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마음의 기호

아빠와 함께 2021. 6. 16. 21:32

20210614a 부산강의 : [시편]39(23편)-마음의 기호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3편 시작하겠습니다. 시편23편 3절에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렇게 돼있지요. 여기 소생시킨다는 말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나를 어디로 집어넣느냐 하면 죽음으로 집어넣고 죽음에서 소생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신됨을 드러내는 거예요. 우리를 죽음으로 집어넣고 죽음에서 건져내는 식으로 기존의 신과 다른 하나님을 소개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시편 23편을 보면서 우리는 따져봐야 된다. 뭘 따지느냐 하면,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건데, 뭘 따지느냐 하면 인간이 감히 하나님과 함께 있음, 이 자체를 따져봐야 돼요, 가능한지. 이게 가능합니까? 인간은 나와 같이 노는 거예요. 하나님과 감히 함께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선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것이 시편부터 해서 성경에 많이 나오거든요. 우리는 뭐부터 출발해야 되느냐 하면 이거는 한 마디로 말해서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것이 거짓말이에요. 거짓말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거짓말하는 주특기를 갖고 있는데 그 거짓말 중에서 최고의 구라는 자기가 하나님께 함께 있다는 거다.

왜? 인간은 완전하고 싶고 완벽하고 싶은 그러한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시한 인간과 같이 돌아다니는 것, 그거는 별로에요. 같이 있으려면 적어도 하나님과 함께 있어줘야 그게 함께 있는 중에서는 최고의 함께 있음이죠.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 백 프로 구라입니다.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이걸 따져봐야 돼요.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이걸 거짓말인 것을 드러내는 증거가 많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많을까요? 어느 증거가 많을까요? 우리의 평소는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그 증거가 더 많아 쏟아져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 기분에 울고 기분에 살고 기분에 웃고 있거든요. 그러니 하나님이란 것은 자기 기분 좋기 위해서 자기가 조작해내는 어떤 관념 같은 것이라는 것이 그런 증거가 더 많아요.

그래서 시편 23편은 한 마디로 뭐냐 하면 거짓말인데 다윗은 지금 거짓말하고 있다. 다윗은 거짓말쟁이다. 그런데 다윗은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본인의 입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은 하나의 실험이다. 인생은 실험이다. 어떤 대담한 실험이냐 하면 과연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할 수 있는가? 이거는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인간과 함께 할 수 없어요. 그건 기정사실이에요.

그냥 하나님을 추구한다,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라, 하나님이 도와주면 좋겠다. 수시로 도와주면 좋겠다는 건 누구나 갖고 있는데 그거는 함께 하는 게 아니에요. 이 차이를 알아야 돼요. 여러분들이 돈 많은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새롭게 시작한 신혼 자식들을 수시로 도와주면 참 고맙지요. 그러나 수시로 도와주는 것과 한 집에 함께 사는 것과는 완전히 엄청난 차이입니다.

시부모가 와서 돈 좀 주고 할 때 빈 말이라도 그렇게 하지요. “나는 어머님, 아버님과 함께 살고 싶어요.” 그러면 시어머니가, “제발 거짓말 좀 하지 마라.” 도와줄 때 그냥 예의상 고맙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좋은데 함께 있다는 것은 백 프로 거짓말이에요. 인간은 돈만 있으면 혼자 살고 싶지, 이게 인간입니다. 돈 있으면 혼자 살고 싶지 같이 살고 싶지 않아요.

제가 서울강의에서 들어보면 알겠지만 부부는 동업이라 했잖아요. 처음에는 사랑으로 했는데 나중에 사랑이 돈으로 변해요. 돈 없는 사랑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돈 없는 사랑이. 참. 돈 있는 사랑은 귀하지요. 그거는 사랑 때문에 돈 때문에 귀하지요. 사람은 혼자 살고 싶은 겁니다. 이거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본인도 본인을 말릴 수가 없어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런데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이 말은, 이거는 인간의 본성을 넘어서는 거예요. 인간의 본질과는 너무 차이 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지금 다윗의 시편 23편에서 하는 건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고 떠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함께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누구와 정이 들어서 아주 깊이 사랑이 넘칠 때는 그럴 수가 있어요. 이별은 두렵지 않고 눈물은 참을 수 있지만 그러나 과연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은 나를 너무 슬프게 한다.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홀로 있다는 것은 조금 전까지 같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 자기가 같이 있을 때 얼마나 내 행복이 업그레이드되는가를 늘 시험하고 측정해 온 거예요. 같이 있고 싶다는 것은 자기한테 행복이 될 경우에는 그 상황을 본인은 놓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어쨌거나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냥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구지요. 고대사항이지 모든 인간의 본질은 혼자 있는 게 편합니다. 물론 돈 있고 난 뒤에 편하지요. 그렇다면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가 빠져버리면 나는 부족하다.

홀로 있다는 것은 나한테 힘들다, 어렵다, 하나님 없이 혼자 있는 것은 괴롭다, 슬프다, 라고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는 그 출발점이 인간에서 출발한 게 아니에요. 다윗의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닙니다. 출발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상처로부터 출발해요. 이게 기존에 시편 23편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시작점이에요. 하나님의 상처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상처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신은 죽었다. 하나님의 죽음부터 해석을 해야 시편 23편이 풀립니다. 신이 죽은 거예요. 신이 죽었다는 것은 악마가 원했던 거고 모든 인간들이 내심 원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내세워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내가 없다는 것보다 더 아파하는 그러한 새로운 존재의 출현이 등장하는 겁니다. 다윗을 통해서.

내가 죽고 내가 없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대수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이 아픈 것은 내가 참을 수 없다는 것, 이런 존재 자체가 특이한 겁니다. 나를 소생하는 것, 나를 죽음 가운데 살리는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소생,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그 사건이 다시 발생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코 혼자 있다는 다윗이란 다윗에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윗이라는 다윗의 하나님이 되게 하는 그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경우에만 비로소 다윗은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거는 보통 인간 아니지요. 일반적인 인간으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월요일이잖아요. 어제가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복음 들었던 그 날이잖아요. 어제의 복음이 오늘까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날이 주어지면 우리는 바닥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은혜 받은 것은 오늘에 와서 다시 의심해야 돼요. 이거는 거짓말이다. 내 본성을 내가 아는데 나는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고 싶은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싶어 한다는 말은, 나로 인하여 즐겁다는 말은 나에게는 인생 상처가 없어야 된다. 아픔이 없어야 된다는. 나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상처 없는 나로부터 오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거예요.

상처 없이 출발한다는 것은 모든 시편과 모든 성경말씀 다 포함되는데 시편 23편과 우리는 동떨어진 거예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성경 백날 해봐야 인간들은 무슨 실험에 나서냐 하면 나는 뭐든지 잘 돼야 한다는 그걸 증명하는 쪽으로 실험하게 돼요. 나는 안 다쳐야 되고 나는 상처 없어야 되고 나는 늘 행복해야 되고 나는 살아남아야 되고.

그러한 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싶어 해서 성경말씀을 또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원래 성경말씀과 전혀 동떨어진 내 잘났음을 다시 한 번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밖에 안 돼요. 그건 나르시시즘이죠. 너무 미남이 시냇물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면서 비춰볼 때마다 자아도취에 빠져서 또 자기의 미모에 스스로 감탄하는 재미로 하루를 일과를 시작하는 거예요. 큐티가 그거잖아요. “역시 나는 잘났다. 나는 복 받아야 돼. 당연하지.”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나 시편 23편은 출발이 뭐부터 했습니까? 하나님의 상처로부터 출발해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부터 미움 받는 거예요. 미움 받는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다윗의 존재를 통해서 실험에 나서는 겁니다. 다윗을 포위한 것은, 다윗을 주변에서 압박을 하거든요. 포위하면 여기 힘의 필드가 작용해요. 인간의 개인은 무능합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힘에 눌려 살아요. 우리가 세상에 산다는 것은 세상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역설, 또는 힘에 의해서 우리가 후달리면서 내몰리면서 살아가는 게 인생입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런 예가 열왕기 2장에 나오지요. 엘리야가 하늘에 올라갈 때 불 수레와 불 말을 타고 올라가잖아요. 그러면 불 수레, 불 말은 엘리야가 이 땅에서 일을 끝내고 죽을 때 불 수레와 불 말로 갔다면 죽기 전에 엘리야에 일어났던 모든 일은 불 수레와 불 말이 주는 그 힘의 장에 의해서 활동한 겁니다. 남들에겐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불신자는 내가 어떤 힘을 가졌다, 소유된 힘을 증명한다면 하나님이 성도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함으로써 네 잘남이 아니라 네 재주가 아니라 네 속에 너를 둘러싼 그 힘의 본성과 성격이 얼마나 하나님과 대조가 되고 하나님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상처를 안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거예요. 이게 바로 다윗이 본인이 원치 않는 인생길을 가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탈락이냐 하면 내 신앙, 이것이 탈락이에요. 내 신앙이란 존재할 필요도 없고 있어서도 안 돼요. 내 소망, 내 사랑, 이런 것은 탈락입니다. 내 신앙, 내 소망 이것은 신앙을 통해서 내게 갖고 있는 상처를 내 신앙으로 보상 받으려는 의식이 강해요. 그러면 내 신앙 말고 뭘 집어넣어야 되지요. 상처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 내 소망 대신 하나님의 소망, 내 사랑 대신 주님의 사랑이 하나에 성도를 둘러싼 장으로서 여기서 형성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거예요. 본인 자체를 본인이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둘러싼 영역 자체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한 다른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놀아나고 휩쓸렸다는 그 자체에서 비로소 다윗은 성도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내가 내 인생을 제조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특이한 환경이잖아요. 하나님이 찾아와서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 그 영역에 다윗은 무작위로 초대받은 거예요. 초청받은 거예요. 이 동네가 무슨 동네지? 초대받은 겁니다.

기존의 동네, 기존에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동네와 전혀 외부의 장, 필드가 영역이 성격이 완전히 다른 성격 속에 들어온 겁니다. 따돌림 받고 쫓김 당하고. 기존의 영역은 무슨 영역이냐 하면 바로 사울의 영역이에요. 사울을 성경에선 하나님의 원수의 힘이 작용하는 겁니다. 시편 5편 8절 봅시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주의 의의 길로 갈 수도 없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할 수도 없어요. 우리는 스스로 찾아갈 수 없습니다. 주의 원수가 발생돼야 되고 주의 원수에 휘둘려야 되고 쫓겨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주의 원수가 주의 길을 곧게 한다는 말은, 이미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게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주님 드러내기로 설정된 그 길에 우리가 접어들게 돼있다 이 말이에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길이 두 가지 밖에 없어요. 보통 사람들은 좁은 길, 넓은 길 하지요. 그걸 달리 하겠습니다. 인간이 가는 길과 하나님이 가는 길, 그 두 가지 길이에요. 하나님이 가는 길은 인간은 모르게 돼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신 길 그것을 주님이 그대로 가는 길이 하나님이 가는 길이고 그걸 예수님께선 좁은 길이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공통점이 있고 그 공통점 때문에 인간들은 절대로 공통점과 이탈되는 다른 길은 인간들이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넓은 길, 멸망의 길은 모든 사람이 흔쾌히 동의하는 길, 충분하게 그게 진리답고, 그리고 그게 옳은 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증명이 된 그 길이 멸망의 길입니다.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인간의 지혜로 증명이 된 모든 교회가 다 이야기하는 그 길, 그게 바로 지옥으로 가는 길, 멸망의 길이에요. 왜? 동의가 되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이 거짓말로 시작한다는 그것을 인간은 본성상 우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거짓말쟁이가 돼야 돼요. 왜냐? 주님의 원수 안에 우리가 처음부터 포함이 돼있기 때문에. 나는 주님의 원수거든요.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의롭게 하시거든요.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에 이미 포함이 된 거예요.

내가 좋아하고 내가 그리워하는 예수는 이거는 백 프로 가짜에요. 그것은 나의 행복을 나의 미래를 스스로 보장받기 위해서 내가 지어낸 기존의 나의 장, 기존에 세상적으로 나를 만들어낸 내가 창조한 그 어두움의 세계에서 동조되고 있는 입장에서 생각해낸 그 길은 아무리 아프가니스탄 가서 선교사로 고난 받아도 에티오피아 가서 고난 받아도 그건 넓은 길입니다. 좁은 길은 없습니다. 넓은 길만 우리에게 허용돼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시편 23편 3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소생한다. 죽음에서 살리는 그런 계기가 주어지지 아니하면 살아 있는 내가 계속 어떤 방식으로 내가 살리는 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 고생을 더 할까요, 더 헌신할까요, 나를 비우고 또 비울까요? 온갖 요령들을 다 끄집어내요. 왜 그런 짓하느냐? 살아 있는 나를 더욱 더 살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끄집어내는 방식은 예수님 고난 받는 길을 흉내 내고 코스프레 하는 그 일 외엔 없습니다.

뭐 지가 알아서 자기를 때리고 부족하다고 하고, 스스로 금식하고, 재산을 다 바쳐서 가난한 자에게 다 주고, 별 쓸데없는 짓을 다해요. 누가 굶으라 했어요, 남 주라고 했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다 끄집어내요. 남들 보기에 헌신해 보이고 남들 보기에 낮아져 보이고 대단히 자기를 낮춰 보이는 그런 모든 짓은 그거는 우리가 속해 있는 넓은 길에서 반영한 하나의 메아리, 종교적 메아리에 불과해요.

신앙의 역사 가운데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소문난 사람 있잖아요. 그걸 저는 가짜뉴스라고 보는데 한경직이 어떻고 주기철이 어떻고 잔느 기용이 어떻고 캘빈이 어떻고 루터가 어떻고, 전부 가짜뉴스거든요. 그 사람들 죄인이에요. 인간을 모방하면 안 됩니다. 인간을 따라가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그건 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요. 너도 했는데 내가 못할 게 뭐 있느냐. 그거는 카레이스 하는 거예요. 분노의 질주입니다. 그냥 너 속도 밟으면 나도 속도 낼 수 있는 거예요. 따라붙을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거는 신앙도 아니고 배틀하는 거예요. 자존심 경쟁이에요.

이런 교회는 없지만 기존 교회는 기도 좀 하게 되면 악을 써서라도 그 사람 기도보다 더 힘차게 더 길게 더 유창하게 말 빠르게 말이 너무 빨라서 자기 말도 자기가 조절 못해서 방언 터져버려요. 단어와 단어가 연결이 안 돼서 방언이 터져버렸어요. 지도 지 혀를 조종하지 못해서. 할렐루야 해야 되는데 알렐루야, 알렐루야 빨리 열 몇 번 해보세요. 지가 방언해서 자아도취에 빠져버려요. 저는 그걸 분노의 질주라고 생각합니다. 제7탄까지 나왔어요. 카레이스 하는 것. 안에 분노가 있어요. 너한테 질 줄 아느냐, 하는 분노. 이거는 여전히 자기가 살아 있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원수기 때문에 원수가 노리는 것은 신을 죽임으로써 신이 되는 대안, 그 대안 외에 인간에겐 나올 수 없어요. 왜냐? 본인이 신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내가 신이면 타인은 나 말고 또 다른 신이 되겠지요. 그래서 타인이란 이름의 신을 죽임으로써 내가 신 됨을 증명하는 것, 이게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인생실험입니다.

성경에서 인생실험을 뭐로 바뀌느냐? 인생시험이에요. 테스트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험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마나 우리의 가슴 급소를 손가락으로 밀어요. 니가 문제야, 니가 문제야? 그러니까 네가 문제라는 것은 너를 놓치면 안 돼요. “내가 문제니까 전 포기하겠습니다.” “하지 마. 나는 너다움을 마음껏 발휘해.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성질과 속성을 죽이지 말고 그걸 발휘하라고.” 이런 뜻이에요. 발휘하란 겁니다.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성도는 죄를 도망가면 안 돼요. 죄를 도망가는 것은 비겁한 겁니다. 죄를 도망한다고 자유가 아니에요. 자유는 뭐냐? 죄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나의 죄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태어난 자체가 이것이 나의 죽음인 것을 본인이 그걸 확인해야 돼요. 사람이 살아 있는 경우를 스스로 자기를 죽일 순 없습니다. 자기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자기 이름은 못 죽여요.

그래서 주님께서 의의 길이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죽였던 그 지점까지 가는 그 길이 바로 의의 길이에요. 이건 인간이 못합니다. 이거는 원수가 해줘야 돼요. 주님의 이름이 짓밟히는 그 지점까지 가줘야 거기에 그쪽에서 하나님의 의가 등장하는 거예요. 사무엘상 12장 9절에 보게 되면,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정리하게 되면

인간은 본인이 스스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항상 나는 천하에 거짓말쟁이로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오늘이 월요일이잖아요. 월요일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내일 화요일이면 화요일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나 거짓말쟁이다. 내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 함께 있고 싶다는 그것보다 더 큰 거짓말은 없다. 나는 혼자 있고 싶다. 그 혼자 있는 내가 하나님보다 더 귀하다. 그것부터 그 바닥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그래야 말씀이 새로워져요. 어제 아는 것 계속 강제로 끌고 가지 마세요. 그러면 어제 하나님이 필요하지 오늘은 안 필요한 게 돼요. 오늘 나의 지식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여전히 어제 하나님 은혜 받았으면 오늘 동일한 그 하나님이 어제 은혜 받은 것을 거짓으로 증명할 거예요. 네가 꾸며낸 것이란 걸 증명할 겁니다. 내일 되면 오늘 은혜 받은 게 거짓임을 증명할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계속 살아 있어줘야 함께 있는 취지가 살아나요.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 취지를 우리가 무시하지 맙시다. 모독하지 맙시다. 주님의 의로움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아담의 본성을 우리가 죽여서는 안 돼요. 그걸 감추면 안 돼요. 그걸 오히려 들춰내는 겁니다. 무엇으로? 말씀으로 들춰내는 겁니다.

그것이 사무엘상 12장 9절에 나옵니다. 이것도 중요한데 누가 읽어보실까요. “그들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 군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붙이셨더니 그들이 치매” 제가 읽을게요. “그들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잊은지라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전에 성경 볼 때는 왜 여호와를 잊어, 하는데 너도 월요일 돼서 벌써 잊었잖아. 인간이 잊는 거는 너무나 당연한 거거든요. 못났으니까 잊지요.

인간이 잊지 만 하나님이 함께 할 거라는 엉뚱한 발상을 자꾸 자기 잊을 걸 교묘하게 감추기 위해서 어제 하나님 잘 믿었잖아,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오늘 자기를 포장을 한다니까. 인간은 하나님 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건데, 당연한 거예요. 그것이 마치 안 당연한 것은, 그것은 조작된 허구적인 내 모습이에요. 그거는 허상이라니까요, 환상이고.
나으
하나님 잊었지요.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 군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붙이셨더니” 여기 붙인다는 말이 나와요. 붙인다는 이 말을 통해서만 뭐냐?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 전쟁 어렵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 일이 드러나요. 붙인다는 것을 우리말로 쉽게 하면 넘긴다는 것, 넘긴다. 나의 원수를 너한테 넘겨볼게.

“이스라엘아, 너보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그 민족 있지?” “아이고, 무섭습니다.” “무섭지. 너보다 숫자가 어때?” “숫자가 더 많습니다.” “무기는?” “그들 무기체제가 강력합니다. 도저히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오케이. 이길 수 없지. 그러니까 나중에 승리해도 네가 이겼다는 소리 안 하겠지?” “못하지요.” 그러니까 넘겨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쪽수로 이기고 가진 에너지로 이겼다는 말은 우리 인간으로선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환경 외에는 다른 환경으로는 이해를 안 해요. 누가 나보다 강하느냐, 누가 돈이 많으냐, 누구보다도 지혜가 더 많으냐, 지식이 많으냐, 기도를 늘 열심히 했고 헌금을 많이 했냐. 그런 식으로만 인간의 본연의 가치와 위치를 정하려고 해요. 나는 서열상 몇 등할까, 이 교회에서 몇 등할까? 우리나라 교회 전체에서 전체 순위로 나는 우리 교회에선 믿음 제일 좋지만 다른 교회와 붙었을 때 나는 몇 등할까? 1%에 들어갔을까? 수능 1%에.

자꾸 그런 식으로 하거든요. 그럴 때 더 센 것, 더 강한 것, 더 헌신적인 사람을 대했을 때 우리는 엄매 기 죽어, 되는 거예요. 저쪽은 엄매 기 살아. 눈썹 일자로 딱 붙여놓고 순악질 여사 있지요. 우리가 무서워하고 내 힘은 저 사람한테는 안 된다, 끝났다, 라는 자를 우리에게 붙여줌으로써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가 나의 길, 그러니까 내가 잘 되는 나의 길을 제거해버리고 나의 길을 뭐로 바꾸느냐? 주님의 길에 동참하도록 하는 방식은 이 방식 밖에 없어요.

나의 길이 작살났을 때 여기는 뭐가 작살나느냐? 나의 의도 작살나고 나의 자존심도 작살나고 내가 생각했던 나의 천국도 이게 다 헛방이라는 사실을 작살내고 그 다음에 주님이 생각했던 주님의 천국, 주님의 나라, 주님의 의, 주님의 평안함과 온전함으로 우리를 강제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 과정에서 작살나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래서 작살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만만한 사람을 이길 수 있느냐가 아니라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러한 사태가 바다에 떠있는 파도가 밀려오듯이 이것은 끊임없이 사건이, 사건이 계속 밀려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마감되지 않는 사건의 파도에 휩싸여있다. 마감되지 않는 사건이에요.

이러한 다윗의 형편이나 오늘날 우리의 형편이나 똑같아요. 마감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다는 거예요. 다윗의 목숨이 안 끊어졌어요. 안 끊어졌으니까 육신이 있으니까 마감되지 않은 사건이에요. 왜냐하면 내일 사건은 내가 아직 안 만났으니까. 내일 되면 내일 사건 또 있을 거예요. 마감되지 않아요. 마감되지 않았지만 그 중심에는 이미 마감이 돼있어요. 인간은 모르는 확정된 마감된 사건에 다윗은 아직 미진한 모습으로 거기에 풍덩 사건의 소용돌이에 뛰어든 겁니다.

아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하나의 예를 들겠어요. 신앙생활 잘하고 신앙 있다고 소문난 그 사람이 있다면 내가 물어보고 싶지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옥에 처박는다면 영원히 못 빠져나오도록 지옥 불에 들어간다면 그때 당신은 그렇게 결정한 주님에 대해서 감사하겠습니까, 미워하겠습니까? 정답은 알아요. 그것마저 주께서 하신다면 그러한 주님의 조치에 대해서는 저는 기분 째지겠습니다. 너무너무 찬양 드리겠습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로마서 9장에 나오는 말씀,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그런데 그게 정답인데 이미 마감된 사건의 정답인데 실제로 우리 육신은 뭐냐 하면 이상하게 기분이 썩 좋지 않아요. 정답과 괴리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 육신과. 그 괴리현상은 우리 육신은 소멸돼줘야 돼요. 내 힘으론 안 돼요. 우리 육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그게 정답이고 따라서 주님께서 나를 지옥에 처박도록 하신 주님의 조치는 어떤 조치라도 주님의 선택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선택을 내 선택보다 존중합니다, 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좀 나를 봐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 정도 알 정도면 어떻게 좀 빼내, 이 정도까지 아는데 섭섭하게 하시면 곤란하지요. 바로 이걸 테스트하는 거예요. 세상과 더불어 계속 테스트하고 실험에 나서는 겁니다. 남은 속여도 주님은 속여도 본인만큼은 본인이 속일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노래가 있어요.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마지막 눈길에서 외면하시는 사람이 이제는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오는 거기서 울 때 이미 버려진 내 가슴에 어찌 사랑이 남으리오. 한 번 떠나간 사랑은 내 마음에 없어요. 이 문 밖에 있는 여자야.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 만날 이런 식이에요. 그때 돌아오라고 눈길 줬지만 그녀는 차갑게 돌아섰다고요.

박강성이 불렀던 <문 밖에 있는 그대>의 가사지요. 그 여자가 좀 잘 돼서 오면 얼마나 좋아요.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와요. 돈 보고 온 거예요.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지금 어떻게 당신을 받아들이겠다고. 건강한 모습이면 혹시나 뭐 하겠는데 이건 아픈 몸으로 돌아오면 미치는 거예요. 짐탱이 짊어지란 말인가. 어쩌란 말이고, 지금. 내 몸도 아파서 지금 건강사탕 먹고 있는데. 지나간 당신 와 가지고.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건강한 하나님을 원하지 상처 난 아무 빼먹을 게 없는 하나님은 우리 육신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식으로 땜질하고 싶어요. 나 하나님에 대해서 압니다. 이런 하나님 맞지요, 라고 계속 내가 갖고 있는 소유된 지식으로 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선 그 지식을 피해가 버립니다. 지식 말고 현실을 다시 보라. 네 생각과 현실이 맞아 들어가더냐. 절대로 안 맞아 들어가지요. 절대로 맞아 들어가지 않아요.

복음을 많이 안다고 해서 조그만 내 소망이 이뤄지던가요? 세상은 내 소망은 복음 안다는 밑천으로 얻고자 하는 모든 행운은 전부 다 비껴가버립니다. “주님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뭐라 하느냐? “기도하지 마, 기도하지 마!” 언제 기도하라 했느냐 말이죠. “백날 기도해야 네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그 엉터리 기도하지 마. 누가 하라 해?”

가만있으면 우리의 원수 갖다 붙여줘요. 내 인생에 저런 인간 안 찾아왔으면 하는 그런 사태가 자꾸 일어난다고요. 뭘 막았는데 예상 밖의 뭐가 또 터져요. 이것 막으니까 저것 터져요. 자꾸 인생에 빵꾸가 나요.

그것은 바로 아까 시편, 소생이라는 것, 소생 다음에 부활이죠. 죽음 다음에 부활입니다. 죽음, ‘소생=부활’이니까 늘 주님 가신 길은 바로 나의 원수가 아닙니다. 아까 시편 5장 8절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이것이 다윗의 예언이 신약에 오게 되면 진짜 말씀의 원천이 다윗이 아니고 예수님이란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적도 없어요.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해요. 하나님의 이름은 주에요. 그래서 구약부터 신약까지 주께서 함께 하시죠. 인간과 함께 할 수 있는 하나님을 따로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그게 주의 이름이 돼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 한복판에 주의 이름이 함께 있고 임재 했다는 그 증거를 갖고 있어요.

그 지점이 뭐냐? 그 지점은 이동하는 지점인데 그 지점은 바로 언약궤가 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뭘 보느냐? 언약궤가 어떻게 이동하는가를 보게 되면 이리고 가면 주르르 따라가요. 요리 가면 주르르 따라가야 돼요. 그런데 언약궤가 이스라엘 손에 잡히지 않아요. 언약궤가 이스라엘과 따로 떨어져서 따로 가버려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화들짝 놀래서 우르르 가는 겁니다.

다윗이란 인물은 언약궤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그런 가이드 역할을 하는 거예요. 사무엘하(이번 수련회할 때 사무엘하 할 거예요) 6장에 보면 다윗이 왕 되고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언약궤를 모시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거죠. 시편 23편에 나오는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바로 하나님도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게 된 겁니다. 들어오시는 거예요. 고난 받는 하나님, 상처받은 하나님, 사람한테 짓밟히는 하나님 그것이 주의 이름입니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까지만 알 수 있어요. 왜? 인간과 동행해서 인간한테 온갖 서러움을 다 받으면서 비로소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죽는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 때부터 하는 거예요. 상처받은 하나님. 주의 이름이 이 세상을 긁고 지나간다. 이것이 바로 주의 이름에 상처가 되는 겁니다. 동시에 이 세상은 주의 이름이 받은 상처에 근거해서 의의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다시 오늘 강의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믿는 하나님은 다 거짓말입니다. 가짜에요. 나를 상처 안 되기 위해서 도입된 관념이에요. 나 긁지 말라고. 나 다치면 긁히면 아프다고. 자기 아픈 것이 우선이에요. 안 아파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출처, 근원 난 그 딴 것 모르겠고 지금 내가 마음이 안 아파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 제목을 이걸로 정했습니다, 미리. 마음의 기호. 다윗은 주님의 마음의 기호입니다. 특이해요. 주님의 마음의 기호에요. 다윗은 억울하게도 계속 억울해요. 억울 안 할 수가 계속 억울하면서 난데없는 인간들로 인하여 계속 추방을 당하니까 다윗 본인도 답답해요. 다윗의 심정을 이해하세요.

그들이 나쁘다고 해서 나는 의롭다고 하는 게 다윗이 아니고요. 그거는 우리가 너무나 상식적인 거고. “네가 감히 나를 쳐. 나는 너에게 분노할 거야.” 이게 아니고 나를 치는 그들이 이해가 된다는 거예요, 다윗이. 같은 편인데 나를 치니까 그 점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같은 편인데 나를 치는 거예요.

시집 간 여자 분들은 다 알 수 있을 거예요. 동서들끼리 잘해보라고 하는데 큰동서가 이유도 없이 나를 미워해. 뭐 달래보려고 명품 사주고, 소용이 없어요. 그쪽에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어요. 뭐 시아버지 재산 노리는가, 왜 그래? 그게 다윗의 심정이에요. 너 이해한다니까. 네 마음, 심정 알아줘. 그런데 나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사울에게 다윗이 물었어요. “왜 당신은 나를 싫어합니까?” 사울이 하는 말이, “나도 내 마음 몰라.” 이게 마음의 기호에요.

이게 왜냐 하면 다윗을 미워하는 기능 때문에 사울 왕은 무엇이 들렸단 말인가? 악신 들렸다고 표현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울은 본인이 악신 들렸다는 표현을 못해요. 왜냐? 자기는 정당하니까. “동서는 왜 나를 미워해?” “나 악신 들렸거든.” 그런 소리 안 합니다. “나 너 안 미워해. 그런데 자꾸 미운 마음이 드는데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돼. 미안하다.” 미안하다 해놓고 돌아서면 마찬가지.

이상하게 이유도 없이 미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이유도 없이 하나님을 찾으면서 막상 함께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미워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쪽에다 물어보세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미워했다고. 절대로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하나님을 찾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의 기호로서 나타난 다윗은 그들에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은 좋아하면서도 다윗은 미워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느 편에 서있는가? 지금 다윗과 함께 있는 겁니다.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시편 23편은 그 당시 하나님의 계시에요.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 그것은 네가 좋아하는 하나님은 가짜고 진짜 하나님은 네가 미워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있다.

그러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다. 마찬가지인 나를 주께서 시범조로 나를 죽음에서 소생시키는 그 작업이 다윗을 드러나는 진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주의 이름이죠. 주의 이름의 표현형, 이것이 바로 다윗. 이것이 바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표현형,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다윗처럼 다뤄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싫어할 수 없어요. 왜? 지 사는 거나 나 사는 거나 진배가 없고 똑같기 때문에. 똑같은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달리 다루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살아가면서 이 특이 사건을 우리 성도를 통해서 그걸 증명하게 하시고 그걸 시험하시는 거예요. 이미 마감된 사건은 십자가 사건이에요.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어요. 끝났어요. 끝났는데 그 죄 사함보다 내가 안 다치고 내가 남한테 인기 얻는 게 더 좋아진다면 여전히 우리는 다윗처럼 더 얻어맞을 게 아직 많이 남아있는 것을 우린 시편 23편을 통해서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것이 생명의 길인 것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

 

20210614b 부산강의 : [시편]39(23편)-마음의 기호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합니다.

시편 23편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데리고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죽음, 생명보다 더한 생명 이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거예요. 인간세계에서는 죽느냐 사느냐 이게 문제라는 것, 이것을 합쳐서 죽느냐 사느냐 이게 인간세계에선 제일 중요한 문제거든요. 자기 존재가 사라지게 되면 하나님도 의미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있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있다. 내가 있다, 이것을 존재라고 한다면 내가 있고 난 뒤에 뭐가 필요하냐 하면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있다. 있으니까 하나님이 존재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의 있음에 대해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인간은 내가 여기 있는데다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 예수님이 존재하신다 해서 계속 뭘 하느냐? 플러스만 하는 거예요.

안에 바탕은 깨질 생각은 안 하고 추가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 성령, 어디서 들은풍월은 있어서 은사가 어떻고 온유, 화평, 자비, 양선 그런 리스트 있잖아요. 선한 도덕적 리스트, 항목들, 카테고리 이런 것 있잖아요. 카테고리 알지요. 백화점 물건 신상 나오는 것. 그런 것들을 계속 추가적으로 덧붙이는 거예요. 이것을 누가 했느냐? 바리새인들이 귀신 같이 한 거예요. 바리새인들이 이것 연구한 거예요.

인간이 있는데 인간에다 뭘 더 추가하게 되면 천국 가느냐? 인간을 천국 보내기 위해서 말씀으로 어떤 엑기스를 뽑아내느냐? 그걸 연구한 게 신학자들이에요. 고객 만족해주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더 살고 싶지요? 출발점을 내가 생명이 있는데 곧 죽을 것 같아. 아파서. 죽으니까 생명을 죽음에서 피해서 생명이 더 이어지기를 바라는 거예요.

주님께서 죽음, 생명 이 자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 두 개를 세트로 해서 하나님의 원수로 보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원수가 돼요. 네가 여기에 주눅 들었다는 거예요. “나 봐, 나 예수님 봐. 이것 능가했잖아.” 죽음보다 더한 죽음, 생명보다 더 생명이거든요. 인간들은 죽는 이유가 죄 때문이라 생각하고 죄 안 지으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죄라는 것은 본인이 알고 있는 고런 죽음, 내 목숨 끊어지는 그 죽음은 죄에서 나왔기 때문에 죄를 적게 짓게 되면 그 죽음은 나중으로 미뤄질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버스 타고 가다가 그것도 앞좌석 말고 뒷좌석에 앉았다가 한솔기업에서 철거하는 5층 건물이 내려앉아서 뒷좌석에 앉은 사람들 아홉 명인가 죽었지요. 그 사람은 그 전에 무슨 죄를 지어서 죽었습니까? 어떤 죄를 지어서 죽은 거예요?

내가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 죄라는 것은 본인이 목숨이 붙어있는 그 내가 파악하는 기피하고 멀리하고 싶은 죄, 역시 나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멀리하고 싶은 죽음이 왔구나. 따라서 그 죄를 적게 짓게 되면 하나님께서 특별히 죽음에서 좀 늦게 죽든지 안 죽는 방향으로 해주시겠지, 라고 생각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겁니다. 목숨이 붙어있으니까 그러한 잡스러운 게 다 들어있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원수를 없애버릴 때에 죽음보다 더한 죽음, 생명보다 더한 생명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의 목숨 붙어있는 것에 출발하지 않는 다른 것이 출처가 되는 그 뭔가 더한 생명이에요. +α플러스알파라고 하는데 여분의 것, 있음이 있음으로 파악 불가한 그 무엇을 바로 존재에다가 뭐가 폭격하느냐? 사건이 와서 다 뜯어내요.

내 있음에다 낯선 사건이 찾아와서 존재에 균열을 일으키는 겁니다. 금이 가게 만드는 거예요. 애초부터 우리는 5층 건물이에요. 언제 무너져도 무너지는데 그 무너지는 타이밍을 몰라서 산에 갔다 와서 버스 뒷자리에 탔다가 칠십 넘은 할머니 평소에 아픈데도 늘 건강해. 마지막 자기 죽음을 자기는 상상했겠지요. 더 힘없어서 요양병원에 시름시름 앓다가 죽을 거야.

그건 어디나 네 생각이고. 난데없이 옆에서 뭔가 덮쳐서 죽는다는 것은 자기 생명의 스케줄 안에는 그런 내용이 들어있지 않아요. 그게 외부적이고 외부적인 사건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골라서 사건 터진 거예요. 그 외부적인 더한 생명, 그것을 제가 논리로 설명하기보다도 실제로 예수님 말씀으로 봅시다. 마태복음 15장 34절, 이건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을 때 배가 고팠던 모양이죠. 기진맥진해서 집에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기진맥진했습니다. 광야에서 무슨 떡을 먹겠습니까? 광야에요. 인간들이 목숨 붙어있는 한 어떤 다른 대안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근처에 파리바케트가 없어요. 재래시장도 없습니다. 마트, 큰 마트도 없어요. 많은 무리가 있는데 그 무리가 남자만 해도 무려 사천 명입니다. 거리두기도 안 했어. 1.5단계가 아닌 모양이라. 엄청나게 같이 모여 있는 거예요. 실무진 제자들이 걱정이 되는 거예요. 말씀도 좋지만 먹는 문제를 해결해야 되는데……

“제자들이 가로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의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물어요. 이 점이 중요한 거예요. 출발점을 지금 배고프면 죽고 배부르면 살지요. 지금 너에게 평소에 네가 너의 생명 유지하기 위해서 어떠한 생각이 너를 지금 장식하고 작동하느냐고 물어요. 현재 있는 것은 모자라요.

왜냐하면 물고기 두 마리, 그 다음에 보리떡이 몇 개입니까? 떡이 일곱 개. 그것도 작은 물고기가 두세 마리, 이렇게 있어요. 이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죽음보다 더한 죽음, 생명보다 더한 생명에서 이들은 지금 존재가 깨질 판이에요. 난감합니다. 존재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요. 더 이상 대책이 없어요. 난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축복하시고 주시니까 36절에,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자, 떡이 일곱 개입니다. 남은 광주리가 일곱 광주리지요. 그러면 숫자로는 동일한 일곱이에요.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일곱 광주리잖아요. 그럼 처음부터 7이라는 물고기 속에는 무엇이 내장돼있고 잠재돼 있느냐 하면 배불리 먹고 남아있는 생명보다 더한 생명이 7속에 일곱 개 떡 안에 있는 겁니다.

그러면 7을 가지고 인간들이 일곱 개뿐이라고 하는 그 숫자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이 너무나 차이 나지요. 이 안에 7속에 배부름이 다 들어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관점이죠. 따라서 인간이 담고 있는 아슬아슬한 생명의 관점을 주님께서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관점으로 지금의 생명을 보게 한다면 우리 성도는 뭐냐? 하잘 것 없는 일곱 개의 떡입니다. 남들 보기에 심지어 내가 보기에도 하잘 것 없는 나, 일곱 개의 떡, 이 떡 속에 주의 이름이 함께 있음으로써 배부름으로 죽음보다 더한 생명이 작동하는 그러한 초라한 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야 돼요. 그 안목입니다.

우리는 하찮게 보지만 주님은 하찮게 안 보겠다는 겁니다. 네가 나와 함께 있다면. 그러니까 주의 이름으로 함께 있다면. 주의 이름으로 함께 있다? 이게 바로 마음의 신호, 이것이 바로 다윗의 마음, 또는 다윗의 존재가 되겠습니다. 다윗이 주의 이름과 함께 있지요. 그래서 다윗도 이해 못하고 사울도 이해 못한 것이, 특히 다윗도 본인을 이해 못해요. 왜 세상은 자꾸 나를 미워하느냐 이 말이죠.

이것은 내가 모르는 나의 요소가 다른 요소가 내 안에 내장돼있는 겁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집어넣은 거예요. 그 집어넣은 것이 하나님이 아니고 주의 이름이 집어넣은 겁니다. 두 번째 시간 중요한 것, 첫 번째 주의 이름은 반드시 뭘 호출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를 호출해서 하나님의 원수 속에 다윗부터해서 모든 사람이 원래 이 장소에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에서는 뭐가 없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초과적인 능력이 하나님의 원수는 그렇게 싫어해요. 그렇게 싫어하기 때문에 사울은 다윗을 싫어한 겁니다. 세상은 성령 받은 성도를 그렇게 싫어하는 거예요. “꼴랑 네가 뭘 할 줄 안다고?” 그럼 우린 이렇게 하지요. “나도 그걸 알아. 나도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안 돼.” 안 돼요. 개뿔도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고 목도 아프고 정말 내세울 게 아무 것도, 복이라고 내놓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없지만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기뻐한다? 이것 구라인 줄 아시겠죠, 여러분. 첫째 시간 통해 알았잖아요. 분명히 정답은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기뻐하는 걸 알아요.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해야 함을 압니다. 성경에 나오니까 정답이니까. 문제는 나의 육신과 주의 정답과 괴리현상이 일어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린 아직 죽으면 안 돼요. 죽으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는 죄에서 피하지 말고 우리가 미처 모르는 죄 속에 들어가야 돼요. 가장 나의 나다움, 다시 말해서 주님의 원수의 원수다움을 가장 주께서는 우리를 내 원수의 자리까지 찾아가게 해주신다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를 이끄시는 그것이 바로 성도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입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사실, 다른 사람은 몰라요.

그럴 때 시편 23편의 뭐가 보이느냐? 바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나이다가 보이는 겁니다. 누가 크게 읽어보세요. 시편 23편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오케이 스톱 고 정도.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이건 나의 인생의 목적이 아니고 우리와 함께 있는 주의 인생의 목적입니다.

주의 원수는 결코 너의 원수가 아니고 나의 원수라는 거예요. 너의 원수 말고 네 속에 있는 나, 예수님의 원수를 너를 통해서 목격해주겠다는 거예요. 만나면 원수가 아니고 친구처럼 느껴질 거예요. 주님의 원수인데 왜 우리는 평소에 그 인간을 왜 그리 좋아했는지. 서로 친하게 지내고 원수는커녕 하루에도 전화 두 시간 못하면 안달이 나서 안 돼. 너무너무 좋은 거예요. 동창생이니까 너무 만족스럽게 너 없으면 내 인생 외로울 뻔했어.

그렇게 좋은데 그 인간에게서 하여튼 복음은 안 나와요. 그냥 보리떡, 오늘 보리떡 일곱 개 투자해서 보리떡 여덟 개 돼서 기분 좋다. 뭐 그런 이야기만 나와요. 배불리 먹었다는 이야기는 없어요. “그저 사는 대로 살아봐야지. 세상 다 그렇지 뭐. 열심히 투자해야지.” 만날 그런 이야기만 나오고 나처럼 곧 죽어도 상관없는 넉넉함이 그쪽에서 안 나와요. 안 나와도 그 인간 좋은데 우에 합니까. 그런 것 없어도. 오히려 나온다고 하는 교인이 미워. 신앙인척하는 그게 더 미워. 오히려 안 믿으니까 만만해 보이는 그런 즐거움도 있어요. 수가 지보다 못하니까 즐겁지요.

그래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다윗은 하나님이 해놓은 이미 해결 난 이미 결정 난 사건과 다윗의 자기 육신이 지금 일치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치 안 되도 괜찮아요. 주께서 계속 활용하니까. 그 일치점이 어디서 마감이 되고 일치되느냐 하면 신약성경에 와서 마감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 자체로서는 어떤 해결점 없고 신약성경에 와서 그 해결점이 다 드러납니다.

그중에 하나 예를 들겠습니다. 아까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5장. 정말 마태복음 15장에서 봤던 보리떡 일곱 개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보는 세상 보는 모든 안목을 알게 되면 정말 얼마나 내 몸이 더 이상 내 몸을 내가 내 관리에서 해방된다는 그 기쁨이 있습니다. 지금까진 내 몸을 내가 관리하고 살았는데 그게 손을 떼도 괜찮다는 거예요.

여러분 애 낳을 때 이름을 칠득이 이렇게 짓습니까? 이상하게 바보 같아. 칠성이 이런 거죠. 칠성이는 깡패조직 이름 같고. 마태복음 15장에 아까 34절 이야기했지만 다른 이야기해봅시다. 앞에 25절 이야기해봅시다. 어제 주일설교에 이 본문 거론했는데요. 24절부터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자 여기 나오는 단어, 설교시간이라서 시간이 계속 흘러가기 때문에 풀이를 하지 못했어요.

잃어버린 양이거든요. 잃어버린 양은 누구 관점이냐 하면 어디까지나 주님의 관점이에요. 우리 관점이 아니에요. 우리는 나를 잃어버린 적이 없어요. 심지어 잘잘 때고 꿈을 꿔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목숨 붙어있는 한 안 잃어버려요. 지 휴대폰은 잃어버리고 지갑은 잃어버려도 내가 잃어버렸다는 의식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이게 데카르트에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안 잃어버린다. 나는 존재한다.

어떤 경우에서도 자기 자신만은 똑똑하게 의식하는 게 인간입니다.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 요양병원에 누워있으면서도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아요. 며느리 보고, “너 누고?” 합니다. 그 말은 본인은 안 잊어버렸어요. 며느리는 잊어버려도. 인간은 일체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렸다는 말은 인간에겐 해당이 안 돼요. 인간이 아무리 잃어버린 양이라고 의식해도 거짓말입니다. 첫째 시간 초반에 이야기했지요. 인간은 몽땅 거짓말부터 시작한다고요. 거짓말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인간은 거짓말부터 하는 거예요.

복수적 요인, 복수적 요소라 하는데 복수複數란 단수가 아니다. 사람 보복하는 것 말고 단수가 아니다. 여러 개다. 내가 어떻게 생각을 한다 할 때 예를 들어서 지지난 달 우리가 먹은 게 뭐냐 하면 코다리정식 먹었지요. 계절상 코다리정식이지만 여기에 내 옆에 누가 앉았는지 기억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표현은 코다리정식이란 개념 하나지만 거기 있는 좌석부터해서 그때 그 식당에서 나름대로 방역조치를 어떻게 했으며, 다른 여러 가지의 다양한 변수들을 종합해서 그걸 다 말 못해서 코다리정식 먹었다 하는 겁니다.

지난번엔 국수 먹었지요. 국수만 먹었습니까? 가는 과정에 차 안에서 누가 탔는지 다 있지요. 타면서 무슨 소리했는지 다 기억나지요. 이런 것들을 모아서 전에 갔던 그 국수집, 동일한 국수집 그때 국수의 맛과 지난달에 갔던 국수의 맛이 달라져요. 복수적인 경향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들은 전부 다 평형적인 너나 나나 거의 같은 여러 가지 변수들에 둘러싸여서 가는 그런 평형적인 인생들만 살아가는 거예요. 어떤 개성 같은 건 없어요. 전부 다 여러 가지의 사건과 경유들이 복합적으로 구성이 된 겁니다.

얼굴과 인상의 차이점은, 얼굴은 뜯어고칠 수 있어요. 하지만 인상은 아무리해도 뜯어고치지 못해요. 인상 더럽다고 쌍꺼풀 수술했지만 쌍꺼풀 수술한 인상이 더 더러워. 더 부자연스러워, 이상해. 괴물 같아. 괴물이야기 나왔으니까 말씀드립니다만 악마를 사람들이 선입관이 잘못됐는지 악마라고 한다면 괴물적 형상으로 보는 거거든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악마는 어떤 형태를 말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피 흘림의 죄 사함에 대해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신 자는 죄 사한다는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악마에요. 악마를 형태로 이해하는 자체가 악마의 본모습을 우리가 놓치고 가리고 오히려 방해하는 요소가 돼요. 노트르담의 꼽추가 형태는 일그러졌지만 마음은 얼마나 착하냐, 그 내용이잖아요.

얼굴과 인상이 같을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인상은 복합적인 요소가 보이지 않는 복합적인 변수와 특히 그 사람이 살았던 과거가 다 담겨있어요.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그냥 책상에 눈물만 뚝. 뚝. 뚝. 우연히 만났어, 우연히.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 우연히 만나서 안아주었지. 아무 소리 안 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는. <옥경이>에서 지금 <우연히>로 넘어가는 거예요. 그 사람의 과거가 거기 변수들이 누적이 된 거예요. 인간에 누적이 돼있어요.

그래서 그 소위 부잣집이나 재벌 쪽에서 며느리나 뽑을 때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근본도 없는 것들은 우리 집에 못 온다. 그 집안의 뿌리를 보면 알 수 있다. “근본도 없는 것들이 어디 우리 집에 감히 들어와서 내 재산을 탐내.” 그러잖아요. 인간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잃어버리지 않는데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거든요. 그러면 인간은 잃어버린 양이 될 수 없고 주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니까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닌 거예요.

그럼 주님은 어떻게 일하느냐?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이미 정답은 나와 있어요. 주와 함께. 주와 함껜 데 다윗은 육신이 있잖아요. 육신이 있으니까 주와 함께와 합치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구약이거든요. 다윗은 선지자지만 신약이 아직 안 됐어요. 그래서 욥처럼 하나님이 날 끌고 가는 건 되겠는데 온전하게 메시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시대적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죽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다윗은 부활되지 않고 주님이 먼저 부활돼요. 다윗보다 주님이 먼저 부활되고 난 뒤에 부활된 주님이 그제야 육신에 썩어있는 무덤의 다윗을 건지시는 겁니다. 엘리야가 먼저 죽어도 부활되는 것은 주님이 부활돼야 엘리야도 모세도 부활되는 거예요. 에녹도 마찬가지고. 항상 부활의 첫 열매는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부활되고 난 뒤에 그 부활의 안목으로 육신과 결합해서 우리를 예수님의 안목으로 살리는 주의 일이 되게 하는 겁니다.

문제는 잃어버린 양이라 했는데 우리는 잃어버린 양이 될 가능성도 없습니다. 힌트가 뭐냐 하면 바로 앞에 붙어있는 게 있어요. 이스라엘과 이어진 그 다음에 잃어버린 양이라고 예수님 이야기했거든요. 예수님은 뭐냐?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에요. 그러면 귀신 들린 딸 가진 엄마가 어디에 힌트를 주느냐 하면 2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예수님이 원칙을 분명히 했어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 안 보냈다. 그러니까 가라 이 말이죠. 너는 이방여자니까 가라 이 말이거든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 여자가 삐져서 “가자, 가자, 아이고 더러워라.” 이렇게 한 게 아니고 자기 딸 데리고 간 게 아니고 무엇이냐? 잃어버린 양이 이스라엘과 연계돼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과 연관된 것 중에 뭐가 있느냐? 이스라엘 집에 있는 개가 된다면 이 개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이스라엘 집에서 떨어진 빵부스러기를 먹으니까 이스라엘이 존재해야 이스라엘 집에 개가 존재하잖아요. 그렇다면 내가 어디로 가면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는 이 개에다 내가 들어가면 되겠다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믿음이라 한 거예요. 연계돼있는 거예요. 사람취급 못 받아도 괜찮아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영역, 그 영역에 이방인이니까 이방인은 하나님의 구약에 의하면 개 같은 거예요. 개지만 개도 두 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집에 있는 개와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개가 다르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밖의 개는 이방인이 주는 떡 먹고 살지만 이스라엘 집의 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배부르다고 갖다버린 개에게 와 떡이다, 그냥 떡이 아니고 이스라엘 떡이다, 하고 달라붙을 때 이 이스라엘이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양은 누구냐? 예수님의 개 같이 결합이 되는 자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에요. 왜? 예수님이 찾지 아니하면 존재하지 않는 존재에요. 초과적인 존재, 죽음보다 더한 죽음, 죽음보다 더한 생명. 그것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기껏 죽음과 생명의 그게 한계에요.

죽음과 생명의 한계는 무슨 한계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그 죄 때문에 내게 죽음이 왔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걸 찢어버립니다. 네가 죄를 알아? 네가 게 맛을 알아? 네가 뭘 안다고. 네가 태초에 대해서 모르면서 네가 아는 죄는 죄가 아니야. 오히려 죄를 가려버리지요. 죄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그 전체가 죄지, 내가 목숨 부지하려는 요령으로 내가 더 착해야 천당 간다는 식으로 하는 그것은 죄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인간에게는 죄를 몰라요. 죄를 아무리 연구해도 죄를 모르게 돼있어요. 그 자체가 죄기 때문에. 밥 먹고 살고 하는 코다리 먹는 그게 죈데 무슨 죄가 있어요. 복수적인 변수가 들어간다고요. 이것 왜 먹느냐? 이것 먹고 살려고. 왜 사는데? 자꾸 복수적인 다양한 변수들, 이유들이 계속 달라붙고, 달라붙는데 그걸 종합해보면 죽음보다 죽음이 아니에요. 그냥 죽음 안에 갇혀있는 죽음이에요.

여러분 자꾸 말씀 읽는 것 시켜서 미안합니다만 또 시켜야 되겠네요. 23편 4절 누가 읽어보세요.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그 다음에 뭐라고 해요? 두려워하지 않는 거죠. 지금 다윗은 그때 그 심정으로 이런 고백을 해요. 그러나 다윗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온전하지 않아요. 다윗 내부에 온전한 것이, “다윗아 앞으로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어줄 거야. 두려워하지 않게 해줄 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죽음보다 더 죽음, 생명보다 더 생명을 얻기 전까지는 뭐냐?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두려움의 전부라고 생각하지요. 아닙니다. 내 두려움을 초과하는 두려움을 주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이 다윗이 두려워하는 것과 다니엘 3장 7절, 이번 강의에서 더 이상 성경 읽으란 소리 안할게요. 내가 미안해서 그래요. 다니엘 3장 7절, 제가 읽어볼게요. 읽고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3장 7절이 아니고 3장 20절부터요.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을 명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지라 하니 이 사람들을 고의와 속옷과 겉옷과 별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질 때에“ 이렇게 돼있지요.

다윗의 입장에서는 지금 사울에 쫓기기는 하지만 삼천 도 되는 용광로 속에 들어가지는 않잖아요. 다니엘 세 친구가 봤을 때 다윗이 참 무섭습니다. 나한테 이러한 재앙이 옵니까, 하면 다니엘 세 친구의 안목에서 보면, 다니엘 세 친구는 다윗보다 예수님에 더 가까워요. 시대적으로 가깝단 말이죠. 주님의 고난에 더 가까운 거예요. 가까운 사람이 다윗이 고생하는 걸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에게 그것도 겁난다고, 그것도 무서운 거나. 쨉도 안 돼.” 이럴 거다 말이죠.

두렵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린 아직도 두려움의 진짜 두려움, 십자가 죽을 때 사람한테 버림받는 것은 두려움 아니에요. 예수님이 경험한 것은 죽음보다 더 죽음, 두려움보다 더 두려움,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두려움, 저주받는 두려움 지옥의 저주입니다. 따라서 주님이 하는 기쁨과 부활의 기쁨도 우리가 생각하는 더 이상의 기쁨이에요. 상상도 안 되는 기쁨입니다.

그 안목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고생한 것 보세요. 이건 뭐 고생 끝, 행복 시작도 없어요. 늘 고생이에요. 강도의 위협과 도적의 위협과 강의 위협과 달리 이야기하면 가는 곳마다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 반갑다, 위험아. 이 정도지요.

전에 이야기했지만 사도 바울이 주기도문을 못 외운 모양이에요. 왜냐하면 주기도문에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돼 있잖아요. 우리가 그 본문을 주기도문을 외우는 순간에 하나님께서 최소한 기본으로, 기본소득 있잖아요. 최저시급 8720원 그 정도 주시겠지 하겠지요. 사도 바울을 굶게 했어요. 일용할 양식도 안 줬어요.

정리합시다. 두렵다는 것은, 두렵다는 정의를 내려 보겠습니다. 십자가로부터 개념이 나와요. 십자가는 뭐냐 하면 내가 나를 버려야하는 순간, 이게 인간으로서 제일 두려운 거예요. 그래서 이러지 않기 위해서 뭘 하느냐 하면 사람은 자살을 하는 겁니다. 세상은 버려도 나는 나와 더불어 껴안고 번개탄 내지는 마포대교로 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가룟 유다에요. 어제 낮 설교에 했지요. 가룟 유다로부터 시작해서 베드로까지 간다고.

버림을 받는다는 것, 십자가에서 버려지는 것, 그 가룟 유다의 버려짐을 누가 체험했는가? 주님이 선택했다는 말은, 주님의 요소가 가룟 유다 속에 들어있는 거예요. “베드로야 너는 버림받아 마땅해. 하지만 내가 찾아올게. 너는 나를 배신했지만 내가 다시 너 찾아갈게.” 왜? 끝까지 사랑했기 때문에. 요한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자기 사람을 그냥 사랑한 게 아니고 끝까지 사랑하는 거예요.

그걸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친구라고 하는 거예요. 친구는 어느 정도 돼야 친구 이상의 친구냐, 친구 너머의 친구냐? 그 친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쳐야 친구에요. 세상에 그런 친구 없어요. 목숨 바치는 친구, 보증 대신 서주는 친구는 있지만. 하와이 니가 가라, 그런 친구는 있어요. 많이 묵었다 그만해라, 그런 친구는 있어도 대신 죽어주는 친구 없고 대신 죽어줘도 소용없는 친구 밖에 없어요.

친구를 위해서 내 간에 신장을 떼어줬다. 신장 하나 있어도 산다니까 내 신장 하나 떼어서 네 신장 살리자. 살려내면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할까요, 좋아하지 않을까요? 일시적 감사하지요. 내 신장 그 안에 붙어있어도 그 사람은 나를 안 좋아해요. 인간은 자기만 좋아하게 돼있어요. 인간은 자기를 넘어서 남 좋아한다는 게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사람 상대하지 마세요. 사람 상대 안 하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뭐하라고? 감당하라고. 너하고 똑같은 하나님의 원수 왔다. 감당해봐라. 네가 새 사람 되었으면 원수인 줄 알고 새 사람 아니면 반갑다 친구야 할 거고. 그러니까 사람을 붙여주시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모든 성도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선택에 의해서 주님이 우리한테 넘겨준 거예요. 너는 주님 믿나, 사람 믿나?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테스트하기 위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굽니까? 그걸 부모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끔은 복음적인 소리를 하지요. “이 웬수야, 나가 죽어.” 나가 죽고 난 뒤에 죽었다고 온통 울고. 허락도 없이 먼저 죽느냐고 대성통곡하고. 그렇게 죽으라고 소원을 빌어놓고 막상 죽으니까 내 허락도 없이, 그러니까 내 스케줄에 없이 갑자기 죽으니까 내 원수라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더 원수에요. 왜? 자기 계획에 없는데 죽었으니까. 평소에 내 시키는 대로 안 하고 죽었으니까. 그럼 어쩌란 말이야, 도대체. 모든 것이 지 사람 돼야 만족하는 인간.

다시 마태복음 15장 봅시다. 마태복음 15장에서 그 여자가 바로 개의 자리에다 자기를 집어넣는 겁니다. 이걸 이렇게 정리하게 되면 아주 쉬워요. 죽음보다 더한 죽음, 아까 십자가에 저주받은 것, 생명보다 더 생명, 부활의 행복입니다. 부활의 장이죠. 주님만이 존재합니다. 그 존재의 영역을 확대시켜요. 존재의 영역을 확대시키면 이게 자리가 되고 이게 주의 이름의 자리가 돼요. 주의 이름의 자리에다 하나님이 성령을 줘서 이 자리에 들어오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육신이 있으니까 내 존재를 우기겠죠. 월남치마처럼 펄럭이는 긴 치마폭의 하나에 결, 또 하나에 무늬가 돼요. 우리는 이 장이 필드가 내 마음대로 안 돼요. 주께서 복음적으로 펄렁거릴 때마다 내 존재가 아주 멀미날 정도로 이렇게 흔들리지요. 인생이라는 게. 오늘은 평안하지만 보장 못해요. 이상하게 불안해요. 내일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안할 때는 내일 염려는 내일 펄럭이는 이에게 맡기고 내가 나대지 말고 호들갑 떨지 마세요. 그냥 주신 것으로 마음껏 즐기면 되지 내일 미리 생각해서 그러지 마세요. 우린 어차피 내 자리가 아니고 주님의 존재 자리에요. 여기서 펄럭일 때마다 주님께서는 무엇이 나와야 되느냐 하면 바로 시편 23편이 그대로 나라는 존재에 현실로서 구체화되는 자리에요. 이게 남의 자리가 아니고 우리 자리에요. 다윗의 자리로 끝나지 마세요. 오늘날 우리의 자리입니다.

그게 어떤 것이냐? 바로 귀신 들린 딸 가진 그 여인이 잃어버린 양의 자리에 엮인 거예요. 그러면 이걸 소급해서 다시 신약에서 구약으로 되돌아가서 해석하면 다윗을 뭐가 되느냐 하면 잃어버린 양이 되는 겁니다. 다윗이 잃어버린 양이라면 내가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여긴 그때 그 시절을 자기 육신의 기억으로서 여기 담겨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에 의하면 우리 옛사람은 벗어버리고 우리 안에 새사람이 나온다고 했지요. 우리 육신은 우리의 관리 하에 있지만 새사람은 우리 손을 넘어있어요. 그새사람이 옛사람을 돕게 됩니다. 옷을 벗듯이. 이렇게 밀어내요. 주님의 안목이. 그러니까 이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죄로 인하여 죽는다, 라는 이러한 부담을 우리 신 쪽에서 초월적으로 매일같이 이걸 뜯어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는 죄 지어도 안 죽어. 왜냐하면 이미 너는 죽었으니까. 갑자기 말이 어렵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이걸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신병 들린 사람이 정신병 약을 먹지요. 어떤 정신질환자가 남의 차를 발로 차고 아주 난동을 부렸어요. 경찰이 왔어요. “당신은 왜 난동을 부렸습니까?” 약을 복용을 안 했다는 거예요. 이게 말이 돼요. 약을 복용을 안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 행동은 정당하다는 겁니다. 약 먹었으면 난동을 안 부렸을 건데 약을 안 먹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세상에 나가서 복음 전할 때 뭐라고 하느냐? “왜 당신은 예수님 십자가의 죄 사함을 십자가 피로 다 해놨는데 왜 안 믿습니까?” 성령을 안 받았다는 거예요. 그 사람이 어디서 듣기는 들었어. 성령을 안 받아서, 약을 복용 안 해서 내가 예수 안 믿는 것을 용납하라는 거예요. 지 잘났다는 겁니다. 성령을 주시는 분이 나한테는 아직까지 배급이 안 들어와서. 이게 말이 됩니까.

그때 제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지금 성령 안 받았다고 지 잘난 척하는 그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무엇 때문에 감사하는지 그 감사와 기쁨의 근거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사실은 그 사람이 성령 안 받았다고 하는 그 변명이나 분명히 은혜 받아놓고 오늘도 이상한 짓하게 되면 본인이 주님 앞에 이야기해요. “주님, 어제는 은혜 받았는데 오늘은 은혜 안 받았기 때문에 오늘 좀 내 마음대로 살렵니다. 이해해주세요.”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끝까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변명하고 있는 겁니다. 비겁한 변명이죠.

신학의 한계에요, 그게. 신학적으로 뭘 했는데 마지막 최종 결론이 뭐냐? 그 사람이 예수 안 믿는 것은 딱 결론 나왔어요. 우린 지식으로 압니다. 성령 안 받아서 그렇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를 듣고 성령 안 받은 사람이 뭐라 하느냐? 성령 안 받았으니까 약 복용 안 했으니까 좀 이해해주면 안 되겠어,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죄가 없다는 것은 바로 그 자체가 우리가 이미 뭘 해도 죄인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의가 된다는 것은 내가 성령 받아서 의가 된 게 아니고, 적어야 돼. 너무 어려워서. 내가 성령 받으면 의인 되는 게 아니고, 두 번째가 정답이에요. 내가 없어지는 게 의인이에요. 성령 받고 자시고 할 그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고 주님이 주님에게 성령 준 거예요. 주의 이름으로 성령이 온 이유가 거기 있어요. 내 자리. 내 이름 자리 없애고 내 자리라 여긴 것이 내 자리가 아니고 주님의 이름의 자리에요.

다윗아 착각하지 마라. 나는 너를 인도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내 이름을 인도하는 겁니다. 다윗의 이름을 뭐로 바꿉니까? 주의 이름으로 바꿔서 시편 23편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 정신병자나 뭐 성령 안 받았다고 예수 안 믿는 걸 정당화하는 거나 전부 다 근본 원인은 뭐냐? 아직도 자기 존재를 본인이 잃어버리지 않았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안 잃어버렸으니까 좀 내 마음대로 살도록....

이 말은 뭐냐? 앞에 내가 없어지면 여기 내 자리에 누가 들어갑니까? 주님이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주님이 나를 성령 안 줘서 지옥 보내도 정말 내 자리가 주님의 자리라면 그것조차도 찬미하고 찬양하는 거예요. 그래서 가룟 유다가 자살한 것은 끝까지 누구 자리를 고수한 거예요? “내 자리다, 내 자리. 내 목숨 내가 알아서 산다는데 니가 왜? 나 얼마나 양심적인데.” 이렇게 나와요.

여러분들이 가룟 유다, 가룟 유다하지만 가룟 유다를 딴 데 찾지 마시고 오늘날 티비에 나오는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인간들, 듣고 보는 만나는 모든 사람들 전부 다 가룟 유다로 보면 돼요. 모든 것이 가룟 유다의 평형 인생이니까. 같이 평형 이어있죠. 너나 나나 똑같은 인생을 비슷하게 살아가는 모든 게 동일하거든요. 그러니까 그 비빔밥 고명이 갈아엎어도 마찬가지고 괜찮아요.

내 자리가 알더라도 이거는 본인이 지금 착각하고 있다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건 내 자리가 아닌데 내가 고수한 자리는 내가 아는 변수만 고려한 자리에요. 그러나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다른 변수가 나를 계속 침입하고 있어요. 왜? 주님의 펄럭이는 치마 속에 하나에 우리는 무늬고 진하게 채색된 결이니까. 그게 시편 23편이에요.

그러니까 주님이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위해서 시편23편을 다윗으로 하여금 주의 마음의 기호로서 사용하신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이젠 감 잡았겠지요. 이 시편 23편이 다윗이 가는 길이 아니고 누구 가는 길이다? 주님께서 자신의 장차오실 메시아가 자기 가는 길을 그냥 다윗 이용해서 거기다가 새겨버린 거예요. 중첩시켜버린 겁니다.

그 다음에 봅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말씀대로 주께서 이끄시는 거예요. 6절에 마지막 하고 마치겠습니까. 5절, 6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그건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원수가 나타나지 아니하면 주님이 주 되지 못해요. 6절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은 언약궤가 있는 곳이 여호와의 집입니다.

시편 143편 10절에 보면,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나를 가르쳐 주의 뜻을 행케 하소서 주의 신이 선하시니 나를 공평한 땅에 인도하소서” 새로운 땅이 나와요. 공평한 땅에 이르게 하신다. 그 다음에 좀 유명한 게 뭐냐 하면 시편 135편 4절, 제가 준비하면서 마지막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시편 135편 4절 이야기하고 싶어서 제가 계속 이야기한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보세요. 우리 이름 빠지지요.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주의 주되심을 위해서 놀아난 것을 감사할 때 그게 하늘나라 백성이고 이미 천국의 원리원칙에 주의 이름의 자리에 이미 들어온 것입니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직도 육신이 있어서 육신이 뿜어내는 내 중심이 얼마나 독하게 주님의 십자가를 아프게 하는지를 상처를 내는지를 주께서 여러분의 생명을 허락할 때까지 충분히 경험하셔서 저주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오히려 그게 두려움이 감사로 바뀌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예 없는 존재로 간주하심에서 오는 그 기쁨과 감사, 여러분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이미 값을 주고 소유권이 바뀌었기에 더 이상 내 인생을 내가 관리하는 부담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으로 주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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