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로마서42강-원수지간(롬8;5-9)이근호130714

아빠와 함께 2013. 7. 14. 15:07

 

원수지간(로마서 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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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근호 13-07-14 13:30 
원수 지간

2013년 7월 14일                                 본문 말씀: 로마서 8:5-7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육신의 일 따로 있고 영의 일이 따로 있다는 것은, 인간 모독으로 간주 될 다분합니다. 일이란 오로지 창조적 노동이 전부라고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이 세상에서 지속적으로 창조적 작업을 시행하게 됩니다. 멈추지 않는 열정으로 계속해서 새로움과 새로움을 남기려고 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문명이란 멈추지 않는 인간의 열정과 지혜와 용기와 반성과 개선의 산물입니다. 장애가 등장하면 물러서거나 외면하지 않고 돌파한 결과로 오늘날 찬란한 문명이 건설된 것입니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을 영웅시하거나 영웅으로 포장합니다. 영웅은 실패나 좌절을 모릅니다. 이겨냅니다.

인간의 일이란 이런 창조적인 속성으로 인하여 인간으로부터 찬사 받을 대상이 됩니다. 유(有)에서 유(有)로의 전환입니다. 인간들은 생각합니다. 신이 있다면 인간의 무한한 능력을 자극시키고 고취시켜서 만개할 때, 하나님은 인간으로 인하여 영광과 찬양을 받는다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의 일이란 그 자체가 보람을 인간에게 안겨다 주는 창조적이고 영적 사업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런 일을 ‘육신의 일’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뭔가 기분이 찜찜합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라고 구분지어서 인간은 평생 뭔가에 홀리듯이 쫓아다니는 본성에 매여서 산다고 단정합니다. 이 점도 또한 인간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의 후예들이 제일 먼저 만든 것은 도시입니다.

그 안에 인간 스스로 생존에 필요한 것들은 다 담겨있게 됩니다. 그들은 음악도 만들고, 목축업도 개시했고 기계도 제작했습니다. 나중에 이들은 바벨탑까지 건립을 시도하게 됩니다. 자, 이런 일을 하는 당시자들에게 물어봅시다. 자신들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는 일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황당해 할 것입니다.

인간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모든 것을 잃어도 자신의 육신만큼 잃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나기는 비 맞는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내립니다. 죽음이란 인간에게 먼저 묻고서 다가서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차려입은 아가씨라도 화재 현장에서 숯검댕이로 돌변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작업에는 육신보다 우선되는데 있습니다. 인간들이 시도하는 영적 일이라는 것은 기껏 불교가 그 시범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인생은 고(苦)라는 현실이해가 먼저입니다. 세상은 생노병사가 동반되는 고생의 바다라는 겁니다. 둘째로 인간의 고통은 마음에서 일어나며 그 마음이 어디엔가 집착에서 함으로서 나온다는 겁니다.

셋째는, 따라서 그 집착을 없앰으로써 열반에 들 수가 있다는 원리적 처방을 말합니다. 넷째로, 그런데 아무리 맑은 거울도 세상을 살면은 때가 묻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심신에 거울에 때 까듯이 때가 낄 거니까 늘 닦을 필요가 있다고 합나다, 그러기 위해서는 팔정도에 매진해야 한다는 실천이 불교 사상의 요지입니다.

8정도란 바른 말(正語)하기, 즉 거짓말하지 않기, 중상모략하지 않기, 욕설하지 않기, 잡담하지 않기입니다. 또한 바른 행동(正業)입니다. 살생하지 않기, 주어지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기, 사음(간사하고 음란한 마음)하지 않기입니다. 셋째로 바른 생계(正命) 그릇된 생계수단을 버리고 바른 생계수단으로 살아가기입니다.

넷째로, 바른 정진(正精進)하기입니다. 다섯째로 바른 알아차림(正念)입니다. 여섯 번째는
바른 집중(正定)하기입니다. 일곱 번째는 바른 견해(正見)갖기입니다. 마지막 여덟째는 바른 사유(正思惟)입니다. 자신의 육신을 기어 포기 못하고 자신의 육신이 선도하는 식의 인생관인데 이를 두고 오늘 본문 7절에서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에 해당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영을 좇는 자는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임신했다”입니다. 성경 말씀이 육신을 찾아오게 되면 육신은 본인의 육신의 생각은 거부당하고 찾아오신 말씀의 세계가 그 육신을 통해서 펼쳐지게 됩니다. 즉 ‘신 속에 성령님이 임해서’ 늘 육신을 육신대로 발산시키시는 일을 하시게 됩니다.

그럴 때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구약의 바로 왕이 하나님의 원수였지만 정작 히브리인들은 그런 점에서 무관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육신만 편하면 그만이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따라서 바로왕의 권력 밑에서 구원되리라는 것은 그들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그런데 10재앙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바로왕의 맏아들이 죽었습니다. 모든 애굽의 살던 가정의 맏이가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오로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갖다 바른 집의 맏이들이 살아났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안목에서 살고 죽는 것이 것이 인간들의 안목과는 다르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이 어린양의 피는 상자에 담겨서 이스라엘 내내 주도적으로 이끌게 됩니다. 구원이란 육신의 아이디어나 상상력에 의해서 성취 가능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로 도저히 눈치 챌 수 없고 그 뒤편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항상 장벽이 이스라엘 앞에 나타나게 됩니다.

요단강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생각들이 주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는 요단강 강물에 두니 범람했던 강물 속에서 길이 새롭게 생겨버렸습니다. 이것처럼 육신에게 있어 천국으로 가는 길은 항상 장벽과 마주하는 노선입니다. 인간의 노선으로서 그 다음번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미리 알아챌 수가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은 스스로 육신의 생각을 주도적으로 따라가면 아니됩니다. 성령을 따라간다는 말은 이미 인간의 육신 속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킬 마음도 없고 지킬 수도 없다는 그 말씀 자체가 장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 피가 주도적인 힘을 발휘해서 항상 십자가 피가 보이는 쪽으로 이끌림을 받는 것이 성령을 따르는 삶입니다.

이 따름 과정 속에서 성도는 자신의 육신됨을 혹독하게 경험해야 합니다. 자신의 포부와 기대와 아이디어가 늘 무너져내리는 즐거움을 맛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기도가 곧 우리 육신의 여망의 막장으로 이끌고 거기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결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