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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 13-08-28 21: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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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강-에스겔20장 5-7(옛날에)130828 - 이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20장 5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78페이지입니다. 에스겔 20:5-7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옛날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야곱 집의 후예를 향하여 맹세하고 애굽 땅에서 그들에게 나타나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하였었노라 그 날에 내가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그들을 위하여 찾아 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애굽 땅”이라는 실제 있었던 곳을 언급하고 그렇게 해서 자기백성들을 관리할 때 우리 이방인인 우리 입장에서는 무척 부럽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애굽 땅이라는 역사적 상황을 가지고 관여해주시니까. 애굽 땅이란 실제로 있었던 땅이거든요. 그 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언급을 하시고 그 땅에서 너희들을 이끌어 냈다고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소리를 들을 때 얼마나 안심이 되겠습니까? ‘야,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구나. 애굽 땅을 언급하고 출애굽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까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맞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이 맞다면 우리의 할 일은 말씀대로 그분께 순종하면 그것으로 우리의 인생의 의미는 다 챙긴 것이 되거든요. 다 정립이 되니까 상당히 맘이 편할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로 그 당시에 이 말씀을 들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가 부러워할 만큼 이 말씀을 좋아했는가, 하는 그 문제를 우리가 생각해 봐야 됩니다. 방금 제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했다고 했지요?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에스겔이라는 선지자가 나타난 겁니다. 선지자를 보고 “너 뭐야?” 이러면 끝나는 거예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 보냈다.”라고 했을 때 “너 뭔데? 우리도 선지자 많아. 너만 선지자 아니잖아.”라고 해버리면 아무리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애굽 땅을 언급하고 출애굽을 언급하고 “옛날에 이렇게 은혜를 줬잖아. 옛날에 너희는 애굽의 우상을 섬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너 뭐야?” 그 한 소리에 다 날라 가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보낸 자가 있어서 그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 입장에서는 “너 뭐야? 네가 하나님이 보낸 것을 인정 못하겠어.” 그러면 그 한마디에 하나님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그것이 무용지물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 좋은 말씀을 그대로 전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왜 그 말씀에 대해서 순응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 선지자 입에서 나오는 내용이 뭔가 덧붙여주는 정도가 아니라 현재 그들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 우상을 섬겼다고 지적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기분이 굉장히 상한 겁니다. 사람이 기분이 상하게 되면 진짜 하나님이 보냈다 할지라도 더 이상 듣기 싫어요. 자기 자신을 보고 “잘한다. 훌륭합니다. 대단합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뜻인가, 하고 귀를 기울일 수가 있는데 자신이 현재 살아가는 것은 우상숭배고 신앙도 아니고 회개하라고 나온다면 아마 하나님부터 그 선지자까지 통째로 제거하고 싶은 충동이 들 수밖에 없어요. 우리가 이 말씀을 볼 때에 행여 이 말씀이 우리의 문제를 치고 들어오더라도 그 당시 멸망했던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에스겔, 당신 뭐야!” 이러지는 맙시다.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을 하고 우리가 전제를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 인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내 인생보다 더 우선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말씀을 볼 때마다 늘 생각을 해야 됩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뭐냐 하면, “옛날에”에요. 5절에 보면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옛날에 내가 이스라엘을 택하고.” 이렇게 나왔지요. “옛날에”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했던 일을 잊지를 않고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옛날의 일을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어떤 기능, 어떤 효과를 내려고 하느냐? 요한계시록 22장 11절 12절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일 한대로 갚아 주리라.” 했어요. 이 대목이 십자가복음을 외치는 사람들한테는 좀 안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십자가복음으로, 그냥 은혜로만 용서받아서 구원받는다는 그 논리와 법칙과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듯한 느낌을 주게 되는 겁니다. 다시 12절을 읽어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했으니까 ‘아하, 십자가피로 용서받아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제대로 일했으면 구원받고 일 제대로 못하면 지옥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요. 제가 오늘 본문 가지고 왜 요한계시록 22장 11절, 12절의 말씀을 거론해야 되느냐 하면, “옛날에”라는 그 말 속에 요한계시록 22장 12절의 심판의 원칙, 구원의 원칙이 이미 여기에 포함이 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너 ‘옛날에’ 이랬잖아.”라고 하는 것은 “옛날 것은 그냥 못 본 것으로 하고 지나갑시다. 주께서는 죄 지은 것도 모른다고 해서 넘어간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자꾸 ‘옛날’을 끄집어내시네. 그냥 옛날 죄를 용서했다고 해놓고는, 기억지도 않을 것이라고 해 놓고는 ‘옛날에 네가 이렇게 했잖아.’ 하는 식으로 자꾸 옛날을 끄집어내시면 우리가 무심코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다 옛날로 기억이 되고 다 장부에 적히게 된다는 것인데 아무리 잊고 싶어도 주께서 재탕 삼 탕 해서 주님 앞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예를 들어서 한 5년 전에 예수님 피 믿고 용서 받았다고 칩시다. 5년 전에 예수 처음 믿었는데 그 전에, ‘15년 전에 이랬잖아.’ 이렇게 나오면 5년 전에 용서받은 것은 무효가 되잖아요. 15년 전에 내가 예수도 모르고 복음도 모를 때 한 짓이 내가 생각해도 끔찍스러운데 주님께서 그것을 기억해서 ‘너 옛날에’ 이렇게 나와 버리면 이것은 반칙이잖아요. 용서한다고 해 놓고 ‘옛날에’ 이렇게 과거를 끄집어내버리면 용서라는 것이 무용지물 되는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굉장히 중요한 문제지요. 이것을 쉬쉬하고 모른 체 할 수는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옛날에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 넣어놓고 다시 이끌어냈고 그들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건만 7절에 보면 “너희는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그리고 8절에 보면 “그 눈을 드는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하였었노라.”라고 되어 있지요. 애굽 땅에서 바로에게 내렸던 그 하나님의 진노를 이제는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너희들에게 그대로 퍼붓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유다 땅에서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고 왕은 애굽에 잡혀가는 이러한 모든 것, 이 죄를 거론하려면 하나님께서는 옛날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죠. 옛날 그 때 그 당시에 하나님 내가 너희하고 언약을 체결했다는 거예요. 언약을 체결했으면 이제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너희의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홀라당 날라 가버려요.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할게요. 성도한테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이 허용이 안 됩니다. 사람이 과거 현재 미래를 아직도 움켜쥐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옛날에 저지른 것도 다 책임추궁당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돼요. 정말 자기가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은 언약가지고 인간을 상대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둬야 돼요. 언약 빼고 하나님 만나시면 안 되고 언약을 놓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더 이상 우리에게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것은 전부 다 이미 회수해 가버렸습니다. 과거가 회수당한 것은 당연한 거고요, 놀라운 것은 우리의 미래도 홀라당 날라 가버렸어요. 우리의 미래라는 것도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릴게요. 주일 낮에 장로님께서 질문한 것인데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한 번 더 언급을 하겠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늘나라 갈 때에 우리가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정보는 다 지워진다고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산 정보는 지워져요. 그러면 이 땅에 사는 정보가 지워진다면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가 지옥가고 나사로가 천국 갔잖아요. 그 때 이 땅의 정보가 지워진다면 내가 이 땅에서 부자로 살았는지 혹은 예수 안 믿고 살았는지 그것도 같이 지워져서 지옥 갈 이유조차 없지 않느냐? 만약에 부자가 지옥 간다면 정보가 지워진 것이 아니고 안 지워져서 “네가 말이야. 부자로 살면서 교만해가지고 하나님도 안 믿고 심판주도 안 믿고, 네 죄를 알렸다.” 이래야 맞거든요. 정보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남아 있어야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 아닌가, 라고 저에게 질문을 하셨어요. 그래서 이렇게 답변했지요. 내가 생각하는 내 정보는 지워져야 마땅한 이유가 있어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나의 과거 현재 미래, 계획 잡아서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내가 스스로 만든 거짓정보 혹은 거짓시나리오에 속아 넘어가고 있는 겁니다. 성경에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분명히 언급을 했건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우리가 되는 거거든요. 에서가 어떻게 살았다, 야곱이 어떻게 살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이 되어 있어요. 야곱은 자기가 그렇게 살고 싶어서 산 것이 아닙니다. 에서가 스스로 그렇게 살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산 것이 아니고 에서는 에서대로 살아야 되고 야곱은 야곱대로 살아야 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언약 속에 포함이 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정보를 낚아챌 수가 없어요. 이것을 알아 챌 수가 없어요. 왜,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 내가 생각하는 나의 계획에 너무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내 자아상을 구축하기 위해서 오늘도 24시간 온 정력과 시간을 다 퍼붓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님의 계획 속에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은 우리는 도무지 생각 안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계획 잡아놓고 자기가 좌절하고 울고불고, 나 혼자 책을 보고 나 혼자 길을 가고 나 혼자 노래 부르고, 혼자 울다가 혼자 웃다가, ‘그래, 차라리 죽자.’ 혼자 자살하려 하다가, 혼자 좋아서 이것이 천국이라고 하다가……, 그게 전부 다 하나님의 계획인줄도 모르고. 이제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오는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 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1-12) 하는 이 말씀의 의미를 구약 성경 한 곳을 찾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지만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냈다는 그 사실을 사람들이 잘 안 믿어요. 특히 구약에 있는 사람들도 잘 안 믿었어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믿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자식이 세 명 있다 합시다. 자식이 세 명 있다 할 때 부모들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자식이 첫째 둘째 셋째가 있는데, 첫째 둘째는 말을 잘 듣는데 셋째는 그렇게도 말을 안 듣네요.” 이렇게 하는데 그것은 잘못 생각한 거예요. 첫째 둘째 셋째가 다 말을 안 들어야 돼요. 그런데 첫째 둘째가 말을 잘 듣는다면 이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사고방식을 자기 욕망을 기준해서 끄집어내는 버릇이 있는데 그러면 안돼요. 우리는 세상이 망가지고 하늘에서 진짜 유황불 떨어져야 마땅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유황불 안 떨어지잖아요.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성경 보는 사람들 중에 이것을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소돔과 고모라에 불이 떨어졌다. 지금도 불이 떨어져야 돼요. 이것이 예수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이 소돔과 고모라보다 징벌이 더 심할 것’(마 10:15)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면 정신 바짝 차리고 그 말 들어야 돼요. ‘아하, 지금도 하늘에 유황불이 떨어져야 마땅하구나. 그런데 오늘도 왜 이렇게 하늘이 맑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사고방식을 좀 반대로 가져가야 돼요.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이 대목이 기니까 그냥 제가 이야기 식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북쪽나라에 아합이라는 아주 못된 왕이 있었어요. 그 왕은 눈에 불을 켜고 맨 날 자기 좋은 것만 찾고 있는데 그 왕 옆집에 나봇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그 나봇이라는 사람이 포도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포도 익은 향내가 솔솔 나니까 이 아합 왕이 환장을 한 모양입니다. ‘야, 포도농사 진짜 잘 되었네. 내가 임금인데 포도열매를 그냥 먹기보다는 저 포도원자체를 가져봤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해서 나봇을 찾아가서 아주 좋은 조건을 제시했어요. “나봇씨! 이 포도원이 좋은데 이것보다 더 좋은 포도원 줄 테니까 이 포도원은 나에게 넘기소. 이 포도원이 이상하게 너무 탐이 나네. 내가 누군데?” “임금님이죠.” “그렇지, 나 임금이야. 내가 이 나라 임금이라니까. 빼앗을 수도 있지만 내가 착한 임금 되고 싶어. 이것보다 더 크고 좋은 포도원 줄 테니까 너의 포도원은 나에게 달라.” 했습니다. 우리가 항상 성경 볼 때에 나쁜 사람의 발언이 나올 때 이것은 나와 상관없는 발언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항상 나쁜 편의 그 심정을 우리가 먼저 헤아릴 줄 알아야 돼요. 자기가 임금인데, 요새 말로 재벌인데 구멍가게가 옆에 있더라. 그 가게가 너무 아담하고 좋아 보이더라. “돈 후하게 쳐 줄 테니 그거 파세요.” 충분히 그런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를 나쁘다고 이야기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아합 왕은 이야기합니다. “나봇씨! 다른 포도원으로 교환해주는 조건 말고 현찰로 쳐 달라고 하면 현찰로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아주 후한 조건으로.” 그런데 이런 발언을 임금에게 한다는 것이 아주 희한한 거예요. 열왕기상 21장 4절에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고. 죽으려고 환장을 한 거예요. 상대방이 왕인 줄 알아요. 그리고 그 왕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유업을 당신에게 넘길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땅도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땅 주신 따로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끼리 사고팔고 할 문제가 아닙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이것이 언약정신입니다. 성도가 여자가 되어서 ‘난 남자하고 살아보겠다.’ 또는 남자가 되어서 ‘여자하고 한번 살아볼까.’ 이것은 우리 맘대로 안 됩니다. 왜, 하나님의 언약이니까. 이 몸뚱이, 이 인생자체가, 허약하면 허약한대로 강하면 강한대로, 조실부모했든지 조실부모 안했든지 간에 어쨌든 간에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영역이고 하나님의 계약 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고백을 오늘날 사람들이 기대를 안 해요. 왜냐, 그런 기대를 한다는 자체가 오히려 희한한 사람이에요. 내 인생 내 맘대로 한다, 하는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평소에 살아가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강요한다는 자체가 참 욕심인데 나봇같은 이런 사람도 있더라는 말이지요. 놀라운 거예요. 사실은 이런 생각을 이스라엘 전체가 다 가져야 되는데 그런 사람은 거의 없고 오히려 나봇이 아주 특이한 사람처럼 되는 겁니다. 그것을 누가 몰랐느냐, 왕이 몰랐던 거예요. 돈 쳐주겠다는데……, “하나님은 떼고 이야기합시다. 잠시 만요! 하나님 떼고 가실게요.” 하나님 이름은 잊어버리고 이야기하자는 겁니다. 언약은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약속이거든요. ‘이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너희는 품꾼’이라는 것이 레위기 26장에 보면 나온다는 말이죠. 분명히 율법에 나오는 이야기란 말이지요. 이것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에요. 낯선 것이 아니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요즘이나 그 때나 성경 무시하기는 마찬가지니까 잊어버렸겠지요. 그걸 보고 임금님이 고민에 빠졌습니다. 밥을 못 먹을 정도예요. 잠을 못잘 지경입니다. 아합 왕의 유명한 부인이 있는데 그 이름이 이세벨입니다. 이름은 예쁘지요. 왕비가 보니 남편이 밥도 안 먹고 잠도 안자고 있으니까 “당신이 뭣 때문에 고민합니까? 당신이 왕인데 왕이 고민할 것이 뭐가 있어요? 뭔지 말해보세요.” 할 때 아합 왕이 “저 포도원을 내가 못 가져서 고민이다.” 한 거예요. 왕비가 들어보니 기가 차요. “아이고, 이 양반아! 당신은 왕이야. 뭐 이런 왕이 다 있어? 내가 해줄게.” 그래서 그 이세벨이 나서서 유력한 사람들, 장로들과 깡패 두 사람을 고용을 해요. 일당을 주고 고용을 해서 나봇이라는 사람을 공개석상에서 높은 자리에 앉히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식사대접을 하는 가운데 갑자기 동원된 깡패 두 명이 등장해서 “여러분, 이 훌륭한 나봇, 믿음 좋은 것으로 보이지요?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임금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습니다.” 율법에 보면 누군가를 고발할 때는 두 사람의 증인이 있으면 된다고 했거든요. 두 사람이 나서서 “저도 봤습니다.” 해 가지고 “이런 사람은 율법에 의하면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해서 나봇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쳐 죽이게 한 다음에 이세벨이 남편을 찾아가서 “여보! 이제 식사하세요. 잠도 편히 잘 수 있어요. 그 포도원은 이제 당신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나봇이라는 이 사람의 억울한 죽음, 나봇이 죽게 된 것은 자신의 옹고집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속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목숨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마치 제사한 번 잘 드리고 죽었던 아벨처럼, 그리고 스데반집사처럼, 그리고 많은 사가랴같은 선지자처럼, 그리고 죽었던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복음 때문에, 하나님의 입에 담아준 언약으로 인하여 언약이 언약답게 발산하는 과정 속에서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제공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사람의 일에서만 주께서는 갚아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보냈습니다. 보내놓고 아합을 만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를 통해서 아합에게 지시하기를 “아합이 포도원 뺏으러 갈 테니까 너는 이런 이야기를 그에게 해라.”하고 예언의 말씀을 하는 겁니다. 열왕기상 21장 19절에 보면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저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아벨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아벨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은 옛날에 있었던 일을 잊지를 않고 있습니다. “너 옛날에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잖아. 하나님 것이니까 못 주겠다고 하니까 네가 사람 보내서 나봇의 목숨을 앗아가고 포도원도 빼앗았지?”라고 옛날에 했던 그 일을 하나님은 잊지를 않습니다. 이 “옛날에”라는 것이 오늘 본문 에스겔 20장에도 나오지만 또 한군데 나오는 곳이 있어요. 열왕기하 9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나봇뿐만 아니고 그 아들들도 죽였던 모양이죠. 하나님께서 나봇을 죽인 그것을 기어이 나중에 예후라는 장군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정권을 잡게 해서 그 예후라는 장군이 기어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이세벨이라는 그 왕비를 처참하게 죽이도록 하는 이야기가 열왕기하 9장에 나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이야기는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이야기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옛날에”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은 잊어본 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야기 본론으로 돌아갑시다. 이제 해결을 봐야 되니까.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같이 마주보고 살았는데 거지 나사로는 천국가고 부자는 지옥 갔습니다. 부자가 지옥 갔을 때 하나님은 부자가 이 땅에 살면서 한 일을 잊지를 않습니다. 왜 잊지를 않느냐 하면, 그것은 부자 본인이 아는 정보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부자로 하여금 지옥에 가도록 만든 하나님의 세세한 그 정보가 부자로 하여금 지옥가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도 오늘날 우리한테는 우리식대로 해서 행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서 매일같이 우리의 일상에 심어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옛적에, 옛적에…….” 하면서 절대로 잊지를 않습니다. 내 인생 내가 꾸려가는 것 같지요? 많은 철학자들, 많은 세상 사람들은, 그리고 옛날의 전설이나 신화에 보면 우리의 인생은, 옛날 여자들이 베를 짜듯이, 천 짜는 기계를 가지고 매일같이 인생을 짜나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자기 인생은 자기가 다듬어나가는 것이고 자기가 꾸려가는 것이고 사람들은 전부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봇은 뭡니까? “이 땅은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나봇의 이 고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고백입니까? 놀라운 것 아닙니까? 나봇은 자기인생, 자기밭뙈기, 자기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고 평소에 그렇게 믿고 산거예요. 그게 신앙인이에요. 그게 신앙인입니다. 그렇다면 나봇에 있어서 ‘행한 대로 갚으리라.’라는 이 말은 요한계시록 22장 11절의 말씀, ‘의로운 자는 계속 의를 행하고 악한 자는 계속 악을 행하라.’는 이 말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천국 갈 사람은 매일같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십자가 피를 잊을 수가 없는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그 말입니다. 누가요?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된 나봇같은 신앙인. 그런 사람에게 오늘 본문에서 ‘옛날에 애굽 땅에서 너희를 건져줬잖아.’ 할 때, 에스겔을 통해서 그런 말씀을 할 때, “맞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은혜로 살아가지 우리 힘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비록 유다나라 망해도 그 사람은 천국 갈 사람입니다. 역사적으로 망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원히 지옥 간다는 말은 아니에요. 이스라엘은 망해도 그 사람이 망하는 가운데 구원받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의 그 옛날의 원리원칙이, 출애굽 했던 원리가 지금도 이 자리에 그대로 적용되어서 지금 그것이 믿어지도록 조치하신 이 능력은 십자가의 언약의 능력이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믿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믿는 자들은 알게 되는 거예요. 인생 뭐 있습니까? 인생 한 방이죠. 언약 한 방입니다, 언약 한 방! 예수 믿게 되면 소급해서 ‘아, 내 인생은 나봇같은 인생이구나. 내게 주어진 단추 하나조차 전부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구나. 물론 이 몸도 마찬가지고.’ 주께서 실을 짜듯이 짜가는 인생, 야곱은 구원받고 에서는 저주받고, 이것은 다 짜인 각본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발걸음도 세시면서 인도하시는 그 언약 적 인도하심, 그것이 바로 야곱이 고백한 ‘나는 나그네 인생이었습니다.’ 하는 고백이에요. 하나님께서 ‘옛날에’ 하거든 그 말은 옛날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옛날의 그 원칙이 지금도 적용되는 것을 네가 믿으라는 뜻으로 아시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 내가 가꾼다고 생각하고 예수 믿으니까 믿다가 말고 믿다가 말고, 맨 날 우상숭배 하듯이 딱딱 끊어지는 어설픈 신앙이었습니다. 하지만 원천적으로 내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언약이고 은혜인 것을 인정한다면 지금껏 살아온 것도 다 은혜인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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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표징(겔20;12-14)이근호130904 (0) | 2013.09.06 |
사자 가족의 슬픔(겔19;1-7)이근호130821 (0) | 2013.08.24 |
선인과 악인(겔18;21-24)이근호130814 (0) | 2013.08.24 |
율법과 죽음(겔18;5-9)이근호130807 (0) | 2013.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