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물 퍼내기

아빠와 함께 2022. 1. 2. 09:23

안양20211216a슥9장17절(물 퍼내기)-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9장. 16절, 17절. 15절부터 보겠습니다.

“15.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 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16.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17.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이리 되어있지요. 여기에 16절에 보면,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제 수요설교 때에 구원에 대해서 제가 하나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구원이란,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벗어나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 존재하는 것.’ 이게 구원이다.

여태까지 내가 있던 그 곳, 내가 있던 그 곳에서 벗어나서 내가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는 곳에 가는 것. 이게 바로 구원이지요. 마태복음20장에 천국을 설명하면서 포도원 비유를 이야기하면서 포도원의 일군을 통해서 천국에 대해서 미리 이야기해줘요. 사람들이 자꾸 예수님 오시기 전에 사람들이 자꾸 천국, 천국 이야기하니까 그거 전부 다 엉터리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미리 이야기해줘요. 미리. 미리 알려줘요. 천국이 궁금하니까 미리 알려준 거예요.

천국은 뭐냐 하면 내가 존재한 곳에서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곳으로 벗어나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포도원 비유 일군에서 천국은 뭐냐 하면 “왜 내가 노동한 대가 없이 이곳에 오게 하셨습니까?” 이거에요. 내가 오후5시에 와서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품삯을 주잖아요. 한 시간 일했는데 하루 품삯을 줬잖아요. 오후 5시에 온 사람들. 그러면 한 시간만 일하면 한 시간 품삯을 준다는 내가 살던 고향, 이 세상에서는 내가 노동한 대가로 내가 사는 거예요. 이게 아까 이야기한 일반화에요. 일반화.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거에요.

그러면 천국가려면 무엇이 완전히 작살나야 돼요? 일반화적인 삶을 작살내야 돼요. 내가 살던 동네의 사는 방식이 박살나줘야 된다 말이지요. 이게 제거되어야 돼요. 내 노동으로 내가 복을 받는다는 것이 제거되어야 된다는 말이에요. 헌금해서 전도해서 기도해서 복 받는다. 이게 제거되어야 돼요. 예배 참석해서 복 받는다. 이게 제거되어야 돼요. 이건 익히 아는 거니까. 익히 아는 걸 그냥 가버리면 이건 구원이라는 게 성립이 안돼요.

그래서 성경에서 뭐가 중요하느냐 하면 이방민족의 존재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이방민족들의 특징은 우상을 섬기게 되어있어요. 우상을 섬기는 자들. 이방민족 본인은 우상이라 하지 않고 뭐로 보느냐 하면 신. 다른 말로 뭐냐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에요. 하나님을 섬기는 자.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하나님이 공격을 해서 그거 완전히 박살냅니다. 이게 15절이에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셔서 그들을 물맷돌로 밟아버리지요. 포도를 물맷돌로 밟아버리면 색깔이 어떻게 됩니까? 포도가 터져서 색깔이 파란색 입니까? 붉은 색입니까? 붉은색 나오지요. 타작마당. 타작마당의 특징은 알갱이 하나의 존재성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포도 하나가 있는데 이걸 물맷돌로 밟아버리면 여기서 뭐냐 하면 포도 없다! 가 돼요. 그게 요한계시록14장18절부터 보면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그 다음에 포도주 뭡니까? 포도주 틀이지요. 포도주 틀은 포도를 살리는 게 아닙니다. 포도를 으깨버리는 거예요.

포도 개체의 존재감을 으깨버리는 겁니다. 으깨버리니까 그 포도주 틀에서 뭐가 나옵니까? 붉은 액체가 흐르지요. 그걸 뭐냐, 피가 흘러서 천육백 스다디온. 정사각형 이 세상전체가 완전히 피바다가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개체를 애초부터 개체를 인정한 적이 없다. 개체를 인정하지 않고 그냥 집단으로 본 거예요. 그런데 현대인들은 집단이 중요합니까? 내 개인이 중요합니까? 개인이 중요하지요. 그게 개인주의 아닙니까. 개인주의거든요. 개인이 자본을 흡수해서 나는 나만이 사는 거예요. 더불어 사는 게 아니고 더불어 사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나만 사는 게 자본주의에요. 나만 사는 게.

옛날에 60년대에 노래는 같이 사는 거예요. 흙에 살리라. 홍세미. 몇 달 전에 죽었지요. 갑자기 심장으로 죽었거든요. 노래 한 곡으로 평생 먹고 산 사람인데. 불교 집안인데 아내가 지독하게 기독교여서 마지막에서 예수 믿고 교회 다니고 죽었다는 소문이 있어요. 흙에서 사는 거. 더불어 사는 거. 나훈아의 <고향역> 이런 거. 그냥 더불어 사는 거예요. 요즘 애들은 한 집에 살아도 자기만 살아요. 자기 방에 들어가서 문 잠가 버리고. 게임하고. 한 집에 살아도 자기만 살아요. 자기만 살기 때문에 외부의 누구의 가족도 이용하려고 하지 어떤 가정에 대한 그러한 사랑, 그런 것은 장남이나 몰라. 그런 흉내 낼까. 다른 차남이나 형제는 지만 생각하고 동생 생각도 안 해요. 장남은 희한해. 팔자인 모양이라.

현대는 전부 다 개체 중심이에요. 그래서 돈을 모으는 이유가 내 잘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옛날에 여고 졸업해서 돈 벌면요, 의례히 부모는 돈 가지고 와. 시집갈 때 돌려줄게. 돈 가지고 와! 이리 되거든요. 내가 알아서 돈 모아가지고 니 안 그러면 화장품 사고 다 쓰니까. 내가 모아가지고 다 해준다. 의례히 자식은 고등학교 졸업해가지고 경리 보다가 돈을 부모한테 주는 걸로 되어있는데 지금은 부모한테 용돈 따로 받고 지 돈 지가 챙기고. 지 통장 따로 챙기고. 부모가 내주는 건 당연한 거고 내가 왜 부모 돈 대주나. 그냥 내복이나 사 입으세요. 첫 달 봉급 내복으로 보내고 그걸로 끝났어.

가정 책임. 이건 장남이나 장녀가 하는 짓이지 그 다음부터는 동생들은 이런 것도 없어요. 누가 희한한지. 장남이 희한한지, 동생이 희한한지. 어느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지 분간이 안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개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요. 왜냐 하면 개인의 존재는 이미 확정됐습니다. 누구냐, 바로 예수님만이 개인의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정한 이름은 주의 이름밖에 없어요. 다른 이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름은 아담에 속한 이름으로 간주하지 그 이름에 의미 없어요. 그래서 아담의 이름 플러스 여기에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이게 계시의 이름이 되게 되고 계시의 이름은 주의 이름의 내용물이 되는 겁니다.

아브람이라는 아담의 이름에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니까 아브람이 뭘로 바뀌었어요?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지요. 이 아브라함은 아브람의 이름이 아니고 예수님의 하는 일, 내용을 보여주는 거예요. 아브라함. 왜냐 하면 아브라함은 자식이 하나도 없어요. 없는데 이름만 덜렁 뭡니까. 많은 민족의 아버지라 되어있어요. 많은 숫자의 아버지. 어떤 집단의 조상이 되어버려요. 그러니 이건 아브람에 관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관한 거예요.

이삭도 마찬가지에요. 이삭이라는 이름 자체가 농담, 우습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인간의 일반성에서는 포함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이 하실 일이에요. 야곱이 뭐로 바뀌었지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지요. 야곱은 아담의 이름이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전쟁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매일 전쟁해야 돼요. 이방민족과 전쟁해야 돼요. 우상 섬기는 것과 진짜 하나님 섬기는 것과 전쟁해야 돼요. 그래야 일반성 속에서 특수성이 뽑아져 나오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된 자만 들어가는 하나님의 경계선을 형성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선을 넘을 수가 없어요. 인간은 매일 몸부림치고 행복에 몸부림 쳐봐도 그것가지고 선을 넘었다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저리 가! 오지 마! 오늘 설교 제목 ‘오지 마!’

그런데 인간은 과학적으로 따져보니까 이 개체 중심인데요. 개체로부터 집단이 있어야 된다는 힘을 모아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힘으로 모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개체에서 어떻게 집단화될 수 있느냐, 그 개체의 속성이 집단화의 공통적으로 연결되어있는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 문제가 바로 생명과학Ⅱ 20번 문제에요. 수능에. 정답 없음의 그 문제.

하디-바인베르크의 바인베르크의 법칙을 거기다가 문제에다가 고지했거든요. 하디는 영국 사람이고, 바인베르크는 독일 사람인데 이 사람이 1908년 때 했던 법칙이 있어요. 그 법칙은 이 법칙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같으면서 왜 다르냐, 거기에 대한 법칙이에요. 인간은 같아야 되는데 어떤 점에서 다른가에 어떤 법칙을 내놓은 겁니다. 모든 인간은 코를 갖고 있지요. 개체에. 그럼 이건 인간의 공통점이지요. 공통점인데 코 중에서 딸기코가 따로 있는 거예요. 딸기코가. 딸기코가 있고, 정상적인 코가 있다고 하면, 딸기코는 뭐냐 술 먹었을 때에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는 게 딸기코 아닙니까. 조금만 들어가면 코가 벌겋게 되는 거예요.

이건 왜 다 정상적인 코가 아니고 딸기코가 왜 등장하느냐, 여기에 대한 법칙을 세운 겁니다. 정상적인 것을 우성이라 하고 딸기코를 열성이라 할 때, 우성과 열성이 1대에 거쳐서 2대에 거쳐서 3대에 거쳐서 서로 서로 세대가 지나가면서 서로 섞이게 되는데 섞일 때 이 비율이 변화느냐, 안 변화느냐의 법칙이 아까 하디-바인베르크 법칙이에요. 결론은 뭐냐 하면 폐쇄된 집단에서 어떤 새로운 외부 요소가 없는 한 안에서는 요 우성과 열성의 법칙은 한결같이 변화지 않는다. 그 법칙이에요. 이게.

그럼 이것이 그런 상식적인 이야기가 왜 필요 하느냐, 그 집안에 유전병이 있을 수가 있거든요. 그 유전병이 서로 대를 이어서 다른 집안끼리 계속해서 교접을 하고 결혼을 해도 그 유전병은 계속해서 동일한 비율로 이어지는 거예요. 안젤리나졸리 알지요. 유방암 걸릴까 싶어서 미리 잘라내는 것. 이 법칙을 믿었기 때문에 잘라내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 과학 자체가 분명히 개체이면서도 어떤 집단에서 인간은 몸부림 쳐봐도 빠져나갈 수가 없는 거예요. 개체를 고집하는 게 뭐냐 하면 자아에요. 자아. 나라고요. 나. 오직 나는 나를 내 안에서 나를 내쫓기를 싫어해요. 나는 나를 계속 영원토록 품고 가고 싶어요.

그런데 그 나라는 게 이게 원래 창조 때 없던 거예요. 나 라는 게. 이게 어디서 생겼는지. 그건 창조 때 일어난 사건을 잘라버렸으니까. 성경에서는 분명히 언급해 줬잖아요. 성경에서는 분명히 진리를 이야기해줬는데, 선악과를 완전히 그걸 개무시하고, 잘라버리고 분명히 십자가를 통해서 자아가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미 죽은 존재로 간주하거든요. 자아가.

인간은 자아가 있을 이유가 없어요. 그냥 몸만 있으면 되지 자아가 있을 이유가 없다고요. 고린도후서12장 한 번 봅시다. 참, 이게 불교의 이론에 의하면 이 자아를 없애는데 아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나는 없고 의식뿐이다. 이런 주장하면서 나오는 대목이 있어요. 여기 고린도후서12장1절에서 3절 보겠습니다.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러니까 어떤 존재가 있다는 것. 어떤 몸이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아요. 사도 바울이. 어떤 분이 있는데 그 분이 삼층천 천국에 올라간 거예요. 그 천국에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고 천국에 사람이 있어요. 있는데, 전에 내가 나로 살던 그 지점에서 내가 나로 살지 않는 다른 환경으로 바뀐 게 구원이라 했지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를 위해 살다가 나가 아닌 다른 분을 위해서 사는 존재로 바뀌는 게 구원이에요. 이 세상에서는 구원이라는 게 왜 안 되느냐 하면 다른 분을 위해서 살게 되면 결국 나한테 좋은 일이 되지요. 라고 결국은 나를 그대로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나부터 시작된 아이디어가 그 아이디어를 내가 스스로를 뽑아낼 수 없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렇게 해서 그 결과가 나한테 결국 이득이 되고 나한테 도움이 된다면 나는 그걸 믿겠습니다. 하는 거래, 흥정, 그걸로 계속 가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 안다고 복음 모르는 사람하고 만나가지고 복음 전파한다고 복음 이야기하면서 복음 전하는 본인이 나중에 헷갈려버려요. 주께서 그렇게 조종하시지요. 저 사람 정도는 나는 복음을 알고 저 사람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충분히 저 사람을 설득할 수 있고, 저 사람 전도가 가능하다고 시작은 그렇게 좋게 했는데, 결국에는 그 사람의 답변을 못하고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어떤 상황에서 해결하려고 내가 나설 때에 반드시 나의 정당성을 경유하기 때문에 그런 사단이 일어난 겁니다. 말하고 있는 나는 너보다 옳다고, 말하고 있는 나는 니보다 아는 게 많다는 나를 본의 아니게 형성시켜 놓고 그걸 들키지 않은 채 하면서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위장하니까 상대방이 마귀가 되어가지고 눈치 채지요.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떤 한 사람이 있는데 나라고 하지 않고, 어떤 한 사람이 있는데 14년 전에 하늘에 올라갔는데 그가 몸밖에 있는지 몸 안에 있는지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니 내가 굳이 그걸 알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시면 되지 내가 굳이 알 필요가 뭐가 있느냐 모든 일은 그 분께서 하시는데 내가 했나? 그 분이 하셨는데.

아까 강의 처음에 한 거 다시 해봅시다. 포도원에서 마지막 한 시간만 일했는데 포도원 전체의 품삯을 줄 때에 내 쪽에서 그걸 설명할 수가 없어요. 그건 주인한테 물어봐야 돼요. 왜 저에게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해답은 내가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가 아니라 내가 알 필요가 없다는 쪽으로 넘겨야 돼요. 질문을. 주께서 알아서 하신 걸로 저는 족합니다. 그걸로 된다 말이지요. 그걸 알려고 굳이 애쓰게 되면 나는 그걸 알았기 때문에 구원 받는다는 논리가 또 성립돼요.

3절에 보면,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자꾸 자기 자신을 가지고 ‘그’라고 이야기해요. 삼인칭을 사용한다고요. 사도바울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나가 아니고 삼인칭이에요. 이건 주님의 시선에서 나를 바라보니까 나는 주님의 소유물이 되니까 3인칭이 되는 거예요. 이 물건 내 것이라 할 때, 물건이 주님의 물건이 되는 거예요. 주님의 소유의 물체가 되는 거예요. 소유물이 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자기로부터의 해방이지요. 내가 알던 나로부터의 벗어남, 이게 구원이잖아요.

그가 이끌려갈 때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했지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이거 부산강의에서 했어요. 이 세상은 언어의 세계라고요. 이 사회 자체가 언어의 세계에요. 언어에 뭐가 실리느냐 자신의 요구사항과 욕망이 실리고 그 욕망은 내가 만들어낸 욕망이 아니고 나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던 그 타인의 욕망이 언어를 통해서 나한테 전달됐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 말에 담긴 욕망을 내가 탐을 내게 되어있어요. 욕망은 자극 받게 되어있으니까요.

친구 만나서 친구가 하는 말이 “나는 한남빌에서 산다. 한 200억짜리 집에 산다.” 라는 말을 했잖아요. 그런데 말에 뭐가 담겨있습니까. 나 200억짜리 산다는 타인의 욕망이 담겨있지요. 욕망이 담겨올 때 저거 사나, 이거 사나 뭐 하루 된장 찍어 살면 되지. 라고 쿨하게 잊어보려고 갖은 노력해도 소용없어요. 나도 이왕 죽는 거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갑자기 원룸에 사는 자기 신세가 처량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때까지는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 맞대고 네 식구 한방에 자면 되지. 이게 이제 내 팔자도 참 더러운 팔자다. 그 소리 듣기 전에는 낙원이었던 자기 원룸이 완전히 지옥으로 바뀌었어요. 그러니까 타인은 새로운 나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타인의 욕망이. 나는 그걸 거부할 수 없도록 내 욕망에 의해서 내가 포로 잡혀있고 그래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나로 다가서면 어떤 경우라도 그건 해결점이 전혀 없습니다.

뭐로 다가서야 되느냐 성도라면, 둘 다 언약의 발산으로 다가서야 돼요. 언약의 발산. 복음의 방출로 다가서야 되지요. 나 믿었다 하면, 너만 믿나 나도 믿었다 해가지고 절대로 나중에 식식거리면서 둘 다 화만 내고 있는 거예요. 둘 다 없애버리고 다가서야 되지요. 없는데 주께서 있게 하셨다는 것. 주의 은혜만 다가서지요. 예를 들면 나는 한 시간만 일했는데 천국 갔다. 이리 나오면 나는 30분일했는데 천국 갔다. 나 웬일인지 모르겠어. 나는 포도원 구경도 안했는데 천국 보내줬어. 그렇게 저희들끼리 싸우지 마시고요. 아이구, 한 시간 일했는데 너무 고생했어. 이러지 마시고요.

이게 바로 개체를 없애는. 하나님의 일은 개체 자체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나를 없앤다는 것보다도 개체, 나, 나 홀로만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산다는 자체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이라는 천국 백성이라는 그 집단, 하나님이 새로 만든 집단에서의 서로의 관계와 나만의 관계, 그걸 언어로 문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천국내의 관련성, 관계성, 너와의 관계성을 신앙이라고 해요. 또는 신앙 관계. 믿음 관계. 신앙으로 엮여지는 거예요. 복음으로 엮여지는 거예요. 신앙관계에요. 그러면 나로 인하여 저쪽은 나와 연결되는 이것은 신앙이 아니고 신념입니다. 신념은 반드시 내게 내가 정당하든지 내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이렇게 신념은 활용되게 되어있어요.

자, 이 스가랴를 보면서 제가 이런 나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이거에 대해서 하나님의 조치는 한마디로 뭐냐 하면 폭력행사에요. 이게 스가랴9장15절이에요. 개체를 물맷돌로 밟아버립니다. 그 포도송이 하나, 하나를 다 으깨어버려요. 으깨어버리면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개체의 문제가 아니고 유전자의 문제가 나오는 겁니다. 유전자의 문제. 생명과학2에 20번 문제는 개체 문제와 유전자 문제의 차이를 아느냐 묻는 문제였습니다. 결국 해답은 없었지만요.

나중에 퍼센트, 비율의 문제, 세대가 연결될 때에 우성과 열성, 또는 대대로 내려오는 유전병에 대해서 그걸 비율을 알아내야 의사들이 조치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이러한 하디.바인베르크 법칙이라든지 이런 게 중요한 거예요. 하디.바인베르크 법칙은 흔히 일반적으로 아는 멘델의 법칙 안에 들어있는 거예요. 멘델 집단 안에 통하는 법칙이에요. 그러니 의사가 되어가지고 어떤 사람이 왔을 때 치료할 병인지, 유전병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대한 지식을 알아야 된다 말이지요.

만약에 그 비율이 그 유전병 비율(멘델의 법칙에서 2대 잡종에서는12(=9+3):4(=3+1)로서 결국 3:1의 비율로 나옵니다.)이 의외로 심하게 되어버리면 많아지게 되면 바깥에서 다른 요소가 뛰어들어 왔다는 그런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어디 나하 시만 갔다 온 적 있어요? 이런 거요. 어디 여행간 적 있지요? 울타리 바깥에서 다른 요소가 들어왔을 때는 유전자의 변이가 생긴다. 라고 진화론을 믿고 있는 현대 과학에서는 이 문제가 유의미, 의미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과학이 생명과학이 수능 20번 문제는 학생들에게 보다 나은 집단을 위해서 이런 기본 지식을 갖춰야 된다고 문제를 낸 거예요. 보다 나은 집단을 위해서. 발전이라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우리 힘으로 지켜내고 그걸 안정성 있게 더 발전시켜야 되는데 여기에 필요한 지식들이 수능 문제에 나왔다 이리 보시면 돼요. 수능 문제 자체가 상당히 나 좋아라 되지요. 수능 문제는 신앙 문제에요? 신념 문제입니까? 신념 문제에요.

신앙이라는 것은 인간 세계에서는 신앙은 없습니다. 인간 세계에서 전부 다 말하는 것은 나를 믿느냐? 믿습니다! 하는 것은 신념에 관한 문제에요. 나한테 이익이 되는 문제다 말이지요. 신앙은 특수성의 문제에요. 어제 수요 설교에 의하면. 특수성에 관한 문제지. 일반성에서는 신념밖에 없어요. 신념은 신념을 측정하는 방법은 간단해요. 이게 뭐냐 하면 확률이에요. 확률. 현대과학의 마지막은 확률입니다.

핵이 있고 전자가 전자구름이 있을 때 전자구름이 왜 찌그러지지 않고 이렇게 멀리 떨어져있는가. 둘 다 이건 핵은 플러스고, 전자는 마이너스인데, 둘 다 붙어가지고 찌그러지면 이 집이고 뭐고 우리 몸도 다 압축이 크런치가 되거든요. 납작하게 된다고요. 왜 벌어져 있느냐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되어있는가, 왜 거리가 벌어져있고 벌어져 있으면 단단하게 있어야 되는데, 왜 단단하게 있지 않고 자꾸 다른 것과 만나면 바람을 일으키느냐 말이죠. 전자에 어떤 위치가 있을 것이고 위치는 뭐냐, 어떤 지정된 돌아가는 게 아니고 확률로만 존재한다는 거예요. 확률로만.

곽이 있고 그 안에 오비탈이 궤도가 있어가지고 바깥에 있는 곽은 반응하기에 좋게 되어있고 안쪽에서는 단단하게 되어있고, 전자 확률이 그렇게 되어있는 거예요. 확률상. 그래서 현대과학이 내린 결론은 인간이란 확률이다. 이게 과학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은 확률이다. 주일 낮 설교에 이야기했지요. 인간의 모든 감정이나 기억이라 하는 것은 -30메가볼트에서 +50메가볼트사이에 전압 펄스의 순서맞춤, 서열이다. 이말이에요. 거기에 대한 열정을 두뇌가 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두뇌가. 이건 기억해! 저건 기억하지 마! 문제는 이건 기억해. 저건 기억하지 마. 저 전압은 받아들이고 저 전압은 버려! 라고 명령을 하는 당사자는 누구냐, 몰라요. 그건 과학이 밝히지를 못해요.

전압을 조정해서 기억을 조정할 수는 있지만, 그걸 외부에서 조정하지 않고 스스로 내던져주게 되면 왜 저런 사람은 나는 싫고, 왜 저런 사람은 좋은지를 모르는 겁니다. 제가 지금 폭력이야기하면서 그 폭력은 이방민족들이 살아가는 일반성에 대한 공격이라고 지금 계속 이야기하는데 그 일반성은 우상을 섬기고요, 그 다음에 그 우상은 뭐냐, 자아 자체를 위해서 신을 믿는 게 우상이라 말이죠. 자아 자체를 위해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사랑한다고. 사랑을 하면 계속 사랑을 해야 될 텐데 이상하게 특징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이게 계속 외로워요.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외로워요. 그럼 부부가 왜 사느냐,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는 거예요. 부부사이는 전혀 외롭지 않아요. 같은 식구인데 뭐가 외로워. 사랑은 외로움을 유발합니다. 그러면 외로우면 왜 안 되는데? 내가 왜 외롭지 않아야 되는 이유는 뭐냐, 그걸 모르겠는 거예요. 그걸 모른다고 하지 않고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해요. 두렵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두려움을 매꾸기 위해서 누가 나를 보호해줘야 되고 그걸 사랑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상하게 사랑하면 할수록 이제는 헤어질까봐 나를 떠날까 싶어서 겁이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두렵다의 반대말은 뭐냐 나를 보호해 달라. 사랑이잖아요. 사랑과 두렵다. 전부 다 이런 생각가지는 것이 주인공이 누구에요? 오직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그래서 이 나를 위해서 사랑을 언급하고 나를 위해서 두렵다 하니까 여기서는 뭐만 찾아오느냐, 그냥 가짜 신만 여기 들어붙을 뿐이에요. 진짜 신은 안 와요.

진짜 하나님은 뭐냐 하면 이 자체를 폭발시키지요. 폭발. 폭력이라. 왜 인간은 진정한 외롭지 않은 사랑을 못하느냐 하면 이미 사랑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그래요. 해여, 달이여, 별이여, 다 나를 사랑해 달라. 이 말 아닙니까. 지가 무슨 주 예수님입니까. 왜 지가 만들지 않은 해와 달과 별을 보고 자기를 향하여 절하래. 말이 돼요? 이거 말도 안 되잖아요. 말도 안 되는 그러한 것을 악마가 인간 개체에다가 다 심어놓은 거예요.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그런 의식으로 평생 고생이나 하고 살아라. 인간아. 신이 아닌 게 신인 체 하면서 모든 것은 내 발아래 꿇어야 된다는 거예요.

성도는 어떻냐, 성도는 두려움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자아로부터 벗어났잖아요. 내가 모르는. 성도는 두려움에서부터 시작해요. 해가지고 뭐냐, 신비로워요. 아까 고린도후서12장 봤지요. 뭐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지금 나는 어디입니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내가 그 세계에 있다는 그것만 있으면 내 인생 충분해요. 나는 봤다고 나는 빼버려. 나는 삼층천에 거기에 있었다. 더는 소원이 없는 거예요.

내가 예상도 못한 세계에 들어설 때에 한 시간만 일했는데 포도원에 하루 품삯을 다주는 이런 엄청난 혜택 앞에서 할 말을 잊어버린 거예요. 할 말을. 그러면 됐지. 거기서 찬송만 나올 뿐이지 뭐가 필요하겠어요. 두려움에서 신비롭다. 그 다음에 뭐냐, 감사다. 성도는 이거에요. 성도는. 내가 어떻게 나를 단도리 해야 되고 어디서 어디까지는 내 것이냐,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이 신비로움, 이 신비로움을 주께서 주신 이 신비로움을 이게 복음인데요. 주께서 하신 업적. 주님의 성과, 이걸 하나의 뭐로 보느냐 냄비로 보자는 말이지요. 우동 냄비 있지요. 냄비를 거꾸로 하면 그 안에 쥐새끼가 들어가면 가만히 있는 냄비가 움직여요. 왜 움직입니까? 그 안에 쥐가 들어있으니까 쥐가 움직이니까 냄비가 움직이는 거예요.

쥐새끼는 우리가 되고 냄비는 주의 복음의 진리가 되겠지요.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뒤집어써가지고 안에 쥐새끼처럼 움직이면 그게 전체적으로 복음 자체가 활동하는 방식이 되는 겁니다. 여기 쥐 안에 주님이 들어있어요. 쥐는 죄인이고 주님만이 의인이니까. 구원자가 되셔가지고 우리를 가지고 예수님의 자신의 성과를 자랑하고 영광 돌리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고 움직이는 겁니다. 굳이 개체적으로 요거는 내거. 라고 따로 챙길 필요가 없어요.

이러한 복음의 신비로움과 엄청난 진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항상 출발점을 이 두려움부터 출발 합니다. 이 두려움은 어디서 생기느냐 하면 내가 나를 지키고 싶어요.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자, 스가랴9장 16절을 보겠습니다.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이리 되어있지요. 이 본문을 만약에 교회 목사가 설교하면서 이 본문을 했다면 듣는 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기분 좋게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왜 기분 좋게 하느냐 하면, 그들의 자기 백성 속에 누가 포함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바로 나의 미래상이라고 여기고 기분 아주 좋게 여기겠지요. 그게 문제인 거예요. 그게.

여기17절에 봅시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이 말씀이 딱 나한테 적용되었으면 참 좋겠네요, 라는 욕망에서 이 본문을 만나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 많은 유대인들과 오늘날 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소위 신념생활하고 있으면서 본인은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나가 없어지지 않고 나가 유지되는 한 그건 신앙이라고 하지 마세요. 그건 신념이에요. 내 잘되기 위해서 하는 짓이에요. 그게. 자기를 위한 노동이라고요. 그게. 여전히 자기 노동이 있잖아요.

그럼 목사가 하는 말이 “여러분, 이렇게 스가랴9장16절, 17절, 들으셨지요. 주님의 약속입니다. 축복입니다. 믿으시려거든 이 교회에 나와서 충성하세요. 시간을 바치시고, 그 다음에 돈 바치시고. 결국 마지막에 설교 끝난 뒤에 돈 바치라. 아니면 예배당에 선교비 없고 교육관 빨리 넓혀야 되고, 주차장 넓혀야 되는데 돈이 안 들어옵니다. 이러니 여러분들이 16절, 17절 이런 혜택을 입었으면 염치가 있어야지 사람이 싸가지가 있어야지. 이런 복을 받았으면 돈을 왜 안 내놔.” 목사는 그 교회를 내 교회로 여기는 겁니다.

내가 안 죽었으니까 자기의 명예를 드높이는 교회이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노골적으로 바라면서 그 교회에 온 거예요. 그건 교회가 아니고 회사입니다. 회사의 목적은 이익창출이에요. 그리고 거기 이사들은 명예회복이고. 그 장로들, 집사들 명예회복이고요. 이왕이면 나도 사람값 했다는 소리 듣고 싶다 이 주장이거든요. 그 사람값 그 소리를 왜 들어야 합니까. 니가 뭔데 그 소리를 들어야 돼요. 교회 안 다닐 때는 개차반이었는데 교회 다니고는 인간됐네. 그런 소리를 듣고 싶다는 거예요. 그런 소리를 왜 들어야 됩니까. 그거 들으려고 스가랴9장16절, 17절 그거 있는 줄 압니까? 그거 아니에요.

15절부터 들어가야 돼요. 짓밟혀야 돼요. 특히 우리는 뭡니까. 이방인이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나를 위한 신. 우상. 얼마나 하나님을 모든 삼위일체를 우상화로 다 바꿔놓은 그 조작하는 능력이 우리 안에 이미 욕망으로 들어 있잖아요. 그러면 16절, 17절 성급하게 내밀지 말고 15절부터 뚫고 나가야 돼요. 주님께서는 이걸 반복시켜버립니다. 성도한테.

15, 16, 17절 반복시켜요. 이 반복시킬 때 반복의 실험대상이 이스라엘이었어요. 이스라엘은 농경시대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농사짓기 때문에 곡식과 새 포도주 17절에 나오지요.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곡식과 새 포도주만 있으면 그들은 사는데 행복이라는 걸, 축복이라고 느낀 그 때 그 시절에 그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어요.

요즘 청년들한테 밥 세끼 먹고 이밥에 소고기 말아먹고 그 다음에 가끔가다 음료수 포도주스 마시면 자식한테 해 줄 거 다 해줬다고 손 털고 행복하지 물으면 그게 행복합니까. 행복해요? 쌀밥에 소고기 국 끓여주고 그 다음에 맛있는 음료수 누룽지탕이라든지 해주면 어머님! 눈물 흘리면서 더는 소원 없습니다. 저 강건 할게요. 저 행복 할게요. 이런 청년, 자식들 봤습니까. 스마트폰 바꿔 달라. 나이키 신상 나왔는데 특별히 100켤레만 나왔는데 친구도 샀는데 나도 사줘. 이렇게 나오지요. 차 바꿔 달라 하지요. 니한테 곡식 줬잖아. 아침에 밥 먹여줬잖아. 이게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요.

욕망이 그 때 이스라엘보다 커진 거예요. 욕망이. 17절대로 말씀대로 고대로 하려면요. 교회 나온 교인들에게 아침 밥 먹고 나왔고 그 다음에 맛있는 음료수 마셨으면 더는 하나님께 복 받을 필요도 없는 게 돼요. 그거까지가 형통함이고, 그거까지가 아름다움이에요. 하나님의 복의 아름다움이에요.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일용할 양식을 줬으면 다 준거다 이 말입니다. 먹는 거 입는 거 줬으면 됐다 이 말이지요. 참새 수준으로 줬으면 됐다. 짹짹거리기나 해라. 더 필요치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 요즘 현대인들은 기본 복은 다 누리고 있어요. 복지정책이 괜찮아 가지고. 노인네들 한 달 사십만원씩 줘가지고 이 정도는 다되게 되어있어요. 노름만 안하면, 술 담배만 안하면 지 죽을 때까지는 밥 먹을 수 있어요. 나중에 쌀 떨어지면 라면 먹으면 되잖아요. 무슨 복을 더 원합니까. 이 15절, 16절, 17절 이 말씀은 물맷돌로 안 밟아 준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이런 뜻이거든요. 매일 생존해 주신다. 이 말이에요. 매일 생존해 주실 때 이게 바로 복이 아니고 뭐냐 말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복이 아니냐.

16절에 보면,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신다.” 시편100편3절에 보게 되면, 깨나 유명한 구절이 있어요. 깨나 유명한 구절이라는 것은 보통 족자로 또는 액자로 많이 기독교 가정이 많이 있어요. 기독교 가정에 집사님이 이사 가면 성구 구절하나 액자로 해서 선물하잖아요. 3절에,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본 적 있지요. 교회 많이 다닌 사람들. 초자 아니고. 그의 백성이고 기르시는 양이다 말이죠.

이 말씀의 뜻은 뭐냐 하면 양 위주로 일체 허락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너 욕망 위주로 나는 니한테 휘둘리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니가 하나님을 이용해서 니가 니를 기르지 말라는 뜻이에요. 친히 기르시는 분은 니가 아니고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나에서 뭐로 변했습니까? 스가랴9장16절에서. 나는 사라지고 나는 뭐가 되었어요? 양이 되었지요. 양이 됐다는 것은 그냥 양이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 누구의 양이에요. 어떤 목자의 귀속된 양이에요. 12년동안 피 흘린 그 여인이 주님의 옷 가를 만지게 되어서 주님이 칭찬하신 이유가 바로 주님과 그 여인 사이에 시편100편3절, 주께서 친히 기르시는 양인 것을 주님도 아시고 그 여인도 알기 때문에 이것은 신념의 관계가 아니고 신앙의 관계지요.

자, 신앙은 내가 얻고자 하는 게 일체 없는 거예요. 주님께서 원하는 것만 내게 도달하고 도착하면 그걸로 만족한 것. 그게 신앙의 관계에요. 그 관계를 증거 하라고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 거예요. 그 관계성. 말만 김양, 박양하지 마시고 최양하지 마시고 주님의 양이에요. 기르시는 양. 그 기르시는 양은 어떠냐 처음에 출발은 어디서부터 한다? 이방인입니다. 우상부터. 우상부터 출발해서 진짜 하나님의 말씀의 시편100편3절 말씀대로 진행하시는 언약대로 진행하시는 진짜 하나님. 진짜 하나님까지 관계를 우리를 통해서 매일같이 순환시키지요. 반복시키는 거예요.

자, 시작은 우상부터 시작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뭐가 생긴다? 우상의 특징은 뭡니까? 두려움이지요. 두려움. 벌써 몇 번째 하나, 다 잊어버렸어. 두려움이지요. 항상 말씀 듣고 좋다고 했는데 돌아서면 5분도 안됐는데 두려움이지요. 10분 봐 줍니다. 10분까지 있다 하는 것은 대단한 거예요. 두려움이지요. 감사가 아니고 두려움이에요.

복음은 들었는데 복음이 나한테 밥 먹여주나. 이렇게 된다니까요. 복음이 우리가정에 무슨 화목을 주었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가정에. 그래서 주님께서는 두려움에서 신비로움으로 바뀌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나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 없어지게 만들어 버려요. 하나님의 복음이 오게 되면 나의 존재가 없어지면서 나게 있었던 두려움, 걱정, 염려, 공포, 그것이 같이 없어져 버려요. 신비로움과 감사가 이어지는 겁니다.

복음을 날려 보내는 것은 내가 나 혼자 사는 거예요. 나는 양이 아니었고 신념가로 사는 것. 아주 지독한 신념가. 나는 내 힘으로 일어서리라. 내 무릎을 내 힘으로 일어서리라. 대표적인 노래가 에요. 나를 높은 곳에 세울 것이라는. 대단한 신념에 관한 노래입니다. 그리고 인순이가 불렀던 <거위의 꿈> 그런 노래들. <마법의 성> 이런 것. 아주 노골적인 것은 정수라가 불렀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88올림픽 때 불렀던 노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 이건 레닌 주장이에요. 공산주의 주장이에요. 공산주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그 공산주의 메시아니즘 모토가 그겁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이런 거요. 얻다보니 코로나까지 다 얻어버렸는데.

이 세상의 해와 달과 별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내가 해와 달과 별에게 빌 수가 없는 거예요. 나한테 도움 달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미국 사람들이 미신처럼 섬기는 것이 뭐냐, 캐서린 양초에요. 성 캐서린 양초. 양초를 피우면 어떻게 여자한테 효과가 있다는 거예요. 임신했을 때나 이런 게. 수술 앞두고. 성 캐서린은 옛날 유명한 성자에요. 그 양초를 팔아요. 이게 미신이거든요.

스가랴10장2절 봅시다. “드라빔들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며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하나니” 드라빔들은 드라빔은 우상이지요. 우상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복술자는 복술자 알지요. 점치는 거. 점괘 보는 것. 진실하지 않는 것을 보고 헛된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되므로 백성들이 양 같이 유리하여 목자가 없으므로 곤고를 당한다. 사람들이 왜 위로를 원하고, 왜 꿈을 원합니까? 본인의 인생을 외부의 것을 도움을 얻어서 결국 내가 잘되겠다는 거예요. 내가 내 욕망대로 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로 그렇게 교회가 문제고 목사가 문제해도 그런 문제되는 목사를 그리워하고 본인이 찾고자 하는 거예요. 본인이. 진실은 나를 좋게 안하면 진실이 아니라고 우기는 그 우상성. 거기에 대한 주께서는 어떻게 조치하시는지 그건 10분 뒤에 해보겠습니다.

 

안양20211216b슥9장17절(물 퍼내기)-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도 어떤 집착 같은 게 있습니다. 그건 자기 백성을 사랑한다, 할 때 그 하나님의 집착을 사랑이라는 표현도 하지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질투하면서 사랑한다. 질투. 질투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데 그게 먼저 앞에 먼저 이야기해야 될 게 있어요. 뭐냐 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질투하면서 사랑한다 할 때에, 여기 자기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해요. 여기서 하나님은 자신을 할 때 이 하나님을 하나님 아버지라고 보고 자신을 할 때, 자신이라는 말을 할 때에 여기에 아들, 예수님을 여기다가 넣게 되게 되면 이 말이 통합니다. 이게 요단강에서 세례 받을 때 나온 거예요. 그리고 변화산에서 하신 구름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형으로 나타난 거예요.

사랑이라는 감정이 실제 인물로 나타난 겁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실제 인물로 나타난 겁니다. 나의 택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어느 정도로 사랑하느냐, 아버지의 모든 심판성, 심판을 아들에게 다 일임할 정도로 아들을 사랑했어요. 그 일임한 심판의 권리가 주님의 권리에요. 주의 권리. 하나님이 일할 때에 하나님의 오른쪽에서 일하실 때에 그 오른쪽의 자리가 주님의 자리, 심판의 자리입니다. 심판을 한다. 그리고 주님의 기능을 한다. 이렇게 할 때는 이렇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무엇의 존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그걸 의식해서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한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나는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하나님의 원수를 사랑하지 않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사랑이 아들에 대해서 택하신 아들에 대해서 창세전에 택할 때, 이 하나님의 아들 사랑하는 그 사랑에 그 사랑을 인정하고 그 사랑을 찬미하기 위해서 예수 안에서 택해 놓은 자들이 있어요. 예수 안에서. 그러니까 이게 원래는요, 하나님은 피조 인간을 사랑한 게 아니고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들만 사랑하기로 선택된 자들이 있어요. 그 선택을 무슨 선택이라 하느냐 하면 ‘예수 안에서 선택’이라 합니다. 예수 안에서.

선택의 방향이 있고, 선택의 목적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겁니다. 선택할 때. 예수 안에서 선택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선택한다? 인간을 선택할 때 하나님 존재, 인간 존재 나오지요. 여기 예수님 존재 나오지요. 그러면 여기서 인간 존재가 지워져야 예수 안에서가 되어버려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선택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내 안에서 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거부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나를 선택하는 것이 단순한 거부가 아니고 하나님 보시기에 미워해야 될 원수가 있어요. 그 원수의 사고방식이 바로 내 안에서 내가 선택하는 그 사고방식이 원수적인 사고방식이에요.

왜 그런 논리가 성립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많은 인간들 가운데 오직 예수님만 사랑하는 이유가 그래야 하나님의 적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 빼고 나머지 적이 되는 거예요. 내 아들 빼고 나머지 것들은 전부 다 이미 원수의 사고방식이 물들어진 엉뚱한 선택, 자기를 위한 선택을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다. 방금 한 거 다시 하겠습니다. 방금 목적이 있다 했지요. 자, 그 목적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선택의 목적은 뭡니까? 그들을 예수 안에 있게 하지요. 그러면 이걸 모르고 하나님이 나를 선택한다. 하면 그 선택은 목적은 어디 안에 있게 됩니까? 내 안에 선택이 들어와 버려요. 내 안에. 나는 그대로 있고 내 안에 하나님의 선택이 들어와서 나를 건져내는 거예요. 이 선택이 뭐냐 하면 바로 칼빈주의 선택입니다. 칼빈주의가 왜 이단인지 아시겠지요.

정통 개혁주의 칼빈주의 신학이 왜 이단인지 알겠지요. 나를 없앨 줄을 몰라요. 왜? 성령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을 꼬이려고 하는 목적으로 사람들의 이성에 호소하고 논리에 호소했지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해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이렇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그걸 전제로 깔고 신학을 해가지고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교회 와서 복음 들으시고 비시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하는 것을 채워줄 겁니다. 아까 그걸 뭐라고 했습니까? 공산주의라고 했지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얻을 수 있는 거예요.

해를 통해서, 달을 통해서, 별을 통해서 당신의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거예요. 당신의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것과 스가랴10장2절에 나오는 무당이나 점치는 사람이나 다를 게 뭐가 있어요. 똑같지요. 사람에게 다가설 때에 당신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당신에게 점괘 봐 드리겠습니다. 이거나 우리 교회에 오셨습니까? 복 받을 거예요. 이거하고 차이점이 뭐가 있습니까. 마태복음16장에 분명히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자기를 부인하고 되어있지요.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부정하라 이 말이지요.

십자가라는 말은 예수님이 지셨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거예요. 오늘 스가랴9장15절, 16절, 17절, 지금도 그냥 나갈 수가 없어요. 나갈 수가 없다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 양떼를 구원한다. 이 말이 16절, 이 날에 여호와께서 자기 양떼를 구원한다. 이 말이 말은 굉장히 간단한 결말로 되어있지만 그 과정에 있어서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것이, 상상도 못할 일이 여기에 들어갑니다. 그게 무슨 사건이냐 하면 바로 ‘십자가 살인 사건’이에요.

제가 몇 달 전에 여기에 대해서 설교를 한 적이 있어요. 그것도 짧게 할 수밖에 없지요. 너무 어려우니까. 이 땅에 살인 사건을 일으켰어요. 누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인 사건이. 어떤 33살 먹은 어떤 분인데 어떤 청년인데 그 청년이 죽었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하면 모든 사람이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뭐? 우리 아하고 수능 치는 거 하고 무슨 상관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있어요? 코로나 1차,2차,3차 맞았습니까? 그 이야기하고 살인 사건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국무총리 이름이 뭐예요? 김유경 대구사람이지요. 김유경 그 사람이 지금부터 코로나와 관련해서 특보 이야기하겠습니다. 여러분,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것부터 운을 뗀다면 방송사고 날 거예요. 저거 뭐예요? 저거?

아, 코로나하고 살인 사건하고 무슨 관계있는데? 대번 이리 될 겁니다. 코로나하고 살인 사건이 관련되어 있어요. 코로나 번지는 거하고 이 살인사건과. 살인사건과 관련 없는 일이 없어요. 토네이도 터지는 것부터 모스크바에 폭설내리는 것도 전부 다 이 살인사건과 관련되어있어요. 우리 애 수능 치는 거하고 다 관련되어있어요. 이게 폭풍의 소용돌이 핵입니다. 모든 세계를 소용돌이치는 거예요. 여러분, 옛날에 초등학교 때 문방구 앞에 연탄불 가스 일산화탄소 마셔가면서 뭐했습니까? 달고나 하지요. 달고나할 때 각설탕 하나 설탕인지 수상스러운 삭카린인지 분간 안 되지만. 그거 하나할 때 휘저어보세요. 약간 노리끼리한 설탕 녹은데다가 하얀 게 들어가 가지고 뭘 일으킵니까? 소용돌이를 일으키지요. 그런데다가 탁하게 되면 약간의 산이 쫙 올라오지요. 벌써 연탄가스 많이 취해 있는 상태에서. 정신이 오묘한 상태에서.

소용돌이에요. 소용돌이. 세상이 주는 소용돌이는 살인사건입니다. 이거 강남경찰서에서 강력계에서 담당해야 돼요. 이 살인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뭐 신앙이 아름다워. 신앙이 그건 신념이고요. 신앙은 살인 사건과 너와 관련 있다는 그 관계성이 그게 신앙입니다. 아무도 양이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밝히는 거예요. 아무도 양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구약에는 말씀을 주셨고, 이 말씀을 이루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스가랴9장 백날 줘도 소용없어요. 십자가 아무리 줘도 소용없습니다.

10장2절과 3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드라빔은 허탄한 것을 말하며, 옛날에 부채 비슷한 거예요. 부채 던지고 하는 드라빔이 있어요. 대제사장들이 하는 거 있고. 복술자들은 진실하지 않은 것을 보고, 거짓 꿈을 말한즉 그 위로가 헛됨으로 백성들은 양같이 유리하고 목자가 없음으로 곤고를 당하지요. 이런 짓을 진리가 아닌 짓을 누가 했는가. 3절에 봅시다. 내가 누구한테 노를 발한다고 해요? 목자. 영적인 목자. 목자가 뭐냐 하면 목자는 중재자에요. 중재자. 다른 말로 하면 가이드에요. 가이드.

가이드는 이탈리아 가이드. 알마피에 나오는 이탈리아 관광지 알마피 해변이 있는데요. 가봤어요. 거기에 가이드가 필요하거든요. 가이드는 그 곳에 가봤습니까. 안 가봤습니까. 벌써 수차례 가본 거예요. 이쪽 세계 한국 사람들은 한 두 번 가지만 그 사람들은 수백차례 가봤어요. 가이드니까. 한국에도 살았고 그래야 한국말을 할 줄 알아야 되니까. 남부 이태리에도 살았고. 양쪽 다 살면서 오고가는 이리 저리 누가 하느냐, 가이드가 한 거예요. 목자는 선지자들이 목자가 되어야 될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천상회의 내용도 알고 지상에 하나님의 뜻과 얼마나 위배된다는 것을 대적적인 관계가 되는가, 양쪽을 알아서 그 둘 사이에 오고가면서 중재하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되고, 아침 일찍 와서 노동했다고 노동 값 내놓으라고 하면 안 되고, 그냥 모든 게 은혜입니다. 라고 이렇게 하늘나라를 알고 중재해야 돼요. 중재하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특별히 선지자에게 성신이 주어진 겁니다. 하나님의 신이 주어진 거예요. 성신은 무슨 신이냐 하면 구 언약의 신을 성신이라 합니다. 새 언약의 신을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령이라고 해요. 성령. 이 성령은 새 언약이고 최종 언약이기 때문에 성령 받고 난 뒤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오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지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어떻게 떡을 달라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해로운 것을 자식에게 주겠느냐.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식에게, 자식은 이 땅에 없습니다. 예수님만 있어요. 성신은 일회성이기 때문에 성신 받았다고 해가지고 구원받는 거 아닙니다.

심지어 사울왕도 성신 받았어요. 나중에는 악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일회성이에요. 성신은 하나님이 그 가이드, 중재자에게 주는 거예요. 성령은 중보자에게 주는 겁니다. 중재자하고 중보자하고 달라요. 한 번 중보자는 영원한 중보자에요. 중보자는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어요. 구약의 중재자는 선지자들은 장차 올 한 분밖에 없는 중보자를 앞당겨서 그 분의 기능을 차원을 가면 갈수록 더 깊이 있게 해주는 거예요.

무슨 말인가 하면, 지하실에 물붓기 거든요. 지하실에 물 붓기, 물 퍼내기도 되고. 지하실에 물 퍼내기로 해봅시다. 장마철에 비가 와서 지하실에 물이 가득 찼습니다. 지하실에 물이 가득 찼어요. 그럼 펌프로 푸게 되면 뭐가 드러나게 되느냐 하면 퍼낼 때마다 뭐가 드러나겠어요? 계단이 드러나겠지요. 이스라엘 역사에 초창기에 성신 받은 선지자들은 첫 번째 계단만큼만 물을 퍼내요. 그 다음에 선지자는 두 번째 계단을, 그리고 제일 마지막 계단은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그 때는 성령이에요. 성령 받은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의 마지막 죄까지 다 거둬내는 것이 성령 받은 예수님이 하신 일이고. 그 성령을 받은 자가 성도에요.

그러니 성도는 없어요. 예수님의 영을 받으면 성도됩니다.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나의 죄는 내가 알 길이 없어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가 뭔지를 몰라요. 하지만 성령이 오게 되면 내 죄는 하나님을 죽인 게 내 죄가 돼요. 내가 몇 월 몇일에 죽인 게 아니고 태어난 자체부터가 하나님을 죽이기로 작정된 경향성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죽이는 방법은 간단해요. 살인사건 중심의 삶이 아니라 내 생존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게 이게 살인 사건을 개무시하는 거예요. 모독하는 겁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교만이라고 하지요.

교만이냐, 겸손이냐 하는 것은 얼마나 마음을 낮추느냐가 아니라 니가 지금 어느 지점에서 출발점을, 사고의 출발점을 어느 지점에 두고 하느냐에 따라서 이게 구분돼요. 그래서 이걸 달리 하면 신념은 건방짐이고, 교만이고, 신앙은 바닥이지요. 지하실 바닥.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를 아주 입가에 미소가 올라가면서 감사함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죄인이기 때문에 아침에 쌀밥 먹고 고기 먹은 이것은 저한테 오감습니다. 하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가운데 이제 초등학교 2학년 됐는데 “어머님, 저에게 아침에 밥을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저한테는 과분하고 오감습니다.” “왜 그래? 응?” “제가 하나님을 죽인 내 중심으로 생각한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연구한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이 큰 죄에 대한 것이 이게 십자가를 모독한 살인사건 중심으로 하지 않고 내가 안 다는 것, 내 호기심 중심으로 살았던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가리는 마귀의 짓이었습니다. 어머님 밥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죄인에게.” 이리 나온다면 엄마가 뒤로 나자빠지지요. 니가 미쳤구나! 니가 진정 미쳤냐? 아니면 성령 받았느냐? 신비로울 거예요. 신비로울 겁니다.

그게 바로 진짜 참 목자가 그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빼놓고는 전부 다 거짓 목자에요. 예수님 빼놓고는. 그 목자에 대해서 10장3절에, 내가 목자들에게 노를 발하며 내가 숫염소들을 벌하리라, 그런데 그냥 엄포냐, 아니에요. 10장1절에 봄비가 올 때, 늦은 비가 올 때는 반드시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다시 이야기할게요. 첫째시간 한 거 후딱 지나갔는데. 이스라엘은 하나의 무대에요. 농경시대의 무대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냥 밥이나 먹고 잠이나 잘 자면 복 받은 줄 아는 거예요.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삼차산업이 발달하고 서비스업이 발달하고 금융 자본주의가 발달한 이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는 그 농사짓기 때문에 비 안 오면 하늘에서 비 안 내리면 농사 완전히 버리는 거예요. 그냥 천수답이에요. 저수지해서 개간산업하고 이런 거 소용없어요.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안 살면 전부 다 작살내는 겁니다. 그건 하나의 작은 간이무대니까요. 마지막 때를 위한 시범조로 보여주는 거예요. 시범조로. 이스라엘 자체가 소규모 집단이고요, 거기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장차 대규모로 일어나는 아니 대규모 정도가 아니고 온 우주로 일어나는 우주의 파멸과 종말의 근거를 위해서 그들을 작게 모집단으로 해가지고 하나의 시범조로 실험실에서 시료로 하나 빼가지고 작은 데서 실험해서 그 원리를 전체에다가 보편화 적용시키는 것이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하는 일입니다. 구약 때 그렇게 보셔야 돼요.

그래서 여기 10장에 9장에 곡식이 있고, 포도주가 넘치고, 약속의 땅에 포도주가 넘치고 포도농사 했으니까 포도가 잘 되는 것은 복이라 여기지요. 양치니까 양떼가 많으니까 복이지요. 그런데 요새 양떼 같은 거 포도 잘되면 그걸 구원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청정지역이라고 하는 나라가 뉴질랜드거든요. 뉴질랜드 인구가 850만밖에 안돼요. 그 뉴질랜드가 수질오염에 빠져있습니다. 환경오염에 빠져있어요. 그것도 모르고 뉴질랜드 환경 좋다고 가는데 자연환경은 좋겠지만, 그 물이나 모든 것은 오염됐어요. 왜냐하면 소를 키우고 양을 키우는데 소가 방귀 꾸기 때문에 소가 방귀 꾸는 것은 우리나라 자동차 매연하고 못지않게 비율이 세서 매탄가스가 오염시킵니다. 지금 뉴질랜드가 그런 큰 문제가 있어요. 뉴질랜드가 여성들의 세계거든요. 여성들이 이혼하게 되면 80%가집니다. 남자들은 쪽박 차는 거예요. 유책해서 책임있는 쪽, 그건 우리나라 법이고 다른 나라는 그런 거 없어요.

무조건 여자들은 약하니까 재산80%가져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자들은 어디 가느냐, 뉴질랜드 여자하고 결혼 안하고 미국, 호주로 가버려요. 인구가 늘어날 수가 없지요. 그리고 환경 위주로 하다보니까 공장 없지요. 중국산 수입해야 되지요. 그리고 여자 위주로 하니까 치안이 불안하지요. 치안. 행정관리가 느려 터져요. 우리나라는 배달의 기수가 있어서 오토바이 타고 빨리 왔다 갔다 하지만. 그런 것도 없고. 도대체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뭐가 좋다고 가는지 모르겠어요. 이거 전부 다 바보들 같아요. 아이고~ 캐나다에서 듣는 사람 있어 말조심해야 돼요. 미국도 마찬가지고. 이게 집단이거든요. 인간은 동질성의 조직이기 때문에 집단에서 빠져나가게 되면 외로워요. 왜 외로우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외로운 이유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외로운 겁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면서 농사가 안 된다고 불평을 하니까 여기서 거짓 선지자들이 우상을 섬겨도 주변의 나라들 봐라. 잘 먹고 잘살고 군사력이 뛰어나잖아.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은 점점 더 그 잘사는 사람이라는 그 목표. 그 목표 자체에 완전히 혼이 빠져가지고 그 목표를 되기 위해서는 어떤 짓을 했기에 어떤 행동을 했기에 그들은 부를 얻었습니까. 우리도 그거 수입하겠습니다. 해서 다 수입해가지고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우상 섬기는데 온 나라가 다 따라가 버렸어요. 가이드가 엉터리 가이드에요. 저 뒤에서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더 저주에 빠지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만의 특수성이에요. 이방민족은 그런 게 없습니다. 이방민족은 잘 먹고 잘 살아요. 어차피 내놓은 자식이니까. 어차피 그건 지옥 갈 거기 때문에. 언약이 없기 때문에 죽이든 밥이든 지 맘대로 살게 둬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아요. 이스라엘부터 먼저 멸망합니다. 그게 벌하는 거예요.

다시 스가랴9장16절 돌아와 봅시다. 이게 그냥 대충 설명하고 넘어갈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주신 복이 뭐냐 하는 거예요. 이걸 생각하려면 아까 이방민족부터 생각합시다. 이방민족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부러워했지요. 부러워했는데 이방민족이 아주 잘 살아요. 권력도 많고 군사력도 강해요. 나중에 하나님 앞에 뭘 받느냐 하면 저주 받거든요. 저주 받는 이유에 우리가 주목해야 돼요. 방금 무슨 민족 했습니까? 이방민족 했잖아요. 이방민족을 했지만 저와 여러분에게 했지만 사실은 딱 깨놓고 이야기하면 그냥 현대인이에요. 그냥 현대인들.

현대인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또는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런 제목의 책들이 나오잖아요. 중년에는 무엇으로 사는가, 그런 책들이 있잖아요. 처세술에 관한 책들. 교보문고 제일 앞자리 1등으로 나오는 책들이요.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책들 있잖아요. 30에 자취는 끝났다. 이런 거요. 성경에 나온 단어 빼고 오늘날 단어 그냥 붙여보면 이방민족에 딱 해당되는 말이다. 이 말입니다. 제 말은. 오늘날 그냥 평소에 나오는 뉴스나 방송이나 신문지상 매스미디어에 나오는 언론에 나오는 모든 단어가 신문에 나오는 모든 단어가 그냥 이방민족이기 때문에 통하는 단어들이에요. 우리는 거기에 홍수처럼 거기에 휩싸여 있는 겁니다. 그럼 무엇으로 사는가.

정답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정답이라 할 수 있어요. 뭐냐 하면 자기 의로 살아요. 자기 의. 자기가 사귀는 여자가 헤어진다고 해서 그 여자 집에 찾아가가지고 여동생부터 남동생 엄마까지 다 죽이는 25살 먹은 애 있지요. 왜 그 짓합니까? 아무리 가정환경이 어떻고 데이트 폭력이 어떻고 하지만 그런 중간 말고 가장 원인적인 것. 현대인들은 무엇으로 삽니까? 자기 의로움으로 살아요. 내 잘난 맛에 살아요. 잘난 맛에. 그 잘난 맛에 그 여자가 흠집을 건드린 거예요. 부부싸움에서 니 왜 돈 안 벌어오나? 경제문제처럼 다가가지요. 경제문제는 핑계고요. 더 깊숙이 싸우고, 싸우고 또 싸워 봐요.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고 넘어서 계속해서 싸워 봐요. 뭐가 남는지. 니가 뭔데 내 자존심을 건드려? 네가 뭔데. 처음에 할 때는 니가 하다가. 니가 하는 성격은 니그 집의 친정엄마 닮았다. 하는 순간 끝나는 거예요. 니하는 거하고 니 시숙하고 똑같노. 이리 나오면 그 때는 소속에 관한 문제 아닙니까.

나의 의에 관한 문제에요. 아까 지하실 물 퍼내는 거 했지요. 1단계, 2단계, 3단계, 4단계 계속하니까 퍼내니까 왜 인간은 하나님을 죽입니까? 주님이 먼저 인간에게 시비 거는 거예요. 니는 죄인이라고. 그게 하나님이 인간을 건드리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려버린 거예요. ‘너는 살 가치조차 없다.’ ‘너는 쓰레기다.’ 이거 건드린 겁니다. 목사가 설교 때 당신들 나와 당신들 쓰레기라 하면 그 목사 오래 가겠어요? 계약 만료지. 그 다음부터 끝났지요. 목사가 말을 조심해야 될 것은 거기에 오래 있겠다가 아니라 나올 때 퇴직금에 액수와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그래요. 좋게 해야 좋게 돈의 액수가 올라가고 나쁜 짓하게 되면 아무래도 성질 나가지고 돈 안 줘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회사잖아요. 교회도 회사 아닙니까. 어떤 회사? 나의 미흡 된 나의 의를 하나님 예수님이 마저 채워주는 회사 이게 교회입니다.

왜?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살아가요. 나는 사람 취급 받고 싶어요. 왜 나는 나를 사랑하니까. 이게 바로 이사야에 나오고, 미가에 나오고, 선지자들이 그렇게 신약에 가까울수록 그들이 폭발적으로 외칩니다. 너희들이 우상 섬기는 것은 딱 한 가지. 니가 신처럼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이방민족이 진짜 하나님한테 된통으로 당하는 이유가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행세하기 시작한 거예요. 내가 하나님이라고요.

그래서 복음이 안 나오거든 만나지 마세요. 참 이건 참 만나지 말라 해가지고 뭐 진리처럼 진리는 아니고요. 사도바울은 요 비슷한 이야기를 했어요. 복음이 안 나오거든 사귀지는 말되 만나기는 만나라. 요렇게 이야기했어요. 아예 안 만나면 생활을 못하니까. 슈퍼 하면서 팔면서 여기 라면 있습니까? 예, 라면 있습니다. 이러면 되지 그런데 실제로는 복음을 아십니까? 이걸 물어볼 필요가 뭐가 있어요. 라면 팔면 되지. 옷가게 하는데 여자 옷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아이고~ 속으로.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또 먹여살리는구나! 고맙습니다. 이리 하면 되지. 실례하지만 물어보겠습니다. 계산하는 순간에 십자가를 아십니까? 십자가 살인 사건을 아십니까? 괜히 오늘 하루 일당 다 날려버리면 우이 하려고. 안되지요.

사귈 때는 복음을 모르면 사귈 수가 없어요. 이 비슷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교회 어떤 아가씨는 아주 결심을 했어요. 복음 모르는 남자하고는 절대로 안 사귄다고. 글쎄요. 복음을 알든 안 알든 간에 나를 찾는 남자가 귀할 수도 있어요. 내가 선택할 사항이 아니고 내가 골라잡을 사항이 아닐 수도 있거든요. 그 점도 고려해 봐야 될 텐데. 한 200명 쫓아와가지고 좋다한 가운데서 복음 아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 이리 되면 괜찮은데 내가 200명 다가가도 다 튕겨나가는데.

자기 의라는 것 이게 우상입니다. 구약에는 우상을 섬겼잖아요. 이제 신약에 가까우게 되면 내가 나한테 신이에요. 나는 신이다. 내가 나는 신이에요. 신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나한테 오더라도 내가 좀 믿어도 안 믿어도 선택권은 예수님이 갖고 있으면 안 되고 나한테 일임해야 된다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 지어보고 희생하는 거 보니까 내가 믿어 줄게요. 이런 관계로서 예수 당신하고 같이 가자는 거예요. 천국 가자는 거예요. 결정을 나한테 맡겨 달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이에요.

그렇다면 여기에 아까 16절에서는 양이 성립 안 되지요. 양은 목자 없는 양이 성립되지 않잖아요. 16절 끝에 보면 그들이 왕의 보석같이 빛나리라. 이리 되어 있는데. 자, 그럼 제가 아직까지 해답을 안 내렸습니다. 그럼 당신이 말하는 정답이 뭐냐, 정답은 진정한 중재자가 중보자로 오십니다. 하늘과 땅을 양쪽 다를 알아야 돼요. 하나만 알면 안돼요. 예수님이 오셔서 잔소리 산상설교만 하면 안돼요. 지상의 형편을 알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을 해야 되는 겁니다. 땅을 알아야 돼요. 우리는 땅에 살면서 땅을 몰라요.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 죄의 마지막 계단을 몰라요.

우리의 의가 어느 정도로 우리에게 매순간 매초도 놓치지 않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24시간 나의 의가 나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느끼지를 못하고 있어요. 뭐 동정하고 베풀고 자비를 베풀면 뭐 하나님의 성령의 열매인가, 이리 착각하고 있다 말이죠. 온유와 화평하면. 돈 떨어져보세요. 무슨 온유와 화평이 있어요. 여유가 있으니까 그리 하지요. 사기꾼에게 그런 거 하겠어요. 원수를 사랑하라, 하는 것은 인간은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신랑이 되시는 겁니다. 이 스가랴9장16절, 17절 이 말씀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그 말씀의 자리에 예수님이 그냥 들어와 버려요. 이걸 한 번 봅시다.

이사야62장 5절에서부터 8절, 9절, 거기에 신랑 신부가 나오거든요. 신랑, 신부가 나오는 이유는 기쁨의 환경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신랑이 나오고 신부가 나오면 왠지 분위기가 즐거움으로 가득차지 않습니까. 여기에 보면 4절에 왕관 나오지요. 아까 스가랴9장16절 왕관 봤지요. 자, 왕관이 누가 쓰실 왕관이냐 하면 이건 먼저 예수님이 먼저 써요. 예수님은 가이드니까요. 중보자니까. 지상에 살면서도 왕관을 쓰시는 최초의 분은 예수님이어야 하는 거예요. 아들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말씀은 일단 예수님이 다 가져갑니다. 우리가 지킬 수가 없어요. 기쁜 소식 아닙니까.

우리가 못 지켜요. 마음속으로 간음이고, 살인이고 뭐고 지킬 수 있는 말씀은 하나도 없습니다. 일단 다 가져가요. 주님이 다 가져가요. 주님이 출제한 문제를 주님이 정답을 다가져간다고요. 우리는 백날 해야 정답 없음이에요. 3절에,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라고 주님이 예루살렘 이스라엘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건 인터셉트 예루살렘 이스라엘을 누가 채는가, 예수님이 가운데 들어가 가지고 예수님이 이 말씀을 아버지가 아들을 향하여 말씀으로 전부 다 전환시켜 버립니다.

선지자는 그냥 백성들에게 있으니까 전하는 거죠. 예수님은 백성들이 없어요. 말씀의 상대자가 자기밖에 없어요. 계약 상대자가.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자기가 모든 말씀을 혼자 다 받고 자기가 그 안에서 예수님 본인이 선택을 해버려요. 죄인들 가운데서. 아버지는 예수님을 선택했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알아서 선택할 권한을 받았어요. 아버지한테. 요한복음5장에 나옵니다. 내가 원하는 자를 내가 선택한다. 그 권한조차 아버지한테 인수인계 받았다. 이사야62장 덮지 마시고요. 손으로 꽂아놓으시고요, 요한복음5장21절,“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예수님이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린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린다.

그러면 하나님이 살린 자 따로 있고, 예수님이 살린 자 따로 있는가, 그게 아니고 요한복음6장에 보면 아버지께서 모든 걸 내게 일임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원하는 자를 예수님이 살린다. 이리 돼요. 그래서 이 말은 뭐냐 예수님께서는 중재자를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만 일한다. 이 말입니다. 그걸 인간 쪽에서 지하실에 있는 인간 쪽에서 보게 되면 예수님만 하나님이 돼요.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인간 쪽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예수님의 영이 계시는 거예요.

그러니 삼위일체는 애초부터 성립이 안돼요. 그냥 예수님 중심주의입니다. 모든 게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께 돌아간다. 주님 중심주의지. 삼위일체 중심주의가 되면 안돼요. 인간은 자기 주제파악을 못해가지고 그런 논리 신학을 하고 그걸 정통개혁주의라 생각하지요. 예수님 중심 그걸 다른 말로 해서 십자가 중심주의에요. 삼위일체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의 능력으로 구원받아요.

하나님을 알아버리면 하나님을 아는 내가 지옥가면 안되지만 십자가로 구원받으면 십자가 앞에서 나는 죽은 자가 되어야 돼요. 내가 죽었다는 조건하에 나는 구원되는 겁니다. 왜? 내 존재가 죽고 난 뒤에 주님은 예수님의 속성으로 새로운 창조,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내는 만들어진 그 인간만 천국에 구원받거든요.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겪게 되는가, 내가 죽었다. 내 자아가 죽었다는 것을 반드시 경유해야 돼요. 그런데 나는 나를 안 죽이거든요. 살려고 하지 나는 나의 의가 있는데 의가 아까워서 내가 어떻게 죽을 수가 있습니까. 심지어 자살해도 무엇은 잃지 않는다. 자살하는 것이 뭐냐 하면 최후의 나의 의는 챙기면서 그냥 챙기고 죽겠다 해서 자살하는 거거든요.

복음모르는 성령 안 받은 일반인들의 삶이 그게 사실은 죽어가는 거예요. 자살하는 거예요. 지연된 자살이에요. 그들이 열심히 돈 벌고 열심히 활동하는 것은 이러고 죽겠다는 거예요. 결국은. 내비둬. 이리 살다 죽을래. 그럼 소원 들어줘야 되지요. 그럼 가게에 와가지고 “바지 얼마입니까?” 할 때는 “예, 바지 얼마입니다.” 이렇게 해야지. 거기다가 복음 이야기하면 안 되지요. 이 바지 입고 살다 죽어라. 햄버거 가게하면 손님 오면 햄버거 팔아야지요. 속으로 이 햄버거 먹고 죽어라. 표 찍어줘 가지고 대통령 됐으면 찍어줬으면 대통령 누가 되든 다 죽어버려라. 이왕 죽은 인간인데 죽든 냅두지요.

아들이 자기 사람을 살린다는 요소가 성도라면 내 의에 있던 자리에다가 이것이 대체해서 이것이 꽂아져야 돼요. 천주교 신자들 안방에 제일 깊숙한 곳에 무엇이 있습니까. 요만한 마리아상있지요. 마리아상 있고, 옆에다가 천주교 십자가는 예수님의 형체가 있는 십자가에요. 기독교 십자가는 그게 없고. 예수님의 형체가 있는 십자가. 십자가에다가 묵주가 이렇게 걸려있어요. 그래야 아침마다 빨리 빨리 나중에 급하게 해서 밥 먹어야 하기 때문에. 해가지고 성경문보고 기도문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게 뭡니까? 자기 의에요. 자기에 대한 자기 충성도를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거예요. 나 이정도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침 9시에 온 포도원일군이에요.

이 노동을 설마 무가치하다고 할 수 없겠지. 이러고 있다 말이죠. 그게 바로 거짓 선지자, 거짓 목자들이에요. 십자가를 경유를 안 하는 거예요. 이게 십자가입니까? 예. 그럼 다음 코스 갑시다. 이게 빈무덤입니다. 자, 다음 코스 빨리 빨리. 전세버스 떠나야 하니까 빨리 갑니다. 그냥 내가 관람하는 것. 나의 바라봄. 내가 보고 있는 것만 보는 거예요. 주께서 십자가에 섰음을 모르는 거예요. 계속해서 자기의 의를 자기의 50, 60동안 교회를 다니고 성당을 다닌 걸 그걸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나를 살릴 수 있다고 여기면서.

그게 나의 뭐가 되겠어요? 나의 자존감이 되는 겁니다. 자존심이 되는 거죠. 교회 와서 맨날 싸우는 게 결국 청소 똑바로 해! 그거 싸우는 게 아니고 자존심 싸움이에요. 어디 햇권사가 고참권사한테 달려들어. 니 몇 년 되었어? 나 다른 교회에서 50년. 나 이 교회에서 60년 됐어. 눈 깔어. 씨~ 이거 뭐 김장할 때 젊은 것들은 놀고. 외지에서 온 나이 많은 것들만 다하고 이거 뭐야? 왠 천사의 외침이었습니다.

매일같이 중보자가 우리를 꾸중할 수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성령께서 꾸중을 하시는 거예요. 성령께서. 제발 겁내지 말고 너의 의를 유지하려하고. 얼마나 겁이 나요. 이거 흠집 날까봐 얼마나 겁납니까. 겁내지 마! 니는 시체가 겁을 내요. 시체인데. 숯 덩어리가 무슨 겁을 냅니까. 숯 덩어리가. 천국 가는 나는요, 내가 죽고 난 뒤에 만들어진 나에요. 지금의 나가 아니고 죽었다고 우리를 통보해 줄 때 나의 있는 옷가지 하나 내복 하나 전부 다 주의 것입니다. 자식부터 해서 모든 가정 모든 것이 내 것이 없고 다 주의 것이에요.

그래서 나의 일은 없어요. 전부 다 주의 일입니다. 여기에 이사야 한 번 봅시다. 여기에 결혼하지요.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건 기쁨의 끝장은 결혼이에요. 헵시바라는 것은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 쁄라라 하는 것은 결혼한 여자를 쁄라라 합니다. 기쁨으로 결혼한 거예요. 관계입니다. 관계. 여기서는 더 이상 포도주, 곡식이 왜 필요한지 알겠지요. 포도주, 곡식이 생존하라고 준 게 아니고 신랑, 신부 그냥 살라는 것이 아니고 둘이 혼인해서 한 가족이 이루기 위해서 신랑, 신부하는 거예요. 어느 땅에서?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끝은 혼인잔치에요. 주께서 혼인잔치 이야기가 예수님이 하시는 끝 이야기입니다.

내 혼인잔치에 참석하라 했지. 이런 거. 혼인잔치. 이사야62장5절 봅시다.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신랑으로 오신다는 게 아모스에 나오지요. 우리가 얼마 전에도 지금하고 있는 요엘서 나오지요. 특히 유명한 말씀 호세아에 나오지요. 내가 너의 신랑이라는 겁니다. 그럼 여기 내가가 하나님 입니까. 아니지요. 중보자. 예수님이 우리의 신랑으로 온 거예요. 이 말은 스가랴에 있는 이 모든 말씀은 말라기에 있는 모든 말씀이 나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예수님을 위한 말씀이에요. 왜? 그럼 나는 들러리야? 아니요. 이미 나는 그 말씀에 입각해서 우리는 율법에 죽었어요.

죽은 자가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는 그 광경을 죽은 나를 살려내어서 니 잘났다가 아니라 니 의롭다가 아니라 주님 의롭다를 보게 하는 관람객으로 참여시키기 위해서 죽은 우리를 주님이 살려내 가지고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일어난 일을 구경하게 하시고 그걸 증거케 하시는 겁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비밀이에요.

그 십자가의 살인사건이 그것 때문에 필요한 겁니다. 니가 죽은 걸 니가 모르잖아요. 그래서 니 죽었다는 것을 예수님 내가 너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말미암아 너는 아버지 보기에 이미 죽은 거야. 십자가를 봐. 니 죽은 거 맞잖아. 십자가 죽은 거 나일까? 나만 일까? 아니야. 나도 죽었지만 그 안에 너도 죽었어. 이리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신념관계가 아니고 신앙관계에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나는 살아있다. 주님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살아있는 거예요. 내가 살기 위해서 주님이 필요한 게 아니고. 반대가 나가시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스가랴 9장, 10장 아니 스가랴 전체 내용입니다. 이게. 전체 내용이 이 내용이에요.

요한복음6장에 봅시다. 29절요.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일이니라 하시니” 내일이 없고 전부 다 주의 일이지요. 그럼 주의 일에 가정에 청소하고 청소기 윙윙 밀고, 세탁기 돌리고 양발 빨아 넣어라. 넣고 그거 ①번 세탁기 일이다. ②번 세탁기에 집어넣는 나의 일이다. ③번 주님의 일이다. 어느 일하나 주의 일 아닌 게 없지요. 그 일은 뭐냐 하면 주님의 노동입니다. 그게 관계이기 때문에 바로 믿음이에요. 주님께서 주님의 일인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생존케 하시는 피조물 되게 하는 그 관계가 세탁기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겁니다. 하루 일과를 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97세 먹은 할머니가 증손자 돌본다고 세탁기에 양말 넣고 하다가 그 할머니가 세탁기 돌아가는데 한 10분 남았는데 갑자기 심전기 해서 돌아가셨다. 심장이 기능이 정지되어 돌아가셨다. 그러면 죽은 것은 누구의 일입니까? 이게 누구의 일이겠어요? 이 사람이 복음을 안다면. 이게 전부 다 주의 일이지요. 그러니까 세탁기는 할머니가 돌아가셔도 세탁기는 계속 돌아가지요. 그게 누구의 일입니까? 세탁기 돌아가는 것은 주의 일이지요. 나는 죽어도 주의 일은 영원히. 주의 일은 영원히.

그러니까 애초부터 그걸 역으로 필름을 반대로 돌리면 내가 태어날 때부터도 주의 일, 그럼 태어난 일은 주의 일중에 하나.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도 주의 일. 코 흘리게 한다고 손수건 달고 하는 것도 주의 일. 대학 들어가는데 재수해서 들어갔다. 주의 일. 내가 재수했다는 말은 아니고요. 대학교 재수 안했어요. 그냥 들어갔어요. 재수도, 취직 안 해서 노는 것도 주의 일. 군에서 탈영하는 것도 주의 일. 어느 거 하나 나보고 너는 제발 빠져달라는 그런 주의 일 아닌 게 없습니다.

신념은 좀 빼라. 신념 빼고 신념이 빠지지 않으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바로 나 혼자 사는 것을 양과 목자의 관계로 대체해 버리겠다는 것이 스가랴에 나오는 처녀의 등장, 그리고 곡식이 풍성하고 포도주 풍성할 때, 거기에 처녀 나오고 청년, 전부 다 예수님의 신약의 작품을 주님에 의해서 새로 생긴 새로운 피조물을 스가랴에서 이렇게 예언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스가랴에서 어떤 내용을 다 이루었는지 말씀을 통해서 역으로 추적해보았습니다. 주의 일을 방해자가 우리 자신인 것을 알았사오니 나의 의로움, 나의 자존감이 주의 일을 모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사오니 주여, 저희로 하여금 복음이 일하시는 이 신비를 통해서 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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