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신체포기각서

아빠와 함께 2021. 10. 30. 09:22

강남-누가복음 7장 38절 (신체 포기 각서) 211019a-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누가복음 7장 36절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라고 되어있지요.


이 본문에서 핵심은 어디 있느냐 하면은 여기에 있어요. 뭐냐 하면은 이 여인의 사정과 형편이 온 동네가 다 알고 있다. 이 여인이 어느 정도로 악하냐 하는 것은 그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는 거에요. 거기에 비해서 바리새인들과 우리 일반인들은 사적인 사정이 감추어져있다. 감추어져있는 거에요. 자기 개인 사정이 남에게 들키지 않는 사람은 함부로 이 여인에 대해서 말 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셔요. 이 여인이 그 동네에서 얼마나 악한 여인인 것을 다 아셔요. 이 여인의 사정이 그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것을 다 알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여인의 하는 것과 예수님이 하는 일, 복음 전파의 일에 이 여인이 딱 적합한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 여인의 사정을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중심부’.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


그러면 자기 사람의 사정이 감추어져 있는 대부분의 모든 사람이죠. 뭐 안 들킬려고 난리를 하잖아요. 난리도 아주 부르스를 춰요. 안 들킬려고. 누가 이야기하면 원수지간 돼요. 네가 누구한테 이야기했어? 응? 네가 날 알아?! 막 이렇게 행패부리잖아요. 자기 사정을 꼬깃꼬깃 고이 감추고 평생을 두고도 감추고 계속 감추는 이 사람들을 저는 ‘주변부’라고 하겠습니다.


중심은 중심이라는 말은 뭐냐? 예수님의 하실 일의 그 취지와 가장 근접해있는 사람은 중심부에 있지요.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중심부에 있고 예수님하고 저 멀리 떨어진 쪽은 뭐냐 하면은 주변부가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 이 여인을 함으로서 이 여인은 예수님이 벌리시는 말씀의 현장이 돼요. 말씀의 현장. 말씀이 실제로 적용되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주변부에 있는 인간들은 자기 현장밖에 없어요. ‘자기 현장’. 이것은 내 영역이고 내 영역만 안 들키고 챙기고 추스르면 무탈하다. 아무 탈 없다. 남한테 계속해서 잘난 체할 수 있다. 나에게 여전히 내가 희망을 가져도 된다. 그런 식으로 자기 인생을 그런 식으로 계속 유지할려고 한다. 이게 주변부에요.


그런데 이 말씀의 현장에서 이 주변부들이 말씀의 현장에 있는 여인을 볼 때 어떻게 여인을 보느냐 하면은 악하다고 했어요. 악하다. 악하다는 말이 뭐냐? 참 안됐다. 참 불쌍하다. 가련하다. 또는 더 하면 못됐다 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요. 어쨌든 간에 이 여인의 취지가 내가 저 여인의 취지만큼 안 된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천만다행.


구경꾼으로 주변부에 있으면서 지금 주체 파악을 못하고 있는 거에요. 주님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을 참 안됐다 불쌍하다 생각하는 거에요. 왜? 안 들켰으니까. 저 여자는 다 들켰으니까. 나는 안 들켰으니까 얼마나 다행스러우냐는 거에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 드라마에 한 컷 나오고 드라마 시작하자마자 초반에 죽어가지고 그 다음에 안 나오는 사람들 있잖아요. 초반에 나오자마자 10분 내에 죽어가지고 안 나오는 사람들. 그 사람이 드라마 내내 계속 주연하는 사람보고 참 안됐다. 불쌍하다. 혀를 차면서 끌끌끌 뭐 이럽니까? 안 그렇지요. 부러워죽겠다.


나는 언제 편당 1억 받지. 이런 식으로 하지요. 한 회에 나오면 1억씩 받고 나중에 16회 나오면 16억 받고 그 정도 초주연급 있잖아요. 초주연급. 그 사람이 계속 카메라 앞에 주연할 때 그걸 굉장히 측은하게 봅니까? 상당히 슬프게 봐요? 그렇지 않지요. 부럽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악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향수를 예수님께 뿌리는걸 보고 그 악한여인과 자기의 입장을 연결 짓는데 내 입장에서 그 여자를 보는 거에요. 그 온 동네에 여자가 악하다는 것이 소문났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님께서 정작 필요한 사람은 악한 사람이 아니고 온 동네가 악하다는 걸 아는 사람이 필요한 거에요. 온 동네가.


온 동네가 다 악하니까 더 이상 그 여인은 이 여인은 손해 볼 게 없지요. 들통 다 났으니까. 전혀 손해 볼 게 없지요. 감출 게 없으니까 공포스럽지 않지요. 숨길 게 없으니까 두렵지 않지요. 까놓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까놓고 하는 거. 누구처럼.


지금 이 여인이 홀로 있는 게 아니에요. 여인이 중심부에 있다는 것은 여인의 죄가 진짜 칭찬할 만하다 그게 아니라 여기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사용하고 있다는 그 점이 중심부에 들어가 설 수 있는 그 조건이 된 거에요. 이 여인이. 온 오고 오는 모든 성도들에게 이 여인의 모습을 봐라 라고 주님께서 자랑할 만한 대상이 된 겁니다. 이 여인이. 그 뜻은 이 여인의 사정과 형편이 온 동네에 다 이미 들통 났기 때문에 다 알려졌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주변부 이런 사람들은 바리새인도 마찬가지고요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이런 사람들은 주님을 드러내는데 미흡한 거에요. 이런 사람과 관계해가지고는 제대로 주님이 주님 되심을 드러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사정과 형편이 온 동네 다 드러났기 때문에 이 여인은 거의 100% 주님의 일이 고스란히 그대로 노출되게 되어있어요.


그런데 이 주변의 인간들은 감추는 것이 왜 그리 많은지 뭐 감추고 있는 것들이 많아 가지고 그들에게 내보이는 것은 전부 자신의 위신과 자신의 의로움과 정당성과 체면 이런 잡것들이 욕하는 거 아니에요. 옳지 않은 것들이 하늘나라 받지도 않는 것들을 마치 복음인 냥 내놓게 돼요.


집에 쌀이 있는데 쌀에 모래를 집어넣은 것과 똑같은 거에요. 쌀의 가치가 죽지요. 모래의 가치가 더 강하니까. 나 이정도로 예수 잘 믿어. 이 정도로 하나님 잘 믿어 이런 소리가 나온다는 것은 자기 속에 따로 챙기고 있는 게 있다는 거에요. 꼬불치고 있는 게 있는 거에요. 뭔가.


그게 들키기 싫어서 나 교회 50년 다녔어. 나 목사야. 나 장로야 이러고 있어요. 뭔가 켕기는 게 있어요. 그걸 감추는 용도로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목사인데 이렇게 심방을 가게 되면 교인들이 심방을 오는 것을 안 좋아하는 이유가 있어요. 겉으로는 모르고 속으로 제가 내놓을만한 실적이 있을 때 오세요. 실적.


애가 공부를 잘한다든지 갑자기 뭐 집을 새로 인테리어를 했다든지 잘난 게 있을 때 그때 심방 오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믿음이 좋아졌다든지 이런 거요. 내세울게 있을 때 심방오라는 거에요. 이게 주변부에요. 주변부. 이거는 뭐 주님 생각 안하고 자기 과시, 자기 위신, 주님 앞에 자기 체면 자랑하는 것밖에 더 됩니까. 안되지요.


그냥 그런 거 따지지 마시고요 그냥 찾아갈께요. 이렇게 되게 되면 그들이 대부분 교인들이 거부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그 교인들이 노는 교인들도 있지만 일하는 성도들은 어떻느냐 하면은 하루일과가 파절임 김치 알지요? 파절임 김치. 쭉 절여져버리면 사람이 퇴근하게 되면 중력에 의해서 완전히 바닥에 깔린다고 축 쳐져요. 축 쳐져버린다고요.


얼마나 피곤한지 손가락 까닥할 말 할 기운도 안나요. 말 할 기운도.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복음이고 뭐고 다 귀찮아. 다 귀찮아. 메시지 보내고 답변도 하기 다 귀찮아. 오늘 하루 일과가 힘들어 죽겠어. 힘들어 죽겠어. 자기 몸도 자기가 하나 건사 못하는 거에요. 생업이라는 게 그래요. 내가 이러다 죽겠다. 내가 지금 사는 건지 죽는 건지 내가 죽을라고 일하는 건지 살라고 일하는 건지 분간이 안돼요. 그 정도로 푹 쳐져있어요.


그런데 이참에 훅 목사가 들어온다. 신앙이 개코 신앙이 어딨어 신앙이. 짜증나 죽는데요. 신앙이 어디 있어요. 개인 사정이 개인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 금방 다 들킨 거에요. 들켜버린 거에요. 이러면 내 실적, 내 자랑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게 돼요. 사정이 옴팡 다 드러났으니까요. 내가 정신차려가지고 뭐 성경이나 좀 읽고 딱 들어오실 때 성경 공부하는 티 나고 달달 외우고 뭐 이런 거 좀 해줘야 하는데 그냥 턱~.


나 못 일어날 거 같애. 오늘부로 내가 죽을 거 같애. 내 인생 그럴싸하게 산 어떤 흔적도 없이. 인간의 삶이란 것은 하루하루가 그렇습니다. 두 가지를 못하잖아요. 이제 은퇴해서 시간은 남아돌지 할 거 없지 그때는 복음이나 듣지. 지금은 힘든데 복음 들어오지도 않아. 아무것도 기억 안나요. 아무것도. 뭘 했는지 몰라요.


이 여인한테는 이 여인은 주님과 함께 함으로서 더 이상 상처받을 일이 없습니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상처받을. 소문났는데 뭐 상처받을 게 있어요. 내 배 째라는데 무슨 상처가 있겠어요. 그러나 여기 그걸 비난하는 이 바리새인들은 그들은 상처받을 게 가득 남아있습니다. 화날 게 남아 있고 분노할 게 남아있고. 원망할 게 남아있고 짜증날 게 남아있어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말씀의 현장에 예수님과 여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바리새인도 가담이 되야 이게 삼인이 한 조가 될 때 이게 말씀의 현장이라는 사실이에요. 바리새인이 빠지면 안돼요. 바리새인이 들어가야 돼요. 바리새인이 꼭 여기서 참관인으로 관람자로 들어가야 돼요. 그러니까 여인을 보고 욕을 해야 되고 예수님 보고 이들이 욕을 해야 돼요.


그 예수님의 거룩하고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분이라는데 저 여인의 그 더러운 율법에 위반된 더러운 여인의 행위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이 뭐 필요하겠어요. 예수님은 자기한테 껌뻑 죽으니까 그 여자가 괜찮은 여자인 줄 압니까.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요 이걸 알아야 돼요. 왜 바리새인을 집어넣었는가.


바리새인의 말은 이게 맞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이 여인 보고 39절에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이렇게 나오는데 바리새인들 말이 맞아요. 바리새인이 보기에 그 여인의 소문과 여인의 악행에 대해서 예수님은 분명히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바리새인 말이 맞습니다.

바리새인 하니까 무조건 나쁜 생각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은 바리새인은 이 여인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어요. 어느 정도로 알고 있느냐 하면은 우리가 상상하는 악함을 초과하는 여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 하면은 바리새인은 자기를 뭘로 보느냐 하면은 바리새인이 스승이거든요. 스승. 요즘말로 하면 목사 아닙니까. 목사에요. 목사.


목사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어떤 교인이나 성도에 대해서 본인이 나서서 교화할려고 합니다. 교화할려고 해요. 본인이. 왜? 이게 내가 받은 사명이기 때문에. 교화해버리면 여기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심리학적으로 가스 라이팅이라고 하는데 효과가 있어요. 가스 라이팅. 우리 말로 수은등 맞지요? 수은등.


가스 라이트라는 영화 1944년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인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그 내용에 나오는 그 줄거리를 대충 제가 그 영화를 봤으니까요. 한 두 시간 가까이 되는데 대충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주인공 여자가 주인공 이름이 폴라인데요. 폴라라는 여자가 일찍이 어머니 돌아가시고 유명 성악가인 이모 밑에서 딸처럼 살았는데 이모는 유명 성악가라서 주변에서 많은 후원이 있었습니다.


이게 영국의 런던 이야기거든요. 프랑스 유명한 보석, 왕실에 있는 보석을 그 소프라노 노래 잘하니까 반해서 어떤 사람이 이 귀한 것을 선물로 줬어요. 주고나니까 이 보석이 그 집에 있긴 있는데 어디 있는지 몰랐단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그레고리라는 악한 인간이 남자가 이 이모를 죽였어요.


목 졸라 죽이고 보석을 찾다가 실패하고 그 조카인 딸처럼 키운 폴라가 나중에 크니까 폴라가 있으니까 그 폴라하고 접근해가지고 사랑을 핑계로 혼인을 하면서 이 폴라를 자기가 결혼한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아갑니다. 갑자기 가방에다가 뭘 해놓고 자기가 넣어놓고 자기 빼놓고 “내가 준거 내놔라.” “몰라.” “너 건망증 걸렸다.”


그 다음에 이렇게 지붕에 자기가 왔다 갔다 하면서 밤중에 소리 들린다. 너 정신병자다. 그 다음에 가스불 올렸다가 내렸다가 올렸다가 내렸다가 조절하는 거에요. 인간의 심리를 조절하듯이 가스불이 자꾸 올랐다 내렸다 네가 이상해. 여기 아무도 없는데 네가 했잖아. 자꾸 정신병해가지고 폴라를 자기 아내를 다른데 보내고 그 집을 뒤져 보물을 찾고자 시도했던 그 내용이에요. 그 내용인데 그 형사가 그걸 알고 나중에 이 사람을 체포하고 여자에게 당신은 정신병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그 대목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예수님한테 껌뻑 빠졌을 때에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하는 일이 사람을 교화시키고 천국 보내는 사람으로서 랍비로서 이해할 때에 여자가 왔는데 그 바리새인 보기에 예수라는 그 랍비는 그 여자 교화하는데 거기에 정신 팔려가지고 이 여자가 교화될 가치도 없고 그러한 자격도 안 되고 그런 마음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이 바리새인들이.


왜냐하면 여자의 악행은 이미 바리새인들도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악이 너무 많이 때문에 그런 거에요. 여자가 악을 조금 지웠으면 바리새인이 나서서 “당신 하나님의 사람이 그러면 되겠어?” “아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충분히 될 수도 있는데 이 여인은 이미 소문났어요. 소문났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이 여자의 악행에 대해서 돌이킬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는 걸로 이미 확정이 나버린 겁니다.


가스 라이팅 효과라고 하는 것은 목사가 자기가 교화할 목적으로 그쪽의 정신을 가지고 쥐었다 풀었다 쥐었다 풀었다 하는 거에요. 그러면 이 교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는 너한테 교화받기 싫어. 나는 주님한테 직접 교화받고 싶어. 나는 새 사람 되고 싶어. 이렇게 나올 게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그런데 만약에 어느 교인이 어느 성도가 그렇게 나온다면 이 성도 또한 이게 중심부가 아니라 주변부가 돼요. 이 성도 또한.


뭐냐 하면은 내가 지금은 악하지만 나중에 예수님 만나서 또는 내가 성경 말씀 내가 새 사람 되겠다 하는 이런 마음 자체는 이런 것은요 전혀 지금 여기에 오늘 본문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악하다고 소문난 그 여자의 자리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악하지만 선하게 되겠다는 것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은 주변부에 속해요. 이게. 자기한테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 여인이 자기한테 희망을 가질 필요가 없음을 본인이 알고 있다는 거에요. 누구 좀 나를 교화시켜주시면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누구든 교화시켜주면 제가 향수고 뭐고 모든 걸 다 드리겠습니다 라고 나온다면 그 사람은 지금 이 여인하고 관계없어요. 그 사람은 바리새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교인한테 다가서가지고 우리 다 죄인입니다 이렇게 시작하거든요. 우리 다 죄인입니다. 그러나 똑똑한 여자 성도가 뭐라고 하겠어요. 당신은 목사이기 때문에 나도 죄인이고 당신도 죄인입니다 하고 다가서는데 당신은 지금 무슨 수작을 하느냐 하면은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함으로서 나는 잃을 것 없는 의인이 된 거에요.


나 죄인이고 당신 죄인이니까 우리 죄인끼리 만납시다 할 때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가만히 생각해봐야 돼요. 여자 쪽에서 혼자 패 다 깠어. 저쪽에서는 패를 감추고 있는데. 자기는 자기 가정 뭐 다 손톱만큼도 손해 안 보고 이쪽만 다 손해 보는 거에요. 이쪽만. 이거는 불공정 게임인데. 기울어진 운동장. 기울어진 운동장.


혼자 실컷 해놓고 난 병든 영혼 하나 구원했다. 이게 뭐에요. 이게. 이게 바리새인 체면 아닙니까. 위신. 난 목사 값했다 이 말 아닙니까. 결국은 이게 가스 라이팅 효과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심리적 효과. 심리적. 심리하고 하는 것은 인간의 철학에서 나왔지요. 철학의 모든 것은 뭐냐? 바리새인적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개선된 나를 찾겠다는 것은 그걸 또 도와주겠다는 목사나 그런 혜택을 입겠다고 나 당신 말고 예수님에게 직접 교화받겠다는 그 인간이나 모조리 다 지금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잘 되겠다는 것. 그럼 이 여인의 위치는 뭐냐?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은 여인의 죄 사함은 여인에서 예수님 쪽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이동. 이것 놓치면 완전히 다 놓친 거에요.


죄 사함의 원형은 여자가 아니고 예수님이에요. 예수님. 예수님이 죄에 퐁당! 퐁듀. 스위스 요리 있지요. 푹 소스에 푹 담갔다가 나오는 원형은 여인이 아니고 예수님 본인이 최초입니다. 죄 속에 들어갔다가 죄에서 벗어난 것은 아버지의 은혜로 아버지의 성령의 능력으로 사흘 만에 죄에서 벗어난 거에요. 죄 지은 것도 없지만 죄의 권세에서 부활의 권세로 나온 거에요.


그러면 이 여인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원형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앞당겨 보여주는 거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는요 예수님 어느 것도 다시 용서받을 가능성은 전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가장 깊은 곳에 갔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이 아니면 아버지의 약속이 아니면 예수님 스스로 몸부림친다고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따라서 이 여인은 좋은 스승 만나면 나도 개과천선해가지고 천국갈 수 있다 지금 이런 여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바리새인이 그걸 알고 있어요. 어지간한 여인 같으면 이쪽에서 다 나서서 무상으로 교화해줬어요. 교육해주고. 당신은 양심은 아직까지 깨끗합니다. 이래가지고 입바른 소리해가면서 잘 구슬려가지고 충실한 율법에 따르도록 바리새인 자기를 스승으로 따르도록 그렇게 가스 라이팅 분명히 했을 거에요.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인간들 정신 가지고 갖고 놀고 이렇게 하면서 자기 원하는 걸 챙겼을 거에요. 그렇게 해서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와 역시 나는 하나님 사자, 하나님의 종 맞아, 이렇게 했을 거에요. 그거 전혀 없습니다. 왜냐? 그 근거가 어디 있느냐? 이미 소문났기 때문에. 이미 소문나서 손도 못 댑니다. 뭐 여자 남자만 밝혔다. 창녀다 이 정도 죄도 아니에요 이거는.


그 당시 사람들이 혀를 두를 정도로의 죄라고 보면 돼요. 왜? 일말의 저 여자가 죄 용서받는다는 것은 이것은 창세 이후에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전적인 죄인이에요. 예수님이 여자의 죄를 용서했다 죄 사함을 했다 이 말은 여자가 죄 사함 받은 게 초점이 아니고요. 주님 쪽에 보물이 있다는 것을 죄 사함이라는 그 껍데기를 벗겨볼 때 손도 못 대는 그런 지독한 죄 안에 인간들이 상상도 못하는 보물이 그 안에 들어있는 거에요. 보물이.


보석이 보석함에 들어있는 게 아니고 보석이 인간이 감히 아이고~ 나 안 해! 다가서기도 겁내는 그러한 죄 속에만 하나님이 숨겨놓은 보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똑똑하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 바리새인들이 감히 그 여자를 어떻게 해볼 생각 없고 다만 우리도 손도 못 댄 것을 예수님이 이렇게 그 여자와 상대해주니까 예수여 당신은 그 여자를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한참을 모릅니다. 이렇게 하겠지요.


그것을 왜 주님께서는 이 여인을 이렇게 사용하시는가.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7장 41절에 한 단어 쓰겠어요. 예수님께서 왜 이 여인을 상대하느냐? 한 단어가 나옵니다. ‘빚’. 빚졌다 라는 이야기에요. 이 단어는 바리새인 세계에서 인간 세계에서 빚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있을 수가 없어요.


인간이 하나님께 빚졌다는 그러한 발상은요 나올 수 없습니다. 빚이란 인간 대 인간의 문제에요. 하나님 관여할 문제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 너무나 절대자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빚을 지우고 인간에게 빚이 져있고 하나님 인간에게 빚 달라고 독촉하고 그런 생각은 이것은 인간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어요. 하나님 상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빚졌다.


세상에 인간이 인간에게 빚을 져도 못 갚는 게 허다한데 하나님이 요구하는 레벨, 수준 그 빚을 언제 갚아요. 갚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빚을 갚는다는 것은 이것은 예상도 못하고 생각할 수가 없지요. 또 얼마나 착해야 그 빚을 갚겠어요. 안되잖아요. 그 안 된다는 그 취지를 바로 그 동네에 이미 개인적 사정이 다 까발려진 거에요.


아까 그 개인적 사정이 다 노출됐다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몰라요. 이거부터 들어가야 돼요. 왜냐? 모든 사람들은 꼬깃꼬깃 자기 비밀을 간직하고 살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온전히 예수님께 자기를 내놓을 수가 없는 거에요. 헌신한 척이나 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척 하고 봉사하지만 결국은 마지막은 뭐냐 하면은 이 여인처럼 되기는 싫은 거에요. 이 여인처럼.


그럼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빚이 있다면 결국 모든 인간은 이 여인처럼 그들의 개인 사정은 하나님이 이미 다 알고계시는 문제입니다. 여인의 자리에 들어서지 않는 네가 바로 네가 기회를 놓치는 거에요. 그게. 손도 못 댈 정도로 악한 어느 누구도 저 사람 인간 만들기 텄다 하는 그 자리가 반갑다 친구야 하고 우리 자신의 자리여야 돼요. 내가 내 식대로 내가 어떻게 손 쓸 수가 없는 그게 진짜 내 본 모습인 것을 여인을 통해서 알아야 돼요.


우리는 자꾸 여기서 여인이 죄 사함 받았고 용서됐다 하는데 죄 사함은 여인에 있지 않고 여인에서 어디로 이동했다 했습니까? 주님에게로 이동해서 주님에게 이동해가지고 주님한테 이동해서 다시 여인에게 와야 돼요. 뭐 요령부리고 “예수 믿습니다.” 하면 죄 용서받을 줄 알아요? 그런 식은 없어요. 막 인간이 통밥 굴리는 거에요. “나는 죄인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땅에 용서하러 왔다.”


그래?!고뤠?! 예수님한테 잘 보여가지고 집에 향수 있는데 뿌려드릴까요? 울면서 내 죄가 너무 많아요. 흑흑흑 하면서 뿌리면 그래 네 죄가 사함 받았다. 어디 이런 통밥을 이런 시나리오를 생각합니까. 그 짓거리는 바리새인들이나 하라고 하세요.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금식하고 금식할 때 왜 했습니까? 얼마나 바리새인들이 자기 회개합니까. 회개 왜 했어요? 좋은 실적 얻겠다고. 좋은 결과 얻겠다고.


그 결과가 뭡니까? 역시 나는 잘 되야 마땅해. 그거잖아요. 나는 무조건 잘돼야 돼. 그런데 그런 생각이 여인에게는 없다 이 말이죠. 주여 빼가세요. 주여 나의 손댈 수 없을 정도로 불가능한 이 죄 담당을 그냥 빚이라 여기시고 빼가세요. 저는 주님 앞에 빚 갚을 재주나 능력은 저한테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을 미리 정했습니다. 이건 안 바뀌고 싶어요. 제목을 6자. 제목은 ‘신체포기각서’.


가져가세요. 향수라는 것은 제일 비싼 거에요. 제일 값있는 거에요. 자기의 삶의 목표였어요. 내가 이것 때문에 삽니다를 계속해서 모아놓은 게 향수에요. 그걸 주님 앞에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그냥 허비했죠. 낭비했어요. 그냥 낭비한 거에요. 그러니까 얇은 그 유리병에 향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게 얼마나 아슬아슬한 상황입니까. 툭 건드리면 깨지고 다 쏟아지거든요.


그 얇은 유리병 안에 향수 있는데 그 여인이 향수의 밑바닥을 그냥 깨트려버린 거에요. 깨트려 버리면 병 안의 향수가 밑으로 다 빠져나가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나의 희망과 나의 애씀과 나의 기대 이것도 어떻게 됩니까? 다 땅으로 다 허비한 겁니다. 그걸 보고 바리새인들이 다 화가 난 거에요. 저 비싼 것을 저렇게 허비하다니 이렇게 되있거든요. 예수님한테 한 것을 허비한 걸로 본 거에요.


이거는 뭐냐? 바리새인들이 철저하게 무얼 생각하느냐 하면은 이익과 손실을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당신에게 주게 되면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이게 바리새인이에요. 손해 볼 수 없잖아. 항상 어떤 경우에도 손해 볼 수 없다. 손해 볼 수 없잖아. 철칙이죠. 삶의 철칙이에요. 제가 다시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의 현장에서 여인이 어떻게 죄 용서받는가는 핵심이 아니고 그거는 전혀 정답이 아니고요. 말씀이 얼마나 이 세상을 이 곳을 현장화시키느냐가 핵심이에요. 말씀이.


여기에 죄인 있고 예수님이 있고 또 하나 있어야 돼요. 여기 누가 끼어들어야 됩니까? 바리새인이 꼭 끼어들어야 돼요. 바리새인이. 왜냐 하면은 우리는 바리새인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내 사정이 온 동네방네 다 알려지는 것 차라리 우리는 자살해버리지 그거 참을 수가 없어요. 얼레리 꼴레리 하면 그 다음부터는 다 죽어버려요.


검찰청 가서 얼굴 가지고 목소리 변조하고 이렇게 하면 이제 죽을 계획만 하고 있는 거에요. 어느 산에 가서 죽느냐 이거에요. 우사스러우니까. 우사스럽다는 말은 나는 우사스러우면 남에게 공개적으로 우사스러우면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계속 자기가 지키고 있는 거에요. 그걸 버티고 있는 거에요. 그걸 버티는 자가 이 말씀의 현장에서 뭐가 돼요? 하나의 관람객으로 참여가 되어있어야 돼요.


왜? 예수님에게 적이 필요하니까. 예수님에게 적이 필요하거든요.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원수가 필요해요. 그 원수가 딴 게 뭐 있어요. 손해 볼 수 없잖아요. 손해 볼 수 없잖아. 내가 주님한테 하게 되면 주님 나한테 뭐 줄 겁니까? 이 정신이 바로 바리새인 정신이에요.


우린 알아요.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만 알면 안 되고 죄 있는 여인을 죽인 자도 살인자 된다는 사실을요. 바리새인을 죽인 자는 살인자가 안돼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하나님이 살인자가 되어버려요. 하나님이 율법 위반자가 된다고요. 율법의 차원에서는 예수님 죽인 자만이 살인자가 돼요. 동시에.


예수님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이 여인을 죽인 자, 바로 형제를 죽인 자가 살인자가 되는 겁니다. 살인자의 새로운 규정이 생겨버린 거에요. 예수님과 함께 한 자를 건드리는 것은 곧 나를 건드린 것이다. 하나님을 건드린 거에요. 그렇게 하면 딱 끝나는데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 나보고 하는 이야기네. 우리는 막 이러고 싶어요.


그러면 제가 묻지요. 왜 그러고 싶습니까? 구원받기 위해서 이렇게 하거든요. 구원받기 위해서 그게 바리새인인 거에요. 아직도 자기한테 희망을 걸고 있는 거에요. 내가 여인처럼 내 모든 것을 버리면 내가 주님 앞에 주면 주님 나한테 뭐 해 줄 겁니까?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이게 바로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에 딱 합치된 거죠. 더도 덜도 아니고 딱 맞는 거에요.


그래서 향수를 주님께 했다는 이것을 저는 이 단어로 표현할게요. ‘상실’. ‘잃어버린 것’. 여인은 자기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 것을 알아요. 자기가 개과천선 안 되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찾고 있는 사람은 뭐냐? 나를 상실해도 되는 나를 그 분 앞에서 나는 더 이상 내가 나로 있을 이유가 없음을 결정되는 그런 순간을 기다렸던 거에요. 예수님을 제대로 안 거에요.


예수님이 대신 나를 대신한다는 그 대신이라는 의미를 여인은 미리 알게 된 겁니다. 어떻게 알게 됐느냐? 그건 주님 소관이니까 우리는 알 수 없지만 여인은 나를 대신하는 분이에요. 대신하는 분에 더 이상 내가 나를 유지할 필요 조차도 없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내 죄가 세상만사에 공개적으로 웃음거리가 되고 놀림거리가 된다고 할지라도 나랑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에요. 이 정도 여러분 실력 되십니까? 이게 실력에 관한 문제가 아니에요.


반면에 관람객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상실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갖고 놉니다. 자기가 자기 가지고 장난치고 있어요. 내 인생 내 것이고 내 몸 내 것인데 내가 장난 좀 치면 어때? 맨날 이런 식이에요. 집에 화초가 있는데 아침마다 물 줍니다. 물 줄 때 이거는 주인이 그 화초보고 내가 물을 줄 테니까 맛있게 마셔라 하거든요.


그런데 정작 마시는 그 화초는 기분 나쁘고 주인이 내가 아니고 자기가 주인이면서 지 맘대로 키우는 거에요. 나의 신체, 나의 인생을 이게 내 것이라고 여기고 이 내 것이 내 것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내 것 가지고 뭐냐 하면은 예수님 찾다가 부처 찾다가 교회 봉사했다가 어디까지나 내 것이니까 내 맘대로 내가 해가지고 썩 내 마음에 드는 내 것 만들겠다는데 그게 뭐가 잘못이냐. 여기 손실과 이익을 계산하는 거에요.


주님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이것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나는 나를 평생 장난감으로 여긴다. 평생 장난감으로 여긴다. 이게 바리새인입니다. 이게 주변부에 그 예수님과 여인이 있는 중심부의 둘러쳐있는 거에요. 관람객으로 쭉 있는 거에요. 있으면 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여인을 보고 뭐 참회하고 회개하고 하겠습니까?


그걸 보고 참회하고 회개하고 이런 거 없어요. 욕만 하죠. 뭐라고 욕하느냐?? 바리새인처럼 욕해요. 저 여자는 죄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예수님이 잘 모르시는 모양이야. 악해도 너무 악하기 때문에. 저런 여자를 용서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위신과 체면에 손상이 갈 텐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아무리 교인 하나가 아쉽더라도 저런 여인을 받느냐. 저 여인이 향수 하나 얻기 위해서 무슨 짓을 했는지를 주님 알아요?! 주님 저 여자의 과거를 제대로 알아요?!


주님 뭐라고 하는 줄 압니까? 너는 네 과거를 알아? 이렇게 나와요. 우리는 우리 죄가 우리의 생각의 한도를 초과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자신은 모르고 있는 거에요. 우리가 몇 단계 거처 버리면 우리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고 있는 거에요. 그저 코앞에 있는 나의 이익과 손실 그것만 자꾸 염두에 두지 우리는 우리 죄를 미처 모르면서 남의 인생이라고 그렇게 나쁘게 평가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그래야 내 장난감이 얼추 손해 안 봤다 싶은 생각이 들거든요. 하나 예를 들게 되면 서울에 주로 못 사는 동네 주로 골짜기 산중턱이 많거든요. 산중턱에 집을 해질 때 되면 노을이 훤하게 보이는 집 알지요? 앞에 가리는 게 없이. 이런 집에 그야말로 피난촌 임시로 지은 집 같은. 사람 손으로 지어도 일주일 만에 다 짓는 집 있잖아요. 전문가 아니더라도. 그런 집.


밑에 집들 있는데 떨어져있어. 따라오지 말라고 하는 것처럼. 버스는 여기까지 오고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올라가야 돼. 여기에 아빠 50대 초반, 엄마 40대 중반, 딸 중학생 12살짜리 있다면 여러분 이게 얼마나 행복해 보입니까? 참 이게 행복해 보이겠죠? 행복해 보인다, 보인다는 말을 했어요. 그런데 막상 이 집에 들어가 살아보세요.


물도 이 밑에 가서 수돗물 들고 와야 되지요. 애는 중학생은 학교 마치고 여기서부터 헥헥 버스 내려가지고 헥헥헥 거리면서 와야 되고 여름 되면 땀 다 젖지요. 겨울 되면 찬바람 다 맞지요. 좋은 것은 아침에 해 뜰 때하고 해 질 때 노을 아름답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이익 되는 거 없어요. 빨리 아빠 우리 돈 벌어서 밑에 있는 여기 주택에 들어가 살아. 이게 소원일 거에요.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은 나보다 더 죄 있어 보이고 나 보다 더 못 살아 보일 때 그 쪽에는 어떤 행복이 없을 거라고 여기잖아요. 거기는. 행복이 없다고 여기는 그 자체가 내가 생각하는 내 죄 한도를 넘어선 거에요. 내가. 나쁜 짓해서 죄가 아니라 생각하는 기준, 삶의 기준, 그 기준이 하나님 보시기에 모자라면 그것은 함부로 남들을 정죄한 죄가 되고 이것은 하나님께 뭐가 되느냐 하면은 빚진 자가 되어버려요. 빚진 자. 주님 앞에 빚진 자가 된다고요. 빚을 지고 있다고요.


이거는 예수님이 이야기 안 하면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왔으니까 알려주는 거에요. 너희들은 남들하고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행복하면 뭐 인생 잘 살았다고 고개 끄덕이면서 자기를 갖고 노는데, 정작 시선은 뭐냐 하면은 이 바리새인 말고 예수님이 보는 시선과 그리고 예수님께 모든 것을 상실해버리면서 그게 너무 감격스러워서 우는 그 여인의 안목은 우리한테 없다면,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우리는 엄청난 죄인입니다.


10분 쉬어야 되겠지요.

 

강남-누가복음 7장 38절 (신체 포기 각서) 211019b-이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죄 사함이란 내가 다가서고자 하는 나 자체를 상실시킬 때에 그 보물이 그 주님한테 있는 보물이 오롯이 드러나는 그것이 죄 사함의 취지에요. 나 용서받았다가 아니라. 내 문제에서 내 문제로 돌아오는 게 아니고 나를 치워버리니까 상상 못할 보물이 거기 있었네. 이게 죄 사함의 의미에요.


죄를 치워버리니까 죄인 아니고 의인 되게 하시는 그 메카니즘이죠. 장치. 주께서 친히 마련하신 계획, 이게 드러나는데 이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이게 엄청난 보물인 겁니다. 그러면 그 보물을 한마디로 그 보물이 뭐냐? 그 보물이 주님의 지시입니다. 주님의 지시라고 하는 것은 그 항상 전제가 뭐냐 하면은 인간의 지시에 따르지 마라. 인간의 지시에 따르지 마라.


그런데 이 인간 안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은 ‘나’가 포함되어 있어요. 나는 나의 지시를 따르지 마라.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상실이 일어납니다. 내가 상실하는 걸 ‘나’ 상실. 드라마에 나상실 나온다고 했지요. 오지호하고 한예슬 나오는 거. 주님의 지시는 나를 상실하라는 지시에요. 나를.


왜냐하면 죄의 문제, 죄와 죄 사함의 문제, 죄가 무엇이냐 아니냐, 그 죄를 하느냐 문제는 이미 내 문제가 아니에요. 주님에 속한 문제입니다. 왜냐 하면은 인간은 자기 죄를 자기가 한도를 잘 몰라서 그래요. 어떤 행실 나쁜 여자 보고 저 사람은 나보다 죄인이다 하는 것은 그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거는 얼마나 그 여성이나 나나 뭐 삐까삐까 하지요.


그러면서도 관람자 입장에서는 자기를 숨기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만약에 내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 10명인 것과 내 속사정을 아는 사람이 547524명인 것과 이럴 때 많은 사람이 알면 졸지에 이 사람은 죄인이 되어버리고 나는 10명 알고 나머지는 모른다 할 때 나는 졸지에 뭐로 인식되느냐 하면은 의인으로 인식돼요. 의인으로.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둘 다 죽여버리거든요. 둘 다 죽인다는 말은 죽음을 새로운 죄의 기준으로 사용하겠다는 거에요. 주님의 안목은. 그 주님의 안목이 지금 여인 앞에 있는 예수님의 안목이에요. 관람자들 바리새인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요. 예수님이 무슨 안목을 가지고 예수님이 여인의 죄를 받아주는지를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주님의 지시를 따라야 될 이유가 왜 인간의 지시 내가 나의 지시를 따르면 안 되느냐 하면은 나나 타인이나 인간은 빚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갚을 수가 없다. 빚을 갚을 수 없으면 이건 저주에요. 저주입니다. 빚 갚을 수가 없어요. 죄 사함 문제를 가지고 빚 문제, 빚과 그 탕감 문제로 주님께서는 전환시킵니다. 죄 사함 문제.


죄 사함 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두 가지의 견해가 있지요. 하나는 바리새인 견해. 바리새인의 견해는 그 여인에게 말로서 잘 설득하게 되면 자기가 개과천선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이미 동네에서 5875만 모든 인간이 다 알기 때문에 이거는 어지간한 사람은 교화가 안 된다. 인간 안 된다 결정 난 문제지요.


또 하나 견해는 뭐냐? 예수님 견해에요. 예수님의 죄 사함은 그 여인의 죄가 사해지느냐 의인되느냐 그 문제가 아니고 그 여인을 가지고 어떻게 예수님 하실 일을 벌어지는 하나의 말씀의 현장화시키느냐 여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이 발상의 전환, 이것은 성령이 아니면 아무도 몰라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천당 가요? 어떻게 하면 죄 사함 받을 수 있습니까? 이 발언 자체가 질문 자체가 이거는 주님하고 아무 상관없는 문제입니다. 주의 지시와 주님의 명령이 현장화되어 있는 현장에 너는 이 세 그룹 중에서 어느 쪽에 속하느냐? 이것을 한번 보라는 겁니다.


어쨌든 주님께서는 말씀은 말씀 자체가 곧 현실이 될려면 그 작업을 주님께서는 계속해서 밀어붙입니다. 그래서 여기 죄 문제, 죄 사함 문제에서 전부 다 말씀과 관련되어 있고 주님의 지시와 관련되어 있고 주님의 오신 뜻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 뜻이 조금 더 구체화되게 되면 빚과 탕감 문제가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빚과 탕감 문제.


빚과 탕감 문제에 대해서 빚진 사람을 주인이 용서하게 되면 탕감된다. 이 정도는 바리새인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탈무드 보면 다 나와요. 다 나온다고요. 어떤 사람이 사랑을 표현할 때 “너 빚이 얼마야? 나한테 빚 얼마 졌어?” “100만원.” “그거 안 갚아도 돼. 탕감해줄게.” “아! 진짜 사랑입니다!” 이 정도는 모든 인간 세계에 종교에 인간의 상식에 선악 체제에 다 들어있는 거에요.


죄인을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용서해준 자가 의인이 되는 이 구조, 이 구조는 사실은 그동안 인간 세계를 유지해왔던 인간들만의 지혜의 구조 안에 이것이 풍부하게 다 들어있습니다. 가진 자의 명예를 위해서 헌신하라. 그래서 기부하는 그 제도에 대해서 사람들이 좋게 생각하잖아요. 가진 만큼 기부를 많이 하는 그것이 이 세대의 미덕이다.


예수님께서 했다고 하니까 그렇게 놀라운 일이! 뭐가 놀라워요. 일반 세상 다 하고 있는데. 심지어 조폭에도 있다고요. 조폭에도. 형님 한번만 도와주시면 하겠습니다. 그래! 너 나와 함께 이 조직 생활 고생 많이 했으니까 이번 저쪽 나이트클럽은 네가 인수해라. 조폭 세계도 다 있는 거에요. 조폭 세계도.


여기 41절에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 한 사람이 하루치 품삯인 거에요. 참 흥미롭지요. 값을 매기는 데 있어서의 뭐하느냐 하면은 노동력으로 매겨요. 노동력이 뭐가 된다? 그 사람의 값이 된다는 말은 노동이 그 사람의 생존의 권리를 보장해준다. 생존의 권리를 보장해준다.


이것은 마르크스 같은 경우에는 상품에 들어있는 사용 가치는 거기에 투입된 노동의 시간에 따라서 비례해서 사용 가치가 주어진다. 노동자가 일을 많이 하면 노동자에게 그 몫이 돌아가야 된다.


그런데 세상이 자본주의 세상이 되면 사용 가치가 아니고 아무리 사용 가치 있더라도 시장에서 안 팔리면 이거는 완전히 똥값이 되니까 결국 사용 가치만 정의로운데 이걸 교환 가치로 되니까 어떤 사람이 만약에 사재기를 해버리면 다른 사람은 사용하고 싶어도 백원 짜리를 오백원주고 사야 되니까 이 나머지 사백원은 새로운 자본으로 축적이 되가지고 이 자본이 활용되어 버리면 생산 기계, 생산 수단을 이게 독점해버리면 다음에는 100주고 살 것 500원 주고 사는 게 아니고 천원주고 사고


이번엔 400원 이윤 보는 게 아니고 900원 이윤 보고 합쳐서 1300원 이익을 봤으니까 이거는 더 큰 모든 자본의 힘을 다 독점하는 큰 자본가가 되가지고 큰 자본가가 또 다음에 더 많은 피해를 낳는 그런 이 사회가 있으니까 혁명으로 엎어버리자. 이게 자본주의, 공산당 정신이에요. 공산당 정신입니다. 이게. 뭐라고요? 인간의 가치, 존재의 가치는 어디 있다고 했습니까? 자기의 노동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북한의 김일성도 좋아하는 성경 귀절 마르크스도 좋아하는 성경 귀절 뭐냐?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북한 김일성도 그 주장했어요. 마르크스도 주장했지만. 마르크스 엥겔스, 스탈린, 레닌, 전부 다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 “너는 죄인 중에 괴수다” 그 말은 들어오지도 않아. 십자가 그건 들어오지도 않고 그 말만 들어오는 거에요. 이게 말이 말 돼서 그래요. 이게 기호가 되지 않고 언어의 유희, 언어의 장난처럼 돼서.


그게 왜 잘못되었는가. 아까 바리새인할 때 기억나십니까. 복습합시다. 자, 바리새인의 삶을 뭐라 한다? 이익과 나에게 이익과 나에게 손실이 오느냐를 염두에 두고 모든 일을 하지요. 바리새인들은. 그래야 자기 가치가 죽을 때까지 유지가 되기 때문에요. 나는 나 때문에 살잖아요. 나는 나 때문에. 나의 가치 때문에 산다고요. 가치를 늘이는 것은 나에게 이익이 되고 있는 가치 손실되면 나한테는 그걸 불행이라 하고 이걸 인생 비극이라 생각하는 거에요. 나의 가치를 어디에 내놓는다? 세상의 시장에 내놓는 거에요.


시장에 나와서 내 가치를 시장에서 많이 쳐주면 다시 말해서 나라는 것이 교환 가치가 늘어나게 되면 되고 아무리 일해도 만들어서 시장에서 안 팔리면 나는 고생한 게 헛수고가 되는 거에요. 집에서 하루 12시간 뜨개질해보세요. 뜨개질한다. 그 뜨개질한 노동 시간 해가지고 돈으로 쳐가지고 팔면 팔립니까? 안 팔리지요. 그래서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그것조차도 자본 시장에서는 교환 가치입니다. 예술 시장.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기 오백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의 하루 품삯이 일 데나리온입니다. 요새 농촌에 포도 따고 과일 딸 때 얼마 주는가 13만원 되겠습니다. 여자는 10만원, 남자는 13만원. 13만원 곱하기 오백 데나리온 하면 얼마냐 하면 6500만원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빚이 있는데 하나는 6500만원 빚졌고 하나는 650이라는 빚졌는데 값을 것이 없음으로 둘 다 탕감하여 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2절까지 봤습니다. 누가 더 사랑하겠는가?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시몬이죠.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합니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주님께서는 주님께서의 빚 해결은 인간의 노동으로서 하나님께 빚진 것은 인간의 노동으로서 해결이 안돼요. 그럼 뭘로 해결되는가? 주님께서 여기서 모든 율법의 완성으로 해결하는데 율법의 완성이 뭐냐 하면은 ‘사랑’입니다.


인간에게 그동안 빚을 못 갚은 것은 노동을 안 해서가 아니라 뭐가 없기 때문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거에요. 모든 행동의 그 안에 뭐가 깔려있지 않느냐? 사랑이 깔려있지 않았던 겁니다. 그럼 사람들은 사랑하면서 종일 일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을 가지고 이걸 뭐냐 하면 죄의 한도 초과에요. 한도 초과.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거에요. 속상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을 원하는데 사랑이 없는 인간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빚을 이 빚에 대해서 내가 어떤 노동을 해도 빚 갚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동원시키는 거에요.


그렇다면 바리새인 같은 경우에는 자기한테 여전히 가능성을 두는 거에요. 열심히 하고 바르게 하게 되면 빚 갚을 수 있다. 그런 관람객들이고 거기에 비해서 여인은 어떻습니까? 이미 자기는 물 건너갔어요. 안됩니다. 자기 향수 해가지고 뭐 향수 예수님께 넘겨준들 뭐 그 값어치 안 쳐줍니다. 뭘 해도 여자가 예수님께 어떤 아양을 떨고 어떤 아부를 해도 죄 용서는 되지 않아요. 그래서 그 여인은 눈물을 흘리지요. 자기 상실이죠.


흘리는 것은 눈물만이 아니지요. 남자 오줌 그런 건 아니고 향수까지 흘리지요. 고속도로 보면 써놨어요. 남자 화장실에 제대로 오줌 누라고 하는 거 있어요. 내가 오지랖 넓게 또 밀지요. 청소 하는 아주머니들 고생하지 말라고. 그런 노동한다고 구원받는 건 아니고요.


그 여인은 그냥 그 앞에서 고체인 자기를 액체로 만들어버려요. 눈물과 향수처럼 저 모습이 내 모습인 냥 그냥 쏟아부어서 중력에 맡겨버리는 거에요. 날라가버리는 거에요. 허비해버려요. ‘나는 이제 없다’가 되는 거에요. 갚을 수가 없는 거에요. 주님은 말합니다. 내가 그동안 네가 사랑을 몰랐던 인간이 사랑을 할 수 없는 이유는 여전히 자기한테 어떤 요만큼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게 계속 죄가 되는 거에요. 자기한테 희망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지금 와서 자살할까요? 확 죽어버릴까요? 어떻게 할까요? 이렇게 나오겠죠. 그냥 주님의 지시에 따르면 되는 거에요. 주님의 지시에. 탕감하고 안 하고는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겸손했느냐 그거하고 상관없어요. 그럼 주님의 지시에 따르면 될 게 아닙니까. 너의 지시에 네가 따르지 말아라. 너 지시에. 너의 지시에 따르지 말란 말이죠.


사람들은 남들이 나에게 명령하고 나는 그 사람의 지시에 따른다고 하거든요. 이거는 그 구조를 잘 몰라서 그래요. 사람은 절대로 남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습니다. 남들의 지시를 받고 자기의 미래를 계산해가지고 아까 했지요. 어느 것이 손실일까 어느 것이 이익일까 계산해가지고 최종적으로 본인이 본인에게 지시를 내려요.


협박, 급박 백날 해도 지시는 내가 내린다니까요. 내가. 지시는 내가 내려요.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하는 거에요. 어떤 목적으로? 보다 나에게 유리하도록. 이익이 되도록. 그 이익 된다는 게 뭐에요? 나의 노동의 가치가 안 죽고 계속 살아남게 하는 거죠. 내가 저 자식 키운다고 얼마나 애 쓴 줄 압니까 이런 거 있잖아요.


그 남편들이 술 먹고 들어와가지고 자는 아이들 다 불러 아내까지 불러놓고 마! 내가 너희들 먹여 살릴려고 마! 응! 내가 서장하고 마! 같이 목욕도 하고 내가 당구도 치고 이런 수모를 당했어! 다 너희들 때문이야 내가 가족 없이는 나도 존재하지 않는 거야. 뭐 되게 거룩한 연설을 일장연설을 하는데요 단에 올라가가지고. 그거 자기능력 가치 알아 달라. 내 존재 가치 알아 달라는 겁니다. 내 존재 가치.


큰 교회에서 장로들이 기도하면서 매뉴얼 있지요. 매뉴얼. 우리 선배 장로들과 우리들이 피 눈물 흘려가면서 기도했기에 오늘날 이 성전 터를 주셨고 이렇게 나오지요. 스페인의 어떤 남자가 90살인데 이 사람이 서른 살 때부터 홀로 60년째 뭘 짓느냐 하면 성당을 짓고 있어요. 성당을. 그래서 저널리스트 하는 사람이 찾아가서 방송에서 인터뷰합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혼자 몸으로 보니까 성당 헌 30%인가 40% 완공됐는데 보조 하나 있긴 있는데 이 보조는 20년 전부터 붙어서 돕는 남자, 50대 남자가 붙어서 도와주는데 어떻게 힘들게 성당을 지었습니까 하니까 그 할아버지 하는 말이 이건 다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세 번 물었는데 세 번 다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이건 내가 한 게 아닙니다. 그런 소리...


주님께서 하시면 이 성당을 허물어야죠. 성당을 세우는 게 아니고 허물어야 돼요. 향수는 상실해야 되니까 내 노동력은 상실해야 돼요. 무가치하다고 주님 앞에 통하지 않는다고 버려야 그게 주의 일이죠. 늘 손수 벽돌해가지고 심지어 지하에 자기 무덤까지 파 놨어요. 그 사람은 성당을 쌓는 게 아니고 자기를 쌓는 거에요. 자기를. 자기를 이만큼 쌓는 거에요. 바벨탑 쌓듯이 자기를 쌓아온 거에요.


큰 교회 장로들 기도하는 내용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그동안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이 나라, 이 조국 한국을 위해서 민주주의와 경제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는데. 경상도 쪽의 장로입니다. 이제 와서 이 좌파 이것들이 주께서 살펴보셔서 북한한테 가지 않게 해주시고 갑자기 정치적 발언이 막.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그런 대통령 뽑아서 이 나라를 다시 하나님의 축복된 나라로 만들어주옵소서. 윤석열 교회 안 다니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 중간에 다 떨어졌는데. 정세균 집사부터 다 떨어졌는데. 신학교 나온 그 사람도 중간에 떨어졌는데. 표 못 받아서. 노동력은 인간에게 권력으로 이어집니다. 권력으로 그냥 이어지는 게 아니고 노동가 노동하는 당사자가 노동하는 그 당사자가 하나의 자기 스스로 자기를 이념화시켜요. 우상화시킨다는 말입니다. 이거는 내 중심이죠. 내 중심.


내 중심 이념화시켜가지고 내가 원하는 나라, 내가 원하는 조국, 내가 원하는 그러한 가정, 내가 원하는 교회 이렇게 다 내가 들어가요. 바로 오늘 나오는 이 여인은 바로 이 나를 없애버리는 거에요. 왜냐하면 탕감이라는 의미를 나중에 신약에 사도 바울은 이게 뭐냐? 대신 죽으심이 되거든요. 탕감이. 죽었다는 말은 뭘 죽었다 하느냐. 노동이 죽었다는 거에요.


내가 하는 노동이 아니라 주님 한 노동으로 내가 구원받는다 이 말입니다. 내가 죄 용서받고. 내 노동이 아니고. 따라서 주님의 지시에 따르라는 말은 너는 너의 지시에 따르면 안 되는 거에요. 왜냐하면 나는 항상 내 노동력을 근거로 해서 나에게 그만한 실적과 업적을 남게 하겠다는 아주 집요함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내 고유의 나의 가치거든요. 고유함. 고유함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only. 오직 나만의 최종 마지막 남은 나의 노동력. 내가 살아왔던 힘들게 인생 살아왔던 그거에요.


여기서 인간은 손실과 이익을 생각한다고요.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바리새인이나 일반 교인들이 이걸 보면서 아 이런 게 있구나 좋겠다 하는 것은 그 사랑은 그 사랑에서 뭐가 빠져야 돼요? 사랑에서 뭐가 빠져야 됩니까? 내가 원했던 나의 사랑은 이 사랑에서 필히 빠져나가야 되는 거에요. 필히 빠져나가.


그래서 많이 탕감받아야 많이 사랑할 때는 이것만 보게 되면 뭐가 안 빠져나가요? “헤헤 좋은 주인 만나서 이익 봤네. 세상에 6500만원 빚졌는데 얼마나 자비로운 주인을 만났는지 탕감되었어.” “에게 나는 650만원인데.” “나는 6500만원.” 6500만원이 “음메 기 살어!” 하면 옆에서 “나는 6억5000인데.” “나는 60억5000 탕감받았는데.” 바로 이것은 바로 인간이 본인이 알고 있는 죄에 대해서 죄는 항상 그 한도를 초과한 은혜가 주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죄를 알면 알수록 은혜는 그 자기 아는 죄보다 더 초과해서 탕감되었다는 사실을 계속 이 땅에서 성도라 할지라도 죽을 때까지 살아봐야 더욱더 내 죄가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가 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죄가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어떻게? 그만큼 노동했으니까. 많이 노동하고 많이 애쓴 만큼 모든 게 아까운 거에요. 그걸 이미 가졌기에 너무 많이 가졌기에 버리기에는 너무 시기가 늦어버린 겁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로마서 5장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되어있지요. 그러나 그 간단한 말 되기 위해서는 누가복음 8장 같은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던 만났던 이 여인들이 필요했던 거에요. 오늘 강의 중에 어려운 부분에 속하는데 나열해보겠습니다.


인간이 이렇게 있으면 인간에게 무엇이 있느냐 하면은 시간이 있고요. 시간은 변화 의식으로 인하여 시간 의식이 생기는 거에요. 변화. 변화 없으면 시간을 느끼지를 못해요. 삼풍백화점 무너졌을 때에 분명히 3일 있었는데 그 사람보고 당신 몇 일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한 10시간? 아닙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72시간 동안 땅속에 있었거든요. 왜냐하면 달라진 게 없으니까. 변화를 감지를 못하는 거에요.


이 시간은 변화를 의식하고 변화하다 안 하다를 느낄 수 있는 재질은 바로 어디서 나오느냐? 바로 공간입니다. 공간에서 이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뭐냐 하면은 이걸 확장해나갑니다. 4살 때 아이들의 시간과 공간, 7살 때 아이들의 시간과 공간, 20살 때 다 달라요. 그럼 80세 때 시간과 공간 다 다릅니다. 80살 된 어른이 7살 애가 울고 있으면 “꼬마야, 그게 울 일이야? 그게! 남자는 일생에 3번 울어야 돼.” 태어날 때 울고 주식해서 망해서 울고 퇴직해서 갈 데 없을 때 울고.


아버지와 조국을 잃어버리든 말든 아버지 죽으면 늙어서 죽는 거 할 수 없고. 전부 다 나 때문에 울고 나 때문에 울고 나 때문에 울고 비상금 감춰놨는데 그거 들켰을 때 울고. 그게 울 일이야? 주님 보시기에는 이게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있어요. 제한적. 제한적이라서 울 때 웃을 때 분간도 못하고 있어요. 인간들은. 여기서 원형이 있어요. 원형은 뭐냐? 예수님이 우시는 것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 그 시간과 그 공간을 몰라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은 나의 시간과 공간을 나이와 관계없이 그걸 잘라버리고 주님의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여기서 시간을 집어넣어서 공간의 변화를 추구합니다. 이 변화가 뭐냐 하면은 아 이건 다음 다음주 주일날 설교인데 특별히 알죠? 특별히 이게 바로 주님의 강림. 재림입니다. 공간의 변화에요. ‘공간의 변화’.


이거는 공간의 변화는 공간을 기다리면 안돼요. 이미 주의 시간에 들어 간 사람에게는 이거는 자연적으로 이거는 따라오는 거에요. 자연적으로. 내가 여기 있는 것은 주님의 죄 사함의 은혜, 탕감의 은혜가 들어와서 내가 용서받는 게 아니고 내가 이 자리가 바로 누가복음 7장의 말씀의 현장인 것을 그 현장에 내가 다루어지고 있다는 거에요.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의 말씀의 하나의 기호로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거에요. 주님 보이고 나를 관찰하는 바리새인 보이고. 그리고 거기에 모든 것을 어쩔 수 없이 상실하게 된 나, 그거 보이고. 그런 내가 날마다 파 절이도록 노동을 하는 이유는 노동하면 할수록 나로 하여금 내가 아는 죄를 점점 더 초과해서 내가 미처 모르는 내 죄가 이렇게 겹쳐진 죄가 세월 따라 풀려져 나오는 거에요.


풀어져 나와서 ‘내가 이 정도로 악한 자구나’ 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대충 악하면요 착함으로 이게 만회가 되버려요. 주님 내가 악한 거 인정하겠는데요 내가 그 사람한테 사과했잖아요 이렇게 한다고요. 제가 주일 낮설교 때 했지요. 인간은 남하고 하나님한테 사과한 적 없다고요. 사과는 누구한테 하느냐?? “바보야! 똑바로 해. 앞으로 사과할 일 없도록 노력해야지.” 본인이 본인보고 닦달하고 사과하고 있는 거에요. 여보 미안해. 절대로 여보한테 미안한 거 아닙니다.


그래서 죄 짓고 주님의 지시에 따르는 게 아니고 주님의 지시가 임하는 그런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나의 죄는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는 거에요. 나의 악한 여인의 역할은 무럭무럭 지금 잘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모든 걸 맡겨야 되고 울면서 비싼 돈도 드려야 되지 않습니까 하면 그냥 갖고 계세요. 우리 것 아닙니다. 주께서 필요한 데로 쏙쏙 뽑아 쓰실 거에요. 아무도 없어서 과속해서 7만원 날라가게 만드실 것이고 쏙쏙 뽑아내요.


절대로 한순간도 우리 힘으로 절대로 돈 하나 허투루 안 쓰게 하십니다. 허투루 안 쓰게. 벌금낼 때 벌금 내게 하시고 허투루 쓰지 않게 하지요. 사기꾼한테 속아가지고 돈 한 20만원 날리게 만들고 허투루 쓰질 않아요. 얼마나 욕심이 많았으면 사기 당하겠어요. 그런데 욕심을 안 낼 수도 없는 게 우리 입장이고.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죄가 아무리 한도 초과라도 은혜는 그보다 더 한도 초과. 탕감은 인간의 어떤 노력, 노동을 했던 그 노동은 주님 앞에서 네가 몇 시간 일했니? 500 데나리온. 500시간 일했습니다. 너는? 50일 동안 일했습니다. 둘 다 없음. 둘 다 노동한 거 아무것도 없음. 이게 보물이에요. 이게 주께서 감추어진 보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마태복음 18장을 한번 보겠습니다. 18장 21절. 그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제가 마태복음 18장을 보자고 했습니다.


21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이건 수천억이 넘어요. 갚을 것이 없는지라 이런 식으로 되어 있다고요. 비슷한 이야기죠.


비슷한 이야기인데 왜 마태복음 18장에 베드로가 죄 용서 문제를 왜 끄집어내야 되는가. 베드로라고 되어 있지만 베드로라고 하지 말고 바리새인,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있는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이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완성은 누가 가져가야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완성을 가져가요. 내가 온 것은 율법의 일점일획 다 이루리라 했거든요.


이루는 상태를 아까 뭐라고 했어요? 사랑. 사랑의 구체적 방법은 은혜로 주어지요. 이 은혜의 원형은 바로 죄 속에 있던 아들을 바로 아버지께서 은혜를 주셔가지고 건져내는 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율법은 어떻게 이루어진다고요? 지키는 게 아니고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거에요.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뭐가 없으면? 사랑이 없으면 nothing, 아무 의미가 없어요.


네 몸을 구제하고 네가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남들 보기에 대단한 희생처럼 보일지라도 그거는 사랑과 별개다 이 말입니다. 사랑과 별개. 사랑은 사랑이고 네 몸 하나 건지는 것은 사랑하고 무관하고 아무 상관 없어요. 사랑일 거라고 여기는 흉내내기 있잖아요. 그건 본인의 노동이에요. 인간의 노동은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


자신의 가치에 손상이 오느냐? 아니면 내 가치가 빛나느냐? 이익이냐? 손해냐? 빛나면 행복하고 손상나면 나는 비극이고 불행이고. 어디까지나 자기 관리와 관련되어 있거든요.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이고 사랑은 뭘로 오느냐? 은혜로 와요.


로마서 4장에 보면 은혜는 뭐와 격돌이 되느냐 하면은 인간의 행위와는 절대로 같이 매치가 될 수 없어요. 은혜는 행위로 되지 않고 은혜거든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은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니고 뭐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 그걸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해요. 이 믿음 안에 내용 들어 있으면 행동, 행위가 못 들고 오직 은혜만 믿음의 내용으로 들어있어야 돼요.


그래서 주님 십자가 지고 난 뒤에 성령 오고 난 뒤에 비로소 믿음이라는 것이 오는 겁니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았으니까. 사람의 손을 피해서 왔으니까. 내 노동력과 내 손을 피해서 선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성령의 선물. 이걸 자꾸 은사라고 하니까 은사라는 말이 맞는데요 은사라고 하니까 이게 너무 남발이 되가지고 그냥 선물이고 싶어요.


그것도 모자라면 택배. 은혜가 그냥 택배에요. 그것도 새벽 특송. 아침에 보니까 새벽 배송. CJ에서 온. 믿음. 믿음 오게 되면 그게 사랑이고 율법의 완성이니까 이 사람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의인이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의 안에 있는 사람이 되지요. 개인이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물리학에 필드, 장의 어떤 질서가 정립이 되면 그 개체도 동일한 질서를 성질을 부여 받는다 이거 물리학에 나와요.


그러니까 의의 장 안에서는 우리는 무조건 그 안에서는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의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오늘 누가복음 본문 안에서 이게 뭡니까. 탕감의 세계거든요. 내가 죄 졌습니다 할 때 그 “저는 죄 지었어요.” 하면 주님께서 더 데시벨을 높여 가지고 고함을 지릅니다. “내가 탕감했어!!! 탕감했어!!! 내가 탕감했어.!!” “제가 이런 죄를 지었어요.” 바들바들. “내가 탕감했어.” 뒤통수를 팍! “탕감했어!!”


“죄 지었다니까요.” “탕감했다니까!!” “죄 지었어요.” “탕감했어!!” 또 얼마나 맞아야. 탕감했다니까. 탕감. “저 죄 지어서 손해 봤어요. 지금 몸이 아플 것 같아요.” “죽어라 인간아! 탕감했어!” 내 공간의 변화에 신경 쓰지 마세요. 이 공간은 이미 탕감의 공간이기 때문에 나 7살 8살 9살 때 내 몸이 아프다 주님께 벌 받았다 지금 돈이 20만원 날라 갔다 이런 내가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공간의 여러분들이 신경 쓰면 안 됩니다.


나 때문에 아이가 아프고 나 때문에 성적 내려가고 이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내가 이렇게 까불대니까 교인 두 명이 다른 교회 가고 나는 이제 끝났다. 그러면 안돼요. 지금 그거는 바리새인입니다. 자기 노동력 지금 계속 고집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 사람들이 여인 보고 욕 할 사람이에요. “너 한번 까발려봐?” 그럼 “안돼요~.”


그래서 율법 있는데 베드로는 뭐냐 하면은 바리새인같은 사고방식이에요. 뭐냐 하면은 율법을 내가 멀쩡하게 살아서 어떻게 율법을 이루느냐? 질문을 한 거에요. 내가 멀쩡하게 살아가지고. 그러면 내가 멀쩡하게 살면 여기서 좀 난해한데요. 내가 살아 있으면 내 옆에 누가 있느냐 하면은 내가 여기 있으면 타인도 여기 있어요.


나는 누구하고 비교하느냐? 이 차이에서 나의 나를 규정하거든요. 나는 이 정도다. 타인하고 비교해서 하거든요. 규정된 그 규정이 나한테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내가 둘로 갈라져요. 지금의 나와 거기서 더 보다 더 괜찮아진 나를 미래상을 여기서 반드시 내가 자식처럼 나의 복제물로 이렇게 만들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남하고 이야기 안 합니다. 내가 나하고 이야기해요. 항상. 나하고 이야기하고 내가 이야기해서 상상한 내가 만족스러우면 도로 그걸 당겨서 내가 만족스러워요. 결혼 안한 노총각들이 침대 옆에 길다란 죽부인 있지요. 죽부인 껴안고 잔다고. 자기 짝이 있어요. 자기가 자기하고 속닥속닥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니까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내가 좀 더 나가면 내가 누구한테 검사받느냐 하면은 내가 진짜 다치기 싫은 내가 공들여 만든 나로부터 실망시키기 싫은 거에요. 내가 나한테. 내가 나라고 하니까 이걸 어려운 말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자아와 주체의 관계. 사회에서 인정해 주는 나와 내가 규정하는 나와 나 사이의 끊임없는 교류와 대화, 교환.


그리고 남한테 내세울 때는 나를 내세우는 게 아니고 나를 숨기고 반드시 나를 숨기고 주체를 내세우고 싶은 거에요. 그런데 오늘 나오는 이 악한 자는 나와 주체가 전부 한 통 속이에요. 몽땅 다 그냥 상실해버렸어요. 그냥 버려버렸어요. 어차피 주께서 내 대신 할 거니까. 내가 나를 가지고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면 나는 어디로 가느냐? 이동했으니까. 나의 죄 문제가 이동했으니까 내 문제가 법원에서 내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대신해서 주님이 선고받고 주님이 판결받을 내 문제인데 나를 대신한 그걸 구약에서 후견자라고 하는데 후견자, 나를 대신 대표해서 변호사가 내 대신 모든 일을 처리해주는 거에요. 나는 그 분 안에 있고. 너무 편리하죠. 갑자기 이익이라는 생각 안 듭니까? 이익. 그런 수가 있었어요?! 그런 수가 있었어요. 그런 수가 있는데 문제는 이걸 은근히 노린다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괜찮아진 구원받은 나를 나는 멀쩡히 살아있고 이 이상형에다가 구원받고 깨끗하게 죄 처리가 된 나를 여기 딱 세워놓고 내가 나한테 잘했어 예수 믿길 잘했어 이러고 있다니까요. 예수 믿는 거 다른 사람하고 너 한번 비교해봐. 내가 월등하게 믿음 좋은 거야. 믿음 배틀 들어가는 거에요. 바로 이걸 근원을 짤라버리는 거에요. 주님께서. 이런 고리를. 선악 체제 고리를 잘라버려요.


베드로가 너무나 감사한 게 우리의 본심을 그대로 이야기해줘요. 제가 몇 번 용서해주면 내가 용서하는 사람이 되는 이상적인 나 자신을 확보할 수 있습니까 라는 뜻이에요. 내가 저 사람을 얼마나 용서하면. 그런데 여러 사람 용서하면 안 되고요 같은 사람이 나한테 같은 죄를 지었을 때 또는 다른 죄를 지었을 때 내가 그 사람을 몇 번 용서해주게 되면 나한테 나쁜 짓 한 사람으로 인하여 나는 점점 더 용서가 되는 용서할 줄 아는 율법의 완성자로 거듭나서 나 자아의 완성의 길에 얼마나 높이 도달할 수 있습니까 라고 베드로가 우리가 묻고 싶은 그 질문을 미리 당겨서 해주신 거에요.


그 뒤에 것은 모른다고 치고. 우리는 갑자기 베드로 편에 서가지고 저도 안 그래도 그거 궁금했어요. 저 그거 굉장히 궁금했어요. 예수 믿는 거 구원받는 것은 아는데 믿고 난 뒤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굉장히 궁금했어요. 어떤 목사는 말하기를 대구에 사는 목사는 막 살라고 하는데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분명히 이야기해주세요.


역시 정답은 마찬가지에요. 주의 지시를 따르는 거에요. 왜 주의 지시냐 하면은 거기에 대해서 네가 신경쓸 게 없다는 거에요. 그 문제에 대해서. 그런 문제를 시작하는 그 율법 문제, 율법 문제의 책임자는 네가 아니고 네가 지킬 문제 아니고 책임자가 따로 예수님 자신이 온 거에요. 히브리서 10장에 나오지요. 내가 한 몸을 따로 준비해가지고 그 몸에게 모든 율법은 완성 하나님 아버지께 다 맡긴 거에요.


그분이 실패했으면 우리가 실패한 건데 놀랍게도 그 분이 성공했어요. 성공하시고 성공했다는 그 표시로서 우리에게 성공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게 성령의 소식입니다. 성령 오게 되면 그 소식을 받게 돼요.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심지어 나의 일이 더 이상 내 일이라고 할 게 없구나. 아무 문제없구나. “나는 문제없어” 하는 노래 있죠. 아무 문제 될게 없다 이 말이죠.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을 그 반복시키기 위해서 우리 자신을 자꾸 문제아로 만들어버리는 거에요. 주께서. 문제아로 만들고 문제없음이 되는 과정 속에서 뭐가 피어나느냐? 사랑이 피어나는 겁니다. 탕감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매일같이 확인되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아직도 계속 살려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22절에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 일곱 번이 아니고 일흔 번의 일곱 번. 베드로의 용서의 한도에요. 다시 말해서 죄의 한도에요. 설명해드릴께요. 베드로가 여기 있는데 어떤 사람이 자기한테 죄를 지었잖아요. 죄를 지었을 때 베드로가 어디까지 참느냐 하면은 한번 내가 참아줬다. 두 번 참아줬다. 세 번 참아줬다.


일곱 번 참으면 이것이 네가 더 이상 내가 용서할 필요도 없는 죄인 중의 죄인의 극치에 왔다고 베드로 쪽에서 그렇게 결정을 내리는 거에요. 이게 베드로가 아는 죄의 한도에요. 일곱 번이. 8번째 용서하는 것은 용서 못하겠다는 거에요. 7을 경계로 해서 8번째는 용서 못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베드로는 지금 자기는 뭐냐 하면은 죄의 한도를 7번으로 규정했잖아요. 7번으로 규정한 내가 뭐가 되느냐 하면은 이상적인 내 모습을 이상향을 세우는 거에요.


주께서 이걸 뭐로 끄집어내느냐 하면은 이걸 490번으로 하는 거에요. 7곱하기 70, 490번이잖아요. 그러면 489번. 489번을 그 인간도 참 끈질기다. 489번 돈 빌려가고 돈 안 갚을 때 지금 베드로는 그래도 네가 용서 받을 기회가 있다 라고 이 착하디 착한 이상적인 베드로가 자기 베드로에게 그렇게 설득하는 거에요. 한번은 참자 우리. 한번은 참자. 주님께서는 그럴 용의 있냐고 묻는 거에요.


그러면 베드로가 고집 센 베드로 같으면 안 하겠지만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희미한 베드로 같으면 예 하겠습니다. 다 하고 나서 490번 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일흔 번의 일흔 번의 일흔 번 이렇게 할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용서는요 우리가 490번의 일흔 번보다 더 한도를 초과한 죄인으로 우리들을 보고 계시다는 뜻이에요. 우리를.


우리가 용서받을 수가 없는 인간이라는 그 점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거에요. 네가 한 두 번 잘못이 아니라 뭘 해도 잘한 것이 없는 존재. 하는 족족 죄에 해당되는 사람. 그것을 탕감하는 시선에서만 그게 보이는 거에요. 용서받은 자 만이 그 사랑이 보이고 그 사랑을 아는 자만이 더 이상 내 구원을 탐내거나 내 구원에 시도하지 않고 주께서 나를 주님의 다 이루심, 그 말씀의 성취 현장으로 나를 사용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감사하게 됩니다. 이 감사는 또 내일치 죄를 지어야 또 감사가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우리가 예상하고 우리가 계획하고 결제받을 일이 아니라 일방적인 주의 계획에 우리가 일방적으로 선물을 받고 주의 말씀에 일방적으로 다루어지는 그런 성도로서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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