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회자료

2강-다윗언약

아빠와 함께 2021. 8. 7. 08:42

2021 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제2강-사무엘하 강해 : 다윗언약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제가 실수한 게 있는 게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있는 게 아니고 영채에 있습니다. 사무엘하 11장 11절에 보면,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전쟁하기 위해서 언약궤 있는데 우리야 장군은 언약궤 있는 쪽과 언약궤 없는 쪽과 관심이 어디에 언약궤가 있고 어디에 율법이 없는지 거기에 관심이 있는데 다윗은 자신이 왕이니까 그건 됐고 내 문제 하겠다는 거예요.

이차 방정식 일반해에서 개별해로 빠진 거예요. 관계가 끊어져버린 겁니다. 끊어진 게 그냥 나는 관심이 없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뭘 야기 시키느냐 하면 나는 말씀에 관심이 없고 내 사적인 욕망을 취하고자하는 순간 그것이 율법에 준해서 간음죄와 살인죄를 유발시킨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개별적인 구원에 관심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내가 이제는 그런 실수도 안 하고 완벽하게 구원받을 수 있겠는지, 다윗의 그런 잘못을 우리가 본받아서 다시는 이런 짓도 하지 않겠다고 나선다면 그거는 역시 개별자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거예요. 우리야처럼 죽어도 상관없지, 이래야 되는데 자신이 우리야를 죽여 놓고 그렇게 우리야를 부러워했을까요? “니가 내 손에 죽다니. 나는 니가 부러워.” 뭐 그런 생각이 들겠어요? 그런 생각 들지 않지요. 그게 우리 인간, 개별자에 국한된 한계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가 유지하는 방식은 다윗의 혈통자체가 내부적 혼란으로 와해되는 거예요. 전부 다 무너져 내리는 거예요. 이스라엘 나라가 유지되는 방식은 다윗의 혈통 내부적으로 와해되는 겁니다. 그렇게 와해되는 것, 엉망이죠. 와해되는 그것은 와해되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와해되지 않는 어떤 원칙을 세워버려요.

이건 여러분이 보셔야 돼요. 사무엘하 7장 13절부 14절까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거할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하니까 나단 선지자가 와서, 나단 이 사람도 집안사람으로 다윗의 아들로 나와 있거든요. 나단 선지자가 와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수련회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 참여한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추가적 교재, 족보가 여기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인물들의 굉장히 많잖아요. 수십 명 되잖아요. 그런데 이 수십 명들의 조합, 이들이 있어줘야 이스라엘이 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망해줘야 이스라엘이 살아요.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각기 잘났다고 우기면서 자기 정당성을 한 구석이라도 잡으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노선 변경이 일어나요. 다윗 혈통적 노선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이스라엘은 특정 영웅적 인물의 혈통을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왕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사람이 혈통으로 안 된다면 뭐로 되는가? 혈통을 쪼가리 내는 방식으로 거기다 덧붙여주는 새로운 혈통이 다윗의 죄 또는 왕가의 죄를 바탕으로 해서 새롭게 등장하지요.

여기 나단이라 해서 다윗의 아들 세 번째 나와 있지요. 그 다음에 족보이야기하려면 골치 아픈데 거기 스루야의 아들 나와 있지요. 아비새, 요압, 아사헬. 특히 요압은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또 여기에 여러 가지 역할이 잇습니다만 다윗의 아들 가운데서 암논, 두 번 째가 다니엘, 세 번째가 압살롬, 네 번째가 아도니아, 다섯 번째 스바댜, 여섯 번째 이드로암 쭉 나와 있지요.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하게 되면 이런 말하고 있어요. “목사님, 이것 외워야 구원받습니까?” 이것 외워서 지옥 간 사람들이 더 많아요.

여기 첫 번째 암논 있잖아요. 세 번째가 압살롬. 다윗의 아들 그 암논이 뭐냐 하면 권력승계 1위입니다. 압살롬이 3위에요. 그래서 3위가 1위를 제거해야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적절한 기회를 봤는데 거기 미모의 이복동생 다말을 욕되게 한 암논을 죽이고, 설명 나와 있지요. 압살롬의 동생 중에서 다말이 있는 겁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 그걸 말하는 게 아니고 사무엘하 7장 14절을 말하고 싶은데 뭐라고 돼있느냐 하면,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돼있어요.

15절은 뭐냐 하면 제가 아까 어렵게 설명했는데 다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다윗 왕의 특징은 죽음에서도 소환된다. 그러나 사울의 죽음은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다윗에게는 죽음에서 소환되는 쉽게 말해서 죄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용서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왕이 되는 이 요소가 다윗의 계통에 저 후에 어떤 다윗의 자손(롬1:1~3)의 영향력이 시간을 거슬러 거꾸로 물이 내려와서 다윗에게 도착하는 겁니다. 나중에 아벨까지 창세기 4장까지.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시간을 예수님을 마지막 때로 하고 그 마지막 때가 작은 곳이 아니고 높이 있어요. 물이 높은 데서 작은 데로 흐르듯이 마지막 때가 시간을 거꾸로 가기 때문에 이건 뭐냐? 이것은 종말의 주입입니다. 마지막에 일어날 그 일을 작은 조각으로 분배하고 있다. 나눠주고 있는 거예요, 이 요소가.

그러면 여기도 마찬가지지요. 오늘날 성도는 시간이 정지 되어있으니까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까 그 마지막 때의 혜택을 성도에게 주면 성도는 이미 구원받았다가 되는 거예요. 이미 구원되었고 성도의 모든 모습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구약에 흐르는 모든 여기에 대해서 일대일 대응이 돼요. 사무엘하에 일어나는 인물들 있잖아요. 그 인물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미리 역할을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여기 모압이라든지, 암논, 압살롬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안에 이 요소들이 다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보면서 우리가 좌절하고 이럴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합격해놨으니까. 느긋하게 보는 거예요. 아하 나한테 암논, 내 속에 압살롬, 나한테 요압 요소, 아사헬, 이런 잔인한 요소가 있었구나. 아비새 같은 요소가 있었구나. 다윗, 솔로몬 같은 요소가 있었구나. 이런 걸 느긋하게 보는 겁니다.

느긋하게 보는데 딴 걸 느긋하게 봐야 되는데 그저 보는 것은 뭐 미모였다, 아름다웠다, 이런 것만 자기한테 마음에 드는 것만 뽑아내지 마시고 성경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은 개별 해에요. 아까 이야기했던 x²+3x-4했지요. 개별적인 공식에다 마지막 때 보편적인 진리가 담기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내 모습이 어떠했기에 십자가 아니면 구원이 될 수 없는가, 그걸 보는 방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무엘하 7장 14절에 보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거기서 사울은 징계 받으면 그걸로 끝이지만 다윗은 징계 받는다 할지라도 내가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겠다. 이렇게 돼요. 내 앞에 패한 사울처럼 은총을 은혜를 빼앗지 않겠다. 이것을 다섯 자로 ‘다윗의 등불’이라고 해요.

이것도 촛불 같은 게 있으면 좋은데 다윗의 등불을 꺼지질 않아. 흔들리지만 꺼지질 않습니다. 다윗의 등불이거든요. 다윗의 등불이 영원히 빛난다 말이죠. 그래서 이것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고 보편적이죠. 개별적인 것은 나의 행동여부를 통해서 그것이 결정되지만 보편적인 것은 예수님의 행하심과 관련되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히 완성된 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보편적이 되지만 내가 예수 믿겠다는 것은 치매 걸리면 그걸로 끝장입니다. “예수가 누구지?” 끝장이에요. 기분 나빠서 술 한 잔 먹고, “나 예수 안 믿는다.” 술 깨고 난 뒤에 “아이고, 실수했구나.” 그렇게 되면 안 되겠지요. 나중에 주께서 문제 삼으면 농담도 못합니까? 봐 주세요, 라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요.

그래서 여기 사무엘하 7장 14절에서 다윗이 오해를 합니다. 내 개별자 다윗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지금 이런 오해가 어디서 드디어 제자리 잡히느냐 하면 솔로몬에 와서 제자리를 잡히는데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다윗은 뭐라고 제안하느냐? 다윗은 성전을 짓겠습니다, 출발점이 다윗부터 시작해서 제가 여호와를 위해서 성전을 지어드리겠습니다. 내 행함을 통해서 어떤 결과가 생긴다는 겁니다.

이걸 보통 교회에다 적용시키면, 여러분들이 금가락지, 집 있는 사람은 팔고 전세로 옮기고 나머지는 교회에 헌납하세요, 라고 부흥사가 와서, 부흥사가 목사 친구들이 많아요. 그런 식으로 돈 빼내는 설교를 하는 거예요. 돈 빼내는 설교를 할 때 제일 결정적으로 써먹는 것이 뭐냐 하면 자식들을 거론합니다. 자식에게 뭘 남겨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봤지요. 자식에게 돈 남겨서 자식들 싸우는 것 봤지요. 그러지 말고 자식에게 줄 돈을 교회에 헌금을 하시면 그 교회가 부흥되게 되면 마귀나라는 쫓겨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면 이 사회가 얼마나 아름다운 사회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왕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쓸데 잘 써야 됩니다. 자식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를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돈 몇 푼 주는 것보다도 교회에 먼저 줘서 교회로 하여금 여러분의 자식 대대로 손자까지 영적으로 양육 받는 그러면 여러분도 천당 가고 기다리고 있으면 자식들도 따라서 어머니 덕분에 같이 천국 올 것이니까 이게 바로 돈을 땅에 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다. 오늘 설교가, 사기가 왜 이리 잘 되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지금 문제는 예배당이 보인다는 게, 이게 부동산이거든요. 부동산이 눈에 보이는 게 문제입니다. 지금 다윗은 보이는 성전을 지어드리겠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은 성전을 짓게 되면 무엇이 되느냐? 땅이 고정돼요. 부동산이에요. 땅이 고정되면 나중에 다윗계통, 다윗의 자손 주님에서는 이 땅은 불 심판 받기 위해서 땅을 포기해야 돼요. 땅을 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땅을 성전 지으면 땅을 포기되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 땅은 영원해야 한다는 그런 조건이 성립해버려요. 원래 골리앗을 이길 때는 소년 다윗은 무조건이었습니다. 주님의 율법의 무조건의 승리에요. 그런데 여기다 다윗이 성전 지어드리겠다고 자기의 조건이 여기에 끼어든 거예요. 그러면 무조건은 조건을 배척하게 돼있습니다. “제가 성전 지어드리겠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하나님은 네가 성전을 알기나 아냐?

“성전은 인간의 몸이다.” 이걸로 대체해버려요. 인간의 몸인데 그냥 몸이 아니고 네가 생각하는 네 몸, 육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여기는 없는 몸이 새로 등장하는 몸을 말합니다. 인간에 아담에 속하지 않는 다른 몸으로 성전이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네가 성전을 지어드리면, 만약이 다윗이 성전을 지어버리면 하나님 입장에선 어쩔 수 없이 성전에 갇히게 되는 거예요.

세상 좀 구경하려 하는데 다윗이 성전을, 효도를 해버리니까 효도를 받아 준다가 바깥에 나가지를 못하네. 밖에 나가질 못해서 시킬 것은 다윗한테 시켜야 돼요. 이건 받들어 모시는 게 아니고 인간의 종이 돼버리잖아요. 기존의 종교처럼. 기존의 종교는 신들을 위한다는 식으로 신을 신전 안에 가둬버렸습니다. 다곤 신 같은 경우에는 신전 안에 가두었지요.

여기에 침입자가 있었으니 언약궤라는, 언약궤는 상자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언약궤가 말하죠. 이게 네게 상자로 보이느냐? 이게 상자인데 상자 두니까 다곤 신전이 완전히 엉망이 되고 말았어요. 이게 상자 같은 죽은 물체인데 죽은 게 아니고 살아 있단 말이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거기다 cctv를 설치를 했어야 돼. 도대체 몇 시에 다곤 신상의 손목이 날아갔는지, 그걸 보고 싶어요. 그러나 믿음은 보이는 게 아니니까 주께서 허락하는 게 아니지요.

하나님 쪽에서 성전을 지어버릴 때에 다윗이 성전을 제공했잖아요.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이 규칙자체를 하나님께선 박살내버립니다. 하나님은, “네가 손으로 짓느냐? 그렇다면 거기에 들어갈 마음은 없다.” 인간이 예배당을 지었기 때문에 주님은 예배당에 안 계시는 거예요.

그러면 왜 교인들한테 돈을 강요해서 예배당을 지으라 하느냐? 예배당 짓게 되면 그게 부동산이 되잖아요. 우리나라 자본주의에선 부동산 값이 오르게 돼있고 이걸 팔고 세 배, 네 배 더 넓은 성전 짓고, 또 그것 팔고 더 큰 성전 짓고. 이건 자본주의의 이자가 늘어나는 원칙을 그대로 따라한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에서 주님이 사흘 만에 지으라는 성전은 예배당을 말하는 게 아니고 건물이 아니고 우리의 몸이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는 이러한 이단들이 등장해요. 기존 것 반대하면 진리 되는 줄 알고 또 우기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몸이 성전이다. 이건 지방교회 같은 데는 이렇게 주장하지요. 지방교회 뿐만 아니고 뭔가 개혁의 티를 내서 다른 교회 교인들 빼먹으려하는 뭔가 독창적인 것을 끄집어내서 지 자리 한 번 잡겠다고 우리 몸은 성전이지 예배당 짓고 하는 것은 다 거짓이라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성전이 조직화 된다는 거예요. 조직화 되었으니까 이 조직을 크게 키우면 이게 바로 사무엘하에서 그렇게 다루는 국가에요. 그러니까 사무엘하에서 국가 권력을 놓고 투쟁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투쟁을 미리 다 보여준 거예요. 인간의 투쟁, 투쟁하지만 결국 마지막 욕망의 가현체는 국가 최고 권력자가 누가 되느냐 그겁니다.

그렇게 국가가 최고 권력자가 될 때 그 위치가 어떤 타이밍이냐 하면 국가의 이름으로 메시아를 죽여 버려야 될 그 기능이 기다리는 곳으로 그들은 접근하고 있지요. 기독교국가, 우리 전체가 기독교국가다, 전체가 이슬람국가다. 뭐 이거는 한 마디로 짐승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자꾸 눈으로 확인하려고 하는 거예요. 다윗도 그런 오류를 하게 돼있어요.

사무엘하 끝에 보면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합니다. 원래 인구조사는 군인들이 하게 돼있어요. 기간은 9개월 20일 정도 걸립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윗의 군대장관 요합의 권한인데 왕이 나서서 인구조사를 하겠다고 하니 요압이 말리지요. “임금님, 인구조사 안 해도 우리 넉넉한데 왜 인구조사하십니까?” 다윗은 고집을 부려 인구조사를 하지요. 인구조사를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문제가 왕에게 있고 요압에게 있는 게 아니고 백성 그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백성을 죽여 버리기 위해서 인구조사를 왕이 시킨 거예요.

새로 나온 책, [두 개의 구원] 교재에 보면 나와 있어요. 백성들이, 국민들이 지도자를 원하는 이유는 나는 지도자 될 자격이 없다는 겸손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도자를 뽑는 거예요. 우리 백성들은, 국민들은 남을 위해서 희생하거나 봉사하거나 뛰어난 능력자가 아닌 것을 아는 겸손한 자인 것을 티를 내기 위해서 나 대신 지도자를 뽑겠다는 얄팍한 수를 쓰는 거예요. [두 개의 구원] 교재에 보면 나와 있어요.

그래서 나라가 잘못되면 다 지도자의 잘못이지 우리는 그저 겸손했을 뿐으로 백성으로 참았을 뿐이다. 우린 그냥 촛불만 들었을 뿐이라고 이런 식으로 자기 의로움을 챙길 것은 다 챙기고 지도자를 뽑는 겁니다. 참 못 됐지요, 백성들이.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왕부터 시작해서 백성들까지 운명을 관련지어버려요. 왕 제도로 안 되면 왕은 그냥 포로 잡혀가는 이 정도인데 백성은 집안이 거들 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건 다른 말로 이야기해서 제대로 된 왕이 있다면 백성들은 그냥 공짜로 혜택을 입는 그런 방식이 돼요. 그 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리스도라 합니다. 주님이라고 해요. 이 말은 뭐냐? 이라는 뜻이에요. 왕이란 뜻은 백성은 계약자가 아니고 될 수가 없고 하나님은 백성과 개별적으로 사적으로 계약한 적 없고, 오직 하나님은 택하신 왕, 임금과 계약을 맺었다는 겁니다. 이게 다윗계약이에요.13.  He shall build an house for my name, and I will stablish the throne of his kingdom for ever.14.  I will be his father, and he shall be my son.  방금 하나님께서 손수 백성들 제치고 왕과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너를 친히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면 하나님과 계약 맺은 이 왕이 확장이 됩니다. 확장이 되어서 새로운 백성들이 왕에 의해서 선택을 받게 되면 이 나라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되겠다. 이게 바로 다윗언약, 사무엘하 7장 13절, 14절에 나오는 그 내용입니다. 다윗은 자신한테 이야기하는 줄 알고 신이 났어요. 야, 이게 웬 떡이냐 싶을 거예요. 그게 사무엘하 7장이죠.

사무엘하 7장 그 계시를 나단 선지자로부터 들을 때 다윗은 사무엘하에 어떤 여인이 목욕하고 있는 그 순간을 목격한다는 그 생각은 지금 전혀 못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에서 상당히 역설적인 사실을 하나의 문장으로 하게 되면, “목격했기에 거짓말한다.” 목격 안 했으면 거짓말할 수 없어요. 체험했기 때문에 드디어 거짓말이 슬슬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뭘 봤기 때문에.

내가 보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서 안 보여주고 내가 거부한 그것을 주께서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목격자의 자격으로 거짓말을 해줘야 이 거짓말이 언약적으로 유의미한 거짓말이 됩니다. 이게 죄인이 되는 방식이거든요. 보여주고 죄인 되게 하는 거예요. 이 위치에 누가 있느냐? 다윗이 있는 겁니다.

밧세바가 임신하고 난 뒤에 임신 소식을 다윗에게 알려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예요. 이참에 땡잡자 이 말이죠. 왜? 권력이니까. 왕의 자식을 가진다는 것이 날이면 날마다 오는...., 남편 자식 아니에요. 그런데 다윗의 반응은 뭐냐 하면 “나 아니야.” 이게 먼저 반응하고, 목격했기에 나 아니라는 거짓말이 의미가 있고, 이 거짓말이 발생되는 타이밍 잡아서 나단 선지자가 새로운 계시를 가지고 등장합니다. 이 무대가 전부 다 자기 대본을 쥐고 있어요. 거짓말하면 딱 와요.

이스라엘 내 전체가 주님의 짜인 각본대로 움직입니다. 어느 누구에 대해서 완전히 책임을 몰빵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역할을 했을 뿐이지 책임을 묻지 않는 게 아니에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어요. 죄 없는 자가 돌을 치라는 이 말은 그 돌을 놓으라는 뜻이거든요.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칠 때 본인은 거짓말쟁이라 감히 생각 못했어요. 왜냐하면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신명기에 간음한 자는 돌로 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영광이 된다, 이걸 철저하게 배운 거예요. 실제로 그 현장을 목격 안 했습니다. 목격하고 난 뒤에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 당사자와 함께 그 현장에 왔을 때 돌을 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대로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나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권한이 있다고 오해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과 관련된 바리새인이라면 짱돌 놓고 도망칠 게 아니고 쪼르르 주님 앞에 나와서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세리처럼 그렇게 해야 될 텐데 이 인간들은 계속 거짓말쟁이로 그 현장을 황급하게 떠나기 바빴어요. 나이 많은 것부터, 나이 많은 게 그만큼 죄를 많이 졌다는 뜻이거든요. 나이 많은 것부터 짱돌 놓고 그 현장을 떠나면 그만입니까? 아니 주님 목격 안 하면 그만이에요? 세상 끝에 모든 무덤에 있는 자들이 호출되는데요.

우리 성도가 주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닌 게 뭐냐 하면 성도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다음에 잘할게요, 라는 말을 이제는 안 해도 된다는 겁니다. 다음이 어디 있어요. 지금 이 순간이 전부인데 다음이 있어요. 다른 데 가서 잘할게요, 이런 것 있잖아요. 다른 공간에 가서나 다른 사람에게 잘할게요. 이럴 필요 없어요. 안 그래도 돼요.

그 인간이, 컵이 여기 있다가 저기 가면 컵이 달라집니까? 똑같은데.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 가면 안 샐까요? 이것 찬송가에 넣어야 돼. 찬송가에 가장 적절한 거예요.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선 안 샐까~ 인간은 환경 바뀌고 시간과 공간 바뀌면 자기가 다른 인간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다고 착각들 하는데 그런 것 없습니다. 그 상황마저도 주님께서 주신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녀 교육시킬 때 잘하라고 교육시키지 마세요. 네 본색을 보이라고, 너도 모르는 네가 접혀진 너의 본색을 발휘해 봐라. 네가 얼마나 그림을 잘 그리는 게 아니라 네 그림이 입상하면서 숨겨진 교만이 터져 나오는지 보자. 부모는 그걸 봐야 되지요.

“엄마 또 백점이야.” “엄마 눈에는 또 교만이구나. 네가 백점 맞은 것이 너 잘나서가 아니라 엄마 닮아서 그렇다.” 이런 것. “어디서 머릴 가지고 DNA가 누구 건데. 반은 내 거야. 다른 DNA론 안 되잖아요. 내 DNA론 되잖아, 봐. 엄마한테 영광을 돌려야지 어딜 교만이. 반만 할게. 반은 아빠 거니까. 그럼 바쁘잖아. 내가 아빠한테 전달해줄게.”

그래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성도는 현장에서 주께서 무엇을 지키느냐는 들을 수 없어요. 일단 일을 저질러놓고 그 다음에 주님의 지시가 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무엘하 11장 다윗이 범죄 한 장면을 보면서 이런 생각 안 했던가요? 그 나단 선지가가 미리 이야기해야지. 살인하지 마세요, 라고 왜 미리 이야기하지 않고 일을 저질러놓고 뒤에 나와서 바로 당신입니다, 이런 식으로 꾸중을 하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나단 선지자 탓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바꾸자는 거예요.(혈육노선→미래노선) 뭘? 노선을 바꾸자. 어떤 노선? 지나온 과거의 혈육에서 새로 맞이하는 미래의 노선으로 갈아타게 하는 거예요. 갈아타려면 기존 혈육의 그 실정, 그 속내는 완전히 다 까발려야 돼요. 마치 옆구리 터져서 내장이 다 나오듯이 속에 있는 모든 것이 다 터져 나와야 됩니다.

터져 나와서 다윗은 껍데기라고 봐야 되지요. 터져 나오는 다윗의 속성이 다윗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다윗의 아들 있지요. 혈육, 아들한테 다윗에게 내장돼있던 그 속성이 아들 내부로 확장되면서 아들들이 제2, 제3의 다윗처럼 욕망과 권력의 화신이 되어서 날고, 뛰고 난리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여기서 사무엘하 7장 14절을 다시 봐야 돼요. 다윗이 있고 너의 아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집이 되게, 집이 가문이거든요. 하나님의 가문이 되게 해줬다. 헤헤하고 웃지요. 좋지요. 그러나 헤헤는 너무 이른 거예요. 가문이 되겠다하는 것은 다윗이 알지 못하던 이게 7장이죠.

11장을 거쳐서 12장 드디어 압살롬 나오고, 암논이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는 사건부터 후궁이 열 명이나 아들한테 공개적으로 왕의 소유물이 농락당하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 집안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어 가시는지 그때 그 이유가 점점 더 명확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쭉 가면서.

개인적으론 그냥 지식으로 확보하면 그만이죠. 그런데 다윗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서 월남치마처럼 그 넓은 폭에 자기도 몰라요. 자기 후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떤 일이 일어나도 후손들이기 때문에 그 속성은 다윗 본인의 속성의 갈라짐, 갈래들 다 다윗에게 나오는 숨겨진 가득 들어있던 속성들이 아들로 확장돼있는 겁니다. 마치 이집트의 삼각주처럼. 나일 강에 퍼져서 삼각주가 형성되거든요. 모래밭이 있듯이 섬이 있듯이 삼각형 모양으로 확 퍼지는 겁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진짜 하나님의 축복이에요. 내가 이렇게 성질 더러운 것을 낳았구나. 내 말 안 듣는 것이 마치 우리 아버지한테 내가 말 안 들었던 것처럼 어찌 그리 빼다 박았노? 그러니 우리 집안이 될 리가 없지. 이럴 때 뭐냐? 갈아타는 거예요. 이 노선이 무슨 노선이냐 하면 바로 다윗계통에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우리야죠.

죽은 우리야의 씨가 등장합니다. 잉태지 못한 자의 자식이죠. 다윗은 잉태한 적도 없는데 다윗의 아들 되는 그렇게 접붙임이 되는 거예요. 다윗이라는 못돼먹은 죄인에게 그 죄를 너는 영원히 구원될 수 없음을 확인시켜주고 달라붙도록 해주는 것이 뭐냐? 다윗에 의해서 친히 살해한 자의 자식이 다윗의 후계자가 돼버리죠.

그래서 다윗의 이 후계자 경쟁에서 하나님께선 계속 쳐내기 시작하는 거예요. 다윗의 정통 혈통들이 다윗을 닮아서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는 것을 다 쳐내고 거기에 다윗의 잉태치 못한 자식을 집어넣어버리는 거예요. 이것은 마치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쳐내고 이삭을 정통 후계자로 삼는 거예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주입, 하나님의 뜻의 개입입니다. 성령의 개입이죠.

너는 악했지만 네 속에 들어오시는 분은 의로운 분이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분이 네 속에 화목제물로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게 바로 성전이에요. 너의 몸을 내가 거하는 성전으로 삼겠다. 네가 지을 생각하지 마라. 내가 친히 너를 통해서 내가 거하는 성전이 되게 하겠다. 이것이 바로 다윗언약입니다.

그래서 다윗언약의 특징 중 하나는 뭐냐 하면 한 사람의 구원이 여럿 다수의 구원이 되게 한다. 그러면 이것은 다윗을 통해서 기존 유다지파는 유다지파가 아니고 새로운 다윗의 유다지파가 많이 생기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7장 4절에 나옵니다. 새로운 유다지파가 등장해요. 기존의 혈통적 유다지파는 벌써 한 물 간 거예요. 새로운 유다지파로 바뀌지요.

요한계시록 5장 5절에 이건 누가 크게 읽어볼까요. “유대 지파의 사자가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너의 죄악 된 육에 하나님의 생명을 거기다가 불어넣겠다. 네가 생명을 담은 포장지가 되는 거예요. 이걸 입맞춤이라 해요. 지가 잘났다가 아니라 네 안에 네가 하지 않은 다른 내용이 주님이 하신 내용이 네 안에 들어와 꽉 채워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생명이 사망을 삼켜버리는 거예요. 생명이 죽음을 삼켜버리죠. 그러니까 죽어야 될 이유가 생명 때문에 이 땅에서 오래 안 살고, 오래 안 살아도 돼요. 한 구십 일곱 살, 백 살 정도 살면 됩니다. 죽어도 괜찮아요. 언제 죽어도 생명은 생명이 이겼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자랑할 것은 십자가 외에는 없다. 왜냐하면 유다지파와 관련되어있다. 다윗에게 일어난 현상이 나에게도 그대로 일어났다는 겁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셔서 구원한 것처럼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을 불러서 의롭게 하신 그 원칙이 언약이란 요소 때문에 그것도 우리와 계약 맺은 게 아니고 개별자 말고 바로 왕 되신 분과 계약 맺어 놓고 그걸 하나의 구원이 하나의 예수님의 죽었다가 부활이 다수의 부활로 이어지도록 그렇게 계약을 맺은 거예요. 그게 다윗중심의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 혜택을 이방인인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라는 우리가 이렇게 혜택을 입은 이유가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그것은 피로 모든 걸 무효화시켰기 때문에 혈통을 무효화 시켰어요. 피에서 기존의 혈통을 무시하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십자가 피로 새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 믿는다고 유대인이 아니고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피 믿으면 이것이 진정한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걸 내 공로로 여러분 공로로 자랑할 수 없는 이유가, 우리가 거기서 어떻게 개입하느냐 하면 우리는 죄인으로 개입하기 때문에 지 죄 진 걸 자랑하면 안 돼요. 십자가 자랑하라 하는데 죄 지은 걸 자랑하고 지 마음대로 사는 걸 자랑하면 이건 주객이 잘못되잖아요. 그 잘못된 그게 바로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인간의 권력이 욕망이 되고, 욕망이 주도권 싸움에 나서게 돼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숨겨져 있는 압살롬 같은 경우에는 왕이 되고 욕망, 자기는 3위잖아요. 암논은 1위였다. 영순위, 다음 차기 왕. 이 사람들이 이런 걸 하는 이유는 다윗을 인생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다윗의 특징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사실, 이게 너무 신나는 거예요. 나는 조금만 해도 작살나 죽이는데 다윗은 그런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용서를 해주니 그 용서가 탐이 나는 거예요. 나도 저 용서를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윗은 본인이 모델이 아닌데 다윗은 숨겨진 솔로몬을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솔로몬을 생각 안 하고 다윗이 받은 지 마음대로 해도 죄 사함이 되는 그게 탐이 난 겁니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탐이 나는 것처럼 탐이 난 거에요. 그래서 압살롬이 1위가 되기를 원했는데 여기서 암논이 압살롬의 누이동생을 강간하니까 압살롬이 입을 다물었다. 이거는 정의고 이런 것 없어요. 이걸 통해서 3위가 1위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다고 생각한 겁니다.

욕은 누이동생이 먹었는데, “지금 네가 따지거나 하지 마. 가만있어. 오빠 믿지? 오빠 잘 되면 네 명예 회복시켜줄게.” 그럼 이건 율법을 율법대로 드러낸 게 아니고 율법을 어디로 거치느냐 하면 나의 욕망을 경유해서 율법을 계산한 거예요. 율법에 따른 그 경쟁자를 제거하고 그 권력을 내 것으로 인수인계하는데 율법을 이용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 거예요.

여러분 이게 어떻게 남의 이야기되겠어요? 사무엘하 이해할 때 뭘 생각하라 했습니까? 기존 한국교회 생각하면 딱이죠. 2층에서 예배드리고 아래층에서 예배드릴 때 둘 다 하나님의 정의를 부르짖지요. 그것 누구를 위한 정의입니까? 부동산, 재산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정의에요. 돈과 관련된 정의입니다. 도대체 이 교회에 퍼부은 내 십일조가 얼마고 헌금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주장하거든요. 그 십일조 누구에게 드렸어요? 하나님께 드린 게 아니고 지 계좌에다 주식투자한 거예요. 교회란 주식을 산겁니다. 언약한테 준 적이 없어요.

삼 대째 섬긴다? 뭔 뜻입니까? 삼 대째 돈을 바쳤다 이 말 아닙니까. 뭐든지 돈으로 해석하면 안 될 해석이 없어요. 다 돼요. 다 됩니다. 참 쉽지요. 모든 교회는 돈으로 해석하면 다 돼요. 목사 한마디 한마디를 그냥 듣지 마시고, “이러니까 나에게 얼마 줄래?” 이걸로 이해하면 목사 설교가 참 쉬워요. 욕망이거든요. 권력이고. 교회도 하나의 꼴에 조직이라고 거기에 권력이 있다고요.

권력, 아까 했는데 “내가 나를 지키는 것 같이 왜 너는 나를 지켜주지 못하느냐?” 나에다 당회장을 집어넣어 보세요. 왜 장로는 나를 힘들게 하느냐? 이 논리가 그대로 다 적용되잖아요. 이것이 바로 여기 나오는 인물들 하나하나가 개별자가 다 그래요. 욕망에서 벗어난 인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밧세바까지 전부다. 솔로몬도 마찬가지고요. 전부 다 율법을 빙자해서 자기의 야망을 채우는 거예요. 이게 인간입니다.

사무엘하를 경유해서 솔로몬에 이르고 솔로몬에서 나라가 둘로 나눠지고 결국은 이스라엘이 망하고. 이스라엘의 망함은 우리의 망함을 미리 앞당겨 보여준 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