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6강-원수의 등장

아빠와 함께 2021. 8. 7. 08:47

2021여름수련회 사무엘하강해 제 6강 : 원수의 등장 - 이 근호목사

여섯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다윗이 사무엘하 1장에서 11장 이전까지 사울에게 속해 있는 그 나라를 자기가 인수하기 위해서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사울을 왕으로 여기고 있는 사람에게 젊은 자기가 등장해서 “내가 왕입니다.” 나이도 서른밖에 안되었어요. 그 나이에 내가 왕이다, 하고 나설 때에 사람들이 선뜻 동의를 하지 못하지요. 동의를 하지 못할 때 다윗이 쓰는 방법은 이 방법이었습니다.

당신들의 멘토가 되어줄게. 지금의 스승, 상담가, 이런 거지요. 당신의 정신적인 스승이 되어 주겠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인도할 때 멘토정신 가지고 이끄는 거예요. 다섯 번째 강의에서 했지만, 다윗의 욕망을 하나님의 말씀이 동의를 하겠어요? 동의가 안 되지요. 계속 어긋나는 겁니다.

일단 언약궤 오게 되면 그리고 언약궤를 모실 성전 딱 지어주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영원히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의 신, 언약궤만 있으면 모든 민족을 이긴다는 그 신비로운 마술상자 같은 언약궤만 있으면 이 이스라엘 나라는 영원히 유지될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스라엘이 든든하리라 하는, 하나님의 언약은 바로 내 손으로 이루어진다는 그런 것까지 계산하는 겁니다. 이게 다윗의 욕망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뭘 몰랐느냐 하면요? 내가 지금 현 순간에서 어떤 욕망에 의해서 소문자 ‘a’ 그 미지의 그 대상을 원한다 칩시다. 그러면 여기서 어떤 사태가 일어나게 되면 즉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에 오게 되면 여기에 따라서 욕망이 또 달라진다는 사실을 다윗은 생각을 못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버지가 있고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나 너 키워주고 길러주느라 힘들었으니 내 말에 순종해라.”라고 한다면 아들이 하는 말이 “제가 아버지 아들로서 아버지께 순종하면 아버지에게서 얻는 게 뭡니까?” 이렇게 묻지요. 물론 그렇게 묻는 경우도 없지만. 그럴 때는 그냥 예, 하면 되지 묻는 것도 이상해. “그러면 나는 아버지로서의 나 답다”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면 아들이 또 묻지요. 아들이 참 똑똑해. “아버지가 아버지다운 그것으로 과연 끝일까요? 과연, 과연 그게 아버지 욕망의 한도일까요?”라고 묻지요. 그러면 아버지가 훅 찔리지요. ‘아, 얘가 뭔가 아는구나. 나보다 더 아는 수가 있구나.’ 아버지의 가오도 있고 체면도 있어서 “나는 아무 욕심 없다. 나는 너 키워서 잘살고 있는 그것만 보면 나는 아버지로서 아무 여한이 없다.”

아들이 있다가 “내가 또 그런 거짓말 할 줄 알았다. 기대한 내가 나쁘지.” 다윗이 몰랐던 것은 백성들의 멘토가 되면 자기 욕망은 끝이라고 본 거예요. 백성들은 자신을 우러러보고 나는 그 사람들의 미래와 카운슬러를 자기가 담당하니까 그 사람들은 나에게 자발적 존경을 보내는 그것, 내게 오는 자발적 존경 그것이 나의 욕망의 끝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게 끝이 아닙니다. 잡아먹습니다. 양을 키우는 목적은 양이 양답게 토실하게 하는 것? 아니에요. 그다음 순서가 있는 거예요. 토실한 양만 잡아먹는 거예요. 주님의 요한복음 10장에 의하면 그게 도적이라는 거예요. 도적은 나쁜 짓 하는 목적을 가진 게 도적이 아니라 나 빼놓고 다 도적이에요. 예수님 빼놓고는 다 도적이에요.

여러분 보기에 어떤 사람은 착해 보이지요. 착해 보이는 것은 아직까지 욕망의 레벨이 충분히 안 올라가서 착해요. “우리 둘째 애는 나무랄 데 없이 얼마나 착한지.” 아직 세상맛을 못 봐서 그래요. 돈맛을 못 봐서 그렇지요. “걔는, 둘째 애는 내가 죽으라면 깜빡 죽는시늉까지 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아들에게 속으신 거예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런 자식, 그런 인간은 없어요. 하나님은 그런 착한 인간을 만들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인간이면 자기가 메시아 되게요. 그러면 메시아 주님이 올 이유가 없잖아요. 성경은 우리 자신들이 처한 상태에서 얼마나 자기 변신에 능한가, 하는 겁니다. 자기는 이만하면 괜찮다 하는 식으로 자부하고 있어요.

욕망 이야기 계속해 봅시다. 다윗의 욕망은 언약궤를 들여오고 예루살렘에 안치하는 것, 그리고 예루살렘에 성전 짓는 것, 이걸로 모든 것을 자기는 할 대로 다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다윗성, 다윗 도시, 다윗성에 하나님이 오신 것은……,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루살렘의 정복은 자기 뜻이 아니고 뭐냐, 여호수아에게 약속한 것이 마감되었거든요. 그 말은 누가 뭐래도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일을 다 완료했다고 본 겁니다. 그다음에 더 플러스알파, 더 나아가는 이스라엘은 다윗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빠졌을까요? 다윗의 욕망이 충족되었다고 생각하고, 자기로서는 할 일 다 했다고 생각하고 기뻐서 춤을 추는데 무엇이 빠졌는가? 다윗에게 빠진 것은 뭐냐 하면, 원수의 정체가 더 폭을 넓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 적, 자기는 블레셋, 암몬, 모압, 다 평정하면 그것으로 적을 다 섬멸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가까운 곳은 자기 부하가 직접 통치하고, 약간 먼 곳에는 약간의 병사를 주둔시키고, 세 번째, 먼 곳은 전령을 보내서 조공을 바쳐라, 그런 식으로 1, 2, 3차 처리를 해서 그 주변 온 지경이 자기의 권력 속에 놓여 있으면 원수는 이제 상관없다고 생각했지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있던 그 모든 외부원수에 대해서 충분하게 통제와 관리가 가능한 유일한 제국으로서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과 일치되는 모양새라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요. 원수를 다 이겼으니까.

그런데 원수가 이스라엘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내부에서 원수가 등장하게 됩니다. 그 내부의 원수가 등장하게 된 그 원인 제공자가 누구냐? 나단 선지자의 말 그대로 하면 “다윗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이 이스라엘의 원수입니다.” 하는 거예요. 당신이 바로, 율법을 잘 아는 당신이 율법이 위반자입니다, 부터 시작이 되는 거예요.

얼추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안착하고 적도 평정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만하면 이스라엘이 평화를 얻었다. 그러니까 축하기념으로 기념물, 드디어 영원히 하나님이 완성했다는 성전까지 지어드리겠다 하니까 하나님께서 성전 짓는 것을 보류하지요. “너는 아니야. 아직도 네가 치를 전쟁이 남아 있어. 너는 피를 더 흘려야 해.”

바깥의 전쟁이 아니고 내부전쟁에서 너와 네 가족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야 할 많은 백성들의 피가 있는 거예요. 내부전쟁에 의해서. 왕이 자비와 은혜와 지혜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이것을 다윗이 원했건만 도리어 다윗이 밑에서 올라오는 핏소리, 백성들이 억울한 죽음, 이 죽음에 대해서 다윗은 자기위상을 변경시켜야 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사무엘하 끝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인구조사를 하지요. 인구조사를 해서 몇 명 죽었느냐 하면 7만 명이 죽었지요. 요새는 제가 다 약하지만 먼저 숫자에서부터 많이 약하지요. 본문에 얼마 죽었다고 되어 있느냐 하면, 사무엘하 24장 14절에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인이라.”

아, 어쩌다 맞췄네요. 칠만 명이 죽었어요. 코로나로 우리 얼마 죽었습니까? 그만큼 안 죽었잖아요. 칠만이 죽었어요. 그것도 며칠 동안? 3일 만에. 제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그동안까지는 출애굽기 민수기 사사기까지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을 기적으로 여겼는데 이 이스라엘, 제대로 된 이스라엘이 되려면 내부가 붕괴 되는 이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이고 손길인 것이 가미 되어야 돼요.

칠만 명 죽고 난 뒤에 왕이, 제대로 된 왕이 하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제사 드리는 거예요. 제사! 아, 왕은 뭐 하는 자다? 제사 드리는 자구나. 제사장 중에서 초월적 제사장을 뭐라고 합니까? 그 이름이 뭡니까? 멜기세덱. 창세기 14장에서 멜기세덱은 어느 지역의 제사장이냐 하면, 살렘왕, 예루살렘이지요. 예루살렘왕 멜기세덱입니다.

창세기 14장 18절에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언약궤 – 예루살렘 – 멜기세덱’ 그 언약궤의 인수인계자는, 여기서 언약궤의 인격자는 멜기세덱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언약궤 – 예루살렘 – 멜기세덱’ 여기에 그냥 멜기세덱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중간에 들어갔다가 빠져야 될 사람이 있어요. 그게 누구냐? 다윗입니다. 다윗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연히 밧세바가 목욕하는 그러한 씬(scene)을 하나님께서 연출해서 집어넣는 거예요.

잠자고 있는 인간의 잔인함과 그리고 내가 꽁꽁 숨기고 있었던 그 모든 죄악의 근거가 바로 ‘자기의’에서 출발한다는 거예요.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것처럼 바리새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에요. 뭐냐 하면, 자기의 의가 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이 의를 교체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거예요.

로마서 10장 2, 3절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 자기의에 길들여진 욕망이지요. 욕망, 내 의가 유지되고 확장되는 이것, 인간들은 실재 내 의가 살아 있는 이것만이 참된 현실이라고 이미 인간은 굳어져 버린 심성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어요.

내가 의미 있다 할 때 그것은 뭐냐 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라는 자기 의를 스스로 지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저건 에어컨이네, 이것은 컵이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인간이 내뱉는 모든 단어, 이름 붙이는 모든 행동은 반드시 배후에 이걸 컵이라고 인정하니까 나는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에요. 지금 망가져서는 안 되고 살아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자식들에게 애정이 있다고 자부하는 부모들이 자식 불러놓고 “어머니, 더운데 농사터 조금 있는것 팔아버리고 그만 서울서 우리랑 삽시다.” 아파트가 열 섬인데요, 열섬. 47도까지 올라가는데 촌에 살면 그만큼은 안 덥잖아요. 그것도 모르고 “촌에서 힘든데……” 힘들다 하지 말고 왔다 갔다 하는데 차비 들어간다고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해요. 한번 갈 때마다 마누라하고 싸우지요. “너 혼자 갔다 와라.” 맨날 부부싸움 하니까 그게 짜증 나 가지고.

함께 산다는 뜻은 아니고 가까운데 원룸 하나 얻어서 모시면 “역시 장남은 달라.” 이런 자기 의가 유지가 되고 색깔이 반짝반짝 빛날 수 있는 거예요. 자기 안에 보물이 있는데 그 보물을 반짝반짝 닦는 것은 나는 역시 잘났어, 를 반짝반짝 닦는 자기의, 이 자기의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무너지게 됩니다.

주님의 모든 율법의 최종 목표점은 뭐냐 하면, 깊숙하게 꼬깃꼬깃 숨겨놓은 나의 의를 향하여 율법은 화살을 쏘게 되어 있어요. 율법은 자기의를 쏩니다. 그래서 선택받은 사람은 자기의가 무너지게 되어 있고 선택되지 않은 사람은 완강하게 반발하지요.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나의 의는 건드리지 마시옵소서. 헌금하라면 헌금하고, 전도하라면 전도하고, 선교 봉사 다 할 테니까 please, 제발 좀 내 의는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 그 의, 자기 역사지요. 회고록이에요. 자기 역사, 회고록, 하면 너무 깁니까? 일기장, 이거 일기 쓰지 마세요. 일기 쓰지 마시고 Q.T 작성하지 마세요. 그거 자기의입니다.

자기의를 키우는 방법은 개선하는 거지요. 개선은 구체적으로 뭐냐? 반성하는 거예요. 회개하는 거예요.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이거 자기의에요. “뭐가 부족한데?” 물으면 몰라요. 왜냐하면 교회 담론이 그러니까. 아까 담론 배웠지요. 교회 여론의 장이 그러니까. 권사가 교회에서 권사다워야지. 그거 뭐 새벽기도회에서 앞자리에 앉아서 추운 겨울인데 담요 한 장 딱 놓고 앉아서 목사 언제 나오는가, 심사하면서 부족합니다, 부족합니다.

아……, 그러면 저는 이렇게 해요. “집에 가 주무세요. 여기서 자기의 관리하지 말고 집에 가 주무세요. 여기 히터 틀어주고 에어컨 틀어주니 좋지요. 그래도 집에 가 주무세요. 이번 달 교회 전기세 너무 많이 나왔어요. 나도 빨리 잘 겁니다. 문을 잠가야 될 것 아닙니까? 집에 가서 주무세요.” 부탁, 부탁하지요.

그러면 권사님이 이렇게 하지요. “내가 내 집안을 위해서가 아니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아, 너무 멀리 가지 마세요. 국가와 민족, 남북통일, 그리고 또 기도할 것이 생겨서 코로나로 기도하고, 교회 부흥과 어린아이들, 유초등부까지 당회로부터 줄줄이 내려오지 마시고요. 그냥 집에 가서 쉬세요.”

이 자기의를 깨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방법은 사랑하는 자를 동원 시켜요.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이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이삭 주고 이삭을 잃어버리게 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로 하여금 친히 손을 들어 이삭을 칼을 들고 죽이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입니다.

이스라엘이 인구수를 계산했다가 무려 3일 동안 죽은 자가 7만 명이거든요. 나눠봅시다. 이런 나눗셈까지 해야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루에 23,000명. 이게 3일이니까 망정이지 만약에 4일째까지 갔으면 7만에다 2만 3천 더하면 거의 십만 가깝게 돼요.

이 말은 결국 뭐냐? 이스라엘 다 죽이겠다는 거예요. “다윗아, 무고한 생명이 언제까지 죽어 나가야 네가 네 의를 버리겠느냐?” 주님께서는 압박을 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자기를 이스라엘의 멘토로 여기기 때문에, 정신적 스승이라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정신적 스승일까요, 죄인의 괴수일까요? 자기는 죄인의 괴수가 아니고 정신적 스승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다윗의 야망이고 다윗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못 먹고 월급 적고 힘들어도 부교역자 생활 때려치우고 선교사 가는 이유는 바로 멘토가 되고 싶은 야망을 자기가 못 견뎌서 그래요. 시키는 대로 하는 것보다도 교인 수 몇 명 안되지만 나에게 전적으로 존경을 보내고 나의 말에 신뢰 보내는 그런 교인 몇 명, 몇 명 되지 않지만 한 2백 6십 명쯤 되지만, 그런 것을 꿈꾸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한국에서는 안 되고 파키스탄에 갈까? 파키스탄은 좀 위험해서 안 되겠다, 미국 갈까, 캐나다 갈까……, 캐나다는 요새는 잘 없고 미국이나 뉴질랜드 좋은 데 있잖아요, 호주 같은 곳에 가는 이유가 목사의 야망과 멘토가 일치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호주 가서 유튜브에 십일조는 없다, 그런 내용 올리면 몇만 명 오니까.

하여튼 왕이 이렇게 스스로 멘토를 자처하고 정신적 지도자 하겠다는 것은 백성들 자체도 이미 질적으로 떨어져서 그래요. 백성들이 멘토를 찾는다는 이것이 소비가 있으니까 생산이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원하니까. 둘이 합의 조건이 맞는 거예요.

여기 자기의를 깨부수는 것은 외부의 적입니다. 그게 뭐냐? 사랑하는 압살롬, 암논. 그러니까다윗이 제대로 처벌을 내릴 수 없고 정의를 행사할 수 없는 이유가, 다윗은 자기 생각 안 하고 자기가 멘토고 정신적 스승이기 때문에 스승이 되려면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자기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는, 자기 말에 따라주는, 자기에게 전적으로 콩을 팥이라 해도 껌뻑 죽는 자기의 팬들이 있어 줘야 돼요. 자기 백성들. 이 백성들을 관리하는 것은 곧 자기를 관리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주인은 어디에 의존한다? 주인은 자기 노예에 의존해서 노예가 주인의 주인이라는 논리, 이게 바로 헤겔이라는 철학자가 말한 주인과 종의 변증법이라는 거예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주인은 노예가 있을 때 주인답고 노예를 해방함으로서 더욱더 주인답다는 거예요. 노예인데 노예로 대접하지 않고 하나의 식구로 대접하면서 상대적으로 자신의 가치, 자기의가 확 높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서 목사들이 뭐라고 하느냐? “나는 여러분의 섬김받는 종이 아니고 주님이 가르치는 그대로 너는 사람을 섬김받지 말고 섬기라는 그 정신으로 저는 이 교회에 목회하러 왔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딸랑딸랑, 종이 되겠습니다.” 나갈 때 얼마 주면 돼, 이런 식으로 퇴직금 따지기나 하지요. 거기에 교인들은 또 진짜 제대로 된 목사가 왔다고 하고 있고요.

교인들 입장에서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교회 있으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그것도 그냥 교회가 아니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괄호 열고, 합동, 괄호 닫고. 정통 개혁주의 있으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소비자가 그걸 원하니까 생산자가 “너희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우리는 정통적인 교회 노회에 속한다. 세금 연말정산 다 된다.” 아이고 참, 그러니 꼭 성령 없는 교인들한테는 딱 맞춰서 성령 없는 목사가 맞게 되어 있어요.

전부 다 누가 주인인지, 노예인지, 서로가 서로를 헷갈리고 있어요.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설교시간에. 나라가 너희를 위해서 무엇을 해줄까를 기대하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서 뭘 해줄까. “교인들아, 목사가 여러분을 위해서 뭘 해줄까 기대하지 말고 교인들이 교회를 위해서 뭘 해줄까를 먼저 생각해라.” 교인들이 목사나 교회에 무엇을 해줄까를 생각하게 되면 교회로부터 혜택을 받아요? 안 받습니다. 그걸로 입 딱 씻고 끝나버립니다.

좀 세상을 아세요. 그걸로 끝나요. 사람이 잘해주면 원래 그렇게 받는 것을 당연한 줄로 알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만큼 인간의 욕망은 업그레이드 되어 있으니까. 어지간해서는 안 돼요. 꼭 뭐 같으냐면 원숭이 같아요. “아침에 바나나 세 개 주고 저녁때 네 개 준다.” 그러니 화를 막 내는 거예요. “좋아, 좋아. 좋아.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주고 저녁에 세 개 줄게.” 좋다고 난리에요. 합하면 둘 다 일곱 개인데.

그래서 사람은 욕망에 놀아나기 때문에 사람의 모든 생활은 인간은 기분대로 산다. 딱 요거에요. 사람은 기분대로 산다. 끝. 사람은 신앙으로 산다. 노. 신앙대로 산다, 믿음대로 산다. 아니에요. 인간은 기분대로 사는 거예요. 일본말로 기마이죠. 기마이로 사는 거예요. 기분대로 사는 거예요. 자기를 조정하거나 위장하지 마세요. 그냥 내가 보기에는 기분대로 살아요.

그러면 이런 인간을, 하나남께서 이 다윗을 어떻게 제거하느냐? 아들이 아버지를 대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이스라엘 왕이기 때문에 다른 백성들을 염두에 둬서 아버지로서 아들을 사랑하는 면모를 보입니다. 여기에 치고 들어가서 거기에 반감을 느끼는 것이 누구냐 하면, 그게 요압이라는 사람입니다. 요압.

지금 왕은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들이 지금 당신을 죽이려고 하고 나라 전체가 아들에게 다 쏠려갔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여기서 왕권을 내놔야 됩니다.” 요압이 하는 말이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약속은 이뤄지지 않게 됩니다. 그게 이뤄지도록 위해서 제가 나서겠습니다.” 하고 압살롬 전쟁에서 누가 큰 공을 세우느냐? 요압이 공을 세워요. 요압이 공을 세우면서 다윗은 걱정이 늘어졌습니다. 나의 적이 너무 세력이 강해졌다.

그래서 요압을 강등시키고 거기에 누구를 등록시키느냐? 아마사를 등록시켜요. 아마사는 어디 출신이냐 하면, 유다지파 출신이에요. 아마사를 등장시킬 때 요압의 대책은 뭐냐 하면, 죽여버리는 거예요. 죽이는 겁니다. 라이벌은 용납이 안 돼요. ‘그동안 내가 산천초목 헤매면서 이만큼 했는데……’ 말로는 하나님께서 다윗왕을 도와줘서 맨날 하지만 그 내용은 뭐냐 하면, ‘이 나라는 내 힘으로, 내 땀으로 이뤘다.’ 내 땀, 내 수고로 이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압살롬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어떻게 바꾸는지 시편 3편을 보겠습니다. 그걸 시편의 표제라고 하는데 누가 그것만 읽어보세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다윗이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 그 당시 다윗의 심정은 어떠했는가를 보여주는 거예요.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여기서 사무엘하는 또 막혀버립니다. 일관성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하면 다윗이 분명히 이야기한 것, 다윗의 적은 누구냐 하면 바로 요압이에요. 그런데 압살롬을 누가 물리쳤느냐 하면, 자신의 적인 요압이 압살롬을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다윗이 압살롬이 죽이지 말라 했거든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 신성우를 죽이지 말라 했다는 말이지요. 요압은 합리적이에요. 적의 장수를 안 죽으면 계속해서 추종자들을 모으게 된다. 그러니까 왕이시여, 전쟁에서 이길 거예요, 질 거예요? 분명히 태도를 정하라고요. 이길 것 같으면 아들 죽는 것을 섭섭해하지 마시고 질 것 같으면 아예 왕권을 내놓든지. 우유부단도 유분수지 밑의 부하 지휘관으로서 지휘해야 될 입장에서 도대체 왕의 태도가 불분명해서 전쟁하기 곤란하니까 이게 뭡니까.

요압이 있다가 다윗이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니까 ‘에라, 내가 알아서 할 게’ 자기가 알아서 했어요. 요압의 부하가 와서 “압살롬이 머리카락이 길어서 나뭇가지에 걸렸습니다.” 가위 있으면 자기 머리 자르고 달아났을 텐데 아주 급했던 모양이지요. 그럴 때 요압이 듣고는, “죽여버려라. 죽이고 끝내자.”

요압의 이런 결단이 이유가 있는 것이, 지금 전쟁이라 하는 것은 무고하고 애매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잖아요. 군사들도 죽어 나가지만 그 주변 마을 주민들 다 피해준다고요. 그러면 이 전쟁이 다윗 자존심 하나 세우겠다는 전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요압의 입장에서.

그런데 그 요압을 성경에서 다윗은 뭐로 보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헷갈리는 거예요. 이것은 누가 봐도 합리적이고 정당한 이유인데 그게 어찌 다윗 입장에서 여호와의 대적이 되느냐? 그게 앞뒤 논리가 매치가 안 됩니다.

이걸 풀어야 돼요. 풀어야 됩니다. 매치가 안 되는데 그냥 넘어가면 안 되잖아요. 시편 3편 2-6절에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셀라)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시편 3편을 다윗은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갈 때에 나의 대적이 이렇다고 한다면 누가 봐도 다윗의 적은 요압이 아니고, 자기편에 서서 목숨을 다해 사력을 다해 싸우는 요압이 적이 아니고 누구냐 하면 압살롬이 적이 되어야 형편상 우리에게 납득이 되지요.

그런데 분명히 압살롬과 그 일당이 다윗의 적이요 하나님의 적이라고 분명히 단정하고 사무엘하로 넘어오게 되면 다윗의 태도와 앞뒤가 안 맞으니까 도중에 우리의 논리가 어디서 문제가 있었지, 라고 검토를 해봐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하가요, 그냥 삼국지도 아니고 소설책도 아니에요. 그야말로 트러블메이커에요. 전부다. 시편 3장 7절에 보면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이 시를 누가 지었다고요? 다윗의 시다. 그러면 다윗은 압살롬, 사랑하는 아들, 그냥 아들이 아니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쫓기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은 자기의 욕망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그걸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적을 발견하게 되어서 그걸 신앙으로 담아서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한번 봅시다. 다윗은 자신이 알고 있는 다윗의 위상 이쪽으로 가는 것으로 맘을 먹었는데(다윗→→다윗의 위상),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생각했던 위상을 꺾어버리고 미지의 다윗으로 이끄실 때에(다윗→→→?) 이 중간에 뭐가 생산되는가? 하나님의 원수, 처음 다윗인 내가 알 수 없는 다윗의 원수를 중간에 끼워 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의 위상에는 뭐가 포함이 안 되었느냐 하면, ‘나는 여전히 누굴 사랑한다, 여전히 압살롬을 사랑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압살롬이 무슨 죄가 있느냐, 압살롬이 무슨 나쁜 짓을 했느냐, 내 아들 압살롬은 나쁜 짓을 안 했어.’

그래서 부탁하는 거예요. ‘제발 요압아. 딴 사람은 죽여도 압살롬은 죽이지 마라.’ 이게 다윗이 예상되었던 다윗의 위상이었어요. 그러니까 압살롬, 아들도 살리고 그다음에 이스라엘도 평정되어서 다시 자신의 왕권이 회복되고 유지되기를, 다윗의 욕망 안에는 이런 위상의 요소들을 고루 갖춰놓고 그걸 기대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통해서 반란을 일으킬 때에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원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위상 이걸 1번이라 하고 다윗도 모르는 자기의 모습을 2번이라 한다면 1번의 모습에서는 원수가 없는데 2번의 다윗의 입장에서는 확실하게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2번의 다윗은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지요. 그리고 이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쪽 1번으로 가서는 안 되고 2번으로 가야 하는 거예요. 여전히 다윗 속에는 하나님의 원수적인 요소가 남아 있어서 ‘자기 부하들 다 죽고 군사들 다 죽더라도 그따위 숫자가 백 명이든 만 명이든 관계없고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 사랑하는 압살롬, 내 DNA, 내 자식, 내 자식은 나는 못 놓겠다. 내 자식을 사랑하지 마, 하는 그 소리는 제발 좀 하지 말아다오. 나는 그 애가 어떤 짓을 해도 나는 용납하겠다. 그 잘못은 내가 담당하겠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다윗 1번의 잘못된 사고방식에서 죄가 나오고, 원수가 나오는 겁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너무나 사랑해서 나무라지도 않았어요. 그 압살롬을 사랑하는 그것을 자기가 감당하는 겁니다. 그 가운데서 압살롬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스라엘은 누구 소유다? 내 소유다. 나는 이스라엘의 멘토니까. 팬이 없는 스타는 의미가 없습니다. 노예가 없는 주인은 주인이 아니에요.

인간은 누구나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자기 형편과 상관없이 항상 자기는 무슨 꿈을 꾸느냐? 내가 언젠가 주인이 되리라. 주인 되고 싶어하는 거예요. 그래서 월급 5백 줄 게, 라는 중소기업 때려치우고 치킨집 차리는 이유가, 무슨 소리 하느냐 하면, 월급 5백 받는데 일을 너무 많이 시켜서 평일에는 8시간 일하는데 세상에 잔업 한다고 주말에 30분 일 더 하라고 해서 기분 나빠서 사표 냈다는 거예요.

그러데 치킨집 하면 하루 근무시간이 15시간이에요. 영업시간 더 늘리고 싶어서 환장했어요. 제발 밤 열 시 이후에는 술집들 다 문 닫으세요, 해도 안 돼. 열 시 이후에 손님 맞아야 해. 그래서 자기 손해를 메울 때 손해를 입든 성공을 하든 그 나는 주인이 될 수 있어요.

내가 주인이에요. 망해도 여전히 주인이고 잘돼도 주인이고, 이래도 주인 저래도 주인, 한번 주인의 맛을 봤기 때문에 다시 남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것은 참……, 퇴직하고 60 넘어 늙어봐야 ‘아, 아파트 경비원도 고맙구나.’ 젊은 애들한테 귀싸대기 맞아도 월급 백오십, 이백이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거지요.

그래서 자식들이 부모들에게 용돈 줄 때 주의해야 됩니다. 부모는 평생 자기가 주인이 되었든 안되었든, 남의 종노릇을 하든 항상 자기 안에는 자기가 주인이에요. 용돈 줄 때 주인이라는 의식이 훼손되지 않게 조심해서 용돈을 줘야지 용돈 주고 난 뒤에 자꾸 노인 대우 하게 되면 기분 나빠서 부모들이 힘들어합니다. 곧 죽어도 자기는 주인이고 어른이니까.

아무리 늙어서 치매 걸려도 며느리한테는 시어머니 노릇 합니다. 아, 참 희한하지요. 혼자 있을 때는 아무렇게나 어떤 짓을 하면서도 며느리 오게 되면 갑자기 옷 단장한다고 하고 시어미의 위세가 손상되지 않기 위해서 조심합니다. 인간의 자아는 옷이거든요. 더러운 것을 감추는 옷이라는 말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제일 먼저 한 짓이 옷 입는 거잖아요.

인간은 옷에다 모든 인생의 가치를 다 거기에 실어놨어요. 육신은 죽어도 자아는 안 죽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온 결과가 자살이에요. 자살함으로서 자살 이후의 자아가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 그게 자살밖에 없으니까. 난관이 있을 때. 치사하고 굴욕적이지만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이고 싶다. 그래서 계속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시편 3편에 나오는 원수에 대해서 보충이 필요해요. 그게 시편 51편입니다.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밧세바 간음 이후에 그리고 우리아 장군을 미필적 고의가 아닌 것처럼 꾸며서 죽였던 간사한, 남자답지 못한 비겁한 짓을 해서 자기의 팬 관리, 백성들 관리에 여전히 자기는 왕이고 싶다, 하는 자기의 욕망의 구조, 여기에 다윗은 사력을 다합니다.

내가 누구의 정신적 지도자라 하는 그 자체, 굶어 죽어도 그거 하고 싶은 거예요. 참, 목사가 참 위험한 거예요. 곧 죽어도 목사예요. 직분이 사람을 망치는 거예요. 한번 장로하고 나면 곧 무슨 짓을 해도 자기는 장로이고 싶어해요. 한번 시어머니는 영원한 시어머니인 것처럼, 한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인 것처럼.

아, 인간이 이처럼 자기의를, 하나님의 원수, 악마지요, 악마가 자꾸 키워요. 너 그거 놓치면 너의 너다움은 없잖아. 너의 너다움, 도대체 이게 뭐예요? 너의 너다움. 너의 너다움을 지키라. 문제는 너의 너다움이 이게 없다는 거예요. 없는데 그 없는 것이 사람의 목을 졸라요. 나의 나다움이 목을 조른다고요.

시체 냄새 풍기면서도, 곧 죽어가면서도 너의 너다움이 하나의 신화 같아요. 이것은 환상 같은 것이 그동안 평생의……,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걸 귀신들렸다 하는 거예요. 인간은 평생 악마 들린 거예요. 자꾸 너의 너다움을 포기하지 말라. 그러면 너는 살맛이 없다. 이런 식으로 계속 압박을 하니까.

이 너의 너다움을 하나님이 회수하는 방법은 뭐냐?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바꿔치기란 뭐냐? “그래, 그래, 너 하고 싶은대로 너의 의를 챙기든지 네 잘난 체하든지 그냥 살아.” 그냥 살게 해주는 거예요. 인간의 본성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의 본성, 야곱의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바꿔치기해주는 거예요.

이 바꿔치기란 게 중요하거든요. 이걸 성경의 신약 사도바울에서는 ‘대신’이라는 뜻인데요. 대신, 대구신학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대신 죽으심, 속죄, 이런 것을 동원하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사도바울에서는 인간을 인간이라 하지 않고 육이라 해요. 육이 영이 등장할 때는 육이 육으로 같이 동반해서 등장하는 거예요.

이걸 없애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유발해요, 육을. 우리가 나쁜 짓을 다 하라는 말이 아니고 나쁜 짓을 하기 전부터 너는 그럴 가능성, 그럴 수밖에 없다는 육이라는 개념으로 한꺼번에 축약시켜 버립니다.

이 세상 모든 죄는 아담의 죄에서 나왔고 그 아담의 죄가 네 안에 꽁꽁 액기스로 다 담겨 있다는 거예요. 네가 지금 아직까지 그런 기회와 경우를 못 만나서 네가 욕하는 죄를 못 지었지 네가 똑같은 경우를 만나면 네가 얼마든지 그걸 재생해 낼 수 있다는 말이지요. 마치 녹음테입처럼 안에 다 들어있는 거예요.

육이 영으로 되겠지요. 바꿔치기하는 거예요. 바꿔 치는 이 대신하심, 대속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 악마가 뭘 하느냐? 이렇게 바꿔치기하는 것이 아니고 악마는 이 육을 뭐로 바꾸라고 하느냐 하면, 이 육을 네가 성령으로 바꾸라고 자꾸 악마가 부추겨요.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인간이 할 수 없기 때문에 악마는 계속해서 자기가 멘토 역할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너의 너다움은 여기서 지옥 갈 수는 없지 아니한가. 그러면 네가 노력해서 너를 어디로 보내라? 천국으로 보내면 그게 남는 장사다. 이런 식으로 악마가 자꾸 부추겨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까? 늘 하던 이야기인데요. 주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방치해요. 방치하고 뭐로 보내느냐 하면, 너는 너다워라, 이걸 어디에 집어넣느냐 하면, 이걸 육에다가 집어 넣어버려요.

다시 말해서 악마를 너는 이길 수 없다. 대신해서, 악마와 함께 있는 것을 나는 뭘로 규정했느냐 하면, 일체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게. 왜 그것은 이미 뭐기 때문에? 이미 시체기 때문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에 네가 하는 행동에 대해서 일체 내가 입 다물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사실은 하고 싶은 대로 못 해요. 왜냐하면 모든 환경이나 이런 것이 주께서 조성해주는 한 거기에 맞추어서 숨겨진 자기 죄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나쁜 짓도 다 환경보고 해야지 그냥 까분다고 나쁜 짓 못 해요. 다 그때그때 하는 겁니다. 세 살 때 나쁜 짓 하고요, 네 살 때 나쁜 짓이 달라요. 일곱 살 때 나쁜 짓이 또 달라요.

인생을 더 살아보게 되면 나쁜 짓이 자꾸 업그레이드 돼요. 점점 더 뱀처럼 간교해져요. 예수님은 갈수록 지혜가 늘어난다 했는데 인간은 지혜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고 간교한 뱀의 지혜가 자기 잘남을 자기변명으로 해서 자꾸 늘어나지요. 사자머리 교수한테 백날 해봐도 그때뿐이고요. 소용없어요. 상담받아봐야 소용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시편 51편에서 한꺼번에 딱 이야기해줍니다. 너는 출생이 죄짓게 되어 있다. 끝.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고 죄가 나를 낳았다는 말입니다. 엄마가 나를 낳았다는 말은 죄가 나를 낳은 거예요. 나는 죄의 아들인 거예요.

야구선수 이정후는 바람의 아들의 아들이거든요. 바람의 손자입니다. 바람의 아들은 이종범이고 야구선수. 우리는 죄의 자손이기 때문에 아담의 자손 악마가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가 날마다 주님께서 규정한 것, 너는 죄의 종이라는 그 말씀의 규정이 규정대로 실현되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돼요.

야, 역시 말씀은 어떤 경우라도 옳았구나. 말씀이 옳다면, 약속이 옳다면 그러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도 이것도 옳은 이야기구나. 이것은 농담이 아니고, 이것은 위로 삼아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내가 뭘 해도 죄인 것처럼 내가 뭘 해도 하나님의 의가 되는 그 사실도 또한 죄만큼이나 더 확실하게 이게 실제상황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행함을 내놓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다 이루심을 증거하지요. 절름발이가 나았다. 절름발이가 나았을 때 금과 은은 내가 없으니 예수 이름으로 걸으라, 했을 때 절름발이가 나아서 만약에 교회에서 간증한다면 “나 이제 절름발이 아니에요.” 이거 자랑하겠어요? “지금 나는 주님을 알고부터 제대로 된 내가 장애인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멀쩡한 장애인 있잖아요. 멀쩡한 장애인. 내가 뭘 해도, 전에는 이렇게 걸었지만 지금 이렇게 걸어도 이게 바로 아무 의미 없는, 지긋지긋하게도 나 장애자 아닙니다, 하는 그 자체가 바로 이것이 나의 의고, 자기 의고 이게 바로 죄였습니다, 하는 것을 낫고 난 뒤에 발견하는 거예요.

암에 걸려서 기도하고 난 뒤에 암에서 나았어요. 암에서 나은 내 모습이 바로 내가 그렇게 기피했던 죄의 결정체입니다. ‘내가 죽어야 되지 암 나아서 뭐하려고? 암에서 나아서 더 살아야 되잖아. 아, 귀찮아 죽겠다. 그때 갔어야 했을 것인데. 갔어야 했는데. 괜히 낫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난 그 기도가 응답될 줄을 몰랐지. 낫고 보니 사는 게 이렇게 힘들걸. 이런 꼴 볼 것이었으면 빨리 죽는 게 나았지. 괜히 쓸데없이 내가 부질없는 짓을 했구나.’ 그게 십자가를 증거하는 방법입니다.

이제 또 식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식사하면서 고민해 보세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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