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먼저 성경 말씀을 보겠습니다. 에스겔 8장 1-13절입니다.
“제 육년 유월 오일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았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서 내게 임하기로 내가 보니 불같은 형상이 있어 그 허리 이하 모양은 불같고 허리 이상은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이상 가운데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는 투기의 우상 곧 투기를 격발케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 있는데 내가 들에서 보던 이상과 같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편을 바라보니 제단 문 어귀 북편에 그 투기의 우상이 있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그가 나를 이끌고 뜰 문에 이르시기로 내가 본즉 담에 구멍이 있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 담을 헐라 하시기로 내가 그 담을 허니 한 문이 있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들어가서 그들이 거기서 행하는 가증하고 악한 일을 보라 하시기로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면 벽에 그렸고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인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같이 오르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다시 그들의 행하는바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죠? 성도들이 성경을 많이 읽는다면 “목사님, 그 말씀 다 아는 내용입니다. 설교하지 마세요.” 이럴 수도 있지요.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알아 간다고 했을 때, 알아 가는 것이 어떤 의미냐는 거죠. 목사는 설교해야 하니까 밥 먹고 하는 일이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죠.
목사님들은 당연히 성경을 연구해야 하고, 묵상하는 것은 당연하죠? 그렇다면 ‘이 말씀 자체를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이해하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이 되는가?’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은 성경 전문가들이죠. 그들이 우리가 읽은 에스겔 8장의 내용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에스겔 8장에 나오는 70인 장로는 이스라엘의 대표자들입니다. 백성들을 영적으로, 말씀으로 이끌어야 할 지도자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우상숭배의 앞잡이가 누구냐 하면,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입니다. 사반은 요시야 왕 때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며 종교개혁에 앞장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반의 아들이 우상숭배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들이 지금 하나님의 성전에서 우상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성전 곳곳에 각양 동물, 곤충들을 그려놓고 그것을 숭배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들어 순식간에 약 1,600Km 되는 거리를 순간 이동을 시켰습니다. 이 이야기만 해도 할 말이 많죠. 이게 설명이 됩니까? 손오공이야 이런 짓을 하지만 이게 불가능하잖아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성경을 합리적, 과학적으로 풀어낸다는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고, 또 성경 말씀을 통하여 상대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 다니는 젊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SF 공상 만화나 옛날 신화에서 나오는 내용이지 이런 일이 어찌 가능하냐’고 반문할 겁니다. 설사 이 내용을 믿는다고 해도 구원은 요원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십자가 지신 주님이 구원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그러한 것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죠.
자, 이들이 지금 성전 안에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데 여기에 보면 그들이 누구를 섬기는가 하면, 여자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8:14). 담무스는 음식과 식물의 신이에요. 여자들이 왜 성전 안에서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는가? 담무스가 살아나야 비가 내리는 겁니다. 비가 내려야 풍년 농사를 기원할 수 있기 때문이죠.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도 담무스와 유사한 신인데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는 이유는 유다 땅에 풍성한 소산물이 없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이들이 지금 담무스에게 애원하면 비도 내려 주시고 풍년을 가져다 준다는 기대를 갖고 이런 일을 합니다. 이들이 지금 성전 안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유를 간단히 말하면 잘 먹고 잘살기 위함입니다.
신명기 11장 13-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 너희는 스스로 삼가라 두렵건대 마음에 미혹하여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그것에게 절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으로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의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에 의하면, 약속의 땅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면 그 땅에 소산을 풍족히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방금 읽은 에스겔 8장을 보면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는 목적이 땅의 소산을 풍족히 달라고 애곡하거든요. 즉 성전에서 우상숭배를 하는 겁니다.
여기에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명기 11장 말씀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서 땅의 소산을 풍족히 얻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가나안 땅에서 원래 행하던 대로 우상에게 기도해서 풍년을 얻는 방법이 있습니다. 결과물은 둘 다 같아요.
우리는 믿음이 좋아서 ‘여호와를 사랑하면 풍족한 소산을 얻지만 우상을 숭배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서 멸망합니다.’라고 말하겠지만, 남 유대인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그들이 살아가면서 주변 국가들을 다 살펴봤어요. 우상을 열심히 섬기는 나라가 강한 제국을 이루고 잘 먹고 잘살아요. 그들이 다 보고 경험한 일입니다. 달리 말하면 과학적이죠. 체험한 거예요.
자, 그러면 풍족하게 되는 방법이 두 가지인데 어떤 방법을 선택하겠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우상숭배를 선택하겠습니까? 둘 다 땅의 소산을 풍족하게 주신다고 하는데. 우상을 섬기겠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겠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것 같죠? 우리가 무엇을 놓치는가 하면,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어요. 창세기에 의하면 선악과를 먹은 자들은 각자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에 뱀이 찾아오잖아요. 뱀이 찾아올 때부터 여자는 선택을 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는가?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하시면 안 따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여자는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지만 따먹는 선택을 합니다. 그런 선택을 했다는 자체는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도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그 세계 속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뱀이 유혹하기를 ‘선악과를 따먹으면 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다.’고 했을 때 이미 끝났어요. 그래서 선악과를 보는 순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미 눈이 밝아졌다고 보셔도 돼요.
제가 이런 주장을 하면 신학을 공부하신 분들은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 눈이 밝아졌잖아요?’라고 하실 겁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는 말 자체가 정상적입니까, 비정상적입니까? 비정상적이죠. 은혜의 세계에서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말이 성립이 안 돼요.
왜냐? 예수님께서 십자가 피로 자기 백성을 만들었죠. 그러면 주님 백성의 특징이 뭐예요? 탐스러운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그냥 살면 돼요. 무엇이 좋고 나쁨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요.
여자가 선택을 했다는 자체가 누구를 위한 선택이냐가 드러나죠. 자신이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선택을 한 겁니다. 여러분 같으면 선악과를 따먹을까요, 안 따먹을까요? 중고등학생들이 종종 이런 질문을 하지요. ‘인간이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잖아요?’라고.
이런 학생에게 되물어보세요. “네가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데 왜 열심히 공부하지 않냐?”고. 하기 싫거든요. 하기 싫으면 죽어도 안 해요. 이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어요. 이미 악마의 권세 속에 사로잡혀 있기에 나름대로의 선택을 하는 겁니다.
에스겔 31장을 보면 선지자가 환상을 보고 지적을 했죠. 그러면 우리 같으면 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하겠지요. 신약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복을 받자.’라고. 하지만 구약의 인물들은 농경사회에 살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방법이 뭔가 하면 자기가 선택을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결과에 대해서 내 선택에 의한 결과를 원하지 하나님 말씀에 의해 되는 것은 못마땅하다는 겁니다.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를 사람들은 따져요.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은 선택권이 있다는 거죠. 선택권이 있다는 것은 내가 판단자라는 거예요. 판단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해요.
하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나에게 자유 의지가 있고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택권이 있기에 내가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도 내가 책임지겠다고 나섭니다. 즉 나로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고 나에게로 돌아가겠다는 거예요.
피조물은 피조물로 살면 되는데 창조주의 자리로 옮겨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신명기 11장에‘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면 네 땅의 소산을 풍족하게 주겠다.’고 했을 때, 우리 같으면 이 말씀이 기쁘겠죠? 그런데 주변에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게 많아요.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매일 밤 11시에 유튜브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목사님, 금요일은 재미있는 TV 드라마가 너무 많아요.” 금요일만 재미있는 것이 아니고 매일 밤이 재미있어요. 재미있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 그냥 순종하면 되는데 순종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한 거예요. 우리 같으면 저주받기 싫어서라도 순종할 것 같은데 이들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해서 복 받는 것보다 내가 내 방식대로 신을 섬겨서(이 신은 내 마음대로 조율할 수 있는 신입니다) 내가 원하는 복을 받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호와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신이에요. 그러니 여호와를 버리는 겁니다.
자신의 선택 자체가 자기를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왜 이들은 바보같이 성전에서 우상을 섬겨서 심판을 받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들이 성전을 우상 섬기는 장소로 만든 것은 제가 방금 말씀드린 이유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 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기죠. 이 송아지를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했어요. 출애굽기 20장에 보면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우상은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그들은 말씀을 선택하기 보다는 자신의 선택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고 요청합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나밖에 몰라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어요. 인간들이 가장 기분 나쁘고 불쾌한 것이 이것입니다. 애굽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이루기 위함인 것은 우리가 인정하겠는데 그 구원이 ‘나를 위한 구원’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구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그들은 기분 나쁜 겁니다. 이들은 출애굽 이후에 시내산에 오기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따라 왔는데, 그들 마음속에 담고 있었던 신은 금 송아지였다는 겁니다.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인데 실체는 금 송아지예요. 정말 신기한 대목입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면 출애굽기 12장 이후에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정도였다면 이들의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신앙이라 생각하는데 32장에 가보면 그 여호와가 금 송아지였다는 사실입니다. 금 송아지 자체가 그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생각하는 언약의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었던 거죠.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선택이 충돌하는 지점입니다. 에스겔 8장에서 이들이 왜 성전에서 우상숭배를 할까요? 자기를 위해서죠.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셨어요. 그것을 이들은 용납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선지자들이 외쳐도 진짜 하나님이라면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거예요.
내 존재가 사라지고 내가 부인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나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우상의 특징입니다. 우상은 나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나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부터 출발하죠.
언약으로부터 출발했으니까 나의 존재는 없어요. 없으니까 하나님은 없는 데서 만들어 내시죠. 이스라엘을 만드시는 겁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처음부터 이미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신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를 증거할 뿐이죠. 그래서 인간의 모든 선택은 자기를 위한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앞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선택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선택은 말씀 중심으로 되어지는데 이것은 필연적입니다. 말씀 중심으로 되어진다는 것은 반드시 말씀대로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에 선악과를 먹은 인간들이 반기를 들지요. 그래서 이 세상은 내가 하기 나름이라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말은, 세상은 우연적이라는 거죠. 그런데 오래 살다 보면 우연적 선택 속에서 나의 선택이 늘 옳은 것이 아니고, 그리고 이 선택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하잖아요. 거기에 대한 한계성을 느끼면서 다시 필연성으로 돌아온다는 거예요. 이게 종교라는 겁니다. 그 종교 중에 가장 뛰어난 종교가 유대교이고.
이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 자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만들었잖아요. 이스라엘을 만들어서 말씀대로 이루어가기 시작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목적이 뭡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드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들을 짐승으로 만들기 위해 선택하셨습니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이스라엘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삼기 위함’이라고 하지요. 이 말이 맞아요. 그런데 성경을 해석할 때는 항상 십자가의 완료성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중간에서 해석하는 것이 맞긴 맞는데 십자가 완료성에서 보면 그 맞는 것이 엉터리가 됩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드신 목적은 자기들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절대로 망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메시아를 주신다는 약속도 자신들을 위해 주신 약속이지 다른 사람을 위해 주셨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주셨기 때문에 그 메시아는 당연히 자기들을 위한 메시아가 되어야 하는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자기를 위한 메시아가 아니었던 겁니다. 달리 말하면 정답을 가진 나는 메시아도 선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 한 겁니다.
자기들이 이미 정답을 갖고 있어요. 어떤 분이 메시아로 적합한가? 그 적합도를 무엇을 근거로 평가하는가 하면,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니까 인간이 신이 되어서 선택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당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 내가 판단하겠다는 겁니다.
우리 같으면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할 거라 생각하지만 말씀 순종은 너무 까다로워요. 말씀대로 살면 불쾌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1년 동안 죽도록 농사를 지었어요. 거기에서 소득의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냅니다. 그러면 그들은 뭐합니까? 자기들 볼 때는 제사 지내고 놀아요. 그러니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내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외칠 때 그 외치는 내용 하나하나가 자기들 마음에 안 들어요. 자기들 마음에 들게, 불쾌하지 않게 외친다면 들을 마음이 있는데 선지자들의 외침을 보면 자기들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무조건 반대해요. 그러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저 인간은 나에 대해서 긍정적인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왕상22:8).” 이 말을 누가 합니까? 아합 왕이 미가야 선지자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어요.
미가야 선지자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면 다른 선지자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선지자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왕이 하는 모든 짓이 엉터리라는 겁니다. 그러니 누구 선지자의 말을 듣겠습니까?
이들이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아 이미 1차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완전히 멸망하기 직전인데도 절대로 생각을 바꾸지 않아요. 마치 노아 홍수 때 물로 심판을 받아 죽이 전까지 시집장가가고 사고 파는 일을 멈추지 않았듯이 이들은 우상숭배를 멈추지 않습니다. 왜? 신은 나를 위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심지어 내가 선택한 결과로 내가 망한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취해요.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어떤 선택을 합니까? 하나님이 구약의 율법을 주셨잖아요. 그럼 그 말씀을 연구할 것 아니에요? 그러면 결론이 나옵니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에 대한 결론이지요. 그럼 당연히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 왕국을 기다리기 때문에 어떠한 선택을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너희들이 구약 시대 조상들의 실패를 보고 옳은 것들을 선택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이 되어라.’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이런 생각이 왜 잘못되었어요? 자리를 위한 것이죠. 즉 멸망 당하지 않기 위해 선택을 합니다. 인간의 선택은 항상 자기가 살기 위한 선택이고 자기 이름을 위한 선택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선택은 죽기 위한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왜 목사가 되었습니까? 살기 위함입니까, 죽기 위함입니까? 오늘 왜 여기에 모여 말씀을 듣습니까? 듣는 목적은 하나라도 더 배워 살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말씀 안에서 죽어도 좋다. 내가 사라져도 좋다.’ 이런 마음으로 말씀을 대합니까?
교회에 오는 교인들이 십자가 복음을 듣기 싫어하는 이유가 뭔가 하면, 목사의 설교가 자신의 옳음을 증명해 주기를 바라고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은 거부하죠. 자신의 선택은 항상 자신을 살리는 선택이기에 목사도 나를 살리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목사의 입장은 이런 거죠. 말씀을 공부해서 교인을 설득할 수 있는 적절한 논리를 갖기를 바라고 또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교인 수가 증가하고, 교인들에게 존경받는 목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사가 성경공부 모임을 찾는 이유가 성도를 이해시키고 낙듭시킬 수 있는 말씀을 배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은 이해와 납득을 용납지 않습니다. 이해와 납득은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지 않나요? 내가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복음이에요. 나를 위한 복음은 없습니다. 사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 3년 동안 동행을 하잖아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자기를 위한 예수님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달리 말하면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이 자기를 위한 복음이라 여긴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홀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성령을 보내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을 십자가로 끌고 가십니다. 제자들은 살려고 하는데 주님은 죽음으로 데려갑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당신을 위해 죽고자 하는 자로 만들어버려요. 제자들이 성령을 받게 되니까 과거 자기들이 살기 위해 따라다닌 예수님은 자신들이 만든 우상임을 깨달아요. 그래서 사복음서가 재미있는 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했는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읽는 성경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잖아요. 물론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가 따르지요. 이게 함께 기록된 이유가 있어요. 인간들 입장에서는 어느 누구도 일방적 선택당함이 없어요.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더라도 예수님을 따를지 말지의 결정은 제자들 자신이 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들은 자기의 선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육에 속한 자는 언제나 자기의 선택을 포기하지 않아요. 왜냐? 자기를 위해 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롬14:7).”라고 합니다. 충격적이죠? 여러분들은 이 구절에 해당됩니까, 해당되지 않습니까?
목사가 만약 이 구절을 외친다면 교인들이 목사에게 ‘목사님은 항상 자신을 위해 살면서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니 무슨 소리 합니까?’라고 할 거예요. 맞죠? 이건 복음을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영의 말씀은 성령 받은 사람만 알아들어요. 육에 속한 사람은 말씀을 언제나 육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 보면, 선택 자체가 재미있죠.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들어 놓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는데 그들은 뱀의 유혹으로 선택을 할 때 그 선택 자체가 자기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 명료하죠.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하면, 아담이 하나님의 약속을 듣잖아요. 저주가 내려졌죠. 뱀에서, 여자에게, 남자에게 저주가 내려지는데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이 주어집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의 후손은 여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라고 할 때, 지금 이 말씀을 아담이 듣고 선택을 합니다. 어떤 선택인가 하면, 여자를 그냥 내버려 둘거냐, 아니면 이름을 지을 거냐? 여기서 이름을 짓죠. ‘하와(생명)’라고. 우리는 아담이 여자의 이름을 ‘생명’이라고 지은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지요? 긍정적인 면이 있어요.
원래 긍정적인 것은 어떻게 해서 나오는가 하면, 달리 말해서 영적인 것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육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이 나오려면 반드시 육이 먼저 있어야 해요. 아담이 여자의 이름을 ‘하와’로 지은 이유는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이죠.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생명이 돌아오기를. 왜냐하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으니까요.
하여간 기대를 품고 이름을 짓는 선택을 한 겁니다. 그 다음을 보면, 하와가 아들을 낳죠.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짓는데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하면서 ‘가인’이라 짓습니다. 주도권이 다 자기에게 있는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내가 믿는다는 겁니다. 내가 믿기 때문에 “나와 ‘생명’이 나은 아들(가인)을 통해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거죠?”라는 자기 선택이 담긴 이름 짓기에요.
자기를 위한 이름 짓기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인정하실까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을 때 인간은 그 약속을 받아들여서 바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죠. 이게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의 특징입니다.
이후에 가인을 보면 선택에 아주 결정적인 장면이 나오는데, 하나님이 아벨과 그 제물을 선택하시죠. 선택하시니까 그전까지는 가인이 어떤 인간인지가 잘 노출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개입되는 순간 가인이 하나님의 선택을 제거해버리는 선택을 하죠. 이것은 십자가 사건도 마찬가지죠. 예수님을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하니까 예수님을 죽여버립니다.
가인은 왜 하나님의 선택을 제거(아벨 살해)하는 선택을 할까요? 기분 나쁘다는 겁니다. 왜? 자기가 신이기 때문이에요. 무엇이 그렇게 기분 나쁘냐? 왜 나를 무시하느냐는 거죠.
목사가 설교할 때 교인들을 무시하는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교회 안 옵니다. 목사들도 자신을 무시하는 설교를 강사가 하면 가방 챙기서 갑니다. 여기도 몇 분 가신 것 같네요. 분명히 설교할 때는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세리와 창기의 친구입니다. 우리는 정말 지옥 가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렇게 전해놓고 목사 자신에게 강사가 “당신은 마귀의 자녀다.”라고 해보세요. “내가 왜 마귀 자녀야! 내가 왜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했어?”
“내가 드린 제물이 뭐가 나쁘다는 거야?” 신께 제사 드리는 사람이 아무것이나 드리겠어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라기에 보면 온전치 못한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는 갈 때까지 간 거고, 가인은 처음으로 제사를 드렸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최선을 다했겠지요? 그래서 그 본문에서는 정성을 다하지 않았다고 시비를 걸지 않아요?
만약 가인이 추수를 끝마친 후에 논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 하나님께 바쳤다면 하나님의 거절하심에 대해서 화를 낼까요? 아니죠. 예를 들면 이런 거죠. 특별한 기술도 없고 재능도 없는 교인이 죽도록 허드렛일을 해서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는데, 목사가 “하나님은 당신의 헌금을 안 받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피만 받습니다.”라고 하면 화를 낼까요, 안 낼까요?
목사들은 이렇게 설교를 못 해요. 왜? 그런 말을 하면 삐쳐서 헌금을 안 하거든요. 지금 하나님이 가인을 선택하지 않고 아벨과 그 제물을 선택한 장면은 이와 흡사합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자기중심으로 진행되어야 하는데 하나님 중심으로 일이 진행되어 가니까 거기에 대해서 가인이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자기 선택을 대입시켜서 하나님의 선택을 무효화시켜 버리는 거예요. 이 모든 생각의 배후에 마귀가 있어요. 마귀가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주님으로 세워지는 것을 제거하려 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아직 그런 것이 잘 나타나지 않지만 아벨과 그 피로 드러난 주님은 나중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주 되심으로 드러납니다.
마귀는 최종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거할 목적으로 인간을 부추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가인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이 거절하실 때 “그래, 내 제사가 거절당해도 괜찮아! 나는 선악과를 따먹었고, 선악과 먹은 자는 정녕 죽으리라 하셨으니까.” 이런 태도를 왜 취하지 않을까요? 사단이 배후에서 ‘너는 이미 신과 같이 되었으니까 절대 죽으면 안 돼!’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의 모습을 계속해서 추구하라고 뒤에서 부추기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유대인에게 “내 살과 피를 먹여야 영생을 얻는다.”라고 하실 때 그들은 왜 이 말씀을 거부했지요? 거부한 이유는 이들이 구약 성경을 읽고 메시아 왕국에 들어갈 조건을 자신들이 마련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려워요. 만약 구약에 이런 말씀이 없다면 예수님 말씀을 수용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구약에서 이스라엘 조상들이 멸망한 이유가 분명해요.
그럼 멸망 당하지 않고 메시아 왕국에 들어갈 방법은 말씀대로 사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달리 선택할 길이 없습니다. 에스겔 8장에서 읽었듯이 성전에서 우상숭배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고 그렇게 살면 메시아 왕국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뭘 선택하겠어요? 지키는 것을 선택하겠죠.
질문해 보겠습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이죠. 그러면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겠어요, 안 믿겠어요? 당연히 믿겠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예수 믿고 천국 가려고 하는 것을 우상숭배라 한단 말이죠. 목사가 설교해야 할 내용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당신의 선택이 곧 사단의 선택이다.”
왜 사단의 선택인가 하면, ‘예수 믿고 천국에 가고자 하기 때문’이죠. 즉 누구의 이름을 위하여 예수를 믿는가 하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이름을 위함이 아니라 내 이름을 위함이죠. 이것은 결국 내가 신처럼 된다는 이야기죠. 제가 이 이야기를 어젯밤에 설교할 때도 거론했고, 오늘 오전 강의에서도 말했어요.
C. S. 루이스의 주장이 왜 악마적인가 하면, 우리 속에 있는 자아성을 날마다 끄집어내고 주님의 자아를 우리 가운데 채운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된다는 겁니다. 이런 말 들으면 기분이 좋죠. 작은 예수가 되면 어떤 인간이 되는가? 법륜 스님처럼 된다는 말이죠.
그러면 교회 왜 옵니까? 그렇게 살 것 같으면. 십자가의 피를 완벽하게 제거해 버리죠. 악마의 자리입니다. 왜 십자가 피를 제거하려 합니까? 십자가의 피가 전파되면 나의 가치가 사라지거든요.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자신을 만물의 찌기 취급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어요. 그런데 오늘날 목사들은 자기가 복음을 전하면 만물의 찌기 취급을 안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십자가 복음을 안 전하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을 알고 전해도 “나는 만물의 찌기 취급받으면 안 돼!”라고 하는 목사는 가짜입니다. 그들은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요. 반대로 자기 생명을 얻고자 하죠. 그래서 말씀을 열심히 연구해서 자신이 인정받기를 원해요. ‘나는 성경을 깊이 연구했고,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전한다.’고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어요. 우리는 다 성령을 받았잖아요. 예수님의 영을 받았으니까 C. S. 루이스 주장처럼 우리는 작은 예수가 맞죠.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사시니까. 그러니 우리도 죽으려고 사는 거예요. 달리 말하면, 목사 하지 말라고, 십자가의 증인만 되라고, 복음만 전하라고 살게 하신 거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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