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45강-아들과 고난(롬8;15-17)이근호130804

아빠와 함께 2013. 8. 7. 20:50

아들과 고난(로마서 8: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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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8-04 13:35 
아들과 고난

2013년 8월 4일                           본문 말씀: 로마서 8:15-17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하나님의 영이 주입되므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는 절벽같은 균열이 생겨났습니다. 육신에 속한 사람과 영에 속한 사람들이 서로의 세계로 진입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14절에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으로 인도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어떻게 된단 말입니까?” 하나님께 받은 게 없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욕하고 저주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것이 유입되지 못한 자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하나님의 영’이라는 어디서 생기는가 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어느 마트에서 팝니까? 어디서 구할 수 있어요? 만약에 성령을 구하지 못하여 인도함을 받지 못한다면? 이것은 엄청난 비극으로 끝장납니다. 인간은 육신에 매여있기에 성령을 구입할 수도 그것을 원할 자격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모든 것은 육신 자체를 긍정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육신은 선악과를 따 먹어서 규정받는 개념이기에 육신을 위하여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을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육신이 달리 살아갈 여지도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이는 곧 영은 우리 육신과 접합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육신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악령과 같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5:1-5에 나오는 아니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사단과 성령을 선택한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도리어 사단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가 아니니아를 정죄하거나 돌을 던지기 전에 우리의 평생의 생활태도가 바로 이 아니니아와 삽비라 식으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부부는 헌금을 하고자했고 헌금을 교회에 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교회에서 자신들이 헌금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실천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헌금이나 교회 다니는 것도 내가 원하기 나름이다는 겁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런 생각으로 산 것입니다. 일반인으로 봐서 하등 이상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극히 정상적인 결정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부부는, 사단이라든지 성령이라는 것을 빼고 현실을 구성했습니다. 사단과 성령을 빼고 현실을 구성하게 되면 남는 것은 오직 인간의 자기 결정권 뿐입니다.

고만고만한 인간들이 각자 자기 결정과 노고에 의해서 이 현실이 꾸려져 있다고 믿는 겁니다. 인간말고 그 어떤 외부요인이 여기에 끼어들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 부부에게 지적한 것은, “왜 사도인 나를 속이느냐”가 아닙니다. 즉 인간이 네가 왜 인간인 나를 속이느냐“가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단과 성령을 같이 언급합니다. 성령은 반드시 사단의 지배성을 폭로하시면서 현실에 등장하십니다. 즉 “나는 사단도 모르겠고 성령도 모르겠다. 단지 나는 평소에 타인에게 내 의사를 전달하듯이 신에 대해서 내 의사와 의견을 전달하면 그만이다”고 여기는 식으로 이 아니니아 삽비라 부부는 행동에 대해서 사단의 일이라고 사도 베드로는 단정짓습니다.

인간의 육신이 짓는 죄라는 것은, 가만 있으면서 예수님으로부터 죄인으로 지목받는 정도가 아니라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죄를 발간합니다. 마치 크레이 사격장에 날아다니는 진흙 표적들을 선수들이 총으로 맞추는 것처럼, 소위 “나도 이 정도는 복음을 알고 하나님을 잘 압니다”고 하면서 행동하는 모든 행동들에 대해서 하나님은 쏘아버립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냥감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을 이미 지니고 있는 인간으로서 성령의 세계, 곧 하나님의 아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성립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해졌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님이 채택한 육신은 오직 예수님 육신 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육신은 성령에 의해서 출현했습니다.

요단강에서 성령님은 비둘기같이 예수님의 육신 위에 내려앉았습니다. 이는 구약 때부터 줄곧 이어져온 언약의 성취자가 예수님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는 자리까지 계속 나아가셔야 하는데 이는 언약완성이란 예수님은 살리고 인간을 죽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서는 아니되고 예수님이 살아나셔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언약완성태입니다. 오늘 본문에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이 아들되심을 위하여 동원되고 짜여져서 일어나야 하기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고린도후서 5:15에 보면,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의 육신으로서 우리 육신을 대체하려고 하십니다.

값을 주고 산 육신은 예수님의 몸의 위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모되고 활동됩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시는 ‘고난’이란 곧 성령받은 사람들만이 나타내는 독특한 현상인데 이 고난의 의미는 세상살이 하는데 고생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 육신이 보여줄 한계는 다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것들이 각자 대장질을 하고 싶어한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남들이 알아줄 때만 자기 중심의 현실감을 느낍니다. 남들이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하면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성령께서 성도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하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처럼 찌질이 인생으로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십자가와 부활만이 진정한 현실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특이한 현실을 참된 현실로 인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8-07 13:39 
45강-롬8장 15-17(아들과 고난)1308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15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9페이지입니다.



로마서 8:15-17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 있어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경에 보게 되면 하나님께 뭔가 받은 것이 없으면 하나님께 버리운 자라, 이런 방정식이 성립이 됩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으면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욕한다고 버림받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대로 보통 사람으로 있는데 추가적으로 제공된 것이 없으면 버림받은 사람이고 추가적으로 제공된 것이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다. 추가적으로 받게 되면 그 사람은 뭐를 알게 되느냐 하면, 추가적으로 받은 것은 이것이고 현재 내가 지니고 있으면서 그동안 살아온 것은 이것이고, 그 두 개가 뚜렷하게 구분되는 겁니다.



‘아, 이것은 추가적으로 받은 것이고 이것은 그냥 일반사람하고 다를 바 없이 공통 적으로 갖고 있는 요소가 이것이구나.’라고 구분이 되는 겁니다. 일반사람과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육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받은 것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14절에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에서 하나님의 영이 추가적으로 받은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추가적으로 받은 것과 육신이 섞이지 않으니까 결국 육신이라 하는 것은 어머니가 임신해서 자식을 낳듯이 일반적으로 다 생기고 생기는 그 사실, 그것이 육신인데 하나님의 영이라는 것은 어디서 생기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요.



칠성시장에서 팝니까? 마트에서 팔아요? 우리가 갖고 있는 몸은 부모가 물려준 몸이죠. 부모 없는 자식은 없잖아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종교는 부모한테 잘하면 복 받는다는 식으로 정립이 되어 있습니다. 불교도 그렇고 다른 종교도 그렇고, “부모한테 잘해라. 복 받는다.” 그런데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께 추가해서 받은 것이 없으면 너는 복 받는 것이 아니고 저주 받는다.”고. 얼마나 큰 차이가 납니까? 하나님께서 성령 이야기를 함으로써, 칠성시장이나 서문시장에서 팔지 않는 하나님의 영을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세계와 성령의 세계의 절벽을 만들어 놓았어요. 


건너가고자 해도 건너갈 수 없는, 완전히 갈라진 거예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가 세상에서 딱 붙어살았어요. 그랬는데 죽는 순간 갈라져버렸어요. 큰 계곡이 있어서 거지 나사로가 살던 동네에서 이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건너올 수 없고 지옥 불에 있는 부자입장에서도 거지 나사로가 보고 싶어도 건너갈 수가 없어요. 엄청난 계곡이라 최고의 등산가를 동원해도 건너갈 수가 없어요. 쫙 갈라진 거예요.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두 쪽으로 갈라지게 하는 겁니다. 이쪽 차원과 저쪽 차원,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 모든 연결된 것을 다 끊어버리고 도저히 인간의 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육신의 힘이죠, 육신의 힘으로는 아무리 용쓰고 애써도 그쪽으로 건너갈 수 없는 겁니다.

육신을 갈고 닦고, 육신을 교육하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금식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목사 섬기고, 별 짓을 다 해봐야 버림받은 자입니다. 버림받은 자. 하나님은 성령을 받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성령 받은 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해서 그쪽을 뭐로 보느냐하면, 그쪽을 생명이라 하는 거예요. 에덴동산에 나무가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아무도 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한쪽은 맛을 다 봤어요. 선악과 따먹고 대대로 맛을 보게 해서 모든 인간은 선악과 맛을 다 봤습니다. 그런데 한 나무는, 생명나무는 아무도 맛을 본 사람이 없어요.

“선악과를 따먹었느냐?” “예, 따먹었습니다.” “그러면 생명나무 따 먹지 마.” 이런 원칙이 있었어요. 선악과를 안 따먹은 사람은 따먹어도 되는데 선악과를 따먹은 이상은 생명나무는 못 따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따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생명이라고 하거든요. 그게 진짜 생명이라는 말이지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 된 사람만 생명나무를 먹게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천국이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쪽만 생명이 있다는 말은 이쪽은 사실은 육신의 이 세상은 생존자들이 아닙니다. 

같이 살고 움직이니까 마치 서로가 다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생존자들이 아니고 죽은 자들이에요. 그것을 두 자로 좀비라고 하는 겁니다. 좀비에요. 북한의 평양 네거리에서 수신호 하고 있는 여자 교통순경 봤지요? 좀비입니다. 나이트클럽에서 춤추고 있는 머슴애들이나 아가씨들 봤지요? 좀비들이에요. 생존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구도 성경을 즐겁게 볼 자가 없어야 되는데 이상하게 성경을 사람들이 즐겁게 봐요. 뭔가 잘못보고 있는 겁니다. 즐거울 내용들이 아니에요.

로마서 7장 9절에 보면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을 때는 나를 내가 생존자라고 간주했는데,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죽었도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까 죽었더라, 는 말을 한다고 해서 생존자로 쳐주는 것도 아니고 죽어가는 채로 좀비가 “나는 죽었더라.”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이것이 로마서 7장 9절에 나와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성경을 즐겁게 보는지 모르겠어요. 성경을 제대로 알면 즐겁게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거의 안봅니다. 즐거울 거리가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절벽을 만들어 놓았어요. 절벽을 만들어놓아 버리고 이쪽 세계의 소위 사람들이 까부는 모습을 성령의 세계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바라보는 같은 안목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자는 거지요. 그러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나님의 아들 되고 영생을 얻는데 성령을 어디서 구하는가, 돈 주고 사면되는데 그 판매처가 어디냐는 겁니다. 이게 로또도 아니고 성령을 구하고 싶은데 어디서 성령을 구할 수 있느냐 하는 이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걸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이 어디서 생기는가? 사도행전 5장에 보면 거기에 성령이 나옵니다. 지금 또 원칙 이야기를 합시다. 성령이 나올 때는 반드시 사탄, 악령도 같이 병행해서 나온다는 겁니다. 악령이 안 나오고 성령만 나오는 법은 없어요. 성령이 딱 나오면 ‘아하, 이게 악령의 일이구나.’를 같이 병행해서 알고 있을 때 성령 받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삽비라와 더불어서, 아내도 같이 동조 했지요, 밭을 판 소유 얼마를 감춘 채 사도들 발 앞에 헌금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여기서 성령을 언급합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악마가 너의 마음에 가득하니까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의 얼마를 감추었다고 사도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는 베드로 입장을 얼른 동조하지 마시고요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그 마음을 우리가 먼저 헤아려봅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도 모르고 그 다음에 뭐냐, 성령 모르면 악령도 모르는 거예요.

사람이 모른다는 말은 없다는 뜻이에요. 성령? 없어. 사단? 그런 것 없어. 귀신? 없어. 세상에 있는 것은 이 육신뿐이고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이 육신이 자기의지대로 내가 하고 싶을 때 그게 결과로 나오는 거예요. 그것이 노동의 결실이라고 하는데 내가 헌금하고 싶으면 헌금 하는 것이고 내가 헌금 안하고 싶으면 안하는 것이고, 내가 웃고 싶으면 웃는 것이고 울고 싶으면 우는 것이고, 이 세상은 살아 있는 것이 내 육신이 살아 있으니까, 내가 살아 있으니까, 그리고 나와 똑같은 인간들도 살아 있으니까. 같은 살아있는 인간들의 총 집합, 그것이 세상이고 그것이 현실이다,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아나니아 삽비라 이야기에서는 뭘 빼놓았느냐 하면, 악령, 귀신, 다 빼버리고 동시에 성령도 빼버리고 차 빼고 포 빼고 나머지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세상현실이고 이것이 바로 세상사는 것이고 여기서 내가 살기 위해서는 나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내 선택 여하에 따라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온다, 이게 세상사는 전부다, 끝! 사람은 이렇게 사는 거야. 내가 교회 가고 싶으면 가고 안가고 싶으면 안가고, 내가 예수 믿고 싶으면 믿고 안 믿고 싶으면 안 믿고, 내가 예수 안 믿는 것은 안 믿고 싶어서 안 믿는 것이다. 끝! 이것은 나의 결정이고 나의 판단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아나니아 삽비라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아나니아 삽비라 보고 돌 던질 사람 나와 보라고 해요. 아무도 없어요. 왜, 평소에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니까. “여보! 헌금 좀 할까?” “너무 많다.” “그래? 얼마 빼고 하지.” 다들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다들! 다들 그렇게 하잖아요. 헌금 막 하려고 하는데 “아빠! 영어 학원!” “알았다, 알았어. 가만 있자, 일단 십만 원 빼놓고…….” 다들 그렇게 살아가잖아요. 뭐가 이상합니까? 성경에 나오니까 우리는 돌 던질 준비 하고 있는 겁니까? 그 돌 우리한테 던지세요. 

아나니아 삽비라는 평소에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고 그 현실에 적응해서 살아가는 제대로 된 똑똑한 인생임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단이 났네요, 사단이. 베드로가 헌금 몇 푼 내면 고맙다고 하고 건지면 되지 시비를 왜 겁니까? 베드로는 돈 아쉬운 것도 없는 모양이라. “아이고, 고맙습니다. 봉투에 넣어서 주니 이게 목돈인데 푼돈 같으면 그냥 줬을 텐데, 참 고맙습니다.” 하고 날름 받아 챙겨야 될 사람이 헌금해도 문제라, 헌금을 해도. “아나니아야, 네 속에 사탄, 악령이 가득하구나. 네가 성령이 있다는 것을 왜 모르고 네가 헌금을 왜 이 따위 식으로 하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4)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날 목사가 교인들 보고 “저, 집사님! 이 헌금이 다가 아닌 것 같은데 소문에 땅 판 값이 7억이라던데 십일조면 7천을 내야지 왜 3천만 냅니까? 소문 다 나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이렇게 할 때 그 집사님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 내가 악령이 가득해서 성령을 속였구나.” 이렇게 나올 줄 압니까?

“목사, 네 일이나 똑바로 해라. 다른 교회에 내버릴까? 어디서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있나.”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그러면 목사가 “아이고, 내가 말을 잘못했나? 왜 이러십니까? 제가 괜히 한소리 한 것을 가지고. 화를 좀 가라앉히세요.” 이렇게 나와요.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것은 뭐냐, 일반사람들을 이해 못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 자체를 이해를 못해요. “이런 식으로 성경이 나오신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못삽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불평이 늘어져요. 누가복음 9장 61절, 62절에 보면 이것은 아나니아 삽비라보다 더 심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이야기인데, 어떤 제자가 예수님 따라가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하니까 그 제자가 하는 말이 “아버지에게 작별인사나 하고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하니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그래, 자식 된 도리로서는 당연하다. 아버지에게 인사하고 오너라. 내가 기다리마.”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아는 보통 상식이고 합당하지요. 그런데 제자가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하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주님이 오버하신 것 아닌가요? 인사도 못해요?

누가 성경을 즐겁게 보십니까? 아버지하고 인사하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데 그 작별인사조차도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은 면면이고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행동이라는 겁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만약에 그 사람이 작별인사를 안하고 “작별인사도 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 ‘아, 진짜 자식 된 도리로서 이러면 안 되지만 예수님의 명령이니까, 영생이 주께 있으니까 따라가야지.’ 하고 따라가 봤자, 1년 따라가고 2년 따라가 봤자 마음속에는 ‘나 혼자 천당 가는 것은 좋은데 떠나올 때 부모와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지금 부모는 돌아가셨는지 어쩐지 이래 가지고 자식이 자식도 아니다. 내가 이렇게 살면 뭐하는지, 이렇게 나 혼자 천당 가면 뭐하는지 자식 도리도 못하는데 …….’ 이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예요.

바로 그 마음, 그 마음이 뭐냐, 절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잘못된 판단이에요. 육신에서 천국까지 건너가는 방법은 예수님 따라 간다고 해서 성사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을 따라가도 절대로 주님을 따라간 적이 없습니다. 주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나를 따르게 하는 것은 주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끝까지 따라가도 결국 끝까지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다 배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는 원칙에 부합되는 거예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 되는 겁니다. 도저히 할 수가 없어요. 어떤 40대 아저씨가 차를 몰고 가다 길 가의 보도 위를 걸어가는 사람을 치었어요. 수십 명 다쳤는데 “당신은 길가로 질주해서 사람들을 다치게 했는가?” 하니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건강하고 웃으면서 길을 가는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는 거예요. 왜 건강하냐 그 말입니다. 그리고 건강하면 건강한대로 과분한줄 알고 조용하게 입 다물고 가면 될 것을 왜 아줌마들이 낄낄거리면서 길을 갔느냐, 한 거예요. 꼴 보기 싫다고 차로 사람들을 밀어버렸어요.

우리의 속사정을 그대로 여실하게 대변해주고 있는 장면들이지요. 그런 장면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이야기하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에요. 우리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의 한계이야기를 하고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죄를 이길 수 없고 죄가 인간을 이런 식으로 이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요새 천지일보 논쟁이 나오는데 그 논쟁에 제 글이 쓰여 있어요. 질문지를 보면서 내가 느낀 점은 뭐냐,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나 여기 있고 하나님은 저쪽에 계시고 여기 있는 내가 저쪽에 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비책이 되는 정보를 알려 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할 것이니 여기 있는 나를 그쪽 나라에 보내 달라.’는 식으로 사람들이 생각해요. 

우리가 교회 올 때도 그런 생각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우리를 구원하거나 건지시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이 장총을 쥐고 있어요. 긴 총을 쥐고 있는데 올림픽 사격에 클레이라는 종목이 있습니다. 클레이의 특징이 뭐냐, 다른 것은 표적지가 붙어 있고 그냥 쏘기만 하면 되는데 진흙으로 만든 이 표적은 공중으로 솟구쳐요. 움직이는 표적을 쏘는 겁니다. 주님의 방법은 뭐냐, 우리보고 움직이라는 거예요. 헌금을 반으로 숨기든지, 하여튼 움직이라는 겁니다.

교회 오든 말든 하여튼 움직이라는 거지요. 움직이면 쏴버리는 거예요. 탕! 탕! 우리는 사냥감이라. 나는 이제 복음 알았다, 하고 설치잖아요. 설치면 벌써 총알이 와 있어요. 나는 십자가를 안다, 십자가를 안다고 설치게 되면 그대로 쏘는 거예요. 뭘 알았다, 챙겼다, 성령 받았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 알았다. 움직여보렴.’ 움직이면 무조건 쏘는 거예요. 탕! 탕! 다 쏘는 겁니다. 쏘게 되면 어느 날 우리도 차 몰고 나는 아픈데 왜 너희는 건강하냐고 하면서 길 가는 사람들 차로 밀어버리는 수가 있는 거예요.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이 마치 뭐와 같으냐하면, 이게 실제 그렇지만, 죽음이라는 천 위에 있는 그냥 무늬 같은 것에 불과한 거예요. 인생이라 하는 것이 그냥 막 위의 인생이에요. 막이라는 천위의. 거기서 온갖 그림을 그리고 자기 인생을 즐겨도 주께서 찢어버리면 그 천과 함께 그 위에 그려진 우리 인생도 한꺼번에 다 날라 가버립니다. 죽는다는 것은 데이터가 자 삭제되는 거예요. 컴퓨터 할 때 삭제, 취소, 나오잖아요. 주께서 삭제를 눌러버려요. 이번 수련회 하면서 제일 은혜 받은 것은 뭐냐 하면, 언젠가는 내가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사라진다면 지금 하는 이 일도 남겨둬 봐야 결국 사라질 것을 지금 미리 당겨서 일을 하고 있고 행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주님의 장총은 90을 살든 100까지 살든 결국은 움직이는 것은 다 쏴버리니까 없애버려요. 여름 되면 사람들이 밤마다 모기약을 뿌려서 모기를 사라지게 하잖아요. 여름철에 기승을 부리는 모기는 우리한테 필요 없고 우리를 귀찮게 해요. 모기도 그렇고 파리, 쥐, 바퀴벌레, 그 중에 하나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 우리는 선악과 따먹었기에 하나님이 원래 의도했던 그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은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 아들, 오직 성령으로 인도함 받는 그 사람만 인간이고 나머지는 좀비고 바퀴벌레고 모기나 파리, 그런 겁니다. 지렁이죠. 그러면 왜 살게 하는가?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 없애버릴 구실, 이렇게 살았으니 당연히 없어져야 한다고 없애는 거예요. 주님의 뜻은 이거예요. “제발 좀 없어져 줘.” 그겁니다. 우리가 금요철야 기도하면서, 우리교회야 금요철야기도회 하지 않지만 교회들이 금요철야기도회에서 “주여,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내 꿈을 이루어주옵소서.”할 때 주께서는 “없어져라. 없어져라. 모기야, 파리야, 없어져라.” 이렇게 없어져야 돼요.

자꾸 없어져야 한다는 그것을 모르고 자기가 인간도 아닌 것이 살려고 하니까 주님께서는 보통 과격한 말로 해서는 안 되지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이런 과격한 말씀을 할 수밖에 없어요. 누가 성경을 즐겁게 봅니까? 얼마 전에 박용식이라는 탤런트가 죽었어요. 댓글이 죽 달렸습니다. 댓글 중에 이런 것이 있었어요. “저승사자님, 사람 잘못 골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분이 가실 분이 아닌데.” 박용식이라는 분이 전 전 대통령하고 같아서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닮은 분이에요.

댓글 단 사람은 진짜 죽을 사람은 안 죽고 저승사자가 사람을 잘 못 고른 거예요. 전두환은 그냥 살아 있고 비슷하게 닮은 사람을 데려가 버린 거예요. 박 용식 씨 죽은 것을 상당히 아까워들 했어요. 그런데 모든 사람은 결국 죽습니다. 끊어진 그 계속은 인간이 몸부림치면서 뭘 해도 소용없어요. 끊어지는 겁니다. 안 돼요. 선악과라는 천이 있고 그 천을 찢어버리면 그 육신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그 천이 구멍 나고 찢어지면서 다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부터 생각해야 돼요. “하나님이여, 제가 육신인데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어디 가서 성령을 구할 수 있습니까?”라는 사고방식, 그 사고방식 자체를 이제는 우리가 중지해야 됩니다. 



성령은 육신과 결합이 안돼요. 성령은 육신과 결합이 안 됩니다. 쇳덩이를 딱 풀로 붙인다고 해서 붙는 것이 아니잖아요. 쇳덩어리는 용접을 해야 되지 종이 바르는 풀로 그 무거운 쇳덩어리가 붙겠습니까? 육신과 결합될 수 있는 성령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천국 갈 희망을 갖지 마세요. 오늘 설교가 이것으로 끝나면 안 되겠지요? 그러면 성령과 결합된 육신이 과연 없는가? 딱 한 분계십니다. 바로 출생부터 성령에 의해서 출생하신 육신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이라는 육신만 원합니다. 육신과 결합해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주님과 함께 결합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예수님과 결합하는 이유는 예수님이야 말로 구약 때부터 내려왔던 하나님의 약속, 언약을 성취할 그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을 아주 어려운 말로 로마서 5장에서는 마지막 아담, 다른 데 보면 두 번째 아담이라고 한 거예요. 이것은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성경에 나왔기에 저보고 어렵다 하지 말고 성경보고 어렵다 하세요. 성경에서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이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같이 영생하고 싶은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뿐이에요. 하나님이 그렇게 작심했기에 거기에 대해서 어떤 변동사항은 없습니다. 괜히 하나님 보고 대 놓고 막 하지 마세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예수님만이 참된 육신이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다른 사람은 아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은 소용돌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여러분들이 그것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아야 될 이유가 그것이 미처 여러분들이 몰랐던 복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복음 내용을 구성하라고 여러분 주변에 쉴 새 없이 일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 교회 가면 복음 듣고 구원 받겠지. 그런데 내 남편은 왜 교회를 안 나오지? 그래, 교회 같이 와서 같이 복음 듣고 구원 받으면 좋겠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고 복음적이다.’라고 생각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그것은 복음을 빙자한 자기 자신의 자존심과 관련된 것, 자기 자신의 육신의 욕망과 관련된 일인 거예요. 쉽게 해서 인간들의 모든 행동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버려버린 그 내 인생을 기어이 내 힘으로 돌이켜서 원상복귀하고야 말겠다는 오기와 주먹다짐, 이런 것들이 인간의 행동으로 나와요. 

우리 빌라 앞 동에 사는 어떤 분이 있는데 우리가 이사 오기 십여 년 전부터 중풍이 걸려서 다리를 전다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아주 젊은 아줌마였는데 그렇게 되었답니다. 그 분은 아침저녁으로 이 땡볕에 운동한다고 진짜 이 악물고 기어이 운동을 합니다. 제가 인사를 해도 받아주지도 않아요. 굉장히 차가워요. 절룩거리면서 하는데 그 오기가 아주 대단합니다. 물론 이것은 그분에 대한 저의 일방적 생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분 생각은 물론 아니지요. 외간남자와 이야기하는 것이 싫어서 그럴 수도 있으니까 일방적인 제 생각이지만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복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원칙에 따라서 그분에게는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모든 것을 다 끄집어 당기는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예수를 믿고 두 손 모으고 기도를 하고 열심히 헌금을 하고 전도를 해도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 버려도 나는 내 인생을 내 손으로 내 맘에 족하도록 회복하고야 말리라는 집념과 집착으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이 점을 고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성령을 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함으로 말미암아 소위 귀한 부모로부터 받은 이 귀한 육신을 가지고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것, 이 육신을 육신가지고 천국으로 밀어 넣어보겠다는 이 모든 시도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아서라. 제발 네 힘만 빼지 말고 그만 두라.”는 통보를 해줄 때 그것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것을 양자라고 해요,
양자. 로마서 오늘 본문 8장 15절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아바 아버지라, 양자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진짜 아들은 따로 있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의 현실은 내 육신을 중심으로 해서 어쨌든 이 세상을 이용해서 만족스러운 내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중심의 현실과 세상관을 우리에게 넣어줍니다. 그런데 그 성령은 어디서 나오느냐, 예수님의 영, 예수님에게서 나오거든요. 


그러면 그 영이 예수님에게서 나왔다면 예수님의 육신과 우리 육신을 성령께서는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제발 네가 살지 말고 예수님을 살게 하라. 성령 받는 너의 임무는 너를 살리는 것이 너의 임무가 아니고 예수님이 살리는 그것이 너의 임무”라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15절에 나오는 말씀, 구원을 받는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함이라고 되어 있어요. 참, 성경이 즐겁게 읽을 내용이 아니지요? 우리 육신은 살고자 하는 내 육신을 위하여 내 육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4,15) 여기 “산자들로 하여금” 이 말은 뭐냐 하면, 이미 죽은 자가 따로 있는데 예수님 때문에 살아 있는 자들에게만 이야기하는 거예요. 산 자들 입장에서는 옛날에 예수님 모를 때의 사람을 죽은 자로 인정하라는 말이지요.

“죽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산다더라. 더 이상 너는 이미 죽은 너를 위해서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 “그러면 저는요?” “너는 이미 죽었다가 사신 자를 위해서 살게 하려고 너를 살려냈다.”는 겁니다. 그 말은 “예수님만이 참된 아들이십니다.”라고 부르짖게 하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참된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영으로서 십자가 지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임하게 되면……,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성령은 육신과 결합이 안 된다고 했지요. 육신은 성령과 결합이 안돼요.

안되는데 어떻게 성령이 임할 수가 있는가? 예수님의 육신은 성령이 함께 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이 차고 들어와요. 그러면 우리는 누에가 껍질 벗듯이 슬슬 우리의 껍질을, 허물을 벗겨 내야 돼요. 더러운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피부가 벗겨지듯이, 바람에 허물이 벗겨져서 날라 가듯이 벗겨져야 돼요. 우리의 겉 사람은 날라 가버리고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뭔가 이질적인, 기적이죠, 뭔가 허물이 벗겨지면서 바뀌어 지는 현상, 뭔가 속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현상이 계속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일어나면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느낌과 의식이 마구 솟아나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람은! 여러분, 제 말 이해되지요? 왜, 느낌을 아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육신 그대로입니다. 평소에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거예요. 언젠가도 이야기했지만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면서 사는 겁니다. ‘나도 너처럼 될 수 있어.’ 맨날 공부 못하는 인간들끼리 답안지 서로 베끼듯이 해답도 모르는 인간들끼리 서로 베끼면서 가고 있는 거예요. ‘사람의 노동이란 수고의 결정이다. 그것이 나를 살린다.’ 

그래서 모든 목적이 뭐냐, “신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어떻게 하면 내가 삽니까?”라고 한다면 성령께서는 그 ‘너’라는 자리에 ‘너’가 중심되지 말고 예수님, 성령님이 중심이 되어서 이제는 네 중심이 바뀌었다고 통보해주는 그 분이 성령이에요. 이제는 바뀐 거예요. 그래서 이번 수련회 때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제가 누구십니까?” 묻지 말고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을 주께서는 일으키십니까? 주님은 저를 눕혀놓고 저에게 무슨 일을 매일 같이 일을 발현시킵니까?”라고 물으라고요. 그것은 “네가 사는 것이 아니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령께서 그런 일을 하”시는 거예요.

CF에 이런 CF가 있잖아요. 어떤 탤런트가 닭고기를 뜯으면서 너무 맛있으니까 이런 말을 해요. “도대체 이 닭고기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도대체 주님께서는 우리를 쥐고서, 우리는 그것을 느껴요, “주여, 저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왜 저는 죽어도 살아야 되고 왜 우리는 죽어도 천국 가야 됩니까? 도대체 무슨 짓을 저에게 했습니까?” 건너 갈 수 없는 것을, 이 죄 많은 육신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자신의 육신으로 간주하시는 겁니다. 이미 회수해 갔으니까요.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이 “아들과 고난”인데 이 고난 대목은 17절에 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그러니까 성령 받았습니다, 안 받았습니다, 확정할 수 있는 기준을 목사님이 이야기해 보세요.”라고 한다면 “복음을 위해서 고난 받으면 성령 받은 사람이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 받지 않으면 그것은 버린 자식입니다.”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이 로마서 8장 17절에 근거해서. 그런데 문제는 그 고난이 뭐냐 그 말이지요. 고난은 고생이 아닙니다. 

고난이 뭐냐, 이것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함께 있으면서 언급이 되었어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 육신의 본성을 폭로시킵니다. 뭐냐 하면, 대장질 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봉사했잖아요. 봉사해서는 안 알아주잖아요. 안 알아주면 봉사 그만 합니다. 봉사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봉사하는 가운데서 자신도 모르게 대장질 하고 싶은 생각이 많이 드는 겁니다. 이것은 어느 단체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마찬가지에요. 제가 설거지 좀 할라 치면 아내가 못하게 합니다. 해 봐야 밥 태기가 그냥 묻어 있으니까 아예 못하게 하는 거지요. 

안다는 것은 그만큼 권력을 쥐고 있다는 거예요. 교회의 전등 누가 켜고 누가 끄는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그런데 어떤 집사님 보고 “집사님이 아침 일찍 오셔서 다 하세요.”라고 하게 되면 그 분은 봉사하는 순간 우리교회의 권력자가 되고 일인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인자를 안 알아주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 교회 안 나와요. 이걸 누가 아는가? 우리교인들이 알기 때문에 아예 봉사를 안 해요. 이걸 미리 꿰뚫어보고 아예 아무것도 안 해요. 그러면 안하면 대장질 안하겠다는 뜻입니까?

아니지요. 고난이라는 것은 뭐냐, 대장질 하고 싶은데! 참 이 이야기하고 싶어서 얼마나 참았는지 모르겠어요, 고난이란 대장질 하고 싶은데 못하게 되는 그것이 고난이에요. 나는 모든 것을 아는데 남들이 그것을 안 알아줄 때 그것이 고난입니다. 사람이 밥이 없어서 고난이 아니에요. 굶어죽게 되어서 사람이 자살하는 것이 아니고 자살하는 것은 남들이 날 안 알아주기에 자살하는 거예요. 남성연대 대표가 왜 자살했는데요? 시민들이 안 알아주니까 자살한 거예요. 목사가 되어서 제일 큰 시험이 뭐냐 하면, 자기가 목사인 것을 아무도 안 알아준다는 거예요. 

미치고 환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목사가 선교사로 나가는 거예요. 선교사로 나가면 무식한 아프리카 사람들이 목사라고 알아주거든요. 왜, 돈 가져오니까. 모든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사랑받기 위해서. 부잣집 며느리로 가는 사람들이 쌀이 없어서 이혼을 합니까, 옷이 없어서 이혼을 합니까? 자기가치를 안 알아주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아가씨들 너무 좋은 집으로 시집가면 안 알아줘요. 주님의 고난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 이 땅에 살 때 찌질이로 살았거든요, 찌질이로! “이 찌질이를 믿어라. 그러면 영생얻는다.” 그 말이거든요. 거지 나사로, 세상에 그런 찌질이가 또 없습니다. 돈이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개마저 자기를 무시했는데요.

그래도 천국 갔잖아요. 사람의 고난이라 하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고 남이 나를 무시하니까 내가 더 이상 나답다는 것을 누가 인정해주고 확정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사람은 타인을 통해서 자아를 발견하는데 그것이 없을 때 ‘내가 사니 뭐하나, 죽지.’ 그렇게 되는 거예요. 거기에 문제점이 뭐냐 하면, 남이 안 알아줘도 성경말씀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몰라서 그래요. 성경말씀은 안 알아줘도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은 누가 뭐래도 이것은 현실이에요. 안 알아줘도 현실이고 알아줘도 현실이에요. 

세상은 십자가 중심으로, 주님의 심판 중심으로 갑니다. 마귀가 가짜 현실을 자꾸 양산해내니까 진짜 현실인 십자가는 자꾸 우리 눈에 가려지는 거예요. 그래서 아나니아 삽비라가 ‘남들 다 헌금하는데 나만 갈구겠는가?’ 하고 헌금했는데 주께서는 그 사람만 갈군 거예요.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게 하는데 그 사람을 갈군 것은 그 사람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왜, 천이 찢어질 수 있는 기회, 찢어질 때 진짜 자기의 본 모습은 내가 진즉부터, 애초부터 생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구를 주께서 찢어지게 하기 전에 십자가를 통해서 십자가만이 진정한 현실이고 실제상황이라는 사실을, 그 십자가의 효력 때문에 나 밖에 모르는 내가 이제는 십자가가 감사하고 주님 앞에서만큼은 그야말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활동덕분이고 날마다 장총으로 우리를 쏴대는 주님의 사격술인 것을 우리가 잊지 맙시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사람 닮으면 성공하는 줄 알았습니다. 남들이 칭찬해주면 그것이 하나님의 복인 줄 알았습니다. 그게 사탄의 술책인 것을 성령 받고 보니 알았습니다. 찌질이로 살았던 주님, 주님의 쓴잔 마시기를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육신, 이 죄많은 육신을 날마다 벗겨버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