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10715A슥7장8절(죄의 생산)-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스가랴7장8절에서 14절까지 제가 그냥 죽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라고 여러분이 보셨지요.
방금 읽었던 이걸 세자로 줄이면 이겁니다. ‘죄 생산’입니다. 죄 생산.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솜씨가 있느냐 하면 죄가 없는 곳에 죄를 만들어내는 솜씨를 갖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느냐 하면 죄도 죄 아니라고 우기는 그런 고집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시는 일과 인간의 하는 일이 어기작 난다 하지요. 서로 안 맞지요. 주님은 죄를 만들어 내려하고 인간은 죄 지으면서도 변명으로 일관하고 변명으로 늘어놓지요.
이렇게 죄를 생산하는 그 장소가 어디냐, 그 장소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을 바로 구심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구심점이 되는 거예요. 그 어떤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치는 수배중인 범인을 찾기 위해서는 경찰이 애를 많이 씁니다. 범인이 있을 곳을 수색하고 탐색합니다. 그건 뭐냐 하면 그 범인이 있는 그곳이 이 수사진행에 초점이 되는 구심점이 되는 겁니다. 구심점. 범인 잡겠다고 온 나라를 다 뒤집지는 않고 범인이 어디로 빠졌는가, 만약에 양천구로 빠졌다면 양천구 거기만 수색할 때 그 양천구는 그 사건에 의해서 구심점이 돼요.
그럼 이스라엘이 구심점이 된다는 말은 하나님이 보는 재생산의 구심점이 이스라엘이라는 뜻이거든요. 이 말은 뭐냐 이스라엘 외에 모든 나라, 세상의 모든 나라 또는 모든 민족은 뭘 모르느냐 하면 죄를 모릅니다. 죄를 안 짓는다는 말이 아니고요, 죄에 대해서 몰라요. 죄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요. 죄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초반부터 상당히 난해하더라도 여러분이 강의 한 두 번이 듣는 게 아니니까 잘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에게 뭐가 문제냐 하면 거울 앞에 서면 자기의 몸이 보입니까? 자기의 마음이 보입니까? 둘 중에 어느 거예요? 자기 몸이 보이지요. 간단히 말해서 몸은 기계입니다.
기계란 말은 뭐냐, 왜냐 하면 이게 분해가능해요. 모든 회사의 제품은 분해되게 되어있어요. 그리고 남자들이 군에 가서 총 받을 때 총의 특징은 이게 분해가 되어있습니다. 빨리 분해하고 빨리 조립하는 거. 그 기술을 빨리 익히도록 하지요. 그런데 군에서 받은 기술은 자기가 자발적이 아니고 강제로 했기 때문에 억지기 때문에 별로 기억 남는 게 없어요. 군에 장기 복무하지 않는 한 군에서 시키는 일을 모든 게 다 귀찮아요. 심지어 밥 먹으라고 해도 귀찮아요. 내가 알아서 먹을 거니까 밥 먹으라고 하는 소리 하지 마! 아침에 기상하는 것도 귀찮아. 내가 알아서 일어날 테니까. 시키면 다 귀찮아요. 알아서 하면 알아서 잘 할 건데 시키면 다 귀찮아요.
몸은 기계입니다. 분해가 가능해요. 요 분해하는 걸 가지고 뭐냐 하면 의학이에요. 의학. 의학은 인간을 분해하는 거예요. 철저하게 분해하는데 어디까지 분해하느냐 분자차원까지 분해해요. 분자. 분자, 원자까지 분해를 합니다. 그걸 분해해서 조립하지요. 어디서? 병원에서. 분해하고 조립하지요. 인간에게는 이가 사물입니다. 물체입니다. 물체니까. 짐승에게는 이빨이라고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라고 하거든요. 점잖게. 고상하게. 이가, 이빨이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이빨이. 제가 질문할 때 빨리 답변해야 돼요. 내가. 여러분들이 힘들지 않기 위해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없고 몸만 있을 뿐이에요. 몸이 나중에 세포내가 기능이 희박해지면 지하철 두 군데 더 막 지나가고 그렇지요. 지금 잘 못 들으시니까 누구 이야기인지 모르는..., 지하철 두 군데 막 지나가는 것은 이게 인간이 기능이 쇠해서 그래요. 기계가 낡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 사회에서 어떤 거짓말이 있느냐 하면 이게 인간이 기계거든요. 왜 기계라 했습니까? 분해가 가능하기 때문에 기계에요. 그리고 뭐가 가능합니까? 조립이 가능해요. 분해, 조립이 가능하면 이건 무조건 기계입니다. 앞으로 인간의 보조 인체 만들어가지고 보조적인 것이 더 많이 삽입될 거예요. 앞으로는. 심지어 두뇌세포까지 보조물로 이게 채워질 수가 있습니다.
인간 자체가 기계기 때문에 사람이란 없는 거예요. 그럼 질문 하나 더 한다면, 인간의 몸이 기계거든요. 보이는 기계란 말이죠. 키가 얼마, 몸무게 얼마 나오잖아요. 기계는 측량, 사물은 측량이 가능해요. 규격 재잖아요. 몸무게 재고 할 때 여기서 정신은 어디 있습니까? 이게 질문이에요. 모든 기계인데 그럼 정신은 어디 있느냐, 정신은?
이 기계라 하는 것은 조립, 분해가 가능하잖아요. 그럼 이건 물질이 되는 겁니다. 물질은 뭐로 교환이 되느냐 하면 돈으로 가능해요. 돈으로. 임플란트 하시렵니까. 이거 돈이잖아요. 물질은 돈으로 가능해요. 나라는 기계는 돈만 있으면 이 기계가 움직여 나갈 수가 있습니다. 가동이 됩니다. 그럼 기능이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단백질, 탄수화물, 기름기라는 영양분 그리고 비타민 같은 물질로 해서 살수가 있습니다. 영양분을 공급하니까. 세포는 에너지를 원하니까. 에너지는 곡물에 들어있고 에너지가 몸속에 들어오면 소화됨으로 되거든요. 그게 인간이다 말이죠. 그게 사람이라는 기계입니다.
그런데 자살은 왜 합니까? 이게 이상하지요. 그래서 이 두뇌를 연구하는 사람은 생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그 인간세포 속에 자살인자가 있다는 거예요. 자살인자. 자살인자가 있어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기 세포를 알아서 파괴하는 그 본능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파괴하는 거.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이야기해도 인간은 기계잖아요. 기계가 무슨 본능이 있고 기계가 무슨 자살하는 의식이 있습니까. 이건 앞뒤가 맞지를 않는 이야기에요.
어떻게 이온농도가 높아지게 되면 자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할 때, 이온 농도를 왜 높이는데 물으면 답변이 없어요. 어디로 핑계를 대느냐 하면 날 때부터 DNA가 그렇다는 거예요. 그럼 DNA는 뭐야? 이렇게 물어야지. DNA가 누구십니까? 이렇게 물을 수는 없잖아요. 이 말은 DNA도 기계에요. 디보신리보핵산. 기계 이름을 지은 거예요. 인간은 파고들고, 파고들고, 쪼개고, 쪼개고, 백날 해봐야 인간 속에는 오직 기계밖에 없어요. 기계입니다.
기계가 태어나서 기계가 스스로 식물이 자라듯이 자라나고, 어떤 나이 서른쯤 되게 되면 두뇌세포도 정지되고 키도 정지돼 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쭈그러들기 시작하지요. 내려앉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아시지만 20대에 피부를 생각해보잖아요. 생각해볼 때, 자기 피부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20대에요. 이 피부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런데 한 80되어보세요.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피부에. 노화라는 이름의 무슨 일이 벌어졌어요. 그래서 노화에 대해서 연구한다고요. 노화가 누구야? 나를 노하게 하는 노화는 뭐냐? 또 이거 연구한다고요. 백날 연구해봐야 인간은 기계입니다. 기계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서러워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집에 있는 기계가 컴퓨터가 고장 났다. 그러면 서러워할 사람은 컴퓨터 산 주인이 서러워해야 되지 컴퓨터가 혼자 자기 망가지면서 눈물 찔찔 흘리고, 눈물 찔찔 흘리거든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컴퓨터에서 눈물을 흘리면 대번 주인은 그 눈물을 수집해가지고 성분분석에 들어갈 겁니다. 왜, 컴퓨터는 기계기 때문에. 이건 눈물이라고 하지 않고, 어떤 액체가 나온다고 볼 거예요. 그러면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인간도 눈물 흘리면 그 눈물 가지고 성분분석 들어가야 할 거 아닙니까. 그래서 눈물 흘리는 사람에게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잘 될 거예요.” 이리 이야기할까요? 아니면 “그 눈물샘이 파괴 되었으니까 약국에서 약 사라. 이렇게 이야기해야 될까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인간이 인간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을 설명하는 것은 인간은 기계다. 여기서 멈출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이건 뭐냐 정신이라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 그래서 기계에 몰두하는 사람은 이렇게 해야 돼요. 자기의 논리에 일관성이 있으면 정신이라는 것은 없다, 이렇게 해야 돼요. 정신이라는 것은 그냥 단어는 있을 뿐인데 나중에 더 분석해보면 정신 그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돼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뭔가 잊어버리면 “나, 정신이 없어.” 이렇게 하거든요. 본인이 정신이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정신이 없다, 하거든요.
그래서 이런 점들이 왜 이렇게 인간은 기계가 되고, 정신은 인간에서 찾을 수가 없어요.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는 정신을 찾아낸 사람은 없습니다. 정신을 찾아낸 사람은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겠지요. 정신이 어디 있어야 하지요. 정신이 없잖아요. 정신이 어디에 팔려있습니까. 머리에 있다고요. 그거 단층촬영해보면 없는데요. 정신없어요. 두뇌세포를 엑스레이 촬영하게 되면 정신이 “아이구! 들켰구나!” 정신이 한 곳에 숨고 이럽니까? 날 찾지 마! 하고. 그러면 정신에게 기어이 찾아낼 거야. 정신아! 거기서 나와. 손들고. 이런 게 있습니까. 그냥 눕혀 놓고 자기공명에다 눕혀 놓고 쐬어보니까 정신은 없는 거예요. 세포들의 활동만 있을 뿐이지 정신은 없는 거예요.
일단은 정신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없어요. 그럼 정신이 없다면 정신에게 소속된 것도 없는 거예요. 여러 가지 소속된 것 없는 거예요. 소속된 거 한 번 해볼까요. 사랑 없습니다. 소망 없습니다. 믿음 없습니다. 더구나 뭐가 더 중요하냐 하면, 뭐가 없느냐 하면 자아라는 게 없습니다. 인간의 자아라는 게 없어요. 그냥 우연히 태어나서 우연히 살다가 그냥 우연히 죽는 겁니다. 결국 이 말은 인간은 자기의 근본과 근원에 대해서 기계로 보면 없어야 되는데 이 정신이 없다고 아무리 우겨도 정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자아가 있잖아요. 그 자아는 정신에 속하거든요. 지금 제 논리가 얼마나 복잡한지 여러분 감 잡아야 돼요.
나는 기계라고 이야기하는 그 당사자 있잖아요. 그 당사자는 기계에 포함이 돼요? 안돼요? 포함이 안 되는 겁니다. 기계 바깥에서 내 몸은 기계라고 쳐다보고 있는 너는 누구냐? 에요. Who are you? 너는 누구냐? 너는 도대체 누구냐 이 말이에요. 너는. 사도행전8장17절에서 20절 보겠습니다.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여기 시몬이라는 마술사가 신기한 것에 대해서는 지가 못 참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베드로가 안수를 하니까 성령을 받잖아요. 지도 그 재주가 갖고 싶은 거예요. 갖고 싶은데 방법이 뭐냐 하면 돈을 주고 얻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20절 마지막에는 니가 돈과 함께 어떻게 된다? 망하게 된다고 되어있지요. 돈과 함께. 오늘 스가랴7장 14절을 보게 되면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었느니라.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12절에 보면,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가지고 그들이 망했다고 되어있어요. 오늘 스가랴에서는. 그렇죠. 방금 읽었던 사도행전8장에서는 돈으로 망한다, 이리 되어있지요.
여기서 베드로가 하는 단어가 하나있습니다. 뭐냐 하면 선물이라는 겁니다. 선물. 그러니까 인간이 되려면 뭐냐 하면 몸. 그러니까 기계입니다. 기계. 여러 가지의 원소, 지구를 구성하는 101가지 하지만, 100가지 잡고. 100가지의 원소들이 혼합되어있는 몸. 실제 기계에요. 기계에다가 뭐가 추가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선물이 추가되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나온다? 비로소 인간이라는 게 나오는 거예요. 인간. 인간이 나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정신이라 하는 것은 결국 뭐다? 정신이라 하는 것은 선물이지요. 선물이라면 이건 출처가 정신하고, 몸하고 출처가 따로 있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따로. 따로에요. 따로. 전에 말한 이분법 이야기하고 지금 다른 이야기하는 겁니다. 출처가 따로 있다하기 보다도 하나의 출처에서 두 개의 양상이 나왔다. 이게 더 정답이어야 하는 겁니다. 출처가 따로 되어버리면 자칫하면 이분법 되어가지고 이건 영원히 하나가 되지를 못해요. 하나가 되려면 정신을 주신 분이 뭐도 줬다? 몸도 줬다,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기계라고 했지만 육신, 육체, 고깃덩어리, 단백질덩어리, 이렇게 하는 게 좋지요.
문제는 이 기계로서는 그 출처를 찾아갈 수 없다는 거예요. 기계로서는. 그래서 주님께서는 기계에 대해서 문제 삼지 않습니다. 니가 팔이 부러졌던지, 허리가 아프던지 그런 거 문제 삼지 않아요. 키가 몇 센치냐, 인물이 왜 못 생겼느냐, 잘생겼느냐, 그런 거 문제 삼지 않아요.
자, 다시 스가랴7장에 들어와서 7장에 보게 되면 12절,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이렇게 되어있지요. 하나님께서 출처를 드러내면서 무엇과 함께 동반하느냐 하면 율법을 동반시켜서 너의 출처는 여기서부터 나왔다고 우리의 자리를 알려주는 겁니다. 너는 여기서 나왔다는 거예요. 여기서 나왔다.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이거 다 아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세상 모든 민족이 다 아는 이야기고요. 이스라엘이 구심점이라 했지요. 아까 이스라엘을.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특별히 율법을 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만 율법을 줘가지고 인간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거예요? 율법에서 나오게 하는 거예요. 율법에서. 율법에서 뭐가 나오느냐, 인간이라는 게 나온 겁니다. 인간이라는 몸이라는 육체라는 기계도 나오고 정신이라는 자아도 나오고 이게 어디서 나왔다? 율법에서 나온 거예요. 율법에서. 어제 수요설교 한 거 잠깐 해보겠습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난 뒤에 아담의 범죄이후에 아담에게 결여가 있다. 결여. 쉬운 말로 하면 모자람이 있다. 아담에게 구멍이 하나 뚫렸다. 텅텅 비어있는 구멍이 생겨버렸다. 이런 뜻이에요.
거기에 아담 곁에 모자람이 있는데 여기에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 율법이 들어와 버렸어요. 율법. 율법이라 해도 되고, 언약이라 해도 되고, 말씀이라 해도, 계시라 해도, 예언이라 해도 다 같은 말이에요. 또 하나님의 약속이라 해도 괜찮아요. 율법이 아담 속에 들어와 버렸어요.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아담이 아담과 그 후손이 내내 죽어야 될 이유가 발생이 되는 겁니다. 율법에 위반됐으니까 율법의 뜻을 충족시키지 못하니까 죽어 합당하다는 이유가 성립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담은 그때부터는 아담 본인의 스케줄, 본인의 계획, 본인의 목적, 이것은 전부 다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주도권은 아담 옆에 율법이 쥐고 있기 때문에 율법의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다시 할게요. 율법 안에 인간의 본연의 모습이 인간다운 인간이 율법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그 인간다운 인간이 율법 안에 율법이 완성될 때 인간과 율법에 위반했을 때 인간과의 차이점을 이 아담과 후손들, 인간들은 피조물들은 그걸 보여줘야 되는 거예요. 그게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난 이유입니다. 보여주는 거예요. 지금 제가 여러분과 같이 스가랴7장을 보면서 이스라엘보고 하나님이 분노를 쏟아내고 책망하는 대목이 나오지요. 그리고 그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민족을 이스라엘 자체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들이 원치 않는 나라로 전부 다 바람으로 불어서 가루로 훅 불어 흩어버린 거예요. 흩어버린 거예요.
전쟁 통이나 또는 사업하다가 부도가 나고 빚쟁이가 올 때는 어쩔 수없이 온 식구가 한 4식구 같으면 5식구 같으면 전부 다 어떻게 돼요. 다 흩어져야 되겠지요. 왜, 빚이 많아서 한데 모아서 살 수 있는 형편이 못되고 빚쟁이들 찾아와가지고 애들은 공부도 제대로 못시키고 이 시기 놓치면 공부도 못하니까 니는 이모 집에 가라. 니는 고모 집에 가라. 하고 전부다 보내버리지요. 큰 집에 양자가 돼라. 다 보내버리잖아요. 우리 둘은 갈라서자. 둘이 같이 붙어있으면 빚쟁이 찾아와서 안 되겠다. 우리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갈라서자. 둘이 갈라서고. 그럼 어떻게 됩니까. 가정이 구성이 안 되지요. 뿔뿔이 흩어졌지요. 뭐가 날아갔어요. 구심점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은 뭐냐, 일단 흩어놓고 하나님이 구심점을 따로 만들어놓고, 흩어놓고 구심점 만들고, 그 다음에 구심점으로 한데 모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원래 구심점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유일한 구심점이에요. 율법이 주어졌으니까. 구심점인데 구심점을 흩으신다. 뭐로? 율법으로 흩으셔요. 율법으로. 율법의 내용이 9절에 나오지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이게 율법의 내용이란 말이죠. 율법의 내용을 해놓고 이걸 흩어버려요. 흩어지고 난 뒤에 그 다음에 구심점이 없잖아요.
그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누굴 보내느냐, 성령을 보내셔가지고 다시 이스라엘을 규합하는 거예요. 모으시는 거예요. 흩어지고 다시 모아질 때 이스라엘. 흩어진 이스라엘은 이건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흩어짐의 대상이고. 흩어짐을 경험한 체험한 그 이스라엘만이 어디냐, 이게 바로 천국에 백성들이에요. 천국 가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이 깨어졌다가 다시 모아지는 거.
그러면 흩어졌을 때는 율법으로 흩어졌잖아요. 그러면 다시 모으려면 율법을 다 지켜야 모을 수가 있다는 조건이 여기에 성립이 되겠지요. 그런데 흩어질 때 이미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이 흩어졌는데 아니 무슨 수로 다시 율법을 지켜가지고 뭐 개과천선합니까? 다시 해도 소용없어요. 다시 율법을 행해서 할 수가 있습니까? 할 수가 없어요.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냥 아담이 아니고 결여된 아담이기 때문에. 율법이 없으면 충족되지 않는 빈껍데기 아담이기 때문에 이게 부실한 아담, 아담도 아닌 아담, 가짜 아담, 엉터리 아담, 망가져버린 아담, 그 아담이 다시 율법을 지킬 능력은 없어요.
여러분, 시계가 고장 났을 때 소금물에 담그면 어떻게 됩니까? 고장 난 시계 소금물에 담그면, 소금물에 담겨있는 고장 난 시계지 갑자기 시계가 다시 가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계는 기계잖아요. 인간도 기계잖아요. 기계지요. 기계기 때문에 인간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아가 망가졌어요. 그러면 자아는 빼고 몸은 멀쩡한데 그 멀쩡한 몸으로 다시 건전한 자아를 회복할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의하면 천국백성은 있어야 하겠고 인간들은 그 율법을 다시 지킬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간들을 자기 백성들을 십자가로 모읍니다. 끌어당깁니다. 십자가로 끌어당깁니다.
자, 오늘 강의하면서 나왔던 첫 번째 중요한 결론, 또는 명제 공식하나 생겼습니다. 우리는 이 공식을 확고히 하여야 돼요. ‘성령은 자기 사람을 십자가로 끌어당긴다.’ 끌어 모은다. 또는 끌어당긴다. 성령께서는 자기 사람을 십자가로, 주님의 사람을 십자가로 끌어당긴다. 이게 성령의 객관적인 일이고 스케줄이고 일이에요. 성령이 무엇이냐 할 때는 십자가로 눈앞에 보이게 하는 게 성령의 일입니다. 그 외에는 성령의 일이 아닙니다.
자, 아까 봤던 사도행전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사도행전8장17절에서20절에서 지금 베드로가 안수하니까 성령의 안수를 받았지요. 그렇지요. 받았는데 마술사 시몬이 그게 멋있어 보이니까 뭐를 준다고 제공했어요. 돈을 제공하지요. 돈을 제공해서 뭘 얻겠다? 성령 받는 그런 희한한 비법을 이렇게 하게 했다 말이죠. 하게 하니까 이것은 성령이 하는 일하고는 다르지요. 십자가는 자기 부인이잖아요. 자기부인. 자기부정이잖아요. 자기부정이지요. 또는 자아부정. 자아는 어디에 속했다? 정신에 속하지요. 자기 정신은 망가졌다고 인정하는 것이 성령께서 십자가로 인도하는 현상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 시몬은 성령이 하는 일, 권역, 범위, 그 바깥에 있지요. 그걸 가지고 사도행전8장에서는 망했다고 하는 거예요. 망했다. 망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망했다. 자, 이걸 오늘날 21세기 현실에 적용시켜 봅시다.
여러분들이 요즘 내가 비가 많이 오고해서 아침에 산책하게 되면 그 길가에 뭐가 자꾸 거추장스러우냐 하면 거미줄이 있어요. 자, 거미줄이 있다는 말은 그 근처에 거미가 있다는 말이에요? 없다는 말이에요? 거미줄이 있다는 말은 이건 머리 나빠도 알 수 있어요. 거미줄이 있다는 말은 거미가 거기에 있다는 거예요. 안 보이지만. 거미가 거기에 있어요. 그러면 인간이 자아, 자기 생각, 자아를 생각하는 그것에는 뭐가 있다는 말입니까? 거미줄이 있는 곳에 거미 있다면 인간들이 자아를 생각하는 그 인간들 속에는 뭐가 있다는 말이지요. 지옥이 있다는 거예요. 거미줄이 있는데 거미 없다하는 이것은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터무니없는 말도 안 되는 인간이지요.
그러나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을 우선시하는 그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뭐가 있어요? 망한 영역이 있어야 하겠지요. 최종적으로 망한 영역이 바로 지옥입니다. 지금 우리가 지옥 속에 살고 있어요. 지옥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지를 마세요. 자기 부정이 안 되고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게 바로 거미줄들이에요. 거미줄들. 그게 뭐 스파이더맨인줄 알아요. 아니에요. 그냥 거미줄 속에 있는 지옥에서 쫙쫙 뽑아낸 그 거미줄은 뭐가 안 되느냐 하면,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성령이고, 예수고 간에 돈 주고 사려해요. 돈 주고 사려한다고요. 원빈 있잖아요. 얼마면 돼? 사랑! 얼마면 돼? 얼마면 사랑 내가 차지할 수 있겠어? 그러다가 낙엽 던지면서 가라! 가라! 가란 말이야! 갑자기 딴 마음이 되어가지고. 사랑한다고 그렇게 자기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사랑한다 해놓고 강제로 겁탈해놓고는 얼마나 전에 있는 연애보다 더 심하게 미워해요. 가라! 가라! 가라는 말이야! 바로 이 작용이 니는 다쳐도 나는 다치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니 몸에 있는 니 정신은 다치든 말든 나는 상관없고, 내 기계에 몸에 붙어있는 내 육신에 붙어있는 이 자아는 다치기 싫다는 겁니다. 상처받기 싫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자아는 도대체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이 자아가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담 보시기에 보기 심히 좋았다 했으니까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지요. 그 없는 마음이 오늘 스가랴7장10절에 나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이리 되어있어요. 그 다음에 9절에 보면, 너희가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처음 만들었던 그 신체, 아담의 신체에 붙어있던 선물로서의 그 정신이 그 자아에요.
율법은 내가 만든 내 자아 어디 갔느냐를 찾고 있습니다. 그것과 동일한 자아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들을 망하게 하겠다는 그 뜻을 시범조로 샘플로 보여주는 민족이 있었으니 그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민족이에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진짜 살아계신 하나님은 바로 일을 이렇게 하시는구나! 흩어놓고 흩어질 때도 율법에 준해서 흩어놓아 버리고 그것도 분노하신다니까. 오늘 본문에 분노 나오지요. 등을 돌려 듣기 싫어함으로 내가 분노하여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 나왔다. 12절에 되어 있잖아요. 분노하시고 그 다음에 율법에 적용시키면 인내와 긍휼이에요. 불쌍히 여긴다. 불쌍히 여김으로서 다시 거두어주시는 그 둘 다, 분노하는 마음과 거두어주시는 두 마음이 다 어디서 나온다? 율법의 완성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율법의 완성에서.
율법에 비해서 하자가 없어야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는 천국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율법에 의하면 생기지 말아야 될 것이 생겼어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자아라는 겁니다. 자기. 셀프. 나. 쉽게 말해서 나가 생긴 겁니다. 자, 강의 처음부터 다시 하겠습니다.
거울을 보면 육체가 있지요. 거울을 보면 어떤 육체가 이렇게 서 있잖아요. 있을 때, 이 거울 속에서 뭐가 없느냐 하면 거울 속에 비친 나가 없어요. 자기가 없습니다. 자기는 어디 있느냐 그 거울의 모습을 보면서 그게 나라고 하는 여기 있지요. 거울이라 하는 것은 똑같이 비춰주는 거예요. 그렇지요. 거울 속에 있는 것이 어디서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잖아요. 내 모습이 거울에 비치니까 무엇이 없습니까? 여기 자아라는 게 없는데 나는 거울 속에 맞은편에 있는 실제 하는 나는 이 몸을 가지고 그건 남의 몸이 아니고 뭐다? 나의 몸이다. 나라는 것을 이걸 집어넣어서 해석을 해버리는 겁니다. 거울 속에 있는 몸을.
하도 이것이 무의식중에 늘 그리 살기 때문에 제가 따지는 내가 나쁜 사람처럼 느껴져요. 목사님! 그걸 굳이 따지십니까? 그 몸이 그럼 남의 몸이겠어요. 내 몸이지. 이렇게 할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자아가 자기 몸을 해석을 해왔기 때문에 자아가 있는 이상 어떤 식이라도 인간은 어떤 식이라도 자아를 스스로 갉아먹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 거예요. 이게 반칙이다 이 말이죠. 이게 잘못된 생각이에요.
다시 말해서 처음에 강의했습니다. 인간은 죄를 압니까? 모릅니까? 죄를 모르는 거예요. 그저 변명만 늘어놓는 거예요. 변명만. 사회가 나빠서 그렇고, 사회가 안 알아줘서 그렇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 그걸 어떻게 구박하면 안 되잖아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도 한다고 했습니다. 계속, 계속 움츠러들고 숨어가면서 비겁하게 도망치면서 내내 뒤돌아보면서 내뱉는 게 뭐냐 하면 “제발 나만은 안 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뭐? 돈? 돈 줄게. 집? 니 집해. 애 다 니가 키워. 하지만 나의 결정만은 건드리지 마라.” 그걸 만약에 내가 건드리게 되면 니는 나한테 모욕감을 줬어. 모욕감이지요. 목욕 값이 아니고. 칠천원하는 목욕 값이 아니고. 모욕감을 줬어.
니가 아무리 옳고 나는 나쁘다 할지라도 너는 나를 치욕을 느낄 수 있는 권한은 내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럼 상대방이 “왜 그런데? 잘못해놓고 아까 반성했잖아. 반성해놓고 뭐 또 딴 소리하느냐. 왜 그런데?” “몰라. 나도 몰라. 알 수가 없어.” 평생 내가 누군지를 모르면서 평생에 모르면서 그걸 지키는 오직 그 집념, 그 집착하나로 평생을 시간을 다 허비하고 온 겁니다. 그거 왜 지켜야 됩니까? 물으면 “모르겠어요. 그냥. 제발 나를 갉아먹지 말라”는 거예요. 나를 좀 갉아먹지 말라는 거예요.
누가 욕해도 나는 나에게 너무나 귀한 존재라는 겁니다. 나는 나에게. 꼭 범죄자의 엄마 같아. 세상이 다 너를 내 자식을 욕해도 나는 너를 지켜주마. 그걸 가지고 세자로 공범자라 해요. 공범자. 제가 최근에 그런 강의했잖아요. 자식이 음주했는데 옆에 앉은 80넘은 할머니가 경찰이 오니까 80넘은 할머니가 벌벌 떨면서 “내가 운전했어요. 술 먹고.” 경찰이 그걸 믿겠습니까. 운전 면허증 보여주세요. 운전면허증 집에 놔두고 왔어요. 왜 그렇게 변명합니까? 자식은 자기 밖에 있는 게 아니고 자식은 영원히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식이 곧 나기 때문에 그래요. 자식을 지키는 게 아니고 그 노모가 자기 자신을 자기가 지키는 방법입니다. 왜? 나의 것이니까.
나는 구체화시키면 나의 것으로 돼요. 나의 것. 소유. 이 소유를 뭐로 전환시키느냐 하면 돈으로 소유함을 지켜요. 돈으로. 아까 나왔지요. 사도행전8장17절, 20절, 그 성령 받는데 공짜가 아니지요. 돈 주겠다 이 말이거든요. 이건 뭐냐 하면 나의 것으로 성령을 사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성령이 하시는 일은 나의 것을 없애는 것. 나의 것을 부정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십자가라 하는 것이 바로 나를 못 박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6장에서 24절에 그런 말씀이 있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빈손으로 오지 말고, 뭘 하나 끌고 오라고 했어요. 뭡니까? 자기 십자가를 끌고 오너라. 자기 십자가. 십자가와 함께 동반해서 오라, 이 말이지요.
이거 가방 있지요. 제가 올 때 빈손으로 들어오던가요. 가방을 메고 오던가요. 이걸 가방이라고 하지 말고 십자가라고 하고. 나의 십자가. 남을 못 박는 십자가가 아니고 이걸 십자가를 소유한 가진 나를 이 자아를 반복해서 못 박을 수 있는 그런 기구와 장치를 가지고 니가 오라 말이지요. 나를 따라 오너라 이 말이지요. 왜냐하면 예수님도 바로 그러한 장치, 제도, 그러한 조건을 갖추시면서 이 땅을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없는 사람은 못 빠져나온다.
그렇다면 율법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율법의 완성이 뭐다? 십자가에요. 긍휼이 여기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 아니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 아니에요. 올바르게 재판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 아닙니다. 여기 나오지요. 마음을 금강석같이 하지 않는 게 율법의 완성이 아니고 어떤 인간도 율법을 지킬 능력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율법에다가 맡겨야 되는 거예요. 율법이 나를 죽이도록 나를 맡겨야 되는 거예요. 율법은 나를 공격하는 것이 율법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면 율법 앞에서 율법에 의해서 정죄 받도록 맡겨줘야 돼요.
이 일을 바로 흩어진 자를 자기 백성을 끌어 모으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다시 할게요. 성령께서는 무슨 일을 한다? 우리에게 십자가로 끌고 가신다. 왜냐하면 새로운 백성의 시작점이 바로 십자가고, 시작점이. 그리고 세상에서 볼 때에 성도의 마지막 모습도 십자가를 뒤로 하고 사라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가방을 제가 멨다고 칠 때 제 뒷모습은 뭐만 보이겠습니까? 가방이 오죽 큽니까. 가방만 보이겠지요. 십자가만 남기고 떠나간 사람. 십자가만 남기고 떠나간 사람. 십자가 할 때, 그동안 내가 했던 잘난 거, 멋있는 거, 노력한 거, 그거 다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걸어서 세계 속으로 프로 나오지만, 거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이게 나옵니다. 터키 음식 골목에 가면 먹는 거 있지요. 케밥. 개밥이 아니고 케밥. 이렇게 둥그렇게 되어있고 여기 고기를 걸어놓고 여기에 넓적한 빵에다가 손님이 오게 되면 즉석에서 고기를 잘라내고 채소 엎어가지고 터키식 샌드위치라 할까요. 이렇게 만들어서 주잖아요. 저는 그걸 보면서 거기에 안 가 봐도 딱 압니다. 저 맛 되게 이상하다는 거. 저런 양고기.
혹시 십자가마을이나 우리교회 혹시 이스라엘 이렇게 몇 년 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스라엘 가려고 하거든요. 이스라엘 갈 때 거기 가가지고 예루살렘 보고 그런 것도 좋지만, 제일 먼저 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 한국에서 먹던 음식을 들고 가는 것이 그게 기본입니다. 배고프면 아무것도 헛것이 보이지 아무것도 안 보여요. 한국에서 먹던 음식을 가지고 가야 돼요. 이 귀한 시간에 이스라엘 갈 생각을 하면 안 되지만. 후딱 이야기한다면 한국에서 먹던 던킨 도너츠 같은 거 괜찮아요. 그리고 컵라면은 기본이고 단팥빵 이런 거요. 그 나라에는 없어요. 단팥빵 이런 거. 한국 입맛에 맞는 거. 그리고 전투식량이라든지 요새 마트에 가면 무슨 밥맛 나요. 그거 소비용이기 때문에 처음에 무겁지만 나중에 다 먹고 없거든요. 그거 다 들고 가야 돼요. 괜히 안 들고 가가지고 남의 것 탐내지 말고. 진짜 못 먹습니다.
케밥의 특징은 잘라내는 거예요. 갉아내는 거예요.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꾸 살려고 하지 마! 이 아담아. 니는 이미 문제 있어. 내 율법 한 번 쏘아 봐. 이 중에 율법 하나 지켰다고. 그럼 옆에 거는 왜 안 지키는데. 온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어. 케밥 고기 잘라내듯이 우리의 자아를 훼손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 성경 말씀이 있는 거예요. 전체가 율법이에요. 이 전체가. 사도바울의 명령, 지시 다 율법이에요. 그런데 자아도 만만치 않거든요. 버틴다고요. 뭘로 버티느냐 하면 율법을 지켰잖아요. 말씀을 믿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자기 의를 아주 저돌적으로 지켜요. 저돌적으로.
죽기 살기로 그 자기의의 쪼가리. 그 쪼가리 하나는 계속 건지려고 아주 사투를 벌립니다. 이 성경 말씀을. 아~ 고집도 대단한 고집이지요. 쉽게 말해서 자아라는 구심점. 이거 포기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어디를 공격하느냐 하면 이 자아를 공격해요. 자아를 공격해버리면 이 자아에 율법의 완성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여기에 와버리지요. 그러면 자아에서는 자아는 그냥 자아가 아니에요.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기 의를 토대로 해서 자아가 성립이 됩니다. 자기 의.
나 살만 해! 나 이만큼 노력했어! 라고 변명과 핑계로 일관된 의로움. 쉽게 할까요. “나는 결국에는 옳다.” 이런 좋은 소리는 좀 적어놓으세요. 나는 결국에는 옳다. 누가 뭐래도 그래도 나는 옳다. 이걸 철저히 가져가는 거예요. 철두철미하게 가져가요. 나는 어떤 경우라도 옳다. 묻지도 따질 필요도 없다. 나는 옳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니가 옳은 거 같으면 내가 대신 죽을 리가 있겠느냐, 니 대신 내가 죽었다는 말은 내가 옳다. 이것이 바로 니가 몰랐던 뭐가 되느냐, 죄였다는 거예요.
인간은 죄를 모르지요. 성령이 오고 십자가가 와야 죄를 알아요. 그렇지 않으면 죄를 몰라요. 그래서 제가 제일 처음에 칠판에다가 뭘 썼습니까? 하나님의 솜씨가 뭐라고 했습니까? 죄를 생산하는 것. 죄를 생산할 때에 나는 옳지 않다, 를 기쁨으로 이야기하세요. 아~ 내가 옳지 않구나! 기쁨으로 이야기해야 되지, 씩씩 거리면서 하면 또 자아한테 미련이 있어서 그래요.
내가 옳지 않구나! 내가 밥 먹고 사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구나! 내가 이가 멀쩡하고 다리가 멀쩡한 게 이게 당연한 게 아니구나! 모든지 나한테는 옳지 않은 나에게는 모든 것들이 그냥 선물이구나! 그냥 공짜로 주신거구나! 그게 긍휼이구나! 이게 바로 오늘 스가랴7장9절 아닙니까. 그게 인애, 사랑이고 그 다음에 긍휼. 인애와 사랑. 이게 바로 그 사랑을 지금까지 선물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훼방질했습니까.
이 자아라는 이상한 죄가 죄악 된 정신이 주님이 주신 선물과 은혜를 다 훼손한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천국백성이라 하는 것은 내가 옳다가 아니라 주님이 옳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못난이. 나는 못난이. 이렇게 같이 동반해서 천국 가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10715B슥7장8절(죄의 생산)-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아까 첫째시간에 주님께서는 죄가 없는 곳에 죄를 나게 하는 것이 주님의 솜씨라 했습니다. 죄가 없는 곳에 죄가 난다는 말은 인간은 자기의 죄를 죽어도 몰라요. 왜 죽는지도 모르고, 내가 왜 잘못됐는데? 그것도 모르고, 그 이유가 죄를 안 지어서가 아니라 나라는 그 자체가 이미 자기는 나는 옳다, 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옳지 않은 경우를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옳지 않는다, 라고 한다면 내가 진짜로 내가 정말로 옳지 않는 거라면 무엇이 생각나지 않느냐 하면 의미라는 것, 의미 자체가 소실됩니다. 의미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옳다가 될 때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중국에 태풍 분다. 뭐 어쩌라고. 중국에 태풍 부는데 내가 뭐 어쩌라고? 왜 중국 태풍 부는데 내가 거기에 관여할 필요 없잖아요. 내가 중국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 일어난 모든 것은 나와 관련 있는데 그냥 나와 관련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가 있는 거예요.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첫째시간 공부를 했으면 우리는 압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뭘 생산하는 겁니까? 죄를 생산하기 위함이지요. 죄를 생산함인데 나라는 것이 나는 옳다. 나는 옳다가 되어버리면 뭐냐 하면 ‘내가 옳기 때문에 내가 옳다는 사실을 하나님도 아시기 때문에 이 옳은 나를 천국에 보내려고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방법을 나한테 주셨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이 말씀을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끌어 모으는 거예요. 성경 모든 구절을 어디에 끌어 모으느냐, 누구를 구원시키는데 끌어 모은다? 나를 구원시키는데 끌어 모으는 거예요.
첫째시간에 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없는 죄도 생산한다. 없는 죄. 요 말을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죄라는 말이 있잖아요. 죄라는 단어가 있잖아요. 죄라는 단어가 있으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함축해서. 죄라는 개념이 있지요. 이 모든 죄라는 단어는 그게 바탕에 뭐가 있느냐 하면, 역시 나는 옳아, 증명하기 위해서 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거예요. 저 사람 죄인이야. 그 뿐만이 아니고 역시 나는 못났어. 무슨 뜻입니까? 나는 못났다고 반성함으로서 그 결과는 뭐하다? 역시 나는 잘났어! 가 되는 거예요. 나는 잘났어! 가 되는 거예요.
내가 옳다, 를 어떤 경우라도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마음을 낮춰라, 하잖아요. 그 마음을 낮추면, “마음을 낮추겠습니다. 하나님. 나한테 뭐 해줄 거요?” 마음을 낮출 테니까 뭐해줄 겁니까? 우리애가 고3인데 수능 잘 치게 해줄 거요? 마음 낮추는 대신 주고받는 게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마음 낮추겠습니다. 그러면 이 옳고 옳은 나에게 뭘 해주겠어요? 뭐 해주렵니까? 이리 나오는 거예요.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았더냐? 이런 말이 있지요. <이수일과 심순애> 심파극에서 이수일이 말했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그 다이아몬드에 팔려가지 말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김중배역은 주로 허장강이 역을 많이 했어요. 옛날에. 옛날이야기입니다. 심파극에서. 나쁜 사람을 굳이 우리가 생각을 해야 될 이유가 상대적으로 우리가 내가 옳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나보다 더 착한 사람은 우리가 굉장히 질투심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분노해요. 드라마 거의 안 보는데 어떤 드라마에 보면 드라마 거의 안보는 거 안 믿지요. 어떤 드라마에 보면 이혼하고 난 뒤에 자기 남편이 열 살 아래의 같은 직장 내에 있는 아가씨를 좋아할 때 자기는 벌써 이혼했는데 인사팀장이어서 직위도 높은데 했는데 지가 버린 남자가 지보다 10년 젊은 여자하고 이렇게 사귀니까 화가 난 거예요. 왜, 상대적으로 자기가 버려졌다는 것이 화가 나는 거예요.
한 번 따져봅시다. 나는 버림받았다. 이게 왜 화가 날까요? 왜냐하면 나는 결코 나를 버린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나를 버린 적이 없거든요. 니가 뭔데 나를 버리래? 그런데 버림받은 여자보다 더 혹독한 시련은 뭐냐, 잊혀진 여자에요. 왜냐하면 나는 결코 나를 잊은 적이 없어요. 내가 나를 다루는 방식의 확장, 그게 내가 꿈꾸는 세계에요. 내가 나에게 잘해주고 나를 칭찬해주고 나를 격려하고 내 노력에 대해서 누가 인정해 주는 그 세계, 그 세계라면 그게 어느 교회든 등록합니다. 그게 어느 교회든. 인간의 모든 행동은,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요. 모든 인간의 행동은 이게 있어요. ‘keep’하는 게 있어요. 킵하는 게 있어요. 커피 먹다가 남겨두면 뭐합니까. 내일 올 테니까 키핑해주세요, 하지요. 커피.
뭔가 나의 것을 꽂아 놓은 게 있어요. 꽂아 놓고 늘 그게 뭐냐 구심점이 되는 거예요. 나에게는 오직 나만이 구심점이 되는 겁니다. 킵 한 것이 없으면 그건 뭐 저능아인지 바보인지 그리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진도 나갑시다. 하나님께서는 죄 없는 곳에 죄가 되고요, 오늘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없는 죄를 생산한다. 없는 죄를 생산해요. 왜냐 하면 인간은 근원적으로 따지고 따지고 보지만,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마저도 죄라고 하면 너무 심하지요. 어떤 경우라도 나는 선하기 위해서 노력한 그것은 인정해 줘야 되지 않습니까. 기어코 자기를 옳다고 보는 거예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모든 인간은 같은 죄가 되도록 묶어버린다.’ 끈으로 묶어버려요.
인간 대 인간 사이에 죄의 차이가 경중이 없도록 만들어버려요. 하나님께서. 인간 대 인간 사이에. 하나의 예를 들게 되면 여러분들이 열 살 때 지었던 죄와 여러분이 40이 되었던 지은 죄가 그게 어디서 나온 겁니까? 같은 몸에서 나왔지요. 그렇다면 열 살 때 지은 죄는 덜 나쁘고, 40때 지은 죄는 큰 죄 지었다고 성립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안 되는 거예요. 4살 때, 5살 때, 그 애들이 갖고 있는, 옛날이야기입니다. 지금 이야기 말고. 컴퓨터 인터넷 시대 말고 옛날에 우리 세 살 때 4살 때 5살 때 6살 때 놀던 거 있어요. 그 때 우리가 가장 어릴 때 7살 때 가장 보물로 여겼던 것이 뭐냐 하면 구슬입니다. 유리구슬. 구슬 있지요. 장군 따먹기 할 때 구슬. 동글동글한 구슬 있잖아요.
이게 그들은 그들 시대에 비트코인입니다. 그들 시대에 주식이에요. 이거 많이 모으면 자기 세계에서 최고가 되는 거예요. 구슬 모으는 거. 그런데 지금 나이 60이 넘어서 다시 이 구슬을 보니까 제가 한 번 찾아봤어요. 다이소 가서 찾아봤습니다. 구슬100개에 천원해요. 500g해서 한100개쯤 돼요. 구슬 1개에 10원밖에 안 해요. 부모가 되어서 애들한테 구슬 차지할 때 부모가 한 십만원치나 사줘버려요. 그러면 그 애는 부자로 느끼겠습니까? 안 느끼겠습니까? 안 느끼지요. 뭐가 빠졌습니까? 구슬이 5개에서 10개, 10개에서 20개, 40개에서 50개 되는 그 과정들이 빠졌지요.
그 과정이 뭐냐 하면 나는 너를 이겼다! 나는 너보다는 옳았다! 는 거. 구슬치기 더 잘한다는 것. 이 사실이 빠져버린 구슬 10만원짜리 구슬은 의미 없습니다. 왜냐, 의미는 나의 옳음. 나의 의로움이 첨가되어야 이게 의미가 있는 거예요. 첨가가 되어야. <마인>이라는 드라마에 보면 애를 키운 엄마가 자식의 엄마냐, 애를 낳은 엄마가 자식의 엄마냐, 낳고 도망친 엄마가 엄마냐, 그 이야기가 나왔다고요. 결국 그 드라마에서는 키운 엄마가 엄마다. 끝났어요. 낳고 키우기 싫은 여자는 엄마라는 자격이 없다. 이리 되는 거예요. 키운다는 거, 양육이라는 거, 해산의 고통만 있는 게 아니에요. 여자한테는 해산의 고통이 곧 양육의 고통입니다.
그 자식이 왜 귀하냐 하면 키울 때 고생했기 때문에 키우잖아요. 자식이 귀한 것이 아니고 자식에게 부여된 투자된 나의 아픔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 자기의 아픔이 자기의 옳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옳음에서 도망칠 수 있는 어떤 대책이 없어요. 그러면 이건 뭐냐 자기 의가 그대로 남아있으니까 아까 이야기했지요. 거미줄이 있는 곳에 뭐가 있다? 거미가 있듯이 자기 의가 남아 있는 곳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지옥이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옥 가는 사람의 공통점이 전부 다 훌륭하다는 거예요. 지옥 가는 사람의 공통점이. 그리고 천국 가는 사람의 공통점은 뭡니까? 다 죄인이라는 거예요. 특징이. 나는 뭘 하나 나는 옳은 게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천국을 가고 있고, 어느 것 하나 내 솜씨 아닌 게 없고 내 애씀이 없음이 없다고 여기면서 지금 그들은 지옥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과 지옥 구분하기가 의외로 참 쉽죠잉. 진짜 쉬워요. 마태복음18장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하나는 세리 나오지요. 주님께서 순회 재판합니다. 그냥 본격적인 재판하기 전에 내가 현지에 가서 니는 지옥행! 너는 천국행! 할 때 바리새인이 먼저 지 자랑 늘어놓습니다. 십일조하지요. 금식하지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구제하는데 왜 구제합니까.
여기에 오늘 스가랴7장에 보면 고아와 과부 불쌍한 사람 도와주라고 돈 모으는 게 그게 구제잖아요. 구제했습니다. 그리고 더 첨가해서 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리 나왔다고요.
자, 그렇다면 그 바리새인 속에 자기의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투입됐습니까. 투입 안 됐지요. 아까 첫째시간 끝에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지요. 어디로 데려갑니까? 십자가로 데려가지요. 그게 성령이 하시는 일이에요. 뭐 불 받았다! 그게 성령의 일이 아니고.
십자가로 데려가요. 방언하는 게 , 방언 터지는 게 그게 성령의 일이 아니고. 자기를 십자가로 데려가는 겁니다. 뭘 해도 나는 의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이 확정되는 그러한 상황들 속으로 계속해서 몰아내어 세우시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가 의롭지 않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뭐가 되느냐 하면 자기뿐만 아니고 별나게 나는 이렇게 죄인인데 나 말고 아주 뛰어나게 착한 사람은 따로 있다. 가 자기가 죄인된 사람한테는 성령 받아 죄인된 사람한테는 그런 사람이 존재하지 않아요. 그냥 사적으로 반성이나 하고 사적으로 회개를 해버리면 ‘아휴, 저 사람은 내가 보기에는 나보다 너무 착해.’ 착한 사람이 발생돼 버려요. 주위에서 착한 사람이 발생된다는 말은 그렇게 이해되시거든 아직도 본인은 십자가 근처에도 안 갔습니다. 근처가도 소용없지요. 근처에 가도 합체가 돼야지 근처만 가서 관람객 되면 안 되잖아요.
첫 번째는 하나님이 없는 죄를 발생시킨다. 두 번째는 모든 인간의 죄는 똑같다. 죄와 죄 사이에 어떤 차등을 두지를 않았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모두 다 누구의 자식이냐 하면 아담의 자손이거든요. 그럼 아담 안에 뭐가 들었느냐 하면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죽고, 죽고 하는 거예요. 죄가 아담의 실력보다 더 우세해요. 더 셉니다. 그러니까 이 죄는 아담을 통해서 퍼졌다가 성립돼요. 퍼져버린 거예요. 이렇게 죽 퍼진 거예요. 퍼진 것을 말리거나 처리할 수 있는 방안, 대안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암세포가 대단한 암세포가 되어가지고 아무리 착하게 해도 그 착함 속에 죄까지 착함이라고 하는 그것이 죄가 되게 만들어버려요.
죄의 위력이 그런 겁니다. 죄가 아담에 들어왔기 때문에 아담에 있던 모든 퍼져있는 모든 영역은 전부 다 죄의 통제와 죄의 지배 속에 죄의 힘 속에 놓여있게 돼요. 그러니까 죄들이라는 것은 하나의 죄에서 나온 것은 죄들이에요. 단수에서 복수가 나오던 이 복수는 하나로의 죄로 구치고 들어가야 되는 겁니다. 자, 이 작업을 많은 죄들, 율법에 의해서 일어나는 많은 죄가 결국은 하나의 죄였다. 그 죄가 뭐냐 하면 바로 십자가를 믿지 않는 죄. 십자가를 믿지 않는 죄.
그럼 십자가를 믿지 않는 죄가 뭐냐 하면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뭐로 보느냐 하면 죄인으로 규정했거든요. 모든 인간입니다. 한 모든 죄를 하나로 묶었어요. 어느 니 내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죄인이 되는 거예요. 이걸 로마서5장에서는 죄의 뭐냐, 죄의 왕 노릇이라 합니다. 왕.
왕은 요번 수련회에서 왕에 대해서 할 거예요. 왕이라는 게 뭔지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이라는 것이. 왕이라는 것은 유일하게 있음의 세계에 포함되지 않는 존재 이게 왕이에요. 유일하게 있음에 있다는 것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왕이라는 말은 있음에서 있음의 세계, 인간의 존재하는 세계에서는 여호와는 없는 분이에요.
없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있음의 세계와 연결되어있는 연속되어있는 신은 우상이에요. 사울 왕이 그래서 잘못된 왕이에요. 왜? 사울왕은 누가 원했던 겁니까? 시작을 백성들 쪽에서 먼저 시작했어요. 왕 주시옵소서! 저만한 왕 같으면 괜찮습니다. 이리된 거예요. 제안을 인간 쪽에서 제안했다는 요소가 포함된 왕이 사울 왕이에요.
그런데 그 사울 왕과 따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제안을 하지 않았던 준비된 왕이 있었지요. 사무엘도 사울 왕이 무서워서 몰래 했는데 막상 그 현장에 왕은 없었어요. 이새의 아들 일곱명이 있는데 일곱명 다 주님께서 전부 다 보이콧했어요. 거부했어요. 아니야. 아니야. 그거 아니야. 그 아니야. 결국 나온 것은 없는데요. 없음이에요. 왕은 없어요. 없는데 사무엘보고 가라고 기름 들고 가라고 한 거예요.
기름부음은 있는데 기름 받을 대상은 없는 겁니다. 없을 때는 모든 있음을 제켜나야 돼요. 있다, 있다, 있다를 다 제켜나야 돼요. 그래야 그 있음에서 예상도 못한 없음은 그냥 왕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고 모든 있음을 고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있다는 내가 여기 있다는 자체가 바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있는 거예요. 죄 지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 있다가 되는 겁니다.
이 땅에 태어난 자체가 죄고 살아온 것도 죄고 죽는 것도 죄고 그렇게 규정할 수 있는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그 분이 십자가지신 분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1절에서 뭐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인다 했지요. 십자가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를 보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따라간 겁니까?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따라간 거죠.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부활에서 탈락한 겁니다. 십자가는 봤는데 그 다음에 부활에 대해서 그들은 보고 즐거워한 게 아니고 두렵다. 뭐가 두려워요? 부활이 두려운 거예요. 부활이. 부활이 두려운 거예요. 왜냐 하면 인간은 있음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있음의 끝은 뭐냐 하면 죽음이 있음의 세계에 한계점입니다. 따라서 내가 죽는다, 까지 아는 것 안에서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 인간은 내가 죽는다 하는 것은 각오했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익히 알기 때문에. 내 아는 범위 내에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라는 게 성립되지 않아요.
그런데 여기에 어떤 묘지 청년도 아니고 어떤 낯선 사람도 아니고 “마리아야! 누구를 찾느냐? 그 분은 죽었다가 살아난다고 약속했잖아. 약속대로 왜 안 믿어? 그 분은 살아나셨느니라.” 할 때, 그 여인들은 그 3명의 마리아와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두려웠어요. 두렵다는 말은 나에게 하자가 있음을 최초로 지각한 겁니다. 알게 된 겁니다. 내가 붙들고 있을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최초로 알게 된 거예요. 붙들고 살아온 이것이 오류고 이건 실수였던 겁니다. 평생 나를.
만약에 진짜 부활을 만난 사람은 두 번 다시 뭐냐 하면 나의 부활은 물 건너 간 걸 알아요. 부활은 나의 부활이 아니에요. 성도의 부활이지. 새로운 사람의 부활이지 나의 현재의 구닥다리의 부활이 아니에요. 주님이 주신 주님의 내 안의 자기의 부활인 거예요. 우리는 그냥 그걸 실어 나르는 하나의 냄비지요. 냄비 우동 할 때. 냄비. 냄비 우동 씹으려고 하지 않지요. 그 안에 내용물 담아 있잖아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여러분이 수박화채 할 때 수박 껍데기 먹으려고 화채하지는 않잖아요. 그 안에 내용이 있잖아요. 우리 성도라 하는 것은 그 내용은요, 주님의 말씀이 채워져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그 말씀을 그냥 담을 뿐입니다. 담을 때 그냥 담는 게 아니고 그릇도 의미 있다. 그런 식이 아니고 그릇은 껍데기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라는 것을 절감하면서 그 내용들을 담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구원 받는 내가 구원 받았다,에 증인이 아니고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이래서 천당 간다, 의 증인이 아니라 주님의 증인돼요. 나는 물 건너갔어요. 킵을 해도 주님을 킵해야지 나를 킵하면 안돼요. 교회 다닌 역사라든지 헌금한 거라든지 킵하면 안됩니다. 내가 전도한다고 몇 명을 전도하고 이런 거 킵하면 안됩니다. 따라서 신앙의 특징은 뭐냐 결코 나는 신앙인이 아니다를 왜 진작에 이제야 알았다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이에요. 왜냐하면 자기를 킵 안하니까.
신앙인 아닌 나를 하여금 주님을 알게 했으니까 주님을 알게 한 게 키핑 할 수 있는 내용이에요. 주님을 알게 된 거. 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요, 나중에 치매에 걸리면 그거 다 도루묵으로 다 날아가 버려요. 치매에 걸려가지고 아버지도, 엄마도, 자식도 다 못 알아보는데 뭘 그걸 믿어요. 믿을 걸 믿어야지. 목사님이 와가지고 요양병원에 와가지고 “권사님, 새벽 기도하는 권사님 저 아시겠습니까?” “아저씨? 누구? 내 신랑인가?” 거기에 실망한 목사가 “이 권사님, 지옥 갔다.” 니도 나중에 늙어봐라. 니도 늙어봐라. 지옥가지. 젊은 사람들은 자꾸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정당한 잔소리를 꼰대라고 하는데 니도 세월한번 먹어보지. 니는 늙어봤나? 나는 젊어봤다! 이리 하거든요. 니는 늙어봤나? 나는 젊어도 봤다. 나는 니가 어떤 수준인지 안다 이 말이거든요.
주님이 우리를 알아요. 아시기 때문에 다른 대안은 없어요. 십자가 죄용서 외에는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그걸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의 행동 하나 태도 하나, 하나에 대해서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신경 쓰면 안 되지요. 그걸 신경 쓰면 안돼요. 내가 어떻게 됩니까? 가 아니라 “주여, 오늘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무슨 지시를 내리실 거예요?” 어제 수요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그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수박 얼마 주고 샀나? 삼만원 줬습니다. 니는 봉 썼구나! 봉 쓰는 일을 하면 돼요. 그거 뭘 수박 사기 전에 서울깍쟁이 돼가지고 비싸게 받았느니 온 생각 쓰잘데기 없는 생각, 완벽에 완벽을 기하려고 하지 마세요. 인간은 완벽은 없습니다. 철저에 철저를 기하지 마세요. 그것도 자기 의가 돼요. 그냥 어설픈 그것도 주님의 주신 은혜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정리합니다. 우리는 나의 죄에서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도가 할 것은 앞으로 죄 아닌 것도 죄였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그런 재미가 솔솔하시기 바랍니다. 아~ 이것마저 죄! 이것마저 죄였구나! 이미 주께서는 다 아시고 죄를 한 묶음 되게 하셨어요. 해태종합선물이에요. 죄가 한 묶음 되어야 될 이유가 죄의 용서가 단번에 한 묶음으로 예수님의 피로 단번에 다 처리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피의 단회성을 옹호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여러 가지 죄가 한 묶음 되어야 돼요. 이건 내 좋아라가 아니라 주님에 하신 일을 드러내는 방식이 이 방식밖에는 없어요. 심지어 밥 먹는 것도 죄고, 잠자는 것도 죄고, 그렇게 되어야 예수님의 피흘림의 죄사함이 우리의 모든 것을 능가한다는 것을 알지요. 로마서5장에 보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죄가 왕 노릇한 것처럼 예수님의 한 분의 의가 우리에게 넘치도록 은혜가 넘치는 거예요.
그 냄비 우동에 냄비가 다 못 받아요. 우동을 너무 많이 줘가지고. 우리는 그냥 죄 씻음 해가지고 다시 상쇄하는 죄의 의가 없어지는 그 정도로 중성쯤 평균 마춤도 감사한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고 죄가 있는 곳에 의가 흘러넘치게 만들었어요. 감당이 안 돼요. 마구 넘치니까. 이제는 뭐 주님의 덕분입니다. 말도 부끄러워. 그 말을 능가해요. 실제로 주신 의가.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신 모든 환경은 우리로 하여금 죄 아닌 것도 죄를 생산하게 하시고 그리고 그 죄가 니만 있는 죄가 아니고 아담에 속했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생긴 그 죄인데 그 죄가 있는 곳에 주님의 긍휼과 은혜가 그 죄보다 더 훨씬 더 넘치도록 우리에게 주셨다는 겁니다. 니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니가 똑똑해서가 아니라 니가 성경공부해서가 아니라 주님 자신이 주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냥 주님의 자의적인 일방적인 사랑에 의해서 그렇게 퍼부어주는 겁니다. 그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자기의 행함으로서 마중 나와서 모독하지 마세요. 그 우리의 마중 나올 행함은 우리에게는 애초에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어요.
자, 그러면 그 다음 진도 나갑시다. 그 다음 문제, 죄가 없는데서 죄가 생기고, 그 모든 죄가 결국 한 묶음이 된다는 그 작업을 위해서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 던져 넣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 던져 넣었다 할 때에 요 경우를 분명히 보여주는 그 성경구절이 뭐냐 하면 다니엘 +3인조, 다니엘 세 친구, 저는 다니엘밴드라고 하는데. 다니엘밴드. 드럼, 베이스, 퍼스트기타 보컬까지 합해서. 다니엘밴드.
다니엘 세친구가 어디서 그들이 신앙의 티가 나던가요? 따로 산기도 했습니까. 기도원에서 합숙했어요? 아니죠. 어디 있었습니까? 더러운 공무원생활하지요. 다니엘 세친구가 직업이 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그 국가가 어떤 국가냐 하면 짐승이에요. 어두움입니다. 여러분들이 차를 몰고 가다가 짧은 터널 말고 긴 터널을 차를 몰고 가다가 바깥에 환하게 맑게 개인 하늘이 오게 되면 확 눈부시지요. 그게 어두움이 있었기 때문에 눈이 부시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어두움에 있다는 말은 그 빛이 왔을 때, 어두움에 있었던 모든 시절이 아무것도 아니고 신경쓸거리도 안 된다는 것을 확 눈부시게 찬란한 그 빛 앞에서는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을 잊게 만들어요. 제가 이런 잘못했습니다. 저런 잘못했습니다. 그런 말조차도 주께서 손가락으로 쉿! 그런 말도 하지 마! 그것도 자칫하면 니 의가 돼. 하지 마! 하지 마!
이 찬란한 눈부신 빛으로 그걸 니가 찬미해. 그걸로 니가 고마워해. 그걸로 끝이야. 그러면 돼. 딴소리하지 마! 어릴 때 했고, 내가 목사 욕을 했고. 목사 욕을 해도 괜찮아. 목사 욕 얻어먹어도 괜찮아. 뒷담화해도 괜찮아.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내가 아내를 때려가지고 늑골 나가고. 늑골 두 대 더 나가도 돼. 어차피 그 아내 내가 죽일 거야. 일단은 하지 마! 이 빛을 바라보는 거예요. 방향성이지요. 방향성.
어디를 쳐다보고 사느냐, 이 더러운 공무원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다니엘 세 친구가지고 여기다가 집어넣어버린 거예요. 여기에 얼마나 치열한 암투와 경쟁과 시기와 질투, 정치적인 모함, 얼마나 많겠습니까. 누가 대선 후보라 하면 마누라 논문 같은 거 다 뒤집고. 술집에서 일한 거부터 해가지고 전부 다 엎고. 이 더러운 세상에 던져놔 버린 거예요. 여기다 던져 놓습니다.
그러면 왜 그래야 되느냐 죄를 한 묶음 만들기 위해서는 여기서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어떤 씨앗이 필요해요. 구심점이 필요하다고요. 이 다니엘 세 친구 밴드는 바로 그 당시 율법입니다. 율법은 이 땅에 딱 떴다 하면 주위에 어두움이 율법을 질식시켜 버립니다. 군말 못하게. 왜? 여기는 뭐가 있느냐 하면 어두움은 어두움의 권세가 있어요.
오늘 스가랴 한 번 봅시다. 스가랴7장14절, 내가 그들을 바람으로 불어 알지 못하던 여러 나라에 흩어졌지요. 그 후에 이 땅이 황폐하여 오고 가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을 황폐하게 하였음이니라, 이리 되어있지요. 원래 이 땅은 이방인들이 살던 그 토착민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히브리인들을 이 땅을 몽땅 차지하게 하셨지요. 차지하면서 조건이 있었습니다. 율법대로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쉽게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은 전부 다 한 묶음이에요.
여기에 10절에 봅시다.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 압제 받는 자 이 모든 사람은 그 당시 애굽에 있을 때에 이스라엘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당했던 일들이에요. 그게 출애굽21장에 나옵니다. 출애굽기21장에 보면, 사람들을 빼낼 때 사람만 빼낸 게 아니고 거기에 뭐도 같이 묻혔느냐 하면 율법이란 걸 새롭게 첨가해서 갖다 붙여놓은 거예요.
그 율법의 내용이 뭐냐, 출애굽기22장 20절을 보면 여호와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해놓고 21절에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뭐 되었다 했습니까? 너도 같은 처지 나그네처지였잖아. 왜 니 옛날 신세 모르느냐, 니가 만일 노가 분열하면 내가 만약 가난한 사람들에게 학대하게 되면 나는 나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가 되고, 과부의 남편이 되어가지고, 직접 내 몫을 내가 니한테 찾겠다. 이리 나와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지상에 나타나는 방법은 이 세상에서 의지할 데 없고 오갈 데 없는 고아와 나그네와 그리고 과부의 모습으로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율법이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공부한 거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되면 없는 죄를 생산한다, 했지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하느냐, 율법을 개입시켜서 성사시킨다. 율법이 개입시키게 되면 없는 죄니까 이 죄는 뭐냐 하면 내 것을 키우고 내 것을 보호하고 내 것을 사수하는 게 죄거든요.
내 것을 내 것이기 때문에 내가 지키는 게 그게 왜 죄냐 할 때는 여기에 율법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내 것이라고는 아예 없는 자가 누구의 보호를 받는다? 주님의 보호를 받을 때 주님으로부터 보호 받는 것이 뭐냐, 긍휼과 자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자기 게 있다고 자기를 지켜버리면 무슨 요소가 누락이 되느냐 하면, 긍휼과 자비 요소가 거기에는 없어요. 긍휼과 자비 요소가 없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없는 거예요. 아담에 속한 자를 건져줬다. 죄밖에 없는 인간을 천국가게 한다. 이것은 자체적으로 자기를 격려하거나 독려해가지고 천국갈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것을 내가 지키게 할 때 내가 내 것을 지킬 때 내 것을 잃어버려도 나는 남잖아요.
그런데 고아와 과부라 하는 것은 이건 주님께 종속되었기 때문에 주님과 연관되어 있는 과부요, 주님과 연관된 고아요, 주님과 연관된 나그네가 되는 겁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이 된다? 주님에 의해서 과부되고, 주님에 의해서 나그네 되고, 주님에 의해서 고아가 되는 그 집단체가 될 때 그건 이상적인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속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요소가 우상 섬기면서 하나님의 정신이 사라지기 시작해요. 사라지니까 여기서 나오는 유명한 사자성어, 어두움의 세계를 지배하는 사자성어, 이건 팻말로 크게 한다든지 표구점에 가서 액자 만들던지 해야 돼요. ‘각자도생’ 식구가 아빠, 엄마, 아들, 딸 있거든요. 이거 하나 붙이세요. 나이 서른 되면 각자 나간다. 각자도생하기로. 부부는 각방쓰기. 이런 거. 각자도생. 이게 원래 인간의 본모습이에요.
예선전 거쳐서 준준결승, 준결승, 결승, 결국 남는 마지막 최종적인 승리자는 누굽니까? 나에요. 나라고요. 그래서 이 각자도생에 결정판이 뭐냐 하면 자살입니다. 자살. 자살할 때 어떤 인간도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어요. 끝내 이기리라. 마포대교에서. 끝내 이기리라. 누구하고 의논하느냐 하면 본인하고 의논해요. 본인이 본인하고 의논해서 죽기로 결심한 겁니다. 완전히 귀신이지요. 귀신.
나의 옳음. 나의 옳다는 것을 누가 지켜주느냐 하면 내 말고는 지킬 자가 없어요. 세상은 자꾸 나를 지적하니까. 평생을 도망치듯이 살아요. 내 지적 받음을 내 옳음을 지키고 견디기 위해서는 지적하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는 거예요. 월급 준다고 대기업에 갔다가, 어디로 도망칩니까? 중소기업으로 도망쳐요. 중소기업에서 또 잔소리 하니까 어디로 도망치느냐, 치킨 집으로 가요. 치킨 집을 하든지 아니면 퇴직해서 파리바게트 하던지. 대기업 있을 때 일주일52시간 근무하고, 지가 카페하든지 커피 전문점 할 때는 15시간 일하고, 이렇게 일해도 다시는 그 대기업에 안 가는 이유는 누구든지 나를 지적질 하지 말라는 거예요.
무엇이 옳은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나한테 잔소리하지 않는 게 옳은 거예요. 특히 부부사이. 잔소리 좀 하지 말라. 내가 잘못한 것은 인정해주는데 잔소리 좀 하지 말라. 잔소리 하고 싶어도 못한다. 이게 부부사이만 아니라, 자식도 마찬가지에요. 눈 콱 닫고 문 잠겨버려요. 밥 먹어라. 내가 먹고 싶을 때 먹는다. 대화가 그리 가요. 꼭 나를 집어넣어요. 나를. 밥 먹어도 내가 나를 지시할 거야. 내 말고 지시할 사람 아무도 없게 하는 거. 천상천하유아독존. 천상천하유아각자도생이에요. 이게 결정판입니다.
이게 다니엘 세친구가 있던 그 동네에요. 이게 참 어려운데, 이스라엘이 망했잖아요. 오늘 스가랴7장14절, 망하게 되어있지요. 마지막에. 망하는데 주께서는 흩어지게 하면서 구심점으로 다니엘밴드, 다니엘과 플러스 삼인조밴드, 그것을 어디에다가 집어넣습니까? 짐승의 나라 그 당시 최강의 바벨론 짐승의 나라 집어넣는 이유는 끝내 진짜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가 세상의 가장 위대한 제국을 어떻게 한다? 박살내버리더라. 박살내버린다.
이 다니엘 세 친구가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속에서 그들이 어떤 수모를 받았습니까? 열심히 일해서 승진했다. 그걸로 끝이 아니지요. 그래서 그들은 왕에게 칭찬받았다. 그걸로 끝이 아니지요. 세상이 가만두지를 않지요. 그걸 끄잡아 당기기 위해서 법을 만들되 한 놈만 밟아라. 위조로 법을 만들잖아요. 한 놈만 밟아라. 다니엘 기도를 하는 것을 기회를 통해서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법을 만들 정도에요.
따라서 오늘 공부에 의하면 다니엘의 존재는 모든 인간의 세계를 한 묶음으로 하는데 핵심씨앗이다. 알맹이가 돼요. 구심점이 돼요. 오늘날 성도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성도가 행복하고 편안하게 인생을 마감하라고 성령 준 게 아니에요. 성령은 성도를 어디로 인도한다 했습니까?
반드시 십자가로 인도하지요. 제가 오늘 강의 중에서 끝으로 진짜 중요한 거 이야기하고 싶은 건데, 기존 세상에서 특히 교회에서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면 일단 하나님을 하나의 냄비우동의 냄비로 이렇게 걸쳐놓으라는 거예요. 기존의 목사들이. 하나님이라는 것, 계시다는 것. 하나님은 계시니까 요거는 괜찮으니까 두고 거기다가 여러분들이 뭐가 지금 모자르냐 하면 성경 내용이 모자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냄비에다가 성경 내용들을 다 끌어서 집어넣으면 당신은 구원받습니다. 천당 갑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이론이에요.
이 냄비 자체가 죄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교인이 와서 하나님 믿으면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뭐로 굳히냐 하면 자기 의로움으로 자기 옳음으로 굳히게 돼요. 굳혀 있어요. 32년 동안 집 앞에 있는 교회 가서 32년 동안 배운 게 이거 배운 거예요. 끌어 모아! 끌어 모아! 성경 보고 기도해서 모든 십자가든, 피든, 다 끌어 모아. 그러면 이 냄비는 멀쩡할 거다. 천만에 말씀. 이 냄비는 찢어버립니다. 이 십자가 내용이.
하나님 믿는 거 자체가 죄가 된다는 거예요. 이게 성령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겠어요. 하나님보고 하나님이라 하고. 하나님 계시는 거 보고 살아있다고 했으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를 얼마나 칭찬하겠는가, 얼마나 맛있게요! 얼마나 칭찬하겠지요! 칭찬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게 바로 우리가 죄를 모르는 이유에요. 하나님 믿는 게 죄가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것은 할 수 있는 것은 일체 구원의 방식에 담길 수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동안 성경 말씀을 몰라도 이상하게 하나님 존재는 인정한다. 그 인정하는 거 그거 우상입니다. 그거 인간태어나면 다 할 줄 아는 거예요. 로마서1장21절에.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인간 태어나면 애들보고 3개월 된 애에게 해보세요. 기도하자. 예. 기도 누구한테 했어요? 하나님한테 기도했어요. 그러면 너가 갖고 있는 신학적인 견해는? 이건 몰라요. 하여튼. 무조건 하나님만 있으면 그건 이제 시작은 제대로 된 걸로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믿으니까.
왜냐하면 인간의 악마가 준 이성가운데서 초월적인 내용을 계속 요청하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왜냐하면 신이 라이벌이기 때문에. 목표가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인간들 상대해서 저 사람들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뭐냐, 내가 신처럼 되는 게 이게 선악과 따먹을 때 휴유증이에요. 신이 라이벌이기 때문에 일단 라이벌을 인정하기 때문에 그건 하나님 보기에 먹고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냄비는 괜찮다고 보고 지금 직장일한다고 바빠서 성경 못 봤는데 목사님은 성경 연구하니까 그저 이 냄비나 채워주세요.
냄비 자체가 이게 저주인데요, 저주에다가 저주를 추가해봐야 안에 들어오면 전부 죄로 다 변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변한 것이 사울에서 사도로 변한 이유가 요거 변한 거예요. 내가 여호와라고 한 그 여호와가 우상이었다. 내가 하나님 하는 그 하나님이 가짜였다는 것. 이게 변한 겁니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가 나에서 나왔던 모든 것은 이게 배설물 쓰레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이것이 뭐냐, 나의 부활을 기대하는 게 아니고 나의 부활은 애초에 생기지 않고 주님의 부활 안에 우리가 참여함으로서 부활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을 첫째 부활 그 다음은 우리 부활이에요. 주님의 부활이에요. 그런데 그 주님은 사람에게 납득되지 않는 분이에요. 사람들에게 내쫓음을 당한 분이에요. 인간의 자아들의 집합체, 인간의 자아들의 무리에서 전혀 끼어들 수 없는 자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인 겁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소외당한 아담. 그게 진짜 인간이에요. 진짜 인간의 영이 성령이 우리에게 와버리면 나라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고 가짜인 것을 아주 휘파람 불면서 우리는 고백해야 되지요. 신나서 고백해야 돼요. 주여, 나는 인간도 아닙니다. 집안에 있는 그릇 하나 전부 다 선물입니다. 자식도 선물이고, 이만큼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이것이 바로 뭐냐 하면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십자가 의, 그 의 안에 있는 이미 들어온 이스라엘의 구성요건이 되는 거예요. 오늘 스가랴 본문을 죽 보면서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죄를 생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내에 고아와 과부를 일부러 발생시켰습니다. 고아와 과부되는 것이 지 죄 때문에 된 게 아니에요. 남보다 더 죄를 지어서 고아 되고 과부된 게 아니에요.
바리새인이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않고 흉을 봤는데, 세리는 어떻게 했습니까. 바리새인 옆에 있는 세리는 감히 고개를 못 들었어요. 뭘 보는가, 같은 사람하고 비교를 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 주님 보시기에 맞습니다. 나는 죄인으로 태어났습니다. 니가 바로 의인이다, 라고 해요. 의인.
뭘 잘한 게 아니고 니가 의가 있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다. 라는 것을 스스럼없이 고백할 수 있는 거예요. 아주 자유롭게, 가볍게, 누구 눈치 보지 않고 오히려 본인이 화들짝 놀랄 정도에요. 아~ 나같이 잘난 체 하는 인간이 내가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죄인이구나! 그걸 알아챈다는 게 자각한다는 게 이게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겠어요.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이 기적은 주님의 작업이기 때문에 마음껏 우리가 주님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켰다는 것은 이제는 어떻게 되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 갈라디아서6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십자가만 자랑한다, 했지요.
십자가만 자랑하는 그것이 율법을 완성하는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가랴를 통해서 어떻게 예언되었는지를 왜 이 말씀이 인간 세계 속에 들어왔는지를 저희들이 알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왜 스가랴 말씀의 완성인지를 왜 그 안에서 새롭게 이스라엘이 탄생되는 것을 저희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하신 일만 증거 되고 자랑하고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보충강의)
시간 있으면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하면 자아에 관한 거거든요. 자아. 자아가 어디서 생기느냐 하는 거예요. 나가 어디서 생기느냐. 원래 아담은 자아가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왜 아담이 자아가 없느냐 하면 자아가 되려면 하나로서 온전해야 자아가 되는데 아담에게는 육체가 둘이 있어요. 여자. 그래서 둘을 유지해야 하나가 돼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 둘이 있어야 하나가 돼요. 혼자서 자아라고 표현하면 안 되는 거예요. 둘이 있어야 하나가 되거든요. 그래서 그 아담이 요즘 사람 같으면 이해 안 되는 이야기에요. 내 살 중에 살이요, 내 뼈 중에 뼈다. 나라는 것을 어디서 찾느냐 하면 바깥에서 찾아요. 바깥에서. 자기가 아니고.
아담을 잠들게 해서 그 갈비대를 여자를 만들었지요. 그러면 아담의 중요한 요소가 아담 몸체 안에 있는 게 아니고 아담의 몸체 바깥에 새로운 개체로서 성립이 돼버린 겁니다. 그러면 이리 되어버리면 내 하나로서 자체적으로 순환시켜서 모든 걸 완결시킬 때는 그 완결이 깨져버리고, 관계, 그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가 온전하게 드러나게 되어있어요.
한 쪽은 사랑을 받아야 되고, 한 쪽은 사랑을 주는 관계, 그 사랑이 이쪽에서 이쪽으로 이동하는 관계를 통해서 사랑은 구현되는 겁니다. 혼자 지 사랑하는 것은 그건 지 자살할지언정 그건 사랑이 아니고요. 내 사랑을 받는 쪽이 있어줘야 사랑이 살아요. 그래서 주님도 혼자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주님이 사랑해야 될 자기 백성이 있어줘야 주님의 사랑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담이었고, 그 아담이 범죄하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이 예수님에게 그게 아담에게 있던 모든 그 성과가 성취가 되잖아요. 그래서 인간의 자기를 지어서 자기를 자아라 하는 것은 이것 자체가 주님보시기에 반칙이고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미 있었던 제도와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형식을 드러내기 위해서 실패한 형식을 도입한 것이 결혼제도에요. 결혼해봐라. 이게 제대로 된 결혼이 되는가, 일단 해봐. 일단 해보라고. 해보니까 특히 해보면서 거기에 뭐가 따라오느냐 하면 모세의 율법이 따라오지요.
엄연한 연고 없이 아내를 못 버린다. 라고 해놓고는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 하면 이혼증서 써주면 이혼가능하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런 법이 올 때마다 이혼하고 싶어 환장한 남자들은 혼자 살기 위해서 온갖 정당화된 합리화된 성경 법을 찾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했습니까? 마음속으로 간음한 게 뭐라고 했습니까. 간음죄죠. 완전히 모든 걸 뒤엎어버리는 거예요. 판을 뒤엎어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간음죄만 성립되는 게 아니고 누구 형제를 미워하게 되면 살인죄 되지요. 덮친데 겹친 거예요. 한 번 행해도 징역15년에다가 그거 하면 징역20년, 징역56년, 계속 덮친 것 해가지고 나중에는 내 몸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저주의 요인이 되게 만들어버려요. 나한테 육체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의 신체를 다른 신체로 바꿔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예수님의 아주 세밀한 배려에요. 그 신체 가지고는 어떤 법도 어떤 말씀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시고자 우리의 신체를 허락하신 거예요.
이런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신체를 주신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그걸 감사해야 돼요. 어차피 깨질 거 부러질 거, 넘어지고, 자빠지고, 나중에 정신까지 없어지면 진짜 헤매게 되지요. 그래서 요양병원에 우리 어머니께서 가셨지만 가보면 그 요양병원에 있는 사람마다 젊을 때는 제정신이라고 우길 때는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것 같고, 남편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막상 몸 불편하니까 자기만 사랑했다는 것이 그게 안에 진열장에 빵처럼 죽 누워있습니다. 또 할머니들끼리 싸워요.
내 기저귀 누가 가지고 갔느냐, 해가지고. 인간의 본색이 그대로 다 노출되지요. 얼마나 교회의 교인들이 위선자인가를 목사부터 해서 얼마나 위선자들인가 분명히 아셨지요. 아까 그 냄비우동했지요. 됐어. 됐어. 이제는 됐어. 이제부터는 담으면 돼. 이것 담고, 이것 담고, 비빔밥 다 만들어놔요.
자아라는 것은 원래 없던 건데 악마가 집어넣었다. 요렇게 보시면 돼요. 자아라는 것, 타인을 통한 자아가 아니고 내 육신, 거울에 비친 내 신체만으로 그걸 자아라고 보는 것은 이것은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신도 아니면서 신인 체 하는 그 거짓된 악마의 계략이었습니다. 참, 어느 누구도 아담에 속했기 때문에 이러한 속성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자꾸 의롭게 살려고 하지 말고 착하게 사는 것은 조폭들이 하는 짓이지 조폭들이나 차카게 살자. 하지요. 그렇다고 일부러 악하게 살지 말고, 범사에 감사하는 고마운 줄 아는. 감사하면서 잡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