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5강-멘토

아빠와 함께 2021. 8. 7. 08:46

2021여름수련회 사무엘하강해 제 5강 : 멘토 - 이 근호 목사

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사무엘하 6장에서 다윗이 언약궤를 가져옵니다. 언약궤를 가져오는 문제는 세 가지의 성경의 핵심구조를 연결시켜야 되는데요. 첫번째는 언약궤, 언약궤와 다윗의 조합에서 먼저 고정이 되어 있어야 되거든요. 그러면 언약궤(사물) – 예루살렘(공간) - 멜기세덱(인물).

예루살렘은 공간입니다. 언약궤는 상자고요.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상자, 주의 이름이 언약궤를 이동시켰으니까요. 그걸 고정시키는 거예요. 그다음에 그 고정시킨 것이 인물로 돼요. 인물 또는 인격으로. 이게 누구냐 하면, 멜기세덱이에요.

그래서 언약궤는 예루살렘에 안착되고 그 예루살렘의 왕으로서 멜기세덱과 연결된다. 여기서 이것(언약궤 – 예루살렘- 멜기세덱) 빼놓고는 전부 다 탈락입니다. 다윗부터 해서 모든 것이 탈락이 돼요. 연결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가져오면서 다윗이 갖고 있던 그 권력에 대한 욕망을 하나님이 충분히 이용하시는 거예요. 충분히 이용해서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안착이 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 예루살렘이 사무엘하 5장에서는 여부스 땅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여부스 땅은 마지막 남은 퍼즐조각이에요. 마지막 남은 퍼즐조각, 이것을 마저 채워야 돼요. 왜 그러냐 하면, 여부스 땅은 가나안의 원래 토착민이고 여호수아에게 준 예언에 의하면 가나안 족속인 여부스 이것이 마지막 정복되면 여호수아에게 내린 하나님의 임무는 완료가 됩니다. 정복하는 그 임무는 전부 다 완료가 돼요.

그래서 마지막 버티는 것이 여부스고 그 여부스 민족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무엘하 5장 6절에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소경이 되고 절뚝발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곳을 지키고야 말겠다는 이것이 이 가나안 족속의 마지막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게임을 하고 싸움을 해도 적이 발악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재미가 나요. 그냥 항복해 버리면 이것은 게임이 안 됩니다. 마지막에 이쪽이 강력하게 대치를 해줘야 이것과 비례해서 정복자가 누구냐, 정복자의 가치가 확 올라가게 되어 있어요. 헤비급이 플라이급하고 게임 해서 이겨서는 전혀 가치가 없어요. 더 센 것과 붙어서 이겨줘야 다윗의 가치가 쑥 올라가면서 여부스의 수도가 뭐로 바뀌느냐? 다윗의 도시로 바뀝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강력하게 반대하신 거지요. 다윗의 도시로 바뀌면서 모든 여호수아에게 내린 정복의 모든 과업은 이제 마감이 되었습니다. 마감이 되었으니까 떠돌던 이 언약궤, 50년 동안 떠돌던 이 언약궤를 이제는 예루살렘에 안착함으로서 예루살렘이 기념도시가 돼요. 기념도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출애굽 때 너희가 약속의 땅에서 나에게 경배하고 예배드린다는 그 모세에게 주신 약속이 드디어 이 역사 속에 실현됨으로써 언약은 살아 있다, 언약은 안 죽었다, 언약만이 진실이라는 것을 다윗 대에서 증명할 수 있다고 그렇게 다윗은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언약궤, 예루살렘, 그리고 다윗, 거기에 다윗이 앉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제가 이 세 개의 항을 가지고 한 조를 만들 때 ‘언약궤 – 예루살렘- 멜기세댁’, 이렇게 멜기세덱을 집어넣었는데 다윗은 아직 멜기세덱을 집어넣는다는 것을 몰라요.

이것은 신약 히브리서 6장과 7장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족보가 다윗족보가 아니고 멜기세덱 족보라 합니다. 멜기세덱 족보의 특징은 뭐냐? 히브리서 7장 3절에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역사와 접촉점이 없고 역사의 출생자가 아니에요. 이 아담의 계열의 출생자가 아니에요. 그냥 홀연히 등장한 거예요. 아비도 없고 족보도 없고 뭐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에 멜기세덱이 안착이 돼야 언약, 비로소 언약궤가 미소를 띄시는 거예요. 적합한 인물과 매치가 되는 겁니다.

다윗은 너무 일찍 김칫국을 마시는 거예요. 탈락할 수밖에 없지요. 다윗은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여호수아에게 준 약속을 감사하게도 다윗 나에게 모든 것을 마무리 짓게 해줘서 너무나 감사해서 언약궤를 모셔오고 거기에 예루살렘 자체를 기념도시라고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왜냐?) 하나님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 도시를 바치겠습니다.’ 이름은 다윗의 도시라 해놓고 그렇게 바치는 거예요.

그리고 다윗에게는 사무엘하 7장 14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언약의 당사자가 되지요.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야곱처럼 하나님께 언약을 맺은 당사자예요. 언약을 맺은 당사자라는 이것은 뭐냐 하면, 자기가 매개 존재가 돼요.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매개 존재가 되는 겁니다.

매개 존재의 의미는 뭐냐 하면, 축복과 저주는 다른 곳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축복과 저주는 오직 언약 맺은 나를 통해서 축복과 저주가 내려오니까 자기 위상이라 하는 것은 절대적이지요. 얼마나 다윗이 기뻐했겠어요? 언약궤 들어올 때에 다윗이 너무 좋아서 춤을 췄습니다.

그때 다윗이 춤춘 동영상은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 동영상이 간접 목격자에 의하면 흉물스럽다, 흉물스러운 댄스였다는 것이 후담으로 전해져 옵니다. 춤 선이 곱지 않았던 모양이지요. 그래서 미갈이 보기에 왕이 자기의 소박한 가정을 깨고 다윗이 자기를 왕궁으로 데려왔을 때는 왕비로서의 어떤 체면과 위신을 보장해 줄 거라고 은근히 기대했거든요. 이게 바로 여성의 권력, 여성의 욕망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왕이 기쁨의 춤을 춰도 내 앞에서, 왕비인 내 앞에서 내가 독점적으로 왕이 아니라 하나의 남편으로 까부는 것 있잖아요, 까부는 것, 재롱부리는 것, 그걸 내가 독점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독점이 안 되면 왕비와 일반 여타 여성과의 차별화가 되지 않아요.

차별화가 되지 않으면 미갈의 욕망은 달성되지 않습니다. 욕망이라 하는 것은 뭘 쟁취하는 것이 욕망이 아니고 차이 나면서 쟁취하는 거예요. 남들이 함부로 갖지 못하는 것을 내가 가질 때 욕망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미갈은 다윗하고 결혼할 때 벌써 노림수가 있었어요. 오직 저 남자를 독점해야 되겠다, 내 차지가 되게 하겠다, 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잖아요. 첫 강의 제목이 뭐였습니까? 트러블메이커. 여기 사무엘하에 나오는 인간들은 전부 다 한결같이 욕망의 바다에서 욕망이 흐느적거리는 그러한 존재들이지요. 그 욕망이 마음껏 인간이 잠재되어 있던, 접혀 있던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구조를 그렇게 가져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지키게 되면 나는 훌륭하다. 이런 구조는 전혀 거부당합니다. 그것은 용납이 되지 않아요. 그 구조는 인간이 자기 죄악성,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 마당을 마련하고 있지요. 그래서 사무엘하의 욕망과 언약구조의 관계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관악기의 구조다, 그렇게 보면 돼요.

관악기라 하는 것은 공기의 패턴, 이 관악기의 내부구조의 기하학적 형태에 따라서 자체적으로 공기에 의해서 입자들의 활동, 파동을 유발시킵니다. 그래서 소리가 구조에 따라서 구조가 바뀔 때마다 도레미파솔라시도, 모든 것이 바뀌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관악기의 구조, 그 말은 공기 또는 입자, 이것을 인간으로 본다면 주님께서는 관악기적 기하학적 구조의 장을 열어주는 거예요. 마음껏 까불어봐라. 너희 욕망의 원대로 한번 까불어봐라. 관악기 구조로 이렇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어제 강의 중에서 어려운 것을 다시 한번 정리하면 ‘피의 복수자’라 했는데 아까 한 것부터 다시 봅시다. ‘언약궤 – 예루살렘 – 멜기세덱’ 예루살렘은, 여부스는 가나안 토착민이 마지막 버틴 장소이고 그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멜기세덱, 이 언약궤가 인물화 되면 멜기세덱이 돼요. 예수님이지요. 언약의 완성이 되니까.

그래서 ‘언약 – 예루살렘 – 멜기세덱’인데 이 멜기세덱 이 자리에 다윗 자신을 집어넣었는데 이게 치명적으로 큰 오해를 한 겁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무엘하 11장의 사정을 몰라서 그래요. 피의 복수자에 대해서 다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게 어려운데, 피의 복수자의 의미는 뭐냐? 율법을 살아 있게 하라, 이거거든요.

율법을 살아 있게 한다면 율법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살인하지 말라고 되어 있어요. 율법은 무엇을……, 교회 오래 다닌 사람도 이걸 잘 모르는데 율법은 뭐냐 하면, 어쨌거나 저쨌거나 네가 죽는 이유를 내 쪽에서 율법을 통해서 밝혀줄게, 라는 거예요.

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고요. 이것은 선택사항이 아니고 죽는 것은 마땅한데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이유나 알고 죽어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살아나기 위함이다. 율법이 살아나기 위함인데 율법에 뭐가 있느냐 하면, 살인하지 말라가 있어요. 살인하지 말라, 를 성취시키기 위해서 여기에 선택된 자는 반드시 뭘 하느냐 하면, 살인해야만 해요.

살인해야만 한다. 이게 윤리 도덕하고 전혀 별개의 문제에요. 이것은 다른 기하학적 구조입니다. 언약의 구조에요. 쉽게 말해서 수련회나 학교에서 급식할 때 식판 들고 서잖아요. 그러면 조리원으로 일하시는 분이 식판의 한 칸에 콩 자반, 그다음 다른 칸에 콩나물 무친 것, 그리고 오뎅 볶은 것 그리고 단백질 보충하라고 자반 고등어 구운 것, 소시지도 놓고……, 칸이 모자라네요. 그러면 이쪽 칸으로 가서 미역국과 밥 떠서 주잖아요.

그것은 학교에서 급식할 때고, 성도가 주님 앞에 나오면 이쪽 칸에 살인죄, 그다음에 간음죄, 그다음에 탐심 죄, 거짓말 한 죄, 부모공경 안 한 죄, 안식일 위반한 죄,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아주 우습게 여긴 죄, 우상숭배 한 죄, 이 식판을 들고 죄의 세상을 허락해주신 여기에 성도는 감사한 거예요.

‘야, 참 이제야 내가 죽는 이유를 알았구나’ 말씀이 담기는 거예요. 사람은 콩나물 무친 것 먹고 영생 얻지 못해요. 말씀을 먹어야 하는데 이 말씀을 먹는 것은 제대로 된 죽음이에요. 제대로 된 죽음 속에 영생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죽음이에요.

자살한다고 영생이 아니고 제대로 된 죽음이라 하는 것은 네가 죽지 말고 내가 죽이는 쪽으로 죽어가고 있으면 그것으로 죽는 이유도 알게 되고 마지막으로 너에게 주어지는 것은 말씀,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신 주님이 너를 죽게 하셔서 너를 살게 하시는 그 원칙이 기다리는 겁니다. 이 방법 외에는 없어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지는 방법 외에는 다른 구원의 방법이 없습니다.

이게 언약의 구조인데 다윗 같은 경우에는 지금 다윗이 시건방지게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예루살렘에서 하나님 앞에 귀한 것 바쳐놨으니까 자기는 왕으로서 건재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사무엘하 11장 오기 전에, 6장에 왔을 때는 막 좋아서 춤을 췄지요. 11장을 모르니까 그런 춤을 춘 거예요. 흉물스러운 춤을. 선도 곱지 않은 춤을. 자기가 언제 댄스를 배웠겠습니까?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춤을 춘 거지요.

문제는 11장에 들어와서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애를 낳았을 때, 자, 다윗은 죽음에서 소환됩니다. 죽음에서 부활해서 소환돼요. 제가 반복하겠어요. 이 내용이 복잡하기 때문에. 신하들, 다윗은 언약에 의해서 죽을죄를 지었더라도 거기서 생명을 얻는데 다른 신하들은 뭘로 이해하느냐 하면, 절대권력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그런 초법적인 자리가 탐이 난 거예요.

나도 어서 그 자리에 올라가서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처벌하지 그들이 나를 처벌하지 않는 절대적 위치, 북한의 김정은하고 똑같아요. 김정은이나 스탈린 히틀러 이런 사람들, 최고 자리 아닙니까? 짐이 곧 법이요. 나는 관대하다. 관대하다, 가 패배해 버렸지요.

다윗으로 하여금 죄를 묻지 않고 용서가 되는 것은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그 살인했던 죄, 다윗에서 살인을 끄집어내고 그 다윗이 치러야 될 그 피의 복수를 다윗 말고 다른 대행자가 치르는데 그 대행자가 누구냐? 밧세바에서 난 아이입니다. 아이가 죽어요.

나단 선지자가 와서 다윗에게 “당신은 살겠고 당신이 낳은 자식은 죽을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내세운 계약 계약서에요. 이것이 새언약 계약서에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영생을 얻지 못한다. 그래야 율법은 율법대로 의가 그 가치가 살아나고 그리고 택한 백성은 택한 백성대로 건지고. 유명한 사자성어가 있지요. 그걸 일타쌍피라고 하는 거예요. 한번 치면 두 개 얻는 것 일타쌍피.

지금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이 다윗을 통해서 언약을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너는 착하냐를 묻는 게 아니고 너는 나의 선택됨을 아느냐, 하는 거예요. 선택이에요 선택. 다윗이 선택받은 지 15년 만에 왕 되었잖아요. 나의 선택이 너의 착함보다 우세하다는 겁니다. 누가 더 세냐? 네 착함이 세냐, 아니면 내 선택이 더 강하냐를 묻는 거예요.

다윗에게 있었던 이러한 선택의 일관성이 확장이 되어야 이게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밧세바가 낳은 다윗의 자식이 죽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 죽은 자식이 희생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시편 51편에 나옵니다. 8절에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그러면 이 죽은 자식, 밧세바의 자식은 죽었으니까, 하나님께서 밧세바는 이제 별볼일 없으니까 너는 너대로 팔자 고치라고 보내 버려야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 자식을 죽이고 그 자식을 낳은 밧세바를 다윗과 정식으로 혼인을 하게 해요.

혼인을 하게 되면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주도권이 다윗에게 있지도 않고 밧세바에 있지도 않고 죽은 아이로 이 주도권이 바뀝니다. 다윗 이후에 다음 차기 왕은 죽은 아이 속에 있는 어떤 요소가 결정을 내리게 되어 있어요. 죽은 아이 대신 등장한 자가 누구냐? 솔로몬입니다.

그리고 이 솔로몬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면, 이게 산자가 아니고 죽은 자에요. 우리아장군이에요.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해야 다윗이 탈락하고 다윗 자리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멜기세덱이 들어가거든요. 멜기세덱은 이 땅에 족보도 없어요. 아비도 없어요. 어미도 없어요.

분명히 우리 입장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 자가 되는데 그 죽은 자의 족보만이 우리를 생명의 나라로 이끌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다윗이 언약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은 ‘나 죄인이었어. 탈락했어.’ 그 역할 그 기능 하라고 다윗으로 하여금 살인하게 하고 간음하게 하신 거예요. 식판에 자기 이름 있는 거예요.

기분 좋아 가지고 드디어 주께서 선택을 위해서 내가 어떻게 죄인으로 활용하는지 이제 그런 관계가 맺어졌다는 그 자체가 너무너무 감사하고 너무너무 기쁜 거예요. 그러면 지금부터 생각할 것은 다윗이 언약궤를 모셔오면서 처음부터 어떤 점에서 오해를 했는가?

사무엘하 5장 20절에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 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고요. 21절에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

여기에 우상이 등장했다. 인간에게 있어서 신이라는 개념, 신개념에 뭔가 아, 율법이 없는, 할례가 없는 블레셋 사람들의 신이라는 것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자기 신을 섬기는구나, 라는 것을 다윗의 전쟁과 마주침으로서 알게 되는 거예요.

신명기 17장 15절에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그다음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을 누가 아느냐? 이것을 다윗이 알고 있어요. 구약의 모든 율법은 어릴 때부터 기본적으로 가르치는 거예요. 율법을 잘 알아요. 율법과 상관없지만 율법을 너무 잘 알아요.

율법 아는 것보다 욕망이 더 세서 문제지 성경 말씀 모르는 것이 아니에요. 잘 알아요. 그르면 형제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다른 이방 민족에서는 왕이라는 개념이 그냥 지배자, 통치자가 왕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어요. 왕은 지배하고 통치하고 백성은 왕의 종이 되고.

그런데 이스라엘은 신명기 17장 15절에 의하면 왕은 통치자나 지배자가 아니라 ‘형제 중 하나’, 같은 왕이 되더라도 ‘형제 중 하나’를 유지해야 된다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왕은 허락하되 하나님이 진정한 통치자고 지배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러한 요건, 조건을 유지하면서 왕이 왕으로 세워지는 거예요.

그러면 왕조는 백성의 종이 되어야 되겠지요. 봉사자 또는 매개자, 지혜를 전달받는 사람, 그런 역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선지자와 제사장이 융합된 그 직분이 바로 왕 직분,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 이 세 직분의 공통점은 기름부음, 기름 부었다는 것, 이게 딱 맞아떨어지는 거예요. 이걸 전체로 하나로 하면 매개자, 다른 말로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중보자, 그리스도, 기름 부었다고 해서 그리스도라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형제들보다 우세한 것이 아니고 형제들 속에 있으면서 형제들을 묶는 중심역할을 하는 거예요. 형제들 속에 있으면서 형제들보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형제들을 묶는 겁니다. 묶으려면 다윗이 계산한 것은 뭐냐? 그 당시에 언약궤가 50년 동안 어디로 돌아다녔느냐 하면, 유다와 그리고 북쪽 열한 지파 사이의 중간, 길갈이라든지 벧엘이라든지 그쪽 동네에 있었거든요.

그쪽 동네 있다가 그 언약궤를 빼앗기고 난 뒤에 블레셋 동네, 여기는 지중해고 여기는 사해고 갈릴리호수가 여기에 있고 여기 요단강이 있어요. 요단강이 한 백 킬로미터 흐르는데 그 끝에 사해가 있는데 이 사해와 같은 위도에 있는 것이 예루살렘이에요.

여기 이쪽에 기럇여아림이 있어요. 기럇여아림인데 사무엘하에서는 그 같은 곳을 뭐라고 했느냐 하면, 사무엘하 6장 2절에 보면 ‘바알레유다’ 같은 곳의 명칭입니다. 바알레유다, 기럇여아림, 여기에 언약궤를 딱 둔 겁니다. 그러니까 유다보다는 그 북쪽에 언약궤가 있었다는 말은, 길갈이나 이런 곳에 있었다는 말은 북쪽 이스라엘 지파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언약궤가 해왔다는 거예요.

언약궤 안에 열한 지파의 정신적인 희망이라든지 목표, 사는 이유, 이것이 함유되어있는 것이 언약궤라면 언약궤를 다시 남쪽의 유다 쪽으로 가져온다면 열두 지파 모든 족속이 언약궤를 중심으로, 신명기 말씀대로 형제를 이루게 되면, 곧 신명기 17장 15절 말씀대로 이뤘다는 말은, 지금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통치하고 있는 그 이스라엘이 지금 우리에게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온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이 생각하기를 다윗이 율법대로 했잖아, 또는 교회에서 우리가 말씀대로 한다 하는데 반드시 인간들은 말씀대로 한다 할 때 무엇을 경유하느냐 하면, 자신의 욕망을 경유해서 말씀대로 들었고 또 말씀대로 했다고 하게 되어 있어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멜기세덱 빼놓고 모든 인간은. 말씀을 동원할 때 이 말씀이 나의 정당성을 얼마나 증명해 줄 것인가에 관심을 두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블레셋을 공격할 때 아주 잔혹하게 공격하거든요. 아주 잔인하게. 사무엘하 8장에 보면 그 경우는 블레셋은 아니고 모압의 포로들을 두고도 아주 잔인한 짓을 합니다.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즉 온전한 줄자로서 3분지 1에 해당되는 사람 자체를 사용하는 식으로 해서 전체 3분지 2를 죽이고 3분의 1만 살리는 식으로 정규직들의 숫자를 줄이기 위해서 다윗이 그런 잔인한 짓을 했어요.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그냥 물건으로 보는 거예요. 왜? 할례언약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은 개 같은 거니까.

그런데 이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 신이라 하는 것은 그냥 자기들 소원을 달성하기 위해서 비는 대상인데 지금 급한 상황에서는 신까지 못 챙기거든요. 그러니까 다 버리고 도망간 거예요. 그걸 보고 다윗은 우리는 이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과 연관된 민족이라 할 수 없다. 빨리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오자.

모셔오는데 여기에 어떻게 모셔오는가? 여기 보면 3절에 수레에 싣고 와요. 3만 명을 보내서 플랜 A가 제대로 안 되었을 때 플랜 B를 실시하기 위해서 3만 명 보내서 언약궤 하나 모셔옵니다. 올 때 언약이 오시는 것은 하나의 축제에요.

이것은 유다 지파만의 왕이 아니고 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왕이 블레셋을 이기고 이제 드디어 여호수아가 예언한 대로 되니까 이것은 뭘 뜻하느냐?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어서 우리를 지킨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고 뭡니까, 라고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거예요.

교회에서 그런 경우가 많지요. 주차장 확보하려는데 거기에 독실한 불교 신자의 허름한 집이 깔고 앉아 있는데 그걸 차지하기 위해서 새벽마다 기도하고 있다고요. 빨리 저거 팔되 헐값에 팔게 하옵소서. 온 교인이 합세해서 여호와 정복 기도처럼 해서 아침마다 목사는 열심히 그 집 한 바퀴 돌면서 이 집이 내 것 돼야 할 텐데, 되어야 할 텐데,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저 집 주인 마음을 개과천선하게 해서 그래서 평당 백만 원인데 십만 원에 가져가라,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해 주옵소서.

전부 다 돈 문제거든요. 돈 문제인데 그건 생각 안 하고 주께서 살아계셔서……, 그런 식으로 했는데 마침 그 집안 애가 갑자기 죽자 급매로 그 집을 내놨는데 또 교회에서 산다고 하면 안 팔 것 같으니까 교회 집사님 아는 사람으로 해서 간접적으로 해서 드디어 샀을 때 바로 이것이 우리 새벽제단의 기도의 응답이 아니고 뭡니까,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교회 불심판 받아라!

자꾸 어떤 욕망의 달성을 위하여 율법을, 말씀을 이용한다는 것은 이 욕망이 뭘 자아내느냐 하면, 여기에 주체를 자아내거든요, 주체. 자아, 나, 주인공. 그러니까 욕망이 주체를 자아낸다는 말은 뭐냐? 나 더 살아야 돼, 이런 뜻이 되는 거예요. 나 더 살아야 돼, 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인간이 주인공이 아니고 욕망이 주인공이라 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에서 밝혀냈어요. 정신분석학에 공식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자기의 주체는 환상이다. 환상공식이 있어요. ‘$ ◇ a’ 이게 환상의 공식입니다. $는 주체가 쫙 갈라졌으니까 분열된 주체, a는 미지의 알 수 없는 것을 욕망해요. 알 수 없는 것이 소문자 a고요. 그다음에 가운데 있는 마름모꼴은 뭐냐? 같다(=)는 것은 아니다(×). 다르다(≠)것도 아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뭐냐 하면, 동일시하는 거예요.

이게 나거든요, 나. 나는 저것과 같을 것이라고 동일시하지만 어디까지나 동일시하는 이것이 뭐냐하면, 환상입니다. 그래서 환상의 공식은 이런 거예요. 인간에게 있어서 실재는 없고 오로지 모든 것이 환상뿐이다. 인간은 환상 외에는 아무것도 볼 줄 모른다. 이게 환상의 공식이에요.

동일시하거든요. 동일시하는데 이 ‘a’라는 것이 미지의 것이기 때문에 이게 자꾸 바뀌어요. 자꾸 바뀌게 되면 전에 좋았다, 하는 것이 지금은 안 좋아져요. ‘아, 뭔가 있을 건데.’ 그러니까 이 욕망이 대상에 따라서 그때그때 누가 바뀌느냐 하면, 내가 그때그때 달라지는 겁니다.

처음에 스무 살 때 믿던 예수님하고 스물다섯 살 때, 서른 살 때, 사십 때 예수가 다 달라요. 왜? 본인이 종잡을 수 없거든요. 본인이 종잡을 수 없으니까 본인이 그때그때 마다 나는 이렇다고 증명해내는 거기에 동원된 예수, 하나님, 삼위일체, 전부 다 달라요.

그래서 인간은 이렇게 분열되어 있으니까 자기가 결합이 안 되었잖아요. 그래서 이 분열된 것을 결합하기 위해서 평생을 부지런히 노력합니다. 이런 공식이 있어요. ‘$→타자’ 분열된 것은 뭘 찾아요. 뭘 찾느냐 하면 타자, 타인을 찾습니다. 타자를 계속 찾아요. 이 찾는 것을 가지고 라캉이라는 사람이 ‘담화의 원칙’이라 했어요.

담화라는 말이 어렵잖아요. 쉽게 하면 대화의 원칙. 인간은 자기를 찾아가기 위해서 남인 대화 상대를 찾아요. 계속해서 이야기를 던져요. 이야기를 던지면 그 타자가 뭘 주느냐 하면, 어떤 결론을 내리지요. 그래서 그 타자의 자리가 생산물의 자리, 그리고 나중에 이 분열된 주체의 자리($)가 진리의 자리가 되는데 방향이 뭐냐?

나, 나는, 분열된 나는, 그런데 분열된 것도 모르면서 나는 온전하다 하는데 그 온전한 나는 새로운 욕망이 옴으로 말미암아 그것도 식상하고 시들해서 딴 것 뭘 찾고 싶어. 그래서 내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어. 그때는 누구냐? 남을 찾아가요. 타인에게 묻는 거예요.

특히 옷가게 하는 사람들 이야기했지요. 세 시간 동안 봐놓고 이거 다른 것으로 바꿔 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는 경우. 세 시간이나 봐놓고. 이 타자, 계속 찾아요. “날 세상에서 제대로 살게 해 줄 유일한 사람이 너란 걸 알아. 나 후회 없이 살아가기 위해 너를 붙잡아야 할 테지만~” 문제는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래서 이제는 자기가 망가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불안한 눈빛과……, 이런 것, 왜? “난 위험하니까~” 나를 제대로 살게 해줘서 예수님 고맙습니다, 했는데 그 예수님이 나의 욕망을 못 채워줘요. 자기는 드디어 거듭났다는 그것을 생산한 그것을 소유하게 되었고 나는 천당 간다는 영생을 소유했다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니까 그것도 식상해. 갑자기 그게 진리가 아닌 것 같아요. 진리가 또다시 나로 하여금, 진리라고 여겼던 그 진리가 나를 분열시켜 버립니다.

S를 쪼개버리면 절반쯤 잘린 채로 조각이 나겠지요. 이건 이상한 모양이 되니까 그냥 사람 모양으로 대충 이런 식으로 표시하게 되면, 그 나가 분열되면 나1, 하나 등장하고 나2, 또 하나 등장하는데 옛날에 그것 가지고 좋아했던 나와 이제는 그것에 식상해서 새로운 것을 찾는 나와 나가 둘로 분열돼요.

분열되면서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것이 지나가 보면 하나의 꿈이었고 하나의 환상이었고 내 욕심이었다는 것이 등장하는 겁니다. 끊임없이 그렇게 돼요. 이것은 쉬지도 않습니다. 다윗은 멜기세덱이 아니에요. 여전히 자기가 여호수아의 약속대로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성을 정복했고 이제는 그 성을 다윗의 성으로 해서 언약궤만 안치하면 되는데 언약궤를 안치하면서 다윗이 몰랐던 것은 바로 웃사가 언약궤 이동하면서 언약궤를 붙잡았는데 하나님이 웃사를 죽였지요.

사무엘하 6장 6, 7절에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웃사가 그렇게 죽지요. 자,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언약궤가 아군이에요, 적군이에요? 잘해줘도 문제야. 하나님께 잘해줘도 문제에요. 사람 같으면 “누구냐 너!” 이렇게 나올 거예요. 도대체 어쩌란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주셨다. 그래서 언약궤대로 잘해보라고 주신 줄 알았는데, 그래서 언약궤와 이스라엘이 한패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언약궤가 블레셋을 쳐야지 적군 아군도 분간 못 해서 왜 아군 이스라엘을 쳐버리느냐 그 말이지요.

그래서 사무엘하는 일관성 찾기가 무지무지 힘든 거예요, 도대체가. 다윗을 중심으로 하니까 적들이 너무 많고, 언약궤를 중심으로 해도 적들이 너무 많고, 요압을 중심으로 해도 적들이 너무 많고, 만민의 만민의 투쟁이라. 이거 사태 어찌해야 돼요? 그러면 모셔올까요, 말까요?

무서워서 못 모셔오지요. 그래서 웃사가 죽었던 이유는, 원래 하나님의 언약궤는 율법에 보면 채를 어깨에 메게 되어 있어요. 수레에 담는 것은 이방신들이 하는 방법이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규례대로 하면 어깨에 메는 거예요.

옛날 70년대만 해도 제가 있던 교회 장례식 할 때 상여를 어깨에 메었어요. 그다음부터는 경운기에 실었습니다. 요즘에는 상여 자체가 없고 그냥 화장, 대구 명복공원에 가서 그냥 두 시간만 기다리면 화장됩니다. 간편해요. 아주 간편해요. 작은 단지에 담아서 나옵니다. 이게 밀가루인지 뭔지 모르지만 하여간 딱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분열된 주체가 어깨에 상여 메면 너무 아프잖아요. 분열되면 자기 욕망에 방해되니까 장례 잘 치렀다는 소리는 듣고 싶고 자기 몸도 편한 어떤 진리를 찾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물어봤지요. 이 담화의 요소 이걸 펼쳐 낸 것 이걸 뭐라 하느냐 하면, 이걸 담론이라 합니다.

담론, discourse, 담론이라 하는 것이 너무 어려우니까 쉽게 하면 여론의 장이에요. 그러면 진리는 어디서 찾는가? 지금 이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례를 어떻게 치르냐? 그게 진리가 되면서 거기에 동조하면 한결 이 주체의 분열은, 욕망은 약간은 해소가 되는 겁니다.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은 그 시대가 만들어내는 거예요. 시대가 바뀌면, 옛날 시대하고 달라지면 과거의 그 판정 기준을 적용하지 못합니다. 옛날에는 무조건 여자는 25세 되면 결혼해야 돼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결혼을 해야 됩니다. 취직도 하지 말고 집에서 신부수업을 하면 돼요.

요새는 진공청소기가 다 해주는데 수업을 할 게 있어야지요. 뭘 수업해? 중요한 것은 청소하는 그 방법, 설거지 방법이 아니고 식기세척기를 사는 돈을 버는 것이 진짜 신부 중의 신부에요. 식기세척기를 살 수 있는 돈을 벌어주는 것이 최고의 신부예요.

전에는 뭐였습니까? 결혼하고 난 뒤에 집에서 애나 잘 키워라. 지금은 필요 없어요. 애는 적게 낳고 돈은 계속 유입되어야 돼요. 분열된 주체의 담론이 형성된 여론의 장은, 그 시대는 그걸 요구하는 거예요. 거기에 맞출 때 나의 환상은 실재인 것처럼 착각되는 거라는 말이지요. 이 공식 ‘$ ◇ a’ 분열된 주체($)는 날마다 자기하고 일치(◇)시킵니다. 허무한 것들(a)과 일치시킨다고요.

그러니까 이 쪼개진 주체, 인간은 영원히 연구해도 본래의 나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 늘 찢어져 있다, 깨져 있다, 봉합되지 않는다, 그거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이게 복음이 아니고 이게 철학, 정신분석학입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네가 깨어졌다는 것을 네가 무슨 근거로 아느냐 그 말이에요. 그걸 몰라요.

이 사람들은 왜 깨졌는가, 그 이유가 이래요. 뭐 하나 가지고 얼마 안 가서 곧 식상하고 만족함이 없으니까 계속 지연되고, 지연되고, 지연되고, S1의 주인 기표가 S2. S3, S4……, 계속 대체되고 대체되면서 욕망을 달성해야 되니까 이게 어디까지 이어질지, 이게 무한까지 이어진다. 무한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무한까지 이어지니까 이것은 진리가 확정된 것이 아니니까 진리가 아니고 진리가 아닌 인간이 진리를 찾고자 하는 나는 그 진리에 목말라하면서 이렇게 차이 나고 깨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의 결론은 뭐냐? 간단해요. 모르겠다.

세상 철학이라는 게 원래 이렇습니다. 모르겠다. 모르겠다는데 이유가 너무 많아요. 논문 100페이지, 200페이지 써놓고 마지막 결론은 모르겠다. 뭘 모르겠는데? 내가 누군지 모르겠고 내가 누군지 모르면 세상도 이게 환상인지 실재인지 구분이 안 되잖아요. 자기 자신을 모르니까. 내가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닌지 그것을 확정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정신분석학이 왜 유효하냐? 바로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육적인 요소를 이런 철학이, 정신분석학이 대신 다 설명해주고 있어요.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사무엘하, 하나님의 율법을 빙자해서 자기 욕망을 달성하는, 다윗부터 또 다른 사람들이 전부 다 이 공식에서 합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대로 적용이 돼요.

이 여론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은, 인간의 행위는 또는 행동은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만 움직이는 거예요.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만 인간은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인간 전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소경으로 보는 거예요. 소경, 진리도 모르면서 내가 진리라고 하면 진리라고 우기면서 행동을 하는 거예요.

마지막에 자기에게 저주와 심판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지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성도는 이 저주와 심판이 자기 행위 속에 들어와서 이것이 중심이 되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될 이유, 죄인인 이유를 십자가를 가지고, 성령께서 십자가를 집어넣으니까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오직 모든 것은 환상이고 십자가만이 이게 실재라는 것을 확정된 거예요.

이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있느냐 하면, 바로 이게 들어 있어요. 나는 너를 말씀의 사람으로 선택했다는 겁니다. 선택했다. 선택했기 때문에 오직 마지막에 십자가만 자랑한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세상은 나에 대해서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 죽었다는 말을 아주 기쁘게 이야기해요. 죽었다. 그러니까 나는 죽었으니까 시체인 거지요. 제가 이렇게 안경을 쓰고 있지만 이것은 시체에다 안경 씌운 거예요. 아, 이걸 안 믿으시네. 시체가 안경 쓴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보게 되면 사람들 마다 약간 차이가 있지만 시체 색깔이 보여요.

제가 전에 설교했잖아요. 급행 401번 타고 가다 그 안에서 본 할머니, 어디서 본듯한 색깔이 나왔어요. 양말을 신지 않아서 보인 그 발의 색깔, 그게 시체 색깔이었어요. 시체 색깔은 그만하면 견딜 수 있는데 시체 냄새는?

야~, 시체 냄새는요, 나이 70쯤 넘어가면요, 무슨 샤넬부터 해서 고급화장품 떡칠해서 시체 냄새 안 나도록 하는데 그걸 속일 수 없는 게 뭐냐 하면, 손자 손녀가 “할머니, 냄새나는 것 같아요. 할아버지 냄새나는 것 같아요.” “쉿! 하지 마. 할아버지가 용돈 주잖아.”

순 돈 문제거든요. “맛있는 것 사주잖아. 가만있어 봐. 네가 지금 사회생활 잘해야 돼. 여기서 네가 사회생활 잘 배워야 돼. 좀 참아야 계속 나와.” 이걸 미리 아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환상을 즐기세요. 그리고 의미 없음을 즐기세요. 이걸 아는 것은 성령 받지 않으면 이걸 알 수가 없어요. 주께서는 착한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꽂아놓은 선택된 그 사실을 주께서는 찾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언약궤 하면서 그런 사달이 나니까 너무 겁이 나서 어디에 언약궤를 두었느냐 하면, 자기 이스라엘이 다칠까 싶어서 비겁하게 이방 집에 딱 집어넣은 거예요. 그 집이 오벧에돔의 집이에요. 재수 없는 것은 너나 재수 없어라, 하고 박아 놓은 겁니다.

그런데 오벧에돔의 집에 언약궤가 석 달 있었는데 무슨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온 집에 복을 주시는 거예요. 배척했는데 복을 주실 때 그때 아, 제대로 대우를 안 해줘서 그랬구나. 수레에 질질 끌어서 경운기에 실어서 그게 문제가 되었구나.

그래서 여기서 언약궤를 맨 사람이 오되 사무엘하 6장 13절에 보면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그리고 또 여섯 걸음을 행하고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그랬어요. 마치 “함 사세요!” 구멍 뚫린 오징어 붙이고 함 사세요, 함 파는 것과 똑같아요.

몇 걸음 걷고 봉투 내놓으라고 하게 되면 마지못해서 잡아끌어 당기면서 들어오라카이, 술상 마련했다고 하는 그 ‘함 사세요.’ 그것도 옛날 담론에서나 가능했지 요새 아파트 단지에서 그랬다가는 욕만 실컷 얻어먹고 112 신고 들어옵니다. 옛날 담론에서는 그랬어요. 그렇게 해서 무사히 왔을 때 아, 하나님은 이런 것을 좋아하는구나. 새삼스럽게 배우는 겁니다. 십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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