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무지에서 오는 자유

아빠와 함께 2022. 6. 6. 08:57

강남-누가복음 11장 29절 (무지에서 오는 자유) 220524a-이근호 목사



자, 누가복음 11장 29절부터 보겠습니다.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And when the people were gathered thick together, he began to say, This is an evil generation: they seek a sign; and there shall no sign be given it, but the sign of Jonas the prophet.
이게 누가 봐도 표적이라는 다른 말로 하면 이적 또는 쉽게 말하면 기적. 요나에게 일어난 그 일들이 요나의 입장이나 그 당시 다른 사람 입장이나 이게 표적으로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길에서 걸어가면 다른 사람이 저기 표적 간다 이렇게 합니까? 그냥 평범한 거죠. 그래서 이 표적이라는 말은 무엇과 싸워야 될 개념이냐 하면은요 보편성, 보편성과 싸워야 될 개념이에요. 표적이라고 하는 것은 특수한 사건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걸 표적을 특수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을 인간들은 잘 용납을 안할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특수한 사건이 되어버리면 자기는 거기에서 소외가 되고 배제가 돼야 되기 때문에. 자신이 배제 당하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래서 보편성이라고 하는데 이 보편성이라는 말도 되고요, 같은 말 비슷한 말이지만 ‘일반성’. 그냥 평범함. 일반성의 지속. 그렇고 그런 삶, 생활. 그러한 변화들이 줄곧 이어져간다. 때로는 지루하게 때로는 깜짝 놀라는 일이 있지만 지나가면 다 잊혀진 일. 세상은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사람들이 이런 생각하는 것이 굉장히 편하게 보는 겁니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되는 것을 어려운 말로 하면은 범주화라고 하는데 범주라고 하는데 범주라는 것은 이게 테두리 치는 거에요. 테두리 쳐서 여기서 안에 들어있는 것을 동일하게 평평하게 만드는 거에요. 평평하게. 이걸 평평하게 만드는 것을 동질화. 같은 질의 그렇고 그렇다. 특별한 인간은 없다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걸 뭘로 보느냐 하면은 누가 봐도 요나가 살았다. 그래서? 요나가 뭐 이렇게 복음 전하다가 와가지고 죽을 뻔해가지고 바다에서 고래 배에 살았다. 그래서? 니느웨 가서 회개하라고 복음 전했다. 그래서? 그럼 뭐? 그거는 요나 개인적인 일이죠. 요나에게 일어난 일이잖아요. 주님께서는 이걸 이 요나의 일을 표적 삼아버립니다. ‘표적’. 표적 삼아버리면 여기 사발이 있다고 봅시다. 사발. 그릇이 있는데 어떤 액체가 담겼는데 지금 막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봅시다. 사발에 끓고 있는 이 뜨거운 물을 사발을 기울여서 그냥 부어버려요. 이게 이제 예레미야에 보면 비슷한 예가 나옵니다. 뜨거운 것을 부어버리면 졸지에 여기에 있는 사람들 뜨거운 기운에 화들짝 놀래겠지요. 이게 표적이에요. 표적은 일반화, 보편화되어있는 자기끼리 동질화되어있는 이 세상을 표적으로 뒤덮어버립니다. 심술쟁이. 심술쟁이죠. 요나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가지고 니느웨 성을 이렇게 뒤엎어 버려요. 뒤엎어버리니까 이상하게 니느웨 사람들이 지금껏 하나님 없이 이렇게 자기가 평안하다, 일반화되어있는 거죠. 그냥 일상생활 하다가 갑자기 그들이 이상한 현상을 보여줍니다. 가축, 자기 자식은 물론이고 온 나라가 동일한 믿음 체제, 믿음 망이 형성되면서 동일한 믿음 망으로 전부 다 금식을 하고 회개를 하는 거에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이 특수성을 그들이 이해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럴 때 이 특수성을 가져다주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지고 표적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안일하고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그렇게 흘러가고 흘러간다고 여기는 이 세상에 하나의 폭탄처럼 활용되도록 작용하는 것 그게 바로 표적이 되는 겁니다.


구약 때의 요나가 표적이 됐다면 오늘날 표적은 누구냐? 오늘날 성도가 하나의 주님의 표적이 되는 겁니다. 표적은 일반성, 평범성, 안일함을 겨냥해서 표적이 등장한다는 것은 표적이 이렇게 상대하면서 들이닥칠 때 이게 바로 심판입니다. ‘심판’. 심판할려면 기준이 있어야 되겠지요. 기준 없이 “너 나빠” 이러면 안되지요. 어디 어디에 준해서 너는 저주 받아야 돼 이래야 심판 되잖아요. 예수님 자신이 표적이 되고 그 예수님의 자신의 표적의 표적됨을 이해 못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특별남에 대해서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 심판하는 거에요. 예수님의 그 의미와 예수님의 그 가치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그게 뭔데? 마치 요나 시대 때 요나한테 아무도 관심 없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니느웨 사람들이야 호들갑을 떨었습니다만 다른 사람들은 관심 없어요.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런 무반응을 일으키는 그런 사람들에게 심판이 행사되게 하는 것, 이게 표적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우리 성도의 존재가 심판이 될려면 성도가 이야기하는 것과 성도의 모든 행실과 그 생활 모습에 대해서 주변 사람들이 긴장을 할까요? 긴장을 하지 않아야 될까요? 어느 쪽입니까? 성도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긴장할까요? 심각함을 느낄까요? 느끼지 않을까요? 전혀 느끼지 않아야 되지요. 그래야 심판이 되니까. 그래야 심판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성도가 전도한답시고 기대하면 안돼요. 그러면 여기서 이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왜 그들은 표적을 표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뭐냐? 이제 그걸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표적을 표적으로 받지 아니하고 일상의 일로 받는 이유는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냥 무심코 받는 이유는 각자 기대하는 바가 따로 있기 때문에. 각자 기대하는 바가 따로 있어요. 기대한 바가 따로 있다는 말은 아직 세상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이야기에요. 세상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표적은 이들이 표적을 안 받은 이유가 각자 기대하는 바가 따로 있기 때문에. 기대라는 것 알지요? 꿈, 소망, 희망 이런 거에요. 장래에 대한 계획 이런 거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의 이야기 복음에 대해서 시답지 않게 여기는 거에요. 자기 할 일이 지금 창창하게 남아 있는데 그게 뭔데 신경 쓰겠어요. 그러니까 이걸 보게 되면 안 받아 준다면 예수님의 표적은 결국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표적은 시간은 이미 끝났다. 기대해도 소용없다. 세상은 이미 끝났다는 거에요. 그게 지금 그 끝난 증거가 어디 있느냐? 여기 29절에 나옵니다. 이 세대는 어떤 세대? ‘악한’ 걸로 이미 규정이 정해져있어요. 어느 정도 악하느냐가 문제지 악하다가 뭐 질적으로 개선됐다 이런 것은 기대하지 말라는 거에요. 이미 악한 걸로 확정이 된 상태에요. 그래서 이 마지막 때의 표적인데 어떤 표적이냐? 이 시대가 마지막이라는 표적. 마지막 때. 시간은 끝났다. 시간은 끝난 거에요. 그러면 시간이 끝나면 뭐냐? 그럼 시간이 끝나면 예수님은 이걸 뭘로 보느냐? window. 우리말로 번역하면 창 또는 창문. 표적 자체가 지금 이 순간 직접 하늘나라와 통하는 그것은 오직 표적밖에 없어요. 왜? 창이니까. 저 바깥풍경 창 말고 차 루프처럼 하늘로 지붕에 뚫린 창을 생각해 보세요. 그 창은 어제는 창이었는데 오늘은 창이 아니다 뭐 그런 거 있습니까? 그냥 지붕이 뚫려가지고 유리창으로 막아 놨으면 어제나 오늘이나 한 달 뒤나 공사 이후에 계속 그냥 그 자리에 있잖아요.


리가 표적이 된다는 말은 더는 우리가 남을 위한 나의 인생에 있어서의 어떤 계획하는 바가 기대하는 바가 이제는 쫑났다는 겁니다. 그런 거 갖고 있지 말라는 거에요. 기대하는 바. 지금까지 강의 다시해보겠습니다. 표적은 곧 심판입니다. 표적은 심판이에요. 심판인데 이게 왜 표적이 심판이어야 하느냐 하면은 그들이 ‘악한 세대’이기 때문에 심판되는 거에요. 악한 세대이기 때문에.


그래서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표적이 표적이기 위해서 이 세상은 꾸준히 악해왔는데 드디어 그 악행이 예수님의 십자가로서 확정이 나버렸어요. 죄가 무르익었는데 거품이 나요. 너무 무르익어서 포도주가 거품이 나는 거에요. 너무 무르익어서. 주님께서 이제는 시간을 더 끌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그냥 주님께서 필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고 window, 창이에요. 하나님과 통하는 창이 있다는 거에요. 창을 냈다는 말은 이 땅에서 창이 있다는 말은 이 세상 말고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window가 있다는 것은 다른 길은 없어요. 다른 길은 없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지막 때 표적이 되는 그런 형식 외에 다른 길은 없어요. 다른 길은 없으니까 사적인 희망이나 기대나 꿈같은 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치 않아요. 사람이 기대가 있으면 실망할 것도 남아있어요. 그리고 아슬아슬해요. 어떤 전기기사 시험 친다 하게 되면 그 시험 칠 때 전기기능사 치고 난 뒤에 그 시험 준비할 때 얼마나 기대감이 높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20대 여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결혼이 한 두 달 남아있다면 두 달 동안에 얼마나 초조하고 희망에 부풀어있겠어요. 그 희망이 어느 정도로 대단한 희망이냐 하면은 두 달 동안 만큼은 제발 예수님 재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수님 재림 늦춰줬으면. 전혀 주님이 나를 주님의 표적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자기의 기대감이 엉뚱한데 있기 때문에 그 딴 것은 신경도 안 쓰지요. 관심도 없고 그래요. 관심 없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방금 한 것을 문장으로 적어보겠어요. 아직 자신에 대한 기대가 먼 훗날에 남아있는 한 말씀은 들어올 수 없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아직 자신에 대한 기대가 먼 훗날에 남아있을 경우에는 복음이고 말씀이고 귀에 안 들어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이러한 잘못을 31절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1절 “심판 때에”.


자, 보세요, “심판 때에”. 굉장히 특이하죠. “심판 때에 남방 여인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주님께서 표적 이야기할 때는 무엇을 염두에 둡니까? 이 세상은 어떤 세대다? 악한 세대다. 악한 세대에게 돌아갈 적절한 조치는 심판밖에 없지요. 이미 “심판 때에 남방 여인이 이 세대를 정죄하리니.” 남방 여인이 누구냐? 남방 여인은 이 시대에 성도 같은 존재지요. 심판을 눈치 챈. 주님의 십자가가 이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이라는 것을 눈치 챈 사람. 더는 먼 훗날에 내 기대가 되냐? 안 되냐는 전혀 이제는 이미 물 건너간 나의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이 “이 세상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 땅 끝에서 왔습니다. 땅 끝에서 온 사람 있지요.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10장 7절에 그 여왕이 어느 나라 여왕입니까? 스바 여왕이죠. 스바 여왕이 그 땅 끝에서 왔는데 그 사람이 온 목적이 뭡니까? 어디 뭐 온천 즐기러 왔어요? 놀러 왔어요? 연애하러 왔어요? 이 여왕이 솔로몬에게 왜 온 겁니까? “소문 듣고 왔지롱” 해서 온 거에요? 무슨 소문 말입니까? 솔로몬의 모든 지혜, 그 모든 지혜가 여기 10장 7절에 보면 “내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이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내가 들은 소문 보다 더 월등하다” 이런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말은 이 남방 여인, 스바 여인이 찾아온 이유는 절대 진리, 최종 진리, 마감은 내 인생을 여기서 종쳐도 상관없는 내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 내 목숨 같은 것 그런 것은 내 목숨도 시답지 않게 신경 안 써도 될 만큼 놀라운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최종적 절대 진리 그걸 얻을려고 그걸 지혜라고 하는데 그 지혜 얻을려고 온 거에요. 그 지혜가 자기의 나라에서는 뭐냐? 여호와 신이 줬다는 지혜인데 하나님이 직접 줬다는 지혜가 과연 그럴까? 하고 그걸 확인 차 온 거에요. 확인하고 난 뒤에 이거는 내가 상상한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거에요. 그럼 이 스바 여왕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가 잘되리라 먼 훗날에 남아 있는 마음 이런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 없지요. 절대 진리가 어디 있습니까? 솔로몬한테 있으면 자기는 그걸로 족한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누가복음 11장을 보면서 왜 그동안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해도 시큰둥하고 멀뚱멀뚱 눈만 바라보는 이유를 여러분 아시겠지요. 세상은 그냥 평범한 거야. 뭐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 많이 묵었다 고만해라. 많이 들었어. 전부 다 평범하고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고 보편적인 이야기에요.그런 이야기 고만 해라 나도 지겹다. 왜? 나는 내가 계획한 내가 기대한 것이 따로 있단 말이죠. 너한테 그딴 소리들을 시간도 아까워. 시간도 아까워서 더는 들을 수가 없어. 내 나름대로의 인생설계가 되어 있는데 왜 네 말 굳이 들어야 돼. 네 말을 굳이 들어야 될 이유 다섯 가지만 대라. 여러분 어떻게 답변하겠어요? 그럴 때 우리는 내가 지금 너한테 한 수 가르칠려고 하는 걸로 네가 그렇게 보이냐? 나는 지금 심판하러 왔다. 정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왜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복음 뿐만 아니고 말씀 자체에도 대해서 관심이 없느냐? 오늘 제일 핵심 되는 부분 나오겠습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


무지하지 않을려고 하기 때문에 복음을 안 듣습니다. 인간이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요. 그것은 자기가 아는 만큼 자기가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더 나은 인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는 만큼 나은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아를 무겁게 만들어요. 아는 만큼. 무지가 주는 즐거움을 인간은 아 이거 정말 무지라는 즐거움을 알면 여러분 인생 모든 것을 다 아는 거에요. 아니까 내가 뭔가 알고자 하고 알아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자꾸 긴장이 되는 거에요. 긴장이 되고 잘 해야 되고 잘 살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바리새인처럼. 철저하고 실수 줄여야 되고 이렇게. 그러나 인간은 모르는 그것이 자유입니다. 갈수록 나는 아는 게 없음을 아는 게 그보다 더 큰 자유가 없어요. 몰라서 구원받는 거에요.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이게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바로 이게 나의 모든 지혜를 박탈시키는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나를 십자가에서 무지한 자로 만들고 그 무지한 자만이 누리는 희열과 감격과 기쁨의 눈물과 그리고 그 가벼움. 와 잘 잤다! 이거 있잖아요.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는 거에요. 그동안 평생 거의 80이상을 사시면서 ‘알아야 돼. 아는 것이 나를 구원해’ 라고 하는 그러한 기대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와 희망 이것이 한방에 다 날라가버려요. 한방에.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여기 33절에서 36절까지 나옵니다.


33절에서 36절 이 내용, “등불을 켜서 등경 아래에 두지 않고 등경위에 둔다” 빛에 관한 이야기고요. 빛은 우리의 눈을 통해서 들어오고 그렇게 해서 빛이 없으면 어떻게 되드냐? 빛이 없으면 우리는 35절에 어둠에 있다. “어둠에 있다.” 그러니까 이걸 여러분의 눈동자가 이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여명의 눈동자. 여명 또는 미명. 새벽에 어두움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 순간. 그 순간. 그 순간이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빛을 본 순간을 주께서는 캐치해서 찰깍 찍어서 우리를 표적으로 삼으시는 겁니다. 빛을 본 사람. 우리가 안다는 것은 어두움에서 주워 모은 것들이에요.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모르면 안 된다고 여겨서 모르면 남한테 뒤처지고 남한테 무시당하고 인생 출세 못한다. 우리는 그런 것을 이 세상의 일반화된 이 세상에서 우리는 꾸준히 그런 영향력을 우리는 받아왔어요. 아는 것이 이기는 비결이라고.


우리는 무지가 오히려 그 지붕을 뚫어버리고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십자가 앞에서 무지함이 그게 window가 되는 것, 우리 자체가 창문이 되는 거에요.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여명의 눈동자, 하나의 빛이 들어오는 등불 같은 존재. 이것은 이 세상이 안다는 그 자체가 복음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는 바로 무지 그 자체인 것을 우리가 발견하는 거에요. 빛을 받았으면 우리는 이제는 충분히 모르는 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모르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 아는 게 없기 때문에 대책하지 않는 자유. 뭘 알아야 대책하지. 내일도 모르는데 오늘 저녁일도 모르는데 무슨 대비를 해요. 모르기 때문에 대비하지 않아도 되는 그 가벼움. 존재의 가벼움. 그것이 바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거에요. 왜? 아는 게 없으니까. 아는 게 없으니까 모든 것을 해보는 거에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알게 되면 이거 하게 되면 나중에 나한테 얼마나 내게 이익이 되고 손해가 될까? 아아 안돼. 이거 말고 다른 것 해야 돼. 이걸 하게 되면 이러한 수익이 나오고. 안돼! 사고 나면 안돼. 그럼 다른 것 해보자. 아는 게 화근이에요. 아는 게 화를 자초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은 스바 여왕이 솔로몬 앞에 있는 새롭게 생겨버린 자신의 겸손한 마음 자세죠. 그리고 기쁨이죠. 솔로몬 당신의 아는 것에 비해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군요. 아니면 더 갈수록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런 기쁨을 솔로몬 당신이 나한테 허락했다. 그것이 바로 열왕기상 10장 7절에 나오는 그 고백이죠. 내가 알았다고 내 나름대로 나도 이 정도 아는데 해보니까 완전히 우사 당했죠. 내가 안다는 기준으로 감히 범접이 불가한 범접할 수 없는 지경에 솔로몬의 지혜가 주어졌을 때 깨갱하는 그 즐거움이 있어요. 솔로몬 앞에서.

 

그 솔로몬의 그 지혜는 하나도 버릴게 없어요. 왜냐? 그게 함축해서 인격화되시는 분이 등장했는데 그분이 신약성경에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죠. ‘예수님’. 욥기를 끝냈습니다만 욥기 끝부분에 나오는 “악어에 대해서 아느냐? 네가 염소에 대해서 아느냐? 염소의 인생 아느냐?”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대구강의에서도 했지만 악어나 염소 모든 그 속에 누가 들어있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요소가 ‘지혜’라는 이름으로 들어 있는 거에요. 모든 것 속에. 시편 104편 한번 봅시다. 24절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보세요. 모든 피조물 안에 여기 주가 신약에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죠. 예수님의 십자가 요소가 다 들어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 뒤에 쭉 보면 바다의 생물 악어부터 해서 쭉 나오면서 28절에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취하시면 어떻게 됩니까? 흙으로 돌아가잖아요. 돌아가면 되잖아요. 자기 아는 것 가지고 방어기재가 가동되면 안 되지요. 내 딸 결혼식이 두 달 남았는데 지금 주께서 재림하시면 안 되지요 이런 식으로 말리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30절에 보면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새롭게 하시겠지요. 세팅 다시 하시겠지요. 하시라고 하세요 우리는 죽으면 그만이니까. 우리가 뭔가 주의 일에 콩 놔라 팥 놔라 내가 거기에 대해서 이의 걸 권리가 있습니까? 자격이 있습니까? 없지요. 개코도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뭐 아는척 해가지고 우리 인생 꼬라지하고는 알아서 기껏 한 게 뭔데? 예? 남는 것은 자살충동 외에 뭐 있어요? “주여 왜 내 뜻대로 안됩니까?” “너 뭐 알아? 너 알고 하는 이야기야? 왜 세상이 네 뜻대로 되야 할 이유가 뭔데?” 자살해가지고 119에 전화하게 만들고. 호들갑을 떨고. 그런 이야기 있어요. 경찰 찾아오게 만들고. 자기가 로스쿨 원서 냈는데 다 떨어졌다는 거에요. 떨어진 이유는 몰라서 떨어졌지요. 무식해서 떨어졌겠지요. 그런데 아직도 그 떨어진 걸로 대해서 자기의 무식의 정도를 몰라요. 딴 데 더 떨어져봐야 돼요. 주식해가지고 주식 몽땅 날라가야 돼요. 주식도 내가 아는 게 없구나. 이 정도 경험해야 돼요. 이 정도 경험은. 그래가지고 또 부동산 이렇게 개입해가지고 또 인수인계하다가 또 잘못 사가지고 날려먹고. 그래도 아직도 모르는 거 아직 멀었어요.


도대체 나의 모름의 끝은? 나의 무지의 끝은 뭐냐? 그 끝까지 가봐야지요. 저는 얼추 아는 거 있고 모르는 것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까 아는 게 생판 모르는 것밖에 없네요. 왜? 모든 변화는 주님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에. 모든 변화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그럼 너는 상대방 안 속였어요? 상대방에게 속았다는 거에요. 그러면 너는 사랑했나? 사랑한적 없어요. 인간이 안다는 것이 모든 것을 인간이 안다는 것이 스스로 자기를 더욱 더 망하게, 더욱 더.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자기를 망하게 매우 밀어붙이게 돼요. 아는 것이. 깜깜해 모든 것은 다 어두워. 어두운 데서 다 끄집어 당겼어요. 그 무지의 절정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무지의 절정이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본인이 표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가 실제인줄 알고 있어요.


시편 74편에 8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그들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리가 그들을 진멸하자 하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9절 “우리의 표적은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더 이상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They said in their hearts, Let us destroy them together: they have burned up all the synagogues of God in the land. We see not our signs: there is no more any prophet: neither is there among us any that knoweth how long. 선지자 자체가 표적이었다는 거에요. 표적인데 사람들은 선지자라는 말에 관심 갖지 않았어요. 왜? 자기가 나름대로의 자기를 실제로 보고 자기가 잘 될 수 있는 기대에 그들이 눈이 멀은 거에요. 그들이 기대하는 것이 여명이 아닙니다. 빛의 세계가 아니에요. 빛의 세계는 표적이 될 때만 보이는 것이고 알 수 있는 것이지 보편적인 일반적인 삶에서는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어두움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빛이에요. 그런데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인간은 뭐냐? 악한 세대요 심판의 대상이고 정죄 받을 일만 남아 있어요. 개코도 모르는 게 아는 척해서 다 정죄 받는 겁니다. 아니까 가만 있을 수가 없어서 아는 걸 주워 모아서 장차 내가 이렇게 성공할거야 하고 기대를 갖게 되는 거에요. 기대를. 그래서 표적은요 무엇과 관계되는가? 표적과 현실의 관계는 빛과 어둠의 관계입니다. 빛과 어둠의 관계.


자, 이제부터는 상당히 어렵지만 우리 자신이 방향을 이제는 뭘 아느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에 대해서 무지하냐 내가 무지함을 아는 기쁨을 여러분들이 한번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무지함을.

요나부터 시작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했다. 그리고 배를 타고 하나님이 계신 곳 말고 먼 곳으로 도망쳤다 이렇게 되지요. 이게 같은 배를 탔던 사람은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가는 것을 이것을 절대로 그들은 이걸 표적, 이적이라고 기적이라고 보지를 않았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사적으로 손해 보는 요나 개인적으로 이거는 손해 보는 일이기 때문에 나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런데 아까 표적은 뭐냐? 이 세상을 향하여 심판하는 거죠. 그러면 표적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 세상 문명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에요. 이 세상이 어떻게 있느냐? 이 세상은 악한 세대고 음란하고 악한 세대고 정죄를 당할 그런 것들만 끌어 모으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이 표적이 등장하는 겁니다. 요나 개인적인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배타고 가는 사람들은 회개했습니까? 요나하고 배타고 가는 사람. 회개 안했지요. 회개 누가 했습니까? 엉뚱한 곳에 살고 있는 그것도 집단적으로 그들은 회개했지요. 사람들은 말합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구원받았습니까? 그게 궁금하지요. 주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이 자기가 했던 그 짓을 전부 다 회개하고 그만두고 금식하면서 우리가 금식했다는 이 자체를 주님께서는 뭘로 사용하느냐 하면은 그 전체를 뭘로 보느냐 이걸 표적으로 본거에요. 표적으로. 자, 표적이라는 것은 시간의 흐름이 더 이상 필요치 않지요. 표적이란. 그 자체가 얼음 땡이니까. 스탑이니까. 그 자체가 표적은 그 자체가 스탑이 돼요. 양초 있지요? 파라핀. 파라핀이 몇 살입니까? 질문돼요? 안돼요? 이 컵이 몇 살입니까? 질문 안되지요. 언제 만들었습니까는 질문이 되지만 이 컵 자체가 몇 살입니까는 질문이 안되지요. 왜 질문이 안됩니까? 사물 자체에는 이미 확정되고 고정된 것은 시간이 거기에 합류되어 있기 때문에 흐르지 않아요. 오래 된 컵 이거는 말이 되는데 컵은 물을 담는 기능이지 컵아 네가 몇 살 되었냐 이거는 질문 리스트에 들어 갈수가 없지요. 권사님 몇 살입니까? 이런 질문은 성립이 안 된다고요. 권사님은 무엇을 누구를 인하여 그렇게 되었습니까? 주님에 의하여. 그게 권사님의 기능이에요. 우리 인생 사는 거 편하지요. 어머님 오년만 기다려주시고 밀어주시면 오년 뒤에 성공하겠습니다. 오년이든지 십년이든지 자꾸 자기 기대의 시간 요소를 집어넣지 마세요. 우리교회 지금 숫자가 얼마 안 되지만 3년 내에 부흥할거야. 인생에 시간을 집어넣으면 자기가 아는 걸 영끌, 영혼까지 끌어 모아서 그거 성공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것도 아니고 지옥 같은 삶을 사는 거에요. 자기 아는 것, 실수 줄이고 보다 아는 지식의 접근하게 되면 진리가 나를 성공케 할 것이다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에요. 진리가 우리를 성공하게 하는 게 아니고 성도 자체가 이미 진리에요. 새삼스럽게 추가될 진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가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전성기는 지금 일할 수 있는 순간이 전성기다.” 일하고 있는 자체가 전성기지 일에서 어떤 실적과 업적을 남기는 게 전성기가 아니라는 거에요. 주의 일을 하게 되면 그 자체가 표적이 되면 그게 저와 여러분들의 전성기입니다.

표적이 안 되는 우리를 표적 만들 때 우리를 어리석은 자로 만들죠. 무지한 자로 만드는 거에요.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요. 1장 19절에서 20절까지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뭐합니까? “멸하고.” 이런 좋은 체험을 해보셔야 될게 아닙니까.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이게 얼마나 우리를 가볍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자유의 영이십니까. 이런 경우 없어요? 지혜가 애초부터 없었어요? 총기가 애초부터 없었습니까? 20절에 봅시다.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세상에서 지혜 있는 자를 세상에서는 박사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그것은 어리석고, 어리석기만 한 게 아니고 그게 자기의 화가 되고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18절에 나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멸망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가 여전히 자기 지혜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기대를 갖고 있다면 그게 전형적인 멸망하는 자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표적에 대해서 누가복음 11장으로 오겠습니다. 요나를 표적으로 만들고 니느웨 사람을 표적으로 만들고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한 것을 표적으로 만든다면 그 표적들이 최종 표적에서 나온 표적들이겠죠. ‘최종 표적’. 그럼 최종 표적은 아까 우리가 봤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최종 표적이 뭐죠? 십자가죠. ‘십자가’. 이 최종 표적에 대해서 설명해드리면 십자가 설명해드리면 제일 쉬운 게 뭐냐 하면 바로 구약의 언약궤하고 같다고 보시면 됩니다. 언약궤. 사무엘상 6장 19절, 사무엘하 6장 7절에 보면 여기서 어떤 사람이 죽는 사건, 사람이 죽는 사건이 나타나요. 여기는 웃사가 죽고 여기는 많은 사람이 죽지요. 70명이 죽지요. 사람이 죽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왜 죽었습니까? 뭐를 건드렸습니까? 언약궤 붙잡을 때 그들은 죽었어요. 여기서 다윗이 아주 탄식을 해요. 가슴 아파해요. 다윗이 웃사를 좋아했는지 아주 가슴 아파합니다. 건들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린 거에요. 따라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 쪽에서 십자가를 관찰하고 연구하게 되면 죽는다. 인간 쪽에서 십자가를 분석하면 그거는 죽는 거에요. 어떤 사람이 성도인데 성도 아닌 사람이 성도 된 이유를 분석하고 탐구하고 연구하게 되면 그 불신자 지옥 가는 식으로 죽는다가 돼요.


어떤 사람이 묻는데 “넌 뭘 알아서 성도됐느냐?” 물으면 “나는 나의 무지함으로.” 내가 자랑하는 것은 나의 무지함 밖에 없다. 내가 지혜롭고 총기 있다는 것은 그 십자가 앞에서 다 박살나버렸다. 처음부터 모르는 게 왜 아는 척했느냐? 처음부터 우리의 바탕과 근원이 무지함을 그동안 몰랐던 거에요. 십자가를 모르니까 내가 무지함을 모르고 내 무지함을 모르니까 자꾸 애를 쓰는 거에요. 무지한 인간은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주는 대로 거지가 돼서 개코도 아는 것도 없는데 그냥 주시는 거에요. 주시는 대로 하면 되지요. 그냥 살면 되지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할 줄 아는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법률서적 한 20권 읽어볼래? 뭐 읽어보겠습니다. 읽어보니 나중에 판사 됐어요. 당신 어떻게 판사 되었습니까? 무지해서 판사 되었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판사된 거죠. 너는 어떻게 의사 됐는가? 공부하는 게 제일 쉬워요. 수능 보니까 다 아는 것만 나왔는데. 일부러 틀릴 수도 없고 했는데 결국은 의사됐습니다. 그럼 너는 뭘 알아? 어떻게 나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문제 풀 뿐이지. 모르는 무지가 우리를 살립니다.


강남-누가복음 11장 29절 (무지에서 오는 자유) 220524b-이근호 목사



사람이 무지해야 조심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아는 게 많으면 자꾸 조심스럽게 살려고 하는 거에요. 조심스럽게 살아버리면 자기가 구심점이 되어버려요. 조심스럽게 산 그 성과로서 괜찮아진 나를 못 놓습니다. 자기가 우상화되지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표적이 안돼요. 왜냐하면 앞으로 더 잘 될 기회가 남아있다. 더 시간이 남아있다. 시간이 남아있어버리면 양초가 안 됩니다. 그 자체가 시간 요소가 계속 있어버리면 표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남한테 과시할려고 살아가는 거죠. 그러면 자신의 그 인생이라는 것 자기의 모든 것은 자기 이야기만 달랑 남게 됩니다. 성도는 어떤 인생을 겪어왔든 그 자체가 표적이고 주님의 이적 외에 다른 추억은 필요치 않습니다. 성도한테는 다른 추억이 필요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8절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걸로 충분하잖아요. 실제로 그게 또 사실 맞고요.


그래서 사람이 알게 되면 뭔가 내가 안다는 것, 내가 알게 되면 이 아는 것은 어떤 목표를 아는 것만큼 이득으로 챙기기 위해서 어떤 목표를 갖게 되는데 여기 세상과 얽히게 되어있습니다. 필연적으로. 세상에 연락을 주게 되면 세상이 또 내 쪽으로 연락을 줘요. 삐삐 전화 오듯이 이렇게 연락이 오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그동안 내가 노리고 들어갔던 세상 이것이 너무 아까워해요. 이게. 잘만하면 저것 내 것 될 수 있는데 기대를 한다고요. 여기서 울고불고 고민하고 걱정하는 거에요. 이러한 문제 해결 알려드려요? 내 쪽에서 철수하면 돼요. 내 쪽에서 철수하면 된다고요. 괜히 그 꽂아놓은 것 빼면 된다고요. 내 쪽에서. 표적인데 뭐. 빼면서 뭘 빼느냐 하면은 아 내가 무지했구나. 자신의 무지함을 계속 즐기고 고마워하기 위해서는 거기서 발을 빼면 그만인 거에요. 원래 무지한 게 원래 무지하게 되는 게 별로 그게 손해 아니잖아요. 인간에게 자기가 어느 정도 깊이 있게 무지함을 지금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이 무지함을 아는 방법이 뭐냐 하면은 바로 등불이에요. 여기 빛이 들어가는 겁니다. 빛이 들어가면서 이 세상은 나부터 너 모든 이 세상에는 어떤 것도 일말의 빛이 없었다는 사실이 드디어 폭로됩니다. 빛이 없었다. 빛이 없었는데 빛이 들어왔으니까 자기는 뭐가 돼요? 더욱 더 짙은 칠흑 같은 뭐가 되느냐? 어두움이 되겠지요. 이게 얼마나 즐거운가요? 이게 얼마나 즐겁습니까. 빛 된 생활한다고 얼마나 쓸데없는 많이 짓들을 했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어두움이 드러나는 이 즐거움 있잖아요. 아 주여 제가 이정도로 어두운 뒷골목을 어두웠군요. 주께서 멀었다 인간아! 아이고 네가 몇 년 살았다고. 그것도 어두움이냐. 기다려봐 내가 더 짙은 어두움을 빛으로 인도할게. 그 빛으로 인도하게 되면 내가 생각했던 나의 미래의 꿈꾸던 것은 전부 다 짙은 어두움의 복도지요. 그렇게 하면서 우리가 아는 게 있어요.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표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표적,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표적. 이 표적이라는 말보다 다른 적당한 말은 흔적. 자국 또는 때. 뭔가 때 묻어있는 것.


이것이 바로 어디서 나왔는가? 이것이 바로 어두움의 다양한 현상들 또는 현상들의 조합. 이것이 바로 나였다. 이 세상의 일어난 모든 현상들에서 우리가 탐을 안 낸 적이 있던가요? 다 탐을 내지요. 만약에 여러분의 손자가 여러분의 자녀가 “아빠 나 공부에 취미 없는 거 같아. 나는 축구 잘하는 것 같애.” 그러면 아버지가 “너 축구해서 뭐할래?” “손흥민.” “해해해. 내가 밀어줄게 해해! 23골 더 넣어라. 최고득점자 돼. 밀어줄게.” 그게 뭡니까? 그게 손흥민이 어두움의 현상이라는 것을 생각을 못하고 있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너 뭐 될래” 라고 뽑아내는 모든 마치 그 어떤 어둠의 마트에서 물건 골라가지고 카트에 담는 모든 것이 어두운 것들만 가득 담고 거기서 희망을 찾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 외에는 다른 재주가 없다는 사실로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타고난 재주가 그거에요. 괜찮다 좋다 아름답다 귀하다 다 나와 다 끌어모아. 멋있다. 무조건 다 끌어모아. 어두움의 현상. 점점 어두움으로 집합되어 가는 거에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그걸 배우라고 봅니다. 배우. 영화배우 있지요 ‘영화배우’. 십자가 마을의 영화배우 있잖아요. 지금 찍어놓은 드라마가 2000개가 있다는데 지금 한참 바빠요. 배우를 마태복음 23장 13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이거 완전 코미디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여기 ‘외식한다’는 말있지요. 이게 배우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외식이라고 원뜻을 살려서 나쁜 의미로 사용했는데 원뜻은 뭐냐? 연기하는 거에요. 인간은 연기하는 것 외에 다른 진실은 할 줄 몰라요. 왜? 세상 모든 것을 끌어 모을 때 자기 내부에서 자기 본질과 다른 모습을 해줘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저 한평생 배운다는 것은 연기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 대표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대표자가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공격했던 백성을 대표해서 공격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들은 연기하는 것 밖에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서 연기하는 거에요.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고 연기를 하니까 주님께서 네가 구제할 때 너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거는 아무리 도저히 연기해도 연기가 될 수 없는 이야기를 해버려요. 그리고 네가 기도할 때는 달라고 기도하잖아. 주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그럼 달라고 기도하지. 줄라고 기도하는 게 어디 있어요. 기도 자체가 ‘다오다오’ 달라고 하잖아요. 주님께서는 그걸 또 시비를 건다고요. 그걸 시비 건다고요. 달라고 왜 기도하느냐? 그럼 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주께서 이미 무엇이 있어야 될 줄 이미 안다는 사실을 네가 알고 있어? 네가 구하기 전에 네가 필요한 것을 주께서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 알고 있다는 말도 못하고 모른다고 하면 진짜 하나님 모르는 게 되고 알고 있다고 해놓고 기도한다는 자체가 아는데 왜 기도를 해.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돈 오만원 줬는데 “아버지 아버지 오만원 주옵소서.” “여기 있다니까.” “주시옵소서 오만원.” 이 말은 뭐냐?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기도하는 내 폼 좀 봐달라는 그 이야기잖아요. 아 금요철야 기도가 그거잖아요. 기도하는 폼 좀 알아달라고 캡처해달라. 그냥 주지마시고 기도에 응답해줬다는 그런 식으로 거래합시다 이게 기도하는 사람의 심보 아닙니까. 기도 안 해도 주시는데 뭐. 그러니까 그들이 왜 그런 짓 하느냐 뭐 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우리는 기도해서 뭐 아는 게 없잖아요. 무지하면 되는데 자꾸 아는 걸 활용해가지고 없는 걸 얻고자 해서 그런 문제 생기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은 결국 연기하는 걸로 문제가 되는 게 아니고 천국 문 앞에서 그 짓하고 있는 거에요. 본인도 본인의 연기를 빼야 할 수 있는데 연기만 하면서 갈려고 하니까 천국은 안 열어주지요. 본인은 뭐냐 하면은 악하고 음란한 죄인이고 이미 심판의 대상이에요. 심판의 대상이 심판받아야지 왜 엉뚱한 천국은 왜 자꾸 염두에 둬요. 가야될 곳이 지옥인데. 가야될 곳은 지옥인데 천국 왜 생각합니까? 벌써 자기가 연기를 워낙 하다보니까 착각해가지고 자기가 천국 가는 냥 착각하는 거에요. 천국 넣어줄 거라고. 50년 다닌 게 아니고 50년 연기했지요. 그 뒤에 보면 마태복음 23장 그 뒤에 보면 “화 있을진저.” 화라고 하면 저주. 저주가 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연기하는 너희들아.” 그다음에 23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또 25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이 말이 중요한 것은요 이 세상에 인간들이 워낙 더럽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거룩한 영토, 빛 된 생활을 그들이 조작해내요. 그런 재주가 있어요. 선악과 따먹은 솜씨를 발휘할게 아닙니까. 그걸 서울강의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선과 악을 무엇에 비유했습니까. ‘함량’. 선이 얼마나 많이 포함됐느냐로 선을 간주합니다. 함량 미달되면 지옥 간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과거에 어두운 골목길을 살았던 사람들도 교회 나오면 술 끊고 담배 끊고 바르게 살겠다는 것은 자기 함량을 높이겠다는 거에요. 금 함량을 높이겠다는 거에요. 아주 열심을 내지요. 과거에 자기 자신을 아니까. 그게 뭐냐 하면은 전에는 무지했는데 이제는 무지를 청산하고 아는 쪽으로 가겠다. 이게 완전히 반대쪽이에요. 교회 와서 배운 것은 신앙인인 척하는 그것을 배워서 그것을 선배 따라서 목사 따라서 교인들도 같이 다 연기자 만들어버렸어요. 연기자를. 할렐루야 이런 거요. 저한테도 인사할 때 할렐루야 해가지고 저도 받아줄 뻔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연기해도 몰래 감추어둔 오랜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은 이게 말릴 수가 없습니다. 건드리면 방어기재가 딱 작동하기 때문에 내가 뭐가 나쁜데? 하고 딱 나오지요. 사춘기 아들처럼 탁 튀어나오지요.


주님께서는 이미 예수님 자체가 십자가가 뭐에요? 표적이잖아요. 이쪽에 표적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저쪽에 그 본질에 대해서는 이제는 변동이 없다는 거에요. 시간이 흐르고 2022년 산 것 그거 기대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미 십자가로서 시간의 흐름이 무의미하게 된 거에요.


자, 그렇다면 우리가 어두움 속으로 이제 들어가봅시다. 어두움 속에 뭐가 있는가? 즐겁게 들어가는 거에요. 블랙홀 속으로 즐겁게 들어갑니다. 즐겁게 어둠 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여기에 뭐가 있게요?? 여기 뭐가 있느냐 하면은 무의미. 아무 의미 없는 것들. 내가 쟁취하는 모든 것이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 어둠 속에 악마 있는 줄 알아요? 아니요. 악마 귀신이 있는 게 아니고 무의미, 허무가 있어요. 무의미. 허무는 곧 허탕을 이야기하지요. 내가 기대했던 그 모든 것은 허탕이다. 사법고시나 의사 면허증이 나에게 행복, 기쁨이 되지를 못한다. 그것은 그 이유는 내가 그 어두움과 한통속이기 때문에. 워낙 본인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본인 존재 자체가 무의미한 것을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내 무의미함을 대체할 의미 있는 것을 찾고자 하는 거에요. 여자가 인물이 좀 이쁘고 반질하다 싶으면 괜찮은 돈 있고 키 크고 성격 좋은 남자 만나가지고 자신의 미래를 보장받을려고 시도를 하게 되겠지요. 그거는 뭐냐 하면은 자기가 자기를 바라볼 때에 자기가 알아요. 자기가 인물 좋은 것도 맨날 아침에 거울 보거든요. 거울 보면서 처음 볼 때는 좀 이뻐 보이지만 자꾸 자기 얼굴 보세요. 식상해요. 평범하고 남들도 다 이 정도는 생긴 것 같이 느껴져가지고 별로 인물로 돈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 자신이 새롭지가 않아요. 바깥에서 새로운 기쁨을 주는 것을 가져 올라고 자기가 연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괜찮은 존재인 냥. 격이 맞는 냥 연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마태복음 19장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8절부터 보고 어려운거 해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그 다음에 뭡니까? ‘심판’하지요. 왜냐? 구닥다리 옛날 이스라엘을 심판함으로서 비로소 새롭다는 것으로 정립되어 가는 거에요. 새로운 게 뭐냐? 옛것을 심판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래서 이것은 끝까지 표적은 세상을 심판하는 기능으로 작동하는 거에요. 우리가 본인이 무지한 것을 알아야 세상에 대해서 넉넉하게 심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들은 안다고 하지만 그 어둠 속에는 뭐가 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은 깊은 바다에 송사리 떼 또는 송어 떼가 쭉 가잖아요. 송어 떼가 가게 되면 거기에 큰 고래가 야 송어 떼다! 하고 달려들잖아요. 몇 마리 잡았게요? 한 마리도 못 잡죠. 여러분들도 어릴 때 뭐 잡을려고 잠자리 잡을려고 하면 많아 보이지만 잡아보면 닿는 순간 동작 빨리 돼서 다 흩어져요. 빈공간만 있지요. 내가 잡을려고 하는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그러면서도 꿈을 또 쫓아갑니다. 왜? 그냥 식상한 나로 살기에는 너무나 내가 허망하기 때문에. 그 허망한 병을 내가 견딜 재주가 없어요. 이 세상은 허망하다 허무하다 무의미하다 하는 것은 이 세상은 전부 다 그냥 반짝이는 그런 반딧불 같은 것이라서 반짝 반짝 아름다워 보이지만 막상 잡아보면 냄새나요. 더러워서. 모든 것이. 손에 소유할 만한 가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왕 못 잡을 거 심판이나 하시면 되는 겁니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고. 12지파가 뭐냐 하면은 인수위원회거든요. 대통령 인수위원회. 구 정권 끝나고 새 정권 인수위원회들이에요. 심판하는 것. 그 역할을 이미 무지함을 아는 즐거움을 가진 자에게 인수위원회, 표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새 시대는 새 정권. 우리는 새로운 정권을 인수받는 거에요. 새로운 정권. 이 세상이 어떤 것도 의미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버리는 것. 그래서 나이가 들고 시간이 지체해도 그 시간 문제는 우리에게는 더 이상 나이가 늙었다 당신은 나이가 많다 이게 중요하지 않고 지금 내가 하는 이 일이 중요해요. 하는 일. 인수위원회 하는 일. 그러면 이 세상은 왜 그렇게 심판을 당해야 마땅하냐. 다시 한번 누가복음 본문을 한번 봅시다. 이제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12장 등불, 빛, 어둠 이야기 염두에 두시고요. 창세기 1장 16절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해와 달과 별 그들은 빛입니까 아니면 빛을 전달하는 매체에요? 어떻게 돼요? 빛이 아니고 빛을 전달하는 매체입니다.

 

빛은 하나님 그 자체에서 나와요. 하나님 그 자체에서. 그래서 해와 달과 별들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빛임을 보이기 위해서 빛이 반사돼서 나오게 했고 그 빛이 있음으로서 세상 만물이 생존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을 마련했어요. 예수님 자신이 빛이라고 했으니까. 모든 창조에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서 성도가 성도 된다는 것은 빛의 반사물, 빛을 보여주는 매체라고 보면 돼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빛을 비추는 등불이 될 수 있느냐. 이게 이제 어려운 이야기에요. 그게 로마서 8장 32절에 근거해서 이야기가 돼야 합니다. 그 외에는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적절하다고 봐요. 32절에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는 말씀이죠. 거기에서 무슨 대목을 우리가 유념해 봐야 되느냐 하면은 내어주셨다는 것. 내어준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내어준다는 게. 이게 어려운 거에요. 내어주신다는 것. 아버지가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내어줄 때 도대체 뭘 내어준다는 거에요? 뭘? 그냥 예수님 내어주고 하면 예수님만 구원받아요. 뒤에 있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고요. 우리에게 은사를 선물로 준다고 하잖아요. 선물 줄 때 선물 주는 근거가 있어야 되지요. 예수님을 내어주고 예수님을 거둬들이면 우리에게 선물은 있을 이유가 없지요. 예수님만 훌륭하고 예수님만 하니까 끝났잖아요.


왜 예수님을 내어주는데 왜 우리가 선물을 받느냐 이 말입니다. 엉뚱하게 우리가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가 왜 선물을 받아야 되고 왜 우리한테 선물을 주시는 이유가 뭐냐 하는 거에요. 따져보니까 이게 어려운 문제지요. 이천수 아버지하고 이천수 엄마하고 대화를 하는데 이천수 엄마가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너희 아버지는 꼭 복권 같아 복권.” 복권 알지요? 듣는 사람 전부 다 오해했어요. 야 이천수 아빠는 이천수 엄마한테 귀한 행운의 선물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뒤에 하는 말이 “맞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줄 때 예수님을 어두움에 내어준 거에요. 어두움에다가. 어두움에다가 내어준 거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알아요? 몰라요? 희망에 부풀어있는데 무슨 어둠이 있어요. 보다 많은 것을 아는 것이 힘이니까 보다 많은 것을 아는 것이 미래의 나를 찬란하게 더 질 좋은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꿈이고 희망인 거에요. 지금 이렇게 지지리궁상 사는 것보다 앞으로 내가 더 잘 될 거야. 그리고 예수까지 믿었으니까 천당 갈 거야. 이게 전부 다 무엇의 반대냐 하면은 내어줌의 반대에요. 그래서 어려운 거에요. 내어줌이. 예수님은 시작을 내어줌부터 시작했는데 우리는 끌어 모으는데 정신이 팔렸어요. 끌어 모으는데. 예수님이 있던 자리가 하늘입니다. 빛의 자리에요. 빛의 자리에서 어디로 왔습니까? 땅에 내어주는 것을 내어줌이라고 해요. 빛의 세계에서 어디로 왔다? 어두움의 세계로 온 거에요. 어두움의 세계로. 예수님 자신이 표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어두움에 내어줬다고요. 그러니까 세상은 뭐냐 하면은 세상은 어두움에서 자기가 허무한데서 어디로 나간다? 빛으로 나갈려고 아등바등 모든 발악을 다하고 모든 노력, 아까 이야기한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총명을 다 동원한 거에요. 왜?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지금보다 더 질 좋은 나를 위하여. 값어치 있는 나를 위해서. 허무? 아니 나 허무에서 벗어날 거야. 더욱 더 의미 있을 거야. 그러나 실제로 어둠속에 들어가면 세상에서 끌어 모은 모든 것은 이게 쓰레기를 끌어 모은 거에요. 나도 무의미하고 끌어 모은 것도 무의미하고. 그러니까 허무한 것을 계속 끌어 모으니까 그걸 모은 창고, 그 창고 역할은 본인이죠. 본인의 존재의 무게는 너무나 갈수록 더 무거워져서 나중에는 자살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어요. 아 내가 평생을 노력해서 이만큼 이걸 모았는데 세상에 이게 허무하다니. 21층에서 뛰어내릴 수밖에 없는 거에요. 아까 뉴스 보니까 발달장애 아이 안고 40대 아줌마가 뛰어내렸다 했지요.


왜 그런 짓합니까? 뭘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진짜 하나님은 인간이 시도하는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어떻게 왔다? 하나님께서 그냥 내어주신 거에요. 어둠으로. 그러면 예수님을 어둠에 내어줄 때에 성도한테는 은사 선물로 주어진다 했잖아요. 성도는 없어요. 인간에게는 성도란 없습니다. 죄인밖에 없어요. 그럼 죄인이 뭐 되느냐 하면은 성도되거든요. 성도될 때 여기에 뭐가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은 ‘내어줌’ 다시 말해서 은사, 선물이 주어질 때 죄인은 성도가 되는 거에요. 그렇다면 예수님이 내어줄 때 어둠 속으로 왔잖아요. 예수님이 세례 요한한테 뭘 받았습니까? 세례 요한한테 세례 받았지요.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니야 그렇게 해야 돼. 내가 물속에 들어가야 돼. 이 어둠속에 들어가야 해. 물 자체가 표적이니까. 어둠 속에 들어가야 돼. 들어가게 되면 여기서 인간들은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 않지요. 왜? 왜냐하면 뭐가 작동하기 때문에? 자기 방어기재. 죄인 같으면 방어합니까? 죄인 같으면 방어 안하지요. 진짜 사랑을 많이 받은 자가 방어합니까? 만약에 어떤 아내가 남편을 너무 사랑하는데 남편이 이리와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이렇게 하면 아니되옵니다 이렇게 합니까? 아니되옵니다 하는 게 사실은 안 된다는 게 아니고 뭐 더 당겨달라는 그런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벌써 방어기제가 가동된다는 말은 당신이 함부로 할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잖아요. 그럼 자기는 뭐다? 자기는 무의미한 게 아니고 당신 앞에서 나름 의미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부부싸움 하잖아요. 자기 의미 때문에. 인간은 추호도 내어줄 의사가 있어요 없어요? 내가 나를 내어줄 의사가 없어요. 끌어 모을 의사가 있다고요. 이거는 의중 알아요 몰라요? 자기가 밤에 어두운 골목길 다녔으면 갱생해가지고 새 사람 되면 그만이다. 이게 선악체계 아닙니까. 악에서 선으로 나가면 그만이지 내가 한때는 함량이 조금 약간 있더라도 선으로 그 함량을 많이 채우면 될 수 있다. 인간은 절대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 누구한테도 구박 받아도 마땅한 죄인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태어날 때부터 그런 생각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그게 인간의 두뇌 자체에서 그런 성질이 생기고 그것은 뭐냐? 모친의 죄 중에서 악마 지옥 작동을 하고 있는 거에요. 인간은 어둠을 모릅니다.


그러면 주님의 내어줌에서 뭐가 나오느냐? 주님만 아는 어두움이 나오겠지요. 이게 뭐냐? 선물로 줍니다. 너는 어두움이다. 네가 인생이 어떻게 꼬이든 군말하지 마라. 내가 너를 더욱 더 어두움 되게 해줄 테니까. 이게 공약이에요. 공약. 공약수 있잖아요 공약수. 4하고 8은 4라는 공약수가 있잖아요. 6하고 3은 3이라는 공약수가 있듯이. 약분하면 3으로 떨어지듯이. 1,3,5 소수로 마지막 떨어지듯이. 1과 자기 외의 숫자로 나눠지지 않는 것을 소수라고 합니다. 프라이머리 넘버. 수학에서는 제일 기본수거든요. 제일 바탕. 기본. 인간은 몰라요. 내가 허황된 환상으로 평생토록 살도록 둘둘 감아놨기 때문에. 둘둘 감아놔요. 그래서 두루마리 화장지 제일 마지막 인생의 서글픈 모습은 마지막에 종이 나올 때 모습이죠. 그것도 끝까지 안 떨어질라고 붙어있는 거 떼버리면 동그란 것만 달랑 있지요. 코 풀고 거기다 집어넣는 거 있잖아요. 두루마리 화장지 다 벗겨버리면 딱딱한 종이 하나 심 하나 나오듯이 주께서 은사를 주실 때 우리를 바닥까지 다 보게 하셔요. 바닥까지. 그게 내어줌의 끝이에요. 십자가 죽으심이다. 그것도 아버지의 뜻. 버림받음.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모습, 그 모습이 내어줌의 절정이에요. 마지막 장면입니다. 어느 인간이 거기에 공조할 인간이 없어요. 아무도 거기 십자가에 동참할 인간 없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해도 제자들 목자 칠 때에 양들 다 갔어요. 왜 갔습니까? 십자가 안 질려고 간 거에요. 그동안 예수님 말씀들은 거 헛발이에요. 전부 다 방어기재가 작용해가지고 저희들끼리 살라고 한데 모여가지고 발발 떨고 있었지. 두려워했던 거에요. 무섭고 두려워했던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주님의 짜투리.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 남은 자만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남은 자만 주님이 주신 선물로 구원받습니다. 우리 죄인이 죄인인 줄 모를 때 더욱 더 죄인 되게 하는 선물이 예수님의 내어줌의 기능의 짜투리로 우리에게 택배로 오게 돼요. 내가 이렇게 아버지께 버림받았다. 너도 마찬가지야. 너도 마찬가지라고 올 때 이미 우리는 주님과 한 식구가 되는 겁니다. 같은 운명이 되는 겁니다. 아 버림받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하구나. 마땅하고 당연하구나. 어두움이 우리가 무의미하고 허무한 게 너무나 지당하고 당연함을 받아들일 때 이게 바로 무지가 주는 자유함이에요. 몰라도 되는데 왜 쓸데없이 알라고 애썼을까. 내 자아만 대땅 중량감 나오도록 만들어놓고 개코도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척해가지고 얼마나 내가 나 스스로 훌륭한 연기자로 만들었어요. 자기 연기가 안 먹히니까 자살하잖아요. 자살 이유는 자기가 꾸민 연기에 자기는 아는데 남이 안 속으니까 자살하는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은사를 주시면 주께서 우리를 끌고 다닙니다. 네가 그동안 괜찮은 너를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채워놓았던 네가 꿈꾸던 너의 목표물들이 얼마나 하나 둘 할 것 없이 전부 다 어두움의 형상들인지를 다 보게 하시죠. 끌고 다니면서. 저것 좋잖아. 저것 좋잖아. 너무 맛있는 거 같아요. 서브웨이 샌드위치 너무 맛있는 거 같아요. 한 세 번만 먹으면 하여튼 우리가 좋아하는 것 모든 것을 끌고 가서 그게 다 무의미,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내 자식은 성공했으면 좋겠어. 내 소망은 우리 아들 장가가는 거다. 장가가게 되면 우리 아들 담배 끊는 거다. 우리 아들 술 끊는 것이다. 네가 아들해라. 그렇게 요구하고 아직도 기대를 걸고 있다는 이 자체가 내가 뭔가 알고 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그런 건방진 교만이 작동하는 겁니다.

 

그럼 주님이 어떻게 합니까? 내어줌은 어두움은 주님의 십자가 버려짐의 하나의 짜투리로서 동일한 그런 능력으로서 우리에게 온다고 했지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이것이 ‘언약궤를 만짐’. 우리로 하여금 언약궤를 만지게 하는 겁니다. 이건 뭡니까? 즉사죠. 즉사. 25만 볼트. 네가 더러운 게 어딜 거룩한 것을 만져. 만지면 죽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일부러 주님 자신을 만지도록 허락했어요. 주님 못 만지면 옷자락이라도 만져요. 옷이라도. 이게 뭐냐? 우리 안에 주님의 등불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방식입니다. 빛의 세계가 어둠 세계에 오면서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속이 내 안이 얼마나 더러운 걸로 온통 쓰레기로 내 자존심과 내 가오 내 돈 자랑 이런 걸로 온 집안이 전부 다 엉망진창이 된 거 그걸 우리로 하여금 다 보게 하십니다. 그중에 어느 것도 봐라 이게 빛, 가치 있는 것, 거룩이 되는 것이 그중에 있는지 한번 봐라. 네가 쏟아내는 토사물이 이 꼴이다. 네 속에 있는 것이 밖에 나오니까 이게 바로 하나님의 거룩 영광에 아무 관계없잖아. 이걸 우리에게 낱낱이 보게 합니다. 네가 뭘 아냐? 저는 무지합니다. 모릅니다. 주께서 그렇게 할 때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가 아니라 그 사람이 표적이 되었다. 주님과 같이 표적이 된 거에요. 먼저 심판 이 허무한 것을 아니까 이 세상은 이제는 마음 놓고 이 세상이 심판받을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이제는 보이지요. 제가 주일학교 설교하면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사도 바울이 비늘이 떨어졌다 했거든요. 비늘. 사울 때의 보는 그 관점이 떨어진 거에요. 바울 되고 난 뒤에는 눈이 떴지요. 눈이 떴다는 말은 전에 내가 알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아는 척 떨었던 하나님이고 뭐고 내가 알던 건 다 떨어졌어요, 그거 다 떨어지면서 발견한 게 뭐냐 하면은 내가 예수님을 핍박하고 있다는 사실, 그 사실 그것에 기초해서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이고 십자가에 죽이는 그걸 기초로 해서 세상 자체를 전부를 주님부터 해서 다시 완전히 빛으로 주님의 빛으로 다시 보게 합니다. 주님의 내어줌에 같이 동참하고 있으니까 이제는 세상 자체가 어두움이고 그리고 찾아오시는 그분이 바로 유일하게 빛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33절에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이게 아까 이야기한 표적이라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표적이란 시간적 요소가 더 이상 추가될 필요가 없이 확정된 신분 또는 확정된 기능. 이게 표적입니다. ‘표적’. 그러니까 주일날 설교에 끝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주께서 오셔가지고 차를 태우는데 핸들에 갑자기 수갑을 채워가지고 핸들을 내 마음대로 운전 못해요. 그러면서도 앞에 있는 그 유리창을 통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 어떤 장애물이 있는 것을 다 보게 합니다. 옛날 같으면 핸들 잡으면 백번이고 피해갔을 거에요. 백번이고. 살아 볼라고 이러면 나한테 이익이냐 손해냐 계산 따지면서 했던 그걸 주님께서는 수갑을 채워서 있는 그대로 다 그냥 가게 하는 거에요. 우리는 막 눈을 감지요. 죽었다! 하면 아침 되면 살아있고 또 죽었다! 하면 살아있고. 맨날 두근두근 이런 식이죠. 주께서 이게 바로 나의 내어버림이다. 이거 아니면 다른 길은 천국 가는 다른 길은 그 길 외에는 없습니다. 그걸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수동적 자율성’. 너 하고 싶은 대로 뭐든 해라. 다만 내가 이끌고 그쪽으로 하게 했다는 것을 주인공을 너로 삼지 말고 내가 너로 하여금 그렇게 하라.


제가 대구강의에서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망했을 때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망했을 때에 당신은 어떻게 말을 하겠습니까? 내가 망했다는 것은 성도한테 성립이 안돼요. 왜? 처음부터 망했어요. 처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에게 망한다는 것은 그건 자기 분수를 모르고 하는 짓이에요. 자기 분수를.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폼 잡는 사람치고 향기 있는 사람 없다. 실속이 없다 이 말이에요 실속이 없다. 우리는 실속조차 없어요. 아니 그거 가질 필요 없어요. 우리는 무지, 그냥 모르면 돼요. 주께서 그때그때 하게 하시는 겁니다. 어머니 김장 어떻게 담아요? 내가 뭐 아는 게 있나 하다보면 뭐 맛있는 김치 됐지. 어머니 김장 너무 잘 담그세요. 모르는 소리! 나는 죄인이야. 이거 하다가 지옥 갈 인간이었어. 이거 하다가. 그런데 나를 어둠을 어둠이라고 까발려주시는 그 빛 되신 빛이 찾아왔어. 여명의 눈동자가 되가지고 주님이 들어왔기 때문에 빛의 세계를 아니까 빛과 어둠의 경계선이 있으니까 빛도 알고 어둠도 아니까 이것은 나의 김장을 통해서 이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을 나는 미리 알지. 무의미한 게 이거 뭐 이렇게 되지요. 우리가 주님 주신 것으로 자랑하고 감사하라고 성경에 되어 있잖아요. 왜? 우리는 그만큼 내일일도 모르고 총기도 모르고 우리 지혜는 아무 쓸모 짝도 없는 어두움만 쫓아가는 어두움만 헤헤 거리면서 쫓아가는 그런 지혜밖에 없는 우리를 그런 우리를 우리로 하여금 표적으로 요나처럼 감히 요나처럼 또는 스바 여왕처럼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사랑 앞에서 빚을 다 청산해 주신 주님 앞에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런 빛에 대해서 거룩에 대해서 고백하는 기능으로 사용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지금 된 것이 주의 은혜라는 말을 아니 공식처럼 외웠지만 이제 실감나게 해주시고 체험으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 이렇게 가볍고 이렇게 편하고 이렇게 자유로울 줄 예전에 미처 몰랐던 그 은혜 선물을 우리도 세상에 내어줌을 따라서 그 자유를 만끽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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