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판 바뀜

아빠와 함께 2021. 7. 14. 09:03

20210712a 부산강의 : [시편]40(24편)-판 바뀜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4편,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그렇게 돼있지요.1.  The earth is the LORD's, and the fulness thereof; the world, and they that dwell therein.
2.  For he hath founded it upon the seas, and established it upon the floods.


세상의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고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같은 말로 나의 것은 없다. 나의 것은 따로 있을 수가 없겠지요.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은 나의 것은 없다는 쪽으로 계속 공격하고 압박이 들어오게 돼있습니다. 나라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나의 것이 없다가 돼야 되는데 어느 인간도 내가 여기 없다,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근거를 가진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죽기 전까지 있다, 있다 하다가 나 없다 하고 죽지요.

내가 여기 없다는 것은 주님께서 공격이 들어오는 거예요. 공격이 들어오는 게 3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라고 묻습니다. 없다는 얘기에요. 그 다음에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것이라고 하면서도 여기에 조건을 걸었어요. 성산에 합류할 자, 그 다음에 거룩에 합류할 자가 있겠느냐,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모든 만들어진 것은 마땅히 성산에 가고 마땅히 거룩에 올라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마땅히 사는 것 자체가 거룩한 것이고 사는 것 자체가 성산에 오를 것 같으면 물을 이유가 없잖아요. 있겠느냐, 하는 것은 곧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것이라 하는 것은 소위 나의 것들로 있는 것 중에서 젖힌다 할까요, 추린다 할까요, 계속 추리는 작업을 실시하는 겁니다. 추리고, 추리고 해서 성산에 합류하고 추리고, 추리고 해서 거룩에 합류하는 거예요.

이 작업을 어디서 했는가? 여호와거든요. 항상 여호와라 할 때는 언약의 하나님, 그 다음에 3절에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냐 하는 이것은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니까 언약의 하나님의 외침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오늘 시편 24편을 여러분 이해하시려면 이렇게 하면 한꺼번에 이해된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외친다. 누구에게? 자기 자신에게. 본인에게 외치는 겁니다. 본인을 자랑하는 겁니다. 성산에 오를 자, 나 빼놓고 누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가 나 빼놓고 누가 있겠느냐? 이렇게 자랑하시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제시하는 모든 요건과 요소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을 조건과 요소로서 제시한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요건과 요소를 여호와 자신에게 이야기했잖아요. 중간과정에 하나 집어넣읍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한다는 건 신약의 최종성이고 중간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외치신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왜 외치느냐 하면 이스라엘 안에 언약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이스라엘은 인간이니까 아까 한 대로 없지요. 없는데 없는 것 속에 언약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약을 만드신 언약자가 언약을 이룰 상대를 향하여 외치신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언약의 민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외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논리에 입각해서 이스라엘은 하나 둘씩 젖혀지기 시작한 거예요. 내부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하고 제거되기 시작한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의 엑기스만 뽑아낼 때까지. 이스라엘 속에 아브라함의 씨만 뽑아낼 때까지.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언약만 뽑아낼 때까지 이스라엘 역사는 계속 진척됩니다. 젖히고 젖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거룩, 거룩으로 젖히게 되지요.

거룩이란 뭐냐 하면 율법을 주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에 그렇지요. 율법을 줘놓고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자에게 내가 보니 그게 아니야, 라고 젖혀버리는 겁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객관식 문제가 아니고 주관식 문제거든요. 아무리 자기가 정답이라 해도 채점자 자신의 주관이 이것은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야, 라고 젖혀버리는 겁니다.

그걸 통해서 이스라엘은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언약과 인간은 합치되지 않는 것을 아셔야 돼요. 이걸 아까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자기를 규정하는데 늘 실패한다.” 이게 날까, 하다가 그것도 상황 바뀌면 내가 아니에요. 20대들이 하는 것이 자기가 젊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20대들이 하는 오해 중에 하나가 이 탱탱한 피부는 절대로 쭈그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자신감 같은 게 있어요.

아무리 밤샘하고 세 시간밖에 못 자도 이 피부가 저 할머니의 피부처럼 쭈그러들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전기로에 통닭 기름기 쫙 빼보세요. 나이 따라 세월 따라 젊은 쭉 빠졌습니다. 갑자기 바지 입고 돌아다녀요. 다리 못 내놔요. 양말 신어야 돼. 발만 내놔도 전체 주름살이 그 발등에 다 함축돼있어요. 부분이 전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건 젊음인데 그게 피부가 쭈글쭈글해질 때 왜 그래야 되는가? 왜 나는 그래야 되는가? 그것은 인간이, 이런 게 좀 어려운데요. 인간이 분명히 내가 있잖아요. 분명히 내가 있다고요.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과정 속에서 여기서 언약이 나와요. 시편 24편이 나옵니다. 언약은, 그러니까 시편 24편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내가 지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몰락할 때 허물어질 때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여기 3절에 보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고 돼있지요. 성산입니다. 거룩한 곳, 거룩한 산, 또는 성전이 있는 곳. 성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냐, 라고 이렇게 해놓았습니다. 자,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강의가.

시편 24편에 의하면 성산은 고정적이에요.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올라가는 거예요. 고정적 성산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언약을 따라서 이 성산이 이스라엘 속에 내려오는 겁니다. 원래 원형이죠. 오늘 강의에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달했습니다. 원형은 미지의 수인데 뭐밖에 없느냐 하면 이거는 복사판밖에 없어요. 모방물, 복제물밖에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원형은 따로 있는데. 원형이 어디 있는 줄 몰라요.

사람과 사람이 운집해 있으면 그 중에 어느 것을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어요. 각자 내가 사람답다고 우기는데. 아니지요. 그러니까 전부 다 복제판, 복제물이에요. 전부 다 모방한 거예요. 모방의 원판도 어딘지 몰라요. 원형을 모른다니까요. 성전? 성전의 원형이 어디 있습니까? 성전이라고 해보게 되면 이 복제판, 모방, 쉽게 말해서 이건 가짜에요. 가짜를 복수로 하면 가짜들, 전부 다 짜가들, 가짜들밖에 없어요. 전부다 가짜에요. 가짜가 천 명을 만 명을 모아도 전부 다 가짜들이지 거기서 진짜가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가짜가 내가 가짜인 것을 규정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인간의 한계인데 내가 가짜이면서도 가짜인 것을 알 수 있는 그 요소, 또는 그 사실, 팩트가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짜 인간이 여기서 내뱉어지는 모든 것은 가짜만 남발합니다.

이렇게 봅시다. 원형이 있고 어떤 복사물이 있다면 이 복사물의 복사품. 아담이 원형이라면 아담의 아들은 복사물이죠. 그 아담의 아들의 아들은 뭡니까? 전부다 복사물의 복제가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기존에 있는 기성세대를 베끼지 아니하면 내 것이 없어요. 나의 것을 따져보면 전부 다 참조한 거예요. 전부 다 참고한 거예요.

이것이 진짜 원초적인 원래 원형이라고 할 게 없어요. 베낀 것 베끼고, 베낀 것 베끼고 전부 다 논문 복사하듯이 베낀 거예요. 원래 논문 저자가 없어요. 왜? 저자 그것도 베꼈기 때문에. 그래서 논문에서는 나 여기서 베꼈다는 그 이야기하면 논문 통관데 베껴놓고 안 베꼈다 하면, 이건 문제 되는 거예요. 너 왜 베껴놓고 안 베꼈다 하느냐?

그래서 이 세상에는 어떤 것도 인간이 만든 건 없습니다. 다 여호와의 것이에요. 여호와께서 원형인데 그 원형은 다른 나라에는 없고 이스라엘에게만 그 원형이 주어진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주어졌는데 인간들이 그 원형과 자기가 이미 괴리돼있고 분할돼있거든요. 이것도 참 어렵다.

분절과 분할이 달라요. 분절은 연속성을 가지고 이렇게 딱 분지르면 분절되지만 분할이라 하는 것은 이것 따로 있고, 이것 따로 있고, 따로 따로 돼있는 게 분할이에요. 분할은 그 사이에 무가 들어가요. 없음이 들어가요. 이것과 이것 사이에 없음이 들어가서 따로 존재하는 게 분할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가짜입니다. 진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도 몰라요. 모르는데 그 안에 박혀있는 들어가 있는 언약이 이스라엘을 진짜로 이끕니다. 끌어당기거든요. 끌어당길 때 가짜가 곱게 가짜가 아니고 진짜를 핍박해요. 여러분 신약성경 생각하면 금방 쉬울 거예요. 진짜를 공격해요. 개코 인간도 아닌데 인간을 공격해요. 이미 범죄 한 아담이 죄 없는 아담을 공격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뭐냐 하면 신이시여 신앙 있습니다, 믿음 있습니다, 소망 있습니다, 사랑 있습니다. 이런 소리하는 거예요. 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다 가짜만 남발할 뿐인데. 믿음, 소망, 사랑. 그렇게 내게서 내는 게 다 가짜라면 진짜 내가 되도록 노력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면 진짜 나란 원형을 몰라요.

사람들이 말하는 진짜 나, 또는 진짜라는 것은 그 안에 반드시 하나의 쪼가리처럼 들어있지만 나 자신을 거기다 집어넣는 겁니다. 뭐 일곱 번 고난 받았다. 하지만 여덟 번 일어설게. 일어서는 당사자가 누굽니까? 쪼가리, 다 깨지고 쪼가리 그거잖아요. 나 부도를 일곱 번 맞았다. 집에 돈도 없다. 집에 보니까 쌀 한 되밖에 없었다. 쌀 한 되가 쪼가리 아닙니까. 그것 딛고 일어서잖아요. 동전 한 닢밖에 없다. 기타 하나 동전 한 닢, 그것으로 자기가 일어서잖아요. 그 안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담잖아요. 쪼가리라고 아무리 겸손 떨어도 그 쪼가리 안에 자기가 집약돼있다 이 말이죠. 지독해요, 인간은.

근원적으로 나를 치워버릴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간은 어떻게 가난하든지 어떻게 인생이 완전히 쪼가리나 짜개지든지 간에 인간의 행복은 한 결 같아요. 내가 노력한 것을 남이 알아주면 나는 행복하겠다. 이 소망 말고 다른 소망 있습니까? 뭐 부자 되게 해달라는 것보다 거창하게 물론 부자 되면 좋지만,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할지라도 그 노력 하나 가상히 여겨서 누가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인정해준다면 비록 가난하지만 사람이 살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24편 보니까 살맛이 없잖아요. 백날 해도 성선에 오르지도 못하고 백날 해야 거룩을 이루지 못하는데. 자기도취에 빠졌어요. 자기 즐거움에 빠졌어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지 최선을 다한다고 성산에 참여될 수 있습니까? 무슨 율법에 최선을 다하라는 그런 율법이 어디 있어요? 율법을 주관식 시험 친다면 율법의 정신은 최선 다하라는 겁니다. 땡. 그건 니 생각이고.

마태복음 7장 중간 쯤 보게 되면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은 네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서 이제는 알았다고, 그렇지 이제는 알았어.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내가 지금 칼국수를 먹고 싶다면 먼저 내가 남한테 아내한테 칼국수를 해주는 거예요. 해주면 지가 눈치가 있다면 칼국수 해줄 줄 모르고 그냥 도마에 칼 얹고 해서 호박 썰고 다시물 내서 칼국수 해주겠지. 이렇게 할 때 이 나가 가짜거든요. 가짜에서 가짜 율법해석밖에 안 나옵니다.

나는 없습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나는 아니다=나는 있음이 아니다=나는 없음’이 돼요, 논리가. 나는 아니다, 라는 이 말은 네가 이다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이다만 고집하는 하나님의 진리체제에 의해서 이다 원형 바깥에 존재하는 거예요. 복사물이에요. 가짜란 말이죠. 복사물은 가짜에요. 아무리 유사하고 아무리 비슷해도 주께선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의로 구원받지 유사한 나의 의로 주님의 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어요.

어제 낮에서 그런 비슷한 내용을 했습니다만 이걸 다시 정리하면 사랑과 성령은 인간세계에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인간세계에서 감당할 수 없는 걸 로마서 14장 17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게 아니라 했어요. 이 말은 인간나라는 뭐만 한다, 뭐가 주류다? 먹고 마시고 있는 그것으로 표출되는 것이 인간나라에서 모든 의미와 가치, 최종적인 궁극적 의미를 표시하는 방법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이 말은 하나님 나라를 표시할 때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데 그게 먹는 것, 입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먹어야 되고 이것은 안 먹어야 되고. 이런 거란 말이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14장 17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뭐냐? 들어가자 아니라 너는 가짜란 뜻이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가짜라고 구박 들어오고 공격 들어오고 지적이 될 때 지적하는 그 실체가 하늘나라에요.

여러분들이 예수님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설명할 때 하늘나라가 어떻게 등장하던가요? 인간나라가 없으면 하늘나라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인간나라를 지적하면서 그때 등장하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천국입니다. 여기 있다 따로 천국 가고 이런 것 없어요. 그냥 인간나라를 지적하고 나를 지적하는 거예요. 네가 해낼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하늘나라에 부합되는 게 아니다. 거짓이고 오류다 이 말이에요.

오류, 잘못이죠. 오류가 있으려면 오류 없는 원형이 있어야 되겠지요. 이걸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된 것, 오류가 없는 것. 그런데 인간은 본인의 오류를 통해서, 참 말이 중요한데, 연속적으로 오류를 줄여나가는 방법을 사용해서 참회에 이르려고 하는 거예요. 원형에 이르려고 하는 거예요. 율법을 주니까 율법을 계단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제자훈련 1단계, 2단계, 3단계 쭉. 백날 단계 올라가봐야 부도 한 방 몰락됩니다. 모든 것도 이혼 한 방에 다 날아가요. 연속성이 분할되는……

원형과 인간의 복사물 사이에는 무, 없음이 들어가요. 있음을 없음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왜? 쪼가리지만 계속 있어줘야, 주인공이 있어줘야 드라마가 되잖아요. 드라마 시작하자마자 1회에 주인공 죽어버리면 그 뒤는 볼 것 없어요. 항상 주인공은 살아 있어야 돼요. 있어야 돼요. 주인공이 없으면 남의 세계가 돼요. 나의 세계가 아니고.

근데 인간은 자기가 진짜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주인공으로 생각해서 타인을 만나는데 문제는 내가 진짜기 때문에 남을 만나도 결합할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어요. “너 내 말에 꿇어.” 이 이야기만 있지 의견통합이 될 리가 없습니다. 내 인생 따로 있고 네 인생 따로 있는데 의견통합이 되겠어요. 어떤 사람은 뭐 부부가 한 몸이라고요? 부부가 한 몸이면 왜 식당에 갈 때 체온 따로 잽니까? 하나 재서 곱하기 2하면 되지.

구원의 조건 나왔으니까 구원의 조건은 둘이 아니고 하나 됨이에요. 네가 날 찾아오라가 아니라 내가 네 속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너는 이 성산에 오를 자 없고 거룩에 설 자가 없습니다. 인간은 가짜이면서도 계속 진리 찾기에 나서면서 결합의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쪼가리지만 멀쩡하다고 여기는 나에게 타인의 것으로 자꾸 결합을 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실패로 끝남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주섬주섬 주워 모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1이 되되 이 1의 주인공은 뭐냐? 나를 핵심으로 해서 1이 되려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번 수련회에 사무엘하 하겠지만,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는 게 왜 죄가 되느냐 하면 그 왕 속에 본인들을 잃어버리지 않아요. 그래서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왕 달라 했지? 너희들의 통합체로서 왕을 구하지? 오히려 왕이 너희들을 내칠 것이라고 주의사항을 이야기합니다. 왕이 있음으로 왕만 있고 너희들은 잃어버린 자가 될 것이다, 그래도 좋으냐? 그래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너희 말대로 왕 제도 굳히기에 들어갈게. 들어가면서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왕 자신의 운명이 자기 행위에 자기 태도에 전혀 근거가 토대가 없어졌어요.

왕이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이거는 난데없이 재앙이 덮치게 돼있어요. 사울은 내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울이 왕이 됨으로 말미암아 사울 왕이 하는 행패 때문에 백성들의 죽을 고생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인간세계는 자꾸 어떤 통합적인 궁극적인 참, 참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어야 되니까 둘되면 거기서 마지막 결승전을 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최종적인 하나를 위해서 다 몸 바쳐서 그렇게 매달리는 겁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할 때 남자는 이미 본인이 최종적인 하나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여자가 범죄 하고 난 뒤에는 하나에 붙어야 내가 산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남자는 그것이 귀찮아. 굉장히 귀찮아요. 들어붙어야 돼요. 여기서 신약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자는 지향성을 갖고 있어요. 남자를 바라보게 돼있어요.

그게 복종하는 형태로 바라보게 되는데, 문제는 여자가 복종한다고 해서 남자가 복종시키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한테 복종한다고 해서 얼씨구나 하고 남자가, 그래 네게 명령내릴 테니 시키는 대로 해라, 하고 할 자격이 남자한테 없습니다. 그럼 남자는 뭐냐 하면 희생해야 돼요. 참 이상하죠. 복종하는 자는 있는데 복종시키는 자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사랑하는 자는 있는데 사랑을 아는 자는 없어요. 이게 방향성이 핀트 안 맞아서 그래요. 두 개의 방향. 오늘 제목을 ‘두 개의 방향’으로 할까요? 두 개의 방향이 서로 핀트가 어긋나서 가는 겁니다. 성산은 뭐냐? 주의 이름이 있는 곳이에요. 그럼 성산은 엘리베이터에요. 주의 이름이 내려오면 성산도 성전도 같이 내려오게 돼있어요. 위에 있는 성산이 아래로 내려오는 겁니다. 원형이 내려오는 거예요.

내려오고 율법을 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상대자, 파트너니까 율법에 대해서 현재 기존에 인간세계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줘야 될 의무가 있어요. 그들은 성산은 뭐냐? 올라가는 거예요. 양방향이 틀려요. 인간은 자꾸 오르려 하고 성산은 내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시편 24편에 거룩에 이룰 자가 누구며 성산에 오를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주신 모든 말씀이 최종 마무리 지어질 때 그냥 처음 있던 성산이 아니고 처음 있던 성전이 아니라 올라갔다 내려온 그 경로가 포함된 최종적 성전이고 성산인 거예요.

인간은 그냥 율법에 오를 자 하니까 올라가면 되는 줄 알아요. 시온 산이 약간 높으니까. 별로 높지도 않아요. 가보니까. 성산에 오를 자 누구냐? 높은 곳에 진리가 거기 있다고 생각하고 자꾸 올라가는 거예요. 올라가면서 두 방향 사이에 의견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이죠. 내려온 쪽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선지자, 올라가는 쪽을 이야기한 것은 아까 왕 제도, 바로 이스라엘 나라, 왕 중심의 이스라엘 백성들, 선지자의 말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왜 이해 못하느냐?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목적성이 있는 방향에 대한 어떤 취지를 그들은 버릴 수 없어요. 인간의 모든 행위는 방향을 보여주고 있고요 그 방향은 내가 갖고 있던 나의 성격과 성질, 속성 그것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엄마와 갓난아이보다 돌 좀 지난 아이가 있으면 엄마가 장바구니 들게 되면, “엄마, 어디 가?”라고 방향을 이야기해요. 그러면 엄마는 어디 안 간다는 거예요. 그럼 장바구니는 왜 드느냐? 치우려고 하는 거야. 엄마가 장바구니를 들면 장에 간다는, 그러니까 엄마가 하는 모든 행동은 방향성을 갖고 있다고 어린아이들이 간파하게 됩니다. 간파성이 있거든요. 어른들이니까.

인간이 어떤 말을 내뱉는다든지 어떤 행동을 할 때 방향성이 있어요. 그 방향성은 나의 완성형이에요. 나는 아무리 봐도 온전하지 않은 것 같아. 미흡해요. 하지만 내가 하는 방향은 미흡을 조금이라도 없애버리는 쪽으로 채우고 보충해서 보다 완전 형에 가까운 쪽으로 인간은 행동하게 돼있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추려낸다 했지요. 추려내는 거예요. 잘라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위에서 내려오고 주의 이름 자체가 내려오고 여기서는 올라가고. 인간들은 자기 이름이 있고 주님은 이름이 두 개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두 개에요. 하나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이고 하나의 이름은 주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의 이름으로도 오셨고 주의 이름으로도 오셨습니다.

인간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인자, 사람의 아들이에요. 주님이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기존에 사람의 아들과 비교해보자 이 말이죠. 누가 원형인지. 같은 사람이고 같은 사람의 아들임에도 달라도 왜 그리 다르냐 말이죠. 주님의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이게 극단적인 단절이에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니까 단절된 줄 몰랐어요.

하늘나라가 세상나라가 감당 못할 정도로 내려앉아버린 거예요. 아까 했지요. 사랑과 성령은 세상의 어떤 형식과 제도로 그걸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담아낼 수가 없어요. 다른 말로 하면 기호로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될 건데 눈물이 입을 가려 말을 못했어. 나중에 돌아가고 난 뒤에 같은 하늘 어느 곳에 있더라도 날 잊지 마. 날 잊지 말라는 말을 진즉 하지 눈물이 입을 가려서 말을 못한 거예요. 말을 하려는데 입이 굳어서 말을 못한 거예요.

그런데 감히 주님 앞에 잊지 말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세 개 있을 때 구원받은 강도는 뭐냐 하면 진짜 대단한 일을 했어요. 어느 곳에 가든지 날 잊지 말아다오. 빚쟁이 이야기한 것과 똑같죠.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나를 기억해주세요. 이 말은 주님의 기억 속에 저 있잖아요. 내 기억 말고 주님의 기억에 들어있는 나이기를 원합니다, 라는 뜻이에요.

주님의 기억 속에, 주님의 원형 속에 내가 들어있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의 언약이 내 안에 있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내 안에 내 것이 아닌 게 들어와 있습니다, 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강도된 것에 대해서 피해자에게 미안합니다, 그딴 것 마스크 쓰고 기자 앞에서 피해자에게 죄송합니다, 그런 소리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남에게 피해주든 말든 그건 내 일이 아니에요. 원형이 하신 일이지. 참 무책임한 비겁한 변명일수도 있는데. 내가 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주님의 기억 속에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주여 그걸 내가 이젠 알게 되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언약이 발현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은 두 가지 이름이에요. 하나는 존재의 이름이고 하나는 기능의 이름이에요. 이 기능은 바로 마태복음 1장 21절에 나옵니다. 이름은 그냥 간단히 예수지만, 예수는 주의 이름입니다. 사람으로 있을 때는 인자고요. 남들이 부를 땐 인자고. 벌써 막혀있거든요. 인간들은 예수님을 뭔 뜻인지 몰라요. 예수는 너무나 흔한 이름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란 이름.

설명이 더 길어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몇 자입니까? 12자. 이름이 너무 길잖아요. 이걸 함축시키면 예수에요. 삼천갑자 동방삭이라 해서 코미디에 나오는 이름 있잖아요. 길게. 옛날에는 이름 길게 지으면 명 길다고 안 죽는다고. 예수님은 예수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걸 허용한 적도 없고요. 왜냐하면 이 기능은 예수님 본인만이 할 수 있는 기능이지 다른 외부인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어요.

그러면 예수 이름의 기능이라면 존재의 이름은 뭐냐? 존재의 이름은 없어요. 없는데 내용은 임마누엘이에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원형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원형은 성취될 수 없어요. 그래서 이름 자체가 뭐냐 하면 전부 다 존재와 기능이에요. 어떤 기능을 하기 위해서 어떤 분이 계셨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분이 뭐냐? 언약자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누구 보고 이야기했다? 언약자 보고 이야기했으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성부께서 성자에게 이야기하신 그 관계가 언약입니다. 인간은 들어갔다간 튕겨져 나오지요. 튕겨져 나올 때 튕겨져 나옴을 아는 것, 그게 바로 날 잊지 마오, 에요.

마땅히 튕겨져 나오는 그 일조차도 누구 일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하실 일임을 감사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기 때문에.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부정과 없음이 꼭 필요한 거예요. 없다, 아니다, 죽는다, 나의 죽음을 하나님의 귀한 소재로 자기 언약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소재입니다. 피부가 쭈글쭈글한 이런 것,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는 것 주께서 필요해서 일으킨 일들이에요.

자 이렇게 되게 되면 인간이 남들과의 관계라든지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기의 미지의 자아상의 관계도 전부 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인간이 남들과 비교한다든지 너는 잘 살고 나는 불행하다. 비교한다든지 너는 잘 피고 나는 만날 롤러코스트 타는, 롤러코스트면 다행인 줄 알아요. 롤러코스트보다 더 심한 게 이거에요.

심장박동측정기 57, 58 하다가 제로. 주님은 이걸 보고 있는데 우리는 롤러코스트 탔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그건 롤러코스트 아닙니다. 그냥 계속 죽어있어요. 이래 가만있으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요래 돼있지만 외부에선 그냥 간 거예요. 그냥 쭉 가는 거예요. 처음부터 죽었고 계속 죽은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뭐냐? 상상세계 속에 내가 되고 싶은 나에 대한 뭐다? 방향성을 인간은 자꾸 모색하지요. 인간이 행동하는데 의미 없는 건 없어요. 지금보다 낫고 온전하고 완전하고 흔히 말하는 더 성숙하고 더 성화된 모습을 지향하면서 나아가고자 하는 겁니다. 그 모델은 내가 여기 살아 있으면 우리는 그 모델을 내가 한 방향성으로 더 거룩한 걸 찾고 있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내게 보이지 않는 원형이 내 뒤에 있어요. 절대로 우리는 주님을 본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짜 주님을 본받고자 하지요. 나를 죽이지 않는 나를 부정하지 않는 가짜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모시고자 하자 나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예수님을 모시게 되면 내가 소멸되잖아요.

아까 인간의 본성은 무엇의 행복이라 했습니까? 내가 노력한 걸 남이 인정해주는 것, 남에는 하나님마저 포함되지요.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면 가장 행복하다 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돼버리면 내가 소멸해버리면 뭐가 없습니까? 내가 행복할 이유 자체가 근원적으로 다 날아가 버리죠.

왜냐하면 내가 소멸하면 노력한 모든 것이 나를 뭐했다? 계속 소멸케 했기 때문에. 그러면 내가 노력하고 애쓰는 게 의미가 없잖아요. 의미 없으면 하는 소리가 왜 사냐 하는 거예요. 주님 뭐라 합니까? “왜 사냐? 니 벌써 죽었어. 죽었는데 뭘 왜 살아가 있냐.” 어떻게 죽느냐가 남아있지 어떻게 사느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가짜라고 하면서도 기어이 가짜라는 말을 내뱉는다고 해서 그게 진짜로 변화되는 게 아니에요. 주여 저 가짜라고 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니에요. 아까 강도처럼 날 기억해주세요,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기능이에요. 따라서 주님의 기능은 죄에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내는 거잖아요. 아까 했지요. 그러면 인간은 죄를 몰라요. 자기 백성도 몰라요.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따라서 여기서 주님께서 뭘 하느냐 하면 통합되지 않는 아무리 인간이 손을 내밀어도 예수님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통합될 수 없는 쪽에 언약을 심어놓고 그 언약을 찾아가는 식으로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버립니다. 그 주님의 손이 뭐냐? 성령이에요. 그래서 그 성령의 형식이 뭐냐 하면 율법이 아니고 사랑으로 온다는 거예요. 사랑과 성령은 세상이 그리고 우리 본인이 감당이 안 됩니다. 내가 사랑을 소유할 수가 없어요. 왜? 소유하면 이미 감당한다는 뜻인데 소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냥 넘치는 거예요. 감당하지 못함.

그러면 이러한 우리에게 찾아오는 그 기능에 대해서 항상 여기에 가시가 있고 장애물이 있지요. 장애물이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의 방향성이죠. 우리 자신이 어떤 의도하는 것, 시도하는 것. 하나님 보시기에 죽이려고 환장했는데 우리는 그걸 살려고 환장한 모습으로 우린 생각합니다. 이것이 꼭 필요해요. 우리가 살려고 애쓰는 게 꼭 필요합니다. 갑자기 기쁘죠. 아등바등 애쓰는 게 꼭 필요해요. 그것이 어떻게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사랑에 의해서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필요한 재료가 되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것도, 복음 안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거든요. 그래서 복음 아는 것은 다 필요한 거예요. 약속도 없고 올 리도 없는데 복음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 많아요. 약속한 바도 없고 주님께서 너 데려온다는 약속도 없고 주님이 재림한다 하는데 한두 해지 벌써 몇 번 속았어요. 그저 올 리도 없는데 복음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것은 무슨 추억이냐 하면 갈색추억이 아니고 복음추억이에요.

모방이죠, 모방. 어떤 믿음 좋은 사람의 모방, 또 내가 상상한 그 상상을 도로 또 우리가 모방하고. 어떤 경지에 이르면 난 행복할 거야. 그런 도달한 경지에 여러분 한두 번 속았습니까? 그 지점에 가면 신기루 같아요. 분명히 뭐 있던데 하고 가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그때까지 살아온 만큼 그 세월만큼 늙은 내 모습만 보이고요.

월남에 갔다 온 김 상사가 어떤 사람으로 변했습니까? 그냥 늙었어요. 월남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월남 모습 있더라도 돌아오면 이미 병장에서 상사된 늙은 나밖에 없어요. 그 나밖에 없는 이것이 주님한테 다 쓸모가 있다 이 말이죠.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네 쓸모없다는 사실을 날마다 부각하는 그것이 감당할 수 없는 그냥 불쌍히 여김, 그냥 사랑이에요.

사랑을 우리 행함으로 계속 가리고 있든 말든 간에 주님께서 우리 행함을 늘 이렇게 그때그때마다 성령으로 부정해서 네가 나한테 애 안 써도 돼, 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우리는 애써요, 주님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우리는 헌금한 것, 돈 만 원 한 것을 일주일 내내 아니 한 달 내내 잊지를 못해요. 그 교회 지분 얼마 냈는지 주식 얼마 샀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도 돈 낸 나는 기억해요. 나는 나를 잊지 못합니다. 이것을 바로 하나님께선 율법을 통해서 죄를 생산해내는 이 부지런한 주님의 작업에 우리가 참여해야 돼요.

 

20210712b 부산강의 : [시편]40(24편)-판 바뀜
(강의:이근호 목사)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개입을 유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꼭 필요해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시편 24편에서 모든 만물은 자기 것이라 하는 거예요. 자기 안에서 내부적으로 순환되는 겁니다. 내 것이니까 내 안에 내 것으로만 순환시켜 버리는 거예요. 나의 요소만, 하나님의 요소만.

그러니까 천국에는 인간의 것이 없고 전부 다 누구 것이 되겠어요? 생명나무 것, 주님의 것으로 순환되게 만드는 것, 그걸로 유지되는 게 천국이죠. 거기선 철저하게 인간의 것들은 왜 천국에 올 수 없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 이야기할 때 포도원비유 나오지요. 인간의 것을 언급하는 거예요.

인간의 것은 일찍 노동했다고 해서 남보다 품삯을 더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것, 그렇게 되면 품삯을 인간의 노동의 양에 따라서 품삯이 그만큼 차등이 진다는 그것은 무슨 요소가 살아 있느냐 하면 인간의 행함의 요소가 살아 있지요. 그거는 외부에서 주는 게 아니고 그냥 무상으로 주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기회를 부여한 것밖에 안 돼요.

니가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기회 부여하고 거기서 실력 발휘하고 실력 발휘한 만큼 상급을 더 받는다든지 구원이 된다든지 너에게 특별한 보상을 주든지 그런 식의 계산은 이것은 바로 가짜에요. 원형이 원판이 아니에요. 주님의 뜻이 아닌 거예요. 원형은 하늘에서 땅에 내려왔습니다. 원형과 가짜의 대비, 철저하게 원형과 가짜를 대비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대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자로서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야 되겠지요. 그걸 함축해서 한 문장으로 표현할게요. “율법의 탄생과 소멸”이에요. 탄생, 소멸. 탄생하는 건 다 소멸하는 거예요. 태어난 것은 다 죽어요. 이것은 인간이 죄를 품을 때나 일어날 일입니다. 근데 여기에 누가 끼어듭니까? 하나님이 끼어들지요. 끼어든 그분이 원형이에요. 하나님이 원형입니다.

그래서 시편 24편의 내용의 완성은 하나님이 끼어듦으로서 판을 바꾸는 겁니다. 이게 오늘 강의의 핵심이에요. 판을 바꾸면 뭐가 등장하느냐? 여기에 우상이 등장하는 거예요. 우상의 특징은 소멸을 거부하는 거예요. 소멸되지 않는 하나님을 그들은 인간들은 믿고 싶어요. 하나님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기가 소멸되지 않기 위해서 소멸되지 않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죽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니체가 신은 죽었다 할 때 본인은 정신없이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지만 그게 복음이에요. 신이 죽었다는 게 복음이에요. 죽은 신이 진짜 신입니다. 죽지 않는 신은 가짜에요. 죽지 않는 신은 무조건 인간이 만들어냈다고 지어냈다고 보면 돼요. 자기의 이상적인 모델로서 하나의 라이벌로 여겼다 보면 돼요. 인간에게 신을 라이벌이에요.

당신이 갖고 있는 것 나도 갖고 싶다. 이 욕망, 이 욕심을 신에 의해서 자극받은 겁니다. 그 자극 없으면 무슨 기도하겠어요. 그 자극 없으면 무슨 교회 나오겠습니까. 사람이 자기가 신이라는 방향 쪽으로 나갈 수 있는 그런 여지가 희망이 보일 때 그것에 자기 교회 나오는 노동력을 보태고 싶은 거예요. 자기가 수고의 대가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수고 싶은 겁니다.

죽으려고 교회 오는 사람, 망하려고 교회 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주여 저주케 하옵소서. 할렐루야 하고 교회 나오는 사람 없지요. 주님은 저주받았어요. 아버지한테. 그런데 인간은 딴 마음을 갖고 교회 나온다 이 말이죠. 판을 바꾸는 겁니다. 판을 바꿔야 여호와, 신, 예수 이 전체가 이게 바로 인간 판에 새겨진 우상적인 개념이란 겁니다.

인간 판단은 개념의 종합입니다. 개념은 어디서 생기는가? 움직임에서 생겨요. 뭐 움직이면 개념 다 집어넣는 거예요. 의미 다 주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고정시키고 판단자고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현상에 대해서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종합하게 되면 자신의 판단으로 정리가 되죠.

이 인간들의 논리의 순환에서 자기 부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는 죽어 마땅해, 이게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나올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에서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뜻을 전하니까 다른 말로 율법을 주니까 이스라엘은 그 율법으로 자기 존재와 하나님의 이름,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니까 일치되고 결합되기를 원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판단으로 펼쳐진 이 체험의 평지, 지평에서 인간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겪게 하십니다. 이게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게 오늘날 성도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예상 못한 일이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감사한 줄 알아야 됩니다.

인간이 예상한 것은 달성하게 되면 거기에 허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게 고작 이거야? 고작 이것 하려고?” 광고에 홈쇼핑에 에어프라이기 나오면, “그래 저거 갖고 있으면 튀김도 팔팔하게 살아 있고 좋겠어.” 그런데 막상 해보면 에게 이거야? 결국 이거에 내 목숨, 목숨까지 건 건 없습니다만 삶의 보람을 여기 걸었어? 모든 것이 허무와 실망으로 느끼죠.

그것은 일어난 일이 잘못이 아니고 그 일어난 일을 자기 임의대로 판단자 된 내가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겁니다. 내 판단에 내 평가에 오류가 있었던 거예요. 오류가. 그것은 뭐냐 하면 분명히 자기가 이 땅에 탄생했잖아요. 탄생이 거창합니까, 그럼 출생으로 바꿉시다. 출생했잖아요. 출생한 것은 필연적으로 어디 가야 돼요? 출생을 무효화해야 돼요. 무효화 되는 그 과정 속에서 뭐냐? 언약이 나오게 돼있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탄생한 것도 살리고 언약을 지켜서 자기의 소멸과 죽음을 이게 나에게 해당사항이 없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그냥 살고, 영원히 살고 또 살고, 또 살고, 또 살고, 살고 싶어 온 거예요. 주님이 가는 방향과 다릅니다. 달라요. 주님은 자기 십자가, 다시 말해서 자기 죽음을 가지고 자기 죽음 관을 짊어지고 장고처럼, 장고 알지요. 장~고 지 관 질질 끌고 가는 사람 있잖아요. 저 뒤에 뭐 끌고 가. 보니까 자기 관이라. 항시 대기, 자기 개인용 택시를 항시 대기.

죄가 있어야 피의 실력이 발휘됩니다. 죄가 없는데 피만 믿으려고 하는 자체가 가짜에요. 그러면 우리는 관람자가 아니거든요. 저건 죄고, 이건 피다 하면 안 되고 죄의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야 돼요. 죄가 뭐냐 하면 나를 살리는 것, 좀 어렵게 이야기할까요? 나의 이름을 유지하는 것, 나의 존재를 지켜내는 것 이 일을 우리가 주께서 하도록 이 땅에서 출생케 한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아담의 족속, 아담의 후손이잖아요. 아담의 후손 이것이 뭐냐? 판이에요. 이 판을 뒤집어버린 거예요. 뒤집기 위해서 아담의 후손으로 오셔서 빠져나가는 게 있어야 돼요. 아담의 후손이지만 아니었다. 그게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전한 복음은 시편 24편과 관련돼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부활’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평생 들었고 또 듣게 되는 이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깔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관람하듯이 취득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이 십자가와 부활이 펼쳐지는 한 마당, 그 새로운 판에 우리가 끼어들게 되면 바로 우상이라는 것, 신이죠. 신이라는 것이 죄악 된 신을 우리가 평소에 선택했고 사모하는 식으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내가 원하는 신, 하나님은 전부 다 우상적이란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이 신을 믿음으로서 나의 탄생을 계속 지켜내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은 소멸하신 하나님과 다른 방향성이기 때문에 이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우상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신약성경이기 때문에 굉장히 함축적으로 이야기했어요. 탐심이 곧 우상이다. 그럼 탐심의 주인공이 어딥니까? 내가 탐심의 주인공이죠. 그러면 탐심을 유도하는 환경은 판, 오늘 제목을 한 자로 ‘판’으로 할까?

판, 이 세상 자체가 내가 나에게 미혹거리고 나를 홀리게 만들어요. 눈에 보이는 것, 신상, 신상. 만날 신상. 시즌 끝납니다. 80% 세일, 한 개 더 줍니다. 모든 우리 주변에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 다 나로 하여금 유혹거리고 미혹거리에요. 요한일서 2장 15절, 16절에 보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것이 없나니, 했어요.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아요. 왜? 이 세상에는 아버지 것이 없어요. 하나님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대로 하게 되면 누가 하나님의 성산에 오를 것인가, 누가 거룩할 것인가? 같은 이야기에요. 현재 우리 처지와 형편을 제대로 지적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들에 탐심을 갖고 있다 이 말이죠. 탐심을 갖고 있으면서 문제는 어떤 게 우상스럽느냐 하면 탐심이 있잖아요.

있는데 이것을 뭐로 위장을 하느냐 하면 거룩으로 하나님의 고상한 것을 포장을 하는 거예요. 누가? 내가 판단하면서 계속 의미 주면서 그다지 나쁘지 않았어. 그래도 신앙에 선방했잖아,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 보세요.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도 많은데 자기 아이 굶겨 죽인 부모도 있는데 나는 애 하나 잘 키웠잖아.

하여튼 본인이 율법의 주인공 돼버렸어요. 율법을 새로 만드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판을 뒤엎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상과 거짓 신과 결탁돼있는 채로 율법에 대해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대조적으로 이스라엘 유대사회 속에 하나님께서 같이 끼어들어 같이 이 땅에 합류시켜버린 거예요. 그만큼 무시무시한 겁니다.

시험 치고 있는데 시험문제 낸 사람이 같이 옆자리에 앉아 시험 치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지는 시험문제에 대해서 커닝해보니까 주님 답변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어. 왜 저런 답변이 나오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사시면서 주님 사신 행적 자체가 뭐냐 하면 율법이에요. 새로운 율법입니다. 그 행적 자체가.

모세는 간음하면 간음죄다 이렇게 되잖아요. 예수님의 새로운 출제는 뭐냐?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간음죄가 되는 거예요. 율법에는 네가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려라, 이런 내용이 없어요. 율법에 그런 내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안에서 문제 내는 거예요. 네가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려라. 그 다음 문제 보니까 더 센 문제가 나와요.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버려라. 이것 빼고 저것 빼고 알맹이 다 빼버리면……

그래놓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 이미 죽은 자 좀 뺀들 어때? 이미 죽은 자 눈알 좀 뺀들, 눈알 두 개밖에 없지만 그것 좀 뺀들 이미 죽은 자가 그것 뺀다고 더 죽는 것도 아니란 말이죠. 니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 그걸 다른 말로 코로나 현상, 이래 보면 돼요. 코로나 두려워하지 말고 백신을 두려워하지 말고. 백신 맞아도 죽고 안 맞아도 죽은 잔데 이왕이면 꼭 맞으세요. 그래야 유도되니까. 내 죄가 유도되는 거예요. 참 오늘 좋은 것 배웠습니다.

내 죄가 있어줘야 피의 실력이 주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것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드러나는 거예요. 사이다를 그냥 마시지 말고요. 사이다 맛을 알려면 한우를 구워줘야 사이다 맛이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용이 좀 더 들어요. 사이다 한 병은 천오백 원이면 되는데 한우는 200그램에 오만 오천 원.

진짜 존재는 탄생할 수 없다. 시편 24편 초반에 세상의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것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그 여호와, 주의 이름인데 여호와가 탄생이란 경우를 겪을 것이란 것을 이스라엘 어느 누구도 상상도 못했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태어납니까? 말도 안 되지요. 태어났다는 말은 없을 때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신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존하시는 그 하나님의 규정과 이게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과 동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이 아니고.

그러면 하나님은 이사야 45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계속해서 감춰진 분이에요. 감춰진 그분을 사도바울은 이걸 비밀이라고 했어요. 영원 전부터 감춰진 그분이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너희들이 아는 신학 실력 나도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 그것 다 배웠다는 거예요. 인간이 배웠던 신학 가운데 조직신학 가운데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인간의 판단이 그래요. 인간은 뭘 보게 되면 그냥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판단을 통해서 받아들입니다. 자기의 선입견을 통해서 받아들여요.

지금 제일 난해한 것은 뭐냐 하면 이 십자가와 부활이 어느 인간도 예수님만 겪었지 다른 사람은 겪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겪은 적이 없는데 사도 바울은 뭐냐 하면 성령을 통해서 겪었다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지신 주님 안 보이지요. 부활 안 보이지요. 성령 안 보이지요. 그럼 보이는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겪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도 바울만 그 시대에 보이는 겁니다. 사도 바울만.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구원받는 길은 예수님 당시나 그 이후나 구약 당시나 어떤 경우라도 다 막혀있는 거예요.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그럼 막혀있는 거예요. 구원은 막혀있는 겁니다. 막혀있으니까 답답하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안 막히도록 조작해내야지요. 가짜가 가짜를 만들어야지요. 조직신학, 성경신학 이런 걸 통해서 만들어내야지요.

그러면 오늘날 성령이 안 보이잖아요. 사도 바울은 자꾸 보이지 않는 것을 들이미는 거예요. 아까 강의한 것, 사람은 또는 사람의 이름은 어렵게 이야기하면 사람은 타인과 합치될 수 있는 그런 가지는 없어요.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타인에게 나의 주장을 강요하는 것 외에는 없어요.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부부도 마찬가지고 강요하는 거예요.

복종하면 내가 복종하는 것보다 더 내놓고 사랑하면 사랑을 내놔라, 이거지 뭐든지 내 행동을 항상 강요해요. 내 앞 길 막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지 말라는 거예요. 막지 말라면 헤어져야지. 그럼 또 손해니까 협조하라고. 막지 말고 협조하라. 내가 너한테 복종할 테니까 나의 나 됨에 대해서 당신 남편 된 자가 나한테 좀 협조하라.

그럼 따지고 보면 누가 누구한테 복종하는 거예요? 내가 너한테 복종할 테니까 네가 알아서 복종하라 이 말이에요. 어느 인간도 내가 있는 이상은 타인과 합치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인간에게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상이기 때문에. 기존의 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봅시다. 문제가 되겠지요.

여기에 시편 24편 4절 보겠습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가 성산에 이르지요. 거룩한 산에 오르지요. 거룩한 곳에 설 자가 이런 자지요. 그러면 여기에 마음에 청결하다는 판단을 누가 내립니까? 자기 마음 청결한 것을 본인 판단이 여기서 끼어들까요, 안 끼어들까요? 필연적으로 끼어들지요. 내가 끼어든다고요.

뜻을 허탄한 곳에 두지 아니한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내가 남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항상 나는 나를 껴안고 가야 돼요. 내가 나를 버리면 나는 안 돼요. 몰라요. 왜 안 되는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나는 심지어 지옥 가도 내가 나를 격려해야 돼요. “걱정 마. 요샌 그다지 뜨겁지 안 데, 지옥 불이.”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는 것, 그걸 쉬지도 않고 계속 내뱉는 겁니다. “그만하면 청결한 거야. 뜻이 허탄한 데 두지 않은 거야.” 계속해서 이 율법을 자기와 연결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중간에 뭐가 들어가야 돼요? 십자가와 부활이 들어가야 하는데 십자가와 부활을 집어넣지 않고 내가 바로 이 율법과 시편 24편과 직결시키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점을 여러분이 아신다면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뭔지 알겠지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현재 내가 하는 그 짓거리, 율법과 나를 직거래한 것에 대해서 그걸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율법은 네가 나서서 될 문제가 아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나의 구원이 아니고, 나의 구원이란 율법 구원이에요. 나의 구원이 아니라 피의 의미, 피의 가치, 하나님의 언약, 새 언약의 완성을 구원하는 겁니다. 여기다 자꾸 나의 구원을 집어넣으면 안 돼요. 이걸 잘라내야 돼요. 피만이 피의 효과만이 나에게서 튀어나올 때 그 사람이 바로 구원된 사람입니다. 피가 나올 그 발언에 대해서 지 구원이 나오면 안 돼요.

물론 이게 사실은 모든 교회와 기독교가 전부 다 구원파에요. 구원파 아닌 기독교가 없고 교회가 없어요. 이래야 이게 상품적 가치가 되기 때문에. 돈 받고 팔릴 교환, 상품적 가치가 있거든요. 소비자는 자기 소비에 만족하기 위해서 돈을 지불하잖아요. 교회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렇게 돼버리면 주님은 상품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다버린 것이고 그 내다버린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십자가에요. 그걸 베드로전서에선 뭐냐? 건축자의 버린 돌이에요. 그 버린 돌을 내가 찾아가서 가져오는 게 아니고 같이 눕겠다는 거예요. 주께서 누운 자리에 같이 누워 지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미 탄생돼있지만 앞당겨 소멸 체험을 주와 더불어서 주께서 하게 하시는 겁니다. 말씀 앞에서 나를 소멸시키는 체험에 가담하는 거예요. 교회 왔는데 잘리고 교회 왔는데 왕따 당하고 교회 왔는데 무시당하고 집안에 말 한 마디 뗐는데 와르르 달려들고 직장 갔는데 직장에서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고. 그럼 우리는 화가 나서 이 미친 것들, 하고 욕인 듯 욕 아닌 욕과 같은 미친 것들이라고 하지만 제가 어제 오후설교에 했잖아요.

남 보고 미쳤다하지 말고 네가 더 미쳤다는 것을 알아라. 더 미치고 살게 되면 세상 미친 것은 별 미친 것도 아니에요. 본인이 생각해도 남이 나를 그렇게 미쳤다고 하는 게 과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진짜 미친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예요. 이게 사도 바울이고 선지자잖아요.

사랑과 성령은 누가 감당되지 않는다? 세상의 어떤 판단도 감당할 수 없어요.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요. 나는 너를 이렇다고 규정하고 싶어. 그 규정에 안 맞는 거예요. 규정지을 수 없어요. 성도를 규정지을 수 있는 인간의 준비된 기호는 언어는 없습니다. 남들이, 너 왜 인생 그렇게 사느냐고 묻거들랑 나도 모르겠다고 답변하면 돼요. 나도 몰라. 거기다가 한 마디 더 붙일 필요 없지만 혹시 복음 좀 아는 사람은 붙이세요. “주께서 아시겠지.” 그러면 상대방이, “또 주, 제발 좀. 주님 이야기 그만해라. 듣기 싫다.” 그게 복음전파입니다.

판을 바꿔나갈 때 율법은 주의 이름과 관련돼있고요 주의 이름에 율법을 준 것은 율법적 민족, 율법적 국가를 세우기 위함이에요.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세우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한,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거룩한 민족이다. 명제가 하나 걸쳐놨어요. 이 명제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게 자기인 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주님의 명제거든요.

그 명제는 주님에 의해서 움직여나가는 겁니다. 그들이 겪지 못한 것을 겪게 하는 겁니다. 그들이 겪었던 것은 처절한 생존의 시도에요. 생존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복음, 복음해도 돈만 한 게 없다는 것, 이건 평생을 살면서 절실하게 느끼게 해요. 복음 잠시 잊어도 견딜 만 하지만 돈 없으면 못 견딥니다. 돈 없어봐야 아는데.

그 정도로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내가 모르는 실제 내 모습은 차이가 나요. 내가 세상과 완전히 한 통속이라는 것을 늘 나는 그것을 애써 감추지만 주께서는 애써 파헤치는 거예요. 특히 돈 없이는 살아도 자식 아픈 것, 자식 마음 아픈 것, 이것 못 견딥니다. “내가 대신 유치장 갈게.” 이건 서슴없이 나와요. 그 음주 운전 내가 했다고 할게. 팔십 넘은 할머니가 음주 운전했다고. 오십 넘은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음주 운전했다고 해. 주님 앞에선 그렇게 당당하다가 자식 앞에선 왜 그리 작아지는지. 그거는 DNA가 오십 퍼센트 할당돼있어서 생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착각은 뭐냐 하면 율법을 지킨 나가 곧 율법의 실현태, 실제라고 본 거예요. 내 안에 율법 들어있으니까 내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고 율법이라고 본 겁니다. 여기 자기부정이나 자기파괴란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홀연히 뭐하느냐 하면 이별했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 땅에 온 것은 사람과 이별하기 위해 온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주님의 마음이, 성령이 주님의 마음이거든요. 고린도전서 2장.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것도 그냥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마음, 어떤 인간도 찾아내지 못한 깊은 마음이 성령이 우리 안에 와버리면 우리는 뭐가 없느냐 하면 주님과의 이별이 없습니다. 이별이 없음을 성도는 평생 동안 이걸 체험하는 거예요. 돈이 없어도 이별이 아니고 자식이 아파도 이별이 아니에요. 주님과 결별이 아닙니다.

내가 흔히 말하는 죄를 지어도 결별이 아니에요. 벌써 천국 생활이에요. 천국, 지옥을 내가 골라잡는 게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거예요. 열두 제자가 말씀 듣고 지키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러나 어디까지나 실습은 실습이고 실전은 달라요. 실습 백날 해봐도 실전, 다시 말해서 영원한 이별, 모든 인간과의 이별, 그 사건이 세 자로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 모든 인간과 이별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과 단절이죠. 빠이빠이 잘 있어라, 가버렸어요.

따라서 만약에 성경이 소설이라면 인간이 작위적으로 지어낸 거라면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 구원된 사람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구원은 뭐냐 하면 결국은 너와 나 사이 이별 없음이에요. 이별 없음을 이야기에서 먼저 전제조건이 내가 나와 이별해야 돼요. 내가 나를 포기해야 돼요. 포기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4절 보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이게 나와 결별해야 될 요건, 이유가 거기 있어요. 왜냐하면 이 말씀을 우리는 미련 없이 포기하지 않고 이걸 잡거든요. 잡아서 여기서 유사적인 율법 성취성을 내가 변명조로 내놔요.

이 정도하면 마음이 허탄한 것 아니죠, 하나님. 이 정도하면 청결 속에 속하죠. 이 정도하면 내가 거짓 맹세치 아니했지요. 계속해서 자기의 변명의 변명을 꼬리 물고 하는 이유가, 5절에 보면 그러니까 저는 하나님께 복 받지요. 저쪽은 저주받았지만 나는 복 받아야 마땅하지요. 자 복 어디 있는가, 헤아려보자.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자신을 수호하고 지키는 쪽으로 나간다 이 말이에요.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보고 이야기,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인 것을 누가 알겠어요. 모든 인간과의 이별이에요. 우리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13장 1절 같이 보고 난 뒤에 질문을 하나 던지겠어요. 성경이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어느 정도 어려운지 여러분 실습해보세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제가 잘못 읽은 것 아니지요. 맞지요. 끝까지 사랑하지요. 질문 들어갑니다. 뭐를 믿고 끝까지 사랑하는 걸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뭘 믿고? 말 뿐인데. 끝까지 사랑한다, 그런 말 누가 못해요. 결혼하기 전에 남자가 이야기할 때, “내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를 지키고 너와 결혼할게.” 결혼 전에 말이죠. “끝까지 사랑할게.” 어디서 멘트는 들어서 끝까지 사랑할게. 요한복음 13장 동원해가면서.

그럴 때 믿습니까? 속으로 “이 인간아. 니가 돼봐야 알지. 말로 하지 말고 실제로 실천에 옮길 때 그때 인정해줄게.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으면 인정해줄게.” 끝까지 사랑한다 해놓고 죽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자 제가 질문이 뭐냐? 끝까지 사랑하는 걸 뭐로 증명할 것이냐? 끝까지 사랑함을 어떤 방법으로 증명됩니까? 나 너와 이별 없어. 뭐라고 증명할 거예요? 나도 그래 말하겠다. 이러면 끝나는 겁니까? 이런 게 어려운 거예요.

성경말씀이 나와 있는 건 인정하는데 믿고 싶어서 믿습니다, 라는 말을 해요. 그런데 믿습니다하는 것이 뭐냐? 평생 내가 겪었던 그 토대 위에 나오는 남발된 가짜거든요. 내 토대된 내가 경험했던 것 중에서. 그런데 항상 주님의 말씀은 내가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체험을 경험케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러면 끝까지 사랑한다는 이 말은 결국 두 가지입니다. 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 좋으라고 주님 자신에게 주신 약속이란 말이죠. 끝까지 사랑한다. 그러면 나 좋으라고 할 때 우리가 이 말씀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주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의 일에 방해물이 되는 나를 죽이는 쪽으로 가야 되지요. 다시 말해서 나를 믿지 못하는 것만 튀어나오는 괴물로 몰아세워야 되겠지요.

내가 주님의 끝까지 사랑함을 못 믿게 만드는 요인이 있어요, 원인이 있어요. 내 안에 있는 악마가 그 짓하는 거예요. 너는 네 자신을 믿어야 돼. 이게 자꾸 격려인지 나를 파괴시키는 건지 분간도 안 되지만 계속해서 내 안에서 내 육신이 너는 너만 챙겨야 돼. 너만 챙기면 인생 성공이야.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뭔가 마귀가 우리를 격려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해결책이, 이건 우리에게는 최후의 난제입니다. 마지막 남은 난제에요. 어렵게 말해서 인식론이란 어려운 단어가 있지만 맨 그 말이나 그 말 어려운 말이고요. 그러면 그 결론을 여러분 조바심 낼 게 아니고 미리 말씀드리겠어요. 주님은 뭘 통하느냐 하면 전쟁을 통해야 돼요.

주의 이름은 그냥 곱게 말 몇 마디 주고받고, 주고받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이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위험하니까. 전쟁 같은 사랑을 집어넣는데 전쟁 없는 사랑은 없다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로 전쟁을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시범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다루는 똑같은 방식으로 신약의 내 백성 창출하겠다, 만들어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 탄생하고 소멸되지요. 그럼 우리가 무슨 판입니까? 아담의 판에서 태어났다가 죽고하지요. 이 판을 뭐로 옮깁니까? 주님의 판으로 옮기는 거예요. 그러면 나의 죽음을 아담에서는 아직까지 죽을 때 안 됐잖아요. 이걸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당겨서 죽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노선변경이 일어나요. 판이 바뀌는 거예요. 나는 죽고 날마다 사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있는 것은 부활이잖아요. 주님의 사건이 이 아담 판에 그냥 무능력하게 놓여있는 우리에게 십자가 죽고 다시 삶을 계속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 삶을 끄집어낼 때 뭐가 되느냐? 말씀이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내 안에 뭐가 주인공이다? 말씀 자체가 주인공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 체험인 거예요.

그 전쟁을 할 때 여기 시편 24편 7절, 8절 보세요.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성문이죠. 전쟁할 때 성과 성이 전쟁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공격을 해대지요. 이제는 문들이 열려야 돼요. 왜? 여기 강하고 능한 여호와, 뭡니까? 전쟁하시는 하나님이죠. 전쟁하시는 하나님이 어디 들어온다고요? 강함이 어디 들어와요? 내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이거는 지식도 아니고 그냥 지식이 아니에요. 나를 위해 마련한 모든 판이 다 엎어지는 겁니다. 이거는 내 자식이고 이건 내 돈이고 모든 것을 하는데 주께서 그것 여호와의 것이야. 네 것 아니야.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것이야. 언약을 이루기 위한 여호와의 것이야. 네 머리카락, 네 옷, 모든 것은 주의 것이야, 하고 선전포고 없이 그냥 마구 밀고 들어와서 내 인생 자체를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효과로 다 뒤집어엎는 거예요.

그렇게 일이 벌어진 사람을 들 수 있지만 제가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누구냐 하면 들어나 봤습니까? 세례요한. 세례요한이 끝에 어떻게 죽었습니까? 여자의 말 듣고 지 모가지 날아갔어요. 그런 고문도 그런 고문 없고 그 말로가 누가 봐도 처참하고 비참하지요. 성령의 예언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말로가 뭡니까? 쟁반 모가지 날아갔지요.

왜 그렇게 합니까? 쟁반에 모가지가 아니라 난도질 쳐도 주님의 십자가 위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흠집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듣기만 해도 겁나지요. 네가 아무리 망가져도 이미 시작된 그리스도의 판은 언약의 완성은 그 판은 훼손되지 않는다. 그 천국의 생명을 흠집 하나 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생명의 위력입니다. 제3의 위력이고 피의 위력이에요.

교회하다 망했잖아요. 그게 복음이잖아요. 주님이 망하게 한 거기다 네가 왜 인상 찌그리고 앉아있냐 말이죠. 몸이 아파요. 네 몸이냐? 코로나 그것도 알파가 아니고 델타, 베타에 걸렸습니다. 이중 삼중. 네 몸이냐, 내 몸이지. 왜 겪게 하십니까? 내가 예상 못한 걸 겪게 하신 이유는 그래도 십자가의 용서의 위력이 요만큼도 손상되는 게 아니고 오히려 더 위력을 발휘하는 거예요.

그래야 마귀를 이긴다고요. 그게 승리입니다. 이스라엘의 궁극적 승리에요. 세상에 닫힌 문들 다 열려버려라. 다 꿇어, 꿇어앉아. 궁극적 승리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파괴에요. 이스라엘이 파괴됨으로써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승리하듯이 그 겪지 못한 체험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겪게 하시는 거예요. 네가 성도란 이름으로 나의 승리를 가로막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교회란 이름으로 내 승리를 십자가 다 이루심을 훼손하지 말라는 거예요. 주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딱 그 이야기에요.

여기 9절에 보면,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문들이 한두 문이 아니에요. 전쟁할 게 한둘이 아닙니다. 적들이 치면 또 올라오고, 치면 또 올라오고. 주께서 십자가 이야기하면 내 속에서 또 십자가 반대되는 내 은밀한 탐심과 욕심과 세상에 홀린 어떤 희망사항이 또 올라오고, 그 기대가 좌절되게 되면 또 올라오고. 올라온 이유가 남은 좋은 것 주고 나는 이것밖에 안 줍니까, 라든지 내 희망사항은 기도 빡세게 하고 금식해도 안 들어줍니까? 이런 게 계속해서 올라오지요.

우리는 이미 주님의 십자가 안에 우리의 죽음과 새로운 탄생이 들어있어요. 그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그거는 사도 바울이 고백했잖아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식의 그러한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사되는 이유가, 주의 이름은 결합능력이 나옵니다. 자기가 하시는 모든 공로에 대해서 다른 죄인을 집어넣어 결합시키는 결합능력이 나와요. 성령께서.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낚시하신 게 아니고 이 땅에서 실제로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해선 다 해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죄에 대해서 해결했음을 우리한테 집어넣는 일을 반복하는 거예요. 네가 육신을 갖고 있는 죄에 대해서 해결되었음을 우리에게 반복해서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바로 성령이 오신 이유는, 나 잘났다가 아니라 주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연결된 관계망으로 주께서 우리를 불러내신 거예요. 이 죄악 된 세상에서. 그걸 네 자로 뭐냐?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의 궁극적 승리는 곧 주님의 승리에요. 나의 승리가 아니고 우리 왕이신 주님의 승리에요.

10절에 보면,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성전은 원래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한 자리는 하늘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의 엘리베이터가 내려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그냥 위에서 올라가면 우리가 연속적으로 율법 지키면 올라갈 줄 알았지요. 성전이 직접 더 몰락해서 이 낮은 곳까지 내려올 줄을 누가 상상했겠어요?

율법에서 말하는 그라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이에요. 가슴 치며 돌아섰던 내가 그 사람이에요. 갑자기 백지영이 왜 튀어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차마 못했지만 당신이 사랑한 사람, 내가 그 사람이야. 율법이 말한 내가, 이 하나님이 율법의 주인공이었다는. 내가 지켜서 너를 구원하지 네가 지켜서 구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 설명하는데 예수님 애먹었어요, 이 땅에서. 말귀 못 알아듣는 인간들 상대로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그냥 비유로. 그런데 그 비유가 항상 인간을 치는 비유에요. 인간은 자기의 노력을 알아줘야 살 보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주님이 치었어요. 배척받았다고. 그런데 십자가 끝이 아니고 십자가 다시 부활했단 말이죠.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성령을 주셨던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일의 연속이에요. 주님 자기 일하려고 우리를 불러 세웠기 때문에 주님은 이미 승리했다는 거예요. 죄로부터 악마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빼내는데 승리했어요. 이제 판이 달라졌어요. 노선변경이 일어난 겁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노선이 아니고 마중 나와 주신 노선, 그게 바로 성령의 오심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내가 펄떡펄떡 살아 있지 말고 늘 매일같이 말씀이 살아 있게 하옵시고 그 말씀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이 반복됨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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