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39강-육신과 죄(롬7'12-17)이근호130623

아빠와 함께 2013. 6. 23. 14:43

 

육신과 죄(로마서 7:12-17)

음성          동영상

 

구분된 동영상1      동영상2     동영상3

 이근호 13-06-23 13:29 
육신과 죄

2013년 6월 23일                               본문 말씀: 로마서 7:12-17

(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7:13)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7: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7: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율법이 선하냐 내가 선하냐를 놓고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율법이 선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율법이 선하심은 ‘나의 악함’을 전제한 선함이라고 말합니다. 율법도 선하고 나도 선하는 그런 식은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을 보는데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익히는 것들을 토대로 해서 세상을 구축합니다.

그러다보니 성경 용어나 종교 용어만이 현실이 아니라 경제 상황, 정치적 상황까지 모두 현실로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현실관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율법, 죄, 선, 악, 죽음 이런 특수한 용어를 통해서 현실을 구축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안목에서 볼 때에 인간은  ‘나는 이미 죽었다’가 성립된다다.

13절에 보면,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새삼 언급하고 있으니, 이 하나님의 현실관 속에서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이 인간 사회에서의 죽음이란 모든 것의 끝이요 마감이요 더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현실에서는 죽음이란 하나의 과정이요 절차에 불과합니다. 죽음 이후를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현실에서는 인간의 삶이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고 ‘율법이 선하다’는 점을 보이기 위한 용도로 당연히 죽어야 하고 죄인이어야 하고 악인이어야 하고 지옥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의 내리앉는 무게로 인하여 현실 일부가 찌부러져서 왜곡된 현실을 갖게 말입니다. 즉 자신이 움직이고 안주하는 그 공간이 마치 세상의 중심인양 행세해서 참된 중심성을 모독하는 발언과 행동을 보여주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는 예외라는 것이 없습니다.

율법이 오게 되면 사람은 모든 것이 죄로 지적받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3:21-25에 보면,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맨 끝을 주목해보세요.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입니다.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즈음 말로 하면 가정교사를 뜻합니다. 가정교사는 집에서 학교에 정식으로 들어가서 배울 것을 선행학습을 시키기 됩니다. 그런데 이 율법의 방문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신이 마치 선해도 되는 존재인양 행세하게 됩니다.

즉 율법이 온 것이 모든 것을 죄 안에 가두어서 어느 인간이든 예외에서 죄인이라고 이미 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율법을 상대로 하여 얼추 예수님을 만날만한 사전 마음 준비가 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이런 생각은 아직도 자신만큼은 구원받을 만한 자격자가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허지만 율법은 우리 인간을 개별적으로 접촉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아담과 일괄적으로 상대하십니다. 그것은 율법은 우리 인간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을 고려하고 염두에 두면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의 죄를 겨냥해서 고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입니다.

한참 음주단속하면서 범칙금을 부과하는 경찰관을 향하여 붙들면서 계속 외치기를 “제발 저와 결혼해주세요”라는 하면 이것은 공무집행방해죄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됩니다”고 할 것입니다. 바로 이 자리는 모든 인간들이 율법에 의해서 선함이나 의로움과 무관한 존재라는 것을 원천적으로 발각시키는 자리입니다. 동시에 그 어떤 인간도 죄로 인해 하나님과 결별해야 된 대상임이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인간들은 실제로 율법을 따지면서 자신들이 도리어 그 율법을 재판하려 합니다. 자신의 행동을 의롭다 여길만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 법들은 위법인 것처럼 평가를 내립니다. 마치 바래시인이 서기관이나 사도개인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은 성햐을 오늘날 우리들도 여전히 보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몽학선생이란 무슨 의미입니까? 이는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이 만들어진 자리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앞장 서서 몽학선생의 기능을 하게 하셨기 때문에 몽학선생을 학생 본인이 골라잡아서 예수님에게 도달된 방법은 없습니다. 율법이라는 몽학선생에서부터의 풀려남도 인간에게는 성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율법은, 곧 말씀은 죄를 유발시키시는 기능과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려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율법의 몽학선생 기능이란 이미 그리스도의 완성의 혜택을 입는 자들에게만 예수님과의 만남이 오로지 말씀을 통해서만 계속 진행될 수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 쪽에서 예수님 믿는다고 율법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 안에 있는 자만이 자신은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체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형마트에서 물건 가득 샀으면 그 물건 갖고 다시 백화점에 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필요한 물건은 다 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트 주인되시는 예수님은 그 손님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그 물건을 가득 실은 채 백화점을 돌아보게 합니다. 얼마나 가격 차이가 나는지를 실제로 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흘린 피가 얼마나 고귀하고 감사할 피인지를 두고두고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마트 주인이신 예수님에게만 감사케 합니다.

인간의 육신에게 죽을 때까지 쏟아져나오는 그 모든 것들이 율법 앞에서 의로움인 것이 체험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자꾸만 보상받겠다는 심보로 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내 인생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간으로 바꾸어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로마서 7:12-17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성경에 나오는 이 용어들, 계명이나 율법이나 죄라는 것, 죄 아래 팔렸다, 이런 용어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볼 때 이런 개념들로 짜서 이 세상을 본다는 뜻입니다. 우리현실 같으면 한국, 북한, 미국, 경제사정, 전기세, 주식거래, 금리인상, 이런 용어들을 가지고 세상을 다루고 다듬어 가거든요. 경제용어나 정치용어들, 대선이나 국회의원, 월드컵, 프로야구, 이런 용어들을 가지고 우리가 세상을 구성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볼 때나 그런 것이고 하나님이 세상을 파악할 때는 그런 용어들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달리 사용하는 겁니다. 그것을 가지고 계시라고 이야기합니다. 같은 용어, 같은 사람들이 쓰는 단어인데 그 짜임새가 뭔가 달라요. 그 짜임새에 들어오는 사람만 하나님이 보는 안목을 같이 볼 수가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라고 합니다. 선한 것이 나오고 사망이 나오고 그 다음에 아주 특이한 내용이 더 나옵니다.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함이니라.” 이런 문장들은 수능에 안 나옵니다. 수능시험에 안 나오지만 우리가 그 나라에 가야 되기에 제가 깨알같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선한 그것으로 내가 죽게 만들었으니, 이렇게 하게 되면 사람에게 죽음이란 막장입니다. 내가 더 이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선한 것이 나로 죽게 만들었다 할 때 이 문장은 우리에게 무슨 안목을 요구하느냐하면, ‘난 죽으면 끝이다.’가 아니라 죽음이 있고 난 뒤에 또 무슨 일이 있는가를 지금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그 이야기는, 우리 인간이 생각하기는 죽으면 끝이지요. 좋아하는 것이든 사랑하는 사람이든 다 떠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에서는 죽음이 끝이 아니고 죽음은 하나의 과정이며 절차입니다.

여러분이 라면 끓일 때 봉지에 담긴 스프의 심정을 헤아린 적이 있습니까? 스프가 뜨거운 물에 들어갈 때 스프 개인의 입장에서는 죽음이고 끝나는 겁니다. “난 끝났다. 이런 뜨거운 물에 들어가기 위해서 스프가 되었구나.” 하는데 스프가 끓는 물에 들어가서 라면이 맛있게 끓여져서 나올 때 비로소 스프는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에 자신이 흩어져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스프 하나, 이 몸 하나 죽어서 라면만 맛있게 된다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겁니다. 스프가 라면을 이루는 재료가 돼요. 하나님이 계명을 주시고 선한 것을 주시는 것은 제발 네가 죽어줘, 그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냥 죽으면 안 되고 “하나님의 계명의 거룩하심, 선하심을 드러내면서 제발 죽어줘.”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죽어주게 되면 “너 같은 인간은 계명에 의해서 죽을 정도로 하나님의 계명은 거룩하고 고상하고 선합니다.” 이 향기가 하늘나라에 확 퍼질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역할이 뭐라 하는 것, 우리 존재의 의미가 ‘아, 하늘나라라면 끓일 때 스프 같은 역할을 하는구나.’라는 하나님의 안목을 약간이나마 이해를 할 수 있겠지요.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늘나라 이루는 그것밖에 몰라요. 우리의 개인적인 사정 같은 것은 고려치 않아요. 우리가 쓰이는 것은 하늘나라에 쓰이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지옥 가는 사람의 특징은 성질이 하늘나라에 부합되지 않기에 하늘나라 스프로 사용을 안 해주는 겁니다. 지옥 가는 사람은 자기가 소중하고 자기가 선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무식하다 해도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니까 그거잖아요. ‘율법이 선한가, 내가 선한가?’ 그 싸움이지요. 그 싸움이 이미 판정 났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것이 아니고 율법이 선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야구를 할 때 내가 삼성라이온즈를 좋아하고 롯데자이언트를 안 좋아한다면?

대개 대구 사람들은 삼성 팀 좋아하고 부산 사람들은 롯데 팀을 좋아하지요. 그러면 누가 이기느냐 할 때, 내가 이기는 편에 속하면 기분 좋지요. 내가 부산사람이라면 롯데가 이기면 좋고 대구 사람이라면 삼성이 이기면 좋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선하다 하는 것은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거기에 내가 소속됨으로써 나도 같이 선하다고 인정받을 때 기분이 괜찮아요. 기분 상당히 좋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내가 탄 버스하고 택시가 충돌을 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자기가 탄 그 버스를 편들기 마련입니다. 만약 택시를 탔다면 버스가 잘못이고 자기가 탄 택시가 옳다고 보는 거예요.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편에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인간은 세상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좀 더 심도 있게 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어떤 자리를 마련하게 되어 있는데 자기가 마련해서 서게 된 그 자리로 인하여 그 자리가 들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세상을 잘못 해석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의 중력 때문에. 만약 내가 냄비위에 서 있다면 내 무게로 인해서 냄비가 찌그러지겠지요. 그러면 그 때부터 내 위주로 세상을 잘못 보게 되는 겁니다. 생중계가 잠시 멈춰서 다시 할게요.

사람은 자기 생각하는 그 순간에 이 세상을 이루는 그것이 잠시 무너지고 뭉개지게 되어 있습니다. 무너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자기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에 아무리 정확하게 세상을 해석한다 하더라도 이미 반칙이고 잘못된 거예요. 자기 무게, 자기 중력으로 인해서 찌그러들게 되면 평평해야 될 세상, 순수하고 깔끔하게 보여야 할 세상이 자기 자신이 여기 있다는 그 이유로 인해서 눌려서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버스 탄 사람은 버스 편 들고 택시 탄 사람은 택시 편드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렇게 육신이 있는 것은, 몸무게가 얼마고 키는 얼마고 이렇게 육신이 있는 것은 죄에 팔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이 육신을 부여했다.”는 겁니다. 내가 죄에 팔렸다, 안 팔렸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내가 죽게 된다는 그 사실은 하나님이 짜놓은 세상으로 볼 때 그냥 죽는 것이 아니고 죄의 값으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늙어서 죽을 때 “죄 값으로 죽는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너의 육신은 죄에 팔려서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데 그것은 율법을 우리에게 주었다는 겁니다.

율법, 그것이 십계명이든 안식일이든 십일조든 율법을 받거든 ‘아, 나는 죄에 팔려 있고 그래서 이것을 지킬 선한 것이 내게 없기 때문에 결국 내가 나이 들어 죽든지 교통사고로 죽든지 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는 것을 미리 알아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나 중심으로, 내가 여기 서 있다는 그것 때문에 일방적으로 세상을 보던 그 현실관은 엉터리 현실관이라는 것을 우리가 눈치 채야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냥 죄에 팔렸다, 하는데 성경전체를 보게 되면 우리가 죄에 팔린 이유가 우리로 하여금 그 배후에 우리 육신을 장악하는 힘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육체를 힘이라고 보는데 잘 본 거지요.

육체는 힘에 의해서 조종 받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람이 힘이 있을 때 비로소 자기를 느낀다는 이야기입니다. 좀 깊이 있게 이야기하면 자기가 어떤 힘을 느낄 때 그 힘 때문에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힘이 생길 때 느낄 때 힘이 빠질 때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 되면 안 죽으려고 버틸 때 비로소 사람은 그동안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왔다는 것이 들통 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은 어려운 이야기인데 제가 함부로 여러분에게 이야기 합니다. 감당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함부로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무심코 있을 때 자기를 못 느끼는데 상대방이 자기를 공격할 때 갑자기 ‘그래, 나를 지켜야 해.’라고 할 때 자기 자신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공격받거나 뭔가 빼앗길 때 자기 자신이 오므라들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공들인 것을 지키려고 하기 마련이에요. 지킬 때 어떻게 지키는가, ‘빼앗기면 안 돼.’라는 식으로 지키는데 이유를 댄다면 ‘그동안 내가 나한테 한 짓은 다 착하고 선한 것이기에 이 선한 것을 절대로 포기할 수 없어.’라고 되는 거예요. 궁극적으로 남은 문제는 이거예요. “내가 선합니까, 율법이 선합니까?” 그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들이대는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미리 항복했어요. “율법이 선합니다.” 라고 하는 순간 “저는 악합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거예요. 율법이 주어진 것은 우리를 악하다고 지적하기 위해서 준거라고 하는 겁니다. 지난 주일에 읽었던 본문에 보면 “내가 탐심을 몰랐는데 ‘탐내지 말라’는 말씀이 오는 순간 잠자고 있던 탐심이 일어나서 ‘누구야! 이렇게 착하디착한 나 자신을 탐내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는 게 누구야? 저리가라!’”라고 거부하게 되어 있지요. 그게 바로 탐심이에요. 죄라는 것은 다른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나는 착하다. 그리고 나는 착해져야 한다. 이 착한 나는 천국에 가야 돼.’ 이 모든 것이 죄에요.

이렇게 착할 것 같으면 율법이 주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율법이 없어도 착한데 뭣 때문에 율법을 주겠어요? “아이고 착해요. 천국 가세요.” 하고 천국에 모시면 그만이죠. 율법이 마중을 나오는 것은 “네가 착하고 선하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통한 하나님의 모든 안목이 너한테 완전히 초치기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너한테는 거짓말을 한 셈이 되어버렸다는 말이거든요. 안착한데! 순하지 않아요. 그리고 우리 조상이 선악과를 따먹었기에 우리는 지옥에 가야 됩니다. 그런데 부득부득 천당 간다고 설치는 것 보니 가당치도 않아요. 웃기는 이야기에요. 그것보다 더 웃기는 것은 예배당 만들고 교회 만들고,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이 누가 와서 자기를 지적하게 되면 그 지적을 하는 법 자체를 재판하게 됩니다. 재판할 수 있는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보는 거예요. 자신을 악하다고 하는 그 선한 법 자체를 가지고 “내가 보기에는 그 법 자체가 틀려먹었다고.”라고 오히려 재판을 해버립니다.

성령이 오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근거로 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하는 말이 이겁니다. “네가 하는 모든 재판은 다 엉터리였다.” 그것을 매일같이 지적하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을 받았다 하는 것은 “제발 네 자리로 좀 돌아가! 이것들아.”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에요. 로마서 8장에 보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라고 하잖아요.(롬 8:26) 그러면 성령의 일은 딱 그거예요. 열심히 기도했는데 “너 몇 시간 기도했어?” “두 시간 했습니다.” “네 자리로 돌아가. 기도할 줄도 모르는 게.” 방금 두 시간동안 기도했는데, 예수 이름으로 붙이면서 기도했는데.

우리가 거룩한 사람 되고, 우리가 거룩한 생활 되고, 우리가 의인되고, 하는 이 모든 것은 성령 본인의 숙제지 우리 숙제가 아니네요.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으로, 십자가의 영으로 오시기 때문에 십자가만이 거룩하고 십자가만이 다 이룬 율법의 완성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에 육신으로 남아 있는, ‘나는 나름 가치 있다, 나는 나름 선하다.’ 이것을 발췌해서 업어 치고 메어쳐서 계속 꾸중하는 역할을 하시는 겁니다. 남의 자식 같으면 꾸중을 하지를 않아요. 자기 자식이기에 꾸중을 하시는 거예요. “선하지도 않은데 왜 자꾸 선한행세를 하느냐, 이 답답아!” 이런 뜻이에요.

안착하고 안 의로운데 왜 자꾸 의롭다고 하느냐는 말이거든요. 인간은 자기가 자기를 만들었다는 자기 일방적인 엉터리 현실관, 세상을 자기중심으로 보기에 그런 일방적인 엉터리 현실관 때문에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아주 애를 씁니다. 그러다 보니까 뭔가 미흡하다 싶으면 자꾸 보상을 바라요. 사람들이 교회 오는 이유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보상받기 위해서. 뭔가 기도하고 헌금하고 예배참석하면 뭔가 내가 놓치고 빼앗긴 것을 주께서 회복시켜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구원은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거지요. 현재의 흙에 속한 우리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꾸 현재 있는 것도 귀하게 여기고 여기에 빠진 나머지를 자꾸 채우려고 합니다. 노래도 이런 게 있어요.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가기를…….” 그리워하면 언젠가는 만나게 된다는 거예요. 자꾸 뭔가 그리워해요. 자꾸 기대하고 그리워하고. ‘주여, 이런 상황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은 거기에 대고 경상도 말로 이래요. “뭐꼬? 네가 뭔데? 네가 뭔데!” 네가 뭐 길래 그렇게 아까워하느냐는 말입니다. “제 몸이 아깝잖아요.” 하거든요. 평생 네 중심으로 살았으니 네가 아깝지. 평생 자기중심이니 자기가 아까운 거예요. 빠진 것을 채우려고 하고 회복시키려고 하고.

그래서 그 보상책으로 교회 찾아오고. 그러면 안 돼요. 교회는 우리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못합니다. 교회라는 것은 이미 안 채워도 되는 사람, 이미 준비된 하늘에 속한 형상의 그 우리 몸이 준비되었기에 이제는 이 고물덩어리, 고철덩어리가 같은 이것, 내 놔도 할머니들조차 가져가지도 않는 고철덩어리, 똥 싸고 오줌 싸는 이것을 내버리는 작업을 하는데 그냥 내버리는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아, 이것이 죄고 이것이 죽음의 이유가 이것이 바로 율법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평생 쏟아내 가면서, 피고름 쏟아내 가면서 이미 우리의 몸은 하늘에 따로 마련되어 있음, 이미 그 하늘의 몸을 받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현상,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라는 겁니다.

이 육에 속한 것은 벗어버리고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을 때가 온다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예수님도 우리 죄의 결과를 죽음으로,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저주의 모습으로 보여주시고 또 이미 저주에서 풀려서 축복의 대상인 사람은 부활로 보여주기 위해서 부활의 새 몸으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종교도 아니고 교리도 아니에요. 이미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그 현장의 저 끝에 가면 부활이 있어요. 아직 부활이 안 되었기 때문에 이 몸을 그냥 가지고 있지만. 이 몸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부활이라니까요.

연결되었기에, 우리를 부활시키려고 하기에 미리 주신 것이 뭐냐 하면, 바로 계명이라는 겁니다. 계명이 그렇기에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를 지적하고 나를 죽인다고 했기에 계명은 정말 선하시고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참 예상 밖이고 철저하고 완전하고 완벽하십니다. 우리는 그 완전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즐거워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똥 싸고 오줌 싸는 이것이 완벽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정체를 날마다 폭로시켜주니 그만큼 너는 구원받았다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그 소리가 고맙습니다, 하는 뜻이에요.

맨 날 엑스레이 찍고 그래서 우리의 허접한 몸을 드러내는 거예요. 우리는 맨 날 육신의 죄를 반복하고. 그래서 13절에 보면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죄가 죄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도대체 하나님이 하는 일이 뭐가 잘못입니까? 하나님한테 하등 억하심정을 가질 이유가 저는 없다고 보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는 하나님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사사건건 하나님이 욕을 얻어먹으면서 살아야 되는 거지요?

율법이 와서 우리를 건져내는 그 과정과 절차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 21-25절에 잘 나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약간 어려운 대목이 있는데 그것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율법을 주신 것, 십일조나 십계명이나 안식일 계명을 준 것은 살게 하기 위함이 아니고 죽은 인간 죽었다고 통보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주입된다는 그 말입니다. 22절,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가두어두었기에 손톱 길러가면서 벽을 파서 탈출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시도를 하지 말라는 그 말이에요. ‘이것 지키면 의롭겠나, 저것 지키면 내가 의롭겠나.’ 그런 시도를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네 손톱만 피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아, 믿음이 오기 전에,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율법 앞에 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율법 아래 매인바 되었으니 그 앞에 “꽁꽁”이라는 말을 집어넣어 보세요. “율법 아래 꽁꽁 매인 바 되고.” 이렇게 보시면 돼요. 율법의 노끈, 율법의 밧줄로 우리를 꽁꽁 묶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23, 24절에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어렵다는 것이 뭐냐, “몽학선생”이라는 말이 어려워요. 25절에 “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선생이 있다는 말은 학생이 있다는 말이거든요. 몽학선생을 요새 말로 하면 가정교사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들어가기 전에 집에서 대충 한글도 익히고 셈도 가르치는 것이 가정교사거든요.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가정에서 가르치는 가정교사로 언급하는 겁니다. 이 말이 어렵다는 것은 가정교사가 잘 가르쳐 놓으면 선행학습을 미리 했기에 나중에 학교에 갔을 때 보탬이 되고 학교 선생님에게 잘 인수인계가 된다, 이게 우리 생각이잖아요.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가정교사가 오게 되면 우리가 “야, 가정교사다. 오늘도 선행학습을 해주세요.” 하고 우리가 율법을 붙들어서 드디어 예수그리스도가 오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여력이 생겨서 예수 믿는다, 라고 우리는 하고 싶은데 성경에서 뜻은 그것과 정 반대입니다. 율법이 오게 되면 우리가 율법을 붙들 수 있는 그 모든 것은 끊어지고 차단되었다는 것을 통보하기 위해서 율법이 온 거예요. 율법이 왔으니 율법을 잘 믿으면 나중에 예수님이 잘 오셨을 때 우리가 잘 참고해서 예수를 좀 더 잘 믿을 수 있다, 라는 아이디어는 전혀 율법의 취지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아주 믿음이 안 온 경우입니다. 믿음이 안 와서 옛날 율법 지키는 속성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자꾸 자기가 살 궁리를 해서 율법을 붙들려고 합니다. 교통순경이 과속 단속하는데 어떤 아가씨가 걸렸다 합시다. 그 아가씨가 차창을 내리고 하는 말이 “경찰관님, 저하고 결혼해 주세요.” 그렇게 합니까? “과속하셨습니다.” “아저씨, 저와 결혼해주세요. 저 아직 아가씨에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과 붙으라고 준 계명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벌금 7만원입니다.” 이것을 지적하기 위해서 준 것이지 율법을 가지고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율법은 오늘 본문대로 죄를 더욱 죄 되게 하고 우리를 죽이려고 오는 거예요. 교통순경이 하는 말이 “아가씨! 지옥가세요.” 그리고 가버립니다. 율법이 미리 왔다고 해서 율법을 붙들 수 없는 이유, 율법과 결속될 수 없는 이유는, 중요합니다!, 중요한 단 한 가지, 율법은 우리를 사적으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집단적으로 아담의 자손으로 보기에 아담, 인류 전체를 가지고 다 죽었다고 규정하기 때문에 그 안에 한 사람으로 포함된 나, 대표자도 아닌 내가 나서서 “저 사람은 안식일을 안 지켜도 내가 지킬게요.” 이런 안식일은 없습니다.

잘 들으세요. “나는 십일조를 했는데 저 사람은 십일조를 안했어요.” 이런 것이 없어요. 율법은 아담하고만 상대하는 겁니다. 이미 아담과 상대해서 결론 나버렸어요. 사적으로 각자 율법 지켜서 율법 지킨 사람은 선한 사람이고 안 지킨 사람은 탈락하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율법이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율법은 나만 따로 지킬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왜냐, 너나 할 것 없이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그 모든 세력이 악마고 죄고 사망이기에 저 사람을 움직이고 있는 악마가 다른 악마가 아니에요.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악마가 따로 따로 붙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죄, 동일한 사망, 동일한 범죄가 다 같이 우리 배후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장발장이 배부를 때 빵가게에서 빵 훔친 것이 아니에요. 배고플 때 빵을 훔쳤잖아요.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가 6.25때 이야기, 수백 번 들은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함경북도까지 진격했는데 중공군이 밀려들어왔어요. 그래서 원산에서 배타고 부산까지 퇴각하는데 그 가운데서 양식은 하나도 없고 달랑 건빵 두 개 남았답니다. 우리 아버지가 한 의로움 하는 분이라서 그 건빵 두 개 부하 주고 자기는 안 먹었대요. 사람이 배고프면 배고픈 상태에서 배 안고픈 상태로 원상복귀하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다 하게 되어있어요. 그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내가 나답다는 것은 배 안고파야 되는 거예요.

따라서 눈에 뵈는 게 없어요. 하나님이고 뭐고 내 것을 빼앗아 가면 하나님도 나쁜 하나님이고 미워하는 예수고. 내가 나다운 것은 이 모습인데 왜 그것을 허락을 안 해주느냐는 거지요. 기도 좀 하다가 기도응답 안되면 기도 때려치워버리는 것이 우리 마음 아닙니까? 사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받으면 자기가 선하다는 것을 자꾸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그걸 자꾸 차용하고 이용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계명이 온 것은 우리보고 착하다는 여지를 조금도 주지 않기 위해서 계명이 온 거예요.

무슨 교회법이 그렇게도 많은지. ‘장로 뽑을 때는 3분의 2 찬성으로 하라.’ 과반수 찬성으로 하면 지옥 갑니까?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법을 만들 때는 그 법을 지킬 수 있기에 법을 만드는 거예요. 법이 있는 곳에 힘이 있거든요. 아버지가 딸을 보고 “10 이전에 들어와.” 하는 것은 본인이 10이전에 들어올 자신이 있기에 그 법을 만든 겁니다. “밥 먹을 때 좀 채소도 곁들여서 먹어라.” 하는 그 말은 본인이 채소가 좋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람이 무슨 말을 내뱉고 행동을 할 때 “이러니까 내가 착하다.” 하는 그것이 포함되어 있어요.

그래서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기에 자기 해코지 하면 그 법은 나쁜 법이라고 내쳐버려요. “그 법은 법도 아니야.” 그렇게 내침을 당할 때 예수님도 같이 내침을 당한 거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앞에서 예수님이 죽은 것처럼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사, 장로, 집사, 교인들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어요. 또 다시 그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인천에 있는 구 목사님이 녹취를 다 하고 끝에 이런 멘트를 해 놓았어요. 대구 강의 녹취를 하고 있거든요. 벌써 녹취를 10년째 하고 있는데 지난 녹취 끝에 이 멘트가 있어요. “교인 300명이 뭐고? 30명만 있었으면.”

그 글을 보는 순간 무엇을 느꼈느냐 하면 ‘나는 적어도 30명 정도는 목회해야 될 사람이다.’라는 것, 나는 그 정도 되어야 나답다는 생각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날마다 사라져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뭐냐, 우리가 나다운 것을 모으지 말고, 보관하지 말고 주시는 하루를 소모해버리세요. 소모하라고 주신 하루라,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기 인생을 잘라버리세요. 자기 뒷주머니에 사직서를 써서 늘 넣어두세요. 날마다 자기 자신과 사직하세요. 자신을 사직할 수 있어야 남보고 “같이 죽자.” 할 수 있는 거예요.

“300명 교인의 목사, 너 사직해. 30명 교인의 목사, 너도 사직해. 나도 사직하겠다.” 늘 어떤 마음이냐 하면, 무 밭에서 무를 하나 뽑아서 부엌칼 들고 무를 탁 잘라먹는 상 남자 있잖아요. 까짓 거 매일같이 잘라서 ‘어떻게 하면 하루를 잘 살까?’ 잘 살까 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내 모가지를 자를까?’ 매일 같이 자기의 모가지 치고 가슴치고 팔 다리 쳐서 나중에 죽을 때 되면 그냥 빈껍데기로 푹 죽으시고 내일 되면 내일 분의 하루라는 시간이 주어지거든요. 그러면 아침부터 잘라내면서 하루를 다 소모해서 죽었다 치고 그날 잠 주무시고 또 내일을 부여받고, 그렇게 사세요.

사람이 잠 잘 때 자기 본모습이에요. 잠 잘 때는 북한 핵도 모르고 잘 때는 토네이도도 모르고 잠 잘 때는 그냥 죽은 거거든요. 죽은 인간을 주께서 하루하루 계속해서 에너지를 줘서 매일 같이 살려내니 우리는 그것을 자꾸 모으려고 하지 말고, ‘십년 살았다, 2십년 살았다…….’ 얼마 전에는 ‘60년 살았다…….’ 엊그제는 내가 60년을 살았다고 예쁜 옷을 하나 주는데 참 고마웠지요. 그런데 받고서 가만 생각해보니 다음에 이런 옷을 받으려면 60년을 또 살아야 돼. 내가 120살이 돼야 이거 하나 더 받아요. 내년에는 절대 안줄 것 아닙니까?

무 자르듯이 매일같이 자신을 잘라주세요. 그리고 주무실 때는 아예 나라는 것이 하나도 없고 뿌리 채 다 잘라서 실컷 먹어버리세요. 그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보내주신 이유입니다. 죄를 더욱 죄 되게 해서 그 죄 값으로 죽어가는 하루하루를 보낸 겁니다. 그렇게 죽어버리면 누가 구원받는가? 구원 못 받지요.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에는 몽학선생을 보낸 분이 있어요. 이게 중요하지요. 가정교사라 하는 것은 율법을 줬을 때 우리는 가정교사가 개인적으로 붙으면 우리는 가정교사 팔이나 다리 붙들고 초등학교 들어가듯이 본격적으로 하늘나라 간다, 이런 생각이 드는데 율법이라 하는 것은 나 개인을 위해서 준 것이 아니고 또 네가 특별히 미워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은 똑같이 죄 안에 갇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몽학선생, 가정교사라는 율법을 줬거든요.

그러니까 그 가정교사를 우리 쪽에서 붙든다는 그 자체를 율법으로서는 용납을 안 해요. “저리 가! 날 붙들어서 구원되겠다고? 어디서 이런 수작을!” 하고 그 수작을 용납하지 않고 내쳐버립니다. 그런데 구원받는 당사자는 뭐냐 하면, 율법을 앞장세워서 나중에 믿음이 오게 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미리 우리에게 율법을 줬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율법을 줬지만 그것을 줬다는 것을 알아채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율법 때문에 알아챈 것이 아니고 성령이 오고 믿음이 오게 되면 ‘아, 율법이 우리로 하여금 정신 차리라고, 네 주제파악 하라고 우리를 구원하실 분이 우리에게 미리 던져줬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렇게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율법인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게 되는 겁니다. 어디 안에 있는가? 믿음 안에, 예수님 안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존재해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아, 나는 그 율법 가지고 착해지려고 했는데 내가 착해지고 의로운 것은 율법이 아니고 도리어 율법은 나로 더욱더 죄 되게 하는구나.’ 그렇다면 결론은 뭐냐, 나를 더욱더 죄 되게 하는 그 사람만이 의인이고 그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끝으로 약간 촌스러운 예를 하나 들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마트에 가서 옷과 가방과 여러 가지 가정에 필요한 것을 잔뜩 샀어요. 본인이 얼마나 싸게 샀는지는 몰라요. 그냥 누가 주니까 고맙다고 받기는 받았는데 그 가격이 어느 정도 싼지는 몰라요. 주님께서는 실컷 사게 해놓고 그 다음에 어디를 가느냐하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백화점에 가요. 이미 물건 다 사놓은 마당입니다. 이미 다 이루어졌어요. 물건 다 샀다니까. 그런데 새삼스럽게 비싼 백화점에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네가 산 물건하고 저 물건들 하고 비교해 보라.”하는 거예요.

비교 해보니까 백화점은 비싸도 너무 비싼 거예요. 백화점은 가게세 자체가 비싸니까 그만큼 물건 값도 비싸지는 겁니다. 이 예처럼 우리도 이미 구원받았어요. 구원받고 난 뒤에 일방적으로 우리를 의인되게 한 이 축복, 이 놀라운 불쌍히 여기심의 기적이 얼마나 큰 감사덩어리인지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평소에 우리가 육신으로 살던 그 행세를 평생 동안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율법이 가득한 그곳에 가게 하는 겁니다. 절대로 우리가 율법에 매이지는 않아요. 율법에 매이지는 않지만 율법이 우리 육신과 마주쳐서 어떤 것들이 나오는가는 우리가 계속 내 뱉어 줘야 되는 겁니다.

기도했다고 자랑하고 헌금했다고 자랑하고 복음 좀 안다고 자랑하고. ‘난 이렇게 착해. 난 이렇게 의로워.’ 그리고 그냥 의로움으로 끝나는 겁니까? 재정적으로 하나님께서 생활의 편의를 주셔야 한다고, 월급 올려달라고 손도 내밀고. 내가 복음 이렇게 아니까 우리 자식 잘 돼야 되고, 우리 남편 예수 믿어야 되고, 교회 부흥되어야 되고, 300명은 아니어도 한 30명은 돼야 되고……. 우리가 세상을 내 중심으로 보는 그 육신의 본성, 그 육신의 본성은 지금 계속 무너지고 있는 거예요. 붕괴되는 그 와중에 기어이 발악을 하네.

붕괴되면서도 곧 죽어도 자기 잘났대요. 노인들 한 번 보세요. 연세 많은 분들, 치매 걸려도 왜 자존심은 치매가 안 걸리는지 몰라요. 곧 죽어도, 곧 죽어도 반성할 줄 모르고 자기 잘났다 하고, 자기가 똑똑하다 하고, 자식 보면 훈계부터 먼저 하려고 들고. 끝까지 개별적으로 자기는 돋보여야 되고. 사도바울은 이것을 예수님 안목에서, 하나님 안목에서 봅니다. “주여, 선한 것은 제가 아닙니다.” 이 한마디, “저는 선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속에 괴물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악을 행하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죄가 이 육신을 통해서 이 죄를 드러내고 있네요.”

청일전쟁이 더 나쁜 이유는 우리나라 땅에서 남의 나라가 전쟁했다는데 있습니다. 이게 문제잖아요. 싸우려면 저희들 영토에서 싸워야지 왜 남의 나라 땅에서 전쟁을 해서 해를 끼칩니까? 우리 육신이 그런 거예요. 예수님과 죄의 싸움판에 우리가 몸을 대여한 거예요. 우리 몸은 대여한 몸이에요. 마귀는 자꾸 “너는 잘났어. 포기하지 마!!” 이런 식으로 자꾸 격려를 하고요. 그리워하면 언젠가는 만나게 되는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진다느니, 계속 우리로 하여금 미련과 낭만에 빠지게 하는 거예요. 나중에 정신 차려보면 모든 것, 내 인생은 사적인 것이 아니고 이미 집단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한꺼번에 의미를 줬어요. “모든 인간은 죽은 것이라.”(고후 5:14)

그 의미 속에 우리가, 내가 하나의 물방울처럼 포함되었다는 사실에 불과한 거예요. 이런 노래가 있어요.

<연극이 끝나고 난 후>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적이 있나요.

음악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도

이젠 다 멈춘 채 무대 위에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배우는 무대 옷을 입고

노래하며 춤추고

불빛이 배우를 따라서 바삐 돌아가지만

끝나면 모두는 떠나 버리고 무대 위에

정적만이 남아 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무대 위에 남아

아무도 없는 객석을 본적이 있나요

힘찬 박수도

뜨겁던 관객의 찬사도

이젠 다 사라져

객석에는 정적만이 남아 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관객을 열띤 연기를 보고 때론 울고 웃으며

자신이 주인공이 된 듯 착각도 하지만

끝나면 모두는 떠나버리고 무대 위에

정적만이 남아있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우리 인생에서 내가 주인인양 잘 보이려고 남의 시선 의식해서 어떻게든 예뻐 보이려고 하는데 나중에 은퇴하고 무덤으로 사라지고 난 뒤에 그 무대를 여러분이 관객이 되어서 한 번 바라보세요. 내가 설치고 다녔던 그 무대, 정적만이 흐르고 고독만이 흐르고 있죠. 죽고 나면 수개월도 안 되어서 다 잊어버리고. 난 아직도 김대중 대통령이 살아 있는 줄로 착각한다니까요. 잊었어요. 그 분 죽은 것 챙기는 것이 내 일이 아니니까. 인생이란 것은 한 번 이 시대에 살았잖아요. 90이 되어서 다 쓸어갔습니다. 그 다음 80대 쓸어가고, 어차피 이 세상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시게 되어 있고 그 다음 젊은 사람들이 늙어가게 되어 있고 죽게 되어 있고, 인생이란 이렇게 또 다른 누군가 나같이 생긴 인간이 설치고 잘난 체하다가 무대에서 사라지고 그 다음 젊은 누군가가 무대를 차지하고, 인간은 그냥 살다가 안개처럼 사라질 뿐이에요.

이것을 주께서는 익히 아시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일관됨,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잘했다거나 못했다는 것을 일체 묻지 아니하시고 일괄적으로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네 모든 죄를 용서하겠다는 것을 자기의 택한 백성, 몽학선생을 이해하는 택한 백성에게만 전하는 그것, 그때 우리는 “복음이, 믿음이 나에게 찾아왔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더 이상 율법에 속하지 않고 믿음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정신 차리게 하여 주옵소서. 세상 하나님 안목으로 봐야 하는데 날마다 내 위주로, 내 중심으로 봤습니다. 그것도 죄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주여, 날마다 죄를 보여주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요 구원받은 모습의 거룩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첨부파일 : 39강-롬7장 12-17(육신과 죄)130623-이 근호 목사.hwp (33.5K), Down: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