜롭고 슬기 있는 이 어른’은 모든 인간을 대변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은 인간들에게는 숨기시는 거에요. 모든 인간에게 숨기는 겁니다. 어른이 안 되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숨기는 겁니다. 인간은 여기에 공백이라는 물, 이걸 물로 둘러쳐서 섬으로 표시하는 이유가 인간에게는 ‘있음’이 돼요.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음, 존재감을 느껴요.
그런데 아이는 뭐가 없느냐 하면은 존재감이 없어요. 아이는. 한 6개월 된 아이가 나는 무엇인가. 물인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이런 아이 봤습니까? 아이의 특징이 어른 인간들과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설정해놨어요. 이 아이라는 것을 반대로. 그러면 어른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여기 있음’이 돼요.
인간이 있다는 것은 뭘 있느냐? 인간은 소유가 있음으로서 있다가 돼요. 인간들은 자꾸 내 것을 끌어모을 때 점점 더 ‘내 있음’이 확실해 지는 겁니다. 뭐 재산이고 뭐 건강이고 아무것도 없어버리면 자살할 생각부터 먼저 해요. 있던 명예 날라가버리고 우사스럽고 남한테 욕 들어 먹은 게 있다면 그동안 내가 있다는 말은 그동안 내가 남 앞에 자랑거리가 있을 때 있다가 돼요. 그런데 자랑거리가 있는 게 아니고 웃음거리가 있다면 인간은 자살하든지 안 그러면 산속에 들어가서 자연인으로 살던지.
하여튼 산속에 들어간 인간들치고 과거에 일 안 저지른 인간이 없어요. 왜 산속에 가겠어요? 싫다 싫다 세상이 다 싫다. 왜 싫었겠어요? 뭔가 해볼려다가 자기 뜻대로 안되가지고 도피하듯이 도망간 거에요. 도피하듯이. 산속이 그렇잖아요. 뭐 공기 좋다. 공기 좋아서 간 게 아닙니다.
소유가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 소유에 대해서 인간에게 어떻게 작용하느냐 하면은 이 소유를 가질려면 욕망이 작용합니다. ‘욕망’. 그리고 이 소유를 얻기 위해서 뭐냐? 나와 상대를 찾아요. 너가 있죠 ‘너’. 너를 만들어요. 너를 만들고 그 너를 생각하는 거기 ‘나’가 있고. ‘나와 너’의 관계가 성립됩니다. 어른들의 세계에.
그런데 아이들 생각해보세요. 아이들은 소유에 대한 욕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이들은 소유에 대한 욕망이 없어요. 내 옆에 엄마만 있으면 되지, 여기서 소유라는 것은 나의 것으로만의 소유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의 것으로만. 내가 끌어 모아서 이제는 나의 것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나의 것을 의미하는 거에요. 지식도 마찬가지고 슬기도 마찬가지고.
이거는 독자적으로 내가 나를 미워할 필요 없고 내가 스스로 내 것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력을 장만하는 있는 그게 바로 어른들이 하고자 하는 거에요. 어른들이 인간의 욕망을 하는 겁니다. 욕망은 반드시 뭐냐? 소유 있는 것을 내가 가질 수 있는 대상, 그 있는 것이 욕망을 자극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아이는요 어른들이 아이를 욕망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개뿔도 아무것도 없어요. 아이가 너 주식 갖고 있어? 이런 거 안 묻잖아요. 너 통장에 돈 있어? 아이는 욕망의 대상이 아니에요. 그래서 아이는 있어도 뭐냐? ‘공백’, 없는 쪽이에요. 주님께서 아이에게 나타났다 해도 인간 어른들은 그 아이 찾아갈 수가 없는 이유는 이건 뭘 건너와야 됩니까?
아무것도 없음을 건너 와야 되는데 없음을 건너 올 생각이 없어요. 왜? 없음은 내 욕망의 표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욕망의 대상이 아니에요. 없다는 것은. 친구도 뭐 돈 꽤나 있을 때 친구지요. 빌붙을라고 와서 친구야 하면 문 안 열어주지요. 남자들 나이 60 넘어서 친구 찾는 이유가 뭐냐 전에 여러 번 했는데 이유가 뭔지 알아요? 혼자 먹으면 술 맛이 안나. 술 먹을라고 만나요.
아 이거는 바깥 세상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린 마음 놓고 할 수 있잖아요. 무시할 가치도 없는 그 이야기. 여자들 친구들 만나는 것은 내 수다 좀 들어달라고 전화한 거고요. 수다 떨라고 전화한 거에요. 속풀이 화풀이 전부 다. 어린 아이 붙들고 속풀이 화풀이할 수가 없어요.
인간의 대인 관계, 나와 너의 관계는 거기서 뽑아 낼 소유가 있고 그 소유가 내 것이 될 때 나는 있음은 더욱 강화됨, 더욱 더 견고하게 강화된 존재가 돼요. 우리는 그것을 내가 더욱 더 힘을 끌어 모은 그런 나를 나는 미워할 수가 없어요.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럴싸한 내가 될 때 나한테 자부심을 느끼면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되어있어요.
아이들이 아빠 퇴근하면 아빠 오늘 얼마 벌었어? 그 이야기가 나올 때 나도 너처럼 됐으면 좋겠다 그런 욕망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어린 아이를 욕망하지 않아요. 빨리 그때 그 시절을 벗어나고 싶어요. 지금 사춘기에 있는 청소년들 또는 여자 하나 남자 하나. 걔들한테 들어 있는 속마음은 뭐냐? 대통령? BTS? 방탄소년단 아니에요.
빨리 어른 되고 싶은 거에요. 빨리. 어른 되어서 따로 나가 살고 싶은 거에요. 빨리 어른 되어서. 나가 살아서 빨리 회사 취직해가지고 우연히 커피 들고 가다가 재벌 3세와 부딪혀가지고 “이름 뭐야?” “신금희” 이래가지고 드라마 나오잖아요. ‘신데렐라’. 신데렐라처럼 갑자기 수직으로 출세하는 것.
특히 아이에 대해서 우리가 주님께서 어린 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천국 못 간다는 그 점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을 더 깊이 해봐야 돼요. 어른들은 아이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지요. 왜냐 하면은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아이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이 안돼요.
그런데 만약에 여자에게 남편을 갖고 싶다. 저 남자를 내 소유로 삼고 싶다. 그러면 남자가 원하는 것이 뭐냐? 아이이기 때문에 아이 낳아주고 아이를 담보로 해서 남자를 소유할려고 하는 거에요.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목사님 함부로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습니까? 되지요. 어디 나오느냐?
야곱의 두 아내 사이에 질투의 역사. 그 야곱의 12아들 하나 하나가 무슨 역할 하느냐 하면은 엄마가 자식을 사랑해서 자식 보고 낳은 게 아니에요. 남편의 사랑을 내 것 만들기 위해서 경쟁자로부터 내 것으로 완전히 내 것 차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그래야 하나의 여성으로서, 여성은 비우고 있는 것이거든요. 비우고 있는 것이 남성 것이 채워질 때 비로소 여자는 남자의 여자가 되면서 여자가 완성이 되는 거에요. 창세기 3장에서. 그럼 자식은 뭐냐? 남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하나의 재료가 되는 거에요.
아까 제가 언급했지요. 인간의 모든 일은 노리는 것이 목적이 뭐냐? 육의 번식이에요. 육의 번식. 나의 확장이에요. 쉽게 말해서 내 영향력의 확장, 뭐든 내 유명세 뭐든 좋아요. 나의 확장이에요. 나를 미워한다? 어림도 없어요. 사랑스러운 내가 더욱 더 사랑할 만큼 더욱 더 범위를 넓혀가는 것.
이것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잠잘 때나 뭐 밥 먹을 때나 오직 내가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가 그것만 생각하는 게 인간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그래서 어린 아이라는 것은 방향이 반대쪽 되면 절대로 어린 아이가 아니에요. 어린 아이는 가질 게 얼마 안돼요. 뭐 사탕 몇 개 주고 등에 업고 잠 재워주면 그걸로 족한 것. 그게 인간입니까?
돈이나 좀 오만원짜리 이만큼 쥐어줘야 좀 사는 것이지 잠만 재워줘서 인간 같으면 그게 인간노릇 다 했다 볼 수 있겠어요? 우유만 입어 넣어주면 인간입니까 그게. 빨리 탈피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 의미에서 어른이 되게 되면 아이는 아이 자체의 가치는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공백’입니다. ‘없음’입니다. 없는 물 건너야 아이의 나라가 나와요. 아이의 나라. 천국이죠. 천국의 나라죠.
그래서 천국은 인간들에게는 천국은 예수님은 아이가 있다고 했는데 여기만 나타낸 거에요. 하나님께서. 그런데 인간들에게 아이는 뭐냐? 욕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욕망의 대상이 아닌 것은 뭐가 되느냐? 아이는 이 땅에 없어요. 존재하지 않아요. ‘비존재’가 되는 거에요. 아이는 없는 거에요 이 땅에.
그럼 아이가 없다는 말은 그러면 누구의 모습을 보여주느냐? 그게 바로 예수님은 인간에게 안중에도 없는 거에요. 왜? 내가 확실하고 내가 진실이고 인간에게 각자 자기 자신이 너무나 생생한 유일한 소중한 현실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것이 망가지고 부서지고 이것이 다 채워지지 못할 때 아쉬워서 어디서 들은 풍월은 있어 가지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자. 그때나 예수님 찾지요. 하나님 찾고 예수님 찾는 거에요. 자기를 안 미워해요. 그래서 교회는 사기 집단이에요.
자기 귀하다고 그거 내세울려고 온 사람들이에요.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목사 앞에서는 물론이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귀한 나, “주께서 그냥 버려두시렵니까. 어찌 합니까. 제발 저 여자만 주시면 제가 뭐라도 포기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냥 저 어떻게 이렇게 방치하실 거에요? 주님” 영어로 “WHY ME?” “왜 하필이면 접니까” 이런 거. “왜 제게 이런 재앙을.” 뭐에요 그게. 미워하라고 했잖아요. 왜 본인을 안 미워해. 미워하는 시간 드릴까요? 10분.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10장 21절 (섬) 220322b-이근호 목사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사랑은 인간의 욕망으로 다 메꿔져요. 금방 메꿔져요. 사랑의 이름으로 때리고 사랑의 이름으로 공부하라고 하지만 그 사랑이 없음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내 욕망에 부합되라고 재촉하고 채찍질하는 거에요.
부모가 자기를 미워해서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사랑에 네가 힘 보태라고 사랑하는 거에요. 결국 남는 것은 자식 사랑이 아니고 자식보다 자기 존재가 더 사랑스러운 겁니다. 게다가 남편이 자기 아내에 대해 관심이 없어버리면 거기에 대한 복수심 또는 거기에 대한 보복으로 자식에 대해 집착을 더 하게 되어있지요.
왜? 남편마저 떠난 상태에서 자식마저 떠나버리면 자기의 내용은 텅 빈 공간이 되잖아요. 자기가 텅 비면 되잖아요. 왜? 주님은 아이에게 계시를 했지, 어른 같은 나에게는 계시를 안 했잖아요. 나에게는 숨겼잖아요. 주님 쪽에서 생각해보세요. 주님 쪽에서는 꽉 차 있는 나에게는 들어 갈 틈이 없어서 안 줍니다. 뭔가 비어있어야 되지.
텅텅 비어있어야 되는데 우리는 욕망이 나의 비는 것을 용납을 안 해요. 욕망 자체가 내가 한시도 비는 것을 용납지 않아요. 언제 왔느냐 멀리 있는 욕망이 벌써 비어있으면 다 채워버려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것을 내 영혼이라고 해요. ‘내 영혼’. 갑자기 찬송가가 확 생각이 나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하는 거 있지요.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내 영혼. 영혼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은 욕망이 변형된 게 영혼이에요. 순수하지 않습니다. 욕망이 영혼을 영원토록 가기를 추구할 때 그것이 뭉쳐져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영혼이 됩니다. 마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죄가 올라오게 되어있어요. 끊임없이.
입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게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는 말은 이 욕망이 변형을 한 거에요. 영혼이라는 아주 고상한 용어로. 마치 영혼이라고 하면 굉장히 순수한 것처럼. 마치 창세기 2장에서 진흙으로 숨 쉬라고 하는 그 푸쉬케, 그 기. 그것이 그대로 남아있는 줄 알고 있어요.
주께서 아버지께 대화하고 기도한 내용은 아이가 주인공이다. 아이가 주인공이에요. 기존의 슬기롭고 지혜로운 것을 추구하는 모든 어른의 세계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에요. 왜? 어차피 아이는 얼마 안 지나서 벌써 자아가 발생 되가지고 어른 흉내 내기 바쁩니다.
자, 아까 강의 했지요. 어른이 되는 방법은 존재가 되는 방법은 자기 것이 누적되어 있으면 그게 부풀어져서 어른이 돼요. 풍선 안에 바람이 불면 풍선이 커지는 것처럼 아이도 어른 것이 들어가버리면 어른 흉내내버리면 그건 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새 애들은 애가 아니에요. 작은 어른들이에요. 자의식이 강하죠. 뭐 사춘기라고 하는데 개인의식 강렬하죠. 자의식은 풍선이라면 이 안에 사랑이 있는 게 아니고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욕망이 들었다는 것을 가지고 뭐냐. 내 마음이다 이렇게 하거든요. 그래 그게 네 마음이다. 그게 네 마음이야.
욕망이 한순간의 욕망이 아니고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기대하면서 그게 네 마음이고 그게 네 영혼이 되는 거에요. 이 그림 중요해요. 욕망이 올라가게 되면 영혼이 되는 겁니다. 영원토록. 자, 그렇다면 아이가 없다고 했지요. 아이가 없어요. 아이는 공백 안에 들은 섬이 되가지고 인간들은 거기에 접근할려면 본인부터가 자기가 미워해야 되고 자기가 없는 존재가 돼야 되는데 인간에게는 택도 없는 소리에요.
멀쩡한 내가 왜 없어져. 그렇거든요. 그런 주장하는 거에요. 내가 왜 날 미워해? 미워할려면 나를 괴롭히는 적을 미워해야지. 왜 나를 미워해. 인간은 자기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고 있다는 그 최종적인 결정적인 증거가 뭐냐? 십자가입니다. 왜? 십자가는 인간의 미움의 다 집중되어있어서 터진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거든요.
그래서 흘려진 것이 예수님의 피고 예수님의 살이죠.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먹여버리는 거에요. 먼저 먹여버리면 제자들의 운명은 본인의 욕망 따라 갈 수 없고 그들이 먹었던 예수님의 피와 살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제자들의 특징은 날마다 어린 아이같이 돼요.
왜? 어린 아이의 특징은 뭐냐? 타인으로부터 욕망의 대상이 안 되는 거에요.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안돼요. 부러움의 대상이 안 되는 거에요. 타인들로부터. 그런데 하나님의 적은 마귀잖아요. 성도의 적은 마귀죠.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하나님께서 마귀와 어떻게 전쟁하는가? 어떤 아주 깊은 산골 있다 합시다. 적의 나라에 가까운 산골 깊이 있다 합시다. 여기 사람 한 스물댓명 살고 있는 작은 촌락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국방부의 정보에 의하면 간첩이 여길 통해서 온다는 순간 갑자기 여기서 간첩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난 뒤에는 갑자기 여기 뭐냐? 군사시설 들어서는 거에요. 군부대가 들어서버려요.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은 쌩뚱맞지요. 갑자기 군인들이 왜 오지?
주님께서 우리 성도를 다룰 때 악마가 들어오는 침투 과정 속에 있는 우리 자신을 주님의 군사기지로 만들어버려요. 우리를. 나를 위한 전쟁을 하지 않고 주님의 전쟁을 하는 군사시설로 만들어버려요 우리를. 그게 바로 뭐냐?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세상은 아주 문제없어요. 아무 문제없고 고요해요.
그런데 예수님의 사도,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사도가 복음을 전해버리면 갑자기 거기가 악마와 주님과의 전투지가 되어버려요. 그게 사도행전입니다. 사도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세상 좋은 세상이에요. 물론 완전한 천국은 아니겠지만 자기가 노력한 만큼은 댓가를 얻는 소박한 나만의 행복은 챙길 수 있는 뭐 챙겨봤자 지옥이지만 챙길 수 있는 그런 세계를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람들의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복음을 이야기해버렸어요. 그게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나오지요. 유명한 네 글자 나와요. 나한테만 유명하지만, 사도행전 2장 37절이에요. “어찌할꼬.” 사도들이 복음을 안 전하면 사도들이 성령을 받아서 복음을 안 전하면 이 탄식이 나올 리가 없지요. “어찌할꼬.”
만약에 사도들이 없다고 치는데 ‘어찌할꼬’ 라는 말이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지요. 뭐 사기 당했어요? 이거는 뭐 변호사 찾아가서 상담 받던지 그러면 돼요. 그런데 지금 사도가 무슨 이야기를 해서 이런 ‘어찌할꼬’가 나오느냐 하면은 사도가 딴 이야기 안 했어요. 하나님이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다녀갔다 할 때 평화롭게 다녀간 게 아니고 좋게 좋게 다녀간 게 아니고 하나님이 메시아가 죽어서 떠났다는 이야기를 할 때 유대인들이 그 당시에 제대로 알아들은 유대인들이 ‘어찌할꼬’ 라고 했어요. “회개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라.”
다시 말해서 십자가는 ‘어찌할꼬’ 라는 새로운 차원의 영토를 만드는 거에요. ‘어찌할꼬’에서는 뭐냐? 자기를 미워하겠습니까? 사랑하겠습니까? 미움이 되면서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대를 하지 않지요. 왜? 절망적이니까. ‘어찌할꼬’니까.
그러니까 아까 섬에서 뭐를 건너온 거에요? 이 공백의 물을 건너온 거에요. 공백의 물을. 이 섬. 누구의 섬? 아이의 세계. 어린이의 세계, 아이의 세계에서 바깥쪽으로 계속 악마와의 전쟁을 실시했던 겁니다. 이 공백을 건너서. 이 일을 누가 하느냐? 사도가 해야 되는데 이 공백을 못 건넜어요. 사도의 영혼과 마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덕분으로 좀 덕 보자는 쪽에 있어요.
하나님의 능력을 뽑아내서 내 구원에 보탬이 되고자 이렇게 했지 모든 게 나한테 유리하도록 작동하겠지 라고 오해한 거에요. 하나님의 그 모든 선한 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내가 원하는 것과 합치되겠지 뜻이 일치되겠지 라고 오해한 겁니다. 나를 상실하고 나를 공백으로 만들고 나를 빈 잔으로 만드는 건 상상도 못했지요.
지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0장 25절에 보면 여러분 교회 조금이라도 다녔다 하는 사람들은 이건 잊을 수 없는 거에요. 교회 안 다녀도 다 아는 이야기에요. 이게 무슨 비유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죠. 그다음에 38절부터 42절까지는 마르다 마리아 이야기죠.
그러니까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 여러분들 모를 사람이 없잖아요. 그 내용이 뭐냐? 제가 지금 이야기 다 해드렸어요 방금. 자기를 공백으로 보는 거에요. 나한테 어떤 이익이 있느냐? 내 욕망대로 욕망의 대상을 찾아서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를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
여러분 선한 사마리아가 어린 아이입니까? 어른이죠. 그렇잖아요. 그런데 이게 아이가 되는 거에요. 왜? 선한 사마리아인은 지나가는 대제사장 두 번째 지나가는 사람이 레위인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존재는 애초부터 없던 존재에요.
없는 존재고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그러한 호칭이 그렇게 평되는 사람이 등장한 것은 애매하게 강도 맞은 사람의 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에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데 강도를 안 만나고 서로 갔던 길을 그냥 간 사람 같으면 저게 선한지 악한지 저게 사마리아인인지 그게 구분될 필요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버지하고 이야기했던 것, 내가 꼭 집어서 아이들에게 나타냅니다 한 그 아이들, 그 아이들은 이 땅에서 찾아볼 수가 없지요. 주께서는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아버지와 협작해서 말씀을 말씀대로 드러나게 하는데 아이라는 것에게 나타낸다면 그 아이는 새로 생산돼야 되는 거에요.
내가 아이 된다고 손 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사건이 나로 하여금 성도로 하여금 아이 되게 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해도 예상치 못한 나, 없던 나를 나에게서 만들어 내는 거에요. 그게 나야? 그게 나였어? 본인도 놀래야 돼요. 본인도. 약간의 아부를 한다면 여러분처럼. 아부입니다. 그냥 아부. 아부입니다. 진담으로 들으셔도 더 은혜가 되겠지요. 아부입니다. 여러분처럼.
이 바쁜 시간에 장사 안 하고 여기 왜 앉아있어요? “미쳤는가봐. 미쳤나봐 나.” 이거 뭐 돈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때는 이렇게 나한테 따지지 말고 위를 보세요. “주님이 했어요!” 이렇게. 약간의 짜증을 애교스럽게 짜증을 내면서 주님이 날 이렇게 만들었지요. 나는 이 스타일 내 스타일 아닙니다. 성경 공부하는 게 내 스타일 아니고 돈 세는 게 내 스타일인데 주님이 이렇게 했지요.
예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걸 아는 거에요. 주님이 그렇게. 왜요? 지옥불의 뜨거운 맛을 안보여주기 위해서. 지옥불. 이거는 뭐 참고로 들어두세요. 여러분이 제 잠자리 어떻게 되는지 알 필요 없잖아요. 저희 집에 가면 홈매트가 있는데 홈매트가 거기가 애들용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이불이 있으면 반쪽밖에 차지 안 해요.
그래서 처음에는 야 이거 뭐 너무 작다 싶은데 지금은 그게 은혜가 돼요. 날씨가 추워서 저녁에 꼽고 자잖아요. 꼽고 자게 되면 조금만 있으면 10분도 안 되서 뜨거워지면 자동적으로 거의 반작용이지만 반대로 옮기게 되면 감사가 나와요.
왜? 뜨거운 데 있어보니까 시원함이 얼마나 시원한지 알거든요. 그런데 시원함이 더하면 춥게 돼요. 다시 반자동으로 이렇게 오면 돼요. 밤새도록 이러고 있어요. 감사만 나오고 있어요. 감사만. 1, 2분이니까 견디지 이걸 영원토록 한다면 이거 기가 찰 일이에요. 그럼 혼자 묻지요. 주여 왜 지옥불에 안갑니까? 십자가 죄 사함, 그게 최고야.
그러니까 십자가 죄 사함만 있으면 다른 기쁨 필요치가 않아요. 다른 기쁨, 다른 즐거움 필요치 않습니다. 오만원 그거 안 받아도 괜찮아요. 그런 거 안 받아도 괜찮아요. 늘 그 기쁨으로 기뻤으면 좋겠어요. 늘 기뻤으면. 그런데 이게 그렇게 되면 우리가 말씀을 지키는 게 되니까 주님께서는 이거 용납 안 합니다. 못 지키게 만들어요.
못 지키게 만들어야 뜨거운 것도 알고 시원한 것도 알고 일부러 또 세상의 복음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자기 스타일로 가요. 자기 타입으로 간다고요. 돈 세는 맛, 이 맛 이거 괜찮거든요. 자기 스타일로 가게 만들어요. 아빠 오늘도 돈 많이 벌어왔어? 돈 많이 벌어왔어. 자랑스러운 아빠. 아빠 힘내세요! 그래! 힘낼게.
아빠도 어른이고 아이도 어른이고 우리 집은 애가 하나도 없어. 전부 돈만 세는 인간들. 애도 애 같지도 않는데. 없습니다. 없다는 이야기가 누가복음 10장 22절에 나옵니다.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없나이다. 끝났지요. 저 있는데요?! 하면 안 됩니다. 없어요. 주님이 작용하지 아니하면 아버지의 뜻대로 주님이 작용하지 아니하면 없습니다. 인간 같은 인간은 그 다음에 뭡니까? 네 자로 ‘없나이다’ 주님이 원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매일 없습니다. 매일. 일주일 단위로 없는 게 아니고 매일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늘 살아계시기 때문에. 내가 늘 살아있을 필요는 없어요. 주님이 늘 살아있으면 주의 말씀 늘 살아있고요 주의 말씀 늘 살아있으면 주의 말씀대로 구원 받을 아이는 늘 있게 마련이거든요.
내 쪽에서 말씀을 강제로 끌어오지 마시고 나를 공백의 물로 바닷물을 건너서 내가 없는 상태에서 말씀에 들어갔다가 말씀에서 그냥 나와버리면 이제 말씀의 사람으로 살지 내가 전에 내가 알던 나로 사는 게 아니에요. 전에 알던 나.
전에 알던 나는 뭐냐 하면은 힘으로 사는 어른. 내 욕망이 꽉 차 있는 그런 영혼. 그게 전에 알던 나 잖아요. 나를 미워하지 않고 더욱 더 사랑하는 나. 이 아이에 대해서 좀 더 어렵게, 설명 들으면 어렵지 않아요. 이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두 언약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두 언약이 뭐냐? 두 여자지요. 이건 대구강의에서 약간 언급했어요.
이제는 대구강의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아이가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인간은 아이가 없다고 했지요. 인간은 후딱 어른 되고 싶어요. 아이가 후딱 어른 되고 싶어요. 어른이 되고 싶은 것은 뭐가 있어야 되느냐? 내 소유가 있을 때 어른 돼요. 내 존재가 된다고요. 소유가 존재를 만드는 거에요. 아무것도 없으면 이거는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소유를 위해서 무슨 관계? 나와 너의 관계라고 했지요. 이건 야곱의 두 아내 이야기했지요. 야곱의 두 아내. 야곱의 두 아내들은 자식이 12명이 있어도 12명 아이들은 없어요. 뭐냐 하면은 남편과 아내, 다시 말해서 여자와 남자만 있는 거에요. 이게 어른의 세계에요. 이걸 염두해 두시고 보세요.
자, 아브라함에게 육의 번창이니까 하나님께서 네 자식을 그냥 한 두 명이 아니에요. 하늘의 별 만큼 많다고 했을 때에 그래서 이름이 많은 무리의 아버지, 아브라함이거든요. 그런데 자식이 몇 명 있습니까? 아브람 때 단 한 명도 없었지요. 아브람 때 자식이 한 명도 없는데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지었다고요. 많은 자식을 거느리는 아버지로서 자식 하나도 없는 너는 그렇게 돼야 된다는 거에요.
그러면 누가 봐도 이거는 내가 아내하고 자식을 많이 낳는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인간으로서는. 아브람이 사라지고 없는 아브라함이 나에게 나타난다는 생각은 감히 못한 거에요. 그런데 이 생각이 여기서 사라가 자식이 없어요. 사라가 자식이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 사라가 자식이 없다는 게 중요할 뿐만 아니고 같이 중요한 게 하갈에게는 뭐가 있느냐? 자식이 있어요. 이게 중요한 거에요. 하갈에게 자식이 있는 거에요. 하갈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있습니다. 그것도 어디 바람피운 게 아니고 아브라함의 자식이에요. 지금 하갈이 종이라는 것은 잠시 잊어주시고 두 여자라고 봅시다. 두 여자.
그런데 두 여자는 대구강의 때 했지만 두 비유라고 했습니다. 두 비유. 이 말은 뭐냐?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비유에 해당돼요. 이 말은 인간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와 가치는 생성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누가 찾아와서 인간에게 너는 나를 증거하는데 필요하다고 먼저 다가와줄 때 비로소 인간은 비유라는 조건하에 인간이 돼요.
예수님을 증거했다는 조건하에 비유가 돼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예수님의 증상이다. 또는 아바타다. 또는 마스크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비유증상은 인간이란 성도란 홀로 있지 않다. 인간은 혼자 있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 특징이 뭐냐 하면은 갓난 어린 아이 특징이 내가 있다를 자기가 몰라요. 자기 있다는 것은 관심이 없어요. 엄마가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해요. 아이한테는. 제가 서울강의 때 약간 언급했지요? 아이한테는 자기 존재감을 본인이 인정하게 되면 이미 아이가 아니에요. 그거는 독립할려는 의가 벌써 개시된 거에요. 갓난아이는요 독립의지가 없어요.
왜? 나한테 끌어 모을 욕망이란 게 없어요. 그러니까 어른들에게는 아이가 짐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아이 낳으면 얼마나 이쁘겠느냐 했는데 막상 아이 낳고 난 뒤에는 자기가 밤 10시에 퇴근해서 잠 좀 잘려고 했는데 새벽 두시에 울어가지고 아침 6시까지 울어보세요. 성질 급한 남자 같으면 문 열고 애 던져요. 바깥으로.
이거는 엄마도 마찬가지에요. 엄마가 애 우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냥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밤새도록 업고 달래고 바깥에 나갔다가 안에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안에 들어왔다가 해가지고 애는 손 뻗고 세상에 무슨 우크라이나 전쟁처럼 고함지르면서 세상 지 세상인줄 알고 고함지르면서 이건 뭐 눈치도 안보고 고함지르고 있고요. 다들 그렇게 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과거 아이 때를 이미 지나갔기 때문에 돌아갈 수가 없어요. 남은 것은 우리가 슬기롭고 지혜롭다 그것만 남았지 돌아갈 수가 없는 거에요. 슬기, 지혜 가지고 뭐할 건데? 혼자 살지요 뭐. 혼자 사니까 이게 문제되는 거에요. 혼자 사니까.
하갈은 지금 애가 있잖아요. 자기들끼리 혼자 사는 거에요. 사라는 애가 없어요. 아이가 없으니까 남편의 여자가 될 수가 없는 거에요. 남편의 여자가 될 수가 없으니까 사라는 뭐냐 하면은 사라가 만약에 아이를 낳게 되면은 남자의 후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 되는 겁니다.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가 없었더라 이 말이에요. 남자가 관여하지 않았다 이 말입니다. 보통의 세상의 육은요 아이 낳아 봐야 누구 아이 되느냐 하면은 여자 자식이 아니에요. 남자의 자식이에요. 여러분 일깨우기 위해서 남자의 자식 족보 한번 읽어드려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전부 다 이게 뭡니까? 남자가 아들을 낳잖아요. 정철의 시조에도 나오지요. 아버지 날 낳으시고 어머니 날 기르시니. 어머니는 보조에요. 백날 길러봐야 그건 아버지 족보에요. 여자 족보에 올라가지 않습니다.
여자는 자식을 낳고 그걸 남자 집에 뇌물로 바침으로서 그 남자의 여자로서 완성체가 되는 거에요. 그게 배필자로서의 그게 한계입니다. 여자는 독자적인 존재가 아니고 남자의 것으로 채워질 때 비로소 여자가 여자로서의 완성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여성가족부 생긴 건가요?
성경 자체가 도저히 기존의 자연스럽다고 하는 인간의 인식과 의견으로서는 성경은 바깥 세상입니다. 전혀 이게 예상할 수 없는 세계에요. 이 세상과 천국은 이게 그만큼 물로서 공백이라고 했지만 떨어져있어요. 건널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사라에게 뭘 줬습니까? 사라에게 계시를 담은 자식을 줬지요. 이 계시를 담은.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주어진 계시를 담은 거에요. 이 계시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누구를 바꾸느냐? 남편을 바꿔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꿔서 아브라함이 사라의 종속되게 만들어버려요.
여자의 후손에 새롭게 종속된 이 땅의 남자 없이 태어난 자로서 아브라함이 되게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을 낳은 게 아니고 사라가 아브라함을 낳는 거에요. 사라가. 여자 하나 잘 만나서 인간됐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물론 여자 본인도 마찬가지지만. 여자 본인도요 사라가 처음엔 사라가 아니었어요. 사래였어요. 사래가 사라가 된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계시가 인간이 도저히 예상 못하는 다른 존재로 다 바꾸어놓는 거에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 하갈보세요. 아브라함의 종 하갈은 너무나 정상적으로 아이를 낳았잖아요. 남편은 누구다? 아브라함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낳은 자는 본인이죠. 자식을 낳아준 남편의 자식을 낳아주었기 때문에 이로서 우리는 온전한 가정이 된다고 생각한 거에요.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시는 뭐냐? “내어 쫓아라.” 내어 쫓아라. 참 이게 얼마나 충격입니까? 오늘 제목을 이걸 하고 싶어요. ‘내어 쫓아라.’ 인간 세계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빠져나갔지요.
자, 묻습니다. 누가 누굴 쫓아냈습니까? 인간들이 죄인들이 누굴 쫓아냈어요? 하나님을 예수님을 쫓아냈지요. 이거는 누가 봐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게 아니고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을 계기로 인간들을 전부 다 쫓아냈다고 본거에요. 어둠 속에서 흑암 속에서 쫓아낸 거에요. 인간들이 예수님을 쫓아낸 것은 인간 중심입니다. 인간 중심, 육의 중심이죠.
그러나 성령으로 봐서는 뭐냐? 누구 중심이냐? 예수님 중심이에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이 인간들은 이미 바깥 어두운 데 이를 갈면서 지옥으로 쫓겨난 거에요. 그 쫓겨난 그 재벌들 쫓겨난 그 대선후보들 그게 그렇게 부럽습니까? 쫓겨났는데.
그들이 가는 방향성이 지옥으로 가는데, 원래 돼지 잡기 위해서는 잘 먹이잖아요. 좋은 집에 좋은 아파트에. 돼지 잡기 위해서 호강은 일단 해주고 영원한 전기매트에다 뜨거워도 돌아누울 곳이 없도록 온 천지 뜨겁게 그렇게 하듯이. 이런 강의는 이런데서 듣는 게 아니고 뜨거운 전기매트에서 들어야 되는데. 오늘 새벽에 올려놓을 테니까 전기매트 틀어놓고 들어보세요. 뜨거운 지옥불이 진짜 뜨거운 맛이 얼마나 뜨거운 지를.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가 인간이 기대하는 그런 선물, 은혜하고는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감사하고 기쁘냐 하면은요 목숨도 내 목숨도 하찮을 정도로 기뻐하고 감사하고 뛰놀아야 돼요. 그 정도로요. 율법에서 벗어나서 영생을 얻은 게 우리 족쇄처럼 수갑처럼 채웠던 율법, 선악체제, 사법권. 이거 아니면 죽는다는 것. 지옥 간다는 것. 거기서 벗어났기 때문에 우리는 비로소 지옥에 가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지옥인가를 벗어났기 때문에 아는 거에요. 벗어났기 때문에. 있으면서 아는 건 소용없어요.
벗어났기 때문에 그 무서운 너무 강렬하고 거기서 벗어나면 너무 기쁘기 때문에 지옥불 입에 달고 달아도 우리는 신바람 이박사다. 달고 달아도 괜찮아요 이제는. 이제는. 이제는 말한다 지옥에 대해서. 아내가 남편을 이렇게 이름까지 바꿔서 구원했습니다. 그럼 주도권이 뭐냐 하면은 아내한테 있어요. 아내는 여자의 후손이지요.
여자의 후손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남성의 세계에서 없는 존재에요. 그래서 성도는 아이 같아요. 없어요. 누구든지 어린 아이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했지요. 아이는 이 땅에 없어요. 없는데 성령을 주니까 비로소 섬의 주민이 된 거에요. 시민권이 아이의 나라에 있어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빌립보서 3장 17절에 있잖아요.
우리의 시민권은 아이의 나라, 없는 나라의 시민권 없는 나라에 존재하는 사람이 된 겁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주님이 영혼이 되어서 영원한 영생을 얻지요. 창세기 2장에 보면 주께서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한 것은 영원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그 상태로 저주 받은 상태로 영원히 멸망하는 것을 주께서는 그게 선악 먹지 않는 상태에서 영생을 기대해서 생명나무를 심어놓은 거에요. 그래서 그걸 분리시킨 거에요.
뭐냐 하면은 보이지 않는 담장. 이 세상에 이것이 그어져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담장이에요. 그래서 성도가 가게 되면 거기 군사기지이기 때문에 주님의 군사기지이기 때문에 가면 성도 주위에 보이지 않는 담장이 있고 성도가 부산에 가면 부산에 있고 성도가 만약에 캐나다 가면 캐나다에 보이지 않는 담장이 쳐져있어요.
왜? 주께서 악마를 의식해서 성도를 가지고 그렇게 사용하기 때문에. 성도는 아이에요. 성도는 남성의 세계에 속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세계에 속해요. 남성이 없는 그런 세계에요. 그래서 성경에 출애굽기에 보면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라” 하지요. ‘고아와 홀아비를 불쌍히 여기라’ 하지 않아요. 그런 게 있어요? ‘고아와 홀아비를 불쌍히 여겨라’ 이런 거 있어요?
주께서 여성을 없음을 표기하기 위해서 여성으로 하여 없는 존재로 활용하기 위해서 여성을 태어나게 한 거에요. 그래서 이사야 3장 같은데 보면 이사야 3장 잠깐 볼까요. 이사야 3장 16,17절이죠. 시간 관계상 제가 빨리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낸다 하시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가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이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얼굴 가리개와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쭉 나오지요.
어디에 치장합니까? 여성에게 치장을 했지요. 그 여성들이 남자, 부자 남자, 재벌 남자 만나서 이렇게 치장을 했다 이 말입니다. 이 말은 뭐냐? 이 사람들이 여성적인 여성이 아니에요. 남성의 것으로 꽉꽉 채웠던 여성을 의미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단독적인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게 종속된 여성이 이들이 사치한다는 것은 곧 남성의 세계에 추구하는 방향이 이렇게 육적이라는 것, 세속적이라는 것을 여자를 통해서 나타나 보이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멸망한 도성은 뭡니까? 음녀, 더러운 여자라고 하지요. ‘음녀’. 세속적이고 더러운 여성을 통해서 이 세상을 통째로 표현하는 방법.
그런데 그 여성에 비해서 이 사라 같은 경우는 어떻습니까? 하갈 말고. 사라 같은 경우에는. 남성이 필요해요? 안 해요? 남성 자체가 필요하지 않아요. 그 사라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죽어요. 그 사라가 낳은 자식이 바로 이삭.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있는 이삭입니다. 계시가 담겨있어요.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언약의 몸통이 확장되는 거에요. 여자의 후손이 그런 식으로 이어져가는 거에요.
여자의 후손은 반드시 뱀의 후손과 대립관계를 세우면서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는 거에요. 성도라는 것은 반드시 그 주변에 보통 같은 경우에는 악마가 신경 안 쓰는데 성도가 생겨버리면 악마가 계속해서 거기서 자꾸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키듯이 계속 시비 걸고 들어오는 겁니다.
왜? 요주의 인물이니까. 특이하잖아요. 악마의 권세 바깥에 존재하잖아요. 그러니까 악마는 끊임없이 성도를 향하여, 보통 사람은 그냥 놔둬버리고 성도를 향하여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착해야 구원받는다.’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착하게 되면 누가 착해? 주인공이 누굽니까? 내가 착하지요. 그럼 착하면 어떻게 돼요? 하나의 슬기와 지혜로써 누적이 되겠지요. 아까워서 못 버리죠.
교회에 목돈 내놓으면 그 교회가 복음을 안 전해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목돈 낸 것 있고 안면 사람 바친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목사가 문제가 아니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 있으면 그 친구 따라서 교회를 못 빠져나와요. 특히 일가친척 한꺼번에 있으면 못 빠져나오지요. 안면 바쳐서.
안면 바친다는 것은 무슨 뜻이에요? 그런 사람 없으면 내 가치가 형성되지 않지요. 그걸 설명하게 되면 시간 너무 많이 가요. 이게 뭐냐 하면은 너와 나의 관계에요. 누가 너와 나의 관계를 뿌리칠 수 있는 사람 누가 있겠어요.
나라는 것은 너가 있음에 있고, 너라고 하는 것은 내가 있음에 있다. ‘나’가 있는 곳에 반드시 너가 있고 네가 있으면 내가 있어서 나는 네가 나한테 요구하는 것대로 너의 욕망대로 내가 있어 줄게. 그 대신 너는 나에게 내가 내가 욕망에 필요한 것들을 나한테 채워다오. 이게 바로 뭡니까? 이게 바로 인간관계 아닙니까. 이게 인간관계잖아요.
인간관계는 혼자 못 살아요. 너와 나와 많이 엮이면 ‘아 그 사람 사교성 좋다 친구 많다’ 이런 소리 듣잖아요. 외톨이는 살 수 없습니다. 외톨이라도 그거는 나를 위해주는 위로해줄 친구를 찾기 마련이에요. 여러분들 모든 사람들이 결혼을 하잖아요. 결혼하니까 결혼이 당연히 해야 되는 줄 알고있어요.
그러나 제가 아는 기억에 의하면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가 이런 이야기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이 나요. “혼자 살아라. 결혼하는 것이 죄지은 것까지는 아니라도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그러니까 억지로는 하지 말고 혼자 살아라.”
“어차피 아내 있는 자는 없게 되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너와 나의 관계 안에서 나 스스로 자기를 미워할 수 있기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안면 바쳤기 때문에요. 사람은 이렇게 아는 사람 있으면 혼자 못 살아요.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고 배려해야 될 상황들이 너무 많이 생기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자, 누가복음 10장 계속 봅시다. 22절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두 단계로 내려오지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아들과 성도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아들과 성도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이걸 그대로 Ctrl V. 복사를 복제를 해버리면 그게 아들과 성도 사이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야 계시가 딴 게 침범을 안 하지요.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 사이에 있는 일은 그걸 그대로 복사를 해버리면 이삭과 야곱 사이가 되고 그걸 그대로 복사를 해버리면 야곱과 12아들의 관계가 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언약이라고 합니다. ‘언약’. 언약이 계속 복제, 복사를 계속 해나가는 겁니다. 언약으로. 그래서 언약으로 구원받아요.
마지막 언약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 살과 내 피가 언약이죠. 그걸 그대로 Ctrl V. 복제해가지고 우리한테 예수님 제자들에게 먹이듯이 성령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공로를 성과를 우리에게 그대로 먹여버립니다. 먹이고 그 먹인 것을 그걸 그대로 가져와버리면 우리가 딸려서 덩달아 양자로 구원되는 거에요.
우리가 율법의 종인데 아들 되는 이유가 예수님이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를 그대로 우리에게 복제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이 고난의 길이었잖아요. 마찬가지로 성도에게도 바로 의미 있는 고난과 환란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 환란의 내용은 뭐냐? 이거는 주일 낮 설교에 할 거에요. 그때까지 기다려야 되냐? 기다릴 필요 없지요. 지금 이야기하면 되니까. 우리의 싸움은 영적 악마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환란과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주님의 구원과 십자가 복음을 주님의 은혜를 내가 가로막고 있어요. 내가. 너무나 육적인 내가. 옛사람이, 나의 옛사람이. 주님이 거저 줬다는데 우리는 자꾸 어떤 행함을 통해서 내가 정당한 성과로서 내가 했다는 이야기를 자꾸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사라처럼 그냥 약속의 아들을 낳았는데 어떤 결과를 낳았는데 우리는 자꾸 하갈처럼 내가 타고난 내 능력으로 자식을 얻었다 자꾸 그러고 싶은 거에요. 우리 마음이. 그래서 그것이 우리 주어진 가운데서 감사함을 쉽게 놓쳐버리는 거에요.
그러면 그 환란을 제공하는 쪽이 어디냐. 그거는 미리 이야기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나의 추억이에요. 나의 추억.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이선희가 불렀던 노래보다도 박정현이 불렀던 노래가 더 괜찮아요. 추억을 책장을 넘기며. 맨날 추억에 확정된 슬기와 지혜로서 내일을 대처해 나갈려고 합니다.
어제까지 모아놨던 모든 지식으로 나의 난관을 헤쳐 나갈려고 해요. 난관. 난관 없어요. 죽는 마당에 무슨 난관이 있어요. 악마보고 죽이라고 하고 있는데 무슨 난관이 있어요. 그러나 난관이 있다는 자체, 환란이 있다는 차제 이게 의미의 고난이거든요.
주님이 당한 환란과 고난은 주님께서 당했던 것을 우리에게 주는데 우리는 그거 말고 ‘내가 끝내 이기리라’는 환란 고난을 내 힘으로 끄집어내고 싶어요. 그럼 나의 추억은 어디서 오는가? 나의 추억은 지옥에서 뽑아낸 겁니다. 나의 모든 추억은 지옥에서 뽑아낸 거에요. 지옥에서. 지옥이 돼야 될 요소를 우리는 좋다고 거기서 뽑아낸 거에요. 그게 너무 좋아보여서 우리는 그걸 계속 담고 있는 겁니다.
혹부리 할아버지가 이렇게 혹이 있는데 그 안에 뭐가 들어있다 했습니까? 욕심이 담겨있지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결혼도 뭐였다? 결혼도 욕심이었다는 거에요. 아 이 사실을 이제야 말한다. 결혼하고 난 뒤에 말해야지 결혼 안하고 말하면 섭섭하지. 결혼도 욕심이었어요. 성경에 의하면. 심지어 이혼도 욕심이었습니다.
아들 낳겠다는 것도 욕심이고 딸 낳겠다는 것도 욕심이고 온 천지가 욕심뿐인데서 괜찮은 욕심을 끄집어내서 추억의 책장에 일기장에 써놓는 거에요. 그것 가지고 남한테 안 질려고 하는데 이거는 남자의 후손입니다. 뱀의 후손이에요. 이거는 없는 데서 없는 곳을 겨냥하고 알려주는 주님의 뜻은 아니에요.
바로 환란이나 이런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감사를 삭제하기 위해서 마귀가 우리를 충돌질 해서 너 과거에 잘 나갔잖아 왜 이래 여기서 물러설 거야? 챈스가 왔는데. 찬스도 아니에요 챈스가 왔는데 물러설 거야? 한 몫 잡아야지. 물 들어올 때 뭐 저어라?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
물 들어와서 노는 저었지요. 감사는 어디서 찾는데? 지옥불의 감사는 어디서 찾는데요? “좀 있다가 나중에 가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고.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그렇게 일이 일어났을 때 그거 할 때 중첩해서 지옥불로 같이 생각해주시면 돼요. ‘그런 거 하지 말라’가 아니라 노 저어야죠 뭐. 그러면 손가락만 빨고 있을까요, 저어야죠.
..하되 지옥과 관련해서 주께 더 다른 차원의 감사가 늘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우리 일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받기만 했는데 그런 주의 일을 방해하는 자가 우리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놀라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것 조차도 감사로 이어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