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1강-사무엘하 강해 : 말썽쟁이들
(강의:이근호 목사)
저희들이 조성한 모임이 아니라 말씀이 스스로 조성한 모임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중요하지 않고 우리 가운데 주님이 함께 있음이 더 중요한 것이 새롭게 각인되고 확인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무엘하를 하겠습니다. 사무엘하를 처음부터 읽어본 사람들은 무엇이, 뭔가 상황이 너무 세속적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속적으로 전환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상황에 나와야 되느냐 하면 자연의 기적 또는 출애굽, 그런 일들이 일어나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서 막 도와준다는 그런 현상이 일어날 때 참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구나, 라는 걸 이해가 되는데 자연의 기적은 출애굽기, 그 다음에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까지는 봐줄 수 있는데 점점 자연의 기적이 자꾸 쇠퇴해집니다. 희미해지기 시작했어요.
희미해지면서 무엇이 부각되느냐? 인간들의 아귀다툼이 유난히 점점 더 강렬해지기 시작합니다. 사무엘하로 오면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도와준다는 이게 없고, 어떤 인간이 어떤 인간을 죽이고, 죽이고 난 뒤에 그 형제들이 복수하겠다고 또 나서서 죽이고. 인간들의 갈등, 이런 것 인간들의 마당이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이 개입한다, 관여한다는 증거는 점점 더 축소가 되고 인간들이 설치기만 하면 얻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사무엘하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에 나오는 모든 인간들은 뭐냐 하면 트러블메이커에요. 말썽쟁이들, 말썽꾸러기들을 다 모아놓은 것 같아, 사무엘하에. 말썽꾸러기들을 통해서 나온 결론은 죽이고 죽고, 죽이고 죽고 주로 그런 이야기들이죠. 말썽꾸러기들이 트러블메이커인데 이들이 이런 트러블을 일으키는 이유는 뭐냐 하면 인간이 뭐만 쳐다보느냐? 인간만 쳐다봐요.
인간이 자꾸 다른 인간들을 염두에 두는 거예요. 이걸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나를 안 버렸지만 너는 나를 버렸잖아. 따라서 나는 너를 죽이겠다.” 지금 마치 시조 같지 않습니까? 나는 나를 안 버렸지만, 나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지만, 너는 나를 배신했으니까 배신당한 나는 너를 그냥두지 않고 죽여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무엘하 전체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이걸 한꺼번에 그 의미를 축약해서 말하면 뭐냐 하면 “율법은 안중에도 없다.” 하나님의 법은, 지금 내가 성질나서 바쁜데 뭘 법을 이야기해요? 타인이 나를 건드렸는데 남이 나를 건드렸는데 왜 거기 율법이 끼어드느냐? 일단 복수부터 하고 가실게요, 라고 이렇게 나온 거예요. 성질나니까 복수하고 가실게요, 이게 사무엘하 전개입니다.
여기에 누가 한몫을 하느냐 하면 세상에 다윗이 한 몫을 해요. 다윗이 한 몫 한다는 말은 다윗조차도 율법에 안중이 없습니다. 자 이스라엘에 이런 분위기가 된 것은 언제부터냐 하면 바로 사사기에서 사사들이 단회적이다, 사사들의 활동이 일회용이에요. 그래서 사사들의 숫자가 많습니다. 어떤 사사도 한결같지 않아요.
사사들이 단회적이라는 말은, 사사들 자신이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나를 안 버렸지만 너는 나를 버렸잖아. 나는 너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이 원칙에 소위 성신 받은 사사들도 자기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사와 같은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드디어 사무엘상에 들어가면 바로 선지자로 가요. 사무엘상 사무엘, 그리고 이런 사사들의 단회성적인 요소가 어디까지 이어지느냐? 바로 사울 왕까지 이어지고, 다윗까지 이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지금 우리의 초점은 사사에 관심이 있고, 사사기에서 사사들이 우리를 훌륭하게 구원했잖아. 그런 영웅 같은 것 없어? 또 선지자 사무엘, 사무엘 때문에 살았잖아. 감정이입해서 사무엘, 사사, 그리고 왕에게 기대를 거는데 사무엘하에서 정작 하고 싶은 것은 이겁니다. “백성들이 문제다.” 자꾸 누가 나를 구원하는 영웅을 기대하는 그 백성들이 문제에요.
백성들이 왕을 갈아치워 버립니다. 백성들은 “나는 나를 안 버렸지만” 이 문장, 나는 나를 안 버렸다. 그래서 뭐 잘했냐? 사사는 그걸 묻는 거예요. 나는 나를 안 버렸습니다. 나는 나에게 충실했습니다. 그래 그게 잘했다는 거야, 네가 대단하다는 뜻이야, 라고 지금 이걸 묻고 있는 거예요. 여기 ‘나’가 모여서 백성이 되거든요.
그럼 백성들마다 생각이 뭐냐 하면 전에 훌륭한 사사, 훌륭한 선지자 좀 없느냐 이런 식이에요. 그러면 그들이 처음부터 무엇을 폐기 처분했습니까? 율법은 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나타났는데 율법은 왜 있는 겁니까? 율법은 안중에도 없어요. 그냥 나는 무슨 짓을 하든지 나는 나를 지키는 것에만 일관되게 충실 할 테니 여기에 발생되는 하나님에 대한 해악은 하나님과 백성사이 중재자가 나타나서 눈 감아 주소. 봐주든지 해결하든지 해 달라, 이렇게 나옵니다.
사무엘하를 읽어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나는 나를 버리지 않았지만 너는 나를 버렸다. 그래서 나는 너를 죽이겠다고 하는데 죽일 때 그냥 죽이는 게 아닙니다. 잔인하게 죽여요. 잔인하게 죽인다는 말은, 나는 나를 지킬 때 잔인하게 지켜요. 내가 나를 지키는 강도와 비례해서 타인에 대한 태도가 결정되는 거예요. 남을 강하게 죽인다는 말은 그만큼 나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는 표시를 잔인의 강도를 높여가면서 이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빨간 걸로, “인간은 잔인할 때 살맛이 난다.” 어중간히 잔인한 것도 아니고 봐주는 것도 아니고, 이건 뭔가 남아있어요. 칭찬은 좀 받는데 칭찬이 우리의 살맛을 입맛을 돋워주는 겁니다. 내가 극히 잔인할 데로 잔인할 때 비로소 그게 나다운 거예요. 내가 아주 잔인하게 할 때 가장 나를 직면하는 순간입니다. 속이 다 시원하다, 이 정도에요.
남을 밟을 때 그냥 땠지, 이럴 때는 전혀 나답지 않아요. 저리 가세요, 이건 안 돼요. 밟아도 맨발이 아니고 군화발로 눕혀놓고 지근지근 밟을 때 속이 다 시원하다. 그래 이 맛이었어, 이 맛이었어. 율법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 계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기를 가장 인간이 잔인할 데로 잔인한 자신을 다 털어놓을 때 율법은 완성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사기 지나서 사무엘상 지나 사무엘하로 가면서 점점 더 어디에 어프로치 접근하느냐 하면 십자가로 다가서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본성이 드디어 이제는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본성대로 활개를 치면서 그들이 무엇으로 달려가느냐 하면 인간의 잔인함이 구성해내는 최고의 목표지로 그들은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국가라는 겁니다. 국가가 잔인함은 어디서 드러나느냐? 바로 전쟁할 때.
13세기 몽골이 지구의 반 이상을 점령할 때 아주 잔인했습니다. 그들은 잔인하면서도 왜 잔인해야 되는지 이유를 모릅니다. 그런데 몽골제국이 그렇게 잔인하게 적들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징기스칸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그들보다 열배 이상 잔인하게 자기 부하를 다루었어요. 하나가 탈영하면 그 부대를 다 죽였습니다. 자기 소속 부하들을. 부하를 사랑하고 이런 것 없습니다.
그걸 병사들이 인수받아서 다른 민족, 미얀마 칠 때라든지 현재 이란을 칠 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유럽으로 가선 좀 막혔지만, 그것은 칸이 죽었기 때문에 후퇴한 것이지 안 그랬으면 유럽도 넘어갈 뻔했지요. 그건 뭐냐 하면 전쟁이라는 것은 숨겨진 자기의 악마적인 주특기까지 다 뽑아내야 돼요.
그걸 아주 고상한 말로, 고상하다하니까 수상하지요.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날것”, 표피층 밑의 날것, 피부가 벗겨지면 날 것이 나와요. 아주 흉측한 날것이 나오죠. 전쟁할 때만 것이 나와요. 전쟁 때는 의리, 우정 같은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아니고 전쟁할 때만 인간은 기계가 됩니다. 아무 감정이 없어요.
인간의 그동안 정이란 사치스럽다는 것. 이건 전쟁 아니고 평화롭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있었던 우정이고 형제우애고 가족애에요.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게 되면, 이건 성경에 나오니까요. 갈수록 점점 더 십자가에 가깝다했지요.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십자가에 가까워지고 인간의 본성은 본성대로 다 드러납니다.
북이스라엘이 아람나라에 포위되어 양식이 없을 때 어떻게 했는가? 가위 바위 보를 해서 먼저 진 사람이 네 자식을 먹고, 다음 날에는 내 자식을 먹자고 약속을 했는데 약속을 안 지켜서 왕에게 고소하는 이런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인생을 살아도 가장 모르는 게 뭐냐? 본인의 마음이에요. 본인의 마음을 모른다고.
본인의 마음도 모르고 무슨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리겠다고, 눈코는 다 그렸지만 마음만 못 그렸어요, 하면서. 눈코는 그렸지만 당신의 마음은 그릴 수 없습니다. 네 마음이 그 마음이야. 네 배부터 부르게 채우는 그 마음이 타인의 마음이에요. 인간이 타인의 마음을 알 때는 항상 뭐로 다가서느냐 하면 이것으로 다가섭니다. 환상, 내게 없는 것은 네게 있을 것이라는 이 환상, 헛것이거든요. 헛것의 반대말은 날것이거든요.
나는 전쟁 중에 내 목숨이 위태로울 때 나는 나부터 챙긴다는 그 원칙은 두 살 먹은 손자라도 이건 유지됩니다. 그렇게 누나와 사이좋다가도 쟁반에 피자 한 조각 남으면 치열한 접시가 다 깨질 정도로 너 죽고 나 살자는 식으로 덤벼들게 돼있어요. 어딜 감히, 나는 나를 지키는데 감히 나를 건드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할 때 다윗도 한 몫 거든다 했지요. 다윗은 무엇을 잊어버렸느냐 하면 다윗이 갖고 있는 율법 완성체제가 다윗에게만 있어요. 다윗은 자신이 모델이 아님을 다윗은 아는데 다윗 이외의 인물들은 이걸 몰라요. 다윗은 본인이 모델이 아닌 것을 본인은 알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둘로 나눕니다. 다윗에서 메시야가 오지만 이 다윗과 다윗이 둘로 쪼개져요. 메시아는 다윗에게서 오지만, 이게 로마서 1장 2절에서 3절에 나오잖아요.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지만, 그 다윗이 그 다윗이 아니란 말이죠. 다른 다윗을 다윗대로가 아니라 다윗 속에서 다윗을 끄집어내는 방법을 사무엘하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 다윗은 날것이에요. 이 다윗은 뭐냐? 율법대로 다윗입니다. 그래서 사무엘하는 이 두 종류로 나누어서 생각하면 쉽습니다. 쉽기는 뭘 쉬워요. 그렇게 쉬운 책이 아닙니다. 다윗의 혈통인데 다윗의 혈통에서 다윗을 끄집어낼 때 이 다윗은 생것, 날것이 그대로 유지되는 다윗이죠. 이건 압살롬이라는 자기 셋째 아들한테 크게 웃음거리를 당하는 거예요.
그런 다윗인 반면에 이 다윗은 어디서 나왔냐 하면, 이건 오히려 자식에 기대하는 다윗, 솔로몬이 태어나면서 솔로몬을 의지하는 다윗에게서 나오죠.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다윗 다음에 솔로몬인데 솔로몬하고 난 뒤에 솔로몬 속에 있는 다윗을 다윗이 새롭게 발견한다 이 말입니다. 후손을 통해서 선조 된 자가 후손 속에 응축되어 있는 메시아, 언약의 율법의 완성을 선조들이 후손 속에서 찾는 거예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오지요. 아브라함이 분명히 자기 후손인 예수님이 오는 걸 보면서도 오히려 아브라함이 선조이면서도 자기의 자손인 메시아 오기를 고대할 때 그 메시아와 아브라함 사이는 혈통 그 이상이 있는 겁니다. 혈통을 빗겨나느냐? 혈통을 비껴나지 않아요. 그럼 혈통 안에 뭐가 있느냐? 이것은 율법은 혈통을 관통한다. 율법은 혈통을 뚫어요. 뚫고 지나가는 거예요.
세계에서 제일 긴 터널이 알프스 산, 북이탈리아와 스위스에 있거든요. 그때 알프스 산 뚫고 지나가거든요. 그럼 알프스 산이 무너지고 이럽니까? 멀쩡하지요. 멀쩡한데 뚫고 지나갑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신앙적 인물이 그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 뿌리 채 뚫고 지나간 사람이에요. 앉은뱅이 된 사람, 열두 제자는 말할 것도 없고요, 거기 등장했던 사람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 백부장, 12년 혈우병에 걸린 여인. 그러니까 뚫고 지나가니까 무엇이 생겼느냐 하면 생명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소경된 자가 그냥 자기는 눈만 뜨면 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날것이죠. 눈이 번쩍 뜨이고 지옥갈래, 눈 감긴 채 천국갈래 이 모습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소경은, 나는 소경인 채 천국갈래. 그러니까 그 소경은 눈 떠도 자기 뜬 눈에 대해서 전혀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눈 떠 있어도 시력 2.0이라도 나는 소경이라고 한다 말이죠. 그게 미친 것이죠. 정말 이상한 일이죠. 사람이 이상하게 돼버렸어요. 변화 없이는 될 수가 없거든요.
다윗은 자신을 모델로 여기지 않는다는 이 말은, 그럼 자신의 모델은 어디에서 찾는가? 솔로몬에서 찾는데 솔로몬이 다윗 자신의 몸에서 나오면서 자신의 몸에서 나온 것을 본인이 인정하지 않고 거부해버려요. 그럼 누구냐 하면 여기 죽은 우리야 장군의 아들로 솔로몬이 돼버립니다. 그럼 솔로몬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 날것, 육적인 내가 누구를 죽였거든요.
그럼 여기서 첫째 시간에 제일 중요한 것 적겠습니다. “왕은 죽음에서도 소환된다.” 이게 메시아적이에요. 다윗만이 간음을 하든, 살인을 하든 상관없어요. 왜? 그 죄의 죽음에서 소환되기 때문에 구원을 받기 때문에 그래요. 왕이 왕다우려면 내가 필히 율법에 의해서 망가져야 되고 구멍이 나야 됨을 유일하게 아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 왕 다윗입니다.
내가 멀쩡한 나로 유지해서는 절대로 죽음에서의 소환이라는 언약적 복음적 능력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다윗만 알아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그럼 다른 사람은 다윗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왜? 다윗에게 권력이 있기 때문에. 권력은 내가 나를 지키고 싶은 나를 어떻게 하느냐? 칭칭 감아요. 두텁게 잠바 입고 오바 입고 그 위에 또 뭐 입고 자꾸 걸치는 겁니다. 힘들을 모아서 계속 걸치는 거예요.
권력을 원해서 뭐가 되느냐 하면 권력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다윗의 모형에서는 권력자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무엇으로 싸웠습니까? 칼의 힘이었습니까? 큰 키라든지 평소에 훈련 덕분이었습니까? 아니죠. 하나님의 이름으로 승리했다 돼있어요. 소년 다윗이 고백하기를.
그러면 다윗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 여호와의 이름이 다윗 속에서 무슨 고백을 하느냐 하면 저 골리앗을 볼 때 덩치로 본 게 아니고 방패가 있다, 칼이 있다, 창이 있다, 이것으로 본 게 아니고 다윗은 뭐로 봤느냐 하면 골리앗에게는 누락된 것, 없는 게 있어요. 할례언약이 없다. 할례 받지 않았잖아.
굉장히 정답을 알면 간편하면서 허망하게 느껴질 거예요. 골리앗이 왜 죽었느냐? 하나님의 언약이 없어서 죽은 거예요. 소년 다윗이 힘이 세서 죽은 게 아니고 언약이 없어서 죽은 거예요. 그러면 다윗은 왜 이겼느냐? 소년 다윗에겐 뭐가 있습니까? 할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이긴 겁니다. 참 쉽지요. 굉장히 쉬운 이야기다.
그런데 이 쉬운 이야기가 무엇이 훼방을 놓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델로 삼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구원의 모델인 것을 본인이 알아요. 그럼 예수님 빼놓고 열두 제자들 빼놓고 예수님이 구원의 모델인 것을 어떤 인간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과 힘, 권세, 권력 여기에 진짜 눈독이 들은 거예요. 우리 제자들 가운데 하늘나라에 가면 누가 높습니까?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제일 빈약한 존재를 하나 끌고 오지요. 어린아이.
어린아이라고 열 살? 그것 어린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두세 살 어린아이를 데려왔을 때 한두 살 어린아이의 특징은 뭐냐 하면 아까 원칙인, 나는 나를 지킨다는 원칙이 없어요. 그게 아직 발달이 안 돼 있습니다. 내가 나를 지킴이 없으니까 타인에 대해서 잔인함도 없어요. 그냥 의존적입니다. 의존적 알지요. 의존교회, 의존적. 의존적이에요.
무조건 길가의 아저씨가 사탕 준다, 요샌 사탕은 안 먹히는데 길가의 아저씨가 비트코인 준다면 따라가는 거예요. 그만큼 똑똑한 아이는 없는 거고. 뭔가 좋아한다면 따라가는 전부 다 의존적이에요. 누가 키워주어도 엄마라 부르는 그런 존재, 뭐 혈통적으로 태어났는지 문제 삼지 않아요. 내가 전적으로 더 이상 나에게 내가 중요치 않다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율법 안에만 계십니다. 내가 안 중요하다는 걸 끝까지 나에게 그것을 주입시키는 분 그분이 바로 메시아입니다.
다윗에게는 이미 소년 때는 있었어요. 다윗이 자기 자신이 골리앗을 이기고 그걸로 계속 이스라엘의 왕이 될 줄 알았습니다. 사무엘하 1장부터 10장까지 나는 왕이다, 나는 왕이다, 계속해서 자기 주입하면서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계속했습니다. 이것이 11장으로 넘어가면 드디어 몰락합니다. 벌써 진도 11장까지 나가버렸네.
사무엘하 11장에,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암몬 자손과 전쟁을 했거든요. “저녁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이렇게 할 때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의 그 원리원칙을 소년 다윗은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게 아니고 할례 언약이 무할례를 이긴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를 지킬 이유가 없었지요.
그런데 소년 다윗이 점점 자라납니다. 예수님은 자라나도 십자가로 다가지만 인간의 종류는 자라나게 되면 어릴 때 품성이 전부 다 세속에 물들어 똑같이 돼버려요. 점점 자라가면서 나는 왕이다. 옛날에 잘 나갔다, 옛날에 과거에 골리앗을 이겼다, 만날 그 생각 때문에 이 나라에선 나 말고 왕 적임자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여론조사, 정치적 발언하면 안 되지만 내가 바른 정치, 정의로운 정치를 위해서 이렇게 애썼다. 그러니까 나는 나라고 계속하는 겁니다.
그렇게 인간이 밀어붙이는 자체가 나는 이 정도라는 자체가 자기가 망가지고 있는 과정인 것을 상상도 못했지요. 오히려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멀어져버린 골리앗 원칙과 율법정신과 멀어진 다윗을 대체해서 누가 등장하는가? 우리야 장군이 등장해요. 지금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에서 누가 관여하느냐?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가 주시하고 있습니다.
참 이점이 중요한데요. 전쟁은 사람들이 전쟁한다고 봤지요. 그러나 여호수아나 사사기에 보면 사무엘상도 마찬가지고 초반에. 전쟁은 누구한테 달렸느냐? 언약궤가 있는 쪽과 없는 쪽으로 전쟁은 이미 결정 난 것으로 보았어요. 그러니까 언약궤가 율법의 완성이고요. 그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우리야 장군은 뭘 보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지키는 전쟁이 아니라 언약궤의 의미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주셨다는 거기에 연결고리를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저쪽 암몬자손은 할례가 없어요. 이스라엘은 율법이 있습니다. 그쪽은 율법이 없잖아요. 율법 있는 쪽이 없는 쪽을 이기는 그것이 언약궤의 취지를 살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차원의 전쟁이에요. 그걸 무슨 전쟁이라 하느냐? 이걸 붙여주는 전쟁. 붙여주시는 전쟁, 붙이시는 전쟁.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마태복음 5장 그런 말씀 나오지요. 5장 39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며 왼편도 돌려대며” 이 주의 말씀에 꽂힌 사람은 어떤 사람이 와서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도 내놓는 거예요. 그러면 갑자기 기분 되게 나쁘다고 한 번 더 때린다고요. 요샌 군대에서 때리면 안 되지만 때리는 게 왜 없을까요? 졸병이 까불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내놓는 거예요.
그러면 네가 때리면 가만있어야 되지 더 맞을 줄 몰랐느냐 하니까 마태복음 5장 39절에 보게 되면,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며 왼편도 돌려대며” 내가 얻어맞음으로 말미암아 마태복음 5장 39절의 의미가 살아나는 겁니다. 그 설명을 듣고 화가 난 상관은 이번엔 오른쪽 정강이를 발로 찹니다. 그러니까 왼쪽도 때리라고 내놓습니다. 이것도 마저 때립니다. 주저앉습니다. 그래서 두 시간 반 동안 너무 맞아서 죽습니다.
죽어가면서 죽어가는 이것이 마태복음 5장 39절의 완성이라고 하면서 죽으면 이건 미친 거예요, 어떤 의미에선 개기는 겁니까? 말씀을 왜 네가 지키느냐 말이죠. 좀 바보 같지요. 우리야 장군은 바보 같아요. 이것은 우리가 이 전쟁에서는 내 목숨의 안전과 내 아내와 약간의 휴가를 즐기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언약궤가 있는 이스라엘 쪽이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이 몸 하나 바쳐서 그걸 확인해야 되고 증명해야 될 그 붙이시는 전쟁에 우리아가 나선 거예요.
그걸 사실은 전에 다윗이 소년이었을 때 골리앗과 했던 전쟁방식이었습니다. 전쟁방식은 하나님에게 변함이 없어요. 그런데 인간이 시건방져졌어. 내가 왕년에 뭐 했잖아. 왕년에 세탁이 백만 대 팔았던 신화의 인물이다. 드라마 보면 그런 게 나와요. 옛날에 내가 뭘 했다는 식으로, 왕년에 내가 이 교회 처음 세웠잖아, 왕년에 내가 전도를 몇 명했잖아. 왕년에 나오면 망했구나, 맛이 갔구나, 끝났구나. 저 인간 안 되겠어, 끝났어. 새로움이 없어요. 옛날에 너한테 절해줬잖아, 이런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새로움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아가 전쟁에 나갔을 때 우리야 아내가 목욕하고 있었고 다윗은 그걸 쳐다봤을 때 언약궤와 전쟁 가운데 여기에 아무것도 장애물이 없어야 되는데 갑자기 다윗 왕이 여기에 장애물로 등장하는 거예요. 타이밍 죽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소년 다윗은 아무 다친 것 없이 골리앗을 이겼는데 우리야 정도 되게 되면 우리야 본인이 죽어요. 본인이 죽는다는 말이 다쳤다, 안 다쳤다 보다 더욱 더 죄가 심화되는 거예요. 그리고 방식도, 방식이 어떠냐 하면 잔인하게 죽습니다.
여기서 누가 죽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다윗이 끼어든 겁니다. 소년 다윗 그 시절이 다윗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건방지게 다윗이 끼어든 거예요, 여기서. 율법이 한창 진행되고 있는 현재성, 실재성에 인간이란 게 끼어든 거예요. 끼어드니까 여기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느냐 하면 바로 억울한 자의 억울한 의인의 죽임이 발생되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사사기나 출애굽기에 나오는 대자연의 기적보다 더 확실한 기적이 뭐냐? 의인의 죽음이에요.
집에 돈 백억 생기는 것보다도 십자가가 더 큰 기적이에요. 백억 생기면 나는 백억 받을 만한 잘난 존재가 되지만 십자가가 내 인생에 개입해버리면 구원이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내가 나의 무거운 인생의 무게를 그냥 놔버린 겁니다. 돈 좀 들겠지만 실감나는 방법은 하나 있어요. 저기 가면 접시가 있거든요. 접시를 위에서 놔버리는 거예요.
그러면 그 접시는 어떻게 됩니까? 바닥에 와장창 깨어지겠지요. 깨어지기 전에 접시에 써놓으세요. ‘나’라고. 시건방지게 내가 주께서 하시는 일에 내 구원이라는 욕망이 기어에 끼어들면 진짜 구원될 사람은 주께서는 그걸 접시 깨버리듯이 깨어버리는 복을 주시는 겁니다. 내가 망해버리는 복, 다윗은 이 복 만들기에 이스라엘의 왕의 자격으로 여기에 참여하게 된 겁니다. 타이밍을 통해서 참여하게 된 거예요.
그것을 제가 처음에 강의했잖아요. 트러블메이커 말썽꾸리기. 모든 인간은 주님에 대해서 말썽꾸리기. 말썽 일으키라고 이 땅에서 구원시킨 겁니다. 이쯤 돼서 아멘 좀 나와 줘야 되는데. 우리가 어느 정도로 말썽 꾸리기인 것을 알기 위해서 계속해서 내일도 살려주시고 살려주시는 거예요.
말썽꾸리기 역할에 좀 충실하란 말이죠. 영화 주인공은 끝났어요.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우리는 엑스트라거든요. 엑스트라 중에는 허장강 같이, 김중배의 다이아가 그렇게 좋더냐, 했던 국민에게 욕 얻어먹는 나쁜 사람 되는 것, 국민밉상이 되는 주께서 그런 역할을 맡겼다는 것이 뭐예요? 주님의 드라마에 역할 하나 맡은 거잖아요. 얼마나 신납니까, 감사합니까.
악한 일 하라는데 착한 일 하면 역이 다 깨지지요. 감독이 컷! 다시, 다시. 악한 일하란 말이죠, 악한 일. 악한 일 여러분 잘해요. 아까 악한 일 원칙 봤지요. 나는 나를 지키려는데 너는 나처럼 못 지키느냐. 죽어버려라. 인간이 잔인할 때 비로소 살맛이 나는 것처럼 그 역할을 하게 하시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고 다른 사람은 가만히 있는데 믿는 사람은 이단이라고 돌아다니는 사람 있잖아요. 이름이 사울. 지가 행정적 주인공 된 양 스데반 죽을 때 돌 던지는데 힘들지요. 옷 벗어놓고 돌 던지세요. 제대로 죽여야지, 신명기 율법대로. 옷은 내가 맡을게. 옷 맡은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울이에요.
사울 본인이 그때 그 당시 예수 믿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구원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상상이 안 돼야 돼요. 이번 주 수련회 끝날 때 예수 믿을 걸. 아이고, 무슨 망상을. 그런 망상이 돼버리면 망상 자체에 현혹이 되어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하는 그런 후유증이 발생돼요.
그냥 구원문제는 어린아이처럼 후견자라 하거든요. 보호자, 교회에선 목자. 후견자 고엘은 우리를 양자 취급하는 거예요. 아들도 아닌데 아들로 해서 구속자, 구원자란 뜻이에요. 구원자는 우리를 양자취급해서 돌봐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돌봐 주실 때 우리는 뭐가 있느냐? 반드시 아들이 될 자격자가 아니었다. 이걸 한때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해야 돼요.
주님께서 율법을 이루셔서 그 율법을 우리에게 적용시켰더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부하는 내가 양자로 전환되는 겁니다. 아들은 따로 있지요. 아들은 예수님이고 우리는 양자되어서 그의 동생들, 형제로써 드디어 하늘나라 패밀리가 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거예요.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이고 동생들이냐. 주의 뜻대로 되는 자다.
그러니까 이 양자되는 사람은 무엇이 누락되느냐? 주의 뜻 때문에 나의 뜻이 다 작살나는 겁니다. 내 작살내기 위해서 주께서 날마다 우리의 포부와 뜻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요. 계속 매일같이 우리는 눈만 뜨면 스케줄 체크하지요. 그것이 내 뜻입니다. 오늘은 뭐해야 되고 오늘은 계란 삶아야지, 오늘은 찰밥 해야지. 계속해서 우리의 뜻을 만들어요.
그러면 찰밥을 했을 때 맛있게 먹는다고 했는데 하고 난 뒤에는 왜 그리 인생이 허무한지. 내가 찰밥 하려고 태어났나. 돈 모아서 차 바꿔야지. 차 바꾼 후 기분이 좋지요. 그런데 차 바꾸고 몇 개월 가지도 않아요. 기껏 인생 살아서 차나 바꾸려고? 제일 작은 차에서 벤츠 600 타려고 태어났나. 살 재주도 없지만 이게 뭔데? 나중에 서울 가보니까 개나 소나 다 벤츠 타고 다녀. 차별화가 확 들어. 인생목표 향상시키자. 이런 벤츠 안 된다. 다른 걸로 바꿔야 돼, 이러고 있단 말이죠.
우리의 뜻이 아니고 주의 뜻인데 주의 뜻은 언제 나타나느냐? 먼저 우리의 뜻이 등장한 난 뒤에 와요. 그래서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전부 다 지 뜻이에요. 기도할 때 주님의 영광만 위해서 주님의 복음만을 위해서 하겠습니다. 거짓말하고 있는 거예요. 배고파 보세요. 지 뜻이 우선되지 주의 뜻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나대지 마시고 그냥 우리 뜻 있잖아요. 사무엘하에선 우리 뜻은 이걸 욕망이라 합니다. 무슨 욕망? 권력의 욕망. 권력의 욕망대로 사세요. 사시면 알아서 주께서 그 욕망을 다 부셔주십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요. 한 것은 죄밖에 안 지었는데 결과는 구원이다. 이게 무슨 이런 공식이 다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공식을 하나 쓸게요. 인간의 개별적인 뜻은 통하지 않습니다. x²+3x-4=0, 여기서 x를 구하는 방법을 4를 뒤로 해서 x=1이 나와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거예요. 이걸 보편화 시키면 x²+ax+b=0의 보편공식은 뭐냐 하면 x=, 이게 일반해에요. 이 일반해에서 공식을 적용시키면 1이 나오거든요.
적용할 때 일반해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뜻, 하나님의 뜻,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의 완성이 되기 위해서는 x²+3x라는 그런 상황을 타이밍 맞게 적절하게 주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거예요. 심심할 때 밧세바가 목욕할 타이밍도 아닌데 목욕해야 돼요. 보편적인 해가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적용이 되려면 우리는 그 보편에 매여진 개인이 돼야 돼요. 개별자가 돼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사무엘하는 사람들이 권력욕망에 미쳤을 때 누가 피해를 보느냐 하면 율법은 아무런 관심의 대상이 안 돼요. 누가 힘을 가졌는가가 하나님께 복 받은 것으로 오인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무엘하를 제일 잘 이해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교회 내에 권력투쟁을 보면 되죠.
교인들이 목사님은 그냥 모시는 게 아니고 이 앞에 뭘 넣어요. ‘받들어’ 모신다. 받들어 모시는 이유는 교인들을 백성으로 본다면 백성들이 뭘 결정하느냐 하면 당회장 목사를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당회장 목사는 우리들이 요구하는 바, 요청하는 바, 기대하는 바를 충족할 때 받들어 모시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갑자기 사무엘하가 확 다가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가 커졌어요. 한 십만 명이 되었어요. 커지니까 목사가 자기 아들들을 교회 주요관직에 세웠어요. 성가대장이나 반주자로 세워요. 이거는 그 교회는 그 집안의 교회가 돼요. 그리고 그 교인들은 졸지에 백성이 되지요. 백성들이 그 목사를 쫓아내지 못하는 이유가, 목사가 옛날에 골리앗을 이겼거든요. 그 목사가 옛날 빈민촌에 활빈당을 만들었거든요. 옛날에 처음 개척할 때 고생을 혼자 했거든요.
그런데 여기에 눈치코치도 없이 복음 전하는 자가 등장했다. 목사가 가만둡니까? 성경용어로 종용히 불러다가 종용히 잘라 버립니다. 네 말 옳지만 교회 부흥이 안 된다. 그 한 마디로 잘라버리는 거예요. 여기에 있는 관료들, 주식이 많은 임원진들, 장로들은 목사의 횡포가 심하지만 지금은 권력이 없어서 종용히 있느니라. 때를 기다리면서.
그러니 여러분들이 사무엘하 그렇게 보시면서 10분 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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