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8장 37절 (빛의 산란)211116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8장 22절부터 56절까지 보게 되면 몇 가지 일이 나오지요. 하나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더불어서 갈릴리 바다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풍랑이 일었고 예수님은 주무셨고 제자들이 그 풍랑을 보고 우리가 죽게 되었다 해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깨우니까 예수님께서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고 그 다음에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고 나무라시고 제자들은 자기들 나무랜 것은 안중에도 없고 어떻게 저분이 누구신데 바람과 물이 명령에 순종 하는가 놀라기 바빴지요.
그 다음에 26절부터 보면 거라사인의 땅에 귀신들린 가자 있었는데 귀신 들린 정도가 아니지요. 귀신들이 집단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귀신이 얼마나 많은지 그 이름을 스스로 주님께서 군대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많은 귀신들이 들어가 있어요.
이제 예수님이 이름이 무엇이냐 하니까 그들이 군대라고 하니까 군대라고 하는 것은 많은 귀신이 들어 있기 때문에 군대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래서 그 귀신들이 우리 주님에게 무저갱으로 가지 않게 해달라 비니까 귀신들을 돼지에게 보내게 하니까 돼지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집단적으로 투신해가지고 돼지들이 다 죽었지요.
그 뒤에 귀신들은 어디 갔느냐. 그건 더 이상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거라사인에 있는 사람들이 소동을 보고 예수님께 부탁하기를 빨리 우리 동네에서 빨리 떠나기를 바랬고 그 다음에 40절부터 56절인데 여기 두 개의 일이 섞여있지요.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또 어떤 일이 있느냐 하면은 어떤 여인이 12년 동안 피를 흘리는 여인이 하혈을 하는 여인이 와서 가만히 와서 옷에 손을 대니 그 피 흘리는 증세가 즉시 사라졌습니다.
이럴 때 주님께서 누가 내게서 능력이 나가는 그 계기를 만들었느냐. 누가 내게 손을 댔느냐 하니까 그 여자가 겁이 나가지고 제가 손댔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주님께서 나무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칭찬을 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그렇게 하시고 그 다음에 회당장 딸에게 가서 믿기만 하라. 그러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과 아이의 부모 외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하니까 모든 사람이 아이가 늙어서 죽은 게 아니고 젊어서 죽었으니까 애통해서 우니까 주님께서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이렇게 할 때 예수님이 비웃음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손을 잡고 아이 보고 일어나라 명령하니까 그 영이 돌아와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지막 56절에 이 부모가 놀라니 예수께서 경계하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지금 이게 몇 개냐 하면은 하나, 둘 네 개죠. 네 개. 네 개를 한꺼번에 처리하면 이렇습니다.
이게 한꺼번에 처리하면 ‘유령의 물질화’. 이게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육신, 육체도 여기 포함이 되어 있거든요. 물질, 육신과 육체로 된 이것을 인간은 자기 육신+영혼, 또는 영. 육신과 영으로 되어있다 인간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이란 육신과 영으로 되어있다 라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은. 이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에요. 왜 잘못된 생각이냐? 인간 자체가 없으니까. 인간 자체가 없는데 육신, 영 결합이. 인간이라는 것이 있다고 치고 그럴 때만 육신+영이 되는데 인간자체가 없다면 이런 것도 육신+영도 성립이 안 되는 거죠.
그렇다면 인간 자체가 없다면 인간은 뭐냐? 육신으로 된거냐? 아니면 영으로 되는거냐? 라고 우리가 궁금해 하잖아요. 오늘 본문 내용도 그거에요. 그것도 궁금해 할 자격도 없다는 거에요. 네가 인간에 대해서 궁금해 할 자격이 없다. 왜냐 하면은 인간은 육신+영으로 되어있다 할 때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게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 자체가.
나는 육신에다가 영혼이 있다 또는 영이 있다 이렇게 결합된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 문제 중에 하나가 유령을 물질화시키는 겁니다. 인간은 육신이 있으니까 코, 눈, 입 등등 육신으로 되어 있으니까 유령을 상대할 때에 이걸 유령이라고 보는 거에요. 영으로 보는 거에요. 나는 육체로 되어 있는데 저쪽은 육신 없으니까 영으로 됐다 이렇게 보는 것이 인간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여기 29절 한번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그 사람을 붙잡으므로 그를 쇠사슬과 고랑에 매어 지켰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 사람들이 귀신들린 청년이 자꾸 이렇게 말썽을 일으키니까 뭘로 묶었습니까? 쇠사슬과 고랑이죠. 쇠사슬, 고랑은 물질이죠. 물체죠. 쇠사슬과 고랑을 가지고 뭐를 묶고자 했다? 귀신들린 사람을 묶고자 했다는 거에요. 왜 묶고자 했느냐 하면은 그 사람 속에 귀신이 들어있으니까 귀신은 뭘 가지고 하면 붙들 수 있다? 쇠사슬과 고랑을 가지고 묶어버리면 꼼짝 마라 했으면 우리는 그 사람 속에 있는 악한 영을 제대로 다스리게 되었다라고 자부하고 싶은 거에요. 이게 바로 문제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그 사람이 그 거라사인 마을에 오지 않았으면 그들은 돼지 키우면서 축산업 하면서 스스로 문제 있다고 생각하겠어요? 문제 없다고 생각하겠어요? 문제가 없지요. 그들은 뭐냐 하면은 첫 번째 문제 없음이죠. 문제 없음이 여기 귀신들린 자 찾아오니까 여기서 문제 있음이 되고 나중에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것이 문제가 해결이 되지요.
문제가 해결이 되면서 문제 해결은 주님 쪽에서는 문제 해결됐는데 여기서 문제 없음에서 문제 있음이 생기고 문제 있음은 문제 해결로 되는데 지금 이 과정이 오늘날 우리 과정하고 똑같은 거에요 지금. 여기서. 문제 해결이 되면서 문제 해결되는 것은 주님 쪽이고 여전히 해결 안됨 이건 바로 세상 쪽입니다.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은 여기 37절에 보면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예수께 떠나가시기를”, 누구를 떠나기를 원합니까? 예수님이 떠나시기를 요청했지요. 구했지요. 예수님이 떠나주게 되면 문제 없음 그때 그 시절이 좋았다 이 말입니다. 귀신들린 자가 들어왔을 때 문제 있었지요.
예수님은 문제 있음의 문제 해결자로 왔는데 결과적으로 그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도 제발 떠나주기를 그 다음에 누구도 떠나주기를? 예수님도 떠나주기를. 그러면 그들은 문제가 없음이 된다고 여기겠지요. 이 문제 없음이 문제가 있는 거에요. 문제 없음이. 왜냐 하면은 예수님이 떠나버리면 이것이 바로 지옥이 되는 거에요. 천국은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고 예수님이 없는 곳이 지옥이거든요.
처음부터 이거는 뭐냐 하면은 누가복음 8장 22절에서 56절까지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는데 그걸 한마디로 요약하면 뭐냐? 마주침입니다. ‘마주침’. 사람과 사람들의 마주침이 아니고 예수님이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을 예수님께서 유발해놓고 거기에 예수님이 투입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들과의 마주침에서 마주침을 그걸 계기로 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누구하고 마주치느냐 하면은 예수님하고 마주치게 되는 거에요. 예수님하고 마주치는데 그 결과는 뭐였습니까? 사람들은 제발 플리즈 우리 동네에서 좀 나가주실래요? 라고 부탁한 거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다녀가지 않았으면 그들은 멀쩡하고 문제없다고 여기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다녀가니까 일을 발생시키며 다녀가니까 그들의 의식 속에는 뭐냐? 부디 예수 없이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겁니다. 예수 없이. 예수 없이 살아도 아무 문제 없었다는 겁니다. 주님은 그게 문제 있다는 거에요 그게. 그게 문제 있다는 겁니다. 예수 없이 살아가는 것.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다니면서 교회 오면서 많은 사람이 교회 왔다가 갑니까. 안 믿어도 될 걸 괜히 믿었다 하면서 떠난 사람이 굉장히 많거든요. 떠난 사람보다 더 나쁜 경우가 뭐냐 하면은 교회 목사 집사 장로로서 50년 동안 봉사하면서 예수 안 믿는 사람들. 뭐 대부분이죠. 교회를 믿으니까. 교회 커지는 것만 믿기 때문에 예수는 안 믿어요.
교회 있으면 되지 굳이 예수가 필요 없어요. 내가 돈 투자해서 세운 내 청춘과 역사와 봉사를 바친 이 교회만 멀쩡하고 교회만 이렇게 부동산 값만 오르면 아무 문제 없어요. 교회 부동산 값이 내려가는 게 좀 문제가 되겠지만. 올라가면 이거 팔고 다른데 가면 되고. 더 멋진 예배당 짓고 뭐 이러면 되니까. 그들은 자기 교회 욕하면 벌컥 화를 냅니다.
그러나 예수님 이야기 십자가 이야기하면 또 화를 내요. 왜냐 하면은 자기를 치는 이야기로 들리기 때문에. 자기들은 교회만 있으면 돼. 그러니까 오늘날 교인들과 목사와 장로에게 있어서의 오늘날 교회가 뭐냐 하면은 거라사 지방의 돼지입니다. 그들에게는 돼지만 있으면 돼요. 공식 하나 적을까요? 교회=돼지.
그런데 이 돼지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귀신이 들어갔지요. 교회에 뭐가 들어갑니까? 이 귀신이 들어간 거에요.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제발 예수님 복음은 좀 꺼져줄래? 서울말로. 우리교회에서 십자가 복음 제발 꺼져줄래?! 제발 부탁하오니 이 교회가 역사가 몇 년인데 이 교회 역사 건들지 말고 십자가 복음 좀 나가줄래?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잖아요. 그런 이야기한 사람도 있었고. 제주도 어떤 성도가 제주도 어느 교회 가니까 십자가 복음 하니까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십자가 이야기를 왜 하느냐? 이 말이죠. 그 체험 한 사람 아직 제주도에 살고 있을걸요. 설마 교회인데 십자가 복음 이야기는 먹히겠지. 아니. 귀신이 귀신같은데 그게 먹힐 리가 있겠어요?
교회에 부흥되는데 도움 되지 않으면 전부 다 교회의 적입니다. 마귀 들어온 걸로 여겨요. 교회 부흥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교회가 사랑이 넘치고 뭐 이렇게 사랑이 넘치고 이 분위기 흐리면 그거는 뭐냐? 그건 몽골 지방에서 날라 오는 모래폭풍과 같은 거죠. 그걸 뭐라고 합니까?
황사지요. 황사 날라온 거에요. 황사 날라온 거. 분위기 다 흐려놨다 이 말이죠. 분위기를. 싸늘하지요. 분위기가. 주님의 분위기가 싸늘한 거에요.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게 뭐냐? 인간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 유령을 물질화하는 이 자체가 이게 바로 귀신들린 짓이다 이 말입니다. 유령을 물질화하는 자체가. 이게 실패작이다 이 말입니다.
유령을 물질화하겠다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나는 행복하겠다 이거거든요. 내 행복에 유령이 귀신이 끼어들면 내 행복이 뭐로 변합니까? 이게 비극으로 변하지요. 이게 싫은 거에요. 이게 싫고 주님 보시기에 문제 있는 거에요. 나는 행복해야 되고 나는 항상 편안해야 된다고 우기는 그 자체가 이것이 뭐냐 하면은 인간이 문제 있는 겁니다. 귀신 하나도 다룰 수가 없어요.
그러면 인간은 뭐가 문제냐 하면은 바로 인간은 육신+영 이라고 생각하는 이것. 내 육신이 있는데 여기에 깨끗한 영이 임하면 그게 내가 천국 가는 백성이 된다는 이 공식 자체가 이게 있을 수가 없는 거에요. 왜 이게 있을 수가 없느냐 하면은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요.
천국은 뭐냐? 천국은 사적 의식에서 벗어나는게 천국이에요. 개인적 의식에서 벗어나는 거에요. 개인적 의식 갖고 있으면 어떤 경우라도 이거는 천국의 현상이 아닙니다. 반딧불 알지요? 반딧불이 한 마리만 번쩍입니까? 아니면 여러 마리가 그 현장에 반딧불이 번쩍 번쩍 거려요? 그 현장에 집단적으로 움직입니다. 집단적으로 움직이지요. 그게 바로 천국도 마찬가지에요.
천국도 개인적인 노림수 없이 주님이 작용을 하게 되면 여기저기서 반짝 반짝 거리는 겁니다. 이걸 좀 설명해드릴게요. 천국은 사적인 의식에서 또는 사적 의미에서, 개인적인 의미에서 벗어나는 게 천국이에요. 천국의 나는요?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곳이 천국이에요. ‘나는요’.
그래서 천국의 특징은 반딧불처럼 우발적으로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거든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천국은 진행 중이다. 뭔가 진행 중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가지는 게 아니고 사적인 것 같으면 내가 가져야 돼요. 가지는 것이 아니고 서로를 보면서 반딧불 불빛 확인하듯이 확인되는 겁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제가 간단한 자연 현상을 한번 이야기할게요. 하늘은 왜 푸른가? 하늘은 왜 붉지 않고 왜 노랗지 않고 왜 푸른가? 같은 질문. 구름은 왜 하얀가? 그것은 하늘과 구름을 만드신 하나님 마음이 착해서 그렇다. 이거는 유치원 애들한테 이야기하는 것이고요 유치원 벗어나고 초등학교 벗어나면 해답을 달리 해답을 해야 돼요.
물리적으로 상식적으로 내가 물리적 이해를 해보겠습니다. 이 세상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다음에 빛이 올 때 빛은 파장으로 되어있어요. 이 이야기가 오늘 본문 이해하는데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기 연못이 있는데 연못에 돌을 던진다. 이만한 돌을 던지면 풍덩하고 돌이 빠지겠지요. 빠지면 이걸 파원, 파장이 일어나는 기원이 되는데 파장이 이렇게 일어나게 되면 이걸 골 이라고 하고 이걸 마루라고 해요. 이 마루과 골 사이에 이걸 파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이걸 가지고 진동이라고 하고요.
이건 뭐냐 하면은 종파라고 하지요. 이렇게 움직이는 거에요. 마루와 마루 사이도 하나의 파장이 됩니다. 진행방향이 이렇게 돼요. 행파도 있는데 행파 같은 경우에 좁아졌다가 넓어졌다가 좁아졌다가 이런 거 있잖아요. 어쨌든 간에 파장을 생각해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고요한 연못에 돌이 주어졌다. 돌이 주어지게 되게 되면 물의 표면 장력이 도중에 충격을 받았지요. 있어가지고 이거는 복원하려고 복원력이 작동하고 있어요. 그리고 종파든 행파든 충돌이 일어났을 때 여기 표면 장력이 하나가 됐던 것이 구멍이 났으니까 빨리 복원 하려는 하나 있고, 또 위로 당기는 것이 있기 때문에 중력이 있고 중력과 복원 때문에 물의 파장이 생기는 겁니다.
그걸 그대로 방금 제가 무슨 이야기했느냐? 파장 이야기했지요. 바로 파장은 뭐냐? 위에서 오는 파장이 빛이에요. 빛이 입자에게 오는 거에요. 작은 입자에게 오는 겁니다. 빛의 복사 파장의 1/10 입자, 1/10 입자가 될 때 이 입자가 되게 되면 그걸 산란이라고 하는데 파장이 돌멩이처럼 부딪혀가지고 여기서 부딪혀 파동이 생기거든요.
파동이 생길 때 이것을 무슨 색이냐 하면 짧은 파장으로 푸른색이에요. 구름같은 것은 물 입자가 크기 때문에 이게 흰색이 된다고요. 흰색. 그래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뭡니까? 산란이죠. 산란. 제가 왜 산란하고 성경하고 굳이 왜 연결시키느냐 하면은 산란된 판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말이죠. 산란된 판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색깔을 보여주잖아요.
파장이 짧은 입자에 부딪히면 그게 푸른색, 파장이 큰 것에 하면 붉은색이라든지 안 그러면 흰색. 노을 같은 경우에 지구가 비슷하기 때문에 이거는 참 초등학교에서 하면 좋아하는데 지구가 비슷하게 해가 지기 때문에 파장이 길어져요. 그때는 노을이 붉게 돼요. 붉게 된다고요.
그러면 네가 붉다 너는 파랗다 말을 하면 안돼요. 천국은 사적인 의식이 없기 때문에요. 천국은 그냥 하나의 주로부터 온 산란됐기 때문에 빛깔이에요. 빛깔. 컬러풀한 거에요. 아름다운지 모르겠지만. 아름답게 모든 게 깨어지는 거에요. 뭐처럼? 반딧불처럼. 주님께서 돌멩이를 이 더러운 세상, 문제 많은 세상 여기에다가 주께서 돌멩이처럼 여기서 마주침이 일어나는 겁니다.
마주침이 일어나니까 이 세상에 그 악마의 통치를 한 이 세상이 자기의 본색을 그냥 노출되어 버리는 거에요. 그걸 감추지 못하고. 반응을 일으키는 겁니다. 그럴 때 이것의 문제가 뭐냐 하면은 인간의 문제는 간단해요. 앞에 나를 붙여요. 나는 문제없다가 문제가 되는 거에요. 나는 문제없다. 누가 오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부딪힘이 마주침이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는 자기는 문제 없는 거에요. 늘 희극이여야 되고 늘 웃고 지내야 되고 행복해야 되고 계속 이런 식이에요. 마귀, 악한 귀신 그거는 물질로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자가 거기에 묶였습니까? 으랏차차 해가지고 풀어버렸지요.
제가 지금 누가복음 8장하면서 22절에서 56절까지 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잖아요. 네 가지 일이 있지요. 첫 번째는 뭡니까? 풍랑이 갑자기 일었다는 것. 그리고 풍랑이 뭔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기이하고 신기하다는 거에요. 그 다음에 귀신 들린 자가 있었는데 그 귀신들이 돼지 속에 들어가 몰살했다는 것.
그 다음에 또 뭐냐 하면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는데 다른 사람은 죽은걸 확인하고 울었는데 주께서는 잔다고 이야기했고 그 일 중간에 12년 동안 피 흘린 여인이 옷만 만져도 갑자기 그 자리에서 그 병이 나아버렸지요. 자, 그런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한마디로 이렇게 묶어버리면 뭡니까? 마주침이고 누구와의 마주침입니까? 주님과의 마주침이죠.
어떤 자는 귀신이 나갔다 어떤 자는 병이 나았다 좋겠다. 좋겠다 하지 마시고 그냥 산란이에요. 그 사람은 그런 색깔을 낼 때 그 색깔도 주님에게 나온 색깔이고 어떤 사람이 풍랑이 잠잠해도 그 주님의 또 다른 면을 그 사람, 제자들을 통해서 보여준 것이고 어떤 사람은 12년 동안 피흘려온 것도 산란이에요.
빛이 와서 색깔이 원래 그렇잖아요. 한 색깔만 있는 게 아니고 약 한 2만2천 색깔인지 인간이 이해 할 수 있는 색깔이 그 정도 된답니다. 엄청난 색깔이 빛의 그 파장 따라서 전부 다 빛이 조금씩 다 다르잖아요. 채도도 다르고 다 다르단 말이죠.
여기서 산란이라는 말 한 순간 여기서 뭐가 날라가 버렸습니까? 산란이라는 말 하는 순간 뭐가 날라갔어요? ‘나는요’ 라는 말이 날라가 버렸죠. 이게 바로 천국이죠. 천국은. 누구의? 주님의 여기 계시고 일하고 계시고 일이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현형입니다. 표현해주는 거에요. 개인이 ‘나는요’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우리 교회는요?’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내 인생은요?’ 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을 기도하니까 살았잖아요. 그럼 이걸 보고 사람들은 뭘 생각합니까? 저도 얼마 전에 우리 딸 죽었는데 살려주세요 이렇게 나온다면 지금 그 사람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은 예수님을 물질화시키는 거에요.
자, 인간이 육신이라고 생각했죠. 이 육신 자체 인간은 문제없다고 생각했지요? 단 육신에다가 좋은 영, 착한 영, 정신이라고 해도 되고 마음이라고 해도 되는데 이런 것만 받으면 나는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육신은 문제없으니까 뭐만 붙으면 된다? 예수그리스도라는 영적 존재만 오게 되면 나는 천당 간다 이 자체가 바로 귀신들린 사고방식이에요. 이 자체가.
여기서 뭐가 계속 살아있습니까? ‘나는요’. ‘나는’. ‘나’는 계속 살아있는 거에요. 나는 어떻게 됩니까? 빛의 산란은 어디 가버렸습니까? 없지요. 없는 거에요. 주님은 이 물질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물질+영을 하는 게 아니고 물질 자체 영 자체를 없애버리고 ‘인간 자체=육신과 영으로 되어있다’ 이 공식 자체를 없애버리고 이걸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생명으로 또는 생명의 빛으로 바꾸어버립니다.
나는 없어지고 생명에서 산란된 빛이 우리 각각 다 다르지만 다 묶어보면 동일한 생명에서 나온 그러한 주의 일하심의 결실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천국입니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어요. 정신은 뼈다 라는 말을 한 사람이 있어요. 상당히 말이 어렵지요. ‘정신은 뼈다’. 이걸 제가 쉽게 풀이해드리겠습니다.
정신은 뼈있는 곳에만 정체를 드러낸다 이 말이에요. 정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거죠. 제대로 된 정신을 알려면 뼈가 있는 곳에 정신이 있다. 인간은 뼈로 되어있습니까? 정신으로 되어있습니까? 세상에 철학들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뼈로 골조가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다가 정신이라는 것이 입혀져 있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철학에서 그렇게 생각해요. 철학에서.
이 사람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거 누가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헤겔이라는 사람이 이야기했어요. 그게 아니다. 그러면 그 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자기를 그렇게 관람자로 이렇게 본다는 거에요. 인간이 이렇게 보게 되면 인간이 이렇게 본다는 것은 인간의 지금 자기 자리는 어딥니까? 자기 자리가 이게 뭐에요? 이미 정신이 되어있어요.
정신은 뼈라고 말하는 것은 이 자체는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이게 왜 말도 안 되느냐. 이게 왜 말도 안 되느냐 하면은 이 정도로 말도 안돼요. 어느 화가가 내가 그린 그림 속에 내가 있다. 이게 말이 돼요? 안돼요? 이게 엉터리죠. 자기 따로 있고 그린 그림 따로 있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설명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나라고 할 때 내가 있고 나는 따로 있다고 바깥에 나는 따로 있다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림 속에는 화가가 못 들어가지만 정신 뼈 속에는 이미 이 뼈가 누구 뼈에요? 자기 뼈잖아요. 이 정신 누구 정신? 자기잖아요. 정신은 뼈라는 말은 나는 이렇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거에요.
왜? 여기 정신 속에 본인 들어가 있고 뼈 속에 본인 들어가 있으면 이건 뭐냐 하면은 나는 모르겠고 그냥 나는 나다. 이건 말하나 마나, 이건 아무 새로운 의미가 추가된 의미가 없어요. 너무 어렵게 이야기하나? 제가 굉장히 쉽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굉장히 쉬운 이야기에요. 더 쉬운 이야기해볼게요.
예수님하고 악마하고 싸웁니다. 할 때 다음 정답은 1. 예수님 이겨라 이게 정답일까 아니면 2. 악마 이겨라 이게 정답일까 3. 누구든지 이겨도 상관없다 정답이 어느 것입니까? 1번 2번 3번 가운데. 어느 것입니까? 1번 예수님 이겨라 하면 본인은 마치 악마에 안 속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이에요.
예수님 이겨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 이기면 나는 예수님 이건 것 보고 이긴 편에 속한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러면 주님 나는 손대지 마세요 이거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이거는 엉터리죠. 악마가 이겨라. 악마가 이겨라 말은 뭐냐 하면은 자기는 이미 예수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누구 맘대로? 네가 누구 맘대로 예수님 편에 서있어?
예수님 편에 있으면서 악마 이겨라 이 말은 일종의 심술같은 거다 이런 거라 이 말이죠. 악마가 이기는 걸 봐가지고 내가 이해하겠다 이런 식이거든요. 악마 이겨라 이런 사람 별로 없어요. 세 번째, 세 번째가 정답이 되는 이유가 누가 이기든 예수님하고 악마 싸우는데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거든. 왜? 천국에는 사적 의식이 개인적 의식이 이거는 인정을 안 해줘요.
누가 이기든 그거 나하고 무슨 상관있는데요? 악마가 이기든 예수님이 이기든 내 문제가 아닌 거에요. 그 정도로 우리는 내 문제에서 못 벗어난다 이 말입니다. 인간은. 이게 바로 문제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찾아올 때 인간은 기껏 나는 육신이다. 뼈다 괜찮은 정신으로 무장하자 지금 이 정도밖에 안돼요 인간은.
그러나 정신은 뼈다 이 말은요 뼈가 있는 곳에 진짜 정신이 나타난다. 이 뼈가 결국 무슨 뼈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십자가 일어나야 아! 정신이라는 것이 나와 관련된 게 아니고 원래부터 악마는 나와 상관있는 게 아니고 악마는 예수님을 겨냥하는 거에요. 예수님을.
그 이유가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여기에요. 31절에 나옵니다. 31절에 악마가 부탁하는 게 있습니다. 악마가 뭐라고 하느냐. 제발.. 제발 넣지 말고,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제발 넣어도 괜찮네요.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악마가 예수님이 자신을 무저갱, 무덤 없는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게 하는 분이라는 것을 인간은 몰라도 누구는 압니까? 영은 알지요.
현재 인간들은 모르잖아요. 인간은 지금 돼지 치는 것만 안다고요. 인간은 자기 알면 그걸로 됐지 더 알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자기는 육신만 알면 됐지. 육신에다가 괜찮은 정신만 또는 괜찮은 정신만 또는 괜찮은 영만 골라잡아서 붙이면 나는 잘된다 본거에요. 무저갱이라는 것을 인간은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악마가 주님한테 무저갱 영원한 감옥에 집어넣지 마세요 라고 부탁한다는 말은 이거는 인간들이 아는 레벨하고는 별개의 문제에요. 인간은 괜찮은 영이고 나쁜 영이고 고를 자격도 없고 그런 안목도 없어요. 이런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일들은 결국 뭐냐 하면은 인간 배제하고 벌린 일이에요. 인간의 한계성이란 한계성은 다 드러내고.
예를 한번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22절에 보면 풍랑이 치지요. 자, 여기서 마치 광풍이 호수에 내려칩니다. 광풍이. 자, 광풍은 물질입니까? 물질 아닙니까? 광풍, 바람, 물, 풍랑. 물질이죠. 이 물질에 대해서 아까 귀신들린 사람은 쇠사슬과 고랑으로 잡아맬 수 있는데 이 풍랑과 물결치는 것은 인간이 감당 못하지요. 감당 못하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24절에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죽겠나이다’. 인간은 항상 이 물질에 대해서 죽음에 노출되어 있는 거에요. 어느 정도 괜찮으면 견딜 수 있지만 쎈 풍랑, 바다의 배만 달랑 타고 있는데 쎈 풍랑이 오고 물결이 쳐버리면 인간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본인이 더 이상 이 땅에서 존속할 수 없다는 그것을 감을 잡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육신은 물질이잖아요. 결국 인간은 물질은 더 쎈 물질한테 지금 시달리고 있지요. 그걸 이렇게 합니다. 물질에 갇혀있다. 물질에 갇혀있는 거에요. 인간은 자신의 물질에 갇혀있는 거에요. 불신자들의 공통점이 뭐냐? 예수, 복음을 안 받아들이는 이유가 뭐냐? 본인이 갇혀있다는 사실을 애써 거부해요. 갇혀있다는 사실을.
인간은 2년 전에 인간들이 UN에서 결정해가지고 모든 인간은 앞으로 2년간 마스크 쓰기로 결의했습니까? 아무 일 없는데? 인간의 코 이것도 물질인데 거기에다가 마스크라는 인공적인 것으로 막아보세요. 이게 안 답답해요? 답답하지요. 턱스크가 왜 나왔는데? 답답해가지고 하도 답답해서. 이 답답한 것을 온 지구인들이 심지어 북한에 김정은 빼놓고 나머지는 다 쓰고 있잖아요. 이거 왜 씁니까?
인간이 물질로서 뭘 감당 못한다? 물질을 감당 못해요. RNA바이러스라는 그걸 감당을 못하는 거에요. DNA 바이러스는 어느 정도 감당했는데 RNA 바이러스가 등장해가지고 감당을 못하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뭔가? 인간은 결국 갇혀있다는 것을 자명한 셈이에요.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죽겠나이다.” 이게 문제 있는 거에요. 왜냐하면 이미 죽어있는 거에요 이거는. 갇혀있음을 가지고 다른 말로 하게 되면 두 자로 하게 되면 이걸 ‘죽음’이라고 하는 거에요. 갇혀 있음을. 갇혀있는 가운데 숨 쉰다 골프친다. 갇혀있어도 골프치고 갇혀있는 자체가 이게 죽음이에요. 왜 죽음이냐? 뭐라고 합니까? 생명이 아니니까요.
예수님의 특징은 무덤이라는 것이 돌무덤이 예수님의 육신을 가둬놨습니까? 이런 것 한번 상상해보세요. 예수님이 무덤에서 살아났는데 돌이 무거워. 좀 열어주세요. 낑낑낑 이랬습니까?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올 때에 구름 탈 때 미리 두 세 번 굴러봤습니까? 이게 빠지겠나 안 빠지겠나 이래보고 구름 탔습니까? 아 구름 괜찮네 타고 올라가는 거에요? 그렇게 되는 거에요?
예수님은 정말 대단한 분이다. 예수님은 대단한 분이 아니고 예수님은 사신 분이에요. 대단한 분이 아니라니까요. 세상에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걷느냐? 대단한 분이 아니에요. 그냥 갇혀있지 않는 분이에요. 갇혀있지 않는 분.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좀 길다만은. 주님은 갇혀있지 않는 분이에요.
그리고 주님의 빛에 의해서 산란되는 사람도 갇혀있지 않아요. 이 얼마나 이것보다 더 큰 행복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요.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갇혀있지 않아요. 죽음이 무덤이 예수님을 못 가두듯이 빛이 비추는 빛 되신 분의 물질과 부딪히면서 산란되는 그 산란의 색깔을 그 무지개같은 성도의 모습을 어느 죽음의 권세도 악마도 가둘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내 생각하니까 가둬지는 거에요. 내 생각. 나는 육신으로 되어 있고 육신은 물 위를 못 걸어. 육신은 풍랑을 명령할 수 없어. 육신이니까 육신의 제한적인 한계를 본인이 알고 있는 거에요. 본인이. 쉽게 가겠습니다. 성령 밖에 있는 사람이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볼까요? 어떻게 볼까요? 성령 밖에 있는 사람은 어떻게 볼까요?
아주 예수 믿을라고 발악을 하는구나. 천당 갈라고 발악을 하는구나. 이기주의야 욕심쟁이 우후훗 뭐 이럴 거란 말이죠. 그 지옥 가면 지옥 가는 거지 뭐 천당 갈라고 애를 쓰느냐. 천당 갈라고 애 쓰는 사람 지옥 갑니다. 왜? 나, 자의식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에.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 특징이 뭐냐? 자의식을 성령이 가만두지를 않아요. 성령이 내부적으로 싸워가지고 내 자의식을 완전히 짓밟아버려요. 하여튼 내 뜻하면 다 밟아버려요. ‘내 뜻’. 나 이제부터 거지로 살겠습니다. 절대 거지 안 되게 만들어요. 내 뜻이기 때문에. 내 뜻이기 때문에. 이제 손님 하나도 오지 마라. 안돼 와야 돼요.
손님 오지 않으면 주께서 손님 주시는 방법은 손님 끌어 모을까? 안돼요. 손님 하나도 안 옵니다. 그게 내 뜻이거든요. 반딧불. 이건 통합적이고 통합적이에요. 천국은. 통합적이고 거기서 나를 끄집어낼 필요가 없는 게 하나의 나에서 분산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파급, 하나의 나의 열매거든요. 포도나무는 두 그루가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단 한 그루밖에 없어요.
한 그루에서 나오는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 열매에요. 성도는. 그래서 포도열매 하나 가지고 나라는 ME라는 I라는 말을 붙이면 안돼요. 나는 생명이 아니고 생명의 열매가 나에요. ‘나’. 생명은 예수님이고 생명의 열매가 나에요. 예수님만이 ‘나’가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나’라는 말 못해요. 그래서 여호와가 누구냐 하면은 ‘나는 스스로 나다’라는 뜻이에요.
나? 오직 나만이 ‘스스로 나’라고 할 수 있는 분이 여호와입니다. 왜? 세상의 모든 있는 것이 주로부터 시작해서 주로 말미암아 주님께로 아주 끝내버리거든요. 끝내버려요. 이걸 당구장에서 한 큐에 끝냈다. 짜장면 내기했는데 나부터 친다고 해서 벌써 끝나버렸어요. 아줌마 여기 오백 났어요. 짜장면. 그것도 옛날 짜장면. 당구장에서 먹는.
한 큐에 끝냈어요. 한 큐에 끝냈을 때 나는 당구대에서 좀 칠려고 들어갈 찬스를 못 잡아요. 당구는 한번 치면 계속 치게 되면 성공하면 실패할 때까지 계속 해요. 우리 구원이 그래요. 기도 솜씨 뭐 솜씨 부릴 기회를 안줘요. 낄 수가 없어요. 낄 수가 없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성경에서 나왔지만 참 어려운 말인데 처녀성이라고 합니다. ‘처녀성’. 순수 그대로 계속해서 끝까지 가버리는 거에요. 여러분 아시지요? 이사야 7장 14절. 처녀가 잉태한 아이는 무엇을 유지합니까? 끝까지. 처녀가 잉태했음을 유지해야 처녀성이에요.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 처녀성의 모든 작업 스케줄은 에스겔 1장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한번 봅시다.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이 얼굴이 사방으로 다르다는 말은 이 천사들이 이 천사들의 체계가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창조의 동서남북으로 설명되어 있어요. 동서남북으로.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동서남북으로. 스가랴에도 나오고. 동서남북에 안 간 곳이 없어요. 꽉 채워져 가요. 꽉 채워져 가요. 천사가 하는 일, 스케줄이 그 프로그램이 온 천지에 숨을 곳이 없습니다. 그러면 이건 뭐냐? 이 천사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형상이거든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을 갖고 있다 얼굴을 갖고 있다 이렇게 돼요.
하나님의 얼굴이 여러 가지 다양한 하나님의 스케줄을 따라서 얼굴들이 사면으로 꽉 차 있으니까 이건 뭘 유지하느냐 하면은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 처녀성이 끝까지 그대로 가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 10장에도 똑같은 하나님의 보좌를 봐요. 이걸 본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 선지자가 이걸 봅니다.
이걸 볼 때 에스겔 선지자가 뭘 느끼느냐 하면은 아 지상에 있는 이스라엘은 망해도 상관없구나 정도가 아니고 많은 것이 이게 원래 하나님의 계획했던 순전함을 유지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나라가 망하는 것이 그게 스케줄 속에 포함이 되어있던 거에요. 그 에스겔은 아무 염려 없지요. 스가랴같은 경우는 성전을 짓는데 사람의 힘으로 짓는 게 아니고 뭐로 짓는다? 하나님의 신으로 짓는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이 손대면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인간은 손대는 게 아니고 인간은 자기가 망해야 될 자기의 그것을 예수님의 오심으로 들통 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이거 복음이에요. 나는 그 원천적 처녀성에 해당되지 않음을 자기가 드러내면 돼요.
드러났다는 말은 이미 그 사람에게 주님이 찾아왔다는 거에요. 너 아니야. 너 아니야. 주님께서 너 아니야 손가락질만 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가지고 우리에게 찾아왔거든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가 얼마나 못되쳐먹었는지 나한테 오는 사람들은 모두 나한테 상처나 받고 꺼져라 이런 식이에요.
여러분 한번 살아보세요. 여러분에게 찾아온 사람 중에 상처 안 받고 간 사람 10분 쉴 동안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한테 온 사람 중에서 나한테 상처 안 받은 사람 한 사람도 없어요. 10분 쉬겠습니다.
강남-누가복음 8장 37절 (빛의 산란)211116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10분 동안 상처 받은 사람들 생각해보면 상처 안 받은 사람이 없을 거에요. 다만 내가 많은 상처를 안줬을 거라고 내가 일방적으로 자꾸 해석은 자기 변명조로 하고 싶지요. 그런데 왜 인간은 타인에서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느냐 하면은 그 사람은 내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인간은 동물하고 달라서 자꾸 의미를 생각해요. 의미를 생각한다고요. 예를 들면 수학 같은 것이 문제가 되는데요 5-3=2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5-3=2다. 그냥 기계적이죠. 그런데 예를 들면 어떤 드라마 같은데 수사 드라마 같은데 이런 내용이 나오거든요.
1984년도에 억울하게 죽은 우리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 그 당시에 아버지를 공산당으로 몰아서 물고문해서 죽여 버린 사람이 5명 있었는데 나중에 아들 하나가 나중에 2020년도에 살아 남아가지고 복수를 하는데 5명중에서 3명을 죽이고 나머지 2명을 쫓는다. 그 이야기가 5-3이라는 여기에 나타납니까? 이거는 그냥 핑계죠. 그냥 동원되는 거고 의미는 따로 있지요. 내 아버지의 원수.
그거하고 집에 냉장고에 사과 5개 있는데 사과 한 개만 먹을려고 했는데 아들 와가지고 세 개를 먹어서 두 개 남았다. 이거는 사과 누가 먹었냐 그 문제지요. 이거는 내 아버지의 원수 문제지요. 그런데 5-3에 이게 나타납니까? 이게 숫자에 나타나요? 안나타나요? 전혀 나타나지 않지요. 5-3에는 의미가 없는 겁니다.
여기에 의미를 부여해야 되는 거에요. 그 의미를 무슨 중심으로 부여합니까? 부여하는 자의 나의 가치를 챙기는 차원에서 의미가 나오는 거에요. 얼마나 이게 악마적입니까. 천상천하유아독존. 나에게만 해당될 때 의미가 있는 거에요. 예수가 뭐라든 하나님이 뭐라든 그건 나한테 의미가 없어요. 예수님이 나한테 잘해줄 때 나에게 의미가 있는 거에요.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천국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무슨 천국이에요. 자기만의 세계지. 이건 자기만의 세계에요. 사람들 친구들 모여가지고 이렇게 할 때 뭐 다음에 어디로 놀러갈까 어디로 놀러갈까 회의할 때 갑자기 한 5분 10분 지나면 뿔따구 나서 집에 간다고 하는 사람이 나오지요. 회의하다면 보면. 그렇지요?
그래 나 빼고 너희들끼리 잘해 먹어라. 이렇게 하잖아요. 나 빼고. 나 빼고 너희들끼리 잘해 먹어라. 나는 안 간다 이러잖아요. 그 사람이 원하는 의미가 뭡니까? 자기 의견이 반영되는 쪽으로 좀 놀러가게 해달라 그런 뜻이겠죠. 좀 놀러가더라도 좀 나에게 유리하게 해달라. 그게 결국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나에게 갇혀있는 겁니다. 나에게 갇혀있는 거에요.
한번 봅시다. 에스겔 10장과 에스겔의 1장의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은 바로 그 시초성 또는 시원성, 하나님의 원래 계획했던 것의 아무 이상 없고 하나님의 일에는 전혀 차질이 없었다는 것을 인자라고 불리는 에스겔 선지자는 그걸 봤다는 겁니다.
비록 자기 나라가 망해도 자기 나라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 나가도 한국이 공산당이 되도 하나님의 일은 아무 의미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공산당이 싫어요 하는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는 기도에요. 그거 소용없는 기도에요. 인간이 하는 기도는 뭐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기도하는 당사자인 내가 보다 행복해지고 내가 불행하지 않기를 하는 나에 관한 의미가 담긴 채 기도했잖아요.
그래서 대구 강의하면서 녹음은 안 됐습니다만은 앞서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전부 다 점검한다고요. 백날 기도해도 주님께서 중간에 나서서 가지고 자, 점검하고 가실게요 해서 주의 뜻이 아닌 것은 다 빼버리고 오직 주의 뜻만 주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드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뭐 통과하는 기도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럼 다는 아니고 주의 뜻에 어긋난 것은 빼고 그래도 안 어긋난 것은 받아줄게 아닙니까? 안 어긋나는 기도의 내용이 뭐냐? 그게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죽어라. 제발 너라는 것을 좀 죽여줘. 너. 너의 의미를 좀 죽여줘. 너의 사적인 존재 의미가 들어가면 이거는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고 천국을 훼방하게 되는 겁니다.
거라사 광인 미친 사람의 특징에서 주님께서 귀신을 내쫓을 때 그 귀신이 뭘 시도했느냐. 그 귀신들 한 군대가 와서 한 일이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예수님 떼어내기. 예수님을 이 땅에서 떼어내기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의미를 떼어내는 것. 어디에서? ‘나’라는 의미를 유지시키고 고수하기 위해서 다가오는 예수님을 떼어놓는 거에요.
떼어내기 위해서는 뭐냐 하면은 여기서 어떤 공간적인 폭을 마련해서 예수님이 접근 못하도록 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 폭이 뭐냐 하면은 이게 귀신의 폭이에요. 귀신의 몸이 있다면 귀신의 폭이에요.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진실에 접근불가에요.
예를 들면 미술가가 진실을 그리고자 할 때 진짜 미술가는 붓을 꺾어버립니다. 진실을. 예술 또는 음악하는 사람들. 진짜 자기감정을 음표 도레미파솔라시도 표현할려고 할 때 자기는 절망감을 느낍니다. 절망감을. 처음에 미술 그릴 때 참 잘했어요 상 타고 전국 미술 사생대회 1등하고 그때는 남들이 으쌰으쌰 해줘서 그렇지요.
진짜 예술가의 길에 가서 남들이 이 세상에 있는 아름다움의 그 진수, 진짜 아름다움 속에 들어 있는 그 아름다움의 진짜 아름다움을 한번 그리고자 할 때 예술가들은 절망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예술가들은 죽어요. 일찍 병들어 죽던지 그것도 제 명이겠습니다면 제 명에 못 살고 이렇게 돼요. 얼마 전에 나보다 한 살 많은 이동원이라는 가수가 있어요.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뭐했느냐 하면은 가을편지 불렀고 향수라는 노래 불렀는데 그 사람이 소원이 뭐냐 하면은 내가 북한에 가서 북한에 인민들을 해방하는데 좀 도움이 되는 가수가 되겠다 이런 희망 있는 거에요. 속으로 참 오지랖도 오지랖도 네 병이나 고치지.
이게 뭐냐 하면은 가수로서 이 세상에 참 진리에 보탬이 되는 가수가 되고 싶다는 거에요. 마약이나 안 했으면 좋겠어요. 대마초나 안 피우면 좋겠어. 몇 번이나 피웠어요. 몇 번이나 피고 들어가고 또 피웠다가 들어가고. 하도 유명한 가수라 자꾸 풀어줬는데.
인간의 의미는 어떤 의미냐? 그 진리에 내가 한 몫 했다는 그것에 인간은 어떤 망상같은 게 있어요. 망상. 모든 분야가 그래요. 수학 분야, 과학 분야 모든 분야에 내가 추접스럽게 돈이나 버는 줄 아느냐? 돈 안주면 삐지면서. 말은 내가 돈 보고 이 짓 안한다. 나는 진짜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그런 예술가야.
내가 정치인으로서 명예와 출세로 사는 줄 아느냐. 나는 이 약하고 힘든 서민들 위해서 나는 한다. 두 명의 노 씨 있잖아요. 노 씨. 둘 다 자살한 노 씨 있잖아요. 노희찬 하고 노무현. 오직 정치의 진실 됨. 그게 왜 접근이 안 되느냐 하면은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진실을 막고 있다고요. 막고 있어요.
만약에 귀신들린 청년에게 예수님이 귀신을 그냥 뽑아내 줘버리면 거라사에 있는 축산업에 목축하는 사람들 돼지 키우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야 예수님 참 좋은 일 하신다 이렇게 될 거에요. 그런데 그 귀신들이 무저갱에 가는 게 진실이에요. 그런데 귀신들이 뭐라고 부탁하느냐 하면은 기어이 예수 그리스도가 진실이 진리가 아니고 길이 아니고 예수님이 생명이 아닌 것을 귀신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걸 드러나지 않도록 혼신의 노력을 다합니다.
제발 부탁하오니 무저갱 들어가지 말고 어디? 돼지 떼에게 가게 해달라고 하잖아요. 돼지 떼에 가니까 돼지가 사람들의 재산 아닙니까. 재산 다 날라갔으니까 그들이 뭐라고 부탁합니까. 예수님 제발 우리 마을에서 떠나주소서. 당신은 버겁습니다. 그럼 귀신들은 성공한 거죠. 마귀는 성공한 거죠. 왜? 그리스도로부터 떼어내기에 성공하고 있으니까.
예수님 떼어내기가 그리스도 떼어내기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어요. 왜 하나님께서는 무저갱에서 요한계시록 무저갱에서 왜 귀신들을 풀어놓는지 아시겠지요. 오직 택한 자, 하나님의 선택된 자, 주님의 선택된 자는 인간 가운데는 선택된 자는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선택된 자는 누구밖에 없느냐 하면은 선택된 유일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어요.
예수님께서 인간 속에 섞이니까 여기서부터 선택이 도리어 파급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선택한 자만 선택이 되는 거에요. 예수님이 선택한 자만.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그냥 선택이라고 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선택. 그러니까 선택된 자는 어디밖에 못 나간다? 예수 안팎으로 못나가요.
보통 인간들이 베드로 같은 경우에 성령받기 전에 베드로는 뭐냐? 베드로 나 있고 예수님 있고 베드로 바깥에 예수님 있잖아요. 이건 안이 성립이 안 됩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이건 처소가 안돼요. 베드로가 딱 붙어 가도 붙어 가는 것도 안이 아니에요. 안이 될려면 베드로가 이게 제거되어야 돼요. 죽어야 돼요. 시몬이 죽어서 베드로가 되는 과정, 절차를 밟아야 돼요.
베드로는 이름 베드로만 받았지 시몬 그대로에요. 시몬에서 베드로가 되어야 돼요. 시몬은 개인 이름이지만 베드로는 교회 기초 이름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누구 이름이냐 하면은 예수님 안에 있는 이름이에요. 이게 베드로에요. 예수님 안에 베드로는 베드로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 기능의 이름 곧 주의 이름이에요.
예수님이 교회의 반석이 되겠다고 그 예수님의 빛에 산란된 것이 뭐냐? 베드로라는 색깔로 된 겁니다. 빛의 복사파장 1/10 이하가 돼야 푸른 빛이 되고 나머지는 붉은 빛 하얀 빛이 되거든요. 그것처럼 그 빛에 따라서 주께서 하시는 기능의 다양함에 따라서 이름으로 하는데 그 이름이 본인 이름이 아닙니다.
아까 그 동영상 녹음할 때 사울 안에 사도 없다고 했지요. 이것도 마찬가지. 사울은 뭐냐? 사울은 개인적 이름이에요. 사울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바울이 된 거에요. 바울은 누구 이름이냐? 그 안에 예수님이 그 안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기능을 바울 식으로 드러내는 거에요.
어떻게? 사울에서 달라졌다는 사실을. 사울은 죽고 이 안에 바울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식이다. 자꾸 주님은 천국에서는 뭐냐 하면은 개인을 없애는 거에요. 사도 바울이 삼층천에 올라갔을 때에 올라간 사람이 누구냐? “나 아닌 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 분은 누군지 모르는데 나 아닌 나야” 이런 거에요.
왜 그렇게 복잡하게 이야기됩니까 라고 한다면 십자가는 마치 수학공식 같아요. 5-3과 같아요. 십자가는. 십자가를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십자가 당겨버리면 십자가 의미는 탈락되어버리고 이거는 뭐냐 하면 나의 의미에 달라붙은 게 돼요. 이거는 나를 그대로 이어가는 십자가라서 가짜 십자가에요.
십자가의 의미가 아까 했던 풍랑 이야기 그 다음에 귀신들린 이야기, 야이로의 회당장 딸 죽은 이야기, 혈루병 여인 이야기. 이 이야기가 모아져서 이게 기능들이거든요. 산란된 빛이잖아요. 어디로 모아집니까? 하나로 모아져요. 어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에요.
그럼 이걸 해석하면 해석을 어떻게 해야 됩니까? 십자가에서 십자가를 경유해서 다시 해석을 되돌려줘야 돼요. 이걸 뭐냐 하면 이걸 가지고 현장성이라고 해요. ‘현장성’. 어떤 현장성의 반대말은 지식이 돼요. 어떤 지식을 갖고 있는 게 아니고 현장에서 내가 몰랐던 새로움으로 그 현장에 새로움으로 주님이 비추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 시점에 살아있던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산란케 하는 거에요. 예수님의 주님의 기능이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여러 가지 현장성이 있는 겁니다. 그 현장성의 내용은 인간으로 사는 것은 거짓이었다. 간단하지요. 자, 누가복음 다시 한번 봅시다. 누가복음 8장 24절에 보면 제자들이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하는데 죽겠다는 의미는 뭡니까? 본인이 익히 사적으로 알고 있는 ‘죽겠나이다’죠.
그거는 자기는 풍랑이라는 물질을 못 이겨 갇혀있는 형국입니다. 여기서 풍랑이 너무 쎕니다. 이러면 죽겠나이다. 자, 인간의 의미는 어디서 마감됩니까? 죽겠나이다 함으로서 어디서 마감됩니까? 인간이 죽어버리면 내가 산 의미는 거기서 종결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죽음에 갇혀있는 거에요. 물질에 갇혀있고 죽음에 갇혀있는 겁니다. 죽음을 못 벗어나요.
심지어 죽어도 죽음을 못 벗어나요. 죽어도 저주에서 못 벗어나요. 왜? 뭣 때문에? 자기의 의미를 고집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의미를. 아무리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너 대신, 너 대신, 너 대신 주께서, 너 대신 주께서 아무리 대신을 이야기해도 그게 현장성이 없고 지식으로 받아들이니까 요령을 부리는 겁니다.
나라는 인간은 무슨 지식을 소유하게 되면 내가 죽어서 천국갈 수 있느냐. 이런 꼼수를 부리는 거에요. 본인의 현장성은 뭐냐? 내가 만들었다는 거에요. 이 현장성에 대해서. 천국 현상이란 사적인 현장에서 벗어나는 현상. 이게 천국 현상입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요.
그래서 이 산란성 여러가지 네 가지 중에서 아무것도 특별한 것이 없고 다 특별해요. 이 말은 이것 특별하고 이것 특별하다는 말이 아니고 이걸 한꺼번에 묶어야 특별한 게 돼요. 어떤 것도 단독으로 특별하지 않습니다. 풍랑에서 살아나는 것이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더 나에게 이익이었다. 이익이었다는 그런 말 붙이면 안돼요. 나를 특별히 할 이유가 없어요.
이 사람은 제자들은 그 풍랑이 일어나는 그 현장을 겪었고 야이로는 자기의 딸이 죽는 현장을 겪었고. 오늘날 우리의 자식은 안 죽고 있는 죽음의 현장을 겪고 있고. 안 죽은 듯이 보이지만 죽어있는 현장을 보고 있고요. 그 현장은 내가 만들었어요? 아빠가 만들었어요? 어미가 만들었어요? 누가 만들었어요? 주님이 만든 거에요. 주님이. 거기서 인간이 왜 죽는지를 보게 하는 겁니다.
전부 다 의미 없는 엄마 5-3=2 맞춰서 100점 맞았어. 아무 의미 없는. 아무 의미 없어요. 수학 배웠지요 그 다음에 자기가 서울에 장사해보세요. 이거 잘 써먹지요. 잘 써먹는데 의미는 뭐 붙입니까? 계산적으로 이거 오천원 받아야 되는데 원가 삼천원이기 때문에 이천원 남아야돼. 잘 써먹잖아요. 그런데 이 의미가 누구를 위한 의미입니까? 내가 죽어있음을 감추는 의미. 다른 말로 예수님을 떠미는 의미.
거라사 사람들이 목축업했다고 했지요. 돼지 오백 마리 있는데 지난번에 이백 마리 죽었다면 몇 마리 살았어요? 삼백 마리. 잘 써먹죠. 500-200=300. 잘 알아도 이게 의미가 뭡니까. 결국은 “예수님이여 제발 나를 떠나소서”라는 결말을 도출하는 의미이죠. 인간은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었고 인간이 사는 것은 거짓이었다.
거짓이었다는 여기 25절에서는 이렇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해요. 너의 믿음은 어디 있느냐? 없다 이 말입니다. 너의 믿음은 없다 이 말이죠. 네가 보여주는 산란, 내 빛의 산란은 무슨 모습이냐? 또는 내가 너와 함께 있는 나의 의미는 너희가 어떻게 보여줄거냐? 그 의미가 없지 않느냐. 너 죽었다 살아났다 그것만 네 의미만 도로 챙겼을 뿐이죠.
그건 누굴 믿는 겁니까? 본인의 의미를 믿는 거니까 예수님께 도달될 수 없는 도달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이라고 쳐주지를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 안에 갇혀 있는데 그게 무슨 믿음입니까. 빛이 산란되야죠. 빛이 튕겨져 나와야 돼요. 빛이 튕겨져 나와야 돼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튕겨져 나오잖아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보세요 자기 이야기하면서 뭐가 튀어나왔습니까? 주님의 복음이 튀어나왔잖아요. 복음이.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요? 그래서 성도끼리 만났을 때는 뭐만 끄집어내면 됩니까? 그 사람 속에서 튕겨져 나오는 빛의 산란, 주님의 십자가 의미만 찾으면 돼요. 그러니까 사적으로 그 사람을 평할 자격은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쉽게 생각하세요. 속으로 해야죠. 겉으로 하면 기분 나쁘니까 속으로 해야죠. 인간아 너 같은 인간을 왜 밥 먹고 살려주는지 모르겠다. 속으로만 이야기하세요. 속으로. 아이고 주님께서 저 인간 왜 살려주는지 모르겠다. 아이고 저 인간아.
사람은 10 식구 산다고 더불어 사는 게 아니에요. 10 식구 살아도 혼자 살아요. 사돈에 팔촌에 옛날에 한집에 모여 살았잖아요. 친척들 해가지고 올라와가지고 식모 아닌 식모로 살아갔잖아요. 바글바글. 우리도 12식구 살았어요. 거기에 이혼한 고모 식구까지 들어와가지고. 많이 살았다 이 말이죠.
그러나 각자 자기 의미 챙기는데 그게 무슨 천국이겠어요. 저거 죽어야 되는데. 그래서 10명 모이면 상처받을 일이 10번이나 더 생기는 거에요. 거기 강아지까지 생기면 강아지한테까지 상처받지. 자, 그렇다면 아까 인간의 수학적 논리 5-3=2 이걸로 족하고 이걸 아는 걸로 됐다고 생각하는데. 십자가 피가 나를 구원한다 이런 사적인 것은 단선적 사고방식. 선이 하나에요. 선이 하나면 시간 밖에 벗어나지를 못해요.
그런데 이 반대는 뭐냐 하면은 입체적이에요. 아까 동영상할 때 했잖아요. 여기에 이층집이 산다고요. 고향은 하늘에 있고 본적은 하늘에 두고 땅에 빼꼼히 주의 산란의 일을 위해서 주님의 의미에 따라서 이 땅에 아직 육신이 있으니까 육신을 통해서 주님의 일을 여기서 드러내기 위해서 살고 원래 본적 우리의 생명은 골로새서 3장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우리의 생명은 이미 하늘에 있어요. 앉혀져 있어요. 하늘에 이미 도달해있다고요.
이게 뭐냐? 입체적, 입체적. 하늘, 땅, 위 아래, 아래 위, 위 아래, 아래 위, 입체적. 그럼 단선은 뭐냐? 이게 없으니까 아이고 뭐 내일 되면 좋은 일이 생기겠지. 지금은 의미 없어도 10년 뒤에는 내가 보란 듯이 떵떵거리며 살 거야. 이게 뭐냐 단선적 사고방식이에요. 10년 뒤에 같은 소리 또 해요. 앞으로 10년 뒤에 함 봐라. 10년 뒤에 한번 보자.
우리의 육체는 완전 해제되는데요. 입은 살아가지고. 10년 뒤. 연세 많은 분 보고 이야기하는 거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네가 믿음이 어디 있느냐. 다시 말해서 꾸짖는 것은 그 폭풍과 물결도 꾸짖지만 여기에 그들의 의미는 폭풍과 물결을 꾸짖을 때에 제자들은 그것을 낯설게 여겼어요. 낯설게.
왜 낯서느냐 하면은 폭풍과 물결이 꾸짖을 대상이 되느냐? 주님께서는 네가 된다고 생각하냐? 네가?! 네가 남 걱정하지 말아라. 네가 꾸짖을 대상도 안돼. 너는 나만 믿어야지 네가 따로 주님 저 어때요? 할 그런 쨉도 안 된단 말이죠. 그럴 깜냥도 안 된다 이 말이죠. 그게 바로 첫 번째 부딪힘이었습니다. ‘부딪힘’. ‘만남’.
여러분들이 빗소리들을 때 장독대 떨어지는 빗소리 있지요. 탁탁탁탁. 그 다음에 수풀 속에 떨어지는 비. 그리고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 길가 아스팔트에 떨어지는 빗소리. 전부 다 소리가 다 달라요. 다르지만 어느 바보 아닌 이상 저게 무슨 소리야? 하면 빗소리. 이건 무슨 소리야? 빗소리. 동인한 소리에요.
인간은 성도는 그 사람이 어떤 모습이든 나이, 연세가 있든 없든 간에 그 사람에게 주어져 나오는 것은 동일한 소리입니다. 복음의 소리. 나 인생 산 것이 거짓이었다. 바보처럼 산 게 아니고 거짓으로 산거에요. 진리의 접근을 할 수가 없었어요. 악마가 막아가지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에 접근을 못했어요. 그리고 공부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알게 되면 나중에 지쳐버립니다.
그래서 신학자 가운데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신학자들 성경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끝나는 줄 알아요? 역사로 끝나요. 신학자들이 이거 들으면 아이쿠 들켰다 합니다. 이 사람들은 역사주의에요. 단선적 사고에요. 그러니까 목회 안하고 교수해서 밥벌이할라고 월급쟁이할려고 하는 거에요. 단선적 사고에요. 자기 의미 밖에 없어요.
박사가 되면 박사를 찢어버릴 수가 있어야 되고 목사가 되면 목사를 찢어버릴 수가 있어야 되는데 이 박사 한다고 돈 수억 들어가지고 이걸 부정해 버려? 안돼!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예술가보다 못한 거에요. 붓을 꺾어버리는 예술가보다 못해요. 종교도 예술의 일종이거든요. 주여 주여 하다가 그냥 휘발유 뒤집어쓰고. 주여 이래도 안 해줄 꺼에요? 휘발유 뒤집어쓰면서 주여 나는 부처다. 갑자기 예수, 부처 동일하게 같이 되어버려요.
종교학이란 게 있거든요 대학에 보면은 종교학 교수가 주로 교회 출신이에요. 신을 찾다가 자아가 분열된 사람이에요. 분열됐는데 분열된 자아가 다 거짓이에요. 10개가 분열되도 다 자아가 거짓이에요. 악마의 스케일이 귀신의 스케일이 대단합니다. 절대로 완전히 미식축구에요. 절대로 못 들어가게 막아버려요. 단선적 사고방식이어서 그래요. 왜? 나의 의미를 내가 못 벗어나기 때문에. 나의 의미를.
그 다음에 봅시다. 그 다음의 상황. 그 다음에 주의 빛이 떨어집니다. 여기 보게 되면 여기 35절에 한번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그 이루어진 일을 보러 나와서 예수께 이르러 귀신 나간 사람이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예수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자, 그들이 그 청년에게 한 것은 뭐냐? 인간이 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쇠사슬과 고랑으로 그 유령을 물질화시킨 거죠. 유령을 묶어놓으면 묶일 수 있다는 것. 귀신들 같은데 만화영화 같은데 실제 영화도 있는데. 고스트버스터 라는 노래가 유행됐어요. 고스트버스터 그거는 청소기가지고 귀신을 뽑아낸다는 거에요. 얼마나 귀신을 물질화시킨 아이디어 입니까? 원래 청소기가 먼지 뽑아내는 거죠. 먼지.
그러니까 영이라고 하는 것은 쪼개보면 물질로 되어 있고 그걸 뽑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거에요. 그 영화가 히트쳤어요. 쭉 뽑아내는 거. 인간들이 본인이 귀신들렸다라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본인 자체가 귀신들렸다 못한 거에요. 왜냐하면 진리가 있는데 아무리 해도 진리에 접근을 못하는 것이 귀신들이 여기 오지 못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그들은 귀신이 진리가 없으니까 진리를 찾지 않더라도 나름대로의 뭘 하느냐 하면은 행복을 찾는 겁니다. 자신의 행복을 찾아요. 행복 조건이 뭐냐 하면은 돈 있어야 되고 건강해야 되고 가정이 화목해야 되고 주로 이런 거죠. 돈, 건강, 화목, 명예 이런 거죠. 흔히 이야기하잖아요. 명예를 잃은 것보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다. 그게 바로 귀신들린 자가 한 소리입니다.
자, 이 사람들이 돼지 잃었잖아요. 돼지 잃었잖아요. 자신을 뭐로 봅니까? 비극으로 보지요. 그런데 귀신이 옴팍 들렸던 사람. 귀신 들어간 사람 어떻게 됐습니까? 온전하게 앉아 있잖아요. 그럼 그들은 이 사람을 부러워해야 돼요? 안 부러워해야 돼요? 부러워해야 되는데 그들은 돼지 없는 것을 비극으로 여기고 비극을 뭐로 보느냐?
옛날처럼 문제 없음, 행복했던 시절로 돌이키기 위해서 어떤 요소만 제거하면 됩니까? 예수님만 떼어놓으면 되죠. 이게 바로 악마가 원했던 거에요. 악마가 바로 인간들보고 시킨 거에요. 네가 행복하려면 예수한테 미친 인간들하고 같이 살지 마라 이런 식으로. 예수보다 네가 더 중요하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바로 철학이고 신학이에요. 철학과 신학 과학의 추구하는 바는 동일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행복이에요. ‘인간의 행복’. 신학, 철학과 과학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입니다. 김형석 교수라는 사람이 있어요. 100살 넘었다고 되게 자랑하는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을 우리가 믿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다. 이건 뭐 나이만 100살 먹었지 귀신의 망에 그대로 걸려든 거에요.
예수 믿으면 행복하다는 겁니다. 그 사람의 주장이 뭐냐? 행복이라는 거에요. 그 사람이 왜 그런 주장하느냐 하면은 그 사람은 신학 전공이 아니고 철학 전공이거든요. 신학이나 철학이나 내가 알아보니까 최종 목표는 뭐냐? 인간 행복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게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보라고 했습니까?
아니 모델을 삼아도 죽었다가 살아난 분을 모델로 삼아야지 왜 죽어서 지옥 간 인간을 모델로 삼아가지고 그 분은 대단하다 왜 이렇게 나오느냐 말이죠. 수학하는 사람들은 그 수학에 대가들을 모델로 삼아요. 자기 분야거든요. 골프 치는 아가씨들은 누가 모델입니까? 박세리가 모델이죠. 박세리가. 그렇잖아요. 박세리 키즈라고 하잖아요. 박세리 키즈.
트로트하는 사람은? 임영웅. 이름도 영웅이다. 그럼 목회하는 사람의 모델은 누굽니까? 이찬수 목사에요? 저쪽에 있는 우리 교회입니까? 성남에 있는 우리 교회에요? 얼마나 귀신들린 거에요. 그런데 왜 귀신들린 사람보고 나가라고 하느냐? 귀신이 적게 들렸거든요. 아까 그 사람은 옴팡 들렸고. 적게 들려서 표가 안 나는가 봅니다. 적게 들렸으니까.
그런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보고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 아비는 누구라고 했습니까? 너희 아비는 악마라고 아야기했습니다. 그다음에 40절 봅시다. 40절 보는데 40절 보기 전에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올려고 했지요. 그렇게 할 때 따라오지 말고 너는 너희 동네로 가가지고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가를 그대로 산란해라. 내 빛을 산란해라.
다시 말해서 나는 결코 나는 스스로 온전할 수가 없었다를 이야기하면 돼요. 나는 절대로 내가 천당 갈려고 환장한 것도 아니고 구원 받을려고 미친 것이 아니라 그냥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예수님이 있어야 그것이 천국이고 나의 의미를 뺏어가 줘야 비로소 내가 천국 백성인 것을 알게 하셨다. 나는 그 전에 뭐였다? 귀신들린 자였다. 나는 귀신과 함께 살았던 거짓된 삶이었다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럼 너 지금 온전하잖아. 예수님이 온전하지. 온전하신 분 예수님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지요. 그 다음에 여기 회당장 야이로 보기 전에요 거기에 44절 봅시다. 예수의 뒤로 와서 그 12년 동안 혈루병 여인이 그의 옷 가에 뭐 댑니까? 손을 댔지요. 아까 그 물질성 그대로 합니다.
인간의 육신 자체가 물질성이잖아요. 인간은 물질성에 갇혀있지요. 그렇죠? 물질성에 갇혀있으니까 모든 사고방식이 결국 뭐로 나옵니까? 행동이 물질성으로만 나올 수밖에 없어요. 쇠사슬과 고랑으로 귀신들린 자를 묶으면 해결되겠지 하는 것처럼 이 여인은 뭡니까? 자기의 육신으로서 예수님의 육신을 만져야 되는데 이건 너무 황송스러운 이야기고 예수님의 육신은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 대신 뭘 만졌습니까?
예수님의 옷, 그것도 ‘옷 가’. 옷 가죠. 옷 끄트머리를 만졌습니다. 옷 끄트머리를 만졌는데 여기서 놀랍게도 뭐가 나옵니까? 주님의 능력이 나왔지요. 자, 주님의 능력은 이 물질성 이 자체를 발휘하게 해놓고 물질성 자체에서부터 주의 능력으로 이전시켜 버립니다. 이전시켜버려요. 물질 더하기 괜찮은 영이 아니고 이 자체를 날라가게 해버리는 겁니다.
시작 자체가 물질이지만 그 물질 자체를 뭘로 바꾸느냐 하면은 이걸 믿음으로 바꿔버려요. 믿음으로. 물질은 주인공이 나부터 출발하지만 믿음은 시작을 주님부터 시작합니다. 누가 나에게서 능력이 나가게 했느냐. 능력은 나에게서만 나와요. 소위 만지는 나의 능력이 아니고 능력은 주님에서 능력이 주어진다 그걸 믿는 자가 너희들 중에 누구야? 라고 묻는 거에요.
방금 내 능력이 나갔는데 누구야? 아시지요. 모를 리가 있습니까. 일부러 들으라고 이야기합니다. 누구야? 여자가 하는 말이 자기 물질성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합니다. 벌벌 떨면서 제가 만지지 말아야 될 자를 만졌지요? 그렇죠? 경솔한 짓을 했지요? 그렇죠? 자기의 물질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지요. 그러나 자기의 물질의 한계를 안다는 자체가 이게 바로 구원되고 난 뒤의 인간의 모습이에요.
왜냐하면 물질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나 혹은 나의 의미가 소용없다는 것. 오히려 나의 의미가 천국을 방해한다는 것. 천국의 능력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벌벌 떨면서 제가 만지지 말아야 할 분을 만졌지요? 그렇지요? 아이고 이런 경솔한 짓을. 나는 앞으로 20년 동안 피 흘려야 돼. 이렇게 나올 때 염려하지 말아라. 너의 그 소박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능력은 예수님에게 나온다.
어찌 보면 미신 같지요. 예수님의 몸을 만지면 낫겠다 미신처럼 보이지만 그 미신 보임으로써 자기의 할 도리를 다 토해낸 거에요. 나로서는 기껏 한다는 것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겁니다. 그거 비슷한 것이 사도행전에 나오지요. 사도 바울의 손수건을 만졌더니만 죽은 자가 살아났지요. 그 다음부터 사도 바울이 손수건 빨고 다녔습니까? 손수건 여러 장 한 200장 그거 막 남발했습니까? 물에다가 안수해서 이 물 마시면 뭐든지 병 낫는다고 이초석처럼 그렇게 했습니까? 이초석은 식초나 먹어야 돼. 그렇게 했습니까? 아니지요.
주의 능력은 도달되게 되면 자기의 한계를 알게 된다는 겁니다. 주의 능력은. 바들바들 떨게 하는 거에요. 주의 능력. 내가 하는 이 모든 짓은 나름대로의 최선은 다했지만 주님한테는 전혀 주의 구원이 성립이 안 되는 짓거리만 기껏 내놓을 뿐인 것을 스스로 자기 입으로 자백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많아요. 오병이어도 그렇지요.
오병이어 뭐라고 했습니까? 얼굴 없는 얼굴이라고 했지요. 이름도 없는 얼굴 없는 얼굴. 미비한 거에요. 심지어 마태복음 25장에도 나오지요. 영생과 영벌을 어떻게 구분됩니까? 이 작은 자한테 한 것이 곧 누구한테 한 것이다? 나에게 한 것이다. 작은 자한테 한 것이. 인간들 백날 해줘봐야 작은 자 밖에 못해요.
그래서 잘했다는 말입니까? 내가 뭐 내 할 도리 했기 때문에 나는 당당하다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그게 나로 하여금 바들바들 떨게 하는 거에요. 누구 앞에서? 내 행동과 전혀 관계없이 나를 예수님의 자신의 피로 구원했을 때 다시 내 행동을 돌아보게 되는 기껏 내가 대단하다고 결심했듯이 기껏 아무것도 아닌 일로 들통나게 해주신 그 고마움.
내가 좋은 일 하나 내가 나쁜 일한 것이나 어떤 일도 그것은 아무 일도 아닌 것. 내 구원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 그래서 우리는 나의 의미로부터 벗어났음을 주님으로부터 통보 받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산란이에요. 오늘 제목 ‘빛의 산란’. 그러고 난 뒤에 어디 가느냐 하면은 당신의 딸은 죽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회당장 자신도 보기에 딸이 죽은 거 맞아요. 동네 사람도 보기에 죽은 거 맞습니다.
물질이 봤을 때 물질의 세계에서 봤을 때 물질이 그냥 가만 있고 숨도 안 쉬면 죽었다고 이야기하고 좀 싸대면, 싸대고 좀 깐족거리면 이건 살았다고 보는 거에요. 우리는 그게 왜 엉터리냐 하면은 ‘살아 꿈틀거리는 물체’를 뭐라고 합니까? 이걸 ‘살았다’고 했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고문해가지고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의 죽였다는 말은 예수님을 어떤 상태로 만드는 거에요? 꿈틀거리지 못하는 물체로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거에요. 거기에 대비해서 자기들은 예수님을 죽인다고 꿈틀거렸잖아요. 꿈틀거리는 쪽이 같이 꿈틀거리는 쪽을 죽임으로서 꿈틀거리지 않게 된 것을 예수님을 죽음으로 보냈고 자기는 그쪽이 죽음이니까 자기는 누가 뭐래도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았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 있다가 사흘 만에 꿈틀거렸죠. 살아났잖아요. 살아났으면 그러면 그동안 죽음을 그들이 하는 것은 결국 이 자체가 뭐냐 하면은 결국 물질에서 못 벗어났다는 거에요. 그럼 그들의 정신도 물질의 꿈틀거림을 기초로 한 정신이기 때문에 이 정신도 진리가 아닌 거에요. 물질에 종속된 꿈틀거림이에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뭐냐 하면은 유물주의자에요. 모든 인간은 유물주의자에요. 그래서 헤겔의 말이 맞지요. 정신은 뭐다? 정신은 정신이 아니고 모호한 것도 아니고 영이 아니고 정신은 뭐다? 뼈다. ‘정신은 뼈다’. 따라서 인간은 자기가 꿈틀거리는 것에 따라서 그때그때 기분이 다 달라져요. 내가 기분 좋아서 꿈틀거릴 때는 기분 좋고 슬플 때는 자기가 좌절됐을 때 몸이 아프다 그럴 때는 자기 정신도 혼미하지요.
인간은 결국은 물질에 종속되니까 영이 되는 악마의 노리개가 밥이 될 수밖에 없지요. 인간은 진실을 모르니까. 그래서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여기 끝에 54절에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다음에 55절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그 영이 돌아왔지요.
그 당시 인간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살아있음에 대한 그들의 교리 그들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표현한 거에요. 육신의 영혼이 돌아오면 살아나는 걸로 보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뭡니까? 이런 사고방식은 결국 나중에 사도행전 성령 오게 되면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은 육신의 영이 돌아오면 이건 살아났다 하는 이런 관점보다도 나중에 성령 오게 되면 예수님이 뭐다? 생명이고 예수 안에 있는 사람만이 생명의 열매다 이 논리하고 완전히 다르지요.
이건 뭐냐 하면은 이건 하나의 분석대상이 되어 버리는 거에요. 자기 자신을 분석대상. 자기 자신이나 타인을 분석대상으로 보는 거에요. 자, 회당장 딸이 죽었지요. 죽었다고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회당장이 이야기했습니다. 본인은 죽었어요? 안 죽었어요? 본인은 살았다고 주장하는 거에요. 자기는 살았는데 딸이 죽었다는 겁니다.
인간이 함부로 인간을 둘로 쪼개서 죽은 자와 산 자를 함부로 구분을 지은 겁니다. 나는 산 자의 의미고 저건 죽은 자의 슬픈 의미라고 보는 거에요. 그 인식이 뭡니까? 살아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죽은 사람은 슬프다 이 말이거든요. 그들은 지금 누구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지금 예수님이 무슨 생각하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심지어 베드로 야곱 요한도 몰라요. 그 부모도 몰라요. 이 세계 자체가 죽음의 세계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었을 때 그 회당장 딸에게 다가옵니다. 다가왔을 때 예수님 뭐라고 했습니까?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이야기해요.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 자, 자고 있다는 것을 누구만 알아요? 예수님, 예수님의 의미에서만 자고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 아이는 ‘예수 안’에 있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을 때는 생명이기 때문에 죽음이 없고 죽음 대신 꿈틀거리지 않을 때는 자고 있는 거에요.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와요. “그때는 잠자는 자가 일어난다”
자는 것이 그렇게 슬픈 일일까요? 그것도 예수님 안에서 곤히 자고 있는데. 여러분 아이가 돌 안 된 아이가 조그만 침대에서 자고 있으면 아이가 죽었다고 봅니까?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어떻게 죽었다고 보십니까? 성령 받은 성도가 죽었을 때 여러분 죽었다고 보십니까 주무신다고 보십니까? 인간의 육신적 모습은 중간에 십자가의 의미를 경유하는 형식으로 표현돼야 되지 십자가 의미 빼고서 육신을 설명하는 것은 이것은 나의 의미지 주님의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 받아서 복음을 아신다면 우리가 사나 죽으나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주의 것이니까 현재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습니다. 좀 피곤하고 좀 늙어가고 이게 약간 문제가 되서 그렇지 그것도 주께서 육신을 다루기 나름이니까요. 됐다 이제는 자거라 할 때까지 우리는 주 안에서 잘 수 없고 꿈틀거려야 됩니다. 슬퍼하지 말고 조금만 있으면 재워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생명을 마귀가 와서 육신+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죽은 것이 아니고 잔다고 하셨으니 저희들이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서 주님만 드러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