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강-에스겔18장 21-24(선인과 악인)13081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 18장 21절에서 2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176페이지입니다.
에스겔 18:21-24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 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싫어하는 이유가 오늘 본문에도 나와 있습니다. “죽으리라.” 하나님께서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따사롭게, 가정의 부모가 자식을 대하듯이 다독이듯 다정하게 이야기하면 참 좋겠는데 “죽으리라.” 너무 극단적인 발언을 하나님 쪽에서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너무 극단적입니다. 지옥 불, 너무 극단적입니다. 반드시 저주한다, 너무 극단적이에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예수를 믿고 사랑하는 척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정나미가 다 떨어져 있어요.
왜? 하나님 쪽에서 너무 극단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고 인간과 인간 사이는 어떤가? 인간과 인간 사이는 좋지요. 서로 양보하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사랑을 주려고 하고. 그러니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사람 상대하는 것이 영 부담이 적잖아요. 하나님 말씀 듣는 시간보다는 사람하고 사귀는 시간이 훨씬 더 재미있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모든 책임은 하나님 쪽에 다 있다는 거예요. 왜? 너무나 극단적으로 하니까, 너무 몰아붙이니까 짜증나고 싫은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 답변은 간단합니다. “누가 믿으래? 누가 천국 오라고 했나?” 성경말씀에서는 이미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인간은 죽었어요. 따라서 성경말씀은 “너희들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비정상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겁니다. 출발이 그래요.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인간을 만들었다는 말은 에덴동산에 안 살거든 본인도 비정상인지 알라는 말이에요. 이것이 에덴동산입니까? 기온 37도 6분이 에덴이에요? 에덴동산이 더워서 피서갈 일 있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덥고 살기 힘들고 절전해야 되고 자식 다 크면 군대 보내야 하고 보내놓고 나면 조마조마 하고, 이게 에덴동산입니까? 아니지요. 그것을 가지고 자꾸 하나님 탓을 하는데요, 하나님을 탓하는 이유가 본인을 자꾸 정상인이라고 간주하기에 그 책임과 탓을 하나님 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봐야 될 이유가 하나님에게는 하등 하자가 없어요. 하나님에 대한 하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은 문제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우리한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 내용은 굉장히 간단한 문제인데 상당히 난해한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뭐냐 하면, “너희들이 내가 준 그 법을 지키면 너희가 살리라. 그런데 안 지키면 너희는 죽는다.” 굉장히 간단한 문제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기서 이야기를 그치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더 나갑니다. “악인이라도 말씀 지키면 살려줄게.” 이 말이 굉장히 난해한 말입니다. 그것과 동일하게 난해한 말이 뭐냐 하면, “의인이라도 법 어기면 죽인다.” 이게 왜 난해하냐? 우리가 악인 혹은 죄인이라는 의미가 뭐냐 하면, 우리가 법을 위반했을 때 죄인이 되고 악인이 되거든요.
위반했을 때 죄인 되고 악인 되는데 새삼스럽게 하나님께서 법을 지키면 악인이라도, 법을 위반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법을 지켜버리면 의인이라고 간주해서 살려줄게,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법을 어겼던 사람도 다시 법을 지키면 의인이라고 간주해서 살려줄게, 라고 할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좋아할 인간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런 법칙이 일괄적으로 주어지게 되면 사람이 법을 지켜서 살았다고 하는 그 순간도 내일을 기약을 못해요. 오늘 법을 지켜서 살았지만 내일 되면, 지난번에 법을 어겼던 것이 나라면 내일에 그 법을 안 어긴다는 보장이 없다니까요?
어제는 어겼는데 오늘은 지켰으니 오늘은 살았다. 그런데 내일이 되면 전에 어긴 것처럼 또 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많거든요. 그러면 오늘 법 지켜 놓은 것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오늘 지키면 뭐합니까? 내일 위반해 버리면 그만인데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해야 될 것은 과거에 법어긴 것이 말씀이 싫고 하나님 욕보이기 위해서 어겼다든지 그래서 어긴 것이 아니고 밥 먹고 살다 보니 안식일도 기억 못하고 십일조도 떼먹게 되는 거죠. 내가 밥 먹고 살아야 되고 자식도 키워야 되다 보니 헌금할 때도 인색하게 되니까 자기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를 짓는 것 같아서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고 간주되는 것이거든요.
그러면 어찌되었든 나는 법을 어긴 것이고 악인이라는 말이지요. 악을 못 저질러서 환장한 사람이 아니지요. 악을 더 못 저질러서 환장한 정신병자가 아니고 그냥 일상적으로 살다 보니 하나님에게 소홀한 것에 대해서 양심이 너무 고와서 “아, 이거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생각 못했구나. 내가 악인이 맞다.”라고 생각했다 그 말이지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법을 다시 지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제는 배불러요? 생활이 어려워서 사는 일에 집중하다 보니 법을 소홀히 하고 어겼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생각해도 악인이 되었어요.
그러면 형편이 나아지게 되면 ‘어, 이젠 고정된 수입이 제법 들어오고 생활이 나아지는구나. 그러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겨야지.’ 그러면 하나님께서 “네가 이제부터 법 지키니까 너는 의인이구나.” 해주면 참 고맙겠는데 이게 점점 더 생활이 어려울 때는 ‘내가 생활이 어려워서 하나님께 소홀하니 악이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생각도 하고 하나님께 제대로 못한 것도 참 미안스러운데 지금 형편이 안 나아지는 입장에서는 하나님 쪽에서 무슨 협박 공갈을 해대도 지금 생활하는 이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법을 지키면 의인된다는 이것을 뻔히 알면서도 선뜻 나서지를 못하는 거예요. 더 미안한 경우가 되는 겁니다.
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법을 지키면 의인 되는 것도 알고 그래서 산다는 것도 아는데 그것보다는 먼저 급한 불부터 꺼야 되거든요. 요즘 교인들은 늘 불 붙어 있어요. 불 끄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매일 매순간 불이 붙어 있는 것 같아요. 아침 출근할 때부터 벌써 신발에 불이 붙어 있는 것 같아요. 모든 세상이 불 붙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님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빨리 다급한 불부터 꺼야 되는데 그 불이 늘 붙어 있으니까 어느 세월에 꺼집니까? 꺼질 새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하는 이야기는 그런 상황에 된 악인이 ‘이제부터 난 개과천선해서 하나님만 섬기리라.’ 해서 법을 지켰다고 칩시다.
그 이야기는 뭘 포기했다는 말이 되느냐, ‘앞으로 진짜 가정이 어렵고 생활이 어렵다 할지라도 나는 그게 우선이 아니고 하나님 섬기는 것이 우선이야.’라는 마음으로 달라질 경우에만 전에 것과 비교해서 ‘난 이제 의인되어서 살래.’하고 왔다고 볼 수 있거든요. 친구 온다고 교회 안가고, 그런 많은 경험을 했고 앞으로 할 가능성이 농후해요. 하나님이 친구를 하필 그 시간에 왜 보냅니까? 간만에 법 좀 지켜보려고 했는데 간만에 하나님께서 친구를 보내버리고. 오랜만에 온 친구를 박대할 수가 없어서 같이 놀아주다보니 주일예배는 빠져버리고.
우린 그런 인간들이에요. 그러니까 방금 이야기한 이것이 오늘날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29절에 보면 그 당시 선지자의 말을 듣던 그 당시 사람들의 대부분의 반응이었습니다. 29절을 읽어드릴게요.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 도다.” 백성들 말이 맞잖아요. 제가 죽 이야기했잖아요. 공평치 않지요.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면 하나님의 법을 지킬만한 조건을 만들어놓고 법 지키라고 하면 그 때는 법 안 지키는 인간을 지옥 보내고 조져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그 말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우리의 형편은 하나님이 조정하고 다 주관한다고 하면서 막상 주의 법을 지키려고 들 때 형편이 안 따라주는 책임은 하나님의 몫이지 왜 인간의 몫으로 돌리느냐, 그것이 불공평하다는 이야기를 백성들이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일리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수요일에 왜 교인들이 안 오는가, 하는데 우리교인들 교회 옆에 아파트 얻어놓고 여기서 반경 30미터 안에 다 살아보세요. 억지로라도 교회 다 나오겠지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뚝뚝 떨어져서 살게 만들어놓고 말씀 들으러 안 온다고? 이것이 공평한 겁니까? 받은 것이 있어야 줄 것도 있지요.
우리가 본문만 그냥 보면 ‘그래, 주의 말씀 맞아. 그래, 주님께서 이렇게 분명하게 엄위하게 거룩하게 일말의 여지도 없이 단호하게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죽고 말씀을 지키면 산다. 행여나 지금까지 악한 일을 했더라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돌이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살려줄게, 라고 하시는구나.’ 할 때 그냥 무심코 보면 “하나님, 고맙습니다. 법 지키면 산다, 해서 이런 기회를 늘 부여해주니 너무 고맙습니다.” 이런 반응이라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 드는데 가만 깊이 생각해보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더욱 심하게 우리의 실상을 노출시키는 것 같은, 그래서 다른 숨어 있는 감정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거든요.
자, 이 문제 풀어야 돼요. 하나님은 겉으로 공평하게 보이는데 막상 그것을 분석하고 생각해 보니까 뭔가 공평치 않다는 그 당시의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이 동감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 쪽에서 너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일입니다.”라고 우리가 사람 편에 서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조치에 대해서 납득을 못하고 있는 거예요. 어디가 문제가 있는 겁니까? 둘 중에 누가 문제가 있는 거예요? 정말 하나님이 공평치 않은 겁니까? 해답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뭐 위주인가 하면, 법과 규례와 하나님의 의 위주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뭐가 위주인가 하면, 자기 구원받는 그것이 위주로 되어 있어요. 여기서 차이가 난 겁니다. 여기서 문제가 터진 거예요. 우리 인간들은 잘못생각하기를 “하나님은 하나님이니까, 그것도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날 무조건 살려내세요. 날 살려내는데 조건을 주시되 우리가 지킬만한 조건을 주시면 지켜서 나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그렇게 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생각을 갖거든요. 이 생각이 뭐냐 하면, 그 출발점이 어떻게 하면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처럼 영원히 구원받고 사느냐, 거기에 일단 관심을 둡니다.
그러니까 ‘내가 날 살릴 궁리만 하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도 동조를 해줘야 하나님과 나와 이야기가 통하고 그럴 경우에만 좋은 하나님이다.’라는 일방적인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고 내가 제시한 법과 규례와 의라 하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지 법 위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사람은 죽여 버리겠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네 구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법에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이 법이 중요하기에, 법이 우선이기에 “만약 내가 이 법을 우선시 하는 만큼 네가 법을 우선시하면 살고 나는 법을 우선시 하는데 너는 네 생존을 우선시 하면 너는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신 거예요.
서로 사고가 안 맞지요. 완전히 깨지는 것은 인간 쪽이 깨져야 됩니다. 구약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만약에 네가 범죄 하면 죽인다. 하지만 범죄 한 것도 네가 돌이켜서 법을 지킨다면 내가 살게 해줄게. 똑같이 지금까지 아무리 법 잘 지켰어도 네가 다시 범죄의 길을 가면 국물도 없다. 죽여 버리겠다.”라는 이야기가 하나님 쪽에서 생각하면 참 그것이 공평하고 정당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내가 살아야지, 라는 입장에서 보면 너무 가혹하다고요. 왜냐하면 내 마음 나도 모르기에.
어쨌든 내가 나를 살려야 하는데 사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하나만 제시했다 그 말이지요. “법 지키면 산다. 어기면 죽인다.” 그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법을 지켜야 되는데 내 구원이 우선이 되니까 법을 지키면서 이것이 언제 파토 날지 불안해서 못사는 거예요. 언제 또 무슨 사건을 만나서 갑자기 성질 부려버리면 지금까지 의로웠던 것이 다 무효로 돌아가니까 괴로운 겁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그 당시뿐만 아니고 사도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까지 이것이 고민거리였고 사실은 해답도 없으면서 쉬쉬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의 사울이 사도가 되고 난 뒤에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모든 이야기가 죄의 해결에 관한 문제였어요. 다시 말해서 오늘 에스겔에서는 딜레마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런 딜레마, 하나님은 법 지키라고 일방적으로 우기는 식으로 나오고 인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은 게임이 공평치 않는 듯이 느껴지는 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딜레마, 그 딜레마에 대해서 어느 인간도 고민하지 않는 인간이 없는데 기쁜 소식이 나타났다는 거예요. 그 딜레마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전부 다 말끔하게 해결이 되었다는 것이 사도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골로새서에서 이야기하는 복음입니다.
어떻게 해결되는가, 오늘 본문을 봅시다. 22절에 “그 범죄 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에 율법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모든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를 의인으로 만들어주는 내용이 그 율법 안에 들어 있다는 거예요. 율법 안에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시편 안에도 들어 있어요. 시편 103편 12절에 보면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앞에 10절-12절에는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도 신약에서 보면 율법이거든요. 이 율법 안에 이미 조치, 지은 죄도 안 지은 것으로 쳐주는 조치가 율법 안에 들어 있어요. 따라서 신약의 복음, 사도바울이 이해하는 예수님은 뭐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 율법이 달리는 노선, 이 철로를 방향을 틀어버려요. 방향을 틀어서 예수님 자신 속으로 율법이 지향하도록, 율법이 담기도록, 아예 그 노선 자체를 꺾어서 주님의 가슴팍에 그것을 심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율법의 모든 저주가 어디로 달려가는가?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달려가야 돼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그의 죽으심도 율법대로 죽으심이고 그의 살아나심도 율법대로 살아나신 거예요. 죽는 것도 율법 안에 들어있고 죽은 죄인을 살리는 그 내용이 율법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양면 다 보여준 겁니다. “이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그렇게 된 거예요. 율법의 노선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옴은 다른 사람에게는 율법의 저주아래 있다는 것이 이미 확인된 그 다음의 절차거든요. 율법을 주심으로서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만들어서 모든 인간을 율법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확정된 그 다음 조치가 율법을 예수님이 자기에게로 쏟아지도록 한 그 조치입니다.
그 사도바울이라는 사람, 재산이 얼마고 집을 몇 채나 가졌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사람이 평소에 살아가는 그 원동력, 그 힘, 기쁨, 감사는 오직 십자가뿐이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우리 교회 교인 몇 명이고 우리 교회 헌금 얼마 나오나’가 하등 슬픔이거나 기쁨의 근거가 되지를 못해요. 오히려 환난 중에 기뻐한다 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날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가 산다고 했어요. 그래서 사도바울 입에서 이런 놀라운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게 어느 정도로 놀라운가 하면, 성령 받은 사람은 기절할 지경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이미 신약에는 죄부터 나옵니다. 구약에는 “율법 지키면 의인이라고 해줄게.”라고 하나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그 기회는 신약에 오면 끝났습니다. 이제는 새삼스럽게 “신약 사람들아, 율법 지키면 의인이라 해 주마.” 그런 시절은 이미 지나갔어요. 그런 기회는 이제 부여받지 못합니다. 이미 다 들통 났어요. 인간은 율법을 못 지키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율법에 대든다고. 그래서 신약에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죄, 죄입니다.
죄 있는 자와 죄 없는 자로 구분해 버려요.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 죄 없는 분은 예수님 한 분 뿐이고 나머지 모든 인간은 이미 죄인이에요, 이미. 율법을 몇 개 지켰느냐, 율법을 몇 퍼센트 지켰느냐를 아예 물을 필요도 없어요. 물으나 마나 이미 인간은 죄인입니다. 이미 그렇게 확정지어졌고 고정 지어졌어요. 하나님께서 예수님 오시기 전에 먼저 율법을 이 땅에 보낸 것은 바로 모든 것을 죄 아래 두게 하심이고 저주아래 두게 하심입니다. ‘율법 아래’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저주 아래’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율법을 지켜서 저주에서 빠져나갈 그런 위인이 이 세상에는 한 명도 없다는 거예요. 로마서 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당신은 뭘 근거해서 그런 소리를 하는가?”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율법 앞에서 의로운 인간이 아무도 없다.” 그것은 아담의 죄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이니 새삼스럽게 개별적으로 죄짓는다고 해서 더 죄인 되고 혹은 덜 죄인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아담 안에서 모든 인간을 일괄처리 해 버립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상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들어가면 우리의 변호사, 우리의 대행자, 우리의 후견인, 나를 대신해 줄 분이 거기에 함께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나댈 필요 없어요. 나대지 마세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까불거리고 나대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우린 우리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마주설 수 없어요. 하나님께서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구원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붙들어야 되고 세상의 어떤 사태, 어떤 파탄이 일어나더라도 그야말로 정전이 되더라도 우리가 의지해야 될 것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내 몸이 아프다 할지라도. 오늘 내일, 오늘 내일,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내 몸이 아니고 내 이름도 아니고 내 자존심도 아니고 오직 예수그리스도가 행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자존심 안에 우리가 들어가 있어야 돼요. 주님은 주님의 자존심을 걸고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대신 하심”은 헛소리가 아니기에. 대신 하셨다는 것이 실효성 있는 능력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을 푹 찔러서 “당신이 어떻게 구원 받았는가?”라고 물어보면 “대신, 나대신 돌아가신 분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이고 복음을 아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어디 가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증거 됩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한 2년 전인가, KBS개그 우먼가운데 신보라 라는 그 아가씨가 공개석상에서 “내가 신인상 받지만 나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밖에 없습니다.” 할 때 그게 훈련되어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진심이기를 바래요.
진심이기를! 내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제발 우리 촌 동네에, 이 마을 어귀에 “이장님 아들이 오늘 예수 피 믿었습니다.”라는 플래카드 좀 붙었으면 좋겠어요. “우리 이장님 셋째 아들, 드디어 예수의 피를 믿었습니다.” 이런 것, 사법고시 그런 말고. 동해안 쪽으로 갔을 때인데 뭐가 붙었는가 하면, 이게 붙어 있어요. “세무공무원 합격” 했다고 붙었어요. 얼마나 취직하기가 힘들었으면. 세무공무원 합격해도 율법 어기면 죽여 버립니다. 그렇게 극단적인 발언을 하기 때문에 그 세무공무원 합격한 아들은 아마 예수 안 믿을수가 있어요.
지금 같이 기뻐해 줘야 할 텐데 “지금 그 세무공무원 합격해도 소용없어. 너는 죽어.” 이렇게 나온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대화가 통합니까? 안 되지요. 오늘날 교회가 목사가 교인하고 대화하기 위해서 무지 노력합니다. 공통대화요소를 찾기 위해서 애씁니다. “애쓰셨습니다. 고생하십니다.” 이런 식으로 그저 달래서 교회 붙어 있게 하려고. 쓰레기 모아놓았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냥 쓰레기일 뿐이지요. 정말 사도들처럼 주님의 방식만 이야기해야 돼요. 그리스도의 피만 증거 해서 그 싫다고 하는 사람은 붙들면 안돼요.
그 붙드는 의도가 목사가 자기 교인 수 모아서 자랑하려 하는 음흉한 것이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목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 보면 역시 사도바울이 주님의 계시를 받아서 하는 말인데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늘 본문에서 끝으로 어려운 것이 뭐냐 하면, 율법과 사망을 결부시킨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보통 죽음을 결부시킨다 하면 연탄가스, 한강다리에서 뛰어내리기, 자동차 사고, 이런 것으로 하지요. “올해는 자살한 사람이 몇 명입니다.” 이런 통계도 나오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통계청에서 하는 말이 “올해는 우리가 율법 안 지켜서 몇 명 죽었습니다.” 이런 통계는 안 나온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통계방법은 법을 안 지키면 죽어요. 이미 죽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사람만이 산 사람이 돼요. 하늘나라 통계청에서는 그 숫자만 헤아립니다. 예수 믿어서 성령 안에서 지금 산 사람만 찾고 있어요. 누가복음 15장에서 양 아흔아홉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마리를 찾으러 갈 때 왜 아흔아홉 마리보다 한 마리가 더 귀한가 하면, 거기에는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의 정보가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에, 양이 귀한 것이 아니고 양을 찾는다고 애썼던 예수님의 피와 땀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양이 귀한 겁니다.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귀한 것이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법이 우선이에요. 우리 구원이 우선이 아니고. 그 법을 완성하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자기 아들 예수님이 귀한 겁니다. 그래서 천국 이름도 바꿨어요. 아들의 나라로 바꿨어요. 아들의 나라에요. 아들 싫어하는 사람 오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아들에 대해서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은 오지 말라는 겁니다. 왜, 들어가도 못사니까. 살수가 없지요. 자기 자랑하기 바빠서.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람 사는 것이 장난이 아닙니다. 참 인생이 고문 같아요. 하나님, 하나님, 하지만 지금 어느 세월에 하나님을 찾습니까? 어느 시간을 쪼개서 성경보고 기도합니까?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요. 지금 허겁지겁 살면서 발등에 불부터 꺼야 되는데 이 불은 아침만 되면 늘 붙고 있어요. 거기에다가 주님께서 극단적으로 “말씀 안 지키면 죽는다.” 하니까 기가 막힌 노릇입니다. 살기는 살고 싶은데 말씀은 지킬 수가 없으니까, 지켜봐야 내일 되면 또 후딱 마음 바뀌는 것을 본인이 너무 잘 알거든요. 인생 자기 마음 자기가 모르니까 장담을 못해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있으면 우리가 염려하는 그 사망, 그것을 주님께서 홀라당 없애버렸습니다. “사망아, 어디 있느냐?”그 말은 사망이 없어졌어요. 사망이 없는 생활, 그것이 예수님 안에, 십자가 안에, 성령 안에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사망 없애주는 능력은 우리가 못하고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우리 대신 우리가 못하는 것을 다 해줬어요. 그래서 우리의 자랑, 우리의 기쁨, 우리의 감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씨 무더울 때 짜증나지만 그것조차 사실은 우리가 죽어 마땅한 죄인인 것을 깨닫는 기회로서 주께서 허락하신 줄 압니다. 우리가 언제 주님 사랑하고 주님께 고마워했습니까? 성령께서 말씀을 가지고 늘 깨우쳐서 이제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도 산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저희들 된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