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강의

소유성과 위기

아빠와 함께 2021. 9. 15. 08:40

20210913a 부산강의 : [시편]41(25:15)-소유성과 위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25편 합니다. 시편 25편에 다윗이 언급을 하는데 15절에 보면,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나와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그물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 그런데 그물이 뭐냐 하면은 이게 14절에 이런 말씀 나오는데 18절에 보면 그물을 죄라고 이야기하고 있어요. 나를 죄에서 끄집어내 달라. 그러면 그 전에 나와 죄는 엉겨붙어있는 겁니다.

첫째는 나와 그물은 같이 엉겨붙어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나는 그물에서 못 벗어난다. 이 말은 18절 집어넣으면 세 번째, 나는 죄에서 못 벗어난다. 네 번째, 죄는 저주를 줘요. 나는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서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못 벗어난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전체를 하나님께서는 뭐로 보느냐 하면 전체를 말씀으로 보는 거예요. 전체를 말씀으로 본다는 인식이 상당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나는 여기 있고, 말씀이 있고, 내가 말씀을 지킨다. 보통 이렇게 되잖아요. 이게 잘못됐다 이 말입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궁지에 몰린 내 전체가, 말씀이 말씀 되게 하는 요건에 들어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 하느냐 하면 1, 2, 3, 4 조사해보면 말씀이 말씀되기 위해선 여기 뭐가 필요하냐? 죄가 필요하고, 그 다음에 구원돼야 될 나가 필요한 겁니다. 여기서 죄에서 못 빠져나오는 갈등이 일어나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말씀체제, 말씀 위주로 생각 안 하고 나 위주로 생각해버리면 죄라는 것도 잘못됐고, 그물도 잘못됐고, 용서, 심판 이것도 전부 다 개념이 잘못되게 되는 겁니다.

죄에서 저주, 심판에서 벗어나서 멀쩡한 나가 되게 되면 내가 원했던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으쌰으쌰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면 나는 절대자가 돼버리는 겁니다. 내가 절대자 같으면 이거는 말씀이 절대자가 아니고 내가 말씀 안에 따로 튀어나오는 게 되거든요. 이런 것, 이게 뭐냐 하면 분명히 나는 죄에서 못 벗어나야 되는데 그런 난데, 못 벗어나야 되고, 오죽했으면 요구가 그물이겠습니까.

그물의 실제성. 그물의 실제성이라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비 온 뒤에 운동하다보면 거미줄 있잖아요. 거미줄에 자꾸 걸려요. 왜냐하면 거미줄이 너무 가늘어서 눈 나쁜 사람은 잘 안 보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런데 가까이 가면 뭔가 지저분한 게 거치적거리면 이 공간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미 설치돼있는 거예요. 거미줄 같으면 우리가 무시하면 되지만 문제는 이 그물이 내가 벗어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 상황이 말씀대로 된 거예요. 말씀에 보면 나 좋아라하는 게 있을 수가 없지요. 그러면 여기서 오늘 본문에 보면 2절에,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뭐지요?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님, 나에게 원수가 있습니다. 원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이 전체를 말씀이라고 생각할 때에 말씀을 통해서 비로소 거미줄처럼 눈에 안 보이지만 실제하고 실제로 있고 그 다음에 그 힘에 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그것으로 나의 원수로 규정이 되는 겁니다.

나의 원수, 죄, 같은 말인데 이거는 나의 원수를 누구한테 호소합니까? 주님께 호소한다는 의미는 나의 원수 멈추는 게 아니고 주님의 원수로 확장되는 거예요. 의미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집사님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분이 교사로 일하다가 연락이 왔어요. “선생님, 2주간 격리입니다.” 확진자와 밀착한 사람에 해당되어서 병은 걸리지 않았지만 따로 2주간 격리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격리를 할 때 집에서 격리하면 되지,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앱을 깔아야 돼요. 국가에서 앱을 깔아서 전자 팔찌 비슷한 거예요. 발목에 차는 것과 비슷해서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을 국가에서 다 감시하는 겁니다. 격리지를 떠나지 않도록. 그래서 그 집사님이 하는 말씀이, “국가의 힘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는 거예요. 국가의 힘이 이렇게 강력할 줄 몰랐다.

나에게 있어서 내 안에 있는 모든 세상은 나의 자율성을 충분히 보장한다고 생각하고 나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무엇을 체험했느냐 하면 이 나의 원수, 하나님의 원수의 실제성은, 내가 내 뜻대로 못하도록 전부 다 감시체제가 이미 실제로 내 주변을 내 상황을 그렇게 만들고 있고 나는 거기에 뭐로 빠져있다? 그물에 갇힌 셈이다, 그물에 갇혀있다는 거예요.

국가의 권력이 이렇게 셀 줄은 몰랐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은 곧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여기 두 번째, 나는 내 힘으로 그 그물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 속에 내가 갇혔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이 시편 25편이 의미가 있어요. 이게 말씀이 말씀대로 성취되는 환경입니다.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릴 거예요.

인간이 이 원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에게서 나를 제거해야 되는데 나에게서 나를 제거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다윗언약에 있어서 다윗언약은 다윗을 제거하는 게 다윗언약이에요. 아브라함언약은 아브라함을 제거하는 게 아브라함언약이고, 이삭언약은 이삭을 제거하는 게 이삭언약입니다.

이삭은 누굴 밀어주느냐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에서를 밀어주잖아요. 그걸 실패로 끝내게 하는 거예요. 그게 언약의 위력이에요. 나는 첫째 아들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고 싶지만 하나님께서는 둘째 아들 야곱에게 물려주는 거예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이삭을 언약에서 제거할 때 이삭은 제거되었다는 그 흔적이 남아있는 그 언약을 이삭언약이라 하고,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을 생산할 때 이스마엘을 낳았거든요. 그 이스마엘 속에 자기 의지가 들어있는 거예요. 그 의지를 제거하는 것이 무엇이냐? 아브라함언약인 겁니다. 야곱언약은 뭐냐? 야곱을 제거하는 거예요. 야곱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야곱을 죽여서 거기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 이스라엘로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야곱언약이에요.

그러면 다윗언약은 뭐냐? 다윗을 죽여 버리는 겁니다. 그럼 마지막 새 언약은 뭐냐? 예수님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을 없애버리는 겁니다. 예수님을 없애버리고 다시 죽은 예수를 뭡니까? 사흘 만에 살려내는 그 바탕이 언약을 형성하는 겁니다. 나에 대한 나의 제거에요. 나에게서 나를 떠나야 되는 겁니다. 이 작업.

왜냐하면 나는 무엇에서 돌파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수에서 돌파, 돌파라고 요새 유행하죠. 백신 맞아봐야 세균이 더 세서 돌파하는 것 있잖아요. 언약의 이스라엘은 강력한 원수가 실제성으로 그물처럼 형성되게 만들어서 인간의 힘으로 돌파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돌파하는 그 현장에다 다윗을 집어넣는 거예요.

교회는 국가 속에서 돌파하는 단체에요. 아까 국가 이야기했지요. 앱 깔아서 감시하는 것. 국가가 강력해야 돼요. 뭐 교회가 예배드린다. 이건 국가 안에서 성립이 안 돼야 돼요. 할 수가 없어야 돼요. 할 수 없어야 국가 자체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야 됩니다. 하나님의 원수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초대교회 알지요. 스데반 집사가 죽는다는 이야기, 그것만 하지 마시고 그 스데반 집사 죽는 현장에 누가 있었습니까? 장차 사도가 될 사울이 있었잖아요. 사울이 그 현장에 있었어요. 그러면 사울을 통해서 사울을 사도되게 함으로써 주님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사울은 결코 사도가 될 의사도 없었고 그런 노력도 할 수 없고 어떤 예상도 하지 못하고 사울은 자기가 아는 전부 속에 스스로 갇혀있는 거예요.

사울은 누구한데 갇혀있는가? 사울 본인에게 갇혀있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구원의 시작이에요.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게 아무것도 없게 만드는 그게 구원의 시작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이 실제화 되는 겁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이야기하면,

이 전체가 나는 그물에 엉겨붙어있다. 두 번째, 그 그물은 내 힘으로 못 벗어난다. 그 그물의 이름이 뭐냐? 죄다. 죄에서 저주와 심판이 있었다. 결국 합쳐서 나라는 것은 이 죄의 위세에 갇혀있어서 꼼짝 못하고 있고 당하기만 한다. 그런데 이 전체가 말씀이 말씀되기 위한 요건에 충족되는 거예요.

내가 무능력한 그것이 뭐가 된다? 말씀이 말씀되게 하는 충족돼야 될 요건 중에 하나에요. 내 힘으로 구원받는다든지 내가 예상한 내가 된다든지 이것은 말씀에 위배되는 겁니다. 말씀은 내 위주로 돼있질 않아요. 말씀이 성취되는 것은 뭐냐? 죄 속에 있는 나를 죄와 더불어 없애버리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성도에게 성령이 오게 되면 한 번 들어보세요. 여러분에게 해당되는지. 성도에게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아는 복음의 지식에 의하면 성도는 이미 죽은 자에요. 그러면 죽은 자에게 성령 받고 난 뒤에 거리를 나가 봅니다. 사람들 다니고 성령 받기 전의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게 없지요. 똑같지요. 했을 때 그 현실 차 다니고 건물 서있고 식당은 문 열고 여러 가지 사람들은 농사짓고 택시 하는 사람은 택시 운영하느라 서있고.

이 모든 것이 이미 죽은 자한테는 그게 뭐냐? 관람입니다. 관람이고 여행이고 그냥 죽고 난 뒤에 덤으로 주어지는 풍경입니다. 자기를 상관이 없는 동네에요. 그쪽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그저 우리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죠. 아아, 세상은 이렇게 망해가는구나. 나랑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자기와 전혀 상관이 없는 거예요. 이게 뭐냐? 돌파된 이후에요.

돌파되고 난 뒤에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거는 관람용이에요. 구경거리에요. 아이고, 사람 안 됐다. 여기서 자기 장래도 모르고 운명도 모르고 코앞에 있는 손님 하나 끌어보려고 그렇게 애를 쓰는구나. 돈 버는 이유도 모르고 자기 낭떠러지도 모르고 그저 자식하고 밥 먹고 살면 이게 사는 거다, 라고 생각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영화관에 갔을 때 제일 끝에 일어난 일이 뭐냐 하면 영화관 직원이 문을 열어주면서 영화 끝났습니다, 하는 거예요. 인생이 그런 거예요. 구경 끝났습니다. 애초부터 산 사람은 천국 가시고, 영화가 전부라고 생각한 사람은 지옥 가시기 바랍니다. 영화 끝났어요. 나가세요. 청소해야 돼. 30분간 청소하고 다음 영화 틀어야 돼요. 우리는 한 편의 영화를 본 거예요. 인생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미지고 허상이라니까요.

이게 돌파된 사람이에요. 이게 교회에요. 초대교회 교회, 성령 받은 사람들. 로마의 권력이 사자를 준비하고 믿는 사람들 어떻게 쳐 죽이든 그거는 남의 이야기에요. 나하곤 상관없는 이야기라니까요. 그냥 그거는 발광을 하는 거예요. 앞에 지랄이라는 상스런 말은 쓰지 않겠습니다만(이미 써버렸는데) 그냥 발광하는 거예요. 이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나를 지워지지 않기 위해서.

그게 뭐냐 하면 내 속에 뭐가 들어있는가? 내 속에 그물, 세상에서 주는 것들로 채워지는데 이게 뭐냐? 소유성이에요. 인간의 소유성. 인간의 존재는 소유로 돼있어요. 그래서 인간 자아 안에 소유가 있으면 그 사람은 뭘 해도 빛을 발하느냐 하면 자기가 갖고 있는 소유가 빛을 발해요. 인간이 있다면 여기에 뭔가 세상적으로 그물에서 준 거예요. 준 것으로 이게 빛을 발한다고. 붉은 빛이 발하죠.

그런데 언약, 특히 오늘 본문 10절에 언약 나옵니다. 10절을 볼까요.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 이렇게 돼있어요. 언약이 삽입된 사람은, 이걸 다윗으로 본다면 다윗이 있다면 이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이 있지요. 이게 언약인데 말씀으로 보면 이 사람은 무엇에 빛을 발하느냐 하면 이 언약의 빛, 말씀이 빛이 발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소유의 빛을 발하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이 소유가 목사한데는 교회가 된다는 겁니다. 소유가 있어줘야 나가 있어요. 그런데 이 말씀이 빛을 발하면 껍데기 나가 엷어져요. 점점 더 자기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살아버리면 나는 죽은 자가 되기 때문에 죽은 자에게 신경 쓸 건 남아있지 않지요.

그런데 이 세상 것이, 제가 고함지르는 이유는 잡음이 들려서 경쟁한다고. 세상 것이 들어와 버리면 이 세상 것 때문에 비로소 나라는 것이 정립이 되니까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 내 가진 것을 안 잃어버리려고 하는 겁니다. 그 중에 하나가 놀랍게도 교회가 되고 다윗 때는 뭐냐?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지켜 달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온 거예요. 교회도 세상에서 온 거예요. 교회를 없애버리는 게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거든요.

교회를 없애버리고 세상을 없애버려야 될 이유가, 이미 너는 나를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랬어. 나를 지킬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를 지키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하다보니까 자기 소유의 교회를 지켜야 되고 자기 소유의 재산과 가족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벌벌 떠는 거예요. 두려워하는 겁니다. 돌파되지 못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살 테니까 내 것 지켜 달라. 이거는 말씀의 세계 아니고 나의 세계에요. 어디서 구라를 치고 있어. 그거는 나의 세계에요. 말씀의 세계가 아니고 나의 세계라고요.

하나님께서 다윗언약을 통해서 다윗을 죽이고 그 다윗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없애려고 하는 이유가 뭐냐? 이거는 좀 어려운 건데요. 이렇게 정리하면 되는데 어려운 거예요. “계시는 계속해서 추가된다.” 인간의 자아가 있는데 이스라엘은 여기서 말씀이 들어오거든요. 말씀이 들어온다는 것은, 말씀의 입장에서는 말씀 속에 너를 죽은 자로 간주한다. 이게 말씀이 원 뜻인데 이스라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이스라엘이 지금 땅에 살고 있잖아요.

신약성경에서 이런 물음을 가지고 주께서 오셨습니다. 뭐냐 하면 이 땅에 기거하지 못할 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 땅에 기거하지 못할 자는 누구 게요? 정답, 예수님입니다. 이 땅에 기거할 수 없는 존재로 오셔서 떠나버린 거예요. 오셔서 떠나버린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나 골로새서에서 우리는 땅에서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땅 말고 위에 있다. 아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

그건 신약이고 구약에서는 십자가 앞에서 구약 있잖아요. 구약은 계시가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 계속해서 계시가 추가된다고요. 계시가 추가되면서 약속의 땅에 온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을 지키려고 하는 이 짓거리가 이게 약속의 최종 모습, 완성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구약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이뤄서 성령을 받은 십자가에서 전에 있던 현재 시편 25편을 다시 해석하는 거예요. 신약 입장에서 보면 나는 위로할 대상도 아니고 설명할 대상도 아니고 해석할 대상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는 사라져야 되기 때문에. 신약적 입장에서.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거기 누가 있다 했습니까? 사울이 있었지요. 스데반 집사는 죽어서 사라졌는데 그 현장에 누구는 멀쩡하냐 하면 사울은 스데반 죽는 것이 정당하다고 옷을 지킨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자기가 멀쩡하게 존재하는 그걸로 자기는 사울 본인은 이 땅에서 그 당시 약속의 땅, 이스라엘 땅에서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나는 예수님과 똑같이 이 땅에 살 권리를 찾을 필요가 없는 존재로 이걸 바꿔주는 이것이 바로 내 소유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그것이 주님이 말하는 바로 죄에서의 구원이에요. 이 세상의 권세로부터 구원이었다. 죽음 이후에요.

어려운 질문할 게요? 여러분, 재림은 언제 오지요? 이 질문에, 제가 지어낸 질문이니까 답은 기대 안 합니다. 재림은 언제 오느냐 하면 이미 죽은 자에게는 재림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가 죽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재림 오는 것이지 재림을 기다릴 필요는 없어요. 재림은 확인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재림은.

재림이라 하는 건 인간들이 원하는 건 이 땅이 작살나는 순간이거든요. 심판의 순간입니다. 불바다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이 땅에서 죽은 자 입장에서는 불바다 되는 것도 구경거리입니다. 해운대 축제할 때 불꽃놀이하지요. 살아 있을 때 재림하시거든 좋은 구경삼아 마실 한 번 나가시길 바랍니다. “멋지네. 이 폭죽놀이, 이 불꽃놀이가 멋지네!” 이러면 되는 거예요.

재림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던 모든 소유성이 다 날아가는 거잖아요. 마치 물에 노아 홍수 때 다 빠지는 것처럼. 마지막 때는 불로써 심판해버릴 때 인간들이 그렇게 애타면서 아끼고 거기에 자신의 평생의 모든 노력과 수고와 초조함을 다 집어넣었던 그 소유성이, 목사한테는 그 교회가, 어디 있냐? 애초부터 없어져야 될 거예요. 소유성이 없어진다는 것은 내가 없어져야 될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는 나를 이미 죽은 이후의 사람 된 것, 귀신이죠. 이렇게 된 것을 갈수록 감사하게 되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왕 죽은 것 주께서 부르실 때까지 구경이나 한 번 잘해보자.” 읍내 오일장 구경하듯이. 여기는 뭐 파노? 전자제품 파네. 여기는 뭐 파노? 필라테스하고 있네. 여기는 뭐하노? 코로나 백신 맞는다고 하네.

이렇게 구경거리 난 걸로 여기면서 어슬렁거리면서 사시는 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이미 영화임을 우리가 아니까. 세상은 영화에 불과하다는 것, 드라마에 불과하다는 걸 미리 아니까. 결국 끝이 있다는 걸 미리 아니까. 구애받을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한 번 지금까지 한 것 정리해봅시다.

“자아는 치료대상이 아니다.” 자아는 치료할 게 없어요. 고칠 필요 없어요. 그냥 죽었는데 뭘 고쳐요. 왜 자아한테 그렇게 애착하고 미련 가질 필요 없단 말이죠. 자아는 치료대상이 아닙니다. 없어질 대상이지요. 자, 우리가 그렇다면 이걸 여러분들이 인정하신다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있어요. 그 일이 뭐냐 하면 이겁니다.

다윗언약이 어떻게 다윗 또는 다윗 나라를 제거해 나가시는가? 다윗의 나라 이스라엘은 땅을 갖고 있잖아요. 땅을 갖고 있고 그 안에 자체적으로 힘을 갖고 있지요. 국가라는 힘을 갖고 있잖아요. 그 국가 이스라엘공동체, 이스라엘사회를 다윗언약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사그리 제거하는가? 그 과정이 십자가까지 이어진다면, 지금 여기 십자가로부터 거꾸로 보게 된다면 여기 다윗이 시편 25편이잖아요.

시편 25편 이후에 오면서 우리는 무엇을 주목하느냐 하면 역대하를 주목하는 거예요. 역대하라는 것은 솔로몬 포함해서 솔로몬 이후에 르흐보암, 아비암, 아사, 뒤에 나오는 여호사밧, 열왕이라 하는데 왕들의 연속을 조사하게 되면 그들이 자기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했고 결국은 그들이 모든 노력을 다해도 후대 왕에게 물려줄 때는 엉망진창으로 물려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성을 보여줍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스라엘이 뭐로 됐냐 하면 소유대상이 된 겁니다. 이스라엘 국가 전체가. 이스라엘을 소유할 때 얼마나 핑계대기 좋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나라다. 이스라엘 대신 교회 집어넣으면 여러분 쉽게 이해되지요. 이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 있고 살아 있는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땅 주시고 재산 주셔서 만든 성도의 기도와 땀과 눈물과 이렇게 했다. 얼마나 핑계거리가 많아요.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서 와서 떠나고 싶은데 네는 지금 안 떠나겠다는 떠나지 않겠다는 거예요, 이 땅을. 이스라엘 핑계대면서 교회 핑계대면서 안 떠날란다, 이렇고 있단 말이죠. 나의 소유성에서 못 놓겠다. 나란 의식은 나의 소유에 기초를 하고 있습니다. 소유가 없는 것은 나의 의식이 없는 거예요.

소유가 없으면 나의 의식도 없어요. 뭔가 있어요. 자식이 있든 재산이 있든 펀드가 있든 뭐 있어요. 그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히스토리, 역사를 갖고 있어요. 내가 어릴 때부터 공부해서 어떻게 벌어놓은 재산인데, 이런 게 있다고요. 어떻게 저축한 건데, 이런 게 있어요. 네가 부모의 공덕을 잊으면 안 되지. 핑계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에 내가 부응해야지. 실망시키면 안 되지. 입만 벌리면 나오는 게 핑계에요.

그래서 뭐? 그래서 나는 잃어버리지 않고 살고 싶어요. 결국은 그거에요. 나는 나답고 싶어요. 뭐 이런 핑계에요. 나는 저들과 같지 아니하고, 만날 같은 인간들, 꼬라지 똑같은 인간들과 비교하고. 주님하곤 비교할 생각도 안 하고. 말씀이 나와야 되는데 말씀이 나오는 게 아니고 자기 소유가 나오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힘들게 인생을 살았다. 이 나이쯤 되면 뭔가 보충이 되고 만회가 있어야 되지 않느냐?

주께서 이야기하길 그것 해서 뭐하는데? 그래야 내 자존심 사는데. 자존심 살아서 뭐하는데? 네 자존심 챙겨서 뭐할 건데? 글쎄요. 그걸로 뭐하지? 그게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원수와 결탁돼있었던 거예요. 인간의 원수는 인간 내부에 자리 잡아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어요, 우리를. 나로 하여금 나를 떠나지 못하도록 원수가 그렇게 우리를 몰아세운 거예요, 그동안. 훈육을 시키고 사육했고 교육을 시켰고 그렇게 우리 인간을 자아를 조작한 겁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하는 것보다도 노래 가사 하나가 다 정리해줘요. 가사 한 번 들어보세요.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걱정에
온통 내 자신을 가둬두었지
이젠 이런 내 모습
나조차 불안해보여
어디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나도 세상에 나가고 싶어
당당히 내 꿈들을 보여줘야 해
그토록 오랫동안 움츠렸던 날개
하늘로 더 넓게
펼쳐 보이며 날고 싶어

이 세상이 환상입니다. 세상이란 건 없어요. 그 세상이란 이미 자기 안에 임재범 자기 안에 들어있어요. 임재범이 불렀던 <비상>이란 노래입니다. 임재범이 자기 안에 들어있어요, 세상은. 세상은 자기가 조작해낸 환상에 불과해요. 세상에 나갈 필요 없어요. 니 혼자 앉아있으면 그게 세상이에요.

세상에 나가서 펼쳐 보이는 것은 뭐냐? 내 꿈들을 보여줘야 돼. 누구한테? 지하고 똑같은 생긴 인간들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누구한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온 거예요.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었던 겁니다.

사회주의, 노골적으로 공산주의죠. 사회주의의 모토는 딱 하나밖에 없어요. “같이 먹고 살자.” 먹고 살자가 아니라 같이 먹고 살자. 같이 먹고 살자! 니만 사나 나도 인간이다. 같이 먹고 살자. 이게 사회주의에요. 사회주의 반대인 자유주의는 나만 살자. 내 발목 잡지 마라. 나만 살자. 같이 살자. 같이 살게 되면 어디로 가게 됩니까? 같이 살게 되면 같이 사는 것이 그렇게 좋아 보입니까? 아닙니다. 본색 드러나죠. 같이 살자 하다가 나만 살자로 결국 귀환하게 돼있습니다.

어릴 때는 남매간에, 형제간에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농심이라 해서 밤중에 몰래 볏단 주고 하죠. 나중에 커서 보세요. 같이 사는 것 없어요. 부모가 죽기 전에 형제들 모아 놓고, “너희들 형제간에 제발 싸우지 말고 동서 간에 싸우지 말고 내 재산 ¹/ₙ해서 내 죽더라도 저희들끼리 사이좋게 명절엔 같이 모이고 얼굴 맞대라.” 꼴까닥 죽지요. 자식들 입장에서는 귀찮은 노인네 하나 처리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 병약한 노인네가 나만 살아야 될 내 발목을 잡을 순 없지 않습니까.

어떤 며느리가 시아버지 장례 치루고 난 뒤에 남은 장례비를 그 비슷한 날에 있었던 친정아버지 칠순잔치에 그 돈을 넘겼어요. 남편이 기가차서,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칠순잔치 하느냐?” 며느리 하는 말이, “죽은 사람이 무슨 돈이 필요하냐?” 돈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 많은 돈이 있지만 나에게 왔을 때 나에게 필요한 돈이 필요하지 니한테 필요한 돈은 필요치 않은 돈이에요. 뺏든지 없애든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던지.

인간의 본성은 나만 사는 거예요. 다들 똑같아요. 별다른 착한 사람 없습니다. 인격이 훌륭한 목사? 이 세상에 그런 목사는 없어요. 자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그런 목사는 있을 줄 모르지만 인격 좋은 목사는 없어요. 유령 같은 목사는 있을 수 있어요. 지나가도 귀신이 갔나 하는 그런 목사는 있지만.

인간의 자아에서 이렇게 소유성이 있으면 이 소유성이 있을 조건 하에 내가 있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내 가진 게 얼마나 있지, 헤아리는 겁니다. 그 헤아려서 만족함이 있으면 나는 만족스럽게 있는 것이고 내 재산이 날아가면 자살하는 그거에요. 전부 다 소유성이에요. 평생을 딸 하나 위해서 살았는데 그 딸이 사고 났다. 그러면 난 살 이유가 없어요. “애야 너 좋은 데 가라. 내 따라갈게. 엄마가 따라갈게. 너 얼마나 외롭겠나.” 같이 죽어요. 왜냐하면 딸이 자기 소유성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서 벗어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아야지요. 그냥 세상 따라가지 말고 십자가를 통해서 내 자신이 누군지 알아야 돼요. 성경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은 말씀 없이 사는 그 정당성을 보장하라 외치고 있어요. 나는 말씀 없이 살 테니까 말씀 없이 살아도 나는 잘 살았다고 누가 이야기해 달라는 거예요.

이게 교회처럼 돼버렸어요. 그저 말씀이 안 들리는 곳이고 싶은 거예요. 복음이 안 들리는 곳이고 싶어요. 내가 나로 인정받고 말씀 없어도 소유성만 있어도 소유성 빛 값을 하는 나 이만큼 부자 됐다는 이걸 알아주는 그 재미로 사는 거예요. 내 자식이 이번에 사법고시 합격했다. 그 재미로 사는 거예요. 여러분한테는 해당이 안 되니까 마음대로 이야기합니다.

여자들은 나이 오십에 아직도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그 재미로 사는 거예요. 물론 여러분 가만있어도 괜찮아요. 말씀을 들여다볼 때 자기로부터 들여다보면 어떤 말씀 해석도 악마의 해석입니다. 이 소유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은 뭘 하느냐? 선악체계가 가동되는데 이걸 네 자로 쓰겠습니다. 자기검열. 철저하게 자기검열이에요.

자기검열의 근거는 뭐냐? 사회적 시선에 압박감. 그 압박감의 내용은 뭐냐? 너, 남들 가진 것 없지? 여기서 오는 압박감. “네가 미모가 되나 키가 되나 건강이 되나 돈이 되나. 아이고, 인간아 왜 사니. 나 같으면 죽었다.” 이런 것. 사회적, 심리적 억압 속에 그물 속에 갇혀있으니까 그 그물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어 올 때 이것이 그걸 규제 기준으로 해서 철저하게 선악적으로 자기검열에 나서요.

검열이란 말 알지요. 공산당 검열, 언론검열. 내가 똑바로 사느냐, 안 사냐를 계속 검열을 하는 거예요. 만약에 똑바로 못 살게 되면 여기서 뭘 하느냐 하면 갑자기 되도 않은 이상한 행동을 해요. 이게 뭐냐? 기도하기, 성경공부하기, 예배드리기. 헌금하기, 봉사하기. 왜? 자기검열에 사회적 요구조건에 내가 영 못 미쳐서 자칫하면 내가 자살코스로 가는 게 아닌가, 겁나서 내가 아직까진 자살보다도 오히려 나는 자랑스러운 자아가 되고 싶다. 그때는 뭐냐? 기도, 헌금 이런 것 해서 흔히 교회에서 간증 집회하는 것 있지요. 이 사람을 보라. 기도 많이 해서 복 받았잖아. 그런 쪽이 듣고 싶은 거예요.

다시 정리합니다. 말씀이 없어도 정당한 것을 남들에 의해서 호응 받고 싶은 나. 그러니까 나는 뭐냐 하면 말씀이 있는 자리에 뭐가 있다? 말씀 빼버리고 나는 이렇게 소유하고 있다, 힘과 권력과 돈과 잘남과 너희들의 부러워하는 것들을 갖고 있다. 그렇게 대체된 인간성으로 살고 싶어서 교회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어제 설교에서 교회 나오는 이유는 불먼 터뜨리기 위해서 다 하나님 잘못이라고 내 인생 물러달라고. 그것이라도 있어야 이렇게 하소연할 수 있잖아요. 내 인생 조져놓은 것 책임지라고. 천당을 보내주던지 안 그러면 부자 되든지 나 책임지라고. 말씀이 없이도 나는 정당하다, 라는 그런 인간으로 좀 살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거기에 대한 주님의 십자가는 뭐냐? 죽어라 인간아. 죽으면 해결 끝날 것을 이미 죽음 이후의 존재로서 어슬렁거리면 될 걸 자꾸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어떤 희망과 그걸 찾고자 하는 거예요. 내 소유 지키기 위해서. 말씀은 내 소유를 지켜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싫은 거예요. 말씀이 없는 곳에 다른 소릴 듣고 싶은 거예요.

자, 이제부터 역대하를 시작하겠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스라엘 다윗 시대에 시편 25편에 나오는 이 내용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성취되는가,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싸우신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나의 삶의 실제적 현실의 힘과 싸우신다. 그러니까 하나님 편에 설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역대하에서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합니다. 선지자. 스가랴 같은 사람은 돌에 맞아 죽어요. 미가야 같은 사람은 귀싸대기 맞습니다. 이스라엘을 생각해야지. 요즘 말로 교회를 생각해야지. 이런 거예요. 이스라엘을 생각해야지 네가 그렇게 미래를 예측 잘못해버리면 우리가 전쟁할 때 의욕이 떨어지잖아요. 우리가 전쟁할 때 힘을 비축하기 위해서는 뭔가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그런 소리를 해서 사람들에게 격려차 이야길 해줘야지.

이것 때문에 그때 몇 명입니까? 미가야 그때 거짓 선지자가 몇 명이었습니까? 사백 명이죠. 사백 명 가운데 미가야 빼놓고는 전부 다 그런 이야기할 때 성경에선 이걸 거짓의 영을 모든 선지자 속에 다 집어넣고 왕들 속에 다 집어넣고. 미가야 빼놓고 다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짓의 영이니까 우리가 아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 이퀄 뭐냐? 이게 거짓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좀 어려운 말 한다면 이 세상은 거짓된 겁니다. 그러나 오류는 아니에요. 어렵지요. 오류는 아니에요. 정확하게 거짓이도록 말씀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용을 한 겁니다. 거짓된 것과 오류가 차이 납니다. 오류는 오류를 깨닫는 순간 온전함으로 돌아설 수 있지만 거짓은, 거짓 자체가 계속 뭘 하느냐 하면 거짓된 완성을 낳아요. 거짓된 완료를 낳는다고.

그리고 거짓의 영은 거짓에서 벗어날 경우에는 거짓된 세상으로부터 거짓말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빠져나옵니다. 이단이라는 소릴 들으면서 빠져나와요. 오류는 희망이 있어요. 고치면 돼요. 거짓은 고치는 게 아니라 죽어야 나올 수 있어요. 진실은 거짓을 거짓으로 도드라지게 노출시키면서 진실을 빼내는 거고, 오류는 네가 마음 잘 먹어봐라, 어디가 잘못됐는지 고쳐봐라, 개선해봐라. 이건 오류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 세상은 오류의 영이 아니고 거짓의 영이에요. 그곳에 나도 포함돼있어요. 그러니까 나도 포함됐기 때문에 내 구원과 나 잘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 행위자체가 그 사적 구원자체가 거짓된 거예요. 거짓을 더 쉬운 말로 하면 속임수입니다. 그러니까 악마가 지독해요. 처음부터 속였잖아요. 네가 선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처음부터 악마 본심을 본인의 심정을 인간 속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분배를 해준 겁니다.

국화빵을 찍을 때 밀가루 해놓고 돌리죠. 돌리고 앙꼬를 집어넣지요. 앙꼬 있잖아요. 거짓된 것, 거짓된 것, 거짓된 것, 거짓된 것 그래서 그게 사백 명 된 거예요. 다수결로 하면 미가야가 밀려요. 미가야는 그 소리할 때 자기는 죽었다고 치고 한 거예요. 이스라엘 속의 일입니다. 이스라엘을 치는 진짜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통해서 나타나요.

그 이스라엘이 뭐냐 하면 중첩된 이스라엘. 야곱 아래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있잖아요. 이스라엘이 야곱 이름을 죽여 버리죠. 이스라엘 살리기 위해서. 그냥 야곱 있고 이스라엘 있는 게 아니고 이스라엘이 야곱을 죽여 버리죠. 중첩된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망해야 되는 겁니다. 이게 역대하입니다.

그런 징후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를 보내는 거예요. 선지자를 보내게 되면 이스라엘을 소유하지 말라. 다시 말해서 요새 말로 하면 교회를 소유하지 말라. 교회가 소유돼버리면 자아가 안 죽어요. 나 복음 아는 교회 다닌다, 이렇게 되니까 자아가 죽질 않아요. 그런데 우리 인간은 나 스스로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국가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줍니다. 아아, 자아는 국가 안에 버틸 수 있는 여지는 인간에게는 존재할 수 없구나. 이 어두움의 악마의 국가가 의도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주위에 깔아두신 이유가 오직 내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속에서 말씀이 빛이 나기 위해서 예수님이 빛나기 위해서 국가를 깔아둔 겁니다.

 

20210913b 부산강의 : [시편]41(25:15)-소유성과 위기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에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 아니고 말씀이 나를 가지고 말씀이 터져 나오는 방출되는 것. 그러면 나는 이 과정에서 말씀을 못 지키는 사람이 되는 즐거움이 있어요. 내가 말씀을 지킬 수 없음을 아는 즐거움. 만약에 내가 말씀을 지켜버리면 말씀 지킨 나는 나의 우상이 돼버립니다. 대단한 존재가 돼버리죠. “사람들아, 나 말씀 지켰어. 칭찬 좀 해줘. 목사님 저 칭찬 좀 해주세요. 말씀 지켰어요.”

그게 바로 악마의 앙꼬가 들어간 거예요. 여전히 말씀 지켜서, 이걸 뭐라고 하느냐? 이걸 신격화라 해요. 악마가 마지막 노리는 것은 나를 신격화시키기 위해서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거예요. “네가 신이야. 다른 게 신이 아니야. 네가 신이야.” 이게 바로 철학이고 과학입니다. 노골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이 니체란 사람이고요. 신은 죽었다.

다시 말해서 신은 죽었다. 누군 살아 있다? 니는 살아 있잖아. 니가 사는 힘이 진리야.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우리가 보기엔 니체가 그런 이야기했지만 니체 빼버리면 오늘날 초중고등대학교 모든 사회가 이 철학이에요. 힘을 가져야 사람대우 받는다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고. 숫자 적고 헌금 적게 나오면 교회라고 인정 못 받는다는 거예요.

열댓 명 모여서 이게 무슨 교회냐. 가정도 마찬가지고 가족도 마찬가지고. 니 나이에 뭐했나?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나이 육십이나 먹고 뭐했나? 안 놀았다. 안 논 꼬라지가 그거가. 보증 잘못 서서. 하여튼 지 인생 조져놓은 게 만날 보증 잘못 섰데. 사기 당했데. 사기는 그냥 당합니까? 동업이지.

악마는 아무것도 아닌데 자꾸 거기다 뭘 집어넣느냐? 의미를 집어넣어요.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아까 했잖아요. 성도는 모든 게 관광이라고요. 자기가 태어나서 살았던 그 고향, 그것도 관광이고. 스위스 알프스 가는 것도 관광이고요. 어디 가봐도 사람 사는 것 똑같습니다. 아침 일어나 밥 먹고 살고, 농사짓고 사람 농사짓고, 장사하는 사람 장사하고. 그 동네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나 우리 동네 옆에서 여기서 하는 짓거리나 똑같은 짓거리인데 그쪽 구경하나 이쪽 구경하나 별 차이 없지요.

인간은 뭔가 의미를 집어넣고 반대로 십자가는 그 집어넣은 의미를 지워버립니다. 한쪽은 의미 챙기고 한쪽은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지우개 지우는 것 보세요. 없는 거예요. 의미가 없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위기도 없다는 거예요. 위기도 없는 거예요. 사람이 뭐 건전하고 고상해야 위기란 게 있지요. 애초부터 흙인데 흙으로 돌아가는 데 그게 정상이지 그게 뭐 위기입니까.

예를 들면 현대자동차에서 생산하는 것이 폐차를 생산한다. 그럼 현대자동차 공정에서 뭔가 위기 있습니까? 고장 나는 그게 정상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합니다. 진짜 교회란 뭐로 보느냐? 교회란 블랙홀이다.

20년 전에 911 테러 일어났잖아요.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두 개가 다 날아갔습니다. 그 날아간 현장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라운드제로Ground Zero라 해요. 거기에 어떤 설계도로 설계됐느냐 하면 거기에 지하로 폭포가 떨어지도록 설계했어요. 모든 땅의 근원은 바로 비극적 사건이 근본이다. 모든 물은 여기서 삼켜버리는 거예요. 블랙홀은 모든 질량이 있는 것은 삼켜요.

소유를 갖고 있는 건 삼키는 게 블랙홀이거든요. 이 블랙홀이 뭐냐 하면 십자가입니다. 교회는 그냥 구멍이에요. 가진 자 다 와서 여기 빠져버려라. 빠져서 주와 함께 죽자. 이게 교회란 말이죠. 가진 것을 안 빠지고 그냥 유지해버리면 그것이 자기가 자진해서 뭘 초래하느냐 하면 자꾸 위기의식을 초래해요. 이것 빼앗기면 안 되는데. 이것 내 건데. 이것 사기 당하면 안 되는데. 우리 애 공부 잘하는데 공부 잘해야 되는데. 소유가 있으니까 가진 게 있으니까 계속 위기를 자초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설탕물이나 꿀통 마개를 열어놓고 벌 있는데 지나가보세요. 뭐가 날아옵니까? 벌들이 오지요. 왜 자꾸 나한테 사기성과 보증서라는 이야기 왜 자꾸 오느냐? 자꾸 밀어내는 이유가 뭘 지고 있어요? 날 파리가 들끓도록 조치를 한 거예요. 자기가.

교회에서 기도 좀 한다고 하니까 여기가 누가 달려드느냐 하면 기도깨나 한다는 집사나 권사들이 달려드는 거예요. 누가 오래 하는지 붙어볼까? 이게 교회. 교회 직분마다 봉사하니까 그것도 봉사냐, 그게. 이게 봉사라고 배틀 들어옵니다. 그럼 그걸 못 놓지요. 왜? 자존심 상하니까. 내가 니 콧대를 꺾고 놓고 난 뒤에 뭐 어떻게.... 어떤 경쟁자가 달라붙지요.

자본주의원리는 딱 하나입니다. 경쟁. 경쟁이 발전이 낳지요. 경쟁 없는 곳에는 발전이 없습니다. 시험 안 치면 아이들 공부 안 해요. 시험 없는데 공부 왜 합니까. 결국 나의 성공이 나를 망치게 만들어요. 그러면 나의 퇴보, 다시 말해서 나는 망하겠다. 이것도 복음을 가리는 거예요. 십일조 안 해도 됩니다, 교회 안 나와도 됩니다. 이게 복음을 가리는 거예요. 십일조 안 하고 예배 참석 안 하고 성경공부 참석 안 해서 뭘 얻겠다는 겁니까? 결국은 초월적 자아를 안 버리고 챙기겠다는 거잖아요. 이게 또 마귀잖아요.

그래서 이러한 두 가지의 극단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다 보여줍니다. 역대하 11장 4절을 보겠습니다. 이제부터 역대하 11장부터 24장까지 계속 나갑니다.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짓인지를 역대하를 통해서 살펴봅시다. 두 시간 만에 성경 하나 다 뗀 것 있지요. 그것처럼 오늘 이 시간 한 45분 동안 역대하 훑어봅시다.

역대하 11장 4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누가 읽어볼까요.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와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저희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돌아가고 여로보암을 치러 가지 아니 하였더라” 아멘.

르호보암 왕이 북진통일을 하려한 거예요. 남쪽이 북진통일해서 한 민족이 통일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군사를 많이 모았습니다. 수십만 군사를 모아서 치러나갈 그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뭐라 합니까? 싸우지 마라. 이렇게 나라가 둘로 나눠진 것은 여기 유다 택한 민족이 십팔 만이고요.

십팔 만 모아서 전쟁하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아이고, 잘했구나. 네가 이스라엘이 솔로몬 때문에 갈라진 걸 르호보암 너라도 다시 회복해야 하나님에 영광이지.” 이렇게 가르친 게 아니고, “올라가지 마라. 싸움하지 마라.” 왜? 갈라지게 한 것이 누구 뜻이다? 이게 내 뜻이야. 나로 말미암은 일이에요. 벌써 인간의 자존심보다 뭐가 우선된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언제 나타난다? 내 자존심이 블랙홀로 뭉개지는 그 순간에 등장하는 것이 뭐냐? 그게 말씀이에요. 내 자존심을 키워주는 게 말씀이 아니고 까불고 있어. 어디서 유사 주의 일을 한다고 주의 일 핑계대고 뭐 헌신하고 희생하겠습니다. 좀 나대지 마. 쫄랑대지 말고. 오지랖은 되게 떨고 있고. 가만있어, 가만있어. 세상 돌아가는 것이 다 내 뜻이야.

벌써 이스라엘을 위해서 르호보암 왕이 백성한테 인기 얻기 위해서 정치적인 술책 쓰는 것은 누가 인정 안 한다? 이스라엘 나라의 주인 되신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다시 위기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위기는 없는 거예요. 위기는 누가 만드느냐? 위기는 본인이 만드는 거예요. 본인이 왜 만드는가, 위기를 왜 의식하는가? 안 망하려고.

그러나 망하고 안 망하고는 주님의 안중에 그런 게 없습니다. 니가 망하고 안 망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망할 때도 말씀 나오고 안 망해도 말씀 나오면 그게 오케이지요. 그게 땡큐지요. 고급영어로 Thank you.

그러면 위기는 누가 만드는가? 위기는 악마가 만들어서 내 마음속에 심어준다. 악마가 뭘 노리고? 나의 소유성, 나의 소유한 것을 겨냥해서 악마가 위기를 심어주는 거예요. 네가 말씀대로 안 사니까 이런 저주를 받잖아 인간아, 라고 악마는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소유가 있어야 내가 성립되니까요. 그래서 소유를 원상 복귀하는 말은 이 길은 뭐냐 하면 그 잘난 나를 네가 중도에 포기하지 말아다오. 이게 악마가 하는 이야기에요.

제가 어제 주일학교 설교를 했는데 회당장의 딸이 죽어갈 때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가서 죽어가는 내 딸을 살려달라고 하면서 뭘 했느냐 하면 예수님의 손을 우리 죽은 딸에 얹으면 효과 좀 나겠습니다, 라고 방법까지 이야기해줘요. 곧 죽어가고 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 가자, 해놓고는 딴 데 들려버려요. 딴 데 들르니까 그 딸 죽어버렸어요.

회당장 혼자 급해요. 어딜 가느냐 하면 회당장과 정반대로 생각하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을 초청했잖아요. 그러나 그 여인은 12년 동안 하혈하는 병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감히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주님의 살을 맞댈 수 있느냐. 날리는 옷만 살짝 했어요. 옷만 살짝 했는데 주님께서 12년 동안 했던 그 병이 낫고 말았습니다.

그건 뭔 뜻이냐 하면 여인이 12년 동안 병을 앓았다는 말은 자기 딴에 자기 자아가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이게 소용없다는 걸 안 거예요. 그렇다면 나 같이 죽어 마땅한 것이 살아보겠다고 어디 감히 맨 살을 만지겠어요. 그냥 옷깃이라도 만지겠습니다. 이 자세 자체가 죽이면 죽이고 살리면 살리든지 마음대로 하시옵소서. 이런 뜻이란 말이죠.

그 다음에 죽고 난 뒤에 그 딸을 보고 일어나라고 살려냅니다. 주님에 대해서 어떤 기적을 요청할 때 회당장은 무엇을 의식했느냐 하면 살아 있는 내 딸이 있을 때 내 소유의 딸이 있는데 멀쩡할 딸, 이것이 있어줘야 내가 아버지답다고 생각한 거죠. 그 여인은 12년 동안 이미 자기는 다 깎였어요. 얼마나 자존심 회복하려고 무슨 짓이든 다 했겠습니까. 12년 동안 계속 피는 흐르고 있으니까 다 깎였어요. 깎다, 깎다보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없어요.

신약에서는, 계시는 발전하잖아요. 더 발전하게 되면 뭐냐 하면, “너 그 자리에 그냥 있어라. 십자가의 블랙홀로 내가 찾아가줄게.” 찾아가주는 겁니다. 서비스가 택배서비스에요. 네 자신은 나의 블랙홀, 나의 그라운드제로 모든 것을 소멸시키고 빠뜨리는 그 위력과 혜택을 내가 찾아가서 너에게 덮쳐줄게. 이게 바로 성령의 임함입니다. 우리가 남은 것은 껍데기 밖에 안 남아있지요.

그 다음에 11장 14절에서 17절에 보게 되면 르호보암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르호보암 시대에 제사장들 있지요. 레위지파들이 북쪽에서 제사를 다 철폐하니까 북쪽의 레위지파들이 남쪽 유다 땅으로 다 온 거예요. 남북이 갈라졌을 때. 그러니까 르호보암이 거기서 자부심을 가진 거예요. 우리는 여호와의 정통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전쟁하면 누굴 위해준다? 반드시 우리 편이 되 줄 거라. 그렇게 착각한 거예요.

그런데 14절에 뭐라고 돼있냐 하면, “레위 사람이 그 향리와 산업을 떠나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니 이는 여로보암(여로보암은 북쪽 김정은입니다)과 그 아들들이 저희를 폐하여 여호와께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여기 어떤 번역에 보면 ‘폐하여’란 말 대신에 적절한 말 했어요. 해임시키는 거예요. 목사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레위지파가 하는 일은 뭐냐? 말씀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북쪽에 있는 사람들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말씀 없이 살아도 나는 제대로 살고 있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나라를 만든 거예요. 북쪽에서는. 레위지파 없어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부자 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라는 분위기가 오늘날 교회뿐만 아니고 세상 전체에 확산됐습니다. 유럽에도 마찬가지고. 교회 안 갑니다. 잘 먹고 잘 사는데 왜 교회 가요. 젊은 사람들 보세요. 교회 안 가잖아요.
젊은 사람들 주례 안 듣습니다. 지 축하파티에 참석하라고 해요. 기성세대 잔소리 듣기 싫다고요. 그렇고 그런 주례 지긋지긋하다는 거예요. 뻔해야 자기들 위로하는 건데 그거는 셀프위로해도 그 정도해요. 그저 부모하고 복 받고 하나님 잘 섬기고. 그거는 한두 번 들은 게 아닙니다. 지겨워요, 그것도 이제. 그럴 바에야 우리가 알아서 축하파티가 낫겠다. 왜? 우리는 성인이니까, 나이 서른 넘어서 결혼하니까 이제는 우리가 섬기겠습니다. 잔소리할 생각 마세요. 우리는 내 식대로 삽니다. 왜? 나는 신격화됐으니까.

그렇게 나올 때 어릴 때 엄마 따라 교회 와서 찬송도 삐약삐약 병아리 하듯이 참새 하듯이 그렇게 찬송도 잘하고 피아노 잘 치고 노래 잘한다 했건만 그 다음부터는 교회 안 나가지요. 왜냐하면 사람은 진리대로 사는 게 아니고 재미로 살아요. 인간은 기분파에요. 기분대로 산다고요. 기분이 업 되는 교회는 계속 다닐 거고 자기의 재미를 충족 못하면 드럼 치고 기타 없으면 교회 안 가고 그렇지요. 청년회 모임해서 필리핀 여행가는 경비 안 대주면 교회 안 나오지요. 참 시대가 나만 생각하지 말고 시대 전체 분위기가 그리로 빠졌다는 걸 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이 남쪽에 오니까 12장 1절에, “르호보암이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매” 그 다음에 뭡니까? 무엇을 버렸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얼씨구나. 율법을 버리니. 목사가 복음을 버리니 온 교회는 얼씨구나 되는 거예요. 위대한 지도자부터 말씀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데 설교시간이 교양시간이에요. 여러분 이런 교양 가지면 사회 나가서 사람 대우받습니다. 교회에서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마귀 자식과 천국 자식을 떼놓는 이야기를 해야 돼요. 강제로 떼어놓아요. 주께선 그 일을 하시거든요. 저쪽에서는 가진 것으로 사람 대우받겠다. 이쪽에서는 내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사용했다. 그 두 색깔의 사람들을 강제로 떼어놓는 겁니다. 떼어놓는다는 말은 지옥 갈 사람은 때려죽어도 천국에 못 오도록 지금도 주님께서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어요. 참 이게 이걸 가지고 기쁜 소식이라 해요.

미군부대 철조망에서 초콜릿 얻어먹고 껌이나 얻어먹는 건 인정하지만 미군부대에 근무할 수는 없어요. 여러분들의 고속도로에 들어가려하면 뭐가 있습니까? 톨게이트 있어요. 돈 내는 데 있지요. 톨게이트. 톨게이트 지나지 아니하면 고속도로에 진입을 못해요. 만약에 톨게이트 없으면 고속도로에 누가 다니느냐 하면 지게차 다니고요, 경운기 다닙니다. 덜커덩덜커덩 온 세상구경 다하고.

톨게이트에 이게 고속도로, 천국으로 통한다면 이 톨게이트에 모든 종교는 다 집결돼있습니다. 집결되어 있어서 이렇게 하시면 천국 보내드리겠습니다, 라고 여기에 광고들이 많아요. 대학신입생 할 때 옆에 원룸 광고들 많이 오잖아요. 우리 원룸은 옵션 잘 돼있다고 하잖아요. 그처럼 톨게이트 주변에 천국과 통하지 않는 많은 종교들이 다 옵니다.

그런데 십자가 길은 인간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부정하거든요. 구원받는 자는 오직 십자가만이 뭐다? 하나님의 십자가, 블랙홀만이 능력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만이 모든 어떤 것도 십자가와 같이 죽자. 십자가만이 전하는 것만 와야 되기 때문에 톨게이트를 만들어서 주께서 여기서 성령으로 십자가 영으로 관여해버리면 여기는 그냥 평생을 톨게이트 근방에서 종교 생활하다가 지옥 가는 겁니다. 한 번도 십자가에 접어든 적이 없어요.

그 절차가 역대하에 쭉 나옵니다. 그 다음에 넘어갑시다. 율법을 버리게 되니까 12장 5절에, “때에 유다 방백들이 시삭을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였는지라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방백들에게 나아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붙였노라 하셨다 한지라”

너희들이 나를 버림으로써 너희들은 위기 찾아오게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이 있을 때는 위기가 안 찾아오는데 말씀을 버릴 때는 위기가 왔다는 말은 위기를 잘 극복하면 이스라엘 된다는 말이 아니고 누가 위기를 초래했는가를 보라는 겁니다. 말씀중심으로 살지 않고 이스라엘, 이거는 내 나라다. 내 자존심이다. 내 의미고 가치다. 그걸 붙드니까 더욱 더 날 파리들이 들끓는 거예요. 소유성이 있어야 존재가 있다는 그 원칙을 유지하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7절에 보니까 선지자 말을 듣고 이제 말씀이, 보세요. 그러니까 레위지파가 많이 왔지요. 그들이 모든 율법을 이야기했지요. 그러나 아까 했잖아요. 계시+계시, 어떤 위기가 왔을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이벤트를 사건을 일으켰을 때는 기존의 말씀이 하등 소용이 없게 된 거예요. 50년 교회 다닌 게 하등 소용이 없게 된 거예요. 성경 백 독 한 것, 신학교 졸업한 것 아무 소용없게 됐어요.

지금 이 현장에서 주께서 새롭게 주시는 그 말씀이 뭐냐? “또 죽어라, 인간아. 그냥 세상은 관광용이다. 그게 얼마나 편한 생활이냐. 자꾸 네 것 지키지 말고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지 말고 새로 시작하자. 나와 더불어 오늘 치 기억을 나와 함께 새로운 기억을 만들고 내일 되면 오늘 기억 잊어버리고 내일 치의 기억을 또 만들자.”

그렇게 주님이 살아 있어야 돼요. 내가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오늘 죽어도 그만이지만 주께서 살려주겠다는 데 다 뜻이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살려주시면 겸비하게 살아가세요. 또 약 먹고 하지 말고. 살려주실 때는 나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구나, 생각하고 또 나름대로 하루 동안 관광에 나서세요.

그래서 르호보암이 겸손하니까 해준 게 뭐냐? 시삭의 종이 되는 거예요. 이방나라의 종이 된 겁니다. 그게 기껏 살려주신 거예요. 원상회복 끝났습니다. 안 됩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요. 여기 보면 12장 5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붙였노라 하셨다 한지라”

붙였다는 말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민족들은 항상 세퍼트 개에요. 물어, 하면 물어야 돼요. 그래서 만약에 자식이 다섯 명 있다면 다섯 명이 다 지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살면 아이고, 하나님 나는 아무 걱정 없습니다, 할 때 윗집에서 비샙니다. 다섯 명을 해결했는데 위에서 비가 새는 거예요. 비새는 것 해결해도 또 위층에서 층간소음 나와요. 예상 못한 것을 자꾸 준비하여서 나로 즐거워 사는 것을 용납을 하지 않는 것, 내가 죽은 잔데 산 자 행세 못하게 하시는 것, 그게 바로 천국 가는 십자가만 살아 있는 천국 가는 통로입니다.

그 다음에 역대하 15장 13절에 보면, 아사 왕 때인데요.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면 남녀대소 죽어버리면 숫자가 어떻게 되겠어요? 줄잖아요. 교인 수도 준다는 것은 목사 입장에서는 자기 자존심을 대패로 깎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너, 교인 몇 명이고?” “다섯 명.” 이거는 차마 말을 못 꺼내요. “이게 무슨 주의 사자냐.” 이렇게 욕할 게 뻔하기 때문에.

그래서 15장 13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찾지 않는 것을 왜 죽이라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말씀을 채워야지 사람 숫자로 채우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아사 왕 때도 전쟁이 일어나지만 역대하 18장 봅시다. 이건 여호사밧 왕 때에요. 18장 1절에,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고” 진짜 나라가 잘된 거예요. 잘되니까 그 다음부터 눈을 어디로 돌리느냐 하면, “아합으로 더불어 연혼하였더라” 아합과 사돈을 맺은 거예요. 아합 왕은 북쪽이죠.

북쪽은 뭐가 없지요? 레위지파가 없지요. 이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거예요. 북쪽나라의 특징은 말씀 없이도 우리나라는 강할 수 있다. 그걸 시도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와 같이 강하니까 연합해서 싸우려고 나간 겁니다. 나갈 때에 여기 선지자를 봤는데 아까 이야기한 미가야 선지자가 등장했지요. 미가야가 선지자가, 아까 이야기한 것 후딱 넘어가겠습니다.

천상회의를 참석한 거예요. 그러면 거기서 미가야 선지자만 하나님 뜻을 알고 나머지는 아까 이야기한 거짓의 영을 그들에게 준 겁니다. 18장 20절에 거짓의 영이 와서 내가 사람들을 꾀이었다고 했거든요. 이걸 설명하면 인간은 자기의 마음을 악마에게 노출되게 돼있어요. 그러니까 내 마음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악마가 집어넣어준 마음 따라 움직이는 것이 로봇이 된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에요. 악마는 이걸 알아요. 니 까불어도 네 마음속에 내 영을 집어넣으면 너는 네 마음대로 안 돼. 가룟 유다가 사탄이 들어가니까 가룟 유다 지 마음대로 못하고, 가인도 사탄이 들어가니까 못하잖아요. 제가 어제 낮 설교에서 인간은 뭐냐 하면 인간은 기계에요.

기계에다가 악마가 자유를 부여하니까 갑자기 자아가 자율성을 찾게 해서 수동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 자기가 능동으로 바뀐 행세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더 강한 능력, 강하고 우연적인 능력, 갑자기 이 교회에 동회에서 들어와서 마스크 했는지 조사할 때 이건 내가 요청한 게 아니잖아요.

나보다 더 센 힘을 가진 능력이 와서 나에게 주눅 들게 만들 때 그걸 저는 어제 생산이라고, 생산할 때 우리는 뭐로 가느냐? 갑자기 여기서 예예예, 하고 수동이 되면서 어디로 가느냐? 흙으로 인생을 마감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흙이었어요. 흙으로 와서 어디로 간다? 흙으로 돌아가는데 그 과정 속에서 나라는 것이 반짝 등장한 겁니다.

아이들은 엄마 말 잘 듣잖아요. 어린아이처럼 돼야 된다는 데 이게 어린아이들은 수동이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컸다고 수동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능동으로 바뀌었어요. 자기가 결정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회 나가서 잘 다니던 회사 때려치우고 월급 얼마 되나 사나이가 보여준다고 사업한다고 엄마, 아빠 집 잡혀서 돈 몇 억해서 나중에 사기꾼한테 털리고 난 뒤에,

“어무이 좀 도와주이소.” 갑자기 능동에서 뭐로 바뀌었습니까? 수동으로. 아버지는 말하기를,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엄마는, “괜히 그런다. 내가 다 도와줄게.” 뒤로 몰래 생활비 다 대주고. 니가 있어야 내가 있다는 거죠. 자식은 부모를 버려도 부모는 자식을 못 버립니다. 그런 약점이 있어요.

역대하 20장 봅시다. 20장에 보면 전쟁을 합니다. 여호사밧 때에.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지금 이스라엘은 발발 떨고 있습니다. 겁을 집어먹었어요. 둘째 시간 하면서 첫째 시간도 그런 이야기했지만 크게 쓰겠습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위기 또는 위기의식.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아를, 자아가 있으면 자아는 자아중심이 되지요. 자아중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거든요.

자아중심이 아니라면 무슨 중심이다? 말씀중심이죠. 언약중심이고. 언약중심인데 자아중심이 돼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기 위해서 말씀중심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지요. 이 자아가 골치잖아요. 여기에 뭘 주느냐? 위기를 줘버리는 거예요. 여기에 하나님의 원수를 가동시킵니다. 원수를 가동시켜서 자아가 있기 때문에 뭘 느낀다? 위기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악마는 항상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아닌데 괜히 사람들로 하여금 겁을 집어먹게 하는 거예요. 두렵고 떨리게 만드는 겁니다. 그럴 때 이 자아는 본능적으로 뭐냐 하면 “저리 가, 저리 가.” 자기가 자기 보고 저리 가라 해야 되는데 자기 보고 설정을 자기 자신이 뭔가 교만했고 자기 위주로 살아왔다는 그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에게 해롭게 한 저것 보고 저리 가. 하나님이여 저 원수를 악마를 없애 달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나를 없애는 것이 해결책인데 엉뚱하게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저 나쁜 이단을 없애 달라. 니가 이단이야. 니가 니중심이잖아. 위기 왔으니까 처리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여기서 개입합니다. 개입하면 아까 역대하 20장 15절 말씀처럼 적어볼게요.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여기에서 두 가지를 생각하면 되지요. 일단은 전쟁은 늘 주어지게 마련이다. 전쟁이 있어야 위기가 찾아오고 위기가 주어져야 자아의 문제성이 밝혀지니까. 이 전쟁은 있고 그 다음에 뭡니까? 이 전쟁과 무엇과 결탁돼있다? 인간은 나 또는 우리들과 결탁돼있어요. 주님은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해서 이 전쟁의 적은 바로 뭘 적으로 삼는가? 이 적이 하나님의 말씀 또는 말씀의 임무를 적으로 삼는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주제넘게 끼어들어서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악마는 주님을 겨냥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그 옆에 서있는 자기보고 공격하는 줄 알고 혼자 벌벌 떨고 있는 겁니다.

집에서 저녁 먹고 있는데 예를 들어서 경찰이 왔습니다. “이 저녁에 누구십니까?” “경찰서에서 나왔는데요.” “누군데?” “형사입니다.” 그때 과속 안 하는 건데, 아아. 갑자기 지난, 걸릴 줄 몰랐다. 졸아서 문 열고, “어쩐 일이십니까?” “옆집에 문을 두드려서 안 열리는데 혹시 옆집 전화번호 아십니까?”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들어와서 호작질하는 악마를 지금 겨냥하고 있는데 우리가 나서서 나보고 지적하는 줄 알고 우리가 졸았잖아. 졸수밖에 없는 게 마귀와 한 통속이니까. 내 소유를 지키려 하잖아요. 내 교회를 지키려하고. 그 경찰이 오기 전에 얼마나 우리 가정은 화목한 가정이에요. 화목한 가정이란 말은 말씀 없어도 우리끼리만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여기에 주께선 위기를 줘서 나이 들었는데도 경기 들게 만들어버려요.

그것이 어디서 일어난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추가적인 계시를 주면서 점철되게 해서 그들로 하여금 십자가로 데려가는 거예요. 나중에 십자가는 경기 들지 않아요. 제자들로부터 해서 다 도망 가버려요. 경기 들 것도 없어요. 도망가지만 성령이 와서 뒷목을 딱 잡지요. 이것 너한테 해당되는 이야기다.

네가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완전히 거덜 날 입장에서 네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입장에서 내가 해결 다했다는 이미 해결 다한 거예요. 우리 새로 시작하자. 병든 것 고치지 말고 가난한 것 부자 되지 말고 그것 말고 새로 시작하자. 소유 되찾지 말고 말씀부터 시작해서 말씀으로 끝났다는 이 사실을 네 안에 내용물로 집어넣어버립니다.

그래서 역대하 20장 전쟁을 했지요. 그들이 전쟁을 했거든요. 거기에 군대가 나타났는데 여기 21절, 22절에 보면 갑자기 무기가 등장하는 게 아니고 숫자가 나타나는 게 아니고 뭐가 나타났습니까? 노래와 찬양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들이 24절에 보니까, “유다 사람이 들 망대에 이르러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뿐이요”

야아 주님께 속한 전쟁은 뭐를 확인시키느냐 하면 이 세상에 움직이고 있는 모든 인간은 사실은 시체가 움직이는 것이고 흙덩어리가 움직이는 거예요. 동사무소에서 점검하러 찾아온 것은 사실은 흙이었습니다. 사람인 줄 알았지요. 흙이지요. 악마의 마음을 품은 그 소유성을 가진 그 흙이 찾아와서, “마스크 했어요?” 이렇게 오는 거예요. 흙이 조각품에 경기 든 거예요. 깜짝 놀란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내가 흙인 줄 몰랐기 때문에. 저쪽이 흙이면 나도 흙이거든요. 흙이 성령 받아서 구원받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은 반드시 흙이라고 규정하고 들어온 거예요. 이미 죽은 자로 규정하고. 살아도 내가 산 게 아니고 흙은 살지를 못합니다. 다만 살지 못한 흙이 살았다는 말은 내 안에 주께서 살아 있기 때문에 흙덩어리로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 세상 관광하라고, 죽음 이후의 세계는 이렇게 보여져야 된다고. 그게 바로 예수님의 증인인 겁니다.

그럴 때 여기 역대하 20장에서 그들은 뭘 했습니까? 찬양했지요. 그걸 여기 뭐냐 하면 26절에, “제 사일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이름을 브라가 골짜기라 했다. 이것은 마치 출애굽 할 때 홍해를 건너왔을 때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선창해서 불렀던 찬송 있잖아요.

그 찬송의 내용이 뭐냐 하면 우리는 한 게 없습니다. 우리는 한 게 없었고 주께서 애굽 사람들을, 우리는 애굽 사람들 손도 안 댔습니다. 주께서 손대서 다 죽게 했습니다. 죽은 시체를 확인하는 그 일이 주의 말씀의 해석이에요. 니 시체야, 라고 블랙홀로 집어넣는 그 블랙홀의 환경을 반복해서 확인시키는 것이 바로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이지요. 그걸 돌파지요. 세상 권력에 대한 돌파, 국가 권력에 대한 돌파, 그게 교회입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낌새가 계속 나타나고 있잖아요.

그 다음에 역대하 24장 보겠습니다. 요아스 시대에요. 역대하를 쭉 보게 되면 처음의 왕들은 자기 딴에 백성들에게 인정받는 왕이 되겠다고 뭐 말씀대로 살고 우상 철폐하고 이렇게 해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반드시 나라가 국력이 강해집니다. 이 말은 말씀 없이 소유성으로 버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요. 이만하면 그럴 듯하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게 힘 있는 이스라엘답다, 하는 그 순간 뭘 버리게 돼있어요? 말씀을 버리게 돼있습니다. 왜냐하면 소유가 있는 곳에 뭐가 있기 때문에? 자아가 생기기 때문에.

그래서 역대하 24장에서 요아스가 처음엔 잘했는데 그것도 여호사밧이란 제사장 있을 잘했는데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했는가? 그 다음부터는 이상한 행세를 하고 있는 거예요. 18절에,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긴 고로 이 죄로 인하여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저에게 보내사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 하시매 선지자들이 저에게 경계하나” 그 다음에 뭡니까? “듣지 아니하니라”

왜? 여유만만 하니까요. 집에 재산 있겠다, 자식 잘 키웠겠다, 남들이 사람답게 산다고 칭찬하겠다, 아쉬운 게 뭐가 있어요. 아무 아쉬운 게 없어요. 그러니까 위기감이 없는 거예요. 전에는 위기감이 있을 때 왕이 누구 말을 들어요? 선지자 말을 들었지요. 그러나 계시가 계속해서 십자가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벌써 24장이잖아요. 아까 11장과 경우가 달라요.

계속해서 계시가 가면 갈수록 어디로 가깝다? 십자가로 가까워요. 십자가는 블랙홀로 가까이 가는 거예요. 그럴 때는 왕이 이제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한 번 봅시다. 처음에는 선지자의 말을 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한다. 세 번째는 선지자를 죽인다. 이게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십자가란 환경은 계속 죽어나는 사람이 있어줘야 돼요.

처음에 조그만 교회, 개척교회 할 때 한 댓 명 개척교회 했다. 그런데 부산에서 제일 큰 교회 됐다. 그 다음부터 복음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까? 왜냐하면 십자가는 그 교회 자체를 다 버려야 되기 때문에. 아까워서 못 버려요. 수만 명 교인들 아까워서 못 버려요. 수백 명 교인들 아까워서 못 버려요.

그래서 교인들이 어떤 목사를 원하느냐? 지금보다 더 키워주는 목사를 원하지요. 이미 교회가 우상이 돼버린 거예요. 설마 큰 교회니까 하나님이 몽땅 버릴 리는 없겠지. 큰 교회니까 버리는 거예요. 그게 톨게이트에요. 십자가를 가리는 것이, 교회가 십자가를 가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된 거예요.

넓은 길로 가게 된 거예요. 좁은 길로 가는 게 아니고. 넓은 길로 가지 말라. 이것 언제적 들은 말씀이에요. 그런 건 안 들려요. 교회를 섬겨라. 맨날 하는 소리에요. 큰 교회 더 키워라. 맨날 하는 소리입니다. 네 자신을 부정하라. 이거는 부정적 언사를 날려버리면 있는 교인도 나가기 때문에 목사가 스스로 조심해요. 혹시 실수해서 그런 말 나올까 싶어서. 안 나옵니다.

교양 갖추고 교회가 세상보다 유식하고 더 인간답게 삽니다. 그걸 이야기하고 그걸 가르쳐요. 자기 절제할 줄 알고 자기 관리할 수 있는 훌륭한 인격자 만들어냅니다. 교회가 그것으로 상품 걸고 그것으로 승부 걸어요. 스스로 자긍심을 갖도록 긍정적 마인드를 갖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18절, 19절 보면 안 듣지요. 계속 역대하 24장 20절 보게 되면,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 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스가랴 선지자에 성신이 임해서 외치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 여기에 누가 계신다는 거예요? 여호와가 계신다는 거예요. 근데 너희들은 뭐냐? 내가 여기 있다고 거기에 정신이 다 팔려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 있음은 누구를 방해한다? 주님이 여기 계심을 훼방질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따져봅시다. 주님의 계심은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돋보이는 그 현장이 주님이 계시는 곳이에요. 다만 주님은 여기서 피해자 입장에서 계시는 거예요. 내가 돋보이기 때문에 주님은 내 발 밑에 밟히고 있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씀은 나를 돋보이기 위해서 돋보이는 그 자체를 근원적으로 부정해버리죠.

그러면 나는 이미 돋보인 상태기 때문에 여유만만한 상태기 때문에 강력하게 말씀을 차버릴 때 그때는 뭐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가 십자가 피가 또 다시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내가 바로 주님을 죽인 인간이구나. 그래서 스가랴가 죽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마태복음 23장 35절에 보면,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스가랴입니다)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그래서 이곳에 살 권한은 예수인 나는 없다. 이 말이에요. 나는 너희들이 좋아하는 이곳에 있지 않겠다. 나는 떠나서 딴 데 가겠다. 그리고 자기 사람은 이 백성은 예수님을 죽였던 이 땅에서 너도 죽은 자로 여생을 보내라. 이게 바로 언약이 완성될 때의 모습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의미를 다 지워버려요. 모든 의미를 다 지운다는 것은,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이야기하고 없게 하는 그 사이에 존재와 의미와 가치가 자존심이 가득하거든 악마가 씨앗을 뿌렸다고 보시면 돼요. 그 사이를 그냥 갈대숲 사이를 어슬렁거리면서 인생 보내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말씀중심이어야 하는데 태생이 우리가 아담의 태생이라서 내가 가진 것 중심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이 가지고 있는 이런 중심이 얼마나 십자가를 방해하는 원수의 모습인 것을 십자가의 안목을 가지고 말씀의 안목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파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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