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1-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에서 사도바울의 말이 나옵니다. 여기에 “그리스도 예수” 또는 “예수”라는 말이 나와 있지요. 예수는 어떤 분입니다. 인물인데 이 분을 그 당시에서 멀찍이 떨어진 지금, 2천년이 지난 지금에 우리가 예수, 예수 하지만 막상 그 시기에 당사자 유대인들은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예수를 안 믿었어요. 참 이상하지요? 그 당시 사람들은 눈으로 보고도 안 믿었는데 우리가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 하니 그 믿는다는 자체가 구라가 될 소지가 굉장히 높은 겁니다. 직접 사람을 안 보니 믿을 만하다 하지 막상 봤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하고 이야기를 하지 마시고요, 그 당시 사람들은 왜 예수를 안 믿었는가를 생각해 봐야 돼요.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안 믿은 이유가 하나님을 믿고 싶었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예수를 안 믿게 되어 있고 하나님을 안 믿어야 예수를 믿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그 당시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그 내용 안에 예수님이 하는 그 모든 이야기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고, 이것이 되지를 않아요.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예수 안 믿을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사람들은 그냥 아는 것 새로운 것 다 집어넣으면 다 자기 것 되는 줄 알고 있어요. 하나님 집어넣으면 하나님도 내 것이 되고 예수님도 집어넣으면 예수님도 내 것이 되고 교회 집어넣으면 교회도 자기 것이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만큼 본인이 보기에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일 뿐 하나님이 자기에 대해서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에 그런 현상들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끼어들 마음이 전혀 없어요. 하나님 믿으니 이제 예수도 믿자, 여기에 예수님이 동의를 안 해준다니까요. “어디서 함부로, 어디서 함부로 나를 거론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 하나님 믿는 사람들 중에 누가 있는가, 열 두 제자 있었습니다. 열두 제자가 예수님 따라다니면서 예수를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식사도 같이 했고 일박 이일정도가 아닙니다. 삼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습니다만 예수님을 믿지는 않고 예수님을 소유하려고 했지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같아, 이렇게 예수님을 소유하려 했지 절대로 예수님을 안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에게 뭔가 줄 수 있다고 여겼는데 나중에 예수님이 제자들이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제공하지를 못했어요.
그러면 아무 쓸모없는 겁니다. 여러분도 교회 나와서 신앙생활 하다가 여러분이 언제 자신의 본색이 들통나느냐하면, 예수 실컷 믿고 교회 수십 년 다니고 직분 받아도 예수가 아무 도움도 안 주고 예수가 필요 없다고 느끼는 그 순간 여러분은 드디어 예수 믿을 거냐 말거냐의 기로에 서는 순간입니다. 제발 그런 순간이 오기를 바랍니다. 지난 수요일에 설교 중에 이런 이야기했거든요. 사람은 피부로 둘러싸여 있는데 어떤 사람은 가시에 찔려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가시에 찔리면 피부가 절개가 되고 찢어집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피부 안으로 병균이 침입해서 그 동안 피부 때문에 건강하던 사람이 병들 수도 죽을 수도 있잖아요. 예수그리스도는 병균 같은 겁니다. 그냥 들어오게 되면 우리가 이미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강렬하게 반발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피부를 찢어버립니다. 찢게 되면 거기서 우리의 속살이 공개되고 그동안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속살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침투하게 되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죄를 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쉽게 풀이한 가사가 조금 전에 불렀던 찬송가 187장 3절 가사입니다.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하시네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하시네
불쌍한 사람들아 오라 하시네
너희 죄 사해주사 너희 죄 사해주사
기억 아니하시네 기억 아니하시네
“기억 아니하시네, 기억 아니하시네.” 다른 말로 하면 “정죄함이 없나니 정죄함이 없나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가 평생에 어떤 죄를 지어도 기억 아니 하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정죄함이 없는 거예요. 이렇게 좋은 이야기를 예수님이 했어요. 예수님이 이런 취지로 이야기를 했는데 왜 제자들과 그 당시의 예수님을 목격했던 유대인들은 이 좋은 예수님을 왜 안 믿었을까요? 죄가 있어야 하지요, 죄가 없는데요. 죄가 있어야 용서받는 것이 즐거운데 죄가 없는데 무슨 용서가 필요합니까? 여러분, 매일 같이 죄짓습니까? 아니면 매일같이 착실하게 살아갑니까?
둘 중에 어느 쪽입니까? 매일같이 착실하게 살아가지요. 매일같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 우애 있고 하나님 잘 섬기고, 열심히 살지요. 하나님 잘 섬기는 것이 죄가 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지요. 그러니까 정죄함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사람의 죄를 기억하는 거예요. 죄 용서 받는 것 대신 우리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믿되 예수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본문 말씀 1절에 정죄함이 없다는 참 기쁜 소식, 복음이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 조건이 뭐냐,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만 정죄함이 없다,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조건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만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고 예수 밖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말로 하면 정죄함이 있다는 겁니다. “나는 너 정죄할거야.”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네가 지은 모든 죄 기억할거야. 반드시 놓치지 않고 기억해서 마지막 심판 날에 너에게 벌 줄 거야.”라고 주님께서 부득부득 이를 갈고 계십니다.
“반드시 너의 죄를 기억해서 발췌하고 말리라. 너는 너의 죄를 잊는다고 해도 나는 너의 죄를 잊을 수가 없어.”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이 예수 안이라는 것이 일종의 캡슐같은 것인데 이 예수 안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 당시 하나님 잘 섬긴다는 유대인들은 예수 안에 침투하지 못하고 예수 밖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주 열심히 잘 섬겼습니다. 어딜 감히 예수 안에 들어옵니까? 어딜 감히 예수 안에 들어와서 정죄함이 없나니, 라는 이 행운을 누립니까?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 밖의 인간을 안으로 집어넣는데 그 과정과 절차가 어떤 것인지 우리가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다. 그래야 내가 예수 믿는지 하나님 믿는지 구분된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었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믿을 이유도 없었고 믿을 필요가 없었기에. 그보다 더 솔직한 것은 예수가 하는 말이 도무지 믿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2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이 예수님의 말을 순순히 받아준다 하니 굉장히 수상하지요.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 믿으세요.”라고 전한 것이 아니고 특정 인물을 전했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예수라는 분이 계신데 그분 믿지 아니하면 여러분은 지옥 갑니다.” 그 이야기를 했어요.
성전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돈을 원했던 사람이에요. 신이 있다면 자비를 베풀 것이고 나에게 생계비를 줄 것이다, 할 때 베드로와 요한이 이랬습니다.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 너는 금이나 은을 원하지만 난 못주겠다. 나는 한 분만 소개한다. 주 예수를 믿어라.” 똑같은 이야기를 오늘날 교회에서 했을 때 교인이 몇 명이나 남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소망이 있고 기도하고 싶은 것이 있고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원하기에 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원하기 때문에 줄 수가 없습니다.” 이럴 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받을 수가 없다고 했는데 그 교회에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없지요.
사도들은 그렇게 전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라고 했어요. 이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 신을 원하지 자기하고 똑같이 생긴 인간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것을 알면서도 인간을 원했어요. “예수하고 당신하고 차이가 나는데 당신은 아니야. 당신은 가위표(×)야. 예수님은 오(O)야.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분이야. 하나님이 정하신 분을 믿으면 여러분도 예수님 따라서 구원 받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사도들이 했다 그 말입니다.
여러분이 <마지막 잎새>라는 단편소설을 본 적이 있을 거예요. 중환자실의 어떤 사람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계절인데 창밖에 보이는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집니다. 그걸 보면서 환자가 생각합니다. ‘저 떨어지는 잎 새처럼 나도 곧 죽겠지. 마지막 잎 새 하나 떨어지는 그 순간 나도 숨을 거둘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진짜 나뭇잎이 하나 둘 떨어져요. 잎 새가 마지막으로 한 개 남았어요. 그런데 도무지 떨어질 생각을 안 하네요. 왜냐하면 스카치 테입으로 붙여놨거든요. 저게 떨어져야 죽는데 안 떨어지니까 그것 떨어지는 것 보고 죽으려고 자기도 악착같이 사는 거예요. 그러다 살아나서 퇴원했어요. 그게 마지막 잎 새에요.
이 단편소설의 주제는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살리는 희망을 신봉한다는 겁니다. 내가 현재 있는 이 세계, 내가 구상한 이 세계를 하나님이든 예수든 도움 주는 분은 누구든지 좋다는 말이지요. ‘어쨌든 나를 살려내라. 그러면 나는 그 사람을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라는 생각이 모든 인간,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의 생각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하나의 희망이었고 그 당시 유대인들도 동일하게 이 마음품고 살아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밖에서 일어나는 질서입니다. 그것을 저는 질서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 2절에서는 뭐냐,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사람들이 법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질서라고 표현을 바꿉니다. 질서라고 하는 취지가 있어요. 그것은 내가 정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정하지 않았는데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먼저 있었던 그 질서, 그 질서 안에서 내가 태어났으니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스펀지가 물을 빨아먹듯이 기존질서를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겁니다. 모든 가정, 사회, 직장의 교육, 지금 우리가 기존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훅 하고 빨아들이고 흡수하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질서가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겁니다. 그 죄와 사망의 법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뭐냐, ‘하나님을 믿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여러분의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믿으면 죽어서 천국 갑니다.” 이게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여러분의 죄를 용서합니다.” 이것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울려나오는 메아리고 악마가 그 배후에서 사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네 육신은 어쨌든지 살아남아야 하고 네가 죽으면 예수도 하나님도 아무짝도 소용없다. 우선 네가 살아야 하고 네가 중요하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예수고 하나님이다. 네가 지옥 간다면 천국은 별로야. 천국보다 네가 지옥 안 가는 것이 중요해.” 이렇게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죄송합니다만 성경은 우리 자신보다 천국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천국 가는 우리 자신보다 주님은 천국을 더 중요시 여깁니다. 이것을 우리가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가 용납하지 않지요. 왜냐, 우리는 강력한 질서,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질서가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우리는 “천국보다 천국 가는 내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만은 똑바로 이야기합시다, 하나님. 이것은 내가 숨길 수 없는 솔직한 내 심정입니다. 수십 년 교회 다녀도 저는 이 마음 변할 마음이 없습니다. 추호도 변하지 않을 겁니다. 예수보다 내가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가 만든 세상 안에, 내 안에 그대로 있으면 바깥에서 죄용서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정죄함이 없나니, 그것을 원합니다.
기존에 있는 나의 자리, 나의 세계는 그냥 유지하면서 이런 나를 주께서 용서해주기를 원하거든요.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처음 만난 제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인상이었습니다. 이미지고 느낌이었습니다. 좋은 분이다, 이용가치 있다, 함께 다니면 좋은 낙을 볼 것이다, 희망이 있을 것이다, 뭔가 마지막 잎 새만큼은 떨어지지 않겠지, 라고 여겼습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그 마지막 잎 새 떨어졌습니다. 베드로는 본색을 드러냈고 자기는 저주한다고 모든 것을 정리했습니다. 맥없이 사라진 예수를 믿느니 아직 팔팔하게 살아 있는 나를 믿는 것이 나에게 유익이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그리고 자기는 옛날 그동안 예수를 따르면서 허송했던 세월을 보상받으려는 듯이 고기를 잡으러 간 겁니다. ‘뒤로 돌아 갓!’ 한 거지요. 그동안 예수를 믿었다고요? 천만의 말씀, 예수님 곁에 그냥 붙어살았지요. 예수님 곁에 바짝, 그냥 붙은 것이 아니고 바짝 붙어살았어요. 거기다 혜택도 많이 받았습니다. 하지만 혜택이 떨어지자 이제는 차이기 전에 찬다는 원칙에 의해서 자기가 차버린 거예요. 우리의 마음자세가 늘 상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나오는 것은 관성의 법칙 때문이지요. 늘 해 왔기에 그냥 출석하는 거예요.
우리는 베드로의 인생을 거치지 아니하면 주님에게 돌봐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기피하지 맙시다. 우회하지 맙시다. 도리어 그대로 골인합시다. 모든 것을 그냥 다 올인 해야 돼요. 사도바울이 정죄함이 없다고 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죄를 기억 지 아니한다고 했을 때 엄청난 조건을 달았어요.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 말을 풀이하면서 “그동안 여러분은 죄와 사망의 질서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예수를 안 믿는 것은 너무나 정상적인 것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본 거예요.
그렇다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살았던 그 사람들, 물론 제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을 언급했습니다만 오늘날에도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서도 교회 잘 다니고 유대인처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어떤 유형으로 신앙생활을 표현하고 있는가를 말씀드리면 레오 10세라는 교황이 있었습니다. 이태리 로마에 바티칸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레오 10세가 그곳에 큰 성당을 짓기로 했어요. 그게 성 베드로 성당입니다. 성자인 베드로를 기념하는 성당을 베드로 무덤위에 짓겠다고 한 겁니다. 돈이 엄청 들겠지요.
그 자금을 대기 위해서 면죄부라는 것을 발부했습니다. 죄를 면해주는 면죄부를 발부하고 그것은 로또 판매처처럼 가까운 성당에서 살 수 있게 했습니다. 돈 주고 그걸 사면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물론 많은 돈을 주고 많이 사면 죄가 많이 용서되었겠지요. 1517년에 루터라는 사람이 면죄부는 사기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라고 낱낱이 적은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문에 붙여서 그 사기를 까발렸어요. 물론 요새 같으면 인터넷으로 막 유포가 되었겠지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돈을 주면 죄를 사해주는 서류가 있다는 소식, 돈만 주면 누구나 구입할 수 있다는 그것이 루터가 나설 것이 아니고 사실은 성당 다니는 신자들이 그러한 교황의 선언에 반대를 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성경에 나와 있다면 루터라는 신부가 나설 것이 아니고 일반신자들이 그동안 성경을 이미 알고 있기에 거기에 대해서 반대를 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반대는커녕 오히려 환영을 했고 루터가 그렇게 외칠 때 덴마크나 독일이나 스웨덴 쪽에서 환영하고 스위스의 칼빈 쪽에서 환영했지 나머지 나라들, 스페인이나 프랑스 쪽에서는 오히려 루터에 대해서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반대를 했습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십일조 한다고 해서 복 받는 것이 아니고 신약의 예수를 믿어서 복 받습니다.”라고 했더니 교인들이 그것을 싫어하는 거예요. 죄와 사망의 법이 진공상태가 아니에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내가 그림을 그리는 거예요. 비올 때 붓 한 송이로 거리의 풍경을 그리면 초콜릿 빛깔이 나온다는 유명한 노래가 있지요. 그처럼 비가 올 때는 채색화처럼 바깥 풍경이 느껴지는 겁니다. 비올 때 그걸 느끼지만 평소에도 우리는 그림을 그리는데 죄와 사망의 그 질서를 가지고 우리 바깥의 그림을 그리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에게 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 정성을 보시고 나와 내 집안과 내 가정의 우환을 없애주시고 일 년 내내 남산위의 노루새끼처럼 뛰어놀게 해주시고 남편이 하는 일이 잘 되고 애들 공부 잘하고 고부간에 갈등 없고 복주실줄 믿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사람들마다 이미 믿는 구석, 믿음이 있어요. 뭘 믿는가, 죄와 사망의 법, 그 질서를 믿고 있습니다. 이미 믿음이 꽉 차 있는데 어딜 거기서 틈새를 노리고 다른 것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요. 모든 것이 내 손에 쥔 붓 하나로 세상을 채색하게 되면 그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으로 변신되는 겁니다. 어느 인간치고 이 세상이 자기를 위하지 않는 세상이란 없어요. 나를 위한 세상이에요. 만약 세상이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라면 우리는 한강 다리 위에서 뛰어내립니다. 아직도 우리는 미련이 남아 있어서 마지막 잎 새가 떨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고대하면서 비록 힘들고 고달픈 이 세상이라도 버티고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설마 하나님이, 설마 예수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라는 사고방식은 죄와 사망의 질서에서 그동안 옴팍 배운 거예요. 하는 것만큼 복을 받는다는 사고방식, 그동안 내가 이렇게 산 것은 지은 죄가 많아서 업보가 되어서 벌을 받는다는 사고방식, 그것을 성경에서 선악적인 질서라고 선악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하지요. 그게 죄의 사고방식이니까 거기다가 하나님을 예수로 바꾼다고 해도 그것은 전혀 상황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예수로 바꾸든 예수를 하나님으로 바꾸든 어쨌든 이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안식일이 있는 것이 좋습니까, 안식일이 없는 것이 좋습니까? 안식일을 지키라는 법이 있어야 안심이 되는 거예요? 아니면 “여러분, 안식일 법은 없습니다.”하는 그것이 오히려 안심이 되는 거예요? 안식일이라는 법이 있으면 그게 이상스럽게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만듭니다. 그 당시 예수님을 핍박했던 유대인들이 제일 시비 걸었던 것이 예수님이 안식일을 위반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것은 앞 뒤 볼 것도 없고 무조건 그는 이단이라고 했습니다. 안식일 지키라고 주장 안하고 십일조 하라고 안 하면 무조건 목사 아니고 이단이라는 식으로 예수님도 그런 평을 받았던 겁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대해서 면죄부로 이야기했지요. 만약에 제가 “여러분, 이게 면죄부입니다. 하나씩 나눠드릴 테니 돈 내시고 사인하시면 천국 갑니다. 적게 낸 사람은 연옥에서 고생 좀 하다가 갈 것이고 목돈 좀 내신 분들은 연옥에 가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빼서 천국에 갑니다. 제가 목사고 정통신학을 한 사람이고 이단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걸 사시면 더 이상 여러분의 죄는 하나님이 기억 지 않겠다고 이 목사를 통해서 계시했기에 여러분이 믿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왠지 믿음이 가고 동의가 되지요?
왜 그런가 하면 평소에 자기가 자기 자신을 믿기 때문에 내가 하는 행동을 내가 믿기에 나보고 어떤 행동을 하라고 한 그 목사가 믿음이 가는 거예요. 왜, 내 행동이 나를 구원한다는 나의 본래의 내가 믿고 싶은 그 짓에 부합되기에 그런 거예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구원받는다는 그것보다도 뭔가를 하시면 안심하고 구원받는다는 것이 훨씬 믿음이 가는 거예요. 그게 플라시보 효과라고 하는데 아무 효험도 없지만 입에 넣기만 하면 낳는다고 할 때 아무 내용도 없는 이상스럽게 심리적으로 낫는 것이 있어요.
그게 죄와 사망의 법의 오늘날의 현상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부흥이 돼요. 우리보고 뭘 하라고 한다면 얼마든지 할 용의가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한 만큼 복이 온다는 식이 이미 우리 안에 장착되어 있어요. 복이라 하는 것은 내가 착한 일 행한 만큼 복을 받는다, 나쁜 짓을 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것이 장착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 부합되는 이야기를 목사가 해주면 그것이 왠지 신뢰가 간다니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 밖의 사람, 지옥 가는 사람의 공통점입니다. 세상은 바로 그렇게 내재된 사고방식으로 가득 차 있어요.
우리는 그렇게 꽉 차 있는 세상에서 즐겨 돈 벌이 하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나 하나 착실하고 교회 다니면 구원받는 식으로 어떤 부딪힘도 없이 그냥 내 한 몸 챙기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 온 겁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을 보면서 우리는 새로운 도전을 받습니다. 그게 뭐냐, 그게 바로 죄와 사망의 법이라는 겁니다. 그게 죄와 사망의 법이라면 그동안 우리는 헛짓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다면 나보다 천국이 더 중요한 상황으로 바뀔 수 있는 비법 혹은 방법이 뭔가, 이제 그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야구장에 노란 장대가 있어요. 한 30미터 높이로 있어요. 야구장 끝에 두 군데 붙어 있어요. 타자가 공을 치면 그 장대 안으로 들어가야 홈런이고 밖으로 나가면 파울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멀리서 보면 심판이 보기에 공이 떨어진 곳이 바깥인지 안인지 잘 구분이 안 돼요. 그래서 공이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면 홈런이고 그냥 공이 계속 보이는 상태로서 떨어지면 이것은 장대 바깥으로 날아간 것이기에 파울인 겁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예수님이 구원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사라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세상 붙들고 세상을 전부 내 중심으로 살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그 나라는 것이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사라져버리는 체험, 그런 순간을 경험했느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천국가기 위해서 난 교회 와야지. 그러기 위해서 시키는 대로 예수 믿으라면 믿고 교회 믿으라면 믿어야지.’라고 자기 하나 기어이 구원받고자 하는 그 인간 자체에 대해서 손을 놔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이미 날아가는 공에 불과한 겁니다. 이게 파울이 되어서 지옥 갈 지 안으로 들어가서 천국 갈지 이 공을 쳐버린 예수님에 달린 문제거든요. 정말로 천국으로 날아가고 있는 공처럼, 천국으로 솟아올라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십자가 앞에서 자기 자신 자체가 사라져요. 교수가 되었든, 목사가 되었든, 집사가 되었든, 학자가 되었든, 초신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남자가 되었든, 그 자체가 없어져요.
없는데 다시 나타나요. 그게 없다, 있다, 입니다. “없다, 어, 있네?” 죄와 사망의 법이 뭔가를 만끽하면서 그것을 보여주면서 살았던 날라 간 그 우리가 십자가속에 들어가고 빠져나오면서 그때는 사람이 달라졌어요. 뭐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새로운 질서가 되어서 스펀지처럼 생명과 성령의 법을 흠뻑 담은 채 다시 나타나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사실을 제가 이렇게 야구로 비유해서 설명했지만 예수님은 말씀과 기적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로 마태복음 12장 4-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한 자들이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여기 죄 없음이 나옵니다.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뭘 먹어도, 진설병을 먹어도, 안식일을 범해도 죄가 없는 이유가 거기가 성전 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성전 안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뭘 로 바뀌는가, 예수 안이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죄가 없는 질서가 예수 안에서 뿜어져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 뿜어져 나온다는 말을 마태복음 12장 7절에서는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주님의 자비가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묻기를 법을 지켰느냐고 묻지 않고 “너는 내가 준 자비를 받았느냐? 너는 내 자비를 아느냐? 십자가에서 나오는 그 취지와 의미를 아느냐?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는 취지를 아느냐?”고 묻는 겁니다.
그럴 때 “그게 무슨 말이지요? 난 그거 못 믿겠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은 성전밖에,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고 여전히 죄 있는 사람이고 “아, 예수님 오신 이유가 죄 없애기 위해서 오셨구나.” 하고 알아들으면 그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 생명과 성령의 법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안 믿은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나님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믿었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지 말고 계명을 믿지 말고 나를, 이 예수를 믿으라는 거예요.
그 내막이 8장 3절에 나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그 다음에 중요한 말씀이 뭐냐,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에 죄를 정했다는 말이거든요. 육신이 곧 뭐다? 육신이 곧 죄다. 여러분, 육신들 갖고 있지요? 그러면 죄를 갖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착해지려고 했고 육신을 가지고 의로워지려고 했고 육신을 가지고 십일조 지키고 안식일 지키고 십계명 지켜서 이 육신을 사라지지 않게 천국에 홈런처럼 들어가기 위해서 이 육신인 자기를 때리면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전도하고 목사의 말대로 순종하고 예배참석하고 그래서 구원받으려고 애써왔던 거예요.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그게. 믿을 것은 육신의 행함밖에 믿을 구석이 없기에, 죽으나 사나 믿을 놈은 나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만든 희망을 내가 믿는 거예요. 마지막 잎 새는 떨어지면 안돼요. 예수 믿는 이유가 내가 살기 위해서, 내 육신이 살기 위해서 예수 믿겠다는 겁니다. 그게 잘못이라는 거예요. 이미 우리가 그렇게 아끼고 우리가 그렇게도 귀하게 여기는 이 자체가 죄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우리와 똑같은 육신으로서 십자가에 매달림으로서 “봐라. 너희와 똑같은 육신이 있는 내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재료잖아. 아버지에게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네가 갖고 있는 육신에 있다.”하는 겁니다.
이 육신에서 우리는 손을 놔야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죄와 사망의 법만 있는 사람은 믿을 것이 자기육신밖에 없거든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없는 사람들은 믿을 놈은 자기밖에 없어요. 로마서 8장 33절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34절에 “누가 정죄하리요.”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죄 없다.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겠다.” 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자기 육신 말고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육신,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이 땅에 내가 태어나야만 했었다는 그 관련성으로 엮인 것을 아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생명의 성령의 법에 놓여 있는 사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뭐든지 하세요. 뭘 하든지 여러분 육신을 없애고 주님의 몸으로 태어나게 하는 계기로서 그 일에 종사하게 하시는 겁니다. 있는 것도 있다, 없다, 없다, 있다, 하는 거예요. 있다, 없다, 이것이 시스타의 노래가 아니에요. 있다, 없다, 없다, 있다, 항상 매일같이 느끼는 것은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니 나는 있구나, 그런데 가만 보니 이렇게 하는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께서 시키는 일이었구나, 그 순간 나의 육신은 없어지고 주께서 다루시는 육신, 주님의 육신으로서 지금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있는 사람은 화내지 마세요. 화 낼 이유가 없습니다. 공짜로 살아가는 주제에 왜 화를 내십니까? 자기 것이 아닌데. 자기 것이 아닌데 왜 화를 내지요? 비행기 타고 가도 다치든 죽든 만약 내가 아는 친척이 거기 없다면 우리가 화를 낼 이유가 없어요. 놀러갔다가 잘 되었다, 하겠지만 만약 내 아들이나 자식이 거기 있다면 우리가 화를 안 낼 수가 없겠지요. 이렇게 화 안내고 싶어도 일어나는 모든 것은 일부러 화를 내게 만듭니다. 화내게 만들어서 화내는 내가 분명히 여기 있음을 이야기 하고 그 분명히 있는 육신을 주께서는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 우리 육신이 더 이상 네가 생각하는 그 육신이 아니고 주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 듬뿍 담긴 육신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너로 하여금 육신이 미쳐서 화를 낸다는 것을 까발려 주는 시간들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부릅니다.
늘 우리는 화를 안 내야 됨에도 불구하고 눈만 뜨면 화를 내고 불평하고 불만을 터뜨리면서 하나님한테 따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육신이 안고 있던 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쳐줄 때 귀신들린 것과 병든 것의 공통점이 있어요. 자력으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병들었어요. 우리는 나 중심, 나밖에 모르는 이 고질병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간 못 벗어나는 나를 가지고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증거 하는 용도로서 이 육신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여러분의 눈이 떠지기를 부탁합니다. 부탁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고 그 의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것, 너는 죄를 지어도 이제는 의인이라는 그 사실, 이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원래 소원대로 말려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일하시는 것을 우리 힘으로 믿으려고 하면 믿을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로 꽉 차 있어서 들어올 자리가 없는데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까발리고 껍질을 벗겨서 속살을 보이게 하시고 말씀이 침투함으로 저희들이 이제는 새로운 인간으로 달라져서 살아가는 이 사실에 이제는 눈뜨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