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사자 가족의 슬픔(겔19;1-7)이근호130821

아빠와 함께 2013. 8. 24. 18:58

사자 가족의 슬픔(에스겔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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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8-21 21:09 
                사자 가족의 슬픔

2013년 8월 21일                    본문 말씀: 에스겔 19:1-7

(겔 19:1, 개역) 『너는 이스라엘 방백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겔 19:2, 개역) 『부르기를 네 어미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 엎드리어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

(겔 19:3, 개역) 『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겔 19:4, 개역)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꿰어끌고 애굽 땅으로 간지라』

(겔 19:5, 개역) 『암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취하여 젊은 사자가 되게 하니』

(겔 19:6, 개역) 『젊은 사자가 되매 여러 사자 가운데 왕래하며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며』

(겔 19:7, 개역) 『그의 궁실들을 헐고 성읍들을 훼파하니 그 우는 소리로 인하여 땅과 그 가득한 것이 황무한지라』

슬픈 노래가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전달됩니다. 노래가 슬프게 들려지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현 유다 나라가 지향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나아가서 실제로 유다 나라의 미래는 유대 백성들이 의도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진행되게 됩니다.

이 사실을 미리 통보해주시면서 ‘슬픈 노래’라고 지칭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슬픈 노래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구심점 와해와 관련있습니다. 구심점이란 인간들의 일상 삶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사람이란 중심이 없으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실생활에서는 지리적으로 구심점이 없으면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은 여기서 밀려나고 내일은 저리로 밀려나고, ‘나의 자리’라는 것이 정립되지 아니하면 도대체 나라는 인간조차 누군지 불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삶의 전부는 안정된 구심점 확보에 있습니다.

청년들이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나가면서 하루 빨리 자기만의 구심점을 잡으려고 합니다. 취직이 되었으면 아파트라도 장만하고 거기에다 배우자를 만나서 가정이라는 안정한 영역을 마련하고, 거기에서 자식들까지 낳아서 기르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 샘솟는 곳입니다. 그것을 구심점으로 해서 교회도 다니고 휴가도 가고 일가 친척집을 갈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갔다가는 후딱 자기 보금자리로 되돌아오게 마련입니다.

심적으로나 육신적으로 안정을 취하고 편히 쉴 수 있는 곳은 가정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루 빨리 제자리 찾아서 자기만의 구심점을 수립하는 것은 곧 ‘사람에게 있어 살아남는 것이 가장 우선되는 일이다’는 본성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자연스러운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슬픈 노래’를 선지자를 통해서 전달되게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에 의하면 세상의 구심점은 엄연히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제각기 가정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저 세상 여타의 민족들과 같이 가정과 안정된 사회와 국가의 보호로서 자신의 행복만 추구하면 그만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늘 나라 백성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구심점이 달라야 했습니다. 행복의 원천이 다른 곳, 즉 하늘나라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의 구심점을 부수시게 하십니다. 곧 암사자, 새끼 사자, 젊은 사자라는 호칭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왕을 사자에 비유할만한 의존적 관계로서 이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준해서 이 사자들이 도리어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나라를 말아먹는 그런 불실한 사자로서 다루시겠다는 겁니다. 암사자란 곧 다윗언약에 준해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라야 한다는 다윗 왕 계열을 말하고, 젊은 사자란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과 여호야긴과 그리고 시드기야 라는 유다 말기에 등장했던 네 명의 왕을 두고 말합니다.

특히 여호와하스라는 왕은 애굽으로 끌려가서 죽게 되고 그 다음 왕인 여호야김 왕은 애굽을 의지하다가 도리어 바벨론 왕에서 죽게 되고 그 다음 왕인 여호야긴은 B.C 597년에 바벨론으로 포로잡혀 가서 평안한 여생을 보내게 되고 마지막 사자인 시드기야는 자기가 보는 앞에서 두 아들이 죽게 되고 본인의 두 눈도 뽑히게 되고 불행한 생애를 바벨론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러한 왕, 곧 사자의 자리는 언약적으로 특수한 위치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가 3장에 보면 여자가 나옵니다. 그녀는 그저 선악과 과실이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먹음직도 해서 따먹었을 뿐입니다. 마치 어떤 아가끼가 길에서 립스틱을 주워 그것을 입술에 바르는 순간,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세계 제 3차 대전이 일어나는 식이라고나 할까요.

극히 사적이고 소박한 개인 행위 하나가 인류의 운명을 뒤바꾸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는 것이 됨은 바로 언약이나 약속이 이 세상에서 투입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됩니다. 다윗 언약에 준한 이스라엘의 왕이 이런 위치에 있는 자들입니다. 일반적인 왕들이 아닙니다. 이 왕들은 나름대로 국가 보위하고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최선을 노력을 다 한 자들입니다.

비록 남들보기에 자신들의 권익이나 야망을 위해 백성들을 학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백성들은 미처 알지 못하는 왕이나 지도자들의 고충이 서려있는 그런 자리를 그들이 떠맡은  것입니다. 백성들을 안정되게 통치 하지 아니하면 치안이 불안해지고 그렇게 되면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듣게 됩니다.

그러면 나라의 구심력이 약해지면 주변나라가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침략해서 약탈할 것이 뻔한 이치입니다. 따라서 나라의 기강과 질서를 강하게 잡아서 결집력을 높이게 하기 위해서는 왕 자신이 권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반대파들의 소리를 용납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나라를 부강하기 위해서는 왕의 권한도 강화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 대신은 왕은 백성들이 자신을 믿고 그만한 권한을 부여했으니 책임지고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켜내어야 하고 그 국가 안에 속해 있는 영토나 삶의 여건들이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왕은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면서 정치적 정세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보다 힘있는 세력에 붙도록 처신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삶이란 천국에서 살만한 삶이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3에 보면, “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에게 있어 개인적으로 추구할 구심점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막대로 소유로서 그것을 지켜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성도는 자신의 힘으로 자신이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소유로 삼았다는 그 새로운 현실과 거기서 나오는 힘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자존심 판에 끼어들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근호 13-08-22 10:41 
53강-에스겔19장 1-7(사자가족의 슬픔)130821 - 이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9장 1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76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9:1-7



“너는 이스라엘 방백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부르기를 네 어미는 무엇이냐 암사자라 그가 사자들 가운데 엎드리어 젊은 사자 중에서 그 새끼를 기르는데 그 새끼 하나를 키우매 젊은 사자가 되어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매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꿰어 끌고 애굽 땅으로 간지라 암사자가 기다리다가 소망이 끊어진 줄을 알고 그 새끼 하나를 또 취하여 젊은 사자가 되게 하니 젊은 사자가 되매 여러 사자 가운데 왕래하며 식물 움키기를 배워 사람을 삼키며 그의 궁실들을 헐고 성읍들을 훼파하니 그 우는 소리로 인하여 땅과 그 가득한 것이 황무한지라.”



오늘 읽은 이 본문에 보면 사자가 나옵니다. 사자가 나오는데 여기 나오는 사자가 누구인지 상당히 궁금하지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사자를 언급했으니까 사자가 누구인지 상당히 궁금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자를 거론하면서 이 이야기를 누가 들어야 하는가, 그 대상부터 먼저 생각을 해야 됩니다. 19장 1절에 보면 “ 는 이스라엘 방백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부르기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방백보고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사자의 비유, 사자의 이야기, 암사자, 새끼사자, 젊은 사자의 이야기를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방백들에게 사자가 왜 필요한가? 이 점부터 생각을 해 봐야 돼요. 이 사자는 나중에 보시면 이스라엘 왕이 되는 겁니다. 제가 하는 이 질문을 다시 하게 되면 “이스라엘 여러분, 왕이 왜 필요합니까?” 하는 그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왕이 왜 필요합니까?”라고 물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답할 거예요. “살기 위해서 왕이 필요합니다. 다른 민족들이나 다른 나라들이 다 왕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들은 왕이 있어서 번창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나라와 같이 번창하고 오래 살고 잘 살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왕이 꼭 필요합니다.”라는 식으로 답변할 거예요.



이것은 오늘날 21세기의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이 왜 필요하며 대통령이 왜 필요합니까?” 우리의 답변은 간단해요. “우리가 안전하고 보호받고 잘 살기 위해서 대통령이 필요하고 국가가 필요합니다. 국가 없이는 못살고 대통령이 없고 대통령이 우리를 위해서 봉사하지 않으면 우리 재산과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안전한 대한민국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아마 그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 방백들아, 내가 사자 이야기를 할게.”라고 암사자, 새끼사자, 젊은 사자를 언급하는 것은 처음부터 출발이 ‘우리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왕이 필요합니다.’라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점을 먼저 생각해야 됩니다.



현재 우리가 한국 땅에 살고 있고 대통령이 있고, ‘이 모든 것이 우리한테 필요하다.’라고 여긴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합니다. “대통령이 필요하고 나라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너희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늘나라, 하나님이 필요하다.”라고 하나님께서 언급하고 이야기하실 거예요. 사람들이 대통령이 필요하고 왕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 출발점이 내가 살아있다고 여기기에 그런 생각을 우리가 지울 길이 없습니다. 자식들이 학교 마치고 집에 올 때 아빠 엄마가 없으면 굉장히 허전해 하고 두려움을 느껴요.



그런데 아빠 엄마가 든든하게 집에 있을 때 애들이 들어와서 굉장히 좋아합니다. 왜, 자기가 살아났다는, 오늘도 자신이 안전하게 산다는 것을 말 이상으로 온 몸으로 느끼기에 그렇습니다. 뭔가 보호자가 있다는 것이지요. 본문에서 왕에 대해서 사자라고 이야기했거든요. 사자라는 것은 짐승가운데서 제일 든든한 정도로 힘이 센, 더 이상 달리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수호자나 보호자, 사자가 우리를 지켜준다면 다른 어떤 악한 짐승으로부터도 우리는 보호받을 수 있다, 그런 뜻으로 사자라고 언급을 하신 거예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하나님께서 그 점을 감안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사자가 말썽을 일으킵니다. 보호를 해줘야 되는데 보호를 잘못하고 있어요. ‘그러면 괜찮은 사자, 훌륭한 사자, 곰한테 이기는 사자, 밀림의 어떤 악한 짐승으로부터도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늠름한 사자, 그런 사자를 하나님이 주시면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겠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사자를 줘버리면 사람들이 애초부터 하나님을 안 믿지만 그런 사자를 주게 되면 하나님대신 하나님이 세웠다는 그 왕을 하나님처럼 섬기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이 인간들의 살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가려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언약과 약속으로만 직접적으로 그냥 다가가기를 원하지 인간들이 원하고 있는, ‘하나님덕분에 좀 살아볼까?’ 하는 인간들의 생존욕구로 인하여 필요한 중간의 인물들을 하나님께서는 제거하는 조로 이 비유를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방금도 이야기했지만 ‘백성들을 보호해야 할 사자가 어설퍼서 도리어 백성들을 힘들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우리 생각은 이래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든든한 사자를 보내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숨길 수 없는 본성 같은 겁니다.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내가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어야 되겠다는 이것은 진짜 하나님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는 하나님과의 매치, 연결이 안돼요.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하나님이 뭐냐 하면, 이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하면,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인데요,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라고 하면 교인들이 속으로‘흥, 살아 있으면 날 좀 밥 먹고 살게 해 달란 말이야.’ 대번 이렇게 나와요.



‘주님이 살아 있고 하나님이 살아 있으면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데? 내가 사는 게 왜 이렇게 빡빡한데? 하나님이 살아 있으면 살아 있는 그 값을 하시란 말입니다. 그러면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게요.’라는 쪽으로 반응을 나타내는 거예요. 이것이 오늘날 우리뿐만 아니라 구약에서 그런 식으로 죽 해 왔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이런 취지를 가지고 사자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사실은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사자, 그런 사자 같은 용맹한 지도자를 원했다. 하지만 너희에게는 언약이 중요하고 약속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너희들이 원하는 그 지도자를 내가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 때문에 내가 없애버리겠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라고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같으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아, 우리가 그동안 힘들게 산 것은 원체 우리 사고방식 자체가 문제가 크구나.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뭔가 우리의 살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앞서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제대로 파악을 못했구나.’ 하는 그 점을 본문을 통해서 간파해야 됩니다. 에스겔 18장 1절에 “너는 이스라엘 방백들을 위하여 애가를 지어 부르라”고 했는데 여기 “애가” 슬픈 노래를 지어 부르라고 지시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에스겔을 통해서 슬픈 노래를 들어야 돼요.



기쁜 노래가 아니고 슬픈 노래입니다. 왜 슬퍼야 되는가? 인간은 자기가 있는 그곳을 중심점, 구심점으로 삼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든든한, 뭔가 안정되어 있는, 더 이상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되는, 뜨내기 생활을 안 해도 되는 중심 되는 자리만 마련하게 되면 거기서 빼꼼이 창문열고 바깥을 구경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했습니다. 그 다음에 해야 될 것이 뭐냐? 아파트를 얻어야 돼요. 왜 아파트를 얻어야 되느냐? 아파트를 얻으면 그 자리가 구심점이 돼요.



일상생활의 중심점이 되는 겁니다. 아파트를 얻어놓고 그 다음에 색시 감 얻어서 거기서 살고 거기에 자기 자식까지 낳습니다. 그러면 ‘나’라는 인생은 이제 중심이 만들어졌어요. 아파트 얻었지, 아내 얻었지, 거기에 자식까지 낳았지. 그러니 ‘나’라는 인간이 영원히 붙들어야 될 지점이 그런 구심점, 중심점, 중앙지점이 턱 하니 마련된 거예요. 중심점이 마련되고 나면 24시간 모든 사고방식은 그 구심점을 어떻게 사수하고 키워나가는가, 그 문제에만 집중하면 되는 겁니다. 제 말이 이상하지 않지요? 다들 그렇게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구심점은 언약이고 십자가복음이고 하나님계신 곳이 구심점이에요. 모든 사람들이 아파트 장만하고 거기서 자기 식구들이 살고 교회를 가도 그 자기 집에서 나와서 교회 갔다가 후딱 자기 구심점으로 되돌아옵니다. 휴가 가잖아요. 휴가 갔다가 후딱 자기 구심점으로 되돌아오고 추석 같은 명절에 시골에 갔다가도 후딱 자기자리로 되돌아오고 여자들은 친정에 가서도 후딱 자기 자리로 돌아와요. 그 구심점, 그것은 자기 목숨 같은 겁니다. 그것이 없으면 떠돌이 생활을 해야 돼요. 떠돌이 생활을 하지 않기 위해서 만든 것이 그 제자리에요.



거기에 하나님이 슬픈 노래를 지어 들리게 합니다. 그러니 슬프다는 것은 결국 내가 갖고 있던 구심점이 하나님한테는 허락받지 못한 구심점이고 깨져야 될 중심점이라는 사실, 그러니 다른 사람에 의해서 슬픈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슬픈 노래가 나온다는 말은 “네가 구심점으로 하는 그 자리가 결코 영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심점을 네가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 구심점은 와장창 깨져야” 됩니다. 7절을 봅시다. “그의 궁실들을 헐고 성읍들을 훼파하니 그 우는 소리로 인하여 땅과 그 가득한 것이 황무한지라.” “황무한지라.” 다른 말로 하면 ‘폐허.’가 된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구원받지 않는 백성 같으면 괜찮아요. 세상사람 같으면 그 자리에서 웃음소리가 나오고 모든 행복이 가정에서 나오는 겁니다. 수천만? 너무 많은가요? 수십만, 수백만의 목사들이 교회에서 오늘도 외칩니다. “여러분, 국가고 뭐고 간에 가정이 우선입니다. 가정이 행복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가정세미나, 가정을 어떻게 화목하게 할까’ 같은 강의, 힐링 캠프, 치료하는 캠프, 그 모든 것이 뭐냐? “여러분의 가정을 지키면 여러분의 행복은 거기서 나옵니다.”하는 그 주제에요. 거기서 안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 납득하고 수용합니다. 평소에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백성 이스라엘은 달라도 뭔가 다릅니다. 철석같이 진리라고 여겼고 이것은 모든 백성에게 물어도 다 옳다고 여겼던 그 행복이 나오는 구심점은 하나님의 언약과 복음을 위해서 폐허가 되어 줘야 되는 겁니다. 자기 가정을 폐허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쉽게 동의하고 나설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구원하지 않을까요? 자기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구심점 자체가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심점이고 주님 계신 곳이 천국이고.



내 한 달 월급으로 사는 이 아파트가 아니라 십자가복음사건이 일어나는 그 현장이 하나님과 자기백성이 만나는 구심점인데……, 요새 한창인 커피전문점이 구심점이 아니고. 십자가복음이 느껴지는 그 현장이 하나님께서 우발적으로 허용하는 유일한 사건으로서의 구심점입니다. 왜, 우리 인간들은 구심점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라는 구심점, 내 새끼들이 있고 내 부모가 있고 안심하고 편히 침대에 누워서 잠잘 수 있는 보금자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자의로 포기할 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침대에서 자다가 지옥가면 그 무슨 낭패입니까? 그래 어떤 인간도 자기 보금자리를 내놓을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받을 백성은 언약에 의하면 반드시 구원이 되어야 되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선지자, 하나님의 계시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것이 전파되면서 우리로 하여금 구심점 자체를 바꾸는 작업이 하나님에 의해서 실시가 되는 겁니다. 구심점 바꾸기 하는 거예요. 어떻게 바꾸는가? 바꾸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일단 사람들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 자기를 사수합니다.



자기를 다 사수하려고 하기에 어떤 지도자를 원해요. 그것이 오늘 본문 2절에 “네 어미는 무엇이냐.” 너희가 어미처럼 섬긴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바로 암사자라는 거예요. 왕이 있어야 되는데 왕이 좋아서 있는 것이 아니고 왕이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바로 우리 자신을 지켜 달라는 거예요. 여기서부터 오늘 설교에서 제일 난해한 대목에 성큼 들어섭니다. 암사자 이야기, 왕 이야기를 하기 전에 쉽게 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 언급하겠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여자 한 명 등장하지요. 이름이 그냥 여자에요. 나중에 이름이 하와로 바뀌는데 그 여자가 하나 등장합니다.



그 여자는 세상 돌아가는 내막 하나도 몰라요. 하나님의 뜻도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다만 자기 눈앞에 있는 것은 뭐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나무열매만 자기 눈에 띄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렇습니다. 어떤 아가씨가 있는데 그 아가씨가 길을 가다 보니 예쁜 립스틱이 하나 떨어져 있어요. 그걸 주워보니 새것 같아요. 뚜껑 열어서 입술에 바르는 순간 세계 제 3차 대전이 일어났다고 칩시다. 이야기가 좀 이상해서 당황하셨어요? 좀 황당한 이야기죠.



창세기의 그 여자는 자기 미래가 어떻게 세상이 어떻고,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에요. 다만 그 나무실과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따먹고 싶을 만큼 탐스러운 마음뿐이었고 결국 따먹었어요. 그 여인에게는 사적이고 소박한 행동입니다. 길에서 립스틱을 주워서 자기 입술에 칠하는 것, 이것은 남에게 악한 마음을 먹고 누굴 죽이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본능에 쫓겨서 ‘이거 칠하면 예쁘겠다.’ 하고 칠한 것뿐이에요. 과실을 따먹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세상을 움직이는, 세상의 운명이 바뀌는 그 전선을 건드리고 말았어요.



이 말이 왜 어려운가 하면, 제가 이 종이에 글씨를 쓴다고 해서 여름에 눈이 온다든지 그렇지는 않아요. 그런데 어떤 특수한 인간이 무심코 아무 생각도 없이 사적인 일을 한 그것이 그야말로 서울시를 폭파시키는 정도가 아니고 온 인류를 완전히 저주받게 하는 사건에 여자가 가담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언약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본인은 개인적인 행동을 했는데 그 개인적인 행동이 두고두고 오는 세상에 전부 다 결정적인 영향을 입히는 중대한 사건과 사건들을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는 계기로서 사용하신 겁니다.



예수그리스도라는 분은 서른세 살 먹은 청년이에요. 그 청년이 국가법을 어겨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것은 누가 봐도 사적인 행동이에요. 그것으로 인하여 수천 년 후에 멀리 있는 한국 땅의 어떤 사람이 오늘 밤에 죽었는데 그 사람이 천국 가 있게 하는 능력이 나올 줄을 아무도 생각 못한 거예요. ‘너는 그냥 너의 사적인 일을 하고 나는 내 사적인 일을 한다. 너는 네 가정이 구심점이고 나는 내 집구석이 구심점이고 각자 자기 가정, 자기 아파트에 들어앉아서 텔레비전 보면서 행복하게 살다가 늙어 죽으면 그만이다.’



모든 사람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만 믿는 것이 아니고 진짜 믿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등장했는데 그 언약적인 사람이 등장해서 뭔가 건드려버리니까 변곡점처럼 사태가 완전히 바뀌는, 놀라운 변이를 주는 그 사건. 노아가 그랬지요, 엘리야가 그랬지요, 아브라함이 그랬지요, 이삭이 그랬지요, 야곱이 그랬지요, 다 본인의 사적인 행동이에요, 삼손의 아빠 엄마가 그랬지요, 삼손을 잉태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항상 감추어져 있고 비밀스러워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상식적인 것, 너무나 일상적인 현실관 속에서는 우리를 구원해주는 소스(source)가 감지되지 않아요. 이것이 느껴지지를 않아요. 성경을 펼쳐봐야 그것이 나오는 겁니다. 이스라엘 왕, 이스라엘 왕 말고 다른 왕들 많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은 하와처럼 하나님의 언약의 전선을 건드려서 폭파가 될지 다시 구원이 될지, 하여튼 어쨌든지 간에 하나님이 쳐놓은 거미줄을 건드려서 사태를 유발시키는 언약적인 관계에 위치되어 있습니다. 그게 이스라엘 왕입니다.



암사자,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했던 다윗계통의 다윗언약에 속했던 왕의 계열이었고 그 암사자에서 나왔던 그 새끼사자, 젊은 사자는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그 아들 여호야긴, 그 삼촌 되는 시드기야, 유다가 망하는 와중에 이 네 왕이 등장합니다. 17, 18, 19, 20대까지의 왕들. 그 왕과 방백들은 에스겔 선지자가 개입되지 아니하면 그냥 이렇게 해야 돼요. “왕이여!” “백성들아!” “왕은 우리의 사자이십니다.” “그렇지, 너희는 내 양들이야.” 에스겔 선지자의 암사자, 새끼사자의 비유가 없으면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스라엘 자체를 하나의 구심점으로 삼고 어쨌든 간에 이 이스라엘을 살려내기 위해서 이방나라 애굽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4절에 나옵니다. “이방이 듣고 함정으로 그를 잡아 갈고리로 꿰어 끌고 애굽 땅으로 간지라.” 여호아하스라는 왕에게 일어나는 사건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요시아 왕이 애굽에 대항하다가 죽고 난 뒤에 그 아들 되는 여호아하스는 ‘바벨론보다 애굽이 더 세구나. 이제부터 우리가 애굽을 의지해야 되겠다.’라고 한 거예요. 이것은 사적인 욕망이 아니고 자기 나라 유다를 사수하고 지키는 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책임을 다 한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왕의 조치가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 같이 하나님의 계획의 전선을, 그 무시무시한 전선을 자기도 모르게 건드려서 나라꼴을 왕창 망하게 한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쳐놓은 함정이고 하나님이 쳐놓은 함정이라고 알려준 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그들에게 예언, 계시를 전할 때 알았어요. 여러분, 지금 성령께서 우리에게 십자가 예언을 합니다. 십자가 계시를 전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이 십자가가 어디에 써먹는지도 모르고 이 십자가계시를 왜 들어야 되는지를 지금 몰라요.



그저 내 아파트, 내 가족들, 내 새끼들, 호호, 하하, 공부 잘하고 그저 행복하고, 더우면 에어컨 틀고 시원하면 창문 열고,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 살다가 한 90되어서 죽으면 그만, 이게 인간의 행복이고 국가니 민족이니 뭐니 뭐니 해도 ‘내 가정이 최고다.’ 이것이 우리의 구심점이고 사는 행복의 중심점이거든요. 젊은 사람들을 보세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열심히 직장에서 일하는 이유가 오직 내 가정과 내 행복을 지키고 사수하기 위해서 온 몸을 다 쏟잖아요. 십자가 복음, 하나님이 구심점이다, 하루 종일 그런 생각은 안 듭니다.



여기 왕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선지자? 내 나라는 내가 지킬 테니 선지자 너는 하나님에게 기도해서 내가 하는 일에 보탬이나 되어 줘.” 그렇게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말합니다. “너희들 사고방식이 언약 적이 아니고 복음적이 아니다.” 다 뒤집어져야 됩니다. 여호아하스라는 사람이 그 애굽에 끌려갑니다. 애굽에 끌려가고 난 뒤에 여호야김 왕인데 이 사람은 아주 악당인데 예레미야의 계시 책을 불태울 정도로 악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바벨론 왕에게 죽고 그 다음에 나온 왕이 아들인 여호야긴인데 이 아들은 곱게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어요. BC 597년에 바벨론에 잡혀갔는데 이 사람은 곱게 잡혀갔습니다. 그 잡혀가는 틈새에 에스겔 선지자도 같이 바벨론에 잡혀갑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시드기야라는 왕이 있는데 이 시드기야라는 왕은 두 아들이 자기 보는데서 다 죽고 그 본 자기 두 눈알도 빼버리죠. 그냥 죽으면 좋겠는데 그런 형편으로 제 명대로 감옥에 있으면서 다 살았네요. 처절합니다.



왕? 지도자? 인간적인 구심점? 이스라엘이 살아야 하나님이 산다? 교회가 살아야 주님이 산다? 전부 다 사기, 거짓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그러면 뭐냐? 지금 이미 우리는 죽은 자에요. 골로새서 3장 3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죽은 자의 특징은 뭐냐, 소유를 가질 권리가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내가 스스로 살려고 하다 보니까 아파트도 내 것, 내 새끼도 내 것, 아내도 내 것, 남편도 내 것, 그냥 내 것, 내 것, 하는데 그것이 행복 하고 싶은 우리가 도리어 불행의 늪에 빠진 이유에요.



우리는 내가 내 것을 가지면 안 되고 주님의 소유로 내가 전환되면 되는 거예요. 이미 우리는 죽은 자인데 주님 안에 있을 때에는 비로소 산자가 되면서 자식이든 아파트든 뭐든 주님한테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세상의 돈을 가지고 다투는 이것은 있지도 않은 그 노름판인데 그 노름판이 있다고 착각하고 거기에 혼신으로 다해서 영혼까지 다 팔아먹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이 하나의 게임 판이거든요. 죽은 자는 소유할 필요조차 없다면 쓸데없는 세상적인 부귀영화게임에 놀아날 이유가 없어요.



누가 승진하는가, 누가 부자 되는가, 그런 게임에 자존심을 걸고 판돈 걸고 그렇게 인생 살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에스겔처럼 ‘이제는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신다는 말은 우리를 죽은 자로 간주하면서 우리를 살게 하시는 그 지도자, 그 예수 그리스도, ‘나는 항상 죽었고 주안에서 항상 살아있다.’는 이 지도자만이 우리의 영원한 구심점이어야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스라엘백성들의 그 잘못된 생각을 우리는 매일같이 지금도 저지르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소유했고 소유하기 위해서 세상 게임에 나서야 하는 이 피곤한 인생, 그러다 보니 복음과 십자가의 의미도 다 잊어버리고 하나님도 배척해버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 속에 들어와서 주님께서 매일같이 살려주셔서 산다는 이 확실한 주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