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11014A슥9장8절(대재난을 앞두고)-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9장하겠습니다. 이웃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그 이웃나라를 언급하면서도 8절에 보면, 이웃나라, 이웃나라 계속 거론하시면서 8절에서는 바로 내 집에 대해서 하나님의 내 집에 대해서는 특별 관리에 나서는 겁니다. 하나님의 특별 관리는 하나님의 구원이라 할 수 있는데, 구원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심판, 심판, 심판, 계속해서 심판, 또 심판, 심판, 심판 끝에서 나타나는 거예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이렇게 심판은 됐~고 나는 그저 바로 갈래.” 이런 구원은 없습니다. 심판을 경유해줘야 돼요. 경유하고, 이 심판 받는 게 이방나라거든요. 이방나라가 심판받는 이유에 대해서 필히 아셔야 돼요. 이방나라가 심판받는 그 이유에 대해서 몰라버리면 구원이라는 것도 그냥 모른다, 라고 하는 말이 맞아요. 그냥 알지 못하는 겁니다. 이방나라가 심판 받는 이유는 뭐가 있기 때문에, 이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목적이 있어요. 자기 목표가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전부 다 무엇을 못 벗어나느냐 하면 자기 목적성에서 못 벗어난 채 행동하고 말하고 의식하고 그런 겁니다. 자기 목적이 있고, 자기 목표가 있어요. 목적과 목표가 언어상 개념이 좀 달라요. 목표라 하는 것은 골, “아~ 골인이에요.” 할 때, 골 있잖아요. 골. 목표. 이 목적이라 하는 것은 그 쪽을 향하는 지향적인 것. 의도하는 걸 목적인데, 뭐 그렇게 같이 나눌 필요 없이 그냥 같이 하면 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목적에 착 달라붙어 삽니다. 이 말은 자기 목적, 자기 희망, 희망 있는 곳에 내가 있어요. 그래서 희망이 상실되면 내가 없는 거예요. 내가 없던지 자살하던지 해야 돼요. 내가 없던지 자살해야 돼요. 그렇게 해야 돼요. 그러면 이 목적과 희망이라는 것은 목표는 어디서 제공받는가, 이 이방나라 자체가 이게 어디에 둘러쳐 있느냐 하면 자연세계에 둘러쳐있습니다. 인간이 이리 있으면 자연세계를 360도 슬라운딩 이렇게 죽 둘러보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잖아요. 눈에 보이는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있고 같은 인간들끼리 있다 말이죠. 인간들끼리. 여기서 인간은 여기서 뭘 찾느냐 하면 자기의 이상향을 찾아내요. 내가 찾고자 하는 나의 이상형. 인간은 자기가 이리 있잖아요. 자기가 있지요. 그러면 항상 무슨 칸을 비워놓느냐 하면, 나는 저렇게 되고 싶고 하는 요 칸을 항상 비워놔요. 비워놓고 7살 때, 8살 때, 9살 때, 10살 때 되면 요 빈칸에 수시로 여기에 들락 달락 새로운 이상형 자아상으로 계속해서 교체가 되면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평생을. 나이 80먹은 사람들을 젊은 사람들이 보면, ‘나이 80이나 먹었기 때문에 이젠 인생 다 정리하고 아무 희망 없이 그냥 뒷방 어른으로 그냥 살 거야.’ 라고 생각하는데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 80넘어도 이순제가 드라마에 나오고 80넘고 연기하고 양복입고 나오면 “그래, 80도 내 인생은 저래야 돼!”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살 이유가 생겨버린 거예요. 나이 90돼도 마찬가지에요. “그래, 내 나이 이리되어도 늦지 않았어. 나도 전국노래자랑 사회 볼 수 있어. 송해 다음에 내가 사회 볼 거야.” 이런 거. 사람은 계속 이 자리를 비워놔요. 이 자리는 어디서 왔느냐 하면 자기를 둘러싼 자연세계 속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딱 편집해 가지고 이 자리에다가 항상 꽉꽉 채워 넣는 겁니다. 왜, 희망이 있어야 살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희망이 있어야. 그래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인간은 자기의 희망과 목적은 지금 이야기한 이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세상에서 왔거든요. 세상에서 온 거예요. 요한일서2장에 나오는 것은 세상에서 온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기로 작심한 거예요. 어쨌든 간에 사람은 하나님이 좋아하든 말든 그건 관계없고 내가 세상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각종 좋은 그 목적과 희망에 짝! 달라붙어 있어요. 나라는 게. 붙어가지고 사람들이 내 얘기한다는 게 내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짝 달라붙은 나의 이상형, 나는 이런 것을 꿈꾸고 있어. 라는 그 이야기를 가정주부 같으면 전화기 붙들고 2시간동안 이야기하는 거예요. 낮에. 계속 자기 이야기는 아니고, 내가 되고 싶은 이야기를 짝 달라붙어서 계속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듣는 쪽은 그걸 참조하지요. 나도 저렇게 사회 패턴을 바꿔 봐. 괜찮지. 괜찮지. 괜찮지. 이리 하거든요. 이리 살면 괜찮지. 커피 이리 먹으니까 멋있다. 너도 그 커피 바꿔 봐. 괜찮지. 괜찮지. 어? 괜찮네. 그 이야기로 벌써 전화 2시간 반 지났어요. 그 이야기하는데. 핵심은 아무것도 아닌데. 그 이야기한다고 온 자식이야기 다하다가 2시간 반 다 지나간 거예요. 아파트 인테리어 어떻게 한다고 그 이야기하다 다 보낸 거예요. 자기 목적성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냐 하면, 이게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이게. 이방나라에게 심판이 주어졌다고 했을 때에 그 심판의 이유를 모르게 되게 되면 우리가 말하는 이 구원이라는 것도 모르게 돼요. 왜냐하면 이방나라 심판을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남의 이야기 들을 거 없어. 나만 구원 받으면 되잖아.” 라고 심판이 가버리면 이 구원받는다는 이 모습이 평소에 내가 잘되기 위한 나의 이상향 중에 하나의 요소가 되어버려요. 나의 목표가 되고 나의 목적이 된다고요. 그래서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나 교회에서 항상 교인들 만나게 되면 “목사님, 저 어떻게 구원 받아요?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개인구원이거든요. 교회에서는 얼씨구나 해서 잘 걸렸다 해가지고 개인구원 방법이야기해가지고 낚아채고. “어떻게 나는 구원받습니까? 어떻게 나는 천국 갑니까? 영생 얻습니까?” 그 질문은 이미 이방민족이 했던 질문이에요. 이방민족이. 방법을 알려달라는 거예요. 방법을. 내 간절한 소망은 주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그것인데 방법을 몰라서 내가 안타가운데 그 방법을 알려주신다면 다이아몬드라도 빼어드리겠습니다. 하는 그런 식으로 그리 나오는 거예요. 자기 목적과 자기 희망을 갖고 있는 짝 달라붙어있는 내가 이제는 세상 것뿐만 아니고 세상 것 위에 있다는 하늘나라까지 탐을 내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마귀가 아담보고 선악과 따먹어! 따먹어! 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런데 하늘나라는 어떤 나라냐 하면, “하늘나라는 오면 죽인다.” 하는 나라에요. 창세기3장에.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뭐한다? 죽으리라 했잖아요. 생명나무가 인간하고 격리가 되고 말았어요. 쫓아냈다 말이죠. 쫓아내고 못 오도록 파수꾼을 불검 가진 천사로 가로막았다는 말은 “니 하늘나라 탐내면 내가 죽여 버린다.” 이거예요. 기존교회에서는 죽여 버린다는 이야기는 빼지요. 그걸 상품화시켰어요. 상품화.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방나라부터 차근차근하게 다 심판하고 조지고 다 저주하는데 이게 바로 9장1절에서 7절까지 그 이야기입니다. 아까 얼른 읽어보셨지요. 그렇게 하나, 하나씩 다 심판함으로 말미암아 그 심판하는 이유에 대해서 제가 방금 알려드렸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서 거기에 탐을 냄으로서 인간은 인간 속에 있는 욕망은 자체적으로 한계가 형성되어버렸어요. 내가 원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중에 하나, 또는 여럿이라고 굳히고 들어가는 겁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에 자발적으로 농락당한 대상이 되어버렸어요. 눈에 보이는 것.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 가지면 나는 만족해 라는 게 안돼요. 내가 전에 몰랐던 새로운 신상, 신상은 신제품을 신상이라고 해요. 신상이 나왔을 때 새로운 욕망은 자극받습니다. 전에는 교회 나올 때, “천부여, 손들고 나옵니다. 천국만 보내주신다면 내가 이 교회에서 허드렛일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했다가 좀 한 6개월 갈 것도 없어요. 1개월 2개월 다녀보게 되면, ‘저 사람들은 나보다 앞서온 집사님인데 천국도 건지고 명품 샤넬도 건지고 이게 다 되네. 아~ 이게 다 되는구나!’ 연예인들이 지옥 생활하다가 하나님의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알고 은혜를 받아가지고 이제는 주를 위해서 오직 찬송가만 부르겠습니다, 하다가 한 6개월 보니까 예수 믿는 천국 가는 형제도 찬송가만 부르겠습니다가 아니라, ‘야~~ 이건 트로트도 되네.’ 가수하다가 목사님 돼도 방송에 나가 트로트 부르네. 이리 되거든요. ‘야, 이거 구애받을 필요 없구나!’ 새로운 목표가 또 생겨버리는 거예요. 목표가. 천당 가는 걸로 이걸로서 족합니다. 더는 내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노래에 나오잖아요. 내 일은 나는 몰라요. 이렇게 하면서 그렇게 은혜를 받다가 나중에는 내 일을 알아야 되겠어. 왜냐하면 우리교회 장로님이 소개해가지고 좋은 땅 나왔다 해가지고 평신도보고 한 이천만 보태라 하면 이자 5%준다 해놨기 때문에 이건 오늘저녁에 재림하시면 안돼요. 왜냐 하면 지금 땅값이 올라야 하거든. 그래서 내일 일을 알아야 되겠어. 내일 일을. 내일 일은 몰라요. 아니라 내일 일은 알아야 되겠어. 이제는. 그런데 그 장로가 사기꾼이라서 지 뿐만 아니고 교인들 스물댓명 믿게 해놓고는 몇 억 해먹고 도망갔다. 도망가가지고 그 장로 다른 교회 등록해가지고 또 사기쳐먹는다 할 때, 아이고! 아니고! 또 이러고 있다 말이죠. “주여, 어찌 저에게 이런 환란을 주십니까?” 주님께서 “니 자체가 환란이다.”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을 끌어당겼잖아요. 주님은 주님이 계신 곳에 우리는 갈 수가 없어요. 죽여 버려요.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고 성경을 백독을 봤다하는데 무슨 어떤 입장에서 성경을 봤는지 나라는 인간은 멀쩡하게 있고, 거기다가 밥 하나 추가요! 하는 것처럼 예수님 하나 추가할 수 있다는 그 발상 도대체 누구한테 어디서 보이스피싱을 당했는지. 이건 말도 아니거든요. 이방인의 심판을 경유하지 않고 이렇게 구원을 탐내버리면 이것 노리는 사람들이 한국교회에 순도 99.999%입니다. 전부다 이거 노리고 목회하는 거예요. 천당 가는 비결 4가지. 성령 받는 비결 이런 거.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비결. 비법. 우리교회에만 있습니다. 이런 거. 우리교회 오면 여러분들은 진리를 알아서 여러분들이 당신보다 먼저가신 여러분의 어머니 권사님 가신 나라에 여러분들이 합류할 수 있습니다. 먼저 5년 전에 죽었던 남편이 천당 가있는데, 천당에 같이 당신도 같이 천국 따라 갈 수 있습니다. 이리 한다고요. 그렇게 남편을 사랑하는데 천국 가서 애기아빠 만나야지요. 듣고 있는 아내가 “또 그 남자인가, 아우~ 지겹다. 이건 천국이 아니고 지옥인데. 이번 한 번 갈아봐야지. 천국 가서 딴 남자하고 살아야지. 또 그 남자인가.” 이리 되거든요. 천국은 오면 죽습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죽듯이 이미 천국은 가면 저주받게 되어있어요. 못가요. ‘천국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는 것이다.’ 내가 살아서 발견하는 게 천국이 아니고 내가 천국을 발견하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 주님에 의해서 새로 지음을 받아야 돼요. 그것 때문에 성령이 오신 겁니다. 성령께서 니 내로 새로 시작하자. 니가 이야기하는 거 다 옛사람이다. 니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희망으로 잡고 그게 삶의 보람과 의미로 몰빵했거든요. 애를 낳으면 애에다가 몰빵하고 사업하면 사업에 몰빵하고 결국에는 남편 죽고 떠나고 난 뒤에는 자기가 자기한테 몰빵해요. 인간은. 희망 없이는 못 사니까. 내가 나의 희망이에요. 인간은 두 개거든요. 이걸 어려운 말로 하면 안 되는데. 규정하는 나와 규정받는 나라고 그렇게 어려운 말을 해요. 여러분은 여러분만 알고 계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돼요. 카메라 보고 이야기하는데. 규정하는 나와, 규정받는 나. 나는 한결같지만 이 규정받는 나는 늘 변화를 추구하는 겁니다.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하다는 뜻이에요. 쉽게 말해서 정신병자라는 말이죠. 그래서 불안정하기 때문에 모든 최후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정하기 때문에 뭘 하느냐 하면 이것, 저것해요. 자꾸 이것, 저것해요. 남편이 퇴직하고 난 뒤에 아내한테 자꾸 설계도를 갖다 들이 대는 것은 지금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뜻이에요. 나 안 놀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조금 기다려주면 내가 ‘아이구, 옛날보다 더 낫네. 당신 이런 능력 있었어?’ 그러한 진짜 남편다운 남편으로 내가 턱하니 다시 거듭난 것 까지는 아니지만 다시 멀쩡하게 내가 해가지고 남편 책임 다 할 테니까 그 정도 양심은 내가 갖고 있으니까 실망스러운 남편 되지 않기 위해서 할게. 그 때 현명하고 똑똑한 아내는 이런 이야기하지요. 나한테 말하지 말고 실적을 보여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실력은 말이 아니고 딱 손에 돈 들고 와야 돼요. 이게 자본주의 사회에요. 눈에 딱 보여야 된다고요. 통장이라든지 뭐든지. 이게 되어야지 이게 안 되니까 말로 대충 때우는 거예요. 말로. 비겁한 사람. 그러니까 당신이 안정되어있으면 굳이 나한테 이야기할 필요 없는 거예요. 이야기한다는 것은 조금만 기다려 봐! 내가 아는 친구가 있는데 옛날부터 하자고 하는데 지금 재고 있다. 자꾸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서 이것, 저것 하는 거예요. “니는 그걸 왜 말을 하느냐?” “니가 나한테 위로라도 팍팍 밀어줘야 내가 박카스 먹은 것처럼 힘나가지고 힘을 내서 밖에 나가서 얼마나 일을 하잖아.” 아내가 말합니다. “내가 니 엄만가” 규정받는 나, 이 세상은 아무리 괜찮은 것을 내 것을 집어넣어서 이상형을 집어넣어서 나 이걸로서 이제는 확립했다. 나는 나답게 정립했다고 아무리 우겨도 새로운 유혹의 요소가 와버리면 또 변해요. 정신병 안 될 수가 없어요. 이거는. 그래서 이것, 저것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뭐냐, 그래서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주에 뜻이 뭡니까? 주의 뜻을 알아서 제가 맞춰드릴 테니까 제가 무엇을 해야 됩니까? 이렇게 또 간절히 새벽기도 안 나갔다가 가가지고 하는데, 주에 뜻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대재난을 앞둔 자의 사명감’ 이거에요. 재난은 나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인간은 자기 일을 위한 목표와 목적, 자기의 이상형 그게 아무리 거창하든 소박하든 관계없어요.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규정한 나의 일이에요. 나의 일이라고요.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좀 괜찮다 싶으면 딴 것으로 바꾸거든요. 마음에 들 때까지 계속 이걸 바꿔 나가는 거예요. 공부는 하기 싫지, 중학교, 고등학교 6년은 보내야 되겠지. 그런 자식들이 계속 엄마, 아빠한테 붙드는 게 뭐냐 하면 이것 배울래 저것 배울래 취미생활 바꿨다가 맨 날 이런 거예요. 그 애 그대로 나가다가는요, 그 애 나이 70가면은 60, 70될 때까지 누구 이항구 죽을 때까지 계속 지 취미생활만 목표로 살아갈 거예요. 계속 바꿀 거예요. 이거 하다가 저거 집적하다가. 절대로 들어주면 안돼요. 휴대폰 바꿔 줘. 10대 되면 자전거 바꿔 줘. 조금 있으면 20대 되면 차 바꿔 줘. 나중에 아파트 바꿔 줘. 그 가운데서 남자는 또 여자를 얼마나 바꿀까요. 직장 다니다가 6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야근 시킨다고 때려치워버리고. 또 하다가 월급이 다른 데보다 십만원이 적다고 때려치우고. 이건 뭐 지 취미생활하고 싶어 환장했고. 직장생활은 지 취미생활 못하게 하니까 이건 미치겠고. 그 버릇을 누가 들여놨어요? 부모가 다 허용을 한 거예요. 부모가. 시킨 대로 다 해줬으니까. 세상은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착각에 곱하기 착각을 해버린 거예요. 세상을 제곱 착각을.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어디서 이따위 소리는 들어가지고요. 대재난을 앞두고 난 뒤에 나의 취미, 나의 목적, 나의 희망, 이 딴 것은 대재난 속에 하나의 쓰레기 같은 거예요. 다 타버릴 쓰레기 같은 거 밖에 안 되는 거예요. 나의 소박한 나의 이상, 희망. 10년 후에 뭐가 된다? 5년 뒤에 뭐가 될게. 이런 프로젝트 계획 같은 것은 대재난 앞에서 이건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대재난이 뭐냐 하면 이 대재난 다음에 지옥이거든요. 대재난이 뭐냐 하면 모든 걸 무효로 하겠다는 거예요. 모든 걸 무효로 하는 거예요. 무효. 뭘? 눈에 보이는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은 그게 재난이라는 그 한계에 둘러쳐져 있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세상이 눈에 보이는 게 무한이라고 여겼어요. 무한. 끝이 없다고 여겼어요. 끝이 없는 게 아니고 끝이 있었어요. 지옥의 불에 포위된 상태로 마귀가 눈에 보이는 것을 계속해서 제공한 거예요. 한 번 이거 해봐라. 마음에 안 들지. 식상하지. 그럼 딴 거 해봐라. 욕망은 키워놨지. 지금 있는 형편과 처지는 지 마음에 들지 않지. 나는 멋있고 싶은 규정하고 싶은 게 있는데 실제로 멋있게 규정하고 싶은 나는 사람인데, 규정하는 나는 거울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고 방은 단칸방에 있고 세월은 자꾸 늙어가고 있고. 주위에서는 취직 안하느냐고, 시집 안가느냐고 닦달내고 환장하지요. 환장해. 이쯤해서 인생 종칠까. 끊어 버릴까. 이 이방나라를 심판하는 것은 이게 자연심판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방나라를 심판하는 거예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연이지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오는 거. 봄이면 꽃이 피고, 여름 되면 뭐 하는 거 있지요? 그거 쓰레기입니다. 자연 세계 자체가 쓰레기에요. 자연 자체가. 여기의 특징은 뭐냐 불안정, 난장판, 넝마들의 집합. 넝마주의. 그걸 쳐다보고 있는 산책자의 시선. 그냥 구경삼아 쳐다보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인간은 세상에 살면서 절대로 누구하고는 헤어져도 본인하고는 헤어지지를 못해요. 자기에서 자기를 아무리 떼어놓고 싶어도 결국은 인간은 자기가 마지막 돌아갈 자리는 자기의 규정하는 나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어떤 노래의 가사를 개사를 해봤어요. 개사. “자기가 떠나갔으나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데 왜 그리 힘들었을까. 이제 나는 알았어. 죽는 날까지 나는 나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인간은 결코 자기를 떠날 수 없어요. 이런 노래도 있어요. 늦은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 꺼져가는 불빛을 바라보면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취한 눈, 눈 크게 뜨고 바라보면서 반쯤 찬 술잔에 어리는 얼굴. 아~ 마시자. 한 잔의 술. 이게 바로 제가 주목하는 것은 늦은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지만 지가 지한테 술을 권하는 거예요. 친구 만나면 술값내기 아까우니까 지가 지 집에서 술 먹는 거예요. 여자는 술 대신 커피 먹겠지만. 늦은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 꺼져가는 한 밤중에 다 자고 있는데 지는 안자는 거예요. 꺼져가는 불빛을 바라보면서 지는 술하고 친구가 되어가지고 마시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러한 이방 상태를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 메시아주의 라는 것은 언젠가는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다보면 언젠가는 빛 볼 날이 올 것이다.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에요. 그냥 갈 때까지 가보는 거예요. 기약 없이. 이리 살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뭔가 기다린다는 것. 뭔가 기다렸다는 그 자체로 나는 더는 욕심내지 않겠다. 누굴 기다리는데? 나를 위한, 내가 규정한 평소에 나를 규정했잖아요. 마찬가지로 출발을 나부터 하는 거예요. 나부터 신을 규정해요. 누굴 규정해요. God. 신을 규정해요. 독일어로 하면 고도. 결국 고도를 기다리는 연극 주제곡이에요. 그 유명한 노벨 문학상 받은 사람. 고도, 신을 기다리면서 그러니까 신은 오면 안돼요. 신이 오면 안돼요. 무조건 신은 거기 있어야 돼요. 내가 다가갈 거예요. 교회 다니던지, 십일조 하던지, 봉사하던지, 선교하던지, 신이시여! 오면 안 돼! 내가 다가가야 돼요. 왜? 그래야 그 기간이 내가 멀쩡한 사람이 되기 때문에. 내 꿈을 내가 안 놓치고 꿈을 놓치지 않는 한 나는 내가 꿈꾸는 자가 있다는 그 자체로서 나는 그 자체로 나는 온전한 덩어리라고 자기 자신을 보는 겁니다. 온전한 것이라고. 바보에요. 바보. 그런데 성경은 모든 이러한 자연 속에 갇혀있는 인간이 메시아는 메시아인데 성경에서는 인간을 아주 심하게 다룹니다. 왜냐하면 메시아가 와버렸어요. 이게 사단난 겁니다. 나는 내 맘에 맞는 메시아, 내 맘에 맞는 예수, 내 맘에 맞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진짜 주님이 오셔버렸어요. 오셔버린 거예요. 오시는데 어떻게 오시느냐,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오신 거예요. 심지어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못 알아봤어요. 12제자가. 그 열두 제자부터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면 메시아 오는 것은 날짜까지 계산하고 언제 올 것이라고 다 구약 성경 품으로 있는 게 아니다. 연구하고 있는 거예요. 연구 왜 하느냐 메시아를 영접하기 위해서 우리는 미리 준비해야 된다. 그런 마음으로 구약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해 가지고 메시아는 어디서 태어나고 어떻게 되고, 어떻게 되고, 다 안다. 라고 했는데 메시아가 막상 오니까 이건 이구동성으로 메시아 죽이고 죽이는데 찬동했고 제자들은 도망치기 바빴고 난리도 아니지요. 엉망진창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내가 나를 규정한 내가 메시아 그리고 하나님을 내가 믿기 때문에 그래요. 이 믿음이 문제에요. 내가 믿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갖고 있는 믿음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분을 보내신 거예요. 니 믿음에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니가 믿는 것은 너의 이상향으로서 조작된 조성된 가짜 예수, 가짜 하나님이다. 나 자신의 욕망과 희망을 들어줄 그걸 충족시킬 메시아를 인간은 믿음의 내용으로 자기 자신이 규정을 한 겁니다. 믿음은 내가 믿는 믿음이 아니고 오시는 분이 내 믿음 끄집어내고 예수님 자신이 아버지를 믿는 믿음으로 이게 밧데리 교체하듯이 바꿔줄 때 그게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인간이 제일 아픈 게 뭐냐 하면 자기의 믿음이 빠져나올 때 성령은 밧데리 빼내려고 하고 우리는 밧데리 기존의 살던 내 방식을 마이 웨이 내 방식을 안 빼앗기려고 할 때 그 때 그게 그렇게 아파요. 왜냐하면 그게 나의 희망이었고 나의 소망이었거든요. 어떻게 내가 나에 대해서 늘 좋게 보고 살아왔는데 잘 될 거야, 내가 나를 격려했잖아요. 내가 나에게 연민을 주었고 내가 나에게 위로를 줬는데 그 내가 나에게서 뽑혀져 나갈 때 얼마나 아프겠어요. 희망이 없고, 희망이 절망이 되고 낙관이 참담함이 될 때 그게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믿음 교체할 때 그렇게 아파요. 이빨도 앞니 빼는 것도 아프지만, 어금니 통째로 빼보세요. 그것도 치과의사가 기술이 없어가지고 마취를 덜해가지고 안 아파야 되는데 그냥 마취 덜 취했는지도 모르고, 했는지도 모르고, 빼버릴 때 혼이 나갑니다. 제가 경험자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주님이 오실 때 뭘 몰랐느냐 하면, 나한테 가장 나를 아프게 한 것이 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그동안 몰랐어요. 마귀가 자기의 친구인 줄 알았지요. 마귀와 결별해야 될 건데, 내가 마귀하고 결별하기 싫어요. 왜? 날마다 희망을 주니까. 주님께서 이놈의 마귀야 나가라! 하는데 내가 아군과 적군도 분간을 못하게 왜 그 좋은 나를 그냥 가만히 두시지 복이나 주시지 왜 그걸 아픈 이빨 빼듯이 빼십니까? 하고 발악하듯이 달려드는 거예요. 발길질 하니까 아픈 것은 주님이 아파. 주님은 강제로 빼내고 우리는 안 빼앗기려고 주님께 발길질하고. 내가 이런 예수 믿는가 봐라. 그걸 조선말로 겁박. 나 이 교회 안 다닐 거야. 주님을 아예 협박을 해요. 이러려면 하나님과 관계를 끊겠어. 헌금한 거 다 돌려줘! 창조라는 게 그런 거예요. 창조라는 게 안 아프고 창조되는 법이 없습니다. 창조라는 게. 안 아프고 창조라는 게 없습니다. 왜냐, 이미 쓰레기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께서는 자기 백성 찾아올 때는 이 대재난 있잖아요. 이방인들에게 하는 이 대재난을 우리한테 그대로 실습시킵니다. 실습시켜요. 언젠가 그런 예를 들었는데 내과 의사가 수면 내시경도 있지만 그냥 생 속으로 내시경 하는 거 있거든요. 그걸 환자가 마취제 없이 하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의과대학에서 실습시키기 위해서 교수가 의과대학에서 학생들한테 생 속으로 내시경을 다 시켜버려요. 이 정도로 아프다는 거. 이방인들이 당하는 그 마지막의 재난, 이방인들은 자꾸 도망치는데 그 재난을 성도에게 생 속으로 그대로 성령께서는 앞뒤 안 가리고 까불지 마! 가만히 있어! 딱 쥐고 그냥 집어넣어버려요. 생 속으로. 평생 동안 일궈왔던 나의 희망과 나의 목적, 목표가 도리어 나로 하여금 넓은 길, 절망의 길, 지옥의 길에 저주의 길로 몰아넣는 괴물이었다는 거예요. 브루트스. 괴물이었다는 것을 그것을 알려주는데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 어금니 뽑아낼 때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도 다 뽑혀 나옵니다. 쓸데없는 믿음하고 있네. 믿음 뽑아가면요, 우리는 또 이런 식으로 또 공부했다고 반항해요.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요. 나는 그게 진짜인줄 알고 믿었지요. 그래? 니 믿음이 뽑히는 것이 믿음이야. 니 믿음이 뽑히는 게 믿음이야. 어디서 들은 구석은 있어가지고. 왜 그렇게 어려운 힘든 이것을 성도에게 주느냐, 그게 간격 문제이기 때문에 그래요. 간격. 다른 말로 하면 거리. 공간 문제. 어차피 성도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돼요.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나라에 함께 산다는 뜻이고, 예수님은 이 땅에서 직사게 고생하신 분이에요. 그 고생한 것을 모르게 되면 예수님께 천국가도 고마워할 근거가 없어져요. 당신은 우리를 위해서 뭘 한 게 있어? 이런 식으로 시큰둥하게 나올 수 있어요. 정말 주님 아니면 안 됐습니다,를 알려면 우리로 하여금 탕자의 경험, 집 나간 경험, 그리고 유명한 거 여러분이 좋아하는 거 있잖아요. 불의한 청지기. 그거 되게 좋아하데요. 불의한 청지기, 그 경험을 하는 거예요. 죄 짓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나 본능이 뭐냐 하면 살아야 되니까 “하나님, 이 참에 눈 한 번 질끈 감아주세요.” 지 할 거 다 하는 거예요. 그게 불의한 청지기에요. 하나님 잘 믿을 테니까 내가 잘 될 때 헌금 듬뿍 할 테니까 요번 일만 질끈 감아주시면 그 다음부터는 3배 4배 착한 일로 그 악한 일한 거 다 만회해 드리겠습니다. 그 정도 양심은 저한테 있습니다. 이런 거 있잖아요. 주님께서 불의한 청지기 예를 들면서 바로 그 사람이 사실은 모든 천국 백성의 공통점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불의한 청지기. 비겁한 변명과 변명으로 일관하는 그 불의한 청지기. 돈의 유혹에서 못 벗어난, 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 이건 여러분이 상상도 못했지요. 적어도 “돈 저리 가! 나는 주님만 섬길 거야.” 이런 사람만 천국 가는 줄 알았지롱. 바로 나는 돈은 모르고 오직 주님만 안다는 그 썩은 어금니를 빼내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나름대로의 자아가 유지되면요, 괜찮은 자아가 유지되면 천국을 자꾸 발견하려해요. 지식으로 신학지식으로 성경지식으로 발견하려해요. 그리고 나한테 손대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알아서 하나님한테 잘해드릴테니까 내 몸은 지금껏 내가 알아서 했으니까 손대지 말라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강아지가 집 나가는 게 지 탓입니까? 주인 탓이지요. 그렇지요. 인간은 본인이 강아지인 줄 몰라요. 지는 잔다고 하지만 지는 벌써 집 나가 있어요. 주인이 어떻게 하겠어요? 강제조치 해야 돼요. 이게 마태복음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니가 백날 까불고 잘한다 못한다 백날 그거 때문에 울고불고 해도 너는 내 강아지야. 강아지라고 제가 순화했지만, 사실은 개라고 되어있지만. 좋게 넘어갑시다. 그냥 주님의 강아지에요. 주님의 강아지는 강아지의 사료부터 해가지고 모든 운명과 팔자는 강아지 본인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평소 우리의 행동은 뭡니까? 나의 규정은 누가 한다? 내가 하잖아요. 내가. 그러니까 이 썩어빠진 어금니를 주께서 가만 둘리가 없지요. 뽑아내는 거예요. 뽑아낼 때 주어지는 거 아까 잠깐 언급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사명감입니다. 사명감. 무슨 사명감? 지옥이 오고 있다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명감. 그거 하나로 게임오버. 게임 끝났어요. 게임 끝났습니다.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이 전에 내가 알던 이 세상에 사람으로서 출세 성공하고 싶은 나로의 입장에서는 “아! 이건 잘됐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다. 이건 하나님의 감사다.” 백날 하던 백날 무슨 소리해도 주께서는 어어어어. 안 들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어어어 안 들어요. 왜냐하면 그건 자기 존재를 자기가 쥐고 있는 것이지 사명감이 아니거든요. 대재난. 지옥이 있다는 그 엄청난 자연세계 인간들이 보고 있는 한계, 자연세계 그 자체를 불 질러 버리는 그 날이 오는 그 대재앙에 모든 게 일거에 참화되는 그 순간이 올 때에 나라는 존재 자체도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무의미한 거예요. 이 무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존재성은 무게는 영그램이에요. 새털보다 더 가벼워요. 이게 사명감이에요. 내가 살고 싶어 사는 게 아니고 지옥이 있다는 걸 외치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이 시대에 이 공간에 이 시간대에 그냥 하나님께서 계속 사명자로 살려주는 겁니다. 사명자이기 때문에 자기가 해야 될 일은 대재난과 거기서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십자가로 대신 죽으시는 그 이야기. 그 이야기만 새로운 나의 내 자아에 중심이 된 거예요. 그 중심이 내 자아에 박혀있게 된 거예요. 그럼 나머지는 뭐 취직하고 잘 먹고 잘살고 어떻게 하고 애 공부 잘하고 이건 뭐냐 하면 부스러기입니다. 부스러기. 여분의 것, 나머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은 그런 것들이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것을 주어지기 위해서 그런 것들을 옆에다가 붙여주신 거예요.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런 일이 심각하지 않다는 것을. 지옥 불이 들이닥치는 그 사태 앞에서 나의 어떤 고민거리 같은 것은 이건 고민거리조차도 안돼요. 그것 때문에 내 심상이 상한다든지 내가 고민이 된다든지 잠 못 이룬다든지 그런 부질없는 짓 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내 일이 아니고 대 재난이 오고 마지막에 심판이 오고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로 구원받는다는 엄청난 하나님의 관심사와 비교하면서 이건 그동안 내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비교하면서 큰 것을 큰 것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그냥 같이 부스러기로 붙여놓은 거예요. 식당에서 밥 먹을 때 밥풀이 자기 바지에 묻었다. 식당 주인이 붙인 게 아니고 지가 밥 먹다가 칠칠맞아가지고 나이가 많아가지고 손이 마구 떨려가지고 지 맘대로 안 되니까 떨어진 거예요. 그 하나 떨어진 것 때문에 “나, 밥 안 먹어. 밥 맛 없어. 내가 이 정도로 내가 노망했는줄 몰랐다.” 이러지 마시고 밥만 참 맛있더라. 하면 끝날 문제에요. 툭 던져버리면 되잖아요. 이 지옥에서 면제된 것. 지옥이 있다는 걸 알려주는 사명감을 받고 사명 받은 자는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거든요. 예수님의 안목이니까. 예수님 안목만 참 맛있더라. 하면 끝날 문제에요. 나머지 문제는 중요하지도 않는 오히려 안 중요하다고 여기기 위해서 갖다 붙여놓은 일이에요. 이 점을 제가 어렵게 하겠습니다. 참, 어려운데요. 면적은 선이 되고 선은 점이 된다. 면적 space. wide space. 넓은 스페이스 우리는 항상 자아를 내가 여기 있고 내가 평생 벌려놓고 모아놓은 이 모든 것들을 면적으로 여기면서 버텨나가는 거예요. 면적으로. 실제로 하나의 개인 평수가 50평, 60평 면적이 있잖아요. 주님께서는 이 면적을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뭐로 바꾸느냐 하면 선으로 바꿔요. 선으로 바꾸면 이건 흔적이고, 자취입니다. 이리 설명하면 잘 안되니까 예를 들겠어요. 볼펜의 잉크의 양은 어떻게 측정하는가, 몇그램 들어왔다. 이렇게 측정할 수 있지만. 회사는 이렇게 합니다. 이거 50m 쓸 수 있습니다. 요거 100m 쓸 수 있습니다. 50m 얼마 안 되는 거 같지요. 볼펜으로 죽 선으로 그어보세요. 50m가도 볼펜 잉크 많이들은 거예요. 100m가면 이건 정말 일제도 그리 안 될 거예요. 면적을 양을 뭐로 표현한다? 선으로 표현해요. 그런데 선은 조사를 해보면 선은 이어진 게 아니고 딱 딱 끊어졌어요. 끊어지니까 한 선, 한 선이 뭐가 되느냐 하면 우리의 하루일과에요. 하루일과. 이게 점이 돼요. 포인트. 점이 돼요. 그럼 이 점은 뭐냐 선은 주님이 나를 이끄시는 흔적이고 자취니까 나의 자취가 아니고 주님이 나를 이끄신 자취. 주님이 나한테 관여했던 흔적으로서의 선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인생을 자랑질하면 안돼요. 이건 주님의 인생이지 내 인생이 아니에요. 나는 다만 하루, 하루 포인트 점에 불과한데, 이 점들을 모아서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이끄셨다는 것을 선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성도의 인생이지요. 성도의 가는 길입니다. 하루, 하루 딱 딱 끊어졌어요. 끊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자부하느냐, 어떤 설거지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선으로 생각해가지고 지금 저녁 먹었지. 평소에 패턴대로 설거지하고 그 다음에 다른 일 하면 된다. 라고 했는데 갑자기 정전돼버렸어요. 갑자기 전기가 안 들어와서 설거지를 못하게 됐을 때 나의 목적과 이상은 요거 한 뒤에 저녁 먹고 설거지해서 마무리하고 다니려고 한다. 이게 나의 선이거든요. 이 선을 하나님께서 이걸 끊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느냐 이건 원래 저녁 먹고 설거지하는 것은 이건 내가 원래 하는 거야. 원래 하는 건 없어요. 주께서 허락이 되어야 돼요. 나는 저 계단 10개. 아이구 뭐 저거 올라 가. 아니에요. 나중에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리면 못 올라갑니다. 원래부터 나는 싱싱 날아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다만, 아직까지 관절염 되는 때가 아니 됐음에 잠시 허락한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내가 원래 건강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나에 대해서 잘못 해석한 겁니다. 이방인들은 이게 개입이 없기 때문에 주님의 언약의 개입, 하나님의 개입이 없기 때문에 항상 눈에 보이는 것을 집결해가지고 그저 내 나라, 내 조국, 내 국가, 우리끼리, 우리끼리, 맨 날 우리끼리에요. 이제 두 번째 시간에는 그 우리끼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를 가지고 그것을 작살을 내는지 왜 유대나라는 하나님이 자기 집이라 하시고 보호하시는지 그건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 |
안양20211014B슥9장8절(대재난을 앞두고)-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마지막에 포인트, 점 있다 했지요. 점의 특징은 점이니까 쓸모없는 게 아니냐 하지만 점이 되어야 되는 이유가 그 위치성 때문에 그래요. 구겨진 종이라도 쓸모없다 하지만 구겨진 종이라도 왜 그 지점에서 구겨졌는지 거기서 왜 종이의 운명을 다해야 되는지 그 위치성이 점, 포인트한테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두 번째 스가랴9장에서 이 점을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게 지중해고요. 여기에 갈릴리 호수. 그리고 여기에 사해 바다. 요 사이에 흐르는 100Km요단강. 요르단, 시리아, 터키,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요르단, 여기 현재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밑에 이집트. 이리 되어있어요. 지명을 할 때 포인트 점으로 하지요. 요 중간에 뭐냐 하면 요게 바로 유대나라에요. 유대나라.
유대나라는 무슨 나라냐 하면 다윗의 나라입니다. 제가 다윗의 나라, 유대나라라고 할 때 ‘아이구, 다윗은 훌륭하구나!’ 이리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윗은 뭐냐, 포인트 점이에요. 점은 자체적으로 위치가 중요하지 얼마나 훌륭하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겨진 종이를 던져줄 때 종이가 여기 있었구나! 이게 중요하지 그 종이가 얼마나 중요한 게 많은데. 그런 것은 따지지 마세요. 그냥 우리는 점이에요. 면적도 없고 그 위치만 나타날 표시라는 거예요.
여기에 위에 점이 시돈, 두로, 시리아 쪽에 나온 게 스가랴9장에 보면 다메섹, 하드라, 하맛 2절, 3절에 두로라 했지요. 5절에는 아스글론, 현재 팔레스타인이 아스글론, 아스글론은 제가 가봤습니다. 아스글론 위에 보면 아스돗 맨 그 근처에 있고 옆에 에글론, 같은 동네에요. 5절, 6절 나오잖아요. 이게 뭐냐 블레셋이라는 종족의 땅이에요. 이 땅이 1절부터 7절까지 보게 되면 여기서 뭐가 되느냐 하면 그들이 완전히 파멸에 이릅니다. 완전히 멸망당해요. 그게 BC330년경 여기서 어떤 사태가 일어납니다.
여기 위에 터키가 이리 있고요, 그 옆에는 그리스고 그리스 위에 마케도니아 있고, 마케도니아에 하나의 서른살 먹은 장군이 하나 등장해요. 이름이 알렉산더. 알렉산더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이 쪽 동네로 확 쓸어버립니다. 이건 다니엘에 보면 예언돼 있어요. 세 번째 짐승이에요. 어떤 제국도 자기보고 짐승이라는 말을 하지 않아요. 신의 축복된 나라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 애국가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짐승이 우리를 보호하사 이런 소리 안 나오거든요. 하나님이 보호하지 마귀가 우리를 보호해 달라 그런 소리 안하거든요. 짐승의 특징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거예요. 우리에게 대재앙, 대재난, 지옥을 말하지 않습니다.
짐승을 섬기는 신은 항상 우호적이고 희망을 줘요. 살 기쁨을, 살 이유를 제공한다고요. 끝은 없어. 끝은 없어. 니가 열심히 하기 나름이야. 열심히 할 거 같으면 끝이라고 여겼던 곳에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는 거야. 이런 거요. 사운드뮤직 보면 나와요. 주께서 피할 길을 주신다. 나와요. 이런 게 있을 때 이걸 다 점으로 보세요. 점으로. 하나의 점으로 봐요.
점은 어떤 위치를 보여주느냐 하면 바로 재난의 이유를 담고 하나의 점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이 선은 점으로 보지 않고 아까 첫 시간에 했잖아요. 인간은 자기를 점으로 보지 않고 뭐로 본다고 했습니까? 하나의 면적으로 보지요. 하나의 자기 평생에 일궈낸 나의 업적을 확 펼쳐놓은 것. 업적을. 업적을 펼쳐놓고 그것을 즐기는 거예요. 아~~ 내가 이 정도까지 이렇게 많이 일궈놨나. 자기 자아도취에 빠지는 겁니다. 아! 내가 이 정도였어. 나도 몰랐네. 이 정도로 이렇게 부자였어. 통장을 확 깔아놓고. 부동산 서류를 펼쳐놓고 내가 부동산이 이렇게 많았어. 강남에 두 채에다가 광명에도 세 채있고. 아파트도 있고 내가 이 정도로 많이 했어. 절대로 자기를 점으로 보지 않고 자기를 최후로 보지를 않습니다. 낙관적으로 봐요. 희망적으로 봐요.
그렇게 놓고 하는 이야기가 누가복음12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네 영혼아 염려하지 마라. 이 정도 재산이 있으니까 조금만 아프면 병원가면 되니까. 니가 오늘 밤에는 아마 결코 안 죽을걸.’ 이렇게 생각해요. 점이라 하는 것은 자체가 끊어져 있어요. 점이 스스로 노력한다고 선이 되지를 않습니다. 딱딱 끊어져있습니다. 그래서 이방민족이 저주 받고 심판받는다고 해서 그들이 섭섭해 하면 안돼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이 이방민족은 그림을 이리 그려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있고요, 요 둘레에 태처럼 있는 게 이방민족이에요. 이방민족은 자체적인 목적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켜준 게 아니고 이스라엘이 어떤 특수한 나라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특수하지 않는 자연적인 나라는 운명을 옆에다가 반지처럼 이렇게 주변에 깔아놓은 거예요. 사사기2장에 보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중심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렇게 편애하고 이스라엘 중심으로 하느냐, 여기에 이스라엘 속에 자기 게 들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게 들어있거든요.
여러분들이 주식에 투자할 때, 주식 투자에 관심 없을 때는 주식이 올라가든 내려가든 관계없는데 만약에 삼성전자한테 이만주를 샀다. 하게 되면 그러면 뉴스 안 봐요. 뉴스 마지막에 나오는 오늘의 주식시세. 딴 거는 안 봐요. 삼성전자 얼마나 올랐는지 언제 요걸 팔아야 되는지 다시 딴 거 하이닉스 반도체 사볼까. 맨날 그거하다 과장한테 걸려가지고 사장한테 걸려가지고 반성문 쓰고 하잖아요. 맨날 그것만 쳐다보는 거예요. 그것만. 왜? 자기가 투자한 게 있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내 눈동자 같아. 주님의 눈동자를 빼가지고 딱 심어놓은 거예요. 이스라엘을 건드리는 것은 내 눈동자를 건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점은 사실은 내용이 응축된 겁니다. 함축된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함축돼 있습니다. 그 증거가 성경에 나오는데 이사야37장35절을 제가 보겠습니다. 히스기야 때 거칠 게 없는 앗수르라는 거침없는 대군이 몰려왔어요. 이방민족입니다. 이방민족은 자기가 자기를 면적으로 봐요. 최첨단 무기를 다 동원했습니다. 물론 이쪽도 앗수르가 공격했는데 두로라는 이 도시는요, 육지에 있는 게 아니고 섬에 있기 때문에 함락이 안됐었어요. 앗수르가 와도 이쪽은 다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앗수르 이후에 바벨론이 돼도 정복하지 못했어요. 첫째짐승도 손 못 대고, 둘째 짐승도 손 못 대고, 세 번째 짐승 알렉산더가 왔을 때 싹쓸이해서 다 멸망했습니다. 그것이 기원전330년경이고요.
거기에 보게 되면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이렇게 공격했거든요. 앗수르 군대 입장에서는 자기는 많은 면적을 가졌고, 많은 평수를 가졌고, 유대나라는 에게~ 땅을 조금밖에 안 가졌거든요. 쉽게 싹쓸이하면 무너질 것 같았어요. 왜? 자기는 권세가 힘이 세고, 여기는 힘이 약하니까. 자연세계의 물리법칙은 에너지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게 되어있어요. 물도 그렇고 에너지도 마찬가지고요. 열도 마찬가지고.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잠시도 머무는 게 없어요. 파도도 그렇고. 이 세상은 평정한 게 오래 안갑니다. 항상 요동치게 되어있어요. 정권 바뀌면 KBS사장부터 잘릴 거예요. 이 세상은 고요한 게 아니에요. 계속 권세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어제 제가 수요설교때 제가 바람이라 했지요. 힘의 바람. 부지런히 부는 거예요. 1차 짐승도 2차 짐승도 그들은 교만했어요. 우리나라를 어느 나라가 건드려. 3차때 건드렸어요. 뒤에서 뒤퉁수 쳐버린 거예요. 됐냐? 이리 망한다! 그 때렸던 알렉산더 네번째 짐승한테 망합니다. 네 번째 짐승이 뭐냐 BC160년경에 나타난 로마에요. 로마제국. 로마제국이 마지막 짐승인데 로마제국은 누가 치느냐 로마제국은 칠 것도 없어요. 자체 229개가 분산돼 버렸어요. 자체적으로 다 깨졌어요. 로마제국은. 그 로마제국 치는 것은 마지막에 태산이 와 쳐버리잖아요. 하나님 나라가 와서 쳐버립니다. 어쨌든 마지막은 변함이 없다 말이죠.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리 되어있어요. 포위했는데. 그 때 대저 내가 나를 위하여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항상 재난에 끝에 왔을 때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과 모든 가능성이 사라졌을 때 그 때 구원이 빼꼼히 굴을 내밀어요. 하늘나라 간다는 것은 분명히 우리는 죽어요. 못 갑니다. 갈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못 가는 이스라엘을 데리고 갑니다. 못 들어가지만 데리고 가요. 못 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데리고 가는 거예요. 안되지. 광야에 왔는데 물 없지. 양식 없지. 원망했지. 그래도 계속 데려가요. 나중에는 요단강 못 건너가지요. 처음에는 홍해도 못 건너가요. 나중에는 홍해도 못 건너가요.
절망을 코앞에 딱 바라보게 만들어요. 이 시점에서 니가 할 수 있는 건 하라. 없나이다. 여리고성에 기생라합이 있었잖아요. 기생라합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쳐들어온다는 정탐꾼이 왔을 때 그 여리고성이 정복되기 전부터 기생 라합은 정탐꾼 두 사람한테 지가 정복당했어요. 알아서 항복한 거예요. 그게 숨겨준 거예요. 숨겨주는 것. 조국을 배신하고 그냥 숨겨준 거예요. 어차피 하나님과 함께 있는 저 나라한테는 우리는 안 된다. 깨지기 전에 깨지자. 그게 기생 라합의 믿음입니다. 나의 믿음가지고 얼중 대지 마세요. 나의 소망, 사랑, 헌신 이런 거 하지 마세요.
소망, 사랑, 뭐고 다 놓고 그냥 깨지는 거예요. 그냥. 저를 죽이려 왔군요. 그래, 죽이러 왔다. 죽여주옵소서. 끝나는 문제에요. 접수하는 겁니다. 하나의 포인트로 접수하는 거예요. 전에는 나의 면적이었던 그 우리 집이 주님이 일하시는 포인트가 점이 되는 겁니다. 이걸 결정체라 해요. 결정체. 물방울이 결정체되면 이슬이 되지요. 제가 말하는 결정체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슨 결정체냐 시간의 결정체에요. 시간의 결정체가 뭐냐 하면 최후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최후의 순간으로 포인트 점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최후의 순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우리의 힘으로 안 산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인생이 가벼워요.
아침에 밥을 먹더라도 내 실력과 내 힘과 번 돈으로 이 밥을 만든 게 아니고 주께서 허락하신 시간과 공간과 재산으로 밥을 먹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사는 게 새털보다도 더 가볍다니까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장점, 단점 같은 것이 포인트가 되면 장점, 단점이 없어요. 뭔가 내게 있어야 장점, 단점이 이런 게 있지. 내게 없는데 무슨 장점, 단점이라는 게 있겠어요. 아예 없지요. 주께서 그렇게 허락한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 그것조차도 주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주의 은혜를 가지고 단점, 장점을 논한다는 것은 주님에 대한 모독이지요.
어떤 못생긴 사람보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니 왜 그리 못생겼느냐고 닦달내는 것은 그 사람이 불가능한 것을 강요한 셈이 돼요. 상대방이 뭐라고 하겠어요. 예, 예,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이거 완전히 이주일 아닙니까.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아이구~ 잘생겨서 좋겠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못 생긴걸 견적내서 고치라는 말입니까. 수백만원 나올 건데. 타고난 걸 어떻게 하겠어요. 타고난 걸. 지는 수백만원 견적내서 고쳤다고 합시다. 결혼해서 낳은 애는 무슨 잘못이에요. 겉은 고쳤지만 DNA는 못 고치잖아요. DNA는. 다른 애가 나온다니까요. 다른 애가.
내 인생에 손대지 마세요. 명령입니다. 그냥 주는 대로 고맙다하고 사시면 되는 거예요. 그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제가 이리 또 이야기하면 “목사님, 고맙다고 하면 내 뜻대로 되어줍니까?” 고맙다는 말은 내 뜻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고맙다 하는 것이지 고맙다 소리 하면서 은근히 이 참에 내 뜻 한번 결재서류 내 볼까, 이런 노림수는 갖지 마세요. 나도 안 속는데 주님이 속을 일이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예루살렘을 지킬 때에 하나의 선으로 보이지요. 넓은 대제국인데 얼마나 이게 선처럼 느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사야37장 36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천사지요. 나와서 앗수르 진중에 십팔만오천명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시체뿐이더라. 이거 시체 된 사람 이미 죽었지만 고마워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천사가 오기 전까지는 내가 누군지를 몰랐던 거예요. 내가 규정한 나는요, 항상 늘 요동치고 있어요. 내가 규정하는 나는 지금 앗수르의 이등병이지만 아마 이 전쟁이기고 나면 아마 상병으로 진급할걸. 이거 또 요동치는 거거든요. 그러나 본인이 나는 이등병이지만 나중에 뭐하겠다는 그 자체가 시체나 나올 소리다 말이죠. 천사 앞에서 하늘의 요소, 하늘의 살던 분 앞에서 처음으로 인간은 아는 순간 죽어버렸어요. 알기 전에 다 죽어버렸지요. 십팔만오천명. 십팔만오천명 이게 두 명, 세 명이 아닙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게 이제 어려운건데요. 그들이 사는 이 세계에 개인적인 역량이나 죄가를 묻는 게 아니고 그들의 환경 자체가 죄였던 거예요.
십팔만오천명이 따로 따로 논 게 아니고 그들이 보기에는 따로 따로 놀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한 통속으로 같은 항아리 안에 들어있는 그냥 십팔만오천마리의 쥐새끼들이었어요. 그러니 이 땅에 재난이 온다는 말은 모든 인간을 같이 동급으로 취급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니 노벨상 받았으니까 빼준다. 이런 거 없어요. 니가 코로나 신약 개발했으니까 봐줄게. 이런 거 없습니다. 개인 개인 자질이 모자란다가 아니라 속해있는 환경 자체가 재난 받을 환경 속에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분수도 모르고 주제파악도 안되고 그냥 사는 거예요.
그리고 천사라는 이분들이요, 얼마나 냉혹한지요. 천사 이 분은 봐주는 게 없어요. 무정한 사람? 냉혹한 당신? 유월절 밤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맏이를 다 살해했잖아요. 제가 강의하면서 표현을 이렇게 했습니다. 사무라이가 사무라이칼 보세요. 안 베어도 기 죽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칼 있잖아요. 길죽한 칼. 회하는 칼 그 칼 아닙니다. 진짜 칼. 햇빛이 비추면 햇빛이 영롱하게 반짝 반짝 비취는 그 칼. 그 칼 가지고 아주 입도 막아버렸어요. 입을 막아가지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피 없는 집은 무조건 해가지고 칼로 그 장자를 그냥 쑤셔버렸다. 이리 보시면 돼요.
그럼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습니까? 니가 인간이야? 그럴 거 아니에요. “니가 인간이야? 어떻게 인간이 이런 잔인한 짓을 할 수가 있어?” 천사가 뭐라고 하느냐 “나한테 인간이냐고 물었습니까? 예, 제가 천사입니다.” 오늘 제목 이걸로 할까. 나는 천사입니다. 어떤 국가의 권력과 급박, 협박, 인간의 어떤 아량한 아부, 동정, 전혀 먹히지도 않는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천사가 대재난을 위해서 대기되어있습니다.
천사는 마치 기계와 같습니다. 기계한테 무슨 동정 요합니까. 마태복음13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13장39절부터 보면,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그 누구를 보내리니 천사, 마음속으로 그 앞에 냉혹한 천사, 차가운 천사를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지금 뭐 이재명, 윤석열, 홍준표만 바쁜 게 아니에요. 천사가 더 바빠요. 천사가 굉장히 바쁘다고요. 현재.
천사는요, 표 누가 찍느냐 관계없이 가라지와 알곡만 구분하면 냉혹하게 구분하면 그게 끝이에요. 이런 이야기를 제가 여러분들에게 왜 하느냐 하면 본인의 개인사는 그건 아~~무 것도 아닌 정말 고민거리조차도 안 되는 일이에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에요. 이게. 우리가 그것 때문에 고민한다는 자체가 그동안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만 자기를 규정해서 그런 거예요. 자기의 분수와 자기의 위치를 잘 몰라서 남들 사니까 그렇게 사는 줄 알고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고민은 고민대로 되고 인간은 스스로 불행하다 느껴지고 이 모든 것은 뭐냐 하면 남 따라 가서 그래요.
세상에 많은 사람들 만나고 나도 공부할 만큼 했습니다. 나도 사회 경험 많습니다. 천사 만나봤어요? 천사. 착한 천사 말고 동화책 천사 말고. 냉혹한 킬러. 킬러! 냉혹한 킬러 만나봤어요? 동정도 사정도 통하지 않는 킬러요. 여러분들이 해외여행을 가보면 경치 보러 풍경 보러 와요. 그러나 막상 여행해보면 좋은 풍경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거기서 좋은 사람 만나는 거예요. 세상에 여행 안 왔으면 당신 같은 좋은 사람 못 만났다. 풍경을 잊어버립니다. 칼스타트 동네가 얼마나 아름답다고요. 오스트리아 거기에. 그림 같은 호수. 그림 같은 호수도 좋지만 거기서 자신의 미래의 신부를 만난다. 이건 아우 생각만 해도 어지러워.
좋은 사람 만나는 거예요. 여행은 풍경 보러 가는 게 아니고 좋은 사람 행여나 걸릴까봐 싶어서 아가씨들이 30대까지 돈 벌어가지고 과감히 사표내가지고 배낭 매고 어디 가느냐, 못사는 나라 택도 없어요. 아프가니스탄 안 가요. 어디 가느냐 이태리 피자 먹으러 가고 파스타 먹으러 이태리까지 가나. 그게 아니고 이태리 가면 멋있는 남자들 만나러. 이태리 남부에 소렌토로 오라. 노래 있잖아요. 그 알마피 해변가 이런데. 그런데 동영상 많이 나와 있잖아요. 한국의 아가씨들, 일본의 아가씨들, 거기 배낭매고 전부 다 휴가내서 다 와요. 남자들 만나러 왔다가 여자들 만나고 한국사람 만나고 가요.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을 할 때 이방나라를 둘러쳤을 때 둘 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이 있습니다. 앗수르 이 군대가 감사해야 돼요. 여호와한테 감사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 비로소 그들은 천사를 만나서 몰살당한 거예요. 진즉에 인간은 죽어 마땅한 거였습니다. 십자가를 만난다는 말이 그 뜻이에요. 십자가 아는 건 소용없어요. 십자가를 따로 만났을 때에 “아이구, 뭐 진작에 죽어 없어지지 뭐.” 이게 아니고 십자가는 죽어 없어지는 게 아니고 너는 죄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예요. 니는 니가 사는 모든 환경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저주받아야 될 환경 속에 니는 못 빠져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죽어라, 가 아니라 빠져나왔다는 이야기에요. 십자가는. 빠져나와야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요. 빠져나올 때 이게 십자가 믿는 거예요. 빠져나오고 난 뒤에 자기 자신이 죽을 저주받을 죽을 죄인인 것을 아는 그 것. 그 가운데 십자가 작용합니다. 그 십자가 언약의 완성이거든요.
자, 여기에 보면 아까 이사야37장35절에 보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이걸 지킨다는 것은 이 다윗을 위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사실은 다윗 언약을 위해서. 다윗에게 하나님이 주신 게 있습니다. 다윗언약을 줬어요. 이 다윗 언약이 뭐냐, 이걸 설명하겠습니다. 다윗언약은 여기 스가랴에서 성전입니다. 스가랴는 처음부터 1장부터 성전지어라 이야기가 나왔어요. 성전입니다. 성전은 이게 집이에요. 누구 집이냐 하면 오늘 스가랴9장8절의 말씀처럼 이건 내 집이에요. 내 집.
내 집이니까 하나님의 집이니까 하나님이 지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집을 하나님이 지켜요. 그러면 생각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을 지키면 잘 지켜야지 왜 나중에 앗수르 그 다음에 나온 나라가 첫째 짐승이 바벨론 짐승이거든요. 짐승이라는 말은 앗수르는 왜 짐승이 아니고, 왜 바벨론이 짐승이냐, 짐승이라 할 때는요, 인간의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전체를 다 지배하는 속성을 가질 때 짐승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 세상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이 땅에서 올라오지 않아요. 어디서 올라오느냐, 이 땅을 둘러 싼 바다에서 올라와요. 바다에서 네 종류의 짐승이 연달아 올라오는 겁니다. 바벨론, 그 다음에 현재 페르사, 바사, 세 번째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더대왕 헬라 현재 그리스. 네 번째는 로마. 이 짐승이 계속 올라오는 겁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동안 이 땅에는 왜 못 올라왔는가, 이 땅에는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못 올라오는 겁니다. 손대지 마! 바다야, 그걸로 해변으로 스톱! 바다 것으로 바다의 속성으로 땅을 접수하지 마! 땅을 점령하지 마! 그런데 왜 네 번째부터는 점령하라고 했는가, 요 성전이 요 땅에 있다가 예루살렘 땅에 있다가 이것이 악마한테 허락하고요, 이 성전은 보따리 싸고 하나님의 집이 위로 올라가요. 올라가서 만든 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 그걸 아들의 나라. 아들의 나라, 천국을 요렇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을 악마한테 넘겨주는 절차가 필요해요. 그래서 죽는다는 것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빠져나오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죽는다고 빠져나오는 게 아니에요. 다윗처럼, 다윗이 죽었거든요. 다윗이 살아생전에 하나님께서 빠져나갈 요소를 다윗에게 집어넣어주고 다윗으로 하여금 죽게 했습니다. 사도행전2장을 읽어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하는 대목인데요. 29절,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다.” 이리 되어있지요. 현재 제가 예루살렘에 가보니까 다윗의 묘가 있긴 있는데 가묘에요. 다윗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냥 있다고 치고 관광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다윗이 죽은 장소를 만들어놨어요.
다윗이 죽었어요. 사람들은 어디까지 보느냐 하면, 사람들은 어린애들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에요. 사람이 죽어서 화장터에 죽어버리면 눈에 안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인생이라 하는 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게 인생이고 그게 전부 다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죽였어요. 다윗도 우리하고 똑같이 별개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31절에 보면, “미리 본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베드로가 하는 말이 “다윗이 본인보고 이야기했을까요? 다윗이 자기 말고 자기 뒤에 오는 메시아보고 이야기했을까요?” 라고 베드로가 지금 설교 듣는 청중들에게 지금 되묻고 있는 겁니다.
다윗은 죽은 거 분명한데 그럼 우리 가운데 죽었다가 되살아난 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를 지금 그 청중들에게 확인하는 거예요. 청중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 예수님은 다윗 같지 않아요.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났어요.” 라고 했지요. 바로 다윗이 예수님 오시기 전에 미리 오실 메시아를 믿고 다윗은 과감하게 죽을 수 있었습니다. 왜? 죽음이 끝이 아니니까요.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설교가. 죽는 것이 끝이 아니니까 어떻게 안 죽고 오래 살까를 그게 우리의 존재 의미가 아니라는 거예요. 살려주시는 분을 위해서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 설교를 베드로가 하고 있습니다.
죽어도 또 살려주고, 죽어도 또 살려주는 그 분, 한번만 살면 되지만. 두 번살 거 없지만. 그러면 사람들이 “그러면 다윗은 그렇게 미리 봤다 치고 그럼 우리는? 우리는 주님과 연결점이 있어야 되는데 어떻게 연결점이 있습니까?” 하니까 32절에 주님께서 여기서 뭘 보내주는가, 주님께서 로프를 보여주는 거예요. 왜? 주님은 왕이기 때문에 그래요. 옛날 왕의 시대에 노비가 이리 갈 때에 왕이 “어이!” 하면 아무것도 없어도 그 자리에 섭니까? 안 섭니까? 서지요. 그걸 보면 인간은 내 몸체로 독립되어있어요. 어떤 쇠사슬에 매여 있지 않아요. 그런데 어이! 하면 우리는 내 몸인데, 내가 행동하는데 가면되는데 어이! 하면, 예, 마마! 이러고 있다 말이죠. 이게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에 얽매여 있는 거예요.
어떤 드라마에 보면 여자 노비와 자기가 끌고 가야 되는데 남자 노비가 도망을 치니까 휙~ 휙~ 해가지고 노끈가지고 휙 던져가지고 카우보이가 소몰이 하듯이 밧줄로 정확히 딱 잡아서 질질 끌고 가요. 여기 32절이 그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의 밧줄로, 그 노래 있지요.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라, 라는 노래있지요. 사랑에는 온갖 것 다 동원해요. 밧데리 동원하고. 카우보이가 소몰이 하듯이 뱅뱅 돌려가지고 우리를 성령으로 묶어버린 겁니다. 다윗이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미리 나는 죽지만 그 분이 살려준다는 것을 믿은 것처럼 똑같은 그 밧줄이 이제 성령이라는 밧줄이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 설교를 지금 하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우리의 포인트는요, 우리가 이렇게 사는 존재의 의미는 우리의 잘남과 우리가 이렇게 성실하게 인생 살아왔다. 우리 집은 그래도 밥 안 굶고 살아왔다. 지금 그 자랑하라고 사는 게 아니고 내가 생각했던 그 환경은 예수님을 추방했던 저주받았던 환경인데 우리는 거기서 못 빠져나와 있는 입장이었다. 내 잘난 체 하는데서 내가 빠져나올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걸 예루살렘 성전을 위로 데려가 버려요. 데려가니까 껍데기만 남잖아요. 이게 뭐 불로 싸질러지던지 바벨론이 와서 이걸 뭐 금을 가져가던지 은을 가져가던지 상관없어요. 진짜 보물을 빼돌려 버렸으니까 나머지는 껍데기거든요. 수백억짜리 건물이지만 타도 괜찮아요. 예배당 수백억치고 불나도 괜찮아요. 상관없어요. 주님한테는 관계없습니다. 그거 누가 불나게 했을까요? 그건 냉혹하기 짝이 없는 싸나이 중에 싸나이 천사가 그렇게 했지요. 왜? 천사는 안노니까요. 천사 놀면 혼나요. 주님한테. 부지런히 천사가 활동하는 겁니다. 빼돌리고 그 다음에 불나버리고.
그럼 이스라엘은 건져야지요.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와 한 통속이 되어있으니까. 에이 이스라엘도 불나버려라. 그래서 이스라엘도 불타 버린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시는 겁니다. 로켓의 캡슐 하나 궤도에 올려 보내기 위해서 그 비싼 돈 주고 했던 그 동체, 그 엄청난 덩치의 동체 있잖아요. 그건 발사하면서 공중에서 우주에서 다 타버리게 만들어요. 건질 것만 건지면 됐어요. 주님이 주신 자기의 밧줄, 밧줄 당기니까 어? 소 딸려오네. 이런 식으로.
어떤 옛날에 동화에 나오지요. 전래동화에. “니 왜 소 가져갔나?” 하니까 “저는 소 안 가져갔어요. 밧줄만 당겼을 뿐입니다.” 이런 왠 소인고. 밧줄만 당겼는데 보니까 소가 한 마리 와있어 가지고 소야, 나 니 안 훔쳤다. 밧줄만 당겨간다. 이랬더니만. 이게 핑계 됩니까? 이게. 주님께서 우리를 카우보이처럼 꽁꽁 묶어가지고 당기니까 거기에 걸려든 게 누굽니까? 우리에요. “니, 누구에요?” 우리 할 소리가 뭡니까? “주께서 당겼잖아요.” “어, 그렇구나!”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어요. 사랑한 이유는 단 한 가지. 용모가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한 겁니다. 그러면 라헬이 아름답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못생긴 언니가 있어줘야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 규정이 됩니다. 아~ 이건 낮 설교에서 기호와 언어학이 동원될 거예요. 차이가 져야 의미가 생겨납니다. 차이가 없는 데는 의미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방나라하고 이스라엘하고 차별을 두시는 거예요. 이방나라처럼 되면 멸망한다는 것을 이방나라의 멸망이나 이스라엘 자체의 멸망을 돕는 겁니다.
따라서 스가랴9장8절에 내 집은 못 들어온다. 할 때 그 내 집이 현재 지상에 있는 면적으로 내 집이 아니고 포인트로 된 점으로 된 그 안에 하나님의 성전을 응축해서 거기에 칩처럼 집어넣은 거예요. 그 집이 누굴까요? 요한복음2장에 그 집이 누굴까요? 힌트를 드린다면 그 집은 부셔졌다가 사흘만에 다시 세워진 집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자신의 육체를 하나님이 자기 집으로 본 거예요. 그게 기도하는 집이에요.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집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기도하는 집이에요.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가 돼요. 다른 이름은 기도가 안돼요.
다시 말해서 나는 주님의 면적, 주님의 선, 면적이 되기 위해서 주께서 나를 하나의 점이 되게 하시고 그 점, 점, 점, 점, 점들이 모여서 내 인생을 과거지사로부터 지금까지 미래까지 천국 갈 때까지 이어버린 겁니다. 이제는 그걸 점들이 주님의 자취, 흔적, 그게 성령의 일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내가 태어나서 7살 학교 갈 때 모든 일이 누구 일이냐 바로 성령께서 주님의 사랑의 밧줄의 일이었어요. 묶는 일이었어요. 세상과의 성령 없는 사람과의 차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조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여기다가 성전을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이방나라는 왜 망하느냐 하는 거예요. 이사야24장을 보겠습니다. 갑자기 이사야24장을 보는 이유가 뭐냐 이사야24장 같은 경우에 보면 많은 내용이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에 대한 저주이야기입니다. 이사야24장21절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신다.” 자,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땅에 있는 모든 제국들이 무엇과 관련되어 있느냐 하면 하늘에서 일어났던 전쟁에서 패배한 그 하늘의 용과 짐승과 악마와 관련되어있다는 겁니다.
이사야27장1절 한 번 봅시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바다의 용을 죽이신다. 땅의 원천은 땅에는 없다. 어디에 있느냐, 바다에 있다. 바다에 악마가 땅에 점령하지 못하도록 그동안 내가 봐줬는데 왜 봐줬느냐 자기백성 이스라엘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제는 이방나라와 한 통속이 되어버렸어요. 이방나라에게 물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그걸 다 떠나는 거예요. 주님이 죽으셨다는 말도 되지만 주님께서 이 땅을 떠나셨다는 말이 더 깊이 있는 뜻이 돼요. 그게 요한복음12장에 있거든요. 내가 땅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간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제자들도 그렇고 사람들이 이 사람이 무슨 아버지께로 간다. 무슨 뜻이냐? 하며 몰랐어요.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은 이곳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동네라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대재앙을 내릴 동네라는 뜻입니다.
에스겔28장2절을 봅시다.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 마음이 교만하여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도다 네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할지라도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거늘” 인자야 너는 두로 왕에게 이르기를, 아까 스가랴에 보니까 두로 나왔지요. 요걸 설명 좀 더 해드릴게요. 두로왕에게 이르기를 니가 마음이 교만하여 이르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곧 바다 가운데 앉아 있다.
두로 라는 것. 아까 섬나라라고 했지요. 섬은 아니고 약간 섬인데 알렉산더가 와가지고 치지를 못하니까 갈 수가 없어요. 마치 강화도에 인조 왕이 피신한 거처럼. 왕이 피신한 것처럼. 섬에 피신한 거예요. 그래서 알렉산더가 어떻게 하느냐 제방을 쌓았어요. “우리 멸망시켜 봐! 멸망시켜 봐!” 하니까 “니 못 갈 줄 아느냐? 가만히 있어.” 하고 제방 쌓아가지고 다리를 놓았어요. 그리고 거기서 무려 죽은 사람이 만 명이 죽고 포로 잡힌 사람이 300명이 노비 됐어요. 완전히 망해버렸어요. 그런데 그게 이미 에스겔28장에 예언돼있습니다.
자, 제가 잠깐 설명하려는 게 뭐냐, 왜 두로가 교만 하냐 이걸 설명하는 거예요. 왜 교만 하냐 하면 두로는 어떤 지하자원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어떤 땅이 넓어서 농사 짓는 것도 아닙니다. 뭘 했느냐 하면 이게 무역로에요. 지중해로 나가는 무역항입니다. 여기서부터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쪽에 전부 다 무역이 돼요. 인도에서 왔던 그 많은 물건들은요, 오늘 시간이 가더라도 이건 상식으로 아시기 바랍니다.
상품이라는 것은 상품은 뭐냐 하면 욕망 플러스 기호에요. 기호. 욕망의 형상화 된 게 상품입니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있는데요. 사용가치는 한계가 있고 중요한 것은 교환가치에요. 지가 미술에 대해서 개코도 모르면서 미술을 사지요. 왜냐하면 사놓으면 나중에 3배 4배 은행이자 몇 프로 줍니까? 신한은행1.2%주면 세금 떼고 나면 1%에요. 얼마 되지도 않아요. 하지만 이걸 어디다 하느냐 하면 비자금 은닉된 것을 고가의 화가의 그림을 사놓으면 나중에 이거 경매에 붙이면 3배, 4배 그냥 받는다 말이지요. 이걸 또 알아야 돈 벌지 모르면 맨 날 은행에 정기적금해가지고 물가상승보다 낮아가지고 손해 본 게 많아요. 하여튼 이 땅을 무시하면 못사는 동네에요.
욕망 그 형체에다가 욕망을 담은 게 상품입니다. 그래서 소문을 내는 거예요. 동양에 뭐가 있고. 인도에서 뭐가 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붕 떴어요. 왜냐 하면 사람은 사는 이유가 욕망 때문에 삽니다. 조금 밥 먹고 사는 것은 지루해요. 이건. 이건 시체인지 아닌지 구분도 안 돼. “아이, 짜증나서 못 살겠다. 어이! 무역선 보고, 야! 인도가거든 필리핀 가거든 괜찮은 물건 없어?” “있습니다.” “내가 투자할게. 투자할게. 선원들 비용 다 댈게.” “어디 뭐 사장님 돈 있습니까?” “내가 요번에 은행에 대출 냈어. 내가 아는 은행에. 나폴리 은행에 대출해가지고.” 그런 식으로 무역업을 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떼돈을 못 벌어요.
그래서 부풀려서 소문을 해가지고 백원짜리를 천원 받아도 이거 상품이 없어서 못 팔정도에요. 붕 띄우는 거예요. 이래서 돈을 번겁니다. 가진 자를 등쳐먹고 부자 된 거예요. 이걸 가지고 무슨 주의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가지고 자본주의라고 하는 겁니다. 과학자들이 힘들게 수십년 연구한 거 투자처가 와가지고 그거 내가 2억 줄게 팔아라. 이래가지고 지는 천억 받아먹는 거예요.
역시 돈이 투자가 되어야 연구를 할 게 아닙니까. 연구비 대줄게 나머지 모든 결과는 몽땅 내가 가지고 간다. 감독해줄게 연출해. 오징어를 굽던지 뭐를 하던지 개차차를 하던지 내가 해줄게. 다만 이윤은 전부다 폴리스 내가 전부다 가지고 간다. 이게 자본주의 사회에요. 하나 보면 니도 보고 다 봐요. 거기에 대한 그 아이템을 상품화시키면 엄청난 비용입니다. 이 자연세계는 인간의 욕망만 건드리면 돈이 되는데 내가 그걸 아는 이상 내가 신이다. 내가 하나님이다 말이지요.
그런데 이걸 보고 우리는 욕하면 안돼요. 내가 그리 못 되어서 환장했어. 이 남편이 못나서! 내가 세상에 남편이 욕심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내가 욕심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 못 벌어서 죄송합니다. 세상은 그들을 욕하지만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부러워하면 지는 거예요. 바로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이냐, 십자가용서의 빠져나옴이냐, 아니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냐, 그걸 대비하는 겁니다.
진정한 성공이란 실패할 수 있는 열정이 열정을 가지고 그것을 성공이라 한다고 처칠이 그런 이야기했지요. 실패를 즐기는 그것만이 진정한 성공이라고 우리는 이 땅에서 빠져나온 거예요. 그냥 빠져나오면서 밧줄로 빠져나오면서 이 세상을 제대로 대재난이 온다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그 사명감 그것으로 매사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자기 것만 챙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것으로 꽁꽁 묶였사오니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자취요, 천사의 돌보심인 줄 알고 오직 감사만 하게 하옵소서. 내 일은 주께 맡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