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영생은 저주다

아빠와 함께 2022. 2. 22. 06:47

강남-누가복음 9장 40절 (영생은 저주다) 220208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9장 28절부터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산으로 올라가지요. 변화산에 올라갑니다. 여기 평지가 있고 주님께서 산에 올라가게 되면 평지에 그 의미의 틀, 평지의 의미의 틀과 산에서의 의미의 틀을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걸 차이 나게 만드십니다.


이것은 옛날에 모세가 산 밑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산 위까지 올라가게 만들었잖아요. 산 위. ‘시내산’. 시내산 위에 올라가심으로서 시내산 위에서의 통용되는 그 뜻, 개념, 의미와 지상의 모든 의미가 틀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내산과 땅이 달라요. 다르다고요. 달라지게 하기 위해서 이런 겁니다.


달라지게 하면 어떻게 달라지느냐 하면은 산 위에서는 이게 사실 또는 사실, 같은 말로 현실, 실제 또는 실제 여러 가지 말로 할 수 있는데 그냥 세상 되어지는 사실 그대로를 여기서 보여줍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여기서 진짜 하나님이 생각했던 그 사실, 모세와 사실 합류했고 내려오면서 여기 이스라엘 집단은 무엇이 됐느냐 하면은 이것이 거짓이 드러나지요. 거짓임이요. 안 올라갔으면 이 거짓임이 안 드러나지요.


잠시 자리를 이탈해서 산 위에 올라감으로서 거짓임이 드러나는 겁니다. 여기 오늘 누가복음 9장에 변화산, 올라가시니까 거기에 모세와 엘리야도 함께 나타나가지고 예수님과 영광스럽게 해같이 빛났다 라는 이야기의 핵심이 뭐냐 하면은 이 사실이 이 지상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뭘로 바꾸느냐 하면은 이것을 거짓으로 바꿔버리는 겁니다. ‘거짓’.


예수님이 바꾸는 게 아니고 제자들이 이 사실을 거짓된 것으로 거짓의 효능일 뿐, olny 오직 거짓의 효능일 뿐으로 이게 변화산에 취급되어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같이 합류를 했는데 합류를 하면서 그들은 분명히 놀래버렸어요. 변화산의 기적을 보면서. 뭐 이런 세계가 다 있느냐. 얼마나 좋았으면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산에서 내려갈 생각도 없고 있었단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대표자 이 세 사람을 모세를 만나고 예수님이 해같이 빛나는 그 예수님의 본질, 실체를 보게 하고 그 엘리야도 만나고 해놓고 그걸 다시 평지에 내려옴으로써 너희들이 보았던 이 사실이 이 지상에서는 뭐냐 하면은 거짓으로 취급되는 겁니다. 거짓으로 취급돼요.


기적을 봤다. 뭐 그래서? 돈이 되던가? 이런 거요. 그거 본들 이들에게는 하나의 뭐가 되느냐? 하나의 추억의 나부랭이로 끝나는 거에요. 추억으로. 실제로 이 땅에 내려와서 뭘 하느냐 하면은 내려오거든요. 내려왔을 때 그 평지에서 어떤 무리 중에 사람이 내 아들이 귀신 들려가지고 뭐 형편이 엉망 되었어요. 거품 물고 심히 상하게 되고 그렇게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제자들 보고 좀 고쳐보라고 하는데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산에서 기적 봐도 평지에서 아무 짝도 쓸모 짝도 없는 거에요. 이게. 그러니까 이 평지에 있는 이 의미의 틀의 입장에서 산에서 모세, 엘리야 봤던 이것은 하나의 거짓된 것이 돼요. 거짓된 것. 그리고 사실은 뭐냐? 이 땅의 사실은 내가 이 아이의 귀신 쫓은 것을 쫓아낼 수 없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는 거에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결국은 무능이죠. 무능력.


제자들의 무능력함. 이 무능력함에 변화산에서 본 그 기적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그걸 폭로시키는 겁니다. 제자들도 불만이 있는 거에요. 뭔가 모세 엘리야 만나고 예수님이 해같이 빛나는 그것을 봤으면 그걸 봤으면 적어도 평지에 내려가서 자기들 역량으로 귀신 정도는 병 고치는 귀신 딱딱 떠나게 해줘야 여기 자기가 기적을 본 값을 할 수 있는 거에요.


야 내가 이 기적을 봄으로서 이제 나는 능력자로서 돌변했구나 라는 것을 자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제로 주님께서 산에 올라가놓고 여기 모세 보세요.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은 엉망이었죠. 자기의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이 믿던 여호와는 여호와가 아니었고 뭐냐 하면은 바로 우상이었다. 그런데 그 우상은 뭐냐 하면은 거기 출애굽기 32장에 나옵니다.


32장 8절인가 나오는데 우상의 특징은 무엇을 못 빼느냐 뺄 수가 없느냐 하면은 ‘나를 위해서’ 라는 것을 빼지 않는 하나님이 우상이에요. 하나님 믿는 내가 하나님 믿기 전보다 어떤 이득이 있을 것이냐. 나한테. ‘나를 위해서’죠. For Me. 나한테 무슨 도움이 있을 것이란 그 내용을 빼지 않는 채 동원되는 모든 예수고 성령이고 하나님이고 삼위일체고 전부 다 우상입니다.


이게 출애굽기 32장 내가 알기론 8절인데 요새 뭐 맞는 것보다 틀리는 게 많으니까 확인해봐야 되겠지요. 32장 8절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뭡니까? 이제는 성도된 사람은 더 이상 누구를 위해 살지 아니하고?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자기를 위해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 살게 함이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제가 바꿔볼 테니까 이 바꿔본 것은 잘못된 거에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되면 그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살려 준다 이런 내용으로 바꾸면 안돼요.


내가 예수님을 믿어주면 주님께서는 착하다고 그 보상으로 주님 쪽에서 어떤 살려준다는 대가가 주어진다는 그런 통밥, 요령 그걸 가지고 이 본문을 본문으로 들이대면 안된다 이 말입니다. 먼저 설정된 것이 나를 위해 살지 않는 것이 설정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나를 위해서 뭐 해줄 겁니까? 이런 말은 이 볼따구 꼬집어야 돼요. 이게 어디서 꼼수를. 무슨 이런 꼼수를 부리느냐. 나를 위해서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살면 주님이 나를 위해서 뭘 해주실 겁니까? 뭐 ‘그 여자만은 허락해주옵소서’ 그런 식이에요? 안되지요. 그 말씀은 이 말씀과 다른 말씀이에요.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포함된 여호와를 믿었는데 그 여호와를 보니까 모세가 산에서 그 현장에서 떠나서 산 위에 올라가고 난 뒤에서는 나중에 부재한 상태에서 돌아보니까 그 여호와 안에 뭐냐? 뭐가 포함되어 있다? 껍데기는 하나님인데 하나님은 하나님인데 안에는 뭐냐?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다’ 뭐 이런 논리가 성립된 겁니다. 똑같은 거에요.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곱 요한에게 셋이서 산에 올라가가지고 하나님의 영광됨을 보게 했잖아요. 보게 했을 때 평지에 베드로 빼고 그 3명 빼고 평지에 9명이 합류를 해요. 합류를 하게 되면 이거는 모세 해놓고 나머지는 우상이었다 되지만 직접 하나님의 영광됨을 봤던 당사자가 내려오니까 이들이 사실적인 예수님이 아니라 거짓된 예수님 상을 갖고 있다는 것이 여기 들통나버린 거에요.


변화산에서 기적 봤지요. 산에 내려왔지요. 어떤 귀신들린 사람이 먼저 예수님 보고 고쳐달라는 게 아니고 먼저 누구보고 고쳐달라고 했습니까? 제자들보고 고쳐달라고 했지요. 그 제자들 속에 여기 베드로 야고보 요한 다 들어있지요? 고쳤습니까? 못 고쳤습니까? 못 고쳤지요.


변화산 보지 않은 제자들이 고쳐볼려고 낑낑 거릴 때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비켜 비켜 비켜. 봐라 변화산 기적 못 보니까 이런 사단 나잖아. 우리는 봤어. 주님의 영광됨 봤단 말이야. 비켜 우리가 고칠게!” 고쳤습니까? 못 고쳤지요.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무능력은 아름다운 기적을 보았던 추억도 무능력을 그들은 개조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요 인간이 자기를 부인하라 할 때 나는 부족하다 나는 마음을 낮춰야 돼 이런 자기 부정은요 이것은 도 닦는 겁니다. 도 닦는 거에요.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거에요. 괜히 헛 폼 잡는 거에요. 신앙인인 척하고 있는 겁니다.


주께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능력하게 만든 이유는 “네 안에 심판을 품어라”. 네 안에 심판을 품어라. 그냥 자기 부정이 아니고요. 그냥 자기 부인이 아니라 이 제자들을 뭐로 만드느냐 하면은 심판의 운반체로 만들어요. 심판의 운반체가 어디 나오느냐? 레위기 10장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레위기 10장을 잠시 한번 볼게요. 자기부정, 자기 도 닦는 건 아니에요. 이건 절에 가서 하면 돼요. 절에 가면 그거 많이 합니다.


10장 1절에 보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2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라고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들은 향로에 가져가야 될 그 불의 공격대상이 되었지요.


그러면 그 불을 그들이 운반했다는 말은 제사장이 다른 불을 가져갔잖아요. 그럼 원래 죽지 않아야 될 제대로 된 제사장이라면 그 불은 어디서 와야 돼요? 제단불로 되죠. 그 제단불이 뭐하는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제물을 심판해서 불태워버리는 곳이죠. 하나님은 불로 나타나잖아요. 불로. 하나님이 불로 나타난 것 맞지요? 그 불이 달래기 위한 불이에요? 아니면 사우나 하라고 주신 불이에요? 무슨 불입니까?


심판의 의도가 담긴 불을 그것이 제단으로써 분명히 확고히 드러났잖아요. 그 제단 불을 향로까지 운반하는 자가 누구에요? 제사장이잖아요. 오늘날 성도가 누굽니까? 오늘날 성도는 제사장들이에요. 무엇을 운반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분노하고 있고 화내고 있다는 그 내용을 전달하는 이 땅에서 운반하는 운반체로서 성도의 모습이다 이 말이죠.


누가복음 9장을 다시 돌아와서 봅시다. 9장 44절에 변화산 올라갔지요. 그 다음에 내려왔는데 귀신들린 자의 병을 고쳤습니까? 못 고쳤습니까? 못 고쳤지요. 그 다음에 뒤에 나오는 말씀.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으신다는 그 이야기를 지금 예수님이 하시는 거죠. 그러면 예수님이 죽어야 될 이야기를 이 제자들이 다시는 안 물었다는 이 이야기는 알아들었다는 말입니까? 못 알아들었다는 말입니까? 못 알아들었다는 이야기에요 이게.


지금 예수님께서 조금 전에 어디 갔다 왔습니까? 변화산에서 하나님처럼 영광스럽게 되었지요. 이 영광스럽게 되었다 했을 때 그때 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뭡니까? 이게 환상이에요 아니면 사실입니까? 그들이 환상을 본 게 아니고 있는 그대로 사실을 봤지요. 그야말로 현실을 본거죠. 이게 현실이야. 예수님이 영광스러워. 이게 현실이라고 되어있지요.


그 현실과 예수님이 하는 말씀은 현실입니까? 사실입니까? 내가 죽는다는 것은? 그것도 현실이고 그것도 사실이죠. 왜 두 개의 사실 가운데서 왜 이게 모순되느냐 이 말입니다. 왜 이게 모순되느냐 이 말이죠. 영광스러운 주님도 사실이고 산에 내려와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곧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게 된다” 이것도 사실이고 왜 두 개의 사실이 너무나 모순되게 일어나느냐 이 말입니다. 모순되게.


인간의 입장에서는요 그 둘이 모순되기 때문에 둘 다를 못 받아들여요. 그럼 받아들인다면 어느 한 쪽을 받아들입니다. 어느 한 쪽을. 그래서 변화산에 있을 때는 베드로가 하는 말이 “여기가 좋사오니 내가 초막 셋을 짓고” 할 때는 어느 쪽을 받아들였습니까? ‘신난다 앗싸’ 이걸 받아들인 거에요. ‘야 이 해같이 빛나는 이 모습 이게 천국이 아니고 뭐냐.’


실제로 누가복음 9장 27절에 보면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했지요. 그 볼 자가 있다 해놓고는 보여주신 거에요. 마태복음도 마찬가지고 다 같이 나오는 거에요. 이 대목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가 있다” 해놓고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보여주는 게 아니고 몇몇에게는 천국을 보여준다.


그러면 이들에게는 이 변화산에 있을 때는 거짓이 아니고 진실인 거에요. 진실. 그 진실이 땅에서는 무슨 소용 있습니까. 왜냐 하면은 이 땅에서 평지에서의 사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거잖아요. 죽으면 베드로가 어떻게 돼요? ‘야 우리가 망한단다 이제. 우리가 인자에게 죄인으로 팔렸다. 신나지 않아?!’


여기 산 위에서 신난 것만큼이나 자기가 사람들에게 잡혀서 자기 스승 잡혀 죽는 것도 어떻게 돼요? 신나게 돼요. ‘신나고 고맙습니다’ 해야 되고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제자들이 멘붕이 온 거에요.


자, 문제가 어디서 문제가 일어났습니까? 어떤 문제 일어났습니까? 묻는 내가 나쁘지요. 여러분이 답변을 기대한 건 아니고요 그냥 제가 아는 정답을 크게 쓰겠습니다. 제자는 아무 일도 못한다. 더 깊이 있게 제자는 아무 일도 한 게 없다. 이거 명심해야 됩니다. 우리 인간 아무 것도 할 줄 모릅니다. 아무 것도 할 줄 몰라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의 행위는 주변의 상황을 대변하기 때문에 그래요. 주변의 상황. 인간의 환경이라는 것은. 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화산 올라갈 때 그들이 한 것 뭐가 있습니까? 초막 셋을 지어드렸습니까? 아니지요. 아무 것도 안했지요.


어떻게 저절로 예수님이 해 같이 빛나고 저절로 초청하지도 않았는데 모세, 엘리야가 나타날 줄 상상도 못했지요. 여기 제자들 뭐했습니까? 아무 것도 못했지요. 아무 것도 못 했는데 그냥 아무 것도 못한 것만 아니라 여기 쓸게요. ‘아무 것도 못했다. 안했다.’ 안했다의 진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있었다’ 이렇게 되는 거에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인간이 잡혀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산 밑에서 귀신들린 아이 있지요. 귀신들린 애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나 똑같아요. 같은 입장이에요. 상황이 바뀌지 아니하면 제자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거에요. 끙끙대면서 귀신보고 “나가”라고 하면요 귀신이 같잖아서 웃지요. 너는 내 안에 있는데 왜 네가 나보고 나가라고 해? 너는 애초부터 내 안에 있었는데.


애들이 화나가지고 엄마하고 싸우면서 뭐라고 하는데 “엄마 집 나가”라고 하잖아요. 집 등기가 누구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왜 엄마보고 나가라고 해?! 아이 이름으로 안 되어있지요. 누가 주인이에요? 누가 주인인데 누가 누구보고 나가라고 해요. 귀신이 안 나가는 건 당연하지요. 이 세계 자체가 귀신한테 묶여있는데 뭘 귀신을 쫓아내요.


놀라운 사실은요 제자들이 아무 것도 못하지요. 더 놀라운 사실은 귀신도 아무 것도 못해요. 귀신도. 처음 알았지요? 귀신이 아무 것도 못해요. 왜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귀신으로 하여금 인간을 묶어놓도록 허락을 했기 때문에 귀신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귀신도 아무 것도 못한 것처럼 = 인간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제자의 특징은 뭐냐? 제자 됨의 그 중요점은 아무 것도 못한 자가 뭘 운반하는 거에요? 심판의 불을 운반하는 운반체로 쓰신다는 게 중요해요. 인자가 내가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는다는 이 이야기를 예수님이 동네방네 이야기했습니까? 아니면 누구보고 이야기했습니까? 제자들보고 이야기했지요.


그러면 제자들과 예수님이 지금 함께 있잖아요. 함께 있으니까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둘러쌓인 거죠. 그러면 이 무능한 제자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제자들이 귀신에게 꼼짝도 못하고 귀신도 쫓아내지 못하고 귀신에게 눌려 사는 이 제자들이 여기에 새로운 상황이 들어온 거에요.


그 새로운 상황이 뭐냐 하면은 바로 이 세상은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그 사실을 제자들은 새로운 운반체로서의 기능이 발생된 겁니다. 그래도 제자들이 아무 것도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에요. 아무 것도 못해요. 그 이야기 듣고 제자들이 예, 우리가 주님 심판받을 때 우리가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밀어드리겠습니다. 뭐 이런 질문도 못했어요.


이게 무슨 말인가? 너무나 황당한 거에요. 조금 전까지 영광스럽던 주님이 지금 와서 사람에게 잡힌다 하니까 난감한 거에요. 왜 제자들이 난감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제자들의 무능성의 실체를 드러내는 거에요. 무능성의 실체를. 그게 뭐냐? 귀신들인 아이로 하여금 제자들이 먼저 귀신 쫓아낼라고 시도했는데 그게 어떻게 되었습니까? 쫓아냈습니까? 안됐지요.


쫓아내지 않았다는 말은 제자들이 있으나 마나한 존재라는 점이 부각된 거에요. 제자들이 있으나 마나한 거에요. 그 점에 대해서 제자들이 섭섭해 합니까? 또 섭섭해 해야 합니까? 질문. 섭섭해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마태복음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9장 17절 한번 읽어보세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뭐 돼요? 부대가 어떻게 됩니까? 뭐라고 되어있어요? 터져야 되죠. 부대가 터져야 되죠.


사람이 바로 이걸 무서워하는 거에요. 안 터져야 된다는 게 귀신에 눌려 사는 인간의 모든 인간들의 특징이에요. 내가 안 다쳐야 돼요. 예수 믿고 내가 안 다쳐야 돼요. 예수 믿고 우리집안이 안 망해야 되고 내 자식은 훌륭해야 되고 내 부모는 돈 잘 벌어야 되고 나는 성공해야 돼요. 내가 터지면 안돼요.


내가 터지면 안 된다는 식으로 아무리 변화산에서 주의 영광을 본들 산에서 내려오면 그 변화산 본 것이 하나의 추억이 되고요. 실제 자기가 하는 주의 일에 전혀 보탬이 안됐잖아요. 보탬이 안됐으면 그럼 변화산은 뭐냐? 지금 보탬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에 이것은 거짓이 되는 거에요. ‘거짓’. 있으나 마나한 게 된다고요.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에 사도 요한도 봤고 몇몇 제자들도 봤지요. 도망치느라 바빴지만 실제로 다른 여인들도 봤잖아요. 그래서 여인들이 구원 받았습니까? 그 십자가 봤는데. 그걸로 구원 안 되지요. 본인이라는 그 부대가 터지지 않는 거에요.


이게 내가 터지게 되면 어떤 효과가 있느냐? 내가 터지게 되면 내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은 주님의 심판받아 마땅함이 이 안에 같이 확 폭발하게 되어있어요. 내가 터져야 돼요. 그걸 안 터질려고 이렇게 잠궈버리면 나는 괜찮은 사람 되고 건전한 사람 되고 앞으로 점점 더 예수 믿고 성화돼서 훌륭한 사람 되면 그걸로 구원,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이게 옛 부대에요.


옛 세대는 또는 옛 시대는 옛날 옛 언어의 의미로 틀을 잡아요. 옛 언어의 의미. 갑자기 언어가 나와서 어렵겠지만. 새 부대, 새 세대에서는 옛날의 언어가 먹히질 않아요. 옛 개념이 먹히질 않는다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의 뜻은 이거에요. 옛날 개념에다가 새로운 것을 집어넣으면 같이 합체될 수 있다? 없다? 합체가 안 되고 이게 새로운 게 오면 뭐가 터진다는 말입니까?


옛날 세대 틀, 프레임, 그 세계관 자체가 터져버리고 폭발해야 돼요. 그것도 심판받아서 터져버려야 된다고요. 주님의 가시는 길은 바로 본인 자체가 터트리는 길을 가고 있는 거에요. 지금 제자들이 좀 더 더 명확하게 말해서 더 명확하게 말해서 왜 제자들은 귀신을 못 쫓아냈는가. 그거는 제자들은 남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나를 떠나서 남이 될 수 없어요.


남이라는 글자에~ 하는 노래 있지요. 점 하나를 빼면. 그런 노래 있어요. 인간은 때려죽여도 남이 될 수 없어요. 예수님이 왜 우리를 구원한 줄 알아요? 주님은 우리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주님이 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거에요. 뭐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아요?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예수 믿는 것은 믿는 척 하는 거에요. 그냥.


나 안 터질라고. 이 부대가 안 터질라고. 나름대로의 방어책, 방비책을 취하는 거에요. 그래서 열심히 교회 다니고 신학공부도 하며 헌금도 내고 나름 선교비도 내고 충성도 한다고 봉사도 하고 교회 가서 청소도 하고 다 하는 거에요. 주께서 보고 계시겠지.


이것 몇 번 했더니만 지난주에 갑자기 땅 값 올랐다 뭐 주식도 올랐다 나름대로 체험이라고 해가지고 하는데 체험은 백날해도 그것은 하나의 지금의 주어진 사실 하나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를 않아요. 내가 터지는데 나 자체가 폭발하는데 체험은 아무 도움이 안 됩니다. 오히려 체험은 훈장같은 거에요. 내가 내 자랑질할 수 있는 근거가 돼요. 내 자랑질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요.


여러분 귀신은 아무 것도 할 줄 모릅니다. 그냥 귀신은 인간을 잡아먹는 꼼짝 못하게 탈출 못하게 묶어놓는 그 상태로 그냥 가는 거에요. 새삼스럽게 귀신이 인간을 괴롭히는 게 아니고 새삼스러운 문제 아니고 줄곧 아담부터 계속 귀신이 왕 노릇하고 온 겁니다. 멀쩡하게 돌아다니면 귀신 안 들릴 줄 알지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바리새인들 귀신들렸습니까? 안 들렸습니까? 바리새인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 유대인 지도자들 향하여 “너희 아비는 악마다” 다시 말해서 그 악마가 임신해가지고 새끼 까면 바로 너희들이 나온다는 거에요. 그리고 그 중에 하나가 누구냐 하면은 가룟 유다지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잘 들어보세요. 가룟 유다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너 원래 하던 거 해” 너 할 것 하라는 거에요. 원래 해야 될 것. 귀신은 새삼스럽게 일을 꾸미지를 않아요. 귀신은요, 귀신다워요. 그것도 줄곧, always, 항상 귀신다웠어요. 뭐 귀신을 전도하고 그러지 마세요. 귀신은 바뀔 줄을 몰라요. 그리고 귀신에 속한 인간들도 바뀔까요? 안 바뀔까요? 바뀌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설교하고 아무리 전도하고 아무리 공부 가르쳐도 인간은 안 바뀌는 이유가 옛 세대에 속했기 때문에, ‘옛’. 옛 개념과 옛 언어의 프레임 속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1970년 옛날 포크송 노래 이런 게 있어요. 노래 있는데 여러분들은 잘 모를 거에요. 터질 거에요. 터질 거에요 라는 노래 있어요. ‘터질 거에요’


인간은 터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왜 원치 않는냐 하면은 내가 날라가요. 내가 날라가는 거에요. 그래서 마귀는, 귀신은 인간을 터질 필요도 없게 만들었어요. 터질 필요도 없으면서 안에 나 밖에 모르는 나의 정당성만 확고하는 나만 챙기는 것으로 줄곧 그대로 그 아이스링크 미끄러지잖아요. 미끄러져서 메달 다 날라갔지만 쭉 미끄러지는 거에요. 계속 지금까지 마찰력 없이 계속 미끄러져온 거에요. 인간은.


인간은 새삼스러운 게 하나도 없습니다. 너는 너 위주로 살고 나는 내 위주로 살고 전혀 바뀐 적도 없고 바뀔 리도 없고요 바뀔 수도 없고요. 주의 뜻은 뭐냐? “좀! 쫌 그만해.” 설쳐도 주의 일을 해도 아무 것도 한 게 없어요. 옛 세대 안에서는 아무 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인간이 그 귀신들린 그 인간, 똑같은 처지에 있는 인간 보고 귀신 나가라고요? 오히려 귀신이 어리둥절 할 거에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게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는 나에게 새삼스럽게 뭐 하라고 이야기 왜 하느냐. 귀신을 내보내는 것은 이것은 새 세대에 계신 분만 옛 세대를 공격할 수 있는 자격이 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옛 세대는 그 자체가 심판 불에 의해서 심판 당해야 될 대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어떻게 도울 수 있느냐. 예수님은 바로 자진해서 어디 속에 들어왔습니까? 귀신의 세계, 악마의 속에 자진해서 뛰어들어왔기 때문에 그것도 우리를 대신해서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안에서 뭐가 있느냐 하면은 심판 받아야 될 그 기능을 여기서 성취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일종의 자살 테러한 거죠. 그 안에 들어가서 주님의 심판을 자기가 품고 있는 옛 세대의 대한 심판을 자폭해가지고 같이 터트려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는 척했습니까? 죽었습니까? 죽었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때 하나님께서 “조금만 참아. 조금만 참아. 내가 너 죄 없는 거 아니까 그냥 아픈 척 해” 이랬습니까? 아니면 저주 받았습니까?


“저주 받는 척 해” 이랬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저주 받았어요?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에 제가 전에 이 이야기해가지고 제가 강도사 때 이 이야기하니까 오랬동안 성화론 주장하는 교인한테 막 욕 얻어먹었어요. 예수님이 왜 저주 받아? 저주 받을 일 없는데 왜 저주 받아? 성경에 나오는데 뭘 나한테 닦달해요.


3장 13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예수님이 저주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저주 받았지요. 저주 받았기 때문에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받은 그 저주, 그 저주를 성령 받기 전에 제자들이나 성령이 없는 사람에게 뭘 이야기하느냐. 영생을 이야기하는데 영생은 곧 뭐냐?


영생은 곧 저주에요. 그들에게. 영생은 저주입니다. 저주인지 아닌지 제가 테스트해볼게요. “목사님 영생 받으실렵니까?” 목사님이 “예” 하겠지요. 그렇죠? 그러면 오늘부로 그러면 목숨 가져갈께요. 사람이 옛 세대에서의 복과 저주는 어떤 뜻을 갖고 있느냐 하면은 내게 이익이 되는 게 복이에요. 내가 폭발하고 찢어지는 게 이게 복이 아니고 나는 건재하고 건재한 나에게 내가 원하는 또 내게 복이 되는 게 추가적으로 담겨야 이걸 복으로 이해해요.


나는 그대로 있고 부대가 찢어지지 않아요. 그대로 있어야 돼요. 그런데 영생이 만약에 내것을 그렇게 찢어도 영생이 좋아요? 저주로 느껴지죠. 여러분들이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그 유월절 나오잖아요. 유월절 할 때 여러분은 유월절 모른다고 치고요 하나님이 모세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히브리인들 너희에게는 내가 영생을 준다 이 이야기 퍼트려라 하면 전부 다 반상회해가지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히브리인들에게만 영생을 준대. 생명을 준대. 하고 쫙 하면 그들이 기분이 좋을까요? 기분이 나쁠까요? 기분 좋지요. 무슨 내용이 빠졌습니까? 마땅히 우리 가정에 맏이 있잖아요 맏이. 둘째, 셋째 말고 맏이. 얼마 전에 군대갔다온 맏이 말이죠. 맏이. 펄펄한 20대 맏이.


그 맏이를 주님께서 죽는 조건 하에 영생 준다라고 하게 되면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가정이 그 영생을 기쁘겠습니까 아니면 저주로 여기겠습니까?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이 죽는데 그게 무슨 복이에요. 저주처럼 느껴지지요.


그리스 신화에 그런 게 있어요. 데미안인가. 거기에 보면 여자가 남편하고 싸우면서 남편한테 복수하는 방법이 남편 이름이 야손인데, 야손하고 이 여자가 있었는데 그 남편이 자기를 너무 싫어하니까 남편이 자기보고 두 아들을 자기가 키우겠다 가져가겠다 하니까 아내는 두 아들 원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여자가 남편에게 복수하는 방법이 남편이 가장 아끼는 두 아들을 죽여버립니다. 죽여버려요.


그게 여성의 남성다움이라고 그래 가지고 그런 식으로 문학적으로 해석이 되고 하는데 나의 가장 큰 복은 행복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자가 처절하게 망해버리는 게 나의 가장 큰 기쁨이에요. 그러니까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 이거에요.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거에요.


주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고 자비로운 하나님 같으면 불교처럼 그냥 복이나 주시고 내 기도하는 대로 응답만 하면 되는 건데 나의 옛 세대 프레임 있잖아요. ‘나’라는 프레임 이것을 주께서는 심판을 통해서 심판의 불로 이것을 완전히 찢어버리는 거에요. 찢어버리고 하시는 말씀이 이게 영생이다. 됐냐? 그래도 영생이 좋아? 이러고 있는 거에요.


지금 오늘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산 위에 이야기하다가 그 다음에 어디 갑니까? 산 밑에 이야기 있지요. 그리고 아까 44절에 뭐라고 되어있어요? “인자가 사람들에게 죄인에게 팔려서 죽는다” 이러한 이야기를 연속적으로 설정하고 배치한 이유가 뭐겠어요?


주님이 귀신 세계에 들어와서 이거는 인간들에게 모순되는 이 세계가 결국 인간들에게는 모순되게 보이지만 사실은 모순된 게 아니고 주님은 악마와 상대하시는 거에요. 인간은 인간하고 상대 안하면 그걸 거짓으로 여깁니다. 그냥 망상인줄 알아요. 사람하고 상대해야 되는 줄 알아요.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 있으니까 항상 제자들은 사람들 상대하듯이 누구를 상대했습니까? 예수님을 상대해 온 거에요.


내가 남한테 잘해주면 그 사람도 대접받은 대로 나한테 대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베드로 이야기에요.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나와요. 19장 31절, 32절 보면 나와요. “제가 모든 걸 버렸나이다”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는 말이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 자는 30배나 받는다” 그런 이야기 있어요.


19장 27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데” 했지요. 진짜 모두 버렸습니까? 아까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베드로는 베드로나 12제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뭐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마귀에 속한 인간들은요 자기 딴에는 뭘 해도 그건 아무 것도 안한 게 돼요. 인간은 아무 것도 안했어요.


왜?? 귀신들린 애를 귀신 안에 있는 애를 귀신 바깥으로 끄집어냈어요? 못 끄집어냈어요? 못 끄집어냈지요. 못 끄집어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귀신 들린 자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귀신 바깥에 있는 어떤 자가 귀신 안으로 들어와야 되는데 본인들도 귀신 안에 들어 있으면서 귀신 안에 있는 자기도 귀신 밖에 못 나가면서 무슨 남을 끄집어내요.


그리고 귀신들렸다는 특징이 뭡니까? 나는 뭘 위하여? 나는 [네모]를 위하여. [네모] 안에 뭐가 들어갑니까? 나는 [나]를 위해서 아닙니까. 이게 우상이잖아요. 귀신 들린 자에게서는 우상, 하나님이 우상밖에 안 되는 거에요. 우상밖에. 내가 나를 위해서 해놓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가 주를 위해 모든 걸 버렸대. 뭘 버렸는데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람이 도 닦고 자기 모든 것을 버린 것은 도 닦는 거에요. 주님께서 원하는 제자의 특징은 나중에 성령 받으면 그렇게 되지만 그 특징은 뭐냐 하면은 내 안에 뭐가 들어있다? 심판의 불. 그 불은 누구를 공격한 심판의 불? 옛 세대. 그럼 베드로가 성령 받기 전에 옛 세대입니까? 새 세대입니까? ‘옛 세대’.


베드로와 12제자를 공격하는 심판의 불을 제자들은 특별히 하나님에 의해서 운반체로 가가지고 결국 어디에 합류하게 하십니까? 예수님이 가셨던 그 십자가에 합류하도록 그렇게 조치된 그것만 그들에게 특권이에요. 그것만 그들에게 주어진 특전입니다.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운반체니까 본인이 운반하는 것도 아니에요. 운반하게 하신 거에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계속 예수님 옆에서 헛소리만 계속 내뱉는 거에요. 헛소리만. 앞뒤가 뭔지도 몰라요. 이걸 어렵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새 세대에서 새 부대입니다. ‘새 부대’. 새 부대에서 인간은 상징화의 무력하다. ‘무력하다’. 아무 힘을 쓰지를 못한다. 상징이라고 하는 것은 기호. 어떤 절대적 개념. 쉽게 하겠습니다. 모든 제자들에게는 이 상황이요 귀신들린 상황이 전부 다 우연입니다. ‘우연’.


그러니까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은 아무리 큰소리치고 자신만만해도 어떤 새로운 상황이 오게 되면 그 새로운 상황에 맞출려고 애를 써요. 왜냐 하면은 그 모든 어떤 상황도 어디에 맞추느냐 하면은 나를 위해 맞춰야 하기 때문에 내가 터져버리면 안되잖아요. 내가 아프면 안 되잖아요. 내가 망하면 안 되잖아요. 내가 가난하면 안 되고 내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면 안 되잖아요.


인간을 둘러싼 이 상황은 계속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을 못하니까 그때그때 달라요. 그때그때 우리는 적응하고 처신하는데 도사가 돼있는 겁니다. 그때그때 이게 다르다 이 말이죠. 그럼 이게 고정적으로 기호화 되지 못하고 상징화 되지 못해요. 그때그때마다 말 바꾸기는 예사고요 회까닥 맨날 자기 정당화하고 뭐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어쩌다 이런 식으로 변명과 변명이 주저리 주저리 튀어나오는 게 인간들이에요.


그러면 여기에다가 뭘 꽂아야 됩니까? 우연밖에 없는데 필연을 꽂아야 돼요. 필연을 꽂아야. 그게 산 위에 있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꽂아버리면 이 옛 세대에 꽂아버리면 이게 뭐로 나오느냐. 이 사실이 십자가로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너희가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서 3장에서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십자가가 뭐냐 하면은 십자가 빼놓고는 모든 것은 그냥 우연한 지나가는 그런 하나의 둘쑥날쑥하는 그냥 환상에 불과합니다. 환상에. 여러분들이 연못이나 바다에 햇빛 비취면 어떻습니까? 반짝반짝하지요. 그러나 밤 되면 어떻습니까? 밤 되면 조명 시설 없으면 그냥 시커멓지요. 반짝반짝한다는 그것은 그들이 자체적으로 발광한다는 뜻이 아니에요. 뭔가 비취고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체적으로 귀신에 있어요. 그냥 반짝반짝하는 것은 착각하게 만들어요. 자기가 뭔가 상징이나 기호가 있는 것처럼 “나는 누구누구다”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아닙니다. 인간은 상황 바뀌면 언제든지 말 바꿔요. 다들 그렇게 살아요. 굳은 사실은 확고한 사실은 필연은 뭐냐? 바로 주께서 인자가 사람들에게 미움 받고 죽는 십자가뿐입니다.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9장 40절 (영생은 저주다) 220208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아까 두 아들 죽여서 복수를 했던 그 여자 이름이 메데아라고 하는 여자입니다. 신화에 나오는 메데아. 아까 첫째 시간에 상징이라는 말이 상당히 어렵지요. 인간은 상징할 수 없도록 무력하다는 말은 내게 딱 내가 없다는 말이에요. 내게 딱 맞는 나.


인간은 남한테 내세울 때 또는 스스로 생각할 때 이게 나야 라고 하는 딱 맞는 나이고 싶어 하는 이유가 인간은 주체적으로 살고 싶기 때문에 그래요. 주체, 주도적으로 살고 싶어 해요. 그런데 어느 곳에도 내가 나는 주도적인데 남들이 나를 주도적으로 인정을 안 해줘요. 왜냐? 남도 자기 일이 바빠가지고. 자기 자신이 주도적이니까.


그러니까 이 세상은 뭡니까? 전부 다 경쟁적이죠. 경쟁적이니까 주체와 주체가 경쟁 중에서 내 주체가 주체 될려면 저쪽 주체를 이겨야 혼자 있을 때 주체에서 나하고 경쟁해서 나한테 진 사람이 되게 되면 내 주체가 더 확고해지고 더 확실히 증명되는 거에요.


혼자 있을 때 나는 잘났다 이것도 잘난 거 맞지만 나보다 못생긴 사람하고 같이 붙어서 남들이 당신 저 사람보다 잘났네 할 때 갑자기 기쁨이 되는 이유가 내가 평소에 했던 내 주체적 주도적 그 생각이 그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받는 기회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계속해서 또 다른 사람을 또 찾게 돼요.


자, 두 사람은 꺾었는데 세 번째 한번 보자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는 잘났다 나는 훌륭하다 나는 착하다 나는 멋있다 나는 신자 맞다. 계속 주위에서 끌어 모으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걸 끌어 모으는데 아까 그 나한테 자기도 자체적으로 잘났다고 생각했다가 나한테 감히 겁 없이 대들다가 다른 사람이 공개적으로 에이~ 너는 저 사람보다 못났네 하고 우사당하고 간 사람 있지요?? 그렇지요?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은 뭘 느끼느냐 하면은 자기의 무능력을 느끼는 거에요. 무능력. 자기는 잘나고 싶은 사람이고 싶은데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뒷받침되지 않으니까 그 사람한테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거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래서 방금 이야기한 걸 이렇게 일반화시키면 이렇게 됩니다. 주체의 끝 지점은 순수한 나를 만난다. 순수한, 순결한. 주체의 끝 지점은 순결한 나를 만나는 거에요. 또 다른 말은 내가 한 모든 행동과 태도와 행위는 순수한 나와 조우하는 것. 나와 만남의 시간을 갖는 거에요.


그러기 위해서 이 주체는 순수한 나를 위해서 여기서 노력을 하게 되고 노력의 의도는 뭐냐 하면은 내 주체의 주체다움을 보장해줄 환경 전환에 몰입하게 되어있어요. 환경 전환. 나 잘났다. 나 잘났다고 떠벌려봐야 사람들이 안 알아주잖아요.


그러면 내가 어느 정도 잘난지를 진짜 잘난 나의 순수함을 보기 위해서는 적어도 100평 이상 대지 2천평 이상의 거대한 집을 지어놓고 거기에 사람들을 초대했을 때 자기는 무슨 사람이 되느냐 하면은 성공한 위대한 개츠비가 되겠지요. 위대한 사람이 되겠지요. 소위 귀족이 된 거에요. 그때 자기가 초정한 사람들은 뭐냐? 들러리죠. 처음부터 내 친구들은 들러리였던 거에요.


왜? 나의 나 됨을 박수 칠 사람들을 은근히 내가 잠복해서 갖고 있었던 거에요. 그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누굴 만났습니까? 예수님만 만났습니까? 또 누굴 만났습니까? 모세와 엘리야 만났지요. 이것은 상상 이상의 순수성을 지니고 있는 거에요. 신자라면 저 정도 돼야 돼. 신자라면. 성도라면 믿음의 사람이라면 저 정도 돼야지.


순수한 자가 되어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저 사람에게 뭘 지어준다고 해요? 내가 초막 셋을 지어준다고 해서 이 모세 엘리야하고 자기하고 이걸 동질화시킨 겁니다. 바로 저거야! 내가 원했던 것 바로 저거야 라고 했는데 주님은 그들을 어디다 내보냈습니까? 산 밑에 내 보내서 개차반 됐지요. 순수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귀신 들린 애도 못 고치면서 그게 순수하냐?


모든 인간들이 예수님 핑계대고 하나님 핑계대고 백날 해봤자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 말의 그 끝자락은 뭐냐 하면은 역시 나는 이렇게 나는 순결하고 순수하고 위대해. 그걸 본인이 확인하고 싶은 거에요. 그걸 위해서 자기는 평생을 두고 거기 합당한 환경조성에 나선 겁니다. 환경조성. 여러분 학교 다닐 때 환경정리 많이 했지요.


군에 가 본 사람 있습니까? 장로님 군대에 갔다 오셨어요? 군대에 사단장 뜨면 어떻게 됩니까? 사단장 뜨면 제일 먼저 뭐해요? 청소하지요. 청소하는 거에요. 청소. 왜? 사단장 보시기에 이 부대는 정말 착실하게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구나 칭찬을 받는 거에요. 칭찬 받는 거에요. 교회에서도 목사가 교인 떠받드는 이유가 뭡니까? 헌금 많이 하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당신 순수함에 내가 보태줄게 이런 뜻이거든요.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 이 말이죠. 당신 순수한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거 내가 도와줄게. 칭찬해줄게. 위로해줄게 그거잖아요.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런 거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 죽어도 천당 갈 겁니다 이런 것. 헛소리. 본인도 헛소리하면서 헛소리인지 뭔지 모르지요.


주님께서는 그 환경 말고 다른 환경으로 돌변시켜버려요. 그럴 때 인간의 주체는 뭐냐? 주체는 환경의 증상입니다. 인간이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은 그만큼 썩었다는 거에요. 이 세상 자체가. 불신자보고 썩었다. 절에 가는 사람보고 당신 지옥 간다 그거는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뜻은 뭐냐? 그 이야기를 예수 안 믿는 저런 사람보고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에요. 너 보고 너 자신 보고 이야기하라는 겁니다.


제자들이 뭐랬는줄 알아요? 저 사람들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할 때 예수님이 “너나 잘하세요. 너나.”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여기 나와요. 9장에 나옵니다. 9장 54절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할 때 주님께서 누굴 꾸짖었습니까? 제자들을 꾸짖었지요.


왜 제자들이 그런 소리했느냐 하면은 49절 봅시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는데 제자들하고 합세를 안 한 거에요. 본진에 합세를 안 해. 본진에. 복음은 전하는데 십자가 마을에 들어오지를 않아. 우리교회 등록을 안 해.


그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죽여버릴까요?’ 이렇게 나온 거에요. 그때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하시니라” 이 요한이 누구냐 하면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잖아요. 그 변화산을 봤던 사람이잖아요.


그때 산 위에 있었을 때 마치 자기가 모세인 냥 엘리야처럼 지금 한껏 들떴어요. 그걸 들뜬 상태라 해요. 이 반대말이 뭡니까? 바닥 상태. 가라앉힐 줄을 몰라요. 내가 평소에 내 주체로서 이렇게 모든 걸 버리고 예수님 따랐으니까 예수님 보시기에 내가 얼마나 순수한 신앙인가 이걸 보장해주고 증명해주는 환경이 필요했는데 마침 주님께서 예상치도 않게 변화산에 올려주니까 붕 떴지. 이것은요.


떴으니까 자기가 본진이에요. 본진. 자기가 본부가 되어 버린 거에요. 그러니까 자기 따르지 않는 사람 죽여버릴까 이렇게 된 거에요. 불로써 태워버릴까 이렇게. 주체는 뭘 유지하는가? 무력함. 주체는 무력함을 유지하는 거에요.


자, 이 무력함은 어디 나오느냐? 누가복음 9장 47절에 나옵니다. 누가 한번 읽어볼까요. 무력함, 무능함. 인간의 무능한 것.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왜 변론합니까? 46절 왜 변론합니까? 우리 중에 누가 크냐? 제가 아까 경쟁한다 했지요. 인간은 눈만 뜨면 경쟁해요. 인간은 눈만 뜨면. 모든 게 경쟁이에요.


쇼트트랙도 경쟁이고 심지어 트롯트 노래 부르는 것도 경쟁이에요. 나이 많아가지고 ‘아 옛날이여’ 불러도 필요 없어요. 6살 먹은 아이가 불러줘야 저 아이가 천재가 이렇게 되는 거에요. 쟤가 똑똑하다. 모든 게 경쟁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48절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지금 이 뜻은 지금 제자들은 아무도 이 뜻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왜 무슨 뜻인지 몰랐냐 하면은 이걸 설명해드릴게요. 이 설명이 오늘 강의 중에 핵심 부위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 설명하기 전에 먼저 성경구절 한번 보고 해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 10절. 너무 중요해서 쓰겠어요. 너무 중요합니다.


로마서 8장 10절에 보면 “몸은 죄로 인하여” 그 다음에 뭡니까? “죽은 것이다” 이게 성령 받고 난 뒤에 사도 바울이 이야기한 거에요. 지금 마태, 마가, 누가복음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가복음에서 ‘어린아이 영접하라’ 그런 이야기겠지 이 정도까지 하지 않았어요.


인간의 몸은 그다음에 뭡니까? 끝에 뭡니까? 죽었지요. 무력하지요. 무능하지요. 무력, 무능은 뭡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있다? 없다?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설치면 설칠수록 내가 죽어 마땅함만 계속 티를 낼뿐이에요. 설치면 설칠수록. 인간의 몸은 죽었잖아요.


아니 이 이야기한다고 그렇게 욕을 얻어먹어요. 목사님 다른 건 이해되겠는데요 우리가 죽었다는 건 이해 안돼요. 맨날 이런 소리 들려요. 목사님 다른 건 이해되는데 우리가 왜 죽었습니까?? 안 죽었는데 왜 죽었다고 합니까? 여기 나오잖아요. 로마서 8장10절에 나오잖아요. 나만 욕 얻어먹고 이야기는 사도 바울이 해놓고 욕은 내가 다 먹네.


사람이 죽었잖아요. 사람이 죽었잖아요. 사람이 죽었다. 죽은 인간이 뭘 해요. 죽었는데. 죽은 티만 내지 죽었는데 뭘 해요. 언제 주일 낮 설교인가 설교 한번 했지요. 아 주일 낮 설교 맞아요.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 이야기할 때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못 간다 이렇게 하니까 그 이야기를 알아들은 니고데모가 어떻게 해석했습니까?


‘내가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서 도로 아기로 엄마 몸에 다시 갔다가 오면 됩니까’ 라고 이야기했지요. 그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평소에 내가 나에게 어떤 일을 가하고 노력을 하고 뭘 하게 되면 내가 달라진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에요. 몸은 이미 죽은 거에요. 죽은 것은 달라지지 않아요. 백날 노력해봐야 죽은 것이에요.


여러분들이 오징어 구울 때나 붕어빵 구울 때 오징어 구울 때 오징어 한쪽만 하면 너무 타잖아요. 그러니까 젓가락 가지고 오징어를 이렇게 굽는 사람이 뒤집어줘야 되지요. 오징어가 지가 뜨겁다고 지가 알아서 이렇게 아이고 뜨거워라 이렇게 합니까? 그건 살아있을 때고. 죽은 오징어는요 계속 타고 있어요. 바보 같애. 바보 등신 같애. 그걸 뒤집어줘야 돼요.


그건 오징어를 위함이 아니고 주를 위함이거든요. 주께서 우리를 이렇게 오징어 굽듯이 구워주는 것은 주를 위함이에요. 우리 구원 받으라고 한 게 아니고. 이래도 죽었고 저래도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내가 다시 어린 아이 몸속으로 방향을 반대쪽으로 틀수가 없어요. 인간은. 인간은 비가역적 존재입니다.


한번 증가하게 되면 다시 원형이 될 수가 없어요. 한번 혼란하면 더 큰 혼란으로 갈 뿐이에요. 우리는 죽음을 향하여 지금 달려가고 있습니다. 달려가고 있지 그걸 빼기 위해서 사는 쪽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지만 오늘 문구 영생은 뭐다? ‘저주’다. 나를 죽게 하기 때문에. 영생은 나를 죽게 하기 때문에. “죽어라 인간아” 이게 영생이에요.


나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마태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죠. 다 성경에 있는 이야기에요. 성경에 있는 이야기.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없는 이야기를 해서 문제지 성경에 원래 있어요 이게. 사람이 날 위해 죽으면 살리라. 그 외에는 다른 사는 길 있다? 없다? 없어요.


주님께 충성한다고 사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제발 좀 그냥 죽어줘 그냥. 제발 좀 나대지 날고 그냥 죽어줘. 그것도 못하냐 이 인간아. 왜 그러느냐 하면은 주체는 환경의 증상이기 때문에. 환경이 안 바뀌면 인간은 환경에 따라서 그 옛날 환경, 옛 세대 환경은 자기 자랑하는 거에요. 자기 자랑하는 겁니다.


중국이 금메달 뺏어가니까 화나지요. 여러분은 요새 뭐 해요? 이러면 뭐 화낼 것도 없지요. 요새 베이징에서 뭐 합니까? 무슨 일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은 화가 났지요. 심판 오심 때문에 맨날 뉴스 나오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이 세대가 옛 세대, 심판받을 찢어져야 될 옛 프레임 속에서 전부 다 빠져 나올 생각을 안 하죠 아예.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있어요. 그걸 그들은 사실 또는 현실, 그걸 실제 세계로 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는 뭐가 됩니까? 그들에게 뭐가 돼요? 거짓, 저주가 되는 거에요. 그들에게. 나한테 저주 이야기 그만 해라. 이런 식이에요. 살릴려고 하는데 안 받아들여요.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찾는 것은 뭐냐 하면은 나를 미워하는 것을 찾아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지독하게 주님 밀어내고 배척하고 주님 싫다고 이야기하고 반발하고 반항하는 그걸 결국은 그게 예수님에 대한 배신인데 12제자 도망하고 가룟 유다 배신하고 주께서는 딱 지켜보고 있었던 거에요. 그게 옛 세대의 환경이에요 그게. 옛 환경이라고요.


옛 환경이 제자들 속에 다 들어있었던 거에요. 제자들만 몰랐지요. 그러니까 제발 좀 무력한 존재, 무력한 존재가 뭡니까? 세 자로 하면 뭡니까? ‘어린이’. 어린이라고 누가 이야기했어요? 소파 방정환 선생님. 일제 시대 때. 최초로 쓴 사람이 어린이에요. 애도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어린이일 뿐이지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그때 5월 5일 어린이날 제정되었는데.


어린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 어린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무력한 존재를 영접하는 거에요. 너, 나하고 같은 급이네. 너, 나하고 동급이다. 세리와 창녀 보니까 동급이다. 동급이네. 동급이 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인간이 낮아질 수 인간의 힘으로 낮아질 수 없는 어떤 인간보다 더 낮아지는 십자가, 죄인이 되셨잖아요. 죄인이.


죄인이 됐으니까 거기에 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양쪽에 두 강도가 기다리고 있었지요. 대구강의 때 했잖아요. 두 강도가 있었지요. 한 강도가 메시아가 자기와 동급이 된다는 사실을 화들짝 받아들인 거에요. 내가 점프해서 갈 수 없지만 내려오신 분이 이렇게 있다는 말은 당신의 나라에 나를 생각해달라. 위에서 못 봤지만 옆에 있으면 눈높이를 낮춰버리면 동급이 되는 거에요.


이걸 제자들이 할 수가 없어요. 제자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이게 안돼요. 무력한 존재가 안 됩니다. 제자들은 귀신들린 자라 칭하기를 거절해요. 자기는 예수와 함께 있기 때문에 지금 누가 크냐? 저 하늘나라에 누가 크냐 이게 관심사지 뭐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겁니다.


참 그 이런 모든 이야기의 일을 예수님은 사도 바울에게 그걸 풀이하도록 계시를 내려줘요. 그 계시 중에 하나가 로마서 8장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 그런데 이 죄는 무슨 죄냐 하면은 모든 인간의 예외 없는 죄. 모든 인간에게 예외 없는 죄.


그래서 이 죄를 죄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로마서 7장에서는 율법을 줘 버리죠. 율법을. 율법을 주니까 모든 인간은 죄로 이미 죽은 거죠. 죽었지요. 이 사실이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왔을 때는 율법의 저주를 받은 거에요. 그게 십자가죠. 그래서 십자가는 무슨 기능을 하고 있다? 율법 기능의 완료가 됩니다. 율법 기능의 완료. 십자가 자체가.


그 십자가 앞에 섰을 때에 나는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은 맞고요 그 죄인 중에 괴수가 누구냐 하면은 바로 나 자신이 맞는 이유가 내가 남보다 나쁜 짓을 더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프레임, 내 환경, 내 사용하는 모든 의미가 나를 위한 주체적 의미에서부터 출발을 했다는 그것 때문에 그게 죄가 되는 거에요.


예수를 믿던 뭘 믿든 누구 좋아라고요? 나 좋아라고 하는 거에요. 나 좋아라고.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뭐냐 하면은 공장에 하도 놀기 좋아하는 자식이 있어가지고 부모가 공장에 취직을 시켜놨어요. 취직을 하라고 하는 그 날에 지가 또 어디서 알아봤는지 공장에 가면 현장에서 산업재해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안 갈라고 하는 거에요.


“엄마 나 공장 안 갈래.” “왜?” “사고 많이 일어난데. 사고 일어나면 안 되잖아. 엄마 나 다치는 거 싫어? 좋아? 싫지. 나 엄마 소원대로 효도하는 셈 치고 공장 취직 안 할게.” 이런 식이에요. 자, 이 말을 그대로 복음의 세계에 적용시켜 봅시다. 사고 나는 것 맞지요. 사고 있는 건 맞는 이야기죠. 확률이 적든 많든 간에 무조건 사고 일어납니다.


그러면 복음 세계에서 뭐냐 하면은 성령 받는 일이 성령 세계에서 있습니까? 없습니까? 성령 받는 일이. 분명히 일어나지요. 성령 받는 일이 일어나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 성령 안 받으면 구원 못 받으니까 나 교회 안 나갈래. 이렇고 있단 말이죠. 그 말이 뭐가 문제지요?


사고 나기 때문에 나 공장에 취직 안할래 하고 성령을 받아야 구원받는다면 그럼 성령 못 받으면 나는 교회 다녀도 소용없잖아. 그럴 것 같으면 성령 받고 난 뒤에 교회 오지 라는 그런 아이디어를 발휘할 때 뭐가 잘못입니까? 성령 받는 다는 것은 자기가 지금 성령 받아서 구원 받는다 할 때 그 사람이 뭘 모르느냐 하면은 나한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지요. 그렇지요?


그러나 절대적 최초의 모든 우연적 사실 말고 모든 사실, 확고한 필연적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하면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이 뭐로 보느냐 하면은 이걸 사고로 보는 거에요. 사고난 거에요. 사람들 기피하는 사고로 본다니까. 이 십자가 사건을.


십자가 사건을 자진해서 제자들은 갔습니까? 안 갔습니까? 십자가 그 현장에 제자들 지켰습니까? 안 지켰습니까? 도망쳤지요. 왜? 사고 났으니까. 사고 났으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교회에서 성경을 100독하고 1000독을 하고 배워도 성령이 나한테 이익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성령 받은 것이 십자가 사건에 참여된 사실이라는 사실을 몰라요. 우리는 내가 지금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가 더 훨씬 더 행복하고 좋아지고 싶어요. 우리는.


왜? 나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없다? 있지요. 그리고 그렇게 괜찮은 내가 마지막 만나고 싶은 것은 누구라고 했습니까? 성공했던 구원이고 뭐고 모든 일에 성공한 그것이 나한테는 그 모습이 진짜 순수한 나의 본질 그대로 라고 우리는 자부하고 싶은 거에요.


그런 보람도 없이 그런 희망도 없이 기도하고 교회나 오겠습니까? 헌금하겠어요? 돈 줘놓고 남 좋은 일 시키는 그런 일 하겠어요? 안 하지요. 방향을 그 쪽으로 나의 순수, 이 정도로 나는 괜찮은 존재였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끌어당기는 거에요. 그럼 이 가는 방향은 무슨 방향과 반대 방향이에요?


부모가 자식보고 제일 당부하는 게 뭐냐? 제발 사고치지 마라고 하지요. 이게 예수님은 십자가 죽고 싶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할 때 뭐라고 했어요? 할 수만 있거든 이 사고가 나한테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했지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그 다음에 뭡니까? 아버지 뜻대로. 그러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사고 난 그 사람만이 성령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체험을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령 받고 난 뒤에 자랑질할라고 생각했다가 진짜 십자가의 영을 받고 난 뒤에는 그 자랑질할려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사고를 낸 가해자의 마음이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거에요. 그래서 한번 정리해봅시다. 주체란 성령 안에서 주체란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성도란 구원받은 주체란 사고 난 뒤에 파악하는 거에요.


내가 죄인이었습니다. 내가 죄인이면서 의인인줄 내 주체가 의인인줄 착각을 했었습니다. 뒤 돌아보면서 확인되게 하시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도가 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다 이룬 것을 그냥 확인할 뿐이지요. 그것도 매일같이. 매일같이 확인하는 겁니다. 매일같이 확인하는 방법은 뭐냐?


오늘 본문을 다시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 9장 이거는 너무 많기 때문에 그냥 아무거나 해도 다 돼요. 46절 봅시다. “제자 중에 누가 크냐” 했지요? 제자 중에 누가 크냐 했지요? 그렇죠? 이 말씀 있지요. 이거 저와 여러분의 일상 아닙니까? 한국하고 일본하고 축구하면 누구 응원하고 싶어요? 한국 응원하고 싶죠.


성경에 한국 이겨야 된다는 게 예레미야에 나옵니까? 에스겔에 나옵니까? 어디 나옵니까? 성경 어디 나오지요? 한국은 일본을 이겨라. 성경에 그게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성경에 한국이고 일본이고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예 없지요. 보세요. 얼마나 내가 속해 있는 집단과 단체가 이 국가가 나는 괜찮은 존재인 것을 증명해 주는 국가이길 원하는 거에요.


전에 제가 그런 예를 들었잖아요. 나는 버스타고 가는데 택시하고 버스하고 박았다. 그러면 누가 응원합니까? 나는 버스에 타고 저 택시운전자하고 차 사고 났다 이 말이죠. 그럼 나는 누구 편을 드느냐 이 말이죠. 버스 편을 들지요. 그런데 그 택시 운전자가 우리 사촌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어떻게 돼요? 갑자기 계산하죠. 사촌 편을 들어야 되겠지요.


그런데 그 사촌이 우리 엄마를 욕했던 사촌인데. 그럼 어떻게 할 거에요. 그게 모든 게 우연한 존재. 인간은 자기가 절대적이고 싶지만 상황 자체가 계속해서 상황이 바뀌고 바뀌는 바뀌는 거에요. 그때그때 마다 변신의 변신의 변신을 하지만 이게 뭐냐 하면은 가면이에요. ‘가면’. 가면 뒤에 가면, 가면 뒤에 가면. 벗겨도 벗겨도 자기 본 얼굴을 본인도 몰라. 페르소나 페르소나. 내가 나의 아바타고 그 아바타의 아바타의 아바타가 나고요.


또 벗기면 내가 어느 구석이 바뀌었는지 몰라요. 죽을 때까지 몰라요. 나 죽을 때 내가 왜 이러지. 몰라요. 본인도 모른다니까요. 아버지 왜 그런 소리했습니까? 나 돌았나봐. 본인도 몰라. 그래놓고도 자기는 순수하기를 원하고 자기가 사랑받기를 원하고 위로 받기를 원하고 있다고요. 도대체 인생 왜 사는지 몰라. 알고 살았겠어요. 그냥 마귀가 시키는 대로 가라는 대로 갔지 뭐. 남한테 안 질려고.


사람이 죽기보다 싫은 게 남한테 안 지는 거에요. 지다 지다 안 지면 마지막 카드가 뭡니까? 남한테 안지는 방법은. 자살이죠. 자살함으로서 자기의 정당함을 자기 죽고 난 뒤에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거에요. 너무너무 억울해서. 너무 억울해서 말로 다 표현하기 억울해서. 난 죽음으로 답한다. 난 그 돈 안 받았다. 이런 식으로.


그게 성경에 나옵니까? 그게 뭐에요? 그게 바로 옛 세대, 옛 부대 이게 찢어져야 될 이유고 심판을 받아야 될 심판의 불에 나답과 아비후처럼 마땅히 싸질러야 될 불살라야 될 대상입니다. 왜냐? 몸은 이미 죄로 인하여 뭡니까? 죽은 겁니다. 죽은 게 어디서 사는 척 했어요 그동안.


그래놓고는 스스로 신앙 좋다고 아이고. 귀신 쫓아내지도 못하고. 귀신이 웃어요. 너 우리 편이잖아. 왜이래? 갑자기. 같은 우리 편인데 뭘 쫓아내. 그럼 네 안에 있는 귀신은 어떻게 할거야. 사람은 항상 과거에서 내가 구성해놓은 그 모습을 과거에서 구성한 그 모습을 늘 그리워하게 되어있어요. 과거의. 과거에서 내가 상상했던 그 모습.


내가 5년 뒤에는 이렇게 될 것이다 하는 것을 5년 후에 과거의 그때 괜찮았던 순수한 내 모습을 지금 내가 늘 그리워하는 거에요. 그런데 주께서 뭘 원하는지 알아야지.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괜찮은 내 모습, 살만한 의욕을 제공하는 그것. 나로 하여금 또 하루를 살게 만드는 그 의욕 되는 희망, 그걸 인간은 원하지만 주님께서는 뭘 원하느냐?


중심부의 폭발을 원합니다. 우리 중심의 폭발. 화산 터지듯이. 죽은 화산이 아니고 살아 있는 화산. 마그마가 들어있어요. 내 안에. 이 억눌린 욕구, 욕망, 원통, 분통, 절통. 저 인간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이게 미필적 살인, 누구누구는 내 기억에서 지워버렸으면 좋겠다 이것. 저 인간 때문에 내 인생 조져놨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데 지워버리고 싶은 그 대상 중에 주님이 끼어있다는 거에요.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님이 제발 간섭 그만했으면 좋겠다. 나도 예수 믿지만 예수 없이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 하나님 믿지만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내가 죄를 짓던 내 마음대로 활개 치며 펼치며 살아보고 싶다 그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중심부에 폭발하게 만들어요. 본색을 드러내는 거에요.


이게 누가복음에 22장에 나오는데 여기 보면 22장 31절요.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했지요.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야 네가 용기를 가지고 물리쳐라’ 이랬습니까? 자, 사탄은 악마를 노립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를 들었던 베드로가 ‘제 힘으로 사탄을 물리치겠습니다’가 돼요? 안돼요? 이게 안돼요.


주님은 악마와 상대하지 인간하고 상대 안하거든요. 잔소리한다고 제자들이 달라질 것 없어요. 그래서 뭐냐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누가 기도해요? 주님이 기도하신 거에요. 주님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핀트가 어긋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우리는 괜찮은 나, 순수한 나, 멋진 나, 그리워하는 내 모습 그걸 조기에 달성해 달라고 기도하잖아요. 남한테 주눅 들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고 다시 말해서 내가 ‘나’라는 주체가 승리적인 주체, 남한테 꿀리지 않는 승리한 늘 이기는 주체, 남한테 안 지는 그런 주체이기를 기도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무력한 존재가 아니고 유력한 존재. 강한 나. 버틸 수 있는 나.


그래서 ‘나’ 값을 하는 거에요. 내가 사람 노릇을 하고 사람 값을 하는 나를 원하는 거에요. 그래서 목사가 되어서 새벽기도하게 되면 생전 잘 안 나오다가 새벽기도 나와가지고 설교 끝나면 불 끄고 난로 끄고 가야되는데 엉엉 울면서 땅바닥 치면서 주여 주여 주여 이럴 때 목사가 뭐라고 해야 됩니까?


‘한나야 네가 뭐 억울한 게 있느냐’ 뭐 이래야 돼요? ‘네가 포도주를 먹었구나’ 이래야 됩니까? 그거 미친 거에요. 누구한테 미쳤어요? 자기 자신한테 미친 거에요. 자기 뜻대로 원대로 세상이 안 따라주니까 미친 거에요. 세상은 환경은 인간 중심, 내 중심 아니에요. 세상은 옛 세대는 악마중심이에요. 그리고 새 시대는? 새 시대는 내 중심 아닙니다. 누구 중심입니까? 예수님 중심이에요. 이래나 저래나 내 중심은 어디에도 없어요. 속은 거에요.


내 중심이라고 하는 것은 마귀가 우리를 속인 거에요.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면 베드로는 더 이상 영생이 저주가 아니고 영생이 거짓이 아니고 영생이 거짓이 아니고 영생이 사실이 되는 거에요. 사실이 된다면 베드로는 어느 길로 갑니까? 변화산 길로 갑니까? 아니면 십자가 길로 갑니까? 십자가 길로 가잖아요.


왜? 이 땅에서의 유일한 성령 안에서의 사실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머지는 다 거짓이기 때문에. 거짓이에요. 십자가 빼놓고 거짓이에요. 그 길 외에는. 그런데 이 마귀의 세계에서는 누가 거짓입니까? 이 복음 십자가가 거짓이에요. 주님께서는 뭐냐? 인간의 지식과 지혜는 어리석다 했거든요.


오직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무슨 능력밖에 없다? 오직 십자가 능력밖에 없다 한 거에요. 그 이야기를 누가 싫어하는 줄 알아요? 목사가 싫어해요. 목사가. 왜? 십자가만 자랑하면 돈 나옵니까? 교인들 들끓어요? 하나둘씩 눈치보고 다 가잖아요. 잘됐다. 코로나. 코로나 핑계대고 다 가버리고. 안 오잖아요. 다 갔잖아요.


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왜 제공을 안 하느냐. 교회라는 서비스 단체가. 교회라는 서비스 단체가 사람을 위해서 있는 단체가 왜 사람이 원하는 것을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으면 그건 장사 문 닫는 거에요. 그만 두는 거죠.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겠다는 거에요. 우리를 위로해 주면 헌금하겠다는 거지. ‘몸은 죽은 것이나’ 뭐 이런 이야기하면 그들은 안 듣지요.


이제 가장 근본적으로 가봅시다. 누가복음 9장을 했는데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창세기 3장에 보면 따먹는 이유가 나와 있어요. 선악과 2장에는 안 나오고 3장에 나오는데 왜 따먹느냐 하면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다” 이렇게 되어있어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여러분한테 그냥 강의가 끝나가니까 물어보겠어요.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그 여자에게 있어서 무엇이 현실입니까?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가 현실입니까? 아니면 ‘참 보암직하다 먹음직하다 탐스럽다’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가 현실입니까? 아니면 ‘내가 지금 따먹고 싶다’가 현실입니까? ‘따먹고 싶다’가 현실이죠.


이미 인간은 그걸로 모든 주체가 굳어졌어요. 백날 복음 십자가 이야기해도 소용없습니다. 주체적인 행동으로 우리는 이 옛 부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나를 찢을 생각이 요만큼도 없어요. 나는 건사하고 싶어요. 챙기고 싶고 지키고 싶어요.


그리고 남한테 더 힘을 끌어 모아서 남한테 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고 돈도 없고 몸도 약하고 이것도 저것도 내세울 게 없다면 그저 자존감이라도 갖고 있고 싶어요. 자존감이라도. 자존심이라도 갖고 싶어요. 못 먹어도 go에요. 망한 줄 알면서도 go. 그 자존감.


그 자존감에 뭘 보태는가? 내가 심판받아 마땅함이 들어있는 게 아니고 나는 복음 안다. 나는 교회 50년 다녔다. 나는 권사다, 집사다, 목사다, 장로다 이게 담겨있어요. 이게 자존감으로 다 전환되고 말았어요. 나는 신학교 나왔다. 원어 안다. 헬라어, 히브리어 안다 이런 것. 아 이거 독합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뭐냐? 성령이 사고를 쳐야 돼요. 주께서 사고를 쳐서 내부가 성령을 받게 되면 내가 자존심만 챙겼다 하는 이게 마그마가 폭발해가지고 나타나요. 그러면 그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말로 하는 것보다도 못 그리는 그림이지만 그려볼게요.


플랜카드가 있고 뒤에 내가 있고 플랜카드를 듭니다. 플랜카드 글씨에 뭐냐 하면은 ‘나는 불신자다’ 이거 나오면 신자입니다. 이거 나오면. 이게 폭발되거든요. 이게 사고친 거에요. 여러분들 이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나라는 그런 게 없는데 태국이나 어디가면 음주운전 단속 심하게 하는데 있어요.


그게 뭐냐? 나는 음주운전자입니다. 이거 들고 사거리 서가지고 우사당하지요. 그렇죠? 그러니까 성도는 음주운전까지는 안했지만 나는 뭐가 돼야 되느냐. ‘불신자입니다.’ 이것을 바로 세리와 창기 다시 해서 이거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거에요. 감사의 내용이 정서적으로 두 종류가 있어요.


두 종류가 뭐냐 하면은 1. 내가 고대했던 바가 응답받을 때 감사하는 것. 내가 고대했던 바. 자, 1번에 있을 때 내가 찢어질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찢어질 필요가 없지요. 내가 원했던 기도 응답받았으니까 나는 그만큼 기도 괜찮게 한다는 자기의 과시, 자기의 가치가 유지가 되지요. 유지가 되는 정도가 아니고 빛이 나고 그래 내가 원했던 바다. 내가 이 모습을 원했었어. 드디어 하나님께서 반응을 나타내는구만. 아이고 좋아라 이렇게 되는 거에요.


두 번째 감사가 1번이 이게 불신자라고 드러나는 때 드러나는 감사.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과정이 어떻게 됩니까? 2번 바로 갑니까? 1번을 통해서 2번으로 갑니까? 반드시 1번을 통해서 2번으로 가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 제자들을 데리고 갔던 그 경로와 동일한 경로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사도 바울이 과거에 했던 경력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예수는 거짓이었다죠. 예수는 거짓이었고 무엇이 진실이다? 여호와는 진실이죠. 제 말이 아니고 사도 바울 말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와 예수와 같은 급입니까? 대립이 되는 거에요? 이 인간 세계에서. 하나님이 예수님께 대립이 돼요? 아니면 같은 급입니까? 대립이 되는 개념입니다.


왜? 이건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옛 세대의 하나님과 새 세대의 주님이 세대와 환경이 다르니까 그 주체가 달라진 거에요. 1번을 통해서 2번 내려오는 거에요. 어떤 인간도 왜냐하면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에 제가 주일날 설교 다시 해볼까요?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이에요.


그럼 지퍼를 마지막까지 다 내려줘야 돼. 마지막까지 다 내려올려면 몸은 죄로 인하여 뭐다? 죽은 것이라는 것을 그것을 여기에다가 써야 돼요. 여기에다가. 불신자 이 말을 달리하게 되면 내 몸은 이미 죽었습니다. 이걸 기쁘게 울면서 이게 아니고 활짝 웃으면서 입 째져가지고 빙그레 웃으면서 내가 바로 불신자였고 내가 바로 죄인 중에 괴수며 나는 선을 원했지만 내 속에 무엇이 강했다?


로마서 7장에 “나는 선을 원했지만 내 속에 또 다른 내가” 뭐를 원했어요? “악을 원했다.” 악이 나의 선을 이겼어요? 졌어요? 악이 나의 선을 이긴 그런 인간이 접니다. 이게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이게 바깥에 나왔다는 말은 이게 뭐냐 되냐? 날마다 죽을 때까지 쏟아내는 나의 배설물로 쏟아내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신앙이든 신학이든 남한테 지는 건 죽기보다 싫었고 그리고 나의 약점과 나의 결점이 타인한테 들키는 것을 나는 용납치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도 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율법에 열심이었고 율법에 완벽했었어요. 누가? 사도 바울이.


그런데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에 보게 되면 그런 나를 주께서는 나로 하여금 포행자 살인자로 만들었다. 왜 만들었느냐? 내부적으로 폭발하라고. 바로 이게 주께서 주신 십자가의 심판, 너는 죽어 마땅함을 알려주소서 했는데 디모데후서 1장에 보면 “창세전부터 이 일이 이미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한 게 아니고 주님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8절의 말씀. “내가 사도된 것은 내가 예상하지 않고 내가 성도된 것은 사도된 것은 주님의 예정된 뜻입니다” 라는 고백. 그러니까 이 플랜카드가 뭘로 바뀌겠어요. 주의 말씀으로 계속 바뀌면서 자기는 이제 불신자라는 전제로 계속 주의 일이 불신자는 나고 거기에다가 불신자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혜만 계속 플랜카드에 쓰시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도록 해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에게 들킬 수가 없지만 주님께서는 다 아시는 이야기, 그것이 제자들 통해서 우리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제자들 탓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탓하고 있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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