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양의 출처

아빠와 함께 2021. 5. 12. 09:51

20210510a 부산강의 : [시편]38(23편)-양의 출처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시편 23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 목자 나오지요. 목자가 나온다는 말은 여기에 반대편에 점선으로 뭐가 있느냐? 양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목자가 없으면 양이 생겨나지 않지요. 상당히 시편 23편은 우리 보기에는 목가적이다, 평화롭다는 그런 인상을 주잖아요. 그런데 목가적이지 않고 살벌해요. 대단히 살벌합니다. 양의 출현이.

왜 그러냐 하면 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양은 없습니다. 성경에서의 개념은, 성경에 여러 가지 개념이 있잖아요. 천국이고 율법이고 양이고 목자고 이 모든 개념은 나와 성경개념과 연결시킬 때에 나가 박살나야 돼요. 내가 기대하는 개념을 성경에서 끄집어내면 이건 반칙입니다. 이건 백 프로 엉터리에요.

성경에서 목자가 나오고 양이 등장하니까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양으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또는 하나님을 목자로 주장하고 싶은 거예요. 이래서 망한 나라가 무슨 나라냐 하면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이 예수님 당시에 그러니까 목자가 등장했던 예수님 당시에 뭐가 돼있냐 하면 이들의 권세는 무슨 권세가 되느냐? 뱀의 권세가 돼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은 뭐로 보느냐 하면 양으로 보고 자기를 지켜주는 하나님을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시편 23편에 나오는 목자로 이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개념을 나 개념과 직결시킨 것이 이게 화근이 되고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직결시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알다시피 약속이고, 약속은 어떤 전제가 있는데 그 전제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의 전제가 되는 겁니다. 거기 보면 뱀 나오고 여자의 후손 나오거든요. 여자의 후손도 인간들 입장에서는 없고요, 물론 뱀도 없어요. 인간에게선 인간밖에 없어요. 인간들은 인간만 만납니다. 인간만 만나도록 서로서로 납득이 되고 이해돼요. 인간은 인간과 사귀는 것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지 인간 외에 귀신 만나는 것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국가라는 것, 사회라는 것, 공동체라는 것, 가정이라는 것은 전부 다 조사해보면, 조사할 것도 없이 딱 보기만 하면 전부 다 인간 대 인간의 쪽수에요. 숫자란 말이죠. “식구 몇 식구에요?” “네 식구.” 쪽수가 돼요. 쪽수가 된다는 말은, 어려운 말로 카운트가 되는 대상이다, 헤아림이 되는 대상이에요. “집에 식구 몇입니까?” “네 명입니다.” “아빠, 엄마 말고 또 누구 있습니까?” “고양이 한 마리와 개 한 마리.”

이렇게 카운트가 된다는 것은 비록 대상이 고양이고 개라도 내가 카운트하겠다는 것은 내가 납득이 되고 이해되는 내 식구 안에 바운더리boundary 안에, 범주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살고 있고 정당하고 살만한 가치를 지니고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방식, 이 방식을 아주 공고하죠. 아주 굉장히 영어로 하면 concrete, 단단해하는 거예요.

단단하니까 뭐가 없는 거예요? 나가 우선이니까 뭐가 없는 겁니까?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이런 게 없는 겁니다. 물론 양이란 것도 없고 목자도 없어요. 그건 내가 나의 공고함, 나 자신을 단단히 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차용하고 빌려오고 가져온 겁니다. 뒤에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설명할게요.

성경에서 나오는 개념, 오늘 시편 23편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그 대목이에요. 성경에서의 개념은 나라는 개념과 연결이 안 된다는 이야기했습니다. 목자, 양 개념 우리 인간에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기를 양이라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고요.

자, 그렇다면 목자, 양이란 개념은 어디서 나오는가? 약속에서 나와요. 약속에서 목자 개념 나오고 양 개념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걸 반칙해서 나로부터 목자 개념을 억지로 연결시키지 마세요. 나는 양이고 주님은 목자라고 그렇게 우기지 마세요. 본인이 뭐 김 양, 최 양입니까? 양 아니에요. 성경에서 양이라 하는 것은 살벌합니다. 성경에서 양은 뱀에게 상처받아야 양이 돼요.

뱀에게 상처받지 않는 양은 양이 아닙니다. 양 되려고 상처받을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뱀이라는 이 출현, 등장은 여자의 후손의 경우에만 출현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관여할 수 없어요. 세상에 보면 그런 영화들 많잖아요. 귀신아 나오라고. 귀신은 인간과 싸울 대상도 아닙니다. 자기 부하와 왜 싸웁니까? 자기 사람인데요. 바둑 9단인 줄 모르고 바둑 15급이 나랑 한 판 붙읍시다, 하면 바쁘니까 그냥 가세요. 상대할 가치도 없는 걸 왜 해요.

뱀은 하나님과 상대합니다. 욥기에 나오지요. 스가랴에도 나오지요. 뱀은 하나님께 직고합니다. 여호수아 더럽다고. 또는 욥이 하나님 믿는 것은 받아 챙긴 게 있기 때문에 믿는다고 항상 마귀는 하나님과 상대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양을 생산한다면 그때부터 양은 뱀의 노림수가 돼버려요.

양은 없어야 되거든요. 만약에 양이 이 땅에 생겨나버리면 이 땅에 목자가 등장해버려요. 목자가 기능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25장 33절에 나옵니다. 목자가 기능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을 자기 심판대 앞에 두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에 속한 인간들은 염소에 해당되거든요.

그러니 본인들이 염소가 안 되기 위한 조건은 뭐냐? 목자를 제거해버리면 되는 거예요. 심판주를 없애버리면 자기가 염소가 안 되잖아요. 염소가 아니고 염소와 양의 구분 자체가 소실되니까 없으니까 어쨌든 간에 이 악마는 성경에 나오는 양을 나 자신과 결부하도록 그냥 방치해버리는 거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액자 해서 예수 믿는 사람 집의 현관에 붙여놓거든요. 그것 몇 만원 하거든요. 이사할 때 선물로 받고. 액자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다, 이 말이에요.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은 그건 굉장히 중요한 대목 아닙니까. 사업하는 사람들이라든지 영업사원들한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시작은 미약은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런 구절들 표구사나 기독교서점에서 많이 팔잖아요. 중요한 것은 본인이 중요하기 때문에 본인이 깨진다든지 상처받는 것을 굉장히 거부합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여기 뱀이 여자의 후손과의 관계에서 뭐가 발생되는가? 상처가 발생됩니다. 이 상처에서 양이 나와요. 그러니까 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은 없어요. 액자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백날 그려도 소용없습니다. 그것 안 먹힙니다. 상처에서 양이 나왔기 때문에 목자가 가진 그 상처와 공히 공통된 상처를 가졌을 경우에만 그 사람이 양이에요. 그 사람에게 주님의 적이 곧 양의 적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21장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이런 말씀하시죠. 베드로야 저 사람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이야기를 했죠. 세 번 이야기하면서 항상 세 번 질문할 때마다 끝자리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내 양을 먹이라”라는 겁니다. 이 말은 양 중에서 목자가 나와요. 양 중에서 목자가 나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목자이면서도 이 땅에서는 상처받은 양으로 먼저 오는 절차와 과정을 예수님의 자기 일대기에 담아버린 거예요.

왜 그랬느냐? 그래야 뱀의 정체가 노출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야 목자가 양과 염소를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게 됩니다. 당한 게 있어야 보복이 성립되잖아요. 당한 게 있어야. 평생토록 아무 일없이 직장생활 잘하고 퇴직까지 했는데 거 뭐 양이 있겠어요. 연금 받고 사시는데. 뭔가 인생을 살면서 지독하게 설움 받는다든지 당한 구석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인간에게 치인 게 있어야 돼요.

사람들과 교체가 되려면 내가 사람인데 양은 없거든요. 양과 목자는 없어요. 그런데 사람은 있습니다. 있음이 없음으로 가려면 여기에 교체되는 transformer라 하지요. 변압기. 교체되는 장치가 시스템이 가동돼야 됩니다. 그 시스템을 이스라엘 초반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유월절의 어린양이라 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5장 6절에 보면 이 어린양을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일찍 죽음을 당한 어린양”이에요. ‘일찍’이란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미리’, 미리 죽음을 당한 어린양이에요.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개역한글)

And I beheld, and, lo, in the midst of the throne and of the four beasts, and in the midst of the elders, stood a Lamb as it had been slain, having seven horns and seven eyes, which are the seven Spirits of God sent forth into all the earth.(KJV)

Then I saw a Lamb, looking as if it had been slain, standing in the center of the throne, encircled by the four living creatures and the elders. He had seven horns and seven eyes, which are the seven spirits of God sent out into all the earth.(NIV)

And I saw between the throne (with the four living creatures) and the elders a Lamb standing, as if slain, having seven horns and seven eyes, which are the seven Spirits of God, sent out into all the earth.)NASB)

그렇지 않으면 있음이 계속 유지가 되는 겁니다. 양은 없는 거고 인간은 버젓이 우리는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는 인간은 성경이라는 약속세계 속에 들어가질 못해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게 전부 다 남의 말이에요. 우리한테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에요. 우리가 양도 아닌데 목자가 의미가 없지요. 그래서 다시 설명하면 목자의 기능은 이 땅을 둘로 분류를 시키는 겁니다. 하나는 염소, 하나는 양. 분류 작업이 바로 심판 작업이고, 이 분류 작업의 근거는 여자의 후손 메시아가 발뒤꿈치가 물렸다는 겁니다. 물린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과 동일한 상처를 갖고 있는 양은, 나 양이다, 할 일 없다가 아니라 주님과 동일한 사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 사명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양한테는 뱀과 전갈을 그 다음에 어떻게 한다고 했어요? 밟지요. 그러니까 이게 내가 이런 예를 몇 번 들어서 지겹기도 하겠지만 또 이야기하겠습니다. 미국의 어떤 도시에서 백인 경찰이 마약한 흑인을 모가지를 5분 동안 밟았잖아요. 그래서 흑인 폭동 났지요. 그 모습, 그러한 밟는 권세를 주는 거예요. 일종에 양이 이 땅에 경찰관 역할 하는 거예요.

어딜 마약을 하고 도둑질해서 차 트렁크 조사하니까 마약 나왔단 말이죠. 이런 범죄자는 용서가 안 돼. 꽉 밟았지요. 5분 동안. 살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 정도하면 내 입장에서 살 것 같아, 죽일 생각 없고 그냥 살려달라고 해서 발 떼보니까 죽었어. 바로 그러한 기능을 양이 하는 거예요. 뱀과 전갈을.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6:12)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쪽수 전쟁이 아니에요. 우리 편 몇 명인지 이게 중요하지 않아요. 공중 권세 잡은 영들과의 싸움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기가 있어야 되잖아요. 무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나 양 공히 무기가 있어요. 무기는 이겁니다. 없음이에요. 공백. 아무 것도 없다는 의식이 무기가 되는 겁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개역한글)

For we wrestle not against flesh and blood, but against principalities, against powers, against the rulers of the darkness of this world, against spiritual wickedness in high places.(KJV)


그러니까 이걸 영어로 하면 nothing 난 아무 것도 아니다가 유일한 무기에요. 이걸 사도 바울 편지에 보면 나는 죄인이다. 이게 무기가 되는 겁니다. 왜? 모든 인간은 이 영토에 이 영역에 들어올 수 없어요. 인간은 잘난 맛에 살아가잖아요.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을 로마서 10장(10:3)에선 자기 의로 살아간다. 같은 말이에요. 모든 인간은 자기 의로 살아가요. 존재감이 거기서 나오니까.

여러분 우리 자신을 알아야 돼요. 우리 자신은 어떻게 구성돼있냐 하면 이걸로 구성돼있습니다. 날 무시하지 말라가 토대가 되어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승부욕이에요. 오직 승부욕 하나 외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순해빠진 인간도 건드리면 와락 달려들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양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어떤 특징이냐 하면 순종이란 게 있어요. 이걸 토속적으로 하면 배알도 없어요. 자존심도 없고 빙신인가, 바보야.

독자적으로 나는 이것 하나 유지하면서 이 맛에 살아간다는 게 없어요. 누가? 양은. 그래서 양은 없어요. 이 세상에 양이 없다니까요. 양이 없으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뭐로 하냐 하면 계속해서 우리가 돌아서면 인간존재, 날 무시하지 말라, 승부욕 이것을 성령이 개입해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사건이 개입하면 일시적으로 뭐가 되느냐 하면 양이 돼버려요. 순한 양이 된다고요.

그래서 악마를 누르는 양의 기능을 악마의 모가지를 밟는 기능을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모가지 밟는 경찰관을 주님이 우리 모가지를 밟아버려요. 그러면 이것은 내가 승부욕, 내가 저 악마를 이기고자 하는 그 생각이 악마적 사고방식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겁니다. 내가 누굴 이기고 지고 이게 주의 일이 갑자기 내 쪽에 와서 내가 존재해버리면 주의 일이 안 되고 누구 일이 되냐 하면 나의 자존심과 관련된 일이 돼버려요. 자존심은 소유, 쪽수 이런 것이 막 발생됩니다. 남한테 안 지려고 안 밀리려고.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이야기하기를 목자장이 올 때 너는 내 양을 칠 때 충성된다는 소릴 듣는다. 겸손히 하라. 다시 요한복음 21장 이야기에 돌아가서 너는 이 사람보다 더 사랑하느냐,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저는 모르겠고요. 왜냐하면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신임할 수 없어요. 언제 후다닥 지금 상황에서는 예수님 사랑하지만 어떤 다른 상황에서는 자기가 장담을 못해요.

주께서 사랑하신다는 데, 사랑이 뭔지 알아야 돼요. 사랑이란 자세히 보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들 다 해보셨으니까 잘 알겠지요. 자세히 보는 것. 앞에 뭐가 있어요. 자기 것을 자세히 보는 게 사랑입니다. 이게 성경에 보면 아가에 나오지요. 아가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조목조목 다 따져서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름답고 흐흠 냄새도 맡아요. 무슨 이런 향기가 나느냐, 도대체 화장품 뭘 발랐어요? 조목조목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그렇게 살펴보는 거예요. 자기 거니까.

그런데 거기에 술람미 여인도 솔로몬과 똑같이 하는 거예요. 개도 아닌데 맡아가면서 이렇게 향기로울 수가. 그러니까 아가서에 나와서 서로가 탐색의 대상이 되면서 그러한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의 원천을 뭐로 보느냐 하면 사랑이라 보고요. 그 사랑은 뭐보다 크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진노, 죽음보다 세다고 나와 있어요. 아가서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둘이 서로 사랑하는 순간 죽음의 공포가 날아가 버린 겁니다. 죽음의 공포가 날아가 버렸다는 말은 그 원천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은 뭐보다 세다 했습니까? 죽음보다 세지요. 마치 질투와 같다 했는데 죽음보다 세다 이 말이죠. 죽음보다 세다면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은 무엇과 맞닥뜨리고 무엇과 만나야 돼요? 늘 죽음과 만나야 돼요.

그래서 죽음의 세계가 바로 오늘날 인간들이 말하는 이 세상입니다. 죽음의 세계. 다 죽는다는 그것도 맞지만 다 죽는 정도가 아니고 죽음으로 협박하고 겁박하는 세계, 죽음으로 우리를 밀어붙이는 그 세계 속에 주님이 오신 거예요. 유월절 어린양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은 그냥 양 한 마리 존재한다고 카운트된다고 어린양이 되는 게 아니에요. 어린양이 되려면 죽음을 당해야 어린양이 돼요.

그러면 여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마련돼 있어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애굽의 권세잖아요. 애굽의 권세가 바로 오늘날 이 세상이잖아요.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다녀가셨습니다. 그러면 양도 이 땅은 그냥 다녀가는 처지에 있어요. 왔다가 다녀가는 거예요. 오뎅 뜨거운 물에 빼서 먹는 거예요. 주님께서 자기 양식이니까 집어넣었다가.

안 집어넣으면 맛이 없어요. 푹 익어야 돼요. 주님이 흘리신 그 피 속에 우리가 푹 익어줘야 돼요. 피가 스펀지처럼 우리의 속속들이 스며들어 배겨야 돼요. 이게 무기에요. 전신갑주라니까. 악마를 이기는 전신갑주는 해결했다는 겁니다.

악마가 우리에게 겁박을 주기 위해서 죽기 무섭지. 내 말 들어. 네가 소멸하게 되면 하나님이고 예수고 소용없어. 너는 너 자체를 지탱해야 돼. 그게 너한테 최종적인 의미야, 라고 그렇게 거짓말했던 이 세상에서 나 죽을래. 나 그냥 다녀갈래, 라는 식으로 올 때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처럼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표적지를 잃어버린 거예요.

사격장에서 돈 주고 사격하려하니까 바람이 불어서 표적이 날아가 버렸어요. 쏠 게 없어요. 그래서 양은 공백입니다. 양은 빈자리에요. 나라는 육신은 멀쩡하게 있지만 표적지가 뭐냐 하면 이미 죽은 자라는 표적지를 갖자 붙이는 겁니다. 표적지를 붙이면 세상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각자 자기 의로 장착돼있지요.

그러면 나는 이러한 의로움이 있고 잘남이 있는데 너는 각자 갖고 있는 잘남과 의로움은 어떤 게 있는가, 내놓고 누가 더 잘났고 누가 더 의로운지 선한지 한 번 배를battle 해보자고 나오지요. 그런데 율법이 쏘는 것은 사망이란 말이죠. 법으로 따지는 거예요. 누가 잘났는지 누가 법을 많이 지키고 누가 성경대로 사는지 해보자는 거예요. 개뿔도 없어요. 세리와 창기가 천국 가요. 없어요. 강도가 천국 간다고요.

거기에 대한 무기는 뭐냐? 없다. 여기에 대한 유명한 사자성어? “영구 없다” 영구 없다, 까꿍. 없어요. 사람은 있지만 내세울 게 없다니까. “네가 이렇게 하면 죽어. 이렇게 하면 너는 사람한테 비난받는 거야. 이러면 이 세상에 퇴출이야.” 라고 협박을 하는데 협박이 먹힐 사람한테나 먹히지 먹히질 않는 거예요. 내세울 게 것은 오직 십자가 피만 자랑하는데 그 앞에 먹힐 게 뭐가 있어요, 먹힐 것이.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멋있게 이기는 것은 나중 문제고요. 이러한 마귀로부터의 다툼과 충돌은 늘 주님 앞에서 양 되는 우리 안에서 주님과 세상과의 충돌현상이 매일같이 우리 안에서 벌어져야 돼요. 매일같이. 그래서 어느 강의에서 그랬지요. 매일우유라고요. 아침 되면 늘 현관 앞에 배달되는 우유 있잖아요.

매일같이 주님께서 현관 앞에 내 마음 앞에다 예수님의 유월절로 인한 피를 배달시키는 겁니다. 오늘도 세상에 나갈 때 이 마음 가지고 가라고. 배달 안 되면 나의 양됨으로 무가 삼으려 하는 거예요. 덤벼라, 이런 식으로. 이건 승부욕이죠. 나 양인데 덤벼라. 아무나 붙자. 이단들아 나와라. 여호와증인, 신천지 나와라.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신천지 나오라 하니까 주님께서 손가락으로 우리 대가리 밀어요. “니나 잘하세요, 니나. 니가 이단인데 뭘 또 이단이야. 니나 잘하세요, 니나. 신천지 걱정하지 말고. 왜 괜찮은 사람 따로 모아서 새로운 영토 만들라고? 우리는 다 거듭난 사람이다. 그것 만들려했지? 니나 잘하세요.”

자기 것으로 인하여 주께서 자세히 보는 거예요. 그것을 위해서 성경에 이런 아주 결정적 단어가 나오는데 우리는 그 단어를 잘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무슨 단어냐 하면 “친히” ‘친히’란 말로 인하여 양은 철저하게 수동적 존재입니다. 능동이 없어요. 친히는 누구 담당이냐 하면 주님은 주님 담당이에요. 여호수아에 나오는데 한 번 볼까요. 여호수아 24장 17절 누가 읽어보세요.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개역개정) 
이것은 시작을 누가 개시했느냐 하면 주님이 개시한 거예요. 왜? 양이 없으니까. 그리고 주님이 목자가 되려면 아무도 주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야 돼요. 그래야 주도권을 베드로가 못쥐고 사도 요한 쥘 수가 없어요. 친히 되시는 목자가 쥐는 거예요. 철저하게 양은 목자에 종속돼야 돼요. 수동적으로.

그래서 베드로도 요한도 목자를 치니 그 다음에 뭡니까?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양이 자기 자신을 내세울 게 없는 이유가 뭐냐? 양의 주특기가 뭐냐 하면 흩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이사야 53장에 보면 양의 특기, 양이 하는 본성이 뭐냐 하면 제 갈 길을 알지 못하는 것.

제 갈 길을 알지 못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창녀처럼 온 이리 떼들은 양이 오는 길목을 기다려서 전부 다 뜯어먹고 잡아먹기 위해서 길목마다 자기 의로움이라든지 소유를 장려시키고 그걸 키워주겠다는 상품을 걸고, 쉽게 말해서 복 받겠다.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복 받게 해줄게요. 천당 가게 해줄게요. 그런 식으로 길목을 지켜서 사람들을 유인하는 거죠. 유인하는 사람도 나쁘지만 문제는 유인당하는 사람도 나빠요.

뭐 때문에 그래요? 소유성 때문에. 인간의 소유성, 내 것 있다. 내 것이 있어서 주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사랑이 자기 사랑밖에 없으니까 누가 누구를 살핍니까? 내가 내 것을 자세히 살피면서 그것 사수하는 데 일생의 모든 정력을 거기다 다 소비하는 거예요. 내 것. 특히 연세 많은 분은 내 연금. 아 참, 연금이 주님이에요. 나 이것 없이 못 산다, 죽는다는.

따라서 지금까지 한 강의의 흐름으로 봐서 양과 그리고 목자의 등장에 있어서 뱀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뱀이 원하는 세상은 뱀이 발견되지 않는 세상을 원해요. 뱀의 역할이 전혀 없는 세상. 그러니까 이게 목가적이고 평화롭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시편 23편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굉장히 정갈하고 안정돼있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갑자기 위로가 확 밀려오고 치열한 전쟁이란 생각은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느낌, 사랑 못 줘서 환장했다는 느낌, 그럼 나는 그냥 나의 것을 견지하면 그게 만사 오케이란 느낌을 팍 줘요. 시편 23편을 좀 더 나가보면 거기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오지요.

이것을 시편 23편을 누구 입을 통해서 이 예언이 나오게 했습니까? 다윗이죠. 그래서 뱀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다윗시대의 뱀은, 뱀은 하나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윗에게 뭘 주느냐 하면 상처를 줍니다. 여기서 오늘 양의 핵심이 나옵니다. 양이 양 되기 전에는 보통 인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해버리면 양은 아무 연고 없이 이유도 모르는 채, 참 이게 중요한데요. 이게 하나의 복음이고 영적 무기입니다.

“이유도 모르는 채” 이유를 몰라요. 내가 왜 인생 이렇게 살아야 되지, 이유를 아무리 찾아내도,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난 왜 이렇게 살아야 돼. 왜 내 몸 아파야 되고 저 사람은 멀쩡하고.” 그 이유를 인간의 입장에선 알아낼 재간이 없어요. 이걸 만약에 알려주게 되면 분명히 수상한 사람이에요.

내가 왜 사는지 이런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상처를 받을 때 비로소 자기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왜 상처받아야 되느냐, 그 이유는 없어요. 마치 욥이 고난 받을 때 욥이 그렇게 알고 있는 신학지식과 모든 상식과 교양과 품성과 품격을 다 고안해서 하나 얻고자 하는 것은, “주님이여, 제가 왜 고난 받아야 됩니까?” 문제만 던지지요. 전혀 해답은 없어요.

이런 것은  <고맙소>란 노래 가사에 나옵니다. 나는 상대방에게 정성을 다했는데 상대는 나에게 뭐만 준다고 했습니까? 상처만 주네. 내가 이 세상을 잘 몰랐나 보다. 나는 진심을 다했는데 상처의 반대말이 그 사람한테는 뭐가 돼요? 진심을 다하면 뭐가 안 온다? 설마 상처가 오겠냐고 생각한 게 착각이었습니다. 진심을 다하면 상처할 때 상처가 이게 내가 몰랐던 정답이에요. 이게 진심이에요. 이게 진리에요.

우리는 상처받아야 됩니다. 왜? 상처를 받고 거기에 대해서 왜 상처받지 않고 의문과 질문이 나오는 순간 우리는 처음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거든요. 나는 죄인인 줄 모르고 최선을 다하여 그나마도 남보다는 더 성실하게 바르게 살려고 애썼는데 이게 뭐가 죄가 되느냐고 버텼지만 주님이 뱀에게 물린 그 상처를 공동체험으로 우리에게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 안으로 초청받은 것을 축하드립니다. congratulation! 축하드립니다.

질문에 내가 뭐뭐 라고 시작했던 질문, 나는 무엇이다, 나는 뭐가 될까요? 했던 것은 이제는 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상처는 나에게 어떤 식으로 장착되고 나의 본질입니까?” 질문의 주어가 상처가 돼야 돼요. “주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나를 활용하고 어떻게 다루십니까?” 이게 정답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서 사랑을 언급할 때 나는 나를 모르니까 아시는 분이 주님이, 자기가 고기 잡으러 갔잖아요, 주님 부활하고 난 뒤에. 찾아왔다는 말은 뭐예요? 주님이 요한복음 13장인가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한다 했거든요. 사랑은 자기 것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도권가 베드로가 주님께 넘겨버려요. 사랑은 주님 쪽에서 했기 때문에 주님이 아실 거예요, 하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내 양을 먹이라.”

양을 먹이는 방법이 뭐냐? “네 뜻대로 되지 않는 코스로 인생을 마감할 것이다. 네가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는 것은, 이 말이 주님의 길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베드로가 양을 먹이는 목자의 기능을 하려면, 목자의 기능입니다. 목자는 주님 밖에 없어요. 목자의 기능을 할 때는 항상 누구하고만 의논해야 된다? 사랑하시는 분만 생각해야 돼요.

근데 베드로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원치 않는다 하니까 살짝 손해 본 느낌 들어서 옆에 보니까 누가 있느냐 하면 사도 요한이 있거든요.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저 사람이 오든 말든 니가 왜 신경 쓰느냐? 너의 책임자는 나야, 나. 나라고.” 사도 요한과 견주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말란 말이죠. 나라는 거예요, 나.

이 사상은 이 생각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비슷한 이야기했지요. 고넬료 파가 어떻고 베드로 파가 어떻고 바울 파, 예수 파 있는데 사도 바울은 분명히 했어요. “내가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 졌느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말은 목자는 따로 있기 때문에 나는 같은 양의 입장이기 때문에 양이 양을 위해서 십자가 질 수 없다는 조건 하에서 양이 되고 목자가 돼야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나는 너를 구원하는데 있어서 어떤 기여가 전혀 없었다는 조간 하에 목자가 돼요. 한시적으로. 나 당신을 위해서 심방 가고 새벽마다 얼마나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얼마나 고생하고 당신 교회 안 나올까봐 열 번 더 찾아간 것 아시지요. 당신 자식 공납금 없을 때 공납금 대주고. 이래도 교회 안 나오고 다른 교회 갑니까, 이런 의식 이건 뭐 장사지요, 장사. 자기 존재감 드러내기 위해서 주의 종 맞는지 확인차원에서 사업한 거예요. 사업 벌인 거예요.

출발점을 내가 또는 나는 무엇이다가 되면 이 자체가 안 된다니까요. 나는 주의 종이다, 나는 목자다, 나는 양 이 자체가 성경자체의 개념과는 연결이 안 돼요. 상처가 나를 어떻게 사용하고 이용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제자는 주님한테 농락당하는 거예요. 가룟 유다도.

가룟 유다 보고 하시는 말씀이,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그럼 왜 태어나게 하셨어요? 본인이 태어나게 해놓고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그럼 그 입장에선 너무 억울한 거예요. 주님이 가룟 유다 있으면 억울하냐, 억울해? 피조물 주제에 뭘. 피조물 주제는 자기를 억울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러한 권한 자격이 없어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둬가는 것도 하나님인데 우리가 악마한테 교육을 너무 잘 받아서 따지는 것만 교육받은 거예요.

우리는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최선만 생각하는 거예요. 최선을 다했는데 뭔가 얻어내는 국물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육받은 것이 그 사고방식이에요. 얻어걸린 게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주께서 “그것 가지고 뭐 할래?” “독자적으로 살렵니다.” 그게 바로 마귀에요. 독자적으로 사는 것. 나는 나 있음 그 자체, 그걸 증명하기 위해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든 어디든 세상이든 안 위험한 곳이 없어요. 다 시험의 장소에요. 테스트 받는 장소입니다.

자, 이번에 생각할 것은 뭐냐? 뱀의 역할이에요. 뱀의 역할은 무는 역할이에요. 이것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세기 49장 17절 보게 되면,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는 거죠. 무는데 의도가 있어요. 물어서 땅과 멀어진 존재를 땅과 밀접한 존재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쉬운 예를 진화론 과학이죠. 영적 것을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 영적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모든 것을 과학으로 다 풀어버리는 거예요.

땅에 딱 밀착된, 저는 그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스티커에요. 잘 안 떨어져. 스티커 또는 바퀴벌레. 이걸 어느 강의에서 인간은 표면적 존재다. 만날 하는 게 기어다는 것밖에 안 해요. 표면을 기어 다녀요. 캐나다 이민 갈까? 한국에 기어 다니다가 캐나다 거기 가서 기고 있는 거예요. 온갖 허드렛일 다하면서. 여기 미국 다녀온 사람 없으니 마음 놓고 이야기한다만 맨 거기 가서 기는 거예요. 표면적 존재에요.

너는 땅을 벗어나서 못 살아. 땅이 너를 인간으로 대우해주는 거야. 만약에 땅이 대우 안 하면 대우할 데가 없어. 그게 뭐냐 하면 양의 배후에는, 양의 배후 또는 양은 뱀과 더불어 나타나니까 목자, 양의 배후, 뱀의 배후는 이게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이것이 바로 영토적으로 해석해야 되는 거예요.

개인의 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고 네 자리, 원래 있던 자리와 자리의 지형적 충돌이에요. 그래서 지진이 일어나는 거예요. 대륙판과 해양판이 지구 내부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맨틀 위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땅이 갈라지잖아요. 그래서 양은 충돌에서 나오는 거예요. 목자도 충돌에서 나오는 거예요. 충돌이 없으면 그거는 너무 목가적이에요.

그래서 다윗은 끊임없이 사울로부터 뭘 당합니까? 애매한 이유도 없는 충돌당하는 겁니다. 다윗이 사울 죽이려고 따라 다닌 게 아니에요. 반대에요. 사울은 이유가 없어요. 사울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다윗 만나면 미안하다 하고 헤어지면 죽이고. 연예인 씹는 유튜버 사람들 같아. 당사자한테 미안하다 하고 돌아서서 또 쳐서 이런 인간이었다, 인간도 아니었다. 만나서 미안합니다, 하고 이게 뭐예요?

자, 가인도 마찬가지고 아벨도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정이 없고 싸웠다. 이런 것 없어요. 그냥 가인과 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지요. 형이 먼저 하나님께 제사 드렸는데 안 받고 그 다음에 동생 제사는 받았잖아요. 그것 때문에 동생 입장에서는 아무 연고도 없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어제 설교한 것처럼 인간에게 죽음 세계라 하는 것은 목숨 붙어있는 것과 없는 세계를 대등한 대립세계로 보는 거예요. 하지만 죽음이 삶의 일부고 삶이 죽음의 일부가 된다는 식으로 세뇌하고 가르치고 그걸 납득시키는 세계, 이게 바로 과학의 세계고 인간 초등학문의 세계, 철학의 세계입니다. 둘 다 표면이에요.

중첩되지 않아요. 지금 함께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중첩된 현실관이 없어요. 살다 죽으면 천당 가겠지. 아니에요. 이미 하늘나라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죽어도 지옥 갑니다. 이미 성령 안에 있는 사람, 그러니까 하늘나라 미리 와있지 아니하면 가도 소용없어요.


10분 쉬어야 되겠지요.

 

20210510b 부산강의 : [시편]38(23편)-양의 출처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양보 없는 충돌했지요. 양보 없는 충돌, 서로 두 지평이 양보 없어요. 갑자기 인간의 얼굴만 보이다가 키가 얼마 몸무게 그것만 보이다가 보이지 않는 지평선, 영역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벌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신앙이란 것은, 주님은 주님의 상처를 품고 있는 그러한 지평, 지층 또는 거대한 판때기, 판이라면 여기는 상처 있음, 이건 뭐냐 하면 상처 없기를 바라는 그러한 지평과 지층.

상처 없는 걸 세상에서는 간단히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행복 또는 행복 지향적이다. 몸 편하고 배부르고 그거거든요, 이게. 몸 편하고 배부르고, 몸 아픈데 없고 배부르고, 건강하고 행복하고. 건빵 아니고 건행. 행복 지향적이죠. 제발 나를 그냥 두세요. 나한테 시비 걸지 말고. 독립적이죠. 독립적이고 자립적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1장에 보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짐승들이 나와요. 소와 나귀 나오죠. 여러분 안 찾아봐도 아시겠지만 찾아 읽겠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1장 4절에. 그 앞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주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친히 먼저 발췌해서 먼저 생각을 해서 자기 백성을 만들어놨는데 이 이스라엘은 소나 나귀보다 더 못하다 이 말입니다. 뭘 잃어버렸어요? 주인을 잃어버렸어요. 종속되고 의지해야 되거든요.

집에 개를 키우는 사람의 보람이라는 것은 그 개가 철저하게 주인에게 종속되는 그러한 보람으로 키웁니다. 주인이 개 키울 때는 개 속에서 자기가 친화적인 것을 발견하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개를 키워요. 그러니까 더러운 똥도 치워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요소가 발견된다는 그걸 기대하면서 개를 키웁니다. “너는 왜 이렇게 나한테 순종하고 순해. 순해빠졌어.” 이 말은 뭐냐? 나 계속 너 키우고 싶다 그런 것이거든요. 나 네 주인이고 싶다 이거잖아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랑이라 하는 것은 자기의 것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 책임지겠다는 말이죠. 그런데 인간은 태어나면서 악마와 결탁해서 독립적이고 자립적이기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배신해버립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2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늘에 태양이 둘이 될 수 없잖아요. 이걸 어제 낮 설교에서는 나는 어떤 경우라도 남이 될 수 없는 거예요. 너무나 당연하고 간단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구원될 수 없는 겁니다. 이 나는 구원의 대상이 아니에요. 내가 구원될 수가 없습니다.

주께서 성령을, 믿음을 선물로 줄 때는 노림수가 있어요. 그동안 이유가 순종이 안 되고 예속된 인간을 뒤에서 악마가 그런 식으로 시켰지요. 이걸 부셔버려야 철저하게 하나님의 철저한 종이 됩니다. 순응적이 되지요. 이 성질머리를 주님께서는 가만두지 않습니다. 양 같으면 목자를 증거 해야 될 양의 역할인데 양이 지 잘난 양을 증거 해버리면 이것은 전혀 주께서 원한 양이 아니지요.

그래서 교회에서나 어디에서나 뭐가 문제냐 하면 양과 양이 만나는 게 문제에요. 양과 양이 만나게 되면 서로가 서로한테 기댈 생각해요. 기대게 되면 그 중량감 때문에 피곤해요. 덥다, 좀 떨어져라. 그런데 자꾸 뭔가 괜찮다고 기대고 싶어. 떨어져라 해도 자꾸 기대고 싶어요. 힘들어요. 양과 양이 만나면.

그때는 중간에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목자가 중재를 해야 돼요. 목자가 중재해서 반갑다 친구야, 되려면 항상 목자가 개입해야 돼요. 둘 다 똑같은 인간끼리 뭘, 이게 돼야 된다고. 가정 가운데 가장 행복한 가정은 뭐냐? 둘 다 성령 받은 가족, 드문 경우지만 진짜 생각만 해도 짜릿합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둘 다 못났음을 자랑하는 가족, 둘 다 서로를 보면서 당신은 나에게 과분하다는 것을 행동, 태도, 말 전부 다 온몸을 다하여 난 당신의 영원한 종이 되고 싶어, 딸랑딸랑.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게 대하는 것, 목자가 개입할 때 상대에게 자기가 투자한 투자액을 찾지 않는 사람, 서로에게. 내가 너한테 해준 그 공적을 보상 안 받으려고 하는 그거에요.

숫자로 하면 둘 다 0제로가 되고 제로 사이에 1이 있다면 1의 완결성, 1의 최종성에 순응하고 거기에 순종하는 사람, 이 가정이 최고의 가정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봐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딴 게 아니고 서로의 종이 되라, 서로의 짐을 지라 그런 게 있거든요. 그럴 경우에는 뭐냐 하면 더 이상 내가 나라고 안 하겠다고 포기하는 거예요. 두 분 그렇게 사시지요?

당신 앞에서 나를 지워버리는 거예요. 이거는 김수희가 이미 이야기했어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그리 작아지는가” 이미 우리나라도 많이 전했잖아요, 그 노래가. 충돌이 있을 수가 없어요. 작다는데 큰 것과 골리앗과 싸워서 뭐합니까. 내가 알아서 기는데, 졌다 했는데. 여자가 남편한테 잔소리하게 되면 남자가, “그 모습도 왜 그리 아름다워.” 이러면 끝난 문제에요. 아무 문제 될 게 없고 끝난 문제에요. “나 당신 같은 사람 쫓아낼 거야.” 하면 “그 쫓아내는 행위도 난 존경스러워.” 이렇게 이야기해버리면……

그런데 이것이 지식이 아니고 지식이 있더라도 실제로 자극이 되게 되면 실제로 건드리게 되면 잠자는 난 벌써 복음 알았기 때문에 나는 없다고 여겼던 그것이 건드리니까 발작을 일으킵니다. 갑자기 이렇게 벌벌 떨고 감히 내가 너한테 다이아반지 해줬는데 감히 지금 와서 벌벌, 가방 사줬는데 벌벌 떨어요. 발작을 일으켜요.

그걸 노이로제라 합니다. 신경 증세라 하는 것은 생각이 몸의 증세로 나타나는 것을 신경 증세라 해요. 정신분석학에선 그렇게 해요. 이건 본인이 어쩔 수 없어요. “여보, 식사하세요.” 평화로울 때는 그렇게 되잖아요. 발작을 일으키면, “여-보- 식사하세요.” 속으론 죽여 버릴까? 이것을 숨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나는 비어있지만 빈자리를 주님이 야기한 주님이 밝혀낸 이 세상의 구조가, 양과 염소의 구조가 아무 것도 비어있는 내 안으로 사건화 되어서 내 안에 내용으로 채워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데요.

열왕기상 21장 1절에,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에(이스라엘 약간 북쪽에 있는)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에서 가깝더니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 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지금 나봇이 포도원이 있는데 포도원이 그 당시 아합 왕, 최고 권력자가 보기에는 그 포도원은, 포도원이라는 영토 있잖아요. 영토는 주인이 누구냐 하면 나봇으로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나봇 거라 하는 거예요. 그러나 나봇은 이 땅에 내가 실린 게 아니고 나는 종이고 여기 여호와가 여기에 살고 있다, 여호와의 기업에 여호와가 살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자기도 땅이 자기 땅이 아니니까 자기 땅 같으면 팔겠는데 자기 땅이 아닌 거예요. 하나님의 유산으로 기업으로 상속받은 거예요. 상속받았기 때문에 팔 수 없는 겁니다.

오늘날 이걸 성도 입장에서 하게 되면 너 예수 믿지 말고 교회 가지 말고 십자가 믿지 말고 나랑 산에 가자고 한다면 그렇게 이야기하는 불신자 남편을 여자는 한 몸으로 보지만 복음을 아는 성령 받은 성도는 아내는 자기 영토에 누가 마련해준 거예요? 주님께서 했기 때문에 자기도, “잠깐만 주님한테 물어보고 이야기할게.” 이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원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에 숟가락 하나 얹은 것밖에 안 되니까 내 팔자, 내 운명이 내가 조성하고 내가 만들어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나 불신자 입장에서는 자립적이고 자존적이기 때문에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 의지로 모든 것을 개선이 가능하다고 본 거예요. 이 불신자 남편이.

그러니까 불신자가 교회에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걸 내 결정에 의해서 된다는 거예요. 내가 믿고 안 믿고 내 마음이라는 거예요. 이 불신자 남편 이야기할 때 진짜 신자는 내가 천국 가고 지옥 가고 그게 내 마음대로 될 것 같으면 내 마음대로 하겠는데 나 천국 가고 싶습니다, 나 지옥 안 갈래요. 에이 천국도 따분하다 지옥 갈래. 이게 내가 결정할 문제 같으면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게 내 손을 떠나버렸어요. 내 팔자, 내 운명 자체가 없어요. 영토와 영토의 충돌이거든요.

그러니까 아합 왕의 부인이 있지요. 이름이 이세벨입니다. 이름만 봐도 얼마나 미인인 걸 알잖아요. 이세벨라, 이세벨 이 이름치고 못 생긴 여자가 없어요. 내가 너무 편견이지만. 이세벨라 유명한 영화배우들 많이 있잖아요. 이세벨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이자. 지금 죽이면 포도원 가져올 수 있다. 죽이자. 죽였지요. 종은 죽였는데 주인은 못 죽인 거예요. 주인이 누굴 죽이느냐 하면 이세벨을 죽여 버립니다.

바로 이러한 순환구조, 엮여진 순환구조 그래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종이 받은 상처를 주인이 보복해주는 이 순환구조의 세계가 오늘날 현실세계에요. 건들지 말아야 될 자를 건드린 거예요. 이 나봇이, “나와라. 나는 여호와와 함께 있다. 덤벼라.” 이러질 않았잖아요. 막 시민운동하고 우리끼리 연합해서 이 정권을 물리치자, 그런 것 안 했지요.

죽이겠다는 결정을 누가 했습니까? 아합과 이세벨이 했지요. 했는데 나봇은 그 결정마저도 누가 했다? 주께서 허락하신 걸로 받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미 이 포도원 안에서 나봇은 여호와 앞에서 죽은 자에요. 죽음이 더 이상 협박용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이런 나봇의 죽음 사건이 성경개념에 나와 버리면 사람들은 그 대목을 침 발라서 빨리 넘겨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성경개념을 나의 존재를 견고히 하기 위해서 차용을 해야 되는데 죽음 나오니까 이건 나중으로 미룹시다. 이건 믿을 좋을 때 믿을게요. 후딱 넘어가버리거든요. 성경에서 최종적인 것은 죽음입니다. 나머지 곁가지 소용없어요. 날 위해서 죽을 수 있는지 묻는 게 아니고요. 이미 너는 나를 위해서 죽은 존재로 보는 거예요.

우리 쪽에서 새로 결심할 게 남아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 것도 결심하지 마세요. 그냥 사세요. 그냥 사시면 사건이 계속 주어질 겁니다. 그 사건이 나를 자극시켜서 분명히 나는 양이고 주님은 목자라고 알았는데 그 사건 오는 순간 그 다음에 뭐가 되느냐? 크게 쓰겠습니다.

“내가 나에게 상처를 주네.” 이게 인간으로 태어난 해답입니다. 내가 나에게 상처를 줘요. “이 쪼다야 한 평생 동안 뭐했냐. 남들은 인간처럼 사는데 네가 인간이야 짐승이야.” 내가 나를 핍박을 해요. 꼴 보기 싫어해요. 내 인생이 원망스러워요. 자기 인생 원망해놓고 혹시 주님께서 나무랄까 싶어서 주님한테 이야기는 아니고요, 내 인생.

이러면서 나오는 왜곡되고 조작된 고백이 뭐냐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 제발 이런 소리하지 말라고 저는 제발 이런 소리하지 마세요. 이것 한다고 점수 더 받는 것 아니거든요. 이상하게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게 꼭 주님에게 압력 넣는 것 같아. 나 죄인인 줄 아니까 뒤에는 모기소리만큼, “제발 이것만은 이뤄주옵소서.” 내가 알아서 길 테니까 이것만 이뤄달라는 뭐 있어, 뭐 있다고. 이것 눈치 채야 돼요.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것 같아.

내가 나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육신의 몸을 우리는 범죄 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죽을 때까지 동거해야 됩니다. 나밖에 모르는 이 이기심과 동거해야 돼요. 그래서 남 탓할 수도 없어요. “인간은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다.” 인생이 이렇습니다.

나는 생각 안 해야지. 그럴 필요 없어요. 인간은 생각하게끔 돼있어요. 인간이 생각하는 게 아니고 생각이 인간을 생각하게끔 유도하게 돼있습니다. 인생은 존재가 아니고 흐름이에요, 그냥. 바람 같은 거예요. 한시라도 인간은 멈출 수가 없어요. 뭘 해야 돼. 촌에 팔십구, 구십 가까이 된 어머니가 일하는 것 보고 용돈 줄 테니 일하지 말라 해도 일하지 않는 게 더 징역살이 같아요.

자식 눈치 보고 호미 하나 들고 가서 뭐라도 합니다. 하다가 두 바퀴 굴러서 엄마는 다리 부러져서 병원에 있고 자식들은 엄마가 원망스러워서 일하지 말라 했잖아요. 일 많이 해서 우리 공부 다 시켜놨으니까 호강하셔야지. 일 안 하려했는데 심심해서 나왔다 이렇게 두 바퀴 굴러서 다리 부러져 있고 그 다음부터 자식들은 반찬 해댄다고 고생 더하고. “아이고, 지겨워, 지겨워.”

그렇게 인간은 멈출 수가 없어요. 멈출 수가 없다는 것이 인간은 흐름이라는 것, 이미 인간은 사건에 말려든 거예요. 충돌사건. 하나는 뭐냐 하면 주님의 계획과 버티기에 나가는 악마의 고집, 이것이 충돌사건을 일으킵니다. 악마는 우리 인간을 통해서 계속해서 협박과 회유를 합니다. “네가 중요한 거야. 누구도 너를 대신할 수 없어. 주님이 너한테 밥 먹여줘?”

이것을 누가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내 속에 내가 이야기한다니까. 너 장로로서 20년 했고 교회 복음 안 뒤 50년 됐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좀 쉬어. 이제는 예수 말고 딴 것 즐기라고 계속해서 나의 나다움을 고집하게 만들어요. 우리의 사명과 주님에 대한 역할, 영적인 싸움, 무기 다 그딴 것 생각하지 말고 말씀은 주님이 지키고 나는 놀기만 하라고 자꾸 압력을 가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획은 뭐냐? 아까 멈추지 않지요. 그리고 멈추지 않는 것이 시편 95편 7절에 나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자, 우리보고 양 되라 했습니까, 백성 되라 했습니까? 아니지요.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어요, 누가 자기 계획을 중단 없이 펼쳐나가십니까? 주님이죠. 하나님이죠. 우릴 지으신 분이 주님이 우리를 그냥 양 되게 하고 백성 되게 하시는 거예요. 이걸 우리 안에서 멈춰지질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뭐냐 하면 실컷 당하세요. 악마한테 그런 회유를 받고 실컷 당하세요. 그 당하는 가운데서 이게 죽음이거든요. 심판이거든요. 실컷 당하고 난 뒤에 죽음 속에서 생명의 힘으로 사는 거예요. 생명의 힘을 발견하는 거예요. “아아, 이거는 내 일이 아니구나. 내가 나를 지탱하는, 유지할 수 있고 기도 빡세게 하고 금식한다고 뭐가 되는 게 아니구나.

나는 포기하는 늘 막장 인생, 마지막 포기, 주님이여 그동안 사랑해준 것 고맙습니다만 저도 지쳤습니다. 저도 할 만큼 했는데 우리가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그럴 때 비추는 것이 뭐냐? 나는 죽음이요 주님은 생명이에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주님은 생명이 되고 나는 항구요. 나는 무능력자요 무능력자를 살리시는 주님만 찬양합니다. 일체 주님의 행동에 우리가 절대로 섞여서는 안 되죠. 섞여서는 안 되는 겁니다.

악마는 계속 살아 있어야 돼요. 그래야 계속 우릴 자극해야 될 기능을 해야 되니까. 주님의 지속적인 작업에서 주께서는 처음에 이야기한 양과 목자의 개념은 성경의 개념은 주님만 손댈 수 있지 우리는 손 못 대지요. 따라서 주님께서는 악마의 활동을 허락하심으로써 무슨 개념을 끄집어내느냐? 엉터리 목자 개념을 끄집어냅니다. 엉터리 목자가 있어줘야 그 다음에 양도 생기고 진짜 목자가 등장하거든요.

에스겔 34장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아예 이스라엘 목자란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경에 목자라는 개념이 있으니까 그들은 이스라엘 존재 자체를 견지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말씀에 입각해서 그 성경개념에 입각해서 목자 위치를 만든 거예요. 스스로 자기들에게 인간들끼리 직분과 지위를 만든 거예요.

이게 어렵지 않지요. 오늘날 교회가 그거 아닙니까. 목사는 목자로 바꾸지요. 이 교회는 그게 없지만 약간 큰 교회 고딕건물에 가면 무슨 실이 있습니까? 목양실이 있지요. 참 목양실에서 화투 치는가 모르겠어요. 침대 있는가. 목양실이 있어요. 여러분 목자도 없고 양도 없어요. 그거는 사건을 일으킬 때 목자, 양이 함께 동반되어 등장하는 거예요. 한시적입니다. 사건 수그러들면 목자, 양도 없어요.

뭐만 있는가? 에스겔 34장에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리 나오고 염소 나와요, 숫염소. 34장 17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떼 너희여 내가 양과 양의 사이와 수양과 숫염소의 사이에 심판하노라” 이스라엘을 화답해놓고 이스라엘이 얼마나 성경의 내용을 가지고 코스프레 하는지 조작하는지를 다 허락하시는 거예요. 그래야 악마의 세계가 이스라엘에 합류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3절에 보면,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니까 이스라엘 엑기스가 유대나라에요. 유대나라가 집약하고 압축이 되니까 거기서 뭐로 확실해졌다? 뱀의 공동체에요. 악마의 크리스털, 악마의 정수, 엑기스, 핵심. 인삼 엑기스 있지요. 숟가락으로 퍼먹는 것. 악마의 농축액이 종교란 이름으로 국가란 이름으로 오늘날 교회란 이름으로 응축이 돼있습니다. 그렇게 하게 하신 것은 멈출 수 없는 주님께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렇게 악마가 악마 짓을 해줘야 결정적인 상처가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여기 방금 유대나라는 뭐로 봅니까? 악마의 농축액이죠. 그러면 여기에 농축액에 대해서 농축액을 뚫고 이건 아니지, 라고 덤벼든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열두 제자 중에서 아무도 없지요. “누구야? 예수님을 그렇게 하다니.” 그렇게 나와 봤자 악마가 씩 웃습니다. “나, 너 알거든. 뭐 어디…”

그리고 주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 있지요. 주님한테 혜택 입은 사람들 있잖아요. 병 고침 받은 사람들, 혜택 있어도 결정적인 건 뭐냐 하면 실제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했느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제자들도 안 믿었으니까. 심지어 마리아 3인조 있지요. 야고보 어머니와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3인조도 부활을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까? 안 믿었지요.

왜? 인간의 한계는 부활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그 자체가 한계에요. 인간은 어디까지나 인간입니다. 그 점을 우리가 잊지 마세요. 나는 인간이에요. 인간은 믿음도 없고 부활도 믿을 수 없는 게 인간임을 날마다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내가 나에게 상처를 줄 때 이 나라는 것은 예수님에게 나를 기존의 나가 개뿔도 모르는 나가 나를 계속 핍박하는 거예요. 인생 똑바로 살아. 네가 그렇게 허접스럽게 사니까 니 인생 니 꼬라지 그렇게 했잖아. 그때 그런 결정 안 했으면 니 안 망했어, 라고 내가 자꾸 과거를 들춰가면서 기도하면 만회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를 핍박하는 거예요. 남이 혼내주는 게 아니고 내가 나를 혼내줘요. 실망스럽다고요. 네가 어릴 땐 안 그랬잖아, 이런 식으로.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것에 대해서 자기 한계를 모르고 새벽제단에 와서 성경책 품에 안고 와서 주여 손들고 옵니다, 하면 하나님께서 봐줍니까? “손 내려. 니 누구세요?” 내가 나를 핍박할 때 이 나가 나와 동일한 나거든요. 그런데 주님이 생각한 나는 이미 나라고 생각할 때 주님의 진짜 나는 여기서 벌써 떠나가 버렸어요. 이게 왜냐? 존재가 되기 때문에 사건은 날아가 버렸어요. 없어졌다고요.

내가 지적하는 나나 지적받은 나나 똑같은 존재에요. 이미 한물 간 똑같은 거예요. 과거의 내 기억 속에 있는 나에요. 그러면 나는 구원 못 받잖아. 백날 강의해도 무슨 소용 있습니까. 주께서 일하신다는 데 우리는 내가 일해야 현실이 된다는 그 생각은 이거는 믿음이 아니고 믿음에 돌파하지 못한 거예요. 우리는 돌파할 수 없는 육신이 된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원리 이야기했잖아요. 감사하면 성령의 일이고 공포스러우면 악령의 일이다. 이게 이렇게 증명돼요. 범사에 감사하면 이게 성령의 일이고 공포스러우면 이게 성령의 반대가 악령이니까 악령의 일이 되는 거예요. 주여, 아무 것도 무능자를 이렇게 구원해서 감사합니다. 카운트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시계 벌써 5초 지났어요.

벌써 나는 뭐냐? 이쪽에서 이쪽으로 내려와 버렸어요. 감사합니다, 하니까 신자 맞지요, 라고 벌써 내려와 버렸어요. 자꾸 나는 내가 일한 것에만 기억하고 있어요. 내가 나를 근거만 기억하고 있다고요. 그것을 가지고 뭐냐 하면 이게 시험이라 하고요, 시험의 공간이 이 세상이고, 악마가 시험해요.

시험 받는 이유는 뭐냐 하면 악마와 한 통속되는 속성이 우리한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로 인하여 사망을 낳아요. 그러니 우리 욕심이 죽을 이유가 있기 위해서 우린 날마다 욕심쟁이 우후후 돼야 돼요. 날마다 욕심을 부릴 수밖에 없어요. 나 자신의 가치를 못 놓는 욕심, 이 길로 가고 우리는 이 길로 그냥 죽으러 가는 거예요. 브레이크도 없이 그냥 가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계속 성령의 사건으로 개입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나와 나 중첩된 현실, 산수에서 분모, 분자 하듯이 늘 중첩되게 보는 거예요. 이렇게 죄진 나는 그림자고 우리의 생명의 실체는 하늘에 앉으시고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죽었어요. 이 구조입니다.

이 구조가 주님 쪽에서 보면 이렇게 돼요. 주님은 머리가 되고 육신 되는 우리는 이 땅에 아직 더러운 땅에 발을 딛고 있고. 그러나 우리는 머리를 쳐다봐야지요. 나를 보지 말고. 주님이 당한 그 시련을 우리가 양이란 이유 때문에 같이 공히 당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일이 또 가짜 목자 이게 있어야 돼요, 없어야 돼요? 꼭 있어야 돼요. 필수적이에요. 왜? 예수님도 예수님의 활동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대사회를 뭐로 만들었습니까? 악마의 힘이 농축된 그 사회를 만들었잖아요. 우리가 양이라면 동일한 그 사회현실에 온몸으로 견뎌야 되고 견디기보다도 겪어야 돼요. 견딜 순 없고 그냥 겪어야 되죠. 그 체험을 겪어야 돼요. 늘 자기 부인이 되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획에 보면, 자 봅시다. 집에서 개 키운다고 봅시다. 저는 아주 어릴 때 개를 키운 적이 있어요. 내가 키운 건 아니고 우리 집안에서 키운 적이 있는데 개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가장 마음에 드느냐 하면 개가 혓바닥으로 물을 핥아서 물을 먹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왜냐하면 헐떡거리면서 먹는 그 소리 있잖아요. 도저히 인간세계에선 나올 수 없는 너무나 맛있게 물을 저렇게 맛있게 먹는 존재는 처음 봤다. 철퍼덕철퍼덕 물 먹는 소리가 10미터에서도 다 들려. 그게 그렇게 보기 좋았어요. 왜? 주인의 자부심이 막 올라가. 너 내가 물 안 줬으면 죽을 뻔했어.

바로 양이 하는 행동에 대한 하나님에 찬양이 되는 경우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때가 언제냐 하면 허기질 때 오직 목자에게만 생각과 관심이 다 쏠렸을 때 따로 내가 악마를 이긴다고 설치지 않고 돈키호테처럼 미치지 않고 그냥 남이 뭐라던 간에 그냥 나는 한 마리의 개가 되어서 주님 주시는 사료나 물을 헐떡거리면서 맛있게 먹어줄 때 자식 입에 먹는 것 들어갈 때 부모가 그렇게 예쁜 거예요. 물론 그 자식도 어릴 때 자식이고. 커서는 그게 안 되지요.

허기질 때 말씀에 허기질 때 밤이나 낮이나 말씀으로 내가 시냇물을 찾는 사슴이 허기질 때 주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지요. 놀라운 사실은 이 개를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뭐로 바꾸느냐 하면 이 개를 자기의 신부로 바꾼다는. 개는 개인데 주님은 이걸 사람 취급하는데 그냥 사람이 아니고 주님의 신랑의 신부로 바꾸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여자로 바꾸는 거예요. 여자는 스스로 책임질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남자가 다 책임집니다. 프러포즈 다 받아보셨지요. 당신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내가 알아서 다 할게. 당신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고 당신이 좋아하면 그것이 나의 유일한 남은 생애의 행복이다. 어디서 베껴서 프러포즈, 무릎 꿇고 이렇게 하지요. 나중에 얼마 안 가서 너 때문에 못 살겠다. 내 인생 네가 조져 놨다.

사람은 그야말로 무능합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빗어 봐도 말을 듣지 않아요. <그대와 영원히>라는 이문세 노래 가사에 나와요. 머리카락이 빗에 엉켜서 말을 듣지 않는 거예요. 전에는 삭삭 빗어졌는데. 이 신부가 될 때 여자입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주도권을 쥐면 안 돼요. 그래서 제가 뭘 하나 준비했어요. 뭘 준비했느냐 하면 노래 하나 준비했습니다.

제가 이 노래를 여러분 아시는 노래에요. 이 노래가 뭐냐 하면 <주만 바라볼찌라> 하는데 다른 사람 말고 [다윗과 요나단]이라는 밴드가 부른 노래에요. 제가 이 노래를 들은 이유는 여기서 여성의 코러스를 한 번 들어보세요. 이게 남자가 주도하지만 여자의 역할이 어떤 역할인지 얼마나 음악을 아름답게 만들었는지 들어보세요. 지금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좀 더 들어봐야 돼요. 이 노래 약간 더 들어봅시다. 나올 때까지.

자, 이제부터 들어보세요. 우우우 있잖아요. 여자는 받쳐주는 거예요. 주님을 받쳐주는 거예요. 주인공 되면 안 돼요. 와와 있잖아요, 와와. 요거, 요거 중간에. 뒤에 깔아준다고요. 이게 배필자이거든요. 간주할 때 이야기하는데 이 뒷부분은 더 기가 막힙니다. 뭐냐 하면 그때 신랑, 신부 같이 불러요. 그대 희열을 느낍니다. 아아, 우리가 주께서 같은 급으로 사용하는구나. 이 귀한 노래를 여자와 같이 들어가는, 이제 나옵니다. 합창. 여자가 같이 나와요, 여자 파트너가. 다 같이 끝나요.

이게 주님의 계획이에요. 멈추지 않습니다. 멈출 수가 없어요, 성도는. “인자한 귀로써” 여자가 교체하면서 화음을 넣어줘요. 여기까지. 귀한 시간을 이렇게 빼앗아 미안합니다만 이것 해서 시간 때우려는 그런 노림수는 아니고요.

주께서 악마한테 속아서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우리를 그냥 여자가 되는 게 아니에요. 뭘 거쳐야 돼요? 개 같은 종이 되게 하는 거예요. 종이 되게 하면서 우리는 물이나 철퍽철퍽 핥아먹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기본을 유지하게 만들어요. 그러면서도 뭐냐? 주님의 멈출 수 없는 지속적인 것을 해서 우리로 개 같은 여자를 자기의 여자로 만들어요, 신랑이. 그만큼 나도 너처럼 개였다는 것을 거쳐 가게 해요. 내가 죄인이었다는 것을.

내가 죄인으로서 주의 부활되어서 의인 되는 그 절차에 있던 모든 그 의, 그 의만 하나님께서는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일체 자립적이고 독자적인 존재에서 나온 의는 안 받습니다. 바로 이걸 위해서 그 당시 유대사회는 뭡니까? 악마의 힘의 농축이죠. 그 유대사회는 무슨 사회냐 하면 종교사회, 요새 같으면 교회사회에요. 종교국가. 종교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시겠지요. 30년, 40년 교회 다닌 게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아시겠지요.

그 다니면서 얻었던 것은 뭐냐? 나 이 교회 장로다, 집사다, 목사다, 평신도다. 그러한 자긍심과 자의식, 주도권, 수동적이 아니고 자기가 주인인 양 행세하는 거예요. 이런 것을 철저하게 악마로부터 교육받고 양육 받도록 주께서 그렇게 허락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시스템이나 종교마저도 어떻게 해야 돼요? 성령의 일은 뭐라고요, 마지막에?

성령의 일은 마지막에 뭐라 했습니까? 아까 악령과 성령의 차이점, 성령의 일은 뭐가 나온다고요? 감사하지요. 어떻게 감사하느냐 하면 항상 회고적으로 돌아보면서 감사가 되는 거예요. 내가 이 교회, 종교가 아니었으면 얼마나 개 같은 인간인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존재지요. 성경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액자 반듯하게 해서 집에 걸어놓고 마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인 줄 착각했잖아요. 마귀가 만든 종교거든요.

어느 누가 자진해서 자기가 개 되려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인간에 마지막 남은 게 자존심밖에 없는데 자기 이름밖에 없거든요. 그걸 인간의 능력으로선 절대로 누구한테 양보할 수 없습니다. 챙길 것은 끝까지 자기 잘난 것만 챙기는 것이 인간이거든요. 바로 그런 자에게 목자가 우르르 달려들지요. 유명한 요한복음 10장. 요한복음 10장에서 양과 목자가 나와요.

그런데 그 목자가 뭡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그 목자가, 목자가 아니고 삯군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사람들은 궁금하지요. 삯군과 진짜 목자의 차이점은 이렇게 그 다음 질문 돼있지요. 차이점은 뭐냐 하면 바로 요한복음 10장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숨을 버리노라” 그러니까 죽음이죠, 죽음, 죽음이에요. 주님이여 뭐 건강해주고, 이게 아니고 그냥 죽는 거예요. 십자가 죽으심이에요. 죽는 것, 거기서 빠져나올 생각 말고, 알고 건너뛰고 이것 없어요. 그냥 영원히 계속해서 죽음 속에 죽음에서 죽음이 만남의 장소입니다. 제가 이렇게 죄 짓고, 이렇게 철딱서니 없고 은혜 줬지만 은혜도 모르고 또 세상사람 되었습니다.

“이리 와, 이리 와. 십자가에서 기다릴게.” 멀쩡하게 잘 된 착한 일 많이 한 선교사 한 그거 오지 말고 선교사고 뭐든 네 개라는 본성은 달라진 게 없어요. 그냥 여기 와. 다시 한 번 십자가 보게 되면 거기서 “아 주께서 날 구원했군요.”가 아니라 “나는 놀았고 주님만 일하셨군요.” 달랑 그것만 남아요. “주께서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군요. 나는 엉터리 일하지만 주께서 일하셨군요. 날마다 그 결과물을 내는군요.”

뭐라고? 나는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라는 결과물을 낳게 하시는 쉬지 않는 주님의 멈추지 않는 그 작업, 그것이 바로 주께서 구원이라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개념은 주께서 홀로 다 이루셔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거예요. 우릴 넣어준 거예요. 하나의 패밀리로. 신부로 넣어준 거예요. 우린 뭐 황공스럽지요. 뭐 면류관 쓴 것 던져버리고 이걸 제가 왜 씁니까? 시건방지게 제가 왜 씁니까. 죄인 중의 괴수가 이게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쓰셔야 되지요.

이 생활을 돌아가시고 난 뒤에 5초 후에 하지 마시고 이미 지금부터 하시는 겁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합니까? 그냥 성질대로 사시면 자극이 와요. 나는 착하다, 복음 안다, 나는 이래도 참아야지. 참자. 몇 번 참을까요? 용서해야지. 일곱 번 할까요? 일곱 번 안 되면 주께서 마흔아홉 번 더 늘입니다. 드디어 성질나요. “내가 참을 만큼 참았다. 너 같은 여자와 산다고 용 썼다. 도저히 못 참는다. 갈라서자.”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럴 때 걸려들었어. 너는 나에게 농락 대상이야. 내 일에 얼마나 성과 있는지를 이렇게 망가진 인간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자기 솜씨를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은 쉬지 않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면서 아무 차질 없이 일을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걱정할 상황 아닙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양과 목자의 개념이 우리가 주제넘게 가져올 개념이 아니라 주님께서 홀로 이루실 개념인 것을 알았습니다. 마귀가 필요했고 마귀에 속한 우리 자신 죄인도 주의 일에 꼭 필요한 재료가 된다는 것을 앞으론 더욱 더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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