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십자가 마을 여름 수련회 이근호 목사
1강
저희들이 조성한 모임이 아니라 말씀이 스스로 조성한 모임이 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중요하지 않고 우리 가운데 주님이 함께 있음이 더 중요한 것이 새롭게 각인되고 확인되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무엘하를 하겠습니다. 사무엘하를 처음부터 읽어본 사람들은 무엇이, 상황이 너무 세속적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세속적으로 전환되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상황에 나와야 되는가? 자연의 기적 또는 출애굽 같은 일들이 일어나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도와주는 현상이 일어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음이 이해가 된다. 자연의 기적은 출애굽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상까지는 나오는데, 점점 자연의 기적이 쇠태하고 희미해진다. 희미해지면서 인간들의 아귀다툼이 유난히 점점 더 강렬해진다.
사무엘하로 오면서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도와준다가 없고 어떤 인간이 어떤 인간을 죽이고, 죽임당한 형제들이 복수자로 나서서 죽이고, 인간들의 갈등, 인간들의 마당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개입하는 증거는 점점 더 축소가 되고, 인간들이 설치기만 하면 얻을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사무엘하가 전개된다.
사무엘하에 나오는 모든 인간들은 말썽쟁이들이다. 말썽 꾸러기들을 다 모아놓은 것 같다. 말썽꾸리들을 통해 나온 결론은 죽이고 죽고 죽이고 죽는 이야기가 된다. 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만 쳐다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꾸 다른 인간들을 염두에 둔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나는 나를 안 버렸지만 너는 나를 버렸잖아. 따라서 나는 너를 죽이겠다.” 이것은 마치 시조 같지 않습니까? 나는 나를 안 버렸지만, 나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지만, 너는 나를 배신했기에, 배신당한 나는 너를 그냥두지 않고 죽여 버리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무엘하 전체에 나오는 내용이다. 의미를 축약해서 말하면 “율법은 안중에도 없다.” 내가 성질났는데 무슨 율법을 이야기하는가? 타인이 나를 건드렸는데 율법이 왜 끼어드느냐? 일단 복수부터 하고 가실께요다. 이것이 사무엘하 전개다.
여기에 누가 한몫을 하는가? 다윗이 한 몫 한다. 다윗이 한 몫 한다는 말은 다윗조차 율법이 안중에 없다는 말이다. 이런 이스라엘의 분위기는 사사기에서 사사들의 활동이 단회적이다. 그래서 사사들의 숫자가 많다. 한결같지 않다. 사사들이 단회적이라는 말은 사사들 자신이 이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버리지 않았지만 너는 나를 버렸기에 나는 너에게 복수하겠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사사들의 연속성을 갖고 있는 자들이 사무엘서에서 사사들의 단회성이 사울 왕까지 이어지고, 다윗 왕까지 이어진다.
사사들에게 관심이고 사사들이 영웅같이 구원했잖아요. 사무엘 때문에 살았잖아요. 사사, 선지자, 왕에게 기대를 건다. 사무엘하에서 하고 싶은 말은 백성들이 문제다. 영웅을 기대하는 백성들이 문제다. 백성들이 왕을 갈아치운다. 백성들은 “나는 나를 안 버렸다.”고 한다. 사사들은 나는 나를 안 버렸다. 나는 나에게 충실했다는 것이 잘했느냐고 묻고 있다.
여기에 있는 나가 모여서 백성이 된다. 백성들마다 생각은 전에처럼 훌륭한 사사가 없느냐는 식이다. 그들이 처음부터 무엇을 폐기 처분했는가? 율법은 왜 있는가? 이들 안중에 율법은 없다. 나는 나를 지키는 것에만 일관되게 충실 할 테니 여기에 발생되는 하나님에 대한 해악은 하나님과 백성사이 중재자가 나타나 해결해 주던지 눈감아 달라는 것이다.
나는 나를 버리지 않았지만 너는 나를 버렸기에 나는 너를 죽이겠다고 할 때 그냥 죽이지 않는다. 잔인하게 죽인다. 잔인하게 죽인다는 말은 나를 지킬 때 잔인하게 지킨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지키는 강도와 비례해서 타인에 대한 태도가 결정된다. 타인을 강하게 죽인다는 말은 그만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는 표시를 잔인의 강도를 높여가면서 보여준다.
인간은 잔인할 때 살맛이 난다.
칭찬 좀 받을 때 입맛을 돋아 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극히 잔인할 때 나다운 것이다. 내가 아주 잔인하게 할 때 가장 제대로 자신을 직면하는 순간이다. 속이 다 시원하다. 남을 밟을 때 살짝 밟는 것은 나답지 않다. 맨발로 밟는 것이 아니라 군화발로 밟을 때 속이다 시원하다. 그래 이 맛이었어.
율법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의 잔인성을 다 털어 놓을 때 율법이 완성된다. 그래서 사사기 지나서 사무엘상 지나 사무엘하로 오게 되면 점점 더 십자가로 다가서고 있다. 인간들의 본성이 드디어 이제는 율법에 구애받지 않고 본성대로 활개를 치면서 그들이 인간의 잔인함이 구성해내는 최고 목표지로 달려가고 질주한다. 그것이 바로 국가이다. 국가가 잔인함은 전쟁에서 드러난다.
13세기 몽골이 지구의 반 이상을 점령할 때 아주 잔인했다. 그들은 잔인하면서도 왜 자신들이 잔인해야 되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 그런데 몽골제국이 그렇게 잔인하게 적들을 쳐부수기 위해 칭키스칸이 자신의 부하들에게 열배 이상 잔인하게 부하를 다루었다. 한 군인이 탈영하면 그 부대를 다 죽였다. 부하를 사랑하는 것은 없다. 이것을 군사들이 인수받아, 미암마, 이란을 칠 때 상상 초월할 정도로 잔인했다. 유럽으로 가서는 막혔지만, 칸이 죽지 않았다면 유럽도 그렇게 당할 뻔 했다. 전쟁이라 숨겨진 악마적인 주특기까지 다 뽑아낸다. 그것을 고상한 말로 “날 것”이라고 한다. 표피층 아래 날 것이 나온다. 전쟁할 때만 날것이 나온다. 전쟁 때는 의리, 우정은 없다. 전쟁할 때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된다. 아무 감정이 없다.
인간의 정이란 사치였다. 전쟁 아니라 평화 시에 있었던 한시적 우정과 가족애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면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역사가 진행될수록 십자가에 가깝다.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 이스라엘이 아람에게 포위되었을 때 가위 바위 보를 해서 먼저 네 자식을 먹고, 다음에 내 자식을 먹자고 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아 왕에게 고소하는 사건이 있다.
인간이 아무리 인생을 살아도 본인의 마음을 모른다. 본인의 마음도 모르면서 무슨 다른 사람의 마음을 그리겠다고 하는가? 눈코는 다 그렸지만 마음만 그렸다고 합니까? 네 배부터 채우는 것이 타인의 마음이다. 인간이 타인의 마음을 알 때는 항상 “내게 없는 것은 네게 있을 것이라는 환상으로 다가선다.” 헛것, 나는 전쟁 중에 내 목숨이 위태로울 때 나는 나부터 챙긴다는 원칙은 두 살 먹은 손자라도 갖고 있다. 아무리 사이좋아도 쟁반에 나온 피자 한 조각을 갖고 접시가 깨질 정도로 네 죽고 내 살자는 식으로 덤벼든다. 나는 나를 지키는데 어디 감히 나를 건드리는가?
다윗도 이것을 갖고 있다. 다윗에게는 율법 완성체제를 갖고 있다. 다윗은 자신이 모델이 아님을 다윗은 아는데 다윗 주위에 있는 인물들은 이것을 모른다. 다윗은 본인이 모델이 아닌 것을 본인은 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둘로 나눈다. 다윗에서 메시야가 오지만 다윗과 다윗을 둘로 쪼개진다. 메시야는 다윗에게서 오지만, 다윗의 후손이지만, 그 다윗이 그 다윗이 아니다. 다른 다윗을 다윗 속에서 끄집어내는 방식이 사무엘하에서 나온다.
육적 다윗은 날것이다. 율법대로 다윗이다. 사무엘하는 두 종류로 다윗을 나누어서 보면 쉽다. 그렇게 쉬운 책이 아니다. 다윗의 혈통인데 다윗의 혈통에서 다윗을 끄집어낼 때, 원래 다윗이 생것, 날것이 그대로 유지되는 다윗이다. 압살롬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다윗이다. 다른 다윗은 자식에 기대하는 다윗, 솔로몬이 태어나면서 솔로몬을 의지하는 다윗에게서 나온다.
다윗 다음에 솔로몬이지만, 솔로몬이 태어난 후에 솔로몬 속에 있는 다윗을 다윗이 새롭게 발견한다. 후손을 통해서 선조된 자가 후손 속에 응축되어 있는 메시야, 언약의 완성, 율법의 완성을 선조들이 후손 속에서 찾는다.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이 분명 자기 후손이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기다리면서 자기 후손이 메시야이심을 고대할 때, 그 메시야와 아브라함 사이에는 혈통 그 이상이 있다. 혈통을 벗어나는가? 그렇지 않다. 혈통 안에는 율법이 있고 율법을 혈통을 관통한다. 율법을 혈통을 뚫고 지나간다.
세계에서 제일 긴 터널이 북이탈리아와 스위스에 있는 알프산 아래에 있다. 알프스산 아래도 뚫고 지나간다. 알프스 산이 무너지지 않는다. 멀쩡하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신앙인물이 그 아래 예수 그리스도께서 뿌리 채 뚫고 지나간 사람들이다. 앉은뱅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람들, 백부장, 12년 혈루병에 걸린 여인들 등이다. 뚫고 지나가니 생명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소경된 자가 눈만 뜨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날 것이다. 눈 번쩍 뜨고 지옥갈래, 눈 감기도 천국갈래의 모습이다. 그러니 그 소경은 소경인체 천국갈래라고 한다. 그러니 그 소경은 눈 떠도 뜬 눈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시력 2.0이라도 나는 소경이라고 한다. 미친 것이다.
사람이 이상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 없이는 성도가 될 수 없다. 다윗은 자신을 모델로 여기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의 모델은 어디에서 찾는가? 솔로몬에서 찾는다. 솔로몬이 다윗 자신의 몸에서 나오지만 다윗은 자신의 몸에서 나온 것을 부인한다. 죽은 헷 사람 우리야 장군의 아들로 본다. 솔로몬이 왜 중요한가? 날것, 육적인 내가 누구를 죽였다는 것이다.
첫째시간 제일 중요한 것은,
왕은 죽음에서도 소환된다. 이것이 메시야적이다. 다윗만이 간음을 하든, 살인을 하든 상관없다. 죄의 죽음에서 소환되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왕이 왕다우려면 내가 필히 율법에 의해서 망가져야 한다. 구멍이 나야 됨을 유일하게 아는 자가 이스라엘 왕 다윗이다. 내가 멀쩡한 나로 유지해서는 절대로 죽음에서의 소환하는 언약적 능력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다윗 왕만 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다윗을 모델로 삼는다. 그 이유는 다윗에게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권력은 내가 나를 지키고 싶은 나를 칭칭 감는다. 두텁게 감는다. 잠바 입고 오바 입고, 더 많이 걸친다. 힘들을 모아 더 걸친다. 권력을 원해서 권력자가 된다.
그런데 다윗의 모형에서는 권력자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적이 없다. 왜냐하면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무엇으로 싸웠는가? 칼의 힘이었는가? 큰 키 때문인가? 훈련 때문인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승리했다. 다윗에게는 여호와의 이름이 다윗 속에서 무슨 고백을 하게 하는가? 저 골리앗을 볼 때 덩치로 보는가? 방패, 칼, 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윗은 골리앗에게 없는 것을 보았다. 할례언약이 없음을 보았다. 할례 받지 않았음을 보았다. 정답을 알면 간편하면서 허망하게 느껴진다. 골리앗이 죽은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년 다윗이 힘이 있어서 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이겼는가? 할례 언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굉장히 쉬운 이야기다. 그런데 이 쉬운 이야기가 무엇이 훼방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델로 삼아야 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구원의 모델인 것을 본인은 알아요. 예수님 외에 제자들과 그 어떤 인간도 몰랐다. 그들은 예수님의 힘과 권세 권력에 눈독을 들였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가장 빈약한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오신다.
열 살 넘은 애가 아니다. 두세 살 정도의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셔서 말씀하셨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나는 나를 지킨다는 원칙이 없다. 아직 발달되지 않았다. 내가 나를 지킴이 없다. 그러니 타인에 대한 잔인함이 없다. 그냥 의존적이다. 무조건 길거 아저씨가 비트코인 준다면 따라간다. 그만큼 똑똑한 아이는 없지만. 누가 키워주어도 엄마라 부르는 존재. 혈통적으로 어디에서 태어났는가를 문제 삼지 않는다. 내가 전적으로 더 이상 나에게 내가 중요치 않다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 이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 안에만 계신다. 내가 중요치 않는 자라고 끝까지 나에게 주입시키는 분이 메시야다.
다윗이 소년 때는 있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후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이것으로 계속 이스라엘의 왕이 될 줄 알았다. 사무엘하 1-10장까지 나를 통해 이스라엘을 통치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11장으로 넘어가면 몰락한다. 1절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정할 때, 암몬 자손과 전쟁을 했다. 저녁에 왕궁에서 거닐 때,” 이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길 때의 원리원칙은 없어졌다. 할례 언약이 무할례를 이겼을 때는 자신이 자기를 지킬 이유가 없다. 그런데 소년 다윗이 점점 자라난다. 예수님은 자라나서 십자가로 가시지만 인간은 자라면 세속에 물들어 똑같이 권력을 탐한다. 나는 왕이다. 과거에 골리앗을 이겼다는 생각으로 인해 나 외에 왕 적임자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바른 정치, 정의로운 정치를 위해 애썼으니 나는 나다. 이렇게 밀어붙이는 자체가 자신이 망가지고 있는 과정임을 상상도 못했다. 점점 더 멀어진다. 멀어져버린 할례언약과, 율법정신과 멀어진 다윗을 대체해서 우리야 장군이 등장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에서 누가 관여하는가? 하나님의 언약궤가 주시하고 있다. 이점이 중요한다. 전쟁은 사람들이 전쟁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호수아, 사무엘상을 보게 되면 전쟁은 언약궤가 있는 쪽과 없는 쪽에 의해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 난 것으로 본다. 언약궤가 율법의 완성이다. 언약궤가 있는 예루살렘에서 우리야 장군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지키는 전쟁이 아니라, 언약궤의 의미와 가치를 지키는 전쟁을 해야 한다고 이스라엘을 만드셨다고 생각한다.
암몬 자손은 할례가 없고 이스라엘은 율법이 있다. 율법 있는 쪽이 없는 쪽을 이기는 것이 언약궤 취지를 살리고 확인하는 차원에서의 전쟁이다. 이 전쟁을 붙여주는 전쟁이라 한다. 붙여주시는 전쟁이다. 붙이시는 전쟁이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39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며 왼편도 돌려대라.”고 하신다. 이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을 돌려댄다. 그렇게 하면 기분 나빠 더 때린다. 군대에서 구타가 왜 없겠는가? 졸병이 까불어 왼빰을 치면 오른 빰을 돌리다간 더 맞는다.
내가 더 맞음으로 5:39절의 의미가 살아난다. 왼쪽도 마저 때리라고 하면 더 많이 얻어맞는다. 너무 맞아 죽는다. 죽어가면서 죽어가는 이것이 마태복음 5:39절의 완성이라고 하면서 죽는다. 이렇게 하면 미친 것이지. 말씀을 왜 네가 지키는가? 바보 같지요.
우리야 장군은 바보 같아요. 암몬과의 전쟁에서 내 목숨의 안전과 내 아내와의 사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약궤가 있는 이스라엘이 이긴다는 것을 몸 바쳐 확인해야 한다. 이 붙이시는 전쟁에 우리아가 나섰다. 사실 소년 다윗이 골리앗과 했던 전쟁방식이었다. 그런데 인간이 시건방졌다. 내가 왕년에 세탁이 백만 대 팔았던 신화의 인물이다.
옛날에 내가 뭘 했다는 식으로, 왕년에 내가 전도 몇 명하고,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이런 말이 나오면 맛이 갔다. 끝났다는 말이다. 저 인간 끝났다는 말이다. 새로움이 없다. 옛날에 너에게 절해줬다는 것은 소용없다. 새로움이 없다.
우리아가 전쟁에 나갔을 때 우리야 아내가 목욕하고 있는 모습을 다윗이 보았을 때 다윗이 언약궤 전쟁의 장애물로 등장한다. 소년 다윗은 다친 것 없이 골리앗을 이겼는데 우리야는 본인이 죽는다. 본인이 다친 정도가 아니라 죽었다는 말은 죄가 더 심화되었다는 말이다.
방식도 잔인하게 죽는다. 여기서 누가 죽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윗이 끼어진 것이 중요한다. 소년 다윗의 시절이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 하시는 일에 건방지게 다윗이 이 싸움에 끼어들었다. 율법의 기능의 현재성, 실재성에 인간이 끼어들었다. 그렇게 되니 억울한 의인의 죽임이 발생한다. 이것이 사사기에 나오는 대자연의 기적보다 더 확실한 기적이다.
집에 백억 생기는 것보다 십자가가 더 큰 기적이다. 백억 생기면 나는 백억 받을 만한 잘난 존재가 되지만 십자가가 내 인생에 개입되면 구원이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님이 밝혀진다. 내가 나의 무거운 인생의 무게를 놓게 된다. 돈 좀 들겠지만 실감나는 방식은 이런 겁니다. 접시가 있습니다. 접시를 바닥에 던지만 와장창 깨어진다. 깨어지기 전에 접에서 나를 써라. 시건방지게 주께서 하시는 일에 내 구원의 욕망이 끼어들면 진짜 구원될 사람은 주께서 깨어버리는 복을 주신다. 내가 망하는 복을 주신다. 다윗은 이 복에 이스라엘의 왕의 자격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말썽꾸리기다. 트러블 매이크다. 주님에 대해 말썽꾸리기다. 말썽 일으키라고 이 땅에서 구원시키셨다. 아멘. 아멘이 나와야 되는데, 어느 정도 말썽 꾸리기임을 알기 위해 내일도 살려 주신다. 말썽꾸리기 역할에 충실하라.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우리는 엑스트라다. 허장강 같은 사람이다. 국민에게 욕 얻어먹는 나쁜 사람, 단역배우다. 국민밉상이 되는 역할을 맡겼다. 주님께서 그런 역할을 맡겼다는 것은 주님의 드라마에 역할을 맡았다. 얼마나 신나고 감사한 일입니까?
악한 일 하라는 데 착한 일을 하면 감독의도가 다 깨어진다. 여러분은 악한 일을 잘한다. 나는 나를 지키려고 하는데 왜 너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가? 인간이 잔인할 때 살맛이 나는 것처럼 그 역할을 하라고 하신다.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 믿는 사람은 이단이라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사울이다. 스데반 죽을 때 옷 지키는 사람이었다. 신명기 율법대로 제대로 죽이라고 하면서. 사울 본인이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다. 구원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상상이 안 된다. 수련회 끝나면 예수 믿겠다. 망상이다. 믿지도 않으면서 믿는 척하는 후유증이 발생한다.
구원문제는 어린아이처럼 후견자, 보호자, 목자가 하신다. 고엘은 우리를 양자 취급한다. 아들도 아닌데 아들로 취급하신다. 구원자는 우리를 양자취급해서 돌봐주신다. 그 돌봐 주실 때 우리는 아들이 될 자격자가 아니었다가 한때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온다. 주님의 율법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내가 양자가 되었습니다. 아들은 예수님이고, 형제로써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 누가 내 형제요 모친인가? 주의 뜻대로 사는 자가 형제요 모친이다. 내 작살내기 위해 우리의 포부와 뜻을 유발하는 상황이다. 우리는 눈만 뜨면 스케줄 체크한다. 그것이 내 뜻이다. 오늘 계란 삶아야지. 계속해서 우리의 뜻을 만든다. 찰밥해서 먹으니 맛이 없으니 인생이 허무해진다. 돈 모아서 차 바꿔야지. 차 바꾼 후 기분이 좋지만 얼마가지 않는다. 인생 살아 차 바꾸려고 하는가? 기껏 벤츠 600 타려고 태어났나. 쥐나 개나 다 벤츠다고 다닌다. 이런 벤츠 안 되고 다 비싼 걸로 바꿔야 된다고 한다.
주의 뜻은 먼저 우리의 뜻이 등장한 후에 나온다. 그래서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은 거짓말이다. 주님의 영광과 복음만을 위한다는 것이 거짓말이다. 배고파 보세요. 그러니 나대지 마시고 우리 뜻, 사무엘하에서 우리 뜻은 욕망으로 나온다. 권력의 욕망대로 사시면 주님께서 알아서 그 욕망을 다 부셔주신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죄밖에 안 지었는데 결과는 구원이다. 무슨 이런 공식이 다 있는가?
인간의 개별적 뜻은 통하지 않는다.
엑스제곱 플러스 삼엑스 마이너스 사는 영
여기서 엑스를 구하는 방법은 사를 영 뒤로 보내면
엑스는 일이 나온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이다.
이것을 보편화 시키면
엑스제곱 플러스 에이엑스 플러스 삼은 영을 보편화 시키면
엑스는 이분의 마이너스 에이 플러스마이너스 루터 에이제곱 플러스 사비 이것이 일반해다.
일반해가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님이다. 이 상황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개별해인 엑스제곱 플러스 삼엑스라는 상황을 시간에 딱 맞게 주께서 적절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보편적인 해가 개별적으로 적용이 되려면 우리는 보편에 매인 개별자가 되어야 한다.
사무엘하는 사람들이 권력욕망에 미쳤을 때 율법은 관심대상이 아니다. 누가 힘을 가졌는가가 하나님께 복 받은 것으로 오인되기 때문이다. 사무엘하를 제일 잘 이해하는 방법은 교회 내에 권력투쟁을 보면 된다.
교인들이 목사를 받들어 모신다. 받들어 모시는 이유는 교인들을 백성으로 보면, 백성들이 당회장 목사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당회장 목사는 우리들이 요청하는 바를 충족할 때 받들어 모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커졌다. 십만 명이 되었다. 목사가 자기 아들들을 교회 주요관직에 세운다. 성가대장이나 반주자로. 이렇게 되면 교회는 목사 집안이 교회가 된다. 그렇게 되면 그 교인들은 졸지에 백성이 된다. 백성들이 목사를 쫓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목사가 과거에 골리앗을 이겼기 때문이다. 옛날 빈민촌에 활빈당을 만들었다. 개척할 때 고생을 혼자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눈치 없는 복음 전하는 자가 등장했다. 목사가 종용히 불러 종용히 잘라 버린다. 네 말이 옳지만 교회 부흥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잘라버린다. 여기에 있는 관료들, 주식이 많은 자들은 목사의 횡포가 심하지만 때를 기다리면서 종용히 기다린다.
2강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채에 있다. 삼하 11:11절에 언약궤가 유다의 영채가운데 유하고, 우리야 장군은 언약궤 있는 쪽과 언약궤 없는 쪽에 관심이 있다. 율법이 있는 쪽과 없는 쪽에 관심이 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기에 그런 것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차 방정식 일반해에서 개별해로 바뀌었다. 관계가 끊어졌다. 나는 관심이 없고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에 관심 없고 사적 욕망을 취하고자 할 때 율법에 준해서 간음죄와 살인죄를 유발시키신다.
자기 자신의 개별적인 구원에 관심 있는 사람은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하지 않고 완벽하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다윗처럼 하지 않겠다고 나선다면 여전히 개별자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야처럼 죽어도 상관없다고 해야 되는데, 자신이 우리야를 죽여 놓고 우리야를 부러워하겠는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개별자에 국한된 인간의 한계다.
이스라엘 나라가 유지하는 방식은 다윗의 혈통자체가 내부적 혼란으로 와해된다. 무너져 내린다. 그렇게 와해된다. 엉망이다. 와해되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와해되는 어떤 원칙을 세우신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집을 건축하겠다고 할 때 나단 선지자가 와서 예언을 한다.
사무엘하 7:13-14절입니다.
“저는 내 이름을 우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족보, 수십 명의 조합이 있어야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다. 이스라엘이 망해야 이스라엘이 산다. 여기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각기 잘났다고 우기면서 자기 정당성을 내세우면서 권력을 잡으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 노선 변경이 일어난다. 다윗 혈통적 노선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특정 영웅의 혈통을 지킨다고 해서 왕가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사람이 혈통으로 안 된다면 무엇으로 되는가? 혈통을 쪼가리 내는 방식으로 거기에 덧붙이는 혈통이 다윗의 죄를 바탕으로 해서 새롭게 등장한다.
나단은 다윗의 아들이다. 스루야의 아들은 아비새, 요압, 아사헬이다. 요압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다윗의 아들 가운데 암논, 다니엘, 압살롬, 아도니아, 스바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족보를 외워야 구원받느냐고 묻는다. 이것 외워서 지옥 간 사람들이 더 많다.
암논이 권력승계 일위이고 압살롬이 삼위이다. 삼위가 일위를 제거해야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다. 적절한 기회를 노렸다.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로 인하여 그 기회를 차지했다.
사무엘하 7:14절을 보면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다윗왕의 특징은 죽음에서도 소환한다. 그러나 사울은 죽음에서 끝난다. 다윗은 죄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 받아 왕이 된다. 이 요소가 다윗계통 저 후에 다윗의 자손의 영향력이 시간을 거슬러 물이 내려와서 다윗에게 미친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하지만 마지막 때가 높아 물이 거꾸로 흐른다. 이것은 종말의 주입이다.
마지막에 이루신 일을 작은 조각으로 분배하신다. 오늘날 성도는 시간이 정지 되었으니 마지막 때의 혜택을 성도에게 주면 성도는 이미 구원받았고, 성도의 모든 모습은 구약에 흐르는 모든 것에 대해 일대일 대응이 된다. 사무엘하에 나오는 인물들이 우리 역할을 미리 보여주는 자들이다. 모압, 암논, 압살롬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안에 이 요소들이 다 있다는 말씀이다.
보면서 좌절할 필요 없다. 이미 합격했기에. 느긋하게 본다. 나에게 암논, 압살롬, 아비새, 다윗, 솔로몬 같은 요소가 있었음을 느긋하게 본다. 성경에 나온 모든 것은 개별 해다. 개별적인 공식에 보편적인 진리가 담긴다. 성경을 볼 때 내 모습이 어떠하기에 십자가 아니면 구원이 될 수 없는가를 보는 것이다.
사무엘하 7:14절에서는 사울은 끝이지만 다윗은 은총을 빼앗지 않겠다고 하신다. 이것을 다윗의 등불이라고 한다. 다윗의 등불을 꺼지지 않는다. 다윗의 등불이 영원히 빛난다. 이것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다. 개별적인 것은 나의 행동여부로 인해 결정되지만 보편적인 것은 예수님의 행하심과 관련되기에 영원히 완성된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면 보편적이 되지만 내가 예수 믿는 것은 치매 걸리면 끝난다. “예수가 누구지?” 기분 나빠 술 한 잔 먹고 나 예수 안 믿으면 끝이고, 술 깨면 ‘실수했구나’식이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다. 주께서 문제 삼으시면 농담도 못합니까라고 할 것이다. 봐 주세요라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한다.
사무엘하 7:14절을 다윗이 오해한다. 내 개별자 다윗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한다. 솔로몬에 와서 비로소 제자리를 잡는다. 다윗은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제안한다. 제가 여호와를 위해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한다. 내 행함을 통해 결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교회에 적용하면 집 있는 사람은 팔고 전세로 옮기고 나머지는 교회에 헌금하세요라고 해서 돈 빼내는 설교를 한다. 돈 빼내는 설교를 할 때 자식에게 뭘 남겨야 한다고 한다. 자식에게 돈 남겨서 자식 싸우는 것을 봤으니 자식에게 줄 돈을 교회에 헌금하시면 그 교회가 부흥하면 마귀나라 쫓겨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면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가 된다. 이왕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쓸데 잘 써야 된다고 한다. 자식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해야한다. 교회에 헌금해서 자식 대대로 영적으로 양육 받고 복 받으면 여러분들도 천국가고 자신들도 어머니 덕분에 천국에 가니 이것이 바로 돈을 땅에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예배당은 눈에 보인다는 것이다. 부동산이 문제다. 눈에 보인다. 다윗은 보이는 성전을 지어드리겠다고 한다. 성전을 짓게 되면 땅이 고정된다. 주님은 땅을 불 심판 하는 땅이다. 땅이 고정되면 땅이 영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년 다윗 때는 주님의 율법이 무조건이다. 그런데 여기 성전을 지을 때는 조건을 끼어 넣는다. 무조건은 조건을 배척한다. 내가 성전을 지어드린다고 할 때 네가 성전을 아는가?
성전은 인간의 몸이다. 그냥 몸이 아니라, 네가 생각하는 육체가 아니라 없는 몸이 새롭게 등장하는 몸이다. 인간에 속하지 않은, 아담에 속하지 않은 다른 몸으로 등장한다. 네가 성전을 짓게 되면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성전에 갇히게 된다. 다윗이 효도를 해 버리니 효도를 받아 준다가 밖에 나가지를 못해요. 그러니 시킬 것은 다윗에게 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의 종이 된다. 기존의 종교처럼.
기존의 종교는 신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신을 신전에 가두어 버렸다. 다곤 신전에 언약궤가 침입했다. 언약궤로 인해 다곤 신전이 엉망이 되었다. 상자가 아니다. 상자라는 죽은 사물이다. 그곳에 CCTV를 설치해서 언제 다곤 신상의 손목이 날아갔는지.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는 규칙자체를 파괴하신다.
네가 손으로 지었는가? 그렇다면 그곳에 들어갈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예배당을 지었기에 주님은 예배당에 안 계신다. 그렇다면 왜 교인들에게 헌금하게 해서 예배당을 짓는가? 부동산이기 때문이다. 팔고 더 큰 성전 짓고, 또 팔고 더 큰 성전 짓고, 자본주의 이자가 늘어나는 원칙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경에서 사흘 만에 짓겠다는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한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는 이단이 등장한다. 기존 것을 반대하면 진리가 된다고 생각한다.
독창적인 것을 꺼내기 위해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그들의 성전이 조직화 된다는 것이다. 조직화 되었으니 조직을 크게 키운다. 이것이 바로 국가다. 그러니 사무엘하에서 국가 권력을 놓고 투쟁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투쟁을 모두 다 보여준다. 마지막 욕망의 발현체는 국가 최고 권력자가 누가되느냐다. 국가가 최고 권력자가 될 때 국가의 이름으로 메시야를 죽이는 기능이 기다리는 곳으로 접근한다. 기독교국가라는 것은 짐승이다. 눈으로 확인하려고 한다. 다윗도 그런 오류를 범했다. 사무엘하 끝에 보면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다. 원래 인구조사는 군인이 한다. 요합의 권한이다. 그런데 왕이 나사서 인구조사를 하라고 한다. 그 때 요압이 말린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강행한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문제가 백성 자체에게 있기에 인구조사를 시켜 백성자체를 죽이신다.
두 개의 구원 교재에 보면 “백성들이, 국민들이 지도자를 원하는 이유는 나는 지도자 될 자격이 없다는 겸손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도자를 뽑는다.”
우리 국민들은 남을 위해 희생 봉사 하는 뛰어난 능력자가 아닌 것을 아는 겸손함을 티내기 위해 나 되신 지도자를 뽑겠다는 얄팍한 수를 쓴다.
그래서 나라가 잘못되면 다 지도자의 잘못이라고 한다. 우린 겸손했을 뿐이고, 우린 백성으로 참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우린 촛불만 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기 의로움을 챙길 것은 다 챙기고 지도자를 뽑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에게 백성들의 운명을 집어넣으신다. 왕은 포로 잡혀가지만 백성은 집안이 거들 나게 만드신다. 제대로 된 왕이 있다면 백성들은 그냥 공짜로 혜택을 입는 방식이 된다. 그 왕을 그리스도라 한다. 주님이라고 한다. 왕이라는 뜻이다. 왕이란 뜻은 백성은 계약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백성과 개별적으로 계약하신 적이 없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과 계약을 맺으셨다. 이것이 다윗계약이다. 백성을 제치고 왕과 이야기 한다.
내가 너를 친히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면 왕이 확장이 되어 새로운 백성들이 왕에 의해 선택을 받게 되고 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로 영원한 나라가 된다. 이것이 사무엘하 7:14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다윗은 이 말씀을 자신에게 하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신이 났다.
다윗이 나단 선지자로부터 이 계시를 들을 때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 사건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사무엘하에서 역설적 사건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목격했기에 거짓말이다.” 체험했기에 거짓말이 서서히 나오기 시작한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고 내가 거부하는 것을 주께서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목격자의 자격으로 거짓말을 해 줘야 거짓말이 언약적으로 유의미한 거짓말이 된다. 죄인이 되는 방식이다. 보여주고 죄인 되게 하신다.
이 역할을 다윗이 한다. 밧세바가 임신한 뒤 임신 소식을 다윗에게 알린다. 무슨 꿍꿍이가 있다. 이참에 땡잡자는 말이다. 왜냐하면 권력이기 때문이다. 왕의 자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절호의 기회다. 그런데 다윗의 반응은 “나 아니다.”는 것이다. 목격했기에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 발생과 함께 나단 선지자가 새로운 계시를 가지고 등장한다. 무대가 각자 대본을 갖고 있다.
이스라엘 전체가 주님께서 짜인 각본대로 움직인다. 어느 누구에 대해서도 책임을 몰빵 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역할만 했을 뿐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인간 사이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은 그 돌을 놓아라는 말씀이다.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한때 본인들은 거짓말쟁이라 감히 생각지 못했다. 왜냐하면 공부를 많이 했기에, 그 현장을 목격하지 않았다. 목격한 후에, 율법 당사자와 함께 왔을 때 돌로 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대로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잘못 이해했다. 나는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권한이 있다고 오해했다.
그런데 예수님과 관련된 바리새인이라면 짱돌 놓고 예수님께 와서 죄인이라고 해야 할 터인데 이 거짓말쟁이는 현장을 떠났다. 나이 많은 것부터 젊은 순으로 짱돌 놓고 그 현장을 떠났다. 그 현장을 떠나면 그만인가?
세상 끝에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호출되는데. 우리 성도가 주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다. 성도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다음에 잘할께요를 이제는 안 해도 된다. 지금 이 순간이 전부인데 다음이 어디 있나요. 다른 공간에 가서 잘할게요. 할 필요 없다. 집에서 세는 바가지 밖에서 안 샐까요? 이것 찬송가에 넣어야 하는데. 찬송가에 가장 적절하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이 바뀌면 다른 인간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다고 착각한다. 그럴 여지없다. 그 상황마저 주님께서 주셨다. 자녀 교육할 때 잘하라고 하지 말고 본색을 보이라고 하라. 네게 접혀진 너의 본색을 발휘해 봐라. 네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잘 그려 입상하면서 숨겨진 교만이 터져 나오는지 보여라. 엄마 또 백점이야라고 할 때 엄마 눈에는 또 교만이야. 엄마의 교만도 나온다. 날 닮아서. 내 DNA 다. 엄마께 영광을 돌려야지. 아빠께 영광을 돌려야지.
성도는 현장에서 일단 일을 저질러놓고 그 다음 주님의 지시가 온다. 사무엘하 11장에 나오는 다윗의 범죄를 보면서 나단 선지가가 왜 미리 이야기 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 왜 미리 이야기 하지 않고 왜 일이 벌어진 후에 당신이라고 꾸짖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서 노선을 바꾸자는 것이다. 혈육에서 미래의 노선으로 갈아타게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기존 혈육의 속내는 다 까발려야 된다. 마치 옆구리 터져 내장이 다 흘러나오듯이 속에 있는 것이 다 터져 나와야 된다.
터져 나와 다윗은 껍데기라는 것이 밟혀지고, 다윗의 아들에게서 다윗의 속성이 아들 내부로 확장되면서 아들들이 제 2, 제 3의 다윗이 되어 욕망이 화신이 되어 활개를 쳐야 한다.
너의 아들이 하나님의 가문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은 사무엘하11장을 거쳐 12장을 넘어 열 명의 후궁이 농락당하는 과정을 통해서 왜 하나님께서 다윗 집안을 성전으로 만들어 가시는지가 점점 더 명확하게 드러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지식을 확보하면 그만이지만, 다윗에게 속한 것들이 다윗 자신의 후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다윗의 본인의 속성의 갈래들이 아들들로 확장된다. 자식을 낳는 것이 축복이다. 내말 안 듣는 것이 어찌 그리 나를 빼닮았느냐? 그러니 우리 집안에 될 리가 없지. 노선을 갈아탄다.
죽은 우리야의 씨가 등장한다. 잉태지 못한 자의 자식이 등장한다. 다윗이 잉태한 적이 없는데 다윗의 아들이 되는. 다윗이라는 못돼 먹은 죄인에게, 영원히 구원될 수 없는 자임을 확인해주는, 다윗에 의해 친히 살해한 자에게서 후계자가 나온다. 이 후계자를 통해 다윗의 자식을 쳐내는 작업을 하신다. 아브라함에서서 이스마엘을 쳐내시고 이삭을 주시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개입니다. 너는 악하지만 네 속에 들어가시는 분은 의로운 분이시다. 화목제물로 들어오신다. 너의 몸을 내가 거하는 성전으로 삼겠다. 내가 친히 너를 통해서 내가 거하는 성전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윗언약이다.
다윗언약의 특징 중 하나는 한 사람의 구원이 다수의 구원이 되게 한다. 그러면 이것은 다윗을 통해서 기존 유다 지파는 유다지파가 아니라 새로운 다윗의 지파가 많이 생긴다. 요한계시록에 나온다. 기존의 유다지파는 한불 갔고 새로운 유다지파로 바뀐다.
요한계시록 5:5절에 “유대 지파의 사자가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때시리라 하더라.” 지가 잘났다가 아니라 네가 하지 않은, 주님이 하신 일이 네 안에 들어와 꽉 채우신다.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생명이 죽음을 삼켜버린다. 그러니 주어야 될 이유가 생명 때문에 이 땅에서 오래 살지 않고 죽어도 괜찮아요. 언제 죽어도 생명은 생명이 이겼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간다. 사도바울은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다. 유다 지파와 관련되어 있다. 다윗을 죄인 되게 하셔서 구원하신 것처럼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신 원칙으로, 왕되신 분과 계약 맺어 놓으시고, 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다수의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도록 계약을 맺으셨다. 다윗과 맺으신 언약이다.
우리가 이렇게 혜택을 입은 이유는 피로 혈통을 무효화 시켰기 때문이다. 이방인과 유대인을 십자가의 피로 화목케 하셨기 때문이다. 율법 믿는다고 유대인이 아니라, 아브라함 자손이라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믿으면 이스라엘이 된다. 내 공로를 자랑할 수 없다. 우리는 죄인으로 이 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자기 죄 지은 것을 자랑하면 안 된다.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것을 자랑하면 주객이 잘못되었다.
오해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권력이 욕망이 되고, 욕망이 주도권 싸움에 나서게 된다. 예를 들면 압살롬은 왕이 되고 싶었다. 이에 비해 암논은 왕순위 차기 일 순위였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생의 모델이 다윗이다. 다윗의 특징은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죄를 지어도 다윗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 신나는 것이다. 이 용서가 탐이 나는 것이다. 다윗은 본인이 모델이 아니다. 숨겨진 솔로몬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맘대로 해도 죄 사함이 된다는 것이 탐이 난 것이다. 때마침 암논이 다말을 강간했을 때 압살롬은 입을 다물었다. 정의가 없다. 이것을 통해서 서열 삼위가 왕권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다.
다말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오빠 잘되면 너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을 율법대로 드러난 것이 아니다. 나의 욕망을 경유해서 율법을 생각한다. 율법에 따른 왕권 서열 일위인 경쟁자를 제거하고, 권력을 나의 것으로 바꾸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다.
이것이 어떻게 남의 이야기인가?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딱이다.
일층, 이층에서 따로 예배드릴 때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 부동산을 투가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정의이다. 돈과 관련된 정의다. 내가 퍼부은 십일조가 얼마나 많은데. 이런 사람들에게 십일조 누구에게 드렸느냐고 물으면 결국 자기 교회에 주식을 투자한 것이다. 삼 대째 섬긴다는 것은 삼 대째 돈을 바쳤다는 것이다. 뭐든지 돈으로 해석하면 다 된다. 참 쉽지요. 목사 한마디 한마디를 그냥 듣지 마시고, “그러니 나에게 얼마 줄래?”로 들으면 쉽다. 욕망, 권력이다. 교회는 조직이다. 그 속에는 권력이 있다.
“내가 나를 지키는 것 같이 왜 너는 나를 지켜주지 못하는가?”
당회장을 집어넣으면 장로는 왜 나를 지켜주지 않는가?
여기 인물 하나하나 개별자가 다 들어있다. 욕망에서 벗어난 인물은 하나도 없다. 전부다 율법을 빙자해 자기 야망을 채운다. 이것이 인간이다. 사무엘하를 경유해서 솔로몬이 왕이 되고 이후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 결국 이스라엘이 망한다. 이스라엘의 망함은 우리의 망함을 앞당겨 보여준다.
3강
사무엘하 1장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이 사실을 대하는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다. 사울이 죽었을 때 누가 사울을 죽였는지, 아니면 사울이 자살했는지 거기에 아말렉 용병이 자살을 도와주었는지, 그 현장에 대해서 두 가지 상반되는 사실이 일어났다. 여기서 당황하는 것은 사울이 죽었다가 아니라 사울이 죽은 것에 대한 다윗의 반응이 과민하다는 것이다.
사무엘하 1:19절부터 보면 노래가 나온다. 활의 노래라고 한다.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데 사울의 죽음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다윗의 심정을 따라가기 힘들다. 다윗 본인은 사울의 죽음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죽은 사울은 죽은 자가 다윗 너의 시대라 생각한다. 너희 시대가 활짝 피는 것이 중요하지 죽은 자를 무당을 통해 불러 낸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그렇게 애통할 일이 되는가라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사울에 대한 감각이, 그 당시 다윗과 우리가 격차가 난다.
다윗은 중요하다고 보는데 우리는 보면서 어느 대목에서 중요하다고 봐야하는지 상당히 어렵다.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은 것이다. 아말렉 용병에 의하면 사울 왕이 다쳐 죽어갈 때 지나가는 자신을 붙들어 자신이 살 목숨이 아니니 죽여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는 것이다. 아프지 않게 죽게 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온 이후에 다윗이 활의 노래, 애통하는 노래를 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울의 고통을 아는 자만이 권력위임을 받을 수 있다고 다윗이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권력을 줄 때 그 아픔과 괴로움의 동일한 노선을 갖는 자가 권력 이양 자격자가 된다. 활은 두 용사다. 용사라 하니 좋은 일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활은 삼상 14:8절을 보면 요나단의 무기다. 요나단의 활이 물러나지 아니했다.
두 용사가 엎어졌구나. 다윗은 두 용사,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것이 대해 다윗은 용감한 두 용사다. 이들은 블레셋과 싸우다가 두 용사가 죽었다는 것이다. 왜 애통해야 하는가? 이 죽음이 너무 처참하기 때문이다. 사울과 요나단의 집안이 블레셋에게 녹다운 되었다. TKO 당했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에게 두 용사를 TKO 당하게 하실 때 과연 이스라엘을 지킬 필요가 있는 나라냐는 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는가를 백성들이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자긍심이 추락된다. 권력이양 받는 다윗은 추락된 자긍심을 원상태로 높여 주어야 된다. 인수인계 받는 쪽에서는 다른 민족과 달라. 블레셋은 우리에게 게임이 안 된다는 자긍심을 높여야 한다. 그래서 과도하게 애통한다.
백성들은 블레셋과 싸웠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차기 대통령에만 관심이 있다. 윤석열인가? 이런 것에만 신경 쓰고 있다. 우리 민족이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모른다. 백성들 생각에는 그까짓 율법도 없는 블레셋에게 두 우두머리가 한꺼번에 전사한 것을 보고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생각한 만큼 대단한 민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자부심이 추락했다.
그렇다면 다윗입자에서 공격해야 될 대상이 블레셋인데, 다윗이 있다고 하는 백성들의 의식 자체를 갱신,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두 용사의 이야기를 야셀의 책이 집어넣는다.
삼하 1:18절을 보면 “곧 활의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야살의 책은 어느 출판사인가? 야셀의 책은 의인 열전이다.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안겨준 하나님의 전쟁 영웅집이 야셀의 책이다. 수 10:13-14절에 보면 태양이 머물고 달이 그치매 백성이 대적의 원수를 갚게 하셨느니라. 야살의 책에 기록하기를 태양이 중천에 머물렀더라. 옛날 여호수아 때 획기적으로 전쟁승리를 이끌었던 사실, 곧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외롭게 떠 있는 태양에게 지시하여 제자리에 멈추게 하셨다. 태양을 멈추신 이유는 지구라는 이 동네에 이스라엘이 있는데 그 곳에 중요한 전쟁이 벌어졌기에 멈추라는 것이다. 너의 자전 공전을 멈추라 하신 것이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중요한 사건이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다.
이 야살의 책에 사울과 요나단이 장열하게 죽었음을 기록한다. 차기 왕이 해야 될 임무가 거룩한 복수 전쟁을 할 수 있도록 다음 왕에게 하나님께서 기회를 준 것으로 여긴다. 보다 더 잔혹하게, 더욱 철저히 복수에 임하는 전쟁, 이렇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두 용사를 전사하게 한 것은 백성들로 하여금 블레셋에 대한 복수심을 자극시키기 위함이다. 사울과 요나단은 전쟁에 나서 장렬한 희생을 했다고 다윗은 몰아세우고 있다.
쉽게 말해서 도마체조에서 여홍철의 딸이 동메달 딴 것은 다음에 체조선수들이 금메달 따게 하기 위해 일부러 동메달 따게 했다는 것이다. 실패를 미화시켰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이 왕에게 너무 오버하지 말라고 하면서 사울 왕은 무당에게 찾아갔지 않느냐고 하면서 차기 왕은 다윗이 될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다. 이것을 예상해서 활의 노래에서 그들의 죽음으로서 삼하 1:21절에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재물을 낼 밭도 없을 것이라.” 다윗은 안일하게 생각하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땅이 저주받게 되었다. 따라서 블레셋의 존재는 이 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저주의 땅으로 바꾸기 위해 공격했기에 저주 받은 블레셋을 철저하게 징벌하지 않으면 저주가 복으로 다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땅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이 땅의 원래 의미를 회복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용사에 대한 과도한 애통을 하는 것이다. 삼하 1:26절에 “요나단 내가 그대를 내가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라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려졌으며 싸우는 병기에 망하였도다.”
앞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울과 요나단은 하나님을 위해 평생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었다고 오해할 수 있다. 이렇게 사울과 요나단을 말함으로 다윗이 원하는 것은 열두 지파의 모든 백성 가운데 호응을 받는 것이다. 다윗은 지금 유다지파에서만 호응을 받았다. 지역구민이 강원도뿐이다. 다른 지파는 벌써 권력에 길들여져 있다.
사무엘하 1장을 설명하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사사, 선지자 사무엘, 사울 왕을 거쳐 오면서 변질된 것은 권력이 하나님께 있는데, 권력이 특정 개인에게 집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인가? 원래 이스라엘에는 왕이 필요 없다. 권력이 집중되면 왕이 서서히 떠오르게 된다. 하나님이 왕이심이라는 원칙이 유지되어야 하는데. 사울 왕 때 나라를 말아 먹었을 때 백성이 잘못해서 나라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울 왕이 제대로 못해서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차에 제대로 된 왕을 뽑는 것이 이스라엘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백성들이 생각한다. 그러나 원칙은 이스라엘은 왕을 뽑는 자체가 잘못이다. 그것을 잊어버렸다. 백성들이 문제가 된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율법대로 살면 된다. 율법 안에 있는 희생으로 인해 죄가 용서되면 되는데, 백성들은 사울 왕으로 인해 이방나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보호해 주는 사람을 존경하는 것 같지만, 백성들은 우리 지켜주면 잘해 주겠다는 식이다. 백성들은 자기 지키는데 종노릇 하는 왕을 찾고 있다. 하나님보다 내 신상 하나 편하면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전 목사는 헌금과 교인이 늘지 않았는데 새 목사가 오니 설교를 얼마나 잘하는지 교인도 늘고 헌금도 빡빡 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는? 너는 교회에 놀러왔지. 교회에 노래방도 있고. 그럼 너는 뭘 변화했는가? 백성들이 사고방식이 점점 더 이상해진다. 다윗도 덩달아 이상해진다. 백성들의 마음을 잡지 않으면 차기 대권에 문제가 있다. 그러기 위해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사울 왕을 너무 공격하면 열한 지파를 놓친다. 그렇게 되면 인간적으로 통합이 되지 않고, 그러면 블레셋을 이길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주변 도적으로부터 보호해서 잘 먹고 잘살게 해달라는 것이다. 다윗이 잘 먹고 잘살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없다.
교회다 마찬가지다. 다윗은 요나단을 용사라 하고, 그 용사의 무기가 활이기에 활의 노래를 부른다. 활은 복수의 화살이 되어 블레셋을 향하여 계속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의인 열전에 집어넣는다는 말은 다윗 본인이 의인의 계열에 자진해서 나서겠다는 것이다. 내 한 몸 바쳐 백성을 위해 충성 봉사하겠다는 것이다. 여생을 국가 봉사하는 의미에서 대선에 출마했다. 백성들의 종이 되겠다. 백성들의 위에 서지 않겠다.
지금 다윗은 오버해서 하나님의 땅이 저주를 받으면 저주 받은 땅의 산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축복의 열매를 갖고 제대로 된 감사가 되려면 빨리 저주를 제거해야 한다. 내가 블레셋과 전쟁할 때 각 지파는 거룩한 하나님의 전쟁에 많은 군사를 제 때 보내 달라는 것이다. 제 때 군사를 보내 주면 블레셋 쳐부수는데 한 마음이 되면 다음 왕이 다윗이 되는 것은 저절로, 무탈하게, 저절로 되어 진다. 이렇게 되면 유다 지파의 한계성을 가뿐하게 넘어 설 계략이 있었다. 이런 다윗의 생각이 막힌다. 율법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삼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삼하 14장이다. 사무엘하는 핵심을 찾지 않으면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누구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지 모른다. 요압이 다윗에게 충성할 때는 훌륭한 군인이었다가 다윗의 명을 듣지 않고 귀순한 아브넬을 죽인다. 요압이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이 안 된다. 다윗 왕도 요압에 대해서 다룰 수 없을 정도로 큰 권력을 가졌다고 말한다. 요압은 다윗의 조카다. 같은 집안이다. 사무엘하를 볼 때 인간들의 권력욕에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정신이 빠져있다. 도대체 어느 편인가? 서로서로 배신하고 돌아오고, 배신자가 다윗을 도와주면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받아들인다. 도대체 권력구조가 어떻게 짜였는지 혼란스럽게 짝이 없다. 이것은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자극적인 태도가 그때그때 나오기 때문이다.
원칙은 삼하 14장을 보면 나온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킨다. 다윗은 죄를 범해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다윗의 아들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볼 때,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최고의 권력자만 누릴 수 있는 혜택으로 본다. 최고의 권력자는 초법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신의 권력으로 본다. 왜냐하면 범죄를 해도 처벌이 없다. 범죄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다윗 아래 있는 사람들은 다윗의 처벌의 대상이 되고, 다윗 당사자는 처벌 대상자가 안 되는 그 자리가 내가 원했던 자리, 이상적 모델이다. 특히 여기서 요압이 기웃거린다. 요압이 다윗을 마음대로 주물렀다. 요압의 모든 권력적 태도는 다윗의 권력을 어느 정도 건드릴 수 있는 가를 테스트 하는 식으로 접근한다. 최고 권력을 모방하면서 왕을 도와주면서 자기 지분을 다 챙긴다.
요압의 경쟁자가 아브넬이다. 아브넬은 사울 쪽에 속하여서 유다 지파를 제외한 다른 열한 지파를 꽉 잡고 있다. 아브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차기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사울 쪽의 표를 얻어야 평화로운 권략이양이 된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율법은 날아갔다. 과연 율법이 날아갔는가?
삼하 14장에서 바로 이것을 언급한다. 이 시간의 제목이 피의 복수자다.
이것이 굉장히 난해하다. 암논이라는 차기 왕 일 순위 첫째 아들이 압살롬의 누이동생 다말을 건드렸다. 너무 좋아해서 건드렸는데 관계 후 좋아한 것보다 몇 배나 더 싫어한다. 증오하듯이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욕망을 여인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다.
자기가 관계 했을 때 그 다말이 이제는 차기 왕비 일순위로 왕비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진다. 그렇게 되면 암논이 왕이 되었을 때 그 권력이 다말로 인해 약화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했다는 것은 소유했다는 것이고 철저하게 소유했으면 소유한 양만큼 계속 유지가 되고 싶은 것이다. 여자들은 남자와 관계 맺으면 꽉 물어 놓치를 않는다. 자기 영순위 권력자에 거머리가 붙어 있다고 생각한다. 암논은 처음부터 계속해서 자기가 갖고 있는 영순위 권력이 손상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면 벌써 어떤 일을 벌여도 처벌되지 않는 절대 권력자의 행세를 미리하고 있다. 따라서 압살롬은 자기 누이동생이 급탈당했으니 공정한 처벌을 다윗 왕이 해 주기를 원하지만 통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처벌을 요청하더라도 다윗 아버지가 먼저 그 소리를 듣고 암논에게 왜 그런 식으로 했느냐고 책망하지 않았다. 왕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했다면 압살롬이 왕권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인데.
압살롬은 신성우를 닮았다. 금발의 머리에도 키는 서구적으로. 테리우스. 아버지 다윗이 암논을 근신하게 했다면 자동적으로 압살롬이 왕권을 가질 수 있는데, 율법을 잘 아는 다윗이 아무런 대책을 내세우지 않는다. 유야무야 그냥 넘어간다. 그런데 압살롬은 이것을 왕의 개인적 생각일 수 있는데, 열두 지파는 어떻게 생각할까? 유권자들은 처벌하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기서 사년동안이나 압살롬이 백성들을 섬기는 종이 되어 차기 지도자의 모습을 보인다. 궁금한 것, 아쉬운 것을 다 해결해 주면서 모든 것을 강탈해 나간다.
그렇다면 다윗이 이 소리를 듣고도 압살롬에 대해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윗은 이미 껍데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왕이 제대로 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기능으로서의 왕이다. 사람이 왕이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적절치 않음을 보여주는 왕, 다만 율법에 의해서 용서받은 왕만 있으면 된다. 내가 나서서 국가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소극적으로 나선다. 그러니 다윗은 이미 율법의 은혜를 안다면, 다른 아들들은 껍데기 절대적 권력을 다윗 다음에 차지할 것인가에 몰두하고 있다.
삼하 13장에서 압살롬이 암논을 죽였다. 왕자들을 자신의 손으로 다룰 수 없음을 알기에 포기한다. 방치한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한 줄을 알고, 아버지 입장에서는 암논도 아들이고 압살롬도 아들이다. 요압이 연기에 능한 여인을 택해 상복을 입혀 다윗 왕에게 보내어 율법에 근거한 피의 복수자에 대해 말하게 한다.
창세기 9:5절에 내가 반드시 너의 피 너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라 짐승이면 짐승의 피, 사람이면. 사람을 죽이면 반드시 사람을 죽여야 된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이 자동적으로 가동된다. 사람만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도 살아 있다. 율법은 살해한 사람에 대해서 반드시 복수하게 되어 있다. 공중에 드론 띄어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준해서 대리하는 인간이 살해한 사람 찾아 율법에 의해 살인하지 말라는 법대로 복수하는 것이다. 억울한 피를 낸 것에 대해 반드시 복수하는 이것이 율법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우리가 드러낼 수 있다는 책임이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삼하 14장에서 아버지가 죽은 후 엄마와 형제가 있는데 동생이 형을 죽였을 때 동생 한명만 남았다. 한명 남은 자가 살인자다. 율법대로라면 살인자를 죽여야 한다. 만일 살인자를 죽여 버리면 대가 끊긴다. 사사기 19-21장에서 율법에 따라 피의 복수를 할 것인가 아니면 베냐민 지파를 없애면서 이스라엘을 없애 버릴 것인가에 대해 이스라엘 자체에는 답이 없다.
형을 죽인 동생마저 죽여 버리면 베냐민 지파가 작살 난 것처럼 대가 끊어진다. 하나님의 언약인 야곱 언약, 열두 지파가 온전한 가운데 율법의 혜택이 주어진다. 하나가 궐나면 마저 채워야 한다. 열두 제자중 하나가 없으니 한명 먼저 채운다. 언약적 모습을 보여야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는 이가 다 있는지 보시는 것 같다. 하나라도 빠지면 복을 주시지 않는다.
거룩한 이스라엘은 장애요소가 있으면 안 된다. 만약 하반신 마비 된 사람에게 칼로 하반신을 계속 찔러도 아프지 않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온전케 된 상태에서 이스라엘 가운데 유월절이 공명 상태로 왕왕 울려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열둘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야곱의 축복의 여파로 열둘 지파가 있고 열두 지파 그 어디에도 야곱의 축복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다. 한 지파라도 빠져 버리면 반드시 채워야 한다. 채울 때 반드시 은혜로 채워야 한다. 열두 제자를 채울 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로 채운다. 열둘이 열하나가 되면 율법의 정신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계산할 때 열두 지파 유지가 우선이냐 아니면 율법대로 피의 복수가 우선이냐? 기업이 우선이냐? 여기에 대해 인간이 처리할 방법이 없다. 여기에 왕이 등장한다. 왕이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왕이 처리해야 한다. 복수해야 될 복수를 왕이 그 복수를 떠안는 조건하에 왕이 그 집안의 복수를 멈춰야 한다. 왕이 이 집안의 복수를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는 방식으로 피의 복수를 멈추게 한다. 따라서 이 집안에 타인이 와서 율법대로 살해자를 죽이는 것을 멈추게 한다. 요압이 이것을 제시한다. 아버지가 되어 압살롬을 오라고 해라. 그래야 왕가가 유지될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다. 이것을 연기 잘하는 여인을 통해 말한다.
피의 복수자
왕에게 율법대로 복수를 감행할 책무가 있다. 그렇다면 왕이 그 책무를 어떻게 감당하는가?
앙이 대신 희생해 주는 방식이다. 압살롬 아들에게 당하게 된다. 봉사는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되게끔 외부요소가 침입하여 강제조치하게 된다. 압살롬을 데려 옴으로 압살롬이 다윗을 강제로 제거해 버린다. 압살롬은 열두 지파의 마음을 얻어 차기 왕이 되겠다고 한다.
법이 있을 경우에만 권력이 발생한다. 이것이 참 이상하다. 법이 있을 경우에만 권력이 나온다. 이 권력은 법에 호소한다. 나는 법대로 했다. 나는 정의롭다는 식이다. 이런 비급한 변명이 동반한다. 권력이 행세할 때 정의로운 법대로 시행하겠다고 말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뭘로 삼아야 하는가? 법이 있을 때는 초과적 현상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인간이 법을 이해한다고 할 때는 법을 바탕으로 한 권력자는 진정한 권력자가 될 수 없다. 국민에게 법이 이것이라고 해 버리면 국민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 권력자가 된다. 그렇게 되면 법을 수행할 수 없다. 법을 수행하려면 대통령 너부터 법을 지키라고 하기에 대통령 값을 못한다. 그래서 이 법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법에 기존 법을 흡수통합 시킨다.
압살롬이 다윗 정권을 인수하면서 정의의 법을 내세우면서 다윗은 정의롭지 못했다고 하면서 다윗이 정의롭지 못한 일을 행한 자가 바로 나 압살롬이라고 한다. 법을 규정할 초법을 만들어 자신을 거기에 일치시킨다. 목사도 마찬가지다. 법대로 하라고 하면, 초법적 목사는 은혜로 하자고 한다. 권력에 놀아나는 율법, 권력에 놀아나는 성경내용이다. 반대로 권력의 법에 의해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 법대로 하지 않고 법을 어떻게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 자기 욕망을 펼치기 위해 법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골몰한다.
4강
사무엘하를 보는 방법은 인간의 욕망, 권력에 대한 탐욕, 탐욕과 욕망의 집합체가 국가를 이룬다. 사회공동체를 이룬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탐욕과 욕망과 상관없이 국가에 개입하고 있는 사람은 다윗이다. 하나님의 율법 요소에 의해서 이스라엘에 관여하고 있다. 그러면 율법 자체가 얼마나 인간들에게 짓밟히고 모독당하고 무시당하고 있는 지를 다윗이 온몸으로 감내 당한다. 이 말은 달리 이야기 하면 율법이 있는 그 현장이라야 인간이 마음껏 탐욕을 부리고, 마음껏 욕망이 나온다. 이것이 정상이다. 그래야만 율법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이 점은 요한복음 3:18절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독생자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으로 인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독생자를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여지를 준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뒤에 벌써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심판을 받을 자는 절대 믿지 못할 분을 하나님이 보내셨다. 때려 죽여도 예수 못 믿도록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래야 믿지 않아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어둠이고, 애초부터 지옥 갈 자이다. 이런 자들에게 독생자를 특급사랑으로 보내주셨다. 따라서 무엇이 비정상인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비정상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게 되어 있고 하나님만 믿게 되어 있다. 하나님 잘 믿는데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 믿는 것이 정반대임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기에 그렇게 생각한다. 예수 믿게 되면 내가 믿는 여호와가 우상임을 알게 된다.
인간들은 내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독생자가 있으면 내가 시작하여 내가 독생자를 믿으면 생명이 내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믿고 결과가 나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다. 예수 믿는 사람의 율법 해석은 이렇다. 살인하지 말라는 해석을 예수님을 경유하면 너를 죽여라는 말씀이 된다. 너를 살인하지 않는 자는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못 지킨 것이 된다. 예수님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의 완성을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셨다면 나는 살인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 낳음을 알기에 살인하고 싶어 환장하는 자신을 죽여 달라고 기도해야한다. 내가 골라잡는 것이 아니다. 어느 율법을 지킬까? 예수 믿어 볼까? 아니다. 우리의 원판을 그대로 보여준다.
따라서 인간은 원래 살인하게 되어 있다. 이것을 사무엘하에서 요압이 보여준다. 요압과 그 형제들이다. 아사헬, 아비새, 요압 삼형제다. 삼하 2장을 보면 사울 집안의 이스보셋이 열두 지파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대권에 도전한다. 여기에 다윗은 유다지파 한 지파뿐이다. 조금 전까지 사울에게 쫓겨 다니던 사람이다. 자신을 죽이려든 사울이 죽었다. 자신을 죽이려든 사울은 죽였지만 사울이 통치하든 백성들의 마음은 미우나 고우나 여전히 사울 집안에 쏠리고 있다. 왜냐하면 왕은 왕가를 세세히 형성하기 때문이다. 왕이 특별하다는 것은 그 집안도 특별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선호하는 사람이 왕이 되면 그것으로 굳히기 들어간다. 권력은 습관성이다. 내 정서적 안정 도모를 위해 인간은 단골을 찾는다. 어지간히 불친절해서는 단골이 바뀌지 않는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손님 하나 오면 어지간해도 바뀌지 않는다. 어지간히 달라서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까? 이스보셋에게 충실한 아브넬 군대장관이 있다. 그야말로 왕을 키우는 아브넬이다. 김종인 같은 존재이다. 대통령 만드는 사람이다. 정치 구단이다. 이와 달리 다윗을 미는 사람들은 요압과 아비세, 아사헬 형제가 있다. 요압은 율법엔 관심이 없다. 다윗과 아브넬이 평화의 계약을 맺었지만 요압은 아브넬을 죽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다윗은 사울을 살려줄 때 원칙이 있었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 왕이다. 사울 왕에게 초월적 요소가 있었다고 인정한다. 인간이 건드릴 수 없는 요소가 있다고 본다. 다윗 본인이 사울과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기름부음을 받았다.
다윗은 선지자의 기름부음에 의해 질서가 잡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압은 볼링장에서 야구를 하는 사람이다. 기가 막힐 것이다. 율법에 의해 짜인 구조에 요압의 욕망이 드론처럼 날라 다닌다. 요압은 다윗을 이용하는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을 보는데 초월적 요소를 빼고 보니 사람이 사람을 상대한다. 그러니 항상 권력구조를 염두에 둔다. 저 사람이 내 편일까 아닐까를 생각한다. 이러한 욕망의 화신이 된 사람이 요압이다. 이 요압이 다윗 외에 아주 많이 등장한다.
삼하 2:15절에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둘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둘이라.” 다윗의 신복은 유다지파로, 베냐민 지파는 열한 지파를 대표한다. 유다지파는 단독으로 있다. 그만큼 범이스라엘적으로 다윗이 차기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불안한 상황이다.
삼하 2:16절에 “각기 적수의 머리를 잡고 칼로 적수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곳을 헬갓핫수림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
유도할 때 서로 소매 잡으려고 하고 잡히지 않으려고 할 때 보는 심판이나 관중이 지루해 할 때, 지도 하나씩을 받으니 재미없으니 장난삼아 서로 머리를 잡고 칼로 적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것이다. 전쟁은 명분이라는 것은 없다. 권력 욕망 구조 안에서는 명분은 없다.
법이라 하는 것은 대부분 금지다. 금지가 되면 금지함으로 금지를 넘으려는 욕망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새롭게 나타난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한다.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말이 선악과를 따먹는 동기 유발하게 한다. 하나님께 아담에게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계셨다면 따 먹을 이유가 없다. 그러나 따먹지 말라고 주위를 환기시키니 뱀이 적절한 때에 끼어든다. 따먹지 말라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신처럼 될까 시기하여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한다. 법이 인간으로 하여금 욕망에 휘둘리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욕망을 살려내려면 반드시 성경을 율법으로 읽어 주어야 잠자든 욕망이 깨어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 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리라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 성령 받은 사람은 가진 것도 주의 것이니 감사하면 된다. 먹는 것도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을 주께서 다 지켜주시는데, 자신이 티를 낸다. 나는 이것 하나는 지키는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성령의 열매의 카탈로그가 나온다. 온유 이것 하나는 밀고 나가자. 온유 하나는 끝내주자고 한다. 온유가 그 인간을 박살낸다. 온유가 온유하지 못하는 유발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내가 이 세상에 사는 존재 이유를 찾고자 한다. 주께서 다 해버리면 내가 이 땅에서 살 이유가 없잖아. 존재의 이유가 없잖아.
사람이 주님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치 있다는 재미로 살아간다. 나 인간답다고 할 만하잖아. 아직 망가지지 않았잖아. 이런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근원적인 본능이다. 그래서 전쟁은 법을 무시하고 새로운 법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전쟁할 때 지루하니 네가 잘났는지 내가 잘났는지 화끈하게 싸움해서 끝내자는 것이다.
소년들의 희생은 원래 밥이기에 관계가 없지만 열둘씩 공평히 죽으면서 전쟁이 벌어진다. 자극적인 요소를 서로 먼저 만든다. 서로 복수심이 불같이 일어나도록 각 편에서 열둘씩 희생시킨다. 전쟁하는 장군 입장에서는 열둘 희생을 통해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희생을 덜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다윗도 마찬가지다. 우리야가 죽은 후 다윗이 요압에게 화살은 아무나 죽인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죽음을 물체인 화살에 맡김으로 우리야를 물질로 보는 것이다. 물질과 물질이 만나서 죽는 것은 당연하니 애석해 하지 마, 화살이 사람을 골라 죽이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아침에 운동할 때 날파리가 달려드는데 목사든 집사든 상관없다. 그것을 쫓아내는 방법은 날파리 속도보다 더 빨리 간다.
전쟁이라는 대의명분 앞에 인간 본연의 가치는 최고 권력자, 승리를 원하는 욕망을 가진 권력자의 노리개가 된다. 그러니 공부 많이 해서 권력의 높은 곳에 가야 된다고 생각한다. 권력자의 노리개가 되어 여기 저기 치이는 것을 겁낸다. 인간들은 권력질서서열을 중요시한다. 다윗이냐, 이스보셋이냐를 두고 싸우는데 장군들이 충성스럽게 싸움을 한다. 요압은 자기 자신에게 충성하지 다윗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다.
사무엘하 3장에 보면, 아브넬이 귀순을 한다. 그 전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사헬이 아브넬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아사헬의 발은 들 노루같이 빨랐다(삼하 2:18). 사무엘하에서 남들 앞에서 재주가 뛰어나 노루처럼 빠르다든지 압살롬처럼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진 자는 그것이 자신을 괴멸시키는 동기로 작용한다.
내가 믿는 그것에 본인이 깔려 죽는다. 내가 일군 그것을 믿고 살다가 그것이 무너질 때 같이 무너진다.
아사헬이 아브넬을 쫓아오니 아브넬이 더 이상 쫓지 말라고 하지만 아사헬이 공을 세우기 위해 아브넬을 쫓아가다 아브넬이 창끝으로 찌르니 아사헬의 등을 꿰뚫고 나갔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인간은 자기 욕망대로 살 뿐이다. 한국의 여자 배구가 일본을 이기고 8강에 올라간 것이 언약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인간들의 모든 움직임과 태도와 관심사는 율법과 상관없는 어떤 상황에 자극 받아 욕망의 본능을 그대로 발휘하여 그냥 달려들어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스라엘은 율법대로 사는 거룩한 나라다. 그렇게 부름을 받은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의 뜻이 율법을 통해 풍성히 제공되었다. 그 이스라엘의 움직임 속에는 자기 욕망대로 탐심으로 움직일 뿐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경유해서 행도하는 법이 없이 인간 대 인간으로 네가 잘났는가, 내가 잘났는가로 상대하니 여기에는 율법이 누락된다. 율법이 아무 소용없다. 여기에서 아브넬은 아사헬을 죽였다. 그러면 그 형 요압이 율법을 작동시킨다. 피의 복수자가 된다. 피 흘린 자를 죽이라는 율법을 수행한다. 내가 아브넬을 죽이는 것은 사적 감정 없이 하나님의 법이 시키는 대로 했다는 핑계거리고 율법을 이용한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 내에서 내가 어디서 문제인가를 찾지 않고, 감히 내 집안을 건드려, 내 동생을 건드려, 두고 보자고 한다. 호시탐탐 노리다가 율법의 인격체라 할 수 있는 다윗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다윗은 허수아비처럼 붕 떠 버렸다.
아브넬이 귀순할 때 계약을 맺었다. 다윗은 어떻게든 열한 지파 사람들을 포섭해야 정치적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아브넬이 귀순했다는 말은 권력 인계가 순조롭게 될 것이기에 귀순에 장애가 없도록 왕의 이름으로 평화의 계약을 맺어 오게 한다. 올 때 조건이 있다. 다윗이 과연 왕의 자격이 있음을 말하기 위해 다윗의 처인 미갈을 데려 오라고 한다. 미갈은 사울 왕가의 딸이다. 사울 왕의 재가에 의해 사울의 사위였다는 사실을 열한 지파에게 다시금 각인시킨다. 내가 사울 왕을 따르는 여러분을 다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사울 왕의 사위이니 사울을 좋아한 마음을 나에게도 주어 나를 안정되게 하자고 한다. 그런데 미갈이 이미 미갈이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과 결혼했다. 이미 가정을 이루었다. 가정은 국가보다 더 행복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금자리인데, 왕이 될 다윗이 남의 평화로운 가정을 깨고, 이미 잘 살고 있는 미갈을 데려온다. 여기에 아브넬은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 신변보호를 위해 남의 가정 깨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미갈을 강제로 빼어나오니 발디엘이 질질 울면서 간다. 언제가 돌아오라고 운다.
아브넬이 쫓아 버린다. 나라 일에 남편이 걸고 넘어져. 도대체 인간은 은연중에 권력의 노예가 되어 있다. 소박하게 내 가정 지키는 것은 권력이 깊숙이 침투하지 않았을 때에야 가능하다. 그러나 전쟁 상태에서는 트럭이나 경운기도 차출되지만 아내까지 차출될 줄 상상도 못했다. 여기서 영화가 되려면 미갈이라는 여자도 자기 남편 발디엘에게 여보라고 해야 하는데. 미갈은 이참에 잘 됐다 싶어 한다.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사랑도 돈이 있을 때 사랑이지 돈 없는데 무슨 사랑인가? 권력이 있어야 사랑이지. 권력이라는 대세 앞에 어느 인간도 자극을 받지 않을 인간은 없다. 권력 맛을 보았기에.
막상 그 사람에게 권력이 주어지면 복음이고 예수고 다 버린다. 전부다 빠이빠이다. 교회 와서 온갖 것 다 고치고 성실하게 화장실 청소하면서, 소리 없이 봉사하는 사람에게 장로 되세요하면 장로 행세를 한다. 장로 행세 해야 된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지위가 사람을 버린다. 이것이 권력의 맛이다.
이러한 가정이 깨어진다는 사실을 다윗이 몰랐을까요? 다윗은 알고 있다. 미갈은 나를 못 잊을거야. 그러니 내가 데려와야지. 내 없이는 못 살거야. 그렇지 않다. 다윗이 왕이 되면 바뀐다. 삼하 6:23절을 보면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느니라.” 도대체 뒤죽박죽이라. 사무엘하는 기대했다가는 실망할 수밖에 없다. 아마 미갈은 남편을 사랑해서 남편에게 순종할 거야라고 하지만 순종이 없다. 자기팔 자기 흔들기다. 나라꼴이 엉망진창이다. 전부다 욕망의 화신이다. 물고 뜯는다.
삼하 3:26절에 “이에 다윗에게서 나와서 사자들을 보내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가에서 저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요압의 단독범행이다.
삼하 3:27-29절에,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종용히 말하려는 듯이 저를 데리고 성문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를 인함이더라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죄가 요합의 머리와 그 아비의 온 집으로 돌아갈찌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핍절한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 찌로다 하니라.”
지금 다윗이 이런 소리 할 쨉이 아닌데 당장 요압을 잡아 당장 목을 치라고 하지 못하고 집안 망하라고 저주를 퍼부을까? 부하인데 왜 이렇게 소극적인가? 공로가 너무 많고 실제로 요압이 없을 경우 정권이 무너진다. 정권이 무너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약을 무시하고 다윗의 명령을 무시하고 사적 복수로 아브넬을 죽인 요압을 통제 못하는 다윗의 무엇인가?
31-32절에 “다윗이 요압과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띠고 아브넬 앞에서 애통하라 하니라 다윗 왕이 상여를 따라 가서 아브넬을 헤브론에 장사하고 아브넬의 무덤에서 소리를 높여 울고 백성도 다 우니라.”
다윗은 울지 말고 요압을 처결하면 되는데 왜 죽이지 못하는가? 요압을 죽이면 요압에게 당하게 된다.
내가 나를 지키는 자이다. 내가 나를 해롭게 하면 내가 가만히 안 있다. 이것이 욕망이다. 35절에 “다윗에게 음식을 권하니 다윗이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해 지기 전에 떡이나 다른 것을 맛보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 하매 온 백성이 보고 기뻐하며 왕이 무슨 일을 하든지 무리가 다 기뻐하므로 이 날에야 온 백성과 온 이스라엘이 넬의 아들 아브넬을 죽인 것이 왕의 한바가 아닐 줄을 아니라.”
왜 다윗이 유난을 떨었는가? 열한 지파에게 귀순한 아브넬을 나는 좋아 했지만 요압이 죽였기에 차기 왕이 될 나의 뜻은 아니라고 열한 지파에게 외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왜 요압을 죽이지 않는가? 이중플레이를 하는가? 겉으로는 아브넬을 좋아한다고 해 놓고 실제로 자기 일을 방해 하는 요압은 건드리지 않는다. 일관성이 없다.
38-39절에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오늘 이스라엘의 방백이요 또는 대인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찌로다 하니라.”
다윗 자신이 갚지 않고 여호와께 미루어 버린다. 이것은 다윗 나름의 욕망이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조금만 참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왕으로 세워줄 때 요압을 다스리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한다. 다윗의 잘못된 생각이다. 다윗이 왕이 되어 권력이 강해질수록 요압의 권력도 강해진다. 이것이 인간 권력의 세계다. 이것은 율법의 정신과 전혀 상관없이 경쟁적으로 자기 힘을 키우는 이 시대가 거룩한 이스라엘 하에서 벌어지고 있다.
다윗, 요압,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는 관심이 없고 차기 왕만 제대로 뽑으면 우리는 왕의 영웅적 활약상으로 평안한, 행복한 인생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율법 없는 이방인들이 생각하는 생각과 동일하다. 그리고 다윗은 어찌되었든 자기 권세, 권력을 빨리 매듭을 지으려고 한다. 열두 지파 전체를 포섭하려고 한다.
그런데 삼하 5:1-2절을 보면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전일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헤브론에서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았다(삼하 5:3). 이전에 다윗은 헤브론에서 유다지파의 왕이 되었다(삼하 2:11). 이제는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다. 삼하 5:5절에 “다윗이 삽십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년 육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 삼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후 십오 년 만이 이 일을 이루어 내었다. 삼하 1-11장까지는 다윗은 부지런히 다윗은 권력을 형성하는데 집중 노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기름 부어셨기에 마땅히 할 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과 관련 없는 욕망 덩어리 어중이떠중이를 다 모아 형식적으로 국가 이스라엘이 되어 다윗이 왕이 되었지만 제대로 된 왕이 아님을 짐작해야 한다.
삼하 11장에서 왕이 범죄자의 대표자가 되어 백성들도 짓지 않는 죄를 범하여 권력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브넬이 이스보셋과 왜 헤어지게 되었는가? 이스보셋은 아무것도 모른다. 사울을 여전히 왕으로 생각한 민중들의 마음을 아브넬이 다 쥐고 있다. 그런데 아브넬이 사울의 첩과 통간한 것을 이스보셋이 알고 아브넬에게 네가 어찌하여 내 아버지의 첩과 통간하였느냐고 한다(삼하 3:7). 그러자 아브넬이 이스보셋의 말을 매우 분하게 여겨 “내가 유다의 개 머니냐 내가 오늘 당신의 아버지 사울의 집과 그의 형제와 그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당신을 다윗의 손에 내주지 아니하였거늘 당신이 오늘 이 여인에게 관한 허물을 내게 돌리는도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신대로 내가 이루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아브넬에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라(삼하 3:8-9).” 아브넬의 대답이 정치적이다. 그리고 다윗에게 언약을 맺자고 한다.
아브넬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기가 소유한 권력 앞에 까불지 말라는 것이다. 권력의 장에서 정의를 논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되면 국가 자체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국가 권력을 하나님이 나쁘게 주셨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 권력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더러운가를 까발리기 위해 국가권력을 주셨다. 권력을 소유하겠다고 하면 율법을 멸시한다. 권력을 내세워 누가 센지 한번 보자고 한다. 얘들 구슬 따먹기 하는 것과 같다. 오늘 낯 설교에서도 말했지만 이것이 영생인가? 이게 사는 게 사는 것인가?
욕망이 앞장서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끼어들 여지가 있는가? 억지로 감사할 것을 끄집어낸다는 것은 율법이다.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5장에 있다.
미지의 정복되지 않는 땅이 나온다. 여부스 땅, 예루살렘 땅이 정복되지 않았다. 여부스 사람들이 삼하 5:6-10절에,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다윗이 시온 산상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하여 다윗성이라 이름하고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여부스 사람들이 다윗에게 모욕적인 말을 한다는 것은 벌써 모든 권력이 사유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다윗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다. 율법대로 살아야 하는데 다윗에게 매여 살면 안 된다. 교회가 복음대로 살면 되는데 목사에게 매이면 안 된다. 요즘 목사에게 매인 사람이 없다. 코로나 때문에 집구석에 있다. 비대면이니 파자마 바람으로 보면 되니, 정장차림하지 않고 내숭떨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가? 인간에게 검사 맞고 인정받고자 하는 자는 율법이 없는 세상 나라다. 세상 나라는 헤겔이 이야기한 인정투쟁뿐이다. 서로 인정받는 것이다. 내가 못 먹고 못살아도 가난한 가운데 바르게 산다는 인정만 받아도 가난을 견딜 수 있다. 그 정도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매료되어 있다. 인간은 자아에게 심지어 질투심을 느낄 정도다. 따라서 여부스 사람들은 철저히 예루살렘을 지키고자 했다.
그런데 다윗에게 집중적으로 놀린 것이 잘못이었다. 다윗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감히 나를 약 올려. 내가 얼마나 센지 한번 보여줘. 그래서 쳐들어가서 정복한다. 다윗이 정복한다는 것은 정복할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윗 존재가 부각되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윗 없이 이스라엘이 될까하는 의구심을 들게 만들었다. 저 사람 아니면 아무것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안 되도 좋다고 해야 이긴다. 안 돼. 있어야 돼 하는 것이 아니라 안 돼도 감사하지. 이 세상에 꼭 뭘 해야 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내 뜻대로 태어나지 않았기에 때문에 사라지는 것도 감사해야. 내가 버티는 것에 미련 갖지 마세요. 살만큼 살다 코로나 걸려 죽으면 된다.
죽음을 못 이기면서 무슨 마귀를 이길 수 있는가?
사울을 죽인 블레셋을 친다.
먼 나라에는 감독자를 보내 때마다 조공을 받는 식으로, 가까운 지역은 자신이 통치하는 식으로, 중간 거리의 나라는 반반 섞어 정기적으로 통치와 조공 받는 식으로 통치한다. 바알브라심, 삼하 5:20-21절에 “다윗이 바알브라심에 이르러 거기서 저희를 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물을 흩음같이 내 앞에서 내 대적을 흩으셨다 하므로 그곳 이름을 바알브라심이라 칭하니라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상을 버렸으므로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
블레셋의 그 허무성은 자기 신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죽을 판에 신을 챙길 수 없다. 그러니 신보다 내가 하나님이다. 신이고 예수고 내가 신이다. 이것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 블레셋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6,7장에서 이스라엘은 우리는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하면서 언약궤를 모셔온다.
5강
사무엘하 6장에서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온다. 언약궤를 가져올 때 세 가지핵심 구조를 연결시켜야 한다. 언약궤와 다윗의 조합에서 고정이 되어 있어야 한다. 예루살렘은 공간이고 언약궤는 상자다. 고정된 것이 인물이 되어야 한다. 곧 멜기세덱이다.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착되고, 예루살렘의 왕은 멜기세덱이다. 이것 외에는 다윗을 비롯해 모두 탈락이다. 연결되지 않는다.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가져 오면서 다윗이 갖고 있는 권력욕망을 하나님께서 충분히 이용한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안착되게 하신다.
예루살렘을 사무엘하 5장에서 여부스 땅이라고 한다. 여부스 땅은 마지막 남은 퍼즐조각이다. 이것만 차지하면 된다. 여부스 땅은 가나안 족속이다. 이곳을 정복하면 여호수아에게 내린 예언이 완료된다. 정복할 임무가 완료된다. 마지막 버티는 곳이 여부스다. 여부스 민족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소경과 절뚝벌이라도 내가 물리치리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소경되고 절뚝발이 되더라도 이 성을 지키고야 말겠다는 가나안 족속의 마지막 발악의 모습이다.
싸움을 할 때 적이 발악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재미가 있다. 강력하게 대처해주어야 정복자의 가치가 확 올라간다. 헤비급이 플라이급을 이기는 것은 가치 없다. 더 센 것과 붙어 이겨야 확 가치가 올라간다. 여부스의 수도가 다윗의 도시로 바뀐다. 다윗성. 여호수아에게 내린 과엊이 마감되었다. 오십 년간 떠돌든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착함으로 예루살렘이 기념도시다 된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 모세에게 하신 약속이 드디어 역사 속에 실현되었다. 언약은 살아있다. 다윗 때 언약은 실현되었다고, 증명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졌다.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안착하고 다윗이 그곳의 왕이 되었다.
다윗은 아직 멜기세덱을 집어넣는 것을 모른다. 히브리서 7장에 나온다. 멜기세덱의 족보는 아비도, 어미도 없고 아무 것도 없다. 역사 출생자가 아니다. 아담계열이 아니다. 홀연히 등장 했다. 멜기세덱이 안착이 되어야 언약궤가 비로소 미소를 띤다. 적합한 인물과 매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너무 일찍 김칫국을 마셨다. 다윗은 여호수아에게 주신 약속을 다윗 나에게 마무리 짓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언약궤를 옮겨온 후에 예루살렘을 기념도시로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이다.
다윗 자신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은 당사자로 생각한다. 자신이 매개 존재,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축복과 저주는 다른 곳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축복과 저주는 언약 맺은 나를 통해서만 내려온다. 절대적 위상이다. 언약궤가 들어올 때 다윗은 너무 좋아 춤을 추었다. 그 동영상이 아직 남아 있다. 춤이 흉했다.
미갈은 다윗이 자신의 소박한 가정을 깨고 왕궁으로 데려 왔을 때에는 왕비의 체면과 위신을 보장해 줄 것이라 예상했다. 여성의 권력욕망이다. 왕이 기쁨의 춤을 추어도 왕비 내 앞에서 추어야 한다. 내가 독점적으로 남편을 독점하고 싶어 한다. 만일 독점이 안 되면 왕비와 기타 여인과 차별화가 안 된다. 미갈의 욕망이 달성 되지 않는다. 남이 함부로 갖지 못할 때 욕망이 된다. 따라서 미갈은 다윗과 결혼할 때 노림수는 저 남자를 독차지 하겠다는 것이다.
첫 강의 제목이 트레블메이크다. 욕망의 바다에서 욕망에 흐느적거린다. 접힌 욕망이 마음껏 펼치도록 하나님께서 언약적 구조를 만드셨다. 내가 지키겠다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인간 욕망을 마음껏 펼칠 장을 마련하셨다.
욕망과 언약구조의 관계는 관악기의 구조다. 공기의 패턴이 관악기의 내부구조인 기하하적 형태에 따라 공기에 의해 입자들의 활동, 파동을 유발시킨다. 공기는 입자, 이것을 인간으로 보면 주님은 관악기적 기하하적 구조를 열어주신다. 마음껏 까불어 보라. 욕망 원대로 까불어 보라.
피의 복수자
다윗은 언약궤, 예루살렘, 멜기세덱을 모른다. 언약궤가 인물화 되면 멜기세덱 즉 예수님이시다. 다윗은 멜기세덱 자리에 자신을 집어넣는 치명적 실수를 한다. 삼하 11장 사정을 몰라서 그렇다.
피의 복수자 의미는 율법을 살아있게 하라는 것이다. 율법에는 살인하지 말라고 되어 있다. 율법은 네가 죽는 이유를 율법 쪽에서 밟혀주겠다는 것이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죽는 이유나 알고 죽어라는 것이다.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선택된 자는 반드시 살인해야 한다. 윤리도덕과 별개다. 다른 기하하적 구조다. 예를 들면 수련회할 때 식판에 콩자반, 콩나물, 오뎅, 고등어 구이, 소세지, 미역국, 밥을 떠 준다. 이것은 급식 줄때이다. 성도에게 살인죄, 간음, 도적질,탐심죄, 말씀을 우습게 여긴죄, 거짓말 등등을 담아주셨다. 죄의 세상을 허락해 주신 이것에 감사한다.
사람은 말씀을 먹어야 산다. 말씀을 먹는다는 것는 제대로 된 죽음이다. 이 곳에 영생이 마련되어 있다. 네가 죽지 말고 내가 죽이는 쪽에서 죽어 가면 죽는 이유도 알고 그 곳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는 원칙이 기다리고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는 것 외에는 구원방법이 없다.
이것이 언약의 구조다. 그런데 다윗은 시건방지게 예루살렘에 귀한 것 바쳤으니 왕으로 건재하다고 생각한다. 사무엘하11장에 오기 전이기에. 사무엘하 6장에서 기분 좋아 이런 춤을 추는 것이다. 문제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아기를 가졌을 때, 다윗은 언약에 의해 죽를 죄를 지어도 다시 생명을 얻었다. 다윗은 죽음에서 소환된다. 그런데 다른 신하들은 절대 권력은 처벌을 받지 않는 위치라 생각한다. 절대적 위치라 생각하여 그곳을 탐하게 된다. 내가 처벌하지 그들이 처벌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 히틀러, 짐은 곧 법이요.
다윗으로 하여금 죄를 묻지 않고 용서되는 이유는 살인하지 말라는 피의 복수자에 의해 죽는 대행자가 있다. 다윗이 낳은 아들이 죽는다. 당신은 살겠고 당신이 낳은 자식은 죽을 것이다. 새언약 계약서다.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 그래야 율법은 율법대로 가치가 살아나고 택한 백성은 구원한다. 일타 쌍피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는 언약은 너는 나의 선택을 아는가이다. 하나님의 선택이 너의 착함보다 우세하다는 것이다. 내 선택이 강하냐 너의 착함이 세냐는 것이다. 다윗에 대한 선택의 일관성의 확정이 되어야 이스라엘이 된다.
밧세바와 낳은 다윗의 자식이 죽음으로, 죽은 자식이 희생자가 된다. 주께서 꺾으신 뼈로 인하여 기뻐하게 하소서. 자식이 죽었으니 밧세바가 별 볼일 없으니 돌려 보내야 하는데, 밧세바는 다윗과 정식혼인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주도권이 죽은 아이에게 있다. 차기 왕은 죽은 아이 속에 있는 요소가 결정한다. 죽은 자 대신 낳은 아이가 솔로몬이다. 솔로몬의 아버지가 우리야다. 이렇게 해야만 다윗이 탈락하고 다윗 자리에 멜기세덱이 들어간다.
분명 우리 입장에서 아비, 엄마 없는 멜기세덱이기에 죽은 자의 족보다. 이 죽은 자의 족보만이 우리를 생명의 나라로 인도한다. 다윗의 언약 증거는 나 죄인이었어. 탈락해서 이 증거를 하라고 다윗을 살인하게 하고 간음하게 하셨다. 식판에 이런 것들이 올려 져 있다. 그곳에 자기 이름이 있어 기분 좋다. 드디어 주께서 선택하심으로 나를 죄인으로 활용하심이 너무 감사하고 기쁘다.
다윗이 언약궤를 모셔오면서 오해한 것이 무엇인가? 바알브라심. 삼하 5:21절. “블레셋 사람이 그 우상을 버렸음으로 다윗과 그 종자들이 치우니라.” 여기에 우상이 등장한다. 신개념은 블레셋 사람들의 신을 섬기는 마음을 다윗과의 전쟁과 마주침으로 알게 된다.
신명기 17:15절에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사람으로 할 것이요.”
이것을 다윗이 알고 있다. 구약 율법을 기본으로 다 가르친다. 율법을 잘 안다. 율법보다 욕망이 더 센 것이 문제다. 형제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한 이유는 이방인들에게는 지배자, 통치자가 왕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왕은 형제 중의 하나다. 왕이 되더라도 형제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왕이 있어도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시고 통치자이심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왕을 세운다. 왕은 봉사자, 매개자, 지혜전달자이다. 선지자와 제사장이 융합된 직분이 왕이다. 공통점은 기름부음을 받았다. 중보자, 그리스도, 기름부음을 받은 자. 우세한 자가 아니라 형제들 속에 있으면서 형제들을 묶는 역할이다. 다윗은 형제들을 묶으려면 언약궤를 가져와야 된다고 생각한다.
언약궤가 오십년 동안 길갈, 벧엘 동네에 있다가 이후에 기럇여아림에 있었다(삼상 7:2). 다윗이 바알레유다(기럇여아림)에서 언약궤를 메어 오려다 새 수레에 싣고 온다(삼하 6:2-3). 언약궤가 이전에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북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언약궤가 했다는 것이다. 언약궤를 다시 남쪽으로 가져 와 언약궤 중심으로 형제를 이루게 되면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통치하는 이스라엘이 우리 가운데 실현됨을 그들에게 각인 시킬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다. 다윗이 율법대로 했다는 것이 문제다.
인간들은 말씀을 들을 때 자기 욕망을 경유해서 말씀을 듣는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다. 말씀 동원을 할 때 나의 정당성 증명에 관심을 두고 살아간다. 다윗이 블레셋을 공격할 때 잔혹하게 공격한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물건으로 본다. 할례언약이 없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은 개와 같기에.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에게 신은 소원 달성을 위한 것이기에 급한 상황에서 신을 모시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버리고 도망간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저들과 달리 율법과 연관된 자로 빨리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 온다. 언약궤 모셔 오는 것은 열두 지파의 축제다. 블레셋을 이기고 여호수아의 예언의 성취다. 전능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강조할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주차장을 매입하기 위해 기도하다 어떤 기회로 매입하게 되면 우리가 새벽기도한 주님의 응답이다.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말씀을 끌고 온다. 욕망을 산다는 것은 나 더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모든 인간의 주체는 환상이다. 환상의 공식은
에스 다이아몬드 소문자 에이다.
에스는 분열된 주체, 소문자 에이는 미지의 알 수 없는 것을 욕망한다. 가운데 마름모골 세모는 같다는 것도 아니다. 다르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동일시한다.
나는 저것과 같을 것이라고 동일시하지만, 어디까지나 동일시하는 것이 환상이다.
환상의 공식은 인간에게 있어 실재는 없고 오로지 모든 것은 환상뿐이다. 환상 외에는 볼수 없다.
소문자 에이가 미지의 것이기에 자꾸 바뀐다. 전에 좋았던 것이 지금은 그렇지 않다. 욕망의 대상에 따라 그때그때 내가 달라진다. 스물 살 때 믿은 예수님과 서른 살 때 예수님이 다 다르다. 본인이 종잡을 수 없다. 그때그때마자 증명해 내는 예수가 다 다르다. 인간은 분열되어 있으니 분열된 것을 통합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한다.
분열된 자아는 타인을 찾는다. 계속 타자를 찾는다. 라캉은 담화의 원칙이라 한다. 대화의 원칙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대화 상대를 찾는다. 계속 이야기를 던지면 타자가 결론을 내린다. 온전한 나는 새로운 욕망이 옴으로 말미암아 나를 식상하여 타인을 찾아가서 묻는다. 옷 사러 갔을 때 세 시간 보고 구입한 후 다시 바꿔달라고 한다.
나 후회 없이 살기 위해 너를 붙잡을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자신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불안한 눈빛. 나를 제대로 살게 해 줘서 예수님 고맙습니다라고 했는데, 그 예수님이 나의 욕망을 못 채워준다. 자기는 드디어 거듭났다는 것을 소유하고 영생을 소유했다고 생각했는데, 살다보니 그것도 식상하다. 갑자가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 같다. 진리라 여겼던 그 진리가 나를 분열시킨다.
분열 자아를 쪼개 버리면, 나가 분열되면 나 둘이 되어 좋아하든 나와 식상한 나가 등장하여 그동안 모든 것들이 환상이었다가 된다. 쉬지 않는다. 다윗은 멜기세덱이 아니다. 자신은 여호수아의 약속대로 마지막 성을 함락했고, 마지막으로 언약궤만 안치하면 끝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윗은 언약궤를 몰랐다. 웃사가 수레를 붙들자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 삼하 6:6-7절에,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들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언약궤가 아군인가, 적군인가? 하나님께 잘해 주어도 문제다. 사람이라면 누구냐 너라고 할터인다.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주셨다는 것은 언약궤와 이스라엘이 한편이라 생각했는데 언약궤가 아군을 치셨다. 그래서 사무엘하는 일관성을 찾기 어렵다. 다윗, 요압, 언약궤 그 어떤 중심으로 보아도 적군이 너무 많다. 만민의 만민에 대한 투쟁이라.
그러면 모셔 올까요, 말까요. 원래 율법에 의하면 언약궤는 어깨에 매고 운반해야 한다. 새수레로 옮기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방식이다. 과거에 상여를 어깨에 매고, 다음에는 경운기에. 요즘은 간편하다.
분열된 주체가 어깨에 매니 너무 힘드니, 장례 잘 치렀다는 소리를 듣고 편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 타인에게 물어본다. 여론의 장. 진리는 그 시대 상여를 어떻게 매고 치르는가를 따르면 해결된다. 욕망은 시대가 만들어낸다. 시대가 바뀌면 과거 판정 기준이 적용 안 된다. 과거에는 25세가 되면 시집을 가야한다. 요즘은 신부수업도 없다. 중요한 것은 설거지 방법이 아니라 식기세척기를 살 수 있는 돈을 버는 신부가 최고다. 전에는 결혼 후 아이나 잘 키우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이 적게 낳고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
분열된 주체가 담론의 장에 맞출 때 나의 환상은 실제로 착각한다. 분열된 주체는 날마다 허무한 것과 일치시킨다. 그러니 인간은 아무리 연구해도 자신을 찾을 수 없다. 늘 깨어져 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라 철학, 정신분석학이다. 이들의 문제는 내가 깨어진 이유를 모른다. 이들은 얼마 안가 식상하고 새로운 것을 계속 찾으니, 무한까지 이어지니 이것은 확정된 것이 아니다. 진리가 아니다. 진리를 찾는 나는 목마르고, 진리를 알 수 없으니 깨어졌다. 그러니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이유가 너무 많다.
그런데 왜 정신분석학이 왜 유효한가? 복음을 정신분석이 다 설명해준다. 다윗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이 공식이 다윗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여론이 무서운 이유는 인간의 행동은 자기가 아는 범위에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 자체를 소경으로 보신다. 진리도 모르면서 자신이 진리라 우기면서 행동한다. 마지막에 저주와 심판을 상상 못한다. 성도는 저주와 심판이 자기 속에 들어와 중심이 된다. 십자가를 집어넣으니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모든 것은 환상이고 십자가만 실제라 확정되었다. 십자가 안에 말씀의 사람으로 선택되었다가 들어 있다. 십자가만 자랑한다.
갈 6: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시체다. 제가 안경 했지만 시체 위에 안경 쓴 것이다. 사람마다 시체 색깔이 보인다.
시체색깔은 견딜 수 있지만 시체 냄새는 견딜 수 없다. 아무리 향수로 떡칠해도 손자 손녀의 코를 속일 수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 용돈 주니 참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회생활을 가르친다.
환상을 즐기세요. 의미 없음을 즐기세요. 성령 받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주님은 착한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선택된 자를 찾으신다. 언약궤로 인하여 웃사가 죽으니 이방인 오벳에돔 집으로 언약궤를 치운다. 그런데 예상밖에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주시는 것이다(삼하 6:10-12).
배척했는데 복을 주시니 제대로 대우를 하지 않아 문제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언약궤를 메고 온다. 삼하 6:13절 “언약궤를 맨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고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의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꼭 함사세요 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해서 무사히 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런 것을 좋아하시는 것을 배운다.
6강
다윗이 사무엘하 1-10장까지 사울에게 속해 있는 그 나라를 자기가 인수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사울을 왕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젊은 자신이 등장해 내가 왕이라고 나설 때, 서른 살이다. 이 때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 이 때 다윗이 쓰는 방법은 내가 당신들의 멘토가 되어주겠다는 것이다. 스승. 상담가가 되어 주겠다는 것이다. 당신들의 정신적인 스승이 되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약궤를 인도할 때 이 멘토 정신으로 갖고 온다. 다윗의 욕망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이 동의하지 않는다. 말씀에 어긋난다. 언약궤가 오면 언약궤 모실 성전 지으면, 그 다음부터 전쟁신인 언약궤가 있으면 모든 민족을 이긴다는 신비로운, 마술 상자 같은 언약궤만 있으면 이스라엘 나라는 영원히 유지될 것이고 하나님의 언약은 내 손으로 이루러진다는 것을 욕망한다.
그런데 다윗은 무엇을 모르는가?
내가 지금 현 순간에서 미지의 욕망의 대상을 원한다고 치자. 지금. 사태가 일어나 에이 지점에서 비 지점으로 오면 욕망이 또 변한다고 다윗이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가 키워주었으니 순종하라고 한다. 그러면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하면 얻는 게 무엇냐고 할 때, 나는 아버지로써 나답다고 말한다. 아들이 아버지가 아버지다움의 끝일까요? 한계일까요라고 묻는다. 그러면 아버지께 훅 찔린다. 야가 뭔가 아는구나? 그 때 아버지의 가오도 있고 체면도 있어 나는 아무 욕심이 없다. 나는 네가 잘 살면 여한이 없다고 한다. 아들이 거짓말 할 줄 알았다고 한다. 기대한 내가 나쁘지.
다윗은 백성들의 맨토가 되면 끝이라 생각했다. 백성들이 자신을 우러러 본다. 백성들의 자발적 존경이 자신의 욕망의 끝이라고 본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잡아먹는다. 양을 키우는 목적은 토실한 양만 잡아먹기 위함이다. 이것이 도적이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 외에는 다 도적이다. 어떤 착해 보이는 이유는 욕망레벨이 충분히 올라오지 않아서다. 세상맛을 못 봐서 착한 것이다. 둘째 애는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한다. 그렇지 않아요. 속지 마세요. 그런 인간은 없다. 하나님은 이런 착한 인간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 착한 인간이 있다면 메시야 된다. 인간이 상태에 대해 얼마나 변신에 능한가? 이만하면 괜찮다고 자부한다.
다윗의 욕망은 언약궤를 메어 와 예루살렘에 안치하고 예루살렘에 성전 짓는 것으로 할 일 다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다윗성에 오셨다. 예루살렘 정복은 여호수아에게 하신 약속의 마감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을 완료하셨다. 다윗은 자신이 다했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을 생각하지 못한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원수의 정체가 더 폭을 넓혀야 함을 몰랐다. 가까운 곳은 직접 통치하고, 중간거리는 적은 수의 군사 배치와 조공으로, 먼 곳은 조공을 받으면서 지배했다. 이럴 경우 원수는 없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있는 원수 통제가 가능한 유일한 제국이기에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과 일치된 모양세라 생각했다. 원수를 다 이겼기에.
그런데 원수가 이스라엘 외부가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에서 나온다. 그 원인 제공자가 다윗 자신이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당신이 이스라엘의 원수다. 율법을 잘 아는 당신이 율법의 위반자다. 이만하면 평화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예루살렘에 언약궤가 도착했고 성전까지 짓겠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성전 짓는 것을 보류한다. 다윗이 싸울 전쟁이 더 있다는 것이다. 내부 전쟁으로 피를 더 흘려야 한다. 너와 너 가족으로 인해 죽을 백성들의 피가 있다.
왕이 자비와 은혜와 지혜로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이스라엘을 원했지만, 다윗이 백성의 억울한 죽음으로 자기 위상을 변경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인구조사로 인하여 칠만 명이 죽었다(삼하 24:15). 코로나로 몇 명 죽었나요? 삼일 만에 칠만 명이 죽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는 것을 기적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스라엘 내부 붕괴가 하나님의 기적이요 손길임을 알아야 한다.
칠만 명 죽은 후 왕이 하는 일은 제사를 드린다. 왕다움은 제사를 드리는 왕이다.
초월적 제사장은 멜기세덱이다. 창세기 14장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다. 언약궤, 예루살렘, 멜기세덱이어야 하는데 반드시 다윗이 멜기세덱의 자리에 들어갔다가 빠져야 한다. 이 다윗 역할을 위해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하나님께서 집어 넣으셨다. 잠자는 죄악의 근거가 자기 의에서 출발한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는 이유는 자기 의가 있기에 이 의를 교체할 이유가 없다. 의에 의해 길들어진 욕망이다.
내 의가 유지되고 확장되는 것이 참된 현실이라 굳어진 심성으로 이 땅에 때어났다. 인간이 의미 있다고 할 때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를 스스로 지키는 것으로 이름 붙이고 이름을 부른다. 이 배후에 나는 죽어서는 안된다가 있다. 지금 망가져서 안 되고 살아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촌에 집 팔고 자신이 살고 있는 집 근처에 원룸 얻어 살자고 할 때 자기 의가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가까운데 모시려는 것이다. 자기 의다. 자기 의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무너지게 된다. 주님의 모든 율법의 최종 목표점은 꼬기 꼬기 숨겨둔 우리 속의 자기 의를 향해 쏜다. 선택 받은 사람을 자기 의가 무너지게 되어 있고, 선택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 의를 완강하게 지킨다. 시킨 대로 다하겠다고 한다. 헌금, 봉사, 선교 할테니 나의 의는 건드리지 말라. 나의 회고록, 자기 일기장. 큐티 작성하는 것은 자기 의다.
자기 의를 키우는 방법은 개선하는 것이다. 개선은 반성, 회개하는 것이다. 부족합니다 하는 것이 자기 의다. 무엇이 부족한지 물으면 몰라요. 왜냐하면 교회담론이 그러하기에. 교회권사가 목사 언제 나오는지 심사하면서 부족합니다라고 한다. 집에 가 주무세요. 여기서 자기의 관리하지 마시고. 집에 가세요. 이번 달 전기료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권사님이 내가 내 가정만 위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 남북통일, 코로나, 교회 유초등부와 당회를 위해 기도한다고 한다. 집에 가서 쉬세요.
자기 의를 깨는 방법은 사랑하는 자를 동원시킨다.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자는 이삭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삭을 주고 이삭을 잃어버리게 하는 방법이다. 사랑하는 이삭을 아버지가 친히 칼로 죽이게 하는 방법이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함으로 삼일 동안 칠만 명이 죽었다.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다. 사흘이니 다행이지. 이 많은 피 흘림은 이스라엘을 다 죽이겠다는 것이다. 다윗아 무고한 생명이 언제까지 죽어야 너를 버리겠느냐? 주님의 압박이다. 문제는 이스라엘은 다윗을 멘토로 여긴다. 정신적 스승으로 여긴다. 죄인의 괴수지요. 다윗의 야망이요 다윗의 욕망이다.
월급 적고 힘들어도 부교역자 하지 않고 선교사 가는 이유는 멘토가 되고 싶은 야망으로 인함이다. 교인 수 몇 명 안 되지만 나를 전적으로 존경심을 보내는 몇 명 안 되는 교회를 꿈꾼다. 호주, 뉴질랜드 같은 곳에 가는 이유가 멘토가 되고 싶은 야망 때문이다. 왕이 스스로 멘토로 자청하는 이유는 백성들의 수준이 떨어져서 그렇다. 백성들이 원하기에, 수요가 있기에 공급이 있다. 둘의 합이 맞기 때문이다.
자기 의를 깨는 방식은 자기 내부의 적이다. 사랑하는 암논, 압살롬이 적이다. 다윗이 제데로 처벌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스승이기 때문에 자기 말을 고분고분 듣는, 따라주는 자신의 팬들이 있어주어야 한다. 백성들이 있어야 한다. 이 백성을 관리한다. 주인은 노예를 의존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헤겔- 주인은 노예가 있을 때 주인답고, 노예를 해방함으로 더욱더 주인답다. 노예 대답을 통해 자기 가치를 높이다. 목사들이 여러분들의 섬김 받는 종이 아니라 주님말씀대로 섬기는 자로 목회하러 왔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종이 되겠습니다. 나가면서 퇴직금을 요구한다. 여기에 교인들은 진짜 제대로 된 목사가 왔다고 생각한다.
교인들은 교회 있으면 천당 가는 줄 안다. 전통개혁주의 교회에 있으면 천국 가는 줄 안다. 연말정산 다 된다. 성령 없는 교인들에게는 성령 없는 목사들이 딱 맞게 되어 있다. 누가 주인인지 노예인지 서로 헷갈리고 있다. 이전에 설교 시간에 나라가 너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기대하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까를 먼저 생각해라. 교인들아 교회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까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다. 교인이 교회에 잘하면 받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잘해주면 받을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욕망이 업그레이드 되어 있다. 조삼모사를 싫어하는 원숭이 같다. 사람은 욕망에 놀아나기에 사람의 모든 생활은 기분대로 산다. 끝. 사람들은 신앙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산다. 자기를 위장하지 말라.
다윗은 아들이 아버지를 대적함에도 아버지로서 아들을 사랑하는 면모를 보인다. 여기에 요압이 반감을 느낀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권을 뺏으려 하니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내가 약속을 이루겠다고 하여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요압이 승리한다.
이렇게 되어 대적인 요압의 힘이 너무 강해지니 다윗이 아마사를 등용한다. 여기에 대한 요압의 대책은 아마사를 죽인다(삼하 20:10). 나의 라이벌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동안 말로는 다윗왕의 덕분이라 하지만 자신의 수고와 땀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
압살롬을 통해 다윗을 어떻게 바꾸셨는가? 시편 3편 표제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 당시 다윗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여호와의 나의 대적이 어찌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여기서 어렵습니다. 다윗의 적은 요압이다. 그런데 압살롬을 다윗의 적인 요압이 압살롬을 물리친다. 다윗이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명했는데 요압은 합리적이다. 적의 수장을 죽이지 않으면 다시 병사를 모은다. 전쟁을 이길 것 같으면 아들 죽이는 것을 슬퍼하지 말고, 질 것 같으면 왕권을 내어 놓으라는 것이다. 지휘관 입장에서 분명한 태도를 보여라는 것이다. 요압은 다윗이 이런 경우가 잦으니 요압이 알아서 압살롬을 죽인다.
압살롬이 말을 타고 도망하다 머리가 나무에 걸렸을 때 요압이 죽인다. 전쟁에는 무고한 백성들이 죽어가니, 다윗 자존심 세우는 전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압이 하나님의 원수로 본다. 그러니 합리적이 요압이 어떻게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가? 매치가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를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갈 때 요압이 적이 아니라 압살롬이 적이 되어야 형편상 납득이 되는데, 사무엘하로 넘어오면 다윗의 태도와 맞지 않다. 우리가 어디에 문제가 있었는지 검토해야 한다. 사무엘하가 소설이 아니다. 모두 문제를 만드는 자들이다.
시편 3:7-8절에,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밤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에게 쫓기면서 새로운 적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을 신앙에 담아 노래한다.
다윗이 알고 있는 다윗 위상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다윗이 생각하는 위상을 꺾으시고 미지의 다윗 위상을 만드실 때 다윗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원수를 그 중간에 끼어들게 하신다. 다윗은 여전히 압살롬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압살롬이 무슨 죄가 있느냐는 것이다. 내 아들 압살롬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압에게 압살롬은 죽이지 말라고 부탁한다. 이것이 예상된 다윗의 위상이다. 아들도 살리고 이스라엘도 평전 되어 다윗의 왕권이 유지되기를 바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통해 반란을 일으킬 때 예상치 못한 원수가 등장한다. 일번에서는 원수가 없는데 이번의 다윗에게는 확실한 원수가 나온다. 이번의 다윗은 예수님이고 이 세상 자체가 원수다. 다윗은 일번으로 가는 것이 이번으로 가야한다. 여전히 다윗 위상이 남아 있어 부하가 다 죽어도 내 사랑하는 압살롬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 내 자식은 놓지 못하겠다. 나는 그 아이가 어떤 짓을 해도 용납하겠다는 것이다. 그 잘못은 내가 담당하겠다고 나온다.
일번에서의 잘못된 사고에서 죄와 원수가 나온다. 그 사랑의 결과는 자신이 담당한다. 이스라엘은 내 소유다. 팬 없는 스타는 스타가 아니다. 노예 없는 주인은 주인이 아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에 인간은 언젠가 자신이 주인이 될 것을 꿈꾼다. 주인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월급 오백 주는 중소기업 그만두고 치킷집 한다. 근무시간 15시간이다. 잔업 때문에 그만둔다고 했는데 치킨 집은 열시 이후까지 일해야 한다.
망해도 나는 여전히 나의 주인이고 잘되어도 내가 나의 주인이기에 남의 밑에 들어가는 것이 싫다. 늙어봐야 아파트 경비원이라도 감사한다. 빰 맞아도 월급 백오십 받으면 감사한다. 자식이 부모에게 용돈줄 때 주인 위신이 훼손되지 않게 용돈을 주어야 한다. 용돈 주면서 주인대접하지 않으면 기분나빠한다. 아무리 늙어 치매 걸려도 며느리에겐 시어머니 노릇한다. 시어머니 위신이 손상되지 않도록. 인간 자아는 더러운 것을 감추는 것이 옷이다. 옷에다 인간 가치를 다 담았다. 육신은 죽어도 자아는 죽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자살이다. 자살 이후에 자아가 여전히 내가 주인 되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치사하게 굴욕적이지만 내 인생의 주인이고 싶다고 버틴다.
시편 3편에 나오는 원수에 대해 보충이 필요하다. 시편 51편이다. 밧세바 간음 이후 임신사실을 알고 우리야를 죽이면서까지 나는 팬 관리하면서, 자신은 이스라엘의 왕이고 싶어 한다. 사력을 다한다. 지도자임을 굶어 죽어도 하고 싶은 것이다. 목사가 위험하다. 곧 죽어도 목사다. 직분이 목사를 망친다. 한번 장로는 무슨 짓을 해도 장로이고 싶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고 싶다.
인간이 자기 의를 하나님의 원수 악마가 자꾸 키운다. 너의 너다움을 지키라. 문제는 너의 너다움이 없는데 그것을 지키려니 자신을 목 조른다. 너의 너다움이 환상이다. 평생 귀신 들린 인간이다. 자꾸 너의 너다움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면서 압박하니.
너의 너다움을 해소하는 방식은 하나님께 바꿔치기 하신다. 그냥 하고 싶은 그대로 살게 해주신다. 베드로의 본성이 바뀌지 않는다. 야곱의 본성이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꿔치지 해 주신다. 사도바울이 대신 죽으심이라 한다. 사도바울은 인간을 육이라고 한다. 영이 등장할 때는 욕과 동반해서 등장한다.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의도적으로 육을 유발한다. 우린 나쁜 짓이 나올 가능성을 한꺼번에 축약시킨다. 모든 죄는 아담에게서, 그 죄가 응축되어 네 속에 있다. 아직 그 경우를 못 만나서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나게 되면 재생된다.
바꿔치는 대속이 왜 중요한가? 악마는 육을 영으로 바꾸라고 부추긴다. 인간이 할 수 없기에 악마는 자신이 멘토 역할을 한다. 지옥갈수 없지 않느냐? 네가 노력해 너를 천국으로 보내라고 악마가 부추긴다. 주님께서는 악마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방치하신다. 주님께서는 너는 너 다워라를 육에 집어넣으신다. 악마를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주님은 일체 묻거나 따지지 않으신다. 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사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 주님이 조성하시는 환경 속에 숨겨진 죄가 나온다. 나쁜 짓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나온다.
나쁜 짓이 점점 업그레이드 된다. 예수님은 지혜가 늘어나지만 인간은 간교함이 늘어날 뿐이다. 사자머리교수에게 상담 받아도 소용없다. 시편 51편에서 출생이 죄 짓게 되어 있다. 나는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죄가 나를 낳았다는 것이다. 나는 죄의 아들이다. 야구선수 이정후는 바람의 손자다. 바람의 아들은 이종범이다. 우리는 죄의 자손이다. 아담의 자손이다. 악마가 왕임을 증명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우린 날마다 죄의 종이라 규정되는 것일 기뻐해야 한다. 말씀대로 되어졌기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구나. 뭘 해도 죄가 되는 것처럼 뭘 해도 의가 된다는 것도 실제상황이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증거 한다.
절뚝발이가 나았을 때 교회 간증을 하면 건강하게 걷는 것을 자랑할까요? 주님을 만난 후 멀쩡한 장애인임을 알았다고 한다. 나는 장애자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의고 죄임을 안다. 암에 걸려 기도한 후 나은 후 암 나은 내가 가장 악한 죄인으로 보인다. 그 때 죽었어야 했는데. 낫고 보니 사는 게 이렇게 힘드네. 괜히 쓸데없이 기도했구나. 이것이 십자가를 증거 하는 방식이다.
7강
시편 51편을 보겠습니다. 표제가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선지자가 찾아 왔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식을 전하러 왔다는 것이다. 다윗 쪽에서 일어난 사건을 하나님께서 평하는 내용을 전하러 나단 선지자가 왔다.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왔다는 그 자체로 말할 필요가 없다. 잘했나 못했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미리 찾아 오셔서 나는 너와 특별관계를 맺고 싶고, 네 속에 내가 집어 넣어준 것이 있다는 것이다. 기름부음이다. 기름부음이 자체적으로 작동된다. 기름부음이 다윗 안에 있으면, 왕과 선지자, 제사장 기능을 다윗에게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다윗을 사건 속에 휘말리게 하셔서 이 기능을 뽑아낸다. 왕, 선지자, 제사장 기능 있을 때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 나라가 된다.
다윗이 오기 전 사사가 있었다. 사사는 일회성이다. 왕은 영원성이다. 한번 왕은 영원한 왕이다. 사울 왕은 일회성이다. 썼다 버리는 왕이다. 언약 없는 이방나라의 왕이다. 영구적 왕은 형제들 속에서 나온 왕이기에, 형제로 불린 모든 사람들은 왕이 누리는 영광과 혜택을 공유하게 된다. 예수님이 왕이 된다는 것은 그 형제들이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지 구원만 하시는 것이 아니다. 형님하나 잘 만나 영원히 팔자가 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형님이 살아 있어야 하고, 형님 자리가 유지 되어야 한다. 형님 자식이 없으면 동생들은 자기 남성성을 상납해서 살아 있는 형수로 형 자식을 낳게 해야 한다. 맏아들이 살려서 맏아들 계통으로 언약이 전달되도록 해야 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나올 때까지 노선이 이어져야 한다. 이삭이 기적인 것처럼, 동생 야곱이 맏아들이 되는 것도 기적이다,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는 것도 기적이다. 맏이가 이어가면 복 받은 것으로 본다. 아들로 이어진다.
인간아들이 쓸모없다면 처녀에서 아들을 낳는다. 모든 남성들은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인간에게 난 아들은 아들로 인정하지 않겠다. 전체 아들의 대체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예수님과 아버지가 통한다.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는 폐쇄적이다. 예수님 아버지밖에는 하나님이 난무한다. 신이 난무한다. 가짜다. 하나님의 언약 밖 종교행위는 가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간주한다. 사울(사도바울)이 여호와를 섬기기는 그 여호와가 우상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로 가게 성령 안에서 실시한다. 천국은 성령 안에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니다. 성령 안의 세계가 천국이다. 천국은 가까이와도 허락한 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분명히 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여주어야 믿겠다고 하니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제대로 믿는 자라고 하신다. 결정은 주님이 하신다. 주님의 결정이 착각일 수 있잖아요. 주님이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천당 가고 싶어 환장해서 주님의 결정이라 내가 굳히면 이것은 분명히 가짜인데 이 가짜를 진짜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 네가 나를 믿지 않는구나로 끝난다.
성령을 보내주신 것은 이제부터 너의 심각함과 하나님의 심각함의 차이를 보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일에 심각하다. 자기 일에 심각함에서 벗어나고 탈출할 방법은? 자기 지키려고 애쓰는 것을 허물고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감당 못할 큰 죄에 빠지면 된다. 전의 문제가 사소한 문제가 된다. 큰 죄는 네가 건들지 말아야 될 자를 건드렸다. 예수 그리스도를 건드렸다.
어떤 불교신자가 모기하나를 죽여서 가슴아파한다. 살아 있는 생명을 죽였구나 탄식할 때 그 사람이 우연히 던지 꽁초가 쿠팡창고를 다 태웠을 때 모기 죽인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자기 일에 심각한 것을 밧세바의 목욕장면으로 인해 임신하게 만들어 바꾸게 한다.
남편이 있는 여자이기에 대중들의 존경이 무너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요압을 통해 우리야가 적의 화살에 맞아 죽게 만드는 일을 벌인다. 너의 심각한 간음죄와 살인죄가 하나님의 심각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 너에게 기름부음의 취지를 네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기름부음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 다윗 자신의 심각함을 주님의 심각함으로 집어넣게 된다. 그 세계가 율법의 세계다. 시편 51편이다.
나단 선지자가 율법의 세계로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율법의 세계는 일단 죽어야 들어올 수 있는 세계다. 라커룸이다. 홈런 치고 한 바퀴 돌고 라커룸으로 들어온다. 일단 자아를 죽여야 들어올 수 있는 집단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이 율법의 세계는 주님이 심각하게 생각하는 세계다. 주님의 모든 관심이 집중된 사령부, 본부다. 이 세상은 모두 여기에서 시작된다. 율법의 세계에 모든 인간이 갇혀 있다. 알든 모르든. 다윗이 여기에 들어 왔다. 죽어서 들어왔기에. 다윗은 어떤 율법의 처벌도 받지 않습니다.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율법을 충분이 드러냈다고 보는 것이다. 다윗이 죄를 범함으로 율법을 충분히 드러냈다는 것이다. 네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었다가 아니라 네 죄짓는 모습이 율법이 살아날 계기가 되었다. 너는 그 역할을 담당했다. 너는 인간이 아니라 죄 자체였다.
인간은 자아가 아니라 육이다. 육이라고 했으면 인간이 아무리 착해도 육이고, 아무리 악해도 육이다. 주님의 규정이기 때문이다. 영의 반대개념이다. 영은 예수님이다. 예수님의 반대가 육이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이시고 나머지는 첫째 아담이다. 이미 예수님께서 규정하셨다. 이 육의 규정을 임으로 못 바꾸는 세계가 율법의 세계다. 자신 의를 세우거나 자기에게 심각한 것은 율법의 세계와 맞지 않다.
회개합니다. 나 그런 짓을 하지 않아야 하는데 할 때, 라커룸에서 이곳은 율법이 너를 통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를 내비치면 된다. 자기 관심사가 중지된다. 나의 관심사가 중지된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주님과의 만남이다. 주님과 만날 때 자기 심각함과 관심사는 멈춘다. 이런 놀이가 얼음 땡 놀이다. 일종의 조각의 순간이 된다. 우리의 정신이고 무엇이고 간에. 우린 물체가 되고 죄 덩어리가 된다. 율법의 세계에서 모든 가동되는 것을 주님 쪽에 넘겨야 한다.
마치 수면 내시경 세계 같다. 율법의 세계다. 수면내시경을 할 때에는 벌써 다른 방에서 깨어난다. 자아에게 마취되었다. 내가 모든 것이 물체처럼 죽었을 때 다른 분의 활동이 나를 결정지으신다. 다른 분이 자기 활동을 집어넣고 그분의 활동의 결과로써 율법 완성의 사람으로, 영적 사람으로 거듭난다. 새로운 창조를 일으키는 세계가 율법의 세계다. 신약은 성령의 세계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이후에 일어나는 세바의 반란과 압살롬의 반란이 있을 때 다윗의 태도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 하기 전에 율법의 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다윗은 어떤 태도를 가졌는가? 그것을 잠시 말씀드리면,
그 세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민족을 철저하게 차별했다. 이것이 나의 손으로 이룰 수 있는 율법의 완성 실행방식이라 생각한다. 삼하1-10장까지의 내용이다. 밧세바가 다윗을 이 땅에서 제대로 살게 해 준다. 당시 사울이 못 다한 업적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범한다. 여기에서 다윗이 도장 깨기를 한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승리한다.
무술도장마다 일인자를 다 이겨버리는 것이 도장 깨기다. 도장을 깸으로 이방민족에 대해 일체 자비가 없음을,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임을 그들에게 새겨 넣는다. 외부적으로 도장 깨기 하는 것이 삼하 10:4에 나온다. 1절에 “그 후에 암몬 자손이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문상을 보냈는데, 다윗이 보낸 다윗의 신복을 잡아 수염 절반을 깎고 의복을 잘라 다윗에게 돌려보낸다. 하눈이 먼저 도발했다.
6절에 암몬 자신이 다윗의 미움이 된 줄 알고, 그래서 우리야 장군의 투입되는 전쟁이 시작된다.
삼하 4:5절에 암살자가 등장한다. 이스보셋 암살자가 이방용병이다. 레갑과 바하나가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잠든 이스보셋의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이스보셋의 배를 찌르고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가지고 새 아라바 길로 행하여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린다.
아말렉 용병이 사울 왕을 죽인 후 큰 공을 세웠다고 왔을 때 다윗이 사정없이 죽였다. 이방인이 이스보셋의 목을 가져와 다윗이 왕 되는데 기여했으니 저를 등용해 주셔서 살길을 마련해 주세요라고 하며 다윗만을 섬긴다고 할 때, 다윗이 소년들을 명하여 저희를 죽인다. 삼하 4:12절, “소년들을 명하며 곧 저희를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가에 매어달고 이스보셋의 머리를 가져다가 헤브론에서 아브넬의 무덤에 장사하였더라.”
이 말은 다윗이 정권인수를 받을 때 나는 철저하게 이스라엘 편이라는 것이다. 신명기 7:15절에 형제 중에 왕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음을 열한 지파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힘을 얻기 위해서 이방인 하나를 적폐세력으로 잡는다. 인간의 자기 정당성은 일부러 적을 만들어 적을 공격하면서 함께 공격하는 쪽을 자기편으로 여긴다. 힘이 모아진다. 정치란 같이 약한 자를 밟아 그것을 계기로 힘을 규합하는 동기로 만든다. 마치 나치가 유대인을 잡아 독일인을 하나로 뭉친 것과 같다. 모임이 잘 안되면 누굴 잡아 공동의 적을 만들어 우르르 조지면 된다. 교회든, 기업이든, 국가든 적폐세력을 만들면 동지가 생긴다.
입자는 에너지를 전달하고 좁은 장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품고 있으면 블랙홀이 된다. 스스로의 힘에 못 이겨 블랙홀이 된다. 이것을 방지하게 위해 작은 블랙홀을 만들어 돌을 던지는 것이다. 이 정치적 방법에 예수님이 말려드셨다. 예수님을 죽일 때 이런 결정을 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온다.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사람을 죽여 온 민족을 살리자는 견해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이 권세의 실질성에 대해 베드로를 비롯한 열 두 제자도 위협을 느꼈다. 압박감을 가졌다. 인간은 환상에 기가 죽는다. 현실에 있는 모든 권력은 환상이다. 율법세계에 못 들어가지 못하고 인간 세계에서 인간이 아는 범위 내에서 인간 힘으로 살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율법 세계 중심성, 핵심성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살려 애써야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아는 것만큼 행동하는 환상이다.
그래서 베드로가 알아서 긴다. 가룟유다의 배신은 율법의 중심인 예수님은 아신다.
네가 나 따로 오려고 생각하지 말고 네 주제파악한 후 이제 와서 주님 믿는 것은 염치없는 짓임을 알라 수면 내시경 들어간다. 의사 앞에 내가 나서지 말고, 죽여 놓고 일을 무사히 끝내시는 주님을 찬양합시다.
율법으로 죽여 놓고. 율법으로 죽이고 율법으로 살린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일어난 일들이 성도에겐 율법과 관련 없는 것이 없다. 남자가 여자와 결혼 한 후 에베소서를 보니, 남편 된 자들아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하신다. 결혼 하니 이 말씀이 보인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너는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하라고 하신다. 지금 세대가 무슨 세대인데, 순종하려고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순종을 배워 본적이 없다. 자기 하는 대로 다 해 주었는데 거기에 무슨 순종이 있는가? 부모를 종으로 여기는데. 부모도 순종 안하는데 남편을 순종 하겠는가?
모든 사건은 율법의 개입을 받는다.
율법자체가 가동된다. 밧세바 만나기 전에 다윗은 율법에 대해서 안다고 여긴다. 내가 율법 주체자로 실행에 옮기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된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율법에 포착되어 율법 속에 들어가게 되니 다윗은 죄인이고, 죄인으로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
다윗이 보는 앞에서 밧세바 사이에서 난 아들이 죽는다. 시편 51편을 읽어보면 다윗이 참 뻔뻔한 대가로 보인다. 뻔뻔을 끝장낸다.
시편 51:4절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주께서 만 죄를 범하여.” 내가 밧세바도 우리야도 아니고 주께만 범죄함을 내어 놓는 자로 태어났다. 뻔뻔함의 극치다. 이것이 복음이다. 성령 받지 않으면 복음을 믿을 수가 없다. 복음은 성령이 필요함을 알리기 위해 찾아옴이 복음이다. 육은 복음을 받을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선택된 자에게 복음이. 오직 주께만 범죄 했다. 내가 사람 앞에서 내가 나서서 죄 지은 적 없다는 것이다. 뻔뻔함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죄지은 적은 없고 주께서 날 앞장세워 죄짓게 했다는 것이다.
듣는 사람이 미안하다는 말인가 아닌가? 미안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른빰 터지는 것이다. 너에게 미안하지 않고 네가 나를 죽여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나에게 죄지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세계를 이스라엘이 거쳐 왔다. 전쟁이다.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은 포위했을 때 앗수르 군인 185,000명이 한꺼번에 다 죽었다. 히스기야 왕 때. 다 집안에서 잘난 아들이다. 잘난 남편이었다. 그러나 언약의 나라인 예루살렘을 포위했기에 천사가 다 죽였다. 율법의 세계는 인간간의 어떤 일에 대해서 인간이 결정할 권한이 없고 율법이 결정한다.
최후의 심판을 이스라엘이 먼저 받았다. 죽어서 받을 심판을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경험했다.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났다는 것이 자기 운명이 결정 나는 마지막 심판을 심판주가 되신 분이 먼저 찾아 오셔서 사울 안에 주님의 요소를 집어넣은 것을 찾으러 오신다. 성령 집어넣고 성령회수하면 덩달아 구원되는 방식이다.
성령이 너희 안에 있으면 죽을 너희 몸도 살리시리라. 덩달아 구원받는다. 값없이 구원받는다. 이것이 복음의 방식이다. 포도원에 일하러 왔는데 아침 열시, 열두시,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이 있다. 한 시간 일하고 하루 품삯 받은 기분 어떤가? 덩달아 구원받아 기쁘다. 열시에 온 사람은 기분 더럽다고 한다. 내 노동의 대가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천국이 이런 곳이다. 아닌 자를 밀어내는 곳이 천국이다.
시편 51편 이후에는 요압을 솔로몬에서 밀어내는 전략을 만든다. 요압이 공을 세우면 공을 받고, 너는 아니라고 한다. 틈만 나면 아마사를 내세운다. 율법의 세계를 다녀온 사람의 정책은 요압의 욕망을 더욱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요압이 갈아타기를 한다. 솔로몬이 뜨니 다른 아들을 따른다. 정권을 갈아탄다. 에너지 집중된 곳, 자기 살만한 곳으로 갈아탄다. 이사 갔을 때 여러 교회 중 큰 교회에 등록한다. 헌금 얼마해도 모른다. 천원내고 오천 원짜리 점심을 준다. 어느 교회가 교인 다섯 명 있는데 그곳에 충성할 리 없다. 설교가 비슷비슷하다. 교회도 목돈 낸 사람이 충성한다. 에너지의 힘이 세다. 율법의 세계는 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왕이라는 심각함에서 해방시킨다. 이것이 경배요 예배다. 경배 예배는 출애굽 원칙이 작동되면 경배 예배가 나온다.
출애굽기 10:24-25절을 보겠습니다. 모세와 바로왕의 이야기다. 바로왕은 이방민족이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이다. 택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과 모세 입에서 나오는 내용을 비교해 보고 이 둘이 인위적으로 분리 될 수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개입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분리가 될 수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 생각해 보시라.
출애굽기 10:24-25절에,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은 너희와 함께 갈찌니라 모세가 가로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바로의 이런 제안이 여호와를 안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하는 제안이다. 회사 취직했는데 믿지 않는 사장이 주일 교회 가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수련회는 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종교는 취미생활이기 때문이다. 출애굽 대상이 아니기에. 그들의 기준을 교회에 그대로 적용한다. 그러면 교회교인 대부분은 모세가 아니라 바로다. 교회 놀러간다. 내 몸 챙기는데 급하지 내 하나 없어도 잘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큰 교회 목회자가 의도적으로 돈 지출할 구석을 개발해낸다. 놀러가서 선교지를 만들어 선교비를 내게 한다. 선교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고 하면서 돈을 내게 하여 돈 내는 곳에 마음이 가니 신경을 쓰게 만든다. 목회 프로젝트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잘 따라 가겠지라고 하면 가만히 있을 뿐이다.
출애굽에서 이방민족이 요구하는 것이 내 몸뚱이가 중요하고, 내 생존이 중요하다. 육십조 세포의 긴장도를 유지하는가가 중요한다. 긴장도를 팽팽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 없으면 죽는다. 내 몸이 평안한 것이 우선이다. 하나님은 아쉬울 때 찾는다. 그러나 예배란 율법이 와서 나의 심각성이 남아 있을 때 오직 경배할 분은 나를 율법 속에 집어넣고 죄인 되게 하신 그분만이 경배대상이 된다. 십자가를 알 때 우리는 이미 경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출애굽 원칙이다.
이 원칙이 시편 51편 다윗 사건에 들어가 있다.
구원받으라가 아니라 이미 구원문제는 네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이 떠안았다. 너는 구원의 결과물일 뿐이다. 이미 율법의 세계로 들어와 나는 주께만 범죄 했다. 네가 단독적으로 죄 지을 수 없는 존재다. 건방지게 네가 죄 지을 수 있다는 소리 하지 말라. 죄는 율법이 살아 날 때 죄가 된다. 그렇다면 죄 해결책도 율법 안에 마련되어 있다. 너로 인하여 꺾으신 뼈가 있다. 대속하기 위하여. 다윗은 이것을 포착하면 된다.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바로의 권세에서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피로 빠져 나왔다면 이제는 너는 구원받았으니 룰루랄라로 살아라가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과 함께 살아라가 출애굽의 정신이라면 시편 51편에서는
다윗 너는 꺾어진 뼈와 함께 살아라. 밧세바와 함께 살아라. 밧세바가 있어야 나는 율법세계에 다녀왔다. 죄인이라는 것이다.
8강
두 개의 반란이 있었다. 압살롬과 세바의 반란이다. 이스라엘 나라의 성격이 열두지파인데 열두지파의 시대는 세바의 반란으로 끝났다. 열두지파를 균등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을 하셨기에 유다지파 중심으로 재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재편에 있어서 다른 지파에게 동의를 구할 수 없다. 강제적이다. 출애굽 사건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어난다.
출애굽 사건이 발생되면서 권력층이 두 조각난다. 처음 출애굽 할 때 열두 지파가 동등한 자격으로 출애굽 했다는 원칙이 지금도 유지되어야 된다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이 갈라진다. 왕이 꼭 유다지파에서만 선출되지 말고 다른 지파에서도 왕이 나올 수 있다고 이야기할 때 율법의 세계에 갔다 온 다윗은 이미 끝났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유다지파 중심으로 재편하시기로 확정지었다고 선언한다. 유다지파의 중심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스라엘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새로운 변화가 주어진다. 그래서 시편 78:67-68절에 내가 유다지파를 선택했고 요셉지파를 버렸다고 한다.
하나님이 친히 선택하신 분이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은 임시적 선택이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내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다. 모든 의미의 시작을 예수님으로부터 출발시켰다. 나를 공경하는 자가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자. 예수님을 믿으면 되잖아와 같은 뜻으로 다윗을 믿으면 되잖아 하는데 다윗은 이미 율법의 세계가 갔다 왔다. 죄 씻음 받았다.
다윗에게 죄가 찾아왔고 죄 씻음의 세계로 죄가 이끌었다. 죄 씻음이 되어서 죄 씻겨진 다윗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다윗이 된다. 율법을 드러내는 자로서의 다윗이 되었다. 다윗은 자신이 주인공이었다. 여기에 죄가 찾아온다. 죄가 주인공이었다. 주인공인 죄가 사라졌다. 율법의 자체적인 작동원리에 의해 사라졌다. 자진해서 피의 복수자의 희생물이 되어 죄가 사라졌다. 다윗은 죄가 없다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의 사람이 되었다.
다윗은 자기가 주인공에서 죄가 주인공이 되고, 죄 씻음이 주인공이 되어 다윗을 세상에 내보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전에 내가 주인공이었던 것이 이젠 더 이상 내가 주인공이 아님을 기뻐하고 감사한다. 내가 내 인생의 책임자가 아니다. 그래서 육으로 난 자는 영의 말씀을 들을 수 없다. 육의 세계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아무리 성경 신학 하고 신학박사가 되어도 여전히 자신이 주인공 된 이상은 천국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달라진 것은 자기를 부인한다. 다른 긍정적 요소가 있기에 부정한다. 반복적 자기부정은 중이다. 나를 부인하고 부인한다. 부인이 너무 많이 생겼다. 자기부정은 긍정이다.
시편 51:18절에 주의 은택으로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라고 한다. 내가 할 일은 상한심령밖에 없다. 모든 은총을 예루살렘에 집어 넣어주세요. 나는 예루살렘이 잘되면 제 할 일은 끝난다. 시편 51편의 내용이 다윗 언약의 실천방식이다. 다윗에게 일어난 방식을 모든 이스라엘에게 동일하게 적용시킨다. 하나님께서 인간들로 사건에 휘말리게 해서 유인되어 들어가니 그곳이 라커룸이다. 그곳에서 십자가를 발견하고, 십자가로 인하여 밖으로 파견될 때 십자가의 증인으로 나서게 된다. 굉장히 간단하다. 이렇게 변화된 다윗이 권력에 환장한 미친 사람들을 만난다.
그 사건이 바로 압살롬의 내란이다. 압살롬의 내란이 벌어지면서 다윗이 겪었던 자기 사적 일이 이스라엘 전체에 공적 일로 번지가 된다. 잘난 내가 못난 나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절차가 왕이 된 다윗이 아들에게 밀려 권력 빼기고 도망자 신세가 되는 과정이다. 그 쫓겨 다니는 과정과 다시 돌아오면서 다윗과 함께한 자들이 다윗이 겪은 사적 변화에 참여 혜택을 입는다.
압살롬의 반란이 종결되고 쫓겨난 다윗이 요나단을 건너 돌아오게 된다.
삼하 19:16-18절에,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베냐민 사람 일천 명이 저와 함께 하고 사울의 사환 시바도 그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으로 더불어 저와 함께 하여 저와 함께 하여 요단강을 밟고 건너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왕의 가족을 건네려 하며 왕의 선히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가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의 앞에 엎드려.”
시므이는 압살롬에 쫓겨 갈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벌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신하 주제에 사울 왕에게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셨다. 사필귀정이라 하여 노골적으로 다윗에게 저주를 퍼부었다(삼하 16:5). 자신이 세상을 잘못 읽었다. 압살롬이 패하고 다윗 왕이 돌아올 때,
삼하 19:19-20절에 “왕께 고하되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는 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그 다음 21절입니다. 요압의 동생인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가로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니이까.” 아사헬은 아브넬에 의해 창에 찔려 죽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삼하 19:22-23절에 “다윗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왕이 되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저에게 맹세하니라.”
다윗은 공을 세운 스루야의 아들들에게 다윗은 나와 너희와 상관이 없다고 해버린다. 죄를 지은 자가 다윗 앞에 나와 용서를 구할 때 아비새는 기름 부은 자를 저주했기에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아비새가 사무엘상에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다윗은 사울을 살려준다. 살려준 이유가 기름 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살려주었다. 이것을 옆에서 아비새가 들었다.
삼상 26:8절에,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리다.” 이때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고 했다. 아비새가 이것을 그대로 써 먹는다. 기름 부은 자를 저주했기에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삼하 1장에서도 사울을 죽인 자를 용서하지 않았다. 기름부은 자를 건드렸기에 죽였다. 이스보셋은 무고한 자로, 사울은 기름부은자로 구별했다. 아비새는 시므이를 죽이라고 한다. 여기에 대해 다윗은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에게 너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한다. 그러니 세상사람 보면 일관된 원칙이 하나도 없다.
삼하19장에서 다윗이 요압을 대신해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운다. 아마사는 유대사람이다. 유대사람을 등용시켜 요압을 견제하려 한다. 요압은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고 아마사를 살해한다. 따라서 율법의 정신으로 와서는 이미 다윗은 현 이스라엘 나라 자체를 포기한다. 내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 내 후손에 의해 이스라엘이 유지되기를 바라면서 그 전에 요압을 끊어내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 생각한다. 예루살렘에 은총을 입히는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는 자를 잘라내는 것이 다윗의 남은 일이라 생각한다.
삼하 20:1절에 난류 한사람이 나온다.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삼하 20:1-3).”
다윗을 이새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새의 아들이라는 것은 유다지파를 의도적으로 높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
이스라엘 내부에서 출애굽처럼 새로운 언약기준에 의해서 ,나중 언약이 처음 언약보다 더 메시야적이고 세밀하기 때문에, 다윗언약기준에 의해서 이스라엘 둘로 쪼개지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한쪽은 유다지파 중심이고, 다른 쪽은 요셉지파 중심이다. 유다지파는 한 지파, 나머지는 열한 지파다. 일대 십일이다. 다윗에게 언약이 주어졌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진다. 예수님 당시 그 사회는 유대인 사회이다. 유다지파 사람들이다. 유다 지파 안에 내분된다. 마지막 언약을 위해서. 언약은 들어가면 무조건 쪼개진다. 언약이 오개 되면. 십자가 복음이 오면 십자가 중심으로 한쪽은 천국 한쪽은 지옥이다. 사도들이 전한 것은 십자가다. 메시야가 오셔서 하신 일이 기준이다. 주의 이름으로 하신 일이 마지막 언약, 살과 피로 세운 언약으로 건질 자를 미리 빼돌리는 방식을 사용하신다.
이 기준이 들어왔을 때 요압 집단의 권력욕심이 더 또렷하게 드러나면서 다윗과 격차가 많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세바의 난을 누가 평정하는가? 요압이 세바를 벧마아가 아벨에 있는 성으로 추적했고 그 성의 한 여인이 성 사람들에게 말해 세바의 머리를 성밖으로 던진다(삼하 20:22).
삼하 20:9절에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형은 평안하뇨 하며 요압이 오른 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수염을 잡는다는 것은 허물없는 사이를 과시하는 것이다. 우리 사이는 긴장할 필요 없고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친절을 베푸는 척하면서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 입을 맞추려는 체 하매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니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삼하 20:9-10).”
삼하를 보면 땅이 질퍽질퍽할 것 같아요. 죽고 죽이는 현장. 권력의 현장에서 내 권력의 앞길을 막는 자는 두말없이 죽인다. 그런 요압이 다윗을 위한 공로자가 된다. 다윗 입장에서는 요압의 혜택을 입으면서도 제거 대상이 된다. 너무 미운데 그 사람이 없으면 일이 안 된다. 대략난감하다. 요압은 아마사를 제거하고 세바 난을 처리한다.
사사기 9:9절을 보면 요압의 이런 태도가 왜 인정받지 못하는지를 알 수 있다. 아비멜렉이 나서서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한다.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로 요담이 그리심산 꼭대기에서 소리쳐서 세겜 사람들에게 소리를 들으라고 한다. 나무들아 네가 왕 되기를 원하느냐고 하니 쓸데없는 자가 왕이 되려고 한다. 쓸데없이 놀기는 뭐하고 티 보려는 자들이 정치하고 대선에 출마한다. 율법의 세계에서는 굳이 왕이 될 필요가 없다.
왕이 되려고 억지 부리면 제사장직, 선지자 직이 누락된다. 형식은 왕이지만 폭력자다. 왕은 반드시 율법의 세계를 다녀와야 한다. 죄인의 괴수만이 이스라엘 왕이 될 수 있다. 죄인의 괴수는 자신이 왕이라 절대 말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다윗처럼 은혜 받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된다.
다윗 중심의 새로운 제사장들이 모집되면서 제사장 계열이 다윗에게 종결되고 만다. 엘리 제사장 계열은 저주받아 아비아달에게 끝나게 된다. 솔로몬 반대편인 아도니아 편에 서서 잘린다(왕상 1:7). 다윗 왕 자신이 제사장 사독을 임명한다. 제사장 중심체제가 왕 중심 체제로 바뀐다. 백성입장에서 달라진 것은 제사장 중심체제에서는 제사장이 율법을 준다. 선지자나 제사장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라고 한다. 이제는 왕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라로 바뀌게 된다. 제사장 말에 고분고분할지라도 왕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
제사장 중심은 모세언약이고, 왕 중심은 다윗언약이다. 그만큼 율법보다 더 상위의 언약에 의해 율법마저 통제받는다. 그러면 율법은 임시적 법이 된다. 갈라디아서 3장에 사백 삼십년 후에 온 율법이 닿을 듯 말 듯 접촉하지 않고 그냥 날아가 버린다. 율법을 따라 왕이 오신다.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율법세계로 들어가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되신다.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 들어가게 되면 율법 완성의 세계가 되고, 하나님의 의가 된다. 하나님의 약속이 율법을 통해서 주어졌고 예수님은 율법 따라 오셔서 율법을 완성하셨다. 원래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계통이 완료되었다.
율법보다 높은 언약을 다윗에게 적용하자. 다윗이 떠나더라도 다윗 언약은 살아 있다.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모세 언약대로 약속의 땅이 이루어진다. 모세는 죽어도 모세언약을 살아 있다. 다윗이 죽어도 다윗 언약이 적용된다. 모세에게 모세언약이 다윗에게 다윗 언약이 먼저 관통했다.
새언약이 예수님을 관통해 버렸다. 따라서 예수님의 존재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 된다. 예수님의 존재성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존재증명위해 고고학적 발굴을 한다. 실재인물임을 증명하려고 한다. 예수님의 존재를 믿게 되면 우린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농약 뿌리는 비행기가 병충해를 예방하는지 약이 그렇게 하는지.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내세운다. 인물이 어떻다를 따진다는 자체가 언약의 세계를 몰라서 그렇다. 십자가만이 환상이 아니라 진실이다.
제사장보다 더 상위인 제사장의 완성인 왕의 인격성에 의해, 모세 언약이 다윗 언약에 흡수통합이 된다. 왕의 언약이 되면 영원한 고정성이다. 영원한 구원이 보장된 것이다. 다윗의 후손들이 죽고, 죽어도 상관없다. 언약은 죽어도 상관없다. 이 언약을 따라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예수님이 언약의 사람이 된다.
모세율법을 능가하는 율법이 주어진다. 산상설교다. 예수님의 율법 해석을 바리새인들이 동의할 수 없다. 율법은 예수님을 경유해야 한다. 예수님 자신이 율법이다.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주인이기에 인간이 안식일을 지킬 수 없다. 녹즙기. 예수님 십자가에 모든 것을 다 집어넣으면 피가 똑똑 떨어진다. 피로 세운 언약이다. 모든 율법 완성이 다 들어 있다. 안식일에 나무하지 말라는 것 등 모두 집어넣으면 남는 것은 피다. 예수님의 살과 피로 다 완성된다.
문제는 그 녹즙기에 우리도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집어넣고 자기 인생은 집어넣지 않는다. 십자가는 관람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함께 죽이신다. 성령께서 십자가에 집어넣어 다윗처럼 새로운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신다.
삼하 21:1절에 “다윗의 시대에 연부년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다. 기브온 사람은 여호수아 때 계약을 맺어 침범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사울 왕이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기브온 사람을 학살했다. 그 땅을 몰수하고 상당히 괴롭혔다. 여호수아와 맺은 언약이 사울 왕으로 인해 당했다. 무시당해도 기브온이 소수이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윗 시대에 해결하지 않은 문제로 등장했다. 미제사건이 남아 있었다. 자연적 신호가 삼년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이 여호와께 기도하니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라고 하시면서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지금까지 계약 위반에 대해 아무런 책임 없이 그냥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어떻게 해 주기를 좋겠느냐고 한다.
삼하 21:3절에,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이하여여 복을 빌겠느냐?” 그러자 기브온 사람들이 삼하 21:4절에, “기브온 사람들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니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5-6절입니다. “저희가 왕께 고하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명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왕이 가로되 내가 내어 주리라 하니라.”
사울이 학대한 이방민족을 전체 이스라엘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가뭄을 주셨고 다윗이 반응을 나타낸 것이다.
사울집안 일곱 명 목을 달아 피의 복수를 해 달라고 한다. 이때 다윗의 언약과 여호수아의 언약이 충돌되지 않도록 고려하면서 요나단의 아들 므미보셋은 명단에서 빼고(삼하 21:7) 나머지 사람을 잡아 기브온 사람에게 맡기고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 집 사람 일곱을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았다(삼하 21:9). 그런데 또 문제가 생긴다.
삼하 21:10-14절입니다.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옷을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반석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이에 아야의 딸 사울이 첩 리스바의 행한 일이 다윗에게 들리매 다윗이 가서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서 취하니 이는 전에 블레셋 사람이 사울을 길보아에서 죽여 벳산 거리에 매어 단 것을 저희가 가만히 가져 온 것이라 다윗이 그곳에 사울의 뼈와 그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대로 좇아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죽은 자들이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들이기 때문이다.
꼬이고 엮인 문제가 하나님의 언약대로 풀어주어야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 유지될 수 있다. 왕이 해야 될 제사장직이다. 과거에는 성전에서 제사 드리면 그만인데 피의 복수자의 원한을 해결하는 일까지 왕이 담당해 주어야 한다. 자신이 율법 속에 갔다 왔기에 그것을 해결한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가뭄을 주셔서 호응을 해 주셨다.
이렇게 해서 사울 집안으로부터의 정권이양이 완전히 끝났다. 정권이양이 다 된 후 자기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보고한다. 삼하 22장에 선지자 예언이 나온다.
삼하 22:1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에 손에서 구원하신 것은 다윗이 자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에 말려든 사람으로 인식할 때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되었음은 안다. 그렇다면 다윗에게 일어난 일이 다윗 본인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다. 평생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일중 나의 일은 하나도 없다. 어떤 상황도 그러하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살만큼 살았다. 살아온 모든 이것이 율법 세계 안에 있는 사람은 주께서 이 일을 조성하셨음을, 선지자적 기능을 발휘하라고 벌이신 일이다. 내가 책임질 필요도 없고 그 일에 심각할 필요도 없다. 뭔가 해야 될 것도 없고 또 준비되어 있다.
갑자기 가뭄이 된다든지 홍수가 난다든지 냉장고가 고장 나든지 전기가 나간다든지 그러한 상황을 주실 수 있다.
사무엘하 22장 전체는 다윗은 계시를 만드는 사람 이스라엘, 성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만드는 사람이다. 계시의 특징은 계시는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다. 8절 이하에. 계시를 만든 사람이 하늘로서 내려 오신분이 땅에서 마무리 지으면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이것이 바로 언약궤 정신이 구현된 예루살렘이고 그 예루살렘의 왕은 멜기세덱이다. 세 개 조가 맞다. 언약궤는 한때 이 땅에 등장했던 물체, 예루살렘은 한때 이 땅의 도시였고, 멜기세덱은 한때 나타난 영원한 거룩한 제사장이요 살렘 왕이었다. 그 한때가 언약이 마감되면 그 안에 통합된다. 이 안에서만 구원이 가동되고 이루어진다. 밖에 있는 자들은 안쪽에서 뽑아줄 때 구원이 되는데, 뽑혀 나올 때 원칙은 밖의 세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죄의 세계다.
다윗의 특징은 무조건이다. 성도의 특징은 무조건 무조건이다. 조건이 없다. 조건이 있다는 것은 죄의 세계다. 여기에서 빠져 나오니 내가 살던 세계가 한시적 세계였구나를 안다. 완성된 언약 세계의 그림자였구나.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꼴이 불바다 되는 구나. 이 조건으로 따지는 세계에서 무조건의 세계로 들어간다. 조건은 위에서 주어져 땅에서 실현된다. 다윗에게 일어난 모든 전쟁과 모든 싸움은 하나님이 나의 방패 되시고 반석 되시고, 피할 바위 되시어 하나님의 자기 증명을 하기 위해 보잘 것 없는 다윗을 세워 골리앗을 우연히 이기게 하여 고생 속으로 집어넣으신다. 이것이 삼하 23:7절까지 쭉 예언이 되어 있다.
9강
사무엘하에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요나단-사울의 아들 다윗의 친구, 나발- 아비가일의 남편. 아히노암-다윗의 두 번째 아내, 아비아달- 사울 왕 때 대제사장, 아브넬-사울 왕과 이스보셋의 군대장관 및 북이스라엘의 실질적 통치자지만 나중에 다윗에게 귀순했지만 요압에게 살해당함, 사울의 삼촌이다. 아사헬- 요압의 동생으로 아브넬을 잡으려도 도로 창에 찔려 죽음, 들 노루처럼 빨랐다. 스루야-요압, 아비새, 아사헬의 어머니, 다윗의 누이동생이다. 다윗과 요압은 사촌이다. 암몬 왕 나하스의 딸 스루야다. 다윗의 어머니가 남편 이새가 죽고 난 후 암몬 이방 나라 나아새와 결혼해서 낳은 딸이 스루야다. 그 딸의 용감한 아들이 요압과 아비새, 아사헬이다. 자기 집안끼리다. 그래서 교재 나온 족보가 있지요. 그 다음에 아비갈-암몬 자손 왕 나하스의 딸이자 스루야와 자매사이, 다윗의 여동생, 나하스는 다윗의 어머니와 결혼함. 이새-다윗의 아버지로 모압 땅에서 죽었음.
아비새는 요압의 동생. 암논은 다윗의 장남 헤브론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압살롬에 의해 죽는다. 압살롬-헤브론에서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인데 다윗의 셋째 아들로 왕위 서열계승 2위다. 영순위 되는 암논만 없으면 자신이 차기 왕이 된다. 그런데 왕은 반드시 율법세계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왕과 동일하다. 세상권력과 똑같다. 죽어봐야 내가 왕이 될 수 없고 왕이 될 필요도 없구나를 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율법을 주셨기에 거저 누리고 혜택을 입으면 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성도, 왕 같은 제사장이다.
사무엘하를 보면서 등장인물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조화롭게 구성되어 다윗을 왕으로 옹립하는지를. 다윗이 왕이 되고 싶은 것도 있지만 다른 쪽은 다윗을 왕으로 되게 하면서 은근히 노리는 것이 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나에게 어떤 혜택이 주어지고 어떤 권력을 달성하고자 다윗 곁에 최측근으로 있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똑 같은 의식을 그 당시 다윗 중심으로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준비한 것이 배치다.
교재 5번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5. 욕망의 배치형태.
욕망의 배치에 권력 장치를 동반한다. 그렇지만 권력 장치는 배치의 다양한 구성요소 속에 위치해야만 한다. 따라서 권력 장치는 배치의 한 구성요소가 될 것이다.
권력이란 욕망의 변양(變樣)이다. 사적인 에너지(힘)의 흐름이 양상으로 변한 것이다. 이 힘은 욕망의 배치 속에서 구성된 한 부품으로서의 미시(더욱 작은 세미한 권력) 장치를 통해 행위와 상호 연결되는 행위’로, 혹은 다이어그램(diagram)으로서 작동한다.
권력은 어디서부터인가 무언가로 작용한다. 이것은 권력이 그것이 작용하는 대상과는 다른 수준에 위치하게 됨을 의미한다. ‘정말로 하고 싶은 것’과 ’실제로 하게 되는 것’의 구별이 어떻게 하더라도 권력의 개념 속에 스며들어와 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권력은 높은 곳이든 낮은 곳이든, 어쨌든 어딘가로부터 와서 주체에 작용하고, 그 주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억제해서 무언가 행위를 하게 한다. 즉 권력은 항상 어떤 주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도식을 전제로 한다.
6. 다이어그램(diagram)
점과 점을 선으로 연결하여 작동하는 권력의 기능이 다이어그램이다. 예를 들어 철도운행에서 말하는 ‘다이어(dia 편재하는)’는 운행상황을 점과 선으로 표시하고 관리하는 지도이다. 철도의 다이어는 역이라는 점을 열차의 운행이라는 선으로 묶는다. 사고와 같은 비상사태로 운행에 지연이 생긴 경우에는 선과 선 사이가 좁아진다. 철도회사는 선과 선 사이를 조금씩 넓게 해서 열차를 운행하고 다시 통상의 다이어로 돌아간다. 다이어그램은 확실히 유연하게 상황에 대응하고 전체를 일정 목적에 따르게 한다. 따라서 이 개념은 각 요소를 배치와 배분에 의해 관리하는 권력관을 설명하는데 적절하다.
권력체제가 되려면 평정화 되어야 한다. 다윗이 그것을 시도했고, 스루야의 세 아들도 평정화 되었다. 점과 점 사이에서 군사를 어떻게 배치하고 이동하는가가 한눈에 다 보인다. 이것이 권력의 배치다. 여기서 백성은 작은 입자, 알갱이가 된다. 권력의 종이 되는 알갱이가 된다. 권력의 구조는 이렇다.
평정화가 되면서 인간은 평준화를 누린다. 평균화, 그렇고 그런 인생이다. 조용히 살다 조용히 가는 것. 그러니 땅의 권력구조하 그 어디에서 살든 조용히 살다가 지옥 간다. 나는 대통령이 왕이 시키는 대로 했다. 나는 그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살았을 뿐이다. 남들이 나보고 사람 사는 것처럼 살아가네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그렇고 그런 인생, 조용한 인생, 평균화된 인생, 평준화된 인생, 그리고 보이지 않는 권력, 악마가 평정화시킨 세계가 땅의 세계다.
여기에 대해 어떤 문제점을 못 느낀다.
이런 평화로운 좋은 세상 이것을 인간 입자 내부에 자의식이 되면서 습관화 된다. 나라말 듣는 것이 습관화 된다. 6,70대는 KBS만 본다. 수십 년 동안 습관화 되어 있다. 이것 보지 않으면 공산당이다. 공산당을 이기려면 KBS를 봐야 된다. 북한이 보여준다. 종교화된 유교적 사회주의다. 모든 것이 어버이의 이름에 종속되는 종교단체다. 신천지랑 똑같다. 평정화, 평준화, 평균화, 그렇고 그런 인생. 아무리 세상이 코로나가 심해도 북한에는 단 한명의 코로나 환자도 없다. 마스크 쓸 이유도 없고 백신 들어갈 이유도 없다. 코로나 걸린 사람이 한명도 없기 때문이다. 천국 같은 유토피아 세계다.
8. 기호의 압박
요나단, 나발이라는 기호-헤브론 지역에서의 유지. 유다지파 내의 갈렙지파 영토이기에 다윗과 경쟁관계에 있다. 그런데 다윗이 그 아내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았다. 그래서 권력자라는 것은 이 배치에 의해서 아내를 유력한 유지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음으로 그 영토 내에서 위상이 높아진다. 예선전이다. 유다지파 자체 내에 있는 유력한 자의 아내를 차지한다는 것은 자기 지파 내에 다윗에 대한 호응도가 높아졌다는 의미다.
왕의 아내는 왕의 권력을 증명하기에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 왕의 첩을 공개적으로 합궁한다. 그 이유는 사울의 집안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것은 사울 정권을 제대로 인수했다는 뜻이고, 다윗의 첩들을 공개적으로 동침하는 것은 백성으로 하여금 이전의 왕을 잊으라는 것이다. 옛날 왕의 첩이 나의 첩이 되었으니 내가 지금 최고 권력자고 이 나라의 통치자라고 선언하는 방식이라고 아히도벨이 충언을 한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다.
그러면 다윗이 첩을 왜 데려가지 않았는가? 다윗은 자신의 아들 압살롬이 다윗성에서 죽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다윗은 압살롬이 반드시 패한다는 것을 안다. 만일 자신이 다윗성에 머물게 되면 자기 손으로 아들을 죽여야 하기에 임시로 비워주고 빠져 나온 것이다. 어차피 너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왕이 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게 하시니 봐주는 것이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가정에 칼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 했을 때 다윗은 아들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들을 왕으로 옹립되는데 아들은 이용당했을 뿐이고 그 배후의 다른 세력들, 즉 사울 세력들이 압살롬을 추종하여 우리 다윗 가문이 약간 어려움을 겪을 것이 되어야 나의 어떤 죄로 인하여 저주가 떨어져도 그 저주는 왕가 자체가 무너지는 저주로 통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무엘하 7:14절에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의 가문을 세울 것이라고 약속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다윗은 집안에 문제가 있어도 아무 걱정하지 않았다.
아브넬은 사울과 이스보셋의 군대장관이었고, 아사헬은 요압의 동생으로 아브헬을 죽이려도 도로 죽었고, 스루야는 용감한 삼형제인 요압, 아비새, 아사헬의 어머니였고, 다윗의 누이동생이었고, 암몬왕 나하스의 딸이었다. 요압, 아비새, 아사헬은 이방민족의 피가 섞였다. 아비가일은 암몬 나하스의 딸 스루야와 자매사이고 다윗의 여동생이고 다윗의 어머니가 나가서 혼인해서 생긴 딸이고, 나하스는 암몬 왕이고 하눈은 나하스의 아들이고 암몬의 차기 왕이다. 하눈은 다윗이 암몬왕 나하스를 조상하러 간 사신을 수염절반을 깎고 의복의 중등볼기까지 드러내어 잘라 보낸 자다(삼하 10:2-4). 그것으로 인해 망한 사람이다. 다윗의 도장 깨기의 희생물이다.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요 모압땅에서 죽었고,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아비새는 요압의 동생이고, 암논은 다윗의 장남이고 헤브론에서 태어나지 않았고 아비가일의 아들이고, 압살롬에게 죽는다.
다윗의 혈통적 아들들이 서로 죽고 죽인다는 것은 차기 왕은 솔로몬에게 이미 지정되었기에 유다 지파가 아닌 유다지파, 다윗이 아닌 다윗으로 인수되기에 나머지는 제껴져야 된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해 주시는 것이다. 쓸데없이 반란 일으켜 지풀에 나가떨어지게 한다. 압살론 헤브론에서 태어난 다윗의 셋째 아들, 왕위 서열 2위다. 일등만 하면 괜찮은데 꼭 이등이 되어 자기 목표가 생겼다. 망하게 되었다.
아도니아는 다윗의 넷째 아들이다. 솔로몬은 다윗의 열 번째 아들이다. 그러면 자신이 사표 내어야 하는데, 사법고시 기수가 후배가 올라가면 나머지는 알아서 사표내야 하잖아요. 그런데 아도니아는 한참 동생인 솔로몬이 왕이 되니 나는 백성들의 의견이 더 중요하지 다윗의 뜻은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직 국민의 국민을 위한 왕이 되겠다고 하다가 솔로몬에 의해 죽는다. 네가 언약을 아주 무시하는구나.
왕가라 하는 것은 왕이 지명해야 된다. 국가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어떤 때는 왕의 피가 제일 많은 쪽이 후계자가 되고, 왕비의 피가 많은 쪽이 왕이 되고, 또 하나는 왕이 지명하는 자가 왕이 되는 경우가 있다. 팔레스타인은 왕이 지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미갈은 사울의 딸이요 다윗의 첫 아내, 다윗을 비웃다 자식 없음, 왕국 영향력이 없다. 아마샤는 압살롬의 군대장과, 요압에서 암살당함, 요압과 사촌지간이다.
레갑과 바아나는 이스보셋의 용병이고, 이스보셋을 죽였고, 다윗에게 죽임을 당하고 시신이 훼손되었다. 손과 발을 자르고 몸통이 걸렸다. 왜 이런 짓을 하는가? 내가 요셉지파를 무시하지 않는다. 여러분의 소원을 들어주는 포용력 있는 차기 왕임을 보이기 위해 이방민족출신을 잔인하게 죽였다.
므비보셋-요나단의 아들, 절뚝발이다. 그래서 왕이 될 수 없어 목숨이 살아났다. 희한하지요. 멀쩡했다면 까불다 나서다 요압에서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시바는 므비보셋의 종인데 사울 왕가의 허점을 보여준다. 자신이 종이면 종다워야 하는데 자기 주인이 절뚝발이라 해서 무시하여 재산을 다 빼돌렸다. 거짓말 하고. 므비보셋이 다윗 왕을 무시해서 자신이 대신해서 왔다고 하니 다윗이 그것을 모르고 배신자 므비보셋에게 주지 말고 시바가 다 차지한다. 다윗이 나중에 돌아 올 때 시바가 장난질 친 것을 알게 된다. 종이라 만만히 보면 안 된다.
웃사는 죽고 오벧에돔은 복을 받았다. 나단은 다윗의 선지자 다윗의 아들이다.
요압은 다윗의 군대장관, 다윗의 누이동생 스루야의 아들이자 다윗의 조카다. 사독은 다윗 시대에 주 제사장, 아히멜렉은 보조 제사장. 밧세바는 솔로몬의 어머니. 미모가 뛰어났다. 아히도벨의 손녀다.
하나님의 권력 배치다. 그 몸매까지 주의 뜻이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말은 다윗의 딸, 솔로몬의 누이동생, 암논에게 강간당함.
우리야는 헷 사람으로 밧세바의 남편, 권력의 희생물이 됨.
이름 없는 아이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이, 앓은 지 일주 일만에 죽은 아이. 일주일만 살았다. 희생제물 그 모습을 다 보여준다.
솔로몬은 다윗의 열 번째 아들, 요나답은 암논의 친구, 간사하기 짝이 없다. 이새의 세 번째 아들이자 다윗형인 시므라의 형의 아들로 암논과 사촌지간.
아히도벨과 후새- 다윗의 충신,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신함.
잇대는 다윗 쪽 군인인데 블레셋 가드 사람으로 다윗의 외인부대 인솔 장군
아히마하스는 사독의 아들 제사장.
여호나단은 아비아달의 아들 제사장. 나중에 제사장 잘림.
후새는 다윗의 충신이고 베냐민 지파에 속한 아렙사람
시므이는 다윗을 저주한 사람이고 사울의 먼 친적이고 게라의 아들이다.
마길은 므비보셋을 돌봐주는 사람
바르실레는 길르앗 지방의 유지. 사울 장례를 치러준 사람. 나이 많아 청와대 입성을 거부하고 고향에서 조용히 살겠다고 한다. 아주 멋진 사람이다. 다윗을 마지막 변호한 사람.
세바는 베냐민 사람인데 비그리의 아들 반란자, 아벨에서 여자에게 맷돌을 맞아 죽음.
갓은 다윗의 인구조사를 비난한 선지자
아라우나는 여부스 사람이다. 다윗을 돈을 지불해 그 땅을 예루살렘의 은택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모시기를 원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정확하게 언약이 완성되는 그 모습으로 땅을 제공한 사람이 아라우나, 삼하 24:24-25절에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며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그러니 사무엘하가 아라우나 타작마당에서 다윗이 제사장이 되어 백성전체의 죄를 위해 제사 드린다. 시편 51편에서는 다윗의 사적인 죄로 인하여 주께서 꺾으신 뼈가 제물이 되었다. 피의 복수자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제는 왕이 되었기에 전체 백성의 죄를 위하여 자신이 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다윗언약의 기능에 다윗은 제사장으로 참여되고 있다. 다윗은 자신이 다윗언약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안다. 자신은 배치물에 불과함을 안다. 그렇다면 다윗 언약은 누가 이루는가? 언약을 주신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다. 하나님 본인이 이루셨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다윗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백성 전체의 제사장이 되려면 이스라엘 전체 죄가 나와야 된다. 사적 죄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죄가 사무엘하 24장에 나온다. 1절에,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이 말씀은 다윗의 인구 조사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에 대해서 손좀 보겠다고 하신다. 마치 이것은 사사시대와 비슷하다. 이스라엘 전체로 하나님께서 죄를 죄대로 드러내야 되겠다는 것이다.
죄를 드러낼 때는 준비된 것이 반드시 이 죄가 어디에서 말소가 되고 해소가 되는지를 백성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해서 다윗에게는 다윗의 사적이 지난 과거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사무엘하 7:14절의 언약이 있음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윗을 성전 되게 하시고 다윗가문 자체에 하나님께서 거주하시겠다는 뜻이 다윗이 제사장이 됨으로 거기에 나타낸다.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신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언약의 하나님이 왕이시다. 왕의 권력을 위해 기꺼이 누가 희생이 되어야 하는가? 이스라엘 전체가 기꺼이 희생되어야 한다. 왕을 상대로 해서 왜 삼일 만에 칠만 명을 죽였습니까라고 따지면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라고 하신다.
이스라엘이 네 것이냐? 내 것이다. 내가 하나님 됨을 드러내기 위해 네 자식을 태어나게 해서 죽였다. 네가 그것을 따지냐?
다윗 왕이 바로 이런 정신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해야 된다. 이 정신을 이어받는 자가 솔로몬 왕이다. 그러니 차기 왕은 다윗에게서가 아니라 다윗 언약에서 나온다. 다윗언약에서 왕이 나오면 인간은 무조건 무조건 죄인이 된다. 쓸모 있는 죄인이다. 하늘나라 이루는 꼭 필요한 죄인이다. 하늘나라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성령으로 다이아그램, 연락되게 되어 있다. 성도와 성도끼리 전화할 때 반드시 자신이 하루 살면서 지은 죄를 즐겁고 화사하게 기쁨으로 붕 떠서 이야기한다.
언니 오늘 뭔 일 있어. 오늘 삼성주식 샀는데 대박 났어. 그게 죄거든. 그게 너무 신나. 돈 벌고 죄짓고. 우리애가 또 백점 맞았어. 백점 맞는 죄를 지었어. 사법고시 합격한 죄를 지었어. 걱정인지 자랑인지 분간이 안 되지만 이것이 바로 성도끼리 같이 기뻐하고 같이 우는 것이다. 그것이 죄이기에. 전에는 교만이었는데.
이 모든 것이 죄임을 규정하신 그분의 규정에 의해서 우리가 마음껏 죄를 죄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수십 명의 등장인물 개체 하나하나가 우리의 죄의 모습이다. 우리의 죄는 무엇인가? 오직 권력에 대한 추구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 개인보고 잘해하지 말고, 아예 판을 바꾸라. 주님이 다 이루신 판에 우리를 올리면 된다. 피자위에 토핑 되듯이. 십자가 판에 우리가 토핑 되었다. 각자 역할이 다 다르다. 토핑 된 이 판이 다윗 시대에는 그 어떤 인간도 율법을 감당할 육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로 드러났다.
율법을 감당 못하는 육신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 죽었기 때문에 율법을 가진 육신이 어떻게 죽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삼하 24:1).”
인구조사를 한다. 인구조사는 언제 하는가? 세상에서의 인구조사는 세금 거두기 위해서다. 민수기에서는 전쟁을 위해 인구조사를 한다. 원래 인구가 몇 명이었는데 전쟁 후 얼마 남았는가를 센다. 처음에는 오만이었는데 나중에 삼만이 되면 하나님께서 이만을 죽이셨다. 죽일 자를 죽이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하 22-23장에서 다윗이 전쟁기능을 발휘한다. 삼하 22:2-3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오 나의 피란처시오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하나님은 땅을 상대로 전쟁 중이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도 “나는 너의 방패요 상급이라.”하셨다. 방패는 수비용이다. 나의 피난처요. 구원이라는 말이 너무 흔하니 구출로 하겠습니다. 전쟁 중에 구출이다. 하나님께서 땅을 상대로 전쟁을 하실 때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땅의 세계에서 하늘로 구출 하는 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우리 믿을 수 없다.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고 평정된 세계에서 습관적으로 평준화된 세상에 길들여 살기 때문이다. 악마가 그렇게 만들었기에 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 율법을 주심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 정답을 낼 수 없는 자로 자각하게 만든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나는 하나님의 요구를 들을 수 없음을 절감케 해서 구출과 구원의 의식을 유발시킨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
사도바울의 모든 명령과 지시는 십자가 복음에서 나왔다. 십자가 복음에서 나왔기에 사도바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십자가 지신 그분의 능력이 아니면 못 지킨다. 지킬 수가 없다. 남편 된 자들아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쳐라. 미쳤어요. 아내에게 순교하기 위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내를 사랑한다는 노래가 얼마나 많은가? 곤히 자는 아내를 보니 젊을 때 그렇게 예쁜 것이 살이 쏙 빠져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을게. 내가 괴롭혔기에 고왔든 손이 뭐냐. 다 내 잘못이다고 한다. 그렇게 남편이 아내에게 지사충성하는 것은 남편이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퇴직했거나 능력 없어 다른 여자 볼 겨를이 없기에 그러하다. 죽으나 사나 강아지처럼 아내에게 붙어 있어야 한 끼라도 챙겨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숨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끝까지 이용한다. 왜냐하면 내 권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삼하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다. 어떻게 내가 나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가? 이것을 인간이 피할 수 없다.
선지자는 피할 곳이 없게 전쟁 마당으로 만드신다. 예언의 내용은 땅을 향해 전쟁을 하셔서 전리품으로 너희를 만들어 낸다는 작업이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성경전체가 전깃줄에 앉은 참새처럼 서로 통하는 것이 있다.
아브람이 318명과 동맹군으로 15-1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 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재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아브라함이 왜 십일조를 살렘왕 멜기세덱에서 드리는가? 그 이유가 20절에 나온다. “너의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다시 말해서 이적이 아브람의 적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전쟁이 아니라, 이 전쟁은 하나님의 흔적을 가진 멜기세덱의 가치와 하실 일을 지키기 위해 지상에 지점을 만들어 지상에서 악마와 싸움을 하는 그 일에 아브람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전리품이 떡과 포도주였다. 아브람이 전리품으로 악마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났다.
그러니 기꺼이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이몸의 남은 인생은 당신 승리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십일조 드린다는 말은 우리 관계가 십일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주의 것입니다. 로마서 14:7절을 본격화 시킴.
사무엘하 24:17절입니다.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언약이 언약대로 실현되는데 제가 기꺼이 희생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고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자기 돈으로 값을 주고 사서 그곳에서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린다. 25절입니다.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
이렇게 사무엘하는 끝난다. 재앙이 내리는 땅이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이 재앙을 받아 마땅한데 뭔가 다른 민족에 없는 요소가 이스라엘 속에 함께 공존하고 있다. 다윗이 아니라 다윗언약이다. 다윗은 죽어도 다윗언약은 살아나야 하니까.
다윗언약의 본질이 다윗시대에 잠시 증상을 보인 것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의 증상을 보이는 기능을 맡은 것처럼. 다윗입장이나 우리 입장이나 마찬가지다.
사도행전 2장을 보겠습니다.
27절에 베드로가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행 2:25절에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시편은 다윗의 고백인데 베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다윗언약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윗언약의 주인공은 다윗이 아니라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심을 나중에 나타내고 미리 숨겨서 다윗 시대에 성령을 보내셔서 다윗을 통해서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이다. 그 고백은 예수님의 자기 고백이다. 나는 죽어도 썩지 않는다. 죽어도 썩지 않는다면 저자 다윗이 주인공이 아니기에 다윗은 필히 썩어야 한다. 우리는 죽어야 되요, 살아야 되요? 죽어야 된다. 죄인은 필히 죽어야 된다. 죽는 이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과정이다.
나는 죽는다. 기분이 왜 이리 좋은지 몰라. 이것이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러니 늙으면 늙은 냄새나고 늙은 색깔이 나는 것이다. 언약대로 마땅한 것이다. 나이 먹는 것을 서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야. 왜 떠는지 모르겠어. 기력 다 떨어졌어. 이것은 자아가 만든 환상이다. 아직도 권력을 쥐고 있다. 사무엘하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란 똑 같다. 그들은 다 소멸되고 남는 것은 다윗은 왕으로 옹립되었다. 하지만 다윗마저 주인공이 아니었고 다윗언약이 주인공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과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과 함께 하시겠다고 하셨다. 그 후손이 로마서 1:2-3절에 복음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신다. 성경 전체가 예수님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무엘하를 보면서 오늘날 우리모습이 바로 그들과 똑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들 늘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예수님께 감사하면서, 율법 세계 안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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