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2b 부산강의 : [시편]37(22편)-천국 요소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은 이름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없는 존재, 그러니까 요셉의 형제들로부터 배제되었을 때 무엇이 없느냐 하면 이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어버렸으니까. 있는 자에게 이름이 있는 이유가 이름과 하나씩 일대일 맺어줘야 되거든요. 아담이 하나님께서 이름 지을 때 그냥 짓는 게 아니고 앞에 지나가면 이름 짓잖아요. 하나의 존재가 있어야 일대일 대응이 돼요. 죽은 존재, 없는 존재는 현재 살아 있는 사람한테는 이름이 삭제가 돼버립니다. 이름을 없애버려요.
없는 이름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주의 이름으로 구원한다는 뜻이에요. 주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름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름 짓는 자한테는 어느 누구도 창조된 것은 이름을 지음 받게 되지만 창조하신 분에게는 누가 이름 짓습니까? 만약에 창조하신 분의 이름을 지어버리면 본인이 하나님보다 더 위의 존재가 돼요. 지가 하나님 만든 존재가 돼요.
그래서 이름 없음을 출애굽기 3장 16절에 보면 나오는데 모세가 당신의 이름은 누구냐고 물어요. 이름이 있을 때는 이방신은 이름이 있어요. 상대를 해야 되니까. 이름을 부를 때에 조르르 쫓아와야 되거든요. 이방신은 시다바리입니다. 이방신이 인간의 하인이 되는 하인 노릇하는 이유가 받아먹은 게 있어요. 뒷방 시고모처럼. 나름 제물을 바쳤잖아요. 지가 받아먹었으면 내놔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야 거래가 관계가 유지되지 않습니까.
보통 안 믿는 사람들 제사 지낼 때 보세요. 그냥 조상신 부릅니까? 아니지요. 뭔가 유인책이 있지요. 좌청룡 우백호해서 대추 놓고 감 놓고 해서 거창하게 하잖아요. 이렇게 했는데 가만있기만 해봐라. 뭔가 받는 쪽은 주는 자에게 복을 낸다는 게 인간들의 기본 거래상식입니다. 이것 어기면 안 놀아줘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누구한테 받느냐 하면 일체 인간에게서 받질 않습니다. 구약 제사에서 받지 않는다는 말은 피 묻은 제물만 받는다는 뜻이에요. 속죄제 뭘 드려도 피가 중요해요. 피가 왜 중요하냐 하면
피를 성막에 뿌리고 제단에 뿌리는 이유는
이것은 우리가 드린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 와서 말씀 안에 계신 분이 스스로 작용을 해서 하나님이 하나님께 드리는 방식에
우리가 시중들뿐이지 우리가 낸 것을 우리의 노동을 주께 드린 게 아니란 뜻에서 피를 묻힌다고요.
십계명에 안식일 있지요. 안식일의 특징은 인간의 노동이 들어있지 않은 날이에요. 6일까지 인간이 노동하잖아요. 그날은 노동하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노동해서 이스라엘이 관리되고 운영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어져가는 게 아니다. 안식일의 되풀이, 안식일의 반복으로서 안식일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노동과 안식일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노동과 대비시켜 묻는 겁니다.
6일 동안 네 노동이 너를 살리겠느냐, 안식일에 주님 하신 노동이 너를 살리는지 묻는 거예요. 그럼 안식일 지킨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주님의 일하심으로 우리가 지난 6일 동안 밥 먹고 살았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날이 안식일이에요. 만약에 그날에 일해 버리면 뭐가 죽습니까?
내가 일한 것으로 인하여 내 가족이 먹고 산다는 것이 갑자기 부각이 되고 주님의 거저주신 햇빛과 공기와 잘 때도 움직이는 자율신경계, 내가 의지하지 않더라도 내장부분, 이런 것은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돼있어요. 잠잘 때도 위장이나 이런 기능은 쉬지 않습니다. 네가 숨 쉬라, 허파야 숨 쉬라. 이러다가 잠 언제 잡니까. 잠 못 자지요.
인간은 아무것도 손대지 않지만 그냥 돌아갈 때 그게 잠이고 밤이에요. 그래서 밤과 잠으로 어제 날과 오늘의 날을 하나님께선 구분 짓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그게 한 날이라. 날의 개념은 인간이 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노동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재단한 거예요. 너는 나 없이 못 산다는 것을 잘라낸 겁니다.
참새도 잠을 자고 코끼리도 잠 자. 죽은 상태가 돼. 아침 되면 내가 살려줄지 말지 내가 결정할 거야.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네가 아는 것과 네가 가진 모든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완전 끝이 아니지요.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그냥 손을 놔버리란 말이죠.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백만 한 번, 백만 두 번, 자꾸 세다보면 잠이 안 와요. 백만 세 번, 배터리입니까? 세지 말고 그러다가 잠이 들어버리면 내가 숫자를 헤아렸기 때문에 잠 잔 게 아니고 그냥 본래 내 모습은 죽은 게 본래 내 모습이에요.
그래서 흙 이름이 아담이거든요. 흙에서 와서 어디로 갑니까? 흙으로 돌아가니까 죽어도 절대로 손해 본 장사한 적이 없어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니 이것 수지맞는 장사지 않소. <타타타> 김국환 노래에 나오잖아요. 뭐가 손해 봤어요. 없던 게 생겼는데 뭐가 손해 봤습니까. 없던 게 생겼고 생긴 게 없는 것. 뭘 따져서 손해라 합니까? 당연한 거지요.
성경은 거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창세기 3장부터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만약에 너한테 영생이 주어지고 생명이 주어지거든 그건 덤으로 여겨라. 마땅한 걸로 여기지 말고 내가 악바리처럼 기도해서 얻었다 하지 말고 그냥 생긴 거예요. 주의 뜻으로 천국 가는 것은 그냥 생긴 거예요. 지옥 가는 건 당연한 거고 지옥은 필수고 천국은 주님의 선택이고. 횡재한 거죠.
삼성그룹 이건희 보세요. 죽을 때 원불교 귀의해서 죽었잖아요. 돈 많은 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돈은 살아 있을 때 있지요. 내 본질을 바꿔주지는 못해요. 돈이나 권력이나 내 본질은 못 바꿉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자기가 서울시장 됐다고 해서 본질이 바뀐 게 아니에요. 여비서 건드린 본질을 어떻게 바꿔요.
그런데 마귀가 들어와서 뭘 주장하느냐 하면 나의 의미, 나의 가치는 아마 고상할 걸, 이러다가 자살했잖아요. 이것 버리면 자살할 이유 없다고요. 허상에 매인 거예요. 나는 괜찮은 존재다. 이런 허상, 나는 배울 만큼 배웠다. 이게 전부 다 흙만 있으면 되는데 흙에다 플러스 허구가 귀신 씌우듯이 씌운 거예요. 이걸로 하여금 자살하게 만든 겁니다. 꼭 가룟 유다 같아요.
성도가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물으면 이름 있음이 이름 없음으로 가는 거예요. 이름 있다는 것은 여기 존재한다. 존재란 말 어려워서 미안합니다만 이 말 외에 적당한 말 없어요. 인간이 여기 있다, 존재란 뜻이에요. 그런데 주님께서 뭐로 바꿉니까? 이름을 없애버리면 아까 했지요. 이름이란 뭔가 있어야 돼요. 이름 없음 하면 존재 없음이거든요.
그렇다면 내가 있을 때 교인들이 제일 원하는 것은 나의 구원이었습니다. 나의 구원, 나의 천국행, 나는 죽어서 좋은 데 가고 싶어. 이것이 이름 없음, 존재 없음이 돼버리면 뭐가 날아가요? 나의 구원욕구가 거부당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론이 이단이에요. 모든 구원론은 다 이단입니다. 박옥수부터 해서 모든 구원론이 신천지부터 해서 전부 다 하는 것은 구원을 미끼로 집단화시킨 거예요. 돈 빼내고 재산 다 바치고 이런 것. 왜냐하면 내 자체가 흙으로 돌아가는 게 마땅한데 세상에서 뭔가 들은풍월이 있어서 자기 존재 가치를 붕 업그레이드 시켜놔 버려요.
이름 없지요. 그럼 구원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 새로운 이름이 와요. 이게 뭐냐 하면 주의 이름이에요. 그래서 주의 이름은 이름 있다고 여기는 자에게는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 구원욕구, 내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데 자기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는 무엇이 유별나게 소중하고 고귀하냐? 주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과 이름 없음 사이에 뭐냐 하면 일부는 주인이 되고 나는 시킨 대로 움직이죠.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나는 종이니 그걸로 족합니다. 또는 이방여자 같으면 종이라 하지 않고 자기를 뭐라 합니까? 나는 개. 주님은 나의 주인이고 나는 개입니다. 바로 이런 관계에 있을 때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아까 이야기한 천국의 요소가 살아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가 뭐냐 하면 새 언약의 완성이거든요. 새 언약 완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걸 다른 말로 다 이루었다가 나옵니다. 성도에게만 나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안 나와요. 너 나이가 서른 살이 다 됐는데 앞으로 뭐 할 건데? 다 이루었다. 이게 무슨 이상한 소리해. 뭘 다 이뤘어? 몰라. 주께서 하신 일을 다 이뤘어. 언제까지? 오늘까지만 그래요. 내일 되면 또 내일 주가 살려주니까.
항상 주님께서 우리 인생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생이란 것이 주님의 일하심의 모판이라 보면 돼요. 모내기할 때 모판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네모라는 하루하루가 시간단위로 이건 저녁이고 이건 낮이고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의식이 될 때 이건 의식 없는 무의식 상태, 이렇게 해서 그걸 계속해서 이어져나가는 거예요.
너의 모든 염려는 그날에 족하니라.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마라. 그런 것은 끊어졌다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존재를 미리 천국까지 연결시킨 이방신을 믿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짓거리란 말이죠. 이렇게 딱딱 끊어줄 때 끊어준 관계, 주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해서 끊어준 이 관계가 하나님의 그 나라와 그 의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이어져버리면 주변의 환경을 내가 알아서 조성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나라와 그 의란 뭐냐 하면 주님이 가신 나라란 말이죠. 그러니까 천국이 지옥 같은 세상에 중첩돼있는 거예요. 천국이 와서 지옥 가는 우리를 끊어주는 겁니다. 왜? 그딴 것 생각하지 말란 말이죠. 앞으로 대선 누가 될 것인가, 이재명이 될 것인가, 윤석열이 된 것인가? 그런 것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물론 심심해서 할 일 없어서 남아돌거든 생각하세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번에 서울시장 누가 되겠느냐? 오세훈이 되겠느냐, 아니면 상대방 여자가 되겠느냐? 그런 것들의 뭐냐 하면 갑자기 이게 이어졌어. 주여 이틀만 봐주세요. 만약에 4월 14일에 딸 결혼식이 있다. 그런데 목사님 설교하시기를 주께서 재림하신다, 구름 타시고. 갈등 일으키네. 14일 전에 재림하시면 딸 시집을 못 가잖아요. 살짝 짜증이 나는 거예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딸 시집 보고 15일 재림하시기 바랍니다. 스케줄을 누가 짰는지.
여기서 이름이 있지요. 주의 이름, 아까 진도 나가봅시다. 이름이란 있을 경우만 있다 했어요. 그러면 주님의 이름이 있다는 말은 결국 이름이라는 것은 하늘나라에 있는 게 아니라 이 지상에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름이 어딜 와야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 와야 돼요. 이 세상에 오게 되면 아담에 있는 인간들이 갖고 있는, 이게 좀 어려워요.
인간들이 자기 이름이 있잖아요. 왜? 자기 조상이 있으니까. 이름이 있을 때는 시간과 공간이 구축돼있습니다. 인간은 나 어디 살아, 나는 여기 여기에 산다. 나이는 얼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기를 구성합니다. 자기를 표현하기도 하고 구성해요. 그렇다면 예수님도 이 땅에 시간과 공간을 갖겠지요. 그런데 시간과 공간이 같이 있으면 이걸 중첩이라고 해요.
그런데 인간들은 내가 여기 있으니까 뭘 절대화시킵니까? 나의 절대화는 나의 시간과 내 공간을 절대시하는 겁니다. 절대시한다는 것은 주된 관심사에요. 어린애가 다섯 살 먹은 애가 서울시장 투표에 관심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관심 없지요. 엄마가 오늘 저녁에 뭘 내놓을지 거기에 관심 있지 관심 없어요.
애들의 주된 관심사는 뭐냐 하면 자기 몸에 지금 필요한 것, 자기 욕망에 필요한 그 범위 내에는 시간과 공간이에요. 저녁에 잡채 해줄게. 몇 시에 해줄 건데, 이러지요. 한 달 뒤에. 한 달 뒤를 애들은 몰라요. 내일모레 해줄게. 모레도 그 애는 몰라요. 곧 해야 돼요.
그런데 주님의 시간과 공간은 베드로후서에 보면 주님의 시간은 뭡니까? 하루가 천 년 같지요. 공간은 사도 바울에 보면 예수 안, 같은 말로 십자가 안, 같은 말로 성령 안 이렇게 돼있어요. 같은 말로 말씀 안, 말씀 안에서, 예수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 계속 반복해서 나온다고요. 이 공간 눈에 보입니까? 이게 안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의 시간에 입각해서 세례요한에 의하면 하늘나라는 가까이 왔다. 인간들은 가까이 왔다 하지 말고 딱 집어서 열 시간 남았다든지 그렇게 해달라는 거예요.
다시 복습해봅시다. 아담 안의 인간은 자기의 이름이 있잖아요. 이름이 있다면 이건 존재하는 게 돼요. 이 존재는 그냥 존재하는 게 아니고 내 시간과 공간, 환경을 통해서 내가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할 때는 여기서 뭘 끄집어내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에서 자기 존재를 하기 때문에 여기서 나의 가능성을 하는 거예요. 내가 실현 가능성을 있는 시간과 공간을 인간은 자기 품에 딱 안고 있어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 하니까 인간들은 묻는 거예요. “스케줄 어떻게 됩니까?‘ 그걸 왜 묻느냐 말이죠. 사도행전 1장에서 내가 다시 온다 하니까 ”그때가 언제니이까?“ 성령이 오게 되면 무엇이 날아가느냐 하면 인간은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그동안 나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했던 시간과 공간이 날아가 버려요. 주님의 시간이 그냥 덮쳐버립니다.
주님의 시간이 덮쳐버리면 그런 사람이 있어요, 사도 바울이란 사람이 있어요. 주님의 성령이 와버리면 소원이 뭐냐 하면 빨간 걸로 적을게요. “후딱 내 시간, 내 공간 떠나고 싶어요.” 빌립보서 1장에. 내 소원이 하나 있는 데 그 소원이 뭐냐? 빨리 육을 벗고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런 사도 바울에게 이 체험을 해줬어요. 고린도후서 12장에, 내가 삼층 천에 올라갔는데.
인간이 시간과 공간에서 통용되는 이걸 언어라 해요. 내 말로서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어떤 낯선 시간과 낯선 공간이 있더라. 낯선 시간과 공간은 우리 쪽에선 어떻게 이해되느냐? 이게 죽었을 때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이에요. 육신이 떨어질 때. 죽었을 때 시간은 흘러요, 안 흘러요? 흐르지 않지요. 주님의 시간은 흐르지 않아요.
그래서 성령이 임한 그것을 시간이라 하지 않고 그걸 순간 또는 사건이라 하는 겁니다. 이십 년 기도했더니만 응답받는 게 아니고 주님의 성령이 임한 그 순간을 통해서 다시 돌아보니까 그때는 주께서 기도하게 하셨고 헌금하게 하셨고 성경 보게 하셨다는 것이 순간을 통해서 내 시간을 재해석하는 겁니다. 이럴 때 나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나의 기억이 아니고 누구의 기억이냐 하면 주님의 기억, 이런 점에서 성도는 이미 다 이룬 거예요.
다 이뤘는데 그 이룬 게 너무 지루해. 지루하고 너무 골치 아파요. 그냥 몸 건강하게 좀 가면 좋은데 아파요. 그러니까 다 이뤘다는 기간이 좀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는데 예수님이 당했던 시련과 고난을 공동체험하기 위해서는 남은 인생이 그냥 쉽게 가는 법이 없습니다. 예상 밖의 무슨 난리를 칠 줄 몰라요. 교통사고 일어나서 거의 초죽음 될 수도 있고 부도 맞아서 사기 당해서 있는 재산 다 날려서 생전 해보지 않은 거렁뱅이 체험도 해보고 온갖 것 다 해보게 해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너무나 냉정하고 냉혹하게 이야기합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게 골라서 감사하지 말고 모든 일에 감사하라. 왜? 너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너는 아무것도 심각하거나 진지한 구석은 아예 없어요. 사람이 스트레스 받는 것은 자기 자신을 너무 진지하고 대단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거예요.
오뉴월에 개 보세요. 오뉴월의 개가 오일팔을 기억하겠습니까? 북한의 핵문제 때문에 고민하겠습니까? 기름 값 오른 것 때문에? 그냥 잡아 잡수세요. 음력 오뉴월 됐으니까 빨리 나를 잡숫든지 하세요. 자기를 요리를 해먹든 그전에 자기는 낮잠 자고 있다니까요. 그러니 개가 인간보다 나아요.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잡풀도 주께서 오늘도 친히 기르시나니, 라고 돼 있잖아요. 공중에 새를 보라. 누가 저렇게 창고 있느냐, 없느냐 묻지요.
주님의 모든 말씀은 극단적이에요. 아담이란 범주 그 바깥에서 나오시는 말씀이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지 않은 사람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율법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율법을 주셨거든요. 예수님은 율법을 지키시는 분이 아니라 율법을 만드신 분이죠. 이걸 세 자로 ‘출제자’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이 율법을 왜 못 지키느냐 하면 출제자만 알지 우리는 모르거든요. 그 출제자가 낸 정답은 뭐냐 하면 십자가에요.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전에 의논한 정답은 뭐냐? 십자가뿐이에요. 그 십자가의 특징이 뭐냐? 어리석은 거예요. 인간들 눈에는. 어리석어야 정답이에요. 왜? 인간의 지혜라 하는 것은 자기가 얼추 그 내용대로 해낼 것 같은 어떤 가능성과 실현가능성을 내비칠 때 인간은 의미를 두거든요.
제가 워치만 니와 잔느 귀용을 그렇게 부정하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워치만 니, 잔느 귀용이란 16세기 사람인가 하는 여자, 그분들이 우리나라 교회에서 많이 팔리는 이유가 이게 대단한 분인 동시에 나도 얼추 따라붙을 수 있는 가능성을 주기 때문에 문제에요. 예수를 믿는 게 아니고 워치만 니, 잔느 귀용을 믿고 있어요. 그게 모범인줄 알고.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왜 모범이 안 됩니까? 막 산 강도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왜 모범이 안 돼요? 신세 조져놨거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거거든, 그게. 세리와 창기와 강도는 왜 우리의 모범이 못 됩니까? 그건 안 해도 될 것 같거든요. 아닙니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막달라 마리아 될 수 없어요. 모든 것이 반대로 거꾸로 가고 있는 거예요.
산이 있으면 두 사람이 있으면 한 사람은 이쪽으로, 한 사람은 이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동일한 힘이에요. 동일한 힘이지만 방향 다르면, 수학에서 방향 다르면 같은 값을 주지 않아요. 이걸 벡터라 하는데 같은 양이면 스칼라 양이라 하고 방향을 붙이면(A 위에 화살표) 이건 다른 값이에요. 방향이 다르면 가는 운명이 달라져요.
아까 했던 것 다시 해보겠습니다. 이쪽이 천국이라면 천국 가는 특징이 뭐냐? 천국의 요소가 발현되는 나오는 사람은 천국 가고 지옥의 요소가 나오는 사람은 이것은 아무리 교회 나오고 목사 되고 열군데 개척교회 하고 많은 기적을 베풀고 기적을 받아도 이건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그 천국의 요소가 뭐냐 하면 다 이루었다, 에요.
그러니까 뭘 자랑하겠습니까? 네가 했나? 아니. 내가 행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은 것을 자랑하는 겁니다. 보통 성경에 보면 십자가 자랑하지요. 십자가 입에 달아놓고 하는 것은 길거리 전도하는 사람 다해요. 그것 말고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이걸 알게 된 것을 감지덕지 고마워하는 사람이에요. 그게 천국 가는 사람이에요. 먹는 것 입는 걸로 족한 줄로 아는 것.
그런데 먹는 것 입는 걸 족한 줄이 이게 가능성이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집에 10억 있으면 다들 그 정도는 갖고 있잖아요. 집에 10억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왜? 인간은 타인의 욕망이 나의 유혹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모든 사람이 10억을 갖고 있는데 그중에 만약에 15억 갖고 있다면 그 다음부터 이 사람은 고민에 빠져요.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내가 못 따라갈 것 같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시골학교, 샘들과 학생들 숫자 적어서 친군지 선생인지 분간 안 되는 그런 학교에서 산수시험을 내는데 요새는 수학이라 하지요. 95점, 90점, 제일 못한 아이가 85점, 백 점도 여러 명 나왔을 때에 애들은 신났어. 우리 마을 애들이 이렇게 공부 잘할 줄이야. 그런데 서울서 전학 하나 왔어요. 개별 학교시험 말고 우리나라 전체로 하는 모의고사 쳤는데 백 점 맞던 아이가 10점, 5점, 7점, 서울서 온 아이는 95점.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됩니까? 자기 분수를 알았지요. 아 내 시공간 말고 다른 시공간 가면 나는 달리 판결되는구나.
그러니까 교회에서 목사들이 교인들끼리 배틀 시킨다고요. 헌금 배틀, 기도 배틀, 금식 배틀, 헌신 배틀 특히 봉사 배틀 시킨다고요. 하여튼 사랑받기 위해서 죽을 등 살 등 주님께 영광 돌린다는 명분하에 봉사한다고요. 그런데 여기에 다른 범주, 다른 시공간 예수님이 왔잖아요. 이쪽은 말씀 지킨다고 굉장히 분주했는데 딱 오니까 누가 지남철에 달라붙었느냐 하면 세리, 창기, 강도 이런 자들이 달라붙은 거예요. 이런 자들이 죄인, 이 자들보다 천국 더 가는 겁니다.
만날 이 사람들은 저들과 같지 않음을 자랑스러워했어요. 세리 같지 아니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 했습니다. 십일조하면 교회에서 껌뻑 죽잖아요. 십일조씩이나 하는데 이쪽에선 뭐냐 하면 땡 탈락이에요. 누구 때문에? 세리 때문에 땡 탈락이에요. 아까 언덕 그림 다시 보세요. 언덕에서 한쪽과 한쪽으로 갔을 때 천국 요소와 지옥 요소 갈라지는 겁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 비유할 때 아침에 열 시 온 사람, 열두 시에 온 사람, 오후 세 시에 온 사람, 마지막에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 있지요.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제일 늦게 온 노동을 적게 한 사람에게 몫을 주니까 아침에 온 사람이 삐진 거예요. 배틀 없습니다. 이런 것 경쟁하기 없어요. 이게 아무 의미 없다고요. 달란트 비유가 어떠니 핑계대면서 자꾸 빼먹으려고 하는데 그런 게 교회가 아니에요. 그거는 보이스피싱이지 그건 돈 빼먹는 거지 이런 것 없어요.
어떻게 못났는데 천국을 가느냐? 이 이상한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해서 찬미하는 거예요. 이게 교회에요. 있을 수 없는. 목사가 교인에게 그딴 식으로 신앙생활할거면 우리 교회 나오지 마소. 진짜 신앙인은 뭐라 합니까? 내가 나오고 싶은데 니가 왜. 그저 하나 꼬시려고 뭐 대접해주고 빵 주고 우리 교회 좋습니다. 왜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했어요. 이거는 뭐냐? 다른 교회와 배틀하고 싶어서. 누가 부흥 속도가 빠른지 붙어볼까, 누가 하나님이 계신지 경쟁해볼까? 이런 식이에요.
그래서 아까 시편 29절에 보게 되면,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이렇게 돼있거든요. 이게 뭐냐 하면 새로운 영토 또는 장소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지옥 갈 사람과 천국 갈 사람이 모두 누구한테 무릎 꿇는다? 주님에게 무릎을 꿇는 거예요. 이게 새로운 영토에요. 주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천국으로 가면 이걸 긍휼로 보고 이거는 하나님의 공의로움이에요. 주께선 둘 다 율법을 만드신 분이거든요. 그러면 율법에 준해서 율법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신명기 28장에 네가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들어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거든요. 율법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받는 것은 이걸로 입 다물어야 돼요. 끝났어요. 평가. 제는요? 이렇게 손가락질하면 안 돼요. 이걸로 자기 받을 평가는 다 받은 거예요.
그러면 천국 간 사람은 뭐냐? 이건 덤이죠. 덤 주는 것은 누구 마음대로냐 하면 주님 마음대로에요. 이걸 마태복음 20장에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20장 그 말씀 참 좋아하는데요. 20장 15절, 그 말씀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어요. 읽고 난 뒤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내 것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주지요.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걸 뭐라 보느냐 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결정된 이걸 선이라 하는 거예요. 선은 뭐냐 하면 우리가 결정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이미 악으로 결정된 거예요. 이게 좀 어려우니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악이에요. 죄인이에요. 왜 죄인이냐 하면 선과 악을 알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선과 악을 아는 게 죄에요. 창세기 2장에서. 여기에 천국 간 사람이 긍휼 받을 때에 예수님은 마태복음 20장 15절에서 뭐라 했습니까? 내가 선한 일을 했다 했지요. 그러면 선은 뭐냐 하면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게 선이 돼요. 선악체제에서 벗어난 게 선이 된다고요. 이건 예수님의 세계에선 그래요.
인간세계에서는 선과 악을 본인이 결정해요. 그래서 악이에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천국 못 가는 겁니다. 율법으로 십계명 어기면 악이고 십계명 지키면 선이 된다는 주장하는데 문제는 십계명 지킨 위인이 없어요, 이 세상에. 율법을 지킨 위인이 없습니다. 하나라도 지킨 사람이 없어요. 다 못 지킨 정도가 아니고 단 하나라도 못 지켜요.
인간이 율법을 못 지키는 이유는 본인이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이 문제 출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정답을 모르면서 나름대로 지켰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내가 문제 내면 내가 만들 수 있는데 내가 만들지도 않은 문제에 내가 지킨다는 것은 없어요. 그냥 백 점 해달라고 최선을 다했으니까 만날 최선이래, 인간은. 최선을 다했으니까 좀 눈 질끈 감고 그냥 넘어가달라는 거예요. 내가 천사도 아니고 신도 아니고 인간으로 이 정도했으면 봐줄만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이게 어디 장난칩니까?
성도는 백 점이에요. 이름도 안 써도 무조건 백 점인데 여기 피가 있기 때문에. 피는 다 이루었다, 에서 나온 그 결과물이 피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성도를 받습니다. 왜 받느냐 하면 피 보고 받는다고요. 로마서 8장 10, 11절에 보면, 죽은 자를 살리신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다른 것 안 봐요. 죽은 자를 살리신 그 영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살리지요. 그리고 그 영이 없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어떤 교파, 어떤 신학 이야기해도 그에 말려들지 말고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 사람이 아닙니다.
그 다음 문제에요. 집안 식구 넷이 다 교회 참하게 다녔는데 출석 잘하고 있는데 그중에 한 명만 성령 받았어요. 나머지는 종교생활, 취미생활하고 있어요. 이럴 때 성령 받은 사람이 나머지 세 식구 성령 받지 않더라도 천국 넣어달라면 한 명 성령 받은 것, 구라입니다. 가짜가 돼요.
로마서 9장 3절에 그런 말 있지요.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우리 민족 유대인이 구원받기를 원한다는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그만큼 헌신적 희생적인 말이 아니고 주님의 기준은 너무나도 단호하다는 거예요. 내가 압력 넣거나 주님 앞에 저 사람 좀 넣어주세요, 라고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뜻이에요. 완전히 주님에게 일임된 일이지 내가 관여할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얼마나 단호합니까. 누굴 구원하고 안 하고는 아무리 천하의 사도 바울이라도 그걸 기도한다고 응답할 권리와 의무는 없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기도와 무엇과 관련돼있습니까? 응답과 관련돼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아닙니다. 오늘 시편 22편과 응답이 관련돼있어요. 그러니까 내 기도 자체가 말이 안 되는데 시편 22편이 누구의 기도냐 하면 주님의 기도에요. 주님의 기도만 응답돼요. 그러면 우리는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 시편 22편 내용을 발현되기 위해서 성도가 있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성도의 원칙이 뭡니까? 성도는 개인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지요. 그러면 성도가 기도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답답하니까 하지요. 4월 13일에 딸 결혼식인데 12일에 재림하면 안 되지요. 14일 재림하세요, 15일에 하세요. 이렇게 기도하겠지요. 이 답답함을 주님께서 불러일으키시고 그걸 묵살하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응답해버려요. 시편 22편을 우리 인생에 집어넣는다고요.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유도해요.
제가 아까 첫째 시간 끝에 뭐라고 했습니까? 성도의 삶이란 어떻게 살아간다고요? 예수님을 핍박한다 했지요. 핍박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이건 모든 인간 동일해요. 아담의 육신을 내가 어떻게 끄집어내요. 내가 어떻게 나를 비판합니까? 이 말 뭔 뜻인지 아시겠어요? 내가 나를 반성할 수 없는 게 반성 주체가 난데 나를 항상 좋게 보지 나쁘게 볼 인간이 누가 있어요.
“주여 지옥 보내주옵소서.” 이걸 왜 기도합니까. “주여 내 자식 천국 가게 하옵소서.” 이래야 기도의 의미가 생기지요. “그저 우리 딸 지옥 가게 하옵소서. 내 말도 안 듣고 공부도 안 하고 사춘기 있고 지옥 가게 하옵소서.” 주님의 응답이 뭔지 알아요? “가만 놔둬. 놔둬도 지옥 가게 돼있어. 지옥은 기본이야. 천국은 긍휼이고. 가만 놔둬도 지옥 가니까 기도할 필요 없어.”
사람이 기도한다는 것은 형편이 나아지길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내가 나다움을 유지하는데 장애가 생겼다는 겁니다. 목표가 뭡니까? 나의 나다움이거든요. 고집스러운 거예요, 이거. 나의 나다움, 한 10억 정도 되고 아픈 데도 없고 하는 일마다 손대면 다 일 되는 그게 나다움이에요. 남한테 지기 싫어하고 남보다 더 예쁘고 더 잘 생기고. 나이 칠십인데 아픈 데가 없어. 이 정도 돼야 나다움이에요. 내가 아프기 위해서 살지 않잖아요. 안 아프기 위해 살지요. 그게 나다움이라고. 이 세상 욕망에서 다 온 거예요. 그게 나한테 가득 차있어요.
그런데 여기 뭐가 생겼다? 장애가 생긴 거죠. 누가 이렇게 하셨습니까? 주님이 하신 거예요. 이유가 뭐냐? 시편 22편을 내 속에 집어넣기 위해 하신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말씀 안에 있는 것은 나의 노력이 아니라 주님의 노력인 것을 기도의 응답으로서 나오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 응답되고 그 뒤에 마지막에 갖다 붙이는 것 있지요. 뭡니까? 보통 장로 기도할 때 빨리 끝나기를 할 때 마지막 모든 것을 누구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할 때 속으로 박수 막 치고 속이 시원하다. 고만 해라, 고만. 이제 끝났나, 이런 식이잖아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붙는 이유가 앞의 것의 모든 나의 기도를 묵살해도 나는 좋소. 이 말이거든. 시건 없고 철딱서니 없는 이 기도, 이것 하지 마시고 주의 이름대로 하세요. 이걸 십자가의 공통체험이에요. 예수님 겟세마네 동산에서 뭐라고 기도했어요, 마지막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걸 우리 식으로 쉽게 이야기하면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최적화된 순간인 것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이런 뜻이에요.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 내일 염려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덤으로 준 인생이고 다 이루었음을 내가 한 것도 없는데 주께서 홀로 다 이루셔서 피로서 죄 씻음 해준 그 은혜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그걸 반추하는 시간으로 허용한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사가 뭘 경유해야 돼요? 개판을 경유해야 돼요. 이게 그냥 나와 버리면 상투적인 조작이 된다고요. 배웠던 지식에서 나와서 신앙인인 척하는 기계적이 되지만 하나님께선 그런 기계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되려면 매사가 우리에게 난처하고 곤란한 난감한 당황스러운 일들이 우리 안에 계속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끝나고 나면 어떻게 돼요? 고맙고 감사가 되지요.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이사야 찾아봅시다. 이사야 2장 2절,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아까 영토문제, 공간문제 했지요. 주의 이름이 하나의 성전이 되고 시온 산에 자기 택한 백성 모인다 이 말이죠. 이게 신약에 오면 뭐냐 하면 우리의 몸이 돼요.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 사건을 일으키는 사건 돼요.
무슨 사건? 우리의 존재를 묵살하고 뭐로 바꾼다? 현재 너의 있음은 네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사건의 현장으로 봐라. 존재에서 뭐로 바뀝니까? 늘 사건, 주님의 은혜의 사건, 말씀대로 이뤄지는 사건의 현장, 그것이 주의 이름이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전이 된다. 이걸 모르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성전 지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것은 유대인뿐만 아니고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그런 생각해요. 3차 대전 핵전쟁 터지고 이란과 이스라엘 붙어서 아마겟돈 전쟁하고 난 뒤에는 예루살렘에 거대한 성전이 있을 것이다. 아직도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안 죽었어. 그러니까 자기가 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손으로 쥐는 것, 그럴 때 믿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고 믿겠다는 겁니다. 보고 믿는 게 무슨 믿음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인데. 보지 못하는 것 때문에 살아야 이게 신앙인이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게 무슨 신앙이에요. 그건 과학이고 지식이죠. 남은 몰라요. 나 있는 곳에 주님이 어떻게 다루시는 것을. 남한테 언어로 이야기해도 납득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나를 날마다 뭐하는가? 너 죄인이었잖아, 라는 것을 되풀이하는 것, 이게 바로 십자가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십자가 누굴 위해 죽었습니까? 죄인이 있을 때 십자가가 의미 있잖아요. 따라서 십자가의 의미를 갖추기 위해서는 우리는 뭘 해도 죄인 되는 즐거움과 감사가 일어나게 만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시편 주심을 감사합니다. 실행자가 우리가 아니고 예수님인 것도 감사합니다. 주께서 우리 것을 받지 않고 주께서 시편대로 이뤄진 그 피가 다 이루었다 하니 우리에게 묻어져서 하나님께 날마다 드려지는 제물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