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강의는 '방배동 목회자 모임'에서 정석훈 목사님이 강의한 것을 녹취함)
1강
제가 부탁받은 것은 이근호 목사님의 저서 [하나님의 선택]을 가지고 강의해 달라는 것이었는데, 먼저 하나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7장 1-7절입니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이것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치는 말씀인데, 성전 문 앞(여호와의 집 문 앞)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러 온 사람들에게 외친 내용입니다. 이들이 여호와께 경배하러 온 이유는 심심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문을 보면서 “예레미야 시대의 남쪽 유대인들은 나쁜 놈이다.” 이런 전제를 갖고 볼 수 있지만 사실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 와서 제사 드리는 모습은 사뭇 진진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성전에서 우상을 섬기는 자들임을 알고 있기에 ‘이들은 악한 자들이다.’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사자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2절).”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3절).” 이렇게 외쳤습니다.
그러면 이 예레미야의 외침이 이들에게 제대로 들렸을까요?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말씀을 했을 때, 이들이 자기 자신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고, 바르게 행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었겠느냐는 말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옳은 길로 행하면 이 땅에 거하게 할 것이라.’ 했을 때, 이 모든 말씀은 그때 가봐야 알아요. 1차 포로로 잡혀가도 완전히 멸망할 때까지는 멸망 당한 것은 아니니까. 말씀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인간들은 그 말씀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노아 홍수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홍수 심판으로 죽기 직전까지도 그들을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십자가고, 장가가고 했지요. 노아는 맑은 날에 방주를 만들며 홍수를 준비하고 있었고,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한다는 말도 들었을 거예요. 사람들은 호기심이 있지요. 왜 산 중턱에 이런 방주를 만들고 있는지 물었을 때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라고 이야기했을 겁니다.
그런데 물 심판은 물 심판 받아봐야 알아요. 비가 내려도 마찬가지지요. 비가 내려도 그 비가 온 세상을 덮을 비라고 누가 생각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장차 오셔서 세상을 불로 심판하신다.’고 할 때, 부분적으로는 불에 타서 죽거나 화산이 터져서 화산 재에 덮이는 사람이 있겠지만 ‘전 지구적으로 불에 타 없어진다. 하늘의 해와 달도 모두 풀어진다’는 말씀을 여러분 목사님들은 믿습니까?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 생각에 믿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찾아보기 힘들지요? 말씀은 우리에게 믿으라고 준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분이 이룬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에 대한 접근 방식이 믿겠다고 덤벼드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이 말씀을 외칠 때 관람자인 우리들 입장에서는 “이것은 여호와의 전이 아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이야기했을 때, ‘그들이 들어야 하는데 왜 안 듣지?’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것이 성전이 아니라. 이것이 성전이라는 말을 믿지 말라.” 이렇게 외치는 이유는 ‘이렇게 외쳐도 너희들은 안 듣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선포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심판을 끝내버렸죠. 왜냐하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는” 그 일을 이사야 선지자가 하게 됩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소경이고 귀머거리 상태지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문서 선지자가 활동한다는 것은 이미 심판이 확정되었고, 심판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기적 선지자들이 활동할 때는 심판을 돌이킬 수 있느냐? 우리가 잘 아는 기적 선지자 엘리야, 엘리사 이분들이 활동할 때 그들의 외침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회개했습니까? 회개하지 않았죠.
선지자들이 등장했다는 것은 이미 멸망이 기정사실화된 겁니다. 기정사실이 되었다는 것은 ‘너희들은 멸망 당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런 본문을 오늘날 우리가 읽으면서 ‘왜 사람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을 듣지 않았을까? 우리는 들어야 한다.’라고 설교를 한다면 그 설교자는 마귀의 앞잡이입니다. 왜냐? 하나님의 뜻을 자기가 바꾸려 하기 때문이죠.
지옥 갈 자는 지옥으로 가게하고 천국 갈 자는 천국으로 가게 하는 것이 증인인 목사 역할이잖아요. 그런데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거슬러 역행하여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느냐에 따라서 구원이 좌우된다.’ 이런 생각을 사람들이 갖게 하고 설교자도 그런 식으로 설교를 합니다.
예레미야가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외치고 있는데, 우리가 보기에 예레미야는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안 듣잖아요. 아무도 안 들어요. 오늘날 실용주의 입장에서 “아무도 안 듣는 외침을 왜 합니까?” 이런 질문을 하잖아요.
전도서에 보면 솔로몬이 지혜자죠. 그가 인생의 말년에 하는 말이 ‘모든 것이 헛되다.’고 외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지는 들풀과 같다.”라고 말씀하시면 사람들은 “그럴 것 같으면 왜 삽니까?”라고 반박하면서 아마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어차피 살아봐야 헛된 인생이기 때문에 더 살 이유가 없어요.
이들이 무엇을 모르느냐 하면, 주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 십자가만 남기기 위한 것임을 모르는 겁니다. 십자가의 완료성이 부정되니까 예레미야가 외치는 말씀을 읽고 설교하면서 어떤 식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우리는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혁교회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저께 어떤 목사님과 만나 대화를 하는데, 그분이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따라서 교회다워야 한다.’고 주장해요. 저도 합신(합동신학대학원) 출신이지만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다 들었던 이야기고 목사님들도 다 아시는 이야기죠? 그런데 이런 주장은 목사 스스로가 복음을 부정하는 꼴이죠. 왜나하면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것입니다.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행20:28) 라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완벽합니다.
이게 믿어져야 하는데, 희한하게도 ‘우리를 죄에서 용서했다’는 것은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의 피로 완전한 교회를 세웠다’는 것은 안 믿어요. 왜 그런가 하면, 두 가지 다른 안목으로 봅니다. ‘주님이 완벽한 교회를 세웠다’고 했을 때, ‘완벽’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점이 죠.
여러분들은 다 목사님이니까 목회를 할 마음을 갖고 목사가 되셨잖아요. 목회를 생각할 때 목사에게는 자기가 바라는 교회상이 있어요. 일반인들도 교회에 오면 자기가 기대하는 교회상이 있어요. ‘교회는 이러이러해야 한다.’
어저께 만난 목사님이 ‘오늘날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욕을 먹는지 모른다.’고 해요. 이게 심각한 문제라는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욕 안 먹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자, 그러면 이런 논리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빛이라(마5:13-14)” 하셨거든요. 소금은 맛을 내야 하고, 빛은 빛을 비춰야 하니까 소금과 빛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이 세상 안목으로 소금을 해석하고, 이 세상 안목으로 빛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영입니다. 예수님은 영의 말씀으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빛이라.” 하셨거든요. 이것을 누구에게 말씀하셨습니까? 두 부류에게 말씀하셨지요. 한쪽은 영으로 난 자에게 말씀하셨고, 다른 한쪽은 육으로 난 자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육으로 난 자가 예수님 말씀을 듣게 되면 ‘너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안 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장과 같죠.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했습니까, 안 당했습니까? 안 당했어요.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는 목사들이기에 바리새인에 대한 교육을 다 받았어요. ‘바리새인들은 외식하는 자다.’ 이런 교육이 엉터리입니다. 왜 엉터리인가 하면, ‘외식’이란 말도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에요. 영이신 분이 말씀하신 ‘외식’과 육이 인식하는 ‘외식’은 달아요.
육으로 난 자가 이해하는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속에는 엉큼한 것이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예수님이 이와 비슷하게 표현하셨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는 외식과 예수님이 말씀하신 외식이 같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바리새인은 어떤 분입니까?’라고 물어보세요. 모두가 다 바리새인처럼 살고 싶어 했어요. 그들은 생활 구석구석까지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누구도 바리새인들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들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들도 예레미야 7장 말씀을 잘 알겠지요? 구약의 모든 말씀을 숙지한 자들입니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렘7:3).”고 하셨는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말씀대로 바르게 사는 방법뿐입니다. 그 외에 다른 방법 있습니까? 우리가 강의 시작하면서 이 본문을 읽었는데 목사님들도 답변해 보세요.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만일 교인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답변하겠지요. 그런데 말씀대로 산 자들이 바리새인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의 입을 통해 전하신 말씀 자체가 인간이 알아들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에요. 성경 말씀 자체가 근본적으로 인간이 알아들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지요. 제사 드리는 목적이 뭡니까? 죄 용서받기 위해서 제사 지내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분명히 성전이 있고, 그 성전에서 제사가 드리지는 상태에서 예레미야가 성전 입구에서 “이것은 여호와의 전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누가 미친 사람이 될까요? 예레미야가 미친 사람이 되지요. 왜? 성전이잖아요. 이 성전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솔로몬 왕이 세운 여호와의 전입니다.
다윗 왕이 세우려고 했고, 모든 재료를 준비했는데 하나님이 ‘너는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에 안 된다.’고 하셨고, ‘네 아들이 세울 것이라.’고 해서 세운 성전이지요. 그렇다면 남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 성전이 성전 맞지요? 그런데 예레미야가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했을 때 이 예레미야의 외침을 누가 듣겠습니까? 안 듣지요.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 예레미야의 말이 맞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어디에 비추어서? 성경 말씀에 비춰서. 성경은 이곳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성전인데 성전이 아니라고 하면 그건 예레미야가 이상한 거잖아요.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어요. 베드로전서 1장 10-11절에 나오거든요.
구약의 인물들은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성전이 아니라’는 말의 의미는 참 성전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뿐이라는 겁니다. 제가 갑자기 비약을 했죠? 비약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는 이미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을 보는 안목 자체가 성령 안에서 성경을 보게 되어 있거든요.
예레미야가 이렇게 외치는 것은 건물 성전은 성전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 외치는 거예요. 이것이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헤롯 성전이 46년간 지어 거의 완성되어 가는 단계에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장 19절에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죠.
같은 맥락입니다.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헤롯 성전이 성전이죠. 비록 에돔 사람 헤롯 왕이 유대인들의 환상을 사기 위해서 건립하였지만 예수님이 헤롯이 건립하였다고 해서 그 성전을 부정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 우리들 같이 믿음 좋은 사람이라면 헤롯 왕이 지은 성전을 ‘우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지은 것이니까 이것은 가짜야.’라고 했겠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예수님이 태어나서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에서 제사 지냈잖아요. 성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을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실 때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육으로밖에 이해가 안 되죠. 그들이 아는 성전은 건물형 성전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몸을 성전이라고 했거든요. 이런 말을 해도 오늘날 교회가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우기니까 마귀 새끼들이 따로 없죠. 성경 말씀을 아예 안 듣겠다고 나선 자들이죠. 그러면 목사들이 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는가? 그래야 헌금을 내거든요. 그래서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교회 와서 기도하거든요.
예수님이 눈에 보이는 이 성전은 성전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참 성전은 자기 육체죠. 자기 육체라고 했을 때는 예수님의 몸만 자기 육체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 사신 성도들도 성전이 되기 때문에 한 묶음으로 보는 겁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머리 되신 예수님과 그의 몸 된 교회라고 표현할 때 이 전체가 성전이 되는 겁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5-7절에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열조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약속의 땅이죠.
여기에서 내용 전체를 들여다보면 ‘율법대로 살라’는 겁니다. 출애굽 정신을 회복하여 그 정신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인 것 같죠? 그렇게 이해한 자들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언약의 완성이죠. 즉 십자가 새언약을 세우기 전까지의 과정에 이 말씀이 담겨 있기에 지금 이 예레미야의 외침은 어느 쪽에 속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야곱의 자손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만드시잖아요.
이스라엘을 만드신 목적이 뭐냐를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만드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위해서 만들었다.’라고 말을 하죠. 말은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께 어떻게 영광이 되느냐 하면, 이 이스라엘을 짐승으로 만들어서 심판받을 자의 표본으로 삼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구약적으로 표현하면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 당하고 남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 당하는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왜? 그들이 멸망 당하는 상황에서 남겨지는 것은 언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언약만을 남기고 그들은 멸망 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을 만드신 목적이에요.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말고 너희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결국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미래를 바라보고 있죠. 이 말씀을 선포했을 때 나중에라도 이 선지자의 말씀을 기억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나중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에스라, 느헤미야가 이 정신을 물려받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이 정신을 물려받아서 이제 신명기 정신으로 돌아가려고 하죠. 그래서 개혁작업을 합니다. 흔히 개혁주의자들은 에스라, 느헤미야를 보면서 개혁주의를 외치는데, 문제는 에스라, 느헤미야를 보며 개혁주의 표본으로 삼으면 마귀 새끼가 돼요. 왜냐하면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표본으로 삼은 자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예레미야와 느헤미야의 정신을 본받아 그대로 실천한 자들이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 누가 봐도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안식일을 준수하며 삽니다. ‘아니, 목사님! 그들은 제멋대로 안식일을 지켰잖아요?’
제가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 말씀을 우리의 말로 받으면 안 돼요.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하신 말씀이에요.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 말씀을 이해해야지 우리 입장에서 안식일을 생각해서 ‘지킬 수 있는 것은 지키고 손해 되는 것은 안 지켰다.’ 그런 식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금 메시아 왕국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에서 메시아 왕국에 들어갈 조건을 완비한 상태입니다. 이들은 과거 역사를 교훈으로 삼고 있죠.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친 것과 그 후 에스라, 느헤미야가 개혁한 개혁 정신을 물려받아서 이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메시아 왕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면 메시아, 다윗 왕이 온다면 그 나라에 우리가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을 그대로 받고 순종한 거예요. 예레미야 당시 예레미야의 외침을 못 알아들었고, 이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다가 400년 후 예수님 당시 사람들도 이 말씀을 못 알아들어요. 왜 못 알아듣느냐 하면, 인간의 관심은 오직 자기 구원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말씀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했잖아요. 그러면 사람들이 이 본문을 읽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이 나오겠죠. 왜 이런 질문을 하지요? ‘어떻게 하면 멸망 받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는 쪽에서 질문이 들어온단 말이에요. 그러기에 이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면, 멸망 받지 않기 위해 이 말씀을 지키는 겁니다.
이게 요한복음 5장에 나옵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39절)”한다고 하셨지요.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대로 살려는 목적은 영생을 얻기 위함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성경은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하셨어요. 그러면서 또 하시는 말씀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40절).”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영생’이란 단어를 두 번 사용하셨어요.
유대인들은 구약을 잘 압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이런 관점으로 봐야지 바리새인들이 무식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래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성화론을 주장해도 절대로 바리새인, 서기관을 못 따라갑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사고방식이 어떤 사고방식이냐 하면, 창세기부터 이스라엘 광야 생활, 그리고 왕정시대, 그 이후 400년 그 전체 시대를 꿰뚫고 있습니다. 꿰뚫어서 정답을 찾아낸 거예요. 어떤 정답인가 하면,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이 있죠? 여러분들 모두 언약 중심으로 성경을 보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들은 이미 우리들의 선배입니다. 그들은 언약을 잡고 있었어요.
김이곤 교수가 [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다]는 제목의 책을 섰는데, 이 내용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거예요. 유대인들은 지금도 신의 약속은 파기될 수 없다고 믿고 있어요.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문자적으로 예루살렘 땅 감람산에 하나님이 임하신다는 기대를 갖고 있잖아요.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약속을 붙들고 살았어요. 그러면 그들이 갖고 있는 언약이 엉터리냐? 엉터리가 아니에요.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구약을 해석할 때 엉터리로 해석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믿었어요. 말씀에 따라 살았어요. 이 바리새인들의 신학을 알았다면 ‘성경으로 돌아가자’라는 말이 얼마나 악마적인가를 알 텐데 개혁교회가 그걸 몰라요.
성경대로 돌아가면 결론은 어디로 갈까요? 말씀 중심으로 가거든요. 말씀 중심으로 가면 지식을 많이 쌓는 자가 진리를 아는 자가 돼요. 그러면 지식만 쌓으면 되는가? 아니죠. 삶이 따라야 하지요. 그래서 바리새인이 출몰한 것 아닙니까. 삶의 깊숙한 영역까지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주장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바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뼈저리게 말씀의 실효성을 느낀 사람들이에요. 말씀대로 사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셨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니까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그의 조상들이 구약에서 체험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교육을 제대로 받은 자들이에요. 그래서 그들은 말씀에 근거해서 자신들이 메시아가 오실 때 어떻게 하겠다는 것을 준비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외침에 귀를 기울인 겁니다.
제가 이전에 사당동에서 강의할 때 이런 질문을 드렸어요. “4 복음서에 우상숭배가 나옵니까?”라고. 혹시 목사님들, 4 복음서 읽으면서 유대인들이 우상 섬기는 장면을 보셨습니까? 없지요. 성전에서 우상을 세워놓고 제물을 드리는 것이 없어요.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그것도 지적하셨겠지요.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도 너무나 깨끗했어요.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를 내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신 것(마21:12)’을 흔히 ‘성전 청결 사건’이라고 말하는데, 성전 청결 사건이 아니고 ‘성전 제거 사건’이고 ‘성전 부정 사건’입니다.
성전 청결 사건이라고 하면 성전을 청결케 하면 다시 성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합니다. 신학자들이 이렇게 무식해요. 제가 좀 과격한 표현을 했는데, 성전 청결 사건이라고 하면 성전을 청결케 하면 되지 성전을 무너뜨릴 필요가 뭐 있습니까?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이제 성전은 무너져야 한다는 거예요. 그 무너져야 할 이유를 예수님이 설명해 주신 겁니다.
그 설명한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버지 집(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구약에 ‘성전이 너희 집에서 멀면 돈으로 제물을 사서 드리라(신14:24-26)’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하나님께 드릴 때는 반드시 ‘성소의 세겔로 드리라(레5:15, 27:3 등등)’고 하거든요.
자기가 로마 돈을 가지고 있으면 성전 세겔로 바꿔야 할 것 아니에요. 그러면 환전상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너희들이 환전할 때 환차손을 1%만 떼라.’ 이런 말씀이 없어요. 그들은 오로지 구약에서 선지자가 말한 것, 성전에서 어떻게 제사 드려야 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거기에만 오로지 집중한 겁니다. 여기서는 우상숭배가 이뤄지면 안 되는 곳임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말씀에 따라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한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내 아버지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들이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하셨죠.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사람들은 ‘봐, 이들은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어.’라고 우리는 비난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렇게 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께 제물을 드립니까? 성전에서 200km 떨어져 사는 사람이 자기 집에서 양을 끌고 올 수 있습니까? 못하지요. 그러면 성전에 와서 돈으로 제물을 구입해서 제사를 드려야지요.
그러면 레위인들이 제물을 팔 때 이윤을 남기지 않고 원가로 팔면 됩니까? 성경에 원가로 팔라는 말도 없어요. 그들은 예수님 평가에 의하면,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는데, 예수님 말씀의 의미는 이런 겁니다. 성전에서 제사 드리면서 무엇을 노리는가 하면, 자기의 구원과 이익을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장사하는 문제를 거론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야기와 요한복음 5장 39절에 나오는 ‘너희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이유는 영생을 얻고자 한다.’고 했는데, 이것도 똑같은 거예요. 강도의 특징과 이들의 특징이 똑같이 자기 이익을 구하고 자기 영생을 구하는 거예요.
성전에서 우상숭배 하는 것 없습니다. 깨끗해요. 제사가 제대로 드려지고 있어요. 그러면 목사님들은 신학을 공부하신 분들이니까 ‘당시의 제사장들은 돈 주고 제사장 직분을 사지 않았는가?’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그 가문을 문제 삼으신 적이 없습니다. 가문이 문제가 되었다면 예수님이 “너희는 제사장 아니야. 너 가짜야!” 이렇게 말씀하셨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대제사장을 그대로 인정해버립니다. 목사님들은 성경보다 앞서가요. 이런 일들이 성경에 비일비재하거든요. 예를 들면, 시형제 결혼법(신25:5-6)이 어디에서 유래합니까? 그냥 뚝 떨어지거든요. 그 당시의 풍습입니다. 주님은 그 풍습 속에 언약을 담아 녹여버립니다. 아마 우리 같으면 ‘시형제 결혼법 나빠요.’라고 지적할 겁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자기 언약을 드러내는 방식은 인간의 죄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그 죄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버립니다. 대제사장의 직분을 돈 주고 샀다 하더라도 주님은 그것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대제사장이 되었든 레위인이 되었든 제사 드리는 당사자가 되었든 모두가 다 이 성전을 중심으로 무엇을 꿈꾸는가 하면, 예레미야 7장을 기억하면서 ‘이것은 진짜 성전이야’ 진짜 성전이란 말은, 성전에서 죄 용서가 이뤄지지요.
열왕기상 8장에 보면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립한 이후에 성전에서 기도하면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죄 용서받는 방법을 이들이 알고 있죠? 그런데 죄 용서받아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복 받겠다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 사두개인 이쪽 계열들입니다. 그런데 그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볼 때 그게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 따져보면 성경적이에요. 그게 성전 중심이죠. 제가 질문을 했죠. 이들이 당시에 우상숭배를 했는가? 아니죠. 그러면 바리새인들이 남의 것을 탈취하고 고아와 과부를 압제했습니까? 아니죠.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하잖아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예이, 목사님 그들은 길에서 기도하고 구제할 때도 드러나게 구제하는 것이 잘못 아닙니까?’라고 하겠지요. 이게 잘못입니까? 본을 보이는 게 잘못인가요? ‘아니, 이들은 자신을 뽐내려고 한 짓 아닙니까?’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세요. 자신을 뽐내려고 했는지?
문제는 언약의 완성자가 왔어요. 예수님이 오시는 순간 그들이 자신의 양심에 가책이 없이 마음을 낮추어서 했든 높여서 했든 무슨 짓을 해도 다 외식이 되어 버려요. 십자가의 영이 들어와야 이런 안목이 생기는데 십자가의 영이 안 들어오면 모든 판단이 선악 기준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그 기준에 의해서 외식이냐, 아니냐를 따지게 되는데, 예수님이 와버리면 예수님 앞에서는 무엇을 해도 외식이 돼요. 무엇을 해도 죄가 되고. 복음을 전해도 죄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영이 와버렸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셔서 모든 것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자기가 주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더라도 죄인 중에 괴수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의 위력이에요. 새언약의 위력.
그러면 옛언약은, 옛언약이라고 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어쨌든 유대인들은 언약을 믿고 있었거든요. 언약을 믿는 그들 입장에서는 언약이 세워질 때마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누구를 위한 언약이냐?’로 들어가게 되잖아요. 아브라함 언약, 야곱, 이삭 언약, 모세 언약 이렇게 들어가 보면 사람들은 언약을 공부할 때 어떤 방식으로 공부하느냐 하면, 유대인과 똑같아요.
그 언약에 들어가 보면 언약 자체가 아브라함을 날려버리죠. 아브라함 언약의 특징은 아브라함이 날아간다는 겁니다. 아브람이 날아가고 아브라함이 만들어지죠.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아브라함이 있으니까 ‘아브라함이 있네요.’ 이렇게 나오는데 아브라함 언약의 특징은 없는 아브라함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없어요. 나타나는 것은 아브람 뿐인데 그 아브람이 부정되는 자리에 아브라함이 나타나는 거예요. 이삭도 마찬가지죠. 이삭이 날아가는 자리에 이삭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삭의 이름 자체가 이미 한번 날아갔잖아요. ‘비웃음’이 ‘웃음’이 되고, 그 이삭은 결국은 죽음에서 살아나잖아요. 그 이름 속에 이미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보시면 돼요.
야곱도 마찬가지죠.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잖아요. 이스라엘로 바뀌었을 때 ‘이스라엘이 되었네.’ 이렇게 들어갈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없는 존재지요. 없는데 주님이 새롭게 만들어낸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읽어보면 이스라엘의 모습이 변하는 것을 거의 감지할 수가 없어요. 가끔 조금씩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름조차도 야곱과 이스라엘이 혼합되어 나옵니다. 이러한 것을 과연 이스라엘 사람들이 포착해 낼 수 있는가? 포착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을 보는 안목 자체가 어떤 식이냐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해서 우리 민족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었다.’ 이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언약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약속은 누구를 위해 주셨는가 하면, 자기들을 위한 언약이고 자기들을 위한 약속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예수님이 오셔서 ‘성경은 내게 대해여 전한다.’라고 하시니까 그 예수님을 죽여버린 거예요. 왜? 성경은 예수님을 위한 약속인데 그들은 나를 위한 약속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달리 말하면, 다윗 왕이 오시면 그 다윗 왕이 나를 위한 다윗 왕, 메시아여야 하는데, 이 메시아가 하시는 말씀이 “내가 지옥 보낼 권세도 있고 천국 보낼 권세도 있다(요10:18).”라고 하셨지요. 이 말씀이 우리는 별 거부감 없이 들리지만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이 말씀이 너무나 불쾌해요. 왜? 구약 율법과 안 맞아요. 선지자의 외침과 안 맞아요.
천국과 지옥, 축복과 저주는 말씀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달렸지 예수라는 작자와 와서 자기 마음대로 지옥 보내고 자기 마음대로 천국 보낸다? 그리고 천국 보내는 조건이 십자가의 피로 천국 보낸다고 하니까 그들은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천국에 넣어준다면 이걸 믿을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이걸 못 믿으니까 예수 믿어서 천국 가려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 믿는 것도 행위가 되어버렸죠.
언약에 대한 이해가 이런 거예요.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언약을 실어 나르는데 언약을 실어 나르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작업은 없애는 것과 새롭게 만드는 것을 동시에 펼치십니다. 여러분은 다 언약을 공부하셨고 언약에 관해 책을 쓰신 분도 계시니 잘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언약 작업은 없애는 일과 새로 만드는 일을 하시는데 없애는 분도 하나님이고 새롭게 만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이 끼어들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았으니까 자기가 이루어내려고 하고 그걸 믿고 소망하고 있죠. 물론 성경은 그들이 믿고 기다렸다고 하는데, 그 믿고 기다림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믿고 기다림을 부정하는 믿고 기다림이에요. 굉장히 복잡하지요?
대표적인 경우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라고 했을 때 그 믿음이 무슨 믿음이에요? 개뿔도 없는 믿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의로 여기셨다잖아요. 왜냐하면 그 뒤를 보면 바로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잖아요. 믿음이란 아브람의 믿음이 제거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믿음 ‘너 믿음 아니야!’ 그래서 만들어진 인물이 이삭이잖아요.
그렇게 주님께서 언약 작업을 통해서 언약의 본질, 십자가죠. 십자가의 새언약을 증거해 내시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전체를 통해서 언약을 들여다보면 인간이 손을 댈 수가 없어요. 창조 원리도 마찬가지죠. 천지를 창조할 때 인간이 가담했습니까? 아니죠. 그런데 마귀가 선악과를 따먹게 한 후부터는 인간이 손을 대기 시작하죠. 자기가 하나님 행세를 하는 겁니다. 각자 자기가 하나님 행세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고 이삭을 부르고 야곱을 부르잖아요. 불러서 약속을 주시니까, 약속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이 약속은 나를 위해 주셨다. 내가 얼마든지 이뤄낼 수 있는 약속이다.’ 이게 믿음의 조상들의 본 모습입니다.
그 이름이 날아가고 새로운 이름이 자리를 잡을 때 진짜 언약이 빛을 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름이 날아가고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는 그 사이에 인간의 죄가 드러납니다. 그러면 새로운 이름이 어떻게 등장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희생입니다. 그 희생의 요소를 이 이름이 바뀌는 과정에서, 바꾸어 가는 과정에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물론 아브라함도 알았다가 몰랐다가, 이삭도 알았다가 몰랐다가, 야곱도 알았다가 몰랐다가 하지요. 왜냐하면 구약의 인물들이니까 그 역할을 그들은 감당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모세 언약으로 넘어가는 거잖아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이란 책을 공부하잖아요. 이 책에도 똑같이 나와 있는데 문자적으로 보면 결국은 “교회란 끝까지 주님께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연장 선상에서 이 책을 섰다고 저자가 말하거든요. ‘교회는 주님이 끝까지 책임을 진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언약 중심으로 말씀을 배워나가면 결론은 어디에 도달되는가 하면 ‘주님이 책임진다.’ 여기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책을 읽거나 언약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면 ‘교회는 내가 책임진다.’ 이렇게 나와요. 왜냐? ‘성경에 대한 중심과 그 핵심 내용을 내가 알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됩니다. 이런 모습을 누가 보였는가 하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 야곱이 그대로 보였던 겁니다.
그들이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육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잖아요. 약속이 그들을 끌고 가지 그들이 약속을 이뤄가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것은 항상 충돌됩니다. 약속을 받은 자가 항상 생각하는 것이 그 약속을 이루어야 하고 그 약속이 이뤄지기를 소망하죠. 그런데 이미 여기서부터 어긋나 버립니다.
무엇이 어긋납니까? 약속.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라고 할 때, 이 모든 요소들을 누가 해석합니까? 아브라함이 해석해야 하는데 아브람이 해석하죠. 아브람이 해석하는 내막에 들어가보면 결국 그 주변에 있던 다른 족속들이 기대하고 소망하던 큰 민족, 축복, 땅을 소유하는 것 이런 식으로 이해할 뿐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주님이 자기의 희생을 갖고 찾아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 본뜻을 알았느냐?’라고 묻는다면 아주 가끔 알았을 뿐이죠. 우리는 성경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풀고자 하는 욕망이 있잖아요. 왜 이런 마음이 있죠? 그 목적이 뭡니까? 오전에도 두 시간 말씀을 나누면서 했던 이야기이지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고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7-39).’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니까 사람들이 머리를 굴리죠. ‘생명을 얻으려면 내 생명을 미워해야 해.’ 벌써 예수님 말씀에 걸려든 거예요. 생명을 얻으려는 마음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거잖아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성취할 수 없는 말씀이고, 우리가 손댈 수 없는 말씀인데 사람들은 말씀을 자기가 보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건 유대인들 사고방식이거든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누구에게 주셨지요? 우리가 알기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잖아요. 목사님들도 다 그렇게 알고 계시잖아요. 그죠? 그런데 율법은 예수님께 주셨어요. 율법은 이룰 사람에게 주시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경(모세 율법)은 내게 대하여 증거한다(요5:39).”고 말씀하셨죠.
이 율법은 나에 대한 말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시잖아요. ‘아 그러면 하나님께서 진작 그렇게 말씀하시지.’ 진작 그렇게 말씀하면 알아들을까요? 알아듣는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자신이 소경임을 모르는 겁니다.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영이 되신 분의 어떤 말씀도 알아듣지 못하게 되어 있고 곡해, 오해하게 되어 있어요. 그 대표자들이 바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에요.
‘아브라함 자손들이 자기 조상들을 다 알면서도 왜 야곱을 죽이시고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그 작업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이름을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가 살고자 하느냐?’라고 질문할 수 있는데, 인간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어요. 하나님이 친히 인간에게 그런 능력을 발휘 못하도록 환경을 조성합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선악과죠. 선악과가 에덴동산 가운데 있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뱀을 안 만들었으면 유혹받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뱀을 만들더라도 지혜로운 자로 만들지 말고 멍청하게 만들었으면 아담, 하와를 제대로 유혹하지 못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 선악과 안 따먹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십자가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목적하셨기에 반드시 따먹도록 지혜로운 뱀을 만드셨고, 하늘에서 쫓겨난 이 악마를 그곳에 투입하신 겁니다.
가인과 아벨의 사건도 마찬가지죠. 누가 가인이 아벨을 죽일 마음을 품게 하셨습니까? 가인과 아벨만 있었으면 별문제 없었어요. 제사 드려도 하나님이 안 받으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가인과 그 제물은 안 받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죠. 자, 이 조건에서 인간이 피해갈 수 있을까요? 피해갈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일을 그렇게 하세요. 왜? 세상은 나를 위한 세상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십자가로 완료한 세상을 목적하고 이 세상을 만드셨기에 주님께서 조치하신 그 속에서 어떤 인간도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정답을 갖게 되죠. ‘성전에서는 우상 숭배하면 안 되고, 또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으로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중에도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야 말고 과거 우리 조상들이 바벨론에 멸망 당했던 그 죄를 반복하지 않는 길이야.’라고 해석하게 주님이 만드신 거예요.
주님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했을 때, 그렇게 만들어지는 자는 육에 속한 자에요. 그러면 주님은 영으로 오셨기에 이 말씀의 의미를 다 아시죠. ‘그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마귀적이다.’ 이것은 꿈에도 상상 못할 일입니다.
목사는 설교하는 자이기에 성경 전체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해요. 그런데 왜 전체 흐름을 알아야 하고, 왜 성경 말씀을 연구하는가? 그 목적이 뭐냐? 출발점 자체가 ‘잃어버리기 위함이냐, 살기 위함이냐?’ 이것부터 잘못되면 말씀을 배우면 배울수록 그 악마성이 더 노골화 되지요.
목사들이 복음을 듣고 ‘목회 안 해도 된다. 교인 한 명도 없어도 괜찮다.’ 이런 마음으로 말씀을 대하면 아주 자연스럽죠. 그런데 왜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의 설교를 제사장들과 관원들이 반대합니까? 그들의 설교로 인해 자신들의 밥줄이 끊기거든요. 자기들을 따르는 자들이 사라지니까 돈벌이가 안 되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협박을 가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택] 앞부분에 보면 “현대 교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전에는 저주가 겁나서 조심스러워하던 평신도까지 이제는 마음 놓고 교회에 대해서 비판을 가한다. 그러나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자는 드물다. 교회를 비판한다고 그것이 곧 주님에 대한 사랑의 열매라 볼 수는 없다. 교회 비판이 주님에 대한 사랑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평신도의 경우에는 교회에서 자기 영향력 행사가 실패하게 될 때 분풀이로 교회를 비난할 수 있다. 또한 목회자의 경우는 자기 교회가 더욱 세련되고 현대적이고 수준 높은 설교를 하고 있음을 알려서 교인을 다량 확보하기 위해 교회들을 비판할 경우가 있다.”
비판이 두 종류죠. 평신도가 교회를 비판하는 경우는 자기가 교회에서 영향력을 더 크게 행사하려는 목적이고, 목사들은 비판해서 자기편 만들기를 하죠. 목사들은 기존 교회를 비판하면서 나는 옳다는 거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를 따르라.” 이게 기존 교회를 비판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진짜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이런 이단들 때문에 복음을 못 전하게 하셨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면 “너 이단 아니야?” 하면서 아예 안 듣지요. 이게 주님의 일입니다. 주님의 일은 실패하지 않아요. 왜? 지옥 갈 자를 천국 보낼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지옥 갈 자는 복음을 아예 못 듣게 모든 교회가 자물쇠로 걸어 잠갔어요. 우리 교회는 한 팀이 되어서 지옥 가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설교는 담임 목사의 윤허가 떨어진 목사의 설교들 듣든지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검정을 받으라는 거죠. 정말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이유는 자기 세력 만들기 위함이고, ‘나 이만큼 똑똑하다’는 거예요.
복음을 제대로 전하는 분의 책이 있어요. 이근호 목사님 책도 많이 나와 있고, 십자가마을 홈페이지에 가면 많은 자료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평생을 읽어도 다 못 읽을 만큼 많이 올라와 있어요. 자료가 많이 있어요. 이것을 수집해서 교회를 비판하고 옳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복음이 될 수가 없어요. 이런 일을 바리새인들이 이미 다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가? 성령이 와야 해요. 그러면 우리는 또 질문하죠. “성령이 뭡니까?”라고. 그러면 그분에게 제가 묻고 싶어요. “성령을 설명한다고 당신이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들어요.
좀 더 봅시다.
“반대로 교회에 문제점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 비판을 삼가고 오히려 교회를 비호하려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말하기를, 교회의 사명은 전도와 선교에 있기 때문에 행여 교회가 나쁜 이미지를 드러내면 하나님의 사업에 장애가 될까 우려해서 교회를 비판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도 역시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기가 벌려 놓은 목회 일이 보다 완벽하기를 원하며, 자기에게 해가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이다. 즉 주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자들이다.”
달리 말하면, ‘자기 부인’이 안 된다는 겁니다. 자기 부인이 안 되기에 결국은 교회를 비판해서 내 세력을 키우든가 나의 활동 영역을 넓힌다든가 아니면 나는 저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 또 “목사님, 자기 부인하면 되잖아요.”라고 나올 거예요. 이렇게 말하는 자체가 성령 안 받았다는 증거죠. 자기 부인하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면 주님이 십자가 질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하시니까 유사복음을 들은 자들이 하는 말이 “나는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만 붙들래요.” 이렇게 나오는데 만일 그렇게 해서 구원받는다면 주님이 십자가 질 필요 없어요.
죽은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을 보면 십자가를 붙들어요. 여기 계신 분 중에도 김성수 목사 전문가도 있는데 십자가 붙든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아니요.”라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어요.
이들은 주님의 일은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몰라요. 말로는 안다고 하는데, 그 앎이 절대 나의 능력으로 나올 수가 없어요. 그 앎 자체가 부정되어야 하죠. 아브람이 날아가는 자리에 아브라함이 만들어지거든요. 이때 날아가는 자리가 죽을 때까지 날아가요.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었으니까 이제는 계속 이스라엘로 살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었는데 계속 야곱으로 돌아가죠. 왜 그럴까요? 야곱을 이스라엘로 만들어서 계속 이스라엘로 살면 더 이상 주님의 희생, 십자가가 필요 없습니다.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십자가가 더 이상 필요 없어요. 이게 구원파들이잖아요. 김성수 목사 교인들은 구원파와 똑같아요.
저의 이 말을 듣고 불쾌해서 4년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찾아와서 복음을 듣고 계시는 분도 있는데, 김성수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면, 십자가만 남아야 하는데, 십자가만 남아야 할 자리에 복음을 아는 내가 남아요. 그분은 이근호 목사 신학을 차용, 뼈대를 가져와서 그것을 이성으로, 합리적 방법으로 나열해서 설교합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믿으세요. 좀 어렵지요? 자세히 들어보세요. 잘 들으시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이에요. 이건 교육이지 복음 전파가 아니죠.
그럼 성령이 왜 필요해요? 지금 주님이 살아 계시잖아요. 만약 주님이 안 계시면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해요. 그런데 주님이 살아 계셔서 친히 자기 백성 불러 모으시잖아요. 목사님들이 이것을 믿고 설교하시잖아요. 내가 복음 전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주님이 하시잖아요.
만약 내가 전해서 믿는 자가 생긴다면 주님이 필요 없죠. “자, 이제 정답이 기록된 교재 하나를 만들겠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선택]이란 교재를 만듭니다. 완벽합니다. 부족함이 없죠.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면 천국 갑니다.” 이것은 성령을 멸시하는 겁니다. 성령을 훼방하면 사함을 받지 못한다(마12:31)고 했어요.
“목사님, 옳은 주장을 믿는 것이 뭐가 나쁩니까?”라고 반발할 자가 있겠지만, 그 맞는 주장을 믿고 받아들이면 십자가는 필요 없잖아요. 주님의 일하심을 제거해 버리는 겁니다. 이게 성령을 멸시하는 겁니다.
오늘 오전에 공부할 때도 그런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께서 자기를 증거하실 때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고, 나의 모든 일을 아버지께서 친히 증거하신다(요5:36).’고 했을 때, 그 주변의 사람들이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예수님 한 분뿐이에요.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신다고 했지요. 그럼 정말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까? 목사님들 설교할 때 그렇게 하시잖아요.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마28:20)’고 설교하잖아요. 그럼 어떤 교인이 “목사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주님이 어디 계신지 보여주세요.”라고 하면 뭐라고 답변하실 겁니까?
주님이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는 사람은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게 주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설득이나 납득 시키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왜냐? 어둠은 아무리 설득해도 설득당하지 않아요. 어둠은 사는 세계가 달라서 대화 자체가 안 돼요. 왜 대화가 안 되는가? 육으로 낫잖아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그냥 있는 대화가 아니에요.
그러니 목사가 설교를 제대로 잘해서 성도들에게 구원을 얻게 한다든가 좋은 교회를 만들겠다든가, 아니면 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자체가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람이에요.
예수님은 일방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심판주로 복음을 전했을 뿐이에요. 그래서 주님이 구원할 자는 구원하고 지옥 보낼 자는 지옥 보내버리는 겁니다. 그 역할을 성령 받은 제자들이 하고, 성령 받은 성도가 하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사랑이 나오는데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택] 전체의 흐름이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자체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책을 보면 ‘주님이 사랑하는 교회가 되면 되겠네.’ 이렇게 접근해요.
그럼 주님을 사랑하려면 성경을 제대로 알아야지요. 호세아에 보면 ‘이 백성이 망하는 이유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호4:6)’고 해요. 그러면 그 지식이 어떤 지식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이죠. 그래서 그 지식을 바리새인들은 가득 채우죠. 그런데 그 지식으로 예수님을 죽여요.
조금 더 하고(마치고) 질문 받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의 존립은 전도나 선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함에 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목회자나 평신도 할 것 없이 말씀을 더 생각하는 자들이다.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외부적으로 벌여 놓은 일에 정신이 팔려있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야망의 노예가 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비록 거룩해 보이는 선교나 전도 일이라도 마찬가지이다. 말씀보다 교회를 더 우선하는 가톨릭의 입장을 고수한다면 다소 이해가 되지만, 교회보다 말씀을 더 우선시한다는 개신교에 속했다고 하면서도 말씀 연구에 소홀히 한다면 차라리 목회라기보다는 사업이라고 말해야 옳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가 하면, ‘말씀을 연구하면 교회다운 교회가 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자체가 말씀의 본뜻에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그럼 무엇에 관심이 있는가? 교회 사업에 관심이 있죠. 그리고 교회 사업의 주인이 목사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교인을 직원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돌릴 때 교회가 커지고 잘 돌아간다는 겁니다.
말씀에 관심이 있다는 말은, 말씀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자신이 죽고자 하는 태도로 말씀에 들어가는 것이고, 반대로 이런 책을 읽으면서 ‘교회가 지금 말씀에 관심이 없고 사람의 지식에 관심이 있으니까 말씀으로 돌아가면 진짜 교회다운 교회가 되겠지.’ 이런 이유로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한다면 그놈이나 그놈이나 똑같은 놈이에요.
요즘 교회는 말씀 사업자지요. 그래서 인터넷에 접속해보면 말씀을 고상하게 전하는 사람이 인가가 많아요. 조회 수도 많고. 그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틀린 말은 안 해요. 엉터리 목사들 말고, 건전하다고 하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틀린 말은 안 하는데 꼭 바리새인처럼 말해요. 알아듣는 말을 하고, 이해되는 말을 하는 겁니다.
“왜 말씀에 관심이 없을까? 그것은 자기 자존심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기 자존심을 더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씀 탐구는 바로 자존심이 다 깨어질 때까지 해야 한다.”
말씀 탐구는 내가 왕창 무너지기 위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로서도 무너져야 하고, 말씀을 보면 볼수록 사도 바울처럼 죄인 중의 괴수로,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지 않은 뜨인 돌에 의해서 박살 나게 하는 그 작업이 말씀을 연구하는 작업이란 겁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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