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2001설교모음

16강-완전한 것

아빠와 함께 2021. 8. 30. 12:50

16. 완전한 것(6:1-8)

 

-----------------------------------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

 

오늘날 현대인들은 누구로부터 협박이나 위협을 받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이제는 알만큼은 알고 있기 때문에, 남들에게 간섭을 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성질 때문에, 하나님에게서도 정신적인 억압을 주는 듯한 소리를 들으면 매우 기분이 나쁘다는 말이죠.

 

너희들은 이제 다 죽었어 !!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에 보니,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라고 하는데, 즉 타락한 자들은 다시 회개할 수도 없고, 그래서 모두가 멸망을 당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자체가 우리에게 아주 억압적으로 다가온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말씀이 현대사조와 맞지 않다는 느낌을 우리가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런 내용은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나 통하던 것이고, 이제는 인간들이 성장을 할만큼 했고, 그래서 우리도 나름대로 열심히 해서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심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 위협을 가하고 겁을 주는 이유가 다 있다는 말이죠.

 

그게 바로 오늘 본문 6절인데, 다시 보겠습니다.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내 아들을 어떻게 했는가?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욕보였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이런 자들을 불사른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먹고 살기에 바쁜 현대인들에게 과연 얼마나 먹혀들겠느냐는 겁니다. 자기 가족을 챙기는 것도, 심지어는 자기 몸 하나도 유지하기에 급급한데, 그런데 언제 하나님의 아들까지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있겠느냐는 말이죠.

 

요즘 젊은 사람들은 너무 바빠서 시어른도 제대로 모시지를 못하는데, 그런데 그런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도 아닌,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신봉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까지 챙기라고 하니, 그것은 우리에게 너무 과중한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막무가내로 자기 아들까지 섬기지 않았다고 해서 불사름을, 즉 멸망을 시키겠다고 협박과 공갈로 나오니, 우리는 차라리 성경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아, 하나님의 종들아, 좋은 말만 해라라고 나오는데, 예를 들어서,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하든지,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하든지, “형제간에 우애가 있으면 복을 받으리라라는 것처럼, 우리가 납득할 만한 좋은 말이라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난데없이 자기 아들에 관한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마구 들이민다는 말이죠.

 

그래서 단지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였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이 평소에 얼마나 선하고 착하게 살았는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불살라 버린다고 하니 우리는 난처하기가 짝이 없는데, 이러한 폭력적인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차라리 이런 성경말씀은 없었으면 좋을 뻔했다는 말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무엇입니까? “내 아들을 어떻게 했는가?” 라는 것인데, 이 세상에 보낸 자기 아들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우했는지, 하나님은 여기에 온통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 나와있는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발 자비의 얼굴을 저에게로 돌려주옵소서. 제가 이처럼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왜 외면하십니까? 저의 상처를 왜 외면하십니까? 저와 저의 가족에게도 관심을 좀 돌려주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복만 주세요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관심은 자기 자신에게 있는데, 이것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은 관심사는 되레 손가락을 가지고 우리의 가슴을 팍팍 찔러대십니다. “, 내 아들을 어떻게 했어?” 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우리가 교회에 구박을 받으려고 옵니까? 그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귀염을 받아서 작은 행운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나오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막무가내 식으로 자기 아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민다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에 와서 또 다시 그 누구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강요받고 있는데, 누구를 말인가요? 그것은 우리가 평소에 바쁘게 살아간다는 핑계로 잊어버리고 있는 분인데, 도대체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지? 예수님은 누구시지?” 라는 질문이 나오도록 하신다는 말이죠.

 

이러한 질문이 우리 내부에서 목을 타고 우리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는 것 자체가, 그게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관심사가 아직도 자기에게 남아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신문이나 TV에 그것이 나옵니까? 전혀 아닌데, 그러니 이것이 신자로서의 확증이라는 겁니다.

 

교회나 기독교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신자됨은 아닌데, 교회에 조그만 다니면 그런 것은 누구나 다 안다는 말이죠. 한국에 기독교가 언제 들어오고, 지금은 기독교 신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런 것은 일종의 호기심로도 알 수 있는 것인데,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저런 잡동사니 같은 것을 제쳐놓고, “예수님은 누구시지? 예수님은 무엇을 하신 분이지?” 라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면, 즉 교회를 20년이나 다녔지만 아직도 그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그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뛴다고 하면, 그것이 얼마나 타인과 다른 점이냐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하루 24시간 그 관심사가 언제나 에 있는데, 하지만 인간은 자기에게 집착하면 할수록 그 집착이 그만 자신을 망치게 합니다. 인간을 망치는 것은 매우 간단한데, 자기에게 집착하면 곧장 망하게 된다는 말이죠.

 

사람의 모든 고민과 걱정은 자기 집착에서 비롯되는데, 그런데 단 2초라도 예수님이 누구시지?‘ 라고 하면서 그분에게 관심을 돌리는 그 순간, 우리는 불신자가 감히 누릴 수 없는, 천사가 가지는 행복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살았다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는 겁니다. 아주 간단한 차이인데, 이 간단한 차이를 불신자들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극복해낼 수가 없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관심사는 자신의 아들에게 가 있는데, “내 아들을 너희들이 어떻게 했는가?”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는 자기에게 가있다는 겁니다. 이 관심사의 차이로 인해서, 어떤 이는 천국으로, 또한 어떤 이는 지옥으로 갈라서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여러분이 이왕 교회에 나왔으니, 그 관심사를 자기 자신이 아닌 예수님에게, 그분에게만 국한해서 관심을 가져달라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나와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데, 정말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사람이라면, 자기 문제, 가정 문제, 자식 문제, 교회 문제, 그런 것보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평소에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신자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정말 간단한 문제인데, 비록 이 세상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24시간을 매달리더라도, 그 밑바탕에는 나의 살고 죽는 것은 예수님에게 달려있다라고 하면서, 예수님에게 대한 관심사가 중요하다는 점을 아는 자가 곧 신자라는 겁니다. 자기가 새롭게 각오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공식은 이러한데, 물론 다른 곳도 마찬가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욕보이면 멸망이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8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라고 한다는 말이죠.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셨는가?

 

여러분, 성경에 있어서 다른 흐름을 상상하거나 찾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인데, 우리가 하루가 몇 끼를 먹고 살아가는지,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오늘 설교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셨는가?” 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오늘 본문 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여기에 보면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라라고 하는데, 정말 우리를 부담스럽게 하는 말씀인데 말이죠. 그렇다면 완전한 데로 나가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는 겁니까? 완전한 것을 찾고 있는 하나님의 요구에 미흡하기 때문에, 마지막 결국은 불사름이라는 겁니다. 완전한 것에는 관심도 없고, 그런 것이 왜 필요하냐고 한다면, 그렇게 불사르게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래서 7절과 8절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여기에 보면, 땅이 있기에 거기에 채소를 심었고, 그리고 하늘에서는 비가 내려옵니다. 그런데 만약에 싱싱한 채소를 얻지 못하고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면, 그것은 본래 하나님께서 원했던, 즉 비를 주신 목적에 부합되지 못하기에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그 끝은 불사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죠. 그래서 그러니까 너희들은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된다라는 겁니다.

 

완전함과 초보 !!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숙제라도 던져 주는 것 같은데,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그 완전하다는 것은 어떤 수준이고, 그 내용은 무엇이냐는 겁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완전함의 반대말인 초보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하는데, 그게 1절과 2절에 나옵니다.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이것을 쉽게 말하면, “너희들이 초보에 머무르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만이 싱싱한 채소와 열매가 맺혔다고 할 수고, 그런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까? 그 이유가 4절과 5절에 보면 나옵니다.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자가 되는 그 수준도 감히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인간의 종교성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초보라도 되려면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가 되어야 하고, 내세의 능력을 맛봐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의 보따리로 묶어보면 다음과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다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따로 있는데, 그런데 그들도 자기들에게는 구원을 받을 재주가 없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의 은사를 주시고 성령에 참여하도록 하셔서, 그렇게 해서 그들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놓는다라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서는 비를 내리고 땅에서는 채소를 가꾸는 식과 같다는 것인데, 즉 하늘에서 비가 와야만 채소가 가꾸어지듯이, 인간 세계의 외부에서 능력이 임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가 초보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초보의 단계가 전부입니까? 그것은 아닌데, 그 일의 완전한 것이 따로 있고, 그쪽으로 나가야 구원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내세의 능력을 맛보지 못한 자들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데, 복음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말이죠. 들으면 섭섭할지 몰라도 내놓은 자식인데, 즉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니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죠.

 

우리끼리 !!

 

그러니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자들만 모이라는 것인데, ‘우리끼리말이죠. 그런 자들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이 완전한 데로 나아가고 있는가?” 라고 따지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철저히 우리 내부에서는 하는 이야기인데,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완전한 데로 나갈 수 있습니까?” 라는 것은, 우리끼리의 집단에서 해당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처음 믿을 때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지만, 그 이후로는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완전한 데로 나가서 구원을 받는다라는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그것은 시작과 끝의 원리가 틀리기 때문에 말이죠.

 

오늘 본문의 뜻은 이것인데, 하나님의 능력이 너희들을 어떻게 인도하는지 너희들은 알고 있어라라는 겁니다. “하나님, 이 정도로 믿었으면 다 된 것이 아닙니까?” 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이죠. 우리가 왜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느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구원용으로 삼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겁니다.

 

어쨌든 나만 구원을 받았으면 그만이 아니냐?” 라는 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채소가 아닌데,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너희가 이 자리에 주저앉는다면, 그것은 너희 입장만 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보인 것에 해당된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저는 이것을 이렇게 생각하고 싶은데, 욕을 보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한 시라도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의 가슴을, “지금 니가 나를 십자가에서 욕을 보이고 있지?” 라고 하시면서 쑤시고 있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이만하면 되었지 않았습니까? 이 정도로 하고 신앙생활은 그만 하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현저히 욕보이는 것이라는 말이죠.

 

이것은 마치 귀신이 딱 달라 붙어있는 것 같은데, “니가 아무리 서울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갔다오고 해도 무당이 안 되면 안 된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정말 하나님의 자녀는 그 팔자가 무슨 팔자인지 몰라도, 전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나 죽으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귀신처럼 달라붙어서, “너는 나에게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아나?” 라고 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마구 쑤시는 느낌이라는 말이죠. 실제로 그러한데, 그렇게 동반자가 우리에게 붙어서, 우리를 천국에 데리고 가신다는 겁니다.

 

너는 홀몸이 아니다 !!

 

그러니 신앙생활은 전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닌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마치 보디가드처럼 옆에 붙어서 우리를 천국에 데리고 가시는 것, 그게 바로 신앙생활이라는 겁니다. 이 긴 이야기를 간단하게 말하면, “너는 홀몸이 아니다라는 것인데, 즉 옆에 누군가가 계신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모든 것을 주님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고 있는데, 자기가 감옥에 가더라도 재수가 없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곳에 가도 천사가 와서 깨우는데, “사도바울아, 빨리 나가자. 이미 문을 다 열어놓았다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간수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러면 나는 죽은목숨인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라고 하니, 사도바울은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한다는 겁니다. 이게 거리의 전봇대에도 보면 많이 붙어있는데 말이죠(ㅋㅋ).

 

(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16:30)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16:31)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16: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또한 사도바울이 로마에 전도하려고 가는 것도 자기의 뜻과는 다르다는 말이죠. 자기는 오히려 터키 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유럽 쪽으로 가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도바울은 자기가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가 없는데, 옆에 보디가드가 따라붙어서 알아서 해준다는 겁니다.

 

그리고 로마로 가는 것도 자유로운 몸이 아니라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거기에서 전도를 한다는 말이죠.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들이라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점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누가 옆에 붙어있어서 간섭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끼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도리어 감사해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평소에 집에서 밥도 제대로 못하던 새댁이라면, 이제 교회에서 야유회를 나가면 당연히 걱정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이 새댁은 전혀 걱정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집에서도 음식을 하지 못할 때 도와주던 시어머니가, 야유회를 가서도 당연하게 도와줄 줄로 믿기에 말이죠. 그러면 칭찬은 자기가 다 받고, 고생은 시어머니가 실컷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우리 옆에 붙어있다는 것에 대해서, 부활이고 생명이신 분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다행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인데, 자기 기도의 힘으로, 자기 전도의 힘으로 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그렇다면 무엇인가요? 곁에 계시는 분이 인도하니 이끌려 간다는 겁니다.

 

전도란, ‘나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자랑하고 소개한다는 겁니다. 나는 예수님 덕분에 이렇게 살아간다라고 말이죠. 이것을 두 글자로 전도라고 하는데, 그러니 전도는 사람을 꼬드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살아가는 것을 고백하는 것, 그게 바로 전도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힘든 것이 없는데, 부담도 되지 않고 말이죠.

 

이런 말을 하면, 또 어떤 분들은 그러면 마음놓고 죄를 지어도 되겠네요라고 하는데, 하지만 죄를 지어보라는 겁니다. 과연 그것이 그렇게 되는지 말이죠. 과거에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지어지든 죄가, 이제는 부담이 되고 힘이 든다는 겁니다. 그리고 시시하게 여겨진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제는 술맛도 없어지고, 또한 담배도 별로 생각나지를 않는다는 말이죠. 그러면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집사님, 참으로 성화가 되었네요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성화가 아니고, 옆에 있던 누군가가 인도하니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 견인차가 생각나는데, 물론 성도의 견인과는 한자가 다르지만, 성도는 굳게 참는다는 의미의 견인(堅忍)’ 인데 말이죠. 아무튼 견인차에 끌려가는 자동차를 보면, 자기는 가만히 있으면 앞에서 알아서 다 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는 성령의 인도함이라고 하는데, 주의 영이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는데, 대구를 가든, 광주를 가든, 부산을 가든, 그 어디를 가든 말이죠.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래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은 항상 걱정을 하는데, “내가 무엇을 선택하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지 않을까? 내가 이런 일을 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저주를 내리면 어떻게 하지?”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자기와 하나님의 관계가 자꾸만 흥정하는 식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신앙인은, 즉 완전한 데로 나가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그 완전한 것이 곧 예수님이고, 그분이 인도하신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이것도 되네. 이것도 은혜네. 사는 재미가 여기에도 있었네라고 하면서, 그 인도하심 속에서 살아가는 재미를 느낀다는 겁니다.

 

그러니 매일같이 고기를 먹다가 그만 돈이 없어서 물에 밥을 말아먹었다고 하면, 그 맛도 괜찮다는 말이죠. 반찬은 달랑 오이 하나밖에 없어도, 된장에 오이를 찍어먹는 것도 별미라는 겁니다. 그렇게 주님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면서 자꾸만 겸손해진다는 말이죠. 이것이 곧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늘 주님에게 묻게 되고, 자기도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진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4절과 5절을 다시 봅시다.

 

(6: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이것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획기적인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러니까 초보의 경우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자기 구원이라는 겁니다. 나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나는 천당에 갈까? 지옥에 갈까?” 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그러면 이제 교회에 나가지 않아도 되겠네.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라고 나온다는 말이죠.

 

그러니 초보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오직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는데,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그 고마움을 날로 날로 더 깨달아 가는 게 아니라, “이 정도면 되었잖아. 이 정도면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조직신학을 아니까 말이야라고 하는데, 그렇게 항상 자기 생각만 한다는 겁니다. 이게 초보인데, 자기만 구원을 받으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인도하시는 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인데, 마치 견인차에 끌려가면서 나는 이제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네라고 하면서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하는 것인데, 견인차를 운전하는 사람의 고통을 전혀 모르는 것과도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초보라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의 특징이라는 말이죠. 주님의 고통은 모르고 자기 편한 것만 생각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갈라디아서 614절을 보겠습니다.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사도바울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서 이 세상이 자기에 대해서 죽고, 자기도 이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초보라고 하는데, 이게 과연 초보입니까? 그런가요? 오히려 이것이 바로 완전함이라는 겁니다.

 

이것을 초보라고 여기는 사람의 생각은 무엇인고 하니, “내가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는 더 이상 십자가가 필요치 않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완전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십자가로 인해서 이 세상에 대해서 나는 죽었다고 하는데, 내가 그 정도인가?” 라고 하면서, 그 완전함에 대해서 놀란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말이죠.

 

초보와 완전함 !!

 

그러니 초보라는 것은 개인적인 자기 구원에 집착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완전함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께서 현저히 욕을 보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는지를, 그 이유를, 그 아픔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완전함이란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고 욕된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고, 이제는 그 완전한 고통과 아픔에 전적으로 자기가 빨려들어 간다는 겁니다. “주님이 이렇게 고생했기에, 주님이 이렇게 기도했기에,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라고 하면서,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게 된다는 말이죠.

 

여기서 에베소서 317절에서 19절을 보겠습니다.

 

(3: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3: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3:19)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나님의 충만이 우리 속에 들어온 충만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그 터가 있어야 하는데, 그 터가 무엇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 터가 되고, 바로 그 터로 인해서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서, 그것이 차고 넘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역시 그러한데, 2절을 봅시다.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여기에도 터가 나오는데, 이 터는 무엇인고 하니,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 터를 닦았다고 하면, 이제는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주님이 도대체 어떤 일을 하셨기에 자기가 구원을 받았는지, 그 완전함으로 나아가야 하는 위치에 놓여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나오는데, 9절과 10, 그리고 20절을 보겠습니다.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여기 10절에 보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라고 하는데, 이게 바로 완전함 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누구 차례인고 하니, 주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의 차례인데, 그래서 20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다라고,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완전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하시는데, 성령, 즉 주님의 영이 오시게 되면 어떤 상태를 만들어주시는고 하니까,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있고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똑같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게 된다는 말이죠. 그것이 곧 성도의 완전함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이 있다라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 6절에 나오는데,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예수님을 무시하는 자는 회개치 못해 !!

 

그러니 타락이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그 욕보이심에 대해서 완전히 무시하고 돌아서는 것, 그게 곧 타락이라는 말이죠. 간음하고 살인하는 것이 타락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고 나오는 것, 바로 그게 타락이라는 겁니다.

 

가수 조영남이 뭐라고 했는고 하니, 그래도 나름 신학공부를 했다고 하는데 말이죠. 예수가 죽은 것은 그 당시의 정치범으로서 죽었다는 겁니다. 정치 세계에 그만 겁도 없이 덤벼들다가 죽었다는 것인데, 그러니 그게 오늘날 21세기에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나 2,000전의 옛날 인물이라는 말이죠.

 

예를 들어서, 이순신 장군이 존경스러운 것은 맞지만, 하지만 오늘 아침에도 그 이순신 장군을 위해서 살 필요가 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미친 짓인데, 아무리 훌륭해도 지나간 과거의 인물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예수님도 옛날에 돌아가셨는데, 지금 살아있어서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아닌데,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이 그때 베풀었던 그 이웃사랑을 본받아서 우리도 이웃을 사랑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그런 교훈만 받으면 되는 것이지, 그런데 그게 아니고 누구 안에 누가 있고, 누구 안에 누가 있다라고 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더 이상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것은 일종의 신비주의이고, 그야말로 광신도가 하는 짓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심판을 준비해서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 쪽에서는 무엇인고 하니까, 사다리 타기를 하시는데, 누가 나에게 골인을 하는지 보자. 아하, 저놈은 저리로 세는구나. 어라, 너는 나에게 오네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6절 말씀의 의미인데, 타락한 자들은 다시 회개케 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보였기 때문이다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순신 장군은 아직 무덤에 있지만, 예수님을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계신다는 겁니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실례가 되는데, 사람이 죽으면 그만이지 어떻게 다시 살아나서 돌아다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하는데,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럴 수가 없다는 겁니다.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의 피가, 그 피가 지금도 살아있어서,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고 천국에 넣어준다고 하는, 만약에 그것을 믿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그런 자들이 곧 성도이고 신자인데, 바로 그런 자들에게 호소하고 있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살기에 바빠서 예수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교회에 와서 성경말씀을 펼치니, 하나님의 아들을 현저히 욕보이는 자들은 결코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관심사가 하나님의 관심사와 일치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히브리서2001설교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강-사랑과 소망  (0) 2021.08.30
15강-아들의 순종  (0) 2021.08.30
14강-대제사장  (0) 2021.08.30
13강-연약한 인간  (0) 2021.08.30
12강-말씀의 능력  (0) 2021.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