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오지마

아빠와 함께 2021. 12. 20. 19:25

강남-누가복음 9장 3절 (오지마)2112076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9장 1절부터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그렇게 되어있지요.


제자라는 것은 스승 없이는 제자가 없겠지요. 그래서 제자란 제자들이 모여서 스승을 초빙하는 형식이 아니고 스승이 제자를 생산합니다. 스승이 제자를 생산해요. 그러면 생산된 제자는 나 제자다 가 아니라 나의 스승은 누구누구시다 이렇게 돼요. 나의 스승은 누구시다.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나의 존재 가치라고 하는 것은 나 찾지 말라.


나보고 자꾸 묻지마 너는 왜 사느냐 나보고 묻지마 나를 나 되게 하신 다른 분에게 미뤄버리세요. 미루세요. 미뤄버리세요. 악마가 말씀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고요 악마는 나를 공격해요. 나를 공격하게 되면 나는 나를 부정하면 되는데 나를 안 지키면 되는데 이 공격을 받으면 사람이 본능적으로 자기정당화에 자기방어에 나서버려요. 희한하지요. 자기방어.


조금 전까지 주님의 제자 해놓고 만약에 다른 사람이 와서 확 쑤셔버리니까 누구의 제자는 날라가버리고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뭐 나 더 이상 뭐 어쩌라고? 너는 잘났어? 갑자기 너, 나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여기 12제자 할 때 제자의 제일 걸림돌은 뭐냐 하면은 나는 무엇이다 이거에요. 나의 규정성 이것이 제자들의 제일 나쁜 점이에요. 나의 규정성. 내가 나를 규정하는 겁니다.


이럴 필요 없고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나를 규정함으로써 내가 나를 규정한데서 성경과 맞출려고 해요. 성경에 나오는 딱 그 제자가 나야. 성경에 천국 백성이 종려나무가지 나무 흔들며 주님을 반긴다 할 때 그게 바로 나야! 성경 말씀에 바리새인하고 자기하고 일치 안하고요. 가룟 유다 하고 자기 일치하지 않고 꼭 좋은 거 있잖아요. 골라잡은 것, 괜찮은 것.


기드온 이런 거. 여자 같으면 드보라. 드보라는 할라 해도 룻은 또 안 할라해요. 거지꼴 될까봐 싶어서 겁나가지고. 꼭 괜찮은 여호수아. 이름도 김여호수아. 여자이름 같으면 엘리자벳. 마리아. 한나 이런 것. 괜찮은 거 다 골라하고 다윗. 그런데 저는 이름이 시므온은 제가 들어본 적 없어요. 시므온은 두 번씩이나 저주받았기 때문에.


하여튼 괜찮은 것만 하는데 이 점을 누가 알고 있느냐 하면은 마귀가 이미 알고 있어요. 너는 핑계대지 마. 예수 핑계, 하나님 핑계 백날해도 너한테 중요한 것은 너 자신밖에 없잖아. 내가 알아. 너도 알듯이 내가 안다고. 마귀가 우리 자신이 뭐를 사수하고 무슨 형식을 지킬려고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알아요.


그래서 성경에서 누가복음 9장 하는데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 나오니까 야 이거 제자의 소속이 되야 이거는 천국의 어드밴티지가 이익이 수월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해가지고 예수님 제자 되겠다고 대학교 때 공부할 때 자기 전공 다 F 다 맞으면서도 기어이 성경 공부해가지고 간사해가지고 겨우겨우 졸업해가지고 간사 그 다음의 코스는 선교 아닙니까.


허황된 선교 해가지고 아골 골짜기 빈들에도 가옵니다 해가지고 완전히 자발적인 귀향. 자기가 정약용도 아닌데. 자기가 정약용입니까? 왜 자발적 귀향해요. 흑산도 가서 고기나 연구하라고. 정약용이 그랬답니다. 고기나 연구했답니다. 할 게 없어가지고. 자발적으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제자에 억지로 끼워맞출려고 하는 것, 그걸 뭐냐 하면은 그걸 죄라고 하는 거에요.


죄란 ‘나를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 이게 바로 죄입니다. 나를 위해 내가 존재하는 거에요. 이 세상 사람치고 죄인 아닌 사람이 없는 이유 아시겠지요? 어떤 사람이 나는 나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삽니다. 희생하겠습니다 할 때 이게 또 뭐가 문제냐 하면은 이게 나, ‘나’라는 것은 자아와 주체로 나누는데 자아는 뭐냐 하면은 상상 판타지, 판타지의 이상적인 나를 일치시킬 때를 자아라고 하고요 그 일치시키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면서 일치할려고 노력하는 것을 주체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아로 만족하는 것은 대체로 정신병자들이 하는 거에요. 나는 나폴레옹이다. 정신병자 아닙니까? “엄마 나 나폴레옹 될래.” 이건 주체에요. 차이 확 차이나지요? “나 제자다!” 정신병이죠. “제자 될래.” 주체죠. 이걸 정신병이라고 하고 신경증 환자에요. 둘 다 환자에요. 왜? 둘 다 뭡니까?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위해서 내가 나한테 봉사하고 복무하는 것. 모든 복무. 나의 사명은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되는 것이 타고난 나의 사명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악마가 그걸 모를 리가 있어요? 악마가 계속 이야기하는 거에요. 똑바로 하라고. 사람들은 이 두 점을 구분을 못해요. 악마의 주특기는 뭐냐? 참소, 고자질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은 “똑바로 해! 그래가지고 구원받겠어? 그래서 성화되겠어? 그래서 거룩하겠어? 성경에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고 했잖아. 그 수준이 거룩 수준이야?” 이렇게 지적하는 게 악마가 하는 짓이에요.


성경에 히브리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를 하지요. 징계하고 참소하고 주님이 하는 징계하고 악마가 하는 참소하고 구분을 못합니다. 구분을 어떻게 하느냐? 참소는 우리에게 불안을 조성합니다. 계속 결핍을 만들어내고 결핍을 메꿀려고 애를 쓰게 되지요. “아냐 아직도 모자라. 안돼 안돼. 더 해야 돼 더 해야 돼. 기도 시간 늘려야 되고 헌금 더 해야 되고 선교해야 되고 안돼 안돼.” 나를 채찍질하고 나를 때리는 거에요.


이거 주로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은 수도원, 수녀원 이들이 이거 전문가들이에요. 인간이 심리적으로 어떠했을 때는 이렇게 처방전 다 나와 있습니다. 그 처방전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천주교에 나온 고해성사가 처방전 되는 거에요.


사람들 오게 되면 자기는 삐딱하게 앉아가지고 처방전 내려줍니다. 식후에 30분후에 약 하나 잡수세요 하는 것처럼 주기도문 세 번 외우세요. 처방내리는 겁니다. 다음은 그냥 기도하지 마시고 묵주 기도하세요. 여러분 가짜 아니고 진짜입니다.


이거 그냥하지 말고 묵주 기도하게 되면 마음에 평정이 온다는 거에요. 불교에서 이미 이천년 동안 힌두교에서 이미 사천년 동안 써먹었던 거에요. 그냥 기도하지 말고 이걸 돌리는 거에요. 마음의 평정이 인간의 뇌파나 심장파에 정상파로 진정이 되면서 기분이 이렇게 안정을 취하면 이걸 성령 은혜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고해성사하는 방법이에요. 불안함.


주님의 징계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감격입니다. 주님 저도 아들이라고 그래도 저를 때려주시니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 징계가 감격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내가 살아있다고 여겼는데 이게 착각이었어.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이 현장성에 주님이 살아있었지요. 내가 살아있음은 주님의 살아있음의 파생결과, 파생물이에요.


주님이 살아 있어서 나를 살게 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나의 결과물을 쥐지 마시고 나는 안 살아야 되는데 왜 살았지? 주님이 살아계시는구나. 보이지 않는 주님을 드러내는 감격은 바로 악마의 참소 받으면서 어쩔 줄 몰라 불안에 떠는 나를 주님께서 이 자체를 징계해버려요. 네가 아직도 참소나 듣고 있고 이 인간아. 내 아들이야 마귀 아들이야? 구분이 안돼. 좀 맞아야 되겠어. 때려주실 때 이 참소의 불안에서 벗어나는 거에요.


악마는 뭐냐 하면은 네가 만약에 나쁜 짓했기 때문에 네가 한 달 뒤나 일주일 뒤에 너는 큰 벌을 받을 것이다. 그럼 뭐를 상상하느냐 하면은 일주일 뒤에 내가 벌 받는걸 어떤 벌을 받을까? 보니까 일주일 뒤에 애가 시험친다든지 하면 아 이게 사단나는구나. 그렇다면 미리 주여 감사합니다 미리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의 뜻이 아니면 어떻게 제게 미리 예고했겠습니까. 이게 악마고요. 망하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악마고요.


진작에 망해야 되는걸 안 망할려고 했던 이 죄를 용서하옵소서 이렇게 되는 거에요. 남들 보기에 둘 다 미쳤는데 진작에 늘 망해있어야 되는데 안 망할려고 했기 때문에 누가 꼬였다? 악마 일곱 귀신, 일곱 귀신이면 천만다행인데 일곱의 일곱 귀신 490마리가 꼬이는 겁니다. 너 그러면 망한다가 이게 협박용이거든요. 그럼 자기는 안 망해야 된다는 의식을 유도해내는 거에요.


어떤 스토커가 어떤 사람에게 전화를 한다. 되지도 않는 농담거리로 전화를 했을 때 그거는 뭐냐 하면은 스토커니까 반응을 유도해요. 말동무를 삼아가지고 자기의 권태로움과 무료함을 달래는 용도로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화와 문자를 막 보냅니다. 남은 바빠 죽겠는데. 그러면 어지간한 사람은 뭐합니까? 이런 문자 보내지 마세요 저는 바빠요. 당신과 엮기기 싫어요. 이러잖아요.


그걸 원하는 거에요. 그걸. 그러니까 재미있다고 또 보내는 거에요. 또 보내는 겁니다. 스토커까지 강의를 해야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게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어떤 당신을 사랑합니다 뭐 입에 발린 소리를 해도 이거는 나를 위함이고 당신을 위함이다 너를 위함이다 라고 하는 너가, 너를 위함이다 하는 것은 사실은 너의 욕망으로 내가 나의 욕망을 정렬하고자 하는 거에요. 인간은.


인간은 나는 누구냐가 규정되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살아요. 나는 누구냐가 되지 않으면 불안하거든요. 나의 나 다움을 계속 내용물을 재료를 채워넣을려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으로 나를 구조화한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으로 나를 구조화한다. 구조라고 하는 것은 틀에 곽에 딱 채우게 하는 거에요. 나는 이렇다고 앞으로 몇 년간은 밀어붙일거야. 나는 이렇다고 하는 거에요.


그럼 성경을 보면 누가복음 9장이니까 12제자 나왔지요. 12제자 나오니까 12제자, 예수님의 12제자 타인이잖아요. 타인의 그 욕망이 나는 네모다 에서 나는 준비되어 있어요. 나는 뭐다.여기를 괜찮은 걸로 채울려고 하는데 누가복음에 제자가 나오지요. 나는 제자 될래 에서 나는 제자다 할 때까지 뭔가 하나님이 요구하는 성경말씀으로 꽉꽉 채우고 나름대로 나는 실천에 옮겼다고 우기고 싶은 거에요.


이렇게 하게 되면 더 이상 악마의 협박과 공갈에서 덜 시달릴려고 하는 거에요. 이게 악마가 노리는 겁니다. 나를 포기 안했으니까요.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한 12제자를 보든 어떤 생각하든 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복음 9장에 12제자 볼 땐 어떻게 봐야 되느냐? 이건 굉장히 간단해요.


예수님 계시고 12제자니까 암탉 있고 병아리 12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간단해요. 예수님이 방향성을 예수님이 어디로 들어갔습니까? 이스라엘에 오셔서 예수님이 어디로 갑니까? 죽으러 가지요. 그러며 암탉이 죽으러 가면 병아리는 짹짹 죽으러 가면 되는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스승이 가는 곳에 가야 그곳이 천국이에요.


스승은 네가 가라 하와이 해가지고 스승은 하와이 보내버리고 다른데 가면 그거는 스승은 천국 가는데 나머지는 전부 다 엉뚱한 길로 가는 거에요. 실제로 군대에서 논산훈련소 제식훈련 할 때 실제로 그런 일들 일어나요. 식사시간 제식훈련 시간이 12시에 끝나는데 이 교관이 시간을 잘못 봐가지고 11시 59분에 막 훈련시킨 거에요.


군인들 장병들 가지고 앞으로 가! 뒤로 가! 하고 앞으로 가! 척척 가는데 다 시계를 보고 있거든요. 나중에 12시 넘으니까 교관 혼자 앞으로 잘 가고 있고 나머지는 식당으로 가고. 60년대 개그입니다. 군대는 칼 같이 12시에 식당가거든요. 가버리는 겁니다. 말 못하지요. 왜? 시간이 지났으니까. 그 시간 식사시간 되었으니까. 이게 우스운 이야기가 이게 오늘날 현실이라는 사실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주님을 따라가면 되는데 여기 ‘나’가 있잖아요. 나는 그냥 ‘나’가 아니고 판단을 해요. 나한테 이익이 올 것인가 손해가 올 것인가를 머리를 막 돌리는 거에요. 머리를 무지하게 돌리는 겁니다. 생각이 단순하지를 못하고 점점 더 복잡해버리죠.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는 이처럼 불합리가 늘 발생이 돼요.


주께서 제자다 하시면서 주님께서 나 따라 오너라 분명히 따라가는데 분명히 이 제자들이 엉뚱한 길로 간다는 것을 누가 아십니까? 주님이 아시지요. 제자들은 몰랐다. 뭘 몰랐는가. 예수님께서 인도하실 때 예수님의 적도 같이 동반해서 생산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에요. 제자들이. 제자들만 간 줄 알았지 제자들 속에 악마가 거기 섞여서 가룟 유다죠. 악마가 같이 가자라고 할 줄 제자들이 몰랐고요 또 뭐가 몰랐느냐 하면은 제자들의 11명의 의견이 단 하나의 의견보다도 영향력이 적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그래서 이걸 제가 정리해왔어요. 그걸 가지고 오해의 3종 세트. 오해의 3종 세트에요. 첫째 오해1. 사후작용으로 인간은 재해석된다 라는 사실을 인간은 몰랐던 겁니다. 사후작용으로. 인간은 나름대로 판단하잖아요. 이 길이 나한테 영생길이고 천국길일 것이다. 그 판단 주께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단 너는 무슨 의견 뜻이 있던 간에 일단 너는 저질러. 이걸 다른 말로 더 확실한 말로 일단 막 살아.


막 살고 해석은 누가 한다? 일단 저지른 것에 대해서 해석자가 누굽니까? 주님이 거기서 해석하기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가 확정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구원받는 사람은 내가 내 해석에서 내가 잘 관리하고 해석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거에요.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게 아니고 그 죄라는 해석도 주께서는 개무시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생각하는 죄는 죄도 아니에요. 죄 근처도 안 갔어. 이거는 뭐 내가 죄인입니다 하면 봐줄까봐 복잡한 머리 통밥을 굴려요. 특히 큰일 앞두고 애들 수능 앞두고 있을 때라든지 갑자기 안하는 회개가 막 되면서 회개해야 될 것 같애. 교만한 자는 또 물리친다고 해가지고 나는 괜찮은데 애가 성적이 내려갈까 봐 걱정돼. 이런 점들을 계산하면서 막 회개한다고 뭐 난리도 아니지요.


사후작용으로 인간을 해석하시는 주님의 해석이 그 다음에 우리를 가르치는 게 아니고요 우리를 가르친다. 가르쳐서 똑바로 해!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뭘 하느냐 하면은 적용시켜버려요. 일방적으로. 이게 무슨 법칙이냐? 새 언약 법칙입니다. 옛 언약까지는 우리 코앞에 율법을 가져다 대고 네가 지켜라 이렇게 되요. 네가 지켜야 돼. 그런데 새 언약은 아예 우리 안에다가 이걸 삽입시켜버립니다.


그러면 내 안에 나보다 더 중요한 게 들어와버렸어요. 나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주님 보시기에 나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을 주께서는 그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을 아주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리지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감사한지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이건 뭐 돈 주고도 못 깨달아요. 주께서 밟아줘야 깨달아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내 안에 아무것도 아니게 만든 나보다 더 소중한 것을 주께서는 집어넣었기 때문에 주께서 집어넣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계속해서 일임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강의를 요약하게 되면 제자란 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것도 아닌 것을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겁니다.


그러고 난 뒤에 제자들이 해야 될 일은 여기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했지요. 그러니까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식으로 이끄시는데 그 아무것도 아닌 식의 대우를 받고 그런 평가를 세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 제일 아무것도 아니게 평가받는 분이 누구냐? 스승이에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세상 어느 사람한테도 호응 받지 못하고 정말 죽여 제발 눈앞에서 사라져줘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필요치 않은 존재로 되도록 주님께서는 자기 12제자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도중에 12제자 어디 갔습니까? 따라갔습니까? 식당으로 갔습니까? 다 흩어졌어요. 없어요. 없으니까 정말 제자들의 말로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하고 했잖아요.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잖아요. 그러니까 제대로 된 아무것도 아님을 제자들은 몸소 체험케 되었습니다. 제자들을 위해서 박수 한번. 예수님 배신한 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닌 게 다른 사람들은 입만 살아서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러는데 그걸 실습을 시켜줬다는 거에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 보기에 내가 보잘것없어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라 유일하게 예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드러난 사람들은 오직 12제자들 밖에 없어요.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비교해서 부족합니다 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데 그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예수님 앞에서 정말 너희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니니까 무슨 욕심까지 내지 말아야 되느냐 하면은 “저 구원해주세요” 라는 욕심도 그걸 잘라버립니다. 구원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무것도 아니면 입 다물고 있어. 아무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여야지 어디 욕심을 부릴 걸 욕심을 부려야지. 배신 때려놓고 어딜 합류해? 배신할 때는 언제고 어디 가겠다고? 천국 가겠다고?


천국이 어떤 나라인데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올수 없다를 들추어내는 그것이 근거가 될 때 나타나는 게 천국이에요. 아무도 갈 수 없었다가 확실하게 보여주는 기능을 보여주는 그것이 천국이에요. 아무도 갈 수 없다. 그것은 뭐냐? 천국. 아무도 갈 수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천국.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 쪽에서 천국을 가겠다는 것은 전부 다 주님께서 전부 다 밀어내는 방법이에요.


첫째 오해가 뭐라고 했죠? 사후작용. 죽고 난 뒤가 아니라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인간의 해석은 주님이 일방적으로 해석하시고 그것을 가르쳐서 똑바로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적용시킨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나중에 성령이 찾아오니까 유구무언, 할 말이 없는 거에요. 자기가 주님을 버린 것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할 말이 없지요.


주님은 버림받았다를 계속 유지를 해줘야 세상이 나를 버려도 내가 나에 대해서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버린 것은 그게 뭐 중요합니까.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이 더 분명한 내 위치고 내 진 면목이기 때문에. 진짜 내 모습은 세상이 버려도 우리는 자기 자존심 챙기는 거에요. 제가 그 한 때 인용했던 옛날 노래에 무슨 노래냐면 이 노래에요.


나이 연세 많은 분들은 아시지요. 산장의 여인. 모텔 여자 주인 말고요. 산장의 여인. 가사 내용은 세상에 버림받고. 버림받은 거에요. 세상에 버림받아요. 버림받아가지고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홀로 살래. 그래서 깊은 호숫가에 산장 지어서 사는 거에요. 지금 계산하니까 최소한으로 2억에서 3억 있어야 될 문제에요. 이거 버림받은 거 아니에요. 내가 보기에는.


요새 자연 허가받을려면 보통 돈 먹여서 안돼요. 돈 먹여도 안 되잖아요. 2억, 3억 있어야 산장도 10평짜리라도 사지요. 버림받은 거 아니네. 제가 보기엔 사기 좀 쳐가지고 돈 좀 남긴 거 같애. 산장의 여인될려고 하면요 자기 어떤 재산 여력이 있어야 돼요.


지옥이 뭐냐 하면은 지옥이란 불 뜨거운 것도 지옥이지만 억울한 마음이 있는 곳은 모든 곳이 지옥입니다. 원통, 절통, 분통. 억울한 마음이 있으면 그거는 천국 가도 지옥이에요. 재산이 고 뭐고 자식 잘 되도 필요 없어요. 인간은 자기 의가 있기 때문에 그게 악마의 노림수이기 때문에 분통하게 되면 사람은 어떤 곳도 지옥이 되는 겁니다.


그럼 왜 분통 터지고 억울함을 느끼느냐? 본인이 본인을 해석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 외에는 다른 해석자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이 옆에 안 계시니까 해석해도 내가 해석을 해야 되지 다른 해석자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나는 뭐 별로 억울하지 않아요 하는데 막상 일 터져 보세요. 억울하지 않은 게 어디 있어요. 인간의 욕심은 상승하는데 억울하지 않은 게 어디 있어요. 맨날 억울해요. 지옥은 본인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장 진정한 철학자는 성경에 나오는 진정한 철학자 소개해드릴께요. 이게 뭐냐 하면은 거지 나사로 앞집에 살았던 지옥 간 부자, 이 사람보다 완벽한 철학자는 없습니다. 이 철학자의 외침은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뭐 이랬잖아요. 그렇죠? 철학의 기본입니다. 철학은 윤리 도덕이니까 우리 자신을 알아서 바르게 살 수 있다. 불교도 마찬가지인데 불교도 철학의 일종이거든요.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하는데 가장 진정한 철학자 거지 나사로 건너편에 있는 부자님께서 하신 유명한 철학의 멘트는 이거에요. 오지마! 오지마! 동생 5명이 있단 말이에요. 오지마! 이건 뭐 어렵지 않죠. 달랑 세 자에요. 오지마! 이유를 불문하고. 군대 가서 고생 직싸게 한 형이 동생보고 형 군대 생활 어떻게 해? 세 자. 무시를 하던지 뭘 하든지 오지마! 오지마.


왜? 본인은 이 철학은 생, 살아있는 철학이에요. 지옥에서 벗어나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옥 한 가운데서 외치는 그러한 울림입니다. 오지마. 자기가 들릴 수만 있다면 아직까지 죽지 않은 동생 5명에게 귓가에 들리도록 외치고 싶어요. 지옥에 오지마 라고. 다른 말로 좀 길게 설명하면 나처럼 살지마. 동생이 미리 듣고 나 형처럼 안살아 이럴 거란 말이에요.


동생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요. 안 죽어봐서 지옥에 안 가보니까 지옥에 가볼 때에 이게 아까 무슨 해석이라고 했습니까? 무슨 해석? 사후해석. 주님의 조치가 완전히 시멘트하는 거 뭡니까? 래미콘 시멘트로 덮어버리면 완전히 고형화되지요. 콘크리트. 완전히 지옥의 저주가 덮어버리니까 나오는 게 뭡니까? 오지마라는 거에요.


인간들의 철학자, 정치가 해석 말고 링컨 이야기 말고 그냥 하나님의 이야기가 덮여버리니까 나오는 철학은 뭐냐? 사후해석이죠. 인간의 해석이 아니고 주께서 주신 해석.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해석. 저를 왜 보냈습니까 말도 안 나와요. 그냥 무조건 오지마. 따지고 봅시다 주님 이런 소리도 하지마. 그냥 오지마. 따지고 봅시다 하는 건 아직 안 죽었을 때나 하는.


아무 해석이 주님의 십자가 해석이 안 덮치니까 뭐 한번 따져봅시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어떻고 양심이 어떻고 하는데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워. 그냥 오지마. 지금 첫 번째 오해밖에 안했네요. 두 번째 오해에요. 두 번째 오해, 오해 2가 뭐냐 하면은 인간의 전문성은 철저히 배격된다. 인간의 전문성. 내 가능성, Possibility죠. 나의 가능성. 나의 할 수 있는 것은 철저히 배격돼요.


예수님의 제자들이 뭐라고 하느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뭔가 주의 일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게 오해 2에요. 그래서 이 오해 2가 이 세상에 범람하기 때문에 거지 나사로 누가복음 16장, 거지 나사로 이야기 들으면 어떤 사람은 나도 거지 되면 천국갈 수 있습니까? 라고 본인이 해석을 내려요. 왜? 잘 사는 사람이 거지되는 것은 맘먹기에 따라서.


뭐 톨스토이처럼 그 많은 대지주의 아들이 산상설교 듣고 감명을 받아가지고 나는 예수님처럼 그런 천국의 삶,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이 저의 것임이라 해가지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의 것임이라 이걸 가지고 가난한 자는 천국 가는 줄 알고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 줘버리고 자기는 주님처럼 거지로 되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겠다. 이거는 인간의 가능성에 포함이 됩니까? 안됩니까? 포함되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 다 줬던 톨스토이가 현재 유산이 땅이 15만평 남아 있어서 후손들이 현재 잘 살고 있습니다. 다 줘도 15만평 남아요. 다 줘도. 얼마나 부자였으면. 제대로 다 안 준거에요. 내가 선교사로 가서 고생하면 죽기까지 텔레반한테 모가지 베이면 천국갈 수 있습니까? 이거는 아무리 겸손하고 낮춰도 이거는 인간 가능성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철저하게 뭐가 배제됩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배제돼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그걸 제자들은 오해한 겁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나와 있지요.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제자들이 자기 딴에 고생 좀 했거든요. 고생 하니까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흔히 우리 십자가 마을이나 복음 아는 사람끼리 하는 다른 사람 말고 우리끼리 이야기입니다. 우리끼리. 다른 사람은 놔두고 우리끼리. 우리끼리 준결승, 결승 붙겠다.


우리끼리 누가 복음을 잘 압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주님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쓴 잔이죠. 왜 쓴 잔이냐 하면은 주님께서 마지막 기도할 때 ‘이 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거 거부당했습니다. 예수님의 뜻이 거부당했어요.


예수님께서 내 뜻 말고 아버지 뜻 할 때 예수님의 내 뜻 안에 뭐가 포함되었느냐 하면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뜻이 그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거부당한 거에요. 예수님은 죄인의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죄인의 입장에서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다 내놓고 아버지의 평가를 받는데 그것이 거부당한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은 인간의 판단과 자신의 뜻이 여기 들어있어요.


쉽게 말해서 제자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천국 간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제자들이 천국 간다는 이야기를 예수님한테 한 두번 들은 게 아닌데 우리는 천국 간다 할 때 뭐가 빠졌느냐 하면은 우리는 천국 가는 도중에 옆길로 샌다는 빠트린 거에요. 천국은 한분을 위한 나라가 천국이에요. 예수님, 주를 위한 나라가 천국이지 여럿이 떼로 우~ 들어가는 나라가 천국이 아니거든요.


들어가더라도 한분을 위한 한분만 쳐다보는 나라라는 것 이렇게 되야 되지 천국 가는 본인이 자기가 자기보고 흐뭇해가지고 역시 난 잘했어 이거 하는 나라가 아니에요. 인간의 가능성에서 나올 수가 없는 거에요. 누가 높으냐 할 때 이건 자기의 공과 자기의 노력한 것 누가 더 희생했습니까 그거 자랑하는 거에요. 주님께서 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물으시고 후딱 답변해요. 너희밖에 마실 수밖에 없다 라고 되어있어요.


그게 정말 중요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라고 거들먹거리면서 나 누군 줄 알아? 아까 다시 이야기합시다. 나는 무엇이다. 이 틀 있잖아요. 놀랍게도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계속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이다. 나는 천국 백성이다. 나는 무엇이다. 계속 나오겠지요. 나는 무엇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는 무엇이다 제자들이 알고있는 걸 알고 아예 역으로 가버립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이건 불가능이죠.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이것까지 또 흉내를 내요. 그래서 CCC 애들은 아무것도 없이 돈도 없이 가서 민폐 끼친다고 복음 전하러 왔습니다. 밥 좀 주세요 이러고 있어요. 이건 옛날 조선시대 때 삿갓 하나 쓰고요 중이 지나가는 과객입니다. 밥 좀 주세요 하고 똑같은 거에요. 관세음보살 이런 식으로. 댁의 아드님은 아마 큰 일꾼이 될 겁니다. 휘리릭 하고 가고.


오해 2는 뭐냐 하면은 모든 자를 배격한다는 것은 이미 결론은 나와 있어요. 왜? 내 쓴 잔을 너희들은 마셔야 된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를 나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 뜻도 있잖아. 너희 뜻도 일체 주께서는 거부당할 것이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제자들이 아직까지 좋다고 귀신 쫓아냈다고 좋다고 뭐라도 된 냥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첫째 사후해석. 두 번째 능력배제. 세 번째는 제자들이 오해한 것은 주님과 그들 사이에 틈 생산.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 나중에 갈라져버려요. 갈라집니다. 첫 번째 사후해석, 두 번째 능력배제 이걸 아무리 이야기해도 제자들은 못 알아봐요. 못 알아보기 때문에 이걸 실제로 적용 시키는 것이 뭐냐? 예수님 가신 곳과 제자들이 남아 있는 곳과 틈이 생겨버립니다.


틈이 생겼다는 말은 제자들 쪽에서 아무리 배우고 실천했던 것, 들었던 것 백날 해봐야 도약이 안돼요. 점핑이 안 되는 거에요. 도약할 수가 없어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가장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그만큼 단절되어있다는 것을 그들만 아는 거에요. 그래서 제자들이 나중에 성령 받고 난 뒤에 사도행전에 전도할 때에 절대로 사람의 뜻이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압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 사도 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그 의미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가 이게 바로 실제 인간이 사는 세상의 그 사정이다. 사정 그 자체. 실전 그 자체에요. 실전. 실제로 그런 형편에 있어요. 왜 이것이 중요하느냐 하면은요 우리가 예수 믿게 되었다는 이것은 참 기적입니다. 오히려 매일같이 화들짝 놀래야 될 문제에요.


그리고 예수 믿다가 안 믿고 싶잖아요. 나는 예수 안 믿어 하잖아요. 제대로 제 모습으로 되돌아간 거에요. 그동안 어설픈 신앙인 코스프레한 겁니다. 제가 대구강의에서 했지요. 신앙인 코스프레. 코스프레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흉내 내는 것에서 뭐로 바꿔야 된다고 했습니까. 싸우는 전사로 바뀌겠지요. 이 앞에 신앙인 코스프레 앞에 뭘 하나 덧붙였어요.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칭얼대는 신앙인 코스프레. 주여 부족합니다. 흑흑 주여 도와주옵소서 이런 거. 칭얼대고 찡찡거리고 엄살 부리고 자기를 스스로 나약하다고 여기는 것. 연약하게 느끼는 것을 이걸 마치 겸손처럼 느낍니다. 온갖 인간의 겸손과 나약한 걸 다 동원시키면 여기서 뭘 기대하느냐 하면은 코스프레하는 사람은 여기서 긍휼히 여김, 불쌍히 여겨줄 줄로 아는 거에요. 불쌍히 여겨줄 것을 끄집어내는 능력은 이건 뭡니까? 오해 2에 위반되지요. 오해 2에.


불쌍히 여겨줄 능력이 있으면 구원될 능력이 거기에 결부된다고 그렇게 본인이 스스로 믿고 싶은 거에요. 누가? 코스프레 가짜들, 가짜 신앙인이. 그러나 제자들은 뭘 합니까? 이미 예수님 십자가 떠나고 난 뒤에 인간 쪽에서 할 수 있는 어떤 역량으로 폴짝폴짝 뛰어봐야 그게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그들만이 체험했잖아요. 그 체험으로 그대로 사도행전에 보면 그들이 그 체험 가지고 복음전파에 나서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람 꼬시는 게 전혀 그들의 임무가 되도 소용없고요 이게 애초부터 안 된다는 것을 알아요.


여러분들이 고린도전서 2장 4절 한번 봅시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람의 지혜를 신학이라고 봅시다. 신학, 철학, 사람의 교양 양심에서 나오는 윤리 도덕으로 봅시다.


어떤 걸 해도 이거는 구원이 안 된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거는 하나님의 능력과 맞은 편에 있는 거에요. 하나님의 능력이 이쪽 편에 있다면 맞은 편에 빈 공간이 아니고 인간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하는 겁니다. 그게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1장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그 전도의 내용이 뭐냐 23절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그러니까 이게 맞은편에 있는 사람들, 인간의 자기의 철학과 지혜와 신학과 자기의 행동과 열심과 실천 등 고상해 보이는 신앙적인 코스프레 이걸 못 버리는 사람한테는 무엇이 그렇게 미련 곰탱이처럼 보이겠습니까? 이걸 못 버리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못 버리는 사람들에게는 뭐로 보이겠습니까? 십자가 못 박힌 것이 뭐로 보이겠어요.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십자가만 증거해야 되는 거에요. 가짜를 가짜로서 들통 내야 되니까.


이게 바로 사도들 제자들이 받았던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뭐냐 하면은 배짱 튕기는 거에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산상설교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 복음을 누구에게는 전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개, 돼지한테 전하지 말라고 했지요. 그런데 개, 돼지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그거는 복음을 전해보면 알아요.


결국은 이거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은 결국은 아까 오해 1, 오해 1이 뭐라고 했습니까? 사후해석. 인간은 인간이 해석 못하고 주님이 해석한다. 오해 2. 모든 능력 배격하는 것. 뭐했습니다. 십일조했습니다 뭐 했습니다. 그거 다 치워. 능력배격. 세 번째는 뭐라고 했습니까? 세 번째 틈이 있어 줘야 돼요. 틈이 있어줘야 나오는 게 뭐냐? 오직 감사와 찬송 밖에 없습니다.


시편 42편 5절 한번 읽어보세요. 자, 아까 지옥은 억울함이 있는 것이 지옥이라고 했지요. 시편 42편 5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자, 처음에는 낙망과 불안감이 있지요. 자, 아까 공부했으니까 생각해 봅시다. 불안이 왜 생깁니까? 무슨 틀이 유지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나는 무엇 무엇이어야 된다는 그 틀을 그 프레임을 어떤 경우라도 그걸 갖고 있어요. 나는 무엇이어야 된다. 내가 되고 싶은 것 내가 되고 싶다 이 말이거든요. 나는 이상향 되고 싶다. 그걸 이상자아라고 하는데 그게 나와요. 그게 자아에요. 주체가 아닌 자아. 완전 정신병이죠. 나는 무엇이다. 그걸 노력하는 걸 주체. 나는 무엇이 되고 싶다. 무엇이다 있으니까 무엇이 되고 싶다가 있는 거에요.


정신 분석하는 건 두 가지 밖에 없어요. 너 커서 뭐될래? 이거 되고 싶습니다. 노력해라. 이게 교육 아닙니까. 이게 교육법이잖아요. 스스로 자아가 되라. 독립하라 그거잖아요. 낙망, 불안. 그런데 문제는 낙망과 불안이 있으니까 이게 지옥이에요. 어떤 수입이 많고 아무리 칭찬해도 다 귀찮아. 내가 나임을 정립이 안 됐으니까. 규정이 안됐으니까 불안한 거에요.


그런데 규정이 안 되니까 시편 42편 5절에 끝에 그 낙망과 불안이 뭐로 변했습니까? 찬송. 찬송은 자기 보고 찬송하는 게 아니지요. 어떤 대상이 있지요. 쉽게 말해서 찬송은 이런 뜻이에요. 나 아니었습니다. 나 아니었습니다. 나를 적어놓고 지워야 돼요. 매일같이 나를 생각하고 그걸 지워버려요. 나 아니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위대한 찬송은 없어요. 나 아니었습니다.


끝으로 이 이야기하고 첫째 시간 마감해보겠습니다. 이 이야기에요. 어떤 사람이 바둑을 두는데 인터넷 바둑을 두는데 닉네임, 자기 나름대로 지은 닉네임이 있어. 그런 닉네임을 제가 본적이 없습니다. 아주 진짜 심오한 닉네임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세 살 연상. 세 살 연상이라는 닉네임이에요.


이것은 본인은 그걸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세 살 연상이라는 닉네임, 나는 무엇이다가 날라가버렸지요. 그렇죠? 나는 무엇이다 이건 긍정이잖아요. 세 살 연상은 이걸 가지고 부정이라고 합니다. 부정태. 부정이 되는 거에요. 부정. 자기 자신을 정하지 않아야 될 자로 자기를 정한 거에요. 이게 바로 제자도에요. 제자들은 유동적이에요. 내가 나를 정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아는 거에요.


주께서 그때 그때마다 역할을 주님이 정하지 내가 정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악마로부터 참소하고 공격받을 건덕지가 없어요. 왜? 내가 누구라고 정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10분 쉬는 것이다. 안되겠지요. 10분 동안 여러분이 정한 것 다 빼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0분 뒤에 봅시다.

 

강남-누가복음 9장 3절 (오지마)2112076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오늘 강의 제목을 ‘오지마!’ 그렇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최고의 철학자니까요. 최고의 복음가는 뭐냐? 와! 오지마, 와. 오라 이거는 명령이죠. 그러니까 스승과 제자 사이에 제자가 형성하는 삶의 정황은 자기들이 못 만듭니다. 스승이 조성해주는 거에요. 조성된 그 환경은 스승이 해석한 거에요. 이건 제자들이 해석 못하고 낯 설기 짝이 없어요.


본인들이 분석해가는 현실들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처지가 이런 처지에요. 성도의 처지가 주어지는 변화에 모든 나의 삶의 환경이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되는 게 이상해요. 되는 게 이상해. 되지 말아야 되죠.


그래서 아까 제가 세 살 연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세 살 연상이라고 하는 것은 지시대상이 없어요. 내가 뭐 되고 싶다는 게 없고 비교 대상을 통해서 차후적으로 또는 사후적으로, 사후적이라는 것은 죽고 난 후 말하는 게 아니고 일이 끝나고 난 뒤 사후적으로 알게 하는 겁니다. 사후적 해석이 주어지는 겁니다.


하루 살고 주님의 하루 해석 주어졌고 하루 살고 주님의 해석이 또 주어지고 하루살고 주님의 해석이 주어지죠. 주어지니까 스승의 제자들 환경은 스승이 정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지시에요 지시. 주님의 지시, 명령. 그러니까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 나의 임무가 아니에요. 내가 나를 지키는 것이 주의 임무가 아니고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주의 지시의 생산물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구약의 시편 보지요. 시편이 혼자 있던가요? 다른 분이 있던가요? 항상 다른 분이 다윗이나 모세나 자꾸 지시를 내리잖아요. 지시. 그 지시가 뭐냐 하면은 말씀이 되는 겁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지시를 내려서 이 말씀의 완성의 환경 속에 이미 너희가 놓여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이거는 여러분들이 아시니까 그냥 넘어가고요.


그러니까 나를 규정할 어떤 것도 주님은 허락한 적이 없다는 거죠. 다시 봅시다. 세 살 연상, 세 살 연상이라고 하는 것은 만약에 내 곁에 세 살 짜리 오게 되면 졸지에 나의 환경은 나는 몇 살입니까? 6살. 졸지에 여기 송해가 오게 되면 나는 97살. 98살. 송해가 한 95살 되겠지요. 그러니까 이거는 내가 여기서 내가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자격이 없다 이 말이죠. ‘나’라는 것은.


세 살 연상이라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그 조건은 환경으로 주어지듯이 이거는 와! 이리로 와! 이리로 와라는 조건이 세 살 연상이 아니고 이리로 와 가 정해져버리면 우리가 어떤 상황이든지 이리로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조성해 준거에요. 이것을 여러분들이 인정하세요? 묻는 겁니다. 인정하십니까? 인정했는지 안했는지 제가 한번 조사해볼까요?


나에게는 적이 있다. 나에게는 적이 있다 이게 성립이 안 되야 됩니다. 왜냐 하면은 나에게 적이 되어버리면 적에 대해서 누가 분노를 느낍니까? 내가 분노를 느껴야 돼요. 내가 분노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한 자다 막 이렇게 분노를 느껴야 돼요. 이거는 아니에요. 이리로 와 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적은 원수, 적은 누가 생산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산하면서 동반해서 적을 생산해버려요. 그럼 이 적은 제자들이 적이 아니고 누구 적이냐 하면은 예수님 본인의 적이에요. 예수님 본인의 적입니다. 그 적이 나타났다는 말은 오늘 공부에 의하면 내가 뭐다? 내가 죄다 로 부름 받았단 뜻이에요.


그러니까 이 적이 나타나게 되면 이 적은 뭐냐? 나에게 무슨 대상이 되느냐 하면은 감사와 고마움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지옥 갈 네가 나타나서 너무 고마워 이런 거. 지옥 갈 네가 나타나서 너무 고맙다는. 왜? 너도 네 마음대로 안 되고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사실이 드러났으니까요.


나의 돈을 떼먹는 사람이 적이 아니고 옛날에 내가 생각했던 것 있잖아요. 내가. 나는 내 힘으로 구원받겠다. 그리고 나의 일거수일투족 모든 판단과 해석은 누가 내린다? 내가 제대로 내려서 내가 제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생활해서 구원받겠다. 이 모든 것이 뭐냐 하면은 누구의 적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그 적이죠. 그 적이 눈앞에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됩니까? 고맙죠. 네 모습 보니까 옛날 내 모습 보는 것 같애.


그러니까 여기서 아까 세 번째 오해가 뭡니까? 틈이 갈라졌죠. 틈이 보인다는 것은 이미 그 틈을 넘어섰다는 뜻이에요. 틈을 넘어섰으니까 틈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틈을 넘어서지 않으면 틈이 없어요. 인간의 능력으로 메꿀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틈이 없으면 감사가 안 나옵니다. 틈이 있어줘야 불가능이 늘 주변에 휘둘러 감아줘야 야 이게 주께서 손대셨구나. 내가 주어진 나에 대해서 불평하고 원망할 게 아니고 그것조차도 감사해야 된다는 겁니다.


자, 아까 첫 번째 강의에 이런 이야기했지요. 지옥이란 억울함이 풀리지 않는 것. 억울함이 풀리지 않는 상태. 나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모함하고 일방적으로 내가 잘못했다고 직장이나 사회에서 가정에서 또는 교회에서 나를 지목하고 밀어붙이고 모든 욕설이 나에게 주어질 때 이게 뭐에요? 이게 바로 살아있으면서 경험하는 지옥입니다.


자, 지옥은 아까 공부한대로 하면 지옥의 원칙은 뭐냐? 오지마 에요. 이 말은 뭐냐 내가 원치 않는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내가 원치 않는 상황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상황은 따로 내가 규정하고 있었는데 내가 원치 않는 상황이 와서 내가 지금 화가 나있다는 뜻이에요. 화가 났으니까 이건 감사가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너희들은 나 같은 상태가 되면 안 된다고 이거는 아주 절실하게 간증집회하고 있는 거에요. 간증집회. 자기가 지금 느끼니까. 절대로 너는 나 같은 사람 되면 안돼. 이게 최고의 철학이라고 했잖아요. 이게. 세상 철학은 남 간섭질하고 잔소리하기 바빠요. 그러나 자기를 집어넣지를 않아요. 자기를 집어넣어야 생생한 철학이 되는 겁니다. 생생한 신학이 돼요. 나처럼 안 되면 돼 이런 거요.


그 말은 뭐냐 하면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그걸 들어주지 않아서 나는 지금 분하고 원통하다는 거에요. 내가 지옥 온다는 것은 이것은 뭔가 하늘나라 행정처리가 잘못된 거에요. 서류가 뭐 바뀌었다든지 이렇게 하는데 놀랍게도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주의 일에 조금도 하자가 없습니다. 자기 백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반드시 다 처리합니다. 주의 일에 실수가 없어요.


주의 실수가 없으니까 지옥에 가는 사람은 분통해하고 천국 간 사람은 그냥 뭐 고마울 뿐이죠. 행정처리 내가 안하고 주께서 행정처리해서 갔으니까. 그러니까 천국에 온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이런 적들의 등장조차도 분통이나 절통이 아니고 이것조차도 뭐냐? 감사하고 고마운 거에요. 혹시 주변에 복음 모르는 사람 있으면 먼저 인사를 하세요. 고맙다. 지옥 가줘서 고맙다. 뺨 맞을 수가 있어요. 개, 돼지가 돼서 고마워요.


그래서 제자들은 처음에 성령 오기 전에 이걸 몰랐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는 끝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끝이 없고 자기는 바로 어디로 간다? 곧바로 주님 가신 곳에 계속 따라붙을 줄 알았어요. 왜냐? 나의 틀을 유지하니까. 나는 제자다. 나는 제자다 라고 하는 게 이게 얼마나 위험한 거에요. 그냥 오늘부터 닉네임 바꾸세요. 나는 제자다 하지 말고 나는 세 살 연상으로 바꾸세요. 주의 원수와 대비가 되는 비교가 되는 그런 사람 되야 돼요.


그래서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신 분. 평소에 문화에 관심사있는 분은 딱 떠올라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이건 뭐 퀴즈대회는 아니지만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신 분 이게 어디 노래에 나오는 가사입니까 물으면 나와요. 나의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이게 제목이에요. 양수경이 부른.


제가 광주 강의 때인가 어디서 했지요. 왜 대중가요를 거론하느냐 하면은 대중가요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실체가 있고 그걸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데가 대중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안 믿는데 뭐를 보고 뭐를 믿고자 하느냐. 그건 대중가요가 다 가르쳐놨어요. 대중가요가.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나중에 한번 들어보세요. 양수경 이별의 끝은 어디인가요 노래에 보면 아주 은혜스러워요.


오늘 이 강의했는데도 여러분은 얼굴이 멀뚱하게 있는데 적의 등장에 뭐하라고 했습니까? 적의 등장에 감사하라 이 말입니다. 적의 등장에. 적까지도 감사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범사에 뭐가 돼요? 감사뿐이죠. 뭐 절통, 분통, 원통 그거는 있을 수가 없지요. 내가 나를 규정을 내가 나와 딱 맞을 어떤 규정도 이게 그게 뭐냐? 그게 나의 끝이거든요 그게. 나는 제자다 제자다 했지만 헤어졌잖아요. 나의 끝은 어디인가요?? 나의 끝은 주님이지 뭐. 십자가가 끝이죠.


그런데 십자가를 이미 받아들였다는 말은 끝을 넘어선 그 갭을 넘어선 거에요. 그러니까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보느냐 하면은 편안한 마음으로 바리새인을 보는 거에요. 가룟 유다를 보고 바리새인을 딱 보면서 캬 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딱 나다. 딱 나거든요.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남한테 멋있게 보일려고 하고 기도해도 내가 지금 두 시간 반째 기도하고 있다 그 시간 재고 금식해도 일부러 막 찡그려요.


이게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구제를 해도 오른손이 모른다고요? 온 동네방네 다 알게 됐어. 나 구제한다고 다 알게 됐어요. 이게 우리 바리새인 선배 아닙니까. 선배들이 다 한 거에요. 그들이 한 것 절대로 하지마라 이 말은 네가 지금 네가 그 모습이었다는 것을 그들이 있어야 네가 알게 아니냐. 그 점에 대해서 네가 나한테 감사하고 고맙게 여겨라 이 말입니다. 문둥병자나 여러 가지 세리와 창기나 모든 것이 이게 동지같애. 남이 아니고. 잠시 멈추고 이 노래 듣고 싶다. 이 노래 괜찮은데 반응이 별로네요.


자, 그렇다면 그 다음 문제에요. 그 다음 문제가 헤롯과 관련되어 있어요. 뒤에 헤롯이 나오는데. 분봉왕 헤롯이 나오는데 그렇다면 지금 나는 성도다. 나는 새 신자다 나는 거듭났다 나는 성령 받았다를 고집을 해버리면 이런 사람들, 이게 주님의 원수잖아요. 나의 틀을 유지하니까. 우리의 옛날 모습이기도 하고요. 뭘 유지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게 유지되는 게 뭐라고 했습니까. ‘나’가 있는 이상 이게 자아에서 주체로 계속 나간다고 했지요. 나는 되고 싶은데 좀 돌아서면 다시 주체가 되고 내가 그런가 의심하게 되고. 나는 주체다 했을 때에 이 사람들이 하는 짓이 뭐냐 하면은 이렇게 보면 돼요. 주변 벽을 손톱으로 쥐어뜯는다. 이게 바로 인간들의 신학과 철학과 과학이 하는 모든 일이 그거에요.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는 모든 과학 이런 게 이거에요. 탈출할려고 손톱으로 주변 벽을 뜯어내는 일. 이게 실존주의죠. 실존주의 철학.


갈 때까지 뜯어볼 때까지 뜯어보자 해놓고는 이제는 아픈 마음, 인생은 무상이다 이러고 있다고요. 자기가 초월적인 것 상상을 하고 내가 이 세상의 번뇌와 생로병사에서 벗어나서 바깥의 나온 것을 본인이 상상하고 그 상상한 것을 손으로 뜯어서 그 경로를 주님이 만든 게 아니고 누가 만든다? 내가 아주 멋있게 그리고 아주 희생적으로 처절한 사투를 벌리면서 내가 그걸 올라가보겠다는 거에요. 이게 영웅담론이라고 하는데요 문학에서 이야기해요.


오디푸스 신화, 신화 이야기가 이런 거에요. 영웅이 되는 거에요. 자기가 영웅이 된 뒷자국을 보고 자기가 흐뭇해하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해석해요. 내가 이렇게 장렬했었나? 이렇게 대단했었나? 내가 이렇게 치열하게 싸워왔었나? 마지막 나오는 노래는 무슨 노래? My Way.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렀던 마이 웨이. 인생의 커튼이 쳐지면 나는 후회 없이 살았노라. 인생 스스로 위로해주고요.


그런데 진짜 철학가는 지옥 가서 뭐라고 합니까? 아까 제목 뭐라고 했어요? 오지마! 백날 손톱 뜯어도 오지마! 다 소용없어. 오지마. 어떤 다 소용없는 거에요. 소용없지만 할 수 있는 게 내가 나를 쳐야 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변 벽을 손톱으로 뜯어내가지고 뜯기면 그 다음 세계에 신기한 게 있겠지 하고 유토피아 향해 나가면 그 방법 외엔 다른 수가 없습니다. 피곤해요. 하루하루 사는 게 피곤하다고요.


그럼 성도는 뭘 즐기는가? 이게 헤롯이거든요. 헤롯 대왕이 있는데 헤롯 대왕의 아들이 세 명이 있어요. 아켈라오인데 이게 BC4에서 BC6까지 로마에 밉상 보여가지고 3년밖에 통치를 못했어요. 그 다음에 헤롯 안디바. 이 사람은 BC4세기부터 AD39년까지. 그 다음에 빌립2세, 누가복음 3장 1절에 나오는데 이 사람 말고 빌립1세가 있는데 이 빌립1세의 부인의 이름이 헤로디아. 헤롯하고 비슷하죠. 헤로디아.


헤로디아가 원래 빌립1세하고 결혼했다가 여기 헤롯 안디바, 안디바는 형이고요 빌립1세는 동생이에요. 제수씨하고 결혼한 사람이 안디바에요. 결혼했는데 억지로 결혼한 게 아니고 여자가 좋아서 결혼했어요. 그래서 세례 요한이 이것은 잘못이다 하니까 세례 요한을 죽인 거에요. 이 결혼한 사람이 헤로디아에요.


여기 아켈라오는 이것밖에 통치 여기 밖에 안했는데 여기가 유다 지방인데 유다 지방은 아켈라오가 통치를 못하고 그 이후에는 로마 총독이 빌라도가 직접 통치했고 나머지는 분봉왕, 세금 바치는 그런 헤롯 안디바가 통치했고 빌립 지방은 저 위쪽인데 빌립2세가 분봉왕으로 했고 이런 상황이 됩니다.


자, 이런 상황이 되는데 이 헤롯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불안하다, 불안정한 거에요. 그 세계 자체가. 그 뒤에 헤롯 아그립바도 나오는데 전부 다 모든 게 불안정해요. 누가 뭐 뭐 일 있다하면 밤잠을 못자요. 여러분들 밤잠 못 잘 때 있지요. 그 이유는 뭐냐? 나는 무엇이다를 이게 위협을 받아서 잠을 못자는 거에요. 나는 무엇이다를 유지해야 되는데 그게 나의 정체성인데 그걸 유지 못하면 밤잠을 못자요.


그럼 나는 무엇이다가 나의 밤잠을 못 자게 하는 무엇이다가 침해를 공격을 받은 거에요. 그 공격받은 자가 누구냐 하면은 나의 원수가 돼요. 나의 원수. 그러니까 내가 있다는 말은 뭐도 생산된다? 나의 원수가 생긴 거에요. 따라서 우리는 그 원수를 죽여버리면 좋겠어. 그게 십자가 사건이란 말이죠.


주께서 일부러 원수를 만드는 거에요. 그 원수가 이 세상에서 콱 죽었으면 좋겠다. 내가 죽이면 내가 교도소 가야 되는데 남이 하든지 차가 와서 박든지 해가지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좀 죽여줬으면 좋겠다. 이게 그 사람이 적이 죽던 말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기 불안심은 점점 강해지는 거에요. 라이벌 같은 관계, 라이벌.


결국 불안하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내가 있다는 뜻이고 내가 있다. 내가 있다는 말은 나의 것이 있다. 내가 평생 모아놓은 거 있잖아요. 이게 나의 것이 돼요. 나의 것들이 모여서 ‘나’가 되거든요. 내 자식, 내 아내, 내 남편, 내 재산 이런 것들이 모여서 되는데 이게 빠져버리면 과거의 내가 알던 내가 아닌 거지꼴을 못 면한다 이렇게 되면 내가 부정하고 싶어요. 내가 왜 거지야? 배울 만큼 배웠어. 이렇게 되면 불안하지요.


그런데 성도는 어떻느냐 하면은 성도는 특징은 양자물리학이 동원됩니다. 양자물리학이 뭐냐 하면 양자 세계 너무 작아가지고 양자를 가둘 수 있는 어떤 물질이 없어요. 중간에 이렇게 에너지의 벽이 있으면 통과해버립니다. 이걸 터널효과. 이걸 터널이라고 합니다. 양자물리학에서는 터널효과에 의해서 어떤 것도 전자를 가둘 수 없다 이렇게 됩니다.


만약에 전자가 구슬이라면 구슬을 컵 안에 들어있다면 컵 안에 있잖아요 있는데 가보니까 없어. 유리라는 SiO2의 분자식이 전자를 허용할 만큼 빈 공간이 많은 거에요. 원자하고 전자하고는 빈공간이 많아서 그냥 빈터에요. 그걸 전자가 움직여서 가버렸으니까 전자가 빠져 나가고 없어요. 분명히 가둬놨는데 없어요.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악마가 가둬놨는데 주님이 성도를 빼갔어요. 성도를 빼가는 겁니다. 우리를 빼가는 게 아니고 성도를 빼가는 거에요. 이게 어려워요. 우리를 빼갈려면 우리를 산 채로 못 가고 우리를 죽여서 성도 만들어서 빼가는 거에요. 죽인다는 말은 나는 무엇이다가 아니라 예수님은 나에게 이걸 했다가 되는 거에요. 내가 주어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서술어의 자리에 목적어의 자리에 있는 거에요.


주께서 주인공이 되셔서 나를 사용했다 이게 성도의 공식입니다. 나는 성도가 안돼요. 나는 누구의 종입니다 돼요. 나 바울은 예수님의 뭐가 된다? 예수님의 종, 예수님의 사도인 나 바울은, 이렇게 된다고요. 앞에 붙어요. 이거는 정말 어려운 건데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선택을 할 때 인간은 선택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선택한 하나님이 없어요.


제가 주일 낮 설교 때 한 말 해볼게요. 너무 함축되어서 했는데 선물이 올 때에 선물 상자가 이렇게 있다면 선물 상자 있잖아요. 조기가 온다면 여러분 조기 상자는 버리죠. 그 비린내 나는 거 왜 갖고 있습니까? 조기는 구워 먹잖아요. 조기 상자는 버리는데 그러지 말고 조기를 버리고 조기 상자 안에 자기가 들어가 버려야 돼요.


들어가 버리면 이 자리가 뭐냐 하면은 아버지가 예수님만을 선택한 자리가 이게 선물의 자리에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예수님만이 선택했기 때문에 이 선택한 자리에 성도가 될 때는 여기서 뭘 흘리느냐 하면은 너 오라고 하는 게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피를 흘려버립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려버려요.


예수님의 피는 모든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에베소서 1장 7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예수님의 피를 흘려버리면 이 안에서는 인간이 주인공 노릇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증거하라고 죽었다가 새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로써 이 안에 이 선물 안에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영원히 성도는 누구를 잊어버려요? 나를 잊어버리는 거에요. 나를 잊어버렸어요. 주께서 찬송하는 나.


그러니까 이 나는 죽었다가 살아난 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자리는 죽은 예수님을 살려내거든요.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은 유일하게 동일한 분이에요. 이 세상에. 예수님이 죽었던 그 사람을 살리신 거에요. 예수님은 바꿔치기가 없어요. 죽었던 그 분을 살리시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 부활 사이에 연속성이 형성돼요.


이게 뭐냐 하면은 이 연속성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름이라고 해요. ‘이름’. 예수님의 이름이에요. ‘예수님의 이름’. 우리는 돌멩이처럼 되가지고 우리는 이름이 없어요. 돌멩이는 이름이 없어요. 이름은 예수 이름만 주께서 인정합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이 우리 이름이 되면서 우리는 머리는 주님이고 몸체, 그리스도의 신체가 되어서 그 안에 들어가게 되는 거에요. 그 안에 들어가게 되면 여기서는 그 이렇게 돼요.


뭐냐 하면은 삶이 돼요. 삶 또는 생명이 되기 때문에 어떤 원칙이 되느냐 하면은 시편에 보면은 이런 게 나와요. “사람이 음부에 들어간 자는 어떻게 찬송하리요” 라는 말이 나와요. 음부에. 그게 시편에 있는데. 시편에 보게 되면 “죽은 자는 찬송하지 못함이라” 그러면 살았다가 죽으면 찬송하면 안돼요. 일단 죽음이 있는 자는 찬송할 자격이 없어요. 모든 인간은 죽잖아요. 잠시 살아 있다가 찬송해도 소용없어요. 죽으니까. 찬송할 자격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죽는다는 말은.


인간은 언약 계약 상대자가 아니에요. 계약 상대자는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합니까? 음부에 있는 자를 살려내서 음부가 아닌 산 자의 땅에 있어줘야 뭐가 유지가 돼요? 주께서 원하고자 하는 그 찬송이 계속 나오는 거에요. 피조물의 역할은 찬송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천사의 역할은 뭡니까? 아기 예수 목자에 났을 때 크리스마스 할 때 찬송을 누가 불렀습니까? 하늘의 누가 불렀습니까? 하늘의 천사가 불렀지요.


천사의 역할 중에 하나가 찬송하는 게 있어요. 하늘나라에서 그 역할을 하라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찬양을 누가 하느냐? 바로 종려나무 든 구원받은 백성들이 찬송을 하거든요. 여러분들이 천사가 좀 기계 같고 좀 냉정하더라도 그들의 역할을 우리가 떠맡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찬송하고 시키는 대로 하고 나는 나다 라는 주장은 안 하고. 천사의 특징은 내가 나라고 주장하지를 않습니다. 천사 중에서 내가 나라고 주장하는 것은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은 참소하는 악마밖에 없어요.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철저하게 ‘나’라는 것이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허용되는 것은요 그것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선과 악을 판정할 수 있는 주인공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본인이 따먹었으니까 본인 지식이 발생됐지요. 그럼 이건 선이고 이건 악이다 라고 판정 내릴 자는 누구입니까? 따먹은 당사자 본인이잖아요.


원래 누구만 했느냐 하면은 하나님만이 할 일을 인간이 마귀한테 부추김 받아가지고 얼렁 따먹으니까 본인이 선과 악을 판단하고 싶어 하는 작은 신이 된 거에요. 몰랐어요? 다 아는 이야기를 제가 시시하게 하고 있습니다. 시시한 이야기는 아닌데 지금 시시하게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목적은 찬송 받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는 찬송을 못해요. 성경에 의하면.


그럼 어떻게 하느냐? 살려내야 되겠지요. 누구를? 하나님을? 아니. 주님을. 시범을 보인 주님을 찬송하는 거에요. 우리는 덩달아 주님 때문에 덩달아 뽑혔기 때문에 찬송하는 겁니다. 니체라는 철학자는 이 이야기를 니체가 신학교 출신이거든요. 천국가지 말자. 왜? 심심하다. 찬송만 하니까. 찬송만 하는 게 시시하다는데 지루하기도 하답니다. 이거는 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나의 대해서 내가 나를 성령을 안 받았기 때문에 나를 포기할 마음이 없는 거에요. 나를 포기할 마음이 없어요.


성령이 없으면 해석 자체가 나중심의 해석이 되가지고 그걸로 성경 중에 좋은 것을 이렇게 얻고자 하는 겁니다. 시편 6절 5절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이거하고 이거 말고 또 다른데 나와요. 저는 전도서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시편 30편 9절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그 다음에 전도서 한번 봅시다. 전도서에 보면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는 게 나와요. 전도서 9장 4절.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은 주께서 너 좋아라고 살려준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너 좋아라고 살려준 것도 아니고 나 살았다 이야기하라고 살려준 것도 아니고요. 그 나 살아있다 이거 자랑하라고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날 구원할려고 살려준 것도 아니고 죽어야 될 자를 살게 하신 분을 찬송하라고 살게 해주신 거에요. 그러니까 감사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는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살아났다 이 자체로 그만 그걸 끝으로 그걸 전부로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오늘 누가복음 9장으로 봅시다. 자, 얼마나 불안에 떠는지 한번 보세요. 헤롯이 여기는 당황한다 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9장 7절에 “분봉 왕 헤롯이 이 모든 일을 듣고 심히” 뭡니까? 다른 데는 당황으로 되어 있는데 다른 번역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심히 당황하니 이는 어떤 사람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도 하며” 9장 7절 다 당황입니까? 당황스럽네요. 당황하니 이는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죽은 자에서 살아나야지 이게 시편 30편 9절 맞잖아요. 성경 말씀을 믿으면서 실제로 성경 말씀 되어버리니까 누가 당황합니까? 믿는 자들이 당황해버리는 거에요.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그만큼 성경 말씀이고 하나님 그거는 뒷전이고 내가 되고 싶은 나, 내가 신이 되고 싶은 나, 내가 옳고 그름을 내가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싶은 나, 이 ‘나’는 결국 손톱 다 날라갑니다.


결국 돈 벌겠다 열심히 하겠다 바르게 살겠다 선교, 전도 봉사하고 하겠다 이거 가지고 뭐냐 하면은 천국에 통과하지는 않는 벽을 자기가 손톱으로 후벼내가지고 피 쭉쭉 흘리면 이 피 흘린 게 무슨 의미가 되는 냥 ‘주여 이토록 고생했는데 긍휼히 여기소서’ 이러고 있단 말이죠. 이것 손톱을 긁던지 아니면 새벽제단 가서 제단마루 다 주저앉히든지 아니면 성경을 필사해가지고 자기가 성경을 필사한 게 한 50권 되든지.


하여튼 두 번째 오해 기억나지요? 나의 가능성은 아무 쓸모 짝도 없는데 계속 그걸 동원하는 거에요. 장군쯤 되가지고 “장군 어떻게 살았습니까?”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최선을 다한 내가 살아있잖아요. 이게 문제라니까요. 이게 문제에요. 제가 지난 오후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요. 이 세상의 위기와 문제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이 사람 된 것이 이게 사달난 거에요. 이게 사달난 거에요. 사달이 난 거에요 이게.


그냥 계시지 왜 사람이 되가지고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것과 하나님이 추구하는 것이 이토록 달랐다를 절실하게 보여주는 거에요. 그것도 어디 가서?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인간의 지혜와 재능이 총집결된 그 장소에 가가지고 하나님의 뜻은 주님께서 그걸 완전히 엎어버렸잖아요. 치워라. 버려라. 바로 그 일을 10절에서부터 바로 그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은 제자들이 해야 되는 겁니다. 아까 3절에서 5절까지.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엎어버림을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오해했지요. 주님하고 엎어버린 게 성공하니까 자기가 마땅히 뭡니까? 주님하고 한 패인 줄 알고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줄 알고 오해가 뭐 대단한 오해를 한 거에요. 세 번째 오해입니다. 주님하고 같이 일했다고 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란 겁니다. 구원은 와! 라는 주님의 지시가 거기에 담겨있어야 돼요. 오라. 와라. 그거는 우리는 세 살 여자이기 때문에 내가 주님이 어떤 내용을 채워줘야 하지 내가 누구하고 비교한다든지 내가 나 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채울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채우는가 그게 이제 9장 10절부터 나옵니다. 9장 10절부터 17절까지 나옵니다. 제가 한번 읽어볼께요. 1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자,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께서 먼저 떠봤지요. 주님이 제자들에게 지시와 명령을 했지요. 지시와 명령을 할 때 인간들은 각자 ‘나’라는 게 있잖아요. ‘나’. ‘나’가 주의 지시와 명령을 이걸 안으로 채울려고 하지요. 채우면 뭡니까? 우리가 무엇 무엇 할 수 있습니다 가능성.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있는 것을 가지고 주의 지시를 이렇게 메꿀려고 할 때 주님께서 이 지시와 명령을 결국 여기서 세 번째 오해, 인간들이 하는 오해. 갭이 생기지요.


주님의 지시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벌어져도 너무 벌어졌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구원은 주님의 사전 해석이 우리한테 적용시킨다 했어요. 채우시는 거에요. 우리를 채워버립니다. 하지도 못하는데 무조건 채워는 져야 돼요. 하지 못함을 분명히 앞서서 먼저 선제해서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이건 누가 채웠지? 라는 물음이 가능한 겁니다. 누가 채웠지?


물론 우리는 정답을 알아요. 주님이 채웠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안돼요. 뭡니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왜? 나의 무능함을 통과한 주님의 가능이기 때문에 여기서 내가 못하는 것 주님이 하셨네요 이렇게 하지 말고 그냥 고개 팍 숙이고 내가 예수님의 안에 들어온 것은 이것은 기적 중에 기적이고 이건 진짜 떡 중의 떡이다. 진짜 왠 떡입니까? 이거 희생 다 피와 살 뜯어서 적용시킨 너 때문에 죽었던 내 십자가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런 환경을 마련해준 겁니다.


오병이어는 옛날 지나간 일입니까?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요. 내가 하고 있는 실패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감사로 이어지는 결과, 이 현장이 무슨 현장이냐 하면은 오병이어의 현장이에요. 떡을 배불리 먹었더라 이런 거 따지지 마세요. 인간이 못하고 주님은 채워야 되니까 적용해야 되니까 채워진 것.


봅시다. 여기 12절에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이러한 정황, 이러한 상황을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신 거에요. 일종의 절망이죠. 인간의 입장에서는 절망적이고 뭔가 일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어떤 인간이든 다 예측할 수밖에 없어요. 궁지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비교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수학을 아니까 여기 보리떡 5개 물고기 두마리. 그런데 남자만 몇 명입니까? 오천명. 이 사람들이 그냥 허기 채우는 정도가 아니고 배불리 먹어요. 배불리 먹는다. 이거 수학시험 4번 문제 나왔다면 답은 어떻게 하실렵니까? 수능의 수학문제 나온다면 답 어떻게 나옵니까? 수학 정석에 안 나오는 문제에요.


그러나 이미 인간의 수학에도 이게 나와 있어요. 문제 하나 낼 테니까 빠른 사람은 0.1초 만에 풉니다. 늦은 사람은 0.2초 만에 풀고요. 면적이 100제곱미터의 면적에 정사각형이다. 모든 변이 똑같아요. 한 뼘에 길이는? 이야기해보세요. 빨리 이야기 해보세요. 면적이 100제곱미터의 정사각형의 한 변의 길이는 얼마입니까? 예? 10m요?


틀렸습니다. ±10.이게 인간의 수학에서도 ±10이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수학은 –10m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현실적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에요.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아시고 인간들이 무엇을 진리가 아니라고 빼느냐, 그 빼느냐에 주님께서는 거기에다가 집중해버려요. 그래야 인간의 불가능성이 드러나니까요.


문제는 주님이 내시고 인간은 못합니다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 그런데 인간의 못합니다가 뭐냐? 인간은 자기가 못합니다라는 말을 차마 안 해요. 자기가 자기한테 찬미하고 자기 존재에 대해서 자기가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서 할 수 없는 걸 빼버리고 할 수 있는 것만 골라서 나 이 정도입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죄악 된 본성이거든요. 기도 잘 합니다 이런 거요.


이 마이너스 왜 빼요? 선인데 마이너스일 리가 없어. 선이니까. 마이너스는 없습니다. 있으면 플러스 되거든요. 없음은 없다. 그래서 빼버리고 10m, 10m정사각형으로 보는 거에요. 정답은 ±10m거든요. 물론 ±한다고 떨어지진 않겠지만. 자, 이 문제를 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예를 들어서 문제를 보리떡 5개 물고기 두 마리인데 유치원 한 살짜리 아이 두 명이 있다. 어떻게 먹일 것이냐? 이건 뭐 보리떡 두 개 반 물고기 한 마리씩 주면 아이들이 배불리 먹어요. 배불리 먹는다 이 말이죠. 이 문제가 아니고 오천명이에요. 오천명.


그러면 방법을 알려드려요? 이거 알려드리고 끝내야지. 남자 오천명은 한명으로 줄이면 되죠. 한명으로. 이게 바로 교회입니다. 예수님이 머리고 예수님이 갖고 있던 나머지 다 오천명이 되든 14만 4천명이 되든 다 나눠먹는 거에요. 내 살과 내 피, 내 포도주와 내 떡을 다 먹는 거에요. 문제는 오천명을 내세웠는데 오천명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왜? 한 아담 속에 같은 아담 속에 DNA이기 때문에 오천명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뭐냐? 떡을 먹었다는데서 모든 인간은 동일해요. 중요한 것은 그 중에서 주님이 떡을 주셨다고 아는 사람과 주님께서 이 보리떡 5개 가지고 어떻게 어떻게 해가지고 우리를 배불리 먹였다는 내가 배불리 먹었다 에 관심 있는 사람과, 우리는 죄인입니다. 저는 나의 것만 평생 내 능력과 실력만 의지했지 주님께서 내가 못하는 것을 차고 들어올 줄은 몰랐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죄인 것을 아는 사람. 이 오천명 가운데 몇 명 있었습니까? 다 떠났어요. 다 떠났어요.


옆에 남아있는 것 보니까 주님 제자들 있어요. 주님이 제자들에게 슬쩍 약을 올립니다. 너희들 가지 왜? 너희들도 가지?? 이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이 하는 말이 영생의 말씀이 계시니, 갑자기 뭐냐? 요한복음 6장에 보면 그냥 말씀이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6장에 보면 영생의 말씀 맞지요? 6장 68절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베드로가 이 영생의 말씀을 어디서 가져왔느냐 하면은 6장 앞에 보면 “내가 생명의 말씀이다” 했기 때문에 제자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체를 떡으로 보는 거에요.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저 떡은 잠시 허기를 메꿀 떡이지 영생의 떡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오신 것은 떡 줄려고 돈 줄려고 온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영생의 말씀을 줄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 뜻을 전하기 위해서 그냥 이런 보리떡 5개 물고기 두 마리를 이용했을 뿐입니다 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보리떡 5개 물고기 두 마리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쓰잘데기 없는 우리 자신으로 보자. 우리 자신으로 본다면 우리 자신은 아무 보잘 것 없고 쓸데 없지만 본인이 본인을 무시할 자격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내가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되는 주님과의 관계가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사람이 내 가치를 주장해버리면 나의 원수 때문에 내가 원통, 분통, 절통을 해요. 억울해서.


그냥 내가 아니고 내 안에 주님이 내 안에 나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귀한 것이 있으면 적들이 어떤 적들이 비난해도 내가 나를 함부로 평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평가를 개무시할 수가 있는 거에요. 나도 나를 무시를 못하는데 네가 나를 뭐 그걸 억울해 분통해하지 말고 이야기해라 하는 식으로 살면 되는 거에요. 우리가 소중한 사람이라는 거에요.


그 소중한 것을 우리가 자꾸 가리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과 소중한 사람이라는 게 이게 충돌되지 않아요. 같이 일어나야 돼요. 내가 소중한 것이 아니고 소중한 것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주님께서 오천명을 먹이셨다는 이 자체가 이걸 한명으로 보면 이 한명이 보리떡 5개 하나와 이 한명이 결국은 누구에게 종속되어 있는가? 예수님께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헤롯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헤롯은 누가 없어요? 주님이 없을 뿐더러 주께서 일을 벌려놓은 그 변두리에 있다 보니까 발발발 떠는 겁니다. 세례 요한이 하니까. 예수님의 일을 하니까. 저거 내가 죽였는데. 내가 죽였는데 왜 살아났지? 그러니까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지킬려고 행한 걸로 일이 깔끔하게 마감이 안 되고 나중에 지옥 가서 오지마! 할 정도까지 계속해서 누가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데 벌벌벌 떨고 있는 거에요.


오늘날 교회 다니는 불신자들이.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하는데 돌아서면 벌벌벌 떨어요. 내가 그때 다리미질 안한 오만원짜리를 냈다. 그냥 꾸겨진 거 냈는데. 벌 아닐까? 모든 생각이. 내가 전도했는데 뿔나서 교회 안 나온다고 하면 나로 인하여 저 형제 지옥 보내고 맷돌로 목에 매면서. 우리는 말씀을 못 지켜요. 감사하면 되지. 말씀 못 지키는 걸 감사하면 될텐데 감사가 아니고 내 식으로 내 가능성으로 못했다는 것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것 그것 귀신 한 7천 마리 귀신에 포위된 상태입니다. 오늘 제목은 ‘오지마!’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왠 터널효과입니까? 통과할 수 없는 것을 통과해놓고 뒤돌아보니 다 주님이 하신 것을 그 전에는 내가 귀중하다 여겼는데 내가 귀중한 것보다 더 귀중하게 귀하게 주께서 사용하셔서 나를 없애주시고 이제는 나의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역할 할 수 있음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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