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대제사장(히 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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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5: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히 5: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히 5: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히 5: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히 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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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파악 !!
성경말씀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느냐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사태파악’ 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즉 “이 세상이 어떤 상태에 놓여있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대제사장이 꼭 필요한가?” 라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을 모르고, 무엇이라고 합니까?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갖추었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누구인고 하니까, ‘대제사장’ 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대제사장이 없으면 우리는 구원될 수가 없다는 말이죠.
물론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내가 꼭 구원이 되어야만 하는가?” 라고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가 구원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인간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견해가 서로 상충된다는 말이죠. 그리고 이것조차도 우리에게는 기분이 나쁠 요소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구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 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그것은 나중의 일입니다. 지금은 더 중요한 것이 많습니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지금 사태파악이 전혀 안 되는구나.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나는지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고, 그 와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구나”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오잉, 이방인 !!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런데 우리는 ‘이방인’ 이라는 표현조차도 듣기에 거북하다는 겁니다. 이방인은 무엇이며 택한 민족은 무엇입니까? 인간이라면 다 똑같지 않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택한 민족이 따로 있다는 말은, 택한 민족의 입장에서 봐서는 “너희 다른 민족들은 애초부터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하는 족속이다” 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 자신을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면서 살고 있는데, 즉 “나는 여기에 있다. 그러니 이 세상은 나에게 어떤 유익을 줄 것인가?” 라는 것을 늘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는 이방인이다” 라고 하는 순간,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너희는 내놓은 자식이다. 너희는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우리는 그만 헛다리를 집었고, 김칫국물부터 마셨다는 말이죠. 그러면 이 세상의 중심은 어디입니까? 그것은 이방인이 아니라 선택된 민족이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아는 것이 바로 ‘사태파악’ 이라는 말이죠.
하지만 설령 그 중심을 우리가 알았다고 해서, 중심을 옮길 만한 여유가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그래도 자기가 중심을 잘 잡아서 살아왔다고, 자기 마음을 자기가 잘 단도리를 해서 살아왔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하루 아침이 그 기둥을 뽑아버린다면, 그러면서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무슨 낙으로 살아가느냐는 겁니다.
인간의 유일한 종교, ‘조상숭배’ !!
해마다 명절 때가 되면, 우리가 재차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인간은 ‘가족중심’ 이라는 것인데, 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귀소본능이라고 할까요? 자기가 묻혀야하는 곳으로 말이죠. 인간은 그것을 영원히 버리지를 못하는데, 어릴 때 놀던 곳으로, 어릴 때 상상했던 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그게 신화의 세계인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모두들 모인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가족이라는 것인데, 그러면 모여서 하는 일이 무엇이죠? 음식을 만들고 윷놀이나 고스톱을 하려면, 그것은 그냥 서울에서 해도 되는데, 그러니 그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모두가 모여서는 “우리는 한 핏줄이며, 한 덩어리에서 태어났다”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는데, 그것이 바로 ‘조상숭배’ 라는 말이죠.
그래서 인류문화학자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전 세계의 종교의 핵심은 하나밖에 없는데, 그게 바로 조상숭배다” 라고 하는 겁니다. 고조선 시대부터 보면, 이씨는 이씨, 김씨는 김씨, 권씨는 권씨, 바로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핏줄 중심의 영원한,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다짐하는, 그래서 그 어디로 가던 자기 유전자를 더럽히지 말라는 겁니다.
거기에서 우리 인간은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는데, 어디로 가던지 가문에 먹칠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가족이라는 것은 하나의 센터이고, 본점이라는 겁니다. 개개인은 하나의 지점이고 말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딸이 아닌 아들을 선호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나’ 중심의 가정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으면서 자랐는데, 가부장 제도를 통해서 말이죠. 그런데 이런 우리가 하루아침에 자기 중심을 완전히 빼내버리고, “나는 없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나 중심의 이 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구원을 받아야 한다” 라는 생각이, 그게 기적이 아니라면 가능하겠느냐는 겁니다. “나는 구원이 되어야해. 이 자리를 벗어나야해. 이곳은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냐” 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과연 가르친다고 해서 될 일이냐는 말이죠.
대제사장도 연약하기에 !!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나오듯이, “하나님의 성직을 맡은 대제사장들도 연약한 자다” 라고 하는데, 즉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인데 어떻게 흔들릴 수 있겠는가? 옛날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약속 중심으로 옮겼을 거야” 라고,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을 한다는 말이죠.
(히 5: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히 5: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강하지 않은데, 굉장히 약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굉장히 쉽게 생각하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다” 라고 말을 쉽게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인 민족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민족은 따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했던 민족은 ‘이스라엘’ 이라는 민족 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사태파악부터 먼저 제대로 하자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옛날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도대체 그들의 처지가 어떠했는지, 그것을 출애굽기 19장을 통해서 살펴보겠는데, 16절에서 22절입니다. 이 대목은 드디어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인데 말이죠.
(출 19:16)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출 19:17)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섰더니
(출 19: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출 19: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출 19:20)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
(출 19: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신칙하다 申飭하다 [신치카다] 듣기 동사 단단히 타일러서 경계하다.
(출 19:22) 또 여호와께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로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
시내산도 벌벌 떤 여호와 !!
여러분, 이 세상의 어느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는데,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쉽게 부르는데, ‘여호와’, 혹은 ‘야웨’ 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름도 제대로 모르면서 부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직접 만났던 민족이 가졌던 인식은,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서운 분이었다는 겁니다. 그 누구라도 그분 앞에 서면 살 수 없다는 것인데, 돌에 맞아서 죽는다는 말이죠.
여호와 하나님이 강림하시니, 시내산 전체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떨고 있고, 산 짐승들도 산꼭대기로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거룩한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말로만 듣던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 민족은 직접 대면할 수 있었는데, 그때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는 말이죠.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내려오시니, 그야말로 뻘건 연기가 피어오르고 어디선가에서 나팔소리가 들리는데, 누가 불지도 않았는데도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이 거대한 시내산조차도 여호와 하나님을 전혀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사태파악’ !!
이런 하나님 앞에서 추석이 무슨 의미가 있고, 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프간 전쟁이 뭐 그렇게 중요하며, 대학시험이 대수이겠냐는 말이죠.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구원인데, 감히 설 수 없는 분과 영원히 살게 되는 이것이야말로 제일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된 사태파악이라는 겁니다.
이 시내산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데,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인간도 설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강림하신 이 사건, 그것은 오늘날 교회라는 것이 과연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우리에게 그것을 다시금 되묻게 한다는 말이죠.
여러분, 교회가 꼭 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렇게 개척교회를 해야합니까? 그 교회가 정말로 우리를 구원합니까? 그러니 이 사건은 우리의 신앙내용이 어떠해야 하는지, 그것을 근본부터 점검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아, 하나님과 나 사이에 교회가 필요치 않구나” 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는 말이죠.
그때 그 시내산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하, 지금 우리가 만나는 여호와 하나님은 교회 100개를 개척해서 바쳐도 꿈쩍도 아니하시는, 그런 무서운 분이구나” 라는 것을,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말이죠. 그것이 제대로 된 현실파악이라는 겁니다.
교회와 시내산 !!
그런데 요즈음 교인들은 교회까지만 오고, 시내산은 그만 외면을 해버립니다. 시내산에 가야,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야 ‘자기 중심’ 이라는 기둥이 뽑히는데, 그런데 거기까지 가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런데 자기 중심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교회에 와서도 자기 중심, 집에 가서도 자기 중심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집에서 “하나님, 나에게 무엇을 해주었습니까?” 라고 따지던 인간이, 교회에 나와서도 여전히 따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사태파악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시위를 하고 땡깡을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구세주 이외에는 더 귀한 것이 없구나” 라는 것을 제대로 아는, 그렇게 변화가 일어나야 하는데, 그게 사태파악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현실파악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6절에 보면 뭐라고 합니까?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라고 하는데, 어디 이것이 목사들이 머리를 짜내서, “어떻게 하면 교인들에게 제대로 먹혀들까?” 라고 해서, 그렇게 해서 나온 아이디어입니까?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그럴 것 같으면 우리가 믿을 필요가 없는데, 다들 똑같은 인간에게서 나온 것인데, 전혀 믿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죠. 그런 것을 모아놓은 것이 성경말씀이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우리는 돌을 들고 교회의 유리창을 다 깨부수어야 합니다. 그런 것은 다 사기라는 말이죠.
그러니 교회자체가 필요치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주님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교회가 길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길이라는 말이죠. 만약에 교회를 붙들게 되면, 교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자기 중심의 증거가 되고 마는데, 즉 “니 교회가 되고 내 교회가 된다” 라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교회’ 라는 이름이 좀 이상한데, 소유격이 되어서 말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이방인인데, 즉 인간답지 못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이라고 할 때는, 그냥 택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대면한 유일한 민족으로 만들 목적으로 그들을 택했다는 겁니다. 그러니 택한 민족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된다는 말이죠.
이방인은, 상상의 하나님 !!
반면에 이방인은 전혀 그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상상의 하나님 관만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저기 석양이 아름다우니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도 아름답겠지”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낭만적인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시내산이 아닌 카페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리고 “존재 위에 무슨 존재가 있을까?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인데, 따라서 생각하는 어떤 인격자가 계시겠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런 것은 인간들이 다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소주가 두 잔만 들어가면 말이죠(ㅋㅋ). 그것은 철학자들의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칸트처럼 “인간은 도덕적이니까, 따라서 도덕적인 인격을 지니신 어떤 창조주가 계시겠지” 라고 한다든지, 또는 “온 우주가 마치 정교한 시계처럼 잘 돌아가니까, 그것을 만드신 분이 계실 것이 아닌가?” 라고 하는데, 하지만 이러한 상상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했던 여호와 하나님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야고보서 2장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런 하나님은 마귀도 알고 있는 하나님이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엉터리이고 가짜 하나님이라는 말이죠. 그렇다면 진짜 하나님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바로 ‘행함’을 말하는데, 그러면 그 행함은 무엇일까요?
(약 2: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그것은 바로 자기의 아들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행위인데, 어떻게 보면 그것은 살인행위인데 말이죠. 그리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기 민족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민족 편에 섰던 기생 라합의 행위와 같은, 이것이 바로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이란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자기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난 행위라는 말이죠. 그러니 결단코 윤리와 도덕이 아닌데, 물론 ‘믿음+행함’도 아니고 말이죠. 이것은 바로 누구와 대면했느냐고 하는, 바로 그 현실감인데, 신약으로 말하면 “십자가 앞에 서있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약 2:23)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약 2: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약 2: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대제사장과 속죄제사 !!
오늘 본문에 보면, 1절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거기에 보면 ‘속제제사’가 나오는데, 그러면 왜 그것이 나올 수밖에 없는지, 그 사태파악을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현실인데, 이것 말고 다른 현실은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것부터 확실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제사장’이 나오는데, 이 대제사장 제도는 이스라엘이 진짜 하나님을 만났다는 증표로 생겨난 것인데, 이 제도는 속죄를 위한 겁니다. 즉 속죄가 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인간도 여호와 앞에 설 수가 없다는 것인데, 심지어 제사장이라고 해도 말이죠. 그러니까 이 사실을 빼놓은 현실은 참된 현실이 아니라는 겁니다.
(히 5: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그런데 이 세상에서 고생을 즐기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또라이가 아니면 몰라도 말이죠. 그런데 고난이 즐거운 경우도 있는데, 그것이 어떤 경우인고 하니, 엄청난 현실을 파악했을 때라는 겁니다. 물론 남들이 보면 고난이지만, 자기는 너무나도 엄청난 현실을 맞이했기에, 그런 고난은 전혀 고난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때는 고난이 아닌 감사가 나오는데, 그래서 로마서 5장 3절에 보면,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라고 한다는 말이죠.
(롬 5: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성경에 수많은 구절이 있는데, “형제를 사랑하라” 라고 하면, 사람들은 그렇게 노력을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 라고 하면, 이것은 스스로 자기를 학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것을 보았는가?” 라는 겁니다. 즉 환난도 전혀 환난으로 여겨지지 않을 분을 만났느냐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너무나도 무섭고 엄중하신 분을 만나서 그분 앞에서 살게 되면, 그러면 남들이 아무리 고난이라고 간주하는 상황이라도, 그 고난이 그리 큰 고난이나 어려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님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는데, 그게 바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라는 의미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속죄’ 라는 말이 나올 때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다시 사태파악을 해보라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우리가 얼마나 우리가 고생스럽고 힘든지,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과연 속죄함을 받았는지, 그것이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말이죠.
십자가를 아십니까?
여러분, 십자가 안에 무엇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는 유명한 책도 있는데, 그런데 그 책을 보면 정작 십자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에 구약 이야기를 담아놓았는데, 구약이 어떤 고리로서 연결이 되었는지 말이죠. 그렇게 해놓고 정작 제목은 ‘십자가를 아십니까?’ 라고 해놓았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했는고 하니, 우리는 십자가라고 하면 신약에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그것을 마치 사탕을 까서 먹듯이 그렇게 십자가를 입에 집어넣으려고 하는데, 마치 십자가를 비타민을 먹듯이 입에 집어넣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이 되는 겁니까? 십자가 안에는 구약이 들어있는데, 이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된 구약적 배경이 담겨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시편 22편 12절에서 20절을 보겠습니다.
(시 22: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시 22: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시 22: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시 22: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시 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 22: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시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시 22: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 22:20)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시 22:21)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14절에서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라고 하는데, 16절에는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라고 하고, 그리고 19절에 보면,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라고 하는데, 그야말로 말할 수 없이 고난을 받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십자가와 관련이 되는고 하니, 진짜로 엄청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던 어떤 분, 물론 예수님이데 말이죠. 그 예수님이 이러한 험악한 분위기의 인간 세상에 오셔서, 구원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어떤 괴로움과 고난 가운데서도 구원을 놓치지 않는, 그런 모습을 일일이 다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으로 인해서 말도 못하는 고난을 다 받는 것이 메시야가 가는 길이라는 말이죠.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 것인지, 그것을 그러한 핍박과 시련에도 꿀리지 않고 버텨내는 모습, 그것을 십자가에서 다 담아내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 21절을 보면,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아무리 주위에서 고난을 가해와도. 메시야는 하나님을 끝까지 바라보았기 때문에 구원을 요청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아십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끝까지 버티신 것은, 자기의 행동이 의롭다든지, 남들이 보기에 어떻게 대단해 보인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마치 사자처럼 달려들어서 자기를 찢어버리는 행동들이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것은 지금 아버지의 얼굴이 보인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절대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를 찢고 찌르고 십자가에 매달아도, 그렇게 해서 피를 흘리는 고통의 그 긴긴 시간도 아버지의 뜻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데, 지금 제가 예수님을 너무 미화하고 있습니까? 과연 그런 것인가요?
그것은 스데반 집사님도 마찬가지인데, 돌멩이가 자기에게 마구 날아오는데, 그것도 아는 사람들이 던진다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이제 성전은 필요가 없다!” 라는 것인데, 오직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돌들이 날아왔다는 말이죠.
이것이 곧 성령충만 !!
그렇게 자기는 이제 죽는데, 그러면서도 스데반 집사님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되풀이하는데, 왜 그렇습니까? 스데반 집사님은 예수님의 얼굴을 보았는데, 즉 현실파악이 제대로 되어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곧 성령충만인데, 흔히 교회에서 말하는 성령충만과는 다르다는 말이죠.
(행 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행 7:57)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행 7:58)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9)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러니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자기가 알고 있던 세계보다도 더 큰 세계로 인해서 황홀해하는 것인데, 그래서 자기에게 침을 뱉고 뺨을 때리고 옷을 벗기고 찌르고 하는 가운데서도,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별로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니 말이죠. 자기를 마중 나오는 예수님의 얼굴이 진짜 현실이라는 겁니다.
연약함과 속제죄 !!
그러면 과연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참으로 우리는 연약한데, 하지만 우리만이 연약한 것이 아닌데,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대제사장도 연약하다고 합니다. 이 연약성과 더불어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속죄제’ 라는 말이 나온다는 말이죠.
(히 5: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히 5: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러분, 예수님은 속죄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인데, 그러니 자기 자신의 언약함과 속죄제물을 확실하게 연결시키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점을 제대로 아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현실파악이며, 곧 사태파악이라는 겁니다.
이 ‘속죄제’ 라는 것은 죄를 용서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따로 자기 계획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을 죄가 아니라고 여겼는데, 하지만 자기 계획을 가지게 되면 현실파악이 안 되는데, 그래서 죄라는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그 이유를 “너희들이 연약해서 그렇다” 라고 하시는데, 즉 “이 자슥아, 하나님의 계획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너의 계획을 따로 가져서 무엇을 하겠노? 참으로 연약하구나”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속죄제사를 준비하셔서, 그것을 믿으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저는 속죄제사가 필요치 않아요. 십자가는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만든 계획은 반드시 내 손으로 달성합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아, 니가 연약해서 전혀 현실파악이 전혀 되지 않는구나”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보이스, 비 엠비시 !!
우리 인간은 그렇게 나름대로의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선교단체와 같은 곳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소위 ‘비전’ 이라고 하는데, 세상에 이게 말이 됩니까? 무슨 비전이 필요하냐는 겁니다. 그런 비전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구원의 의미도 모르는 사람이고, 대제사장의 존재이유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흔히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라고 하는데, 왜 가져야 하냐는 말이죠. 먼저 우리가 인간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 인간은 아무리 가지지 말라고 해도 태어날 때부터 야망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게 잠재되어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꿈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음흉하게 숨기고 있다는 말이죠.
이유는 단 하나,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
명절이 될 때마다 보는 풍경이 어떠한고 하니, 1라운드가 한 바탕 싸우는 겁니다. 모여서는 “형, 지난번에 왜 전화를 그렇게 했어? 형이면 다가? 엄마한테는 왜 그래?” 라고 하면서 말이죠. 그렇게 해서 삐쳐서 있으면 제사를 지낼 시간에 되면, 엄마가 “야야, 모두들 모여라” 라고 해서, 같이 모여서 제사를 지내고, 그러면서 2라운드에 들어가서 고스톱을 친다는 말이죠. 그러다가 이제 헤어질 때가 되면 “형님, 잘 가세요” 라고 하는데, 그게 3라운드라는 겁니다.
이게 무엇인고 하니까, 왜 만나서 싸웁니까? “너의 비전이 따로 있고, 내 비전이 따로 있다” 라는 것인데, 즉 “형이 무엇인데 나의 비전을 건드리는가? 형이 보증을 서는 바람에 지금 집안이 힘들어서, 내가 계획대로 하지 못했잖아” 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비전과 비전의 싸움이라는 말이죠.
이것이 현실의 튀어나온 면이라고 하면, 그렇다면 현실의 잠재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실제적인 현실인데 말이죠. 즉 “왜 그럴 수밖에 없는가? 왜 모이면 싸우는가? 왜 자기 자랑밖에 할 수 없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연약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죠.
지금 제가 여러분에게 완벽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왜 필요하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느냐는 말이죠. 그것은 연약함을 좀 알라는 것인데, 즉 주제파악을 하라는 겁니다. 교회에 나왔으니 복을 줄 것이라는 망상은 다 버리고, 교회에 나왔으면 주제파악이나 하고 돌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아하, 교회가 아닌 예수님이구나. 그분이 대제사장이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죠.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신 분이 그야말로 보물임을 알고,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가 아무리 대그룹의 회장이라고 해도 말이죠. 자기 사업을 자랑하지 않고, 자기 비전을 자랑하지 않는, 그게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이방인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
그러니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십자가라는 참된 현실을 파악해주는 사건이 터졌음을 인정하고,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불렀던 찬송가 147장 2절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나오는데,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힘입어 교만한 맘을 버리네” 라고 말이죠.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르친다고 될 문제입니까? 왜 우리가 십자가에 힘도 없이 돌아가신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자랑하면 안 됩니까?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사람들이 전혀 몰랐던 현실,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어했던 현실, 즉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그 어떤 인간도 주님 앞에서 설 수 없다고 하는 것, 그것을 그분은 십자가로서 다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인간이라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 이것이 진짜 현실이란 말이죠. 그러니 우리는 이 현실 외에 다른 현실을 생각하지 말자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을 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이외에는 없다는 말이죠.
속죄제물이 있기에 !!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실생활에 적용을 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고 살기 때문인데,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말이죠. 사업이 부도가 나는 것도, 암에 걸리는 것도, 심지어 돌에 얻어맞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그렇게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모든 것을 영접하시는, 그런 하나님 아버지가 엄연히 살아있다는 것인데,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온 몸으로 모두 다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죽어도 괜찮다는 것인데, 그런 속죄제물이 있기에 말이죠.
그러니 우리를 보고 완벽해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속죄제물이 있는 이상 너의 죄는 용서되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시편 25편에 나오는데, 즉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라고 말이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인데, 그래서 저는 ‘십자가를 아십니까?’ 책을 쓰면서 구약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시 25:18)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구약시절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믿지 않지만, 사도바울은 그것을 믿었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았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도 이제 제대로 된 현실을 파악해서, 사소하고 작은 것이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교회에만 왔다가 도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해주시고, 집에 있던 교회에 있던, 명절이든 아니든 간에, 그 어디에 있던지 간에 속제제물이 되신 예수님 외에는 더 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하면서 살아가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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