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강의

미로

아빠와 함께 2021. 10. 19. 18:00

강남-누가복음 7장 32절 (미로) 211005a-이근호 목사



오늘은 누가복음 7장 26절 보겠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성경을 보면서 특이한 인간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 너도 지킨다 나도 지킨다 지켜봐야 거기에서 거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이한 인간을 딱 거기에다가 꽂아버립니다. 그 특이한 인간이 등장은 일반인들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지킨다는 것과 너무나 차이가 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특이한 인간에 실려 있는 그 운명에 실려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재현은 그 특이한 인간 말고 다른 사람이 나름대로의 말씀 지킨다는 것하고 큰 대조가 일어나죠.


그렇게 되게 되면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도 바쁜 일상 가운데 주의 뜻대로 영광을 위해 살아갔습니다 하는 그 모든 궁시렁 궁시렁하는 소리가 이건 자신의 그냥 한계를 보여주는 것밖에 안돼요. 나름대로의 할 도리 다 했습니다. 그걸 하나님께서는 안 받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특이한 인간을 통해서 말씀은 이렇게 지키는 게 말씀이다라고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반 교회에서는 그 비교 대상이 성경을 안 보니까 성경을 안 보고 먼저 교회 다닌 사람들 교회 직분자들 목사들 어떻게 지키는가 그걸 보면서 저 정도 같으면 따라잡겠다 그런 생각 들지요.


자기 목표 대상이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삼지 않고 오랫동안 신앙 좋다 뭐 남들이 신앙 괜찮다 그런 사람들을 모델로 삼아서 그 사람과 나의 거리는 어느 정도고 어떻게 노력하면 비슷하게 따라 잡겠다 이렇게 생각해놓고 나도 말씀은 한 말씀 지켰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하는데 성경을 보세요. 성경을 보면 거기 선지자 나오잖아요. 세례 요한 나오잖아요.


이 세례 요한의 특징이 벌써 26절 27절 보면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러니까 사도 바울도 그렇고 모든 것은 성경의 특이한 인물들은 기존의 모든 인간 본인을 특이하게 보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소시키는 겁니다. 너는 백날 해봐야 특이한 인간 못돼. 그냥 그렇고 그런 인간류에 속해.


따라서 그들끼리 너희들끼리 잘했다 못했다 경쟁 자체가 이거는 하나님께서 수용될 수가 없습니다. 바쁜데 열심히 지켰으니까 그거라도 열심히 했다고 봐주세요 이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본다는 것은 나를 잊어버리는 거에요. 나에 대해서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겁니다. 소거한다. 음소거 있잖아요. 음소거. 소멸시키는 것.


성경은 우리 자신을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소멸시켜요. 소거시키는 거에요. 음소거는 음이 들리지 않잖아요. 내가 느껴지지 않는 것. 내가 느껴지지 않게 만들어요. 그러면 내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내가 누구하고 경쟁하거나 따라잡아야지 하는 것도 다 소용없는 일인 것을 미리 알게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 것을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단 하나지요. 성경의 인물을 따라잡기는 따라잡아야 되고 그리고 자기 생업이 있기 때문에 시간을 거기에다가 다 쏟지는 못하고 그래서 스스로 본인 보기에 자기 점수를 미리 예상해가지고 미안스러워가지고 늘 부끄러워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소거가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너무 의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 세례 요한이 등장하는 이 모습은 바로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낸다” 뒤에서 이렇게 떠미는 사람의 정형적인 인물, 세례 요한입니다. 선지자죠. 내가 세상에 보낸다. 네가 네 인생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내가 보냈으니까. 보낸 자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타난 자가 선지자에요.


그래서 선지자에서는 ‘너 똑바로 해 너 잘해’ 가 아니라 선지자는 이렇게 해요. ‘누가 너를 보냈더냐?’ 이렇게 해요. ‘누가 너를 보냈더냐.’ 그게 중요해요. 나 아무도 안 보냈는데 나 알아서 왔는데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여전히 자기한테 집중하겠지요. 消去(소거). 한자로 이거에요. 자기 자신을 없애버리는 것.


그래서 세례 요한을 볼 때 세례 요한은 어땠다고 보지 말고 세례 요한의 보냄을 받을 때 그 구조를 알게 되겠지요. 그 구조만 알면 되겠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여기 인간.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인간 세계에 보냈어요.


그러면 세례 요한 중간에 세례 요한이 주어지는데 세례 요한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서 인간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입니다. 세례 요한은. 인간이 보낸 게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이 보냈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 어울리지 않지요. 그럼 세례 요한은 어디에 어울리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은 예수님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동그라미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쪽이 하나님 세계고 이쪽이 인간 세계라면 겹치는 부분, 이게 세례 요한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이 겹치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아야 가능하지 인간 쪽에서 너 하라고 추천하게 되면 이건 탈락입니다. 다윗은 인간이 선택한 게 아니에요. 꼬맹이가 어른들 전쟁하는데 끼어드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버리니까 그 꼬맹이가 그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의 전쟁 막중한 결과를 낳는 그 전쟁에 그냥 뛰어든 거지요. 잔 다르크 비슷하게 해가지고 그냥 뛰어든 겁니다. 만약에 다윗이 그 골리앗 전쟁에서 골리앗 거인한테 발에 밟혀가지고 허망하게 죽었다고 칩시다. 그러면 인간 세계에서 통하는 원리는 계속해서 유지가 돼요. 애들은 어른들 하는데 끼는 게 아니야. 애들은 어른들 일에 끼어드는 게 아니야! 그게 계속 유지가 되겠지요.


그러면 이 인간 세계의 한계가 안 드러날 겁니다. 인간 세계는 전부,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가 곧 전부야 전체야 라고 단정 짓게 되겠지요. 그런데 소년 다윗이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렇게 전체라고 문을 닫아두었는데 문을 닫는 것이 경솔하다가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 이 자체가 이게 가짜고 경솔한 거에요. 하나님 섬긴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이렇게 섬기자고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어울리지 않지만 인간들의 모든 사고를 엎어버릴 낯선 새로운 인물,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침투될 때 이것이 바로 하나님 세계와 우리 인간 세계의 조인하는 결합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는 거에요.


그 방식을 진행, 작업되면서 누가 부정됩니까? 우리 인간 세계 이 전체가 전부다라고 하는 생각 자체가 이것이 잘못이라고 들통 나겠지요. 바로 이 세례 요한의 기능이 그거에요. 인간 세계에 어울리지 않고 주님의 세계에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특이한 사람이죠.


그러면 그 당시에 인간 세계에서 시도했던 것이 뭐냐 하면은 우리 쪽에서 괜찮은 거룩과 괜찮은 하나님께 영광될 만한 어떤 종교적인 성스러움을 이걸 생산해서 이것 가지고 하나님 나라로 밀어붙이자라는 시도를 그 유대사회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선지자를 보냈다는 말은 ‘그거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런 거 안 받아’ 라고 그걸 하나님께서 그걸 강조하시면서 세례 요한을 통해서 인간 세계에 여기에 당도한 거에요. 보냈다 했으니까 당도한 거에요. 도착한 겁니다 인간 세계에. 세례 요한을 보내가지고.


그래서 그림 한번 보세요. 동그라미 두 개 겹치지요. 한쪽은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 세계가 겹치지요. 자, 이렇게 겹쳤을 때에 이렇게 겹친 부분이 있다는 말은 이미 하나님께서 인간 세계에 관여했다는 겁니다. 관여했다는 것. 그래서 선지자의 출현, 그 자체를 우리는 놀라야 되고 감사해야 되고 고마워할 줄 알아야 돼요. 선지자가 등장하지 않으면 나 잘났다 식으로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 한계를 드러내요. 나한테 문제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한대로 하게 되면 이건 나중에 낭패다. 그걸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선지자를 보냈으니까 낯선 우리 인간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고 인간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분을 보내준 것에 대해서 고마워해야죠.


그 선지자가 아니면 주께서 보내신 분이 아니면 나는 나 잘난 맛에 살아갈 뻔했구나. 아휴 큰일 날 뻔했구나. 그래서 선지자가 등장한다는 것은 하늘나라의 제일 인간에게 싫어하는 게 뭐냐? 악마가 악마를 저주하고 인간 세계를 파멸시키는 이유가 뭐냐? 이겁니다. ‘패망’.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다. 잠언 16장 18절에 나오는 말씀이죠. 16장 18절. “교만이 패망의 선봉이다”


여기서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특이성이 없고 인간들끼리 생각하는 그러한 그게 바로 교만입니다. 인간들이 하는 선과 악의 기준 이게 교만이에요. 왜? 특이성이 없으니까. 선과 악 자체를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의 진리는 뭐냐? 선과 악을 그 갈라짐에서 그 바닥에서 올라옵니다. 선과 악, 그 바닥에서 올라오죠.


그러면 세례 요한은 누가 공격하느냐? 선하다고 하는 쪽에서도 공격하고 악하다고 하는 쪽에서도 세례 요한을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누가복음 7장 31절 32절. 제가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한다”


어울리지 않지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겁니다. 선지자가 왔는데 그들은 그들의 이데올로기, 이념과 사상 체제에 있어가지고 어울리지 않는 거에요. 그러면 선지자는 어떻게 하느냐? 이들 모두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되지요. 그래야 그들의 한계가 드러나니까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거에요. 가만있으면 미움을 안 받겠지요. 미움 받는 짓거리를 유발시켜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선지자는 고생 많이 해야 되는 거에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하면 선지자 노릇 못합니다. 이렇게 분란을 일으켜버려요. 물론 선지자가 알아서 하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게 만들지요.


그게 선지자 본인의 의지로 되는 게 아니고 위에서 누가 밀어붙여야 되니까 그걸 하늘로부터 온 권세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 지상에서 지금껏 알던 이야기 말고 다른 이야기를 해버리는 거에요. 인간에서 나올 아이디어가 아니고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은 다른 이야기가 나왔을 때 새로운 거니까 받아들이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하겠지요. 이런 게 좀 어려워요.


뭐냐 하면 인간들로 하여금 아마 선지자는 이러한 자일 것이다 라고 그들로 예측하게 만들어요. 관찰하고 추측하게 만든다고요. 추측하게 만들어 놓고 추측한 그걸 아니라고 해버리는 겁니다. 이 말은 선지자의 그 고난과 핍박 속에는 인간들이 그냥 몰랐다가 아니라 기어이 인간은 이것은 안다 라는 것을 다 끄집어내게 만드는 그러한 작업으로서 선지자가 등장하는 거에요.


초반부터 좀 어렵지요? 어려워도 참아내야 됩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양자역학에서 독약이 들어있는 거기에 고양이를 함께 집어넣어요. 실험하는데. 사고 실험이죠.그 고양이가 죽었을까 살았을까 확률은 반반이었을 때에 양자세계.


아주 작은 이 세상의 미세 중에서도 원자보다 더 작은 그런 양자세계에서는 아무도 모르는데 아마 살았을 거라고 열면 죽어있고 죽었을 거라고 열면 살아있는 거에요. 이게 현대물리학이에요. 이건 미신이 아니고 과학이에요.


결국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입자가 누굴 갖고 노느냐 하면은 덩치 큰 인간이 관찰과 추측이 오기를 고대하다가 그들이 결정한 마음으로 그래 죽었어 죽은 거야 딱 관찰한 순간 그 관찰 자체를 뒤엎어버리는 겁니다.


어떤 경우도 인간의 관찰과 추측이 주도권을 못 쥐게 만들어요. 이게 미세세계, 양자세계에요. 양자역학세계. 가장 작은 최소입자세계입니다. 과학자들이 그걸 발견하고 깜짝 놀랐어요. 이게 슈뢰딩거 학자가 주장해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 하는 거에요. 자기 집에 고양이 키우는 게 아니고요.


그냥 우리가 살면서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고 허무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고 참 허무한 거야. 왜? 전도서 보니까 인간은 헛되고 헛되다 하니까 인간은 허무한 거 맞아. 그래서 구약 전도서를 보고 헛되고 헛되니 인생은 헛되다. 인생은 허무하다. 헛되다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이걸 가지고 이걸 교만이라고 하고 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되게 하는 거에요.


헛된 게 정답이 아니라는 거에요. 네가 성경을 보고 전도서를 보고 헛되다고 하는 것은 네가 평소에 인간 세계에서 갖고 있던 한계를 드러낼 뿐이에요. 그래서 노래도 그런 게 있어요. 돈도 부질없어 사랑도 부질없어 인생도 부질없어 교회도 신앙도 부질없어 훨훨훨. 훨훨훨 뭔지 알아요? 김용임이 불렀던 훨훨훨.


노래 가사에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네 훨훨훨 훨훨 벗어 버려라 훨훨 사랑도 미움도 버려라 벗어라 훨훨훨. 김용임이 히트 쳤어요. 뭔가 세상을 초월한 무상의 세계, 불교의 도 세계가 그렇잖아요. 그걸 성경에서 뭐라고 한다고요? 그게 바로 ‘교만’. 이게 교만이에요. 패망의 선봉이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겸손하게 사는 게 교만이고 순교하는 게 교만이에요. 인간은 그 정도는 알거든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인간에서 끄집어내는 그 모두를 교만하게 만들어요. 왜? 주께서 보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인간을. 주께서 보내지 않는 인간들이 끄집어낸 아이디어는 어떤 경우도 이렇게 겹치는 부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자에요.


보낸 자 세례 요한은 출생의 비밀이 있습니다. 출생의 비밀이 누가복음 초장부터 나오는데 레위지파에 속한 그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있어요. 사가랴인데. 제사장 계열의 사가랴가 아버지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자식이 있어야 아버지죠. 자식도 없는데 아버지가 되겠어요? 그냥 사가랴 선지자에요. 자식이 없습니다.


그 아내의 이름은 예뻐요. 엘리사벳. 뭐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엘리사벳. 둘이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에요. 자식이 없으니까. 대가 끝난 겁니다. 끝났는데 그들이 생각하기를 만약에 자식을 주게 되면 우리끼리 낳은 자식이니까 이름을 누가 짓겠다? 내가 짓겠다고 이렇게 분명히 이야기할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식을 줍니다. 애 못 낳는 것을 분명히 하고 천사가 와서 자식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자식을 주는데 이름 붙일 권한을 부모로부터 뺏어가 버려요. 말도 못하게 만들어요. 아버지가 벙어리가 되는 거에요. 벙어리가 되어서 말을 못 한다 1장 20절에 나오지요. 그래서 친척들이 아버지가 사가랴니까 사가랴 2세 해라. 사가랴니까 하니까 “으으응~~” 말을 못하니까 쓰라고 하니까 그때 썼지요. ‘요한’.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아들 세례 요한 때문에 아버지도 그 친척에 어울리지 않는 그 친척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변했어요. 아버지가 아들을 양육,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고 없었던 아들이 아버지를 아들의 세계 속에 빨아들이게 하는 겁니다. 그 이름 쓰게 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에. 이름을 지어준 것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소유권이 엄마 아버지 소유권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천사가 등장하지요. 천사가 등장하는데 그 천사가 요한이 해야 될 일을 1장 17절에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있는데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바로 말라기에 4장에 나오는 말라기 선지자가 구약 마지막에 예언을 했어요. 자기가 마지막 선지자지만 이 마지막 선지자에서 나오는 그 선지자.


그게 누구인지 모르고 말라기는 누구인지 모르고 다만 해야 될 일만 나오는데 그게 말라기 4장 5절에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크고 두려운 날이 무슨 날이냐 하면 4장 1장에 보면 모든 것을 불살라버리는 거에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하나님은 파괴의 하나님. 창조는 파괴 없이는 창조가 안 된다. 파괴의 하나님이에요. 파괴 없이는 창조가 없어요. 그런데 인간 세계는 뭡니까? 그냥 그대로 밀어붙이려고 하는 거에요. 파괴를 무서워해요. 죽음을 무서워해요. 멸망은 이건 일이 잘못됐기 때문에 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필수 절차인데 그걸 모르고 “안돼요 안돼요”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래서 파괴될 이유를 뭐라고 했습니까? 아까 제가 뭐라고 썼어요? 인간 세계 파괴될 이유를 교만이죠. 교만이 파멸의 이유니까요. 패망의 선봉이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겸손의 극치를 보여주려고 하는 거에요. 겸손의 극치가 인간 내부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모르는 채 나오기 때문에 새로운 낯선 침투에서 보면 이게 뭐가 되느냐? 겸손의 극치가 뭐가 돼요? 교만이라니까요. ‘교만’. 교만이 돼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청춘남녀가 교제를 하다가 맨날 음식은 떡볶이 사주고 떡볶이 얻어먹고 이런 식으로 하다가 어느 날 진짜 결혼할 때 되가지고 남자가 자기 정체를 밝힙니다. “자기야 내가 실은 재벌이거든” 이게 무슨 뜻이에요? “그동안 가난한척 했어. 미안해.” 여러분 이게 교만이에요? 겸손이에요?


그러면 여자가 화내면서 “너 날 시험한 거야?” “미안해. 하도 요새 괜찮은 여자가 없어가지고. 좀 시험했어. 사실은 내가 재벌이거든” 사실은 내가 재벌이라는 말은 주의해서 들으면 내가 사기꾼이거든 그렇게 트릭을 쓸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이게 은혜로운 말인지.


우리 성도가 세상 사람들과 사귈 때 이런 말을 해야 되거든요. 남편이 복음을 알고 여자가 복음을 모를 때 남편이 진지하게 어느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보 당신한테 그동안 말을 안 한 비밀이 있어.” 여자가 “뭐야?! 이거 뭐야? 안 그래도 요새 수상하다 싶더라. 뭔데?!” “사실은 내가 천국 백성이야. 그동안 숨겨서 미안해.”


이게 겸손이에요. 어울리지 않음을 그대로 노출하는 것. 물론 이걸 그냥 써먹으면 미친놈 되겠지만. 그게 얼마나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자유합니까. 세례 요한의 이러한 등장,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어려운 데 해보겠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선지자를 투입했지요. 겹치는 부분 투입하지요.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고 누구한테 어울린다? 하늘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을 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역할을 맡지요. 천사가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면은 말라기 4장에 예언된 대로 그대로 세례 요한을 보내서 자식의 마음을 아비가 돌리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일을 개시하는 거에요. 인간 쪽에서 못하니까.


왜? 인간 체계 자체가 교만하니까. 교만의 결과는 뭡니까? 패망이거든요. 멸망이에요. 파괴되야 돼요. 인간은 자기 것이 파괴된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습니다. 살 이유도 없고 살 희망 자체가 날라가 버리니까 이걸 극구 반대하겠지요. 아까 봤지요. 아이가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울지 않는다.


애곡하는 이유를 모르고 피리 불 타이밍이 아닌데 그들은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거에요. 너무나 이질적인 세계에서 왔기 때문에. 그게 납득이 안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인간 세계는 스스로 갇혀가지고 바깥에 하늘나라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전혀 안다? 모른다?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나름대로의 선과 악을 조장하는 거에요.


아마 겸손은 선이고 성경에 보니까 겸손하라고 하니까 겸손은 선일 것이고 교만은 악일 것이다. 자기들이 스스로 결정한 거에요.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성경 열심히 지켜서 구원 받겠다 하는 자체가 이게 교만이라고요. 이게. 자기 성경 열심히 지켜버리면 관심사가 누구한테 집중돼요? 본인한테 집중돼요.


본인한테 집중되어 버리면 본인은 폐쇄적 자아관이에요. 갇혀버려요. 스스로. 여기 잘 안 쓰는  소거란 말 했잖아요. 성경은 뭘 소거한다? 없애버린다? 나를 생각나지 않게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어느 정도까지 훌륭하냐라는 자체를 생각 못하게 만들어요. 성경이 그래야 돼요. 내 쪽에서 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안 받기 때문에 선지자가 왔기 때문에.


자, 그러면 그 다음에 중요한 질문입니다. 중간에 끼어있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인간 사이에 끼어있는 것이 세례 요한인데 세례 요한이 보통 인간과 차이점이 뭐냐? 차이점 뭐냐? 코가 두 개고 아이큐가 높고 이런 겁니까? 차이점이 뭘까? 없지요. 편식한다든지 그런 게 있습니까? 피가 다른 사람은 붉은 피인데 하얀 피 나오고 그런거? 우유가 막 튀어나오고 그런 거 있습니까? 없지요? 없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없다는 게 차이점이에요. 없다는 게.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는데 셜록 홈즈 탐정이 조수보고 가보라고 하니까 무슨 일 있나? 아무 일 없어요. 개가 안 짖어요. 개가 안 짖는 게 이상하다. 개가 안 짖는 게. 그럼 분명히 범인은 뭐냐? 내부인이지요. 같은 아는 사람이 침투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죽었으면 살인자가 내부에요. 왜? 개가 방비를 안했으니까. 아는 사람이니까.


뭐 반가워요 보고 싶어요 문자보낼 때는 이거는 별로 문제없어요. 문제 보내다가 어느 날부터 보고 싶다 자기야 하는 문자가 없어요.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문자한 게 문제가 아니고 없는 게 문제가 되죠. 왜? 같이 동거생활하기 때문에. 동거생활하니까 할 필요가 없잖아요. 


이런 게 우리가 따라잡을 수 있으면 따라하겠는데. 세례 요한이 훌륭하다 하면 따라잡겠는데 그게 아니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세례 요한을 인간이 따라할 수 없는 인간으로 만들어버렸어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인간들은 말씀을 지킬려고 하는 거에요. 지킬려고 하는데 세례 요한한테는 말씀을 지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지킬 필요도 없어 너희는 이미 깨졌어 너는 이미 파멸의 대상이야. 이게 특이한 거에요. 이게. 이게 특이한 거에요.


더 알기 쉽게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한테 말씀 지켰다고 숙제 내밀까요? 아니면 세례 요한이 빠지라고 하는데 빠질까요? 어느 쪽이 세례 요한이 원했던 겁니까? 여기 29절에 “모든 백성과 세리들이” 성경에서 모두라고 하는 것은 다수에요.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세례를 받지요?!


세례가 중요한 것은 소급, 나 자신을 말소하고 말살하고 없애는데 제거하는데 세례 주는 자가 핵심이 되어버리는 거에요. 세례 받는 자가 의미가 없고 세례 주는 자만 있으면 되고 거기에 합류하는 식이에요. 세례라는 게. 성령의 세례가 뭡니까? 육으로 살던 인간이 육에 대해서 미련 뚝 끊고 이제부터 성령의 지시를 따르는 게 성령 세례거든요.


성령이 갖고 있던 그 혜택 있잖아요. 그 성과에 내 성과를 포기하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했던 모든 성과를 성령이 했던 성과에 섞이지 않고 갖다버리는 거에요. 세례는 뭐냐 하면은 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로마서 6장에 세례 이야기할 때 뭐라고 합니까? 나를 죽이는 게 세례라고 합니다. 나를 죽이는 것.


받아주는 쪽이 모든 것을 갖추었기 때문에 네 보따리 싸고 캐리어 끌고 오지 말아라 이 말입니다. 여기 다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요. 뭐 속옷 3개하고 양말 다 버리고 와. 양말이고 뭐고. 머리 빠졌다고 가발도 써. 아! 가발도 쓰지 마. 다 빼고 와. 그냥 와. 그냥 와. 하나님 것 더하기 내 것 더하기가 아니라 하나님 것 1이잖아요. 그러면 내 것은 1 앞에 못 더하고 버리라고 하는데 물속에 버리라고 하는 것이 물세례고 불속에 버리는 게 불세례고 십자가 앞에 버리는 것이 이게 성령 세례가 되는 거에요.


그걸 가지고 다른 말로 뭐냐 하면은 세례를 심판이라고 하는데 심판. 세례는 뭐다? 심판이다. 이걸 세례 요한은 타작마당이다. ‘타작마당’. 한바탕 놀이마당 아닙니다. 타작마당이에요. 내가 나를 버리면 이걸 아까 뭐라고 했어요? 훨훨훨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 내가 나를 버리면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교만이에요. 아이고 헛된 것, 못 살면 자살하면 되지. 그게 바로 교만이라고요. ‘교만’.


자기 죄에 대해서 속죄한다고 목숨 바치는 것. 그거 누가 시킨 짓이라고 했던가요? 가룟 유다한테 시킨 악마, 악마 짓이에요. 악마 짓. 편지 하나 써가지고 자식들아 미안하다. 못난 남편 해서 내가 퇴직하면서 50억 밖에 안 벌었는데 사람들이 뭐라고 해가지고 내가 장렬하게 죽는다. 실제로 그런 일은 아니고요. 퇴직금 50억 밖에 안 받았다. 50억 받았는데 그게 뭐가 나쁘냐? 내가 자존심 상해서 죽을께 해서 죽었다면 사탄의 짓이죠.


뭐 회사 이름도 어려워. 대표직 사직하라. 사직하면? 그게 겸손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 일절 하나님께서 안 받습니다. 그게 겸손이 됐든 순교가 됐든 헌금이 됐든 예배가 됐든 안 받습니다. 찬양이 됐든 안 받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할 때가 되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이 인간하고 전혀 다른 부분이 없어요. 그런데 뭐가 다르냐 하면은 세례 요한의 좌표계가 달라요. ‘좌표계’. 환경이 달라요. 환경이. 같은 인간인데 환경이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덮쳐진 환경입니다. 좌표계 어려운 말 나왔는데. 또 환경이라는 말도 어렵고요. 한번 들어보세요.


아킬레스란 고대 마라톤 선수가 있어요. 마라톤 선수. 인간 중에 제일 잘 뛰어요. 그런데 거북이가 있어요. 거북이. 아킬레스가 거북이 하고 달리기를 하는 겁니다. 제논이라는 철학자가 내놓은 모순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북이하고 하는데 아킬레스는 어떤 경우라도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 이유가 뭐냐? 거북이가 아킬레스보다 앞서서 달리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듣는 사람은 이게 무슨 소리냐? 한번 붙어봐. 거북이보다 빠르지. 아니야. 절대로 못 이겨 해놓고 아킬레스 뒤쪽에 출발하잖아요. 뒤쪽에. 그럼 거북이를 앞에 둔다고요. 거북이를. 거북이가 앞에 가게 되면 아킬레스 마라톤 선수가 거북이 처음에 지점까지 오게 되면 거북이는 이만큼 갔겠지요. 이만큼 더 갔겠지요? 요만큼 갔겠지요.


그러면 앞서지를 못 하는거에요. 그러나 아킬레스가 이만큼 오게 되면 거북이는 이만큼 갔겠지요. 그런데 앞서지를 못하는 거에요. 아무리 따라가도 못 따라가는 거에요. 이게 제논의 모순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담긴 철학적 의미를 모르고 오늘날 과학은 앞선다고 되어 있어요.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10배나 빠르다고 한다면 거북이는 10분의 1. 아킬레스가 1이 된다면 거북이의 속도는 10분의 1밖에 안 될 거에요.


아킬레스가 이 지점에 오게 되면 여기 또 100분의 1 더 가겠지요. 아킬레스가 이 지점 오면 1000분의 1 가겠지요. 그래서 10분의 1은 0.1. 100분의 1은 0.01. 1000분의 1은 0.001. 결국 이것은 뭐냐 하면은 1.1111.. 중학교 때 나오는 순환소수. 1.1에다가 점 찍은 거에요. 이걸 분수로 하면 9분의 10. 그래서 9분의 10 자리에 오게 되면 그 때부터는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있다. 이거 증명했다는 거에요. 이 증명 틀렸습니다. 잘못된 거에요.


제논이 무슨 뜻에서 이렇게 하는 것인지 그 당시 철학에서는 심오한 의미가 있지만 이게 하나님의 말씀에도 절대로 이게 빠른 아킬레스가 느림보 거북이를 못 따라가는 이유가 우리 인생관에 나옵니다. 인생에 아무리 젊은 사람이 늙은 사람보고 돈도 더 벌 수 있고 출세도 더 할 수 있는데 늙은 사람의 경험, 인생 경험을 젊은 사람이 못 따라옵니다. 왜? 시간이 개입. 제논이 하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시간이 개입해버리면 시간계는요 인간이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젊은 사람이 예를 들어서 젊은 사람이 바둑이 9단이다. 늙은 사람도 바둑이 9단이다. 늙은 사람 중에 바둑 잘 두는 사람 서봉수 9단, 이쪽은 신진서, 현재 세계 1등 신진서 있다. 바둑하면 누가 이깁니까? 젊은 사람이 낫지요. 기억력 좋고 낫지요. 인공지능한테도 이기는데. 보통 실력이 아니잖아요. 낫지요.


하지만 서봉수 9단의 나이가 얼마냐 하면은 나이가 70이에요. 신진서는 21살인가 그래요. 그 세월 다 들어있어요. 그 세월 언제 따라잡을 건데? 못 따라 잡아요. 이걸 여기에다가 적용시켜 봅시다. 세례 요한과 인간과 경쟁이 안 되는 이유는 인간을 둘러싼 그 시간계가 세례 요한이 둘러싼 시간계하고 이게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세례 요한의 시간계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예수님으로부터 온 거에요. 예수님 말씀으로부터 온 거에요. 그러면 세례 요한은 말씀을 지키는 겁니까? 아니면 말씀이 지켜 이미 완성 되었다를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완성 되었다를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요한복음 1장에 나오는데 한번 봅시다.


요한복음 1장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보세요 시합하잖아요. 내 뒤에 오시는 분. 6개월보다 늦게 오시는 분. 늦게 출생한 분이 예수님이죠. 인간의 시간상은 누가 앞섭니까? 누가 시간계가 앞서고 인생 경험이 많습니까? 세례 요한이 6개월 앞서잖아요.


그런데 그 경험이 세례 요한은 그 경험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나보다 앞선 분의 경험일 뿐이라는 거에요. 자기 앞선 분이 누굽니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죠. 예수님이 자기를 보냈다는 자체가 예수님 일이 하늘나라에서는 이루어질 것이다가 아닙니다. 다 이루어진 거에요. 이루어진 것. 믿거나 말거나 모르겠어요. 내 소관 아니니까.


로마서 8장 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걸 다시하게 되면 “이미 정했고 이미 정해진 그들을 정하시고 이미 불러낸 그들을 부르시고 이미 의롭다 하게 하신 사람을 의롭다고 확인시키시고 이미 영화롭게 된 사람을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만 나오는 게 아니라 에베소서 2장 5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살려줄게 강림할 때 살려줄게 재림할 때 그 때 해줄게 가 아니라 “이미 살리셨고” 6절에 또 함께 일으키사 하늘나라 앉혀줄게 가 아니라 “이미 앉히셨고” 성도는 앞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 이미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에요. 중첩된 거에요. 세례 요한처럼.


인간의 시간과 주님이 주시는 성령 안의 시간이 중첩된 자가 성도에요. 성도. 성도 안에는 인간이 해볼까? 구원받아볼까도 있고 뭡니까? 이미 구원되었음도 구원도 함께 들어있는 거에요. 실제 상황이 이러니 뭐 사람 꼬실려고 복 받을 겁니다 잘 될 겁니다 이렇게 구라 떨면 안돼요. 교회가 사람 끌어모으는 데가 아니고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된 숫자는 이미 정해져버렸어요.


구원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만약에 구원받고자 한다면 이것은 교만입니다. 패망의 선봉이에요. 구원받고자 한다면 집중도가 모든 관심사가 누구한테 쏠립니까? 나한테 쏠리지요. 왜? 이 따위 모습이 무슨 구원이에요. 지옥이지. 지옥이죠. 그런데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은 주께서 보내심을 받고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 꼬라지가 이미 완성된 꼬라지에요. 그 꼬라지가.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자기한테 집중합니까? 안 합니까? 할 필요가 없지요. 주께서 시키는 대로 살면 되니까요. 우리가 미리 주의 일을 예측하고 추측해서 감사할 준비를 하면 안돼요. 하나님, 저한테 이런 일 있으면 제가 꼭 감사할게요. 꼭 이 기도 응답해주면 진짜 내가 감사 안하고 내빼면 나는 개라고 해도 할 말 없습니다. 정말 꼭 감사할게요. 감사하는 것 미리 정해버리면 그거는 교만입니다. 우리 성도가 할 것은 이미 주어진 그 자체가 내가 예상 못한 감사거린 줄 받아들여야 돼요.


그래서 범사에 감사, 모든 일에 감사하는 거에요. 내가 관찰하고 추측하는 것을 빗나가게 하십니다. 어긋나게 하시는 방법이에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그 앞에 있는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는 이유가 몸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제논은 거기까지 몰랐지요. 몸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시간계가 움직이는 거에요. 앞선 시간계를 뒤에 시간계가 못 따라잡으니까 이게 따라잡을 수가 없는 거에요.


거북이가 이렇게 가고 있는데 총알같이 아킬레스가 따라 왔잖아요. 따라 왔지만 거북이가 경험한 시간계하고 따라와도 이건 별개에요. ‘별개’. 오늘 제목을 별개라고 하고 싶어요. 별개. 별개라는 말은 우리 뜻 따로 별개로 주께서 일을 해버려요. 그래야 우리 한계가 드러날 게 아닙니까? 평생 우리 한계가 드러나줘야 돼요. 한계가.


구원은 주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야 깨닫게 되거든요. 뭐 세상 다 부질없는 거 이거는 교만입니다. 겸손은 뭐냐 하면은 내가 이미 주의 일에 한 일로서 참여됐다는 사실을 보는 거에요. 너는 누구를 증거하는 것이지, 내 인생 아무것도 아니고 세상을 초탈한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은 교만이에요. 그거는.


십일조해도 구원받고 안 해도 구원받고 하면 뭐하겠노. 교회 가도 안 가도 구원받는데 유투브보면 되겠네. 지금 유투브보고 십일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여전히 관심사가 자기가 소거가 안돼요. 소거, 음소거. 너는 별개야 너는. 별개 너한테 왜 관심을 둬? 관심 둘 필요가 없는데. 악마는 자꾸 우리 자신에게 관심 두게 만들어요.


가룟 유다도 자살하라고 부추기고. 스승을 팔아먹다니. 그래도 네가 인간이야? 양심이 있다면. 죽어 인간아. 죽으면 네가 양심 있다는 소리를 남들이 할 거야. 이게 바로 악마가 인간에게 그런 교만을 준거에요. 스스로 자기 죄책 안고 자살하라는 교만을 준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이 점을 도대체 세례 요한을 어디서 왔는지를 이 점을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 있어요. ‘소실점’.

 

강남-누가복음 7장 32절 (미로) 211005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 세례 요한이 기존의 인간의 시간이라든지 그런 것에 접촉을 안 받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말씀이 세례 요한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세례 요한은 세례 주는 사람이에요. 요한 앞에 세례 있죠. 새로운 세계를 너도 나처럼 이렇게 겹치게 만듭니다. 물론 세상 사람한테는 온갖 소리 다 듣겠지요. 그게 바로 좁은 길 아닙니까.


그게 주님의 형상이 덮쳐버리면 주님의 가시는 길을 그냥 재현하게 되어있어요. 그 자체가 완료이기 때문에. 그걸 저는 좌표계. 새로운 시간이 적용되는 사람. 그리고 내부에서 기존의 인간들의 시간과 새롭게 덮쳐진 성령의 세계에 어떻게 차이 나는 것을 자기의 생을 통해서 자기의 인생을 통해서 그 두 가지를 다 보여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 그 사람을 성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의 위치가 자기한테 관심을 두지 말라고 했거든요. 소실점이라고 하는 것은 점점 더 사라지는 거에요. 사라져서 하나의 점이 되는 거죠. 하나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사각형이 하나 있다면 이 사각형 소실점은 이렇게 어디로 모이느냐 하면은 모든 선들이 여기가 소실점이다. 소실점. 저쪽에서 봤을 때 이렇게 보이는 거에요. 소실점이 두 개일 경우를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소실점이 두 개일 경우.


두 개일 경우는 이렇게 그리는 거에요. 수평을 이렇게 그려놓고 수평 네 개를 연결시켜보게 되면 이렇게 소실점이 여기도 당기고 여기도 당기죠. 모퉁이에 미도파 백화점. 백화점 보게 되면 이쪽에 창문이 여기도 있고 이렇게 있지 않겠습니까. 소실점이 두 개지요. 소실점은 뭐냐 하면은 그 점에서 보내심을 입었을 때 현장에 등장한 것과 그 출발점, 그 보내심을 입은 출발점은 저 뒤에서 당기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두 개인 경우고 세 개인 경우가 있을 때 바둑판같은 것을 입체로 그릴 때는 세 개로 그려요. 여기 하나, 여기 소실점 하나. 여기 세 개를 그리게 되게 되면 이것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해가지고 중간에 그어놓을 것 그어놓고 이 중간에 그은 데다가 촘촘히 선을 이렇게 연결시켜 버리고 또 연결시켜 버리면 이게 소실점이, 여기서 밑에서도 당기고 여기서도 당겨버리면 이것은 2차원 평면이 입체로 보이게 되어있어요.


바둑판 면적이 사각형이 이렇게 되니까. 삐뚤삐뚤하지만 입체로 보이게 되어있어요. 소실점. 이러한 소실점이 있다는 말은 이 자체가 결국은 이 도형 같은 내가 결국은 하나의 점으로 점 있는 쪽에서 나를 출발시키고 결국 그걸로 귀환시키기 때문에 현재에 있는 나의 어떤 형식에 대해서는 내가 이것을 붙잡을 이유가 없다 이 말이죠. 있다가도 없어지니까.


그런데 이걸 제가 설명했다면 그 다음에 뭘 필히 설명하느냐.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세상 사람들은 뭐가 없어요? 소실점이 없어요. 그렇지요? 누가 당기는 게 아니잖아요. 이만큼 키우는 것도 내가 애써 힘들었다. 건드리지 마. 내가 이만큼 만드는 것도 내가 얼마나 애쓰고 양보해가지고 더러운 짓까지 하면서 이만큼 키웠다. 자기 자신에서 응축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뭐냐 하면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소실점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은 미궁이에요. ‘미궁’. 또 다른 말로 하면 미로. ‘미로’. 미궁. 소실점은 한 점으로 당겨가지고 딸려가지만 미궁은 자꾸 중앙으로 갇히게 돼요. 갇혀있어요. 중앙으로 갇혀있다고요. 자, 중심이 자기 자신이잖아요. 그러면 자기 자신을 일단은 하나의 자동차라고 봅시다. 자동차를 봅시다. 이렇게 생겼다고요.


내가 이 자동차라면 나이기 때문에 뭘 생각하느냐 하면은 나 중심이기 때문에 항상 가까운 자기의 보이는 것들을 자기 현실로 봅니다. 7살이면 7살. 10살이면 10살. 세월 따라 커지기는 맞아요. 커지기는 맞지만 절대로 내가 40되었다. 내가 50되었다 이 말은 여전히 내가 중심이다 이 말이에요. 나를 지금 차로 그린 거에요. 차로 지금 대신 그린 겁니다.


그러나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내게 필요한 것만 잡아당기는 거에요. 필요한 것만. 세계 정세든 국가 정세든 내게 필요한 것 이것만 하는 거에요. 내가 만든 현실에 내가 이렇게 놓여있는 거에요. 놓여있다면 그 다음에 이걸 키워보자 이 말이죠. 키워보면 차가 이렇게 되겠지요. 이정도 되겠지요. 이걸 더 키워보자. 어떻게 키우느냐 하면은 이렇게 키우는 거에요.


차가 여기 들었겠지요. 그렇지요? 그럼 이걸 더 키워보는 거에요. 이 안에 차가 들었겠지요. 이게 뭐냐? 이게 바로 미궁 아닙니까. 내가 필요해서 내 생존에 필요해서 얻었던 그것이 나를 미궁에 빠트린 겁니다. 내가 필요해서 원했던 모든 사물과 그런 재산과 재물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미궁에 빠지도록. 미궁에 빠진다는 것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요. 출구가 없습니다.


이걸 요한계시록에 이게 5장 9절과 5장 6절에 이걸 가지고 5장에 보면 봉인. 가둬놔 버려요. 인간이 원하는대로 다 해주고 그 원함 속에 가둬놔 버려요. 이런 예는 많지요. 촌에 농사 짓다가 아빠 서랍에서 돈 통장 훔쳐가지고 편지 한통 쓰고 아빠 출세하고 올게. 출세한다고 가가지고 성남에 땅 하나 사가지고 해가지고 출세해서 퇴직금 50억 받았다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 남들한테는 뭡니까? 성공한 거죠. 성공한 건데 그림에 보면 뭡니까? 면적이 50억만큼 휙휙 자기 안에 감긴 거에요. 그래서 그 사람은 어디 갇혀 있습니까? 자기가 받은 그 재산에 자기가 스스로 갇혀가지고 못 빠져나오는 거에요. 그런데 만약에 나라에서 50억 회수하라고 하면 이 사람은 자살해버려요. 갇혀있기 때문에. 옛날 촌에 가가지고 그냥 농사 안 짓습니다. 놀던 가락이 있거든. 놀던 가락이. 놀던 가락이 있어요.


미국에 뉴욕이 유명한 그 비싼 아파트에 사는 모델이 자살했다. 왜 자살했느냐? 인기가 예전만큼 못하기 때문에. 인기가. 옛날엔 자기 잘 나갔는데 젊은 애들이 막 모델서고 자기는 점점 더 모델계에서 소외되니까 지금 입을 거 먹을 거 없어서 죽는 게 아니에요. 옛날 그 인기 있잖아요. 인기. 자기 팬들. 자기 알아주는 사람. 자기 뭐 올리면 좋아요 막 팍팍 누르는 거 있잖아요. 그 사람이 없다고 자살했어요.


자기가 자란 그 꼬리가 자기를 질식시키는 겁니다. 이게 마귀가 인간에게 한 짓이 이 짓이에요. 돌이 떡 되게 하고 한번 인기 얻고 한번 배부르게 되면 권력 얻으면 그 쇠사슬에서 못 벗어나요. 그게 지금 마귀가 하고 있는 거에요. 그게. 이게 교만이고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단칸방에 살았는데 애들은 참 솔직하지요.


단칸방에 살다가 33평짜리 아파트로 옮겼어요. 그러니까 애들이 이사한지 얼마 안 되서 불편한 겁니다. “엄마 밥 먹으로 오는데 너무 멀어.” 이게 단칸방은 돌아서면 상 펴면 되는데 밥 먹을려면 걸어가야 돼요. 걸어서 저 부엌까지 걸어서. 33평이니까. 50평사는 사람은 “그게 뭐가 머냐?” “50평 안 살아봐서 몰라.” 이렇게 되거든요. 애한테 어울리지 않는 게 휘감기는 이런 위상 공간이 있었던 거에요. 이게 바로 세상입니다.


살고자 싶어서 내가 요청한 것들이 나를 휘감아서 질식을 시키는 겁니다. 질식을. 아 공부 좀 이렇게 못하고 이렇게 체육 좋아하면 놀텐데 이건 뭐 7살 먹은 애가 공룡이름 다 외우고 하루 종일 책 만 들여다보고 이렇게 사는 애가 만약에 전교 1등하고 1등 놓친 적 없다가 한 10등 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엄마는 큰일났다. 어떻게 하면 1등으로 회복할까.


애한테 그만큼 기대를 건 만큼 그게 자기 몸에 휘감긴 겁니다. 자기를 질식시키지요. 주님께서는 여기 갇혀있는 이 인간을 세상 부귀 영화 명예거든요. 명예 자기 정당성에서 못 빠져나옵니다. 자, 그러면 주님께서는 여기 못 빠져나온 이 차, 이 성도를 어떻게 합니까? 이걸 캡쳐를 해요. 이걸 오려냅니다. 이걸 오려내요.


이걸 오려내게 되게 되면 이게 뭐냐 하면은 새로운 시작점이 여기서 발생돼요. 새로운 시작점. 오려내게 하신 주님이 시작점이 됩니다. 그럼 시작점에 들어오게 되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다 이루었다. 말씀으로 다 이루었다가 새로운 시작점으로 그 인간을 새로 개시하게 되는 겁니다. 도려내는 거에요. 자기 힘으로 이차원 평면을 못 벗어나면 도려내서 위로해서 바짝 크레인가지고 들어올리는 거에요.


자, 이거 한번 생각해보세요. 세례 요한이 어떤 위치에 있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은 이런 위치에 있어요. 세례 요한이 알고 있던 이 모든 세계, 세계 있을 거 아닙니까. 세례 요한이 차라면 차가 이 바깥에 있어요. 차가 이 바깥에. 이런 세상 바깥에 있다고요. 그러면 세례 요한 살면서 계속 어떤 새로운 현실이 만들어지겠지요.


여러분 아시다시피 세례 요한이 어디에 관여해서 죽음을 당했습니까? 정치적인 일에 말려들었지요. 어떻게 사촌 간에 결혼하느냐 이래 가지고 말려들었잖아요.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에요. 말려드니까 분명히 정치권력도 세례 요한을 둘둘 말겠지요. 몇 바퀴 돌겠지요. 몇 바퀴. 아무리 돌아도 이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이 바깥에 있어요. 처음부터 바깥에 있었던 거에요. 처음부터.


왜? 이 땅에 태어날 때 인간의 아빠 엄마 혈육적인 것을 차단한다는 신호를 가지고 천사로부터 신호를 가지고 아이 못 낳는 부부에게 아이 낳게 했으니까요. 이건 시작점이 뭐냐? 말씀으로 시작된 거에요. 세례 요한같은 경우에.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이지만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가질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생산될 수 없는 이 세상이 해내지 못하는 존재를 처음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시작점이에요.


시작점이고 이게 뭐냐? 새로운 좌표계에요. 예수님이 속해 있던 좌표계. 그 하늘나라의 요소요소 요건들이 세례 요한을 말씀의 완성이 세례 요한을 이 땅에 보낸 겁니다. 태어나게 하신 거에요. 그러면 세례 요한은 이 자체가 시작이 되고 세례 요한은 이 자체가 뭐냐? 끝이 되겠지요.


세례 요한이 어떻게 죽는다 할지라도 세례 요한의 본인한테는 소거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세상의 바깥에 있기 때문에 어차피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상관없고 어울리지 않으니까.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은 자가 되는 죽은 자로서 이 땅에 같이 살아온 여유를 부릴 수가 있는 거에요. 여유. 이걸 가지고 겸손하다 합니다.


왜 세례 요한은 저렇게 하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의 그 뒤에 오시는 분, 달리 말해서 세례 요한보다 앞서 세례 요한을 설계하신 분, 계획하신 분이 그 분의 인생이 바로 이 인생이에요. 하나님인데 분명히 이 땅에 왔는데 이 세상의 어떤 것들과 섞이지 않으면서 이 속에 섞여 살아가시는. 어두움에 생명으로 살아가시는 거에요. 죽음 속에 생명으로 살았고 어둠 속에 빛으로 오신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을 못 알아듣는 겁니다. 제자들도 못 알아듣고.


그럼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은 예수님이 하시는 그 좌표계 시간계 있잖아요. 아킬레스의 시간계와 거북이 시간계가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공간적으로 앞서가도 아킬레스는 오히려 뒤따라 오는 거북이를 또 따라가야 돼요. 뒤따라오는. 이게 세례 요한의 모습이에요. 나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섰다 이 말이거든요.


그 우리나라 못 먹고 살 때 소고깃국에 하얀 쌀밥 먹었으면 좋겠다. 옛날 50년대 60년대 그때 그런 일 많이 있었잖아요. 그렇지요? 하도 못 먹고 사니까. 그 때 살았던 사람 맨날 엄마 아빠한테 원망하면서 또 보리밥이야? 이랬거든요. 그래 엄마 아빠가 열심히 일해서 하얀 쌀밥에다가 고깃국 끓여줄게. 해서 70년 80년대 하니까 한 80년대 되니까 가끔은 고깃국에 쌀밥이 나오는 거에요. 그때 뭐가 유행했느냐 하면은 보리밥 잘하는 집 찾아다녀요.


왜? 너무 쌀밥 많이 먹어가지고. 거꾸로에요 거꾸로. 우리가 버리기를 원했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리운 거에요. 보리밥집 순례하기. 보리밥 맛집 찾기. 인간이 이 세상 육에서 태어났거든요. 아무리 해도 육에서 벗어나지를 못해요. 그런데 여기 세례 요한을 딱 대비시켰잖아요. 대비시키니까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아이들이. 이 세대 사람들은 마치 이와 같다.


문제가 어려운 게 뭐냐 하면은 아이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과연 아이가 예수님편의 아이인가 아니면 이 세상편의 아이인가. 그건 어떤 아이라도 상관없어요. 하여튼 안 맞다 그것만 그게 주가 되니까 안 맞아요. 사고가 안 맞아요. 이 세상 사고가. 한쪽은 열심히 해보자. 발전 해보자. 더 희망 있다 이거고. 한쪽은 끝났어. 그럼 한쪽은 끝났는데 왜 사냐?


그게 뭐냐 하면은 왜 내가 생각하는 다 이룸과 주님 주시는 이룸과 이게 왜 틀리는지를 보게 하는 거에요. 미리 예측하고 미리 예상하면 주께서는 절대로 그걸 안 들어주세요. 왜? 그것은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인간의 아직 한계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래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죽었을거야 하면 안 죽었거든. 살았을거야! 죽었거든. 마치 인간을 갖고 노는 것처럼.


인간은 처음부터 말씀의 위배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님은 인간들을 갖고 노시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세례 요한을 고생케 하고 죽을 때 말로가 비참하게 죽게 만들어서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세례 요한 할래 하고 손들고 나올 사람 없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 요한보다 말로가 더 비참합니다. 왜? 설계도니까. 설계하신 분이니까.


그저 세례요한은 기껏해야 설계하신 분을 약간 모방했을 뿐이지. 진짜 말씀으로 말씀 그대로 하신 분들은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따라올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가 바깥에 튀어나올 사람 아무도 없어요. 이 한계를 이 단절을 더욱 더 확고하게 하시는 거에요. 주님께서.


여기 28절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인간들 가운데 나실인이거든요. 특별한 사람이에요. 세례요한이 나실인이라는 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은 이런 거 이야기할 때가 제가 약간 염려가 돼요. 왜냐하면 그런 신학적인 거 좀 이야기 안 하면 안 됩니까 뭐 이렇게 하는데.


1장 15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이게 바로 민수기 6장에 나오는 포도주 관련된 술과 관련된 것을 금지하고 나실인이라고 하는 것은 구별된다. 차이 나게 한다. 차이 난 인생 그거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이 없다고 한다면 서로 인간은 경쟁적으로 누가 누가 말씀 많이 지키느냐 누가 겸손했느냐 누가 하나님 말씀에 영광을 돌렸느냐 이거 하겠지요. 그 경쟁을 완전히 묵살시켜버립니다.


인간이 인간끼리 하는 경쟁, 선악에서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 그걸 무효로 칩니다.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 앞에 세례를 받아야 돼요. 세례 요한이니까. 세례 받는 이유는 바로 나를 소급하는 거에요. 아 나는 신경 써서는 안 되는구나. 왜냐하면 내가 나를 신경 안 써도 되는 이유가 나보다 더 나를 신경 쓰시는 분이 그때그때마다 새로운 좌표계, 새로운 환경, 새로운 요소로서 우리를 거기에 이끌고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끌고 가기 때문에.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은 주께서 주의 일을 스스로 하기 위해서 벌리신 일이에요. 그 일이 뭐냐? 나의 파괴입니다. 자, 나의 파괴할 때 이걸 굉장히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대구강의에서 했지만 하나님의 특이한 점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가 딱 하나 있어요.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를 파괴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여러분 상상이 갑니까? 절대자가 하나님인데 절대자가 자기 절대를 부셔버렸어요. 자기가 자기를 찔러 죽인 것과 똑같은 거에요. 이거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죽인 거에요. 이래도 너희들이 신을 안다고 할 수 있느냐고 우리한테 딱 내미는 것 같습니다. 그 파괴, 하나님도 하나님 먼저 자진해서 파괴시켰다면 너도 이 파괴에 참여하라. 이게 세례 아닙니까. 물에 뛰어들어. 풍덩. 죽어버려라. 인간아. 그거잖아요. 죽어버려라. 앞당겨 심판받아라와 같은 말이거든요.


2006년도에 mbc에서 하는 드라마가 제가 아주 참 재밌게 봤다는 드라마가 두 개 있어요. 내 이름은 김삼순하고 환상의 커플. 여기에 한예슬 나오고요 오지호 나와요. 오지호 이름은 장철수. 있는데 이 한예슬이 재벌의 상속녀에요. 그런데 요트에서 까불다가 머리 다쳐가지고 기억이 상실되어 버렸어요. 이름이 기억나요. 뭐냐? 나상실. 이게 얼마나 복음적인지.


나 상실해서 나상실. 지금도 잊어버리지 않는 게 고양이가 이름이 프린세스에요. 그 드라마 잊지 못하는 것은 남해에 비오면 머리에 꽃 꽂고 미친 여자처럼 나오는 배우가 있어요. 아주 연기 잘하는데. 남해에 눈이 온 적이 없는데. 나상실이라는 이 아가씨가 한예슬인데 이게 벌써 몇 년 전입니까? 2006년이니까 15년 전 이야기에요.


오지호가 기억에 없으니까 그냥 데리고 사는데 그냥 동거하는 게 아니고요. 조카가 3명 있어요. 오지호가 하는 일은 허드렛일 하고 노가다 온갖 것 다하는데 재주는 좋아요. 장철수가. 여기 와서 식모일하면서 사는 거에요. 자기 자신을. 나중에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데 알게 되면서 또 드라마는 오지호를 또 사랑하면서 이렇게 되야 되거든요.


여기 보세요. 나상실. 나상실 되니까 재벌녀의 색깔이 뭔가 몸은 남아 있는데 나중에 조카 키우면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장철수의 좌표계에 완전히 빠졌어요. 자기 것이 없으니까 자기는 상실했으니까. 나상실. 상실했으니까 그 오지호의 조카 3명 열심히 키우는 그 따뜻한 그 가정에 옴팍 다 젖어버린 겁니다. 짜장면 못 먹다가 짜장면도 먹고 서민들 음식도 먹고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 보면서 헛되고 헛되고 뭐 다 부질없다. 도인되는 게 아니에요. 성경은 도인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을 초월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오신 것은 기존 세계가 전혀 바깥세계를 모르고 있는 무지한 상태라는 것을 유발시키고 자극시키기 위해서 성도로 하여금 성령을 주신 거에요. 도 닦아서 천당 오라는 말이 아니고 살아가면서 세례 요한처럼 살게 만드는 겁니다.


외쳐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고 울어도 울지도 않고. 웃어도 왜 웃는지도 모르고. 그걸 혼자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세례라는 것. 물세례, 성령 세례. 이 세례에 들어가면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에요.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께서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 세상의 푹 빠져 있는 우리를 도려낸다.


도려내놓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게 하게 되면 윤곽이 생기죠. 윤곽. 내가 사는 것과 다른 사람 사는 것과 다르지요. 다르다보면 주의 좌표계가 있어야 되는데 또 세상에 또 물들어 가지고 난 뭐 구원받았는데 뭐 이렇게 되겠지요. 그러면 뭐가 없어져요? 윤곽이 없어지잖아요. 윤곽이. 나상실에서 나회복이 되어버려요. 그럼 다시 또 성령으로 도려낸 나를 또 도려내버려요. 그럼 또 주님이 시작했던 십자가로 시작했던 새로운 시작을 개시하게 만듭니다. 성령께서. 또 캡쳐를 하는 거에요. 뽑아내는 겁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이야기할 것은 뭐냐? 이왕 그림을 그렸으니까 그림이 복잡한데요. 아까 미궁 속에 빠졌지요. 내가 이 세상에 원하는 내가 스스로 살려고 하다보면 이런 미궁 속에 빠집니다. 미궁의 특징은 뭐냐? 항상 중앙으로 빠지기 때문에 살면 살수록 점점 더 깊숙이 자기밖에 몰라요. 치매 걸린 노인들 보면 자기밖에 몰라요. 평소에 속성이 그런 거에요. 자기중심이죠. 자기중심이란 내가 여기 있다는 말이 아니고 성향이 자기중심 쪽으로 이렇게 쏠리게 되겠지요. 스스로 갇혀버립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올 때 바깥에 있지요. 바깥에 있으면서 보고 있는 것은 다 자기를 둘러싸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라고 해가지고 자연인 되겠다고 지리산 기도원 가지 마세요. 주께서는 세상에 보내버려요. 세상에 보내되 속하지 않는 티를 내게 만듭니다. 그러면 옆에서 한번 봅시다. 이렇게 보게 되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옆에서 보게 되면 뱅뱅 돌렸던 세상적인 모든 사물과 경험했던 이것은 평면에 둘러싸여 있지요.


그럼 여기 세례 요한이 있다 합시다. 세례 요한은 뭐냐 하면은 주님의 좌표계에 포함이 되어있는 거에요. 주님의 좌표계에. 수직적으로. 그러면 수평적으로 이런 세상적인 좌표가 있고 여기에 속하지 않은 수직적인 좌표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와 있는 거에요. 주기도문에 이런 말씀 있지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어디서 이루어진다? 땅에서 이루어진다. 이게 바로 원래 계획했던 예수님의 좌표계에요. 그걸 지금 세례 요한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거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의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물세례 줄 때 누가 여기서 무슨 이야기했느냐 하면은 지금 너한테 세례 받는 그 분이 장차 올 성령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되어있지요. 같은 세례 속에 물이라는 땅의 현상에서 그 다음에 하늘에서 주어지는 물이라는 땅의 현상은 뭐냐? 인간이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잖아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세례에서 성령 세례는 인간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못하지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세례로 자기의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세례 요한은 물세례 기능 끝났으면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께서 이 바톤을 이어서 성령께서 물세례 준 것처럼 성령 세례를 줘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줬는데 그 주는 자가 뭐냐 하면은 창세 전에 예정된 자에게 이것이 도려내버려요. 자기 있는 위치에서 가위로 도려내요. 캡쳐. 동영상에서 사진을 하나 캡쳐하듯이. 스탑. 하나를 캡쳐해요. 포획한다. ‘포획’. 딱 둘러 포획해버려요.


그러면 이 사람은 여기에 살고 이 땅에서 미국 가든 일본 가든 북한 가든 간에 뭐가 따라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좌표가 같이 따라가는 거에요. 마치 사도 바울같이. 사도 바울이 터키에 가나 그리스에 가나 어디가도 심지어 지중해 폭풍 속에서도 어떻습니까? 그때 누가 나타났어요? 밤중에. 사도 바울아 걱정하지 마라. 너하고 구원받을 사람 내가 지켜준다. 이 폭풍은 해야 네가 또 로마에 가서 전하니까 로마에 가서 전해야 돼.


지금 현상적으로 죽을 판인데 풍랑이 일어나는데 로마에 가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본인이 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내가 가게 하겠다는 겁니다.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가게 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성령 안에서는 매일 뭐냐? 매일 시작점이 되는 거에요. 매일 시작점이 되는 겁니다. 자, 그 다음의 이야기. 33절요. 오늘 참 어렵지요. 참 어렵지요.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이렇게 되어있지요. 아까 슈뢰딩거의 고양이 한번 보세요.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어렵더라도 참으세요.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먹지 않으니까 뭐라고 합니까? 귀신 들렸다 했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세례 요한과 어떻게 했습니까? 반대로 해버렸지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속했으니까 예수님 하는 것과 똑같이 한다 이 말이 똑같이 한다는 말이 아니고 인간들의 한계, 인간들의 사고방식과 한계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똑같다 이 말입니다. 일체 인간들과 안 섞이게 하는데 똑같다 이 말입니다. 안 섞이게.


인간들의 선도 악이고 인간들의 악도 악이라는 것을 알려줄려면 인간의 선과 악 자체를 무효로 하는 새로운 게 등장해야 되거든요. 그 새로운 것이 뭐냐 하면은 새로운 것이 뭐냐가 아니라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고 하면서 새로운 게 등장하는 거에요. 참 너무 어렵지요. 우리는 그냥 아 저거 괜찮네. 좋은 거네. 백화점에 물건 보듯이 저것 원하는데 저것 주세요 이러고 싶지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안줘요. 우리가 싫어하는 것도 안 줘요.


그럼 뭘 주느냐? 달라는 것은 안 주고 그럼 주지 마세요 하면 주는 거에요. 그래야 우리가 시작점이 돼요. 아 내 인생은 내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걸 매일같이 하지만 우린 매일같이 잊어버립니다. 매일같이 잊어버린다는 것은 주께서는 매일같이 나상실인데 우리는 매일같이 상실한 나를 또 만들어버려요. 돌아서면. 나 괜찮다 복음 안다 또 만들어버려요.


한예슬이 다시 와야 되나. 환상의 커플 그 드라마 제 2편을 찍을려면 한예슬이 까불다가 차에 부딪혀서 기억 상실 또 해야 돼요. 이번에는 한예슬이 검사가 되가지고 싸움 잘하는 검사 됐다가 재벌집 상속녀, 유산녀가 되가지고 회장 자리 앉아 있는 그런 원더우먼 정도 되든지 이래야 돼요. 드라마 보면 기억상실 되면 뭐라고 합니까? 자꾸 기억을 살리려고 하잖아요. 그게 교만이라 이 말이죠.


우리의 기억은 우리가 살리는 게 아니고 주께서 살려줘요. 왜? 우리가 살리려는 것이 영이 아니고 육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살려줘요 자꾸.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가 주님 앞에 농락당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34절에서 보면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여기 지혜라고 하는 것은 지혜를 인격화하면 주님이 돼요. 예수님이 돼요. 그리고 예수님이 갖고 있던 그 세계관, 세례 요한 포함하고 성도 포함하지요. 이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똑같이 이래도 비난받고 저래도 비난받는 사람으로 동참했다는 의미에서 옳다, 의롭다 하는 평가를 새로운 세계, 하늘나라 좌표에 의해서 인정받을 것이다.


그래서 이 성도의 특징은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어떤 요소를 주님께서는 우리한테 한시도 허락하지를 않습니다. 내가 스스로 의롭다하는 것을. 그럼 뭐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이것. 이게 바로 주께서 의롭게 하시는 증거가 되지요. 해봐야 또 몇 분 안 가가지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으니까 나는 의롭잖아 또 이렇게 나상실이 아니고 나를 도래할 수밖에 없지요.


왜냐? 인생이란 그런 거에요. 주께서 그것 때문에 안 죽이고 계속 살려주는 거에요. 매일같이 새로운 은혜를 주시려고. 새로운 시작점이 새로운 은혜에요. 아 내 힘으로 나를 못 살리고 못 구원하는구나. 그럼 주님이 뭐라고 합니까? 안 해도 돼. 다 이루었으니까. 그게 다 이루어진 증거에요. 그게. 그게 다 이루었으니까 회까닥이 되는 거에요. 이루어진 증거에요. 구원받은 증거라니까요. 내가 원하는 이상형 있잖아요. 그게 매일같이 내 쪽에서 만드는 거에요. 주께서 맨날 그걸 엎어버려요. 엎어준다는 그게 이미 구원됐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요. 구원됐기 때문에.


자, 아까 요한계시록 5장 해보겠습니다. 5장 9절. 주님께서는 성도를 샘플로 시료로 사용합니다. 딱 도려내가지고. 성도 자체의 구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주님이 이미 구원했기 때문에 세상이 악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례 요한같은 기능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 있거든요. 따라서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신경 쓸 이유가 있다? 없다? 없지요. 없는 거에요. 괜히 우리 속에 있는 옛날 그 세상의 사물에 갇혀있던 그것이 그냥 육이 살아있으니까 그게 매일같이 터져나올 뿐이죠. 그것조차도 주님께서 의도한 거지만.


여기 요한계시록에 5장 9절에 보면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다음에 뭡니까?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인봉’. 거꾸로 하면 봉인. ‘봉인되었다.’ 봉인이 뭐냐 하면 가두는 거에요. 가두는 것. 다윗이 소년 때 그 사울 왕이 악신이 들렸습니다. 악신 걸려가지고 미친 짓하고 있으니까 그 때 다윗이 비파 있죠. 기타지고 노래 부르니까 어떻게 되었어요? 악신이 떠났지요.


그러면 이 악신은 성신 받은 다윗에 의해서 풀려났다 갇혔다 풀려났다 갇혔다가 이게 가능한 거에요.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통해서 볼 때에 성경에서 그런걸 한번 여러분들이 찾아내보세요. 이게 인간세계 속에 세상은 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세상을 크게 한번 해볼게요. 잊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세상을 잊어버리면 복음을 잊어버리면 내가 다시 생생히 살아나게 되어있어요. 갇혀있는 상태. 세상은 갇혀있다. 갇혀있다. 이런 상태로 만들어버렸어요 세상을. 갇혀있다. 세상이 갇혀 있는 그 이유가 악마 이걸 창세기에 뱀이라고 되어있지요. 뱀이 피조물이잖아요. 피조물. 뱀이 피조물이라고요.


그러면 이 피조물이 피조물에게 인간에게 관여해서 하나님의 선악과를 따먹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뭐냐 하면은 선악을 아는 선악체제가 낙원에서 분리된 이 체제가 이게 무슨 상태냐 하면 갇혀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갇혀있다는 말 이래가지고 여러분이 잘 설명이 안 되니까 이렇게 해봅시다. 마왕, 악마죠. 악마가 임금에게 사울 왕에게 들어왔다.


그러면 지금 저의 이론에 의하면 악마는 갇혀있는 상태지요. 갇혀있는 상태가 악마가 임금 몸에 들어갔다 이 말이죠. 귀신이 돼지한테 들어갔잖아요. 그러니까 이 갇혀있는 상태에서 이 악마는 같이 자꾸 뭘 하느냐 하면은 변신, 변형 밖에 못해요. 다른 사물을 이렇게 자꾸 이동하고 자기를 변신하는 것밖에 없지 갇혀있는 상태는 여전히 갇혀있는 거에요.


홍천기라는 드라마에 보면 임금에게 마왕이 들어가니까 여기 그림 잘 그리는 소녀가 그림 잘 그려버리면 이 들어온 악귀가 그림에 의해서 이게 조절이 되는 거에요. 마치 다윗이 기타 치게 되면 순하게 되는 것처럼. 그 악마가 악신이 다윗의 기타 노래에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갇혀있다는 거에요. 이게. 갇혀있는 거에요. 갇혀있는데 악마가 홀로 갇혀있습니까? 아니면 자기 부하들 있어요? 귀신들도 있고 누가 있어요? 인간들도 있지요.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뭐에요? 세상에서 도려냄을 당할 때 우리가 성령에 따라 나올 때 세상 전체를 뭐로 봅니까? 이것은 악마한테 마왕한테 마귀한테 악귀한테 갇혀있는 세상이라고 비로소 그걸 보는 눈이 열린다 이 말입니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에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뭐냐 하면은 바로 그걸 갇혀있다는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여기에 주님께서 그 봉인을 열어버려요. 갇혀있는 것을.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인봉을 뗌으로서 이 세상이 왜 멸망해야 되며 악마는 왜 유황불에 들어가야 되는가. 비로소 이 세상은 악마가 귀신이 갇혀있는 게 아니고 활개치면서 세상 전체에 갇혀있는 것이 활개쳐가지고 자기 맘대로 살겠지요. 그렇게 되면 멸망의 범위가 어떻게 되겠어요? 무저갱에 갇혀 있던 귀신이 나와서 이제 벌떼가 확대되니까 확대된 모든 지역 전체가 주님에 의해서 심판과 멸망하기에 합당하게 되겠지요.


그걸 바로 사도 요한이 그걸 요구하는 거에요. 이 세상 작살내게 해달라고. 그 증거가 있어야 되니까. 귀신들로 하여금 자기 패거리 지옥 갈 인간들 마음대로 유린하고 마음대로 활동해서 그들 자기 사람들로 다 만들고 666 표 없는 것들은 전부 다 장사도 매매도 하지도 못하게 하는 거 있지요. 그걸 주께서는 의도적으로 그걸 가동시키는 거에요.


갇혀있는데 갇혀있는 곳에 갇혀있는 무저갱 하나 놓고 갇혀있는 유리관에 모기떼 갇혀있게 해 놓고 안 물리게 그 입구를 팍 터트리면 모기떼가 살았다 하고 유리관 내부의 세상에서 지 세상이다 하고 활개치겠지요. 활개치게 되면 유리관 그 자체를 유황불에 집어넣는 것이 이게 합당하다 이 말이죠.


왜 주께서 그렇게 해야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담겨있는 그 긍휼과 혜택이 그 효력이 어느 정도까지 효력이 있느냐를 주께서는 증거 해야 십자가의 피의 가치가 온 우주에 찬양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참 예를 드는데 자꾸 어려운 예를 들 수밖에 없어서 참 죄송한데요. 예를 들어서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있잖아요. 조수미를 잘 모르는 사람이 와가지고 조수미가 나이가 이제 60 다 되가니까 아줌마 왕년에 노래 좀 했어? 조수미가 응. 했어요.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모르고. 아줌마 노래 좀 했으면 나리 나리 개나리 한번 불러봐. 조수미 잘 모르는 사람이 나리 나리 개나리. 어후 노래 너무 잘한다. 조수미는 기가 차가지고.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아는 수준은요 나리나리 개나리 잘 부르면 노래 잘하는 걸로 하잖아요. 그러나 조수미가 독주회 하면서 자, 첫 번째 부를 노래는 나리 나리 개나리 하면 환불하라고 난리날 겁니다. 그러면 뭘 불러줘야 돼요? 랄랄라랄라라~~ 이걸 불러야죠. 오페라. 마술피리 오페라를 불러줘야지요. 이거는 아무도 못하니까.


악마를 지옥 불에 보낸다? 나쁜 짓했다 그 정도가 아니에요. 온 세계를 전부 다 점령해야 돼요. 온 세계 이 세상 끝까지 전부 다 점령을 해줘야 돼요. 그래야 지옥 불에 들어갈 지옥 불에 처단할 수 있는 그 정당성이 확보하고 그리고 거기서 구원받는 그 위력이 오직 하나님 자기 피를 흘려야 된다는 십자가, 찌른 자도 볼 것이요.


자기 십자가 찔린 그 효력을 보기 위해서라도 너무나 그게 대비가 되고 대조가 되는 어떤 누구도 빠져 나오지 못하는 귀신, 악마로 인하여 완전히 갇혀버린 세상. 어떤 것도 세상에 선한 것 하나도 없다 라고 그것이 갖춰져야 “세상에 그 가운데서 빠져나오다니” 그게 바로 십자가의 위력이고 십자가의 혜택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것이 얼마나 엄청난 감옥에서 엄청난 악마의 위세에서 주께서 도려냄을 당하고 뽑혀나왔는지 그걸 주께서는 그 쪽 일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으로 세례를 하고 그 폼 낸다고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 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다 이루었고 이제는 적용만 남아있는 그런 판국에 그 적용 대상으로 저희를 채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창세 전에 이미 예정되었기에 세례 요한처럼 주의 십자가 복음 전하라고 구원해주셨사오니 세상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를 날마다 증거케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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