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11111a슥9장9절(확인)-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9장9절하겠습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리 되어있어요. 여기에 구원을 베푸시는데 굳이 나귀가 동원될 이유가 무엇이냐, 그리고 나귀 타시는 것을 겸손이라고 거기다가 하나님이 스스로 거기다가 해석을 붙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석을 붙여놓게 되면 그 해석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그 해석에 도달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해석은 무얼 경유해야 하느냐 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하신 일을 토대로 해서 이게 해석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어느 인간도 알지 못하게 오신 거예요. 그래서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겸손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방식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방식.
그러니까 이 나귀 타셨다. 나귀 타시는 것이 겸손이라고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귀를 일반인들이 서민들이 타게 되면 겸손이겠습니까? 아니지요. 나귀가 겸손 되려면 굳이 나귀를 안 타셔도 되는 분이 나귀를 타고 오셔야 되지요. 그 분이 바로 왕입니다. 왕은 뭐타고 와야 되느냐 하면 나귀를 타시는 것이 그것도 나귀를 다 자란 나귀가 아니고 오늘 본문에 보면 나귀라 해놓고 뭘 또 강조하느냐 하면 다 자란 나귀가 아니고 나귀 새끼라고 되어있지요. 나귀 새끼를 가지고 여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귀의 그 다음에 뭡니까? 나귀의 작은 것. 이리 되어있지요. 9절에. 나귀의 작은 것.
누가 타시느냐 하면, 구원자, 메시아 왕입니다. 왕이 나귀 새끼를 타셨다. 이리 되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겸손이다 말이죠. 겸손인데 아무도 그걸 알지 못하는 방식을 사용한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이리 있다면 인간들이 겸손을 이해하려면 뭐부터 알아야 되느냐 하면 어떤 왕이 오신다 부터 알아야 되고요. ‘왕과 그 분이 나귀를 타실 분이 아니고 말을 타실 분으로 오셔야 되고 거창하게 오셔야 되는데’ 라고 이러한 생각을 인간들이 미리 가지셔야 돼요. 말을 타야 되는데 왜 나귀를 타시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시지? 아~ 저게 겸손이구나! 이렇게 인간들이 알아듣게 되어야 됩니다. 알아듣도록 그리 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왕이 나귀를 탔다는 생각을 못하고요, 나귀를 타게 되면 그냥 나귀 타실만 해서 타신 분. 이리돼요. 그리되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겸손이라는 게 날아가 버립니다. 겸손한 것이 없어요.
만약에 우리나라에 제일 큰 재벌집 아들이 재벌3세가 조그만 제일 작은 차 티코를 타고 다니면 그 티코만 보고도 사람들이 야~ 재벌3세다. 알아듣습니까? 안 알아듣습니까? 전혀 관심 없지요. 티코 탈만한 수준이라서 티코 타지. 벤츠 탈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안에 운전안속에 들어있는 사람이 누구냐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앞에 티코 그것만 보고 이미 확정 규정을 지어버리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나귀 탈만해서 나귀 타는 거예요. 그러니 무엇은 아니다? 아니 만유의 왕은 아니고 구원자는 창조자는 하나님은 아니다. 벌써 신속하게 판단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좀 더 깊이 규명 있게 하기 위해서 나귀 새끼를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인간들은 사용가치로 본다. 가치인데 나귀의 가치는 그 사용하는 사람과 같다. 사용가치라 하는 거예요. 사용가치. 인간들은 사용가치를 통해서 ‘나귀에 딱 맞는 적합한 그만한 수준밖에 안 되는 사람이 탔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나귀를 무슨 가치로 하느냐 하면 사용가치로 하지 않고 교환가치로 보는 거예요. 교환 가치.
여러분들이 사용가치, 교환가치가 나오니까 요 개념이 좀 낯설게 마련인데. 요즘에 유명한 요소수라는 있잖아요. 요소수. 자동차에 들어가는 필수용. 일본에는 20L가 삼만원이래요. 이게 일본의 사용가치에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1L에 삼만원이 넘어요. 갑자기 한국 요소수에는 금 들었습니까? 금 들었으면 1L에 삼만원 받아도 돼요. 똑같은 요소수는 동일한 사용가치를 갖고 있잖아요. 가치, 가격은 왜 이 쪽은 1/20로 차이가 나는 겁니까? 이건 한국에는 품귀현상 일어나가지고 사려해도 살 수 없잖아요. 돈 많이 줄 테니까 다오. 이리 되면 사용가치를 넘어서서 교환가치가 되는 겁니다. 교환가치가.
프로선수를 스카웃 하는데 너무 언론에서 부풀어 놔가지고 잘하지도 못하는데 한 10만불 데려왔다. 해보니 동네야구 수준이라. 그러면 이건 뭐 사용가치는 엉망인데 너무 언론에서 교환가치를 들떠놔서 거기에 너무 돈을 지불한 게 되잖아요.
또 어떤 사람은 예를 들어서 스웨터를 하루에 12시간씩 해가지고 한 달 동안 해가지고 스웨터를 한 10벌 만들었습니다. 하루에 12시간이니까 10일 동안 일했다 합시다. 120시간 들어갔지요. 그럼 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해서 뜨개질했으니까 한 시간 동안 한 오만원치고, 6백만원들지요. 자기는 요 스웨터 하나에 육백만원 이상 받아야 돼요. 육백만원 스웨터 내놓으면 시장에서 얼마에 삽니까? 오천원 내지 만오천원. 재료값도 안 나오지요. 요새 스웨터를 손으로 뜨는 게 어디 있어요. 중국산 수입하면 되는데. 공장에서 다 찍어내는데. 그래도 이 사람은 뭐라고 하는가, “나, 노력했어요.” 노력한 건 인정하겠는데 시장에서 교환가치가 없는 거예요. 시장에서 교환가치가.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자기 딴아 열심히 시험 치는데 일주일동안 밤새우면서 시험 쳤는데 50점 나왔어요. 머리가 안 돼. 머리가 안돼요. 그런데 어떤 공부 잘하는 애는 그 날 밤에 두 시간 했는데 100점 맞았어요. 머리가 돼요. 머리 나쁜 사람은 집중이 안 되니까 백날해도 진도가 안 나가지요. 실컷 공부하고 시험 치면 멍하니 다 잊어버리고.
이 세상에서는요, 교환가치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용가치 인정해줘요. 사용가치. 이게 필요한 사람한테 필요한 거예요. 이 세상에는 사용가치로 보기 때문에 ‘그 나귀 탈만해서 나귀에 딱 맞는 인간이 탔겠지.’ 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나가버려요. 뭐냐 하면 ‘나귀=왕’ 으로 쳐버립니다. 나귀=왕.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왕=말, 왕은 뭘 타야한다? 말. 그것도 최고의 백마. 김정은처럼 백마 타고 백두산 왔다 갔다 한 거요. 감기 안 걸렸는지 몰라. 왕은 말을 타야 되는데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이게 사용가치 및 교환가치에요. 적어도 대단한 분이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귀를 타가지고 나귀=왕이다. 이걸 받아들이라. 이걸 받아들이래요. 그럼 이걸 받아들일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 세상은 왕은 적어도 말을 타야 돼요. 나귀를 타게 되면 그건 누가 뭐래도 그건 왕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귀=왕을 만들었으니까 나귀와 왕 사이에 연계가 되어서 사람들은 아는 바가 없어요. 이건 생뚱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뭐냐,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방식. 왜? 그래야 인간들은 자체적으로 뭐하다? 겸손의 반대말이 뭡니까? 교만한 거예요.
교만한 가운데 메시아를 기다렸고, 교만한 가운데 왕을 기다린 겁니다. 완전히 인간 세상을 엎어버린 거예요. 너희들은 보고도 못 믿는 존재다. 못 믿는 존재. 들어도 못 알아듣는 존재. 맞닥뜨려도 누구세요? 하고 그냥 지나가는 존재. 여보세요? 그냥 지나갈 존재. 도대체 어디서 문제가 되었기에 인간들은 메시아가 코앞에 등장해도 못 알아보느냐. 만약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신 게 아니고 말을 타고 왔다면 인간은 더더구나 예수님을 못 알아봅니다. 아니 예수님을 못 알아봤다는 그 자체가 안 드러나요. 그러니까 못 알아보는 거죠.
마태복음21장2절에서 9절 한 번 봅시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이제 이 선지자가 누군지를 우리가 알았지요. 스가랴선지자. 몇 장 몇 절? 9장9절)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자, 여기서 시온의 딸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방식으로 나귀를 탔다는 말은 현재에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시온 사람들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고 간주를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왕이 왕 되시는 분이 나귀타고 왔으면 그 백성 또한 백성 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백성이 아닌 조차도 못 알아보는 방식으로 백성이 되게 하는 작업이 예수님의 겸손부터 개시가 되는 거예요. 시작이 되는 거예요.
8절에 보면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리 되어있거든요. 호산나 라는 뜻은 나의 구원의 주여,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대목에서 다른 성경에 보게 되면 아이들이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요, 예수님보고 나귀타고 오신 분이 우리의 구원의 주다. 라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찬미한다는 뜻으로 덩달아 그들도 겸손한 백성으로서 튀어나와버렸어요. 교만한 백성과 차이나는 겸손한 백성. 특히 아이. 그러니까 나귀, 그리고 아이, 여기에 많은 다수의 군중들,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중에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한테 이 사람들이 한꺼번에 욕을 얻어먹어요. 물론 여기 제자들도 포함하고 예수님도. 마치 기존의 그 당시의 기존의 성경해석을 한 사람들에게 한 묶음으로 다 욕을 얻어먹습니다.
그러면 전부 다 뭡니까? 이 사람들이 한 통속이 되면서 시온의 딸에 편성이 되어버려요. 예수님마저 욕을 얻어먹고요. 예수님은 겸손해서 나귀 탔는데, 메시아로 오실 분이 나귀 탈 분이 아니라고 이렇게 규정을 받아가지고 어디 가짜가 설치냐, 이런 식으로 욕을 얻어먹지요. 그런데 가짜가 왔는데 그걸 또 환영하는 사람들은 또 뭐고? 또 애들은 또 뭘 안다고 저리 흔들고 난리냐, 이리 된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라는 것은 본의 아니게 예수님의 겸손에 참여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잖아요.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그 피만이 구원하잖아요. 그게 절대적이고 그게 제일 기쁜 겁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걸 오히려 조롱하게 돼요. 십자가 그게 뭔데? 이리 되거든요. 사도행전20장28절에 보면 교회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피로 샀다 했어요. 교회라는 것은 그 기초가 하나님의 피 입니다. 하나님의 피. 하나님이 피 흘렸다 이리되잖아요. 하나님이 피를 흘리면 하나님이 뭐가 되어야 피를 흘립니까? 하나님이 이미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는 이야기가 돼요.
그들은 하늘을 보고 하나님! 하나님! 찾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게 인간들의 해석인데, 하나님의 해석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서 뭐가 되어버렸어요? 인간이 알아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미 인간이 되시고 뭐까지 흘렸습니까? 피까지 흘렸어요. 요 피에서 시작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게 교회입니다.
그런데 피를 왜 흘렸습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모욕을 당하고 굴욕을 당하지요. 그러면 교회는 뭡니까? 그 흘린 피로 말미암아 구원됐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도 덩달아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고 배척을 받고 무시를 당하고 비난을 받는 그러한 운명에 동참된 자들이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존재보다도 뭐가 더 우선이냐 하면 인간의 기능이 우선인 거예요. 기능이. 나 신자다! 나 성도다! 그거 소용없어요. 주께서 대번에 묻는 것은 “너, 무엇이 제일 기뻐?” 이걸 묻는 거예요. “저 신자입니다. 저 성도입니다.” 아니고 니가 평소에 뭐가 제일 기쁘냐, “제가 죽는다는 게 기뻐요.” “이 세상에 내가 죽어 없어진다는 것보다 더 기쁜 게 없습니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성도라면. 괜히 살아서 온갖 근심, 걱정 다하는 것보다는 주께서 없애준다는 게 얼마나 특급사랑입니까. 볼따구 잡아야 돼. 김 지애입니까. 이 땅에서 매일 매일 내가 소실되고 아무것도 안했는데도 사라져 주고 계시니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이에요.
어차피 이 세상에 갇혀서 못 빠져나오는 거 빠져나올 방법은 뿅! 하고 사라지는 거예요. 이 땅에서 사라져서 다른 세계에 도달하면 되잖아요. 그럼 내가 나를 없앱니까? 이건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이지요. 불교가 아무리 도 닦아도 무아(無我)가 될 수 없어요. 자기 자신을 없앨 수가 없어요. 내 이름을 내가 없앨 수가 없어요. 내 운명을.
그런데 주님의 운명이 들이 닥쳐가지고 내 운명, 내 팔자를 아주 시답지 않게 여기는 거예요. 뭐 이런 운명이 다 있어. 지워버린다. 지우개가지고 지워 버린다. 아이고~ 이 가치도 없는 거. 내가 싹싹 지워줄게. 지워볼까요. 싹! 싹! 니가 언제 있었어? 이런 식으로. 아예 없는 존재로 지워주니까. 걱정, 근심도 같이 없어지네. 세상에 이런 묘수가. 걱정 근심도 같이 없어져요. 없어진 자리에 뭐만 나옵니까. 예수님의 피의 업적과 실적과 성과와 효과. 이 전체를 가지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오늘 본문에서 제목으로 삼으면, 효과에요. 효과.
성도는 효과를 확인하는 자라서 성도된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건드렸습니다, 를 거기다 뭘 보태지 말고 섞지 말고, 확인해 주는 거예요. 주께서 오늘도 나의 일이라고 여겼던 것을 지우고, 오늘도 나의 일을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의 피로 싹 지워버려요. 니 하루는 니가 만든 것이 아니고 피의 업적과 피의 설계, 피의 스케줄에 따라서 그 피의 효과를 확인하라고 오늘도 하루를 조성해 놨다. 이게 바로 성도가 받은 특급사랑이에요. 특급사랑입니다. 얼마나 기쁜 줄 몰라요.
사람이 자기 소망이 하나 이루어지면 기쁘지요. 기쁜데, 그 기쁨은요, 예를 들면 이게 얼마 안가요.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가 너무나 예쁜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어서 굉장히 공을 많이 들였는데. 드디어 그 여자와 혼인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그 기쁨은 거기서 끝나는 겁니까? 그 기쁨은 앞으로 계속 되는 거예요?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탐을 냈던 여자를 내가 가졌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결혼하고 난 뒤에는 감시에 들어갑니다. 혹시나 공 들였는데 그 여자가 내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눈 돌릴까봐 공을 배나 감시체제에 들어가는 거예요.
인간이 내 팔자, 내 운명을 내가 쥐고 있으면요, 그게 자기가 악마의 미끼에 완전히 빠진 거예요. 여러분들이 초등학교 때 들었던 옛날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어떤 바닷가에 아주 다정한 노부부가 있었는데 굉장히 가난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금슬 좋게 살았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았는데 고기가 금고기가 올라왔어요. 금고기가 사정사정해서 풀어주면 한 가지 소원 들어주겠다고 해가지고 어쩔까 하고 있을 때 그 할머니가, 할머니가 문제라. 우리 집에 부뚜막에 깨진 물동이가 있는데 그걸 성한 것으로 바꿔주면 좋겠다. 그 물고기를 풀어주니까 물동이가 멀쩡한 물동이가 됐어요. 다음에 가니까 또 잡혔어. 그 금고기는 왜 자꾸 잡히는지 몰라. 또 잡히니까 요번에는 잡거든 쌀 한가마하고 다시 기울 필요 없는 새 옷 하나 주세요. 하라고 했어요. 풀어줬더니만 쌀가마하고 새 옷이 왔어요.
그 다음에 또 할머니가 또 잡거든 이제는 이 학고방 말고 기와집 해달라고 부탁해가지고 기와집 됐어요. 그 다음에 또 할머니가 양반되게 해달라고 해서 양반 해줬어요. 그래서 할머니가 성에 안 차가지고 다음에는 만나거든 나라 임금님 되게 해달라고 해서 잡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물고기를 풀어주니까 지금까지 받았던 거 원상복귀 되어가지고 다시 다정하지도 않고 깨진 물동이가 있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물고기가 나를 풀어주면 소원 들어줄게. 해가지고 보이스피싱 비슷한 그런 건데. 해주고 풀어주는 게 아니고. 풀어놓으면 해줄게. 신용 거래한 거죠. 여기 할머니 한 번 보세요. 이 정도 하면 욕망이 멈출 줄 알았지요. 계속해서 해석을 하는데 무슨 해석이냐 하면 자기 해석에 대한 갱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해석. 나는 이 정도에 멈출 위인은 아닐 거라는 것.
자기 해석에 대한 갱신이 이게 욕망에 미끼가 되어서 계속 이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 이건 금 물고기를 잡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지옥을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원래 못 믿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인간은 못 믿게 되어있는데 교회에서 전부 다 강제로 예수 믿으라 하니까 이건 뭐 안 믿으면 안 되는 줄 알고 믿습니다. 하고 손들고 다 나오는 거예요. 본인은 전혀 달라진 것도 없고. 자기 욕심은 그대로 있고. 예수만 덜렁 숟가락 하나 얹어놓듯이 예수만 믿은 거예요.
그 예수의 활용도가 뭡니까. 자기 욕망을 위한 교환가치로 사용해요. 교환가치. 자기 욕망을 위한 교환가치로 사용할 게 뻔하지요. 이 뻔한 것. 인간들이 뭐하는데 뻔하는 걸 알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뻔한 논리 사슬에 얽매이지 않은 교환가치로서 나귀를 동원한 겁니다. 나귀를 탄 사람은 결코 왕이 될 수 없고 메시아 될 수 없다는 걸 철석같이 믿는 이 인간세대에다가 주님께서는 나귀를 타신 거예요. 이 겸손은 인간이 이해하는 개념의 겸손이 아닙니다.
인간이 그걸 겸손으로 이해하지를 못해요.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어린아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군중들이나 그냥 우~~ 해서 떠들어 본 거예요. 아무나 뭐 하도 로마의 압제가 심하니까 아무나 뜨기만 하면 우르르 호응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신 이유가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띄운 겁니다.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시는 작업을 하신 거예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나귀 = 왕이 되는 그 의식이 그들에게 없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되돌려준 겁니다. 너희에게는 나귀가 왕이 된 게 없다. 군중들도 마찬가지에요. 나중에 예수님이 잡혔을 때 군중들도 그 분은 왕 맞다. 일괄적이지 않아요. 한결같지 않아요. 전부다 바라바를 살릴래? 예! 예수는 죽여라. 이리 된 거예요. 전혀 거기에 어떤 여론몰이가 형성이 되지 않았던 겁니다. 일시적인 어떤 분위기 띄우는 데는 됐지요.
우리가 방금 한 걸 다시 해봅시다. 나귀는 뭐와 교환한다? 왕과 교환한다. 이게 하나님의 원칙인데 이런 바보 같은 흥정이나 거래는 인간세계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왕이 나귀새끼 한 마리하고 바꿀 가치인가. 안되지요. 인간개념에서 왕은 나귀 탄다. 이런 공식이 있을 수 없지요. 이걸 통해서 왕은 주님은 스스로 사라집니다. 스스로 사라져요. 물론 인간들이 죽였지만. 스스로 사라질 것을 계산하신 거예요.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는 뭐가 없는 거예요? 인간세계에는 다른 신이 있었고, 다른 메시아가 있었지 진짜 메시아는 없다는 것이 뭐되느냐 하면 확인되는 겁니다. 확인.
자, 이런 확인차원에서 드러난 것은 그 나귀타는 왕은 인간에게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 되었습니다.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 되었는데 이게 주님께서 스스로 의도했던 겁니다. 의도했던 일이에요. 그러면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은 없지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걸 알았으니까 다음과 같은 요 문장을 이해해 주셔야 됩니다. ‘진리는 선 아니고 악 아니고 선과 악 그 사이에서 진리가 나타난다.’
그러면 인간은 선과 악 이것 밖에 모르잖아요. 여기에 갇혀 있잖아요. 갇혀있으니까 여기서 나타나는 진리는 이 선악 계에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인간은 선 아니면 악. 악 아니면 선이니까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진리는 인간세계에서 진짜냐, 아니면 가짜냐, 이게 인간 세상에 둘이거든요. 주님은 진리는 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고 진짜, 가짜, 그 판 자체가 이게 가짜로 드러내게 하는 제3의 없던 구석에서 나온 게 이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했던 마태복음 보게 되면 나귀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귀를 주님이 친히 쓰시겠다, 하라. 쓰신다. 주님이. 아까 봤지요. 마태복음21장3절에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그러면 인간은 뭐보다 못하냐 하면 인간은 뭐보다 못합니까? 인간은 나귀보다 못하지요. 이게 인간 존재냐, 안 존재냐가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쓰시느냐에 따라서 이 참과 거짓이 안 쓰시면 거짓이고, 쓰시면 그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등장해야 돼요. 주님이 등장하셔서 주님이 쓰시면 그건 성도고 안 쓰시면 그건 성도 아닌 거예요.
그런데 하필 왜 나귀하고 인간하고 비교하느냐 나귀는 환상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라.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그런데 인간은 악마가 만든 환타지가 있어요. 환타지. 지 욕망이 만든 환타지 꿈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속지 않으려고 하는 자체가 이미 속아 넘어간 거예요. 속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은요, 나는 거짓은 버리고 오직 참된 것, 진리만 얻겠다고 나대는 그 자체가 속아 넘어간 증거입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 보면 제목이 <도시의 불빛>이란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를 간단히 말씀드리면 어떤 눈 먼 소녀가 환타지 상상을 가지고 먼 친척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데, ‘우리 가게에 큰 부잣집 멋있는 분이 우리 가게에 단골로 오신다.’ 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 분이 물건사고 한다 한 겁니다. 그리고 그 분이 와서 눈 먼 소녀가 불쌍하다고 다정하게 해주니까 나는 커서 그 분과 결혼해야지. 할 정도로 굉장히 연모하고 흠모했다. 이 말이지요. 눈이 감긴 채. 말도 따뜻하게 해주니까. 그런데 우째 우째 해가지고 그 사람은 거부도 아니고 부잣집 아저씨도 아니고요, 떠돌이였고 그냥 잡부였고 그것도 일 안돼서 떠돌이 하다가 오해를 받아가지고 교도소 갔다가 나왔어요.
우연히 돈이 생겨가지고 그 돈을 자기를 잘해줬던 이 눈 먼 소녀에게 주고 교도소에 갔어요. 자기는 훔친 게 아닌데. 도둑으로 몰려가지고. 그래서 이왕 도둑으로 몰린 거 돈도 필요 없다 싶어 그 돈을 눈 먼 소녀에게 다 줬어요. 그래서 그 눈 먼 소녀가 그 돈 가지고 눈을 치료를 했어요. 자기 돈 준 사람은 교도소에 가서 못 만나고. 나중에 교도소에서 나왔으니까 직업도 없고 돈도 없고 헐벗은 모습으로 딱 왔을 때에 소녀가 눈 떠 있는 거예요. 눈 떠 있으면서 어서 오세요. 하니까 그 떠돌이 아저씨가 동전 하나를 그 아가씨 손에 쥐어주니까 그 때 아가씨가 눈이 멀었을 때는 촉각이 발달하잖아요. 그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제 보이느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 아저씨가. “이제 눈이 보이느냐?” 그 때 아가씨가 “이제 보여요.” 자, 본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내와 당신 사이를 본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동안 환타지 속에 놓여있는 나를 비로소 그 아가씨는 본 거예요.
주님께서 모든 일은요, 니가 마귀한테 갇혀있고 속고 있다는 것을 보게 하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주님의 모든 일은. 그래서 예수 믿고 하나님 믿는 것은요, 그건 결국 우리가 나귀가 아니고 인간인 이상 우리가 제대로 못 본 이상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어도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결국 발견하는 것은 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잘난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 밖에 안돼요. 그게 신이 됐든, 예수가 됐든, 성령이 됐든. 자기 욕망을 발견하는 거예요. 자기 욕망. 나는 저렇게 되고 싶음을 발견하는 거예요.
진짜 찐 찐 찐짜 메시아 예수님은 뭐냐 하면 모든 일을 할 때에 나, 이렇다. 자, 꼼꼼히 따져 봐라. 가 아니라 나는 너에게 이렇게 다가갔다. 나는 너희들이 알고 있는 거 뒤집어버렸다. 왕인데 나는 나귀 탔다. 그런 의도를 아느냐? 니가 지금 누구한테 속고 있기 때문에 속는 것에는 거짓말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 다가오는 방식이 무슨 방식이냐, 바로 고통입니다. 고통. 고통이에요. 아픔입니다. 아픔.
주의 성경 말씀은요, 아픔을 토대로 해서 경유하지 아니하면 해석이 안돼요. 모든 말씀이.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경유하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되는 말씀이에요. 왜 하나님께서 거창하게 오시면 되는데 왜 이렇게 살과 피로 십자가에 죽으시느냐, 문제가 뭐냐 하면 자기 백성을 건져내면서 오직 자기 백성을 건짐 받은 백성으로 하여금 메시아가 메시아임을 확인차 확인하기 위해서. 이걸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도 사실은 아버지 앞에 그렇게 하셨어요. 율법에 보면 증인이 두 사람이 됐어야 돼요. 아버지가 증인이고 본인이 증인이에요. 예수님이 증인 된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이 만들어낸 사람과 예수님 자신이 증인되는 거예요. 율법을 이룬다 말이죠. 그 증인 되는데, “딱 보니까 예수님 믿는다.”가 아니라 “십자가 지신 분 맞네요.” 이런 식으로 십자가를 경유해야 찐 찐 진짜로 메시아를 만난 거예요.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말이 아니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이게 주님의 제자에요. 주님의 제자고 주님의 백성입니다. “나 같은 것은 나귀보다 못하니까 나 같은 것은 상대할 가치도 없습니다. 나를 떠나소서.” 한다고 주님이 떠날까요? 주님이 우리 말 듣고 떠나고 안 떠나고 합니까. 우리 말 듣고 지옥 보내고 천국 보내고 합니까? 일체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내는 것은요, 우리 말 안 들어요. 우리하고 상대도 안 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지옥에 있기 때문에 지옥의 인간이 뭐 장래를 지가 걱정해가지고 나는 천국 가겠다. 아이고~ 성질나는데 지옥갈래. 이런 말 한다고 하등의 참고 내용이 될 수가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결정지어버리면 천국 가기 싫어도 천국 가야 돼요. 지옥 가려면 천국에 오지 말아야 되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과정을 통해서 주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주님을 확인하기 때문에 성도 자신의 가치와 의미 있잖아요. 교환가치, 사용가치 이걸 스스로 우리로 하여금 사라지도록 그렇게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사라지도록. 어떻게 사라지게 하느냐, 성경해석 전부 다 니가 한 해석 다 바꿈으로서 너 라는 존재 자체가 별 사용가치도 없고 교환가치도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흠~ 나는 있으나 마나 하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있으나 마나한 존재는요, 걱정하거나 염려하거나 불안을 떨 자격도 안돼요. 있으나 마나 한데. 이걸 뭐라고 하느냐 영어로 nothing. 아무것도 아니다. 이걸 또 다른 말로 하면 성도는 주님을 만날 때 죽은 채로 만나는 거예요. 죽음 안에서 만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이 땅에서 죽음으로서 주가 되셨기 때문에. 그 절차를 그대로 반복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인간들은 도대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성도든 불신자든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성령이 오시기 전에, 인간들은 어떻게 사는가, 인간의 사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화를 내면서 살아요. 분노를 터트리면서 사는 겁니다.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악마가 인간들에게 뭐를 집어넣었느냐 하면 자기 의로 살도록 그렇게 만들었어요. 자기 의로 살도록. 자기 정당성. 자기 정당성을 지키도록 그렇게 그런 식으로 자기 잘남과 자기 대단함 그 보람으로 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의, 자기 정당성을 늘 이걸 신경 오로지 여기만 신경 쓰고 살기 때문에 조금만 자기 의와 정당성에 뭔가 튀어나가게 되면 왈칵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서 분노가 화를 터트리게 되어있어요. 그냥 짐승 같아요. 물어뜯는 게 주특기에요.
이건 뭐 한 살, 두 살, 50살, 70살, 100살 돼도 이건 예외가 없습니다. 자기 정당성과 자기 의로움에 대해서 조금만 손실이 가게 되면 왁 뜯어먹어요. 그래서 부부라든지 자식 관계가 사실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의로움과 자기 정당성으로만 살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하나라는 것이 성립이 안돼요. 다만, 내 정당성과 내 의를 유지시켜 주고 피워준다면 내가 당신과 사는 것을 내가 봐줄게. 하는 식이에요. 자식들도 마찬가지고요. 왜냐하면 본인이 신이고 본인이 왕이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왕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와서 나귀 타고 오는 이상한 퍼포먼스를 벌인 거예요. 인간들은 왕이라는 것은 자기 이상향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왕이 누가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되고 싶은 그것이 왕이에요. 인간이 남을 가족이든 부부든 자식이든 만날 때 뭘 보느냐 하면 타인을 통해서 내가 얻고 싶은 것만 봐요. 인간은. 가족이라도 내가 찾고 싶은 것만 본다고요. 이 말은 ‘인간은 자신이 타인을 만든다.’ 이 문장입니다.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 문장인데. 남은 내가 만들어요. 내가 남을 만들어서 그 남은 내 잘남을 증명해주고 확인해줄 수 있는 상대로서 떡하니 내 앞에 부부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설정해 놓은 거예요.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 당기면 할아버지는 허허 웃습니다.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어요.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 당기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나이 40 넘은 조카가 수염 당기면 그 아는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선택하지 않은 타인이거든요. 내가 용납하지 않은 타인이에요. 아이는 어리기 때문에 내 의에 손상이 안가요. 내 위신과 권위에 흠집이 안 난다고요. 만약에 이제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제명이가 와가지고 악수한 번 할까요. 하면, 아이고~ 감격스러워라. 오늘 손도 안 씻을게요. 하잖아요. 그런데 윤석열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제명이가 악수할까요, 하면, “이게 어딜 성폭행! 성추행을 하다니! 고소한다. 사진 찍어라. 찍어라. 어딜 나의 의와 나의 정당성을 니가 뭔데 니는 내가 원하는 타인이 아니야.” 타인도 내가 정해요. 내가 정한다고.
내가 정하는 타인이 어딜 나의 의를 침범해. 용납이 안돼요.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인간에게 주께서 일괄적으로 타인을 만들어줬어요. 그 타인이 뭐냐,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다가와요. 성도든 성도 아니든 주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다가와 가지고 이 죽음 앞에서 너의 의와 너의 정당성이 과연 어떻게 되는지. 한번 니 정리해봐! 이 나의 죽음 앞에서. 과연 너의 의와 정당성이 아직도 유지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한 번 생각해 봐라. 너희는 그 정도로 너의 죽음을 너의 이웃과 내 모습 이상형으로 받아들일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스스로 사라져버린 거예요. 아무도 주의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런데 미가라는 선지서에 보면, 5장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작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아까 나귀 할 때 그냥 새끼 아니고 작은 나귀 새끼 했지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지역 자체가 예루살렘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딸이 생산되는 곳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이에요. 왜? 예루살렘에 비해서 작기 때문에. 그 다스릴 자가 거기서 나온다는 거예요. 주님의 출생지부터 해서 주님의 나귀 타는 것까지 전부 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인간의 자기 정당성, 자기 의.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택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주님은 오히려 그 정당성에 의해서 침을 받고 희생을 당하는 그 죽음으로서 다시 타인으로 다가 설 준비를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나의 죽음을 너의 영원한 안식처로 받아들일 용의가 되어 있느냐, 그걸 물으시는 겁니다. 아무도 없었지요. 성령이 오면 가능하지요. 10분 쉽시다.
안양20211111b슥9장9절(확인)-이 근호 목사
첫째시간에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풀고 오면서 예수님을 호산나 이렇게 할 때에 그 누가복음 19장39절에 보면,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 이렇게 했어요. 당신이 너무 과도한 대우를 받는다. 구원자 왕처럼 받는다. 이렇게 할 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른다. 돌들이 소리 지른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이건 뭐냐 하면 아까 첫째시간 마지막에 이야기한 것은 죽음이 너의 타자다. 너의 남이다. 너희들은 죽음 앞에서 진정한 너의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돌이라 하는 것은 무기물이거든요. 무기물. 돌멩이보고 어떤 이성이라든지 감정이나 어떤 기대나 희망을 갖습니까. 돌멩이는 처음도 돌멩이고 중간도 돌멩이고 끝까지 돌멩이잖아요. 그 돌멩이가 누구보다 낫다? 인간보다 더 낫다. 그래도 돌멩이는 적어도 죽음은 아니거든요. 인간은 죽음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타자가 죽음이라는 이 말은 많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악마가 인간에게 늘 심리적으로 압박을 주는 것은 뭐냐 하면 무너지면 안 된다.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된다는 거예요. 무너졌다. 무너졌다는 것은 어느 경우에 무너졌다고 하는 것이냐, 이것은 바로 나의 의, 나의 정당함이 무너지는 것을 무너졌다고 이야기해요. 인간들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나귀나 소나 짐승이나 돌은 그런 생각 없어요. 그냥 깨지면 깨지는 대로 그냥 있는 것이지, 무너졌다는 것은 그 전에 내가 무너졌다의 반대말이 뭐냐 멀쩡하다는 뜻이거든요.
인간이 어떨 때 멀쩡한 거예요? 남한테 욕 얻어먹지 않을 때 멀쩡한 거예요. 인간은. 인간의 모든 일은 자기 멀쩡함을 유지시켜 주는 겁니다. 자기의 의로움이 견지되는 것. 이게 인간의 모든 일의 보람이고 희망이고 노력의 근거가 돼요. 나의 의가 아까 한 것 같으면 나는 뭐가 있다? 나는 사용가치가 있고, 사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 땅에서 이 세상에서 나 같은 값어치 있는 인간은 누가 데려가도 땡잡았다. 교환가치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옛날에 여성들은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그 다음부터는 대학교 안 갔습니다. 집에서 뭐하느냐 하면, ‘바느질 가르치고 재봉 가르치고 살림 잘하고 음식 잘하면 이건 이 시장에서 교환가치 때문에 누가 봐도 데려간다.’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돈 들여다가 얼굴 뜯어고쳐야 돼요. 이뻐야 갈 수 있어요. 이뻐야. 이뻐야 튕겨도 튕길만한 가치가 있지. 생기지도 못한 게 튕겨보세요. 그건 진짜 밟아버립니다. 니가 튕길 쨉이 되냐 말이에요. 니가. 니 진짜 너무 모른다. 니. 니가 지금 뭐가 아쉬워할 이유가 없어. 니는. 건덕지가 없어. 뭐든지 감지덕지 감사해야 되지. 나를 데려가면 고맙습니다. 해야지. 뭘 튕겨. 주제파악도 못한 게. 이래가지고 욕 되게 얻어먹게 되어있어요.
튕긴다는 말은 아주 노골적으로 말해서 분노한다는 뜻이에요. 니가 내 가치를 지금 뭘로 보고 니가 드리대느냐 말이에요. 니 깜냥이 되느냐 이 말입니다. 니 한 달 수입 얼마인데? 육백 돼? 이런 식으로. 육백원 말고 육백만원. 말 똑바로 들어. 재산 오천 돼? 오천원 있어. 오천원이 아니고 오천만원. 오억 오천. 앞에 오억 붙여서. 아파트 전세 하나 얻을 돈 돼? 이 모든 이야기가 이 의 때문에 이것 때문에 나는 죽음을 나의 타자로 못 받아들이겠다. 내가 왜 죽어? 이런 식으로. 쉽게 말해서 내가 왜 죽어? 멀쩡한 내가 왜 죽어? 이리 되거든요.
그러면 이 사람은 뭐냐 타인 남을 자기가 고르잖아요. 궁극적으로 뭐냐 이 세상은 나밖에 없는 거예요. 왜? 타인을 내가 필요에 따라서 구하고 사용가치, 교환가치에 따라서 보면 내 쪽에서 잘라내니까요. 그 유명한 법칙 있잖아요. 까이기 전에 깐다. 까이기 전에 까는 것. 까이기 전에 까야 나의 가치는 내가 만족스러운 사용 상태로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행동은 그겁니다. 마작하거나 할 때 포카 칠 때, 나는 포카 같은 거 잘 못 쳐요. 화투도 칠 줄 모릅니다. 그만큼 경건하다는 뜻이겠지요. 이거 화면을 봐야 되는데. 또 음성 들으면 진짜 경건한 줄 알고. 화투 칠 때 뺄 건 빼고 두 장 더. 이런 거 있데요. 영화에 보니까 007보니까 그런 게 있더란 말이죠. 이거 빼고. 그거 왜 뺍니까? 기존의 내 역량을 키우기 위해서는 빼는 거죠. 방해되니까.
인간은 결국 자기 잘남을 지키기 위해서 평생을 타인을 줬다 뺐다 지 맘대로 갖고 놀잖아요. 어떤 영화에 보면 이런 게 나오는데 실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내가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죽은 것이 아마도 경찰에서 조사를 잘못한 거 같아. 피해자인데 가해자로 바뀐 거 같아요. 그래서 그 아내가 찾아다니면서 병원에 가가지고 남편의 진료기록을 봐 달라. 라고 하는 대목의 대사가 나와요. 내 남편의 진료기록을 보여주세요. 제가 아내라는 증명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의사가 하는 말이 제 타자인 타인에게 보여줄 수 없습니다. 진료기록을 본인에게만 합니다. 본인에게 물어보고 오세요. 라고 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아내가 사망진단서를 끊어가지고 남편이 죽었습니다. 남편이 죽었으니까 남편의 의료보험 액수하고 필요하니까 나한테 알려주세요. 하니까 의사가 하는 말이 “죽은 사람도 내 환자입니다. 본인이 아니면 안 가르쳐줍니다.”그런 대사가 나와요. 진짜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뒤에 돈 끼워주면 다 보여주는데 그런 걸 가지고.
이게 왜냐하면 경제논리에서는 타인은 절대적 타인이에요. 부부가 한 몸이 안돼요. 아내와 남편은 돈에 문제가 있어서 절대적으로 타인입니다. 돈의 타인 같으면 곧 이 말은 가치에 대해서 서로 다르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면 이건 가치가 다른데 그럼 그동안 한 몸 인양 살았다는 것은 그냥 한 몸인 듯, 한 몸 인척, 한 몸 인양, 그렇게 산 것이지 결코 인간은 한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제가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우리 구원자 주님과 우리 성도가 한 몸 일 수 있는 능력은 그런 방법은 인간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소용없어요. 한 몸도 아닌데 무슨. 예수 믿는다 하는 것은 지식이지 그런다고 한 몸 되는 건 아니지요. 지난 낮 설교에서 훅하고 지나간 대목이 있어요. 상당히 너무 중요한데. 그걸 설명하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그냥 넘어갔어요. 뭐냐 하면 나와 나 사이에 결합되어 있던 이 결합이 이 나가 현재 있는 내가 이상적인 나, 내가 되고 싶은 나와 결합되어 있다가 이 나가 주님과 결합되면서 이것이 끊어진다는 것을 아주 짧게 이야기했어요.
나와 나는 결별되고 주님과 하나가 되면 나는 결별된다는 그 대목이 나와요. 내 쪽에서 주님이 타인이기 때문에 절대로 아무리 주님을 불러도 주님은 나와 한 몸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가 될 수 없으면 영생이고 뭐고 다 물 건너가는 거죠. 안 되는 거죠.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 새로운 나를 나 되게 하는 거예요. 그 나 되게 할 때 무엇으로 이렇게 결합이 되느냐, 바로 죽음을 가지고 주님의 죽음과 나의 죽음을 일치시킬 때 같이 죽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로마서6장4절. 함께 죽었다는. 함께 죽어야 함께 부활이 돼요.
함께 죽지 아니하고 따로 죽으면 함께 부활이 안 됩니다. 아브라함이 막벨라굴에 갔거든요. 이삭도 막벨라굴에 갔거든요. 동일한 장소에 장사지냈다는 의미가 바로 십자가라는 동일한 예수님이 먼저 선행해서 죽었던 그 지점에 가야 우리가 같이 부활될 수 있습니다. 방금 지점하니까 여러분 생각에 어떤 공간, 어떤 처소가 있는 줄 아는데 그 지점을 신약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건으로 와요. 사건.
그럼 사건이라는 말이 너무 어렵잖아요. 그건 뭐냐 하면 사고. 교통사고 어떤 사고 난 거예요. 그러니까 내 인생이 사고 난 거예요. 주님이 쳐들어와서 오는 사고. 사고는 깜놀! 깜짝 놀랄 일이에요. 아이고~ 나한테 이런 사고가 나다니! 이건 보험 들어도 소용없어요. 주님이 찾아와서 나를 주님이 자기 죽음에 나의 죽음을 초대한다면 이건 그야말로 사건 정도가 아니고 이건 큰 사고 난 거예요. 사고 난 거.
완전히 나는 내가 스스로 포기할 수 없었던 나의 의, 나의 정당성은 완전히 와르르 다 무너진 거예요. 더 이상 너의 의로움에 니가 거기에 매달려 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 주님의 의가 있는데 왜 쓰레기 같은 니 의를 못 지킨다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냐 말이지요. 그러면 그 사고 나는 그 지점, 지점에 대해서 오전 설교에서 제가 언급을 했었어요. 거기에서 뭐냐 하면 출생지를. 아담의 DNA가 출생지였는데 기존의 몸은 엄마, 아빠의 DNA를 50%받잖아요. DNA인데. 유전 정보인데. 새로운 DNA는 뭐냐 예수님의 쓴잔,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고 하는 거예요. 니 살이 아니고 내 살 들어간다. 니 피 말고 내 피 너에게 들어간다. 그래서 들어가는 거예요. 아담에서 내려오는 파이프가 있다면 이 파이프에 사고가 일어나가지고 주님의 수직적 파이프가 이걸 꽂아버린 거예요. 내 인생에서. 꽂아가지고 이쪽에 흐르는 피와 살이 있는데 이것이 뭐냐 예수님의 피와 살이 들어와 가지고 새로운 계열을 형성하는 겁니다. 이 마주침이 뭐냐 하면 십자가 사건 또는 사고의 반복이라 합니다. 반복.
십자가 사건의 반복. 매일같이 되풀이 하는 거예요. 매일같이 사고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사건일수도 있고 사고가 있을 수 있는데. 자, 여러분 사고라는 말을 제가 써볼게요. 사고가 났을 때 여러분은 이걸 희극으로 봅니까? 비극으로 봅니까? 사고가 났을 때. 딱 사고 났다! 희극은 행복이라면 이건 뭡니까? 불행이지요. 주께서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나 자신에 대해서 불행과 비극을 유발시킵니다. 어떤 미련이나 집착이나 희망을 갖지 않도록. 아예 우리에게 불행을 하게 돼요. 자기에게 절망을 한다 말이지요. 무너져 내리는 거죠. 실제로 이런 경우가 구약에 보면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 때에 사렙다 과부한테 가가지고 마지막 밀가루. 마지막 기름 참기름 부어서 죽으려고 할 때, 그걸 누가 냅다 뺏어 가가지고 혼자 그걸 깎아 먹습니까? 누굽니까? 엘리야가. 마지막 죽는 것도 먹고 죽으려고 하는데 그걸 뺐냐, 아~ 참 못됐지요. 그걸 뺏어버렸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당신이 뭔데 내 죽음에 관여합니까? 관여 좀 하자. 왜? 이게 뭐냐 하면 바로 타인이에요. 주님은 바로 타인으로서 내가 초청하지 않은 타인. 내가 부르지도 않는데 그냥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그냥 들이닥쳐 버리지요. 이건 내 인생에 사고입니다.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불행으로 봤다 말이지요. 잘 들어보세요. 그걸 내가 사고 난 걸 불행이라고 다시 말해서 사고 난 게 불행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내 원대로 내 뜻대로 안 되는 걸 뭐라고 봅니까? 비극이요, 이걸 불행이라고 보잖아요.
이렇게 본다는 것은 우리 나름대로 뭘 생각하느냐 하면 행복과 다행스러운 경우를 우리는 따로 내 안에 생각해 둔 게 있어요. 그러나 이 비극과 불행이 무너지면서 행복도 같이 무너뜨리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니가 생각한 희망적이고 낙관적이고 행복, 그거 잊어라. 너 자신이 날아가는데 그것도 같이 날아가야 된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내가 어떻게 행복하냐, 불행하냐, 이 선택 자체가 우리한테는 안 일어나게 하시는 거예요. 일방적으로 주님의 의에다가 여기다가 집어넣어버려요. 그럼 우리는 내가 어떻게 됩니까가 아니라 너는 주님의 효과와 능력을 늘 확인하기 위해서 하루, 하루 살면 되는 겁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이런 일 시켰군요. 이렇게 감사케 하셨군요. 그것만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것만.
첫째시간에 이어서 타인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둘 째 시간도 그대로 이어가보겠습니다. 여기 스가랴 봅시다. 스가랴9장10절에 보면,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에브라임이라 하는 것은 북이스라엘이고요, 예루살렘은 남쪽 이스라엘을 말하겠지요. 활도 끊으리니, 전쟁이 끝났다, 이 말이에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유브라데 땅 끝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을 처음으로 수축시킬 때, 압축을 시켜버리면 처음 에덴동산이 나오겠지요. 이 세상이 그만큼 넓어졌으니까 비디오를 돌려버리면 압축시키면 처음에 있던 동네가 나오겠지요.
따라서 인간세계에서의 영토라는 개념은요, 영토가 있고 인간이 사는 게 아니고 인간이 있는 곳이 곧 영토가 되고 공간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천국은 영토가 있고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국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먼저에요. 사람이. 사람이 먼저고 그 다음에 그 사람의 효과, 능력, 어떤 능력이 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자, 처음 동산으로 갔을 때 인간이 이겼습니까? 뱀이 이겼습니까? 뱀이 이겼지요. 인간은 뱀한테 져서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그때부터 인간에게 비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보면 인간이 누구를 이기느냐 하면 뱀을 이깁니다. 요 인간은 새로운 대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뱀을 이겨요. 이 말은 우리는 이긴다? 못 이긴다? 우리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긴 분이 타인으로 찾아와서 한 몸을 이루면 되는 거예요.
시편2편 보겠습니다. 항상 성경 해석에서는 반드시 예수님의 고통을 경유해야 돼요. 예수님의 고통을 경유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얻겠다, 라는 얄팍한 노림수가 작용됩니다. 주님의 고통을 경유해야 될 이유는 나는 항상 분노하고 화내는 존재다, 라는 것을 전제로 깔아야 돼요.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타인이 왔을 때는 나는 경계하고 방어하고 분노하고 화낸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겸손한 고통으로서 그 화를 주께서 받아 준 거예요. 그 화 낸 거 나한테 와. 분노 나한테 해. 나는 니 쓰레기통 될게. 받아내시면서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이게 뭐냐 주님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은 이유 속에 자기 백성의 화와 분노를 다 받아주기 위한 죽음이에요. 뭐라고 욕하고 발로 차도 받아주게 되어있어요. 엄마의 정강이가 튼튼한 이유는 시장갈 때 자기 아들이 장난감 안 사준다고 엄마의 정강이를 막 찬다고요. 애들은 발이 짧아가지고 발로 차봐야 정강이밖에 안와요. 엄마는 긴 월남치마 입어가지고 다 방어가 돼요. 거기에 내복까지 입어가지고 추운 날. 덜 아픈 거예요. 감수한다 말이지요. 내가 니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받아주는 거예요. 니가 화도 안 내고 점잖게 예수 믿겠습니다. 이런 인간 존재하지 않아요. 화내고 나한테 격하게 대항하는 것을 감수하고 받아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일찍 겪었던 고통이에요. 그 고통이 고난이 확산되고 확장되어버리면 그 안에 뭐가 있느냐 우리가 얼마나 주님께 앞으로도 분노하고 화낼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면서 받아들일 준비를 하시면서 주께서 다 받아주시는 겁니다. 시편2편에 보면 인간들이 그동안 한 통속했던 인간들이 원했던 타인들이 나옵니다.
시편2편 읽어볼게요.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이 분노라는 말이 나오지요.)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이방 나라가 분노하는 이유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하나가 된 거예요. 똘똘 뭉쳐서 한 덩어리 된 겁니다.)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이방나라가 대부분이니까. 크게 쓰겠습니다. 이방나라. 이스라엘 입장에서 이방나라에요. 세상나라는 그냥 나라가 되겠지요. 내 나라. 내 조국 되겠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이 보게 되면 내 나라, 내 조국이 전부 다 뭐가 됩니까? 이방나라 돼요. 이방나라.
자, 이방나라는 뭐할 준비가 돼있다? 분노할 준비가 되어있다. 어떤 경우에만 그러느냐, 어떤 경우냐, 새로운 나라가 등장할 경우에는 이방나라가 공격하게 되어있어요. 이 이방나라는 특징이 뭐냐, 여호와와 관련성이 없습니다. 연결이 안 돼 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여호와와 관련된 나라. 그 나라는 기름 부은 자. 여기 2절에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지요. 메시아. 그 당시에 왕과 선지자, 제사장들입니다. 그 메시아 중심으로 된 나라에 대해서는 그들이 격하게 공격하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나라가 등장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가 등장하지 않으면, 이방나라는 자기 주제를 몰라요. 자기 본질을 몰라요. 다들 점잖고 훌륭하고 다 스스로 괜찮은 존재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은 자가 등장하게 되면 자기의 본색이 감출 수가 없습니다. 분노하게 되어있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그들은 뭘 하느냐 하면 요걸 끊겠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기름 부은 요 쪽을 끊겠다는 겁니다. 요 끊는 게 뭐냐, 십자가 사건입니다. 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그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성도의 성도다움은 남들이 확인해 줘요. 남들이.
서로 서로 좋게 지내고, 김장하셨어요. 뭐 화날 일이 어디 있어요. 김장 언제 합니까? 전혀 화 날 이유가 없지요. 그런데 “어제는 나는 참 주님한테 화를 냈어.” 이리 나오면 누가 화를 내느냐 하면 이쪽에서 화를 내는 거예요. “주님을 사랑해야지. 주님한테 화를 내다니! 그렇게 예수 믿는 게 몇 수십 년째인데 아직도 주님 사랑을 모르고 감사해야지.” 이리 나오면 많이 수상해요. 이쪽에서 많이 수상한 거예요.
내가 주님을 화냈다는 말은 지금 성도가 이게 아우른 거예요. 여기까지. 내가 어디 있다가 어디로 왔다는 것을 아울러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렇게 나는 화냈다, 라는 말을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성령으로 기름 부은 자에요. 왜냐, 내하는 행동이 주님한테 화내는 일밖에 없음을 본인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요 맨 것을 끊어버리자. 그래서 하나님한테 맡기고 우리는 우리끼리 다정하게 살자. 이게 끊어져버리면 기름 부은 자 끊어져버리면 이건 뭐냐, 십자가 의에 대해서 전부 다 함구하기. 말 안하기. 스톱되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의 자식이 와서 “어머니, 참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시절에 엄마한테 화 많이 냈지요.” 라고 했다는 말은 지금 그걸 나무랄 일입니까? 아니면 기특한 이야기에요? “초등학교 1학년 때, 2학년 때 애 많이 먹였지요. 놀러 다니느냐고.” 이 말은 뭡니까? 그만큼 니 많이 컸네. 니가 이제야 엄마 애 먹인 거 아는구나! 이건 칭찬 문제 아닙니까. “니가 작년에 나에게 화를 냈어. 이거 무슨 내가 모르는 게 있구나! 이실직고해라.” 엄마가 목 조르고. 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내가 어머니의 화를 많이 돋구었고 나는 나밖에 몰랐고, 나는 내 잘난 것만 했습니다. 라는 말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자기 분수를 안다는 거예요. 그리고 뭐도 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도 너무나 훤하게 익히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이 말이 그리고 밥 먹어가면서 금식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일은 주께서 다 하셨잖아요.” 이 뻔뻔함. 이 뻔뻔함이 뭘 요구하는 뻔뻔함이 아니고, 그게 바로 주님 주신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겁니다.
연결되어 있잖아요. 니가 죽은 게 아니고 내가 니 대신 죽었다는 죽음의 의미를 확확 살려주니까 세상에 이런 좋은 관계가 어디 있습니까. 남편이 집에 들어와서 “여보, 당신 나 때문에 많이 늙었지요.” 노래 가사처럼. 고이 잠든 당신 모습을 보니까. <당신>이라는 노래. 처음에는 팽팽했던 피부가 당신 애 먹여가지고 다 바짝 말랐지. 꼭 자고 있을 때 이야기해요. 깼을 때 이야기하지. 여보, 미안하이. 앞으로 내가 충성을 다하리라. 노래 보면 나와요. 앞으로 당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 이 말은 벌써 사랑한다는 뜻이잖아요. 그걸 잠 잘 때 하지 말고 깼을 때 명료할 때 이야기해야지. 잠잘 때 이야기한다고요. 부끄럽다고. 말로 다하노. 경상도 말로 그래요. 말로 다하노.
그만큼 자기 자신이 어느 자리에 있다가 어느 자리로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 같으면 항상 자기의 부족함과 자기의 못돼 먹은 성깔, 그걸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부담 없이 마음 놓고 해요. 자기 의, 자기 정당성 개나 줘버려라. 사과 개나 줘버려라. 그런 것은 내가 무슨 의가 있고 내가 무슨 정당성이 있느냐 말이지요. 그것을 바로 이 세상이라는 것은 그 점에 세상들은 놓치지 않습니다. ‘아~ 저 종족이 내 종족하고 뭔가 많이 다르구나!’ 이리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상태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통치라고 해요. 주님의 통치 상태. 주님의 통치 상태에 잘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쪽도 못 났다고 이야기하고, 저쪽은 못 났음에도 발끈하고 있고. 어쨌든 간에 주님의 통치에 같이 성도가 거들 문제는 아니에요. 주님만이 통치되어야 되니까.
그래서 거기 시편2편4절부터 보게 되면,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비웃는 걸 말하는 겁니다.)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이 비웃으심을 우리도 거기에 참여되어야 돼요.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여기 왕은 두 사람입니까? 한 사람입니까? 여러 명입니까? 왕이. 딱 한 분뿐입니다. 한 분. 하여튼 일단 나는 아니에요. 일단 여러분 아닙니다. 딱 한 분. 이미 모든 결론이 하나로 확정 나버렸어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불행한 것은 확정된 게 없을 때는 굉장히 불안합니다. 제가 어제 수요일날 잘 아는 노래 가사 이야기했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 시월의 마지막 밤을.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그 가사에서는 가을이지요. 백수나 실업자에게는 가을이 자꾸 돌아와. 지긋 지긋하게. 벌써 한 해 지나갔나. 나는 뭐 별로 챙긴 것도 없고. 나는 맨 그대로인데. 가을은 계속 돌아와.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꿈 줘도 그게 환타지고 개꿈이지요.
그런데 가을은 어김없이 돌아와요. 자기는 어떤 마련한 것도 없고 안정된 것도 없고, 준비된 것도 하나도 없고, 죽을 준비되어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고. 내게 어설프기 짝이 없는데 어김없이 가을은 돌아와요. 가을은 누구의 지시를 받습니까? 가을의 계절에 갇혀있어요. 우리는. 우리는 가을의 계절에 갇혀있는 동시에 나는 헛된 내 환타지 내 꿈에 갇혀 있습니다. 얼마나 아무것도 없으면 꿈이라도 꾸겠습니까. 그 꿈 개꿈 돼라이.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마다 꿈은 역시 지난 해 꿈도 개꿈이었구나! 가 언제나 돌아오는 개꿈이에요.
이게 안정되지 못했어요. 안정되지 못하니까 그 화풀이를 누구한테 합니까? 남에게 타인에게 화풀이를 하고. 설거지할 때 우당탕탕! 휘익~~ 그 분풀이를 강아지에게 발로 차버리고. 동물 학대하고. 괜히 하고. 손님한테 됐습니다. 등짝 건드리고. 때리는 거 아닙니데이. 괜히 만나는 사람마다 화풀이 하는 거예요. 왜? 안정된 게 없어서 그래요. 왜? 내가 안정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홀로 살아요. 홀로 사니까 내가 안정되어야 안정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성도는 홀로 사는 게 아니고 주님이 안정되어버리면 거기에 완전히 파묻혀 들어가 있으니까 주님의 안정이 나의 확정이에요. 우리는 확인만 하면 되니까. 확인. 오늘 제목은 확인입니다. 그냥 확인이에요. 매일같이 내가 하지 않고 주님이 홀로 하신 것을 확인 하는 겁니다.
9절에 봅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제가 옛날 서천에서 살던 동네에서 오는데 늘 운전을 수십 번 할 때 제일 불안한 코스가 뭐냐 하면 촌길인데 아스팔트 잘 되어있는 길에 이 사람이 도기나 단지나 도자기를 파는 가게인데 가게에 도자기를 내놓은 게 아니고 이걸 길거리까지 내놓는 거예요. 길거리에 죽 보고 사라고 내놓는 거예요. 운전할 때마다 아슬아슬해요. 질그릇 깨질까 싶어서. 그 때 갑자기 속도를 줄입니다. 혹시나 돌멩이 튕겨가지고 질그릇 깨지면 물어줘야 되니까. 그러니까 이 대목을 볼 때마다 철장으로 질그릇을 부수리라. 이게 잘 깨진다는 뜻이에요. 큰소리쳐도 한 번 철장으로 깨트려보면 잘 깨지는 거예요.
12절에 봅시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객사한다. 망한다.)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주님께서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는 이유가 뭡니까? 자신감을 갖는 이유가 하나님이 본인이 직접 사람이 되어서 본 게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직접 이 땅에 오셨잖아요. 하늘에서 잘 보이지만. 이 땅에 오셔서 봤잖아요. 보니까 예수님 한 분 빼놓고 인간 같은 인간은 아무도 없었던 거예요. 사람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전부 다 인간들은 확인하는데 지 잘난 거 확인하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 저 어때요? 사울이라는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 잡아넣어놓고 하나님 앞에 잘했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 저 보세요. 저 어때요? 축구 선수 한 골 넣고 이렇게 하는 거 있지요. 기도하고 막 꽂고 하잖아요. 성부, 성자, 성령, 꽂아가지고 기도하고. 그 다음에 축구 한 골 넣었다고 축하하고. 먼저 신에게 감사하고. 이런 일들.
왜 상대방 선수 팀이 한 골 넣었을 때 이거 안합니까. 왜 안 하지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자기 나름대로 뭘 원했던 거예요? 행복과 희망이 따로 마련되어있었던 거예요. 이게 화근이에요. 이게 잘못된 거예요. 이게 사단난 거죠. 내 나름대로의 희망과 포부가 있다는 자체가 이게 주님의 확장에 대해서 확인해야 되는데 이건 내가 설친 그 열매에 대해서 그 실적에 대해서 누가 확인하고? 내가 확인하고 싶어요.
그러면 확인하게 되면 남는 게 뭡니까? 역시 나는 살만한 가치가 있어. 나는 교환가치가 있어. 사용가치 있고 나는 더 살아야 돼. 나는 죽으면 아까워 안 돼. 나 같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게 마귀의 미끼가 되고 밥이 되는 겁니다. 평생 니가 불안 불안해 봐라. 주께서 사고 일으켜 봅니다.
성도이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성도이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거예요. 끝까지 인간은 자기 의와 자기 정당성을 포기를 못 합니다. 잠깐 제가 예를 하나 들게요.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두 집안이 있는데 이쪽의 가장이 회사에 억울한 일이 있어가지고 우울증 걸렸습니다. 차를 타고 갑니다. 죽으려고 갑니다. 그런데 이쪽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인데 이쪽 집안 아는 여자의 오빠하고 처남사이에 술 한 잔 먹고 차로 이쪽에서 마주 옵니다. 마주 오는데 이 사람이 중앙선 침범해서 자기 죽으려고 이쪽을 박았어요. 죽으려고 하는 사람은 의식불명상태 됐고, 말도 못하고, 이쪽 남자는 죽었습니다. 경찰에서는 죽은 남자가 중앙선을 넘어와서 박았으니까 보험금 넣어놨는지 보험금을 타먹고 입 다무세요. 라고 술 먹은 오빠하고 합의됐어요. 여자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쪽 딸이 있다가 이 여자한테 찾아가가지고 “아줌마, 할 말이 있어요. 그 때 우리 아버지 죽으려고 했어요.” 이 한마디 하고 난 뒤에 여자가 수사 다시하고 변호사 사서 수사 다시 하라고 고발했습니다. 고발했는데 같은 동네, 같은 회사에 다녔거든요. 이 여자는 고발 들어온 것에 대해서 우리 남편이 그렇게 죽으려고 한 것은 니 네 회사에 문제가 있어서 이리 됐다고 붙은 거예요.
이 이야기가 여러분들이 방금 공부했으니까 이 이야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뭐예요? 뭐 때문에 이런 사단이 났습니까? 자기 의. 이게 가만히 있을 때는 안 나타나요. 건드리면 왈칵하고 올라옵니다. 건드리면. 니 죽자, 내 죽자 살피는 것이 뭐냐 하면 나는 의롭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예수 믿는다고 없어지느냐, 꿈 깨세요. 이게 평생 갑니다. 평생. 평생가요. 이게 우리 육이 죽지 않는 한 자기 의 사수하기는 평생 가는 거예요. 이 병은 고쳐지지 않아요. 주께서 육이 있을 때 이것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들춰내기 위해서 계속 우리를 살려주고 있습니다.
자기 의와 자기 정당성. 당신 사정도 알겠는데 당신이 먼저 쳤잖아. 왜 이제 와서. 당신 돈 받아먹었잖아. 이런 문제. 그 모든 문제는 뭐냐 하면 나는 그 누구보다도 못지않은 나름대로의 의로움과 정당함이 나한테 있다는 것. 그 정당함은 내가 안 지켜주면 누가 지켜주랴. 평생 인간 한 평생 살아온 것이 자기 의로움을 수호하는 자기 지킴이, 자기 의 지킴으로 평생 보내는 거예요. 인간은.
예수 믿고 해도 실제로 세상 현실에 나가서 어떤 사건에 휘말려버리면 예수 믿는 거 다 날아가 버리고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리 되는 거예요. 이게 부부싸움도 마찬가지고 밖에서도 마찬가지고, 애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우리 애 누가 코피 냈어? 이것부터 시작해가지고 폭행학생 나와! 해가지고 죽 나오지요. 그 애 퇴학시켜. 한바탕 학교 뒤집어버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지 애가 세 번 때리고 한 번 맞았는데 한 번 맞은 걸 가지고 닦달 내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남한테 지적할 가치가 없는 이유는 남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다 나의 정당성과 의를 더 높이기 위해서 내가 잠시 관계 맺은 사람들에 불과해요. 뭐 쵸코파이, 정, 친구, 정 없습니다. 친구 없습니다. 애정도 없고, 사랑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은 자기 지킴이에요. 자기 지킴이. 자기 잘남의 지킴뿐이에요.
자, 스가랴9장봅시다. 그러니까 스가랴9장9절의 시온의 딸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시온의 딸 없는 겁니다. 우리끼리 분명히 합시다. 성도는 없어요. 천국 백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처럼 그 잘난체하는 그것을 받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돼요. 대신. 대신 받아주는 분이 있어야 우리가 그나마도 천국 백성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모든 분통, 절통, 원통을 대신 받아주셔서 가져가시는 분이 있어줘야 돼요. 그 분이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이고, 받아줬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그냥 들러리로 그 나라에 가가지고 그 분만을 영원히 찬양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지금 지옥 불에 가있습니다. 지금. 그리 되는 겁니다.
아까 제가 갇혀있다고 이야기했지요. 갇혀있다. 이란이 있는데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란. 이란에 미국 인질이 6명이 갇혀있었어요. 1980년도. 지미카터 대통령 때. 혁명 일으켜가지고 혁명수배자가 정권 잡아가지고 6명의 미국인이 있었어요. 미국 사람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영화 촬영한다는 그 때 영화 촬영은 허용됐어요. 왜냐하면 그 때 하도 이란 전체에 성인영화가 유행해가지고 할리우드의 선진국 영화를 배워가지고 좀 뜨게 하기 위해서 영화촬영은 허용됐어요.
영화 촬영한다는 핑계를 대가지고 영화제작자 이름으로 CIA요원이 투입되었고 6명을 하나는 미술감독해가지고 즉석에서 시켜가지고 영화 촬영 팀으로 위장해가지고 들어가서 미국 영화사 직접 만들고 다해가지고 공항에 빠져나오는데 공항에 있는 사람들이 전화 걸어가지고 이쪽 영화사 맞느냐, 아르고라는 영화거든요. 아르고가 외계인이 와가지고 사람과 지구와 전쟁하는 이런 영화를 가짜로 만들어가지고 탈출할 때 그 때 비행기가 들어옵니다. 들어오면서 이란 스튜디오에서 “지금부터는 이란영공이기 때문에 모든 알콜 성분은 우리가 회수하겠습니다.” 하고 비행기가 하늘 영공 지나자마자 알콜을 전부 다 회수를 해요. 탈출할 때는 어떻게 어떻게 탈출해가지고 나중에 걸렸는데, 걸리고 막 따라오고 했는데 어쨌든 탈출했는데. 탈출할 때 그 때, 그 비행기 멘트가 스위스 항공 멘트가 참 감동 깊지요. “지금부터 이란 영공을 벗어났습니다.” 이란 영공을.
그러니까 이게 구원이라는 것은 탈출이거든요. 탈출. 갇혀있는 세상. 나의 의로움, 너의 의. 의 자랑하고 의 다투고 투쟁하는 이 지옥에서 탈출할 재주도 없고 어떤 근거도 없고요, 그냥 죽을 때까지 내 잘났다 하면서 죽을 때까지 내 자랑하다 죽어야 돼요. 어떤 누가 탈출해주지도 않고 탈출 희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와가지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게 되면 지금부터는 천국의 영공입니다. 할 때 우리는 비로소 무슨 말을 할 수 있느냐 하면 나에 대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성경 말씀에 대해서, 해석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아~~ 지옥에서 일어난 일. 그게 바로 십자가고, 그게 바로 성경이야기라는 것을.
이미 천국에 왔기 때문에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마음껏 나의 허물과 나의 한계성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더 신랄하게 더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웃으면서 감사함으로서 옛날 말 하듯이 남의 이야기하듯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것도 매일같이 반복해도 괜찮아요. 즐거워요. 그래서 성도의 재미는 내가 삭제되는 주의 십자가일로 인하여 내 일이 여지없이 삭제되는 그 기쁨. 천국의 영공을 매일같이 통과하는 그 기쁨 외에 다른 기쁨이 있을 수 없어요.
그 기쁨입니다. 스가랴9장봅시다. 11절.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그 다음에 뭡니까? 언약의 피)의 피를 인하여 내가 너의 갇힌 자(갇힌 자 누구 말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해방시켰지요.)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뭐로? 그냥 피가 아니고. 인간의 피가 아니고 오직 주님만이 효과 있는 언약의 피로서.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언약의 피의 효과만 확인하면 돼요.
그게 바로 아까 사도행전 20장28절에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 이제 그 담겨있는 그 뜻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피로 그러니까 하나님이 생각할 때 맥도날드 할아버지 같은 그런 말고, 피. 피 흘리신 인간이 되셔서 피 흘리신 그 분. 그 분만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피를 흘려서 지옥 갈 우리가 해방된 겁니다. 지옥 영공에서 벗어났어요.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괜찮아요. 무슨 행동을 해도 괜찮아요. 누가 정죄하리요. 아무도 나를 티 잡을 게 없어요. 악마가 이 지상에서 뭐라 뭐라 해도. 그래, 맞다. 니가 지적한 거 다 맞다.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그 다음에 12절에 봅시다.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너희는 보장으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날도 이르노라 내가 배나 네게 갚을 것이라 (그리고 죽 나온 이야기가 15절에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매 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 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똑같은 피인데, 하나는 뭐냐 하면 그들의 피. 또 하나는 예수님의 피)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예수님의 피 묻은 사람은 용서가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들이 이제 피 흘릴 차례입니다.
너희들이 나에게 피를 흘렸잖아. 이제는 니 차례인 줄 알지. 니 내가 당했던 한 번 당해봐라. 살면서 지옥에서 못 빠져나와서 고생. 돈 번다고 고생, 고생. 허세와 허풍 때문에 남한테 눈치 본다고 마음고생. 그나마도 희망도 없어서 고생. 언제나 다시 돌아오는 그 가을, 늘 똑같이 돌아오는 그 가을에 해놓은 실적도 없고 몸은 아파가고 점점 늙어가고 아무 대책도 없고 내 자랑해도 전에는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알아주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늙어 죽어버리고. 이제는 내 친구들도 떠나가 버리고. 꿈은 있지만, 꿈이 실현된 건 아무것도 없고.
교회 가서 빌기라도 오죽 열심히 빕니까. 작년에 했던 거 곱빼기로 기도하고, 자기도 알아요. 소용없다는 거. 그래서 저는 그런 불신자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그만하자. 아무 소용없는 거 그만 하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 소용없는 짓을 어지간히도 참 그것뿐인 줄 알고 어지간히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희망 없는 저희들에게 주의 십자가의 피로 다가오셔서 다 끝냈다는 다 이루었다는 다 완성했다는 그거 하나로 더 이상 사단에게 농락당하지 않는 남은여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