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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47강-보이지 않는 소망(롭8;23-25)이근호130818

아빠와 함께 2013. 8. 18. 16:51

보이지 않는 소망(로마서 8: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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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8-18 13:32 
보이지 않는 소망

2013년 8월 18일                             본문 말씀: 로마서 8:23-25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 세상은 우리가 은혜 받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받기 위해서 조성해놓은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즐거움과 자기 재미를 누리고자 일방적으로 설쳐대게 됩니다. 이로서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썩어져 내리앉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성령님에 의한 ‘삭제기능’이 가동되는 것입니다.

제거하고 지워버리는 작업, 그 대상은 곧 인간의 소망입니다. 그리고 그 작업을 진행시키는 본부에는 하나님의 소망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설교가 ‘보이지 않는 소망’입니다. 원래 소망이란 보이는 것을 출발지로 삼아 그 범위를 연속으로 확장시켜 점선으로만 표시할 수 있는 대상을 그리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럴 경우, 그 보이지 않는다는 소망마저 실은 그동안 보였던 소망의 일부로서 돌출부분에 해당될 뿐입니다. 뿌리는 여전히 ‘보이는 것’이 두고 있는 바가 됩니다. 물론 하나님 보시기에 가짜이지요. 따라서 온전히 보이지 않는 소망이 되려면 ‘보이는 소망’을 지속적으로 삭제시키는 능력이 발휘되는 그 소망이어야 하겠지요.

한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어느 단란한 저녁 식사 자리에는 귀하게 자라나는 아들 하나도 또 여느 날과 다름없이 투정이 시작됩니다. “엄마, 나 이것 안먹어” 그러면 엄마는 사랑스러운 자식이 내뱉는 응석을 들어줍니다. “그러면 뭘 먹을거야? 그래 이것 안 먹어봤지. 이것 먹자”

그러면 철없이 아이는 또 응석을 합니다. “그것도 먹기 싫어” 엄마가 참다 못해 버럭 고함을 지릅니다. “그러면 뭘 먹고 싶은지 똑바로 말하란 말이야” 그러면 아이가 말하지요. “글세 엄마. 뭘 먹고 싶은지 그것을 모르겠단 말이다” 보이지 않는 소망은 늘 이런 식입니다. 뭘 소망해야 하는지를 모르지만 단지 분명한 것은 ‘보이는 것을’ 소망해서는 아니된다는 점을 날마다 지적받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논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소망’이 현실적으로 존재함을 증명하려면 지속적으로 보이는 소망들이 쉬지 않고 등장되어야 한다는 모순이 생깁니다. 즉 ‘새로운 것’이 결코 ‘보이지 않는 소망’의 대체물이 될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보이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보는 것처럼 매달리기 위해서는 대상 선정이 문제가 아니라 소망하는 주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어느 미장원에 고객이 유명연예인의 사진을 들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미용사에게 들이대면서 이 머리대로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미용사가 그 머리모양대로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거울을 보던 고객은 불만이 가득합니다. 예상보다 자기 머리가 예쁘지 않다는 겁니다. 얼굴 바탕은 고려하지 않고 욕심을 낸 것입니다.

즉 내가 소망하는 것은 보이지 소망이 아닌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 육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성령의 열매’가 나옵니다. 그 반대만이 바로 ‘육신’이라는 말입니다. 육신은 우리를 두고 말하는 표현입니다. 육신은 24시간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생각하는 본성을 보이게 됩니다.

육신은 자신의 본성을 숨기거나 거역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갈라디아서 6:8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육신이 하는 모든 일은 결국 자신을 썩도록 촉진하는 일일 뿐입니다.

예수님 자신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소망’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눈에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그들이 크게 오해할 소지가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들 육신의 소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좋으신 메시아가 오신 것처럼 처음으로 따랐습니다. 하지만 12제자들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3:36에 보면,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니이까?”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묻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예수님의 소망이 남아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베드로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원하는 소망에 예수님께서는 편승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소망을 위해서 살았는데 그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소망’입니다.

인간들은 자기를 부정할 줄 아는 소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또 그런 것을 위하여 기도할 위인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괴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9:59-62를 봅시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진정 유일한 ‘보이지 않는 소망’인 것을 알고자 한다면 본인이 그 바닥을 떠나서 같은 여행자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평소에 기대한 소망은 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과 지옥이란 인간 본인이 골라잡을 사항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여러분, 저 예수가 여러분의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기 위해서 왔습니다”고 하셨다면 결코 예수님은 이 세상을 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소원이란 본인이 계속 살고 싶어서 만들어낸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소망없음’을 말씀하시기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담아버립니다. 모든 인류는 세 십자가가 함께 달린 그 골로다언덕으로 총정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인류를 둘로 나뉘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국과 지옥은 이미 이 땅에서 개시된 것입니다. 지금 벌써 천국 사람도 아니면서 죽어서 천국 가겠다는 것은 다 소용없는 객기에 불과합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만을 소망하기에 진정 천국 백성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성령의 열매’로서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마치 오이 줄기에서 오이라는 열매가 맺어지듯이, 육신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심겨진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육신됨을 확실히 아는 자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 자신의 육신됨을 아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만큼은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즉 구원이란 공간적으로 이 세상을 떠나야 될 문제도 아니요 시간적으로 이 세상 생활과 사별한다고 성사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예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 되면 바로 그 현장이 벌써 하나님 나라요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일방적인 십자가의 효력을 입은 자들이 발생되는 십자가 현장입니다. 거기서면 성령의 열매가 열립니다. 기도합시다.

『성령의 부풀은 열매로서 우리 속에 십자가 용서에 근거한 사랑만이 가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47강-롬8장 23-25(보이지 않는 소망)1308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23절에서 25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50페이지입니다.

로마서 8:23-25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여기 나오는 소망이라 하는 것은 두 종류가 나오는데요, 하나는 우리가 세상에서 눈만 뜨며 갖게 되는 그 소망이 한 가지 있고 또 한 가지 소망이 나오는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이 여기에 나옵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우리보고 제발 죽으라는 겁니다. 이 땅에 볼만한 것은 없다, 이 땅에 네가 누릴만한 것도 없고, 네가 이 땅에 기댈만한 것도 없고, 이 땅에 희망을 가질만한 것도 없고. 이 세상에 대해서 소망을 갖는다면 그것은 눈에 눈곱 끼는 것처럼 무엇이 안보이게 되느냐 하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이 가려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원하는 이 소망을 하나님이 채워주려고 이 땅에 오셨더라면 예수님께서 구태여 죽을 이유는 없어요. 늘 우리 곁에 있으면 “제자들아! 너희 소망이 무엇이냐?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여러분이 원하는 소망을 들어줘서 여러분을 행복하게 만들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나에게 기도를 안 해서 그렇지 기도하고 나에게 매달리기만 하면 여러분 뜻대로 다 해줄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이렇게 주님이 각자에게 찾아다니면서 그렇게 할 것 같으면 주님께서 이 땅에서 죽을 이유가 하등 없어요.

오래 오래 사시면서 우리의 소망을 들어주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었습니다. 죽으신 이유가 나중에 쓴 사도들의 편지에 보면 나와요. 그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가 뭐냐, 주님하고 사고가 안 맞는 것이 죄에요. 주님의 소망은 하나님의 소망인데 우리의 소망은 내 소망이에요. 내가 신처럼 살고 싶어 얻고자 하는 그 소망, 그 소망 때문에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고가 안 맞습니다.

예수님이 그냥 산 속에서 혼자 자살한 것이 아니고 사람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그리고 그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이해하거나 동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은, 심지어 열두 제자마저 목자를 치니 양이 흩어진다는 식으로 다 자기 갈길 찾아서 도망갔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주님, 주님!’ 하지만 사실은 자기 야욕과 야심과 욕망만 채우면서 주님한테 한 몫 볼까 싶어서, 혹시 예수 믿으면 내가 원하는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서 찾아왔다는 것인데 참 주님은 멋있지요, 주님은 그런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절대로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으시면서 쓸쓸히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날 잡아 봐라.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 예수님께서 죽으실 즈음에 베드로가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13장 36절에 보면 나와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우리하고 같이 살지 않고 가기는 어디로 갑니까, 그런 뜻이에요. 베드로는 자기 자리를 고수하고 싶어요. 그 자리를 위해서 자기가 평생을 수고하고 노력을 했고 모든 정신과 혼과 땀과 노력을 이 자리 얻기 위해서 바쳤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떠나겠다는 거예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예수님 답변은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는 곳으로 내가 간다는 겁니다. “네가 가지고 못하는 곳” 다른 말로 하면 “네가 그동안 나를 믿는다고 여기면서 생각했던 모든 소망은 전부 다 헛 소망”이라는 겁니다. 그것조차 죄였다는 겁니다. 방금 이야기한 그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합니다.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한 거예요. 이 말씀은 사람들이 어떤 소망을 한다는 것은 이미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의 연장선에서 뭔가 미래를 소망하게 되어 있어요.

지금까지 가져온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이 보이는 것에서 좀 보상을 받기를 원한다든지, 뭔가 미흡한 구석이 있다든지, 영 내 성에 안 찬다든지, 내 행복의 어떤 요소가 빠져 있다든지, 그 대목만 마저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하게 되어 있어요. 그렇게 기도할 때 기도하는 그 모양새가 보통이 아닙니다. 그 기도하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간절히’ 또는 ‘간곡히’, 그 다음에 ‘부르짖기’, 그것도 모자라면 ‘철야하기’, 물론 커피 마셔가면서, 그것도 모자라면 ‘굶기’, 그것도 모자라면 ‘헌금하고 기도하기’, 돈이 없으면 ‘봉사해주고 기도하기’, 그것도 안 되면 자기기도가 기도발이 약하니 의인의 기도는 들어준다 하니 의인을 찾아가서 ‘대신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기.’

그래서 거기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그래서 얻겠다는 것이 결국은……, 로마서 8장 24절에서 이야기하는 것,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여기에 언급했거든요. 언급을 했다면 적어도 믿는다고 신자라고 자처한다면 교회에서 기도할 때 이렇게 해야 돼요. “주여, 보이는 소망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 사람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교회 부흥시켜 달라는 이런 기도를 하면 안돼요. 선교사 어쩌고 그런 기도를 하면 안돼요. 왜, 그것은 눈에 보이니까. 내 애가 시름시름 아픈데 낫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 하면 안 돼요. 고 3인데 수능시험 보는데 좋은 대학에 가게 해 달라는 그런 기도하면 안돼요.

고부간에 갈등 갖고 기도하면 안 되고 이사 가는 날 잡으려고 기도하면 안 되고 선 받는데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 하면 안 되고 딸이 일곱인데 아들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안 되고 교회가 먼데 교회 가까운데 집 사게 해 달라는 기도 하면 안 되고……, 그런 기도를 하면 안 돼요. 교회 교육관 짓겠다고 땅 사게 해 달라는 그런 기도도 안 되고 목사님 월급 올려줘야 되는데 헌금 좀 나오게 해 달라는 기도 하면 안 되고 미운 집사 빨리 다른 데로 이사 가라고 기도하면 안 되고요. 우리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쓸데없는 것들을 위해서 기도한 거예요.

제자들이 주님 붙들고 전부 다 자기 야망과 야심, 민중들에게 오병이어기적 베풀어서 떡이나 먹여주니까 “우리 임금 삼읍시다.” 해서 막 붙들고 “이젠 주님 가시면 안 됩니다. 목회 합시다.” 붙들 때 주님이 뭐라고 한 줄 압니까? “잠시만 요! 죽었다가 다시 올게요.” 그렇게 했어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했어요. 생명이 없는 것들, 지루하니 인생 살면 뭐합니까? 날씨도 더운데 그냥 갑시다. 그냥 이 세상 떠납시다, 기도하지 마시고. 얼마나 주님께 감사합니까? 다른 것은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되는데 우리 죽는 것은 기도 안 해도 응답이 되게 되어 있어요. 서서히 골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치매도 걸리고 서서히 뭉개집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성경의 해답은 이거예요. 이 세상은 네가 은혜 받는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이 은혜 받는 세상이 이 세상이에요. 우리는 교회 와서 자기 은혜 받는다는 그것만 챙기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어떤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 스스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하나님께서 흡족해 하는가를 하나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봐야 돼요. 하나님의 기쁨을 누가 버려놓았느냐 하면, 인간들이 헛된 소망에 매달려서 버려 놓은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는가, 지우개를 가져 왔어요. 지우개의 기능은 뭐냐, 삭제하는 겁니다.

인간들의 보이는 소망을 전부 다 삭제해 버려요. 그 삭제하는 능력이 무슨 능력이냐, 바로 보이지 않는 소망의 능력입니다. 내가 하는 기도, 기도제목마다 무시당하고 삭제당할 때 그 사람은 지금 구원받고 있는 중입니다. 지금 하나님께 응답받고 있는 중이에요. “네 속마음 다 끄집어 내. 내가 나오는 족족 다 지워줄게. 철야기도하고 싶으면 해. 하는 족족 응답 안 해줄 테니까.” 응답이 한 번 안 오고 두 번 안 오고, 그러면 사람들은 머리를 써요. ‘헌금을 적게 해서 응답이 안 되니 목돈을 한 번 내봐?’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응답 안돼요.

괜히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아 넘어간 거예요. 자기가 목사들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그렇게 될 때 결국 마지막에 우리 입에서 나오는 것은 베드로가 했던 그 응답이 나와야 됩니다. 뭐냐, “주여, 여기 있는 나를 두고 도대체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둔 주님의 소망은 뭐냐 하면, 우리가 주님의 가는 곳에 있기를 소망하기를 주님께서 소망한 거예요. 그 때를 참을성 있게 기다린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지요. 본문 8장 25절에 보면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보지 못하는 것은요, “보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이 참 어려운 말인데 보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쉽게 설명해도 이해가 될지는 장담 못하겠습니다만. 엄마가 애하고 아침마다 싸웁니다. “얘야, 이것 한 번 먹어봐라.” “밥 먹기 싫어. 맛없어.” “그러면 이 햄 좀 먹어봐라.” “그것도 질렸어. 싫어.” “그러면 시금치다. 이것 먹으면 힘난다. 먹어봐라.” “그것도 싫어.” 그래서 엄마가 화가 난 거예요. “대체 네가 먹고 싶은 것이 뭐냐? 네가 먹고 싶은 것을 이야기해라.” 하니까 애가 하는 말이 “글쎄 엄마, 내가 먹고 싶은 것이 뭔지를 모르겠다니까.”

첨에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소망하는 것,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일단 눈에 보이는 것을 기대해요. 기대해놓고 현재 나한테는 없는데 남이 가진 것, 타인이 갖고 있는 것을 우리는 탐내는 식으로 소망하게 되어 있어요. 나한테는 없는데 저쪽이 갖고 있는 것, 보리밥만 먹고 있을 때 우리는 하얀 쌀밥에 소고기가 먹고 싶은 거예요. 맨 날 냄새나는 수제비만 먹고 있을 때 진짜 하얀 쌀밥에 소고기국 먹고 싶다는 이것이 북한 사람들의 구호거든요. 그런데 맨 날 하얀 쌀밥에 소고기국만 먹는 사람은 뭐가 소망이냐 하면 보리밥 먹는 것이 소망이에요.

‘어디 보리밥 잘하는 집 없나? 보리밥 뷔페가 없나?’ 그것 찾아다닌다고요. 사람의 소망이란 돌고 도는 거예요. 나한테 없으면 무조건 소망하게 되어 있어요. 인간이 소망하는 것은 내게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애에게 “떡 먹어라” 할 때는 애가 떡을 잘 안 먹어요. 그런데 엄마가 떡을 몰래 선반위에 올려놓고 “절대로 내가 올 때까지 먹지 말라.”고 하면 벌써 다 먹었어요.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요. 잠언서에 나와요.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고. 몰래 먹는 떡이 맛있어요.

죄라는 것도 그냥 내놓고 지으라고 하면 재미없어서 못 져요. 죄라는 것은 하지 말라고 해 줘야 그때서야 죄짓는 즐거움이 발생되는 겁니다. 사람의 인생의 즐거움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죄 짓는 즐거움에서 사는 재미를 느껴요. 죄 짓는 즐거움. 하지 말라, 하기에 더욱더 구미가 당기는 거예요. 인간들이 소망하는 것은 결국 돌고 도는 겁니다. 남이 가진 것, 멋있는 것 해보다가 재미없으니까 버리고 자기가 버린 것을 남이 소망이라고 또 가져가고. ‘바보같이 그게 쓰레기인데 그것도 모르고 하고 있고.’ 직업도 마찬가지고 다 사람들이 별게 없어요.

그런데 그 인간들 가운데 자기 속에 뭐가 없는가를 교회 와서 발견하지요. 그게 뭐냐, 내가 다른 것은 다 맛보고 누리고 할 수 있는데 무엇을 맛보지 못했는가? 영생, 생명나무, 천국의 축복, 이것은 없으니까 그것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사람들이 교회 나와서 영생, 죽어서 좋은 나라 가기 위해서 교회 나오고 그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교인들이 돈 내서 교회 공동묘지 만들어서 먼저 돌아가신 장로님들 지금 잘 계신지, 교회공동묘지에 찾아가 보는 거예요.

서현교회 공동묘지도 칠곡 근처에 있어요.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 교회공동묘지에 있는 사람들은 일괄해서 부활된다는 소망을 살아 있는 교인들에게 안겨줌으로 말미암아 교인들이 느긋한 마음으로 교회 다닐 수 있도록 배려를 한 거지요. 제가 언젠가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대구에서 성주로 가는 도로에 보면 공동묘지가 있는데 기독교신자들만 따로 모아놓고 그것을 부활의 장소라고 되어 있어요. 그것을 보는 순간 ‘저기 묻혀야지.’ 거기 끼면 나중에 부활 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사람이 현재 있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고 있는 것 중에서 없는 것이 뭐냐, 그것이 영생인데 ‘그 영생을 소망합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 영생은 하나님의 소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에 빠진 부분을 마저 채우기 위해서 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점선, 돌출부분이 소망인데 그 소망은 결국은 어디에 해당 되는가 하면, 눈에 보이는 것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 다니면서 목사한테 평생 속은 거예요. 여러분이 소망하는 부활은 주님의 소망이 아닙니다. 사람이 바뀌어야지 사람도 안 바뀌고 가기는 어딜 가요? 가만히 혼자 생각해 보니 기가 차요. 본인은 안 바뀌고 죽어서 좋은 데는 가려고 하니까 세상에 그런 뻔뻔스러움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제가 화내는 이유를 모르지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미장원에 가서 미용사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머리모양을 연예인처럼 해 달라는 거예요. 막상 해보니 그 머리가 안 나오거든요. 안 나오니까 미용사가 재주가 없니 기술이 없니 따진다는 말이지요. 바탕이 안 되는데요, 바탕이. 바탕이 안 되는데 그 위에 빙수처럼 머리만 올려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게 모양이 나오겠어요? 딱 깨놓고 이야기할게요.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은 이미 이 땅에서 우리로 하여금 맛보게 하시는 겁니다.

“죽어서 천당 갈래, 지옥갈래? 지옥갈래, 천국갈래? 골라잡아라.” 세상에 이런 천국과 지옥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지옥 사람으로 살면 그 사람은 지옥 안가고 싶어도 가야 돼요. 이 땅에서 천국사람으로 살면 안 가려고 해도 천국 가야만 하는 것이 우리의 팔자에요. 주님께서는 그런 조로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할 때. 부자가 왜 지옥가고 싶어 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구나 천국가고 싶고 지옥가기 싫다는 것을 다 아시고 이 땅에서 이미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을 분명히 갈라놓습니다.

갈라놓고 지옥사람으로 행세하는 사람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옥 가야만 되고 천국 가야될 사람으로 살았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천국, 거지 나사로처럼 아브라함 품으로 가는 겁니다. 인류의 얼굴모양새가 다 다르고 사는 것도 다 달라도 딱 두 종류로 정리가 돼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죽고 다시 살아서 가셨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예수님이 혼자 십자가 지신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십자가 두 개가 더 있었어요. 십자가 두 개가 양쪽에 있고 그 중간에 예수님이 기준으로서 십자가가 있거든요.

어느 쪽인지 모르지만 한쪽은 천국 가는 사람, 그날 밤 낙원에 가는 사람이고 다른 한 편에는 지옥에 갈사람, 이렇게 십자가 세 개로서 그 수많은 숫자의 인류를 그 세 십자가로서 이야기 끝내버렸습니다. 이 예수가 기준이 되어서 천국과 지옥은 나와진다는 겁니다. 주님이 친히 나누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양쪽에 있는 강도 둘은 둘 다 천국 갈 자격이 없어요. 그냥 예수님께서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가리라.” 하면 그냥 가는 것이고 그런 소리 없으면 그냥 지옥가야 되는 겁니다. 모든 선택권과 모든 권한은 예수님에게만 있습니다.

이게 믿어지는 사람,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고 하는데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성령의 익은 열매라, 성령의 열매라는 거지요. 성령의 열매라는 뜻이 궁금하지요? 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 육신의 열매는 아닙니다, 라고 생각하면 돼요. 인간의 육신이란 말이 어렵기에 그냥 쉽게 해서 몸이라고 합시다. 그냥 몸이라고 보면 돼요. 23절 끝에 보면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 몸, 육신, 같은 말입니다. 육신이라는 말을 몸이라고 바꾸어서 생각하자고 제안한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하루 24시간 시작이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루 종일 몸 챙기기 위해서 살고 돈 버는 것도 자기 몸 하나 살아보려고 하다가 피곤한 몸 이끌고 나중에 뒹굴 듯이 자게 되면 그것도 자기 몸의 휴식을 위해서 자는 거예요. 몸에서 시작해서 몸으로 끝나는 인생, 80을 살고 90을 살아도 소용없어요. 그것을 가지고 육신의 여정이라 합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것이 육신밖에 없어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야기해 봐야 금방 잊으니까. 십자가 옆에 모든 인류를 두 종류로 나눈다고 했지요. 한쪽은 천국 갈 강도, 한쪽은 지옥 갈 강도, 공통점은 둘 다 강도라는 사실, 둘 다 강도라는 사실이에요. 둘 다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죄인의 처분은 죄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피고는 판사가 결정해야지 피고 본인에게 의사결정은 허락된 적이 없습니다. 판사한테 돈 주고 뇌물주고 해 봐야 아무 소용없어요. 그것은 안 받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받는다는 이야기를 제가 한다고 해서 저를 무지 욕들 하시는데 이것은 사도행전 17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거예요. 하나님은 어떤 것도 안 받습니다. 헌금이고 기도가 안 받아요. 왜 그렇게 교회는 뭘 달라는지 모르겠어요. 성경 보지도 않은 모양이라! 하나님은 안 받습니다. 그럼 안 받으면? 친히 주시는 분이에요. 그게 오늘 본문에서 뭐냐, 성령의 처음 익은, 익은, “열매”잖아요. “열매!” 지난 금요일가, 목요일인가, 처갓집에 갔어요. 처갓집에 가면 빈손으로 오는 법이 없어요. 꼭 뭘 들고 와요. 얼마나 아내가 고마운지.

오이를 가져왔어요. 그런데 제가 어릴 때 오이가 자라는 것을 본적이 있거든요. 오이가 자라는 것을 보니 말도 안돼요. 왜냐하면, 줄기가 굵어져서 오이가 되었어요. 줄기가 줄기, 줄기,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것이 줄기가 오이되어 버렸어요. 뭔가 속은 느낌이 들잖아요. 열매가 따로 열릴 줄 알았어요. 줄기가 통통해지니까 그것이 오이되어버렸어요. 맞지요? 열매가 뭐냐? 유리관 제작할 때 유리관 제작하는 사람이 훅 바람을 대롱으로 부니까 끝에 봉긋 부풀어서 그것이 유리관이 되는 거예요.

성령께서 육신에다 훅, 훅, 부니까 거기서 맺힌 것이 뭐냐 하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는 평생가도 내 육신, 이 몸만 챙기다가 볼일 다 본다.’는 것을 명심하는 사람이 바로 성령의 열매에요. 왜냐하면, 진짜 성령 받은 사람만이 자기가 육신인 것을 알아요. 말이 좀 어렵지요? 이것을 쉽게 한 구절이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옵니다. 쉽게 한다고 제가 했는데 이 이야기 하면 뒤에서 욕하는 사람 참 많습니다. 뭐라고 하느냐, 6장 8절입니다. 잊지 마세요, 하면 또 잊지 말라는 그 말을 잊어버리니까 걱정이 되는데.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그냥 썩어진 것이 아니까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교회 와서 영생 얻기를 위해서 왔는데 썩어진 육신 가지고 봉사하고, 썩어진 육신가지고 기도하고, 썩어진 육신가지고 주일성수 하고, 썩어진 육신 가지고 십일조 하고, 썩어진 육신 가지고 선교회비 내고, 썩어진 육신 가지고 목사 섬기고, 백날 하면서 교회 50년 60년 다녀도 결국 남는 것은 자기 자랑밖에 남지 않아요.

“교회 봉사 몇 년 했습니다, 내가 교회 목사입니다, 장로입니다.” 그 썩어진 자기자랑밖에 남는 것이 없어요. “내가 기도해서 이만한 효과 보고 응답받았습니다.” 하는 자기자랑밖에 남는 것이 없어요. 교회 와서 더 심한 육신이 되었어요. 교회 와서 지옥생활 하게 된 겁니다. 제가 이렇게 하면 “교인들 가운데 그렇게 생각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교회 올 때 노림수가 있어서 왔지, 죽어서도 에어컨 시원하게 돌아가는 천당 가고 싶어서 왔지.”라고 할 때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이 내 육신만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나한테 투자한 세월이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을 가지고 성령의 오이(열매),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성령 받았다고 나대는 사람은 육신이고 그것은 지옥 갈 사람이에요. 지옥 갈 사람들은 성령 받았다고 나대는 사람들인데 여의도 가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성령받은 사람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알아요.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내 몸 외에 아무것도 생각할 줄 모르는, 오직 나만 생각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거예요. “주여, 내가 헌금은 하지만 이 헌금도 다 내가 함으로써 반대급부를 노리고서 하는 겁니다. 주께서 아시지요?” 이런 고백 하면서 헌금하는 사람, 그것이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면 육신인 사람은? “주여, 이 헌금 받고 저에게 성령을 주옵소서.” 이것은 아직 성령 받지도 못한 사람이에요. 받지도 못했으니 돈을 주고서 사려고 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강도가 “오늘밤에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한 것은 강도가 아양 떨어서 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일방적인 권한이고 선택이었습니다. 내가 내 평생에 육신을 위해서 봉사하고 수고한 그것이 전혀 나를 구원하는데 보탬이 되거나 기여한 적이 없습니다. 절대로 속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여러분은 구원 못 받습니다.

여러분들이 그것으로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육신의 열매가 돼요. 마귀는 지금도 우리보고 떼를 쓰고 열심히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봉사하고 헌신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면 누구만 좋아하는지 알아요? 그렇게 지시하는 지시자의 종노릇 밖에 안돼요. 여러분의 주인은 예수님이지 목사가 아니에요. 여러분의 부모나 가족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나와 똑같은 육신이에요. 육신이 육신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 진적도 없다.”고 이야기했어요. 육신은 육신을 구원하지 못해요.

여러분의 육신 됨을 확실히 이야기하는 것은 여러분과 다른 길을 가셨던 그 한 분밖에 없어요. 우리들이, 모든 650억 인구가 다 같이 가는데 혼자서 어긋난 길로, 혼자서 아무도 따라오지 못할 길로 가셨던 그 분만이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겁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냥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과해서 주어지는 영이기에 로마서 8장 9절에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고 10절에 보면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합니다.

대체 돈 얼마를 바쳐야 이 혜택을 받은 겁니까? 육신적으로 기도를 하루에 몇 시간 하고 성경을 몇 장씩 봐야 이 혜택을 받습니까? 성령 받은 사람은 말합니다. “내가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효과가 저에게 전달되어서 저는 십자가 안에 사로잡혔기에 십자가의 공로로 성령이 저에게 도착했습니다.” 도착하는 동시에 나의 소망의 자리에 주님의 소망이 들이닥친 거예요. 주님의 소망은 날마다 이 육신에서 나오는 나의 소망을 지우개처럼 날마다 지워버리는 겁니다.

육신의 이 보이는 소망은 자기가 안 죽어야 된다는 집착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지요. 약간 어려운데요, 구약에서의 죽음은 외부에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죽고 멸망하고 하는 것은 전쟁을 통해서 외부에서 죽음이 와요. 무서운 바벨론군대가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죽이고 유다백성을 죽일 때 ‘아, 이것이 신이 내린 저주구나. 이것이 심판이구나. 이것이 바로 진짜 죽음이구나.’ 구약에서 죽음이란 그냥 나이 들어 죽는 것이 아니고 이 죽음의 원인이 어디서 오는가를 밝히기 위해서 전쟁이라는 방식을 통해서 죽음이 오게 되어 있어요.

이방인,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살해당할 때 ‘아, 주여, 우리가 죄인 맞습니다.’라고 알려주기 위한 것이 구약성경의 이야기에요. 그런데 신약은 뭐냐, 죽음이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내재적이에요. 내부에서 이미 죽음이 마그마처럼 올라오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더욱 더 분명이 알게 되는 사실은 이 내부에서 올라오는 나의 죽음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내가 어떤 생각, 어떤 행동을 해도 그 밑바탕 뿌리처럼 올라오고 있는 이 근원적인 나의 죄, 아담의 죄가 나라고 하는 이 영토(장소)를 죄가 활동하는 영역으로 자기 맘대로 설쳐 대면서 나로 하여금 뭘 해도 죄 짓게 만드는 식으로 나를 평생 부려오고 있다는 것을 신약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약의 말씀 하나하나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어요. 너무나 차갑습니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의 누가복음 9장 59절에서 60절에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성경 속에 이런 대목이 있다는 것도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요? 무시하는 것은 아니고 다시 한 번 되새기고자 이 대목을 강조합니다.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데 마침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예수님한테 마지막 부탁을 합니다. “제가 이 집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 장례는 제 손으로 치르고 (아마 장남쯤 되었을 수도 있겠지요.) 그 뒤에 예수님을 따르겠습니다.” 이 이야기를 했을 때 예수님이 그것을 거절했거든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어떤 제자가 예수님을 따를 때 아들이 그동안 키워준 아버지가 고마워서 아버지의 장례는 마지막으로 치르고 가겠다는 이쪽에 동의하는 분들은 마음속으로 손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말고 바로 예수님 따른다는 쪽, 손들어 보세요. 물론 마음속으로. 들었던 손 다 내려가 버리지요.

이게 성경에 나옵니다. 61절과 62절에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게 성경에 나옵니다.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여러분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신자라는 생각이 들던가요? 아니면 신자 안하면 안했지 이런 광신도 같은 식은 주의해야 되겠다는 식으로 자기에게 주의보를 내리지는 않았어요? 이 뜻은 이런 뜻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내가 선택할 사항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 땅을 상대로 이미 만들어내고 있었던 거예요. 만들어내는데 만들 때 “천국 갈사람 이리 오고 지옥 갈사람 저리 가세요.”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전부 다 지옥이에요. 전부 다 근원적으로 죄인이기에 모두 다 지옥이에요. 지옥이니까 이렇게 더운 거예요. 지옥인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예수님께서 지옥에 1차 방문 하신 거예요. 그래서 주님 만나고 난 뒤에 주님 말씀 듣고 “참 내가 지옥 맞습니다.”하는 그 사람은 성령의 오이, 성령의 열매,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네가 나 만나고서 네가 지옥에 산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하면 그 사람이 “주님이 이미 이야기했잖아요. 제가 주님 따른다고 식구들과 ‘여보, 내가 다녀올게.’ 하고 안부인사 하는 것도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식으로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새로운 주님의 소망에 맞추어볼 때 ‘내가 예수 따라가면 혹시 천당 갈 수 있겠다.’ 하는 나의 소망이 지우개로 지워지는 그 효과를 느낄 때 비로소 내가 그 동안 내가 소망하는 것, 내가 죽어서 천국 가겠다고 하는 이 소망마저도 지옥에서 파는 상품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지옥 갈 교회에서 만든, 지옥 갈 목사들이 만든, 지옥 갈 상품이었어요. 그 의, 스러움, 너무나 의, 스러운 그것마저 주님의 소망이 아니고 인간의 육신의 여망이었어요. 스페인에서 축제를 하는데 못 올라가니까 인간사다리를 만들어서 마지막에 어린애를 밀어 올려요. 육신 오르기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일종의 바벨탑을 쌓는 거예요. “우리가 천국에 기어이 골인합시다. 너무 더워서 못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밀어붙일 때 그 소망, 천국이라는 종교적인 소망이지요, 그 소망을 주께서는 소망으로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너나 나나 할 것도 없이 우리는 전부 다 그런 소망에 빠져서 그것이 내 소망의 대체물로서 ‘그래, 그 소망이 바로 내 소망이야. 납득이 돼, 납득이 가.’ 하면서 얼씨구나 죽어서 좋은데 가는지 알고 공동묘지까지 만들어놓았는데 그게 만약에 가짜라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가? 제가 서울 갔다가 KTX 타고 오는데 좌석이 절반씩 마주보게 되어 있는 칸이었어요. 오는데 저 앞에 한 세 살쯤 되어 보였어요. 요즘 애들은 세 살도 무서워요. 그 애가 엄마한테 이야기하는데 엄마가 좀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애가 하는 말이 “엄마, 나 좀 봐!”라고 해요. 내가 하는 짓을 좀 봐달라는 말이지요. 엄마가 잠을 깨고 애가 하는 그 재롱을 봐요. 제가 거기서 큰 난제를 풀었어요. 이 세상이란 공간을 떠나서 저 세상에 가게 되면 그것이 천국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시간적으로 이 땅에 살다가 죽으면 내가 죽고 난 다음의 시간은 천국에서 산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엄마가 되어서 애가 세 살이나 여섯 살이나 늘 예쁘기 마련이고 귀엽기 마련이지요. 애가 세 살, 일곱 살, 40이 되어도 부모에게는 그 사랑이 그대로 남아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해결한 것이 뭐냐 하면,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따지지 않는다는 점을 알았던 거예요. 지금 주님 사랑하고 지금 주님 사랑 받으면 되지, 지금 밥 못 먹고, 못살고, 취직 못하고,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 사랑 받으면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하늘나라를 생각할 때 육신으로 파악되는 시간과 공간을 가지고 이것 떠나면 천국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도 오해를 해서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한 거예요. 주님 하는 말이 “너는 죽어도 갈 수가 없어.” 그런 정신머리를 가지고는 못 온다는 거예요.

주께서 성령을 보내주게 되면 우리는 이미 십자가로 사랑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금 우리가 아직 이 땅에서 안 죽고 살아 있어도 주님의 사랑이 있으면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내 십자가 옆에 우뚝 주님의 십자가 있으면 맨 날 주고받는 대화가 뭐냐, “주여, 날 기억하옵소서.” 주님께서 “네가 오늘 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면 “아이 좋아라.” 이게 사귐 아닙니까? 이게 사귐이거든요. 그 옆에 있는 강도는 ‘저 둘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지?’ 맨 날 헛소리래.

주님은 이미 죽어버렸는데 무슨 주님이 여기 계시느냐는 말이지요. 십자가라는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시간과 공간으로 따지는 이 헛된 소망마저 용서해 주시고 그런 것 없어도 날마다 우리 속에서 죄를 용서하고 또 용서하고, 육신에서 죄가 올라오면 또 용서하고 또 용서해주시는 그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 끝장났다는 것, 이 십자가를 믿는 성령의 첫 열매가 뭐냐,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 교회, 우리교회 네 교회 그런 것은 필요 없어요, 교회 앞에 그런 것은 붙이지 마세요, 그냥 교회에요.

교회는 주님이 기뻐하는 거예요. 내가 기뻐하면 안 되고. 주님이 복음 믿는 것 때문에 기뻐하는 장소가 되어야 됩니다. 영적 장소지요, 영적 장소. 그냥 육신대로 살면서도 “주여, 저 아시지요? 돈 밖에 모르는 인간 아시지요?” 라고 할 때 주님보고 자기 솔직한 것을 다 털어놓는 그 모습이 그렇게 주님 보기에 예뻐요. 예뻐도 너무 예뻐요. 왜? 십자가 피 흘리심의 의미가 그런 이야기와 매치가 되기 때문에. “너는 네 죄를 아는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린 이유를 네가 아는구나.” 이런 사이가 바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이것은 육신으로 안돼요. 육신은 자기 자랑하기 바쁘지 회개라는 것이 안 나옵니다. 그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 그것이 이미 주님의 소망이 덮쳐서 내 소망 짓밟고 주님의 소망만 꽃송이처럼 피어나는, 그래서 오이처럼 줄기가 굵어져서 점점 퉁퉁 불어나는데 그 불어나는 것이 뭐냐 하면, 십자가 은혜만 퉁퉁 불어날 때 그게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놓쳐버렸습니다. 교회에서 한 짓 해놓고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목사는 날 어떻게 보는가, 맨 날 같은 육신의 시선 의식하다가 정작 십자가 지신 주님의 시선은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저희들 강도인 것을 잊지 말게 하시고 강도의 시선으로 주님의 용서의 시선과 마주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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