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강-에스겔18장 5-9(율법과 죽음)13080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8장 5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75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8:5-9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법과 의를 따라 행하며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며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변을 위하여 꾸이지 아니하며 이식을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악을 짓지 아니하며 사람 사람 사이에 진실히 판단하며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히 행할진대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신약성경에서 정녕 살았던 분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죽었는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흘 만에 죽음가운데서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이 에스겔 18장 오늘 읽었던 본문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했는가의 문제, 예수님은 이스라엘 족속의 우상에게 눈을 들지 아니하고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지 아니하고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아니했기에 주님이 사흘 만에 부활했을까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아들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 인정하기에 죽음에서 부활로 이끌어냈는데 오늘 읽은 본문 에스겔 18장에 의하면 주님께서 항목을 이야기해요.
이것도 지키고 저것도 지키고 다 지키게 되면 “그는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이 말씀을 듣게 되면 사람들은 백이면 백 이 말씀을 지킨 사람을 주변에서 찾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목사를 찾겠지요. ‘우리 목사님은 변을 위하여 꾸이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지 않을 것이며 손을 금하여 죄짓지 아니하며 진실로 판단할 것이다.’라고 판단을 하겠지요. 목사를 멀리서 보면 상당히 착하고 그야말로 남한테 나쁜 짓을 안 할 것 같은데 막상 그 집구석에 가서 가까이 보게 되면 ‘이것도 영 아니네.’ 그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그것도 아니면 어디서 이 에스겔 18장대로 살아서 진실로 의인이 된 사람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그런 의인은 없다고 했습니다. 전도서에 보면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허무하다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이 에스겔 18장을 이야기한 것은 사람보고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이렇게 어떤 기준을 제시해도 무슨 이유 때문에 이 기준에 부합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느냐 하는 그것을 다시 한 번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18장 5절에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법과 의를 따라 행하며 산 위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어요. 산 위란 우상 섬기는 제단이죠. 우상 섬기는 제단에서 제물을 먹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죽어도 사느냐, 하는 문제가 생겨요. 동화사 갓 바위에서 비빔밥도 주는데 거기 가서 그냥 갓 바위만 구경하고 비빔밥 안 먹고 내려오면 내려오다 미끄러져 죽어도 천국 가느냐, 그 말입니다. 비빔밥이 천국을 보내고 안 보내고를 결정짓느냐는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몇 가지 항목은 다 지켰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나오는 항목외의 경우를 위반했을 때 그 사람이 과연 의인이냐 죄인이냐 하는 문제가 성립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18장의 대목에 대해서 ‘그래, 이것은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보고 준 것이 아니기에 아예 넘어가버리고 못 지키니까 못 본 척해버리자.’라고 넘어가서 “주여, 우리는 못 지킵니다. 우리는 예수나 믿겠습니다.” 나왔을 때 그 사람은 경로를 이탈한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계시는 경로에 들어서서 예수를 만나야 되는데 이쪽 길에 들어서지 바깥으로 나가서 예수를 만나니까 그 경우란 잘못된 예수를 만난 셈이 돼요.
에스겔에서 율법적으로 보이는 이런 명령, 지키면 살고 안 지키면 죽는다는 말씀을 주신 의도와 취지의 노선을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 오시기전에 제공했는가, 그걸 먼저 아셔야 돼요. 좀 어렵지만 중요한 문제이기에 해보겠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질문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이 질문은 하나님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한 그 질문 빼놓고는 모든 인간은 질문을 다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니까 ‘나는 우상을 섬기는 자일까, 아닐까?’를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거예요.
율법이라 하는 것은 뭐냐, 율법이 우리에게 나타났을 때 인간은 그 율법을 앞두고 필히 어떤 질문이든 그 질문이 나오게끔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쉽게 해서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는데 “교회 다니십니까? 교회 나오세요.”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사람은 “나는 교회 안 다닙니다.”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지금 교회를 다니나, 안 다니나?’ 스스로 자기에게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교회 안 다녀도 괜찮을 것 같은데 혹시 안 다니다 해를 입지 않을까? 그럴 리 없겠지.’ 이처럼 사람은 주변에 어떤 계기가 주어지게 되면 스스로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장(場, 영역)이라고 이야기해요. 갈라디아서 3장에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 땅 인간을 어떤 영역 속에 둔 거예요. 도가니 속에 쥐 한 마리 들어 있는 것처럼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 하든지 누구한테 하든 어떤 질문을 함으로써 그런 질문을 유발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환경과 영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거기에 갇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셰익스피어라는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인간은 호두껍질 속의 제왕이다.” 인간이 평생을 살면서 아무리 상상하고 생각하고 깊이 합리적으로 따지면서 36.2도까지 올라가는 이 더운 날 열심히 일했지만 그것이 자기가 호두껍질 속의 제왕처럼 군림하고 싶어서 그런 세계를 피워내고 있다는 거예요.
항상 인간은 제왕, 내가 왕이라는 사실을 포기한 적이 없어요. 덥든지 춥든지 간에. 그런데 셰익스피어가 어떤 취지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좀 더 깊이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준 어떤 환경은 인간이 따져서는 몰라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환경을 줬지?’ 몰라요. 모르는데 어떤 식으로 우회해서 알게 되느냐 하면 주변의 어떤 일이든지, 어떤 사물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만나면 항상 질문하고 답변하고 ‘저 사람은 나에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를 묻고 답하면서 항상 나오는 결과가 뭐냐 하면, “나는 제왕이다. 나는 누가 뭐래도 내가 신이고 왕이다.” 이런 결과로 도출되게 되어 있어요.
아마도 그 점을 셰익스피어가 안다고 치고 그 다음 말을 이렇게 합니다. 뭐라고 단서를 붙이는가 하면, “인간은 호두껍질 속의 제왕이다. 단 악몽을 꾸기 전까지는.” 이렇게 합니다. 셰익스피어의 그 이야기를 좀 심사숙고 하게 되면 악몽이라 하는 것은 꿈이거든요. 낮에는 자기를 조절할 것 같은데 밤에 잘 때 꾸는 꿈은 자기가 지배할 수가 없습니다. 악몽에 대해서는 그냥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어요. 식은 땀 흘리면서. 악몽이라 하는 것은 내가 악몽을 허락해서 꾸는 것이 아니고 허락도 없이 그냥 꾸게 되거든요.
악몽을 꾸게 되면 우리는 갑자기 꿈속이지만 하얗게 질려버립니다. 너무 무섭고 놀라지요. 셰익스피어가 거기까지 이야기했는데 제가 거기에 덧붙이겠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악몽이에요. 하나님을 만나버리면 숨이 막혀서 나는 죽었다는 말조차 감히 하기가 힘들어요. 이사야쯤 되어야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그런 소리를 하지 일반인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나버리면 혼절해 버립니다. 정신이 나가버리죠. 도저히 가당치도 않고 감당이 안 되지요. 기독교의 시작이 뭐냐, 모세가 직접 하나님을 만난 데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났기에 기독교가 시작된 거예요. 구약 이스라엘이 시작된 겁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전부 누가 썼는가 하면 모세가 썼어요. 모세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과 직접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계시 듣고 창세기부터 다 써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창세기 속에 들어온다는 것은 모세와 동일한 경험 속에 겁도 없이 들어온 셈이 되는 겁니다. 모세가 하나님이 십계명을 받을 때 시시덕거리면서 장난치듯이 “하나님, 이 십계명을 제가 좀 지켜볼까요? 사흘 만에 한번 지켜볼까요?” 했을까요?
모세는 이렇게 까불거릴 수가 없어요. 왜, 모세는 직접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물론 그 얼굴은 못보고 뒤만 봤지만. 하나님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안 사람은 더 이상 자기걱정이라든지 자기연민, 자기변호, 자기방어, 이런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이게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해서 첫 마디부터 방어 자세를 하면서 꼬고 위장하고 따지고 계산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따지고 계산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냥 턱 숨이 막힐 뿐이지요. 참 기가 막히지요.
“어찌하여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왜 저를 찾아오셨는데요?” 이런 말밖에 할 것이 없어요. 그것을 저는 아까 말한 창세기 3장에서 ‘질문’이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면서 찾아오면서부터 아담이 생각하는 아담은 허구입니다. 이것은 다 자기가 지어낸 거예요. 미리 제가 결론의 힌트를 드린다면 모든 율법은 우상 찾아내기입니다. 우상 찾아내는데 인간이 우상을 섬기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자체가 우상입니다. 인간자체가 자기를 꼭 닮은 신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신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을 직접 만나보니까 숨이 턱 멈추면서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주여, 누구십니까?” 이렇게 한 것처럼 그냥 할 말이 없어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또는 욥처럼 재를 뒤집어쓰고 그냥 할 말이 없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이 세상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사실은 내가 다루기 위해서, 내가 적응해서 밥 먹고 살려고 일어난 일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 자체가 우상 적인 발상이고 세상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만이 의미 있고 다른 사람은 의미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부러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만들어 낸 기적들 속에서 본인은 있었던 거지요.
“하나님, 이거 몇 개 지킬까요?”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옵니까? “하나님, 이거 지키면 내가 구원받겠습니까? 이것 지키면 구원 시켜 주지요?” 이런 협상과 타협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이 있다는 말은 이 세상은 온통 하나님 세계고 나의 세계는 따로 설정되지 못한다는 것, 내가 아무리 율법을 지켜도 그 지킨 만큼이 절대로 나의 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이 시간에 ‘결과’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원인이 우리 하나님이고 결과가 우리죠. 그래서 진짜 이 세상에서 질문이란 원인이 질문을 하고 그 질문한 질문이 우리가 어떤 대답을 하든 상관없이 질문이 질문한 그 대로 결과가 주어지는데 그 주어진 결과가 바로 성도고 천국이고 지옥입니다.
그러면 우상이 발생되는데 그 우상이 어디서 발생되는가하면, 결과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신에게 질문을 하면서 우리가 원인이 되고 내가 원하는, 내가 원인이 된, 내가 기대했던 그 결과를 따로 설정하고 따로 만들어내겠다는 시도를 하면서부터 그 자체가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정도 우상, 교회도 우상, 국가도 우상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그냥 무심코 이야기한 것이 아니에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마 10:37)하다는 말을 예수님이 그냥 한 것이 아니고 평소에 우리가 늘 이렇게 내가 질문하고 내가 답변한다는 자체가 내가 원인이니까 이 원인에 부합되는 결과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우상 적인 본성을 계속 발휘하고 있었다는 그 말이에요.
어제 누굴 만났는데 그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딸을 키우면서 늘 예쁘게 느꼈는데 언제 자기 딸이 가장 예쁘다는 것을 느꼈느냐 하면, 학교 다녀오면 꼭 이런대요. “엄마, 또 일 등 했어.” 그럴 때는 자식에게 뽀뽀해주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예쁘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는 그런 이야기 들어 본적도 없는데요.” 그 딸이 서울 의대에 갔고 지금은 의사가 되어서 곧 같은 의사와 결혼할 거라는 소식을 전해줬어요. 그 딸이 항상 부모를 기쁘게 한 것이 뭐냐 하면, “또 1등이야.” 하면서 시험지를 들고 집에 오곤 했다는 거지요.
그것이 그만큼 기분 좋다는 것은 그만큼 기대했다는 말이고 그것을 기대했다는 것은 ‘내가 내 딸을 키우면서 그 정도 결과는 생겨줘야 아, 내가 이 땅에 살 이유와 목적이 된다.’고 생각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바로 우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우상인 것을 어떻게 밝혀내는가? 주님께서는 질문을 해요. 질문을 하는데, 마치 우리가 원인이고 내가 나라는 원인한테 잘 작용을 하고 관리를 잘하면 내가 원하는 나를 천국에 보낼 수 있다는, 내가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 그 나름대로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인식의 틀을 주께서 감안해서 이렇게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네가 남의 아내를 탐내지 않으면 너는 살 것이다.” 자, 하나님께 율법의 질문을 던져버리면 우리는 내가 하나의 결과에 불과한데 마치 평소에 내가 원인처럼 살아왔던 그 우상 적인 본성이, 우상을 섬겼다고 우상이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본성이 우상 숭배자니까, 그 본성을 우리는 아주 기발하게 발휘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남의 아내를 탐내지 아니함으로 나는 기어이 하나님의 약속한 것, ‘의인이니 정녕 살리라.’를 따내고야 말겠습니다. 내 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내 행동으로 말미암아 내가 나를 천국 보내는 그 결과를 스스로 따내고야 말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나올 때 “딩동댕! 드디어 들켰다, 이놈아. 네가 우상이구나.”라고 주께 포착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아무 민족이나 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 언약민족에게만 되는 겁니다. 제가 우리교회 들어가 보니 어떤 사람이 질문했어요. “구약에 행위언약이 있고 은혜언약이 있는데 어떤 구절이 행위언약이고 어떤 구절이 은혜언약입니까?”라는 조로 질문을 했어요. 그것이 바로 기존의 신학교나 목사들이 장사하기 위해서 사기를 친 결과입니다. “여러분들이 하기 나름입니다.” 이거거든요. “여러분이 원인자이기에 여러분이 잘 하면 여러분이 잘 될 것이고 여러분이 잘못하면 여러분은 나중에 지옥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더욱더 죄 되게 만드는 거예요. 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결과이면서도 마치 내가 새로 개시할 수 있는 원인이라고 자부할 때 그것은 바로 진짜 원인되시는 하나님을 이 세상에서 삭제하고 지워버리는 악마적인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입니다. 이제 악몽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참된 악몽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이 직접 만나는 것이라고 했지요. 이것은 구약 때 악몽입니다. 신약 때 악몽은 뭐냐 하면, 죽는 하나님을 만나는 거예요. 죽는 하나님!
하나님이 죽어버렸어요. 하나님이 죽어버렸으니까 죽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고 내 쪽에서 “하나님은 살아 계시지요?” 하는 것은 전부 다 우상이라고 여기시면 정답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으면 다 우상이에요. 왜, 나타난 하나님은 사시는 하나님이 아니고 죽어버린 하나님이고 그것도 누구한테 죽었는가? 음주운전이나 포크레인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인간의 우상의 극단이거든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사람들에게 뭇매를 맞아서 사형당한, 사람 손에 죽었던, 그리고 모든 사람이 거기에 동조를 했던, 우리도 거기에 있었다면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테러나 린치로 인해, 사람에게 얻어맞아서 죽으신 그 분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죽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겠다? 그것도 우연히 죽은 것이 아니고 “내가 떠밀어서 죽은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내가 바로 당신을 떠밀었습니다. 떠민 이유가 나는 따로 하나님을 설정했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하나님이 따로 있기 때문에, 당신 같은 하나님은 필요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훼방 받지 않도록 당신을 떠밀어서 당신이 죽었습니다.”라는 것을 포함해서 예수님을 믿는 거예요. 이것은 마지막 악몽이고 최고최후의 악몽입니다.
십자가 앞에 설 때에 그냥 욥처럼 혹은 이사야처럼 하나님을 만나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이 정도가 아니고, 이 정도로 소극적이 아니고 신약에서는 적극적으로 악몽이에요. “제가 죽였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이제 나를 구원할지 안할지는 이미 내가 버린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버린 하나님이 나를 구원할지 안할지의 그 권한은 완전히 하나님 손에 넘어가 버렸습니다. 남들 세게 믿을 때 저는 살살 믿었다는 식으로 해서는 할 수가 없어요. “남들 예수 심하게 미워했을 때 나는 조금만 미워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그나마 이 착한 것으로 내가 원인이 되어서 그 착한 만큼 구원이라는 결과로 주어졌으면 참 좋겠다고 여전히 자기의 원인성을 포기 못하는 우상 적인 본성, 악마적인 본성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율법의 진수, 율법의 노선, 십자가로 들어서기 위해서 율법으로 들어가는 코스에서 에스겔에서 바로 신약에 들어가면 이 노선이 분명치 않아요. 그 당시 사람이라면 이걸 보고 ‘몇 개 안되네? 이거 지키지 뭐. 십계명보다 가짓수도 적은데 지키지 뭐. 이자, 이지 안 받고 대신 구원받지 뭐.’ 이렇게 될 수도 있고 또 신약의 사람 같으면 ‘지키지도 못할 것 보지도 말자. 봐도 못 지킬 것 볼 것이 뭐가 있는가? 그냥 십자가 믿지.’라고 할 수도 있거든요. 그러나 이렇게 돼버리면 이미 둘 다 노선에서 이탈한 거예요.
그러면 이탈되지 않으려면 이 율법에서 십자가로 가는 그 연결점이 있어요, 그 연결점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신명기 27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모세가 백성들에게 부탁합니다.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열두 지파를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 나눠서 세워놓고 하는 말입니다. 16절부터 읽어보겠습니다.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라고 했어요.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질문을 “아담아, 어디 있느냐? 저주를 받을 것이요.” 하나님이 먼저 이야기해요. “아담아, 어디 있느냐?” 질문을 던진 자가 원인이 되는 겁니다. 그 원인은 결과를 놓치는 법이 없어요. 반드시 결과를 낳기 마련인데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먼저 원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면 백성들은 뭐할 것이요? “아멘 할찌니라.” 분명히 아멘, 했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하면, 모든 자기백성을 다 죽여 버리는 겁니다. 다 저주받아 죽게 하는 거예요.
왜, 아멘으로 억지로 동참하게 했으니까요. 그러면 “난 아멘 안합니다.” 하면 그 자리에서 죽여 버려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민족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책정하고 우리가 만드는 신은 아무짝도 소용없더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어디에 걸려들어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말씀을 할 때 그냥 하지 않고 그 뒤에 추임새로 붙는 것이 있어요. “……한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가 붙어요. 거기에 끼어들면 돼요.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라고 하면 그 다음에 모든 백성들은 “아멘 할찌니라.” 해야 된다는 거지요.
그러면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라고 하니 항상 율법대로 모든 일을 행하려면 5월 8일까지 부모를 잘 섬기다가 5월 9일 날 어머니를 경홀히 여기면 “저주를 받을 것이요.”가 되는 거예요. 율법은 장이고 영역이니까, 율법은 원인이니까, 율법은 원인이고 우리는 그 결과니까. 어떤 결과? 율법은 이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보여줘야 될 결과물로 우리는 택정되었으니까요. 그렇게 세워졌으니까요.
설명이 어려운데 예를 들면 더 쉬운데요. 단검 던지는 서커스를 하는 사람이 관중들 앞에서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세웁니다. “여러분, 일곱 살 먹은 내 아들입니다. 제 칼 솜씨를 보시고 박수 쳐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애 눈 가리고 세워놓고 아버지도 눈을 가려요. 그래놓고 단검을 뽑아서 던져놓고 나중에 가렸던 눈을 풀지요. 그러면 단검이 아슬아슬하게 꽂히는 것을 보고 관중들이 얼마나 놀라겠어요? 물론 그것 보려고 돈 내고 들어온 거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아들인 이스라엘을 세워놓고 단검을 던지는 거예요.
“세상 모든 자들아! 내 아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한 번 봐라.” 단검을 던지면 쉭쉭 단검이 아슬아슬 하게 꽂히지요. 그런데 그 서커스 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안 죽이고 그렇게 하지만 진짜 우리 하나님은 단검을 던져서 진짜로 죽여 버린다니까요. 거기서 죽는 하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에요. 이스라엘 백성이고. 말씀은 살아 있어야 되고 말씀 외의 모든 것은 죽어 있어야 되고. 이게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그 다음에 볼까요? 신명기 27장 17절,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여기 축복 이야기가 하나도 없어요. 여기 나오는 열두 가지가 다 저주이야기입니다. 18절에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받잖아요. 그런데 귀머거리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문제가 생기겠지요. 그것은 귀머거리를 만나면 거기에 해당하는 율법 조항이 또 추가가 됩니다. “기온이 섭씨 35도 넘더라도 웃통을 벗으면 벌금 만원 나옵니다.”라고 경찰이 이야기하니까 “그러면 36.2도는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묻는다는 자체가 ……, 경찰이 이야기합니다. “너는 웃통 벗으나 안 벗으나 벌금 7만원 때려도 합당한 것에 아멘 해라.” “예, 아멘.” 그러면 되는 거예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나님을 직접 만날 때 이사야가 하는 말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라고 하는 것은 그런 소리를 해야 했기에 그런 겁니다. 이제 좀 감이 오십니까? “그래, 평소에 착했으면 내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라는 말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인데.”라고 하지 마세요. 모든 말씀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십자가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주여,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 말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십자가 지신 거예요. 모든 인간치고 하나님을 죽이지 않은 인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죽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왔고 그 죽는 하나님 뒤에 부활하신 하나님이 계시거든요. 죽는 하나님 그분이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죽은 그 저주에 합류하는 사람만이, 아멘으로 합류한 사람만이 부활의 혜택을 공짜로 받는 거예요. 공짜로, 아멘 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공짜로 받는 거예요. 십자가 믿었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공짜로 받는 겁니다. 왜, 주님의 십자가 자체가 원인이고 우리는 십자가 믿고 구원 받아야 될 결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바로 십자가로 가지 마시고요, 율법에서 반드시 저주로 가야 돼요. 율법에서 저주로.
그러면 우리는 왜 사는가? 이 세상에 저주받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저주받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왜냐하면, 저주를 받아야 내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반쯤 저주받으면 반쯤 저주 안 받고 있는 내가 그 저주받은 그 반을 회복하고 보상하려고 까불댄다는 말이지요. 완전히 주님의 저주 안에 옴팍 싸여버리면 그 때는 더 이상 나라는 것 자체가 건질 것도 없고 기대할 것도 희망할 것도 없어요. 그냥 거지 나사로처럼 혹은 강도처럼 온전한 죄인입니다.
온전한 죄인이 보쌈당할 때 그것이 바로 주께서 죽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그 결과물이고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로마서 5장에서 그리고 6장에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전하는 복음입니다. 에스겔이 이 말씀 한 것은 “너희들 이제 망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망한다는 것에 대해서 에스겔은 짝, 짝, 짝, 축하박수를 치고 있는 거예요. 이 말씀 지키면 산다고 하니까 ‘지켜보지 뭐. 내가 지키지.’ 그것이 바로 우상이었고 그것이 바리새인적인 사고방식이었던 겁니다.
악마가 아비가 되니 그런 사고방식이 있는데 말씀을 줄 때 우리는 못 지킨다고 내빼지 말고요, “이대로 하면 저주받는다.” “아멘. 그렇습니다.”하고 동의할 때 우리는 주님의 결과물로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인지 증거 할 수 있는 증인으로서 다루어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은 호리라도 우리에게 어떤 융통성도 허락하지 않고 냉혹한 악몽인 것을 저희들이 알게 하옵소서. 그 악몽 속에서 비로소 우리가 몰랐던 진짜 죽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사오니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을 잊고 그저 감사와 찬양만 드릴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