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46강-고난과 영광(롬8;18-19)이근호130811

아빠와 함께 2013. 8. 11. 13:50


고난과 영광(로마서 8: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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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8-11 13:36 
고난과 영광 

2013년 8월 11일                         본문 말씀: 로마서 8:18-19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새로운 것이 주입될 때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받으신다는 것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사실상 절망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주지 아니하면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뵈울 수 있는 형편이 못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 인간쪽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항의할 수 없는 이유는 처음부터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이란 세상의 썩어짐과 더불어 같이 썩어져야 하는 운명에 놓인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좋든 싫든 상관없이 썩어져야 합니다. 그 자체의 육신됨을 속성이요 본질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이런 상황 속에서 자기 주변의 것들을 이기주의 의식을 가동시켜 이용하기에 급급하다는 겁니다. 

마치 자신이 이 세상이 주인공이고 세상은 오로지 자신을 위하여 존재해야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이 뚜렷해지게 됩니다. 즉 같이 썩어가면서도 마치 자시만큼 안 썩어가야하는 자격이라는 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인간들의 이런 행동들은 ‘인간의 자리’의 특수함 때문에 생겨난 현상입니다

‘인간의 자리’란 실은 예수님께서 차지해야 할 ‘인자의 자리’ 곧 진정한 대자연의 주인공의 자리로서, 예수님 본인을 위한 자리입니다. 그 자리됨의 성질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 인간들이 주변의 자연을 향하여 대하는 태도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곧 “세상은 오로지 나를 위하여 존재해야 하고 나는 그런 식으로 활용할거야”라는 정신 말입니다. 

실은 예수님께서만 그렇게 하실 자격자입니다. 인간마저 하나님 위함을 위해서 인간의 자리를 할당받은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이용당한 것입니다. 창세기 3:21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평소에 가죽옷 입고 싶어 하나님께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이 가죽옷 입히기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입니다.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으려고 할 때 “아담은 어디 있느냐?”하시면서 찾아오지 아니하시고 이미 선악과 따먹고 다른 인간상을 드러낼 때, 그 때에 아담을 찾아오신 이유도, 인간 구원이 하나님의 본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본래 목적인
이 대자연의 숨어 있는 창조주를 ‘희생자 모습으로’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아담이 죄짓고 난 뒤에 인간은 전혀 무가치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무가치한 것을 찾아주시는 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필요한 재료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를 자연의 썩어짐을 연관시키므로서 진정 이 대자연의 모든 사물과 그 변화를 책임지시는 분을 따로 돋보이게 소개하기 위함입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바로 이들이 등장되고 출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분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이 작업에 참여된 모든 자들은 본인들을 위한 인생을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의 ‘징조’ 또는 ‘징후’의 자격으로 세상을 사는 자들입니다. 

이는 독자적으로 자기만의 인생을 꾸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은 자기 밖에 모릅니다. 하지만 아들의 영을 받은 사람은, 자신은 대자연의 변화와 결부된 처지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곧 자기를 위하여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우주의 중심인물 되시는 예수님의 활동 징조를 증명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태복음 27:50-53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 이상하죠? 어떤 특정인이 죽었다고 해서 하늘의 해가 가려져 어둡게 되는 것도 이상할 일이요 또 그분이 죽는데 도리어 이미 죽은 다른 시체는 다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무덤도 열립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단순히 개인적인 자기 삶만 사신 것이 아니라 대자연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임이 드러납니다. 

결국 다시 살아나실 것을 미리 알려주면서 예수님 십자가 죽었을 때, 무덤에서 일어난 자들이 있어집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일어날 변화를 미리 보여주신 겁니다. 이 일은 비단 신약 때 뿐만 아닙니다. 구약에서도 나옵니다. 신명기 28:15-24을 잠시 보지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혼란과 책망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마침내 너를 멸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잘못했다고 이스라엘만 벌주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변화를 유발시키십니다. 그렇게 해서 피조물들이 진정으로 고대할 인물을 추적해 들어가는 작업이 ‘말씀에 의한 거부’릍 통해서 실시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라는 분만 남기도 나머지는 다 삭제시켜나갑니다. 

진정 이 세상의 운명이 한데 모아 쥐고 계시는 분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5:43-47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딛고 있는 자리는 육신에서 신령한 몸으로 전환이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에서 제공된 십자가 능력이 그 아들의 자리에 있는 자에게는 ‘대자연의 변화의 자격자는 예수님뿐’ 이라는 소식을 전하기 위한 증거로 만들어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과 우리가 같이 묶여 있기에 독자자적인 자기 살길만 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께 다 맡기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6강-롬8장 18-19(고난과 영광)13081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9페이지입니다.

 

로마서 8:18-19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할 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을 받은 자와 성령을 받지 않은 자로 하나님께서 구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으면 그 사람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고

성령을 받게 된 사람은 성령이 있기에 그리스도 사람이라,

로마서 8장 9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리스도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사람이 되면 주된 혜택이 무엇인가?

그 혜택은 로마서 8장 16절에 보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면 받는 그 다음의 혜택이 무엇인가?

그 다음의 혜택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18절에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되어 있어요.

기차처럼 그 연결이 되게 되어 있어요.

객차와 객차가 죽 이어져서 이 시나리오는 중간에 빠진다든지 누락됨이 없이 한 번 육신에서 성령으로 되면

미끄럼틀 내려가듯이 브레이크도 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17절에 보니까

 “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라고 해서 “고난”이라는 낯선 용어가 등장하지요?

영광만 받으라고 하면 되는데 왜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되는가?

여기서 말하는 고난이란 우리가 육신으로 있을 때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를 다 드러나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보다 더 깊이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육신으로 살 때 나오는 옛 버릇과 행세가 하나님이 본래 이 세상 만든 목적과 안 맞게 되어 있고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삐걱거리게 되지요. 삐걱거리면 우리 속에서 불평과 불만이 나오고 괴로움이 나오지요.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승부 볼 것이 아니구나.

이것이 바로 고난이구나. 장차 영광된 나라가 따로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살았습니다.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애굽을 버린 것이 아니에요.

광야생활 평생토록 애굽을 못 잊어 합니다.

인간의 기억 속에는 애굽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그 애굽을 통해서 그들은 환란과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당하면서 자신들이 구원받는 것은

결국 자신들이 애쓰고 열심히 노력하고 착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언약,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그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천국을 가야 된다는 그 기쁨과 행복을 만끽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생각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를 보냈구나.’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 뒤에 나오는 말씀 19절을 보면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에요.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야 될 이유가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들을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고

20절에,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피조물이 함께 썩어 들어가는 겁니다.

음식이 쉬고 상하고 썩잖아요. 그렇게 썩어 들어가는 겁니다.

21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그러니까 여기서 하나님의 술책, 좀 어감이 그렇습니다만 하나님의 교묘한 술책이 등장합니다.

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서 천국에서 좋게 살게 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면서

사실은 하나님께서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거예요.

그 다른 목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만든 피조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활용하신 겁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트릭이죠.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하나님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 그것이 창세기 3장 21절에 보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해서

원하지 않는 패션스타일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강요를 했지요.

언제 아담이 가죽옷 못 입어서 환장한 것이 아니거든요.

가죽 옷 입고 “빠라빠라빠라빰~!” 이것 하려고 요구한 것 아니거든요.

가죽옷을 입힘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뭐가 되었느냐 하면, 인간은 썩어짐의 징조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 살리기 위한 하나의 건전지, 또는 활용, 재료, 불쏘시개, 그런 것으로 투입이 되는 겁니다.

하나의 연료, 에너지, 휘발유 같은 용도입니다.

이것은 썩어져 가는 세상과 인간을 하나로 묶는 거예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내가 썩어져 가는 세상과 묶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자기만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교회 오는 것도 자기만 살고 자기만 복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같이 묶여서 산다는 사실을 정말 성령 받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이야기해줘도 수용자체를 안 해주려고 해요.

 

나를 위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더라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교묘한 획책을 했어요.

뭔가 우리한테 좋은 것을 주는 척 했지만 우리를 소모품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원래의 자기 뜻을 위해서 우리를 하나의 불쏘시개로, 소모품으로 사용해버리는 전략을 꾸민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보세요.

그 사람들 혼쭐납니다.

썩어가는 그 세계 속에서 같이 썩는 것 때문에.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살려주세요. HELP ME! 살려주세요.” 할 때

“나는 네가 목적이 아니고 너로 인하여 다른 피조물들이 어떻게 썩어가고 있고

그들이 회복되는 것은 누가 나타나야 회복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희들을 이 썩어가는 세상에 집어넣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없어요.

이 세상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들이 오기 전에 먼저 아들들을 만들어놓고

이 아들들이 어떻게 피조물의 썩어짐과 묶여서 같이 뒹굴고 한 운명체로 힘들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 아들들의 희생과 고난을 통해서

썩어짐이 장차 오실 진짜 아들을 고대하는 계기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말이 어렵게 되었으니 쉬운 이야기를 해 볼게요.

장수풍뎅이 새끼를 굼벵이라 하는데 요새 이 사업이 뜹니다.

백만 원 투자하면 6천만 원 건진다는 거예요.

5백만 원 투자하면 3억 건진답니다.

 

누가 이런 사기를 치는지 모르겠는지 이런 사기라도 이 무더위에 기쁜 소식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이게 삶의 지혜인데 누가 정보를 빨리 아느냐 하는 거지요.

이 굼벵이, 장수풍뎅이의 애벌레인 이 굼벵이를 보세요.

이 굼벵이가 옛날에는 요즘처럼 이렇게 인기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그냥 징그러운 벌레였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어느 날 이걸 찾기 시작했어요.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찾기 시작하면서 굼벵이가 이렇게 값있는 굼벵이가 될 줄은 몰랐지요.

그저 이리 뒹굴 저리 뒹구는 굼벵이가 돈이 되는 것인 줄 몰랐지요.

 

전에는 무가치했던 것인데 요새 이렇게 곤충사업이 뜨는 이유는 인간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필요, 요구 때문입니다.

설교시간에 무상으로 사업 아이템을 팔아넘긴 셈이 되는데 먼저 손댄 분한테는 미안합니다.

하여튼 뒤늦게 하면 망해요.

굼벵이한테 “너 값 좀 쳐 줄까?”하고 묻지도 않았어요.

내가 필요하면 굼벵이도 필요한 거예요.

인간들은 본의 아니게 세상 만물을 자기 위주로 의미를 주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묶어지는 것은 생각 안했어요.

그냥 나 따로 너 따로 하다가 내가 필요할 때만 너는 나에게 다가와서 하나의 의미가, 돈이 된다 그 말이지요.

 

이러한 것이 인간들의 이기주의적인 인식인데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 쪽에서 인간들을 굼벵이처럼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냥 “네가 죄 지었나? 그냥 죽어라.” 이러면 굼벵이의 가치가 없어요.

“너는 정녕 죽으리라.” 했으면 더 이상 말 할 필요가 없거든요.

죽으라고 팽개치면 되는데

이 죽어가는 인간보고 찾아와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선악과 따먹기 전에 진작 나타나시지 선악과 따먹고 이미 죽은 뒤에 와서

썩어지게 되어 있고 부부싸움이 일어나서 서로 나 몰라라 하고 핑계나 대고 있는 입장, 서로 부끄러워하는 입장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이제야 찾아왔다는 말이지요.

 

이게 굼벵이 값 오른다는 말이거든요.

평소에 사람들이 자기밖에 모르고 세상 만물을 자기 이익위주로 보고 매사 추구하는 것처럼

인간의 이러한 사고방식과 존재감은

배후에 숨어 있는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만을 위한 세상 구성에서 이미 그러한 입지,

그것을 어려운 말로 인간의 자리라고 합니다,

그 인간의 자리가 결국 인간을 위한 인간의 자리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게 신약성경에서 인간의 자리가 아니고 “인자의 자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안착하려는 그 자리를 먼저 인간을 집어넣은 거예요.

 인간을 집어넣어놓고 거기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그 일어나는 일들이 세상 썩어짐과 그 인간이 하는 짓거리가 묶여서 결합되도록,

떨어지지 않고 한데 엉켜서 돌아가도록 만들어놓고

장차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들어와서

인간이 해내지 못한 피조물의 영광과 새 하늘과 새 창조 작업을 주님께서 홀로 하셨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겁니다.

 

시나리오가 그렇게 돼요.

우리는 멋도 모르고 거기에 말려든 겁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할 때 되게 우리를 좋아해서 찾아오는지 알았지요.

나중에 보면 우리가 좋아서 찾아온 것이 아니고

가죽옷 입히려고, 호피 입히려고 했는데 아담이 가죽 옷 입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입혀 놓고

그 가죽옷의 의미와 본질을 외줄처럼 이어가는 그 노선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계속 진행시키는 겁니다.

언약이 투입되지요.

노아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하나님의 언약. 그것을 이번 수련회에서는 실패에서 실이 나오는 것으로 표현했지요.

실패는 하늘에 하나밖에 없는데 거기서 실이 나오지요.

 

실이 나와서

노아 때 잉크로 한번 적셔 놓고

그 다음에 모세 때 다시 적셔놓고

다윗 때 적셔놓아서

그 실패에서 나온 실의 검은 흔적의 선이 지상에 끌릴 때

그 선의 흔적이 이스라엘의 언약의 역사로 되면서

그 선의 마지막 도달지점은

실패의 실 덩어리인 자신이 그 동안 숨어서 일했다는 그 정체를 드러내는 계획을 하나님이 갖고 계셨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신앙이라는 것이 울고불고 그러다 웃고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에요.

냉철합니다.

혼자 살고 싶다? 혼자 살고 싶다고,

너는 이 썩어가는 세상에서 같이 썩어가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혼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홀로 된다는 것도 없어요.

이 땅에 혼자라는 것이 없어요. 혼자라는 것이 없는데 있다고 우기거든요.

그게 바로 선악과 따먹고 이 땅에서 육신이 되어놓으니까

자기주변에 있는 것은 나 혼자를 위해서 있다고 생각해서 장수풍뎅이 애벌레인 굼벵이 사업을 벌인 거예요.

장수풍뎅이를 도와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돈 벌기 위해서, 그게 돈이 된다고 하니까 손을 대는 거예요.

이것이 전부 다 자기만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그럴 때 타이밍이 하나님과 딱 아다리가 된 거예요.

“같이 썩어라. 제발 좀 같이 썩어줘. 어디서 감히 혼자 살겠다고!”

 

혼자 산다는 것은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자리가 홀로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자리에 우리를 출생시켰습니다.

우리의 자리는 나의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과 관련된, 하나님의 아들과 엮여 있는 자리입니다.

그것을 저는 징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부터 해서

예수님이 일하신다는 징조, 이 세상이 썩어가는 이유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후로서, 징조로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바꾸세요.

김 징조, 이 징조, 박 징조, 우리는 하루하루가 뭔가 징조를 보여주는 겁니다.

징후를 보이는 겁니다.

 

어떤 징후? 세상은 아담인 인간의 죄로 주저앉고 있고 무너지고 있다는 것. 그냥 잠잘 때 무너지면 쉽게 끝나겠지요. 서서히 무너지니까 사람들은 신음하지고 탄식하고 못살겠다고 고함치죠. 제가 지난 금요일에 서울의존교회에서 강의하는데 첫째시간 마치고 한 윤범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인터넷을 보니 대구의 최고기온이 섭씨 41도랍니다. 41도면 신기록인데 확인해 보라고 했더니 진짜 41도래요. 41도라고 하니 일단 저는 신났지요. 왜냐하면 그 가마솥에서 피했으니 일단은 기분 좋았고요. 그런데 그걸 예화로 들어서 설명했지요.

 

대구 사람들은 더울 때마다 하는 이야기가 “더워 죽겠다. 더워 죽겠다.”는 이야기를 달고 산다는 이야기를 강의 중에 했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기를 “주께서 더워 죽으라고 덥게 하신 거”예요. 더워죽겠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죽음은 우리가 피할 길이 없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죽기 위해서 살기 때문에 죽겠다는 소리 나오는 그것이 징후가 징조에요. 감사가 나오고 기쁨이 나온다? 그것은 좀 이상해. 수백억 가져도 역시 “죽겠다”입니다. 사방에서 죽겠다, 죽겠다, 의 연속인데 그걸 자꾸 하려니 입만 아프니 그것을 생략한 거예요.

 

생략하고 살다가 진짜 날씨 더우니까 “더워 죽겠다. 못살겠다.” 겨울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 당장 죽겠다는 거예요. 더운 날씨를 누가 손댑니까? 누가 이걸 바꿀 수가 있어요? 날씨가 더운데 뭘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날씨만 손댈 수 없는 것이 아니고 그 날씨 속에서 더워 죽겠다고 하는 우리도 우리 자신을 손댈 수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 키 작은 사람들의 소망은 키 크는 거지만 그게 걱정한다고 될 일이 아니거든요.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냥 어쩔 수 없다고 끝내지 마시고 같이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내가 특별히 나쁜 짓을 해서 썩어가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세상 바깥, 이 피조세계가 썩었다는 것의 측정계로 사용하기 위해서 썩을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장수풍뎅이 같은 역할을 하라고 이 땅에 잠시 살다가 나중에는 “죽겠다!” 하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조치를 주께서 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 죽어가는 우리를 향하여 주님께서 이렇게 합니다. “아이고, 이 육신아! 이 짐승만도 못한 육신아, 죽어라.” 라고 우리 육신을 보고 지시하기 때문에 ……, 우리보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육신보고 지시하는 거예요. 말을 똑바로 들어야 됩니다.

 

우리가 살고 싶다 해도 날씨는 앞으로 더 더울 거예요. 더운데 우리 육신이 가만있지 않아요. 제가 한 30년 전에 목회인지 아닌지 하여튼 목회한답시고 대구대덕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그 때 한 설교가 기억나요. 신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직도 남아 있을 그 당시인데 그 당시에 설교를 하면서 가만 생각해 보니 이 설교를 좀 솔직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런 설교를 한 기억이 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나요. “여러분들이 이웃을 미워하지 말고 자기를 비우고 사랑하라고 하지만 날씨 더울 때 사랑이 되던가요?”

 

세상에 나이도 어린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어요. 여러분, 날씨 더운데 사랑이 되던가요? 성경에 사랑하라고 나온 것은 저도 보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 컨디션이 나쁜데 사랑이 되던가요? 주님께서 이야기한 말씀은 우리 속에 예수님보고 하는 이야기고요, 성경에 우리 육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네 육신은 안 돼. 네 육신은 못 지켜. 육신은 육신 값을 해.” 이렇게 육신 값을 하라고 “안 돼”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말씀이에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다.(딤전 6:10) 이게 안 된다니까요.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이게 됩니까? 그래서 서울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백수입니다. 여러분은 몰랐지요?”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해놓고는 예수님이 백수거든요. 예수님은 직업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설명했지요. 왜 예수님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해 놓고서는 자신은 백수인가? 예수님은 살려고 온 것이 아니고 죽으려고 온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왜 죽어야 되는가? 세상이 죽어가고 있으니까 같이 보조 맞춰 죽는 것이 인간과 세상이 합쳐서 하나의 징후, 징조 됨의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는 겁니다. 너나 나나 하나의 징후라는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고 죽으리라” 하는 그 말씀에 입각해서 우리는 죽어야 된다는 징후를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말씀도 우리 육신보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육신보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는 썩은 것에서 도저히 탈피 할 수 없고 우리가 괴롭고 한탄스러우면 주의 말씀이고 뭐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요. 그게 우선이 아닙니다. 답답하고 괴로워서 사람은 비명을 지르게 되어 있는데 하루하루 우리 일기장은 비명소리로 흘러 넘쳐납니다. “더워 죽겠다. 아침부터 찐다. 오늘도 교회 꼭 가야 되나?” 제가 보기에 전부 다 비명소리처럼 들려와요.

 

그런데 여기에 성령이 육신에게 옵니다. 육신에게 성령이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네가 썩어지는 세상의 하나의 징후이기에 하나의 온도계나 측량계이기에 세상이 썩었다는 것을 너의 탄식과 원망과 비명으로서 내가 측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영하 3도, 지금 36도, 지금은 37도, 비명소리 봐라, 지금은 40도. 하나님, 과연 이 땅이 지금 썩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내일 되면 다시 체크 들어갑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존재 자체가 징조이기에 썩어가는 세상과 묶여서 세상만 썩어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같이 썩는 것으로 묶여 가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나의 징조로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알려주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길입니다, 길. ROAD, 길! 요한복음 14장에 나오지요. “내가 곧 길이요.”(요 14:6) 예수님이 말한 “내가 곧 길이요.”라는 말은 뭐냐 하면, 그 길 밖에 다른 데는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막혀 있다는 겁니다. 썩어짐이라는 한정막이라고 보시면 돼요. 썩은 것이 현실인데 더 무서운 이야기는 이 썩어짐에서 탈출하거나 빠져나갈 틈이 없는 거예요.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기를 “내가 곧 길이요.”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성령 안 받고 그냥 육신에 있는 사람은 그냥 매일같이 “썩어진다, 썩어진다, 썩어진다, 더워서 못살겠다.” 그 죽겠다는 한가지소리밖에 못하는데 성령이 임해버리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돼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그 사람은 이제부터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새로운 징조체제에 돌입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썩은 것 맞습니다. 맞고요!” 그 다음에는 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길을 뚫어 놓았습니다.”라는 것, “내가 곧 길이요.” 이 더운 날 청량 수같은 소식이 이 성경에 담겨 있습니다. 아까 우리 같이 불렀던 544장 찬송가 3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나의 가는 길 멀고 험하며 산은 높고 골은 깊어

곤한 나의 몸 쉴 곳 없어도 복된 날이 밝아오리

열린 천국 문 내가 들어가 세상 짐을 내려놓고

빛난 면류관 받아쓰고서 주와 함께 다스리리.

 

“나의 가는 길 멀고 험하며 산은 높고 골은 깊어 곤한 나의 몸 쉴 곳 없어도……” 그 다음에 흥미로운 단어가 나와요. “복된 날이 밝아오리.” 4절 가사에는 한 숨 쉰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나의 가는 길 멀고 험하며 산은 높고 골은 깊어 곤한 나의 몸 쉴 곳 없어도” 이것은 우리의 일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된 날이 밝아”온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가사가 맞다고 동의하십니까? 이 가사가 맞다면 진짜 복된 날은 환갑이나 칠순 날이나 내 생일이 아니고 죽는 날입니다. “축하합니다. 복 받으셨습니다.” 이 날이 언제냐 하면 본인들이 죽는 날이에요.

 

이것은 절대로 부정적 관점이 아닙니다. 부정적 사고방식이 아니에요. 이 더운 날들 속에서 계속 사는 것이 복입니까? 한 45도까지 계속 올려볼까요? 하나님한테 그렇게 요청할까요? 죽는 날이 “왔다!”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최고의 복된 날은 이 땅에서 제대하는 날입니다. 장례식 가거든 축하의 악수를 해야 돼요. “아이고 부러워라, 부러워라! 그 어른이 가셨다면서요? 3등급 판정받더니만 그새 가셨네요. 정말 고마워라. 다행이다. 나는 언제나 가나, 정말 미치겠다.” 울게 뭐가 있습니까? 복된 날인데. “축! 장례.” 이렇게 붙여야 돼요. 아예 화려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썩게 만들고 그 다음에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이 작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땅에 한 분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경해석에 있어서 난해하고 난해한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아들이라고 해놓고는 그 아들을 하나하나 삭제해 나가는 방식을 사용하는 거예요. 32강, 16강, 8강, 4강, 준결승전, 결승전, 그 다음에 결승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결승전을 해서 그 최후의 일인자를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남은 가지를 제거해나가는 작업이 구약성경입니다.

 

모세? 아들 아니었습니다. 그냥 성질이나 내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아니었습니다. 이삭도 아니었습니다. 다윗도 아니었어요. 계속 삭제해 나가는 겁니다. 누구만 돋보이는가?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예수님 밖에 없다. 다른 이름은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삭제하는 방법이 뭐냐?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질문을 했어요. “예수님의 피가 하는 일이 뭡니까?” 우리가 흔히들 잘 아는 이야기인데 그 분이 의미심장하게 질문을 했어요. “대체 피를 가지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피가 어디에 쓰는 것인데요?” 다 같은 뜻입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려서 용서받았다는데 우리가 그 피를 어떻게 사용하면 됩니까?” 그런 질문이에요.

 

상당히 중요한 질문이고 함부로 질문할 수 없으면서도 무엇을 질문할지를 몰라서 그냥 찝찝한 마음만 갖고 있다가 ‘아, 이걸 질문해야 되겠구나. 그 피를 어떻게 써먹으면 됩니까?’ 하는 그 질문이거든요. 그동안 40년 50년 교회 다니고 그동안 예수의 피로 구원받는다고 해놓고 찝찝한데 한 번도 그걸 요약정리해서 질문할 엄두가 나지 않고 그게 잘 다듬어지지 않는 것인데 바로 그 내용으로 질문을 했어요. 상당히 속으로 고맙게 여겼습니다. 제가 이렇게 답변했지요. “피라 하는 것은 우리가 소지해서 써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피는 경계입니다.” 경계선을 만드는 거예요.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을 구분하는 경계선에서 이 피가 있어요. 도로에 보면 중앙선이 있어요. 그 중앙선에 두껍게 노란 선 두 줄을 쳐 놓았지요? 그 중앙선 뜯어서 어디에 써먹습니까? 도로 중앙선 칼 가지고 뜯어가는 사람은 없잖아요. 페인트 뜯어가서 뭘 할 겁니까? 하지만 그것이 있어야 이쪽 차선과 저쪽 차선이 구분되잖아요. 피라는 것은 우리보고 써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너는 어느 쪽이야?”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피가 있는 겁니다. 예수의 피를 믿어라, 하니까 우리는 믿는다는 것을 소지하는 것, 소유관념이라고 생각하기에 피를 가지고 어디에 써먹으려고 하는데 이젠 써먹지 마세요. 피는 주님만 손대지 우리가 손대려고 하지 마세요.

 

주께서 그냥 중앙선으로 놔둘 때 우리도 같이 지켜봅시다. 내가 피 안에 있는지 피 밖에 있는지 그것만 볼 수 있는 기준으로 되는 것이 예수의 피 입니다. 예수의 피를 소지하게 되면 “너는 몇 방울 있어? 나는 한 드럼이다.” 이렇게 양적으로 장악하기에 안돼요. 한 사람만 남기기 위해서 구약성경이 있는데 구약성경에서 사람들을 전부 다 삭제하고 잘라갑니다. “너 아니야. 너도 아니야.” 그 자르는 기준이 뭐냐, 그 기준이 하나님의 율법, 법이에요. 하나의 예를 들면 ‘아, 그런 뜻이었구나.’ 하게 될 겁니다.

 

신명기 28장15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또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며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 몸에 염병이 들게 하사 네가 들어가 얻을 땅에서 필경 너를 멸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상한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케 할 것이라.”

 

설명이 필요하지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줬는데 만약에 율법을 안 지키면 우리 생각에는 우리만 치면 되잖아요. 왜, 그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에이, 아들이 아들 값도 못해? 매 맞아라.”하면 되는데……, 엄마가 애보고 공부를 하라고 했는데 게임한다고 공부를 못했어요. 그러면 엄마가 매를 들고 애를 때리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엄마가 애를 때리고 나서 성이 안 풀려가지고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가져와서 동사무소를 불 질러 버리면 그것은 좀 이상하지요. 하나님은 그 이상한 짓을 한다니까요?

 

이스라엘이 나쁜 짓을 하면 “조심해. 앞으로 잘해. 나쁜 짓 하면 맞는 거야.” 이러면 될 일을 주변의 다른 지역까지, 이 세상 다른 피조물까지 다 벌을 내려버려요. 이게 묶여 있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조로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얘들아, 너 잘한다고 너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너의 말씀 순종이 모든 피조세계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같이 묶여 있다는 그 사실을 왜 자꾸 끊어버리느냐?” 그 말입니다. 말씀을 위배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어요. 자기만 생각하기에 말씀을 위배할 수밖에 없어요. 이 세상의 운명과 내 운명이 같이 묶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위반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타고나면서부터 타고난 이기주의에요. 남이야 죽든 말든 자기만 살면 그만이에요. 물론 마귀가 그렇게 했겠지요. 그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 신명기의 말씀을 주신 겁니다. “네가 잘못하면 너로 인하여 다른 피조세계도 같이 신음하고 고생한다. 왜, 너는 하나의 징조이니까.” 가죽옷을 괜히 입혔겠어요? 징조니까. 예배시간에 좀 일찍 오셔서 주보 뒷면에 있는 내용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 번 읽어봅시다. 이번주 설교 요약이 있지요? 위에서 다섯 번째 줄에 보면, 마태복음 27:50-53에 보면,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예수님이 지금 돌아가셨잖아요.

 

그 다음에 보세요.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이상하잖아요. 어떤 서른세 살 먹은 한 남자가 죽었다고 지진이 왜 일어납니까? 일종의 타이밍인가요? 세상에 어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하늘이 어두워지고 지진이 일어나는 이런 징조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까? 없지요? 없는 것을 국가들 마다 신화라고 해서 국가의 시조나 종교의 시조에 대해서는 구라를 치고 있어요.

 

우리 선조가 돌아갔는데 그때 갑자기 하늘의 색이 변하고 이러쿵저러쿵 하는데 그것은 다 베낀 것이고 실제로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는데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시간 맞춰서 성소 휘장 찢으라는 식으로 했습니까? 무덤이 왜 열립니까? 무덤이 열렸다고 하거든요. 무덤이 열리려면 장정이 얼마나 필요하겠어요? 예수님의 몸은 죽었는데 성도의 몸은 일어나고, 이것이 마태복음 27장 52절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징조라는 거예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세요.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림을 생각하세요.”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은 이 우주와 연관이 되어 있는 몸입니다.

 

주님이 죽었을 때 하늘도 캄캄해지고 그리고 주님이 앞으로 부활될 몸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보다 먼저 소생된 몸들이 공동묘지에서 살아서 나왔어요. 이 사실을 여러분이 믿으라고 제가 부탁하는 것은 ……, 결국은 우리 몸은 나밖에 몰라요. 그런데 우리 몸은 나밖에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이 장만한 나의 자리는 나밖에 모르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살고 나를 인하여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용도로, 우리가 동의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쓰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기온이 37도나 38도 오르는 것은 무심코 “와, 더워 죽겠다.” 이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옆에서 그 소리 듣고는 “진짜 덥지? 더워죽지만 우리는 살거든” 이렇게 차마 말은 못해도 속으로 그런 내색이라고 가지는 용도로 활용하려고 우리를 장수풍뎅이의 굼벵이로 사용하시는 것이 주님의 책략입니다. 그런 용도로 성령 줬지 괜히 성령 줬겠습니까? 성령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났던 그 취지를 이제는 그 아들들을 통해서 확산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서 활용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은 “덥다, 더워!”로 끝나지만 성령 받은 사람은 “더워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렇게 죽지만 길이 있다.” 그 길은 모든 사람들을 삭제시키고 오직 한 분에게만 몰입시킨, 오직 한 분의 이름,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이름은 없어요, 오직 그 한 분 예수의 이름으로만 부활이라는, 이제는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새로운 나라가 그 한분의 공로로만 마련되었다는 그 취지를 우리를 통해서 반복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성령 받아서 밥 해먹고 떡 해먹고 수제비 해 먹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이 혹독한 육신의 썩어짐의 비명소리와 탄식은 피 밖에 있는 사람이나 우리나 동일합니다. 역시 날 더우면 짜증나고 먹을 것이 없으면 굶어죽어야 되는 입장이에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복된 날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절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주님의 책략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히 그야말로 벌레처럼 사용하시는 겁니다. 일부러 썩을 것으로 심어버려요. 처음부터 안 썩을 것이 아니라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내가 봐도 꼴 보기 싫은 것으로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어젯밤 제 꿈에 제 어머니 60대의 활동이 나타났어요. 너무 인자한 모습이에요. 지금은 인자한 모습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고요. 썩을 것으로 점점 될 때 뭐가 가까운가 하면, 내가 어디에 이용당한다는 느낌, 주님한테 이용당하면 제일 좋지요, 안 썩고 싶은데 썩어야 될 이유는 썩지 아니할 세계가 있다는 것을, 그런 길이 있다는 것을 우리를 가지고 주께서 사용해먹기 위해서, 해먹는다는 말이 적당하네요, 사용해 먹기 위해서, 사용해 처먹기 위해서 주께서 우리를 이 땅에 썩는 모습으로, 욕된 모습으로, 본인도 본인을 꼴 보기 싫은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하게 하시는 겁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3-49)

 

기록된 바, 첫 사람은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지만 마지막 사람은 마지막에 하늘에서 났으니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으리라는 이것이 구라가 아닙니다. 이것이 위로삼아 쓴 소설책이 아니에요. 십자가사건은 죽음과 영생의 사흘이라는 간격이 있지만 그 간격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메워집니다. 그러면 성령이 왔다는 것을 뭘 로 증거 할 수 있는가?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니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가짜 사도와 진짜 사도의 판별식을 보여줍니다.

 

가짜 사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예수도 이야기하고 복음도 이야기하고 십자가도 이야기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성령도 언급하지만 진짜 사도바울은 복음 때문에 고생하고 예수님 때문에 고생하고 성령 때문에 고생하고 남들이 알아먹지 못하는 이야기 때문에 남들에게 따돌림 받는 식으로 고난 받는데 이 고난 받으면 받을수록 제대 날짜를 더욱 그리워하는, 죽음의 이유를 제대로 아는, 그래서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온 심정적으로 “길이 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것이 농담 삼아 한 이야기가 아니고 실제상황”이라는 것을 주께서 그 몸을 사용해서 발산되도록 조치하신 겁니다.

 

 

이것은 지식이 아니고요, 성령이 온 사람은 어쩔 수 없어요. 성령께서 그렇게 시키십니다. “내가 길이 아니고 주님이 길입니다. 길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는 막혀 있습니다. 답답하고 더운데 막혀 있어요. 하지만 길이 뚫렸는데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지 우리 인간의 애씀과 착함과 노력의 종교행위들은 아닙니다. 길은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흘린 그 피가 도로의 중심이 되어서 내가 어느 쪽에 있는지 날마다 확인할 수 있는 축복을 미리 맛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런 혜택과 이런 축복, 하나님의 아들들이기에 제공되는 혜택인 것을 다시 한 번 감사하게 하옵소서. 더운 날씨에 더울 수밖에 없고 추운 날씨에 추울 수밖에 없고 돈 없으면 짜증날 수밖에 없고 일이 꼬이면 원망할 수밖에 없는 이 육신, 하지만 육신 외에 육신을 육신이라고 지적하는 성령이 왔기에 저희들은 모든 것을 견디면서 그 길을 따라가는 행복과 축복 안에 놓인 사람 된 것을 주께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첨부파일 : 46강-롬8장 18-19(고난과 영광)130811-이 근호 목사.hwp (37.0K), Down: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