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랑과 소망(히 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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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히 6: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히 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히 6: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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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여기 의료보험카드가 있어요 !!
성경은 사람을 건져내기 위해서 있는데, 즉 구원하기 위해서 성경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의료보험제도나 국민연금제도와 같은 이 세상의 제도는 어떻습니까? 구원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더 편리하고 수월하게 살기 위해서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 의료보험카드를 가지고서 하나님께 구원시켜 달라고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늘나라에는 의료보험제도가 없어요. 그러니 그런 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죠. 성경의 내용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이 세상제도가 구원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겁니다.
제가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는고 하니, 그러한 사회제도로서 각각 개인의 인격이 바꾸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회제도가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인간은 그런 제도와 사회에 더욱 더 적응하려고 애를 쓰지, 거기에서 빠져 나오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죠.
그렇게 의료보험제도나 연금제도와 같은 것들이 ‘편리함’ 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애를 쓴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다가보면, 우리는 그런 제도의 사람이 되고, 그런 사회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 거기에서 이탈하고 벗어난다는 것은 점점 더 힘이 든다는 말이죠.
이렇게 사회제도나 법은 그 사회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조치인데, 그런데 성경은 그게 아니라 오히려 구원하기 위해서 있다는 겁니다. 성경말씀은 “관계없다. 괜찮아. 의료보험카드가 없어도 구원을 받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컴퓨터를 할 줄 모른다고 해서 지옥에 보내는 하나님이 아냐” 라고 하시는데, 쉽게 말해서 ‘빼돌린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보다 더 적응을 잘해서 남들에게 박수소리를 듣기 위한 성경이 아닌데, 제 아무리 박수소리를 듣고 인기가 많아도 그때뿐이라는 말이죠. 그러니 “이제 슬슬 나올 준비를 하라” 라는 것인데, 바로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 성경이라는 겁니다.
왜 사람들은 노아방주에 관심이 없었는가?
노아홍수 때 구원의 장치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방주였는데, 그런데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사람들은 그 값어치를 전혀 몰랐지요. 오히려 사람들은 거부반응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방주를 만든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상당히 신기한 일인데 말이죠.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벌에서 건져내겠다고 방주를 만드니,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렇지요? 그런데도 그들은 그 방주를 외면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바로 방주라는 것이 그 시대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는데, 물론 자기들 생각에는 말이죠.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했다” 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오늘날 사람들의 관심사도 역시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 관심사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사고, 잘 팔고, 장가를 잘 가고, 시집을 잘 가는가?” 라는 것에 있지, 다른 것에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마 24: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마 24: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그러니 노아방주가 자기들이 먹고 사고 팔고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방주를 믿을 하등 이유가 없었는데, 날이 갈수록 더 그러하다는 말이죠. 사회라는 것이 ‘편리’ 라는 이름 하에서 새로운 공동체가 자꾸만 생기는데, 이것을 ‘포스트모더니즘’ 이라고 하는데, 일종의 다원주의라는 겁니다. 구석구석마다 그런 모임들이 있다는 말이죠.
어제도 제 아내가 고등학교 동창회에 갔다가 한바탕 떠들고 왔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한 모임에 참여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이 사회에 안정적인 닻을 내린 사람이 된다는 겁니다. 그만큼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위험요소가 줄어든다는 말이죠.
그런데 방주는 무엇인고 하니, 거기에 정착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빼내주는 것이죠. 지금 하늘에서 홍수를 퍼붓고 있는데 동창회에 가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겁니다. 물론 동창회도 갈 수도 있는데, 하지만 방주에 들어가는 날짜를 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부터 먼저 챙겨야 하는데, 이게 바로 노아의 생각이었다는 말이죠.
그러니 성경에 기록된 내용들은, 우리가 이 사회에서 보다 잘 적응하고 친목을 도모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사회에 너무 깊숙이 개입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발을 뺄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노아의 방주였다는 말이죠.
옛날에는 노아의 방주였다면, 그러면 오늘날에서 있어 무엇이 방주 역할을 하는 겁니까? 그게 교회입니까? 국가나 민족이나 가문입니까? 그게 아니고, ‘사랑’ 이라는 겁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이것이 참 중요한데 말이죠. 교회나 국가나 민족이나 가문은 모두가 집단적인 성격인데, 그러나 사랑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독단적인 관계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와 내가 힘을 합쳐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구출된다” 라는 집단적인 관계성이 아니라, 그게 아니라 개인적인 사랑만 있다고 하면 얼마든지 구원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마치 방주 안에서 그 무서운 홍수의 심판을 면한 것과 같이 말이죠.
교회가 아닌, 사랑 !!
고린도전서 16장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하는데, 그러니 어떤 집단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즉 교회가 아니라 자기와 주님과의 독단적인 관계에서 맺어지는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면, 그것으로 구원완성이라는 말이죠.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그러니 교회가 아니고 사랑인데, 집단이 아니고 사랑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것으로 되었는데, 그런 사람은 이미 방주 안에 들어왔다는 말이죠. 교회라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랑을 도와주고 봉사해주는 것 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인간 사회를 살면서 서로 결속력을 다지는데 익숙해져 있는데, 집단주의로 인해서 말이죠. 그런데 의외로 구원은 그것이 아니라 “니가 어느 구석에 놓여서 살더라도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것에서 결정이 되는데, 즉 사랑이 우리를 건져내는 일종의 기중기와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에 보니 뭐라고 합니까? “구원이 가깝다고 평가해줄 사람은, 그런 사람은 이미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10절에도 보면,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랑이라는 겁니다.
(히 6: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히 6: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러니 어떤 교회나 집단체제가 아니고, 그리고 방주라는 어떤 장치가 아니라, 물론 옛날에는 그러했지만 말이죠. 이제는 우리 속에 있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리고 가시는데, 그러니 사랑이 천국으로 가는 우주선이라는 겁니다. 그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것 참 쉽네요. 사랑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겠네요” 라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우리는 사랑이라고 하면 누구나 다 아는 것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이 주님의 사랑은 기적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미 세상적인 사랑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런데 그런 세상적인 사랑을 그만 제쳐버리고, 그것보다도 더 큰 사랑이, 아니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 임했다고 하는 것, 이것은 그야말로 기적이 아니면 달리 설명이 되지 않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아까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 509장 2절 가사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네가 어둠 속을 걸어 갈 때에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주가 참 평안을 네가 주시리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주가 널 지키며 인도하시리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여러분, 자기가 어둠 속을 걸어갈 때, 그때 주님의 그 못 자국을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람이 어둠에 들어가게 되면 스스로 나자빠지든지 주님에게 항의하기에 바쁘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그런 일은 기적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겁니다.
1절 가사를 봐도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그 손 못 자국 만져라” 라고 되어있습니다.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실패는 누구나 경험하고 찾아오는 것인데, 그런데 문제는 그런 와중에서도 주님의 십자가의 박힌 것을 생각하는 사람만이 정말 사랑의 위력을 아는 자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실패야, 왔는가? 나는 못 자국이나 만질 거야. 어둠아, 왔는가? 하지만 나는 주님의 십자가만 의지할 거야” 라고 한다면, 즉 아무리 어둠이 짙게 몰려온다 할지라도 주님의 못 자국을 만질 사랑이 자기에게 있다고 나설 수 있는, 그런 자가 진정으로 사랑을 아는 자라는 겁니다.
물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드문데, 기적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죠.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얼굴을 보니, “그 정도는 기본입니다” 라는 분위기인데, 그래서 제 마음이 참으로 든든하다는 겁니다. 물론 제가 그렇게 보려고 애를 쓰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죠(ㅋㅋ).
여러분, 어두움이 오든지 실패를 하든지 그것이 무슨 대수입니까? 주님의 사랑만 있으면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아무 것도 아닌데, 그런데 “나는 꼭 이렇게 살아야 돼” 라고 고집을 부린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이 약하기 때문인데, 그러면 무척 힘이 든다는 겁니다.
그렇게 사랑이 약하면 자꾸만 어디에 매여서 사는 자가 되는데, 넉넉한 사랑이 없기에 말이죠. 그래서 조그마한 것에 목숨을 걸고, 거기에 모든 것을 집어넣는 무모한 짓을 한다는 겁니다. 이제는 사랑만 있으면 되는데, 그것만이 구원의 방주인데, 그 나머지는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른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사랑이라는 말을 끄집어낼 때는 반드시 뒤따라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으로 참된 사랑인지 아닌지를 판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저도 사랑을 조금 압니다” 라고 하지 싶은데, 그러면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을 비교를 시켜보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것은 사랑이 아닌 것 같은데요” 라고 판정이 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 그 사람이 주님의 사랑으로 사는지 아닌지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고 하니, 그것은 오늘 본문 11절과 12절에 보면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히 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히 6: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일관성과 국토 대장정 !!
여기 11절에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라는 말이 나오고, 또한 12절에는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진짜 사랑이 있다고 하면 이 세상에 믿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 끈질김과 동일한 부지런함과 게으르지 아니함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즉 일관성이 있다는 겁니다.
너무 어렵습니까? 쉽게 예를 들자면, ‘국토 대장정’ 이라는 것이 있는데, 동아제약에서 대학생들을 200여명을 모아서 거의 한 달 동안 저기 남쪽 땅 끝 마을에서 북쪽 임진각까지 행군에 나섭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 국가와 국토를 내가 사랑하고 끝까지 지키리라” 라고 하면서 각오를 하는데, 그런데 그 행군이 만만치 않다는 말이죠.
그래서 도중에 어떻게 됩니까? 행군을 하다가 그만 낙오자가 생기면서 군데군데 살고 있는 자기 친척집으로 빠져 버린다는 겁니다. “국가 사랑도 좋지만 나는 대전에 사는 우리 이모집이 더 좋아”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자꾸만 다른 믿을 구석이 생겨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도 어떻습니까? 처음에는 “저는 주님의 십자가만 믿습니다. 그 어떤 유혹이 와도 십자가만을 붙들고 가겠습니다. 주님의 못 자국만을 만지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시작은 그렇게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가다가 그만 옆길로 샌다는 겁니다.
그래서 “임진각까지 가면 무엇을 가겠노? 그만 여기서 좀 쉬어야지” 라고 하는데, 그러면 “이 국가와 국토를 내가 사랑하고 끝까지 지키리라” 라고 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됩니까? 그게 무슨 사랑이냐는 겁니다. 사랑하는 것이 따로 있었는데, 자기 삼촌집을 사랑했고 이모집을 사랑했다는 말이죠.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국토 대장정을 무사히 마칠 수가 있습니까? 가는 길에 친구집이나 심촌집이 있더라도, “믿을 놈이 어디에 있노?” 라고 하면서, 돌아보지 않고 끝까지 행군을 하면 임진각에 이르게 되는데, 그러면 완주를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진정한 사랑인데,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믿지 않을 때, 그때 하나님은 “진실로 니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흔히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투표에서 떨어지면 분란이 일어나는데, “내가 이 교회에서 수 십 년 동안 주일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봉사를 했는데, 왜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느냐? 꼭 내가 장로가 되고 싶고 권사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죠.
여러분 주위에도 그런 분들이 있지 싶은데, 저는 그런 분들이 진실로 주님을 사랑하는지가 의심스러운데, 교회는 정말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그것을 점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도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온갖 잡동사니 일들이 다 터지는데, 그러니 그런 것을 애당초 믿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죠.
장로투표나 권사투표를 왜 믿습니까? 그런 것을 믿은 것이 잘못인데, 처음부터 아예 믿지를 마세요. 믿으니까 실망이 크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죠.
노아 때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할 때, 노아는 그런 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방주를 만드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하나님의 사랑인줄 알고,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장치인 방주를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도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부지런함으로 게으르지 아니하고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매진하면 된다는 겁니다.
심플 라이프 !!
그러면 사랑은 대상이 없는 것일까요? 만약에 이 땅에서 구체화된 것을 믿는다고 하면, 저는 그러한 믿음은 가짜라고 봅니다. 자기가 손에 쥔 체험과 같은 것은, 즉 자기가 병에서 나은 것과 같은 것은 전혀 믿을 만한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의 대상은 손에 잡히지를 않는데, 즉 체험되지 않아요. 이렇게 체험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자기 체험을 가지고 우려먹을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인데, 그 속에 날아오는 단 하나의 주님의 약속, 그것만이 사랑의 전부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약속만 믿으면 된다는 말이죠. “누가 암이 걸렸는데, 기도해서 나았다” 라고 해도, 그런 것을 돌아보면 안 되는데, 설령 그런 것이 있어도 잊어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그분만 사랑하는 것으로 종결입니다. 더 추가하거나 보탤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더 추가할 것이 없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 마음을 얼마나 홀가분하게 하는지 모른다는 말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전혀 복잡하지 않는데, 그분만 사랑하면 된다는 겁니다.
목사들이 “중보기도를 하게 되면 안 믿는 식구들까지 몽땅 교회에 나오게 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믿지 마세요. 그냥 주님만을 사랑하세요. 주님의 손에 난 못 자국만 만지면 끝나는데, 더 보탤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깔끔하게 사세요. 다른 것을 자꾸 끼어 넣으려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 말고 다른 것은 다 빼버리라는 말이죠.
여러분에게 실패가 찾아오고 어둠이 찾아오면, “남들은 체험적인 신앙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왜 그런 것이 없지?” 라고 하면서 흔들리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다 이물질인데, 그런 것을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철야기도를 했더니만 아버지가 교회에 나오셨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냥 깔끔하게 어렵고 괴로울 때마다 주님의 못 자국을 생각하는 것, 그것 외에 달리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사람들은 남들이 하지 못한 것을 하게 되면, 마치 훈장처럼 그것이 자기 두뇌 속에 저장되고 축적이 되는데, 자랑하려고 말이죠. 하지만 그것을 성경에서는 ‘교만’ 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사람이 왜 참지를 못합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뭔가 저축된 것이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것을 건드리면 폭발한다는 겁니다. 자기는 모두 다 비웠다고 하는데, 하지만 건드리면 터진다는 말이죠. 그렇게 자기가 축적한 것이 하나님과 타인에게 분노를 퍼붓는 근거가 되는데, 하지만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 충족하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어디에 있는고 하니까, 요한일서 4장에 보면 그대로 나오는데, 8절에서 10절, 그리고 1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여기 18절에 보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라고 하는데, 그리고 10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라고 하는데, 이것을 마신 사람, 즉 이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게 하니라, 하나님의 못 자국이 먼저 자기에게 나타났다는 말이죠.
그래서 다른 것이 더 추가될 필요가 없는, 우리의 행함이 들어갈 이유가 전혀 없는데, 그야말로 하늘에서 주신 완벽한 그대로의 사랑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어려움 속에 있어도 어떻게 하면 됩니까? 주님의 그 못 자국만 만지면 된다는 말이죠.
이것은 마치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가면, 노아의 인격이나 행실과 무관하게 방주에 의해서 노아와 그 식구가 구원을 받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면, 오직 그 사랑만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건짐을 받는다는 겁니다. 여기에 다른 것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
여기에 비해서 그래도 우리가 좀 안다고 하는 이 세상의 일반적인 사랑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내용에 의해서 다 걸려지게 됩니다. 천사를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헛것이라는 겁니다.
(고전 13: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무엇이 사랑이 아닌가?
그래서 제가 “여러분, 저는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라고 한다면, 설령 저에게 그런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다고 하면, 그러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완벽한 사랑에는 새로 투입될 요소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반대로 “제가 기도하니까 산마저도 옮겨졌습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오로지 완벽한 주님의 사랑만 생각합니다” 라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 진정으로 참된 사랑 안에 있는 자라는 말이죠. 그래서 사랑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을 위해서 구제하고 순교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기는데, 하지만 그것도 역시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에게 축적된, 자기의 자랑거리가 하나 더 보태지는 것에 불과하다는 말이죠. 그러니 그것은 빼버려야 하는데, 즉 “내가 저 사람을 구제했다. 어디에 가서 봉사했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며느리인데, 그리고 시부모에게 너무 잘하는데, 그런데 시부모가 핍박의 엄청 심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가? 계신다고 하면 왜 저런 일이 일어나지?”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며느리가 되어서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어른을 섬겼는지, 아니면 며느리로서의 의무감으로 했는지를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무엇이 사랑이 아닌가?” 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사랑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5절에 보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라고 하는데, 과연 이것이 말이 됩니까?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겁니다.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까,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반대급부로 저쪽에서 잘해줄 거야. 그러면 나는 지금보다 더욱 위대한 사람의 인격 소유자가 될 것이고, 신앙생활도 더 잘하게 되겠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지 결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점점 훌륭해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믿는 모습이라는 말이죠.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기에, 얼마나 가지 못해서 실망감으로 돌아서고 만다는 겁니다. 그것은 동일한 부지런함과 게으름이 없는 것이 아닌데, 즉 “하나님이 도와주면 신앙생활을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길로 돌아설 거야” 라고 하는, 일종의 흥정과도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잘라버리는 것인데, 자기의 모든 자랑거리를 말이죠. 그것을 저는 ‘잊어버려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이게 기적이 아니고 되는 일입니까? 윤리나 도덕은 자신을 더욱 훌륭한 인격으로 다듬기 위한 노력에 불과한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겁니다. 하지만 사랑은 자신을 잊어버리는, 그것이 곧 사랑이라는 말이죠.
이제 끝으로 빌립보서 3장 13절과 14절을 보겠습니다.
(빌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동일한 부지런함으로 !!
여기서 ‘잊어버리고’ 라는 말이 나오는데, 자기가 과거에 잘났던 못났던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인데,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사랑할 대상은 이미 확보되어 있기에 때문이죠.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아무 것도 아닌데, 이미 사랑할 대상이 있는 자에게는 이 세상일이 상처가 될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만질 못 자국이 있는데, 즉 만질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제가 ‘잘라버려라’ 라고 했는데, 이제는 ‘잊어버려라’ 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일만 감당하면서 살아가는데, 그것을 두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동일한 부지런함’ 이라고 한다는 말이죠.
(히 6: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두려움 없는 사랑으로 !!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가치가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이 주신 사랑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인데, 그러니 자기 것을 내놓은 것이 사람이 사는 이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굳이 자기가 위대해질 이유가 없는데, 그러면 심적인 부담도 그만큼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요한일서 4장에서 사랑에는 무엇이 없다고 합니까?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실패를 하든, 어둠 속을 걸어가든, 아예 그런 것 자체를 전혀 믿지를 않으니, 그런 것이 자기에게 결코 두려움이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죠.
마태복음 11장 2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라고 하시는데, 이것보다도 더 편한 삶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냥 주신 사랑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는 겁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그런데 왜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잡티가 끼어 들어와 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순수한 꿀이 아니라 거기에 자꾸만 무엇을 섞는다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 피만 있으면 되는데, 그 사랑만 있으면 되는데, 거기에 자기의 피를, 자기의 사랑을 집어넣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오히려 고통만 줄뿐인데, 그러니 그런 것은 다 빼버리고 오직 주님이 주신 사랑만으로 시원하게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고민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이제는 종결시켜 주시고, 이것을 하지 않고 저것을 하지 않아도, 그런 것이 없어도 오직 주님이 주신 무한한 사랑만을 유일한 보물로 여기면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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