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자리 옮김

아빠와 함께 2022. 3. 6. 06:26

강남-누가복음 9장 60절 (자리 옮김) 220222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9장 51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여기서 제자들 등장하고 사마리아 등장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 등장하지요. 세 등분으로 한번 나눠 봅시다. 예수님이 계시고 이쪽에 여기에 제자들이 있고 여기는 사마리아인들이 있어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습니다. 오지 마세요. 우리는 당신을 필요치 않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인하고 유대인하고 사이가 관계가 좋지를 않았어요.


사마리아인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면 된다는 것이고 유대인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면 된다는 것이고. 지금도 사마리아인에게는 사마리아 오경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어요. 사마리아 오경. 사마리아 오경 있는데 그들은 출애굽부터 해서 홍해 건너와서 이렇게 시나이 반도해서 시내 산에 이렇게 가는 게 아니고 그들은 이렇게 왔다가 돌아가서 갔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에요. 지금도 사마리아인들의 제사장이 있어서 사마리아 오경을 이렇게 주장합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을 위한 메시아로 생각해서 자기들은 거부를 한 거죠. 메시아 아니라고 거부를 했어요. 그러면 예수님하고 제자는 한 통속이다 생각되는데 오늘 55절에 보니까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신다” 했지요. 예수님이 누구 보고 꾸짖습니까? 사마리아인 보고 꾸짖는 게 아니고 제자들을 보고 꾸짖는 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기의 영역 속에 이렇게 품었다고 생각했어요. 자기의 영역 속에 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게 말이 안돼요. 인간은 신을 품을 수가 없다. 또는 인간은 신을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신을 알 수가 없어요. 알 수가 없지만 제자들을 보게 되게 되면 인간은 신을 알 수가 없고 신을 품을 수도 없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제자들은 신 그리고 신께서 보내준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는 거에요.


여기서 제자들이 신과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다는 말은 하나님 따로 메시아 따로 제자들 따로 가 아니라 자기들이 이해하는 신과 메시아와 자기와 함께 있다고 그러한 상태와 상황이 오기를 고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모든 가족을 버리고 모든 재산을 버리고 오직 누구만 따라갔습니까? 예수님만 따라가는 거에요. 자기 결정이 옳은 결정이기를 바라는 거에요. 옳은 결정이기를.


이걸 오늘날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믿음으로 따라갔다 또는 믿습니다 라고 언급을 하는 거에요. 여기서 이제 믿음에 관한 오해가 크나큰 오해가 있습니다. 인간들은 신과 메시아를 생각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신이나 또는 예수님이나 메시아에 대해서 이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믿음의 대상으로 봐요. ‘믿음의 대상’.


나 안 믿고 나 대신 내가 믿어야 될 분 내가 아니고 저쪽 편에 계시는 하나님 또는 메시아 예수님이 내 믿음의 대상이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말 있잖아요.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다음에 뭐로 구원받는다 했습니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했지요.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믿음으로 구원받으니까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보는 거에요. 우리가 믿기만 하면 믿을 수 있는 대상으로 예수님을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게 근원적으로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거에요. 예수님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에요. 예수님은 무슨 대상이냐 하면은 살해 대상이고 제거 대상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모든 인간에게는 제거 대상이에요.


인간들의 믿음의 대상은 인간들이 이미 알고 있는 제자들이 이미 알고 있는 신, 메시아가 그들의 믿음의 대상이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구를 꾸짖습니까? 이들을 꾸짖는다는 말은 이들이 알고 있는 신과 메시아가 진짜 하나님과 메시아가 아니라면서 꾸짖는 겁니다. 꾸짖어버려요. 그리고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제자들은 같이 합세하지 않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해가지고 심지어 어떤 제자는 옷을 벗고 도망치기까지 했지요. 사도 요한 같은 경우에는.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대표로 배신했지요. “나 저 사람 모른다.” 그냥 모른다 하면 안 먹힐까 싶어서 ‘저 사람을 아주 적극적으로 저주한다’ 했어요. 예수님을 저주한다. 나 예수님을 저주해. 참 희한하지요. 저주해도 구원받았습니다. 베드로가 본인이 저주한 그 분에 의해서 본인이 구원받았어요. 그러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무엇이 자기한테 늘 장착되어 있느냐 하면은 나는 그분을 밀쳤고 저주했었다. 그런데 내가 저주한 그분이 도리어 나를 구원했다. 그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원치 않는 길을 갈 것이다.’ 이것이 베드로에게는 얼마나 큰 사랑이고 복인지 몰라요. 왜냐 하면은 모든 인간은 본인이 원하는 길이 있을 거에요. 원하는 길. 본인이 원하는 길이 있으면 본인이 원하는 길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믿음이 나옵니다. 믿음이. 본인이 원하는 길에서 믿음이 나와요.


본인이 원하는 것은 본인이 달성하고 싶고 되고 싶은 그 목적 같은 것 목표 같은 게 성립되거든요. 그 목표를 위해서 인간은 간절히 믿습니다 열심히 믿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는 주님을 믿는 것을 주께서 아시잖아요 뭐 이런 식으로 자기의 믿음을 티를 내는 이유가 자기가 원하는 게 목표로 앞에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원치 않는 길이란 것은 결국은 뭐냐 하면은 베드로에게는 어떤 목표나 어떤 목적되는 것을 주님께서 비켜서 인도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믿음은 내가 노리고 있던 노림수, 네가 이런 걸 노리고 있고 이런 걸 얻기를 원한다는 것을 아시고 그게 믿음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그 개입이 바로 믿음이에요. 그 개입이.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은 예수님을 일관되게 살해 대상, 제거 대상 여기 하나 더 보탠다면 미움의 대상이에요. 미움의 대상. 그런 노래도 있잖아요. 미워 미워 미워 라는 노래 있지요. 미움의 대상이에요. 일 안 되면 누구 탓을 해야 되는데 그 탓을 할 때 누구 탓을 하겠어요? 주님 탓해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려서 본인이 원하는 것을 본인이 포기를 못하는 한 이 사람은 지금 믿음이 없는 거에요. 믿음이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래도 나를 믿지 않고 주를 믿습니다 로마서 보세요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라는 자꾸 성경구절 끄집어내가지고 자기 원하는 것, 자기 원하는 목표라고 하는 것 다른 게 뭐가 있겠어요. 성도의 목표가 뭡니까? 구원받는 거에요. 천국 가는 거죠.


천국가기 위해서 나는 행하지 않고 믿겠다는 그것. 그것은 이미 본인이 원한다는 조건 때문에 이게 믿음에 해당되지 않고 이게 바로 행함에 해당되는 거에요. 이게 행함에 해당되는 거에요. 믿음은 인간이 뭔가 원한다는 점에서 믿음은 인간 세계에 없습니다. 인간은 원하고 내가 바라고 있다는 점에서 믿음은 없어요.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뭐가 생겼느냐 하면은 믿음과 행함을 인간들은 자기가 판단을 하는데 이 판단은 어떤 판단이냐 하면은 내가 원하는 그 목표를 위해서 믿음이 나을까? 행함이 나을까를 가지고 판단을 하는 거에요.


열심히 율법을 지켜서 천국 갈까? 아니면 예수님의 그 공로를 믿음으로 구원받을까? 둘 다 이게 행함이에요. 둘 다. 둘 다 행함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겠다는데 왜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이 왜 그리 자꾸 생기는지. 자꾸 생기는지. 오늘만 살고 그만 죽어야지 하다가도 뭐 팔순 생일 되면 내가 더 살아서 손자 시집가는 건 보고 가야지. 왜 자꾸 원하는 것이 자꾸 발생되는지. 모든 일에 감사가 없는 이유, 짜증이 나는 이유가요 내가 뭔가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살해 대상, 제거 대상, 미움의 대상이라는 말은 왜 내 뜻대로 안 해주냐고 이런 일이 발생되거든요. 그러니까 인간은 결국 예수 믿는다는 것은 결국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내가 믿는 거에요. 예수 믿는 나를, 내가 믿는 거에요.


자,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이제 내린 결론은 결국 인간에게 예수 믿는 것은 없다 이렇게 되죠. 인간에게 있어서 예수 믿는 것은 없다. 간단하잖아요.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게 있는데요.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원한다는 이유 때문에 믿음이 아니고 전부 다 행함이 되어버리니까 행함이 된다는 말은 내 행위 한 것을 내가 기대한 것 내가 마음에 쓴 것을 내가 믿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예수 믿고 싶어요 하는 그 ‘나’를 내가 믿는 것은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성경말씀처럼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그 존재가 내가 되고 싶어요 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이상 더 이상 인간은 믿음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그 말씀을 왜 주셨는가? 믿음 자체를 만들어내요. 인간에게는 없으니까 믿음 자체를 만들어내요. 주님께서 믿음 자체를 만들어 내는데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 안에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와의 관계가 바로 이게 믿음입니다.


믿는 자가 없으니까 인간은 믿음이라고 해봐야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아무도 없어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새로 만들어요.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믿고자 해도 주께서는 브레이크를 딱 걸었잖아요. ‘다시 태어나야 돼. 다시 태어나면 하나님 볼 수 있어.’ 보는 것이 자기가 원하는 건데 보고 싶은데 다시 태어난다는 그 조건을 본인이 만들 수가 없어요.


내가 엄마 뱃속에 있다가 어떻게 다시 태어납니까? 못 태어나면 할 수 없지 뭐 안 되지 뭐. 그 조건 빼고 어떻게 볼 수 없습니까? 안돼요. 다시 태어나야 돼요. 그 다시 태어나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태어나는 그 방법 그러한 방식, 장치, 구조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자기 하는 일이 그게 다시 태어나는 일이에요.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있는 인간은 무효로 돌리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우리와 함께 죽어서 현재 믿어서 천당 갈려는 우리를 없애버립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과 구원받고자 하는 소망은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너무 절박하기 때문에. 자기 뜻을 자기 스스로 철회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어요. 나 죽어서 지옥갈래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24절에서 분명히 하나님이 인간을 에덴동산 쫓겨났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생명나무 있는 곳과 격리 조치한 거에요. 자택 격리.


생명나무에서 떨어지면 그곳에 같이 있지 않은 상태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것을 저주라고 이야기해요. 저주 또는 진정한 죽음이에요. 왜? 생명이 없으니까. 생명나무에 없는 것을 저주 또는 죽음이라고 하는 거에요. 인간이 자기가 죽고 저주가 있으니까 생명 쪽으로 막 가고자 하지요. 그런데 ‘어딜 넘봐’ 해서 불 휘두르는 천사들을 가지고 강제로 못 가게 만들었어요.


천국에 못 가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참 좋으신 하나님이죠. 천국에 못 가게 하시는 하나님. 천국에 갈려면 천국에 갈려는 나를 죽여버리고 예수님께서 새로 만든 자만이 만들어 보니까 그 자궁, 그 만드는 그 자궁이 여자거든요. 여자에게만 자궁이 있다 이 말이죠. 여자의 자손으로서만 새로 지음을 받는 거에요.


그래서 여기 이사야 7장 14절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사야 7장 14절 여러분들이 외우고 계시는 분 있지요.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잉태하여, 여자지요. 남자 없습니다. 처녀란 말은 남자 없다. 처녀가 인간적으로 보면 스스로 잉태한 거에요. 스스로 잉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다음에 뭡니까? “그 이름을 임마누엘”.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그 새로운 인간을 여기서는 우리라고 이야기하고 그 우리는 어디서 나오느냐? 처녀의 자궁에서 나오는 거에요. 여자의 후손에서 나오는 거에요. 창세기 3장 15절 약속대로.


그러면 남자-여자에서 태어난 자식은 전부 다 ‘NO’가 돼요. ‘아니요’가 되는 겁니다. 육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오’에요.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한 것처럼 육으로 난 자에게는 할례 언약을 해서 피를 내버리잖아요. 죽었다는 걸로. 태어난 것을 죽은 자로 보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의 출생은 무엇의 징조냐 하면은 죽음의 출현입니다. 한 서른 살 살았으면 죽은 몸이 30년 된 거고 한 80 사셨으면 죽은 몸이 80년까지 계속 왜 죽어야 하느냐를 그걸 까발리면서 나오는 거에요.


안쪽에서 생명이 있는 사람은 바깥으로 뭘 밀어내느냐 하면은 죽음을 밀어내요. 죽음을 밀어내요. 그러면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죽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마땅한 것이라는 것을 그걸 즐기면서 그걸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마리아인들은요 무엇을 모르느냐 하면은 자신의 죽음을 시시한 걸로 보지 못하는 게 잘못이에요. 자신의 죽음을 시시하게 보지 않는 게 문제에요. 그 증거가 어디 있느냐 하면은 옆에 제자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54절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라고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과 한 통 속이라고 자부하는 제자들은 인간이 죽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거에요. 주님과 멀어지면 그것은 살아도 산 게 아니라는 것을 제자들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겁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완전히 싹쓸이해버리세요. 이거는 사람 죽이는 것을 볏 짚단 태우는 것 폐기물 태우는 식으로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왜? 인간의 죽음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시시한 문제이기 때문에. 시시한 문제.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거부했을 뿐이지 그걸로 인하여 자기들이 죽는다는 생각을 감히 못한 거에요. 뭐 우리 맘에 안 드니까 가세요 이랬을 뿐이지 그걸로 인하여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당장 죽어도 우리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그들은 못하는 겁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죽음을 바깥으로 내미는 게 아니고 죽음을 자꾸 안으로 숨기려고 하는 거에요. 죽음을. 쉽게 말해서 안 죽을려고 하는 거에요. 안 죽을려고. 내놓으면 되는데 생명이 있기 때문에 쓰레기 같은 이 목숨은 바깥에 내놓으면 되는데 생명 없는 사람은 있는 게 목숨밖에 없기 때문에 그 목숨을 아등바등 어떻게든 쥐고 있어야 되는 거에요. 코로나 걸리면 자택격리해가지고 해야 되는 거에요. 그게 다 시시한 일인데.


한번 적어볼게요. 죽음은 시시하다. 시시해도 너~~~~무 시시하다. 성도의 입장에서 이 죽음은 무슨 죽음이냐 하면은 가죽음이에요. 죽음도 아닌 가짜 죽음이에요. 가짜 죽음이라는 말은 그 죽음 때문에 부들부들 떨거나 주눅들 일은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은 그래요. 그래서 인간들은 이 가짜 죽음을 무서워해서 어떤 목적을 갖는데 그 목적이 뭐냐 하면은 될 수 있는 대로 죽음과 멀리 떨어지기. 될 수 있는 대로 죽음과 멀리 떨어져야 내가 한숨 쉴 수 있다는 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오면서 주께 원망한 이유가 죽음이라는 것을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너무 불안해서 주께 원망한 거에요. 물이 있어요? 뭐 양식이 있습니까? 떡이 있습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이끄시는 지를 그들은 납득이 안되는 거에요.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려가는 것은 주님의 땅에 약속의 땅에 함께 살기 위한 목적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목적이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겠지 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살려주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들어가 있지를 않아요. 광야는 교체기간입니다. 생명이냐 네 목숨이냐 분명히 하라. 그 두 차이를 알라는 거에요. 목숨 지킬려고 하는 그 방식 있잖아요. 양식 먹고 물 먹고 그러나 생명은 그게 아니에요. 생명은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신명기 8장에 나오는 거에요. 그들에게 만나를 주었는데 그걸 눈에 양식으로 보이느냐? 양식이 아니고 그것은 뭐냐 하면은 말씀이에요. 만나가 말씀이에요. 만나가 내려올 때 눈 내리듯이 펄펄 내려올 때 말씀이 내려왔다고 봐야 돼요. 사람은 양식으로 사는 게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식구들은 오늘 아침 뭐야? 오늘 밥 드셨어요? 이렇게 하지요. 오늘 말씀 드셨어요? 오늘 아침 말씀은 뭔데? 이렇게 물어봅니까? 학교 급식할 때 빵하고 이런 거 내놓지 성경 말씀 쭉 펴 놓고 오늘 학교 급식 끝. 급식할 것도 없어요. 급식 그렇게 하는 거에요? 저는 지금의 2,30대를 보면서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40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들이 결혼을 잘 안하잖아요. 결혼.


결혼을 안 하는데 그들이 왜 결혼을 안 하느냐 하면은 마음에 맞는 사람이 없어서 결혼을 안 한다 하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마음에 맞는 사람이 없어서 결혼을 안 하는 게 아니고 현재 20대 30대 MZ세대 이 사람들이 결혼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에요. 젊은 애들이. 어릴 때부터 시작해서 교육이 결혼이라는 것을 할 자격이 안돼요.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왜 인간이 자기밖에 모르느냐 하면은 인간은 요새 모든 교육이 뭐냐 하면은 인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이렇게 바꿔요. 계산하는 사람으로 전부 다 교육을 바꿔놨어요. 계산하는 사람, 카운트하는 사람, 측정하는 사람. 계산하고 측정하고. 전에 인간의 질서가 수학이 됐다. 수학은 수를 헤아리는 겁니다. 수를 헤아리는 것.


수를 헤아리는 이유가 수를 헤아리면서 별 하나 별 둘 헤아리면서 이게 내 것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 하면은 지금 이 시대가 가족 중심이 아니라 공동체 중심이라는 것을 배운 게 아니고요 나만 잘되면 우리 식구들 좋아하더라 그 교육을 받은 거에요. 나만 잘되면. 그러니까 식구들 좋아하는 건 뒷전이고요 일단은 나만 좋아하면 식구들 참 잘했어요 이렇게 하니까 모든 집중을 나만 잘되는데 집중을 하는 거에요. 나만 잘되는 것에.


그런데 결혼은 뭡니까? 혼자 사는 게 아니고 둘이 사는 거죠. 혼자 잘 되는데 왜 한 사람이 더 필요하지요? 결국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내 하인이 되든지 아니면 내 몸종이 되든지 내 하녀가 되든지 아니면 내가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어떤 동업자가 되던지. 그런 조건 아니면 결혼할 이유가 없는데. 그들은 결혼할 이유가 없다고 하는데 본인이 결혼할 수 있는 그런 자격자가 안돼요.


자식들보고 결혼하라는 소리하지 마세요. 교육을 계산하는 인간으로 만들어 놨는데 무슨 결혼이 됩니까. 그래서 결혼을 억지로 했다 해도 소용없어요. 또 계산해요. 또 계산한다고요. 결혼하고 나니 계산하는 인간을 완전히 정면으로 받아치는 그러한 사태가 뭐냐 하면은 애가 생겼네. 애가 생기니까 자기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 잠을 자야 되는데 애가 2시에 깨네요. 이건 계산에 없는 거에요. 미치는 거에요. “애 네가 키워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애 네가 뭔데 내 인생에 이렇게 태클을 거느냐. 그만큼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한 내가 힘을 길러야 죽음에서 좀 멀리 죽음에서 멀리 떨어질 수 있다. 연금이 많다든지 부동산이 많다든지 안심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이 더러운 세계에서는 더러운 세계, 이 교회에서는 예수님을 어떻게 취급하느냐 하면은 통화 또는 화폐, 돈으로 취급됩니다. 유통을 시켜요.


뭐 설교 말씀만 하면 할렐루야. 아멘. 이게 뭐에요? 예수님이 통화에요. 통화. 통화수단. 돈 수단. 돈 유통하듯이 하는 거에요. 예수님 얼마 갖고있는지 보자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전하니까 예수님을 가지면 그 분을 가지면 가질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거에요.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무엇의 대상이다? 인간에게? 예수님은 살해 대상이고 미움의 대상이고 대적의 대상이다. 내가 싫어하는 대상이에요. 진짜 예수님은.


그런데 자기가 계산하니까 예수에 대해서 많이 가지면 자기 목숨부지에 많은 복이 오기 때문에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말씀이 양식입니다. 말씀이 양식이고 그 말씀 중에 하나가 믿음이고 그 믿음 자체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있는 새로운 인간을 현재 아빠 엄마에서 태어난 자식 말고 육 말고 하나님께서 임마누엘로 ‘새로운 우리’라는 그러한 자기 백성을 친히 누가 만드는가? 예수님께서 친히 만들어요.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창조라고 해요. ‘창조’. 예수님을 위한 창조에요. 인간은 나를 위한 창조이기를 원하는 식으로 이미 인간은 타락해버렸습니다. 모든 세상에 보이는 모든 자연이 나를 위해서, 나 인간을 위해서 세상 돌아가는 게 나 좋아라고 내가 원하는 바를 제공하는 쪽으로 돌아갔어요. 주님께서는 그걸 다 제거해버립니다. 그걸 다 죽여버려요.


예수님을 위한 창조. 그럼 예수님을 위한 창조는 뭐냐? 예수님 없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새로 생긴 그 창조와 함께 임마누엘 그게 바로 예수님의 나라고 그게 천국입니다. 천국은 들어가는 곳이 아니에요. 천국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만들어내는 겁니다. 하늘에서는 못 만들어요. 왜? 예수님의 공로, 십자가에 죽는 공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을려면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인간들에게 살해당해야 돼요.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싫어한 바 되고 어떤 인간도 예수님 하는 일에 나는 기여했습니다 할 사람이 아무도 없게 만들어요. 모든 인간도. 어떤 인간도 주님이 하신 일에 기여한 게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발생한 믿음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내가 믿는데 내가 보탠 게 하나도 없다는 그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어요. 어찌 이렇게 믿음을 주셨습니까 이렇게 되지. 내가 믿을려고 산 기도 많이 다녔어 이런 거 있을 수 없어요.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에베소서 2장. 믿음은 사람에게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 믿음이 예수님의 믿음이 바탕이 되어서 만들어진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이에요. 거듭났다는 말은 전에 없던 인간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믿음이란 전에 없던 인간,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 만들어진 인간 그 백성들, 그 백성들 관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람은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바로 구원받는 거에요.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에요.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예수님께서 만들어냄으로 만들어내서 예수님의 믿음만 담겨 있는 사람. 그게 믿음이에요. 그런데 54절에 보면 제자가 이런 이야기하지요.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하늘을 따라서 내려오게 하겠다 하지요. 하늘이 어디 있느냐? 제자들은 하늘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한 거에요. 하늘에 있다 생각한 거에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미 하늘을 통해서 하늘이 열려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셨으면 예수님 자신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지상에 내려온 하늘이 돼요. 예수님 자신이. 이걸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다.” 엄청난 말이죠. “나를 본 자가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너희들은 자꾸 아버지를 보이라고 이야기하느냐. 내가 하는 일이 곧 아버지의 일이다.”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하늘이 열려서 불이 떨어지게 되면 “하늘의 불을 명하여서 불이 떨어져서 그들을 다 멸하게 하소서” 이것은 제자들이 신나는 어디 감히 우리 주님을 거부해. 한번 맛 좀 봐라 하는 식으로 뭔가 떨어졌으면 참 좋겠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러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다는 말은 실제로는 예수님이 하시는 이 모든 말씀이 이게 하늘의 불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뭘 오해하느냐. 불이 떨어지게 되면 새까맣게 연탄 되던지 재가 되어야 그들은 그걸 뭐로 생각하느냐 하면은 그걸 죽음이라고 생각한 거에요. 제자들이 아직도 예수님을 모릅니다. 사람이 숨 끊어지고 피부 조직이 새까맣게 타야 비로소 그들은 죽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에요. 그들은 진짜 죽었다는 게 뭔지를 몰라요. 인간이 죽었다는 게.


주일 낮 설교 때도 했지만 다시 하게 되면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 마지막 결과로서가 될 때만 죽음이에요.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럼 인간이 따먹은 선악과는 그거는 죽음의 끝이 아닙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할 때 그 죽음 안에 누가 뛰어 들어가느냐?


예수님이 그 안에 뛰어 들어갑니다. 뛰어 들어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것 이게 바로 죽음이에요. 그러나 지금 인간들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게 없어요. 그냥. 물론 힘들게 인생 살아가지만 버림받는다는 것은 최종적인 버림받음. 최종적인. 그 버림받음은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든다고 해서 그 버림받음이 다 성사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그 버림받음에 홀로 그 자리에 들어가 있어야 제대로 된 버림받음이 되는 겁니다. 이게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이기 때문에 글로 한번 적어볼게요. 십자가에서 그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말을 하셨잖아요. 이것은 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소환하는 거에요. 자기 죽음에.


이게 내가 십자가 죽는 것은 여기에 누구의 뜻이 들어오느냐 하면은 아버지의 뜻이 여기 관여되어 있음을 십자가에서 외치는 거에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뭐 시편 21편 그거 외워서 한 것도 아니고요 자기가 너무 아파서 주님에게 버림받은 것이 억울해가지고 한번 죽을 때 죽더라도 한번 나는 옳았다 그거 과시할려는 게 아니고 ‘아버지 어서 이 자리에 함께 오세요’


오셔가지고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틈새, 없는 틈을 만들어버려요. 없는 틈을. 이건 건너갈 수 없어요. 틈을 만들어 버려요. 그게 바로 뭐냐. 그게 죽음입니다. 생명과 완전히 갈라져서 틈이 되어버리는 거에요. 마치 천국은 지옥으로 지옥은 천국으로 왜 못 가느냐? 거기 틈이 생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틈은 누가 만드는가? 아버지와 아들이 아주 작심하고 만든 틈이에요.


그래서 지옥 간 사람 천국 못가고 천국 간 사람 지옥 못갑니다. 거듭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아요. 그 틈 때문에 그런 거에요. 그런데 지금 제자들은요 예수님 안에서 어떤 틈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 아버지는 점잖게 계시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일 잘 하시면 거기 같이 일했다고 협조된 자기들도 예수님과 한 편이라고 인정 받아가지고 예수님과 더불어 구원받을 생각하는 거에요.


틈이라는 것, 완전히 균열된 건널 수 없는, 예수님께 있다는 것은 제자들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예수님 자신도 틈에서 못 벗어나요. 자신도. 아버지와 자기 자신의 틈도 본인도 못 건너가요. 성령이 오셔야 가능해요. 성령이 오셔야 예수님께서 사흘 뒤에 부활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실을 모르는가? 알아요. 마태복음 16장에 내가 고난 받고난 뒤에 사흘 뒤에 살아난다는 것 다 아시고 여기 5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한이 차가매”, 예수님도 다 알아요.


알지만 지식이 되는 게 아니고 바로 이 틈이라는 그것에 대해서 그 틈 자체를 위해서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되고 희생해야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죽음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죽음은 어떤 걸로 이것은 지울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지울 수 없는가? 온 우주가 불바다 돼도 이 죽음은 지울 수가 없어요.


이 죽음을 세 자로 이야기하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이에요. 그 틈이 복음이에요. 그 틈이. 틈을 건너왔기 때문에 뒤돌아보면서 틈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이게 성도에요. 입을 살짝 가려야 돼. 내가 저걸 어떻게 건너왔지? 이거는 성령 아니면 다른 길로 설명이 안돼요. 내가 어떻게 건너왔지? 건너올 수가 없는데. 교회 다닌 것도 안 되고 신앙 생활한 것도 아무 소용없어요.


주님도 못 건너는 틈을 어떻게 건너왔지. 죽었다가 살린 성령이 예수님의 영이 이제는 그 영이 아버지의 영이 아니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의 영이 되어서.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늘의 우편에서 성령을 주시거든요. 주시는 이유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그것을 예수님이 그 주의 자리에 앉아서 아버지가 한 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하시는 거에요. 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 설교.


성령을 주심으로써 요한복음 1장도 나와요. 성령으로 오신 그 분이 성령을 받은 그 분이 우리에게 성령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요한복음 1장에서 예언되어 있지요. 요한복음 1장 요단강 세례받을 때.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는 거에요. 성령을 주시니까 이거는 어떻게 거듭나야 됩니까 라는 니고데모에 대한 말의 답변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게 된다. 다시 태어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면 성도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외칠 이야기는 딱 하나 밖에 없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이 죽음 이야기. 모든 인간은 죽었고 예수님도 죽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자기 택한 백성을 위한 대신의 죽음이었다. 이 이야기가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게 유일한 현실이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기 때문에. 온 우주의 핵심 비밀이 이거에요. 다른 것은 없어요.


그래서 인간들이 안 죽을려고 하는 모든, 살면서 죽지 않고 더 오래 살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죽음이라는 십자가 앞에서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살려고 하는 모든 것은 죄가 되지요. 예수님과 인간의 틈새가 곧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틈새였고 그것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틈새가 되는 겁니다.


미리 한번 보시면요 여기 59절에 보면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이렇게 나오지요. 우리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장례 치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까 예수님께서 죽음을 한 가지 종류로 이야기해요. “죽은 자들로 하여금 자기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해라”


다시 말해서 살아있다, 죽었다라는 그 너희들의 생각 자체가 그것이 갭을 뛰어넘을 수 없는 저주받은 상태, 죽음의 상태다 이 말입니다. 61절에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인사,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것은 장례가 아니고 인사, 이제는 당분간 못 보게 되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효도할랬는데 돌아와서 효도할게요. 인사를 할려는데, 62절에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 있잖아요 예수님의 이 말씀. 이 말씀으로 이 세상을 다시 한번 조립을 해보자. 다시 한번 정리를 시켜보자 이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개념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이 세상에 효도한다든지 장례 치른다든지 이 세상에서 뭐 어떻게 뭐 해볼까 하는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죽음 현상이 되는 거에요. 저주받을 일이 되는 거에요.


첫째 시간을 이제 끝내면서 이 이야기를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하고 제자들하고 있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이제 자리 옮겨서 이야기하자. 식당에서 이야기하다가 이제 식당에서 눈치 보이니까 요 옆에 자리 옮겨서 카페에서 이야기하자. 이 세상 자리, 이 죽음의 자리에서 이야기해야 될 그런 자들을 주님께서 만들어내시기 위해서 그 근거, 바탕이 되는 과정을 주께서 몸소 겪은 거에요. 다른 자리에 가서. 그 다른 자리가 뭐겠어요? 천국 아닙니까. 생명이 있는 자리잖아요. 이 자리 말고.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9장 60절 (자리 옮김) 220222b-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다 했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이유는 뭐냐 하면은 자기가 밥 먹고 사는 게 중차대해서 그래요. 중요한 문제라서 그래요. 그러나 죽는 것이 시시하다면 이 말은 사는 것도 시시해요. 지금 주님 뭘 해놓았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뭘 이룰 것인가는 전혀 시시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에요. 내가 뭘 했느냐는 것은.


지금 이 제자들이나 그 예수님 만나는 모든 사람들 자꾸 위를 보는데 그 위가 하늘이 열리면서 땅에 내려왔다고요. 위만 보면 목만 아파요. 하늘을 볼려고 하면 주님만 보면 돼요. 주님에서 나오는 그 하는 행위, 그게 바로 하늘의 행위에요. 얼마나 복된 거에요. 그 가운데서 면전에서 최측근에서 그걸 하늘을 보니까.


그런데 보면 볼수록 이해가 안 되고 제자들이 주님 말씀 하나하나에 이렇게 수용될 수 없는 말, 갈수록 수용될 수 없는 말을 계속 해내십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그 당시의 해석, 율법해석이죠. 율법해석의 범주에 그대로 연장되기 때문에. 연장되어있다. 연속되어있다. 그 당시 율법해석이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그 당시 율법해석이 뭐냐 하면은 정결이에요. 정결. 그리고 거룩, 거룩됨, 거룩함, 성화. 율법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한다. 여기에 그들은 하나의 생애의 목표를 걸은 거에요. 다른 이방 민족보다는 더 월등하게 깨끗하다.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이걸 시도한 거에요. 하나님의 의를 이루자 뭐 이런 거에요.


정결하고 깨끗하게 되면 정결하고 깨끗하게 된 그 결과물 대상이 누굽니까? 그것은 바로 본인이죠. 본인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내가 율법을 지키는 거에요. 남 좋아라고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나 좋아라고 지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선악체계 안에서 악을 줄이고 선을 키우게 되면 악에서 선으로 자연스럽게 끊어짐이 없이 갭이 없이 틈이 없이 그냥 연결되어서 전에는 아주 인생 막장이었는데 갈수록 율법대로 사니까 성화되어 천사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거 하나 노리고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고 이렇게 한 거에요. 남들보다 더욱더 착하고 훌륭하고 깨끗한 사람 될려고 그렇게 시도한 겁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이것은 본인을 더 성숙시키고 성장시키고 선과 의를 더 보태는 일로 보는 거에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걸 뭐로 보느냐. 정결, 거룩, 성화 다 지워버리고 빼기, 뺄셈입니다. 플러스가 아니고 마이너스로 가버려요. 있는 것도 다 날리라 이 말입니다. 있는 것도. 계속 그 말씀 해왔습니다. “너를 미워하라.” 생각해보세요. 자기 자신을 살리게 위해서 율법 지키는 사람에게 지금 뭘 살리려고 해요? 남 살리려고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제일 중요한 거에요.


그런데 나를 버려라? 나를 미워하라? 그렇다면 내가 율법 지키고 말씀 지키는 그런 보람이 없잖아요. 그런 보람이. 내가 왜 사는데. 여러분 왜 살죠? 내가 왜 사는데. 국가에 충성할려고 삽니까? 나 잘 될려고 살잖아요. 나 잘 될려고. 그 잘 되는 것을 너에게서 지워버리라 이 말입니다. 너 자체를. 이 주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제가 시연해보이지요. 여기 메모지 빈칸이 있습니다. 여기 빈칸에다가 십자가 천국이라고 딱 써 놨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내가 이것을 어떤 사람에게 메모지를 해가지고 무슨 소리인지 한번 읽어봐라 줬어요. 주니까 그 사람이 보니까 아무것도 안 써있는 거에요. 뒷면에 썼는데 자기는 앞면만 바라보니까 아무것도 안 써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나한테 준 게 아무것도 없는 거에요. ‘네가 죽어야 산다’를 썼는데 죽는 자만이 산다는 것을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 다 했어요. 너를 미워하라 다 이야기 다 했어요. 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을 기대하는 내 앞면에는 주님이 아무 것도 주신 적이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주님 믿다가는 신세 조질 거 같아서 주님 믿기보다는 내가 노력하는 쪽이 더 확실성이 있는 성공이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뒤에 있는 이것은 앞에 있는 이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 거에요. 모든 것을 지우는 거에요. 자, 어떻게 지우는지 그 지우는 방법을 제가 크게 그림 그려서 한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복음을 듣고 말하기를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의 입만 열면 나는 부족하다, 나는 죄인입니다. 들은 풍월은 있어가지고 나는 망해도 쌉니다.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나는 오히려 고마워합니다.


그야말로 정답이잖아요. 정답. 정답들을 쭉 이야기해요. 그런 사람이 있다 칩시다. 다 그렇게 사는 거 같은데. 그래서 제가 이 사람한테 찾아갑니다. 이 사람 찾아가가지고 내 자동차 좀 고장 났는데 자동차 하루만 좀 빌려 씁시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저한테.


복음 아는 사람인데 자동차 좀 빌려씁시다 라고 하니까 제가 진짜 다급해서 했는데 시험할려고 한 게 아니고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목사님이 되었으면 섬길 생각해야지 어디 교인의 것을 등쳐먹을려고 합니까? 말은 맞잖아요. 왜 교인의 것에 탐을 내십니까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교인의 것을 탐을 내십니까.


그러니까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런 말을 하는 그 의도가 뭐에요. 이거는 손해 보기 싫다는 겁니다. 내가 손해 보기 싫다. 그럼 손해가 뭐냐? 손해라는 것은 내 것의 손실이 가해지는 것을 손해라고 한다. 그럼 이게 손실이 될려면 뭐가 있어야 돼요? 내 것이 있어야 돼요. 내 것. 그럼 이 말은 뭐냐? 나는 뭐로 산다? 내 가진 것, 내 것으로 산다가 되는 거에요.


내 것으로 그 다음에 뭐라고요? 산다죠. 그럼 이건 뭡니까? 죽어야 된다며! 자기 본인이 난 죽어 마땅하다면서요. 안 맞잖아요 이게 지금. 이건 하나의 지식이었어요. 지식. 뭔가 살고자 하는 이 복음 알면 나 사는데 좀 더 보탬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지금 모방을 한 거에요. 모방. 예수님 말씀을 모방한 거에요.


실제로 딱 건들어보게 되면 목사님 왜 이러십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 제가 묻고 싶은 거에요. 무엇이 두렵지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게 왜 안 되지요? 이것은 나쁜 짓이기 때문에 안 됩니다. 나쁜 짓과 좋은 짓을 당신은 어떻게 평가했지요? 그건 선과 악. 그 선과 악이 죽어 마땅하잖아요. 선악과 따먹으면.


복음 뭐 성령 받았다 뭘 해도 딱 해보니까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이런 경우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서랍의 빨래거리 넣어놨다 이렇게 보거든요. 서랍에 딱 넣으니까 냄새도 안 나고 좋지요. 서랍에 뭐가 들은지 모르고. 그런데 이제 며느리가 빨래하기 싫어가지고 서랍에다가 냄새나는 양말 쫙 넣어놨는데 시어머니가 급습해가지고 정기점검을 나간 거에요. 정기점검.


물론 요새는 며느리한테 그렇게 못하지만 생활비를 거의 80%를 줄때는 그게 가능해요. 아들 돈 못 벌고 손자 시어머니가 다 키우고 생활비 다 대줄 때는 급습해요. 돈 문제가 엮여있을 때는 거기에다가 유산까지 받아야 될 입장에서는 정기점검이 가능합니다. 서랍 딱 열어보니까 온갖 다 나온 거에요. 걸레, 빨래거리에다가 양말, 속옷까지 다 나온 거에요.


주님의 이 말씀은 이걸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이걸 기준으로 해서 우리의 서랍을 마음의 서랍을 확 열어보는 거에요. 열어볼 때 얼마나 이게 안 맞는 대비가 되는 그런 것들이 우리 안에 가득 들어있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그 한 예를 들면요 예비역 중장 이름이 나성웅. 육군 예비역 육군 중장이 전에 장군으로 자기가 현역에 복무할 때 그 병사들이 고참들이 신입 병사들을 그렇게 괴롭히는 걸 듣는데 증거를 잡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신입 소위를 전부 다 나이가 작잖아요. 신입소위들 옛날에는 2년 했거든요. 지금은 3년 4년 다되지만. 그 신입 소위들을 이등병으로 위장을 시키는 겁니다. 이등병으로 위장을 시켜서 신입 이등병하고 같이 섞여서 그 부대에 몰래 잠입을 시켜놓은 거에요.


그러니까 고참들이 얼마나 괴롭힙니까. 1997년도에 제가 군에 입대 했는데요 그 70년대에서 너 왜 맞았어? 라는 질문은 성립되지 않아요. 그냥 때려요. 그냥 때리지 이유 있어서 때리는 법은 없어요. 그냥 때려요. 그냥. 고참들이 술 먹고 와서 그냥 때려요. 자는 애들 다 깨워가지고. 그게 왜 때리느냐? 그게 군기 잡는 유일한 방법이랍니다. 서열화시키는 방법. 그냥 때려요. 때리지요 그 다음에 돈 뜯어내지요 그 다음에 온갖 비리. 그걸 신입 소위들이 다 당한 겁니다. 죄도 없이 다 당한 거에요.


그걸 그 나성웅 육군 중장의 80명 다 모아놓고 소위보고 네가 당했던 것 다 이야기 다 해라 했어요. 그 사람이 하는 제도가 뭐냐 하면은 고참하고 같이 생활하는 것이 아니고 같은 동기들과 같이 생활하도록 그렇게 만든 겁니다. 같은 동기들. 이거 뭐 친구 사이죠. 이건 군대 생활 아닙니다. 제대하고 싶지 않아요. 위 아래가 없으니까 같은 친구들 아닙니까. 재미있지 그럼. 군대 왜 힘듭니까? 직장생활 왜 힘들어요? 상사 때문에 힘들지요. 상사 때문에.


그러니까 주님께서 한 방법은 뭐냐 하면은 본인이 쫄병 되는 거에요. 본인이 가장 죄 많은 사람 되는 거에요. 인간이 자기 살리기 위해서 자기 의로움을 위해서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피해를 주고 있는가를 어떤 법을, 법도 아닌데 법을 만들어서 법을 주고 있는지를 예수님께서 몸소 체험하는 거에요.


뭐 안식일을 지켜라? 내가 위반할게 내가. 내가 위반할게. 간음한 사람을 돌로 쳐라? 주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용서를 해버렸잖아요. 용서를 하니까 비로소 용서 받은 후에야 주께서 무슨 죄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거에요. 주께서 용서하는 죄. 그것은 내가 죄사함 받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가 바로 죄사함 자체를 모독하는 가장 극단 최극치의 죄라는 사실.


내가 나를 의롭게 하기 위한 모든 시도가 악에서 선이 되게 하는 모든 시도가 가장 악한 지독한 죄가 돼요. 어떤 죄보다. 개 거품 물고 이럴 때는 주께서 귀신 쫓아내지요. 그러나 그 귀신 보다 더 지독한 악마의 자식은 뭡니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죠. 그들은 자기 아비가 악마에요. 악마를 그대로 닮은 거에요.


결론이 뭐냐 하면은 왜 본인을 못 버리느냐 이 말이에요. 왜 본인을. 왜 신앙 생활하면서 나 안 좋아라고 신앙생활 왜 못하느냐 이 말입니다. 나 안 좋아라고. 나 망하라고 신앙생활 왜 못하느냐 이 말입니다. 왜 자꾸 나 거룩하고 나 정결하고 나 성화 될려고 신앙생활 하느냐 이 말이에요. 왜 그걸 카운트하고 계산하느냐 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시험받았다 악마로부터 시험받았다 하는데 시험들었다 시험받았다 하는데 모든 시험은요 주님에게 향한 시험이에요. 우리에게 준 시험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 같아야 시험이 오지 시험 안 해도 망하는데 마귀가 뭐 할라고 시험해요. 인간 같지도 않은걸. 모든 시험은 예수님에게 오는 거에요. 예수님에게. 예수님하고 관계 끊으라고. 그게 시험이에요. 뭐 7번 넘어지면 8번 일어나라 그런 시험이 아니고 그저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라 이 말이에요. 예수님과의 관계를.


제가 주일날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중요하기 때문에 한 번 더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7장 40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크게 쓸께요.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우리 인간 대 인간끼리 합리적인 조건이잖아요. 좋게 좋게 인간적이게 좋게 이야기하자. 십자가 올라가서 이야기하지 말고 내려와서 이야기하자는 거에요. 너나 나나 다 배운 사람이고 너나 나나 다 알 만한 사람인데 좋은 말로 충분히 되잖아.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좋게 이야기하자는 거에요.


예수님 자체가 하늘나라 아닙니까. 하늘나라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갭을 발견하기 위해서 지금 갭 있는 곳으로 가고 있어요. 하늘나라가. 그 하늘나라가 사흘 만에 부활해버려요. 그럼 하늘나라는 지상에 일단 내려온 하늘나라는 부활한 갭이 없으면 영원한 하늘나라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마귀가 십자가 지지 말래요 자꾸.


같은 인간들끼리 이성이 있고 다 생각 있는 사람들끼리 얼마든지 좋은 의견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바르게 살 수 있는가 한번 의논해 보자는 거에요.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성화, 정결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빼기죠. 빼기. 이 빼기 같은 말로 깨어짐이라고 할 수 있어요. 깨어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깨어지셨잖아요. 예수님 자기 목숨이 마이너스 되었죠. 빠졌죠. 빼앗겼잖아요. 깨어지고 빼앗겼죠.


그래서 제가 하나의 시를 이렇게 적어왔어요. 김소월이라는 분의 시인데요. 제목이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그러니까 이름이 산산이 부서진 거에요. 허공 중에 헤어질 이름이여. 다 부서졌으니까 다 흩어져버렸지요. 이걸 어느 인간이 이걸 원하느냐 이 말입니다. 어느 인간이.


내가 하나로 뭉쳐져야 사람 사는 보람이 있지요. 다 흩어져버리면 사람이 힘들어요. 자식 4명 5명 낳으면 뭐합니까. 하나는 캐나다 가있고 하나는 인도네시아 가있고 하나는 미국 가있고 하나는 브라질 가있고 하나는 멕시코 가있으면 한국에 있는 그 부모님은 얼마나 허전하겠어요. 그런데 어떤 부모님은 애를 셋을 낳았는데 자기는 대전에 살고 있는데 200m 앞에 자기 딸 살고 있고 300m 앞에 자기 아들 살고 있고 자기 집에 지금 막내 살고 있고 여러분 이럴 때 다복하잖아요. 그렇지요?


자식이 내 몸의 연장이잖아요. 내 몸의 연장이 같이 있으면 살맛이 나고 뚝뚝 떨어져 다 흩어져가지고 이거 뭐 오징어 다리 찢는 것도 아니고 다 흩어지면 아휴 내가 이런 낙 볼라고 이런 설움 당할라고 자식 4,5명 다 낳았나 이렇게 신세 탓할 거라 이 말이죠.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내 자체가 완전히 해체되고 말았어요.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아주 환장을 하네 환장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그래서 부모가 먼저 죽는 게 아니고 자식이 먼저 죽으면 자식 무덤가에서 이 초혼, 혼을 부르는 노래 안 하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죽은 이름이 광석이라면 광석이 무덤까지 가가지고 자기보다 먼저 죽은 광석이 이름 부르면서 얼마나 통곡하겠습니까. 광석아 광석아 김광석아. 얼마나 이걸 부르겠어요.


끝끝내 마주하지 못하였구나 부르다가 죽을 내 이름이여. 자기는 살았고 내가 부를 이름은 죽어 있고.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은 너는 살아있고 네가 살아 있으면 내가 나는 부서질 이름에 불과하다는 거에요. 네가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에요. 그러면 누가 부서질 이름이어야 돼요? 우리 자신이 자꾸 안 부서지니까 이름을 불르잖아요. 주여 주여 라고.


그러지 말고 주께서는 너 왜 불러, 너 왜 부르는데? 너 원하는 거 있지? 있잖아. 있으니까 부르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우리 앞에서 산산이 부서질 이름이고요. 주님은 우리 보기에 우리가 산산이 부서질 이름이에요.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를 자격도 가치도 없어요. 죽거든 그냥 죽어. 너의 죽음은 시시한 거야. 너 죽는 일 아무 일도 아니야. 주님이 살아있다는 게 중요하지 너는 안 중요해. 그걸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거에요.


누가복음 9장 60절에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했잖아요. 나중에 우리가 죽게 되면요 주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죽은 자 속에 이미 우리가 포함되어있어요. 주님께서 이 죽은 자들아 하고 포함되어 있다고요. 그런데 시에서는 시 이야기 계속 해봅시다. 심중에 남아 있는 한마디 말은 끝끝내 하지 못하고 내가 너 사랑했다 이 말이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이여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내가 사랑했던 사람 지금은 어디 갔나 부서져버렸구나.


죽을 때 인민군 폭탄 맞고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렸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나가있는 산 위에 나는 그대 이름을 부르노라. 내가 그 사람을 죽은 그 사람을 찾는 슬픔이 있다 보니까 해도 같이 슬프고 사슴의 무리도 같이 슬프고 산들도 떨어져나간 산처럼 보인다 이 말이죠. 자기 신세가 그러니까.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욱욱 하면서 설움이 찼어. 설움이 밀려나오는 우는 거에요.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켜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제자들이 예수님 떠난 것 보고 하늘 쳐다본 거랑 똑같은 거에요. 하늘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바로 옆에 있었는데 하늘만 쳐다보고. 그러다가 천사들한테 욕 얻어먹잖아요.


선체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그래 내가 너를 기다리마. 하나의 돌이 되어서.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돌이 되어서 계속 꾸역꾸역 그 이름을 불러보겠다.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사랑하는 그 사람이여. 이게 김소월입니다. 슬프지요? 안타깝고. 그런데 이 슬픔을 바깥으로 밀어내게 하는 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기뻐서 슬픔을 밀어내는 게 아니고 슬픔조차도 시시하다. 아무 붙잡을 가치조차 없는 슬픔조차도 시시한 거에요. 슬픔조차도. 슬픔이란 내 뜻이 안됐기 때문에 슬퍼지는 거에요. 이 남자가 이 여자와 살고 싶어도 안 되니까 슬퍼하잖아요. 얼마나 슬픈지 말을 다 못할 정도로 슬퍼요.


슬픔도 주께서 생명으로 슬픔도 밀어내면서 네가 이런 이런 시시한 것들 때문에 네가 평생을 눈물 흘리면서 살았잖아 라고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네가 평생 이렇게 사는 것도 죽음이 무서워서 벌벌 떨었잖아. 자, 이걸 바깥으로 이제 밀어내는 거에요. 보여주는 거에요. 마치 서랍장에 작은 서랍장에서 더러운 내가 숨겨놓은 더러운 빨래거리 하나하나 다 들춰내는 것처럼. 다 들춰내는 것처럼.


스위스에서 인간이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이게 갇혀있냐 하면은 얼마나 무서워하고 갇혀있고 어떻게 해결해볼려고 애를 쓰느냐 하면은 스위스에서 기계를 하나 만들었어요. 그 기계 이름이 뭐냐 하면은 조력자살캡슐이에요. 조력자살캡슐. 이 조력자살캡슐은 캡슐은 뭐로 만들었느냐 하면은 친환경적으로 만들어져가지고 이게 나중에 관에 묻히면 미생물에 의해서 분해가 잘 되도록 만들어놨어요.


조력자살캡슐은 이게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3초 내에 질소를 많이 주어서 산소를 1%로 21%산소를 1%로 줄여 가지고 10분 내에 아무 고통 없이 죽게 만드는 기계가 조력자살캡슐이에요. 그래서 그 캡슐 안에 관처럼 되어있는데 그 관에 들어가가지고 딱 들어가게 되면 질소가 뿜어져 나오고요 처음에는 멍하답니다. 멍하다가 그 다음에 잠이 삭 오면서 산소 결핍으로 3초 내에 멍해지고 10분 내로 죽어요.


알지요 10분 내로 김연자 노래. 10분 내에 그 안에 있으면 이걸 그대로 관으로 활용을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어요. 그걸 그대로 매장하거나 화장해도 괜찮아요. 매장하면 미생물에 의해서 신속하게 친환경으로 사라지고 화장하면 잘 연소되어 타게 되어있어요. 어떻게 구미가 좀 당깁니까? 특히 당기는 것이 아무 고통이 없다는 거에요.


이걸 어디서 파느냐? 3D 프린트로 만들어요. 공장에서. 나라에서 인가 해 줄 리가 있겠어요? 안 해주죠. 스위스에서는 프린트해서 만들어 파는 겁니다. 자, 이게 왜 팔리고 왜 이 방법이 이 기계가 왜 나왔을까요? 고통의 문제.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종교는 너무 돈이 많이 들고 시간이 많이 들어요. 새벽기도 해가지고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하고 짜증내고 울고불고 하게 되면 눈물 흘리면요 새벽기도 예배당 1층은 마루로 되어 있잖아요. 이거 썩습니다. 이거 돈 들어가요. 그리고 그냥 하면 또 응답 없을까 싶어서 십일조하고 해야 되지 않습니까.


자아로 인한 나를 내가 있어야만 나로서 보람이 있다는 그 살 이유가 있다는 나를 지키는데 돈이 너무 비용이 많이 들어요. 비용이. 문제는 죽을 때 죽더라도 아프게 죽으면 안 되잖아요. 암 걸려가지고. 그런데 이것은 아주 세상에 이런 아주 복음인가? 이 안에 들어가가지고 10분 내로 노래 틀어놓고 10분 내로 아무 고통 없이 그대로 남은 가족들에게 뭐 보람상조도 필요 없어. 그대로 하게 되면 깨끗하게 그것도 환경 친화적이다. 환경 오염시키지 않고 깨끗하게 죽을 수 있으니.


그러니까 이런 기계 나왔다는 말은 은연중에 인간의 마음 배후에 마지막 소원, 마지막 소원을 이 기계가 대변해주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살다 살다 힘들면 아까 계산하는 인간이라고 했지요. 그 계산하는 인간 누굴 위해 계산합니까? 오로지 나, 나를 위해 계산하기 때문에 이런 것 다 고려해보는 거에요. 늘 계산하기 때문에. 내가 고통스러우면 누구만 손해다? 나만 손해이기 때문에.


이런 게 있다는 말은 이 이야기를 왜 소개하느냐 하면은 세상이요 이 기계는 상당히 노골적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사람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상품 백날해도 너는 그럼 아프게 죽을래? 이러면 아무 소리도 못하잖아요. 인간의 갖고 있던 그 내밀함, 은밀한 그 본성은 인간에게는 아무런 해답이 없습니다. 종교가 됐든 불교, 기독교 다 통합해도 인간에게는 해답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왜 여기 태어났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죽고 난 뒤에 교회 백날 다녀도 성경 달달 외워도 그건 지식이고 실제 체험을 안 해봤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체험을 했어요. 체험을 했는데 그 갭 때문에요 갭을 넘어간 사람은 유일하게 딱 한사람 밖에 없어요. 누굽니까? 예수님 밖에 없어요. 갭을 넘어가야 우리에게 성령이 와요.


그러니까 십자가 없으면 성령이 안와요. 십자가 지지 아니하면 다 이루지 아니하면 안와요. 만약에 성령이 왔으면 그건 다 이루심이에요. 우리가 조기에 죽든 늙어 죽든 어떻게 죽든 그게 다 이루심이에요. 이 기계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이미 다 이루심이에요.


이미 생명이 있음에 우리는 그때부터 고통도 쓱 내밀고 나의 죽음도 쓱 내밀면서 그 다음에 뭘 내미느냐?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라는 것을 이걸 나타나는 것을 감사하게 돼요. 감사. 제가 오늘 강의에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감사하는 거에요. 이건 대구강의에서 했는데요. 어떤 아름다운 결과, 괜찮은 결과보고 감사하지 말고 감사가 되어버리면 그 모든 결과도 아름답게 되고 다 좋은 게 돼요.


왜냐하면 감사가 되어버리면 그 자체로 이미 이 자체가 해결이에요. 뭐 보고 감사하겠다 그런 거 하지 말고 모든 일에 감사해버리면 감사 안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다 감사해요. 모든 일에. 심지어 내 슬픔과 내 죽음과 내 수치스러운 모습과 내가 인생 망가진 거 다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조차도 성령께서 바깥으로 전시하게 하신 주님의 감사가 돼요.


그런 점에서 아까 누가복음 59절 보겠습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도 이거는 감사할 일이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59절에서 바로 62절 가봅시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이거는 누구 이야기냐 하면은 예수님 이야기거든요.


예수님 이야기가 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그 분 내부에 있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62절에 있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씀에 근거해서 감사거리가 되는 거에요. 아! 말씀이 들어오니까 뒤 돌아보지 말라는 이 말씀이 내가 실현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실현케 하기 위해서 나를 재료로 사용했구나 라는 사실을 그 다음부터는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양식이 되는 거에요. 다 이루심이 양식이 되는 거에요. 다 이루심이. 주님의 하신 일이 양식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그렇게 해석하지 않고 이 본문을 해석해버리면 사람들은 악을 쓰고 쟁기 잡고 뒤돌아보지 않는다고 하고 악을 쓰고 장례 치르지 않고 예수님 따라갈려고 애를 쓸 거에요.


그래 봐야 예수님 따라가 봐야 감사가 아니고 슬퍼요. 아이고 지금 아버지 장례해야 되는데 나 지금 예수님 따라 전도하고 이게 무슨 짓이야. 아이고 아버지 죄송합니다. 이거는 억지죠 억지. 그런 짓을 왜 합니까? 자기 구원받을려고. 그게 바로 가짜 믿음 아닙니까 그게. 그게 자기를 위한 거짓 믿음 아닙니까.


거기서 무슨 감사가 나와요. 자기를 미워하지도 않고 자기를 버리지도 않고 주님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인데 자기는 나는 깨지면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있으니 이게 무슨 같이 있을 사람이에요 천국에서. 이제 57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57절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아 집착이 집념이 대단하겠지요. 아주 대단한 사람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주님은 이것을 요새말로 뱃지를 떼어버려라. 전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뱃지를 떼어버려라. 국회의원 뱃지 있지요. 어떤 교단은 목사도 뱃지 있데요. 어떤 교단은. 여러분 통합 쪽 교회 가면 예배 설교할 때 가운입고 옛날에 가운입고 했어요.


인위적으로 구별 짓는 것은요 이거는 권력의 횡포입니다. 권력이에요. 중들이 머리 깎는 거요. 반짝반짝 머리 깎는 것은 여기서 돈이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머리 안 깎는 중한테는 시주를 안 합니다. 머리를 깎아야 중 답다고 돈이 나와요. 신부들 신부복 있지요. 수녀복 있지요. 이게 전부 다 권력입니다. 인위적인 구별이에요. 뱃지다는 것. 제복입는 거. 그게 지금 힘이 되고 힘은 곧 돈으로 환원되서 들어오는 겁니다.


주님이 가신 길 따라가겠습니다. 이 사람은 새로운 권력을 얻고자 하는 거에요. 자기의 가치와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그런데 세상의 종교들은 인위적으로 구분을 지었거든요. 자, 구분을 지은 걸 한번 생각해보세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할 때 주님과 한 통 속이 되어서 하나가 되어서 움직이겠습니다 이렇게 돼요. 주님과 하나가 되어서.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주님의 가시는 길에 주님 외에는 아무도 갈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은 주님은 그 누구하고도 상대를 안 합니다. 주의 일에 다른 사람의 협조가 없어요. 그 이유가 뭔지 알겠어요? 그 이유가 뭐냐? 주님이 가신 길에는 악마가 있는 곳에 가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가 있는 곳에.


사람들은 이 세상에 악마와 함께 살면서도 악마가 어디 거주하는지를 몰라요. 어디에 있는지를 몰라요 악마가. 그럴 수밖에 없지요. 악마는 영적으로 인간을 지배하기 때문에 그걸 로마서에서 왕이라고 해요. 왕. 이 세상의 신으로 있다. 이걸 이제 설명하면 힘들지만 여러분한테는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해보겠습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이게 한계 이야기입니다. ‘한계’.


한계라는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한계가 나오면 한계 너머도 나오거든요. 그런데 한계는 한계 너머라는 말을 쓸 수가 없어요. 한계는. 그 자체가 한계가 되어버리면 한계 너머 같으면 여기 해놓고 동그라미 하나 더 쳐야 돼요. 앞에 것은 한계고 이 뒤에는 한계 너머고. 자평선 수평선 같은 것이죠.


그러나 이것도 말이 안돼요. 왜냐 하면은 선을 그어버리는 순간에 이 선 너머가 자동적으로 발생되기 때문에 그래요. 자동적으로 발생되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나는 한계 있다 하잖아요 이게 거짓말이에요. 한계 있다 해놓고는 뭘 추구하는 줄 알아요? 한계 너머의 영적 세계를 추구하게 되어있어요. 이게 거짓말이에요. 악마가 시켜준 이게 거짓말이에요.


악마는 인간에게 유한하면서도 무한을 추구하도록 만들어놨습니다. 유한에서 무한으로. 그래서 인간은 무한으로 내닫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의 유한의 희망을 부여합니다. 여기서 멈출 수 없어. 여기서 좌절할 수 없어. 내가 그 최고에까지 이르러야 돼. 모든 분야가 그래요. 모든 분야가.


낚시 30cm 민어? 아니에요. 다음에는 35cm. 골프, 에베레스트 등산, 어떤 사람은 3일 동안 등정? 나는 이틀 반 만에 갈 거야. 모든 분야에 꽃꽂이 분야, 예술 분야, 문학 분야 어떤 모든 분야에 거기 종사해보세요. 유한에서 뭘 추구합니까? 무한을 추구하는 거에요. 100m 달리기 10초가 인간의 벽이라고 했거든요. 옛날에. 지금 9초78인가 그렇잖아요.


남자 높이뛰기 최고 얼마입니까? 2m. 옛날엔 2m가 한계였어요. 우리나라 대표선수가 지금 2m36인가 뛰어가지고 1등 했어요. 남자 높이뛰기. 2m36 한번 뛰어볼래요? 우와~~ 하지요. 바둑. 바둑이 인공지능이 등장해가지고 인간보다 바둑 더 잘 두거든요. 그래서 이제 바둑은 끝났다 했는데 아니에요. 본격적이 됐어요.


왜?? 누가 인공지능만큼 따라 붙이는가. 그 분야에서 누가 인공지능하고 90% 80% 어떻게 하는가. 그게 1등이에요. 신진서. 그 박정아. 오늘 농심 배 바둑 세계대회 했는데 이게 고장이 났는지 멈춰버렸어요. 바둑도 세상에 인공지능의 90%를 따라잡아요. 90%. 인공지능의 가장 가능한 지점. 100점 만점에 90점. 사람들은요 같은 바둑기사가 놀래버려요. 야 이 천재라는 말도 모자랄 정도에요.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느냐.


모든 분야가 그래요. 모든 분야가. 헬라어 히브리어 그 분야. 아람어. 아람어도 한 두 종류가 아니에요. 아라비아어. 평생 그거 하다가 죽은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그거 왜 해요 그거? 그거 왜 하는데? 그게 마귀의 시험이에요. 유한에서 어디로 간다? 무한으로.


목사도 그래요. 나 교인 30명만 있으면. 30명 돼보세요. 주여 50명만 있으면. 50명 돼보세요. 그저 세 자리 수 100명만 있으면. 100명 돼보세요. 100명으로 만족하는 큰 교회 있습니까? 1000명. 1000명요? 만 명. 만 명이요? 조용기보다는 많아야지. 60만명. 이거는 자식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에요. 자녀 교육도. 아이고 걔가 얼마나 말 잘 듣는지. 말 잘 듣는 순간 한계입니다.


한계는 뭘 유발한다 했어요? 한계는 뭘 유발한다? 한계 너머.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건 뭐에요? 마귀의 시험이죠. 예수님을 왜 따르겠습니까? 지금 유한한 내가 주님을 따름으로서 무한한 존재가 될 가능성을 내가 못 놓치겠다. 놓칠 수가 없다는 거에요.


주님 가신 길이 아무도 갈 수 없는 길이에요. 왜냐 하면은 인간에게 한계 쥐어주고 인간에게 한계 너머도 유혹시켰던 그 악마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아무도 갈 수 없는 거에요. 뭘 알고나 따라다녀야지요.


제가 아침마다 이렇게 운동 삼아 이렇게 근처에 산에 낮은 산에 걷거든요. 길이 있고 샛길 가면 언덕이 또 있는데 언덕 너머 개 한 6마리가 있어요. 아침에 고개 푹 숙이고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갑니다. 여기 바깥 풍경 보니까 지겨워서 언제 가나 싶어서 그냥 고개 숙이고 생각하면서 가면 언제 내가 여기 반환점 오는지 아느냐. 개가 짖어요. 거기 들어가면. 개가 짖으면 정상이 가까워요. 내 도착지점이 가까운 거에요.


마귀가 짖어대게 되면 그게 바로 우리가 찾지 못한 한계를 주님께서 알려주신 겁니다. 바로 십자가 복음에 가까이 가게 되면 개들이 짖는 소리가 난리도 아닙니다. 개들이 짖는 소리. 네가 미쳤구나 부터 해가지고요 너 잘나가다 인간이 왜 이렇게 됐느냐 부터 시작해서.


악마가 뭐를 우리에게 줬다 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유한한 우리가 뭘 될 수 있다? 무슨 희망을 갖는다? 무한한 존재가 된다. 선악과 따먹으면 신이 된다고 했잖아요. 무한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거에요. 그러면 악마가 짖는 개소리는 어떤 소리입니까? 네가 신이 될 수 있는데 왜 그걸 마다하고 왜 그걸 포기하느냐 이 말입니다. 네가 신이 될 수 있는데.


한번 봅시다 거기. 58절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뭡니까? “머리 둘 곳이 없다.” 이게 뭐냐 하면은 가는 풍경이에요. 주님 가시다 보니까 여우도 있고 주님 가시다 보니까 새도 있지요. 주님은 여우보다도 못한 삶, 새 보다도 못한 그곳에 가는 거에요. 그곳은 아무도 못가요. 인자는 머리 둘 곳 없다 해가지고 텐트치고 야영하러 가십니까? 아닙니다.


머리 둘 곳 없다는 말은 바로 아까 처음 이야기했어요. 아무도 갈 수 없는 그 죽음. 세상에서 볼 때 산산이 부서진 이름. 그 죽음 자리에 가시는 겁니다. 따라서 그것이 그 죽음이 사실은 악마가 만든 이 세상을 한꺼번에 표현한다면 이 세상은 바로 죽음의 세계에요. 그 죽음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주께서는 죽음의 이 세상 하늘나라의 접점 지점에 가는 거에요. 그 갭이 있는 틈새가 있는 그 지점까지 가는 거에요.


그래서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마귀는 예수님 보고 뭐라고 해요? 십자가에서 뭐라고 합니까? 내려와 내려와. 그러나 십자가에 가버릴 때 개들이 짖는 거에요 이제는. 그게 바로 베드로에게 ‘네가 원치 않는’ 그 길을 가는 거에요.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전부가 지옥에 불과하면 살았다는 인간이나 죽었다는 인간이나 전부 다 죽음이란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뒤돌아보면서 이미 예수님의 보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령 안에 십자가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뒤돌아보면서 이 세상의 전부를 한꺼번에 다 알 수 있습니다. 이미 다 이루었기 때문에 다 알 수가 있어요. 그 느긋함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가면 천국 가는 줄 알고 최선을 다하여 믿습니다 하면서 따라 붙었던 저희들 우리 자신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그저 주님 시키는 대로 순종하면 되는 줄 아는 철없는 저희들, 이제는 우리가 죽을 자리에서 성령을 받아 산 사람 되었사오니 우리 자신이 바로 죽을 인간이라는 것을 생명 안에서 바깥으로 밀어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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