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예수 이야기

아빠와 함께 2022. 1. 1. 16:45

강남-누가복음 9장 31절 (예수 이야기)211221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9장 18절부터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질문하는 자와 질문 받는 자가 연대를 이룹니다. 질문자는 예수님이 질문하지요. 질문 받는 자는 제자들이 질문을 받지요. 그러면 여기서 이어져 나와야 되는 논리는 뭐냐 하면은 내 이야기가 나오면 안 되고 성도는 주님 이야기가 나와야 돼요. 주님 이야기가 나와야 돼요. 주님 이야기. 내 이야기가 나오면 안 되고요. 주님 이야기.


이 말은 내 이야기는 아니고 주님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주님의 이야기가 나와야 됩니다. 현재 주님은 나에게 이런 질문을 쏟아 붓고 있다는 그 이야기가 나와줘야 연대라는 것이 형성되는 겁니다. 연대. 예수님께서 먼저 이야기했잖아요. 질문을 하잖아요.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주님 쪽에서 질문을 했어요.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로써 제자들은 제자들의 팔자와 운명은 주님의 질문 안에 묶여져 버렸습니다. 주님이 질문을 했다는 것은 이제는 제자들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주님의 질문이라는 그 묶음 안에서 벗어날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질문은 주님이 알아서 성취되어버려요. 덩달아 질문 받은 제자들의 운명과 팔자도 확정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되게 되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한 것은 정답을 그들에게 얻고자 함이 아니라 주님과 그들이 질문으로서 한데 묶였다는 것 자체가 정답이 되어버려요. 답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너는 나하고 같은 질문을 받음으로서 내 세계 속에 이미 들어와버린 그런 대상이라는 것. 그게 정답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떨어져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하나님에게 떨어졌을 때 하나님이 아담을 구원해서 하신 게 뭐냐 하면은 질문이었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거는 아담이 지어낸 게 아니에요. 아담 쪽에서 하나님께 질문한 게 아닙니다. 이 말은 인간의 모든 질문은 자기 밖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인간의 모든 질문은 자기 밖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질문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의 모든 생각은, 마음 씀씀이는, 본인의 모든 생각은 본인의 의식 영역 밖으로 못 벗어나요. 질문을 해놓고 도로 자기로 끌어당깁니다. 예수님 말고 인간들은. 인간들은 아무리 질문을 뱉어봐야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질문을 하면서 어떤 대상, 어떤 사실에 대해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어떤 사태에 대해서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궁금해서 질문을 던집니다. 저게 뭐지? 선악과가 뭐지? 저 하늘에 있는 별은 몇 개지? 자꾸 질문을 던져요. 인간이 질문을 던지는 걸 이걸 가지고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세계, 세상이라고 이야기해요. 세계, 세상. 그래서 인간이 이해하는 세계란 나의 의식 범주 안의 세계에요. 의식 범주 안의 세계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고린도후서 5장 7절 한번 읽어보세요.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다. 인간은 보는 것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잖아요. 아예 안 보이면 아무 것도 없는데 질문을 못 던지죠. 아무 것도 없으니까. 아무 것도 없는데 무슨 질문을 던집니까. 인간이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보이는 게 있다는 그 범위, 범주가 전부입니다. 범주가 전부에요.


그래서 도마도 뭐라고 합니까? “보면 믿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예수님 다녀갔다고 하니까. 다른 제자들 말 안 듣고 “아니 나는 안 보고는 못 믿겠다. 보면 내가 믿겠다” 이게 인간의 자기한계입니다. 인간이 어떤 말을 하고 질문을 던질 때는 눈에 뭐 뵈는 게 있기 때문에 던지는 거에요. 뭔가 훅 예상 못한 게 뭔가 등장하게 되면 갑자기 물 위를 걸어오게 되면 제자들이 뭐라고 합니까? 제자들이 저건 유령인가? 질문을 던졌잖아요. 유령인가?


그럼 평소에 유령이라는 것은 인간이 보는 것 바깥에 보는 세계 말고 다른 세계, 미지의 세계를 인간은 이미 뭐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습니까? 이거는 유령의 세계다. 귀신의 세계고 천사의 세계고 이건 하나님의 세계다 있지요. 자기 딴에 보는 것 너머의 다른 세계가 있다고 아무리 아울러도 인간의 의식에서 나왔던 이 모든 것은 전부 다 가짜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하나님이든 삼위일체든 예수님이든 전부 다.


본인이 질문을 던져놓고 본인이 해답을 하고 본인이 쥐고 있으면서 나 구원받았다고 우기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는 것은 제자들과 연대를 하지요. 연대를 함으로서 이 제자들을 뭐로 몰아세우느냐 하면은 실패로 몰아세워요. ‘실패’로.


그게 누가복음 9장 24절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졌고 질문을 던짐으로서 질문 받은 제자들은 어쩔 수 없이 예수님과 연대가 이루었고 그 연대를 이루었던 예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이건 실패한 길이야 이건 안돼 이러면 망하는 거야 라고 그들을 강제로 끌고 갑니다.


지금 누가복음 9장에서는 이렇게 되어있는데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마태복음 16장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9장 22절에 보면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이 말씀을 마태복음에도 나오잖아요.


그럴 때 여기에 누가복음 9장에는 없지만 마태복음 16장에 나올 때는 베드로가 여기에 끼어들지요. 베드로가 자기의 의사를 거기에다가 끼어드는 거에요. 끼어들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보고 뭐라고 합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은 나의 연대 속에 주님의 연대 속에 참여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사탄이 끼어들려고 할 때 그 주님의 연대가 될 수 없는 쪽에서 끼어들게 되면 베드로가 하는 그 사고방식대로 끼어들어요. 우리는 실패하면 안됩니다 주님이여. 이 생각. 내가 망하면 안됩니다 주님. 이 생각. 하면 된다 주님께서는 ‘Boys, be ambitious. 소년들아 소망을 가져라’ 이런 거 있잖아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런 거. 이런 것들이 악마의 생각이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꾸 자기 생각의 범주 안에서 자기 성공을 꿈꾸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여기에 오늘 본문 누가복음 9장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잃으면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말은 뭐냐 이거에요. 말이 길지만 짧게 하면 이겁니다. 너를 없애라는 거에요. 네가 내 십자가를 방해한다.


아까 마태복음 16장 같은 경우는 베드로가 노골적으로 보여줬잖아요. 주여 이러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성공 쪽으로 나가야지 실패로 끝나면 그동안 당신에게 기울인 지난 모든 3년의 공적이 다 날라갑니다 하고 간곡하게 우리가 지켜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나오지요. 베드로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게 자기가 알던 자기로서는 성의를 다했지만 베드로는 악마의 생각이 뭔지를 베드로는 그때 처음 알았어요. 악마의 생각이.


악마의 생각은 항상 성공, 성공, 성공, 성공. 성공에서 성공으로 나가는 것이 악마의 생각이라는 것은 베드로로서는 그게 당연하게 하나님이 도와주는데 당연하게 여겼지 하나님이 도와주는데 실패한다 있을 수 없다는 거에요. 주님은 실패하라가 아니라 실패, 성공을 꿈꾸고 있는 너를 없애버려라 이 말이죠.


너를 없애버려라 이 말은 질문자가 질문에 대한 내용을 성취시키지 너는 네가 만약에 거기 끼어들면 너는 방해자가 될 뿐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연대에서 예수님이 허락한 유일한 실체는 유일한 대상은 실패한 나, 실패해버린 나. 이것이 유일한 대상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실패한 것을 감수할 때 그동안 몰랐던 숨어있던 찬양이 나옵니다. 감사가 나오고요.


실패 안하기 위해서 부르는 찬송은 그거는 찬송이 아닙니다. 그건 장난치는 거에요.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라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 순간이 나와요. 그때 사울이 여호와를 찬양했습니까? 그 다메섹에서 내려갈 때 찬양했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거기서 기도했습니까? 아니지요.


사울이 그냥 다메섹에 내려가서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갔을 때에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처음 만난 자리에서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나는 너 찬송소리 들었다 기도소리 들었다 그렇게 나왔습니까? 아니지요. 사울아 사울아 너는 나를 핍박했다는 거에요. 너는 너 자신을 모른다는 거에요. 네가 하는 모든 것이 나의 핍박으로 하늘나라에서는 그게 해석이 된다는 사실을 네가 모르고 있는 거에요. 주님 앞에서.


그래서 20대 30대가 찬양집회에서 종교적 감수성 때문에 그 엄청난 영적 분위기 속에 찬양에 빠질 때는 무엇이 누락되느냐 하면은 자기가 주님을 핍박했다는 생각이 들래야 들 수가 없잖아요. 핍박 없이 하나님과 일체감을 되는 그런 황홀한 감수성, 황홀한 감정을 찬양이라는 이름으로 거기에 뛰어들고 싶은 거에요. 젊은 기분에.


앞에 드럼치고 기타치고 같이 율동 하면서요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이서 해서 앰프 팍 키워가지고 많이 해봤잖아요. 소리가 막 울려가면서. 음악이라는 그 파장에 사적인 개인적인 그러한 심장 고동마저 다 삼킴을 당할 때 그 노래가 나를 완전히 접수할 때 인간은 자기를 상실하는 어떤 놀라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야 너 찬양할 때 나 되게 아팠어. 왜? 네가 나를 밟았거든. “너는 나를 아프게 하는 자로다” 그렇게 하면 분위기 다 깨지요.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의 신앙적 분위기를 주님께서는 초를 쳐버려요.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무슨 짓을 안 해도 너는 나를 핍박하는 존재로서 이 땅에 태어났다.


그 이야기를 사울은 처음 들었습니다. 내가 뭘 하나 안하나 상관없이. 내가 나로 산다는 것이 곧 주께 핍박이 된다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주님이 오셔야 주님께서 먼저 질문을 던져야 주님께서 먼저 대화를 시작해야 내가 주님을 핍박하는 사람인걸 그제서야 왜 아느냐?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평소에 기만하고 있기 때문에 속이고 있기 때문이에요. 속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에게 먼저 질문을 한 거에요. 인간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는 이유는 주일날 설교에서는 이렇게 설명 했지요 A★ 이걸 주일날 뭐라고 했습니까? 주일설교에서는 기획투사라고 했지요. 지금의 내가 좀 더 상세히 설명하면 인간은 의식을 의식, 느껴지는 것을 뿜어내고 느껴지는 것은 뭐가 있느냐 하면은 목표가 있어요.


지금의 현재가 목표 사이에 결핍을 갖고 있고 결핍을 내가 빨리 메꿈으로서 어서 A★ 그야말로 star가 되는 거 아닙니까. 내가 몰락되는 게 아니잖아요. star가 되는 거에요. A★ 되는 이 지점에 오게 되면 AA★ 요게 끝나면 AAA★.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의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목표 없는 의식은 없어요. 반드시 의식한다는 것은 이렇게 되고 싶어라 라는 의식을 그것과 연결하면서 의식이 작동하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이런 목표 없는 의식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경우, 사울의 경우, 모든 인간의 경우는 이런 자기를 상실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를 잃어버리는 게 아닙니다. 어쨌든지 자기를 살려내야 돼요. 어떤 수단을 동원하던지 어떤 방법이든지 자기를 빠트리면 안돼요. 죽을 때까지 어디를 가든지 자기 자리를 데려가야 돼요. 데려가서 A★가 되야 돼요. 목표를. 전력을 다해서. 진정을 다해서.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이 목표를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질문 속에 이 목표를 너도 죽고 나도 같이 죽자 로 바꾸어버린 거에요. 너도 죽고 나도 죽자. 그게 뭐냐? 자기 십자가에요. 너는 너한테 십자가 있고 나는 나한테 십자가 있는데 십자가라는 점에서 같이 목표를 죽는 목표를 하자가 아니라 목표 자체를 없도록 하자. 목표 자체를 없도록 하자. 어떤 노림수 자체를 없도록 해버리자.


자,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의 목표를 없애버리면 질문을 누가했죠? 주님이 하셨지요. 질문을 하신분이 이 땅에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났잖아요. 그러면 질문자가 이 땅에 출생했지요. 주님은 그 예수님 자신의 출생을 제자들의 출생과 일치시킬려고 하시는 거에요. 이 말은 새로 시작하자는 거에요. 제자들아 현재 너 말고 새로 시작하자. 나의 출생이 너의 출생이 되도록 하자에요. 그거 아니면 그 노선을 주의 노선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출생을 같이 하는 그 점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6장에 나와 있어요. 뭐냐 하면은 “베드로야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했거든요. 그때 예수님께서 딱 거기에다가 토를 달지요. “이걸 네가 알게 한 것은 네가 아니고 혈육이 아니고 네 노선이 아니고 나를 이 땅에 출생하게 하신 아버지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시작점은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에서 베드로나 12제자가 어떻게 돼요? 새로 시작되야 되는 겁니다. 그 새로 시작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22절에서 같이 연대되어 있는 그 질문자, 예수님 자신을 뭐로 보느냐 하면은 소멸시킵니다. 내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된다.


지금 너희가 보고 있는 나는 너희들 보기에 너희 의식적으로 나를 기대하고 목표를 갖고 있지만 너희들 보는 나는 버린 바 될 것이다 에요. 죽게 될 것이다 이 말입니다. 더 이상 인간들의 쓸모 있는 대상이 못 되는 거에요. 없어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제자들 입장에서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은 그래야 인간은 인간 자신을 기만하고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자기한테 솔직하고 자기에게 아무리 순수해도 그 바탕은 그대로 본인이라는 바탕은 본인을 버린 적이 없잖아요. 버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거에요.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고생하고 선교하고 고생하고 기도해도 본인이 본인을 버릴 수 없는 거에요.


a에서 b로 달라질 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어느 쪽이 맞는가 보세요. a에서 b로 변했을 때에 1번. a가 변화했다. 2번. x가 변화했다. 어느 게 정답일까요? a가 변화했다. x가 변화했다. 어느 게 정답입니까? 문제 상당히 어렵지요? 그렇지요? a가 변화한 겁니까? 아니면 그 미지의 x가 a형태에서 b형태로 변한 겁니까? 1번입니까? 2번입니까? 정답은 2번이죠. 2번. 정답은 2번인 거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2번을 모르고 자꾸 1번을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내가 나를 변화했다고 내가 이야기하는 거에요. 이게 반칙 아닙니까.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지요. 나는 새 사람 되었어 라고 내가 말한다. 이게 새 사람입니까? 변화라고 하는 것은요 본인이 관여하지 못해야 돼요. 외부에서 나를 내가 나를 변화시키지 못함을 외부에서 알려줘야 돼요.


너는 백날 몸부림쳐도 그냥 몸부림치는 것이지 전에는 몸부림쳤는데 지금은 몸부림 안 친다. 본인이 변화된 게 아니고요 다시 원래대로 된 거죠. 변화된 게 아닙니다. 원래대로 되는 것은 변화되었다 말할 수가 없어요. 이 세상 사람들은 진정으로 자기가 바뀌어진다고 인식하지 외부에서 자기를 바꾼다는 것은 도저히 인간들 아이디어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예에요. 요한복음 12장에서 이것도 질문 형식으로 하면 쉽거든요. 죽은 마르다 마리아 오빠 이름이 뭐지요? 나사로죠. 죽은 나사로가 나흘 만에 멀쩡하게 살아났습니다. 맞지요? 이거 변화입니까? 변화 아닙니까? 변화된 거 맞지요. 죽었다가 소성했으니까 변화 맞지요?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걸 안 믿는 거에요. 안 믿고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그들이 모여서 어떤 생각을 했느냐 하면은 죽은 나사로를 죽일려고 모의를 했어요. 요한복음 12장에.


죽은 나사로를 죽이겠다고 할 때 이거는 변화입니까 변화 아닙니까? 이거는 내부적이죠. 젊은 ‘나’가 차에 치어서 죽었다. 이건 변화입니까? 변화 아닙니까? 젊었다는 그도 ‘나’고 죽은 것도 ‘나’잖아요. 지금 유대인들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을 때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나사로가 알아서 살아난 걸로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죽은 나사로를 죽일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는 이 유대인들을 뭘로 유도하느냐 하면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게 한 그 미지의 x라는 분, 그분을 유대인들이 죽이도록 유도하신 겁니다. 물고를 나한테 와야 될 그 율법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고비를 주님 쪽으로 바꿔버린 거에요. 왜? 나는 율법을 지켜도 변화가 안 되니까요. 될 수가 없는 거에요.


인간은 목표가 있고 그 목표는 그 목표를 구경하기 전까지는 내가 도중에 죽거나 망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내 변화를 내가 목격하고 싶은 거에요. 이건 변화가 아닙니다. 그냥 연기지요. 아픈 척해서. 그런 대목이 나와요 성경에 요한계시록 2장 10절 이런 말씀 있습니다. 제가 그 대목 읽어볼 테니까 여러분들이 어떻게 실천하는지 실천하는 사례를 이야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 말씀요. 자, 죽도록 충성하라. 그걸 여러분들 이 말씀 어떻게 지킵니까? 실눈 뜨고 죽도록 충성하는 내 모습이 죽도록 충성하는지 아닌지를 누가 감시하고 누가 판단해야 돼요? 죽도록 충성하는 내가 판단해야 되잖아요. 그래야 이 말씀을 내가 지켰다가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 걸 내가 실눈 뜨면 실눈 뜬 그 상태가 내가 진짜 죽은 척하고 있는 거에요? 죽은 거에요? 이건 죽은 척하고 있는 거죠. 이게 자기 기만 아닙니까. 속임수잖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게 자기 속이는 재주밖에 할 수 없잖아요. 속이니까. 막 실눈 뜨고 보는 거에요. 사자가 와서 물을 때 사자가 딱 물렸을 때 죽지는 않았는데 죽어가고 있잖아요.


죽어가고 있는 순간 자꾸 확인할려고 하는 거에요. 죽도록 했는데 어디서 화살 날라와가지고 사자 죽어버리면 나는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잖아. 이건 죽도록 충성한 사람 아닌가 죽을 뻔하다가 죽을 뻔할 정도로 충성한 것이지 죽도록 충성한 건 아니에요. 모든 말씀은 연대를 이루는 주님이 가져가셔야지 내가 있는 게 아닙니다. 질문자가 주님이지 내가 주님한테 질문해서 해답을 얻는 게 아니잖아요.


오늘 본문이 그거잖아요. 오늘 본문이 누가복음 9장에서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먼저 질문을 제자들한테 먼저 했잖아요. 제자들은 그때부터 주님의 질문 받는 자가 되어서 뭐가 돼요? 하나의 연대를 이룹니다. 연대를 이루면 본인의 목표는 날라가버리고 주님의 목표에 그들이 함몰되지요. 같이 휩싸이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굳이 내 목표가 있어야 돼요? 말아야 돼요? 내 목표는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제자들 앞에서 내가 버림받는다 내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해버렸거든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같이 연대라고 평소에 생각했는데 그들이 노렸던 그 목표가 아니었잖아요. 아닌 정도가 아니고 반대로 가지요. 이 타이밍에서 주님이 사라져버리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이러는 거에요. 제자들이 당황스러운 겁니다.


당황했다는 말은 제자들이 평소에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여온 거에요. 인간은 A에서 B로 달라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A 본인이 A라는 본인이 B가 될려고 소용없는 짓거리를 해온 거에요. 인간이. 옆에 x라는 미지의 능력으로 A가 B로 달라져야 되는데요. 미지의 x를 생각하지 않고 A라는 내가 예수님의 능력을 컨닝해가지고 저분한테 말 잘 들으면 내가 원하는 목표 B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꼼수를 써왔던 것이 어떻게 저와 여러분만의 이야기겠습니까. 그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야기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울보고 뭐라고 했느냐? 먼저 질문했고 “사울아 너는 나를 핍박했다” 처음 자리 나, 예수님과 구원받을 너의 첫 번째 첫 걸음은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 나는 너와 연대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야 주님이 십자가 사건이 터지기 때문에.


사울이 얼마나 찬양하고 얼마나 헌금 많이 했습니까. 헌금 많이 하고 찬양 많이 할수록 자기에게는 자기가 주님을 핍박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한다는 생각만 있을 거에요. 왜냐 하면은 사울은 인간이었고 인간은 반드시 의식이 있고 A에서 A★라는 자기 목표가 의식 속에 그것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주님이 우리와 연대해서 주님의 목표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목표를 이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더는 목표가 없다는 뜻이에요. 목표가 사라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거는 어렵지 않죠? 이 이야기는. 그렇잖아요. 목표가 사라졌잖아요. 그럼 그 목표는 내가 원했던 목표든 원하지 않았던 목표든 간에 나의 입장에서는 목표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목표가 없는 거에요.


목표가 나라는 A가 있는데 B가 되는 목표가 있었는데 이 B라는 목표가 없어져 버리면 이 거꾸로 보면 뭐도 없어졌다는 말입니까? 나한테 목표가 없다는 말은 이거는 나도 없어졌다는 뜻이에요. 나도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나는 껍데기고 내 안에 누가 사느냐 하면은 예수님, 그리스도가 사는 거에요. 요 관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나니” 다시 말해서 십자가 죽는 것은 내 목표가 아니고 나에게 찾아오신 누구의 목표에요? 주님의 자신의 목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 자신의 목표가 이루어졌습니까? 안 이루어졌습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다 이루어졌잖아요. 그럼 이미 이룬 목표이기 때문에 따로 나의 목표가 있을 리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래서 기도라는 것은 뭐냐? 믿음에서 나온 기도는 뭐냐 하면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그 목표가 껍데기 같은 나를 통해서 마음껏 발휘되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거에요. 나는 죽었으니까. 내 이름의 목표는 없어졌으니까. 현재 내 처지에 있는 모든 상황은 내가 모르는 사항이에요. 내가 의도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남편이 백신 맞고 돌아가신 상황은 권사님이 의도했어요? 빨리 죽어라 죽어라 의도한 겁니까? 의도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 일이 벌어졌잖아요. 그러면 대강 눈치를 채야지요. 이건 내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다? 일방적인 주의 일이란 걸 눈치를 채야지요. 그렇게 되어가는 절차를 통해서 뭘 발견하느냐 하면은 바로 내가 사라져주는 것이 주님의 목표가 또렷하게 드러내는 하나의 기능인으로서 역할 다 하는 거에요.


이거는 결국은 범사에 뭐한다? 범사에 일어난 모든 사태에 대해서 감사하는 겁니다. 고마워하는 거에요. 어떤 일이 일어나든 주변에 자식이 죽던 아들이 죽던 딸이 죽던 남편이 죽던 내가 죽던 심지어 내가 죽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스데반처럼 주께 감사하는 거에요. 이걸 간단히 말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나이다.”


주의 목표 안에 놓이게 된 그 자체가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축복해서 얻어진 엄청난 목표에 거기에 참여하다 보니까 굳이 따로이 내 목표를 내 기쁨을 얻겠다고 따로 내 목표를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딸이 수능 잘 쳤으면 좋겠다 라는 감정이 확 올라오지요. 그러면 함께 계신 주님이 묻습니다. “누굴 위하여?” 딱 묻지요. “누굴 위하여?”


그러면 주님을 위하여 수능을 잘 쳤습니다 이렇게 정답을 아니까 답이 나오겠지요. 그럼 주님이 이야기합니다. 네 딸을 주님 내가 수능 잘 치게 했다. 이미 목표가 끝나버렸어요. 잘 치게 했다는 거에요. 뭐 잘 치지요. 연필 갖고 잘하면 되지요. 잘 쳤잖아요. 문제 보고 정답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시험은 잘 쳤잖아요. 일찍 내고 나갔는지 그거는 모르겠습니다만.


일어난 모든 사태에 대해서 인간들은 아무리 복음으로 믿음으로 산다 해도 주님께 다 했다 해도 막상 일어난 그 상황이 은근히 내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내 목표, 내 자존심과 가치를 확 올라오게 만드는 사태를 일부러 만들어버려요. 일부러 만들어요. 그래서 반복해서 십자가에 자기를 부인해야 될 십자가를 우리를 통해서 되풀이되게 표상되게 하시는 겁니다. 십자가만이 남도록.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성질을 건드려버려요. 우리의 성질을. 잠자는 사자를 건드리는 것처럼 가만히 있는 나를 가만있는데 건드려버려요. 갑자기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하다가 1분도 안 되서 갑자기 내 의지가 확 살아나게 만들어요. 여러분한테 다시 한번 간단한 질문을 한번 던질테니까 여러분들 답변을 한번 해보세요.


1. 내가 없는 세계, 2. 교회 없는 세계, 3. 주님 없는 세계, 4. 국가 없는 세계, 5. 가정이 없는 세계. 이중에 어느 것이 제일 답답합니까? 어느 게 제일 답답해요? 미국에 있는 어떤 분은 저한테 전화했는데요 그냥 유투브만 봤는데 교회 없이는 못 살겠다고 오랜만에 교회 가가지고 이렇게 복음 좀 나눌려고 하다가 너무 실망을 해가지고 또 다시 펑펑 울었다고 전화 왔거든요. 답답해서. 세상에 교회가 이렇게 진리가 없을 줄 몰랐다 했는데.


교회라는 것도 복음 듣는 것도 좋지만 같이 모여 이바구하는 그 즐거움이 있던 그것도 너무 멀면 안 되고 가까운데 전철타고 갈수 있는 거리에 복음 전하는 교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국가가 없으면요 나중에 북한 쳐들어오면요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쳐들어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탈레반 쳐들어온 지가 몇 개월 지났는데 70% 굶어죽게 생겼어요. 원조 다 끊기니까.


전에 미국이 통치할 때는 밀가루 얻어먹었지요. 다 끊어졌어요. 70%가 다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지금. 국가가 없다는 것. 나를 지켜줄 국가가 없다는 게 그렇게 비참해요.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고. 소련군이 쳐들어왔는데 대처할 능력이 없습니다. 홍콩도 마찬가지고요. 홍콩 자체적인 군대가 없어요. 중공군이 확 밀고 들어오니까 겁주니까 홍콩이 손들고 전부 다 중국한테 져버렸습니다.


국가가 없다는 것은 이거는 시리아 난민들하고 똑같은 거에요. 난민 한번 돼볼래요? 실상이 어떤지. 국가가 없다는 말은 땅이 없는 거에요. 내가. 다른 나라가 땅을 뺏어가버렸어요. 이거 살려면 무조건 공산당 돼야 되고 무조건 알라신 믿어야 되고. 국가가 없을 때는 그래서 전 세계 모든 독립국가가 전부 국가에 전부 다 독립투사들이 있습니다. 독립투사.


민족과 국가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순교를 자처하는 사람이 모든 국가에 있어요. 아프리카에도 있고 베트남에도 있고 그들은 지금 전부 다 광장에 동상 하나로 남아있어요. 그들이. 세르비아 같은 나라도 마찬가지고요. 세르비아라는 나라는 주기율표에 나오는 모든 원소를 다 갖고 있는 나라에요. 코발트 광산 때문에 데모하고 있어요 지금. 세르비아. 세르비아 나라 발칸 반도 거기에 있어요. 이스라엘하고 다투고 그 유명했던 나라 있습니다.


하나의 국가가 있다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행복과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기본적인 울타리가 되는 거에요. 국가가 없다는 것은. 침략 받아버리면 노예가 되어버리는데 옛날. 옛날에 구약 보면 나오잖아요. 국가가 없을 때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에 가면 뭐합니까. 도로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는데. 그때 나오는 예레미야 애가부터 해가지고 시편에 나오지요.


137편인지. 우리가 바벨론 강가에서 울었다고 하는 거요. 137편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국가가 없으니까 우는 거에요. 불렀던 팝송 있잖아요. 이 노래 아닙니까.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꼴좋다 이 말이에요.


너희 하나님이 너희 버렸잖아. 아이고 너희를 버린 하나님을 믿다니 바보같이. 역시 우리가 믿는 마루둑 신이 더 쎄. 이런 조롱을 들은 거에요. 국가 없으니까. 그러나 국가라는 것, 민족이라는 것, 교회라는 것 다 무엇을 위함입니까?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그러면 그 가정, 그 가정 안에 누구 가정입니까? 이게 내 가정이잖아요. 남의 가정 아니잖아요. 내 가정이잖아요. 내 가정이라고요.


국가에서 가정이 더 중요하고 가정이 중요한 것은 거기에 누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기 때문에. 내가 있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제가 대구강의에서 이야기했잖아요. 교회에서 교회 헌금하는 것은 취지가 뭐냐 하면은 몇 푼 주고 보내 보내. 하나님께 내 할 도리 했으니까 제발 신이시여 헌금 받아 챙기시고 내 것은 건드리지 마세요. 현재 내 수입과 내 건강과 내 가정의 행복은 건드리지 마세요.


그러니까 몇 푼 주고 보내고 안주면 또 삐져가지고 내 가정을 친다니까요. 그러니까 이게 주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고요 헌금이고 기도고 내 것 지키기 위해서 헌금하는 거에요. 여러분 빼놓고. 여러분은 헌금하는지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가 그런 거에요. 교회가. 교회보다 뭐가 더 중요하다? 부등호표 동원할까요? 교회, 내 가정 어느 것이 더 중요해요? 물어본 내가 귀싸대기 맞을 거에요. 내 가정 지키기 위해서 교회 다니잖아요. 내 가정 지키기 위해서. 내 남편 천당 보내기 위해서 교회 다니잖아요. 복음 듣고.


자, 문제 다시 나갑니다. 내가 없는 세계, 교회 없는 세계, 주님 없는 세계, 국가 없는 세계, 가정이 없는 세계 어느 것이 가장 괴롭습니까? 이것 수능 나옵니다. 뭐가 가장 괴로운 거에요? 정답은 알고 있지요? 마지막이 정답 아니지요? 중간에 섞어버렸지요. 어느 것이 정답입니까? 주님이 정답이죠. 그럼 여기 하나 더 들어갑니다.


누구를 위하여 주님 없는 세계가 견디기 힘듭니까? 누구를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주님 없는 세계가 견디기 힘듭니까? 따라서 이거는 2020년도 수능 과학과정 20번 문제와 동일한 거에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됩니다. 질문을 바꿔야 돼요. 질문이 뭐냐? 무엇이 없는 것이 가장 괴롭습니까? 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고 질문을 무엇이 가장 즐겁습니까? 무엇이 가장 즐겁습니까? 정답이 너무 많아요. 1번 2번 4번 5번이 정답이에요.


왜냐? 주님은 삭제되지 않으면 주님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러면 집에 가서 불 질를까요? 아니요. 불 질르지 마시고 너무 성급하고요 좀 기다려봐요. 그대로 살리면서 주님을 주님 되게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살리면서. 다 살리면서. 어떻게 살리느냐? 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3번과 연관시키는 거에요. 주님을 위해서 내가 있던 없던 나는 즐겁고 감사해야 된다. 주님을 위해서 교회 있던 없던 감사해야 되고.


왜? 주님만 있으면 되니까. 주님을 위해서 국가가 있던 없던 감사해야 되고 주님이 있던 없던 가정은 주님을 위해서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주 참 섭섭한 말씀을 하신 거에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천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장차 100배나 받는다고 이야기했어요. 누가복음에서. 마태복음에서는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4번은 5번보다 약하다. 나를 위해서 가정을 버린다 할지라도 나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방금 이 말씀을요 제가 여러분께 드린 질문이 아니고 주님이 여러분에게 먼저 선빵 날리듯이 질문을 던졌다고 보세요. 우리는 반항하는 베드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우리는 평소에 우리 자신을 따로이 목표를 가지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충실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첫째 시간을 끝내면서 이 질문으로 마감하겠습니다. 어떤 질문이냐 하면은 1이냐 2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1. 나를 숨겨야 할까요? 2. 나를 없애야 할까요? 어느 쪽입니까? 주께서 나를 없애지요. 십자가 지라고 했잖아요. 나를 없애는 거에요. 네 목표 내가 대신하겠다고 주께서 오셨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말씀 들으면 없앨 생각 안하고 뭐합니까? 지하로 도망치고 숨을 생각해요. 그것이 그 길이 뭐냐? 바로 제자들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사랑은 사랑이 지나가면 생기는 거에요. 베드로가 주님을 배신하고 난 뒤에 비로소 베드로는 사랑이 생긴 거에요. 주님이 날 사랑했다는 거에요. 전에는 뭐냐? 내가 주님을 사랑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주께서는 십자가로 그게 얼마나 기만적이고 어리석고 거짓인 것을 십자가로 와서 보여주니까 제가 사랑한 게 아니고 주께서 저를 사랑했다는 그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길 바라면서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9장 31절 (예수 이야기)211221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을 요약해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성도는 본인이 사라진 목표를 통해서 주님 세계로 들어간다. 주께서 물론 거듭 유도해서 들어가지요. 주님 세계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나만을 위한 목표라는 것이 이게 가정이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민족이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교회 부흥이 되었든 어떤 것이 됐든 그런 다 부질없는 소리가 돼요. 그거는 나의 욕심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나의 목표가 아니에요. 그래야 나를 숨기는 것이 아니고 나를 숨기지 말고 끄집어내서 잃어버리는 순간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목표니까 나는 무엇 무엇 ‘되고 싶다’가 아니라 나는 무엇이 ‘되어진다’가 돼요.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 하면 이거는 고립적 존재에요. 나 혼자 사는 것. 그냥 하나님 도움 받아서 결과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 내가 되고 싶다. 되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이 되어지는 거에요. ‘되어진다’.


이걸 반겨야 됩니다. 감수해야 되고 억지가 아니라 기쁘게 반겨야 돼요. 그럼 나는 무엇이 되어지느냐? 여기에 대해서 첫 번째 두 번째 오늘 문제 너무 많이 던진다. 첫 번째 두 번째 있는데요. 1번 나는 죽게 된다. 2번은 나는 십자가에 달린다. 몇 번이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나는 십자가에 달리도록 되어 있지 그냥 죽게 되어있는 게 아니에요. 죽는 것은 뭐 백신 맞고 죽고 차에 치여 죽고 연탄가스 마셔서 죽고 죽는 것은 누구나 태어나면 다 죽어요. 죽을 때 그냥 죽으면 안 되고 십자가에 달린 채 죽어야 돼요. 십자가에 달린 채. 십자가에 달린 채 죽으면 그냥 죽으면 멀쩡한 내가 죽지만 때가 돼서 죽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는 예수님과 연계되어야 됩니다. 나는 예수님을 핍박했다와 연계해서 죽어야 이게 십자가에 달린 죽음이 돼요.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너는 나를 핍박했다는 말은 어떤 뜻이냐 하면은 나를 핍박할지라도 내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네가 열심히 예수님을 모독하고 핍박한다고 해서 네가 나를 핍박했으니까 너는 지옥가거라 가 자동적으로 이렇게 연결이 안 되게 되어있다 이 말이죠. 그게 고려하지 않아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했기 때문에 구원에서 탈락 같은 그런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구원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구원은 주님 자신의 목표에요. 우리의 기대가 아닙니다. 인간은 어느 정도냐 하면은 인간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후회할 자격도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 것이기 때문에 마치 자기 것인 냥 자기 인생에 대해서 후회하면 안돼요. 나 이렇게 살은 것을 나 후회해.


이상하게 겸손하게 보이는데 이상하게 저한테는 교만하게 들리는. 뭘 후회한단 말이야. 그럼 후회할 짓을 안 하면 그 인생은 뭐 주님 앞에 괜찮다는 평가를 받을 거 같아요? 후회할 것이 없어서 구원받는 것입니까? 아니잖아요. 후회한다는 말은 아직도 내 인생을 자기가 꼭 쥐고 있겠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 뜻이거든요.


내가 나를 쥔다는 것은 A가 A★를 쥐고 있는 거에요. 내가 원하는 내 변화를 내가 시도하겠다고 지금 우기고 있는 고집하고 있는 겁니다. 여보 예수 믿으세요 하면 듣는 남편은 그러면 예수 믿으면 지금의 나와 당신 말대로 천국 가는 나의 변화를 내가 시도할 수 있다 이 말이지? 고개 끄덕이면서 믿지요.


그러니까 예수 믿으라는 아내가 지금 나쁜 짓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이왕 마지막인데 아내 소원이나 들어주자. 이런 아내에 대한 배려, 아내를 너무 괴롭혀서 아내에 대한 미안함. 자기가 뭐 경상도 남자입니까? 그냥 사랑하면 될 건데 꼭 말로 해야 되냐? 이런 식으로요. 그냥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아니야 쑥스러워서 못해. 내가 행동으로 보여줄게 맨날 이런다고요.


사랑한고 이야기해봐. 아니야 나 안 해. 그냥 행동으로 너한테 잘해줄게. 왜 말을 못해. 너는 내 사람이라고 왜 말을 못해요. 그것은 상대방을 어떻게 하든 내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내가 끝까지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겠다는 그 악마적 고집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첫 째 시간에 약간 언급했지만 그 대목을 다시 한번 중요한 대목이라서 다시 한번 두 번째 시간 하면서 그걸 한번 거론해보겠습니다.


내 이야기가 예수님의 이야기로 전환되었는가? 전환되었는가? 여기서 뭐가 빠지라고 했지요?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빠지라고 했지요. 내 이야기가 예수님의 이야기가 될려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고립적으로 살고 싶은 나,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싶은 나에 주님이 무단 침입을 해줘야 돼요. 무단 침입입니다. 우리의 허락 없습니다.


그냥 쳐들어와서 나의 모든 알갱이를 다 삼켜버려야 돼요. 덮쳐야 돼요. 주님의 이야기가 될려면 다시 말해서 주님에 관한 이야기가 안 될려면 주님이 쳐들어와야 돼요. 주님에 관한 이야기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바로 신앙이고 간증이 돼요. 이것은 신앙적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올 때 거기서 나온 이야기는 두 가지가 갈라져 나와요. 어떻게? 이름을 크게 쓰겠습니다. 두 종류의 인간으로 갈라져 나옵니다. 첫 째 인간은 뭐냐? 모든 아담에 속한 인간이에요. 아담에 속한 인간입니다. 이것도 성경에서 다 이야기한 거에요 주님께서. 기도할 때 중언부언 기도하는 것. 이게 여러분 바리새인 보고만 이야기한 게 아니에요. 금식할 때 금식하는 거 티내는 것,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알게 하는 것, 마음속으로 간음하는 것,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것, 전부 다 아담에 속한 인간들이 바로 그 일을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언급한 거에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은 주님이 바른 인간이다. 이 두 가지가 같이 동반해서 나와야 이게 주님의 이야기입니다.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류는 율법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죄인이 되고요. 예수님이 하는 이것이 바로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야기는 죄인과 의인 두 개 다 나와야 되고 말하고 있는 나는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은 1번에 속해 있어요. 1번에 속한 나. 그래서 1번에 속했기 때문에 1번에 속한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A에서 뭐를 원하느냐 하면은 A★를 원하는 거에요. 1번에서 2번 어떻게 건너가는가? 여기에다가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은 말씀이 들어와버려요.


말씀이 들어가버리면 A에서 A★가 되는 여기에 이것이 방해받습니다. 이 이야기를 2번에서 해주는 거에요. 합쳐서 이게 뭐냐? 예수님의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소위 신학자들하고 목사라는 인간들은 뭐냐 하면은 1번을 이야기를 안 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2번 이야기해요. 예수님의 제자는 몇 명? 12명. 참 잘했어요. 이런 거.


성경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은 이렇게 했습니다. 계속해서 성경 이야기하는 거에요. 뭐가 빠졌어요? 그 성경 이야기해서 나의 얻어야 될 본래 목적을 달성하는 나는 여지없이 작살났다는 이야기를 빼먹고 있는 거에요. 나는 성경 말씀 이용해가지고 내가 천국 가는 star가 되고 싶어 했던 내 본심을 빼버리면 그거는 예수님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에 관해서 자기가 들은 지식 이야기하고 있는 거에요.


이거 1번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기의지입니다. ‘자기의지’. 영어에서 의지로 표현한 단어가 will이거든요. ‘will’. 그런데 will의 과거가 would거든요. ‘would’. will은 강한 자기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사람들은 will을 잘 안 써요. will 대신에 will의 과거형 would를 많이 써요. 뭐 해주겠습니까? would 할 때 상대방을 배려한다면 will은 강한 자기의지를 드러낸다면 would는 뭐냐 하면은 확률상 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고 확률에 강압, 압력을 많이 축소시켜서 would하는 거에요. Would you like some coffee?


상대방의 선택을 약간은 허용하는 게 would고 will은 강하게 이거 안하면 나 당신하고 결별이야. 강하게 하는 것. 상대방의 허락의 영역을 약간 허락하는 것을 would로 표시한다고요. 그러나 뭘 하던 간에 이것은 인간의 자격의지를 말하잖아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이 잘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일단은 제가 언급해볼게요. 일단 언급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되어 있어요. 중요한 핵심에 도달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과 인간 대 주님의 만남의 차이를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둘 다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자, 베드로가 또는 제자들이 예수를 볼 때 주님으로 봤겠습니까?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났겠습니까? 제자들이 십자가 지기 전에,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 거에요. 이걸 누가 언급하느냐? 예수님이 언급합니다. 뭐라고 되어있어요?


누가복음 9장 18절에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무리가 인간이죠. 무리가 보기에 예수님을 인간으로 보는 거에요. 이 세상의 모든 출발점은 뭐냐 하면은 인간 대 인간의 출발점이 되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의 출발점을 거치지 않고 인간 대 주님으로 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제가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던가요? 두 번째 시간 처음에 뭐라고 했던가요? 자신의 실패를 자기의 실패를 목표가 없어지지 아니하면 주님께 나아가는 방법이 없다. 주님께 나간다는 말은 자기의 목표가 상실되는 거죠. 자기의 목표를 상실하면 주님 만날 수 있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끌어내게 되면 갈수록 점점 더 자기 목표가 이게 시답지 않은 거고 사소한 거고 의미 없는 것을 느끼면서 주님과 가까이 된다 이 말입니다.


자기 목표가 사라지면서 주님 속으로 들어간다. 아까 그런 말했지요? 이제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어렵게 해나가봅시다. 어렵게. 어렵게 할 수밖에 없어요. 인간 대 인간의 관계, 인간 대 주님의 관계는 바로 가는 법은 없다고 했고 먼저 뭐부터 시작합니까? 인간 대 인간의 방법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제자들이 그랬어요. 제자들이. 제자들이 그랬다고요.


일부러 어렵게 할려고 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인간세계 속에 들어오다 보니까 사람은 주님을 뭘로 봤습니까? 그냥 평범한 인간으로 본거에요. 그래서 헤롯대왕이 헤롯왕이 예수님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군대를 보내었고 거기에 천사가 개입할 줄은 몰랐지요. 심지어 동방박사 죽이는 것도 헤롯이 실패했지요. 동방박사가 알아서 빠졌습니까? 아니면 누가 와서 알려줬습니까? 천사가 와서 다른 길로 가라고 했지요.


참 그 이야기 들으면 듣는 우리는 참 섭섭해요. 왜 섭섭하느냐 하면은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살려주지 말고 아예 헤롯을 죽이면 안 됩니까? 그런 능력 있잖아요. 왜 헤롯 대왕은 안 죽이고 뭐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 아슬아슬하게 폭력을 가하는 자를 아예 죽이면 되는데 그렇지 않고 폭력은 폭력대로 그 씬을 살리고 그들에게 손에 매이지 않는 다른 또 촬영 장면을 씬을 또 따로 찍는다고요. 왜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그것은 주님은 우리 목표가 아니고 우리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주님은 자기 편이지 우리 편이 아니에요. 우리가 감독질하고 하면 안돼요. 우리는 하나의 출연자지 감독이 아닙니다. 그리고 감독의 목표는 우리가 구원받는데 있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를 어떤 식으로 우리를 예수님 자신을 위한 존재로 전환시키느냐 그게 핵심이지 구원받고 싶은 내가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아싸!” 이거는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어서 천당 가는 것도 이거는 A★에요. 내가 되고 싶은 거에요. 교회 가서 성경 보면서 은근히 갑자기 자극받아서 그런 목표가 생기는 겁니다. 아 이런 수가 있네. 천국 가는 수가 있네. 몰랐잖아. 나 예수 믿을거야. 이거 뭡니까? 그거는 자기 목표가 안 사라졌잖아요. 내가 지옥 안 가고 천국 가겠다는 그 목표마저도 주님을 만나면 그것 때문에 네가 나를 핍박한 거야 라는 한소리를 듣게 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네가 너의 목표를 안 살리기 때문에 늘 너는 나한테 삐걱삐걱 살아. 그러니까 너는 구원이라는 집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감사가 없어요. 감사가. 자기 노리는 것도 없는데 무슨 감사가 있어요. 자기 노리는 것만 있을 뿐이죠. 감사가 없어요. 고맙습니다 할 건덕지가 없어요. 자기 천당 갈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헌금하고 얼마나 수고했는데. 교회 청소도 다 했는데. 감사는 나한테 감사해야지. 왜 주님한테 감사하느냐. 이렇게 나올게 뻔하단 말이죠.


차마 그 말은 못하고 주님께 감사합니다, 예예예. 십일조 다 했잖아요.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그러니까 아무리 천하의 주님이라도 내가 보람 있게 즐겁게 한 나의 목표 나의 가치는 손대지 말란 말입니다 이런 식이에요. 나의 가치, 우리 가정의 소중함을 손대면 나 미워할거야!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알기 쉽게 말해서 no, yes가 우리한테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안됩니다, 됩니다를 우리한테 요구한 적이 없어요. 아멘, 진실로 그러합니다 라는 아멘은 사랑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결과입니다. 결과로 나와요. 그래서 아멘 하는 것도 내 뜻이 아니고 성령께서 오셔야 아멘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성령이라는 외부성이 와야 아멘이라는 거에요. 그냥 아멘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의 주술 외우는 거에요. 아멘.


어떤 목사가 설교하는데 옛날에 대구의 지방교회에 거기는 완전히 설교자가 민중들에게 심리적으로 체면을 걸어놨어요.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믿음이 있을려면 내 말이 주의 말씀이라면 말 끝나자마자 아멘으로 화답해야 됩니다 이렇게 요구를 한 거에요. 그러니까 그 집회는 시끄러워요. 그러므로 아멘! 무슨 말했는데? 말 한마디 끝나자마자 아멘 해가지고 교인들이 스스로 자기한테 흥분을 스스로 유도하는 거에요. 자기기만이죠.


목사님 보세요. 아멘으로 화답했으니까 구원 받는거 맞지요? 자꾸 목사한테 인정받을려고 하는 거에요. 목사는 그 심리를 노려가지고 말씀에 아멘 하시면 여러분들 속에 성령께서 그렇게 아멘 하시기 때문에 가는 거 맞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둘 다 앉아서 고스톱 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 시끄러워. 이현래 목사. 워치만 니에서 갈라진 위트니스 파에 속한 사람들. 아 참. 어디 진짜 휘발유 있으면 휘발유 몇 통 가져가가지고... 주께서 지옥을 왜 불로 만드신 이유를 알겠어요. 주님의 분노.


본인 구원에 본인이 참여할 것을 계속 본인들이 개발해내요. 그래야 마음이 편하거든요. 세리와 창기 생활해서는 영 마음이 안 편한 거에요. 본인이 뭔가 A에서 A★로 발전할 기미, 그러한 증거 성화된 증거, 인격성이 나아졌다는 증거, 그 증거가 있어야 본인이 마음이 안심이 돼요. 이건 누굴 믿느냐? 본인이 본인을 믿는 거에요 그거는. 본인이 본인을. 그러니까 본인이 실망스러우면 본인한테 후회를 하는 거에요.


드라마에 보면 남편이 사이코패스 같은 남편이 가끔 나와요. 그런데 그 사이코패스 같은 남편한테 늘 허리띠로 진짜 모욕적이죠. 허리띠로 얻어맞는 그 부인도 같이 사이코패스가 돼요. 드라마에 보면.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나 재벌 3세인데 네가 사람들 앞에서 내가 시키지도 않은 말을 네가 그 현장에서 그 파티장에서 했잖아. 내가 많이 참았다. 오늘 좀 맞자 해가지고 밀실에다가 저택에는 그런 게 있답니다. 밀실이 있어요.


이렇게 눌러서 들어가는 거기 들어가가지고 팰 때 때리는 남편도 사이코패스지만 얻어맞으면서 잘못했어요 이런 거 있잖아요. 그 여자도 환자에요 내가 보기에는. 여자도 환자에요. 하도 맞다보니까 이게 가스라이팅인지 길들여졌는지 자기가 얻어맞는 그걸 통해서 자기 앞에 천사표가 막 붙는 거 같아요. 부채표가 아닌 것은 활명수가 아니지요. 천사표가 없는 것은 성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얻어맞는 핍박받는 천사로서 자기만족에 빠지는 거에요. 그 여인이. 안 때려주면 본인이 뭔가 허전해요. 한국교회가 완전 사이코패스 다 만들어놨어요. 그걸 보게 되면. 간발의 차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간발의 차가. 그 작은 차이가 이제 복음을 알면 그런 것을 뽑아낼 줄 알아야 돼요. 저게 사이코패스인지. 안 그러면 진짜 프리패스인지. 그냥 막 천당 가는 사람인지 그걸 구분할 줄 알아야 돼요.


구분하는 방법은 뭐냐? 본인 이야기가 나오면 본인이 얻어맞고 순교했다 나오면 안 되고 예수님이 이야기가 나와야 돼요.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은 예수님이 해석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와야 돼요. 예수님이 해석한 예수님의 말씀. 너는 나를 핍박했고 예수 믿는 너는 나를 핍박했고 사울아 너는 나를 핍박했고 핍박하는 너를 내가 건졌다. 그 이야기가 나와야지요.


그럼 핍박의 근거가 뭡니까? 모든 말씀이 핍박의 근거에요. 왜?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는 내 목표를 이룰려고 했으니까. 이제 감이 오지요? 시키는대로 다 한 게 주님이 시키는대로 다 한 게 그게 주님에 대한 핍박이 될 줄이야 사울도 몰랐고 오늘날 인간들도 모르고 있어요 그게.


문제 다시 봅시다. 주께서 우리를 그냥 죽입니까? 십자가에 죽게 하십니까? 성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지요. 그런데 성도는 그냥 죽을 수 있는데 내가 나를 자살할 수 있고 그냥 순교할 수 있지만 십자가에 죽는 것은 인간의 몫이 아닙니다. 그거는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와야 돼요. 성령이 와가지고 피자먹는 거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이에요. 좀 너무 심했어요? 피자먹고 옆에 사이다 한 잔 먹는 것.


감사라는 것은 내가 패배하고 내 목표가 무산되고 내가 더는 손댈 수 없다는 그 짧은 순간에 감사가 나오는 겁니다. 이거는 내 신상에 아무것도 없어도 나는 망했다를 즐거이 말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망했다. 진짜 재산 날라가고 몸 아프고 그거 말고 그냥 멀쩡하게 가만 있어도 나는 내가 하나님 보기에 망한 존재라는 것을 불현듯 확 올라와서 깨닫게 될 때 그게 바로 감사에요. 그게 기분 좋은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무게감이 완전히 제로가 됐기 때문에. 그동안 그 망하는 것을 지금 이 순간 누가 만들었어요? 죽어가는 남편 옆에 누가 간호케 했습니까? 전에는 누가 했어요? 내가 했어요. 신앙적으로. 그게 바로 삐! 그게 망한 거에요. 주께서 나로 하여금 같이 망한 자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옆에 간호하게 하신 거에요. 둘 다 똑같애.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두 종류의 인간을 말할 수 있어야 돼요. 첫째는 뭡니까? 아담에 속한 자, 누굽니까? 나잖아요 나. 나와 너의 관계. 아까 했죠. 인간은 뭐로 시작한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에요. 인간 대 인간의 만남. 그림으로 그리면 내 안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긴 창이 나오고 또는 가시, 창 나오고 너도 긴 가시가 나오지요.


이 이야기는 둘 다 배 내밀어서 둘 다 찔리는 거에요. 네 말에 내가 상처받고 내 말에 네가 상처받고. 부부싸움이란 것은 처음에는 여보 물을 먹고 난 뒤에 물그릇을 이렇게 다시 똑바로 놓으면 안 되느냐 이렇게 점잖게 시작하다가 좀 이렇게 심하게 되면 시댁 이야기 나오고 친정집 이야기 나오고 둘이 대판 싸우는 거에요. 이게 전부 다 속에 있던 가시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 가시 이야기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사사기에 나와요.


성경 좀 본 사람은 벌써 감 잡을 거에요. 사사기 9장에 7절의 이야기입니다. “요담이 그리심 산 꼭대기로 가서 서서 그의 목소리를 높여 그들에게 외쳐 이르되” 아 여기서 이제 감동이 다르지요. 그리심 산에 올라가 본 사람하고 안 올라가본 사람하고 다르지요. 그 광경이 딱 떠오르는데. 내가 선 자리에 옛날 요담이 섰던 자리. 아래 밑에 세겜 마을이 있어요. 세겜 마을까지 가봤으니까요 저와 우리 가족은.


8절에 “하루는 나무들이 나가서 기름을 부어 자신들 위에 왕으로 삼으려 하여 감람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감람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게 있는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한다고 왕을 안 해요. 그 다음에 무화과나무 보고 하니까 무화과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하니까 안합니다. 그리고 포도나무 하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짜야 해서 안한다는 거에요.


결국 뭐냐? 결국 왕이라고 하겠다고 목표를 가지고 왕의 관심을 가진 자는 어떤 자만 관심이 있는가? 14절 15절에 무슨 나무 나옵니까? 가시나무에요. 가시나무입니다. 자기 상처받은 거 외에는 아무것도 내놓을게 없는 거에요. 전혀 유익이 없는 것들이 결국은 서로가 선악과 따먹고 신이 됐기 때문에 나는 내 선에서 왕이야 라고 우기게 돼있는 거에요. 그게 12제자에요. 그게 예수님과 동행한 자들입니다.


대구강의에서 인간의 심리 이것만 알면 인간의 심보 90%는 먹고 들어간다고 했지요. 첫 번째 뭡니까. 남에게 지기 싫다. 이게 자기 의 잖아요. ‘자기 의’. 돈으로 지고 학력으로 지고 권력으로 지고 아파트 평수에 지지만 나의 의에 대해서는 남한테 질 마음이 전혀 없다. 나의 의로움과 나의 정당함.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지기 싫다.


네가 뭐 신부한테 목사한테 가가지고 너의 죄를 회개했다고? 나는 이번 달만 해도 5번 회개했어. 이게 뭐가 돼요? 자기 의가 되는 거에요. 너는 세 번 밖에 회개 안했지. 나는 5번 회개했어. 두 권사님이 요새 유행하는 성경쓰기. 너 진도 어디까지 나갔어? 나 사사기. 나는 이사야. 앗싸 내가 이겼다. 이게 말은 안 해서 그렇지 모든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은요 비교의 만남이에요. 경쟁의 만남, 라이벌 관계에요. 라이벌 관계.


제가 우리 가정 이야기를 했는데 이게 예수님의 이야기가 돼야 되는데 내 가정 이야기가 아니라. 사돈이 명절 됐다고 또 사돈 생일이라고 뭐 보내줘요. 받고 난 뒤에 가만있을 수 없어가지고 계산 딱딱 해가지고 거기에 맞춰서 또 택배를 보내줬습니다.


보내주니까 저 쪽에서 뭐 이거 안 보내도 될 걸 보냈다고 또 다른 걸 보내줘요. 이게 뭐 하는 시츄에이션이야. 뭐냐 이 말이죠. 한쪽이 그냥 자기 의만 포기하면 되는데. 한쪽이 자기 목표만 포기하면 되는데 둘 다 지금 기 안 죽겠다고. 이게 MBC 로고송입니다. 만나면 좋은 친구. MBC 문화방송. 모든 인간의 만남은 전부 다 경쟁이고 자기 의입니다.


또 제가 들었던 사람은 자기 며느리한테 생일을 해주는데 며느리가 시어머니 생일 하는 것을 보고 그걸 곱빼기로 며느리한테 해줘버려요. 이래도 네가 나 사랑 안하느냐 두고 보자. 내가 보기에 그거는요 며느리한테 해주는 게 아니고요 며느리에 대한 물질적 폭력이에요. 내가 보기에는. 제발 좀 기 좀 죽어라!! 이 말 아닙니까. 이 무슨 관계가 이런 관계에요. 며느리 시어머니 관계가. 이게 모든 관계가 다 그래요. 모든 관계가.


의사와 환자의 관계도 마찬가지고. 돈 치르고 카드 긁고 나가면 밖에까지 나와가지고 건강하세요. 이게 뭐에요. 더 이상 나한테 컴플레인 걸지 않게 사전 조치를 하는 겁니다. 인간의 심보는 모든 행동과 태도는 무엇이 바탕 되었느냐. 어떤 경우라도 나는 고립적으로 산다. 나는 고립적으로 산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산다.


그래서 이러한 여자나 이러한 남자들이 뭘 한다 합니까. 20대 30대 지나면 뭘 해요? 결혼을 한다 하죠.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에요. 결혼이라는 게. 둘 다 가시 이렇게 창 꽂고 무슨 결혼이 되겠습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은 나는 나를 고립적으로 사는데 이 고립적인 나를 보호해 주오. 결혼해 주오 랑 비슷해. 나를 보호해달라고 이 여자는 남자를 만나는 거에요.


나는 내 맘대로 할 테니까 내 맘대로 하는 나를 잘 지켜주고 그게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나는 당신과 나와 결혼해 듀오. 결혼해 달라는 거에요. 그럼 남자는? 나는 내 맘대로 사는데 그걸 뒤에서 다 서포트할 수 있도록 당신은 나의 아내가 될 수 있습니까? 앞에는 물론 생략하고 앞에는 들통 나면 안 되니까 안하지요. 그냥 사랑해요, 이런 말로 하지만 나는 고립적이에요. 나는 나 밖에 몰라요.


그걸 주변에 보호해주면 나 당신에게 합당한 어떤 대우라든지 그런 용돈 줄 용의가 있다 이 말이잖아요. 젊은 사람들이 연애하면서 이걸 실험을 한번 해봐요. 해보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게 잘 돼요? 안돼요? 이게 무슨 보살? 서장훈 찾아가는 보살. 무엇이든 물어보살 이라든지 애로부부라든지 상담하는 거 있잖아요. 안 그러면 사자머리한테 찾아가가지고. 인생경험.


그 사자머리한테 찾아가가지고 자기 인생관 어떤 괴로운 거 이야기하면 사자머리 그 사람 정말 돈 많이 벌지만 딱 한 개에요. 나는 너한테 질 수 없다. 이게 바탕이 되어서 모든 게 나오는 거에요. 이 것뿐이에요 이것. 심리상담 이 것뿐입니다. 나는 어떤 경우라도 너한테 지고는 못 산다. 이거 하나뿐이라니까요 이거.


그러니까 이게 안 되니까 뭐하느냐. 개나 고양이 키우는 거에요. 나의 혼자 사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개와 고양이가 아주 적절해요. 땡이에요. 왜? 살아만 주면 내 고립에 지장을 안주잖아요. 내 고립에. 지장을 주면 갖다버리면 되니까. 그래서 인간이 오늘날 현대인들이 제일 힘든 것은 뭐냐? 사람과의 만남이에요. 사람과의 만남이 제일 힘들어요 그게.


나 혼자 내 마음대로 하는데 왜 그걸 네가 안 들어주냐. 이걸 누구 탓이냐 남 탓으로 돌린다고요. 남 탓으로. 너한테 월급 다 주고 너한테 아파트 사줬는데 왜 너는 내가 하고 싶은 거 왜 못하게 하느냐 이렇게 되는 거에요. 오늘 아침에도 어떤 상담프로에 보니까 남편하고 아내하고 대판으로 카메라 있는데도 싸워요.


왜 싸우느냐 하면은 여자가 장화를 신는데 종아리가 굵어가지고 장화가 안 들어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내가 하는 말이 대뜸 종아리 줄이는 성형하러 가겠다는 거에요. 그걸 남편이 말린다고요. 그 싸움이에요. 종아리 줄이는 성형. 남편은 장화를 버려라 이렇게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나는 장화 없이는 못 살겠다는 거에요. 그 다음 말은 남편 쪽에서 뭐라고 나오겠습니까? 안 질려고 하면. 단답형 나오겠지요. 너는 장화가 좋냐? 내가 좋으냐? 뻔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여자 쪽에서 가만있지 않습니다. 뭐라고 나옵니까? 장화를 좋아하는 내가 좋아? 너가 좋아? 또 이렇게 나온다고요.


인간의 모든 말은 준비되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조금이라도 나의 가치를 나의 의로움을 지키는 방향으로 말들이 터지게 되어있어요. 나오게 되어있다고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만약에 주님이라면 아담에 속한 이 인간, 이 마귀적인 인간 어떻게 뜯어고치겠습니까? 주님 같으면 어떻게 고치겠어요? 잠깐 7.5초 동안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고치겠습니까?


가만 놔두지요. 가만 놔둬요. 가만 놔두고 질문을 던져요. 질문을 던지면 답변이 뭐라고 나오겠습니까? 그대로 마귀적이고 아담적인 답변이 그대로 나오겠지요. 주님께서도 됐어 됐어 알았어 알았어. 알았어. 해놓고 일은 누가 합니까? 일은 혼자서 해버려요. 혼자서 일하고 그 효과는 자기가 질문을 던진 그들에게 효과가 가도록 주께서 조치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 하시는 일에 주님만을 위한 일이 있겠어요? 아니면 자기가 질문을 던진 사람이 포함될 수 있는 일이 또 있겠습니까? 어느 쪽이겠습니까? 예수님 혼자만 구원받는 일이 되겠어요? 아니면 자기가 질문을 던진 그 대상자들도 자신의 이루었던 성과에 포함되는 일도 만들어가겠지요. 그게 몇 절이냐 하면은 그게 27절입니다.


27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아멘. 지금 이 이야기는 제자들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야기에요.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의 계획을 전혀 모릅니다.


왜? 자기 계획에 미쳐가지고 내가 예수님 믿고 있으면 천당 간다 그 계획에 미쳐가지고 자기가 배제되면서 배제되고 난 뒤에 다시 주님 찾아오는 식으로 그것도 본인이 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정말 never 아무것도 없는데 주님 혼자 한 성과를 그냥 하늘에서 폭설이 내리듯이요, 덮치는 거에요. 여러분 폭설이 내릴 때에 여기서 물 뿌려서 폭설 내립니까?


대구는 눈이 거의 안 왔지만 뉴스 보니까 서울에 눈 많이 왔다면서요. 서울에 눈 올 때 밤에 나가봤어요? 전부 다 추워가지고 특히 연세 많은 분들은 미끄러지면 큰일나잖아요. 눈 구경도 20대 30대 문제지요. 눈 지가 만든 것도 아닌데 애인한테 눈 자기가 만든 것처럼 눈 세상 자기가 만든 것처럼 폼 잡을려고 홍대 앞에 명동에 나가잖아요.


눈 뭉쳐가지고 맞아라~ 안서면 때린다 이렇게 눈 장난하지요. 아름다운 낭만. 눈 오는 것도 우리가 만드는 시츄에이션 아닙니다. 무대장치 아니에요. 미장센 아니에요. 주께서 무대장치를 미리 보여줬습니다. 그것이 29절에 나오지요.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절에 그때 누가 등장합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지요.


자, 모세와 엘리야는 31절에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모세 엘리야가 예수님하고 이야기 할 때 그 이야기 대화 주제가 있었어요. 주제가 뭘로 되어있죠? 31절에 두 자로 하면 뭡니까? 별세죠. 죽음입니다. 늙어 죽는 것 아니에요. 자살해 죽는 거 아닙니다. 모든 예수님의 죽음이에요. 아버지와 유일하게 관련된 아버지가 인정한 유일한 인간의 죽음이에요.


다른 죽음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죽은 거고 진짜 의미 있는 죽음은 오직 예수님만이 오셔서 이루어야 그 죽음이 있어요. 그 죽음이 뭐냐? 십자가란 말이죠. 자살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 십자가에 들어가야 돼요. 십자가에 들어가면 인간은 무엇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까? 인간은 뭐를 잃어버리며 들어갑니까? 자기 목표를 잃어버리는 거에요.


인간의 자기 목표는 첫째 시간 다시 반복하게 되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의식이 나오게 되어 있고 의식은 무엇을 한다? 어떤 대상, 어떤 사태, 어떤 사실을 끌어 모으게 되는데 이 끌어 모은 것을 뭐라고 합니까? 그걸 현실이라고 하고 그걸 세계, 세상이라고 하잖아요. 인간은 인간이 꿈꾸는 세계 따로 있다고요. 여기에 별세 없어요. 죽음 없습니다. 살아서 이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이 세계를 주님께서 피의 방법은 이 인간세계에서 가짜 인간에 의해서 본인이 별세, 죽임을 당한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완성하는 별세가 되는 겁니다. 이 예수님 별세할 때 베드로 12제자 어디로 갔습니까? 도망쳤지요. 자기를 없앤 게 아니고 자기를 숨겨버렸어요. 이게 오늘날 우리 모습하고 너무나 똑같은 거에요.


주님 이야기하라고 하니까 입을 다물어버리는 거에요. 내가 아는 게 있어야지. 입을 다무는 것도 자기 의 잖아요. 괜히 모르는 소리했다가는 모든 우사를 흠뻑 다 뒤집어쓰니까 성경 말씀이랑 복음이랑 다르네 이렇게 나오면 온갖 비난과 우사를 다 당해버리면 나의 의가 손상이 가지요. 인간은 나의 의가 손상이 가면 누구한테 이길 수가 없어요. 내가 멀쩡해야 남을 이기는 재미가 있다고요.


그러니까 항상 인간이 신경 쓰는 것은 나의 가치, 나의 의미, 나의 의가 손상되지 않고 아무리 가난하고 아무리 몸이 비실 아파도 끝까지 웅크리면서 남아 있는 것은 그래도 나는 경상도야! 나는 나야! 당신 죽기 전에 경상도 남자인 건 아는데 죽기 전에 나 때문에 당신이 고생했다. 사랑한다 이 말 한마디 하고 죽으라 하면 고개 절레절레. 입에 지퍼를 잠그고 나는 경상도야. 우리 집안에서는 남자가 함부로 입 놀리면 안 된다고 배웠어.


집안 핑계대지 말고 본인이 본인의 의를 잃어버리면 본인의 자존심을 잃어버리면 살맛이 안 난다고 평생 악마한테 그렇게 세뇌 받았어요. 선악과 알지? 선과 악을 알지? 그러면 그걸 지켜. 주님은 따먹지 말라고 했어요. 악마는 지켜라는 이야기에요. 네 양심을 지키고 네 도덕을 지키고 하라는 거에요. 놀라운 사실은 도덕은 도덕이 아닌 곳에서 나와요. 몰랐지롱?!


도덕은 도덕이 아닌 곳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지옥에서 만든 게 도덕이에요. 왜냐하면 도덕은 뭐를 제거하느냐? 자신의 쾌락과 충동을 감추고 나온 게 도덕이기 때문에. 자기의 충동과 자기의 성적인 본능, 먹고 싶은 본능, 충동 이런 게 마치 자기한테 없어진 것처럼 위장하면서 기만하면서 나온 게 도덕이라는 겁니다.


어떤 미국에서 나온 만화책 보니까 어릴 때 봤어요. 군목, 사병들에게 모범이 되고 하나님의 성도의 모범이 되었던 군목, 군대 목사가 만화에 나와요. 나오는데 자기는 마음속으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자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이쁜 여자, 못생긴 여자한테는 그 마음도 안 생기니까. 이쁜 여자가 오는 것을 보고 피하다가 맨홀에 빠지고 빠지는 그 만화를 본적이 있어요.


일단 봤잖아요. 일단 봤으면 오늘 배운대로 하면 일단 봤잖아요. 보게 되면 보고 마음에 훅 들면 간음이죠. 간음되면 어디에 손상당합니까? 나의 의, 나의 의가 흠짓이 날 가능성이 많지요. 그러면 내 의를 지키기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의를 지키기 위해서 그걸 하는 방법은 내가 그 여자를 안보는 방법을 하지요. 안보다가 맨홀에 빠져서 죽는 수가 있어요.


순교입니까? 아니지요. 순교란 내가 내 목표가 사라지는 십자가에 죽어야 자기 십자가에 죽어야 내가 죄인으로 죽을만해서 죽어야 그게 주와 함께 죽는 순교지 자기 의 지키다가 죽으면 순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은 제자들이 자기가 해내지를 못해요. 다만 미장센, 무대장치는 미리 보여줍니다. 그런데 선배들이 누가 있어요? 엘리야와 누굽니까?


모세, 엘리야와 모세는 자기 목표가 없어요. 그저 주님의 목표만 바라봅니다. 그저 주님의 목표를 두 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 본문에서 31절에서. “별세”. 이거는 엘리야가 할 수 없고 모세도 못하고 저와 여러분도 못합니다. 이거는 성령이 와서 우리를 그렇게 환경을 그렇게 만들어줘야 돼요. 주께서 죽이게 했습니다 라는 고백이 나오도록 그게 감사하도록 내가 할 수 없는 십자가 죽음을 이렇게 이루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라는 그것.


그 환경은 지금 여러분들이 조작해내고 만들어낼 필요가 없어요.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이 있는 처해 있는 상황이 이게 주의 감사로 나온다면 그 주님이 누구냐 하면은 십자가 지신 주님에 대한 감사이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나오는 감사입니다. 주의 목표로 인한 감사. 주님의 다 이루심에 대한 감사. 그것이 바로 우리가 못했던 십자가에 우리가 합류한 증거가 되는 거에요.


변화 산 이게 오늘 현재 우리가 사는 21세기 우리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라고 보면 돼요. 변화 산에 영광스럽다 아니다 생각하지 마시고 주제, 모티브가 우리 대화의 모티브가 나는 1번 나는 아담에 속해서 개판이다. 2번 그런데 주님께서는 별세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주님의 별세에 아무 한 것도 없이 오늘도 참여시켰다. 3번 그래서 나는 범사에 감사한다. 이게 십자가 안에서 성령 안에서 주님 안에 살아가는 성도의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사도 편지에 나오는 십자가 안에 있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모든 말씀이 주님 자신을 겨냥해서 이뤄진 그 말씀인 것을 저희들 깨닫게 하여 주시고 그 말씀 이루기 위해서 나밖에 모르고 나의 의만 챙기는 우리를 주의 일에 합류하게 해주신 이 은혜를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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