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3강-사무엘하 강해 : 피의 복수자
(강의:이근호 목사)
사무엘하 1장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이 사실을 대하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듭니다. 우선 정확하게 사울이 죽었을 때 누가 사울을 죽였는지, 아니면 사울이 자살했고 아말렉 용병이 거기 와서 자살을 도와주었는지, 그 현장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되는 사실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당황하는 것은 사울이 죽었다가 아니라 사울이 죽은 것에 대한 다윗의 반응이 상당히 과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무엘하 1장 19절부터 보면 노래가 나오는데 그 노래를 ‘활의 노래’라고 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상당히 중요시 여기는데 사울의 죽음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다윗의 심정을 따라가기가 힘들겠지요. 다윗 본인은 사울의 죽음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면 보통사람들 보는 것은 이미 죽은 자는 죽은 자고 다윗 너의 시대다. 너의 시대가 활짝 피는 것이 중요하지 까불다가 무당한테 점이나 받고 죽은 사람 불러내는 너무나 비신앙적인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그게 뭐 애통할 일이 되는가. 거기서 사울에 대한 감각이 그 당시 다윗과 오늘날 우리가 상당히 격차가 지는 겁니다.
다윗은 중요하다고 보는데 우리는 보면서 어느 대목에서 중요하다고 동감해야 되는지 상당히 찾기가 힘들어요.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사람 죽은 것이지 살아 있을 때 여기 지금 아말렉 용병에 의하면 사울 왕이 몸을 다쳐서 죽어갈 때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자신은 살 목숨이 아니니 죽여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한 거예요. 지금 아프니까 아프지 않게 깨끗하게 깔끔하게 죽도록 도와달라고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고 난 뒤에 다윗이 활의 노래, 상당히 애통하는 노래를 한다 이 말이죠.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사울에 있었던 사적 권력을 사울과 동일한 공감하는 사람에 한해서, 다윗 본인이겠지요. 사울이 갖고 있던 고통을 아는 자만이 권력인계가 된다고 다윗이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권력을 줄 때 이스라엘이 갖고 있던 그 아픔과 그러한 의도, 그리고 그 의가 좌절되었을 때의 괴로움과 동일한 노선을 유지하는 자만이 권력을 이양할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 지금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특히 활은 두 용사거든요. 용사라 하니까 좋은 일하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활은 사무엘상 14장 8절인가 보면 누구의 무기냐 하면 요나단의 무기에요. 그래서 그걸 활의 노래라 하는데 여기 “요나단의 활이 물러가지 아니했다(삼하1:22), 라고 돼있는데 이것을 활의 노래라고 여기 설명이 돼있는데, 두 용사가 엎드러졌구나(삼하1:19).
사람들은 두 용사, ‘사울+요나단’이 죽었다. 다윗은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용감한 두 용사인데 누구와 싸웠느냐 하면 블레셋과 싸우다가 두 용사가 죽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거기서 애통해야 되느냐 하면 이 죽음이 너무 처참하니까 처참한 사울과 요나단의 집안이 완전히 녹다운 되었지요. 블레셋한데 TKO 당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으로 두 용사를 TKO 시킬 때 어떤 가치가 뚝 떨어지느냐 하면 과연 이스라엘을 굳이 지킬 필요가 있는 나라냐, 라는 의식을 백성들이 가질 가능성이 있어요. 우리나라가 블레셋한데도 안 되는구나.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자긍심이 추락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권력을 인수받는 다윗 입장에서는 이미 추락된 자긍심을 원상태로 높여 주어야 된다는 겁니다. 높여줄 때 인수인계 받는 쪽에서는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달라. 블레셋 같은 이방민족은 우리한테 게임도 안 돼. 우린 반드시 이기게 돼있어. 해서 자긍심을 높일 필요가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애통한 겁니다. 과도하게 애통해버린 거예요. 안 됐다는 겁니다.
지금 백성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블레셋과 싸웠다는 것은 생각 안 하고, 차기 대통령은 누가 되느냐? 관심이 지금 윤석열이냐, 그런 것만 신경 쓰고 있는 거예요. 우리 민족이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모르고 백성들 생각에는 우리 민족이 그까짓 율법도 없는 블레셋에게 제일 우두머리가 한꺼번에 전사했다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우리가 생각한 만큼 대단한 민족이 아니라고 자신들의 자부심이 추락이 돼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 입장에서는 공격해야 될 것은 블레셋인데 사울 죽든 말든 우리에겐 단단한 다윗이 있잖아, 라고 다윗을 옹호한다 할지라도 백성들의 의식 자체를 갱신할 필요가 있다,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다윗이. 그래서 두 용사의 이야기를 야살의 책에다 집어넣어요.
사무엘하 1장 18절을 보면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활 이야기란 말이죠.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다 했는데 야살의 책은 어느 출판사냐? 출판사가 있는 게 아니고 야살의 책은 의인열전이에요.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준 하나님의 일꾼들의 전쟁 영웅집. 그 예가 여호수아 10장 13절과 14절에 보면,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도록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그러니까 이것은 옛날 여호수아 때 전쟁을 하면서 획기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그 사실과 그때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에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이스라엘을 위했으면 외롭게 떠 있는 태양마저 하나님께서 강제 지시를 내려서 제자리에 스톱! 태양을 멈췄어요. 태양을 왜 멈췄느냐 하면 지구라는 이 동네에 이스라엘 나라가 있는데 거기에서 지금 중요한 전쟁이 벌어지니까 이 헬륨덩어리야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너의 자전을 멈추든지 공전을 멈추든지 움직임을 멈추라고 조치를 했다 이 말이죠. 그만큼 중요한 거예요. 그 중요한 내용이 야살의 책에 돼있는 거예요.
그 야살의 책에 뭘 집어넣는가? 사울과 요나단이 장렬하게 죽었다는 겁니다. 여기서 장렬하게 죽었다는 말은, 이제부터 슬슬 어렵게 됩니다. 지금까진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다음에 차기 왕이 해야 될 임무가 바로 거룩한 복수 전쟁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다음 왕에게 기회를 준 것으로 여기는 겁니다.
보다 더 잔혹하게, 더욱 철저히 복수에 임하는 전쟁, 이렇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두 용사를 전사하게 한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블레셋이라는 율법이 없는 민족에 대한 복수심을 자극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태만과 안일함을 자극시키기 위해서 사울과 요나단은 전쟁에 나서서 장렬한 희생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지금 다윗은 그렇게 몰아세우고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도마체조에서 여홍철의 딸이 동메달 딴 것은 다음에 체조선수들이 분발해서 금메달 따기 위해서 일부러 동메달 따도록 했다는 거예요. 실패를 미화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왕이 너무 오버하지 마세요. 그것은 무당에게 찾아가고, 벌 받아서 그런 것, 다 아는 이야기인데 그걸 또 다음에 차기 왕이 자기가 될 것이라고 해서 미화할 것 뭐 있습니까. 이렇게 나올 거잖아.
거기에 대해서 그걸 예상해서 활의 노래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들의 죽음으로서 1장 21절 보겠습니다.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재물을 낼 밭도 없을지어다.” 다윗은 바로 안일한 생각을 하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합니다. 이 땅이 저주받게 되었다. 따라서 블레셋의 존재는 이 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저주의 땅으로 바꾸기 위해서 공격했기에 저주받은 이것을 철저한 징벌과 복수를 하지 아니하면 저주는 다시 복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는다는 말은 다시 이 땅의 원래 의미를 회복해야 될 책임이 우리한테 있다고 해서 이렇게 과도한 그래서 애통으로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려졌다고 그렇게 애통하는 겁니다. 26절에 애통이란 말이 있잖아요. 뭐라고 또 하느냐 하면 26절에 보면,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병기가 망하였도다”
누가 앞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으면 진짜 이거는 사울과 요나단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평생을 살다가 장렬하게 죽은 것처럼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사울을 이야기함으로서 다윗이 원하는 것은 현재 열두 지파의 모든 백성 가운데, 유다지파+열한 지파거든요. 다윗은 지금 유다지파에서만 호응을 받아요. 지역구민이 강원도 하나밖에 없어. 다른 데는 벌써 권력에 길들여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1장을 설명하는데도 이렇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많이 해드려야 돼요. 그 이유가 인간이 변질되어서 그렇습니다. 사사부터 선지자 사무엘 거쳐서 사울 왕에 오면서 변질되는 게 뭐냐 하면 권력이 하나님께 있는데 권력이 어디로 쏠리느냐 하면 특정한 개인에게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율법은 뭐예요? 원래 이스라엘에는 왕이 필요 없어요. 그런데 권력이 집중되면 왕이 서서히 뭐냐? 왕으로 수면에 떠오르게 시작하는 거예요. 해 떠오르듯이. 왕이 없어야 되는데 하나님이 직접 왕이라는 그 원칙은 유지돼야 되는데 서서히 왕이 떠오르는 거예요.
왜냐하면 사울 왕 때 나라 말아 먹었거든요. 백성이 잘못해서 말아먹었다고 생각 안 하고 사울 왕이 제대로 왕 노릇 못해서 나라가 완전히 패배했으니까 이번 차에 제대로 된 왕을 뽑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살리는 그 길이라고 백성들이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원칙은, 이스라엘은 왕을 뽑는 자체가 잘못이에요. 그걸 잊어버린 거예요.
백성들이 문제가 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 있고 율법 있으면 율법대로 살면 되고 율법 안에 있는 희생 있잖아요. 희생제사로 우리 죄가 용서되면 그걸로 끝나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백성들은 사울 왕 때문에 우리가 이방나라, 다른 민족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는 거예요. 보호를 받으니까 보호해주는 사람을 되게 존경하고 좋아하는 것 같지만 실은 누굴 좋아하냐? 백성들이 우리 지켜주면 잘해줄게, 이런 식이라. 백성들은 자기 지키는데 종노릇 할 왕을 찾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생각보다도 내 신상 하나 편하면 됐지 뭐, 이런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 목사는 교인 별로 늘지 않고 헌금도 안 늘었는데 세상에 이번에 새로 목사를 뽑았는데 얼마나 설교를 잘하는지 교인도 많이 오고 헌금도 팍팍 늘어나더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는? 너 뭐야, 도대체. 교회란 친목단체에 놀러왔지. 새로 목사 와서 부흥하고 여러 가지 시설 잘 되고 교회에 노래방도 있고. 그럼 너는 지금 노래방에서 공짜로 노래 부르고 싶어서 좋은 목사로 칭찬하잖아요.
너는 뭘 변화했는가? 백성들의 사고방식이 점점 더 이상해져 가는 거예요. 다윗도 같이 덩달아 이상해지는 거예요. 백성들의 마음을 잡지 아니하면 차기 대통령 문제 있겠다. 그러면 백성들로 하여금 새로운 희망을 줘야 되겠다. 그러면 사울 왕을 너무 공격하게 되면 열한 지파를 놓치잖아요.
강원도가 유다라면 강원도는 몰표지만 나머지 열한 지파를 못하게 되면 이것이 인간적으로 통합이 안 되고, 통합이 안 되면 블레셋을 이기지 못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제발 주변에 있는 도둑놈으로부터 잘 보호해서 잘 먹고 잘 살자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이 할 것은 내가 잘 먹고 잘 살게 해줄게. 지금 둘이 짝짜꿍이 죽이 맞은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은 없어요. 이런 경우가 국가는 물론이고 교회도 마찬가지로 이렇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요나단을 용사라 하고 그 용사의 무기가 활이거든요. 활이니까 활은 복수의 화살이 되어 블레셋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의인열전에 집어넣는다는 말은, 다윗 본인이 의인의 계열에 자진해서 나서겠습니다. 내 한 몸 바쳐서 국가에 충성 봉사하겠습니다. 제가 남은 여생을 국가 봉사하기 위해서 이번에 대선에 출마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종이 되겠습니다. 나는 백성들의 위에 서지 않겠습니다.
지금 다윗이 오버해서 이 땅이 저주를 받게 되면 그 땅에서 난 산물을 예루살렘에 제사 할 때 드릴 수 없다는 거예요. 21절에. 따라서 제대로 된 축복의 열매를 가지고 제대로 된 하나님께 감사가 되려면 빨리 저주를 해방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때 내가 나서서 블레셋과 전쟁할 때 여러분 각 지역 사람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에 많은 군사를 제 때 보내 주세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제 때 군사를 보내 주면 목적이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가 관심사가 아니라 블레셋 쳐부수는데 일심 마음이 하나가 되면 다음 왕이 다윗이 되는 것은 저절로 무탈하게 그냥 순하게 우리 전쟁의 사령관이었으니까 그냥 저절로 만장일치로 왕 되게 합시다. 이렇게 돼버리면 다윗지파라는 하나의 지파의 한계를 가뿐하게 넘어선다는 그러한 계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생각은 어디서 이게 막히느냐 하면 바로 율법적으로 문제가 생깁니다.
사무엘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14장에 있습니다. 왜 붕붕 뛰느냐 하는데 사무엘하는 핵심을 찾지 않으면 도대체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도 안 되는 책이에요. 누구 노선에 누구 장단에 같이 춤춰야 되는지 몰라요. 요압이란 사람은 다윗에게 충성할 때는 훌륭하구나, 했다가 나중에 요압이란 사람이 다윗의 명령을 듣지 않고 귀순한 아브넬을 죽일 때는 이건 뭐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이 안 되고. 왕이란 다윗도 요압에 대해선 지금 내가 다룰 수 없을 정도로 권력이 커졌다 가졌다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압이 조카입니다. 같은 집안들이에요. 전부 다.
그래서 사무엘하를 할 때 인간들의 권력욕에 독자들, 성경을 보는 사람이 거기에 갇혀 정신이 빠져있는 거예요. 우리가 도대체 같은 편이야 다른 편이야? 서로서로 배신하고 돌아왔고, 배신한 자가 다윗을 도와줄 때 다윗은 좋아하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이 껴안고. 도대체 권력구조가 어떻게 짜였는지 혼란스럽기 짝이 없어요.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욕망에 사로잡힌 자들의 그때그때마다 자극적인 태도가 나왔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렇다면 원칙을 세워야 되는데 그 원칙은 사무엘하 14장에 보면 나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지요. 반란을 아직까지 일으키기 전인데요. “다윗은 범죄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이게 아들들이나 다른 사람 보기에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그런 게 아니고 최고의 권력자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라고 본 거예요. 최고의 권력자는 초법적 존재가 마치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신의 권력으로 본 거예요. 왜? 범죄를 해도 처벌이 없으니까. 범죄 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까. 사무엘하에서.
그러니까 법은 누가 지키느냐? 다윗 밑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다 다윗의 처벌의 대상이 되고 다윗 당사자는 절대로 처벌의 대상이 안 되는 그 자리가 내가 원했던 내가 노렸던 가장 이상적 나의 모델이 된 겁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지요. 다윗은 자기가 모델이 아니라고. 그러나 다윗 생각이에요.
다른 사람은 특히 여기서 누가 기웃거리느냐 하면 요압이에요. 요압이 다윗을 마음대로 주물렀거든요. 요압의 모든 권력적 태도는 다윗의 권력이 어느 정도까지 건드릴 수 있는가를 테스트하는 식으로 요압이 설쳐대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것도? 이것도 되네. 이것도? 이것도 되네. 그러니까 최고 권력을 모방을 내면서 왕을 도와주면서 자기 지분은 몫은 다 챙기는 겁니다.
그런데 그 라이벌이 누구냐 하면 아브넬이에요. 아브넬 이 사람은 유다지파 말고 다른 지파를 꽉 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사울 쪽에 속한 사람이에요. 사울 쪽에 속했기 때문에 지금 아브넬을 받아주지 아니하면 전라도 표를 얻지 못해 다음 대통령이 될 수 없어요. 사울 쪽의 표를 얻어야 다음에 평화로운 권략인계가 되거든요. 지금 이런 이야기할 때 율법은 날아가 버린 겁니다. 과연 율법이 날아갔을까요?
사무엘하 14장에서는 바로 그것을 언급합니다. 이 시간 제목이 [피의 복수자]에요. 이게 굉장히 난해한데 암논이라는 1순위의 차기 왕이 될 첫째 아들이 압살롬의 누이동생 다말을 건드렸어요. 너무너무 좋아해서 가까이해서 관계하고 싶었는데 관계하고 난 뒤에는 좋아한 것보다 몇 배나 너무너무 싫어한 거예요. 암논이 왜 자기와 관계한 여자를 그렇게 증오하듯이 싫어한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의 욕망을 여인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이게 뭐냐 하면 자기가 관계 했을 때 그 다말이 이제는 영순위, 첫 번째 순위로 다음 왕의 왕비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다말이 은근히 기대하고 있잖아요. 기대해버리면 자기가 갖고 있는 권력을 일부분은 자기 처에 의해서 약화될 가능성이 있는 겁니다. 사랑했다는 것은 소유했다는 뜻이고 철저하게 소유했으면 소유한 양만큼 계속 유지가 되고 싶은 겁니다.
여자들은 남자와 하게 되면 세퍼트로 변해서 꽉 물어버려요. 안 떼져. 가라 좀. 꽉 물었어요. 꽉 물으니까 자기 영순위 권력자에 거머리가 하나 붙어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암논은 계속해서 자기가 갖고 있는 영순위 권력이 손상되지 않기를 바란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벌써 뭐냐? 어떤 일을 벌여도 처벌되지 않는다는 절대 권력자의 행세를 미리하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압살롬은 자기 누이동생이 겁탈 당했으니까 거기에 대한 공정한 처벌을 아버지 되는 다윗에게 하고 싶지요. 그렇지만 이게 안 통한다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압살롬이 아버지한테 청원해서 내 동생이 당했는데 처벌해달라고 하기 전에 다윗 아버지가 먼저 그 소리를 듣고 네가 왜 그런 짓 했는가? 그런 식으로 해선 왕은 안 돼. 바지 내리고 그런 것은 다음 대선에선 될 수 없어. 이러면 누가 쾌재를 부르냐 하면 그 다음에 괜찮아 보이는 압살롬.
압살롬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꼭 누굴 닮았느냐 하면 가요계의 테리우스 누굽니까? 신성우를 보면 돼요. 금발의 머리에다 키는 서구적이지 이름도 만화에 나오는 테리우스, 꼭 신성우 닮았다 보면 돼요. 그런데 둘째는 힘이 없고요. 첫째가 유일하게 장애물인데 아버지가 첫째 너는 근신해. 그러한 자기 욕망도 주체 못해선 안 돼, 하면 자동적으로 제3의 자가기 들어설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율법을 잘 안다는 아버지가 아무런 조치가 없네요. 왜 그랬냐. 마음이 섭하다, 하고 그 다음부터 유야무야 그냥 넘어가잖아요. 그런데 압살롬은 이것이 왕의 개인적 생각일 수 있는데 이 사건에 대해서 전체 유권자들, 열두 지파 전체 백성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건 분명히 처벌되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여기서 무려 4년 동안이나 압살롬이 자기 자신을 백성들의 종에 편에 서서 백성들 위하는 차기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면서 궁금한 것, 아쉬운 것 있으면 다 해결해 줄게, 하면서 중간에 영혼을 강탈한다 하지요. 모든 걸 다 강탈해 나갔어요.
그러면 그 소릴 듣고 다윗이 압살롬에 조치를 해야 될 텐데 다윗은 아무 조치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미 껍데기가 되었기 때문에. 내가 왕이라는 것은 왜 왕이 제대로 될 수 없는가를 보여주는 기능으로서의 왕이다. 이스라엘 왕은 여전히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왕이 돼야 되지 사람이 왕이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한테는 적절치 않다, 라는 걸 보여주는 그런 왕, 다만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용서받은 대상으로서의 왕만 있으면 되지 내가 나서서 국가를 어떻게 하겠다는 그런 생각은 나한테는 없다. 상당히 소극적으로 나서고 말아요.
그러니까 다윗은 이미 뭔가 법의 대한 정신을 은혜를 안다면 다른 아들들은 그런 생각은 없고 어떻게 하면 저 절대적인 권력을 다윗 다음에 차지할 것인가에 지금 몰두하고 있습니다. 몰두했는데 13장에 보면 암논을 자기 손으로 정의를 실현하겠다고 죽여 버리고 말았지요. 형을 죽였어요.
죽이니까 13장 36절에 또 다윗 왕이 역시 자기 아들 죽은 것에 대해서 굉장히 애석해 합니다. 다 죽은 것이 아니고 맏이만 암논만 죽었다고 해도, 뒤에 보면 나오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왕자들을 자기 손으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거의 포기내지는 방치하지요. 이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그 다음 절차로서 뭘 준비했는지를 다윗 본인도 궁금해 하는 겁니다.
이제 14장에 들어가 봅시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는 줄 알고” 아버지 입장에서는 큰 아들도 아들이고 도망친 압살롬도 걱정이 되어 설치고. 요압이 이걸 알고 어떤 여인을 하나 변장시켰는데 이 여인의 주특기가 뭐냐 하면 어릴 때부터 연기하고 싶어요, 그런 여자였어요. 연기에 능한 여인을 하나 택해서 상복 입혀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율법의 피의 복수자, 이 피의 복수자는 창세기 9장에 나오거든요.
창세기 9장 5절에,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사람을 죽이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여야 된다는 겁니다. 율법에 보게 되면 사람은 죽었지만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이 그때부터 가동되는 거예요.
이 세상엔 사람만 사는 게 아닙니다. 율법도 살아 있거든요. 율법을 무시하고 살인하게 되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이 가동되면서 살해한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복수하게 되어 있어요. 물론 공중에 드론 띄워서 복수하는 게 아니고 율법에 준해서 대리하는 인간이 살인한 사람 찾아가서 그 사람을 반드시 율법에 의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그 명령에 의해서 복수하는 것, 억울한 피를 낸 것을 반드시 복수하는 이것이 율법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우리가 드러낼 책임이 있습니다하는 게 이스라엘이에요.
그런데 지금 사무엘하 14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아버지 죽고 난 뒤에 형제 간 밖에 없어요. 엄마 있고 형제만 있는데 형이 동생을 죽였을 때 둘이 한 명 됐지요. 한 명 남은 자가 이게 살인자에요. 이 살인자를 죽여 버리면 이 집안은 어떻게 되느냐? 대가 끊겨버리는 거예요.
이러한 경우가 어디 있었느냐 하면 바로 사사기 제일 마지막에 베냐민지파가 범죄 했을 때 여기서 인간들의 율법 적용이 율법을 적용해서 피의 복수를 할 것이냐 아니면 율법에 의하면 열두 지파를 생존해야 될 법을 지킬 것인가? 이 두 법 사이에 인간들은 아무런 대책이 없어요. 어떤 묘책이 없는 거예요. 피의 복수자에 대해서 이게 모순되잖아요.
이 집안의 가문은 하나님이 주신 가문인데 형이 동생을 죽였으니까 형을 마저 죽여 버리면 그 가문의 대가 끊어져버려요. 베냐민지파가 완전히 작살난 것처럼 끊어져버린다고요. 그러면 하나님 언약은 뭘 유지하는 조건이냐 하면 야곱 언약, 열두 지파가 건재하다는 조건 하에 하나님이 복을 주는 율법이 이렇게 혜택이 입게 돼있는데 열두 지파가 열한 지파가 돼버리면 그 하나마저 채워야 돼요.
열두 제자 중에서 가룟 유다가 배신하니까 사도행전에서 제일 먼저 한 게 뭡니까? 한 명마저 채우는 거예요. 열두 제자마저 채우는, 12란 숫자를 채워야 되는 겁니다. 언약적 모습을 보여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줄 때는 이빨을 보는 것 같아. 이빨 다 있는가 보자. 빠지면 임플란트 하든지.
그게 왜냐하면 거룩한 이스라엘은 장애요소가 있으면 안 돼요. 만약에 하반신 마비가 된 사람에게 칼로 하반신을 계속 찔러보세요. 아픕니까, 안 아픕니까? 안 아프지요.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이 온 이스라엘이 온전케 되어야 하나님의 율법이 유월절의 아픔과 고통과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방 같은 것을 온 지파 안에 공명 상태가 돼요. 열두 지파라는 안에서 계속해서 왕왕 울려주어야 돼요.
왜냐? 열둘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고 야곱의 축복의 여파로 열둘이 있어서 열두 지파 어디에도 야곱의 은혜가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어요. 이게 하나라도 이빨 빠지듯이 빠져버리면 그 빠진 뭐는 다른 걸로 반드시 채워야 된다 말이에요. 채울 때 그냥 아무것이나 채우는 게 아니고 반드시 은혜로 채워야 돼요.
열두 제자를 채울 때도 조건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으로 채워야 돼요. 그래서 이것은 열둘이기 때문에 열하나로 가동되면 가동 자체가 스톱이 돼버려요. 이스라엘이 운영이 안 되고 운영이 안 되면 율법의 정신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산할 때 열두 지파 유지하는 게 우선이냐, 물려받은 각 가정이 우선이냐 아니면 피의 복수가 우선이냐에 대해서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걸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을 때 여기 누가 등장하느냐 하면 바로 왕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왕이 처리해야 돼요. 다시 말해서 복수해야 될 복수를 왕이 그걸 떠안는 조건하에 왕이 그 집안의 복수를 멈춰야 하는 거예요. 이 집안의 복수를 내가 알아서 해줄게. 따라서 이 집안에 더 이상 타인이 와서 왜 율법대로 큰 아들 안 죽이느냐,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멈추게 해주는 거예요. 요압이 그걸 제시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되어 압살롬을 오라고 해라. 그래야 왕가가 유지될 것이 아니냐고 왕가를 빗대어서 어느 가정을 예를 들어서 연기 잘하는 여인을 통해서 그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어려운 게 피의 복수자, 왕에게 율법대로 복수를 감행할 책무가 들어왔을 때 그게 없을 때 왕의 태도와 그 책무가 들어왔을 때 왕의 태도는 어떤 점에서 달라져야 하느냐? 대신 희생해줄게, 이것이 어떻게 이어지느냐? 아들한테 당하게 다윗이 되는 거예요. 아들에게 당해야 돼요.
희생이라 하는 것은 내가 알아서 봉사하는 게 아니고 봉사되게끔 외부요소가 침범하는 식으로 강제봉사가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선 조치를 해버리는 겁니다. 압살롬을 데려 옴으로서 압살롬은 드디어 본격적으로 강권적으로 강제로 그 아버지 다윗을 제거해 버려요. 백성들 열두 지파의 마음을 자기가 차기 왕으로 들어서겠다는 그런 정치적 논조를 펼치게 됩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아셔야 될 것은 이러한 율법을 준수하면서 인간의 세계에서 특징이 하나 있어요. “법이 있을 경우에만 권력이 발생한다.” 이게 참 이상한 일이에요. 법이 있을 경우에만 권력이 나와요. 이 권력은 무엇에 호소하느냐 하면 나는 법대로 했다, 나는 정의롭다. 꼭 이러한 비겁한 변명이 동반하면서 법이 있을 경우에 권력이 나와서 권력을 행사할 때 뭘 핑계 대느냐 하면 나는 정의로운 법대로 시행하겠다는 그런 말을 해요. 인간의 권력의 국가에서.
그러면 우리는 뭘 삼아야 됩니까? 이 법이 등장하면서 여기서 초과적 현상, 이걸 다 설명하려면 어려운데 생략하고요. 법이 있을 때는 반드시 초과적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기존의 인간이 법을 이해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뭐가 될 수 없느냐 하면 진정한 권력자가 될 수 없습니다.
국민들이나 백성들이나 법이 이것이다, 라고 해버리면 그 권력은 국민들에게 놀아나는 국민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국민들의 말을 들어야 될 그런 권력자가 되거든요. 그래서 법을 수행할 수가 없어요. 법을 수행하려면 대통령 너부터 법을 지키라는 소리가 반드시 나오기 때문에 대통령 값을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 법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법에 기존 법을 흡수통합 시키는 거예요.
압살롬이 다윗정권을 인수하면서 다윗은 정의롭지 못했다, 라고 정의의 법을 적용시키면 다윗이 정의롭지 못한 자가 되고 정의로운 자가 누가 됩니까? 다윗이 행하지 못한 것을 행한 자가 누구? 바로 나, 압살롬이 되겠지요. 법과 그 규정, 이 규정할 수 있을 새로운 초법이 생기고 초법과 자기를 일치시켜버립니다. 이게 모든 조직의 권력이 발생되는 메커니즘이고 과정이에요. 교회 당회장 목사도 마찬가지고요. 법대로 하라고 하면, 초법 된 목사는 그냥 은혜로 합시다. 손들고 ‘가’하시면 ‘예’하시고 땅땅, 끝내버려요.
권력에 놀아나는 율법, 권력에 놀아나는 성경책, 성경의 내용. 그런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권력의 법에 의해서 드디어 본색이 드러남, 이게 정답이겠지요. 법을 법대로 하지 않고 저 법을 내게 유리한 쪽으로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서 자기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쪽으로 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거기에 사람들은 아주 몰두를 하게 됩니다. 골머리를 앓게 돼요.
10분 쉬었다 합시다.
'수련회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5강-멘토 (0) | 2021.08.07 |
---|---|
4강-욕망의 화신들 (0) | 2021.08.07 |
2강-다윗언약 (0) | 2021.08.07 |
2021여름수련회 1강-말썽장이들 (0) | 2021.08.07 |
2021여름수련회 사무엘하속의 그리스도 "왕의 무대" (0) | 2021.06.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