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강의

덮는 사랑

아빠와 함께 2021. 9. 28. 10:08

안양20210916A슥8장2절(덮는 사랑)-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8장하겠습니다. 스가랴8장 전체 다를 할 예정입니다. 스가랴8장1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되, 해놓고 2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여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2절.

여러분이 보시기에 상당히 어렵지요. 시온을 위하여 질투한다는 이 말 자체가 일반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이게 매치가 안 되는 말이잖아요. 시온을 위하여, 시온을 지킨다든지 시온을 보호한다든지 이건 이해가 되는데, 여기 시온 있는데 시온과 무슨 단어가 여기에 연결이 됩니까. 매치가 되고 있어요? 여기는. 질투 한다 되어있어요. 질투한다.

그러면 여기 하나님의 눈이잖아요. 시선. 눈. 시선이라면 하나님의 시선이라면 하나님께서는 뭘 지켜보느냐, 시온을 보시는 거예요. 시온을 보시고 시온을 이렇게 시온성이 이렇게 되어있다면, 요 안에 뭘로 채운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질투하심으로 채우겠다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의 시온성이 있는데 그 시온성은 뭐로 채운다? 하나님의 질투하심으로 채운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시온이라는 말, 성경에서 많이 나오는 말은 뭐냐 하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제가 예루살렘에 가봤습니다. 가봤는데 둘로 구분되어야 돼요. 맨 같은 조그만 같은 동네에요. 같은 동네지만, 둘이 해봐야 1키로 약간 더 넘는 거 같은데, 약간 북쪽에 있는 것이 성전이고요, 남쪽에 있는 것이 시온이고 그래요. 그런데 같이 붙어서 예루살렘이라고 이렇게 할 수 있습니다.

자, 예루살렘을 하나님께서 사수하신다. 예루살렘을 사수하신다.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이다. 예루살렘을 사수해야 될 이유가 뭐냐, 갈라디아서 4장 26절에 보면, 예루살렘이라고 해놓고 뒤에 보면 □다. 라고 되어있어요. 예루살렘은 무엇이다.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다.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되어있어요.

어머니의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자녀 생산입니다. 자녀 생산. 그렇다면 어머니 없이는 자식이 안 태어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어머니답게 되려면 어머니가 자식 낳는 기능을 한다, 안한다? 자식을 낳지 않는 어머니는 없잖아요.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인정하는 하나님의 참 백성은 이 예루살렘이라는 어머니를 경과해서 출생된 자에게만 해당된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제 천국가시면 어머니가 누구냐? 라고 이야기하면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예루살렘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돼요. 예루살렘이 낳은 자식이 누구다? 접니다. 라고 되어있는 거예요. 갈라디아서4장에서 여기서 어머니를 둘로 봅니다. 첫 번째는 어머니1로 할게요. 두 번째는 어머니2로 할게요. 어머니1, 어머니2로 할게요. 갈라디아서4장26절은 어머니2로 봅시다.

제가 묻는 것은 이거에요. 예루살렘이 어머니라면 그러면 어머니1은 뭐냐 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4장에 보면 나와 있어요. 어머니1과 어머니2로 나누어지는데 어머니1과 어머니2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인간은 어머니1에서 나온 사람은 안 받는다는 겁니다. 자식을 낳기는 낳았는데 이 어머니1에서 낳은 자식은 일체 나는 천국에서는 받아주지 않겠다, 라는 것이 어머니1이 있는 취지입니다.

어머니1은 아니고 어머니2라는 거예요. 그럼 어머니1은 뭐냐, 이게 바로 육신의 어머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갈라디아서4장이야기이니까요. 이건 생소한 거 아닌데. 아브라함에게 제가 갈라디아서4장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아내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고 둘이 있었어요. 아내1, 아내2. 아내1이 하갈이고 아내2가 사라에요. 요 식대로 한다면.

하갈이 한 일은 뭐냐 하면 바로 자식을 낳았어요. 자식을 낳았다. 그런데 사라가 하는 일은 뭐냐 하면 자식을 낳았다? 못 낳았다? 자식을 못 낳았어요. 잉태치 못한 자라 되어있어요. 성경에서. 잉태치 못한 자만이 어디 간다? 천국 간다. 같은 말로 이 세상에서 잉태된 자는 단 하 사람도 천국에 넣어주지 않겠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태어나서 교회 다녀서 예수 믿는 사람은 천국 못 가지요. 왜? 육에서 나서 육으로 가면서 교회 다녔으니까. 아무 소용없지요.

뭐 교회를 다니든 무슨 말씀을 듣던 변화가 일어나야 돼요. 어떤 변화? 내가 우리 어머니로부터 자식이 되었지만 이 육의 자식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준다는 것을 아는 변화. 이걸 알게 된 변화. 아! 내가 평생을 교회 다녀도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는 받아주는데, 하나님께서는 안 받아주는구나! 를 이게 하나님의 원칙이구나! 라는 것을 알게 된 변화.

그 안 받아준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사람이 죽게 되면 평생 살아온 것이 죽는 순간 다 날아가 버려요. 뭐했니? 아무것도 안했어요. 그저 죽는 일만 했어요. 죽는 순간에 죽는 그것을 골인, 골인지점으로 해서 달려왔을 뿐이에요. 내가 평생 한 그 모든 것이 나의 죽음을 멈출 수 있는 능력은 어떤 것도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부 잘해서 서울 법대 가서 사법 검사해서 변호사해서 국회의원 되었다. 그 중에서 자기의 죽음을 돌이킬 수 있는 그런 기능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서울법대, 국회의원, 변호사, 어떤 것도 자기 인생을 헛된 인생이 아니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자랑하는 것은 어떤 걸 자랑하게 되는가 하면 자기가 이 땅에서 뭘 해도 내가 죽게 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이에요. 이건 놀라운 변화입니다. 내가 살아서 이 정도 했다. 라는 것은 이건 육에 해당되는 사람이에요. 살아오면서 신학교 가서 목사해서 개척교회10군데하고 세계 선교하라고 내가 선교헌금도 많이 모아가지고 25개국에 선교헌금 보내고. 이런 것은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에요.

변화된 사람은 ‘내가 죽어 마땅함을 이제 알았네.’이게 변화된 사람이에요. 이게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안 사람입니다. 인생에 어떤 획기적인 업적도 수많은 사람에게 봉사하고 나로 인하여 많은 유익을 끼친다 할지라도 그것이 나의 죽음을 취소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오히려 나의 죽음을, 그 다음에 용어 하나를 쓰겠습니다. 이 용어 여러분들이 다 아실 거예요. 부스터.

부스터 알지요. 백신 3번 맞는 것. 부스터 무슨 뜻이에요? 가속하는 거죠. 가속하는 거예요. 이 세상에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나의 죽음을 가속하는 힘을 더 보태는 그런 일들뿐이었다는 것을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서 그걸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건 뭐 성경에 전도서에 나오는 이야기니까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런 류의 이야기잖아요. 그런 변화에요.

육에서 태어났지만 육에서 태어난 자기 나라는 인간, 엄마 없이 태어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어머니1에서 태어난 나는 하나님께서 이걸 폐기처분하라고 어머니에게 태어났다는 것을 이게 하나님의 뜻인 것을 왜 이제야 알았느냐고 아주 기뻐하는 사람.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지요.

“니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구나!” “니가 어머니2를 아는구나!” 아브라함의 아내2를 아는 사람이에요. 그게. 아브라함의 아내2를. 그래서 갈라디아서4장에서는 아내1, 2를 하지 않고 아내1을 가지고 하갈을 가지고 언약1이라고 합니다. 언약1, 2를 합해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은 곧 두 언약이니 언약이 2개다 말이지요. 이게 두 언약인 거예요. 여러분들은 왜 언약이 두 개인지를 아시겠지요. 왜 그걸 구약 때 이야기하지를 않고 신약 때 이야기하시는지를 아시겠습니까? 구약 이스라엘은 멸망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니느웨만 멸망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도 멸망해야 돼요. 육에서 난 것은 다 멸망하는 거예요. 심지어 하나님마저 이 땅에 왔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마저 망합니다. 저주받습니다. 멸망합니다. 하나님이 멸망한다는 조건을 세워놓고 하나님이 세운 조건하에 자기도 거기다가 들어가 버려요. 주님도 멸망해요. 주님도 죽어요. 죽고 난 뒤에 틈이 세 시간이었습니까? 3분이었습니까? 몇일이었어요? 틈이. 죽고 난 뒤에. 3일 만에 살아나셨지요. 3일 틈이지요.

생각해보세요. 3초도 아니에요. 3분도 아니에요. 3일동안 죽었어요. 인간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제자들 어떻겠습니까. 모든 것은 게임오버, 끝났어요. 어떤 인간도 죽은지 3분되어서 부실거리는 사람도 있지만, 완전한 단절입니다. 완전한 단절이에요. 손 쓸 수가 없어요. 주님께서 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를 완전 단절을 줬습니까? 인간의 모든 종교가 아무짝도 소용없는 거예요. 내가 교회 와서 한 것도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성경공부, 기도, 찬송 뭐 어떤 것도 죽은 나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은 안 됩니다.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하는 것은 전부 다 목사가 구라치는 겁니다. 목사가 거짓말하는 거예요. 없어요. 오는 사람들 위로한답시고, 아까 누가 이야기했는데 삥땅 뜯는 거예요. 삥땅 뜯는 거예요. 위로해주고 돈 받아 챙기는 겁니다. 아주 노골적인 보이스 피싱도 그런 보이스피싱도 없어요. 사기꾼이지요.

여러분, 예수님을 요한복음10장에서 예수님을 뭐라고 합니까? 목자라고 하지요. 요한복음10장에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기존 목자를 목자로 인정하지 않는 목자에요. 인간이 세운 모든 목자를 목자로 간주하지 않는 목자입니다. 인간에 있어서는 목자 더하기 하나, 목자 하나 더 숟가락 하나 얹는 그런 목자가 아니고 기존에 모든 목자는 목자가 아니다. 왜? 능력이 없으니까. 무슨 능력? 3일의 틈을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니까.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종교적으로 발달했습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거예요. 기도도 해봤다가 금식도 해봤다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6장에서 그 예수님께서 기도와 금식과 할 때 무슨 지적을 해요? 바리새인의 기도와 금식과 또 한 가지 더 있지요. 자선행위, 구제. 구제하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아, 세상에 여러분 교회 가서 목사가 기도를 공격하는 목사 봤습니까? 여러분, 못 봤지요. 교인들이 “아이고, 우리들은 목사님처럼 성경 몰라요. 저는 신학대학도 안 나오고 우리는 그런 말씀 잘 몰라요.” 그렇게 하면 목사가 뭐라고 합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기도나 하세요. 기도는 못 배워도 할 수 있잖아요. 간절한 마음으로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하시면 응답하십니다.”그리 이야기하잖아요. 그게 바리새인들이 했던 그게 삥땅 뜯는 방법이에요. 그게. 그게 사기라니까요. 그게.

그저 인간에게 자기에게 어떤 긍정성을 주려고 지 하는 행동에 보람을 주려고 그 짓을 해 온 거예요. 그 짓을. 아무것도 몰라도 내가 간절히 기도해서 내 아 새벽기도 해서 내 아 대학 둘 다 보냈다고. 보내면 뭐합니까? 죽는데. 보내면 뭐해요? 죽잖아요. 목적이 뭡니까? 대학가는 게 목적이 아니잖아요. 인생은. 인간에게는 목적이 없어요. 목적 뒤에 목적 있고, 목적 뒤에 목적 있어요. 산 넘고 산이에요. 그저 장가만 가면. 장가가면? 아파트만 있으면. 아파트 있으면? 딱 아들만 낳으면. 아들 낳았으면? 뭐 어쩌라고? 그래 결국 죽잖아요. 죽는 게 목적이네. 그럼 잘 죽으라고 기도했어요. 왜 목적을 중간에 끊습니까? 갈 때는 끝까지 가야지. 목적을. 왜 비겁하게. 왜 비겁하게 중간에 목적을 왜 끊어요. 도중에 삥땅하는 인간이 그렇게 많은 거예요. 빵땅 하는 인간이. 돈 좀 내면 복 받을 줄 알고. 아이구야~ 참.

제가 이런 이야기를 기존 목사한테 하면 목사가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그래도 계속 속아 넘어가는 사람 있다. 이렇게 하거든요. 속는 사람 계속 나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장사가 되는 거예요. 교회 업소가 되는 거예요.

지금 무슨 이야기했느냐 하면 갈라디아서4장 26절 이야기를 설명해 드린 겁니다. 예루살렘이 어머니에요.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 갈라디아서4장26절에 보면 위치가 어디입니까? 땅에 있습니까? 하늘에 있습니까?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지요. 위에 있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그 다음에 뭡니까? 어머니라. 어머니가 하는 기능이 뭐라고 했습니까? 자식을 생산하는 것. 그러면 아브라함에 있어서의 사라의 기능과 신약에 오면 예루살렘의 기능과 시간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보면 되겠지요.

아브라함 이야기는 구약이야기고 하늘의 예루살렘은 신약의 이야기니까 이것이 결국은 시간이라는 것은 사다리 역할하고 있는 겁니다. 이어져가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에 있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이런 겁니다. 니가 땅에 있는 어머니한테 니가 육신으로 생일축하합니다~ 하고 태어났냐? 네,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그 육을 죽어야 될 분에게 맡기면 죽어야 될 분이 그걸 내 죽을 육을 가져가게 되면 그것이 예루살렘을 통해서 이게 뭐로 전환되느냐 하면 예루살렘에서 그 육을 죽여 놓고 육에서 영으로 다시 살리는 기능이 어디서 일어난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제가 로마서5장 이야기했잖아요. 아담의 계통에서 뭐가 왕 노릇한다고 했습니까? 죄가 왕 노릇하지요. 왕이라는 것은 권세가 너무 세 가지고 어떤 인간도 그 권세에서 못 빠져나온다는 의미에서 왕이에요. 왕이라 하는 것은 왕의 손아귀에서 못 빠져나가는 거예요. 죄 안 짓고 싶어도 죄짓게 되어있는 게 죄가 왕이기 때문에 그래요. 문재인이 왕이 아니고. 북한의 김정은이가 왕이 아니라 죄가 왕이에요.

캐나다에 이민가도 죄가 왕이에요. 아프가니스탄 가도 죄가 왕이에요. 괜히 세상 정치 핑계대지 마세요. 죄가 왕입니다. 이미 우리한테 왕이 있어요. 왕이 있으니까 주님께서 그 자기 백성 만드는데 있어서는 그 육을 육으로 그냥 쓰레기를 그냥 받아줍니다. 그냥 이 땅에 받아줘요. 받아주려면 아브라함에게 아내가 누가 있느냐 하면 하갈이 있었지요. 그 다음에 사라가 있었지요.

자, 하갈은 자식을 놓을 수 있습니다. 하갈은 잉태합니다. 그러면 사라는 잉태됩니까? 잉태되지 않습니까? 자식이 없지요. 그러면 자식이 있는데서 하나님께서는 자식이 없는 데로 요걸 바꿉니다. 이게 하갈은 갈라디아서4장23절에 보면 육이라 되어있거든요. 육. 사라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사라계통을 가지고 성령이라 해요. 성령. 육체로 난 자식과 성령으로 난 자식과 그 때에 육체로 난 자식이 성령을 따라 난 자식을 4장 29절에 나와요. 한 번 읽어볼까요.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인간이 두 종류가 있지요. 하나는 육체를 따라 난 자식과 그 다음에 성령으로 따라 난 자식. 30절,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사도바울의 편지가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함축되어있어요. 내용이. 요걸 쉽게 말씀드리면 하갈이 있음에서 아브라함의 아내가 하갈 있음을 있음 자체를 육을 자체를 쫓아내버려요. 그 다음에 뭘 붙드느냐 없는 쪽을 아브라함이 아내로 잡아야 돼요. 자식이 없다가 자식이 있다, 로 되려면 어디서 개입하느냐 하면 하늘에서 개입해야 돼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게 뭐냐 하면 약속이라는 게 옵니다. 약속이 있음을 채우게 되면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여기 자식이 생겨요. 희한하지요. 자식이 생긴다고요.

이삭이라는 자식은 죽은 아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삭을 부활로 이야기하고 이삭은 자식이 없는 엄마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삭은 없음에서 있음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반드시 어디를 가야 된다? 없음에서 다른 말로 합시다. 없음은 다른 말로 하면 죽음. 죽음에서 뭐로 있다? 없음에서 있음. 죽음에서 부활되게 하는 거예요.

따라서 이 없음과 죽음을 요런 장치, 설비, 설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요 기능을 하기 위해서 없음과 죽음 이 기능을 하기 위해서 요걸 이 땅에서 만들어버린 거예요. 요게 십자가입니다. 만들어버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없음은 뭐가 반대되고 있음이 되고, 죽음은 뭐가 되고, 부활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요렇게 만들 때 주님 안에서 요렇게 만들 때 주변의 환경은 뭐냐 하면 뭐가 왕 노릇한다 합니까? 죄가 왕 노릇하는 거예요. 죄가 지배하는 곳에 하나님께서 일부러 자기 아들을 떨어뜨려요. 떨어뜨린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추락. 다른 말로 하면 몰락. 또 성경에서는 빌립보서2장에서는 이걸 가지고 하강. 더 쉽게 풀이하면 낮아지심에. 또는 자기를 비우사. 이런 용어를 쓰는 거예요.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떨어뜨린 거예요. 인간은 올라간다고 환장하는데 주님은 떨어지려고 애쓰고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어느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어느 하나님을. 너희는 예수의 마음을 보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너는 이 마음을 품으라.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우사 죄의 종이 되셔서 어디까지 복종했다? 십자가의 죽기 까지 복종하셨으니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주가 되게 하사 모든 이름으로 그 무릎을 꿇고 그 분을 찬양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빌립보서2장5절에서11절까지 내용입니다.

이건 인간의 육이 할 수 있는 이야기 아니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공부, 헌금, 전도, 이걸로 대체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주께서 홀로 다 하셨어요. 주께서 홀로. 홀로 다하셨습니다. 주께서 홀로 다하셔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약속의 자녀가 되게 되면 성령 안에서 약속의 자녀가 되게 되면 우리가 먹고 마시고 아침에 운동하고 이 모든 것이 나를 위함이 아니고 누구를 위함이다? 주님을 위한 일이 자동으로 그렇게 되게 되어있고 그게 하나님의 의가 되게 되도록 그렇게 자동이체가 되게 되어있어요.

나한테 일을 시킨 것이 이체가 되면 내 통장에다가 이체가 되면 저쪽 주님 통장에 주님의 일이 되어버려요. 애초부터 주님의 통장에서 돈이 나한테 와서 나에게 빠져나가 주님의 통장으로 환원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로마서11장33절에 보면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그 다음에 주로 말미암아 어디로 돌아갑니까? 주께로 돌아간다.

지금 성경공부하고 있는데 밖에서 딩동~ 택배 왔습니다. 집사님이 택배를 받았어요. 택배를 받고 난 뒤에 딩동~ 이집 것은 아니네요. 줘놓고 도로 가져가 버리지요. 줘놓고 도로 가져가버리는 거예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주님께서 회수해 나가는 방식으로 우리가 구원되는 겁니다. 택배 받은 걸로 구원해 주세요. 이건 말이 안돼요. 내 것이라는 것이 구원 받는 가운데서 내 것은 다 떨어져 나가야 돼요. 다 떨어져나가야 돼요. 로켓이 올라갈 때 옆에 걸치는 것은 마지막 궤도에 올라갈 때는 캡슐로 올라가고 나머지는 다 떨어지잖아요. 오직 그리스도 주신 것만 생생히 살아서 끝까지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고 볼펜 제일 끝 지점 끝처럼 올라가고 나머지는 다 떨어져나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뭐냐 하면 주께서 오시면서 만든 게 뭐냐 하면 이게 하나님께 유일하게 기도가 응답되는 장소를 만들었어요. 그걸 가지고 뭐냐, 기도하는 집. 기도하는 집을 두 자로 줄이면 이게 바로 성전입니다. 지상에 응답이 가능한 곳을 만들어놓아요. 기도하는 집. 성전이거든요. 성전 만들고 이 성전이 예수님이 승천하면서 이 성전에 이곳에 있지 않고 떠나야 그래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 되는 겁니다. 예루살렘은 무엇이 있는 곳입니까? 성전이 있는 곳이에요.

따라서 스가랴 전체내용은 뭐를 지어라? 성전을 지어라가 주제가 됩니다. 성전을 지어라. 어느 곳에?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라. 성전이 없는 예루살렘은 니가 많이 힘들어했잖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이 다윗 때 예루살렘을 정복했잖아요. 그런데 예루살렘이 멸망하면서 무엇이 날아가서 멸망하느냐 하면 나라가 없다고 멸망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연결 접촉지점 예루살렘 성전이 떠나버리면 그 예루살렘은 게임 끝나요. 그건 이방나라입니다. 없어요. 왜? 접촉점이 없어요.

접촉점이 없으면 이건 예루살렘 아닙니다. 성전 아닙니다. 성전 없으면 예루살렘 아니에요. 그냥 황무지에요. 그래서 스가랴 지금 하고 있잖아요. 스가랴 할 때 지금 제가 계속해서 처음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예루살렘이 뭐냐 이야기했어요. 예루살렘이 뭐냐 할 때 갈라디아서4장 이야기했지요.

자, 복습합시다. 예루살렘은 뭐라고요? 어머니. 옛날에 우정의무대라는 게 MBC에서 했거든요. 우정의 무대 군인들 끝에 나와 가지고 무슨 이야기했습니까? 어머니! 하잖아요. 우정의 무대. 뽀빠이 이상용 사회 보는 거 있잖아요. 어머니! 부르지요. 여러분도 한 번 불러보지요. 어머니! 어머니! 라고. 우리의 어머니라고. 우리의 어머니가 하늘에 있는 거예요.

두레박처럼, 엘리베이터처럼 내려갔다가 올라가신 겁니다. 자기 백성 회수해 가는 거예요. 다윗 때 만든 예루살렘에 다윗이 예루살렘 만들면서 하나님께 성전 지어드리겠다고 약속할 때에 하나님께서 지금 짓지 말라. 아직 전쟁 안 끝났다. 전쟁 다 끝난 뒤에 해라. 해서 전쟁 끝날 때 왕이 누구냐 하면 솔로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역대상에 보면 성전을 솔로몬이 지은 걸로 안하고 솔로몬 본인이 누가 지은 걸로 하느냐 하면 죽은 아버지 다윗이 지은 걸로 봐요. 성전을.

우리는 누구나 솔로몬이 성전 지었다고 보잖아요. 그러나 실제로 성경에 보면 설계도부터 재료까지 누가 만든 거예요? 다윗이 한 거예요. 다윗이 레시피를 준 거예요. 성전의 레시피. 성전 요리할 때 요렇게 요리하면 된다고 레시피인데. 레시피 내용이 뭐냐, 레시피 내용이 바로 시편51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와 번제를 원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이라. 상한 심령. 성전이 성전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효과로 그들로 하여금 상한 심령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요나2장에 보면 요나가 물에 빠져 죽을 때 하나님께서 고래 보내가지고 큰 고기 보내가지고 요나를 삼켰잖아요. 그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했던 기도의 내용이 뭡니까? 어느 쪽을 향하여 기도했습니까? 성전을 향하여. 저는 아직도 신기한 게 그 컴컴한 물고기 뱃속에서 동서남북을 어떻게 구별했는가. 나침판 발명한 것도 아니고. 아주 신기해요. 그러니까 말로는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오니, 방향이 안정해도 괜찮아요. 거꾸로 해도 괜찮아요. 말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오니.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한 것이 성전을 살리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부수적으로 보조역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자, 이 정도로 하나님께서 집착하고 성전에서 강조한다면 오늘 본문처럼 8장2절처럼 질투 할 만하지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그 다음에 뭡니까? 크게 뭐한다 했습니까?) 크게 질투한다. 크게 질투하지요. 지킬 것은 오직 성전뿐이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성전 위주로 예루살렘 위주로 시온 위주로 이렇게 나가는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는 관심이 없어요. 성전 짓는 걸 태만히 하고. 그래서 뭐하느냐 하면 질투하는 자가 질투에다가 뭘 더 보태느냐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한다. 크게 화를 내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화를 낼 때, 그 사랑하는 사람이 화를 낸다는 것은 그 사랑하는 사람의 주된 관심사가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예를 들어서 아들집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랜만에 놀러왔다 칩시다. 손자가 있는 거예요. 손자 보고 “아이고, 우리 손자 공부도 잘하고 선행상도 받고 그렇게 착하다면서.” 그러면 딸이 있다가 “할아버지한테 고맙다 해야지.” “할아버지 고마워요.” “니가 그렇게 공부 잘하니까 할머니가 용돈 줄게.” 할머니가 용돈 주면 딸이 있다가 “빨리 할머니한테 고맙다 해야지.” “고마워요.”

“니가 그렇게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착하다면서 엄마 말도 잘 듣고.” 그 소리 듣고도 손자가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없어요. 왜냐, 워낙 많이 들으니까 식상해서. 그런데 할아버지가 선천적으로 개를 싫어해요. 그런데 개가 오니까 “개를 왜 여기서 키우노. 저리 가!” 하고 개를 잡아가지고 툭 던지니까, 손자가 와~ 하고 질투하면서 분노하는 거예요.

자, 질투하고 분노한다는 말은 정작 본인이 관심 있고 중요시 여기는 것은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질투와 분노가 없으면 분노하는 질투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사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요? 몰라요? 우리가 알지를 못하지요. 하나님의 관심사는요,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의 관심사는 뭐냐, 성의를 다 표하는데 관심을 둬요. 하나님이시여, 신이시여, 제가 이렇게 교회를 다니면서 성의를 표했습니다. 여기에 관심을 두고 있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잉태할 수 있는 것을 자꾸 자랑질하려고 해요. 내가 이 정도할 수 있는데. 기도할 수 있는데. 헌금할 수 있는데. 선교할 수 있는데. 예배참석 할 수 있는데. 자꾸 할 수 있는 걸 강조해요. 내가 잉태할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래서 남한테 칭찬받으려고 애를 쓰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정작 그런 거 가지고 하나님은 좋아하시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건드리지 말아야 될 것을 건드린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나도 할 수 있습니다, 가 이게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는 거예요. 왜냐하면 누가 다 했기 때문에? 예수님 홀로 다 했어요. 구원에 관한 것은 예수님 홀로 다했지 우리가 한 게 없어요. 우리가 한 게 없는데 우리는 우리의 한 것 가지고 복 내놓으라는 거예요. 완전히. 이건 조폭처럼.

새벽기도 40일 연속했으니까 응답해 달라는 거예요. 계속해서. 우리의 관심사는요, 내가 고생해서, 수고해서, 희생해서, 내가 평생을 욕보면서 얻어낸 업적과 결과물이에요. ‘하나님 내 딸 건드리기만 해봐라.’ 이리 나온다고요. 그 딸이 뭔데? 내 딸 얼마나 애지중지하고 귀하게 보고 차라리 내 목숨을 바치지 딸의 목숨 건드리지 말라 하는 정도로 그 정도로 내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게 딸이고 자식이고 아들 아닙니까. 딸이고 아들이다 말이죠.

교회 가서 기도해도 딸, 아들을 위해서. 뭘 해도 이것 잘하면 딸, 아들 복 받겠지. 으이구~ 우리 딸, 아들은 게을러서 기도 안하는데 내라도 엄마가 자식 대신 기도해가지고 주님이 내 자식한테는 화가 안 미치도록 내가 나서서 희생해야지. 이게 부모 된 도리지 뭐. 이게 부모 된 도리야. 이런 마음으로 효심이 가득해야 됩니까. 자식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거예요? 이런 마음으로 교회 다니고 충성 다하는 거예요. 부모가 행동 잘못해가지고 그 화가 자식에게 저주로 임할까 싶어서. 참 그걸 보니 완전히 무당인지 교회인지 분간이 안 돼요.

하여튼 교회 행동 하나, 하나가 미신에서 안 벗어나요. 미신에서. 교회에 꽃꽂이를 해놓으면 남들이 꽃꽂이 할 때는 말썽꾸러기 꼬맹이가 꽃 하나 빼가도 내가 한 것도 아닌데 하다가 꽃꽂이 봉사하는 순서가 내가 되어서 해 놓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예배시간에 눈 벌겋게 해가지고 꽃꽂이 구도가 잘되었는지 못되었는지 개구쟁이가 와가지고 꽃을 뽑는지 그것만 신경 쓰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피아노 하나 기증해 보세요. 저기 저 음이 이탈했는데 저거 나중에 한 번 조율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목사 설교도 안 들어요. 그것만 생각해요. 인간은 자기 한 것을 습관적으로 한 것을 기억하는 거예요. 기억하고 그 기억한 것이 자기 영광이에요. 이게 육이에요. 주님 기도는 생각 안하고 지 기도 열심히 한 것만 생각해요.

그래서 이스라엘을 분노함으로 이스라엘을 어떻게 했다? 이스라엘을 달랑해서 이스라엘을 나가! 그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에서 추방시켜 버렸어요. 내 성전을 이렇게 더럽게 꾸미다니. 성전도 주께서 화가 나가지고 하나님이 자기 성전을 불태워버렸어요. 바벨론을 통해서 불태워버렸어요. 심판의 불길이 화염이 하나님의 성전을 불태워버렸습니다.

그걸 보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이구! 저 성전. 하나님의 성전. 저걸 지켜야 되는데.” 그것 때문에 걱정이 되었어요.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놔두세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그만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은 만큼 성전을 생각하지 않은 증거로 불태웠으니까 마땅하고 성전 없으니까 이제는 이스라엘은 삑! 끝났습니다.

다시 이스라엘을 할 때 이스라엘이 나올 때는 애굽에서 출애굽했잖아요. 다시 이방나라로 다시 노예로 만들어버려요. 노예로 만듭니다. 그럼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3절에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두 번째 출애굽이에요. 두 번째 출애굽. 첫 번째 출애굽에서 왔던 것은 다 추방되고 육이니까 다 추방돼버리고 다시 애굽으로 해서 하나님의 성산에 내 백성이 그득하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성산에는 4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예루살렘 길거리에 늙은 남자들과 늙은 여자들이 다시 앉을 것이라 다 나이가 많으므로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잡을 것이요 그 성읍 거리에 소년과 소녀들이 가득하여 거기에서 뛰놀리라”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세대별로 둘을 떼어놓는 거예요. 소년. 소녀, 이게 유년기죠. 유년기.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사람. 10년에서 20년 된 사람. 그러면 노인네는 60년이상 70, 80, 90까지지요. 처음과 끝을 생동감 있게 있다는 말은 가운데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말입니다.

사무엘하 마지막 대목에서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3가지 징벌을 줬지요. 사무엘하24장 13절, 하나는 뭐냐 하면 7년 동안 기근, 그 다음에 석달동안 전쟁 상태에 있고, 3일 동안 전염병 퍼지지요. 자, 전염이 퍼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여기에 유년기와 노년기가 완전히 작살납니다. 그럴 때 다윗은 인구조사를 했던 그 다윗 본인이 제사장이 돼요. 이 말은 죄인이 뭐된다? 죄를 알고 제사장으로 투입되는 겁니다.

그동안 인간은 죄도 모르면서 제사장에 형식적인 습관처럼 제사를 드리는 거예요. 제대로 죄를 알고 제대로 하나님의 관심사를 알고 그 관심사와 결여가 있는 이 세상의 죄. 성전의 가치를 모르는 인간들의 죄. 그걸 충분히 아는 자만이 영원한 제사장이 되어야 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다윗은 그것을 미리 하나의 기호로서 보여준 거예요. 다윗은. 다윗은 기호로서 그냥 보여준 거예요. 장차 오실 메시아는 이렇다고.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예루살렘의 거리의 풍경도 진짜 하늘나라에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역사상에 역사적으로 하나의 기호처럼 영화를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의 사례를 보여준 거예요. 어디에 비유해서? 옛날에 땅의 풍경. 땅에 인간들이 사는 마을 풍경을 그걸 모티브로 해가지고 그걸 하나의 인형극으로 생각해서 고 인형에 맞춤으로서 마지막 때 인형은 옛날처럼 그렇게 허전하지 않고 활기찬 거리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구약 자체는 모형이니까. 설계사무소 모형 있지요. 설계사가 모형보고 들어가 살라고 그렇게 하지는 않겠지요. 설계사무소에 아파트 있다고 나 오늘부터 여기서 나 살림 살래. 이런 사람 없잖아요. 어디까지나 모형하고 실제하고 구분되잖아요. 구약은 전부 다 히브리서에 보면 모형이에요. 장차 천국의 내용물은 이렇게 활기차다고 보여주는 겁니다.

자, 이들이 이렇게 활기찬 바탕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성전을 향하는 그 질투심으로 분노했다는 그 작업을 밑에 깔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활기찬 예루살렘을 회복시키는 거예요. 잘되게 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요 이야기하고 첫 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그렇다면 질투를 분해해 봅시다. 질투를 분해해보게 되면 질투 안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사랑이 들어있고, 하나는 저주가 들어있습니다. 요 질투 안에는. 질투라는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사, 궁극적인 관심사 안에는 사랑으로도 표현되고, 반대로 저주도 포함되지요.

질투하심으로 사랑의 나라는 무슨 나라입니까? 천국. 저주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지옥. 천국은 왜 생기고, 지옥은 왜 생깁니까? 하나님의 자기의 성전을 사랑하는 지독한 질투심에서 이렇게 천국과 지옥이 생기는 겁니다. 모든 것이 질투와 사랑이죠.

그래서 안 믿는 사람한테는 하나님의 성전을 모독했다고 질투심으로 저주해버리고 진노하고, 하나님의 천국 백성에게는 니가 내 사랑을 아는구나! 해서 그들은 천국가고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첫 째 시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뭡니까? 하나님의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최종 궁극적인 관심사는 어디일까요?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이고, 시온이고, 그것이 바로 성전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기 때문에. 요한복음2장에서. 46년간 그거 성전 아니야. 내가 성전이야.

자, 성전은 어떤 갭을 걷게 된다?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해야 돼요.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아나는 효력, 능력이 있을 그 장소만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들어온 사람은 성전 안에 들어온 사람은 주님의 사랑 안에 들어온 거예요. 그 사랑의 혜택은 바로 2절에 성산이 되고, 많은 사람들이 활기차지요. 생명으로 활기차지요.

그 다음에 8장 6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 날에 많은 백성들이 그 다음에 눈에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눈에는 뭐하려니와? 기이하다 했지요. 기이하다. 기이하다는 게 뭡니까? 인간의 머리의 예상 밖이다. 이 말이지요. 신기하다 이 말이지요. 우째 이런 일이? 깜놀. 깜짝 놀랐다. 우째 이런 일이. 인간의 머리에서 안 나오는 일을 주께서 하신 거예요.

인간이 얼추 흉내도 못 내요. 너무 귀해서. 오히려 구원 받은 우리가 놀랄 지경이에요. 어떻게 아무것도 안하고 구원 받다니?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라는 말만 하란 말이죠. 주께서 원하는 것은. 거기에 생동감 있게 천국에서 활기차게 사는 사람이여, 그것은 수시로 쉬지 않고 우째 내가 천국에 다 오다니? 요 이야기만 계속해서 하시라 그 말입니다. 하실 수 있습니까. 일단은 10분 휴식.

 

안양20210916B슥8장2절(덮는 사랑)-이 근호 목사

스가랴8장9, 10절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집 곧 성전을 건축하려고 그 지대를 쌓던 날에 있었던 선지자들의 입의 말을 이 날에 듣는 너희는 손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 날 전에는 사람도 삯을 얻지 못하였고 짐승도 삯을 받지 못하였으며 사람이 원수로 말미암아 평안히 출입하지 못하였으나 내가 모든 사람을 서로 풀어 주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뜻에 의해서 성전이 만들어 지는 것을 하나님이 개입하셔가지고 제대로 된 성전을 하지 못하게 그렇게 만들어버렸어요.

성전은 철저하게 누가 만드느냐 인간이 만들지를 못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자기 백성을 일방적으로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이게 성전입니다. 인간으로 지은 성전은 성전으로 쳐주지를 않아요. 인간의 힘으로 성전을 만들 수가 없어요. 멍석 깔았다고 주님께서 오시는 게 아니거든요. 인간이 깔아놓은 멍석에 주님은 안 오십니다.

큰 예배당에 물론 안 오지요. 그 원리가 뭐냐 하면 불기둥입니다. 불기둥.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무슨 기둥? 구름 기둥. 이 두 기둥의 특징은 뭐냐 하면 분리성, 떨어지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혜택을 입을 자와 입지 못할 자를 철저하게 격리시키는 기능을 하게 합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어디에 동원되느냐 하면 이것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상을 못했어요.

모세가 출애굽 할 때에 홍해까지 왔잖아요. 같이 따라온 히브리인들도 이게 전부 다 모세가 정치적 의도로 그렇게 우리를 영도하는 줄 알았습니다. 인간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나를 따르라! 이런 거 있잖아요. 나를 따르라! 내가 이 민족을 살리리라! 있잖아요. 김구 이런. 북한 같으면 김 일성. 나만 믿고 나만 따르면 너희들에게 행복한 장래가 보장된다. 이런 거. 모세가 나올 때 모세가 사적인 아이디어에 나온 모세의 일인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히브리인들이요, 그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었어요. 당신이 우리를 독립시켜준다는데 우리를 더욱 더 힘들게 만들었으니까 우리를 책임져라. 모세와 아론이 오기 전까지는 그래도 숨도 좀 쉬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와가지고 그 통치자 바로왕의 심기를 건드려버렸어요. 그러니까 바로 왕이 화가 나서 어떻게 했습니까. 요 히브리인들 아주 배가 불렀구나, 이래가지고 와서 구박을 심하게 했지요. 구박을 심하게 해가지고 옛날에는 짚을 주고 벽돌을 만들라고 했는데 이제는 벽돌에 필요한 짚까지 니가 동일한 노동시간 안에 다 니가 알아서 그 목표량은 니가 다 채워라, 이런 식으로 억압할 때 노동량이 배 이상 들었겠지요. 그 원망은 누구한테 쏟아졌습니까? 괜히 니가 와가지고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다고.

이걸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 오늘 주제일 수도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수모에요. 수모 당함. 서러움 당함. 성도라는 것은 불기둥과 구름기둥 안에서 무엇을 경험해야 하느냐 하면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격리되지요. 누구하고 격리됩니까. 바로 나라하고 이스라엘하고 격리되었지요. 그러면 그들이 불기둥과 구름기둥 안에서 편안합니까? 행복합니까? 아무 탈 없습니까? 살기에 충족됩니까? 아니지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격리시켜 놓고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격리시켜 놓고 그 안에서 무엇을 집어넣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들어왔던 그 수모 있잖아요. 수모. 수모 아시지요. 억울한 것. 천하 사람들이 견디기 힘든 게 뭐냐 하면 억울한 거예요. 나쁜 짓해서 벌 받는 거 억울하지 않아요. 좀 봐주면 안 됩니까. 이리 나오잖아요. 그러나 죄 지은 거 없는데 당해보세요. 어린애들도 길길이 뜁니다. 모든 건 참아도 수모 당하는 건 못 참아요. 억울한 건 못 참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잘해주는 사람에게는 잘해줄 수 있어요. 하나님 구원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 헌금 바치겠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천국 보내주셔서 감사해요. 교회에서 이렇게 훌륭한 목사님 설교 듣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되는데 목사나 장로나 중직이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니가 와서 교회 분위기 다 흐렸다. 어디 미꾸라지 들어와서 진흙탕 다 만들었다. 이렇게 할 때 나가! 이럴 때 대번 못 나가! 가 돼요. 왜냐 하면 혼자 덤벅이 쓰니까. 혼자 교회 문제에 니 때문이라고 덤벅이 쓸 때에, 1번 잠이 온다. 2번 잠이 안 온다. 어디에요?

잠이 옵니까, 안 옵니까? 그래도 잠 잘 자면 수면제 먹던지 무슨 일이 있어요. 잠이 안 오지요. 은혜 받은 거 다 날아갔지요. 벌써. 신자니 아니니 그게 없지요. 니 죽고, 내 죽자 이리 나오지요. 인간은 이 수모를 감당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불기둥, 구름기둥 격리시켜 놓고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인간이 감당 못할 수모를 감당하게 하는 겁니다.

이게 주님이 당한 수모를 공히 같이 경험케 하는 것,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갔습니다. 성전은 불타 버리고요. 다 하나님의 계획이 다 있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쫓아낼 때에 다 계획이 있었다고요.

시편137편 수모에 대해서 제가 한 번 거기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무엇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거기에 나무가 하나 나오지요.)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우리가 바벨론 강가에서 울었다. 무엇을 생각하며 울었어요? 지 형편? 아니에요. 시온을 생각해서, 성전을 생각해서 울었도다. 이제 성전이 없고 보니까 성전이 그리워지는 거예요. 그 성전에서는 다윗에 역대상에 보면 성전 지을 때 레시피 다 집어넣었지요. 성전 짓고 난 뒤에 솔로몬보고 뭐하고까지 하느냐 하면 찬양까지 하라고 찬양대까지 다 만들어놨어요. 아버지 다윗이. 솔로몬 아이디어가 아니고 다 아버지 아이디어에요.

그리고 성전하고 난 뒤에 성전만 한 게 아니에요. 돌아가면서 성가대 조직해가지고 노래까지 불렀어요. 그런데 그 노래가 노래 부를 때 수금이 필요하지요. 악기가 필요하지요. 수금을 걸어 놨다 말이죠. 3절에, 이에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야~ 이게 중요한 거예요. 여기에 사로잡은 자가 나오지요. 사로잡았다는 말은 누구에게만 경험되느냐 하면 옛날에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사람만 이 세상의 권력 자체가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유일하게 체험하는 자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이방인들은요, 인생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돼요. 세금 내라 하면 세금 내면 되고 그냥 세월 가면 세월가는 대로 살면 되고요, 나를 부르러 오거든 아직까지 갈 마음 없다고 80되도 그냥 세상 흘러가는 대로 세상 뭐 있어! 이리 살면 세상이지 뭐. 뭐 별 게 있어. 그냥 사는 게 세상이지. 남한테 그렇게 싫은 소리 안 듣고, 싫은 짓 안 하고 그냥 내 자식 잘 키우고 밥 먹고 살면 이게 세상이지. 이런 생각이 세상 사람이에요.

누구한테 사로잡혔다는 이런 생각은 없어요. 그런데 이 이스라엘은요, 옛날 하나님과 함께 살았잖아요.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 뭐라 했어요? 성전. 어떤 죄를 짓고 어떤 병이 나고 어떤 전쟁이 일어나도 어디를 기도하면 응답 받겠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응답하겠다. 열왕기상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길게 이야기했어요. 성전의 효과에 대해서.

니가 어떤 죄를 지어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내가 성전에서 용서의 능력이 나간다. 이게 성전이에요. 그 성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북쪽 이스라엘은 성전을 무시해도 남쪽 유대인은 성전이 있었기에 성전을 고수했습니다. 그래서 남쪽 유다가 북쪽 이스라엘보다 더 오래 버텼어요. 한쪽은 BC722년에 망해버리고 남쪽은 BC586년에 망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는 북쪽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니까 치워버리고 유다와 베냐민 니가 성전 지어라 해서 성전 짓는 거예요. 에스라1장에 보면 다른 지파가 지으려하니까 가만히 있어. 너는 성전 못 져. 우리 바사나라 임금님이 우리 유다지파보고 성전 지으라고 했어. 그래서 그 다음부터 이스라엘이 무슨 나라 됩니까? 이스라엘이 아니고 무슨 나라? 유다나라가 되는 거예요. 유다지파가 되는 거예요. 그게 성전 때문에 그래요. 성전 때문에. 그런데 그 성전이 있는데 사로잡힌 자가 와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는데 무슨 노래를 청하느냐, 옛날 니가 하나님 믿고 잘 나갔을 때 그 때 불렀던 찬송가 불러 봐! 라고 조롱조로 노래를 부르라고 하는 겁니다.

4절에 보세요.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아~ 어떻게 고향의 노래를 불러요. 타향에서.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이 7080노래 듣고 자주 운다는 거예요. 옛날에 20대에 젊을 때에 한국에서 잘나갔던 그 때 그 시절이 생각나가지고. 지금 미국에서 세탁소하고, 미국에서 생선가게, 채소가게 하면서 슈퍼마켓하면서 떡볶기 장사하면서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이구~ 이거 남의 땅에 와서 죽는 거 아닌가. 고향을 버리고 내가 왜 이런 팔자가 다 있냐, 라고 자기 신세 한탄하면서 서러워하면서 우는 겁니다. 그걸 두 자로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게 뭐라고요? 수모.

이게 예수님이 고향을 떠난 예수님의 수모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하늘나라 버리고 죄 많은, 죄 많은 게 아니고 죄 뿐인 이 세상에 와가지고 죄도 없으면서 온갖 수모 다 당하는 거예요. 따라서 이건 뭐냐 하면 의인이 억울하게 죄인 취급당하는 수모잖아요. 그렇지요. 그 수모를 이미 의인된 하나님의 백성이 공히 같이 경험해야 된다는 겁니다.

어디에 휩싸여서? 이방민족에 휩싸여서. 시편137편에 나온 노래를 가사로 한 팝송이 바로 <바벨론 강가에서> 하는 노래에요. 우리나라에 큰 히트 쳤어요. 1960년도에 나온 노래에요. 보니엠의 흑인밴드에요. 바벨론 강가에서 서러워 우는 거예요. 언제 고향에 돌아갈까.

자,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힘으로는 돌아갈 역량이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그러면 고향에 돌아가려면 바벨론 있잖아요. 이 바벨론 자체가 누구 손에서 움직여야 되느냐 하면 우리를 고향에서 쫓아낸, 약속의 땅에서 쫓아낸 그 하나님의 손에 이방민족의 모든 권세가 역시 같은 여호와 손에 달렸다는 것을 믿어야 돼요.

세상에 북한이 어떻고 세상에 모든 아프가니스탄 어떤 전쟁이든 주의 뜻이 아니면 일어나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어있어요. 긍정도 이런 긍정이 없지요. 우리 집에 빚 받으러 온 사람도 주께서 보낸 사람입니다. 그 수모를 내가 수모 당할 때 그럼 내가 수모 당했다. 당했다 하면 수모 당한 게 아니거든요. 수모 당한 그런 모습을 보여야 돼요.

그게 바로 스가랴8장18절, 19절에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그 다음이 뭐예요?)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이리 되어있어요. 금식 나오지요. 수모를 내면화 시킨 게 금식이에요. 수모를 내 안에 가져온 게 금식입니다. 금식이란 뭐냐 하면 ‘나 생존 안할래.’ 에요.

나 생존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곡기를 끊는다. 밥을 끊는다는 것은 나는 이런 형편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이 말이에요. 어떤 사람이 자기의 신앙을 자랑질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 하나님 없이는 못산다.” 어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자기의 신앙을 자랑질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어요. 하나님 없이는 못산다. 자, 여기에 대한 복음적인 정답은 뭐냐, 물어봐야 모르니까 일방적으로 합니다.

“그냥 죽어.” 그냥 죽어라. 하나님을 찾는 게 의도가 주님이 주시는 금식하고 금식의 취지 수모하고 달라요. 지금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요, 주님의 수모를 체험하는 게 아니고 자기 자존심 상한 것이 못 견뎌서 빨리 빨리 SOS 하나님이여, 빨리 와서 옛날 내 자존심을 유지시켜 달라는 그 뜻으로 하나님을 계속 붙잡는 거예요.

이걸 대구강의에서 자기 자존심 챙기는 걸 5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불멸의 위신. 위신. 불멸의 이순신처럼 불멸의 위신. 인간은 위신으로 살고 위신으로 죽어요. 사나 죽으나 위신뿐이에요. 먹든지 마시든지 위신뿐이에요. 자기체면과 위신과 명예와 그거 뿐이에요. 자기 이름 챙기는 거 그거뿐입니다.

인간이 육이에요. 본능이 이거뿐이에요. 그럼 여기다가 뭘 뿌리느냐, MSG를 친다. 예수, 하나님, 성령 백날 쳐봐야 밑에서는 끄떡도 안 해요. 밑에는 뭐가 있습니까? 나의 위신과 체면을 위해서 산다는 변화가 있어요? 없어요? 변화가 없지요.

아, 교회에서 믿음 좋은 사람, 말만 하면 예수 이야기, 복음 이야기, 기도할 때 얼마나 유창하게 오래 동안 한 사람들, 그 사람을 이렇게 가정 문제나 건드려보세요. 왈칵 일어납니다. “집사님 딸 요번에 참석했는데 인물이 별로대요.” 이 말 한 마디에 그 다음부터는 원수가 아니고 웬수가 되어버려요. 웬수가 되어버려요. 왜? 불멸의 위신을 건드렸어요. 안에 이게 들어있어요. 바깥에 무슨 교회 몇 년 다니고 직분 받고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아무 소용없습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거예요.

그러면 주님의 수모가 들어올 때 뭘 건드리겠습니까? 바로 천하 하나님도 건드리지 말아야 된다는 진짜 나의 자존감, 자존심 정도가 아니고 자존감, 나의 자존감, 나의 의로움, 이걸 누가 건드립니까? 성령께서 주님이 건드려요. 이게 주님의 수모입니다.

수모를 한다고 해서 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선교 그런 짓하지 마세요. 자기를 학대한다고 수모 아닙니다. 잘 먹고 잘살고 돈 많이 벌고 골프치고, 골프는 될 수 있는 대로 치지 마세요. 요트 구입하고, 그렇게 해도 그게 자체가 주님의 수모일 수가 있어요. 괜히 흉내 내지 마세요. 고난의 흉내, 십자가의 흉내 내지 마세요. 뭐 집 팔아서 누구 도와주고 그런 헛짓하지 마세요. 그 도와준 사람 돈만 사랑하게 되어있어요. 괜히 도와줘서 상대방 돈만 사랑하게 되어있습니다. 구제의 피해입니다. 처음에 한두 번 고맙다 하지요. 나중에 돈 나올 때 됐는데 돈 안 보냅니까. 사람이 거지를 다 만들어놨어요. 거지를.

얻어먹는 근성이 작동하는 이유가 인간에게는 뭐가 있습니까? 자신의 가치가 있어요. 나만의 가치. 나만의 가치가 있으니까 내가 되는 자니까 돈 줬겠지. 라는 이 자기의 가치로 인하여 살고 싶은 이 욕망, 이거 죽을 때까지 안 없어져요. 도와줘놓고 욕 얻어먹는다니까요. 도와줘놓고.

제가 강의할 때 여러 번 했거든요. 제발 남자들 특히 술 먹지 말고 담배 피우지 말라는 이유가요, 제가 짧은 인생 살면서 느낀 건데요, 남자들이 나는 여자가 아니니까 몰라요. 남자들은 술과 담배를 피우게 되면 사람이 오버해요. 허황돼요. 분수에 허황돼 가지고 친구도 그런 친구를 만나요. 니 직장에서 얼마 받는데? 남자가 고것 받아 평생 우애 살아. 사업하자. 분명히 그 소리 나오고요, 사업하면 지 돈으로 사업합니까. 아버지 어머니 돈 다 땡겨서 사업하지. 허풍이지요. 허풍. 허세.

그거 어디서 나오는 줄 알아요? 나는 돈 벌만큼 사업할 만큼 가치 있다고 자기를 부풀려요. 자기를 이렇게 환상을 줘가지고 성경에 먹는 거 입는 걸로 족한 줄 알라 했는데 잊어버리고 그저 승부욕에 환장해가지고 내가 니 보다는 안 진다는 이게 진짜 마귀심보에요. 그게 있어가지고 하는 거예요. 그게 나중에 교회 들어오면 뭔 줄 알아요? 니 어디 선교했노? 미국. 미국도 선교하나? 나같이 아프리카 가야지. 이건 선교의 고난의 강도, 고난의 더 낮아짐을 가지고 시합 배틀 한다니까요. 이게. 적어도 아마존은 가야 선교지. 어디 미국에 유학가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경쟁이고 자존심이고 어떤 한 순간도 자존심 버리고 일한 적 없어요. 어느 순간도. 기도를 하던, 헌금을 하던, 봉사를 하던, 저번 집사는 꽃꽂이 잘됐던데, 요번 집사는 도대체 누가 했노? 뭐 구도도 안 맞고, 이거 뭐 봉사 그만 하라 해라. 그 한 소리에 삐져가지고.

자, 수모라는 것은 죄 없는데 덤탱이로 모든 책임을 짐을 질 때 그게 수모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금식한 거예요. 자, 금식을 사월달 금식은 예레미야에 예루살렘이 점령되었을 때 슬프다고 한 금식이 전통이 되어서 사월달 금식이에요. 오월달 금식은 열왕기하25장8절인데요,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열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드디어 이방나라 총독이 약속의 땅에 침범해서 이스라엘이 이방나라에 접수했던 그 날이 서러워서 금식한 날이 오월달 금식. 7월달 금식은 그달랴 대학살사건을 기억해서입니다. 그달랴는 이스라엘 멸망 이후의 총독입니다. 예레미야41장 1절에서 10절까지 내용입니다. 이것도 포로하고 난 뒤에 사건이에요.

시월달 금식은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열왕기하25장1절, 예레미야52장4절, 그러니까 이건 뭐냐 빼앗겼을 때에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그 자긍심, 자존심 있잖아요. 자존심 묵사발된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서 더 이상 택한 백성이다, 아니다? 백성이 아닌 거예요.

저 개 같은 이방나라하고 똑같이 된 거예요. 자기가 갖고 있던 자기 의가 몽땅 빵구 난 겁니다. 이게 신약에서는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가지고 우리한테 수모를 집어넣어요. 십자가가지고 우리를 푹 쑤셔버려요. 니가 뭐라고? 목사라고? 니는 뱀이야. 푹 쑤셔버리는 겁니다. 이게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니가 왕이라고? 니는 왕이 아니고 간음자요, 살인자야. 하고 나단 선지자가 와서 푹 쑤셔버려요.

그 때 그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게 어디 선지자가 나한테 왕인 줄 모르고. 여봐라. 이 놈 하옥하라.” 이렇게 했습니까. 아니지요. “맞습니다. 내가 죽어 마땅합니다.” 이게 바로 상한심령. 이 상한심령이 어디에 필요하다? 예루살렘 성에 필요한 거예요. 그게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그 자격입니다.

시편51편 읽어보겠습니다. 18절에,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17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16절,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시고,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그러니까 성전에서 제사하고 그게 필요한 게 아니고 성전에 들어갈 만한 사람은 내가 눈물, 죄로 먹물되었고 나는 부모로 태어날 때부터 나는 죄인이라는 원천을 비로소 발견한 거예요.

그러면 밧세바 남편 우리아는 왜 죽었느냐, 그것은 돌멩이로 다윗의 안에 있는 그 우물 같은데다가 돌을 던진 거예요. 돌을 던지니까 그 흙탕물이 어떻게 되느냐 출렁하겠지요. 그 출렁이 뭐가 출렁이겠어요? 죄가 가득 고여 있는 거기에 외부에서 돌이 날아오니까 출렁하고 튕기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그럴 때마다 출렁, 출렁하겠지요. 풍선에 물 넣어놓은 것처럼 하겠지요. 다윗은 그걸 알은 거예요. 내 안에 뭐 있다? 내 안에 죄 있다. 이게 바로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자입니다.

내 안에 죄 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 안에 들어있는 죄를 원하신다. 다윗이 자기가 한 행동을 감추기 위해서 죄에다가 또 죄를 지었잖아요. 그게 다 내부적인 죄의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렇게 나와 버린 거예요. 본능적으로.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다윗에게 밧세바 태어난 아들이 있잖아요. 죽여 버렸어요. 죽기 직전에 다윗의 행동은 뭐였습니까? 금식이지요.

자, 금식은 언제 한다? 아들이 죽었지요. 죽은 아들의 아버지가 누굽니까? 다윗의 아들이 죽었어요. 죽은 자의 아버지가 누굽니까? 다윗이지요. 금식했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금식은 누구의 죽음이 마땅함입니까? 나의 죽음이 마땅함. 사는 것이 기이하다. 내가 왜 살지. 내가 왜 살아야 되지. 말도 안 돼.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는데 왜 살아야 되지. 내가 죽어 마땅함을 알 때 우리에게서 날아가는 게 있습니다. 우리한테 붙어 있다가 날아가는 게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악마입니다.

악마가 날아가요. 왜? 재미가 없어요. 사람이 살려고 할 때 부지런히 기도해서 살고, 요거 지켜주이소. 내 가정 지켜주시고, 내 재산 지켜 달라 할 때는 온갖 지나가는 마귀 다 달려듭니다. 기도할 때 그리 기도하지 말고 악바리로 기도해라. 지나가는 귀신이 한 마디하고 나면 그 다음 귀신은 기도할 때 성경 읽고 기도해야지. 그게 QT잖아. 그냥 하지 말고 돈 아끼지 말고 요번 교회 일하는데 헌금 듬뿍하고 기도해야지. 한 마디하고 또 지나가고. 온 귀신 다 날아와요.

내가 기도의 응답을 요구하니까. 그런데 진짜 금식 기도의 특징은요, 응답을 하는 게 아니고 이미 금식한다는 자체가 죄인 된 자체가 나의 기도에 도달될 수 없는 주님의 은혜로 주신 응답 자체가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기도에요. 이미 답을 받았어요. 이미 답을 받았다고요. 답을 아는 상태에서 서울대학 못 갈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이미 답을 알아버렸으니까.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왔습니까? 죄인을 부르러왔습니까? 이건 답변해 주셔야 돼요. 우리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왔습니까?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까? 죄인을 부르러 왔지요. 그런데 왜 교회에서 의인되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그러니 이게 정답이 다른 거예요. 정답이 틀린 거예요. 죄인 되면 귀신도 안 붙고 마귀도 안 붙고 시험도 안 들고 얼마나 좋아요. 일거삼득이다.

자기가 죽어 마땅하면 뭐까지 좋은 줄 알아요? 범사에 감사에요. 숨 쉬는 것도 감사에요. 물론 코로나로 숨 안 쉴 수 있는데 안 쉬어도 감사지만. 모든 게 감사에요. 감사 안 할 게 없어요. 전부 다. 게다가 보너스로 천국까지 가지요. 오늘 죽으면 어디 갑니까? 지금 천국에 도달하지요. 세상에 이런 혜택 종합선물 이런 혜택을 받았는데 감사 안 할 수가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금식할 때 굶지 말고 뷔페에 가서 음식 먹으면서 금식하라 했어요. 제가. 음식 먹으면서. 너무 먹어서 또 살 뺀다고 필라댄스 한다고 너무 애 쓰지 마시고요. 음식 먹어가면서 매일같이 감사해야 돼요. 매일같이 금식해야 돼요. 금식에는 뭐다?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라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뭐든지 감사함으로 하면 그게 바로 살아있는 금식입니다. 뭐 또 굶어가지고 굶은 건지, 살 뺀 건지 분간도 안 되게 마시고요.

자, 그렇다면 이제 제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게 뭐냐 하면 자, 금식했지요. 18절에. 그 다음에 8장 끝까지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거에요. ‘사랑의 옷’입니다. 사랑의 옷. 이거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지금 금식했잖아요. 잘 들어보세요. 금식했지요. 금식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죄인인 줄 알잖아요. 다윗처럼. 하나님의 성은 뭐로 채워진다? 만들어진다? 하나님의 은혜로 한다. 은혜를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선물이에요. 하늘에서 온 택배에요.

아까 잉태치 않는다 할 때에 약속이 온다 했지요. 약속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선물로 구원받는 거예요. 금식하기 때문에 금식은 죄인이잖아요. 자기가 뭘 해도 죄인 되지요. 그러면 여기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랑이에요. 사랑. 아까 질투에서 뭐가 나온다고 했습니까? 위쪽에서는 사랑, 한쪽에서는 저주, 사랑은 천국 만들고, 저주는 지옥 만들지요.

아무것도 못하는데 사랑이 덮어요. 이게 뭐냐 하면 사랑의 옷입니다. 사랑의 옷인데 사랑의 천. 천으로 덮잖아요. 덮을 때 주께서 천을 이렇게 덮어주시고 천을 이렇게 벗겨주시면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확인해 주시고, 천이 올 때 어떻게 오느냐, 부사로 스르르. 스르르 옮기는 거예요.

제가 지금 이걸 왜 얇은 천으로 설명하느냐 하면 금식하는 본인이 손 댈 게 없어요. 사랑의 천이 덮이면 돼요. 사랑의 천이. 은혜의 천이 덮이는 거예요. 이건 성경을 찾아봐야 돼요. 룻기3장7절 봅시다. 제가 지금 사랑을 설명하는 겁니다. 보아스가 먹고 마시고 마음이 즐거워 가서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눕는지라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뭐를 들고? 이불을 들고 가지요. 이불은 혼자 덮은 게 아니지요. 사랑의 대상이 있으면 한 이불을 덮는다 하지요. 이불 같이 덮지요.)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 자, 룻이 있고 룻에게 무엇이 덮였습니까? 이불이 덮였지요.

그 이불은 누구 겁니까? 보아스 거예요. 보아스 남자 거예요. 룻은 여자입니다. 여자가 적극적으로 남자가 누워있는데 여자가 발끝을 이렇게 가가지고 남자 누워있는데 이불을 들추고 그 발부터 시작해서 여자가 남자 이불 밑으로 스윽 들어온 겁니다. 그 때 동작하는 부사가 뭐라고 했어요? 스르르 들어온 거예요. 들어오는 거예요. 제가 지금 사랑을 설명하는 겁니다.

사랑은 홀로가 아니에요. 사랑은 질투한다는 것이 대상이 있다는 뜻인 것처럼 사랑은 홀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반드시 대상을 만들게 마련이에요. 사랑에 대상이 있습니다. 지금 구원을 설명하는데 제가 뭘 동원합니까? 사랑을 설명하는 거예요. 사랑을 설명하면서 사랑을 설명하기 전에 뭘 설명했습니까? 금식했지요.

금식은 뭐라 했습니까? 수모 당함이지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스라엘을 수모 당하게 했지요. 수모 당하게 해가지고 수모 당한 이스라엘을 이제는 주님 외에는 하나님 외에는 마음 둘 곳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이불을 만들고 주님과 같이 수모 당한 이스라엘을 수모 당했잖아요. 쫓겨났잖아요. 약속의 땅에서.

그것을 어디로 기어오게 합니까? 주께서 이미 마련된 성전, 하나님의 이불, 사랑의 이불에다가 룻처럼 들어오는 거예요. 그 다음에 7절 봅시다. 그의 발치에 누웠습니다. 밤중에 그가 놀라(화들짝 놀라서 보니까)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9절이 이제 핵심이에요. 9절에 액센트 치고 해야 돼요.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그 다음에 여종을 어떻게 하라? 여종을 덮으소서. 오늘 제목을 하고 싶다. 덮으소서.)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나는 무능하오니 나는 죄밖에 지을 게 없으니 주님의 사랑의 십자가에 피 흘린 그 사랑이 어떻게? 흠뻑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를 덮으소서. 이게 바로 주님이 우리의 남편이고, 우리 성도는 주님의 어디입니까? 신부잖아요. 신부.

이사야에 보면 이스라엘을 자기 신부라 했어요. 하나님이 스스로 내가 남편이 되어줄게. 남편이 됐는데 남편이 빈자리가 있어요. 빈자리. 남편이 됐는데 남편이 빈자리가 있어요. 빈자리. 남편만 있는데 지금 아내가 빈자리 되었잖아요.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거예요. 뭐로? 십자가로 채우는 거예요. 그냥 들어와! 들어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내 이불 속으로 들어와! 들어와! 그냥 들어와! 구원 참 쉽지요잉.

이불만 들치고 들어가면 돼요. 그러나 조건이 있어요. 금식하는 것. 내가 죄인인 걸 알아야 돼요. 그럴 때 덮으소서. 이는 당신의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라. 금식을 하는 이유가 사랑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생존보다 더욱 귀한 게 나를 덮은 사랑, 천국의 은혜가 더 귀하기 때문에 밥을 먹는 금식을 하는 거예요. 옷을 입는 금식을 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금식을 하는 거예요.

뭘 해도 나한테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에 이불 짝에 있는 하나의 자수요, 무늬라는 사실을 아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성도라면 입에서 뭐가 튀어나오겠습니까? 오직 무슨 이야기? 사랑이야기만 나와요. 사랑이야기. 이 못난 나를 주께서 이렇게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만 나와야 돼요. 지금 내 형편이 어떤 형편에 있던지 그 형편조차도 주님의 사랑에 이불보에요. 이불보. 이불보 또는 식탁보. 스르륵. 스르륵.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보다도 시적으로 잘 표현된 게 있어가지고 영어로 한 번 써볼게요. 영어를 써서 문법적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이걸 해석하면서 오늘 방금 이야기한 것을 제가 해보겠습니다. Olivia Newton John(올리비아 뉴튼 존)의 노래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나에게 그걸 알려주세요, 하는 노래에요. 이게 뭐냐 하면 성령의 역사에요. 성령.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육이고. 나는 하갈이란 육을 갖고 있고, 성령이 오게 되면 이미 내가 육이라는 것을 아는 자체가 너는 이미 잉태치 못한 니 어머니가 하늘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가 어디 있다 했어요? 하늘에 있지요. 하늘에 있는 우리 어머니를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임한 거죠.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저로 당신의 사랑을 알게 해주세요. 그 다음에 가사가, ‘If you don't then let me go’ 만약에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나를 그냥 떠나보내 주세요. 떠나서 뭐할 건데? 떠나서 그 다음 가사가 재미있어요. 떠나면 바이 바이 한다는 뜻이 아니고 떠나면 그러면 That keep me loving you. 떠난 상태에서 당신을 사랑할게요.

당신이 나를 밀어내면 잘 먹고 잘 살아라. 이게 아니고 멀찍이 보면서 나는 끝까지 당신을 계속 사랑할래요. 중간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길어도 써야겠어요. “Before too long I buit my world around you”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당신 주변에 내 세계를 만들어왔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주님 곁에 안 떠나기 위해서 주님 근처를 어슬렁거렸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당신 주변에 당신 세계를, 전에는 내 중심이었는데 이제는 당신 중심으로 바뀌어서 늘 어디에 계시더라도 동쪽, 서쪽 어디에 있더라도 주님을 바라보는 식으로 나는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기도를 해요. “And I prayed you'd love enough of me to say” 이건 뭐냐 하면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내 곁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도록 간절히 나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보고 나가라! 떠나라! 내 곁에 있지 마! 라고 하지는 말아주세요. 그것이 기도의 제목입니다. 주님이여! 주님이 늘 보이는 곳에 있게 하옵소서. 이게 바로 주님과 이렇게 있는 이것을 가지고 두자로 성전이에요. 그게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이게 예루살렘이에요. 이게 성전이에요.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성도는 나를 위해 살지 않아요. 내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의 천이 어떻게 왔다고요? 스르륵. 아주 다칠까 싶어서 아주 부드럽게. 부드럽게 일방적으로 그냥 덮어버려요. 부드럽게 사랑이 와서 덮어버립니다.

그래놓고 이제는 나 혼자 사는 삶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미 성도는 이미 죽기 전부터 누구하고 살아요? 죽기 전부터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있어요. 주님과 함께 있어서 내게 있는 모든 재산과 집에 있는 어떤 것도 이 모든 것도 누구의 것입니까? 주께서 그냥 주신 거예요. 심지어 딸, 자식, 아들, 모든 것이 주님의 구미에 맞추어서 주님 중심으로 준 거예요.

내게 좋아라고 자식, 자손을 주신 게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이니까 주님 적절하게 주님이 필요해서 주신 것들로 채워지는 겁니다. 그 때 주님과 우리 사이는 무슨 사이 밖에 없습니까?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까 하나님은 질투하니까 우리는 어떤 관계입니까. 오직 사랑의 관계 이외에는 입에서 나올 게 없어요. 이게 바로 스가랴8장에 예언되어있고요, 이 예언에 의해서 바로 신약에 성전이, 성령이 오게 되면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겁니다.

자, 스가랴8장20절, 21절에 보게 되면, “만군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다시 여러 백성과 많은 성읍의 주민이 올 것이라 이 성읍 주민이 저 성읍에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속히 가서 만군의 여호와를 찾고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자 하면 나도 가겠노라 하겠으며” 만군의 여호와 있지요. 이 여호와가 신약에 오면 주라고 이야기하고, 이 주가 사도행전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이 있고 난 뒤에 여호와가 누구냐, 주님이 여호와에요. 예수님이 여호와에요. 주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 부르자, 하잖아요. 그것이 신약에 오면 예수님 이름 부르는 거예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줬다면 성도라면 나도, 나도, 이렇게 해서 그 사랑의 이불 밑으로 다 들어오는 겁니다. 남편도 하나요, 신부를 다수라 하지 말고, 신부도 합치면 결국 하나에요. 하나의 신부. 하나의 남편. 전부 다 그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 사랑의 관계 때문에 행함을 따지겠어요? 안 따지겠어요? 안 따지지요. 검열하겠어요? 검열 안 합니다. 책망하지 않습니다. 왜? 뭘 해도 죄니까. 뭘 해도 착하니까가 아니고 뭘 해도 죄니까. 거기에 대해서 묻지 않아요.

성경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했잖아요. 뭘 해도 죄이기 때문에 항상 죄인을 불러서 예수님의 자기의 사랑으로 죄를 덮어버립니다. 시편103편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동에서 서에서 먼 것같이 니 죄를 어떻게 하겠다? 아예 안 보이는 곳으로 아예 옮겨버린 거예요. 내가 했습니까? 교회 목사가 했습니까? 오직 주님이 하시지요. 기도는 엄마가 한 게 아니고 주님만 하신 거예요.

그 주님의 사랑은 밥 좀 못 먹고, 물 좀 못 마셔도 상관없어요. 충분하게 능가합니다. 그게 바로 죽었다가 살아나고 삼일의 틈을 두고 죽은 것도 살아나고 없는 곳에 있게 하시는 능력은 그것이 바로 사랑의 능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전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전에서 자녀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잉태하고 예수님이 생산한 백성으로서 오직 사랑만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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