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2013년 7월 31일 본문 말씀: 에스겔 18:1-4
(겔 18:1, 개역)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겔 18:2, 개역)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비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찜이뇨』
(겔 18:3,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
(겔 18:4, 개역)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비의 영혼이 내게 속함 같이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속담이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는 진리적 내용이 담겨 있는 글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속담에 시비를 거시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단지 속담 하나만에 대해서 시비거시는 것이 아니라 속담 하나를 통해서 알려진 인간들의 본편적 정서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에스겔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시비를 알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정리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도 같이 시다’라는 속담의 근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관된 뜻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갖 지혜들을 짜내어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뜻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정리되어 나온 것이 ‘아버지의 이와 아들의 이가 같이 시게 된다’는 속담입니다. 그렇다면 모세 율법에 어디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이구동성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까? 출애굽기 20:5-6에 보면, “그것들(우상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을 누가 보고 누가 읽어도 “아비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도 시다”의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되게 됩니다. 즉 자식대에 있어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가사가 기우어지는 것은 아버지 대에 저지른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당부하신 것처럼 그 벌을 ‘3-4대’까지 끌고 가신 결과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해석을 내려주어야 비로소 출애굽기 20:5-6 말씀이 하나님의 빈-약속(거짓 약속)이 아님을 서로 동의하는 공동체 내부에서 공감대가 형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그러하다가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결론에 이르렀기에 서로가 “과연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있는게 맞구나”하고 신뢰성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 봐도 출애굽기 20장에 대해서 달리 해석한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보내어서 “그 해석은 틀렸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틀린 이유를 제시하시면서 인간의 견해와 차이나는 주장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근원적으로 해석 인간 자체가 비-정상적인 존재인 것을 들추어내는 식으로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즉 속담 해석의 반대라면 이렇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아버지가 죄를 지어도 자식 대까지는 내려가지 아니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통해서 이렇게 언급하십니다. “모든 영혼은 내게 속했다. 따라서 누가 핑계 누구 탓할 것도 없이 모든 인간은 항상 벌로서 죽을 준비되어야 한다”는 식입니다.
이 말은 곧 사람들이 ‘내가 착하게 살기만하면 벌 안 받게 된다’는 의식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킨 현상이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곧 ‘모든 영혼’은 각자의 영혼을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숨겨진 하나님의 진정한 비밀스런 뜻을 위하여 다루어질 대상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3:32-33에 이렇게 나온 것을 전제로 해야 합니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즉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자식 관계는 출애굽기 20:5의 말씀인 죄와 벌의 엮어짐이 어떤 식으로 성취되는지를 보여주는 재료가 되는 겁니다.
부모없는 자식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어떤 인간 존재이든 아버지와 어떻게든 관련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출애굽기 20:5의 원칙도 끼어들어 작동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의 완성은 인간들이 판정을 내릴 수 있는 사항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판정내려집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는 이 지상의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 자체가 ‘아들’이 되심으로서 ‘아버지’는 영원히 인간들에 의해서 숨겨져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보통 지상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아버지가 시간상으로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서는, 예수님께서 아들다움이 드러날 때만 아버지도 같이 계심이 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아버지를 목수 요셉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보는 그 자신이 따지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예수님에게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에 내린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들로 오셨고 또 아들답게 움직이므로서 모든 인간 세계의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비-정상임이 밝혀집니다. 곧 모든 영혼은 죄인이라는 점을 알려집니다. 고린도후서 5:14에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 곧 아들의 죽음으로 모든 영혼은 이미 그 죄로 애초부터 죽은 영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세계에서의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라는 것은 그 원형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를 지상에 있는 죄악된 구조 안에서 부자 관관계를 통해서 드러내시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죽이시고 사흘이라는 기간 동안를 제시하므로서 인류의 긴긴 역사는 모두 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라는 이 사흘 안에 응축되어 담기게 됩니다. 죄악된 역사라는 성질을 품은 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은 아무리 인류사가 오래 지속되어도 그 의미와 목적은 이미 십자가 사건으로 확정 났음을 말해주는 겁니다.
어떤 영혼이든 범죄하면 죽게 된다는 하나님의 뜻은 곧 부모를 잘못만난 그 어떤 자식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받으면 그 영혼은 산다는 의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제자가 아버지와 작별 인사하는 것조차 쟁기를 잡고 뒤돌아보는 일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