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연약한 인간 (히 4: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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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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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찾아오신 분 !!
이 세상의 종교는 사람이 찾아가는 형태인데, 그러나 복음은 천국에서 어떤 분이 파견되어서, 즉 어떤 분이 미리 마중을 나와서 우리를 데리고 가는 방식을 취한다는 말이죠. 즉 먼저 찾아오신 분의 인도를 받아서 가는데, 그러니 홀로 가는 길이 아니라 어떤 분이 동행을 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인데, 우리가 홀로 찾아가는 게 아니라, 안내자가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말이죠.
제가 여러분에게 듣기 좋으라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이와 똑같이 일이 일어납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 지역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거기서 아브라함은 몇 명이 되지도 않는 군사를 데리고 큰 승리를 거두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서 누군가를 만나는데, 아브라함이 ‘멜기세덱’ 이란 이름을 가진 제사장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먼저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해줍니다. 그리고 난 뒤에 아브라함이 알게 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스케줄을 다 잡아놓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번 전쟁에서 자기가 승리한 것은 전혀 자신의 노력과 애씀이 아니란 말이죠. 그분이 자기를 위해서 기도함으로서 자신에게 승리가 왔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 이란 분은 어떤 분인고 하니,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지상이 아닌 하늘에서 사시는 분처럼 이 지상에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창 14: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창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리고 그분이 자기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했는데, 그러면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라는 겁니다. 하늘의 복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고 하니, 그것은 우리가 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복을 가지고 계시는 그분이 일부러 우리를 찾아와서, 우리에게 복을 넘겨주어서 얻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적으로 그분의 능력덕분인데, 그래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되면, 우리 쪽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해야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겁니다. 바로 이 ‘없음’을 두고 성경에서 뭐라고 하는고 하면, ‘믿는다’ 라고 하고, 또는 ‘의지한다’ 라고 하기도 하고, 오늘 본문 식으로 한다면, ‘붙든다’ 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없으니까 그쪽을 붙든다는 말이죠.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굳게 잡을지어다 !!
오늘 본문 14절 끝에 보면,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라고 하는데, 이 표현이 참 재미가 있지요? 그러니까 이미 와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추가적으로 보탤 필요가 없이, 붙잡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추가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겁니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그것은 3장 14절도 마찬가지인데,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복음은 우리가 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잡아야 하는지, 그것만을 이야기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잡아서 뭘 하지?” 라고 하면서 소유하려고 하면 안 되는데, “아하, 저것이구나!” 라고 하면서 잡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겁니다.
(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14. 우리가 처음의 확신을 끝까지 지켜 나가면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공동번역)
14.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 가진 확신을 끝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함께 누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표준새번역)
14. 이는 우리가 처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굳게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14. We have come to share in Christ if we hold firmly till the end the confidence we had at first.(NIV)
14. For we are made partakers of Christ, if we hold the beginning of our confidence stedfast unto the end;(KJV)
14. For we have become partakers of Christ, if we hold fast the beginning of our assurance firm until the end;
만약에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면 깨어지고 무너지기 쉬운데, 그런데 자기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 다음에는 자기 것이 없으니, 자기 것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붙잡으려고 한다는 말이죠. 여러분, 타잔을 알지요? 그가 이쪽 골짜기에서 저쪽 골짜기를 건너갈 때에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이미 내려와 있는 넝쿨을 붙잡고 건너간다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붙잡을래?” 라고 하시면서 물으시는데,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 것을 쌓기에 매진한다고 하면, 자기의 명예나 자존심 등을 말이죠. 사실은 그게 우리의 주특기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소유하려고 하면, 그것이 어느 순간에 누구의 손에 의해서 박살나고 무너질지 모르는데, 그래서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심적인 부담을 주고 힘들게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 오직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을, 그 마중을 나오신 분을 붙잡으면 된다는 겁니다.
무엇을 굳게 잡아야 하는가?
오늘 본문 15절에 보면, ‘시험’ 이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가 아직도 붙잡을 분을 계속해서 붙잡고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을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한 번 점검을 해보자는 겁니다. 14절을 다시 보겠는데, 15절까지입니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4. Therefore, since we have a great high priest who has gone through the heavens, Jesus the Son of God, let us hold firmly to the faith we profess.
14. Seeing then that we have a great high priest, that is passed into the heavens, Jesus the Son of God, let us hold fast our profession.
14. Since then we have a great high priest who has passed through the heavens, Jesus the Son of God, let us hold fast our confession.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니 무엇을 붙잡는다는 겁니까? 14절에 “도리를 굳게 잡아라”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 도리 안에는 무엇이 꼭 포함되어야 합니까? 그것도 14절에 나오는데, 이게 승천에 대한 내용인데 말이죠. 즉 “구름을 타고 승천하신 분을 붙잡는가?” 라는 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다는 겁니다.
어떤 분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그것을 아직도 자기의 행복으로 여기고 붙잡고 있는지, 그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다는 말이죠. 구름을 타고 올라갔다고 하니 혹시 손오공이 생각나는지 모르겠는데(ㅋㅋ), 그러면 여기서 사도행전 1장을 보겠습니다.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행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왜 홀로 구름을 타고 하늘로 가셨는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과 40일 동안 잘 지내다가, 그만 갑자기 승천을 하고 맙니다. 제자들과 같이 계시면서 목회를 하시고 전도여행을 하시면 되는데, 그런데 왜 먼저 홀로 하늘로 가버리시는 겁니까? 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인데, 여기서 데살로니가후서 1장 7절에서 9절을 보겠습니다.
(살후 1:7)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살후 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살후 1:9)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하늘로부터 나타나서 심판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인데, 그러니 본래의 위치를 취하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심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너희들은 내가 천상의 존재인 줄을 왜 몰랐느냐? 왜 나를 붙들지 않았는가? 왜 나를 믿지 않았는가?” 라는 겁니다. 그렇게 시비를 걸어서 심판을 하시겠다는 말이죠.
그러면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과 17절을 보겠습니다.
(살전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살전 4: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니까 첫 번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참으로 초라하게 오셨다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뺨이나 얻어맞고 옷이나 빼앗기고, 그러면서도 큰소리도 치지를 못하고 순한 양처럼 잡히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았습니까? 광신자, 사이비 교주, 정신병자, 무가치한 존재 등등, 그렇게 여겼다는 말이죠.
그런데 그 초라한 분이 여기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 보면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하늘과 온 세상의 주가 되셔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강림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이후에는 살아남은 자도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져서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이 얼마나 엄청난 반전입니까?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보통 일이 아닌데, 그러니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너희들이 왜 평소에 예수님의 시시하게 보았느냐?” 라고 하신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을 시시하게 믿었느냐고 하신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붙잡아라 !!
설교를 다시 하겠는데, 하나님께서는 ‘붙잡아라’ 라고 하셨는데,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가 생각해보고 붙잡을 만한 인물이 될 경우에만 붙잡아요. 돈이나 좀 있고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사람, 즉 자기에게 이용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만 붙잡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왜 붙잡습니까? 붙잡지를 않는데, 왜냐하면 붙잡을 가치가 전혀 없기 때문에 말이죠. 그분을 붙잡는다고 해서 돈이 생깁니까? 사업이 잘 됩니까? 그렇지 않아도 바쁘고 할 일도 많은데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붙잡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는 아무나 붙잡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만을 붙잡는데, 예수님은 그럴 가치가 없다고 단정했기 때문에 붙잡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다. 내가 부활이다. 그러니 나만 붙잡아라” 라고 하시는데,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붙잡지 않는다는 말이죠.
예수님을 붙잡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붙잡아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것은 쉽다고 하면 너무나도 쉬운 일인데, 유치원 아이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붙잡기보다는 그저 기도해서 복을 받기만 바라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뜻은 이것인데, “모든 것이 없다고 여기고 붙잡기만 하라” 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님만 붙잡기에는 우리는 아직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와 미련이 너무나도 크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귀하다. 나는 대단하다. 나는 훌륭하다. 남한테 밑지기 않는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 자만심과 자존심이 우리 마음속에 태산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면, 우리는 전혀 예수님을 붙잡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에게 해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말이죠. 대학에 간 것도 자기가 열심히 공부해서 갔고, 그리고 교회에는 가면 설교시간마다 돈만 내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뭐라고 하는고 하니, 성경말씀은 참으로 얄밉게도 시험, 즉 ‘테스트’ 라고 합니다. 수능시험 날짜는 딱 하루로 정해져 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테스트는 매일 같이 이루어진다는 말이죠. 그 시험은 어려운 수학 방정식을 푼다든지, 혹은 행정당국에 허가를 따낸다든지, 혹은 정수기를 한 대 판매한다든지, 그런 어려운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너는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퀴즈는 항상 똑같은데, “너는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직도 시시하게 보는가?” 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닙니다. 저는 대단한 분으로 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래, 그러면 내일 또 보자” 라고 하면서, 다음날이 되면 또 묻습니다. “너는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라고 말이죠. 그러면 “저는 참 저에게 필요하고 고귀한 분으로 봅니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래, 그럼 내일 또 보자” 라고 하신다는 말이죠.
그 다음날 되자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데, 그래도 하나님의 질문은 여전합니다. “너는 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하면, 드디어 “저는 원망하고 싶습니다. 왜 내 뜻대로 해주지 않는 겁니까? 나는 이제 예수가 과연 나에게 꼭 필요한 분인지 의심이 듭니다” 라고 하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그만 탈락이라는 겁니다.
유대인들이나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추종했다가 나중에는 돌아서고 말았는데,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쯤 하늘에서 나를 도와주어야 하는데, 왜 연락이 없지?” 라고 하면서, 자기를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표적과 이적을 보여달라고 했다는 말이죠.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맥없이 무너졌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그때 어떤 백부장은 도리어 그러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무너지는 것을 보니까, 저분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라고 고백했다는 말이죠. 그렇게 볼 때, “너희가 믿느냐?” 라는 문제는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데, 즉 “너희가 정말로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가?” 라는 겁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
그러면 믿는 문제가 왜 어려운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유명한 내용이 나오는데, 그런데 그 뒷부분에 보면 아브라함과 지옥에 간 부자 사이에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앞부분도 중요하지만 뒷부분도 역시나 중요합니다. 앞부분은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지옥에 갔다는 내용인데, 뒷부분에 나오는 그 다음의 내용도 굉장히 중요하다는 말이죠.
뒷부분의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 부자는 이미 지옥에 와버렸는데, 그러니 이왕 자신은 지옥에 와버린 신세가 되었지만, 아직까지 동생 5명이 세상에 그대로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자는 자기 동생들이 걱정이 되어서 어떻게 했는고 하니, 그 다음의 내용을 여러분이 모른다고 간주하고, 지금 보니 실제로 모르는 것 같은데 말이죠(ㅋㅋ).
만약에 여러분에게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동생 5명이 있다고 하면, 그들에게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믿게 하겠습니까? 그들이 지옥에 오지 않도록 말이죠. 먼저 부자의 방법을 생각해보겠는데, 물론 틀린 방법이지만 말이죠. 부자는 자기 나름대로 동생들이 자기처럼 지옥에 오지 않는 방도를 생각해내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죽은 거지 나사로를 다시 세상으로 살려 돌려보내서, 그 동생들에게 전도를 하도록 하는 겁니다. “쨘, 내가 다시 살았지롱. 천국에 가봤지롱. 그런데 너희 형님은 지옥에 갔는데, 거기에는 물도 없고 엄청 고생을 많이 한단다. 그래서 내가 너희 형님의 부탁으로 이렇게 이 세상에 다시 나왔는데, 너희들은 그곳에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라고 말이죠.
여러분, 어떻습니까? 부자의 방법이 괜찮습니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래서 눈에 보인다면, 이렇게 되면 거지 나사로는 그 순간부터는 거지가 아닌데, 팔자를 고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죠. 여기저기 다니면서 간증집회를 할 것이고, 사례도 두둑하게 받을 것이고, 그러면 결국 부자 못지 않게 호화롭게 살겠죠. 그러면 사람들의 희망을 채워줄 영웅적인 인물이 되는데, 즉 거지에서 부자로 변신하는데 성공한 인물이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부자의 제안은 아브라함에게 거부를 당했는데,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기적으로 여기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도리어 대단하고 신기한 체험을 한 사람으로 여겨져서 대환영을 받게 되면, 더 이상 고난은 사라져 버리는데, 그렇다면 시험의 본래 취지가 그만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이 과연 예수님을 믿는 표식이냐는 겁니다. 예수님을 머리를 둘 곳도 없었는데, 누구든지 예수님을 보면 낙담을 하게 되어있다는 말이죠.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낙담할 뻔한 환경으로 가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아까 예배를 시작하면서 교독문 38(사42장)번을 보았는데, 거기에 보면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라고 되어있다는 말이죠.
예수님은 낙담하지 아니했다는 것인데, 누가 봐도 낙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런 성품은 거지 나사로도 마찬가지인데, 이것이 곧 믿음이라는 말이죠. 자기가 믿는 대상이 어떻게 달라져도, 그것을 바라보면서 낙담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 다음은 우리 차례인데, 우리가 거지 나사로를 얕잡아 보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는 하나님을 언제나 바라보았던 사람인데, 그게 자기 이름의 의미이기도 하고 말이죠. 이것이 아무나 가지는 마음씨가 아니라는 겁니다. 눈이 있고 하늘이 있으면, 누구나 하늘을 쳐다보게 됩니까? 그렇지는 않다는 겁니다. 마음을 먹고 쳐다볼 때만 보게 되는 것이 하늘인데 말이죠.
그 누구라도 막상 자기가 거지가 되어보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마련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하나님을 원망해도 다른 사람들도 당연하게 여길 정도인데, 하지만 거지 나사로는 놀랍게도 원망하지 않았는데, 즉 낙담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천사가 와서 하늘로 데리고 갔다는 말이죠.
그런 내용을 우리가 잘 아는데, 그런데 문제는 정말 우리가 거지 나사로의 마음과 같으냐는 겁니다. 자기가 거지가 되어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붙잡을 수가 있느냐는 말이죠. 그 하나님의 시험에 우리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고 붙들고 있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것은 교회가 크다고 안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순전히 개인에 관한 문제입니다. 승천하신 분이 심판주가 되셔서 온다는 사실을 붙잡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오신다. 왜냐하면, 구름을 타고 올라가셨거든” 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목사님,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 앞에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나야 그렇지 않습니까?”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말이죠. 그 당시에는 예수님이 눈에 보였으니 붙잡지만, 오늘날은 보이지 않으니 그렇게 붙잡는다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복음을 전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은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도록 조치를 해놓았다는 말이죠. 즉 “너희의 말을 믿는 자는 곧 내 말을 믿는 것이고, 그리고 내 말을 믿는 자는 곧 아버지의 말을 믿는 자다” 라는 방정식을 만들어놓았다는 겁니다. 따라서 직접 예수님을 보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보낸 자의 증언을 듣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고, 또한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된다는 것이죠.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다시 해봅시다. 부자의 동생들이 죽지 않고 아직 세상에서 펄펄 살아있는데, 그런데 나사로가 거지가 되어서 가봐야 믿지 않는데, 형이나 동생들이나 똑같다는 겁니다. “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라고 해도, “기절을 했겠지” 라고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말이죠. “천국에 갔다왔습니다” 라고 해도, “우리도 그런 사람들을 많이 봤어” 라고 하면서 역시 무시한다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의 형님이 지금 지옥에 가있습니다” 라고 해도,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눈으로 봐야 믿지, 너의 말은 믿지 못하겠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붙잡아야 합니다” 라고 해도, “너나 잘 붙잡아라. 우리는 붙잡을 마음이 전혀 없다” 라고 한다는 말이죠. 그러니 믿음은 이처럼 소중하고도 귀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 해결하지 않은 문제가 있지요. 그래서 여기서 다시 멜기세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정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7장 3절입니다.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없고, 없고, 없고 !!
여기에 보면, ‘없고’, ‘없고’ 라는 것이 계속해서 나오죠. 즉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 봐서는 구체적으로 얻을 것이 없는 분이란 겁니다. 세상적인 관계는 다 끊어져 있다는 말이죠. 행복도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고, 보람도 하늘에서 주어진 것인데, 그러니 행복과 보람을 세상의 것으로 조립하고자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숨을 쉬는 것도 그분이 주시는 능력으로 쉬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말이죠.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서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15절입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에 보면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라고 하는데, 말이 좀 어렵죠? 우리는 그야말로 연약하기가 짝이 없는데,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것을 불쌍히 여겨주신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눈만 뜨면 사람을 의식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한다는 말이죠.
우리는 극복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지만,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제대로 극복하지를 못하는데,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 더 일이 꼬이고 극복이 안 된다는 겁니다. 모든 일을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데, 하지만 전혀 되지 않는데, 오히려 잊어버리면 해결이 되고 말이죠. 그럴 정도로 우리는 연약하다는 겁니다.
나는 직업을 바꾸었다. 거지로 !!
어제 십자가 마을에서 어느 목사님과 논쟁한 것이 그것인데, “우리는 연약하니 붙잡기만 하세요” 라고 했는데, 그 목사님은 뭐라고 하시는고 하니까, “우리가 사랑을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라고 한다는 겁니다. 정말로 그러합니까? 우리는 연약한데, 거지 나사로가 무엇을 했습니까? 십일조를 했습니까? 전도를 했습니까? 그냥 죽어서 천사가 와서 모셔갔다는 말이죠. 연약하니까 말이죠.
그러니 우리가 어느 정도로 연약해져야 하는고 하니, “나는 직업을 바꾸었다. 거지로!” 라고 할 정도로만 낮아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붙잡지 않으려고 해도 붙잡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오늘도 붙잡고 내일도 붙잡게 된다는 말이죠. 왜냐하면 자기는 거지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가진 게 없기 때문에 말이죠.
비로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50평이라도, 그런 것과 전혀 상관없이 거지라는 겁니다. 만약에 지금 우리가 지옥에 와있다고 하면, 아무런 다른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냥 붙잡기만 할 것인데, 바로 그런 마음이 거지 나사로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와 같은 신세의 사람을 앞서 보냈는데, 그가 곧 거지 나사로라는 말이죠. 사람들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대조하면서 “나는 거지보다는 부자 쪽이야” 라고 생각하고 한 표를 던졌는데, 그런데 거지가 천당에 가고 부자가 지옥에 갔다는 겁니다.
그 다음은 우리 차례인데, 우리가 비록 지금 당장에 바깥에서 잘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의 마음 씀씀이만큼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여겨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알기는 개코로 알아? 가지기는 무엇을 가졌단 말인가? 권력은 뭉개지기 마련이고, 자존심도 역시 그렇구나” 라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는 연약해야 한다는 말이죠.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4장 16절을 보겠습니다.
(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여기에 보면, ‘은혜의 보좌’ 라고 하는데, 깨놓고 말해서 ‘공짜의 보좌’ 라는 겁니다. 은혜가 하나님의 선물인데, 그러니 선물의 잔치마당이라는 말이죠. 거기에서 우리는 붙잡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분은 하늘에 계시던 분인데, 비록 이 땅에는 초라하게 오셨지만 말이죠. 하지만 그분은 원래는 그런 분이 아닌데, 우리를 마중하려고 그렇게 나오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누구를 붙잡기를 원하십니까?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입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입니까? 만약에 자기 자신이라고 하면 우리는 부자 꼴이 나고 마는데, 그러니 우리가 반드시 붙잡아야만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분은 따로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매일같이 그분만을 붙잡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이란 이처럼 간단한데 왜 사람들은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천국과 지옥은 이렇게 간단한데, 그런데 왜 믿지를 않습니까? 이제부터 저희들은 더욱 더 간단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게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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