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10610A슥7장5절(금식)-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7장하겠습니다. 7장1절, “다리오왕 사년 구월 곧 기슬래월 사일에” 이렇게 나오면 이게 현재 우리 동네 달력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정신적으로 압력을 받습니다. 다리오왕 할 때는 이게 옛날에 이스라엘이 포로 잡혀갔던 그 나라를 페르사하는 바사 나라가 되는데, 2년에부터 이 사람이 그냥 유대인 입장에서 이 다리오왕이 누구냐 보다도 이 사람이 좋은 편이냐, 나쁘냐 그것만 생각하면 돼요. 이 사람은 좋은 편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왜냐하면 이 사람이 왕 2년에 이 사람이 통치한지 2년 만에 “너희들, 성전 지어. 지어! 가서. 우리가 성전 자금 다 대줄테니까 돈 걱정하지 말고 성전 지어. 너희 하나님 섬겨.” 라고 했으니 상당히 우호적이고 유대사회 입장에서는 좋은 사람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좋은 왕 제4년에 성전 지으라고 한 2년 뒤에 아홉째 날, 그러니까 달력이 지금하고 좀 달라요. 아홉째 날이면 우리나라 같으면 12월 달. 그 당시에는 아홉째 날, 기슬래월, 기슬래 할 때는 여러분들이 유산슬 생각하면 되겠어요. 아니면 다슬기라든지. 하여튼 다 이름이 있는데. 그 날 사일에 여호와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했다. 뚫고 들어왔다고 보면 되지요.
이스라엘 나라가 이렇게 포로 잡혀 있는데 이 나라 전체가 바사나라에 이스라엘 전체가 전부 다 바사나라에 통치하에 있어요. 오늘날 이 세상이 어떤 국가냐 상관없이 모든 것이 악마 이 세상의 신에 의해서 통치를 받는 똑같은 상황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압제당하면서 유대인에게도 하나님의 계시가 전달될 수 있구나. 그 이야기나 세상이 주님의 부활도 모르고 십자가도 모르고 오직 그건 다 차단시키고 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가르치는 이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계시가 복음이 전달될 수 있어요.
이 복음을 받은 사람에게 악마가 통치한다는 것이 그렇게 슬픈 소식이 아니고 도리어 이러한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은 끄떡 없이, 차질 없이 아무 구애받지 않고 되는구나! 하나님의 일이 실행되는구나! 하는 그 반가움. 그걸 더 느낄 수가 있습니다. 괜히 본인 신앙생활 하는데 이 세상이 불신자들이 불평한다고 해가지고 불편하다고 해서 불평하면 안돼요. 어떤 환경이든 남편이 아프다든지 어떤 환경이라도 상관없이 계시는 계시대로 아주 막힘없이 올 수가 있습니다. 덮이거든요.
덮이는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시간, 유산슬월이 아니고 기슬래월, 9월 4일 날 요새로 하면 오늘날로 하면 12월4일이지요. 12월4일 때 하나님의 계시가 이걸 뚫고 들어오는 겁니다. 이 어두움의 세계에 빛이 뚫고 들어오는 겁니다. 우리 성도가 사는 재미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만약에 예를 들게 되면 예가 좀 억지스러운 예지만, 예를 치고 억지스럽지 않은 예가 어디 있겠어요. 광주 5층짜리 건물을 철거하다가 무너질 때 마침 지나가던 그 버스에 15명인가 탔는가 그 6명 죽고 9명 다쳤잖아요. 그 15명 탄 버스가운데서 고등학교 소녀가 한 명 탔다고 칩시다. 5층짜리 잔해가 무너졌잖아요. 덮였지요. 덮였는데 그 가운데서 그 애가 뭘 듣고 있었느냐 방탄소년단 노래를 듣고 있었다. 예가 억지라 했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가 들렸을 때에 비록 잔해에 덮여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았지만, 잔해에 덮였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기가 들을 음악은 다 챙겨들었잖아요.
남들 보기에는 막 걱정돼서 어디 아프냐, 뭐 다친데 없느냐, 하는데 지는 리듬에 맞추고 있는 거예요. 세상이 무너져도 상관없어요. 5층이 아니라 115층이 넘어져도 상관없어요. 자기 집안이 다 무너져도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이 시간을 뚫었으니까. 이 시간을 뚫는 것은 묵시영역이라. 시간 뚫는 것은 묵시의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전체 강의의 흐름을 이렇게 이야기할게요.
역사부터 먼저 시작해서 그 다음에 여러분이 읽어보셨잖아요. 금식하지요. 금식을 거쳐서 어디로 가느냐 묵시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7장하고 있다 말이죠. 그럼 6장은 뭐냐 묵시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묵시에서 내려와서 묵시라는 말이 어려우면 비 역사. 역사를 초월한 거. 비 역사가 와서 역사를 거쳐서 금식을 거쳐서 묵시로. 일종의 바늘에 실을 꿰고 바늘이 쑤시는 곳마다 실이 따라 나와서 이게 하나의 노선을 형성하는 거예요. 하나의 실을 형성하되 하늘에 있는 빈 실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꼬지처럼 꿰고 빼내는 그 하나의 하늘에서 내려오는 실.
그 실에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하나님이 원래 구원코자 했던 그 자기 성도를 데려가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뭐냐 하면 역사적 인물이지요. 그냥 인간이잖아요. 인간. 인간인데 묵시의 계시를 받음으로 성도가 장차 어떻게 되느냐 하면 비역사의 세계 하늘나라의 존재가 비존재로 이것이 중간에 바뀌게 되는 겁니다. 그럼 바뀔 때 어떻게 바뀌느냐, 바로 금식을 통해서 바꿔진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오늘 강의 전체의 개관을 설명한다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 묵시라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건 뭐냐 하면 원천이지요. 원천. 원천아시지요? 목욕탕도 있지만, 원탕. 원천. 최초의 것.
자, 그러면 여기 6장을 다시 보면 6장에 눈을 본즉 네 병거가 산에서 나오더라. 첫째 병거는 붉은 말, 둘째 병거는 검은 말, 셋째 병거는 흰말, 넷째 병거는 어룽지고 건장한 말, 이렇게 되어있지요. 천사가 몇 나옵니까? 넷 나오지요. 천사의 출처가 나와 있습니다. 천사는 원천부터 나온다.
곧 다른 말로 하면 천사는 역사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역사 속에서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지어낸 게 아니고 머리에서 지어낸 게 아니고 인간의 머리에 없는 다른 세계에서 천사가 온다. 그 다른 세계에서 천사가 옴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실이 내려오는 것처럼 확정되고 특정된 요지부동, 하나님께서 이뤄야 되겠다하는 그러니까 특정된 정확하게 모든 것을 딱 함축시킨 그 뜻이 천사를 통해서 하나의 천사의 기능을 통해서 내려온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구약에 보면 이 지상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동산을 만들었는데 그 동산 자체가 분명히 지상에 만들어진 동산임에도 불구하고 그 에덴동산은 상당히 묵시적이에요. 역사 이전에 지상에 있는 가든 동산이 되는 거예요. 역사이전에. 그 에덴동산은 역사에 포함되지 않고 언제부터 역사가 되느냐 하면 에덴동산에서 뭔가 둘로 구분되지요. 쫓겨나가라 했으니까. 쫓겨나가는 분류와 남아있는 분류, 한 쪽은 생명나무가 남아있어야 될 그 영토와 선악과 따먹고 그냥 저주 받아야 되기 때문에 생명나무와 대척관계에 있는 생명나무와 같이 공존할 수 없이 분리되어야 될 그러한 영토가 추방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대지를 형성합니다.
그 때부터 시작된 게 역사에요. 역사. 시간이 있다고 역사가 되는 게 아니고 시간의 내용이 역사를 규정해야 됩니다. 그 역사에는 어떤 내용이 있느냐 바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것. 어떤 사람을 물을 때 죽을 때까지 싸우는 거죠. 이 말을 다시 하면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싸우리라. 이리 되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싸우리라. 소위 선악 편에 서서 생명나무 편과 적대 적의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생명나무 쪽을 고수하는 것과 선악체계를 고수하는 것과 정녕 싸우리라. 이리 되는 겁니다.
그 싸움 자체가 치열하고 처참하지요. 그 와중에서 인간은 죽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복수한다는 차원에서 인간은 죽게 돼요. 인간은 곱게 죽지 않습니다. 늙어죽는 게 아니고 주의 복수의 차원에서 죽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죽는 것이 아니고 죽음이 인간을 쳐버리지요. 죽음이라는 힘이 인간을 치게 되어있어요. 그게 필연적입니다. 그래서 니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니가 잠시 인간이었던 적이 있지만, 생명이 없다는 점에서 생명나무가 없다는 점에서 너는 인간이 그냥 흙이라고 나는 그렇게 불러줄게. 이름도 그렇게 지어줄게. 이흙아! 박흙, 김흙, 홍흙, 발음도 안 된다.
경주흙씨, 안동흙씨, 전부 다 흙으로 와서 흙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지요.
흙 적인 이런 요소에서 여러분들이 추가적으로 알아야 될 것은 현재는 지금 과학시대잖아요.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지혜로 인간 스스로 살겠다는 게 과학입니다. 옛날에 첫 째 학문에서는 과학과 철학이 전부 다 하나였어요. 철학이 있는데 그 안에 과학이 들어있어요. 원칙은 하나입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가 산다. 신에게 너무 의지하지 말자. 왜냐 하면 신은 운명가지고 우리를 장난치려하고 우리에게 협박 공갈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거기에 순응하지 말고 맞서서 운명아 비켜라! 우리는 이러한 재주와 지혜가 있는 줄 몰랐지. 그래서 신화에 그렇게 되어있어요.
제우스신이 “아차, 실수했구나! 누구야? 우리 가운데서 배신해가지고 인간에게 불을 준 자가 누구냐? 이리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운명은 우리보다 이기지만 운명 속에서 우리의 자의식, 자기 것은 따로 챙기겠다는 것이 인간의 지혜의 눈뜸이에요. 운명을 부정하는 게 아니고 세상만사가 신에 대해서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신이 신대로 되려면 모든 걸 알고 있어야 신이잖아요. 그걸 당신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인정해 줄게. 하지만 우리의 몫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 몫. 내가 나답게 숨 쉴 수 있는 몫은 우리가 챙겨야 되겠다. 라는 것이 헬라 철학입니다. 헬라 철학이거든요.
쉽게 말해서 성령대로 하면 이방인들의 지혜입니다. 이방인들의 특징은 신을 인정해요. 신을 인정하지만 좋게, 좋게 갑시다. 이거에요. 신을 인정하되, 내 몫도 챙겨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게 타락이야. 그게 악마와 함께 있는 거야. 이렇게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성경을 덮었고 성경을 안 보는 인간들에게는 신을 우리가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신은 우리보다 더 뛰어나고 월등하고 세상만사는 신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신의 주권에 대해서는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숨 좀 쉬자. 그것도 사람이 일을 시켜도 쉬는 시간은 있어야 될 것 아니냐.
그래서 이 이방의 철학에 보면 인간들이 자기 나름대로 살다가 마지막에는 지 죽을 때 다 됐잖아요. 어떻게 합니까? 납작 엎드려야지요. 신이시여,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이런 식으로. 실컷 지 할 것 다해놓고 이제 서서히 죽음에 가까이 오게 되면 자기 앞가림 계산하는 거예요. 갑자기 퇴직하고 난 뒤에 교회 다니고. 아프고 난 뒤에 다시 믿습니다, 이리 나오고. 이게 하나님은 제가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것은 아닌 줄 아시지요? 이런 식으로. 슬슬 아부모드로 나가지요. 아부모드. 얍삽하지요.
지 할 것 다 해놓고 이제 와서 겁난다 이거지요. 죽음 다음에 아무것도 없는 것 내가 다 알지만, 혹시 있으면 나만 손해 아니냐. 혹시 없는 줄 아는데 그냥 죽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 알지만, 혹시 불교도 이야기하고, 기독교도 이야기하고, 천주교도 이야기하니까 혹시 있으면 미리 보험 하나 들어놔야 될 거 아니겠습니까.
그거 뭐 돈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없어도 되지만 그래도 다진데 다지는 식으로 이렇게 걸쳐놓으면 마음이 안정적으로 할 수 있다, 이리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가 번창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이방종교입니다. 교회 자체가 이방종교에요. 인간들의 꼼수가 만든 거예요. 내가 나다움 그것을 성경에서 이야기해요. 그게 바로 악마의 마음인데, 세상은 악마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뭐냐 하면 출발점이 역사에서 출발하는 거예요. 악마라 하면 묵시잖아요. 역사로 출발하기 때문에 그냥 요렇게 내 하고 싶은 것도 요것도 안 됩니까? 그러면 신이 너무 무자비하잖아요. 신이 자비한 것을 제가 인정하니까 저도 자비한 그것을 인정한 것을 봐서 제가 어떠하더라도 좀 봐주소. 고마 나를 위해 살은 거.
그래서 성경에서는 우상이란 그 다음에 믿는 것. 우상이란 뭐를 목적으로 믿는 것. 신이란 믿는 것, 이리 되는 게 아니고 뭐가 안에 들어가면 우상 돼요. 나를 위하여. 예수가 되던 뭐가 되던 나를 위한 신은 전부 다 우상입니다. 나를 위한.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나를 빼버리면 교회 다닐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믿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믿는 것도 나 좋아라 믿는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고 그걸 성경에서는 마귀의 마음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악마는 자꾸 종교를 유포해요. 악마가. 허용을 한다고요. 왜? 신이 됐던 예수가 됐던 자기를 위해서 악마의 졸개가 예수 믿고 악마의 졸개가 하나님 믿으니 악마가 말릴 이유가 없어요. 백날 교회 다녀봐야 자기 이익보기 위해서 가는 건데 그 악마가 왜 말립니까. 장려하지요. 장려한다고요. 성경읽기대회 장려한다고요. 장려.
그러니 인간들이 과학의 입장에서는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하기 때문에 인간은 어떻게 보느냐, 인간을 면적과 부피로 봐요. 면적과 부피로. 이 면적과 부피라 하는 것은 면적이라 하는 것은 직사각형 생각하면 됩니다. 면적구하라. 직사각형 생각해서 구한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이런 모양이 있다면 이걸 전부 다 쪼개가지고 직사각형을 만들어요. 직사각형은 어디서 나오는가, 정사각형에서 나왔지요. 정사각형은 픽셀이에요. 한 단위, 최소단위. 이 최소 단위는 더 쪼개지지 않는 거예요. 그걸 숫자로 카운트하면 1이 돼요. 1.
인간의 과학은 1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1부터해서 1을 모아요. 1+1+1+1+1+1. 그럼 이게 뭐냐 면적이 되는 겁니다. 면적이 되는 거예요. 이걸 삼차원으로 하면 이게 최저 부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생각은 카운트, 수를 헤아림부터 시작돼요. 수를 헤아림부터. 집사님! 면적이 어떻게 됩니까? 이리 되는 거예요. 지금 몸무게 묻는 거 아닙니다. “지금 면적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을 볼 때 앞에서 보면 그냥 면적이에요. 원 면적 할 때. 이걸 어떻게 하느냐, 바깥에 있는 사각형, 내접한 사각형해가지고 이것보다는 크고 4보다는 작고. 3.14 나오는 거예요. 파이가 되는 거예요. 3.14 원과 반지름과 줄기의 관계가 3.14 파이라 하거든요.
그래서 했잖아요. 모든 인간세계에서의 모든 판단은 비례라고. 있음과 있음밖에 없기 때문에 있음과 있음 가지고 비교하고 차이를 끄집어내서 그들은 진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어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수요일날 선과 악은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자기를 일단 옳다고 생각하고 나보다 더 착하면 의가 되고, 자기는 당연히 의로 포함되고 자기보다 못하면 죄가 되고. 이게 지금 비교거든요. 비교되려면 최소단위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최소단위는 인간 본인이 최소 단위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을 볼 때에 앞에서 보면 이렇게 면적으로 보이고, 옆에서 보면 부피가 나오지요. 면적에서 더 발전하면 부피가 나오니까. 부피라 하는 것은 이게 두께가 있더라도 옆에서 보면 이게 또 직사각형. 앞에서 보면 요런 인간이 있더라도 옆에서 보면 폭이 있잖아요. 이걸 쪼개는 거예요. 쪼개면 역시 또 앞에서 직사각형, 옆에서 직사각형 계산 나오지요. 그럼 인간은 뭡니까.
자, 인간은 인간이 알고 있는 카운트의 대상이고 그리고 눈에 보이는 눈동자에 나오는 그 사진의 픽셀 작은 단위 조각으로 이렇게 그걸 시작해서 그걸 분해할 수도 있고 그걸 모아서 평할 수 있다. 이게 인간이 다가 아니라면 저 사람 얼마야? 저 사람 키가 165Cm야. 이게 인간입니까? 그런데 이건 인간이 아닌 줄 알잖아요. 165Cm짜리 바위도 있을 수 있고, 꽃도, 나무도 있는데, 그러나 인간을 볼 때는 바위나 나무를 보는 것처럼 처음부터 이렇게 눈에 보이는 대로 면적과 부피로 봐요. 그러면 인간은 뭐냐, 그게 인간이 아니라면 그럼 인간이 동물보다 식물보다 더한 게 뭐냐에요. 더 한 게. 그게 더 한 게 뭐냐, 거기서 인간들은 골치 아픈 거예요. 이게 여러 가지 의견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인간이 뭐냐.
인간이면서 인간을 몰라요. 인간이 뭔지를 몰라요. 동물, 식물에다가 뭐를 플러스해야 되는가, 옛날에는 그걸 뭘로 플러스했느냐 하면 도덕으로 했어요. 도덕으로. 옛날에. 옛날 역사에 조선시대나, 서양도 마찬가지고. 도덕에서 시작해서 근대에 와서 이게 윤리가 됩니다. 도덕이라 하는 것은 인간 속에 선악이 있는 게 도덕이고요, 윤리라 하는 것은 이게 사회적으로 나왔을 때 내 도덕도 잠시 양보하고, 사회도덕이 내 도덕보다 우월하다는 게 이게 사회윤리입니다. 남들 배려할 줄 알아야 그게 인단답지 혼자 지리산에 도 닦는 것은 인간답지 않다. 벌써 도덕에서 범주가 뭐로 확정됐습니까? 윤리로 확정됐지요.
니 혼자 천당 가겠다고 교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집안도 생각해야 되지 일요일 날 등산 가는데 니는 왜 교회 간다고 버티느냐, 이거 무슨 차원이에요? 도덕적 차원에서 너무 하지 말고 잠시 좀 쉬어가라. 이제 윤리도 잠시 해라. 이런 뜻이잖아요. 그런데 도덕과 윤리가 전부 다 공통점은 선악체계에서 나왔고요. 선악체계에서 나오는 그것은 어떤 보상이 따른다고 생각해요. 보상과 처벌. 선악이니까. 선한 자에게는 복이 오고, 나쁜 자에게는 악이 오니까. 보상과 처벌이 따른다고 보는 거예요. 보상과 처벌.
그래서 인간들은 도덕이 진리라고 보고요,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다 만찬가지에요. 도덕을 진리라고 보고 이 도덕에 근거해서 협상과 타협에 의해서 사회 윤리가 나온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이걸 진리라고 보지요. 자, 진리냐 아니냐를 테스트 점검해야 될 거 아닙니까. 착하게 살면 보상이 따라야 된다고 그렇게 우기고 싶지요. 그리고 나쁜 일 했으면 처벌이 따라야 된다고 그렇게 우기고 싶지요.
그런 처벌을 내리는 판사가 나쁜 사람이라면 그거 어떻게 할 건데요? 이 세상은 인간들이 이렇게 해서 우리는 동물, 식물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선한 사람이었습니까? 선한 사람은 동성애나 하면 마치맞지. 아니 사업하는 사람이 어떻게 선한 사람이 사업을 해요. 사업이라 하는 것은 분명히 태어날 때 가진 능력과 재산이 별 차이 없었는데 그 사람이 10년, 20년 30년 지나고 확연한 차이가 났다는 말은 결국 이건 수상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뭐 우리 집안이 부자여서, 그건 핑계고요, 집안 부자여도 망한 사람 한두 명이 아니거든요. 다른 어떤 요소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남의 것을 탐내지 아니하면 결코 기업가가 될 수가 없습니다. 사장님이 될 수 없어요. 김사장, 박사장, 산에서 맨날 듣는 사장님 될 수 없습니다. 남의 것을 탐내지 아니하면 절대로 이 세상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남의 것을 탐내는 사람은 성공하고요, 남의 것을 속으로 탐내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탐내지 않는다고 선한 사람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전부 다 그냥 변변한 집에다 퇴직해가지고 간당간당한 연금이나 타먹고 그걸로 마지막에 이 돈 가지고 어느 땅 사면되고 비트코인 할까 이런 식으로. 제대로 화끈하게 탐내면 되는데 탐내고 있으면서 탐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는 이건 나쁜 거야. 내 양심이 말해. 나쁜 거야. 그러니까 이건 죽도 밥도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정주영이나 이건희처럼 가든지 도둑질을 하든지 아니면 본인이 도둑질을 하고 싶어도 재주가 모자라 하던지 둘 중에 하나를 고백하라 말이지요. 저 놈은 도둑놈이야. 해놓고 지는 도둑놈 아니에요? 백종원의 골목식당 한 번 보세요. 정말 그건 사기꾼들 양성하는 곳이에요.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을 순간적인 맛을 가미해가지고 음식장사 하겠다는 겁니다. 그건 사기지요. 그래가지고 그 백종원한테 한 달 동안 배워가지고 개과천선하겠어요. 인간은 항상 원천으로 돌아가게 되면 크기와 면적, 소유성, 이런 걸로 되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이재룡이가 얼마나 잘생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이재룡이 돈이 재산이 얼마냐가 중요한 거예요.
이재룡이 재산이 얼마냐, 크기로 하는 거예요. 왜, 인간은 바로 카운트가 가장 기본적이거든요. 카운트가 가장 기본적이에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강의한 결론은 뭐냐, 인간은 비역사적 묵시적 존재가 될 수가 없어요. 비역사적 존재인, 묵시적 존재인 악마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아예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다른 것은 못 보게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자, 그러면 이 스가랴6장에서 천사가 내려왔다 했지요. 아까 실 이야기 기억하세요. 바늘과 실해서 묵시로 내려옵니다. 요한계시록 9장, 에덴동산에 여러분 안 가보셨지요. 저도 안 가봤습니다. 에덴동산에 가보게 되면 거기는 역사적 동산이 아니고 묵시적 동산이지요. 묵시적 동산인데, 역사 속에 만들어진 거예요. 최초로. 최초로 최후로 그게 마지막이었지요. 거기에 보면 창세기2장에 보면 에덴동산에 보면 네 개의 강이 나와요. 강의 근원이 나오고 근원이 생명나무와 선악과고요, 네 개의 강물이 거기서 나옵니다. 그 강물이 나오면서 모든 생명이 그 강물에 의해서 살도록 구조가 그런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9장에 보면 그 강 이름이 뭐냐 하면 기혼강, 이리 있는데 거기에 유브라데 강이 나와요. 요한계시록9장14절에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묵시적 존재에 있던 천사를 풀어버립니다. 풀어버려요. 그러니까 악마의 종이 되는 천사들인데,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유브라데 강이라고 표현한 그 자체는 창세기2장에 나오는 그 강을 그대로 따온 거예요. 요한계시록은 예수님 십자가 이후에 이 세상이 묵시와 역사가 혼합된 상태의 단어로 표현한 겁니다.
요한계시록 할 때 이게 참, 묵시의 표현이라고 하는 게 굉장히. 제가 역사에서 그 다음에 금식에서 그 다음에 화살표 묵시로 바뀌지요. 다른 예를 들 수가 없고요, 이 금식 같은 경우에 언어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역사에서는 있다. 없다. 이렇게 되지요. 한글로 쓰면 있다, 없다, 이리 되지요. 뭔가 있다, 없다 할 때. 금식하기 있기! 없기! 뭔가 이상하지요. 있기! 없기! 글자가 틀렸지요. 이쪽에서는.
금식이라 하는 것은 이건 없는 거예요. 없는 곳을 지나쳐야 됩니다. 없는 곳을 지나치려면 묵시에서는 묵시적인 것이 역사로 올 때는 시간이 역순돼요. 역순됩니다. 사모님 계신데, 예를 한 번 들겠습니다. 공부를 위해서 활용되니까 기분 나쁘게 생각마세요. 한 번 적어볼게요. “사모님! 담배 끊으세요.” 사모님, 담배 끊으세요.
역사에서는 그동안 담배를 죽 펴왔는데, 이제는 예수님도 끊겠다는 이 말이잖아요. 묵시에서는 뭐냐 하면 묵시에서는 이미 사모님은 담배하고 상관없는 존재로 달라졌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그게 성경에 나오는 지시와 명령의 의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우리보고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니는 할 건 하게 되고 안 할 건 안 하게 되는 존재로 묵시적 존재로 달라졌다는 겁니다. 그 달라졌다는 걸 어떻게 하느냐, 담배 끊으세요. 하는 거예요. 담배 피워본 적도 없는데 담배 끊으라는 말은 역사와 상관없는 세계가 묵시의 세계에요. 내가 하고 안하고의 원리에 적용이 안 되는 세계에요. 다들 담배 다 끊었지요.
“어? 그건 나한테 해당되는 사항이 없는데요. 그건 내가 아닌데요.” 그렇지요. 역사에서는 내 몸이 있지만, 금식을 통해서 내 몸이 죽어요. 밥을 곡기를 끊으면 죽지요. 이쪽에서는 뭐냐 하면 내 몸이 아닌 몸을 위하여 기존의 내 몸이 새로운 몸을 위하여 내 몸이 이 세상에 출생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 출생하고 그 중도에 금식을 통해서 바뀌어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지옥 가는 이유가 안 바뀌어서 가는 거예요. 안 바뀌어서. 바뀌어져야 됩니다. 내 이름으로 살다가 주의 이름으로 바꿔지는 게 있어야 돼요. 그 바뀌는 방법은 내가 담배 끊는데 있는 게 아니에요. 그 담배 끊는 것은 담배를 피울 때는 끊을 때는 전부 다 그대로 있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 말씀가지고 이 말씀이 있으니까 지킨다 해도 그걸 지켜도 지옥가고, 안 지켜도 지옥가고 하는 거예요.
지키고 안 지키고 상관없는 새로운 몸을 부여받은 사람은 바로 묵시적 존재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바늘로 들어온 그 실이라는 그 선에 내가 꼬지처럼 꽂혀야 돼요. 바늘이 나를 뚫고 들어와요. 나를 꿰어가야 돼요. 줄줄이 사탕. 그 햄 있잖아요. 동글동글한 햄 있잖아요. 줄줄이 햄처럼.
하나님께서는 진짜 이스라엘은 이 땅에 포로 된 상태로 있어야 돼요. 애굽에서 포로된 것에서 나왔잖아요. 나왔는데, 그들은 너무 일찍 해방감을 맛보았습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의 몸은 해방이라는 것을 맛보면 안돼요. 그냥 해방 맛보지 말고 이 땅에 그냥 죽어야 돼요. 금식을 통해서.
금식이라 할 때에, 금식은 나를 괴롭게 하는 것. 이게 금식입니다. 나를 괴롭게 하는 것. 죽어라 이놈아! 죽어라 이놈아! 나를 괴롭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성령의 세계에서는 금식은 어떻게 발전하느냐 금식을 할 때는 뷔페 가서 금식하는 거예요. 뷔페에 가면 이런 코너가 있어요. 허름한 뷔페. 아주 고급 뷔페 말고. 허름한 뷔페에는 LA갈비나 좋은 회 같은 것은 그냥 안 주고 줄서서 주문해야 돼요. 짬뽕 같은 것은 국물 때문에 줄서야 돼요. 그 코너에 있는 세프가 뭘 원하십니까? 금식을 원합니다. 이리 돼요. 뷔페에 가서 금식을 배우는 거예요. 음식을 가득 쟁반에 담아가지고 금식을 담는 거예요. 금식을.
나는 인간도 아니야. 나는 인간도 아니야. 드라마 같은데 보면 남편하고 싸우고 난 뒤에 아줌마가 남편 법인카드 들고 나가가지고 고급 백화점에 가가지고 들어갈 때는 빈 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는 쇼핑백 열댓 개를 손가락에 다 걸쳐가지고 랄랄랄라 랄랄라~~ 들고 나오지요. 금식입니다. 그거. 금식입니다. 금식은 성경적 정의를 내립니다. 주님의 고난에 접속 방식입니다.
주님의 고난에 접속 방식. 주님의 고난에 접속 방식인데 이게 성도한테는 이렇게 돼요. “야~~ 주님이다! 주님하고 하나 되어서 천당 가야지! 천국가야지.” 이게 아니라 주님의 고난의 자세가 뭐냐, 고난의 접속 방식이 뭐냐 하면 “감히. 제가 어떻게 주님과 접속이 되겠습니까?”하는 마음가짐이 접속돼요. 제가 감히 어떻게 주님과 한 몸이 되겠습니까? 하고 너무나 황공스럽고 떨리는 마음으로 할 때 밥맛이 딱 떨어지지요. 그게 금식이에요. 너무 좋아서 밥맛 떨어지는 거예요. 너무 좋아서.
그걸 옆에서 보면 뭐냐, 자기를 괴롭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사야58장에 보면 안식일 날은 기쁜 날이잖아요. 안식일 날. 기뻐서 금식하는 날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금식 안하면 벌 내릴까봐 내거 또 내 소유 다 하나님이 다 가지고 갈까싶어서 억지로 금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빨리 안식일 끝나가지고 다음날 가계 문 열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게 무슨 금식이겠어요.
그리고 지 딴에 그 금식할 때 얼마나 밥 안 먹는다고 힘들어했겠어요. 인간의 욕망은 한 쪽이 비면 다른 걸로 그걸 채우게 되어있다고요. 그래서 이사야58장에 보면 그들이 안식일 날 뭐하느냐 하면 금식하는 대신 뭘로 하느냐, 오락을 해요. 금식 때문에 억눌린 욕망을 오락으로 스스로 풀어주면서 다시 균형이 맞아들어 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치 군에 가기 직전에 젊은 장정이 군에 가서 고생할 걸 생각하게 되면 미리 고생하는 고생을 미리 그것을 견뎌내기 위해서 사창가에 가는 거와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 인간이 하는 금식에 대해서는 마태복음6장에 나와 있지요. 예수님께서 금식 때려치워라. 금식했다고 금식했으니까 자기가 손해 보는 느낌이잖아요. 그 손해 보는 느낌을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뭘로 보상하느냐 하면 온갖 금식했다는 티를 다내가지고 다른 사람이 “금식을 40일간 했어요?” “장하다. 대단하다.” 그 칭찬으로 그만 자기를 보상받으려고 하는 거예요.
아까 했지요. 인간의 선악체계는 뭐와 무엇이 있다? 보상체제와 처벌체제. 거기서 보상받음으로서 계속 나가 나다운 겁니다. 내가 나다운데서 사는 보람을 이유를 의미를 그들은 갖고자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꼼수부리고 아무리 요령 부려도 인간의 힘으로서는 이 역사에서 금식으로, 금식에서 묵시로 가는 이 노선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천사가 납시는 겁니다.
내려오시는 거예요. 하늘에서 범이 내려오는 게 아니고 천서가 내려오는 거예요. 그래서 천사에 의해서 내가 어떤 보상체제, 금식하면 천국 보내주는 보상주지요? 라는 그 보상체제 자체를 성립하지 않는 금식으로 신약에서는 성령으로 데려가고, 구약에서는 천사로 이스라엘 집단을 이끕니다. 진짜 금식이 되어버리면 억울함조차도 성립하지 않아요. 내 인생 뭐 이 모양 이 꼴이냐 하면, 천사가 “좀 억울해?” “정말 억울합니다. 제가 나쁜 짓도 한 적도 없는데 이런 억울함이 있습니까?” 이런 억울함 호소.
진짜 금식에 들어가 버리면 금식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야, 이거 건방지다. 이것조차도 내 인생에 대해서도 내가 탓하고, 슬프고 후회한다고 이것조차도 이건 사치다. 이건 욕심이구나!’ 알게 되지요. 자칫하면 “내 인생 물어내!” 이렇게 하거든요. 그건 원천을 몰라서 그래요. 원천. 금식은 뭐냐, 그 원천에 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좀 더 어렵게 이야기할게요. 어차피 쉬운 건 없으니까.
금식에는 뭐냐 하면 남의 것을 탐을 낼 수가 없는 게 남의 것을 탐을 내도 그걸 갖다놓을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게 금식이에요. 지금 밥 굶고 있는데요. 지금 스스로 자기가 죽으려고 하는데, 남의 걸 왜 탐을 내겠어요? 금식과 자살의 차이점은 금식은 금식하면 자기 부인이 되지만, 자기 부정이 되지만, 자살은 죽는 순간까지 이를 갈고 있어요. “보라, 세상 사람들아! 나는 너무나 그 일을 안했단 말이야. 나 억울하다는 말이야. 신문에 난 것은 다 거짓말이야. 내가 자살로서 내 이 억울함 이 사회가 안 알아주면 나 고소할거야. 응? 그 충성한 인간이 나를 여자로 생각해가지고 나를 성추행한 거 어디에 고소해도 검찰에서 알아주지도 않고 나 자살할 거야.” 그게 자살이고.
금식은 원천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내가 없으니까 집에 뭐 하나 갖다 놔도 누가 과일을 줘도 내가 없어. 먹을 입이 없어. 그래서 금식할 때는 어디서 금식하라 했습니까? 어디서 금식하라고요? 뷔페에 가서 줄서서 금식하라고요. 뷔페에 가서 줄서서. 음식을 먹는 게 아니에요. 금식을 먹는 겁니다. 또 마트에 가가지고 그냥 가지 말고 이쑤시개 긴 거 가가지고 시식코너에 가서 다 찍어요. 이것도 금식, 저것도 금식. 음식을 먹는 게 아니고 금식을 먹는 거예요. 그게 바로 금식된 자의 삶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이에요. 그런 거 없이 이건 뭐 할 만하지요.
다시 말해서 나는 내거라서 가져올 수 있는 어떤 나의 터전이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나는 원천이니까. 원천. 아무것도 없던 원천이거든요. 비어있는 자리거든요. 그게 금식이에요. 그게. 그러니까 주의 말씀은 지키기 참 쉬워요.
주께서 아까 묵시적 예를 들었는데 여러분이 한 번 이해됐는지 실험해보겠습니다. 우리보고 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니는 할 건 하게 되고 안 할 건 안 하게 되는 존재로 묵시적 존재로 달라졌다
자, 그러면 금식의 예를 하나 더 들고 첫째시간 마치겠습니다. 금식할 때 여러 가지 금식의 예가 많이 있습니다만, 요나 선지자 속에 금식이 나와요. 요나 선지자에 보게 되면 니느웨 성이 나오지요. 니느웨 성은 평소에 금식은 어제 수요설교에서처럼 극단적으로 넘어가버렸습니다. 뭐냐 하면 금식을 할 때, 인간들이나 금식하지 그 애궂은 멍멍이까지 집에 있는 소까지 금식을 다 시켰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어차피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니느웨 성을 폭발시켜버리면 인간만 죽는 게 아니고 개, 돼지, 소 가축 다 죽잖아요.
그러면 그 금식하는 상황은 어떤 상황이냐 하면 멸망을 했다고 치고 남아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에 그 상황이 그들의 현재 자기가 자기를 봐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게 본 모습이고 그게 원천이 되는 겁니다. 그게 금식이란 모습으로 등장한 겁니다. 죽기 전에 맛있는 거 다 먹자, 가 아니라 그건 아직 극단적인 행동에 넘어가기 전이고 완전히 극단적으로 해버리면 집에 있는 맛있는 라면 음식 이미 멸망한 상태에서 그걸 먹고 싶어도 먹고 죽으려고 해도 죽은 시체밖에 없기 때문에 못 먹잖아요.
그 못 먹는다는 그 상황을 자기 몸으로 표현함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이여, 지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하는 그 내용이 제가 그 말씀을 향하여 표출했는데 그 표출이 맞지요?” 라고 한 거예요. 그걸 가지고 그들이 뭐라고 하느냐, 회개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니느웨 성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미 심판을 하기 전에 그들은 자진 납세했어요. 벌써 심판을 받아버린 거예요. 금식하는 형태로. 그러니까 니느웨에게 심판할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무엇을 압축했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에 담긴 내용을 압축한 거예요. 십자가 믿나? 믿어? 그 말은 뭐냐 하면 십자가에 죽어버린 인간이 무슨 거기서 자기 의, 자기체면, 자기 자존심이 어디서 캐낼 게 있다고. 날아가 버렸는데. 십자가의 죽음이 곧 누구의 죽음이다? 나의 죽음이다. 그게 십자가 믿는 우리의 모습이지요. 그게 바로 금식의 완성입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10610B슥7장5절(금식)-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금식은 극한이라고 했습니다. 첫째시간에 한 거 다시 한 번 요약을 한다면 역사에서 시작한 인간은 바뀌지 아니하면 묵시의 세계, 천국의 세계에 갈 수가 없어요. 바뀌는 그 중간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금식을 통해서 묵시의 세계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역사라 하는 것은 스가랴에서는 역사 이전에 뭐가 있었느냐 하면 역사 이전에 묵시가 있다 했지요. 묵시를 뭐라고 했지요? 원천, 원탕. 원조. 원천이 있지요. 묵시가 역사를 만들고 역사에 태어난 역사 속에 있는 인간들이 바뀜을 통해서 바뀐 거예요. 인간 자체가 바뀜으로서 금식이 되고 금식은 바뀜을 통해서 묵시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이 묵시의 세계, 원천의 세계는 하나로 일치가 되고 본래의 뜻이 이루어지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역사에서 금식할 때 바뀌어진다, 할 때에 여기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뭐냐 하면 흉내 내기를 한 겁니다. 흉내 내기. 굶음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서 니느웨 사람들은 흉내 내기가 아니었지요. 요나에서. 그들은 무엇을 했느냐, 극단적인 조치를 실시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의 예가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심지어 가축들까지 집에 있는 개까지 음식을 안 줬어요. 식사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한다고 하니까 심판이 다 끝났을 때에 상황을 우리는 미리 넘어갔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표출해 내겠습니다. 그게 금식이었어요.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작살을 내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가 바로 금식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요나가 갔던 니느웨 성의 금식을 그대로 이스라엘 금식에다가 집어넣어버리면 이스라엘 금식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주님의 고난에, 이걸 하나 집어넣으면 좋아요. 감히 접목되는 방식이 금식이다.
주님의 고난에 감히 지저분한 우리가 감히 주님의 고난에 접목되는 거예요. 주님의 고난에. 주님의 영광에 접목되는 게 아니고 주님의 고난에 접목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고생은 어디까지나 나의 고생으로 끝나버려요. 내가 고생한다고 해서 주님의 고생이 되는 건 아닙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게 아니에요. 환란과 핍박이 온다고 해서 그게 구원의 근거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강남강의에서 여러분들이 그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잉태했을 때에, 제가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서 잉태했다는 이야기를 안했지요. 이게 아니라 했지요. 뭐였습니까? 마리아의 세계가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출한 거예요. 낳은 거예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임신해서 예수님을 배출해버리면 이건 마리아하고 성령으로 임신한 마리아하고 사적인 연결고리가 갖추어진 셈이 돼요.
사적인 연결고리가 뭐냐 하면 이게 바로 구원론이거든요. 이게 구원론. 주께서 성령으로 오셨다. 야, 성령 오셨으니까 오셔가지고 구원받았다. 구원론으로 마감이 된다 말이지요. 그러나 베드로가 성령 받고 마리아만 일하신 게 아니고 마리아의 세계 속에 들어왔잖아요. 마리아가 아니고 마리아의 세계 속에. 이 말은 개인적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모든 열의와 열망을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일체 짓밟아버려요.
성령께서 인간의 구원론을 짓밟아버립니다. 은근히 노리고 있는 그 구원자체를.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세계 곧 인간의 세계지요. 인간 세계에 오셔가지고 자기 택한 백성들을 택한 백성한테 물어보지를 않아요. 이 열두제자의 선택이, 열두제자에게 내가 너를 선택하고 싶은데 네가 올래? 말래? 이걸 물어보지를 않아요. 그냥 따라와! 끝나는 거예요. 그냥 따라와!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물러서지를 않습니다. 요한복음6장 말씀처럼. 내가 아버지의 보낸 자에게서 내가 철수 안 해요. 주님이 철수를 안 합니다.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주님께서 손을 떼고 그런 거 없어요. 왜냐 하면 사적인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에 이 성경을 사적으로 관계를 맺어서 해버리면 예수님을 믿어도 중도에 예수님을 안 믿게 되면 지옥 갑니까, 라는 질문이 생겨버려요.
그러면 이건 해답 없습니다. 내가 지금 예수 믿는데 5년 후에 내가 예수 안 믿게 되면 “목사님, 선택 받아도 창세전에 예정되어도 지옥 갑니까? 천국 갑니까?” 라고 만약에 저한테 물으면 “5년 후에 내가 예수 안 믿겠다는 것이 본인의 의사입니까? 아니면 본인이 모르는 어떤 힘의 의사입니까?” 내가 도로 물을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당신이 이야기하는 겁니까? 당신 속에 누가 이야기하는 겁니까? 라고 묻고, 이게 내가 이야기하는 것과 내 속에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과 당신이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뭐고, 그 증거는 뭐냐고 내가 되 물을 거예요.
이 말은 본인이 본인을 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본인이 알고 있는 본인은 한 번도 본인에 대해서 안 적이 없습니다. 왜? 알 필요가 없어요. 인간은 자기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만 알고 있으면 돼요. 금식이란 나의 존재의 제거에요. 그것은 이미 존재하신 분에게 접목이 되기 때문에 굳이 존재하시는 분, 주님에게만 접목된 상태에서는 내 존재에 대해서 그다지 신경 쓸 이유가 없습니다. 왜? 나한테 일어난 모든 일은 그 분의 존재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여기에 있는 박카스를 먹는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박카스를 마시게 한 거예요. “이거 내가 먹었다.” 가 아니라 “주께서 먹게 하셨잖아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베드로야,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이라 하는 것은 주님이 존재함을 증명한 게 사랑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이렇게 하지요. “주님이 존재하셔서 존재하신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잖아요. 왜 이래요? 아시면서.” “아시면서 왜 굳이 저한테 질문하시는 겁니까?” 확인하기 위해서 질문한 거죠.
내가 활동하고 내가 존재하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이 땅에 사적 관계로 살아가는 게 아니고, 내가 구원받는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게 아니고, 모든 구원론이든 뭐든 간에 예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증명하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으면 그건 구원론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여기 있으면 주님이 여기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성령께서 그걸 원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성령이 임하면 주의 증인되게 하는 겁니다. 주의 증인되기 위해서 나의 증인이고자 꼼짝거리는 것은 어제 수요설교에서 한 것처럼 성령께서 사정 두지 않고 박살냅니다. 다 부셔버려요. 아까 묵시적 표현 이야기 기억납니까? “사모님, 담배 끊으세요.” 평생 담배 냄새도 싫어하고, 담배 피운 적도 없는데, 사모님 담배 끊으세요. 이 말은 뭡니까? 그 말을 왜 하는 거예요? 그것은 주변에 담배 피우는 사람 있지요. 그 사람은 누구의 몸입니까? 아담의 몸이지요. 그럼 나는 누구의 몸입니까? 나도 아담의 몸이지요. 성질나면 한 대 피울 수 있는 가능성 있지요. 같은 아담의 몸이니까.
그런데 주께서는 담배를 안 피우게 하셨다는 말은 더 이상 내 몸이 예전의 그 아담의 몸이 아니고 주님과 접목된 새로운 몸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담배 끊으세요. 하는 거예요. 담배 피운 적도 없는데, 담배 끊으세요. 이 말은 모든 말씀은 누가 이룬다는 말입니까? 오로지 존재하시는 주님이 스스로 주님이 주님 되기 위해서 말씀이 우리를 경유하는 겁니다. 니는 있어도 없는 존재라고요. 그 있어도 없는 존재라는 그 절차에 가담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에게 뭘 이야기했어요? 안식일 날 금식하라 한 거예요. 특히 안식일의 최종적인 것은 뭐냐, 속죄일하는 거예요. 속죄일.
속죄일은 7월10일 이날에는 이 속죄일은 무슨 날이냐 하면, 내내 금식하는 겁니다. 금식. 자기를 괴롭게 하는 거예요. 두 번째 시간에 이 금식가지고 본격적으로 이야기할 거예요. 군데, 군데 압축된 논리가 나오면 그걸 제가 좀 계속 풀어드리고, 풀어드리고 하겠습니다.
자, 오늘 본문 스가랴7장 계속해봅시다. 2절에 보면, 그 때에 벧엘 사람이 올라갔다 하는데 벧엘이라 하는 것은 벧엘은 어디 있느냐, 예루살렘이 이리 있다면 서쪽과 북쪽 사이에 벧엘이 있어요. 당신은 어떻게 압니까? 내가 가 봤거든. 가보고 차타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어요. 그때 호텔이 예루살렘에 있었어요. 벧엘 갔다가 내려왔습니다. 그 벧엘에 있는 사람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온 겁니다. 지금 이 상태는 뭐냐 하면 예루살렘에는 지금 성전을 재건하는데 바쁘다 말이죠. 성전 지라 한지 2년 됐으니까 바쁘게 지금 건축 중이에요. 물어왔습니다. 뭐라고 묻느냐 하면 4절에 보면, 우리가 그동안 금식을 했는데 성전이 완공되면 완공되고 난 뒤에 굳이 금식을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그 질문하러 온 거예요.
예루살렘에는 여기 선지자들이 있으니까. 5절에 보면,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라고 하나님을 통해서 그들에게 되묻습니다. 3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있는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물어 이르되 내가 여러 해 동안 행한 대로 올라와서 울며 근신하리이까” 금식은 자기를 괴롭게 한다는 거죠. 자기를 괴롭게 하려하니까 자기 딴에 괴롭게 한 겁니다.
5월달과 7월달에 금식을 했다는데 이스라엘역사에 금식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에요. 굉장히 많아요. 5월달에 금식은 7월달에 금식이 있고요. 그 다음에 8월달에 금식이 있고, 그 다음에 10월달에 금식이 있고, 1월달에 금식이 있어요. 1년에 정기적인 금식이 5번 이상, 거기다가 속죄까지 합하면 더 많지요. 주로 옛날에 죽었던 김 부자가 불렀던 이런 노래가 있어요. <달 타령> 이월에 뜨는 저 달은 동동주를 먹는 달, 유월에 뜨는 저 달은 유두밀떡 먹는 달, 십일월에 뜨는 저 달은 동지팥죽 먹는 달. 이스라엘 역사 자체가 금식으로 이렇게 아예 거의 한달 건너는 식으로 금식이 빼곡히 차있던 이유가 다시 원래 이스라엘로 되돌아가야 된다는 것 때문에 생긴 겁니다.
원천, 원탕, 원래 이스라엘로 돌아가야 된다는 거예요. 아까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했지요. 원래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뭐냐, 애굽에 있던 그들이 나와서 약속의 땅에 있던 그 좋았던 다윗시대 있잖아요. 그걸 원래 이스라엘로 보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이스라엘이 원래 이스라엘이 아니고 아예 이스라엘 자체가 공중분해 된 게 원래 이스라엘이에요. 그게 집단적 금식이에요. 나라가 금식하라는 말이 아니고 이스라엘 자체가 금식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어요. 그 자체가 금식이에요.
자, 금식이라는 것은 알다시피 양식을 곡기를 끊는 거예요.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말은 음식을 먹을, 음식을 담을, 몸 자체가 날아가 버린 거예요. 없는 거예요. 아까 한 거 다시 한 번 할까요. 남의 것을 탐을 낼 수 없는 이유가 가져와봐야 둘 곳이 없다니까요. 내가 있어야 뭐 쌓아두던지 할 텐데 내가 없는데. 쌓아둘 곳이 없다는 그 정신이 무슨 정신? 금식정신이에요. 도둑놈이 도둑질하는 것은 금식정신이 없어서 그래요.
LH직원이 땅 투기 하는 이유가 금식정신이 없어서 그래요. 아파트4채 더 해봐야 관리할 당사자 주인공이 없어요. 주인공 없는데 아파트4채를 탐을 낼 이유가 없지요. 5월 달에는 금식하는 이유는요, 5월 달에는 성전이 파괴되는 날이에요. 5월 달에는 성전이 파괴된 날이에요. 5월에는 성전이 파괴. 금식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은 원천의 이스라엘은 성전이 솔로몬성전이 있던 그걸 원천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가 금식해서 우리를 이렇게 불쌍히 보고 괴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가엾게 봐가지고 그 때 그 좋았던 영광의 시절, 괜찮은 시절, 그 때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는가. 주여, 우리가 회개하나이다. 이렇게 금식한 거예요. 오월에는 성전파괴. 7월 달에는 총독이 암살당한 달. 그달리야. 총독이 암살당한 달. 포로 잡혀가고 난 뒤에 바벨론 지배받고 있으면서 총독을 임명했는데 그 총독이 암살당했어요.
그 다음에 8월9일 날 금식해요. 현재 달력으로 합시다. 그 쪽 달력은 복잡하니까. 이것도 느브사라단. 느브사라단이라는 이 장군이 와서 예루살렘을 파괴했다.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던 그것이 안타까워서 8월9일날 금식해요. 4번째 10월3일날 금식이 있어요. 그 다음에 마지막에 1월10일날 금식하는데 이건 느브사라단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날. 그러니까 이건 하여튼 불상사가 일어났던, 예루살렘이 이방민족한테 침노를 당해가지고 불상사 일어났던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서 정신 바짝 차리라고 우리가 밥 먹고 희희낙락할 지금 그런 처지가 아니다.
빨리 그 때 영광스러웠던 그 영광의 날, 그 날을 회복해야 된다. 그래서 국가적으로 전부다 마음이 통해가지고 집단적으로 금식하는 날로 선포하고 어서 그날이 왔으면 하고 금식하는 거예요. 지금도 그 예루살렘 남아있는 성벽 서쪽 잔해가 있어요. 그걸 통곡의 벽이라 하는데. 그 통곡의 벽에서 머리에 하나 말씀 신명기 말씀 적어서 고개를 끄덕 끄덕해가지고 저쪽은 여자, 이쪽은 남자 해가지고 쪽지 편지 바위틈에 꽂아 놓고 통곡하는 통곡의 벽이에요.
어서 이 성전이 회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상해요. 말이 안되는 게 그렇게 통곡하고 기도하지 말고 이스라엘 군대가요, 미국에서 수조원의 지원을 받아요. 미국의 신무기들, 핵폭탄이 수백 개가 넘는다는데. 그 신무기 있잖아요.
내가 이스라엘 대통령 같으면요, 그냥 거기에 이슬람성전 있지요. 슬그머니 가가지고 나가라! 다 나가라! 차지하면 되잖아요. 뭐가 문제인데요. 언제부터 국제사회에 눈치 봤다고. 이스라엘 나라가 쪼가리에요. 쪼가리. 지중해 있고 예루살렘있잖아요. 탈라비 있고 이게 제일 상업지구로 번성한데. 가자지구인데 성경에서는 가사. 가사로 되어있어요. 사무엘상에 가사. 가자지구하고 이쪽에 뭐냐, 예루살렘 뱅 둘렀다 할 만하지요. 요르단이 있고요. 이쪽 가자지구, 서안지구, 이 전체가 바로 팔레스타인 땅이에요. 지금도.
그래서 이스라엘은 뭐냐, 여기다가 빵구 내는 거예요. 벧엘 요 군데에다가 약 400군데인가 뭘 만들었느냐 하면 정착촌을 만들었어요. 정착촌. 그러니까 공수부대 낙하산 투입하게 되면 그 지점이 아군의 지점이 되잖아요. 이 정착촌 만들어놓고 정착촌 지키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해요. 그러니까 세계 여론이 있으니까 나라 인정해주고 야금 야금 아이들 빵 뜯어먹듯이 다 뜯어먹어요. 가자지구도. 지금 이런 상태에요. 예루살렘도 마찬가지에요. 땅 등기가 아르메니아 지역, 유대인 지역, 팔레스타인 지역, 기독교인 지역, 이렇게 해가지고 그리스도 아르메니아 정교, 왜 이렇게 땅 등기가 나눠졌느냐 하면 저희들 옛날에 이스라엘이 있기 전에 등기 이전한 거예요. 돈 주고 사가지고 토지가. 기독교 국가에서 와가지고 땅을 사놨기 때문에 소유권자가 거기 있기 때문에 이게 나눠져 있어요. 싹 해가지고 전부 다. 현재 여기 이슬람 성전 있고, 사해도 마찬가지에요. 요르단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군데, 군데에 있는데 요르단은 지 맘대로 왔다 갔다 해요. 여기 전부 다 나머지는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어요. 빨리 회복해야 된다는 겁니다. 회복하는데 왜 금식을 하느냐 그것이 사무엘상 7장6절에 나옵니다.
사무엘상7장6절,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식사를 금하고 우리가 잘못했다고 부르짖게 되어있어요. 금식하면서.
그런데 이게 이스라엘의 한계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인간이기에 한계를 못 벗어나지만, 방금 읽었던 그 사무엘상7장6절 제가 한 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께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거기에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8절에 보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 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지배당한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그들은 그것을 전혀 생각을 못합니다. 그들은 이 대목이 좀 어렵거든요. 그래서 성경 한 구절을 더 찾아보겠습니다. 신명기16장3절요, “유교병을 그들과 먹지 말고 칠일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들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속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너의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자, 금식을 한다는 것은 고난의 떡에 참여하는 것, 동참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이 고난은 이스라엘의 고난이 아니고 누구의 고난이냐 하면 하나님 자신의 고난이에요. 죄인을 데리고 다니는데 하나님이 고생깨나 하셨다 이 말입니다. 지금 이 인간은 죄인이지요. 하나님이 자기 택한 백성을 뭐로 바꾸어야 돼요? 죄인을 뭐로 바꿔야 합니까? 하나님의 천국 가려하면 이걸 거룩한 백성, 거룩한 자, 의인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야 되거든요. 이 바꾸는 작업은 죄인에게 아무리 닦달해봐야 그들은 정신 못 차립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어요. 말씀을 지킬 능력이 없으면 참여는 해야 된다. 말씀은 내가 지킬게. 내가 지키는 이 현장에 니 들어오너라. 이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고난의 떡이 되시는 거예요. “내가 떡 될게 너는 고난의 떡이나 먹어라.” 이리 되는 거예요. 그 떡을 먹을 때마다 그러니까 폭신, 폭신한 맛있는 떡이 아니고 딱딱한 떡을 먹을 때마다 내 이빨이 아프겠지요. “내 이빨 아픈데 이빨 아픔으로 내가 자처해서 고생했기 때문에 넣어주세요.” 가 아니라 그런 구원론이 아니라 우리는 이 딱딱한 떡을 먹을 때 맛도 없고 이거 왜 먹나 싶지만 우리는 그 정도밖에 가치 없는 존재인 것을 알아야 돼요.
딱딱한 떡을 먹는 것이 그게 정상이고 폭신, 폭신한 떡을 먹는 것은 이건 진짜 왠 떡 인고, 이런 마음이 있어야 된다 이 말이지요. 마음가짐이. 그렇다면 이 죄인은 하늘나라 천국입장에서 역사 그 다음에 고난, 그 다음에 묵시. 아까 고난을 금식이라 했지요. 금식 말고 고난으로 넣어도 괜찮아요. 역사, 고난, 묵시세계에서 천국에서 보게 되면 이 역사에 있는 어떤 인물도 천국에는 없는 존재입니다.
그 없는 존재인 것을 본인이 그 고난에 참여하려면 나는 없다는 그 없다는 자리까지 들어와서 ‘아~ 나라는 존재는 아예 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구나!’ 라는 것을 아는 체험을 해야 돼요. 그게 바로 떡을 먹는 거예요. 그 딱딱한 떡을 먹는 겁니다. 그걸 왜 먹나 싶지요. 맛도 없지. 뭐 다이어트 하려고 먹습니까. 인간의 입장에서 금식이라 하는 것은 세상 사람에게는 안 해도 될 짓이에요. 그래도 안 해도 될 짓을 아까 했던 한 달 건너 계속 금식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문제가 된 거예요. 이게.
이게 뭔가 금식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겁니다. 금식이라는 것이 자기 구원에 어떤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구원에 자기가 지금 관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나한테 하는 그 행위가 내 구원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보탬이 안 되네요. 이게. 그래서 보탬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천국에는 우리는 없는 인물이에요. 우리는. 없는 인물이기 때문에 없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뭔가 내가 없다는 것을 내가 알려면 나를 없애는 중간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그 중간과정이 뭐냐, 고난의 떡이요, 그게 금식인 거예요. 자, 사무엘상, 야~~ 이렇게 어렵지만 이리 이야기하면 또 쉬워질까봐 이런 이야기했는데 이제부터 어렵지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나왔을 때, 애굽에는 왕이 있었잖아요. 아멜렉도 왕이 있었지요. 이방민족이 다 왕이 있지요. 발람 선지자한테 뇌물 줘가지고 저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 할 때에 그때에 뇌물 줬던 그 모압의 왕이 있었어요. 모압왕 이름이 발락이에요. 발락. 발락하면 남자들은 거의 다 알아요. 독일 프로 대표팀 수비수가 이름이 발락이거든요. 밤새도록 축구보고 있잖아요. 남자들은. 축구 좋아하는 사람들.
세상 사람들 입장에서 그들은 왕이 있다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금 뭘 하느냐 하면 뱀의 목가지를 치잖아요. 뱀의 후손의 가시적 모습이 국가모습이고, 그 국가에 어떤 우두머리가 있어요. 거기의 왕이에요. 수련회할 거 지금 다 하고 있습니다. 왕이라고요. 그러면 인간은 아무리 해도 왕이 없으면 안돼요. 왕을 바꿀 수는 있지만 왕 없음은 인간의 머리에서는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를 않아요. 지도자가 없는 인간사회라는 게 이게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 말이 안 되는 그 테스트. 그 실험적 국가가 이스라엘이에요. 붙자. 왕이 있는 것과 왕이 없는 것과 누가 이기나 한 번 붙자. 여러분이 이걸 아셔야 돼요. 왕이 있으면 지시와 명령을 그 인간으로부터 지시받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럼 왕이 없다는 말은 지시자가 지시하고 명령할 자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왕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없다는 거죠. 하나님이 없는 이스라엘은 어떻게 이용되느냐, 왕이 인간하고 협의하거나 타협 없이 의논할 것 없이 미리 다 해놔요. 미리 상을 다 차려둔다고요. 와서 먹어라 이 말입니다. 그게 왕이에요. 여호와의 왕다움입니다.
이미 너희들은 구원받기로 되어있어. 라는 표시로. “집에 양 있지. 양 잡아. 피내서. 문설주에 발라.” 지금 지시한 게 아닙니다. 그걸 발랐다는 말은 이미 열 가지 재앙가운데 다섯 번째 재앙부터 해가지고 이상하게 히브리인들이 사는 고센 땅에는 이상하게 재앙이 안 떨어져요. 이상하게 차이가 나는 거예요. 이상하게 차이가.
이건 인간이 손 쓴 게 아닙니다. 인간을 초월한 우월한 다른 분이 손 쓴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주께서 다 하셔가지고 내 인생을 이렇게 결과적으로 끌고 가고 있잖아요.” 이건 성도고, 교회 다니는 불신자들은 “그 다음에는 뭐하면 됩니까?” 하고 자꾸 묻는 거예요. “남편이 다쳤는데 그 다음에 뭐하면 됩니까? 기도하면 됩니까?” 자꾸 묻는 거예요. 왜 하느냐 하면, 원상복귀하려고. 니가 무슨 원상이 있나. 존재하지도 않는데 니가 무슨. 존재하지 않는 게 원상이에요.
사나 죽었다, 가 그게 원천이에요. 원탕이라고요. 원조에요. 아예 없는 존재라고요. 어디에 없다? 생명나무에 있는 곳에 아예 없는 존재가 우리 존재입니다. 천국에 뭐가 없다? 우리가 아예 천국에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왔던 그게 우리의 존재에요. 우리가 예상도 못한 내가 없는 존재에 뽕하고 우리로 하여금 거기다가 집어넣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하고 의논해가지고 일방적으로 거기다가 집어넣을 인간을 하나님께서 제작한 겁니다. 이 땅에서. 이 죄악된 세상에서.
죄악된 세상에서 제작하기 때문에 그 구원받을 인간에게 어떤 아이디어를 뽑아낼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다만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주님이 천국 오지도 못할 인간을 만들어내면서 자신의 하실 자신의 절차인 과정, 그게 필요하죠. 그것이 뭐냐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고난을 받는 것이고,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되는 이스라엘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논리가 정말 복잡하지요.
금식이란 역사를 통해서 비역사적 존재, 묵시적 존재로 가기 때문에 금식이란 시간의 연결과 순환을 여기서 끊어버립니다. 그러면 시간이 여기 금식에서 정지가 돼요. 아예 굶는데. 굶는다는 말은 나 여기서 쫑났다 이 말입니다. 죽었다 이 말입니다. 금식은 십자가잖아요. 끝났다. 시간이 끝나면 뭐냐, 공간의 확정성. 이 공간의 확정성이 뭐냐, 바로 성전의 완공입니다. 이게 바로 스가랴7장이야기에요.
성전이 지금 지어가고 있는데 굳이 금식을 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다시 말해서 벧엘로 올라온 이 사람들은 성전이 없어서 빨리 성전 되라고 우리는 그동안 정기적으로 금식 날을 정해서 금식을 해왔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금식하고 우리를 스스로 괴롭게 한 그 기도 빨이 성립돼가지고 효과 얻어가지고 지금 차질 없이 성전이 잘 되고 있는데 이제 금식을 이쯤해서 금식 중단해도 되지 않습니까? 이게 우리 벧엘의 의견인데 예루살렘의 성경 박사님들 고견을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찾아온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스가랴가 하나님으로부터 답변을 들었지요. 그 답변이 뭐냐 하면 “니가 언제 금식했나?” 이리 되는 거예요. 아니 달 건너 금식해왔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금식 언제 했어? 내가 보기에 금식한 거 없는 거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이리 된 겁니다. 이걸 스가랴를 통해서 완전히 들추어내는 겁니다.
5절에,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년 동안 오월과 칠월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라고 되묻지요. 반문하지요. 70년이라 하는 것은 포로 잡히고 난 뒤에 70년이에요. 그러니까 성전이 없음에서 어떤 위기의식을 느끼고 다시 뭐가 그립다? 솔로몬 성전이 있던 그 때가 그립다는 거예요. 이건 인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의식을 그대로 갖고 있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때 솔로몬 성전이 그게 시간이 종결될 만한 그런 완성된 성전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예요. 그들이 금식할 때 그들의 목표가 되는 솔로몬 성전 목표점을 잘못 잡은 거예요. 그 사람들은. 이게 인간의 한계이고도 하고요. 참 그 때 좋았었어. 이렇게 하거든요.
총각시절 때 자기 사랑하는 어떤 연인과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걸은 적 있다 해봅시다. 그런데 한 20년 지나고 난 뒤에 눈 덮인 어느 날 명동성당 정동길 해가지고 덕수궁 돌담길 가보면 옛날 애인이 나타납니까? 뽕하고. 나타난다면 진짜 우연이다. 어? 니가 왜 거기서 나와. 그럴 거 아닙니까. 눈 올 때 우리 처음 만났잖아. 이러면 진짜 우연이지만.
지금 인간은 시간의 순환에서 못 벗어난 거예요. 인간 자체가 시간을 갖고 있지만, 시간의 루프에 갇힌 거예요. 시간의 루프에 갇혀있는 겁니다. 그러면 역사에 갇힌 것이고 역사에 갇힌 상태에서 금식을 하던 기도를 하던 백날 해봤자 그들은 그들이 가야될 곳을 그들은 완전히 차단되어있습니다. 막혀있습니다. 없습니다. 그들이 하는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에요. 자기 구원을 위해서 기도를 한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한 거예요. 자기를 위해서.
우리 집단 이스라엘이 과거가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오히려 장애물이 된 거예요. 진짜 이스라엘은 미래에 있는데 그들은 그 미래상에서 과거가 재생되는 미래를 생각한 겁니다. 아~~ 인간의 한계지요. 인간의 한계입니다. 묵시를 몰라요. 역사 안에서 무한 루프에요. 뺑뺑 돌고 있는 겁니다. 계속해서. 그 때가 좋았다. 그걸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했지요. ‘유년시절로 회귀한다.’ 모든 인간들은 나이 들면 유년시절로 회귀해요. 왜냐하면 그게 장기기억이거든요. 단기기억 없어져도 어릴 때 있던 남아있던 그 장기기억은 남아있어요.
아무리 커서 아버지가 지한테 용돈을 줘도 어릴 때 3살 때 나를 때렸던 아버지상은 변화지 않습니다. 백날 용돈 받으면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3살 때 나를 때렸잖아. 이건 변함이 없어요. 4살 때 나 버리고 엄마는 시집갔잖아. 이건 변함이 없어요. 이것은 인간은 타인이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내 안에는 타인을 모방한 타인을 통해서 구축된 나만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뭘 해도 나를 위해서. 그런 나를 위해서를 가지고 뭐냐, 우상숭배라고 하는 겁니다.
사무엘상에서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은 금식했잖아요. 그런데 그들의 잘못을 몰랐습니다. 그들이 왕을 구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제가 지금 그 이야기하고 싶은 거예요. 왕이 있는 나라와 왕이 없는 하나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구상해서 싸웠건만 그건 왕이 있는 곳은 적이 되고, 왕이 없는 상태가 하나님과 아군이 되는데 그들이 지금 약속의 땅에 오면서 지금 뭐가 되고 싶은가 하면, 하나님과의 아군이 되고 싶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싸웠던 적이 부러운 거예요. 본인들이 그들로 빨리 달라지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상8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8장7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그들은 왕 없이는 못 살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뭘 해서 예상한 결과가 나오는 식으로 그렇게 살아봤으면 좋겠지. 어떤 것도 이미 왕 되신 주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라, 감사나 하라, 그런 삶의 방식은 도저히 자기들이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견디지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걸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보냈잖아요. 사무엘이 하는 채택은 뭐냐, 금식해라. 그리고 우리가 우상숭배 했다. 금식해라. 여기까지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뭘 이야기 안했어요? 왜 우리가 우상숭배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금식은 왜 해야 되는가. 왜 금식이 효과 있는지. 그 내용은 그것도 모르고 무조건 금식했고, 그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블레셋을 누가 이겼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박을 내려가지고 우레를 내리고 그들이 뭘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이 뭘 했어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그냥 사울 말을 들으라, 해놓고는 사울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뭘 했느냐 그냥 하나님께서 기적처럼 블레셋에서 승리케 하셨습니다. 바로 그 기능을 하기 위해서 그 기능을 해야 될 금식의 기능을 금식의 내용의 구체적으로 인격화시킨 것이 처음에 사울 왕이었어요.
이 왕이 한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왕이 필요 없다는 나라인 것을 말하기 위해서 왕이 세워진 거예요. 참, 너무 어렵지요. 여러분이 여기 있고 내가 여기 있는 것은 내가 여기 없다는 것을 통해서 주님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내가 여기 없지만, 있는 모습으로 잠깐 잠시 안개 같은 인생 죽을 때까지는 있어줘야 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금식의 증표입니다. 우리 자신이 징조에요. 우리 자신이. 따라서 우리는 금식을 하는 게 우리 자체가 금식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자주 뷔페에 가가지고 LA갈비 먹기 위해서 줄을 서야 되는 거예요. 왜? 그래서 배불러가지고 진짜 똥배까지 나와 가지고 배불러 있는 이 자신이 이게 없는 모습이거든요. 이게 금식으로 완성된 모습이. “니 눈에 내가 있어 보이냐? 나도 있어 보인다만 사실은 없어.” 이런 이상한 소리 하라고 이 자리에서 살아야 돼요. 자살하면 안돼요. 살아야 돼요.
그걸 바로 고난의 합체. 여러분들에게 합체라는 말을 썼는데 평소에 잘 안 썼는데 합체라는 말을 쓰고 싶은 이유가 합체할 때, 여러분은 그거 먼저 생각하면 돼요. 독수리5형제 하면 돼요. 독수리5형제. 독수리5형제 이야기 나올 때 신학교에 있을 때 그 때 보면서 저게 바로 에베소서4장이다. 우리는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이니, 고린도전서12장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이 독수리5형제가 헤어져있을 때는 지구의 적이 없을 때는 따로 살아요.
그러나 지구의 적이 나타났다. 크로스! 다섯 명의 형제가 하나로 움직이는 거예요. 각자 우리는 지체입니다. 그걸 손가락가지고 이야기를 했지요. 이제 이 예는 너무 해서 지겹다. 이제. 손등은 하나지만. 어느 강의에 가서 이야기했는데. 제가 그 때 수요일에 손가락 할 때, 손가락 내밀었습니까? 하니까 나 안 내밀었어요. 이렇게 했거든요. 야~ 바로 저거에요. 니가 시킨다고 내가 할 사람이냐. 그리 보이느냐. 이거거든요. 바로 저거란 말이죠. 내밀면 바보에요. 내밀면 안돼요. 고집스럽게 니가 한다고 해서 내가 안 내밀어. 이래야 우리가 지체다워요. 아주 보통 고집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산다는 게 고난입니다. 금식이 고난이에요. 우리는 살 이유가 없는데 우리는 죽기 전에 계속 살려두시는 이유가 우리 삶 자체가 십자가라는 고난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나 자신을 결과물로 봐야 돼요. 우리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성전 그 자체입니다.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 성전이 그게 다 인줄 알았어요. 시간루프, 시간의 순환구조 안에 갇혀있습니다. 그러나 금식이란 십자가를 통해서 만들어진 이 완성된 이스라엘은 거기는 예수님의 세계에요. 묵시, 천국입니다. 예수님 세계에 아예 단 한 명도 없어요. 오직 주님만 계시고 왕이 먼저 있고 왕이 백성을 채택하는 그 원칙이 작용합니다.
포도원에 가서 그 포도원에 일꾼이 한 명도 없어요. 한 명도 일꾼이 없습니다. 이제 포도원 주인이 “야, 너 일할래? 너 일하래. 너 일해.” 포도원 주인이 알아서 간택하고 선택해서 포도원에 집어넣을 때 이 포도원은 바로 우리의 자리도 아니고, “그냥 불러주시니까 여기 왔습니다.” 하는 고백만 고스란히 남아있지요.
그러면 불러주시니까 불려 받은 내가 귀합니까? 불러주신 분이 귀합니까? 거기는 누구 영광만 있어야 돼요? 하찮은 나를 불러주신 분 그 분만 있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성령이 와서 하신 일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악착같이 사셔야 돼요. 금식되기 위해서는 살찌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 세상의 떡을 먹어야 돼요. 그 떡이 십자가의 떡이고, 고난의 떡이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묵시적 존재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고, 땅에는 껍데기, 가짜만 있어요.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야 될 그 몸둥아리만 있는 겁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아닌 나도 이렇게 천국에 이미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아무것도 아닌 나를 정말 아무것도 아닌 나로 좀 취급해주시기 바랍니다.
괜히 나를 어떤 의미 있게 가치 있게 봐가지고 이거 지키고, 저거 지키고 하지 마시고 지키게 하신 것은 결과로서 주께서 지켜서 결과로 우리에게 선물로 제공한다는 것. 그것이 성령 안에 나오는 주님의 소망과 사랑과 믿음이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 사는 것도 주님의 은사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어 지고 바늘에 실을 꿰이듯이 주님의 묵시의 실에 저희들이 꼬지처럼 꿰어진 그 사실을 이제는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처럼 살았던 옛날 사람들 바라보면서 주님만 십자가의 고마움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