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4강-욕망의 화신들

아빠와 함께 2021. 8. 7. 08:44

2021여름수련회 사무엘하강해 제 4강 : 욕망의 화신들 - 이 근호목사

사무엘하를 보시는 방법은, 인간이 갖고 있는 욕망, 권력에 대한 탐욕, 탐욕과 욕망, 탐욕과 같은 말이 욕망이지요, 욕망의 집합체가 국가를 이룬다, 사회 공동체를 이룬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욕망과 탐욕과 상관없이 국가에 개입하고 있는 것은 누구냐 하면, 그 이름이 다윗이지요. 하나님의 율법소, 율법요소, 율법소에 의해서 이 이스라엘에 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 자체가 얼마나 인간들에게 짓밟히고 모독당하고 무시당하고 있는지를 다윗이 온몸으로 다 감내 당해야 돼요. 이 말은 달리 이야기해서 율법이 있는 그 현장이라야 인간이 마음껏 탐욕을 부리고 마음껏 욕망이 나오는 이것이 정상이라는 겁니다. 그래야 율법이 제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이점은 신약에 와서 이렇게 단출하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설명이 좀 필요한데요. 3장 16절은 유명하잖아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바로 그 대목인데 3장 18절에 보면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이 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독생자를 믿는 자는……, 그다음에 뭡니까?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이걸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독생자를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네가 믿지 않는 것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고 심판 받는다’ 이렇게 생각할 여지를 주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요. 요한복음 3장 18절에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믿지 않는 것을 따져서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뒤에 뭐가 붙어 있느냐 하면,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다시 말해서 심판을 받아야 될 자는 절대로 믿지 못하는 분을 하나님이 보냈다는 거예요. 심판을 받을 자는 때려죽여도, 교회를 50년 다녀도 못 믿도록 그런 예수님을 보냈다는 겁니다.

그래야 심판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애초부터 어둠이고 애초부터 지옥 갈 자에게 독생자는 그냥 특혜로 제공돼요. 독생자가 반드시 와야 되는 것이 아니고 안 와도 되는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이걸 특급사랑이라 합니다, 특급사랑으로서 예수님을 주신 거예요.

따라서 뭐가 비정상이냐 하면, 예수 믿는 게 비정상이에요. 왜냐하면 심판의 심판기능은 절대로 예수님을 안 믿어야 돼요. 예수님을 안 믿게 되어 있고 하나님을 믿게 되어 있어요. 실제로 그런 현상이 있잖아요. 하나님 잘 믿는데 예수님 모르는 사람 많잖아요.

그건 뭐냐 하면, ‘그냥 하나님 믿는 것으로 묻어가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재벌 총수 믿는데 재벌 아들 딸려서 1:1 한 세트로 믿는 것이지 뭐, 이런 식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하나님 믿는 것과 예수님 믿는 것이 정 반대라는 생각을 감히 인간이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기 때문에 하나님 믿는 것이나 예수 믿는 것이나 같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 믿게 되면 내가 믿었던 여호와가 우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 예수님 십자가나 독생자가 있으면 시작을 내가 해서, 나는 드디어 독생자를 믿으면 그 생명은 내 것이 된다. 그 시작점을 나로 시작해서 믿는 것도 내가 하고 마지막에 내게 좋은 것으로 결과가 주어지겠지요.

그러나 율법에 따라 독생자가 오게 되면 율법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율법이 온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하려고 율법이 주어진 겁니다. 로마서 3장 19절 말씀처럼.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이걸 어떻게 하느냐? 예수 믿는 사람들의 해석은 뭐냐 하면, 살인하지 말라, 의 해석을 예수님 십자가를 경유해 버리면 너를 죽여라, 너를 살인하라, 는 뜻이에요. 너를 살해하지 않는 자는 살인하지 말라, 하는 율법을 못 지킨 것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이 완성이 되어버리면 살인하지 말라, 라는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었다면 진짜 십자가를 믿는 사람은 나는 살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구나, 하는 것을 인정해서 살인하고 싶어 환장한 나,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그런 나를 주님이여 나를 죽여달라고 기도해야지요.

왜? 내 안에 살인죄가 항상 유발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골라, 골라, 골라잡는 게 아니에요. 내가 오늘 어느 율법을 지켜볼꼬, 오늘은 예수님을 더욱더 많이 믿어볼까, 이게 되지를 않아요. 우리의 원래 원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원래 살인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이걸 누가 보여주느냐 하면, 요압이라는 사람이 보여줍니다.

요압과 그 형제들, 형제는 용감했어요. 아사헬, 아비새, 요압, 삼 형제거든요. 사무엘하 2장에 보게 되면, 이스보셋이라는 사울 집안의 아들이 열두 지파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대권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지파가 유다 지파 한 지파 밖에 안 돼요. 조금 전까지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사람이에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들던 그 사울이 죽었거든요. 자기를 추격하는 사울은 죽었지만 그동안 줄곧 사울의 통치하에 있었던 백성들의 마음은 여전히 미우나 고우나 사울 집안에 쏠리고 있습니다. 왜냐? 대대로 세습적으로 왕가(王家)는 왕가(王家)를 형성하게 되어있어요.

왕가를 형성하기 때문에 왕이라는 것은 특별한 존재라는 말은 그 집안도 특별한 존재라는 뜻이에요. 케네디가 대통령 되었잖아요.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고 그 집안 동생 로버트 F. 케네디도 미국 대선에 나왔었고 그가 죽고 나서는 또 당연히 에드워드 케네디도 대통령이 되어야 된다고 하다가 그만 대통령이 안 되었잖아요.

사람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선호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면 그걸로 굳히기에 들어갑니다. 교재에도 나오지만 권력은 습관성이에요. 권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나의 정서적인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도 인간은 단골을 찾습니다. 어지간히 불친절하지 않고서는 단골 안 바뀝니다. 한번 갔던 곳에 또 가요.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손님 하나 오게 되면 어지간하면 안 바뀌는데 그게 아니라 많이 다를 경우에는 기겁을 하고 딴 데 가지요.

그래서 이스보셋이라는 사울가 사람이 있었고 여기에 아브넬이라는 사울왕에게 충성했던 사람이 대를 이어서 충성했습니다. 그야말로 왕을 키우는 사람, 김 종인이지요. 김종인 같은 존재입니다. 확 다가오지 않습니까? 대통령 만드는 사람이지요. 아브넬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정치 9단이지요. 도사가 되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윗을 밀어준 요압이 있어요. 요압과 그 동생들 아비새, 아사헬. 이 요압은 율법이고 뭐고 그런 것 관심 없어요. 다윗과 아브넬이 평화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계약을 맺었는데 요압은 ‘계약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죽으면 그만이지 뭐.’

다윗은 사울을 살려줄 때 원칙이 있었어요. 뭐냐? ‘기름부음을 받은 자 사울’이라고 한 겁니다. 사울에게 인위적인 요소를 초과하는 초월적 요소가 함께 있었다, 를 다윗이 인정을 해줘요. 저 사람을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건드려야지 인간이 건드릴 수 없다는 초월적 요소가 강조되는 이유가, 다윗 본인이 사울과의 공통점을 갖고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기름부음을 받았거든요. 동종업체에요.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기름부음이라는 같은 업종. 다윗 생각에는 이것이 하나의 기름부음에 의해서, 선지자의 기름부음에 의해서 하나의 질서를 잡는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곳이 하나의 볼링장이라고 한다면 요압은 볼링장에서 야구 할 사람입니다. 전혀 구색에 맞지 않아요. 볼링장에서 야구 해 보세요. 기가 막힐 거예요. 가다가 자빠지고 엎어지고. 볼링장은 공을 굴려야 될 구조로 만들었는데 거기서 야구 하듯이 율법에 의해서 짜인 그 구조에 자기 욕망이 드론처럼 날아다녀요.

요압은 다윗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보는데 초월적 요소를 빼버리고 사람이 사람을 상대해버리면 항상 이것은 권력 구조를 늘 염두에 두는 사람이에요. 저 사람은 내 편일까, 내 편이 아닐까? 사무엘하에서 이렇게 욕망의 화신이 된 사람이 다윗 말고 더 많이 등장하는 주연급 배우 같은 사람이 요압입니다. 아주 끈질겨요 끈질겨.

그래서 아브넬과 이스보셋이 사울 죽고 난 뒤에 같은 편으로 있는데 사무엘하 2장 15절에 보게 되면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 둘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 둘이라” 다윗의 신복이라 하지 말고 그냥 유다지파하고 저쪽은 베냐민 지파라 보면 돼요. 베냐민 지파는 열한 지파를 대표하고 유다지파는 유다지파 단독으로 있는 겁니다.

그만큼 아직까지 범 이스라엘적으로 다윗이 다음 차기 왕으로 선뜻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권력적인 불안정함 속에 있다. 그렇게 보시면 돼요. 2장 16절에 “각기 적수의 머리를 잡고 칼로 적수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이것은 또 무슨 짓이냐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그곳을 헬갓핫수림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

그래서 헬갓핫수림이라는 지명까지 생겼습니다. 이게 유도할 때요, 서로 소매 옷깃을 잡으려고 하고 다른 한쪽은 또 제키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심판도 지루하고 하품 나고 보는 사람도 결국은 안되어서 심판이 선수들 세워놓고 손 번쩍 들어서 “지도 하나!” 이거 재미없잖아요.

심지어 선수 본인도 재미없는 거예요. “야, 우리 화끈하게 끝내자.” 그래서 장난삼아 “각기 적수의 머리를 잡고 칼로 적수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자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전쟁이라는 것, 전쟁의 권력의 구조 안에서는 뭐가 없느냐 하면, 명분이라는 것은 전쟁에는 없다는 거예요. 권력 욕망의 구조 안에서 명분은 전혀 없습니다.

자 아까 이야기한 것 다시. 이 사무엘하 성경책이 왜 있느냐? 법이라 하는 것은 대부분이 금지거든요. 금지가 되면 금지함으로서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금지선을 넘으려고 하는 욕망이 새롭게 만들어져요. 새롭게 나타납니다. 하지 말라, 하면 더 하고 싶은 거예요. 하지 마, 하면 넘고 싶어요. 선악과 따먹지 마, 하게 되면 선악과를 따먹는 동기를 유발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있으면 따먹을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따먹지 마, 라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겁니다. “저건 중요한 거야. 따먹지 마.”라고 했을 때 뱀이 적절한 타이밍에 뛰어듭니다. “따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인간이 신과 같이 될까 봐 신 쪽에서 시기가 나서 따먹지 말라고 한 거야.” 따먹지 말라는 이 금지 이 법이 인간들로 하여금 욕망에 휘둘리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욕망을 살려내려면 반드시 뭘 해야 되느냐, 곧 성경을 뭐로 읽어야 되는가? 율법으로 읽어줘야 욕망이, 잠자던 욕망이 깨어나게 돼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디모데전서 같은데 많이 나오지요. 예를 들면 디모데전서 6장 7, 8절에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그러면 보통 성령 받은 사람은 ‘아, 가진 것도 다 은혜니까 주의 것이니까 감사하자.’ 그러면 되는데 먹는 것으로도 족한 줄로 알라, 이렇게 되어버리면 가만있어도 이미 주께서 알아서 지켜주는데 자기가 꼭 티를 내요. 내가 이것 하나는 지키는 사람이다, 라고 자부하고 싶은 겁니다. 성령의 열매,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여러 가지 리스트가 죽 나오잖아요. 카탈로그가 나온다고요.

그 카탈로그 딱 보고 골라잡아요. ‘온유. 아, 이것은 우리 아빠도 온유하지. 엄마도 온유하지. 그 DNA를 가진 나도 온유하지. 이것 하나는 확실히 밀고 가자. 다른 것은 내세울 것 없는데 온유 하나는 끝내주자.’ 이렇게 되어버리면 뭐가 돼요? 법이 되겠지요. 온유가 그 인간을 작살 내 버립니다. 온유가 “네가 바로 온유하지 못한 인간이라.” 온유가, 온유하심이 유발자가 되어서 인간을 온유 못한 자로 만들어버려요.

그런데 인간은 그러면서도 내가 이 세상에 사는 존재 이유를 찾고자 하는 거예요. 다 주께서 해버리면 내가 이 땅에 살아갈 존재 이유가 없잖아요. 존재 이유가! “저녁 늦게 나는 잠이 들었지. 너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눈을 뜨면 또 하루가 가고 내 손엔 작은 너의 사진뿐 그대 사진 붙잡고 나 왜 이렇게 사는가~” 그런 것 있잖아요. 모르시는구나.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를.

사람이 주님 때문에 사는 게 아닙니다. 내가 가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그 재미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은! 나 잘났지, 잘난 정도가 아니라 ‘나 인간답다고 할 만하잖아. 아주 잘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망가지지는 않았잖아.’ 그런 것으로 우리같이 섞여 살자, 공동체를 만들자, 지금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근원적인 본능이에요.

그래서 전쟁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법을 무시하고 우리가 새로운 법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 그래서 전쟁한다는 것은 그냥 지루하니까 내가 너보다 잘났는지, 네가 너보다 잘났는지 그냥 화끈하게 끝내 버리자, 한 거예요.

전쟁을 하면서 여기에 열두 명의 소년들이 희생되지요. 희생이고 뭐고 그들은 하나의 밥이니까 희생이 되든 말든 관계없는데 저쪽 열두 명 이쪽도 열두 명 공평하게 죽은 거예요. 죽은 것을 요이 땅, 하는 신호로 해서 전쟁이 벌어진 겁니다. 자극적인 것, 복수를 할 만한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일을 위해서 열두 명 플러스 열두 명 스물네 명의 소년들이 여기서 희생된 거예요.

희생되었지만 전쟁을 하는 장군의 입장에서는, 열두 명 희생해서 빨리 끝내는 것이 결과적으로 양적으로 보면 그게 죽는 숫자가 적다는 계산이 딱 나오지요.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아가 죽고 난 뒤에 “그래. 화살이라는 것은 아무나 죽이는 거야.” 이렇게 이야기했다고요. 이것은 뭐냐? 인간의 죽음을 물질, 물체라는 화살에 맡김으로 말미암아 인간 그 자체, 우리아 그 자체를 뭘로 보느냐? 물질로 본 거예요.

“물질과 물질이 만나서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지 뭐. 애석해하지 마. 화살이 사람 가려가면서 맞는 것 아니잖아.” ‘어? 우리아다. 피해가자’ 그런 것 없잖아요. 아침에 운동하는데 늘 요새 달려드는 게 있어요. 날파리. 날파리는 목사님인지 집사님인지 그런 것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달려듭니다. 윙~ 하고 달려들어요. 그래서 그걸 쫓는 방법을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날파리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가는 거예요.

그런데 전쟁이라는 대의명분 안에서, 전쟁 안에서는 인간 본연의 고유의 가치가 누구한테 희생되느냐? 최고 권력자, 승리를 원하는 욕망을 보다 더 크게 가진 자의 노리개감, 장난감이 되는 겁니다. 이게 인간세계의 구조에요.

그러니까 더욱더 공부 열심히 해서 놀지 말고 과외 잘 받아서 권력의 더 높은 곳에 가야 하지 만약에 빌빌해서 공부도 못해서 저 아랫자리에 있게 되면 남들 권력자의 노리개감이 되어서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또 치이고 인생 완전히 빌빌 기면서 슬프게 인생 간다. 그걸 인간들은 겁내 하잖아요. 이 권력 구조의 질서, 서열, 인간은 굉장히 중요시하는 겁니다.

그러면 최고의 자리는 뭐냐 하면, 다윗이냐 아니면 이스보셋이라는 사울의 집안이냐의 대권을 놓고 싸우는데 밑에서 충성스럽게 전쟁하는 거예요. 그래서 요압 같은 경우에는요, 다윗에게 충성한다고 보면 안 돼요. 요압은 자기 자신에게 충성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하 3장에 보게 되면 김종인이죠, 아브넬이 안된다 싶으니까 귀순을 한 겁니다. 귀순을 했는데 그 앞에 어떤 일이 있느냐? 아브넬이 전쟁을 하다가 요압의 동생인 아세헬……, 그냥 아사헬이라 하지 말고 요압의 동생으로 하세요. 모든 것이 요압중심이니까요. 참고로 이 요압이 솔로몬 배신하다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하지요. 다윗이 죽고 나서.

이 스루아의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습니다. 지금 사무엘하 2장 18절입니다. “그곳에 스루야의 세 아들 요압과 아비새와 아사헬이 있었는데 아사헬의 발은 들노루 같이 빠르더라.” 그 중에서 아사헬이 들노루 같이 빨랐더라. 그러니까 이 사무엘하에서 뭔가 남들 앞에 재주를 표할 수 있는 것, 빠르다든지, 신성우처럼 머리숱이 좋다든지, 미남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자기를 괴멸시키게 하는 하나의 동기로 작용하는 거예요.

내가 믿던 그것에 본인이 인생이 깔려 죽게 되어 있어요. 내가 믿던 것 평생 내가 일궈놓은 그 안에 살다가 그게 무너지게 되면 같이 무너지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아사헬이 달려오는데 능구렁이 같은 아브넬이 이야기했어요. “우리 다 아는 사이인데 그냥 이쯤에서 서로 갈 길 가자. 쫓아오지 마라.”

그런데 이 아사헬이 젊었으니까 공을 세우겠다고 쫓아오는 거예요. 아브넬은 노련하니까요. 일 대 일 대면할 것도 없어요. 그냥 창끝으로 달려오는 아사헬을 그대로 찔러버립니다. 2장 23절에 보면 “아브넬이 창 뒤끝으로 그 배를 찌르니 창이 그 등을 꿰뚫고 나간지라”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였다는 그 사실이 율법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인간은 모두 자기 욕망에 장난질 치고 있는 거예요. 한국의 여자 배구가 일본 이겨서 8강에 올라간 그것이 언약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무슨 상관이 있지요?

그러니까 지금 인간들의 모든 움직임과 태도와 관심사가 전혀 율법과 상관없는 어떤 상황에 자극을 받아서 욕망이라는 그 본능을 그대로 발휘하면서 그냥 달려들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분명히 제가 아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여기 율법대로, 율법의 언약대로 사는 거룩한 나라라고 그렇게 부러움을 받은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의 뜻이 율법을 통해서 풍성하게 제공되었습니다. 제공되었는데 그 이스라엘의 움직임 속에서 진짜 사무엘하를 들여다보면 모든 구석구석의 모습은 자신의 욕심대로 욕망대로 탐심대로 그냥 움직일 뿐이에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율법 또는 하나님을 경유 해서 행동하는 법이 없고 네가 잘났나, 내가 잘났나, 바로 직통으로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한다면 여기서 반드시 뭐가 누락 되느냐? 율법이 아무 소용이 없지요. 그래서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아브넬은 일단 아사헬을 죽였습니다.

그러면 그 형 되는 요압이 여기서 뭘 작동시키는가? 율법을 작동시키는데 그 작동시키는 방법이 뭐냐? 아까 첫째 시간에 무엇의 복수자? 피의 복수자. 그냥 복수가 아니고 피의 복수자라는 것은 내가 복수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에 의해서 피 흘린 자는 죽이라는 그 명령을 수행하면서 ‘나는 킬러로서 수행한다. 저 인간 복수하는 것은 내 사적인 감정이 절대 없고 하나님의 법이 시키는대로 했다.’는 것을 핑계거리로 삼으면서 율법을 활용하는 거예요.

참,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나 모든 곳에서 ‘내가 어디서 문제냐’를 찾지 않고 ‘감히 우리 집안을 건드려? 내 동생을 죽여? 요시, 좋아, 한번 두고 보자.’ 해서 호시탐탐 노립니다. 노리다가 어떻게 되었는가? 이렇게 돼버리면 율법의 인격체라 할 수 있는 다윗의 기능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다윗은 그 왕은 허수아비 왕이에요. 붕 떴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사무엘하 3장에, 아브넬이 귀순을 했어요. 귀순할 때 그냥 귀순한 것이 아니고 계약을 맺었어요. 계약을 맺어서 다윗은 어떻게든 사울 쪽 열 한 지파 사람들을 포섭을 해줘야 해요. 그래야 나라가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니까. 안정된 정권을 원하니까.

그런데 이 아브넬이 김종인 이거든요. 대권주자를 전체로 아우르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지요. 그 사람이 귀순했다는 말은 모든 권력인계가 순조롭게 잘 지켜지니까 내가 그 사람의 귀순에 대해서 하등의 장애가 없도록 왕의 이름으로 평화의 계약을 맺어서 “오너라. 올 때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다윗이 과연 사울왕의 왕가로서의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사울에 의해서 맺어진 자기의 처가 있었어요. 그 처 이름이 미달, 아니고 미갈입니다. 미달이 아니고 미갈, 미갈을 데려오너라. 미갈은 사울 왕가의 딸이에요. 그냥 딸이 아니라 이미 사울왕의 재가에 의해서 다윗이 그 집안 사위였다는 사실을 열한 지파 사람들에게 다시 그걸 각인시키게 되는 거예요.

‘내가 사울을 비겁하게 정복한 것이 아니고 그냥 순조롭게, 순조롭게, 그래서 사울 다음에 우리는 사울왕을 따르는 여러분의 마음을 다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사울왕을 좋아했던 그 마음으로 사울왕가의 사위니까 저도 좋아해 주셔서 나라를 안정권에 들어가게 합시다.’ 라는 뜻에서 계약을 맺어서 평화롭게 미갈 데려오너라, 했는데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면서 떠돌던 그 사이에 미갈은 이미 누구하고 또 결혼을 했어요.

사무엘하 3장 15절 “이스보셋이 보내어 그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취하매” 그 당시에 발디엘이라는 남편이 있었어요. 그 남편은 하나의 가정이잖아요. 사무엘하에서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생각해 보세요. 하나의 가정이라는 말이지요.

현대사회에서 가정은 하나의 국가보다 더 행복을 보장하는 최고의 보금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런 가정인데 왕이 될 다윗이 자기가 뭔데, 자기가 뭔데 남의 평화로운 가정을 깨고 이미 잘 살고 있는 남의 아내를 그냥 전략적으로 가져오는 거예요.

거기에 누가 따르냐 하면, 아브넬이 자기 목숨 하나 살리기 위해서, 자기는 이미 이스보셋과 결별 되어서 자기 하나 살리기 위해서 내가 다윗 정권하에서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가, 자기의 신변보호를 받기 위해서 남의 가정 깨는 것은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미갈을 강제로 집달리 동원해서 빼앗아서 끌고 나오니까 발디엘이라는 그 남편이 자기 아내를 강제로 빼앗아가는 것을 보며 질질 짜면서 막 따라가는 거예요. 사무엘하 3장 16절에 “그 남편이 저와 함께 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 왔더니 아브넬이 저에게 돌아가라 하매 돌아가니라.”

“여보, 돌아와! 어디가~!” 하면서 우는 거예요. 그러니까 김종인, 그 브니엘이 “어이, 가라 가! 나라가 하는 일에 어딜 사적인 가정이 개입해” 이건 뭐 북한도 아니고 도대체 인간은 은연중에 이미 권력의 노예가 되어있어요. 소박하나 내 가정 지킨다. 그것은 권력이 아주 깊숙이 침투하기 전까지는 진짜 우리끼리 힘 합쳐서 행복하게 삽시다, 하지만 권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특히 지금 무슨 상태냐 하면 준 전쟁상태에서는 트럭이나 경운기도 다 차출 되지만 마누라까지 차출될지는 상상도 못했지요.

그러니까 여기서 영화가 되려면 미갈이라는 여자도 자기 남편 발디엘에게 “여보~!” 해줘야 이 영화가 바로 <미워도 다시 한번>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미갈은 ‘아, 이참에 잘됐다.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랑도 돈이 있을 때나 사랑이지 돈 없는데 무슨 사랑이에요. 뭐 돈보다 친구가 낫다고요? 그것은 돈 있는 친구가 낫겠지요.

그러니까 지금 이 권력이라는 대세 앞에 어느 인간도 여기에 자극을 받지 않을 인간은 아무도 없어요. 권력 맛을 못 봤기 때문에 권력 그 까짓거 우리의 고향은 하늘에 있고……, 뭐 그런 이상한 소리, 우리는 나그네고 이 땅에서 죽었고, 그런 소리 하지만 만약에 그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지고 “청와대 입성하세요” 하게 되면 “입궐하세요” 한다든지 어떤 자리를 주게 되면 예수고 복음이고 전부 다 빠이빠이입니다.

교회 와서 온갖 것 다 고치고 성실하게 아침 일찍 나와서 화장실 청소 다 하고 소리 없이 봉사하는 사람에게 어느 날 “장로 되세요” 하면 갑자기 장로행세를 해야만 되는 것처럼 착각해요. 사람의 지혜가 사람을 완전히 버려 놓습니다. 권력의 맛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가정 깨진다는 사실을 다윗이 몰랐을까요? 모르고 그걸 요구했을까요? 알고 있지요. 아마 미갈은 ‘날 못 잊어 독수공방하면서 늘 나를 그리워했을 거야. 그러니까 데려 와야돼.’ 무슨 소리, 독수공방이 어디 있어요? 지금 잘살고 있는데. 혼자 착각하고 있어요. ‘나 없으면 못살 거야’ 아니에요. 너 없이도 잘 살아요. 다만 네가 왕이 된다면 그다음부터는 마음이 바뀌겠지요.

그래서 미갈이 왔는데 그 미갈이 어떻게 되는가 한 번 보세요. 사무엘하 6장 23절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이건 또 뭐 결과가 이상하게 되지요. 도대체 뒤죽박죽이라. 사무엘하는 뭐 하나 기대할 수가 없어요. 기대했다가는 실망할 수밖에 없어요. ‘아마 미갈은 남편을 사랑해서 이제는 남편에 순종할 거야.’ 순종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순종 없어요. 전부 다 자기 팔 자기가 흔들기에요. 나라 꼴이 엉망진창이에요. 그냥 전부 다 욕망의 화신들이고 물고 뜯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죽고 난 뒤에 김종인, 그 아브넬이 귀순했을 때에 3장에 보게 되면, 이제 귀순했거든요. 귀순했는데 26절에 “이에 다윗에게서 나와서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요압이 쫓아갑니다. 쫓아가서 그다음에 “시라 우물가에서 저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요압의 단독범행이라는 뜻이에요.

3장 27-30절에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 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찌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찌로다 하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저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다윗이 지금 이런 소리나 하고 있을 게 아닙니다. “당장 요압을 잡아서 목을 쳐라.” 하든지 혹은 “매우 쳐라.” 하면 되는데 왜 그 말을 못하고 너희 집안 망해라, 망해라, 왜 그렇게 소극적이에요? 노골적으로 자기 부하잖아요. 그런데 공로가 너무 많아요. 그리고 실제적으로 요압이 없으면 자기를 지켜줄 자가 없고 정권이 무너집니다.

그러면 정권이 무너진다고 해서 이렇게 이미 하나님의 계약이 된 그 계약도 무시하고 자기 명예도 따르지 않고, 진짜 크게 쓸 사람이라고 하는 북한에서 온 귀순자를 왔는데 이걸 몰래 자기 동생 사적인 복수 한다고 죽여버렸을 때에 도대체 이 나라가 요압의 위상이 뭐며 다윗은 그걸 관리 통제하지 못하는 그 위상, 왜 이렇게 그걸 그냥 방치하는지. 그냥 저주나 받아라. 이런 식으로 끝냅니다.

그다음 3장 31, 32절에 보면,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 하니라 다윗왕이 상여를 따라가서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울지 말고 처결하지. 울지 말고. 요압이 가까이 있잖아요.

왜 그러냐 하면, 요압을 죽이면요, 자기가 요압한테 당해요. 다시 말해서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자신……, 다시 첫째 시간에 한 것, 내가 나를 지키는 자에요. 그런데 뭐가 오더라도 내가 나에게 해코지를 하더라도 내가 가만 안 있게 되어 있어요. 이게 욕망이거든요.

여기 3장 35-37절에 보면 “석양에 뭇 백성이 나아와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바가 아닌줄을 아니라”

왜 이렇게 유난을 떠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통합되기를 원하는 열한 지파여. 이 귀순했던 이 사람을 나는 좋아했는데 그걸 요압이 죽였기 때문에 차기 왕이 될 내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여.’라고 외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런 요압을 놔두기는 왜 놔두느냐. 이중플레이 하고 있네. 당신은 겉으로만 나는 요압을 싫어하고 나는 아브넬을 좋아합니다, 해놓고는 실제로는 자기 일에 방해되는 요압에 대해서는 무서워서 건드리지 못한다.’ 그게 일관성이 없잖아요.

그래서 3장 38, 39절에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또는 대인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찌로다 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윗 자기가 갚지 슬쩍 자기가 힘이 없으니까 여호와께 밀어버리지요. 이게 뭐냐 하면, 다윗이 나름대로의 자기 욕망이 따로 있었다는 거예요. ‘조금만 참자. 참으면 하나님께서 왕이 될 때 그때 요압을 다스리면 되지 않겠느냐.’ 이것은 다윗의 일방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왕이 되면 될수록 같이 병행해서 요압의 권세도 자기 못지않게 커진다는 그런 작전을 요압이 안 쓸 리가 없거든요.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권력의 세계입니다. 이 이야기가 왜 있느냐? 율법의 정신과는 전혀 상관없이 경쟁적으로 자기 힘을 키우는 이 시대, 이 시대가 지금 거룩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하에서 그 내부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도 마찬가지고, 요압도 마찬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에게 뭘 시키는지는 관심이 없고 다음 차기 왕 제대로 뽑으면 우리는 그 영웅적인 활약상에 의해서 편안하고 행복한 인생을 보낼 수 있다. 지금 율법이 빠져 있는 이방민족이나 하는 그 사고방식에 푹 젖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윗은 어쨌든 간에 자기의 권세, 권력을 빨리 매듭을 지어야 돼요. 열두 지파 전체를 자기에게 포섭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5장에 1, 2절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전일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라고 죽 나옵니다.

또 5장 3절에 “다윗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라”라고 되어있고요. 그 전에 미리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이 되었었어요. 유다지파의 왕이 되고 난 뒤에 그다음에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5장 4절에 “다윗이 삼십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년 육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이것을 다윗이 기름 부은지 15년 만에 일궈냈어요. 그러니까 이걸 보는 사람들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무엘하 1장부터 11장까지 부지런히 다윗은 권세, 권력을 형성하는데 집중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왕에게 기름 부었기 때문에 마땅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모순되는, 전혀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없는 온갖 잡동사니 욕망이 있는 사람들을 어중이떠중이 다 모아서 형식으로서는 국가 이스라엘이라 했을 때 다윗은 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 왕은 지금 제대로 된 왕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짐작해야 됩니다.

그러고 난 뒤에 11장에서 왕이 드디어 범죄자의 대표자가 되어서 백성들이 짓지 않는 죄를 범해서 이스라엘 권력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하지요. 11장에서 흔들리기 전에 아직 생각 안 한 것이 그러면 김종인 뻘 되는 아브넬이 이스보셋과 왜 헤어지게 되었느냐? 그것은 사실은 이스보셋은 아무것도 몰라요. 여전히 사울을 왕이라고 생각하는 민중들의 마음은 사실은 이스보셋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브넬이 다 쥐고 있습니다.

다 쥐고 있으니까 사울의 첩을 건드렸어요. 사무엘하 3장 7, 8절에 “이스보셋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을 통간하였느냐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히 여겨 가로되 내가 유다의 개 대강이뇨 내가 오늘날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 형제와 그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날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그래서 이스보셋이 삐졌거든요. 왜 그렇게 했느냐, 하니까 아브넬은 또 정치적이에요. “내가 열한 지파 지금 다 모아준 것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하고 그것 건드렸다고 그래서 삐지는가? 겨우 그걸 가지고 시비를 거냐?”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나 너하고 안 놀아.”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전부 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람 대 사람만 보고 있어요. 전부 다 그런 이야기에요. 아브넬이 왜 그런 말을 하느냐 하면, 내가 소유하는 권력의 대단함을 네까짓 게 어디서 비교가 되느냐. 그러니 권력이 곧 정의에요. 힘이 곧 정의에요. 힘이 진리에요. 힘이 없는 것들은 권력의 장에서, 필드에서 힘없는 것들은 정의를 논할 그런 것을 끄집어낼 가치도 없는 게 인간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보니까 뭐가 지금 문제가 돼요? 이 국가라는 자체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되지요. 국가, 이 권력,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좋게좋게 주셨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쁘게 주신 상태에서 하나님이 주셨다고, 나쁜 권력을 주셨다고 이렇게 생각하셔야 돼요.

하나님이 권력을 주셨는데 이 권력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더럽다는 것을 다 까발려 보여주기 위한 그런 장을 권력이 준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은 생각하기는, 권력이 이렇다는 것은 되는데요. 중요한 것은 이 권력을 소유하겠다는 의도를 갖게 되면 이것은 율법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고 나는 이 정도 권력자임을 내세워서 너는 어느 정도 권력인가, 나는 이 정도 권력이다, 누가 똥배 센지 해볼까, 치사하게 애들 장군 따먹기 하는 것처럼이요, 너 구슬 몇 개 있어, 나 열 개 있어, 나 백 개 있어, 누가 이겼어, 이렇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유치한지요. 오늘 낮 설교에서도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만, 이게 영생입니까? 이게 사는 게 사는 거예요?

뭐 하나님 믿는데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끼어들 여지가 있던가요? 자기 욕망을 앞장세워서 사는데 아쉬울 때는 원망만 하면서 무슨 감사가 나와요? 감사하라 하니까 억지로 끄집어 내는데 억지로 끄집어내려거든 감사하지 마세요. 그게 무슨 감사입니까? 율법이지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5장에 있습니다. 5장 20절의 바알브라심, 여기 5장에 들어가게 되면 마지막 미지의 정복되지 않는 영역이 남아 있어요. 그게 여부스 땅 현재 예루살렘 땅이 정복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부스 사람들이 뭐라고 놀리느냐 하면, 5장 6절에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에게 모욕적인 말을 한다는 것은 벌써 모든 권력이 사유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다윗 하나에게 집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권력이 이렇게 되면 안 되거든요. 율법대로 살아야지 다윗에게 매여 살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교회가, 성도들이 말씀대로 복음대로 살면 되지 목사한테 매이면 안 되듯이요.

요새 뭐 목사한테 매이는 교인들도 없어요. 코로나 왔다 하니까 다 집구석에 앉아 있는데요. 코로나 때문에 안 나온다는 것은 안 그래도 가기 싫었는데 잘 됐다, 하는 겁니다.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 하니까 파자마 바람으로 볼 수도 있고 얼마나 좋아요. 이 자유, 정장 차림 안 해도 되고 내숭 안 떨어도 되고 얼마나 좋아요.

그러니까 이게 누구한테 검사받듯이 살면 안 돼요. 인간한테 검사받고 인간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이것은 율법이 없고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세상 나라입니다. 세상 나라 모든 투쟁은 이것 하나밖에 없어요. 인정 투쟁. 헤겔이 이야기했던 인정 투쟁, 서로 인정받는 거예요.

심지어 내가 못 먹고 못살아도 네가 그래도 가난한 가운데서도 바르게 산다는 그런 인정만 받게 된다면 가난을 견딜 수도 있어요. 인간은.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한테 지금 매료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아에게 심지어 질투심을 느낄 정도입니다. 질투심을!

따라서 여부스 사람들은 철저하게 예루살렘에 대해서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집중한 그것이 그들의 잘못이었어요. 다윗은 말씀대로 사는 게 목적이 아니고 ‘감히 날 약 올려? 이거 내가 얼마나 센지 한번 보여 줘?’ 하고 쳐들어가 버린 거예요. 그래서 정복했습니다.

다윗이 정복했다는 것은 이것은 정복할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다윗 본인의 존재가 부각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앞으로 다윗 없이는 도대체 이 나라가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만들었어요. 저 사람 아니면 아무것도 안 된다.

그럴 때 여러분이 이것을 이기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안 되면 안 되어도 좋다. 이게 이기는 방법이에요. ‘안돼 이게 있어야 돼’ 이게 아니고 ‘안되면 뭐 그걸로도 감사하지 뭐.’ 그러면 그만이에요. 꼭 이 세상에서 뭘 해야 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날 때 내 뜻대로 안 태어났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도 굳이 내가 여기 버티는 것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미련 갖지 마세요. 살 만큼 살다가 코로나 걸려서 죽으면 그러면 되지요. 죽음을 못 이기면서 무슨 마귀를 이길 수 있겠어요. 자기 죽음도 못 이기면서.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블레셋을 척결합니다. 주변 나라를 다 척결할 때 다윗이 세 가지 정책을 씁니다. 먼 나라한테는 감독자를 보내서 때마다 조공 받는 식으로, 가까운 지역은 완전히 자기가 통치하는 식으로, 중간쯤 지역에서는 반반 섞어서 정기적으로 통치했다가 정기적으로 조공을 받는 식으로.

아이고 시간이 와 이리 빨리 가노. 아까 2분 늦게 했지요. 그런 식으로 통치를 합니다. 이것 하나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바알브라심, 20절 거기 보면 뭘 주관하느냐 하면, 5장 20절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 블레셋의 그 허무성은 자기의 신조차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도 그들은 인간적이었지요.

죽을 판에 신을 못 챙기잖아요. 못 챙기지요. 신보다 누가 더 신입니까? 하나님보다 누가 하나님이에요? 내가 하나님이라. 그 까짓거 필요 없을 때는 신이고 예수고 발길로 차버리고 내가 신인 거예요. 이걸 그대로 보여주는 게 블레셋이에요.

그렇다면 그다음에 나오는 6장, 7장은 뭐냐? 우리는 그러지 말자, 하고 모셔오는 것이 뭐냐? 언약궤를 모셔오는 그것, 그것은 아무래도 내일 아침에 모셔 와야 되겠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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