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8장 10절 (아름다운 과정)211102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8장 1절부터 18절까지 하겠습니다. 여기 예수님의 12제자가 악귀를 쫓아낸다고 되어 있는데 이 악귀를 쫓아낸다는 말은 이 세상에 악귀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악귀가. 그럼 그동안 인간들이 악귀하고 줄 곧 악귀, 악한 귀신과 더불어 살았다는 겁니다. with 악귀. with 코로나. 함께 악귀와 더불어 산거에요.
악귀와 더불어 살았으니까 이 악한 귀신이 악하다고 악한 것이라고 누가 지적을 해야 합니다. 지적을 해야 하는데 악귀보고 귀신보고 귀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그 분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은 유일하게 귀신들리지 않는 사람. 첫째 조건은 귀신들리지 않은 사람이 악귀라고 지적을 해야 되고요. 두 번째 그분이 뭐냐 하면은 귀신들렸다고 오해받는 사람. 이 사람만이 악귀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본인은 귀신들리지 않기 때문에 악귀를 추방할 수 있고요. 추방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은 악귀하고 함께 있기 때문에 이 함께 이것이 뭐냐 하면은 인간들의 삶의 현실이거든요. 삶의 현실. 삶의 현실이다 이 말이죠. 그럼 삶의 현실에서 악귀를 쫓아낸다는 것은 이 삶의 현실에 속하지 않은 분이어야 악귀를 쫓아낼 수 있고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어야 이분이 귀신들렸다는 오해를 유일하게 받는 분이어야 된단 말이죠.
왜? 악귀들렸으니까 전체가 여기 이러한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해서 악마 자체가 나 악귀다! 라는 악마는 없잖아요. 나는 정상이다. 제대로다. 정상이다, 제대로 된 사상이다 라고 이걸 유포시켜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이 악귀들린 그 쪽에서부터 뭐가 되느냐 하면은 귀신들렸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돼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나옵니다. 누가복음 11장에 보면 15절에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라고 한 거에요. 예수님보고 귀신 들렸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왜 이야기를 이렇게 1번, 2번 두 요건을 다 갖추어야 되느냐 하면은 이미 악귀한테 접수당한 이 세상에서는 중성이라는 게 없습니다. 악귀도 안 들리고 성령도 안 받고 중간쯤 되는 사람은 없어야 돼요. 만약에 중간쯤 된 사람이라면 굳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 세계 가운데서 좀 괜찮다 악귀 안 들린 사람이 그 사람 고쳐주면 되니까요. 유대인들이 그걸 자처했어요. 건강하니까 우리는 악귀 안 들린 줄 나쁜 귀신 안 들린 줄 알고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바리새인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너 집안 자체가 귀신의 집안이다. 왜? 저희 아버지가 악마니까. 악마 집안이에요.
그럼 악마 집안이 믿는 여호와는 있지도 않는 여호와에요. 진짜 하나님은 예수님 아버지만 진짜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마귀가 조작해낸 종교적인 여호와 하나님이죠. 말이야 뭘 못 갖다 붙입니까 다 갖다 붙이죠. 그래서 이 악귀를 쫓아낸다는 말은 어떤 뜻이냐 하면 이 세상 사고방식은요 자기는 악귀 들렸으면서 그걸 모르고 정상적이다, 제대로다, 세상 잘 돌아가고 있다. 지금 멸망으로 가는 것도 모르고 불바다 되는 것도 모르고 잘되고 있다, 이렇게 보는 거에요.
여기서 지난 낮 설교한 것을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낮 설교에 제가 무슨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불신자들은 늘 바른 말만 한다. 이렇게 했지요. 불신자들은 늘 옳은 이야기를 해요. 거짓말을 안 할뿐더러 과학적으로 사리를 판단해가지고 세상을 옛적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불길한 조짐이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가 내린 결론이다. 과학적 결론이에요.
지구 역사가 47억년. 우주 역사는 137억년. 이거 수학적 계산으로 다 나오는 거에요. 조건이 있어요. 지금의 물리법칙이 과거도 유효하다면. 과거도 유효하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된다면. 이것은 이 원리를 계산이 맞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의 짧은 기간의 실험에 의해서 나오는 데이터가 과거도 미래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조건하에 우주의 역사는 137억년 지구의 역사는 47억년 이런 계산이 나온 겁니다.
이 원리가 뭐냐 하면은 이런 거에요. 세상에서의 이 의미라는 것, 세상 자신의 의미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어릴 때 알던 테이블, 테이블의 의미가 좀 크면서 탁자에 대한 의미가 계속 뭐가 되느냐 하면은 누적이 되겠지요. 나중에 42살 때 어떤 테이블을 봤을 때 그 테이블 의미는 어릴 때 봤던 테이블 의미가 누적되면서 그때부터 누적되면서 변천을 거쳐서 나온 42살 때까지 나왔던 그 의미를 자기는 테이블 의미로 보는 거에요. 어릴 때부터 해서 누적된 의미.
그러니까 이 말은 의미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제가 하는 의미는 뭐냐 하면은 어떤 사물 탁자가 있는 것을 그냥 테이블이라고 보지 않고 거기에 감정을 싣게 되어 있단 말이죠. 의미 안에는. 내가 까불다가 넘어진 그 테이블. 인간이 살아오면서 겪었던 모든 것을 다 주입시켜서 색다른 의미로 보는 거에요.
고목나무. 요즘 고목나무 자주 나오는데. 고목나무 무슨 나무냐? 오래된 나무죠. 어떤 사람에게는 그거는 어떤 고목나무를 처음 본 사람에게는 오래된 나무로 끝나겠지만 그 고목나무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고목나무를 볼 때마다 고목나무 플러스 헤어졌던 첫사랑이 자꾸 결부되어서 그게 의미가 되는 거에요. 다른 사람은 고목나무 와가지고 이쪽 길입니다 등산로 노란 테잎이나 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고목나무하면 눈물을 죽 흘리는 거에요. 그때 사람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올 리도 없겠지만. 올 리도 없겠지만 혹시 아냐. 또 올 줄 이렇게. 다 의미가 달라요.
그래서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의미하고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지요. 완전히 달라요. 아무리 달라도 이 세상은 의미를 보태고 보태도 이걸 못 뽑아낸다니까. 이 세상 자체가 악귀가 다스리는 마귀가 다스리는 세계라는 이 요소를 뽑아낼 재간이 없어요. 왜?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을 정상으로 보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불신자는 바른 말한다 이 말은 그것은 올바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세상을 볼 때 의미를 찾는 그 ‘나’ 가 좀 정상이고 싶어라. 이 욕망이 있어요. 나는 하자 없는 인간이고 싶어라.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내가 옳게 이야기한다면 내가 나를 옳게 본다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분명히 하자가 없고 옳기 때문에 옳게 볼 것이다 라는 그것을 자기가 믿고 싶은 거에요 이게. 믿음의 내용을 자기가 만들고 싶은 거에요. 잘못이 없고 하자가 없는.
나는 마귀들렸다 이걸 누가 믿어요. 나는 마귀들린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이거는 되지요. 자기는 마귀 안 들렸으니까. 예수님께서 12제자를 같이 다녔다. 그러면 예수님 주변에 12제자가 포진되어 있습니다. 12제자는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양식을 보여주죠. 형태를 형식을 보여주는 거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그냥 툭 던져놓고 그냥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까? 아니지요. 이번에 겨울수련회 주제가 여호수아인데요. 제목은 ‘없는 땅’ 이라는 제목인데 여호수아가 그 전쟁에 나서면서 그냥 나선 게 아닙니다. 가는 길을 누가 막았느냐? 군대장관이 막았어요. 너희들이 사는 땅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는 땅을 정복하라는 겁니다.
아 인간으로서는 정말 이거는 감당하기 어려운 땅이에요. 자기 사는 땅도 이건 골골하게 터전을 가꾸고 다듬고 하기 힘든데 사람 사는 땅도 이렇게 힘들게 토대를 닦아놔야 되는데 하나님이 산다면 도대체 하나님이 원하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그게 오시지 안 그러면 오시지 않거든요. 하나님이 오셔야 된단 말이죠.
하나님이 사시는 땅을 이스라엘 백성 보고 그걸 만들어내라고 하니까 그걸 만들 수가 있겠어요? 여기에 누가 오느냐? 천사가 등장해요. 수련회 벌써 시작한 느낌 든다. 천사가 왔다고요. 여호수아 5장에. 군대장관이 딱 서니까 거기서 여호수아가 항복했잖아요. 신발 벗어라. 신발 벗었어요. 어디 신 신고. 예예예 신발 벗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는 땅은 어떤 조건이냐 하면은 모세에게 준 언약 있잖아요. 약속이 완성이 되면 하나님이 살 수가 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약속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그러니까 천사가 앞장서야 되지요. 천사가 언약대로 실시할 때 그거는 종들은 시키는 대로 해야지요. 따라가야 돼요.
이 말은 이스라엘이 악귀가 안 들린다 할지라도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동행자가 이스라엘 동행자가 그 당시 이 세상의 악귀보다 더 우열한 더 통치력을 가진 분이 동행해주지 아니하면 악귀는 물러갈 생각을 안 합니다. 악귀한테 자꾸 악귀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악귀는 악한 마귀는 귀신이라고 할께요. 쉽게. 귀신은 물러가지를 않습니다.
귀신은 나름대로의 자기 조직체가 있어요. 악마가 대장이고 그 밑에 부하들이 귀신이거든요. 자기 나름대로의 조직체가 있어가지고 귀신을 건드리면 악마가 가만 두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악마는 인간을 이기고 있고. 귀신이 들어오겠다는 것을 말릴 수가 없지요. 마귀가 집어넣었으니까. 악마가 집어넣었으니까요. 지금 우리 형편이 이런 형편이에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뭐냐? 씨 뿌리는 이야기 아닙니까. 8장 4절에요. 씨 뿌리는 이야기라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씨 뿌린다는 이 비유를 하시는 이유가 그 씨 뿌리는 이야기가 뭐냐? 10절에 보면 이건 천국, 하늘나라에 관한 비밀이에요. 씨 뿌리는 비유가.
그러면 씨를 뿌린다는 그 취지가 뭐냐 하면은 이 세상 자체가 씨가 없는 세상이다 이 말입니다. 씨를 뿌린 적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세상에 인간은 살고 있는 거에요. 누가 와서 뭘 뿌려? 뿌리기는 뭘 뿌려. 뭐 없어. 우리는 청소 다 했어. 없어 없어. 뿌리기만 해봐라. 락스 가져와서 싹싹 밀어낼 테니까. 씨 뿌리는 족족 다 제거해버리는 세계.
그래서 귀신의 대장인 바알세불 악마가 통치하는 세계라는 것은 주께서 그걸 정확하게 이 세상은 악마가 다스리는 세계라는 것을 보여줄려면 주께서 하시는 말씀 속에 뭐냐 하면은 악마가 하는 일을 집어넣어서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뿌리는 거에요. 외부에서 씨를 뿌리는 거에요.
그런데 그 씨 뿌릴 때 제일 첫 번째 내용이 뭡니까? 뿌리면 누가 와서 먹습니까? 새가 와서 공중의 새가 와서 그걸 먹어버리죠. 그게 뭐냐? 12절에 보면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그 다음에 뭡니까? 뭘 얻지 못한다?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자, 구원을 얻지 못하고 말씀을 마음에서 빼앗는 그 세력이 이 세상에 지금 현존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월급만 따박따박 나오면 살만하잖아요. 뭘 말씀을 뺐든 그런 건 신경 안 쓰고. 승진하고 출세하고 성공하고 넓은 아파트 살고 몸 건강하고 살 뺄 때 쫙쫙 빠지고 찔 때 근육 찌고. 그럼 행복하다 이렇게 되거든요.
시작을 주님이 뭘 했느냐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데 평소에 내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뭘 하고 있느냐 맨날 시작을 이것부터 시작하니까 그것부터 시작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내가 뭐 잘못되었는데? 나는 바르게 사는데. 나는 바르게 사는데 나는 잘못된 게 없는데. 맨날 이런 식이에요. 맨날 이런 식.
누가복음 11장 한번 봅시다. 11장 거기에 보면 24절부터 26절까지 보겠어요.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귀신 하나 들어갔다가 나갔는데 나중에 일곱을 더 데려온 거에요. 그럼 토탈 귀신 몇 마리입니까? 8마리가 어디에 들어왔다는 말입니까? 그 사람 속에 들어왔다는 거에요. 그 사람 속에 들어오면서 귀신은 뭘로 보느냐 하면은 귀신은 그걸 자기 집으로 보는 거에요. 자기 집으로. 집이 뭐냐? Home이 뭐냐? 귀신도 좀 쉬자. 너희들만 쉬냐. 나도 좀 쉬자 해서 쉬자고 들어가는 그 안식처가 인간의 마음. 인간의 마음이에요.
그러면 귀신들린 이 분이 그동안 뭐했어요? 나가라 뭐 이런 아무것도 반응도 못하고 그냥 자기 마음을 홀랑 귀신의 안식처로 거실 다 내준 겁니까. 도대체 그동안 뭐한 거에요? 왜 귀신오는 걸 왜 오지 말라고 왜 반발 못했습니까? 왜 못했어요? 지금 이 세상이 귀신이세요? 귀신이 뭐 허락 맡고 계십니까? 잠시 한 달간 하숙 하겠습니다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와요. 그냥. 그냥 들어온다고요. 그 정도로 인간은 귀신한테 나약한 존재다 이 말입니다.
자, 오늘 본문 누가복음 8장 봅시다. 8장 2절에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해 봅시다. 이스라엘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함께 있다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은 누구와 함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있지요. 이건 이스라엘이 거주할 땅을 찾겠다는 것이 아니고 정복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주할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앞장 세운 거에요.
그거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미 아담의 세계, 인간의 세계가 누구의 권세 안에 이미 장악 당했습니까? 점령당했습니까? 뱀한테 점령당했잖아요. 뱀한테. 그게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옵니다. ‘옛 뱀. 용.’ 이미 점령을 당했어요. 예수님이 탄생할 때에 그 유대 나라에 통치자가 누구였습니까? 헤롯이죠.
그러면 주님은 그 많은 유대 나라의 많은 사람 가운데 유독 누구를 지목합니까? 동방박사와 예수님을 해코지할 자를 누구를 지목합니까? 헤롯인 거에요. 헤롯. 임금이에요. 헤롯은 유대 나라의 뭐가 되느냐 하면은 유대 나라의 통치자죠. 이 통치자가 동방박사나 예수님에게 시도하는 게 뭘 시도했습니까? 살해했지요. 죽일려고 한 거에요.
죽일려고 하는데 못 죽이고 두 살 밑의 애들 베들레헴 애들 다 죽었잖아요. 통치자가 뭔가 일을 시도하면서 그 여파로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밑의 애들 다 죽었습니다. 다 죽었는데 정작 죽일려고 하는 아기 예수님은 그 가족과 함께 애굽으로 피신했어요. 애굽으로.
그럼 여기서 애굽이라는 나라하고 이스라엘 나라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말씀을 반대로 사용해가지고 예수님 계신 곳을 이스라엘로 봐가지고 현재 예수님을 학대하는 그곳을 애굽으로 봐가지고 애굽에서 내 아들을 뽑아냈다 이렇게 설명하는 거에요. 예언을. 이거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구약을 설명하는 것과는 완전히 뒤바뀌었지요.
왜냐 하면은 상황 자체가 성경을 해석할 수 없는 자가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해석을 할려면 그들의 해석과 완전히 뒤바뀌어져야 돼요.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도 비슷한 말이 나오는데요. 한번 적어볼께요. 사도 바울이 말하는데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라”고 이야기했지요. 맞지요? 그렇게 되어있지요? 내가 사람을 좋게 하게 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라고 했지요.
여기에 사람 가운데 누가 포함되어 있어요? 내가 사람한테 포함될까요? 포함 안 될까요? 예? 된다? 안 된다? 반드시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걸 새롭게 해석하면 뭐냐? ‘나는 나를 좋게 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나쁜 짓을 한 게 마귀 짓이 아니고 나를 기쁘게 한 게 마귀 짓이에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마귀 짓이에요.
고린도후서 5장 17절 “이제 그리스도 외에는 새로 구원받은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게 함이라” 딱 나오잖아요. “우리 교회 부흥됩시다.” 이거 이단이라니까요. 뭘 부흥해요. 누구 교회? 우리 교회. 우리 교회 하니까 대구의 어느 교회 이름 같다. 우리 교회 부흥합시다 하면 왜 부흥해야 되는데? 왜 해야 되는데?
많은 신학자나 목사들이 어떤 설교를 할 때 기본 선입견이 뭐냐 하면은 이거에요. 저 설교 따라하면 내 교회 부흥될까? 이게 기본이에요 기본. 갈라디아서 1장 10절 이런 건 무슨 말인지 몰라요. 하나님을 위해서 잘되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이런 식이에요. 자기 자신이 거기에 부정적 존재로서 개입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거에요. 자기는 자기가 봐서 멀쩡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여기 2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 있는데 막달라 마리아. 여기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입니까. 뭐했던 자에요? 일곱 귀신 들렸다가 나간 자 잖아요. ‘일곱 귀신 들렸다 나간 자’. 그런데 그 앞에 1절에 보면 12제자가 뭘 했다? 악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지요. 그러면 이 막달라 마리아가 12제자한테 굽신거려야 됩니까 아니면 그 공로를 누구한테 돌리겠어요? 예수님한테 돌리겠어요? 제자한테 돌리겠어요? 제자 아니고 예수님이죠.
왜?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까요. 여기 나 할 때의 ‘나’가 하나의 인물이잖아요. 인물 또 나와요. 뭡니까? 그리스도 인물이잖아요. 이 인물, 그리스도라는 인물과 ‘나’라는 인물 가운데서 인물이 둘 나오는데 최종적인 결정자가 하나로 줄여야 한다. 누구 쪽으로 몰아 세울거야 이 말이죠. 나냐? 아니면 그리스도냐 이 말입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못 섬기거든요. 나를 우선하면 그리스도가 나의 졸개가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리스도가 되면 나는 주님의 졸개 딸랑딸랑. 주님의 졸개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느냐. 나에게 주인이 다 있다니. 지금까지 나 혼자 살았는데 나한테 주인이 있다니. 그 주인이 얼마나 든든한지. 나는 주인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온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온다.’ 이걸 자유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왜? 나로부터 벗어났으니까요.
그 악귀들린 막달라 마리아가 이렇게 악귀들린 쫓아냄을 당하고 병 고침을 하니까 이 광경을 그 다음에 4절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이 모습을 이렇게 비유하시는 겁니다. “말씀하시되” 4절 끝에 보면 뭐라고 되어있지요? 뭐로 말씀하시니? 비유지요. 여기서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어려운 이야기 시작됩니다.
현실에 반대말이 예수님한테는 비유가 돼요. 현실의 반대말이 초현실이 아니고. 초현실이라는건 없어요. 현실바깥에 초현실이 있더라도 현실적과 관련성 될려면 비유로 이야기해줘야 돼요. 비유로. 왜냐하면 현실 바깥에 초현실이라고 이야기해버리면 이거는 그 당시의 유대 민족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들은 다 이 정도로 생각할 수 있어요.
인간이 사는 세상 말고 하나님 사는 세상 있다 이 정도는 상식입니다. 이거는 인간의 상상력에서 이건 충분히 이런 것을 인간은 구상하는 재주가 있어요. 현실의 세계 말고 바깥의 주님의 세계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인간들에게 주님은 뭐냐 하면은 현실의 세계 안에 천국은 비유로 세계에 이미 들어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이미 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들어온 분 놔두고 바깥에 죽으면 좋은 나라 있다. 이미 들어왔잖아. 들어와 들어와 들어왔단 이 말이죠. 이미 들어온 분이 할 때는 비유도 현실 이야기하는 것 같고 현실도 현실 이야기 같은데 둘이 이 양쪽에 내용이 통하지를 않네요. 도대체. 이게 알 수가 없어요. 뜻이 통하지를 않아요.
10절에 한번 봅시다. 8장 10절 “이르시되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비유로 한다는 자체가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새로운 영역 공간을 새로 만드는데 그 만드는 세계가 뭐냐? 비유의 세계. 현실을 까는 세계. 현실을 부정하는 세계에요.
그래서 8절 끝에 보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런 조건을 왜 붙입니까? 이런 조건 이 조건을 모르게 되면 이거는 네가 들어도 왜 예수의 말을 내가 못 알아듣는지 본인이 그 원인을 파악이 안돼요. 주님은 원인을 파악을 합니다. 원인 파악을 해가지고 알려줘도 이게 해결책이 안나요. 왜? 네가 들을 귀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말씀을 그렇게 해버려요.
그러면 그쪽에서 귀 두 개인데 들을 귀 하나 더 붙여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아니야 그러면 안돼. 왜? 현실은 현실대로 비유와 차이 남을 뚜렷하게 드러낼려면 이 들을 귀라고 하는 것은 그냥 제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들을 귀는 어떤 사람에게 제공되느냐?
바로 그것을 위해서 막달라 마리아 일곱 귀신 들렸는데 귀신도 두 귀신 정도가 아니고 일곱 귀신 들렸으면 이것은 자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하는 거에요. 자력으로 귀신은 나가지 않는다. 꼼짝 마라 이거에요. 꼼짝 마라. 일곱 줄을 감는다는 말은 완전히 드디어 자기 힘으로는 구원 불가능성입니다. ‘구원 불가능성’
그러면 나는 구원이 안 되지요. 나는 구원이 안 되는 여자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 나는 구원이 안 되는 여자에요.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이것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은 이건 뭘 반영하느냐 하면은 그 당시의 현실세계, 오늘날 우리의 현실세계를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이 현실세계라는 말은 어떤 것도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막달라 마리아로 보여주는 거에요.
이걸 현대 물리학에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깔대기 비슷한 그림. 깔대기 동그란 부분 있고요 여기 새카만 부분 있는데 이걸 이게 뭐냐 하면은 블랙홀. 블랙홀. 블랙홀은 빛도 중력이 강해서 빛도 빠져나오지를 못해요. 블랙홀은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볼 수가 없는데 그 근처에 있는 별들이 여기 막 빨려 들어가는 거에요. 시커먼 우물이기 때문에 시커먼 우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데 여기 주변에 있는 물들이 여기 우물 속으로 자꾸 흘러가는 거에요. 흘러가고 이게 손실되고 소멸돼요.
막달라 마리아는 구원이 불가능한데 이 땅에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정됐잖아요. 일곱 귀신이 덮고 있으니까 안 되잖아요. 일곱 귀신이 있어서 안 되는데 주님은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은 현실 안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를 뭘로 보느냐 하면은 씨 안의 존재로 봐요. 씨 안의 존재. 씨는 뭐냐? 여호와의 말씀. 말씀 안의 존재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하는데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용어가 적절해요. 지평선은 나중에 저녁 되면 뭐가 지지요? 낮에 혼자 주관했던 낮에 모든 에너지를 주관했던 해가 지평선 너머로 가지요. ‘너머’ 이렇게 씁니까? 한글로. 넘어 가지요. 사라지잖아요. 소멸되고 없어지지요. 이 블랙홀의 특징이 뭐냐? 들어갔다 하면 못 나와요.
블랙홀은 뭐냐 하면은 우주의 쓰레기통으로 아주 적절합니다. 좋은 점은 뭐냐? 보통 쓰레기는 꽉 차면 나중에 한도가 있는데 블랙홀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 커져요. 쓰레기통이 더 커져요. 멋지지 않습니까? 쓰레기통으로. 쓰레기를 집어넣으니까 쓰레기가 쓰레기통을 키우는 거에요. 이게 블랙홀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자꾸 삼키는 겁니다. 손실되고 소멸되는 거에요. 이 안에서.
그러니까 이건 뭐냐? 막달라 마리아 안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없는 거에요. 내 안에 내가 없는 것. 없어지는 거에요. 나의 고유성이 없어지는 거에요. 나의 고유성이 없다는 말은 드디어 귀신이 자기의 안식처로서 나를 사용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잘된 나는 존재하지 않아요.
왜? 내 안에 나는 존재하지 않아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예수 믿고 나게 되면 누구든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라는 아까 그 원칙을 그대로 여기에다가 적용 시켜버리면 나라고 할지라도 나를 위해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닌 거에요.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가 일하는 그 영역 안에 내가 놓여버린 겁니다. 그러면 그 전까지는 내가 일하는 영역 속에 내가 놓인 거에요.
보통 세상에서 어떤 이야기나 드라마 할 때 이런 거 하잖아요. 너의 정체를 밝혀라 또는 네 정체가 탄로났다 뭐 이런 문장들이 있지요. 이게 막달라 마리아한테는 해당이 안 되는 거에요. 정체가 없으니까. 정체성, identity, 정체 자체가 없기 때문에 탄로날 게 없어요.
실은 너 몸무게 57이면서 50이라고 속였잖아. 너 정체를 밝혀라. 아무리 봐도 50kg 넘는 거 같은데. 아가씨들 그런 이야기하지요. “57kg 뭐? 내 안에 있는 주님의 몸무게다. 내 몸무게 아니고 주님의 몸무게다.” 요새 주님의 몸무게 많이 나가요 요새. “정체를 밝혀라! 몇키로야?!” “몰라. 주님께서 얼마나 키워놨는지 나는 검사 안 해봤는데.” “57kg.” “주님께서 그렇게 만들어놨나?”
내 안에 내가 없는 거에요. 내 안에 내가 있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은 바로 귀신이 그렇게 사람들을 길들여놔서 그래요. 선악과 따먹는 한 정녕 네가 신이 되야 되겠으니까. 귀신이 우리를 그렇게 다루었던 겁니다. 너는 정당하다. 너는 하자 없다. 너는 바르게 살면 된다. 성도는 바르게 사는 사람이 아니고 소멸되는 사람이죠. 바르게 사는 것도 소멸되고 아픈 것도 소멸되고.
제가 옛날에 좋아했던 노래 제목이 뭐냐? 이 노래에요. 과거는 흘러갔다. 아시죠? 권사님. 몰라요? 과거는 흘러갔다. 이 제목이 너무너무 좋은 거에요. 과거는 흘러가버린 거에요. 과거의 ‘나’가 소멸된 겁니다. 우리 송재원 씨가 질문한 것처럼 과거가 과거는 현재에 이미 들어와버렸어요. 그래서 과거가 없는 거에요. 과거는 없어도 과거에 있는 의미는 계속 남아있어가지고 고목나무 붙들고 울고 있단 말이죠.
인간의 모든 의미는 사실은 자기에 관한 의미입니다. 모든 의미가. 학교에서 산수나 수학 가르칠 때에 아주 냉혹하게 가르치지요. 7x4=28. 굉장히 냉정하고 냉혹하지요. 그러나 이걸 7x4 이걸 풀 때 인간은 여기 의미가 붙습니다. 나는 똑똑하다라는 의미가 붙어서 내가 이걸 다 맞추다니. 선생님이 참 잘했어요 도장 팍 찍어주면 엄마한테 가가지고 엄마 또 100점이야.
7x4=28. 엄마가 “너는 그 의미를 아느냐?” 의미고 뭐고 필요 없어. 내가 맞췄다는 게 중요하지, 7x4 이것 자체는 의미 없어요. 내가 이걸 풀었다는 게 의미 있는 거에요. 모든 의미는 나한테 와서 최종점수가 매겨져요. 모든 의미가. 그 채점자가 누구냐 하면은 노태우지요. “본인이~~” 내가 채점자에요. 내가.
주님께서 씨를 뿌린다는 것은 그 씨가 현실의 정체를 폭로시키는 씨가 되는 거에요. 씨를 뿌릴 때에 여기에 나타나지 않던 이 세상의 통치자가 나타나가지고 길가에 떨어진 씨에 대해서 어떻게 합니까? 그걸 물어 없애버리지요. 그러니까 현재 인간들이 정상으로 보는 아! 대한민국. 중공. 중국 공산당. 이 모든 것은 노림수가 딱 한 개에요. 대한민국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관계없이 딱 하나입니다. 뭐냐 하면은 씨를 없애버리는 것, 씨를 말려버리는 것. 씨를 말리는 것.
그러면 성도는 그렇게 씨를 말려들어갈 때 성도가 얻는 게 뭐냐? 이게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에 여러분 도달했습니다. 성도는 뭘 얻느냐? 질문할께요. 성도가 얻는 것은 열매다. 맞아요? 열매다. 1번 맞다. 2번 틀렸다. 성도가 얻는 것은 열매다. 1번 이 말이 맞다. 2번 틀렸다. 30배 60배 100의 열매다. 2번 아니다. 몇 번입니까?
열매는 주님이 얻는 것이지 성도가 얻는 게 아니에요. 성도는 뭐냐 하면은 이겁니다. 과정입니다. ‘과정’. 성도는 결실이 되면 안 됩니다. 결실은 주의 일이기 때문에 결실은 주님의 일이 결실 되야지 내가 결실되면 안돼요. 내 안에 ‘나’가 없어요. 나는 하나의 주의 일에 과정으로 프로세스 과정으로 들어가는 거에요. 과정으로. 과정으로 들어가거든요. 과정으로.
저 미국에 남부에 가면 토지가 어마어마하게 크지요. 수십만 에이커 이렇게 농사짓는 사람에게 필수로 필요한 게 사일로. ‘사일로’. 겨울철에 습기 많은 사료를 습기를 촉촉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같이 섞어가지고 탑을 해서 창문이 두 개 있는데 창문 위에 집어넣어서 빼낼 때는 아래로 빼내요. 사일로. 사료 창고, 보관 창고를 사일로라고 합니다.
그러면 들어가면서 여기 돌을 놔요. 무거운 돌을 놔가지고 이 안에 있는 옥수수나 호밀이나 이런 습기가 있는 그것을 해놔야 가축들 먹일 질 좋은 사료가 돼요. 습기를 유지시켜 주니까. 위에서 내려오겠지요. 촉촉이. 40일인가 60일인가 이렇게 겨울철에 한다는데.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바로 과정. 크로마토그래피. 화학 실험하는 사람들은 알아요. 밀도가 다른 것을 집어 넣어가지고 밀도의 차이 가지고 성분을 분석하는 게 있어요.
유리병에 붙어있는 점도 이런 것까지 비교하거든요. 이만큼 내려왔다. 이만큼 내려왔다. 같은 시간 내에. 물질은 인간과 다르고 물질은 이러이러한 물질이다 살피는 거에요. 하나의 과정입니다. 과정인데 지금 주님께서 이걸 비유로 사일로를 몇 개 해놨어요? 하나, 둘, 세 개? 네 개를 한 거에요. 네 개를.
씨는 다른 씨가 아니에요. 동일한 씨입니다. 동일한 씨를 사일로 여기에 다 내려보내지요. 여기서 뭡니까? 쭉쭉 내려오지요. 일종의 사다리타기. 사다리타기 알지요? 쭉쭉 내려오는 거에요. 그러니까 사일로 하나하나가 뭐냐 하면은 과정들을 통해서 절차를 보여줍니다.
무슨 절차냐 하면은 절차를 보여주는데 천국이 통과하는 절차. 천국이 이루어지는,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통과해야 되는 절차, 이 절차를 보여줘요. 동일한 씨를 뿌립니다. 이 전체가 지금 인간의 일입니까? 성도의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이게 주의 일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12제자를 가리잖아요. 옛날 이스라엘처럼.
다시 이야기할께요. 이스라엘이 땅을 정복하는 것은 그들이 살기 위함이 아니고 누구를 살게 하기 위함이다? 주의 이름이 거주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 원칙은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완성하면서 이루어지는 거에요. 그러면 약속을 완성한다는 그 완성의 의미는 그 약속을 도발하고 약속에 대해서 저항하고 반대하는 것을 계속해서 그걸 끄집어낸다는 것과 동일한 뜻이에요. 주님의 적수를 계속 끄집어내는 거에요.
씨 안에 막달라 마리아 들어있어요. 막달라 마리아는 이미 귀신이 나갔잖아요. 막달라 마리아 사적인 의미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이에요. 구원을 받았지만 나는 구원 받았다를 적용해버리고 너는 하나의 씨앗이야 이렇게 되는 거에요. 씨앗이야. 전체가 하나의 씨앗이 되는 거에요.
이 씨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로 나왔지요. 그러면 그 하나님께 나왔다는 말은 이 씨를 뿌린 자가 있을 게 아닙니까. 이 씨를 누가 뿌리지요? 씨를 누가 뿌립니까? 뿌린 자가 있지요. 이 씨를 뿌린 자가 누구냐 하면 예수님 본인이 뿌립니다. 예수님 본인이 말씀을 뿌려요. 그러면 이거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오늘 참 어렵지요. 내용이.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가 어렵다고 사람들이 무슨 뜻으로 어렵다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어렵다고 이야기해요.
아까 다시 해봅시다. 현실 바깥에 초현실이 있다고 했습니까? 없다고 했어요? 이런 건 없어요. 현실 속에 현실의 반대말은 비유의 세계입니다. 비유의 세계에요. 현실 속에서 천국을 만들어내거든요. 그런데 이 비유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께서 현실 이야기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현실은 예수님의 현실 이야기를 못 알아들을 때 이것이 같은 현실 속에 살면서도 두 개의 현실이 지금 따로 나뉘어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과 나머지 인간이 하는 일 또는 마귀가 하는 일, 같은 뜻이에요. 인간이 하는 일을 보여줄 때 예수님께서는 그 양쪽이 어떻게 넘어올 수 있는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 동그라미를 기억하시면 돼요. 하나는 뭐냐 하면은 천국 비유의 세계, 그 다음 이쪽에는 지금 우리가 말하는 현실이라고 하는 거에요. 현실. 이 현실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가 우리는 현실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 사이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씨가 있어요. 씨. 이 씨가 옆에 누구냐. 막달라 마리아. 왜냐하면 이 사람은 구원에 불가능한 사람이기 때문에. 구원에 불가능한 사람인데 아까 블랙홀 있지요. 블랙홀 있는데 블랙홀에 만약에 우주선이 날다가 뱅뱅 돌다가 방향을 잘못 바꿔가지고 이쪽에 있다면 빠져버려요. 블랙홀 근처에 간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빠지는 건 아니고요 제대로 해야 돼요. 그냥 돌면 안 빠지는데 핸들 잘못 틀어버리면 빠져요. 빠졌을 때 한번 빠지면 못 돌아와요.
지평선에 해가 져버리면 이 해는 절대로 다시 떠오르지 않습니다. 서쪽으로 해지는데 서쪽에서 해 뜨는 거 봤어요? 없지요. 지는 쪽이거든요. 지는 쪽. 사라지는 쪽이에요. 그 역할을 누가 하느냐? 막달라 마리아가 하는 거에요. 나는 구원에 불가능함. 구원에 불가능하면서도 이게 넘어가는 거에요.
만약 여기에 절벽이나 해변가에 땅이 끊어지는 곳에 어떤 사람이 갔다. 어떤 사람이 가가지고 뭐 한마디 하더니만 뒤로 넘어져서 이 땅이 끝나는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을 때 다시 엉금엉금 기어 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잖아요. 그냥 넘어가잖아요. 막달라 마리아는 그냥 넘어간 거에요.
그 전에는 뭐냐 하면은 나는 불가능해. 나라는 인간은 불가능해 에서 인간에서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씨로 바뀌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남 보기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인간이잖아요. 그러나 비유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의 비유의 세계에서는 그걸 인간으로 보지 않고 씨 안에 있는 주님의 생산물로 보는 거에요. 주님의 생산물.
주님의 말씀이 들어있는 사람으로 주님의 작업, 주님의 천국 절차 과정에 참여된 자로 보는 거에요. 그래서 12제자가 악귀 쫓아내고 병 고친 사람 많으니까 그 전체를 모아놓고 주께서 거기에다가 새롭게 그걸 하나의 모형을 만드는 거에요. 모형으로 이게 바로 천국의 비유의 세계라고 하는 거에요.
어떤 사람은 삐지고 어떤 사람은 말씀 모독하고 어떤 귀신은 드론처럼 와서 말씀을 가져가고 온갖 있어도 어떤 사람은 기어이 30배 60배 100배 맺었잖아요. 그러면 구원만 챙기는 것이 아니고 그 과정 속에서 뭐가 등장하느냐. 왜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는지. 자력이라는 말 넣지 마세요. 아예 인간은 구원 대상이 안돼. 왜 인간은 구원이 안 되는지 이유가 뭐냐 하면은 본인이 인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구원이 안 되는 거에요.
못난 인간이라서 구원 안 되는 게 아니고 인간이라는 자체가 구원이 안돼요. 인간이라는 자체가. 왜? 씨가 아니기 때문에. 누가 나보고 씨라고 의미를 부여해야 구원을 받아요. 말씀 안에 주님의 작업에 동참해야 구원이 되는 거에요. 그럴러면 우리는 어느 지평선? 현실의 지평선에서 소멸되야 된다니까요. 그래서 성도는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니고 매일매일 사라져가는 사람이에요. “나 간다~” “어디로?” “나도 몰라.” 그냥 가버려요. 지평선, 현실이라는 지평선 너머 씨의 나라, 비유의 나라로 가버리는 거에요.
강남-누가복음 8장 10절 (아름다운 과정)211102b-이근호 목사
씨 뿌리는 비유에 의하면 성도는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은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 그런 것은 없어도 되는 상관없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나는 과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일의 시작과 마감은 내 소관이 아니에요. 그래서 몇 주 전에 설교에 의하면 그만하자.
그러니까 주님하고 나하고 상관이 없다는 점이 너무나 홀가분하고 감사하다 이 말이죠. 주의 일이 내가 관여할 게 없는 거에요. 관여할 게. 주께서 잡채 만들고 있는데 내가 거기 끼어들어서 저 당근 좀 썰어드릴까요? 됐어 됐어. 과정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과정 속에.
그러면 그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뭐가 되느냐. 보통 이 세상 현실에서는 이걸 자아라고 해요. 자아는 이게 주체 노릇을 합니다. 주체란 주인공이란 뜻인데. 이 자아라고 하는 것은 나는 여기 있다 또는 나는 ‘나’다 이런 뜻이거든요. 나는 ‘나’인데 이게 어디에 해당하느냐 하면은 이 주체를 세상이라고 쓰겠어요. 세상에서 내가 주인공처럼 나의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거에요.
그런데 씨의 세계, 천국 세계에서는 자아가 아니고 이걸 단자 또는 하나의 개체가 됩니다. 하나의 개체가 되어서 개체는 뭐냐 하면은 주체 노릇을 못합니다. 개체를 다루시는 분인 이 주인공은 누구이기 때문에? 주님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 노릇할 이유가 할 필요도 없고 할 이유도 없지요.
그래서 이걸 더 응용하면 목적과 기대에 자기를 투신하지 말고 과정에 투신해야 돼요. 목적 기대에 몸을 던지지 말고 과정에 투신해야 돼요. 목적과 기대에 투신하지 말라. 이 말만 들어보면 그럼 그냥 놀까요? 이렇게 나와요. 노는 게 아니고 그 과정에 주께서 이루시는 그 과정 있잖아요. 씨가 30배 60배 100배가 되게 하는 그 과정. 그 과정에 참여하는 거에요.
그럼 30배 열매가 나입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된다고 했지요. 열매는 누구 열매입니까? 주님의 열매. 주님이 포도나무고 주님의 포도나무가 그 열매가 우리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주체가 내가 내 인생을 챙길 주체가 못 된다니까요. 우리는 어디에 연관되어 있어요. 주님의 벌렸던 그 거미줄에 사로잡힌 자 된 거에요. 내 세계가 아니고 내 세계가 따로 없어요. 주님에게 얽혀 들어간 겁니다.
이걸 뭐냐 하면은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라. 사랑의 밧줄로. 그 밧줄이 나를 꽁꽁 묶는 거에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말씀에 이런 거 있지요. 13장 5절에 나오는 말씀. 제가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오늘 강의 듣고 한번 비교해보세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자기의 노림수를 생각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이 과정 속에 우리가 포함된 거에요. 네가 하란 말이 아니고. 참 말을 끝까지 들어야 돼요. ‘네가 이렇게 하면 천당 보내줄게’ 가 아니라 이렇게 되는 말씀이 이렇게 되는 그 과정 속에 네가 여기서 이미 네가 말려들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을 냈는데 나는 성을 냈는데 주님이 성을 낸 게 아니래. 이 말이 이게 진짜 말이야 막걸리야 이게. 정말 희한한 해석을 부여받는 거에요. 나는 성냈는데 그게 성이 아니래요. 나는 화냈는데 화가 아니랍니다. 저 화내는 것 좀 봐 얼마나 귀여워 이러고 있다니까요. 다들 경험이 없는 모양이지.
말씀이 말씀된다 할 때 그 말씀의 예를 든 게 바로 고린도전도 13장 예를 든거에요.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그 작업에 우리를 하나의 씨, 그 말씀의 씨로 들어가는 거에요. 그럼 마귀가 와서 우리 마음에 와서 있는 대로 다 솎아내는 거에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일체 씨 뿌렸다는 그런 흔적이 남지 않기를 목표로 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마귀가 통치한다 이렇게 정의 내릴 수 있어요. 왜냐? 마귀의 노림수는 뿌려진 씨에 있기 때문에 그걸 없애버리는 거에요.
자, 여기서 그 다음 문제 해야 돼요. 그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은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서 나는 사일로 네 개의 그 과정 통 속에서 나는 30배 60배 100배에 속합니까? 그 과정에 속합니까? 아니면 떨기나무 속에 떨어진 씨입니까? 아니면 바위에 떨어진 씨입니까? 아니면 길가에 떨어져 마귀에 잡혀 먹은 씨입니까?
또 이걸 묻는다고요. 그냥 묻는 게 아니고 스윽 물어요. 훅 하고 들어온다니까요. 자기 걱정 되는 거에요. 왜? 내가 주체니까. 내 인생 내가 책임지지 누가 책임지겠어요. 내가 챙겨야 되지 않습니까. 쑥 들어온단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은 이 과정의 특징을 몰라서 그런 질문이 들어오는데 과정의 특징은 ‘홀로 움직이지 않는다’ 에요. 홀로 움직이지 않아요. 과정은 전체가 같이 움직여요. 같이. 예를 들어서 우리 머리 뒤쪽에는 눈이 없잖아요. 눈이 없는데 앞에 있는 눈이 뒤쪽을 향하여 막 놀리는 거에요. 너는 눈도 없고 나는 눈이다 자랑하면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왜냐? 같은 한 몸 안에 있기 때문에. 뒤에는 눈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눈이 없는 거고 앞에는 눈이 있어야 되잖아요. 전체가 씨의 나라, 천국이죠. 말씀의 나라에서는 이런 정황 저런 정황 이게 다 동시다발적으로 늘 다발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거에요. 그걸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진짜 어려운 거 들어가는데요 이 사일로. 네가지 통로. 길가에 떨어진 것, 가시밭에 떨어진 것, 바위에 떨어진 것, 100배 열매를 맺는 것 과정들요. 주님께서 분리를 했잖아요. 각각 밭이 다르다. 이 전체가 과정은 결과와 닮지 않는다. 과정은 결과와 닮지 않아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걸 아주 쉽게 설명하는 방법이 있어요. 제가 한번 쓸게요.
자동차 생산라인은 자동차와 닮지 아니한다 이 원리입니다. 생산라인, 자동차 생산라인은 과정이거든요. 과정은 그 결과물 생산물과 전혀 안 닮았어요. 로봇 팔 이렇게 있고 용접하고 있지 그 라인은 자동차를 안 닮았어요. 자동차 조금 조립은 되겠지만 그것은 그냥 흘러가야 될거고 그 라인 자체는 안 닮았어요. 라인에 관여하는 거에요.
어떤 결실물을 내가 어떤 결실물을 내가 쟁취한다든지 내가 가지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나 열매할래 나 가시덤불 그거 안 할래 나는 마귀한테 먹혀버리는 씨 안 될래 라고 우린 그런 주체, 그런 자아가 나설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또 성경적 예를 하나 들으면 요한계시록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13절에서 16절까지.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이거 지상에 오신 예수님 닮았습니까? 안 닮았습니까? 전혀 안 닮았지요. 지상의 예수님은 마리아 닮았어요. 마리아의 DNA 유전자 입었기 때문에. 인간 모습이이에요. 그러나 여기 보면 인간 모습이 아닙니다. 도저히 닮을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본래 모습이 영광스런 주가 되었을 때 모습이 영광스러운 모습이거든요. 심지어 변화산에서도 이렇게 해같이 빛났어요. 모세, 엘리야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인자가 구름 타고 온다니까 사람들이 안 믿었어요. 왜냐? 보통 인간이 구름을 탄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뭐 타고 올라갔습니까? 구름이 내려와서 타고 올라갔잖아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주체가 있을 때와 그 과정 속에 있을 때에 그 면면이 모양새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인간세계에서는 이걸 이런 일이 없기 때문에 그걸 분간을 못 하는 거에요. 우습게 보는 거에요. 인간 세계에서. 인간 세계의 출발점은 뭐냐? 나같이 생기고 어벤져스.
다시 말해서 아주 슈퍼맨이 된다든지 보다 능력이 가미된 영웅적인 모습, 이걸 원하지. 못 알아 볼 정도의 주님이 현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왔다는 것은 그 인간 모습 속에 감추어진 그 영광스러운 주의 영광은 아무도 알아 볼 수가 없는 거에요. 이게 죄인의 모습이거든요. 로마서 8장에 그가 오실 때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죄인의 모습으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어요.
그렇다면 모양만 그러냐? 아니면 그분의 하시는 말의 의미도 그럴까. 말의 의미도 그런 거에요. 말의 의미는 천국의 세계에서 주어진 거에요. 천국의 세계에서는 완성된 단계고 이 세상은 뭐냐? 과정이에요. 과정. 과정에 있는 사람이 완성된 세계의 그 전체를 미리 넘보면 안 됩니다. 100배의 결실이 뭐가 좋아요? 100배의 결실 맺을래요? 아니면 여러분이 해 같이 빛날래요? 어느 쪽 할랍니까?
여기 비유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비유라고 하는 것은 씨, 땅, 밭 전부 다 이 세상에 있는 단어들이고 이미 그 어휘들이에요 이게. 단어를 주께서 사용할 때는 인간들이 기껏 아는 그 밭이면 밭이란 의미 있잖아요. 씨라면 씨라는 의미. 가시덤불 의미. 이걸 인간들은 자기가 익히 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마치 생산 라인이 곧 자동차인줄 아는 것처럼. 생산 라인 타고 달립니까? 자동차타고 달리지. 생산 라인 해서 로봇해서 뭐 할라고요? 인간들 기껏 아는 게 뭐냐? 눈에 보이는 것이 그게 곧 과정이고 결과물로 생각하는 거에요. 이런 세상적인 과정을 통해서 놀라운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은 인간의 머리로서 상상이 안 되는 겁니다. 이것만 상상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도 이해가 안 되는 거에요. 자기들은 이해됐다고 하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영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8장 10절 봅시다.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되어있지요. 그럼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 알아들었습니까? 못 알아들었습니까? 못 알아들었지요.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님 배신할거에요.
자, 이 원인이 어디 있느냐. 근본적으로. 자기 안에서 자기 현실에 살던 자기 현실의 의미가 자기 안에서 뽑혀나가지 못해서 그래요. 소멸되지를 못 한 거에요. 비유를 들어도 인간들끼리 사용하는 비유 있잖아요 그거 드는 거에요. 들어가지고 나는 길가에 떨어지는 씨 안 될래. 나는 100배 결실 맺을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가시덤불 안 될래 이런 식으로 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 모든 네 가지 과정은 전부 다 주님의 일입니다. 심지어 마귀가 와서 먹는 것도 주님의 일이에요. 이 일을 씨가, 씨들이, 오직 씨들만이 다 겪어야 돼요. 다 겪어야 돼요. 말씀이 왔다가 다 먹히는 경험도 이미 구원받은 자가 겪어야 됩니다. 네 가지 과정 다 말씀에 속한 거에요.
그러면 성도는 말씀의 씨 안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이 말씀 중에서 한 가지 나는 1번, 2번, 3번, 바위 위에 떨어진 것, 가시에 떨어진 것, 길가에 떨어진 것 그건 안 하고 4번만 나 잡을래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이것 다 매일같이 이것 네 개 다 우리는 경험해야 됩니다. 이것도 하나의 과정입니다.
목사님 13절에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라고 하는데 그럼 우리는 배반하면 안 되잖아요.!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 배신자야 배반자야 그게 누굽니까? 베드로 아닙니까. 베드로에게 다 경험케 했다니까요 이걸요.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베드로, 야곱, 요한 뭐했습니까? 겟세마네 기도할 때. 잤잖아요. 마귀가 와서 기도 말씀 다 가져갔잖아요. 안 들렸잖아요. 잠자는데 바쁜데 주님께서 무슨 기도하지? 그건 나중에 성령이 와서 알려줬지 그들이 알겠어요? 자고 있었는데요. 그때는 동영상도 없었고 유투브도 없었는데요.
왜 기꺼이 이런 과정을 왜 기꺼이 안 받을려고 합니까? 아직 내 안에서 내가 안 빠져나간 증거 아닙니까? 그게. 이미 우리는 귀신을 못 이겨요. 악마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왔다가 자기 집으로 거주했어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일곱 악귀를 악한 마귀를 악한 귀신을 쫓아냈어요.
여기서 이제 흔히 나오는 귀신 영화 이게 큰 방해돼요. 귀신 영화에 하면 귀신들렸다고 몸 아프다가 목 휙 돌아가고 정상이 되고 난 뒤에는 엄마! 하고 껴안고 이러는데 그게 바로 귀신이 만든 귀신 영화 아닙니까. 결국 귀신 영화에서 원하는 것은 그거에요. 나는 기어이 구원받아야 되겠고 나는 기어이 행복해야 돼. 이거잖아요.
나는 기어이 안 아프고 행복해야 돼. 우리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자이언티가 불렀죠. 나는 기어이 구원받아야 해. 나는 기어이 행복해야 해. 이게 바로 귀신 이야기에요 이게 바로 귀신 이야기. 마귀가 이것 때문에 우리를 꼼짝마라 하고 있었던 거에요. 이게 원인이 뭐냐 하면은요 앞에 뭐가 붙어요? 나는, ‘나는’이 붙잖아요. 이게 빠져야 돼요. ‘나는’ 이게 빠져야 돼요. 이게 뭐가 되야 되느냐 하면은 씨가 되야 돼요. 씨가.
그래서 이걸 빼내는 방법을 여기서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빼내는 방법. 말씀은 자체적으로 과정을 거쳐서 완성으로 갑니다. 말씀이 완성돼요. 이 완성된 걸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성령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성령의 공동체’. 개인 아니지요 공동체입니다. 손이 발더러 소용없다고 하면 안돼요. 한 몸이에요.
서로가 서로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 경쟁하는 것 이런 것 안돼요. 성령의 공동체가 뭐냐 하면은 이게 미래의 도래의 공동체에요. 미래라는 말이 쉬운데 어려운 말로 도래의 공동체에요. 미래가 그냥 살면 있는 게 미래지만 그 미래가 움직이는 것은 도래라고 합니다. 단어 하나 쓰는 것도 진짜 조심스럽게 쓸 수밖에 없어요.
미래가 움직이는 게 도래거든요. 도래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현재를 잡아먹어요. 삼켜버립니다. 현재를 삼킨다. 현재를 삼켜버리면 ‘나는 행복해야 돼’가 뭐가 삼키느냐 하면은 ‘다 이루었다’가 ‘나는 행복해야 돼’ 이걸 삼켜버려요. 마치 고래가 요나를 삼키듯이.
요나는 바다에서 빠질 때 자기는 죽은 줄 알았죠. 요나가 물에 빠지는 것이 바다에 빠지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인데 요나가 배에 빠지고 난 뒤에 예상도 못한 큰 고래가 삼켜야 요나가 생명을 아는데 그렇지 않고 요나가 물에 빠질 때 딱 보고 큰 고래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타이밍 맞춰가지고 뛰어내리면 그것도 고래가 아가리를 벌릴 때 딱 해가지고 계산해가지고 속도, 뛰는 거리, 풍속 계산해가지고 뛰어내리면 자기가 알아서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 구원받은 거에요. 자기가 알아서 구원받은 거에요.
이게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짓이 그 짓이에요. 십자가 딱 가져가서 몸 아플 때, 어려울 때, 가정 우환이 있을 때 딱 들어가게. 일단 죽음이 없어요. 일단 나의 소멸이 없어요. 일단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수작을 벌려가지고 살아있는 것을 괜찮게 살아보느냐. 이거는 미래로 가는 거에요. 내가 미래를 계산을 하는 거에요.
벌써 완성된 미래가 나를 삼키는 방식이 아니란 말이죠. 이 완성된 미래를 가지고 무슨 공동체? 앞에 뭐가 붙었습니까? 성령의 몸. 성령. 성령이 왔다는 것은 미래가 미래 안에 우리가 이미 포함이 되어버린 거에요. 그러면 나는 아무리 나는 설쳐도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정지화면 돼요. STOP. 정지된 화면.
만약에 제가 춤을 춘다면 정지화면이에요? 정지화면 아니에요. 세상 현실적으로 정지화면 아닌데 씨앗 말씀세계에서는 이것도 정지화면이에요. 제가 미국에 이민 간다. 이거 무슨 화면입니까? 정지화면이에요. 미국이나 한국이나 하늘나라에서 보기엔 매 제자리 뛰기에요. 네가 어디서 무얼 하든지 어떻게 하던지 간에 다 성령 안에서, 성령 안에서 확정된 주께서 이미 예상한 일을 그 과정에 네가 참여한 겁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를 빼게 되면 모든 말은 다 이해가 돼요. 내 구원을 빠져버리면 이해가 다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집단 구원이 ‘나’라는 개인 구원을 삼켜서 없애버린 거에요. 삼켜서 없애버린 거에요. 아까 저녁 피자 먹었잖아요. 나 혼자 먹었습니까? 피자 나 혼자 먹었습니까? 내가 만든 피자를 나 혼자 먹었습니까? 아니지요. 여기 목격자들 있지요. 여러분 다 드셨잖아요. 일찍 오신 분들. 네?!
이게 뭐냐 하면은 식탁 공동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떡을 뗄 때 각자 도시락 너희 떡 너희 먹고 너희들 포도주 너희 먹어라 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각자 떡 STOP. STOP. STOP. 주님이 떡을 떼요. 주님의 떡이에요. 베드로 떡 뺏어온 게 아니고 주님이 자기 떡을 나눠주게 되면 주님의 몸체의 분배가 되는 겁니다. ‘분배’.
내 몸 너한테 간다 이게 언약, 이게 약속이에요. 하나님은 우리하고 절대 약속을 안 합니다. 약속할 자격이 없어요 우리는. 약속은 주님하고 약속하지, 우리하고 약속 안 해요. 주님은 우리가 뭘 해도 그리스도 한 몸 안에 지체라는 조건 하에 약속이 유효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내 이름이 아니고 누구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그럼 내 이름은 뭐냐? 죽은 이름이죠.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얼마나 허접하고 허술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이 와도 알아먹지 못하고 마귀가 뺏어가도 그걸 모르는 우리가 되야 되고 그 다음에 바위에 떨어져가지고 말씀을 받아 기쁘지만 시험들 때는 나자빠지고 배반하는 그런 나여야 되고 가시덤불 떨어져가지고 말씀 다 듣다가 갑자기 세상 유혹과 세상 돈 버는 재미에 빠져가지고 그걸 해야 되고 그 다음에 좋은 땅에 있다고 착하고 인내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얼마 안 되서 홀랑 다 날아가버리는 그런 것을 경험을 해야 되는 거에요.
왜? 다 같이 말씀이기 때문에. 내가 골라서 지키는 게 아니고 미래의 완성된 말씀이 나를 덮치니까. 나 이 말씀 할래. 이 말씀 안 지킬래 골라 골라 골라잡을 그럴 입장이 안 됩니다. 그냥 따라 말씀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지금 누가복음 8장 12절 말씀을 지금 보여주고 있다는 것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다루시는 거에요. 하나의 과정이니까요.
여기 10절 한번 봅시다. 8장 10절.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이죠. 비밀은 나타났다고 비밀이 공개되는 게 아니에요. 비밀은 끝까지 비밀답습니다. 끝까지 비밀다워요. 그러면 비밀은 인간 힘으로 캐낼 수 있다? 못 캐낸다? 못 캐내죠.
막달라 마리아가 비밀을 캐냅니까? 못 캐내요. 막달라 마리아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다면 하늘나라 비밀하고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비유의 세계에서 씨로 바꾸니까 이건 뭐냐? 허락 맡은 자가 되어버려요. ‘허락 맡은 자’. 제가 여러분들에게 공부하시는 것을 확인 차 해보겠습니다. 문제를 하나 내볼게요. 문제 이겁니다.
씨 뿌리는 비유의 반대되는 비유를 제시하세요. 한번 맞춰보세요. 씨 뿌리는 비유에 꼭 반대되는 비유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까 이야기했는데요. 제가 적을게요. 씨 말리는 비유. 씨를 없애는 비유죠. 이걸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현실이라는 거에요. 이게 오늘날 현실이라는 거에요. 이게 220개국 국가가 만들어낸 이 지구상의 오늘날 모습이 이 모습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뭐냐 하면은 이미 이 세계에 있다가 성령 받아서 오늘 본문대로 허락을 받아 가지고 무슨 비밀을 알게 되었다? 천국 비밀을 알게 되었잖아요. 그럼 알게 된 우리 자신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우리 자신이 천국의 비밀 요원이 되야 돼요. 그러니까 전에 현실에 있던 내가 지금의 나를 이해 못해야 돼요.
내가 미쳤지 미쳤지. 내가 돈도 안 되는데 예수를 왜 믿지. 전에 있던 우리 모습을 우리가 잊을 수가 없어요. 몸이 잊을 수가 없는데 지금 현재 내가 말하고 생각하는 이것이 도저히 예상을 못한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의 현재는 그게 뭐가 쌓여서 현재가 되느냐 하면은 과거가 계속 쌓여 올라가서 현재가 된 거에요. 과거는 밑에 계속 내려가거든요. 계속 내려간다고요. 참 이건 알아놓으면 참 좋은데요.
2010년도 2015년도 2021년도죠. 2015년에 현재화되었던 것은 그동안 2010년 가운데서 자기가 그 기억에 남는 그런 과거만 2015년도 현재가 되는 거에요. 그러면 2015년도의 현재가 되지 않은 2010년도의 과거는 어디 있느냐? 현재 2021년도 제일 밑바닥에 있다니까요. 잠재되어 있단 말이죠. 잠재되어.
세상에 고등학교 졸업한지 40년 지났는데 늘 고등학교 동창생 생각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없는데 우연히 길에서 뒤에서 차가 받았는데 보니까 동창생이다 뭐 이런 경우 예를 들면 했을 때에 “너 아냐? 너 맞지? 이름도 잊어 버렸어. 너 맞지? 고양이 때려죽인 너 맞지?” 기억나는 아주 참혹한. 담임 선생님한테 대들었던 너 맞잖아, 한다고요.
그러니까 생각 안 해도 잠복되어 있는 2010년도는 2015년도에는 현실이 안됐다가 2021년도에 우연히 만났을 때 되거든요. 그럼 21년도는 뭐냐? 과거에 누적된 그 가운데 지금 내가 생존에 필요한 기억만 여기서 뽑아서 나의 삶의 배경, 환경을 만든 거에요. 다른 것은 필요치 않으니까. 내가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현재를 만든 거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현재를 잊는다? 못 잊는다?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현재, 과거를 조성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은 나란 말이죠. ‘나’. 개인적으로는 자아고 사회에 나가면 주체로서의 나. ‘나’가 이 현재를 구성하거든요. 그런데 이 현재를 누가 와서 삼킨다고 했습니까? 이미 다 이루었다. 이미 구원 끝났어요.
이미 하늘에 앉히신 에베소서 2장7절의 말씀처럼.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아는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자를 영화롭게” 끝내느니라. 끝내버렸어요. 이미 성도에요. 구별된 성도에요. 이건 자기가 노력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오면 성령이 안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
이 성령이 와서 삼켜버리면 이런 모든 것이 소급해서 무슨 일이 되느냐 하면은 나의 일이 아니고 이게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주의 일이 되면서 비로소 우리는 마귀 짓 했고 가시덤불 떨어진 씨앗 질 했고 씨는 씨인데 바위에 떨어져서 배신했고 가시덤불 떨어져 농부가 원하는 열매 못 맺었고 그것이 불현듯 계속해서 기억나게 하는 거에요.
그러면 나의 기억이 아니고 누구의 기억입니까? 주께서 의도적으로 나를 건드려서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우며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로마서 5장의 그 말씀, 그것도 말씀이잖아요. 그 말씀을 이렇게 너한테 완성시켰다는 것을 티내게 만드는 그 작업에 계속해서 우리가 가게 하는 거에요. 그러면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가 아니고 누가 주인공이에요. 내 안에 살아계신 분, 주님이 살아 계신 거에요.
데살로니가 2장에 이런 말씀은 몇 주 정도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만은 아무리 생각하고 두고두고 생각해도 이 말씀이 우리한테 정말 참 여러 가지 말씀도 중요하지만 이 말씀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이 드는 게 바로 2장 13절 말씀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 그 뒤에.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일한다”
네가 일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공장해도 일해도 네가 아니고 말씀이 공장경험 하라고 나보고 그 길을 주신 거에요. 왜? 오늘밤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는 걸 몰라.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몰라요. 그러나 죽을 때 죽더라도 충분히 다 우려먹고 죽는 거에요. 주께서. 이미 구원했으니까 본전 뽑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골곰탕 우려내듯이 우려내는 어떤 가수 이름 있죠. 홍자. 곰탕 국물 우려내듯이 말씀만 우려내는 거에요.
바로 그 장면이 네가 바위에 떨어진 씨야. 씨의 과정이야. 그게 바로 가시덤불의 근거야. 그럼 우리는 이미 합격된 상태잖아요. 합격된 상태에서 뭐 아주 감사거리가 한 두 가지가 아니죠. 왜? 맨날 하는 게 어설프니까. 남는 것은 감사만 하는 거죠. 머리를 긁어서 머리 다 빠지게 생겼어. 아이고 고마워라. 아이고 감사해라 이러고 있다는 거에요.
아까 동영상 두 번째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성도의 그 자세는 당당하자. 당당합시다. 마귀 세계에 대해서 벌벌 떨 일이 없어요. 당당해야 돼요. 오늘 제목은 뭐냐 하면은 오늘 제목을 이렇게 한번 정해 봤습니다. ‘아름다운 과정’. 주의 일에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고 과정으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들어가게 된 것이 허락 맡은 거에요. 하나님께 허락 맡은 거에요.
다시 한번 누가복음 8장으로 돌아와서 다시 한번 제자들 한번 봅시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9절에 보면 “무슨 뜻입니까” 물은 거에요. 제자들이 이 뜻을 무슨 뜻이냐고 물었던 취지가 여러분들은 이해해야 돼요. 왜냐하면 4절에서 8절 있잖아요.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를까요? 이건 주일학교 애들도 알아요 이거는. 주일학교 애들 일반 초등학교 애들도 알아요.
어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이게 어렵습니까? 농부가 씨 뿌리지 농부가 고기 잡습니까? 씨 뿌리잖아. 그런데 밭에 뿌렸는데 공중에 새가 와서 물어 갔거든. 그럼 새가 물어가지 드론이 물어갑니까? 너무나 이건 현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거에요. 현실 그대로를. 현실 그대로를 보여주는데 이게 현실이 아닌 것을 제자들이 감 잡은 거에요.
“아니야 이건 그냥 현실이야기 농부가 농사짓는 이야기 아니야.” 그러면 100배의 결실은 뭡니까? 내가 펀드 하니까 100배 수익이 오르는 그것 말하는 거에요? 기도하니까 응답보다 100배 많은 그런 겁니까? 가게 하나 차려놨는데 프랜차이즈 100개 생기는 그럴 때 기도 응답받은 거에요? 99개는 응답 아니고 100개 되야 응답입니까? 아니잖아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거는 주께서 필히 이 세상에서 네가 이런 세상에서 네가 탈출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필수 코스에요. 하나의 과정 속에 들어가는데 그 과정 역할을 누가 하느냐? 바로 성도이기 때문에 이 말씀이 들을 귀가 있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거에요. 아 말씀이 왔을 때 마귀가 뺏어가는구나. 이게 성도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에요.
성도가 아닌 사람은 “당신 마귀가 와서 복음 말씀 뺏어간 거 압니까?” “뭘 뺏어가? 나는 잠 잤는데.” 자기는 잠잤대요. 마귀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잠잤고 별로 관심이 당기지도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참 거북스럽습니다. 뭐 이정도로 이야기해요.
세상에서 말하는 그 비유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은 채 그냥 두고서 그걸 쉽게 의미를 설명을 덧붙이기 위해서 하는 거라면 주님의 비유는 뭐냐 하면은 허락 맡아야 알고 비밀이고 일체 악귀가 지배하는 악마가 있는 이 세상과 주님의 나라는 완전히 등을 돌린 상태. 건너올래야 건너올 수 없다는 것, 그걸 분명히 하는 그게 바로 비유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그 말씀 자체가 이미 천국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거에요. 비유의 모습으로서. 남은 것은 뭐냐? 비유에는 절차가 있지요. 열매가 다시 씨 될 수는 없어요. 주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마지막 십자가에서 이룰 때까지 그대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이런 과정들 밀어 붙이는 거에요. 여기 15절에 봅시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 가진 사람 누구 있습니까? 12제자 가운데 착하고 좋은 마음 있었습니까? 12제자 가운데 없었지요. 착하고 좋은 마음 있으면 도망칩니까? 아니잖아요. 12제자는요 자기만 생각해요. 자아가 있고 자기 주체가 있는 겁니다. 차라리 막달라 마리아가 더 나아요. 그렇지요? 전부 다 겁나서 붙잡혀가가지고 겁나있는데 막달라 마리아하고 야고보 어머니 마리아하고 마리아 3인조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하고 마스크도 안하고 무덤에 들어갔어요. 벌금 낼 각오하고 무덤에 갔다니까. 코로나 있는데. 비비 꼬는 거 아니에요.
참 다음 주부터는 여기서 안하고 대치동에서 합니다. 대치동에서 해요. 과거, 현실 안 잊어버렸지요? 이제는 비유로 갑시다. 이미 구원받은 자로 대치동에 한번 가봅시다. 대치동도 무너지면 못 가지만 지금 계획은 그렇습니다. 15절 말씀 봅시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 있다는 이 말은 만약에 이렇게 열매를 맺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 능력입니까? 땅 자체가 좋아서 그렇습니까? 밭 자체가 땅 자체가 좋아서 그런 거에요. 주여 저를 왜 좋은 땅으로 사용했습니까? 오히려 반문해야 되지요. 왜 차이가 없는데 다 같이 어둠이고 다 같이 죄인인데 왜 차이를 두십니까. 너 잘나서 차이 두는 게 아니고 과정에 오다 보니까 그 과정 속에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님 자신이 통과해야 될 위치거든요.
주님은 마귀도 통과하고 바위도 통과하고 가시덤불로 통과하고 다 통과 통과 통과 해가지고 주님 자신이 좋은 밭이 되었잖아요. 그럼 그 통과를 제자들도 같이 통과하는 거에요 이제. 어차피 열매가 되었으니까. 포도나무 열매가 되었으니까요. 그 다음에 16절 봅시다. 16절.
자, 16절 들어가기 전에 좀 걱정이 되가지고 뭐 들었는데 뭘 들었는지 모르겠다 되거든요. 뭘 들었는지 모르겠다. 이거 들어온 거에요. 이거. 과정 속으로. 이거. 제목은 ‘아름다운 과정’이에요. ‘아름다운 나’가 아니고 그냥 내가 과정 속에 흡수, 통합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럼 주인은 누굽니까? 주님이 주인이죠. 주님이 과정을 이끄는 거죠.
이게 바로 사도들이 성령 받은 사도들이 이 과정 속에 들어간 거에요. 고생도 하고 굶기도 하고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도 하고 그렇게 하지요. 해도 결국은 뭐냐 하면은 주께서 지옥 천국이 같이 있으니까 그 가운데서 지옥 같은 너를 천국으로 끄집어냈다가 매일같이 이걸 반복시켜 주니까 자기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 복음, 내 살과 내 몸, 주님의 몸이 움직인다는 것 우리는 정지화면이고 stop된 거고 진짜 움직이는 것은 우리를 데리고 주님이 우리를 큰 함선을 만들 듯이 우리를 데리고 다닌 거에요.
심지어 지중해 폭풍을 지나서 로마까지 주님이 데려간 거에요.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네 옆에 내가 있잖아. 이걸 그 폭풍 치는 그 속에서 이 이야기를 하니 참 사도는 죽을 지경. 그럼 폭풍을 멈추던지 안 멈춰요. 사도 바울이 소망이 뭐냐? 이제 따로 놀지 말고 주와 같이 있고 싶습니다. 이게 소망이었어요 사도는.
그냥 이 땅에 사는 것은 이거는 그냥 합격되고 난 뒤에 수능 다 합격되고 난 뒤에 시험 치는 거죠. 안 쳐도 합격이에요. 합격인데 그 시험 과정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너 있는 자리에서 있는 나이대에 있는 시대에 따라 있는 국가 따라 각자 각자 주님께서 거기서 주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제사장으로 왕 같은 제사장 되게 하신 겁니다. 잊지 마세요 하나의 과정속입니다. 본인이 열매를 챙길려고 하지 마세요. 열매는 나를 통해서 나타나지. 온유와 화평과 자비는 나를 통해서 나타나요. 내 과정을 통해서.
16절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이제는 이런 것 조차 뭐냐 다 비유처럼 느껴져요. 그렇죠? 이걸 누가 몰라. 평상 아래 두겠습니까 등경 위에 두지요. 환하게 비취라고 두잖아요. 그런 이야기 나도 하겠다 이러거든요. 그러나 주님이 나도 하는데 전에는 내가 하게 되면 나 따로 등불 따로 있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나로 등불 되게 만드는 거에요.
주님이 우리를 숨기지 않고 올리면 우리는 또 안 갈라고 애를 쓰거든요. 주께서 기어이 높이 들게 만듭니다. “이번에 수석합격하란 말이야.” “안돼요 안돼. 나는 판사 되기 싫어요.” “해!” 그럼 해야지 뭐. “시험에 또 합격. 또 합격해.” “나는 시험에 합격하는 거 싫어.” “해!!” 하나의 과정이니까. 약간 기분 좀 좋아지지요? “암에 걸려!” 이런 것 보다 훨씬 낫잖아요. 이왕 과정인데.
“그 빛을 보게 함이라” 그 빛은 주님이죠. 17절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야 이걸 빠트리면 안돼요. 오늘 강의에서. 우리는 비밀요원이에요. 다 드러났는데 비밀요원이에요. 심지어 어느 정도냐? 나도 나를 이해 못할 정도로.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내가 왜 이렇게 살지. 우리는 현실을 알아요. 현실에 사는데 어떻게 살고 지금도 알 뿐더러 우리는 과거 내의 현실에서 내가 주인공처럼 살기 때문에 현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바뀌어도 예상 못하게 바뀐 거에요. 전에는 내가 마귀 들렸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씨를 외면한 그것이 바로 그게 마귀 짓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지요. 아 내가 십자가 대신 사랑의 하나님 믿었구나. 이게 마귀 짓이란 사실을 이제 아는 거에요. 사랑의 하나님은 지금 나 좋아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복음은 이건 내 살이다 내 피다 하잖아요. 그럼 예수님의 살과 피는 곧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이 살과 이 피가 담겨있는 나라는 주인공은 죽었다. 너도 나처럼 죽어야 부활되는 거야. 그걸 공유하자. 그 체험을. 이게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잖아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 이 말이죠. 그럼 우리는 또 안돼 애가 지금 7살인데 안돼. 뭐 이러고 있단 말이죠.
누가 하라고 그랬나. 가만 있어봐 내가 해줄게. 내가 너 애고 뭐고 네 일은 없고 내가 너의 자식은 어떻게 되고 내가 분배하고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주어진 대로 그냥 범사에 감사하면 돼. 그냥. 어떤 채로?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남들이 나를 못 알아준다고 섭섭해 하지 말고 나도 나를 못 알아주잖아요. 나도. 내가 나를 배신하고요 내가 맨날 정신 차려 인간아 막 이런다고요. 복음이 뭔데 네가 그걸 왜 믿어?! 내가 나를 막 나무랜다고요. 18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참 이 말씀이요 이게 존재자로 이해하면 이거는 성립 안 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없는데 빼앗길 것도 없잖아요. 빼앗길 것도 없는데 뭘 빼앗겨요. 아예 없는데. 하나의 존재자로 생각한다면 말이 안돼요. 있는 자가 빼앗긴다는 것은 이해되는데 아예 없는데 빼앗길 것도 없는데 빼앗아간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이 비슷한 말씀 나오지요. 마태복음 25장에. 10달란트 5달란트 한 달란트 이야기.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없는데 있는 것도 빼앗긴데. 있다 없다는 도대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위상에서 그걸 사용하시는지를 알고 있어야 돼요. 그것은 바로 생명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주시고 누구나 아무도 생명이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 주시면 천국의 비밀을 주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있음이 생겨요. 생명 있음이 생겨요. 이것을 가져가시는 거에요. 이것을. 그러면 생명이 없는 자는 생명이 오게 되면 여기 생명이 없다가 드러나요. 생명이 없다가 되면 없음 자체를 주께서는 저주해버립니다. 왜 없느냐고.
그러니까 불신자는 뭐냐? 주지도 않고 닦달낸다는 거에요. 그게 주의 방식입니다. 주지도 않고 왜 없느냐고 나무래는 것. 아 이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래서 불신자는 바른 이야기만 해요. 그런데 신자는 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들이 알아먹지 못하는 그들 보기에 거짓말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자는 그 생명 때문에 구원받고 생명이 없는 자는 없다는 이유로 지옥 간다. 말을 이렇게 바꾸시면 됩니다. 믿거나 말거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이 땅에 오시고 다녀간 그것을 모든 의미와 모든 가치의 출발점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이제 다시는 우리 자신의 생존을 구원을 출발점으로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