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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43강-그리스도의 사람이란(롬8;8-11)이근호130721

아빠와 함께 2013. 7. 21. 14:20


그리스도 사람(로마서 8: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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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7-21 13:38 
그리스도 사람이란 

2013년 7월 21일                           본문 말씀: 로마서 8:9-11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만약에 성령이라고 호칭되는 분을 우리들이 못 알아본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지요?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와 동일하다고 인정하는 같은 사람들만 만나고 다닙니다. 이 만남 속에서 현실을 구성하는 온갖 의미와 개념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세계를 유일하게 있는 현실이라고 인정하고 싶은데 여기에 성령님이 끼면 어떻게하겠다는 겁니까? 

성령님이 활약에 대해서 인간들이 구성해놓은 현실 속에서 사전에 자리하나 마련해둔 게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님을 투입하여 사명과 생명을 가름해버리십니다. 로마서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현실 자체를 뭉개버리시겠다는 조치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의 등장은 곧 마지막 때에 일어날 모든 것들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종말의 개시’ 같은 겁니다. 마지막을 마지막답게 장식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성령님의 오심이 어떻게 세상 막장이 되느냐 하는 점은 예수님의 죽음 사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를 인간들이 처단하고 없애버리므로서 이 세상의 성격은 모든 게 노출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 세상은 구제요청을 하나님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있는 게 아닙니다. 그럴 기회조차 하나님께서 주시지를 않습니다. 인간들의 자기 힘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여지는 전무합니다. 

성령님의 오심은 인간들의 모든 종교적 노력과 철학은 모두 거짓된 것임을 고발하는 조치 차원입니다. 국에서 국물을 따르면 건더기만 남듯이 하나님께서는 인위적으로 자신을 신자라고 우기는 자들을 따로 버리십니다. 십자가 사건이라는 이 밝혀진 중심되는 내용을 늘 되풀이하는 식으로 역사 속에 개입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 대목에서 인간은 끼어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만들고 그 어떤 행위나 성과도 포함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중앙을 차지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성령님의 오심은 곧 세상이 마지막 정리에 돌입되었다는 것을 알리면서 이 작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자기 자녀 만들기를 하시는 때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종말성으로 모두 정리하는 힘이 성도에게 와 닿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다니엘 3장에 보면, 다니엘 세 친구가 나옵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느부갓네살왕에서 체포되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누가 봐도 죽은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보니 거기에 네 번째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니엘 세 친구가 자진해서 그 불 속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불 속에 계시는 분이 들어오도록 조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하루 일과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고난과 역경이 있는 곳으로 당겨지는 삶입니다. 성령님이 임했다는 것은 더 이상 그 사람은 자기 인생이나 자기 삶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사람’입니다. ‘자기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성령 받은 자들은 사도행전 역사를 장식합니다. “예수라는 분이 살아계셔서 일하신다”고 외칩니다. 이는 보통 인간들, 즉 “내 인생을 내가 가꾸어나가는 것이다”는 일상과는 정반대의 삶이 됩니다. 인간보다 말씀 성취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성령받은 사람의 특징을 말해보라면 한마디로 “자신보다 말씀이 우선이다”는 겁니다. 

새 사람이란 말씀 성취를 위해서 이 땅에 출몰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본인이 본인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책임지게 됩니다. 이들은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외에 달리 모른다고 말합니다.(고린도전서 2:2) 하지만 이러한 성령님의 일을 기만하는 단체가 역사 속에 등장했으니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구원을 상품으로 내걸고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는 곳입니다. 성령님이 와서 구원된다는 작업을 인간쪽으로 조종할 수 없다는 것을 아쉬며 하면서 그 대신, 교회 안에서 구원받는 자를 생산해내겠다는 일념으로 고객들을 끌어모으게 됩니다. 그것이 곧 인간을 몸과 혼과 영(혹은 몸과 영혼)으로 나뉘어서 몸은 비록 세상 때가 묻어 죽지만 영혼만큼은 늘 신서하게 대듬어낼 수 있다고 가르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알아야 될 것은, 천국은 인간을 들여보내는 곳이 아니라 못 오게 만드는 나라라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13장 끝부분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자신이 목숨 버려가면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베드로가 있을 ‘처소’가 없는 곳이 천국, 곧 아버지의 나라라는 겁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죽은 성도들은 음부에 대기해가지고 있습니다. 관권은 하늘나라에 처소 만들기가 순전히 예수님 소관이라서 예수님이 아니면 아무도 그 일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인간이 스스로 정신 차려 알아서 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만약에 처소가 마련된다고 그 소식은 성령의 나타남을 통해서 성도에게만 통보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원래부터 관계가 끊어져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끊어진 고리를 인간이 나서서 잇는다든지 수리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지상에서는 기어이 영의 세계를 접촉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가 시도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사무엘상 28:7-14에 나옵니다.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 

무당이 죽은 자를 불러낼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모든 게 환상 중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환상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란 단순히 죽은 자 가운데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그리스도 사람 만들기’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는 사람으로서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인간이 조작한 현실이 곧 죽음의 현실상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43강-롬8장 8-11(그리스도 사람)1307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8장 8절에서 11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249페이지입니다.

 

로마서 8:8-11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신구약 성경이 이렇게 두꺼운데 그 모든 내용을 모른다고 칩시다. 그 많은 내용들이 나오는데 그 모든 것을 다 모른다 치더라도 방금 읽었던 이 8절에서 11절의 내용을 알게 되면 몰랐던 그 내용들이 이 안에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말을 바꾸어서 하게 되면 다른 것을 다 익히 꿰뚫어 안다 할지라도 방금 읽은 로마서 8장 8절에서 11절의 내용을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모른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두꺼운 성경의 내용, 창세기부터 나오는 바벨탑이며 노아홍수를 비롯한 그 모든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의 역사적지식과 정보로 우리 머릿속에 정리가 되더라도 오늘 본문 내용은 전혀 역사적이지 않습니다.

 

모세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든지 다윗 같은 영웅의 이야기가 전혀 들어있지 않아요. 본문 내용이 중요한 것은 인간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설쳐대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이 땅에 와서 대체 무슨 일을 했느냐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으로 인간들이 벌인 모든 판을 완전히 난장판으로 만드는 거예요. 앞으로 몇 공화국이 새롭게 출범하든지 간에 북한이 어떻고 미국이 어떻고 다른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관계없이 예수그리스도가 무슨 일을 했는지를 모르게 되면 다 소용없는 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선교사가 와서 교회를 세워서 교회의 역사가 100년이니 200년이니, 교육관이 어떻고 교인이 몇 명이고 헌금이 얼마가 나오는지 상관없이 이 본문 모르면 친목단체에서 봉사한 것 밖에 안돼요. 그런데 이 본문을 알고자 하니까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 단박에 부딪히는 것이 있어요. 9절에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영’이 나오거든요. 하나님의 영이라고 호칭하는 분이 계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 땅에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분을 못 알아보면 어떻게 되지요? 지옥 갑니다.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요. 우리는 우리 동네 구청장도 알고 국회의원도 알고 식사도 함께 했다고 자랑해도, 미국 대통령하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고 자랑해도, 유명한 가수하고 수영장도 같이 가서 놀았다고 해도 “실레지만 성령을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할 때 성령에 대해서 모르면 사람들 천명 만 명 만난들 그게 그 사람을 영원히 살게 하지 못하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나지를 못하는 겁니다. 영생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천국을 못가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설교제목으로 한다면 그리스도 사람이 되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사람도 안 된 인간을 교회에서 양산을 하는데, 그것은 성령이 없어도 된다는데, 그것은 물만 뿌리면 된다는데, 성만찬에서 떡과 포도주 마시면 된다는데, 입 있겠다, 마시라고 주는데 누가 그걸 못 마십니까? 신부가 주는 비스킷 같은 것 먹으면 된다는데 그것 왜 못 먹습니까? 이 없으면 틀니라도 끼고 먹지요. 그러면 영생 얻습니까? 성령, 지금도 분주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 성령에 대해서 만나본적이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평생 살면서 누굴 만나고 누굴 봤습니까? 근사한 남자들? 근사한 여자들? 매력적인 사람들? 다 늙어죽고 매력이고 뭐고 다 사라지는데?

 

오늘 본문에서 성령, 하나님의 영을 언급하는 것은 만일 이 세상을 하나의 갈비탕이라고 해 봅시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의 전체를 갈비탕이라고 보고 국물을 따라내면 남는 것은 건더기만 남는데 그 건더기가 성부 성자 성령만 남는다는 뜻이에요.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이끌어온 것이 아니고 성부성자성령께서 이끌어 오신 겁니다. 국물 따라내면 건더기는 남는다, 그 정도도 괜찮아요. 따라내서 건더기만 보여주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불에다 따르게 만들지요. 뜨거운 불에 따르게 되면 국물은 증발해 버리고 남는 것은 성부성자성령만 남습니다.

 

불에서 견디는 사람만 구원받는다고 고린도전서 3장에 나오잖아요. 불 가운데서 견딜 수 있어야 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불 가운데서 다 졸아버리고 타고 없는데요? 하지만 그리스도 사람은 남는다는 겁니다. 다니엘 보면 다니엘 세친구가 앞서서 그런 시험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느부갓네살 왕이 금 신상에 절하라고 했습니다. 헌법이죠. 다니엘 세 친구는 공무원이에요. 공무원 같으면 솔선수범해서 나라 법을 지켜야 되는 것이 도리고 본문이거든요.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 본인들부터 “내가 왜 거기 절하는데?” 해서 체포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도 얼마나 자비심이 많은지 한 번 더 기회를 줍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절해라.” 그런 기회까지도 줬는데 다니엘 세 친구가 뭘 믿고 그렇게 버텼는지 몰라요. 들어가도 살릴 건데 “안 살면 안 살지 뭐. ‘주께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가 우상에게 절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북한 말로 “일 없습니다.” 그렇게 된 거예요. 불에 들어갔지요. 주위 사람들은 애도했을 것이고. 친척들 있었으면 상당히 가슴 아파 했을 겁니다. ‘인생 이렇게 끝나는구나.’ 자비를 걷어찼으니 너무 괘씸해서 용광로 속에 집어넣는데 얼마나 뜨거웠는지 포항제철용광로보다 더 뜨거웠던 모양입니다. 얼마나 불이 쌨던지 옆에 붙들고 섰던 사람들이 타 죽어 버렸어요. 보통 뜨거운데 아니죠.

 

들어간 뒤에 밖에서 보니까 불속에서 타 없어져야 되는데 사라지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이 더 생겨버렸어요. 하나님의 아들 같이 생긴 분이 강강술래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실제상황입니다. 이게 실제상황이라고 제가 이야기를 해도 들어갈 마음은 전혀 없지요. 왜, 지금 35도만 되도 에어컨 켜야 되는데 그 용광로 안에 에어컨 켤 일 있습니까? 다니엘 세 친구가 들어가려고 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안에 계신 분이 부른 거예요. 왜 불렀는가하면, 세상은 막장이고 세상은 종말로서 끝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국물 따라버리고 졸아버리면 결국 남는 것은 그리스도사람만 남게 되어 있다, 하나님 곁에는! 밑에서 불 질러서 하나님의 천국 갈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뜨겁다고 다 튀어나가든지 알아서 맘대로 하라는 뜻이에요. 그러한 모든 작업과 일은 사람 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하면 하나님의 영이 하는 일은 그리스도사람을 튀어나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그 환경을 어떻게 하는가? 이 세상을 막장, 끝장, 종말로 전환시키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이나 요엘서에 보면 성령을 일컬어서 마지막 날이 되어야 나타나시는 영이라고 해서 그것이 구약의 성신과 차이점이에요. 성신은 어떤 특정 개인을 다루기 위해서 임시적으로 하나님의 힘이 임한 것이 성신이라면 성령은 개인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임해서 이 세상 전체를 종말 화시키는 거예요. 마지막 때라는 것을 까발려주는 평탄작업에 나서는 겁니다. 원래 논 밭 있던 장소에 집 지으려고 하면 택지조성 먼저 하잖아요. 주민들 반대해도 불도우자가 와서 밭이고 논이고 산이고 다 갈아엎고 깎아서 택지조성을 하잖아요.

 

그 작업을 성령님이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왕이니 국회의원이니 고관대작이니 하는 것 택지조성하면 다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 땅에 있는 잡초 같은 것인데 택지 조성할 때 다 밀려버립니다. 국회의원이고 대통령이고 봐주고 천당 보내주고 그런 것이 없어요.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사람만 남깁니다. 어머니나 할머니가 한약 다릴 때 보면 한약이 불쌍해요. 나무막대기 두 개 넣어서 비틀어 짜면 국물 나오잖아요. 성령께서 쫙 짜버립니다. 역사를 자랑하고 가진 재산을 자랑하고 아파트 넓은 것 자랑하는데 그걸 쫙 짜버리면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성령은 그걸 쫙 짜버립니다. 그런 현상이 사도행전 보면 쫙 깔려나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 받은 스데반집사와 빌립집사 그리고 나중에는 사도바울도 받아요. 그리고 부활을 받았던 그 제자들도 나중에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전도할 때 성령세례 받은 사람도 나타나고. 그런 사람들이 사도행전의 주인공들입니다. 성령을 받으니까 여자나 남자나 어른이나 어린애가 차이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는 아주 독특한 존재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것은 마지막 때의 압박이 가해졌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준비한 존재자, 낯선 존재들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존재들, 괴상한 소리를 하는 존재들, 예수님은 지금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그 사실을 이야기하는 아주 수상한 사람들, 예수님의 살아 있음이 현재 내가 살아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수님의 살아 있음으로 인하여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죽어가고 있어도 오히려 그것이 축복이라고 알려주는 일을 하시는 분이 주님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세상은 오직 자기꾸미기에 바쁜데, 자기꾸미고 자기영역 다듬고 자기세력 확장시키고, 여기에 교회고 절이고 관계없이 자기세력 확장시키고 남한테 뽐내고 자랑 질 하는 요소들을 끌어 모으는 데에 급급한 거지요. 그런데 사도행전에 나오는 이 성령 받은 사람들은 도무지 부러운 것도 없고 요구하는 것도 없고 나대기는 하는데 특별히 원하는 것도 없어요. 설치기는 하는데 돈 보고 설치지는 않고 더 살고 싶어 안달 나서 그런 것도 아니고, 좀 이상해. 자기 재산을 자기 재산이라 하지 않고 사도의 발 앞에 던지고 복음을 위해서 쓰라고 이야기하고, 미친 사람 같아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이잖아요. 그 미친 사람 중의 대표 격인 사람이 이 본문 로마서 8장 8절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나 다 천당 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안 넣어주기 위해서 만든 것이 천국이에요. 사람들에게 천국은 어림 반 푼어치도 없습니다. 천국은 기대하지 마세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데 그 인간이 그리스도사람이라, 그리스도사람이면 어떻게 되는가? 11절에 보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사건의 되풀이 사건의 반복을 하겠다는 거예요. 십자가사건, 예수님에게만 일어났던 그 유일무이한 사건을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너희를 상대로 해서 되풀이시키겠다는 겁니다. 십자가사건의 되풀이인 거예요. 사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건이 더 중요한 거예요. 십자가사건이 더 중요하다. 이것을 고백하고 이것이 더 중요함을 아는 사람이 바로 성령 받은 그리스도 사람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위로 나갈 길은 끊어진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 그렇게 여러분은 각자 자기 몸이 있지요. 있으면 있는 대로 그냥 몰락하세요.

 

주께서는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있지 않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어놓고 “이제 없지? 있다고 하지 마!” 없게 만들어 놓고 다시 만듦으로 말미암아 그 마지막에 있는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있기에 더 이상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게 만드는 그 작업을 통해서 천국 갈 사람이 국물 졸고 건더기만 건지듯이 푸딩위의 건포도처럼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아주 우연하게. 그래서 우리는 성도를 만나거든 신기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참 신기하다.’

 

성령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인간적인 행위를 보태거나 덧붙여서 현재 있는 나를 계속 있게 만들어서 천국 가는 사람 되게 하는 그 방식을 주님께서는 거부하십니다. 오직 성령께서만 있는 자를 없게 만들고 없는 자를 다시 있게 만들어서 그 다음부터 인생 살아갈 때 내가 내 인생의 운전사가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지요. 그리스도가 내 인생을 이미 장악했음을 고백하는 사람, ‘나는 나의 사람’에서 ‘나의’를 지우고 그 자리에 뭐가 들어가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사람’ 또는 ‘그리스도사람’이라고 만들도록 성령께서 작용하시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등장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기적인가 하면 다니엘 세 친구가 불속에 들어갔지만 거기서 살아나는 것이 우리한테는 무척 기적으로 보이지요. 그렇게 기적으로 보여도 다니엘 세 친구가 오늘날 우리를 더 부러워합니다. 불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보고 다음에 또 들어가라고 하면 역시 겁나요. 어쩌다 한 번은 되었는데 다음에 또 될지 장담 못하잖아요. 그런데 그리스도 사람이 된 것은 불속이 아니라 에어컨 속에 들어가도, 얼음물 속에 들어가서 시원하다고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또는 불속이나 물속에 뛰어드는 경우가 없다 할지라도 십자가사건으로 이미 모든 것이 종결된 것으로 보기에 네가 에어컨 속에 들어가든 불속에 들어가든 어디를 가도 너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산 사람으로 사는 거예요. 실제로 목숨이 끊어진다 해도.

중환자실에서 연결된 선들 다 빼내고 “돌아가셨습니다.”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그 사람은 여전히 살아 있는 거예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그 말씀이 나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나보다 더 중요한 그 말씀을 우리한테 우리를 실험대상으로 실제로 성령을 통해서 집어넣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 안 받고 싶어도 받아야 되고 천국 안 가고 싶어도 가야 될 팔자에요. 이것은 세상에서 내가 갖고 있는 승진, 돈, 권력, 자식, 가정, 행복, 이 모든 것들이 전혀 나의 일생을 결정하는데 조금도 영향을 주지를 않습니다.

 

노래방에 가든, 나이트클럽에 가서 빙글빙글 하든, 신천지에 가든, 구천지에 가든, 교회 가든 절에 가든,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 사람이기에 어디가도 그 티를 내게 되어 있어요. 오직 그리스도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이 그대로 나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 말씀이 나의 오늘 한 끼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말씀을 외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고 기억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겁니다.

 

말씀을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말씀이 나를 쥐고 그 말씀대로 이끄는 것은 이미 우리 선을 넘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사건을 되풀이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그 고백 외에 나올 것이 없어요. 그런데 방금 이야기한 이것이 성경에서 옳은 이야기인데 문제는 이 옳은 이야기만 하게 되면 교회 몇 사람 남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돈이 안 되고 돈이 안 되면 교회 문 닫아야 돼요. 그러니 돈이 지배하는 돈의 세계 안에서 그것을 현실로 본다면 실제 역사 속에서 초대교회부터 성령 안 받은 사람도 “성령 받았습니다. 당신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것을 상품화시켜서 대량생산하는 작업에 신부와 목사가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거기서 나온 성령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소개해 드릴게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뭐냐, 오직 성령께서 찾아와야 그 사람은 그리스도사람이 되고 그 사람의 소유권은 이미 성령에게 넘어가 있기에 죽어도 살고 살아도 이미 사는 것이고 그분은 천국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이 소식, 이 이야기가 너무 맘에 들고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그 과정에 인간의 어떤 아이디어나 노력이나 종교적인 열심도 합류가 안 되고 그냥 결과만 나와 있으니 그 결과만 주워 먹기에는 세상 적으로 심히 빈약하더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성령 안 받은 사람도 구원 받는다고 이야기하고 천당 간다고 이야기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복음이 아닌 비 복음, 악마적인 소리를 목사와 신부를 통해서 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재정을 끌어 모아야 교회가 되고 계속해서 역사적으로 대를 이어 존속할 수 있는 거예요. 제가 미리 말씀드립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교회 자체가 무엇을 부정하느냐, “이 세상은 막장이고 끝장이고 종말이고 끝났습니다.”라는 선포를 교회 자체가 훼방하고 걷어차 버리는 거예요. “내년에도 만납시다.” 이렇게 나온다 말이지요.

 

오늘 끝나면 끝나는 거지 내년이라는 것이 없어요. 지금 한 여름에 빙수 먹어야 돼요. 다음을 기약할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인간들 마음이 불안하잖아요. 그래서 안심을 주고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 사는 것은 행복하고 재미있게 사는 것이 목적이에요. 재미있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미래의 소망을 주기 위해서 교회에서 한 것이 뭐냐? ‘당신의 영혼은 죽어서 하늘나라 갑니다.’라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기 시작한 겁니다. 그 영혼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간주하는 엉터리같은 소리를 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을 분석하는데 둘로 분석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셋으로 합니다. 셋으로 하면 몸과 혼과 영이고 둘로 하면 몸과 영혼으로 분류합니다. 따라서 몸은 포기해도 영혼은 포기하지 맙시다, 라는 식으로 해서 몸은 조지고 영혼을 천국 가는 영혼으로 제작해내는 작업에 대해서 목사들이 말하기를 “제가 맡아서 여러분의 영혼을 천당 가는 영혼으로 개선해 놓겠습니다.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시고 교회에 섭섭지 않게 헌금도 좀 하시고 관심도 가져 주시고 수련회도 참석해 주시고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으신다면 당신의 영혼을 구원받는 영혼으로 만들겠습니다.”라는 큰 소리들이 교회장사치들에게서 나오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심보를 구약에서 목사라 하지 않고 무당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28장 7절에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살았다고 이야기해요. 엔돌이라는 지방에 무당 짓 하는 여자가 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무당이나 점쟁이, 인간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사람들 다 죽이라고 했거든요. 하나님은 이 땅에 국물을 다 따라버리려고 왔지 세상에 희망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건더기만 건지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몸에서 품어져 나온 것은 자기 몸이 영원히 존속하고 싶은 충동입니다.

 

약간 어렵지만 참으세요.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이 죄를 범하고 난 뒤의 충동이 뭐냐, “생명나무 따먹고 영생을 얻고 싶다.”고 나오는 거예요. 죄지은 것은 이미 지은 것이고 저 생명나무 따먹고 싶다는 충동이 안 나올 수가 없지요.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로 향하는 길을 차단시킨 것은 인간들이 생명나무마저 따먹고 죄지은 상태에서 영생할까 한다.’(창 3:22)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는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신은 영원해야 돼요. 영원하기 위해서 나는 비록 죽더라도 나의 영혼은 영원해야 됩니다.

 

그것을 철학적으로 영혼불멸설이라고 하는 거예요. 영혼불멸설을 교회에서는 뭐라고 바꿨느냐하면, “영생입니다.”라고 사기를 친 거예요. 제가 이것을 사기라고 했는데 그것을 사기라고 한 근거를 대라고 한다면 요한복음 14장을 댑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하고 이야기할 때 “내가 너희를 떠나서 하늘나라 간다.”고 했을 때 베드로가 한 말이 “제가 죽어서라도 따라가겠습니다.”라는 제안을 했어요. 예를 들어서 주님이 개성공단에 간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제가 월북해서라도 개성공단까지 따라가겠습니다.”라는 소리와 같은 거예요.

 

베드로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그 당시 모든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던 구원이 무엇인가를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비록 죄로 인하여 죽었지만 우리 영혼은 정갈하게 다듬게 되면, 소위 성화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것만 건더기로 챙겨서 하늘나라 보낸다는 포부, 희망을 베드로뿐만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야 종교 사업이 돼요. 종교라는 것이 물론 세상적인 축복도 이야기 하지만 가장 종교에서 마지막 내미는 카드가 뭐냐, 이 땅에서 고생해도 하늘나라에서는 보상받는다는 보상원리를 상품화시켜서 교회고 절이고 성당이고 다 운영되는 거예요.

 

왜 그런가, 사람들의 기본 포부가 “이 땅에서 고생한 만큼 하나님은 갚아주세요.” 이렇게 된다 그 말이죠. 베드로가 “예수님, 제 목숨 바쳐서라도 주님 따라가겠습니다.” 몸은 버려도 영혼만큼은 주와 함께 하겠다는 뜻이에요. 얼마나 신앙적으로 보입니까? 우리는 다 속아 넘어갈 뻔 했어요. 그것은 요한복음 13장 마지막 대목이고 14장에 가면 “아서라. 말아라. 너는 나 있는 곳에 못 온다. 왜, 네가 갈 처소가 없다.” 하는 거예요. 이것은 생뚱맞은 이야기이고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간단하게 합시다. 촌 할머니가 여기 오셨습니다. 제가 건방지게 묻습니다. “할머니, 할머니가 생각하는 천국은 어떤 겁니까?” 하면 그 할머니가 “나는 하나님 믿지. 하나님이 내가 죽으면 하늘나라에 받아준다니까. 내가 그래서 부처 안 믿고 교회 온 이유인데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라니까.”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라는 거죠. 베드로는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까? 베드로는 구체적인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런데 좌석, 자리가 없대요. 하늘나라에 우리 자리가 없대요. 처음부터 없대요. 기존교회 이 소리 하면 다 나가버립니다. 소망교회 가서 이 소리하면 텅텅 빌 거예요.

 

사람들의 가장 잘못된 생각은 천국은 사람을 안 넣어주는 곳이라는 생각을 안 하고 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그만큼 목사가 교육과 쇠뇌를 시킨 거예요. “여러분, 죽으면 천국 가니까 교회 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교육을 시켜 왔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교인들이 섭섭지 않게 헌금도 하고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고 처소가 없대요. 거기 있는 처소는 예수님밖에 다른 사람은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순서 정합시다. 하나님이 정한 순서를 존중해 줍시다. 하늘나라는 예수님만 살 수 있어요. 천사들도 물론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예수님만 살 수 있는 나라가 하늘나라입니다.

 

미리 죽었던 에녹이나 엘리야, 아브라함이나 모세는 전부 다 어디 있는가? 음부에 대기상태에 있습니다. 보충역도 아니에요. 지금 대기상태에요. 자리배치를 못 받았어요.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고 있는 상태에요. “뭐가 그렇게 복잡합니까?” 제가 그렇게 복잡하게 한 것이 아니고 죄인은 하늘나라에 안 들여놓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이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선악과 따먹은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선악과 따먹은 사람은 선악과 따먹은 죄를 선악과 따먹은 본인이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해결 안 되면 그냥 해결 안 된 채로 그냥 저주 받아야 돼요. 그게 우리의 처지고 입장입니다.

 

그동안 교회고 성당이고 다 사기를 친 것이 뭐냐, 종말이기에 그런 사기가 나타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예요. 마지막 때이기에 진짜 건더기만 건지기 위해서 이런 사기를 깔아놓은 겁니다. 그래서 자기 맘에 드는 사람들이 서로 매치되도록 하신 거예요. 이 땅에는 성령만 활동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때 악령도 발악을 하기에 그런 거예요. 악령의 발악에 사람들이 말려든 거예요. 큰 소리로 한다고 진리 되는 것은 아니니까 조용히 하나 큰 소리 치나 이게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 이야기하기를 “베드로야, 처소가 마련되면 내가 다시 오마.” 우리 생각도 그렇잖아요. “마련되었는지 아닌지 통보는 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이 들지요. 해준다고 해놓고 소식 없으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마련되면 마련되었다는 통보를 해주는데 그 통보자가 누군가, 바로 보혜사 성령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빨간 오토바이타고 안 다니거든요. 성령이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택배회사 아저씨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성령은 보이지 않거든요. 보이지 않는 분이 “네 자리가 있더라.”라고 통보했는지 안했는지 어떻게 아느냐는 이게 중요하잖아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람들의 특징을 제가 초반부터 했습니다만 이 대목에서 다시 한 번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사도행전에 미친개도 아닌데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살아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살아 있기에 나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님을 내가 알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보통 사람은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사는 겁니다. 어제 어떤 분과 상담을 했는데 한 30분을 했어요. 직장 다니는 중에 여러 가지 부조리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호소를 하셨어요. 제 답변은 이겁니다.

 

“왜 자꾸 살려고 하십니까?” 이 땅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땅인데 살려고 드니 회사가 이러쿵저러쿵 자꾸 하는데 본인이 그 회사 사주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섭섭하지요. 일하는 사람은 저 싫으면 그만둘 자유를 갖고 있으면서 사업자에 대해서 당신은 갑이고 나는 을이고 회사가 어쩌고저쩌고 ……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보기에는 불공평하다는 말이지요. 근본문제가 뭐냐 하면, 젊을 때부터 복음을 알았다고 하지만 복음을 지식으로 알았지 복음이 내 인생을 복음 쪽으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느끼지는 못했는데 웬 하나님의 축복인지 내가 이 땅에서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음을 깨닫는 기회를 하나님께서 잠시 부여하신 거예요.

 

여러분, 인생살이 고문입니다. “네 죄를 알렸다.” 하고 막 이 세상 자체가 주리를 트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하나님께 뇌물 바치면서, 감사헌금이 감사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좀 살려달라 이 말입니다. 자식 시집장가도 아직 안 보냈는데 왜 이럽니까?” 이런 식으로 자꾸 버티니 주님보시기에 헐! 어처구니가 없는 거예요. 무엇이 사는 것인지 산다는 의미도 모르는 거예요. 말씀을 살리기 위한 조건으로 우리가 살아 있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증거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 있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려고, 그렇게 구원받으려고 애를 쓰다가 나중에 치매 걸리면 그 동안 신앙생활 한 것 죽 쒀서 개 준 꼴 됩니다. 그렇게 평생 신앙생활하고 봉사하고 헌금한 것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나중에 예수 모른다고 하는데. 몸과 영혼으로 인간을 분석해서 그것으로 하늘나라와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은 있는데서 있는 것으로 나아가려 하는 부질없는 꼴이에요. 엔돌에 신접한 무당이 있는데 사울 왕이 찾아가요. 평소에 사울왕은 하나님의 뜻이니 무당은 다 죽이라고 해놓고 막상 본인이 아쉬운 거예요. 시간 가더라도 이 예는 말씀드려야 되겠습니다. 제 친구가 있는데 친구의 남동생이 둘 있어요.

 

둘 다 공부도 못하고 하지도 않아요. 만 날 바둑만 두는 거예요. 보다 못해 형이 한심스러워서 참다못해서 충격 요법을 쓴다고 도끼를 가져다가 내려치니 바둑판이 한 방에 죽 갈라졌습니다. ‘이렇게 충격 주면 더 이상 바둑 안두겠지’라고 생각한 거예요. 한 달이 지나서 그 도끼로 바둑판을 내리친 그 형이 바둑을 두고 싶어서 자기가 바둑판을 다시 붙였어요. 사울이라는 왕이 자기 딴에 하나님 말씀을 지키면 나라가 잘 될 줄 알고 말씀대로 무당을 다 제거했거든요. 그렇게 했는데 막상 자기 개인적인 신상이 아쉬울 때는 무당을 찾아 왔습니다.

 

사무엘은 이미 죽고 없어요. 하나님과 유일한 소통의 매개자인 사무엘이 죽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얼마나 답답했던지 사울 왕이 신접한 여인보고, 이게 실제상황입니다, 그 신접한 여인에게 사울 왕이 하는 말이 “무당, 사무엘 좀 살려내라.” 한 거예요. 그런데 오히려 무당이 나무랍니다. “왕이시여,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나쁜 짓입니다.” 자기가 답답하면 하나님이고 뭐고 눈에 뵈는 것이 없습니다. “무조건 사무엘 불러내라.” 그래서 사무엘 불러내서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무당이 불러낸 그 사무엘이 가짜냐, 진짜냐, 신학자들이 그거 따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상가운데 일하십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환상가운데 만들어내신 거예요. 성령이 오면 헛걸음을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내고야 맙니다. 그런데 성령이 올 때는 이 세상 자체를 종말로 만들어버려요. 제가 지난 금요일에 시내에 볼일 보러 가면서 직행 401번 타고 갔어요. 그런데 벌이 한 마리가 들어왔어요. 제가 뒷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말벌이 사람 손잡는 그 부위에 딱 앉아 있어요. 둘러보니 갓난애도 차에 있었어요.

 

말벌이 돌아다니는데 사람들은 그걸 못 보는 거예요. 뒷자리에서는 다 보이거든요. 저 혼자 심각했지요. 성령은 벌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사람을 되게 하는데, 창녀든 뭐든 인간의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성령이 임한 사람은 전부 다 그리스도사람 되게 하는데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갓난 애 안고 자기 애 예쁘다고 뽀뽀하고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벌이 날아들어서 심각한 상황인데, 이 세상이 종말인데. “목사님, 사도행전에 나오는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달라집니까?” 사도행전을 보세요. 보게 되면 세상 자체를 종말로 간주합니다.

 

그냥 간주만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종말이고. 왜, 본인이 예수님이 살아 있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사도바울처럼 “나는 주님을 만난 적이 있다. 주께서 죽은 것이 아니고 부활했다. 우리도 그처럼 부활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돈, 권력, 이거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부활이 더 중요합니다. 십자가 복음이 더 중요한 거예요. 미쳤어요, 미쳤어! 십자가에! 교회가 아닙니다. 사람 꾀어서 예배당 유지하고 사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십자가 복음이 중요해요. 주님 살아계심이 중요한 겁니다. 내 가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거예요.

 

그게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열 두 사도들이 다 그랬어요. 더 이상 뭘 더 확실한 증거를 들이대겠습니까? 사도행전 보세요.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고 지금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가 책을 들고 갔는데 그 책이 그렇게 유용할 줄 몰랐습니다. 벌을 내리쳤고 벌은 떨어졌고 의자에 붙어서 버둥대는 것 한 번 더 쳐서 잡았습니다. 일단 버스 안의 종말은 책 때문에 해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령의 활동을 누가 잡습니까? 마귀들이 잡지요.

 

“여러분의 영혼이 착하면 구원 받습니다.” 아니거든요. 우리 자신이 어떻게 착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되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어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말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들어서 사용하는 그 마지막 시대에 우리가 성령 받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우리는 사기를 당하도록 자기밖에 모르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끌어모은 권력과 재산이 중요하고 그 외에 아무것도 중요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우리의 사고방식, 주여, 이것이 육적이고 결과는 사망밖에 없는데 웬 놀라운 은혜인지 십자가를 알게 하시고 주객이 전도되어서 주님이 주인이고 주님 증거 하라고 살아가는 이것을 새로운 현실로 믿을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