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요한복음 5장 39-40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우리는 다 목회자들이기 때문에 본문의 의미는 잘 알고 있죠.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안식일을 어긴다고 고발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을 연구할 때 최종 목적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의 말씀은 영생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분명히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라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기 때문이죠.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이런 말씀들이 여러 곳에 나오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성경 연구의 목적은 ‘영생을 얻기 위함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은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런 것이 어디에 나오냐?”고 반문을 하실 분들이 있겠지만 유대인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이들의 성경 연구는 어떤 이방인보다 탁월합니다. 이들은 구약 전체를 꿰뚫어서 지향하는 바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개혁주의자들이 흔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돌아가자’고 하는데, 이런 주장은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원조입니다. 그들이 말씀으로 돌아가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면 덤으로 주어지는 것이 축복과 영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이시죠. 육과 영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육으로 들으면 전혀 이해할 수 없어요. 예수님 말씀을 육으로 듣는다면 “예수님이 ‘이 성경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으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찾고 예수님께로 가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이구나.” 이렇게 이해할 거예요.
이런 해석은 성령을 받지 않아도 가능한 해석입니다. 성령이 없이 해석하면 결국 예수님의 판단 속으로 빨려들게 됩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오는 겁니다. 이 말의 의미는, 유대인들이 성경을 연구하는 목적이 자기를 위함이고, 이것을 위해 성경을 해석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 오늘날 신약 시대의 사람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예수님을 믿는 이유도 나를 위함인 거예요.
사실 이 말씀에 의해서 육에 속한 자들은 모두가 예수 믿는 우상 숭배자,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우상 숭배자가 됩니다. 그럼 영에 속한 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해’란 말이 별로 타당하지 않은데, 성령을 받게 되면 예수님 앞에 죄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게 오지 않는다.”고 하실 때, 이것은 우리가 가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주께서 자기 이름을 위해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심판할 자를 심판해서 천국 백성과 지옥 백성을 만들 때 우리는 여기에 합류 당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간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면 사도행전 16장 31절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는데 이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어야 되지 않습니까?
육에 속한 자들은 이렇게 해석하죠. 그래서 이 말씀을 보고 예수 믿겠다고 덤벼들죠. 그러면 이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 왔죠?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위하는 것은 곧 우상 숭배입니다. 그러면 빌립보에 있는 간수가 그 말씀을 들었을 때는 어떤 식으로 그 말씀이 들렸느냐? 바울과 실라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잖아요.
마치 그들을 설득하는 것 같고, 구원에 대한 미끼를 던지는 것 같잖아요? 어떤 사람이 유튜브에 올린 제 설교를 듣고 이런 댓글을 달았어요. ‘당신의 설교는 선포가 아니고 가르침이다’라고. 그럼 바울과 실라가 간수에게 한 말이 선포입니까, 설득입니까? 언어의 형식은 설득이 될 수도 있고, 예화가 될 수도 있고, 가르침이 될 수도 있어요. 성경에 보면 이런 다양한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큰 걸림돌이 있어요. 자기 부인입니다.
만일 이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주 예수를 믿으면 유대인들이 성경을 연구해서 구원을 얻으려는 목적과 같기에 그 예수는 우상이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당신이 분별합니까?”라고 물으면, 성령 받은 사람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뭐라고 하겠어요? 요한복음 5장 40절에 의하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오라 했다. ‘바울과 실라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했으니까 내가 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라는 이 자체가 자기를 위함인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그렇게 해서는 구원이 안 돼요. 그들이 구원을 받았잖아요. 그러면 성령이 오게 되면, 주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성령을 주시니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할 때는 반드시 자기 부인이 바탕에 깔립니다. “그럼 우리도 자기 부인이 가능하지 않습니까?”라고 한다면, 맞아요. 악마가 흉내를 내지요. 자기 부인하는 것 뭐가 어렵습니까?
“나는 아니요.”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잖아요. “나는 죄인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그럼 이렇게 흉내 내는 것과 빌립보 감옥의 간수의 차이는 뭐냐? 외형적으로 보면 전혀 차이가 없어요. 그러나 빌립보 간수는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가 될 것이고 육으로 난 자는 자기 구원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빌립보 간수는 살면 살수록 십자가 피가 더욱 자랑스럽고 감사가 넘치는데 육에 속한 자들은 피가 꼴도 보기 싫어요. 왜냐? 출발점이 자신이기 때문이에요.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한다면, 여기서 유대인의 잘못은 무엇인가 하면, ‘성경을 연구하면서 영생을 얻고자 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라고 지적할 수 있지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예수님께로 가야 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전합니다. 이게 맞는 말 같지요? 이게 진리입니까?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구원받고 싶어 미쳐 있기에 어떤 말이던지 구원이 된다고 하면, 행복을 가져다 준다고 하면 다 믿어 버려요. 여기에 무엇이 잠재되어 있습니까? 악마의 속셈이 담겨 있기에 나의 구원을 위한 예수로 바뀌고 그 예수는 우상이 됩니다. 인간의 선택은 항상 이런 선택 외에는 나올 수가 없어요. 자기 구원을 위한 선택, 자기 유익을 위한 선택뿐입니다.
성경 한 곳을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8장 1-6절입니다.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권속과 함께 거할만한 곳으로 가서 거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명하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년 동안 임하리라 여인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행하여 그 권속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의 땅에 칠년을 우거하다가 칠년이 다하매 여인이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돌아와서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호소하려 하여 왕에게 나아갔더라 때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와 서로 말씀하며 가로되 너는 엘리사의 행한 모든 큰 일을 내게 고하라 하니 게하시가 곧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을 왕에게 이야기할 때에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미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왕에게 호소하는지라 게하시가 가로되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 왕이 그 여인에게 물으매 여인이 고한지라 왕이 저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여 가로되 무릇 이 여인에게 속한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 밭의 소출을 다 돌려주라 하였더라.”
이 본문을 보면, 엘리사가 7년 동안 가뭄이 들 것을 말하면서 블레셋 땅으로 권속을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매우 쉬운 일이죠. 과연 그런가요?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 친척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곳으로 가라고 하셨고, 그 명령에 따라 갔잖아요. 갔다는 것이 어떤 의미냐 하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거예요.
본문에서는 이 사람이 7년 동안 블레셋에서 어떻게 살았다는 내용이 없죠? 행복하게 살았는지 힘들게 살았는지 전혀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것은 전혀 중요치 않아요. 우리는 어떻게 살았는가에 관심이 있지만 주께서 다루시는 인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져 가느냐 거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그래서 이 여인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면, 엘리사의 말대로 7년 동안 고향 친척 집을 떠나죠. 그런데 그 고향이 어떤 땅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떠나는 거예요. 그럼 우리 같으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떠날까요, 안 떠날까요? 믿음이 워낙 좋아서 떠날 마음이 전혀 없겠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거잖아요. 분명히 자기 소유물로 주신 기업이란 말입니다. 그것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여인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떠났어요. 떠났다는 것은 지금 이 땅은 하나님이 주신 땅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엘리사가 하는 일을 이 여인이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7년 동안 갔다가 돌아왔는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돌아와서 당당하게 이 여인이 왕에게 자기 전토를 돌려달라고 해요.
이 왕이 별로 선한 왕이 아닌데, 여인의 요구대로 전토를 돌려줄 뿐 아니라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 밭의 소출을 다 돌려주라고 관리에게 명합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왕이 바뀌어버렸어요. 원래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반짝(잠시)이에요. 이것을 요즘 말로 표현하면 ‘사건’이죠.
왕이 그러면 이런 마음을 지속하는가? 그런 건 아닙니다. 이스라엘 왕이나 백성이나 해야 할 일은 이 땅이 어떤 땅이냐? 자기 소유의 땅이 아닙니다. 이 땅이 왕의 땅입니까, 아닙니까? 자기 땅이 아니죠. 그런데 북 이스라엘의 왕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있죠. 열왕기상 12장을 봅시다. 여기에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갈라지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열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오히려 애굽에 있는 중에 무리가 보내어 저를 불렀더라.”
여로보암은 솔로몬 왕 시대에 충성하는 장수였고 성실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아히야 선지자가 자기 겉옷을 찢어 12조각을 나눠 10조각을 여로보암이 취하게 함으로 이 나라를 찢어 열 지파는 너에게 주겠다고 하니까 솔로몬이 화가 나서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합니다(왕상11:29-40). 그래서 애굽에 피신해 있다가 솔로몬 왕이 죽은 후에 10지파 사람들이 여로보암을 불러와서 그를 앞장세워 자기들의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바가 뭔가? 12장 4-5절에 나옵니다.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르호보암이 대답하되 갔다가 삼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하매 백성이 가니라.”
여기서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권면을 듣지 않고 자기와 함께 자란 젊은 친구들의 말을 따라 백성들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왕상12:11).”
이렇게 되니까 10지파 백성들이 르호보암을 앞장세워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뇨 이새의 아들에게서 업이 없도다(12:16).”라고 하면서 배반해 버립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죠. 왕을 요구할 때 그들은 여호와의 왕 됨을 거부했습니다. 버렸죠.
버린 상태에서 왕을 요구하니까 사무엘이 화가 났어요. 그래도 계속 왕을 달라고 하니까, 그때 사무엘이 이런 말을 합니다. 10-18절입니다.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일러 가로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가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아들들로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병기와 병거의 제구를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주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취하여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 양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여기에 보면, 자신들이 요구한 왕이 어떠한 일을 행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왕의 일을 누가 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왕 르호보암이 하려고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을 달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르호보암이 아무리 무거운 짐을 지우더라도 거기에 대해서 순응을 해야죠. 순응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왕을 원했잖아요. 그런데 르호보암 왕을 보니까 자신들이 원하는 왕이 아닌 거예요. 자신들의 소망을 들어주는 왕이어야 하는데 ‘솔로몬 왕까지는 그럭저럭 참았는데 그 아들까지 이렇게 나오면 더는 못 참겠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분명히 자신들이 왕을 요구했는데 왕이 마음에 안 든다고 거부해요. 그러니까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왕을 원한 거예요. 열왕기하 8장에 나오는 왕의 모습이 사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의 모습인데 결국 북 이스라엘(10지파) 백성들이 왜 남 유다를 배반했는가? 자기 마음에 드는 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고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나는데, 결국은 남 유다, 북 이스라엘로 갈라졌잖아요. 그러면 북 이스라엘의 왕이 여로보암인데 이 여로보암이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제사 드릴 수 있는 곳은 남쪽 예루살렘 성전뿐이었어요. 그래서 북쪽 사람들이 남쪽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사 드리려고 하니까 갑자기 마음이 바뀐 겁니다.
처음에는 선지자가 옷을 찢어 10조각을 주니까 좋았는데, 그 찢어짐이 시작점이 되어서 이제 마음껏 왕의 본성을 발휘하는데, 왕노릇 하려고 하는 거예요. 열왕기하 8장은 왕노릇 한 것을 포기한 거고요. 지금 여기서는 여로보암이 왕노릇을 하려고 합니다. 왕노릇이 무엇인가 하면, 솔로몬 성전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겁니다.
어떻게 하는가?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곳을 성전이라 하면서 백성들로 그곳에서 제사 드리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둘을 향하여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한 겁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궁금한 게 있어요. 백성들은 왜 여로보암 왕의 말을 들었는가? 그들이 원한 왕이 여로보암 같은 왕이었어요. 그들이 믿고자 하는 하나님도 그러한 하나님을 믿고자 했던 겁니다. 결국 이들이 원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만 드러내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고,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이뤄주는 하나님’을 원했고, 만약 자기들을 위해주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버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왜 그런가? 이들은 첫째 아담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담 자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들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식으로 듣는가 하면, 맞짱 떠는 거예요.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당신 말 알아들을 수 있어.” 이런 태도로 듣는 게 하나님과 같이 된 증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말씀을 듣는 태도가 어떤 식으로 듣느냐 하면, 지금 이 여호보암을 앞장세워서 자기들 지파, 북 이스라엘만의 나라를 만들어서 그곳,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우상을 섬기는 그런 성향을 띠는 겁니다. 무슨 얘긴가 하면, 예수님이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이 예수님을 어떤 식으로 대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느냐?’ 여기에 관심이 있지, ‘예수님 자신을 위한 분’이란 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다 적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죠. ‘하나님과 같이 된다.’ 자신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거예요. 자신이 판단해서 ‘이 사람이 정말 메시아인지 아닌지 분별하겠다’는 거지요. 즉 ‘자신의 마음에 들면 메시아고 아니면 자기 스스로 메시아라고 우기다가 소멸할 자다.’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은 스스로 신의 행세를 합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신처럼 대해요. 내가 말씀을 연구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고, 말씀을 제대로 배우면 천국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왕이나 백성들이 선지자의 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나요? 예수님 당시는 어떻습니까? 헤롯 왕을 비롯해서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들이 예수님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해 못했습니까?
왜 못 알아듣습니까? 성령을 받지 못해서 못 알아듣고, 그들의 신이 마귀니까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는 거예요. 그 아비가 마귀기 때문에. 그렇다면 복음을 알아들을 사람이 있을까요? 없죠. 그럼 누가 알아듣는가? 없는데 알아듣는 자가 발생하잖아요. 이들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복음을 알아듣게 돼요.
‘알아 듣는다’는 표현도 인간의 한계성 때문에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지만, 주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내몰아버리죠. 예수님과 함께 죽이고 다시 살리는 과정에서 이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겁니다. 창세기에 보면 선악과를 따먹은 자들의 특징이 자기가 선택을 하죠. 치마도 자기가 만들어 입고,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가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해요.
문제만 스스로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면 그 약속조차도 자기가 처리하려고 해요. 자기가 해석을 하고 자기가 해결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해와 말씀해석 자체가 왕창 무너지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대로 꽃을 피워내는 거예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말씀이 그렇게 하시고, 신약적으로 표현하면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말과 지혜로 하지 않았다(고전1:17)’고 하잖아요.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의 설득, 가르침, 설명의 방법으로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가르치고, 설명하고 설득해요. 하지만 이 속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십자가의 영이 담겨 있어요.
십자가의 영을 인간이 흉내를 못 내요. 인간에게는 자기 부인의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고 이해시킨다는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를 아무리 읽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선악과를 따먹었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이런 약속이 있었지.’ 이런 내용을 다 알죠. 그럼 여자의 후손은 누굽니까? 예수님이고 예수님이 십자가로 승리하셨죠. 이걸 다 알잖아요. 이걸 알면 구원받나요?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알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교리 공부를 시키거든요. 공부를 시키는 것으로 부족하니까 그 내용을 믿으라고 해요. 교리를 공부시키는 것이나 믿으라는 소리나 같은 것입니다. 둘 다 나로부터 출발해요. 그러면 십자가가 필요 없어요. 성령이 필요 없어요. 목사가 십자가를 증거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십자가를 증거하면 사람들이 못 알아듣죠. 그럼 뭐라고 하는가 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요. 어떻게? 쉽게 이야기로 풀어달라는 겁니다.
유튜브에서 인기를 얻는 목사들 설교를 들어보면 잘 설명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성경을 풀어줍니다. 성령이 필요 없어요. 인터넷에 들어가서 구독자 수가 많은 목사의 설교를 들어보세요. 성령 자체가 필요 없습니다. 다 알아듣고 이해되고 납득할 수 있어요. 내쪽에서 다 해소가 돼요. 거기에 왜 성령이 필요합니까?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목사고 복음을 전해야 하잖아요. 복음을 전하는 것은 누가 전해요? 주님이 전하게 하시죠. 씨를 뿌리고, 불을 주고 누가 합니까? 바울과 아볼로가 하잖아요. 그런데 ‘자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뭘 생각하는가 하면, ‘씨를 뿌리고 불을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여기죠.
바울이 그런 의미로 이야기했습니까? 중요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바로 바울파, 아볼로파 이런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은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만 씨를 뿌리시고, 주께서만 자라게 하신다는 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거기에 죄인을 투입 시킨 거예요.
영적인 일을 주께서 죄인을 사용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본문을 해석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가치 있는 쪽으로 그것을 해석해 내죠. 그 가치 있는 해석을 해서 바울파가 만들어지고 아볼로파가 만들어졌어요.
창세기 4장을 보겠습니다.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이 구절을 보면,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해석하죠. 해석한다는 것은 목적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여자의 후손이 오면 뱀의 머리를 칠 것이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세요. 뱀의 머리를 치면 어떤 일이 발생하겠어요? 아담과 여자에게 하나님이 여자의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그 말씀을 듣고 아담이 여자의 이름을 ‘생명(하와)’으로 지었지요? 그리고 하와가 아들을 낳았어요. 이때 하와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습니까, 잊었습니까? 믿고 있죠.
믿는 상태에서 이 약속을 자기에게 적용시키죠. 적용시켜서 해석을 하죠.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이 말의 의미는, ‘내가 낳은 이 아들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거야.’라고 생각해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돼요? 에덴동산이 다시 회복된다는 거예요. 이것 말고 뭐가 있어요? 우리들은 믿음이 좋아서 뱀의 머리를 치면 ‘아들의 나라가 만들어진다’고 믿어요. 제가 어려운 이야기를 했어요.
이 부분부터 이야기해 봅시다. 하와가 자기 몸에서 아들이 태어나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해석하잖아요. 해석한다는 것은 뭔가를 목적하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해석 당하면 되는데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해석할 수밖에 없어요. 즉 자기에서 일어나는 일을 선과 악으로 나눠 생각합니다.
그럼 이 일이 선인가 악인가 판단할 때, 약속대로 되어졌으니까 선이죠. 그리고 이 선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하면, 뱀의 머리를 칠 것이고, 그 후에는 쫓겨난 에덴동산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쫓겨난 곳은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을 수 있으니까 예전에 경험하지 못한 변화를 힘들게 여기겠지요.
그러니 여자의 후손이 오면 뱀의 머리를 치고, 뱀의 머리를 치면 우리는 천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예수 믿고 천국 간다.’고 하면 그 천국은 어떤 천국입니까? 내가 원하는 천국이죠. 이게 심각한 겁니다. 뭐가 심각하냐 하면, 지금 하와가 약속을 해석하는 방식과 오늘날 예수 믿는다는 자들의 해석이 똑같아요.
자, 하와가 왜 여자의 후손이 오기를 기다렸죠? 누구 좋아라고? 여자의 후손이 좋아라고 여자의 후손을 기다렸어요, 자기 좋아라고 기다렸어요? 자기 좋아라고 기다린 거예요. 그러니까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나니까 ‘아벨’로 이름을 지은 겁니다. ‘헛되다.’ 한숨이 나온 겁니다. 약속은 단수인데 애가 둘이 되니 약속과 어긋나잖아요. 짜증 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해석하는 겁니다. 해석한다는 말은 자기 속이 이미 선악이 나누어져 있고 해석의 목적까지 이미 결정되어 있어요. 이걸 하나님이 아시기에 인간의 해석을 쳐버려요. 아들 하나 더 주시니까 인간의 본색이 드러나죠. 하나님은 ‘네가 약속을 믿고 기다린 목적이 뭐냐?’고 묻습니다. 누구를 위함이냐? 너를 위함이란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과 이런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교회에 오는 교인들이 성령을 받았다면 십자가의 피가 흘러넘치는 아들의 나라를 사모하겠지만,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천국을 어떤 식으로 이해할까요? 내가 들어가서 행복하게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이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교회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 말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우리의 머릿속에 이미 교회관이 들어있어요. 마치 하와처럼.
‘교회는 이러한 곳이다.’라는 것이 이미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인간의 생각을 다 부숴버립니다. 하와가 왜 이런 해석을 하는지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해요. 왜 알아야 하는가? 우리의 본성이 하와와 같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말씀을 듣게 되면 해석을 하고 이해를 해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달려가려고 해요.
그런데 거꾸로 말씀이 하와를 해석해 버리니까 하와가 분해돼요. 주님이 일을 독특하게 하시지요? 하와가 약속을 해석하고 적용을 시켰는데 하나님이 말씀을 그 자리에 적용시키니까 그 해석하고 적용한 하와가 부서집니다. 그 자리에 아벨이 태어나는 겁니다.
누가 봐도 아벨은 허무한 자예요. 이미 이름 속에 아담과 하와가 가진 기대가 다 무너졌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러니 1차로 자기들이 기대하는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면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것은 무너지게 됩니다. 무너졌는데 더 무너지죠. 하나님이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과 그 제물은 안 받았어요.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 제물을 선택하셨죠. 그러면 인간이 가만히 있겠어요? 그 어머니가 가만히 있지 않듯이 가인도 가만히 있지 않죠. 왜? 그것은 자신도 몰라요. 기분 나빠요. 그럼 나의 선택이 뭔지 보여줄까?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신 아벨을 제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와와 가인의 생각이 일치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위한 세상으로 만들어버렸죠. 그래서 하나님이 가인을 저주하니까 가인이 반발하기를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 해서 불안해서 못 살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요.
하와의 생각과 일치하는 겁니다. 왜 아벨을 죽였는가? ‘하나님 당신이 선택했다면 나도 선택할 수 있다.’ 이런 거예요. 왜 선택하는가 하면, 이미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이 되었잖아요. 하나님이 된 이상은 자기가 들어가고자 하는 천국이 따로 있어요. 잃어버린 낙원이죠. 에덴동산을 꿈꾸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내 마음대로 한다는 거예요. 이미 진짜 천국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죠. 자기가 왕노릇하는 세상, 자기가 원하는 세상을 가인은 꿈꾸고 있는 겁니다. 그런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어요. 이런 사고방식을 우리가 부여받았기에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하면, 가인과 같은 선택을 하는 거예요.
아까 요한복음 5장 39절을 봤지만, 이 유대인들은 가인과 같은 선택을 한다고 하면 받아들일까요, 안 받아들일까요? 안 받아들이죠. 왜냐? 가인 같은 인간은 죽어 마땅한 인간이고, 우리는 아벨 계열에 속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다는 거예요.
물론 자기의 조상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순종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 시대에 있었다면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았다(마23:30).’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말을 그대로 끌어와서 “너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이 됨을 스스로 인정함이로다.”라고 하시죠.
예수님의 해석이 놀랍죠. 충격적이죠. 이게 이해가 됩니까? 유대인의 선조들은 선지자를 죽였어요. 성전에서 스가랴를 죽였잖아요(대하24:20-21).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죠. 알고 있으니까 ‘만약 우리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우리 조상들처럼 스가랴 선지자를 죽이지 않았을 겁니다.’라고 말한 거예요.
이 말이 진심입니까, 진심 아니니까? 진심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의 말을 듣고는 ‘너희들이 그런 말을 하니까 선지자를 죽인 자손이네.’라고 했어요. 이 말씀은 ‘그러니까 너희들도 선지자를 죽이지.’라는 말씀인데 이들은 못 알아들어요. 왜 그런가 하면, 그 당시 선지자를 죽인 자들도 그렇고 죽이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도 그렇고,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언약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기 구원에 관심이 집중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말씀이 불쾌하게 들려요. 여러분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면 죽이겠어요, 환영하겠어요? 흔히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해요. ‘오늘날 엘리야나 이사야 선지자가 와서 말씀을 전하면 들을 것이다.’라고. 이건 성경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너희들은 조상들처럼 선지자를 안 죽인다고? 그러니까 너희들은 선지자를 죽은 자의 자손이지. 너희 아비가 마귀야!” 대화를 하면 소통이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과 사람들은 소통이 안 돼요.
우리도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그들이 선지자를 죽였다면 예수님 말씀이 맞는데 그들은 안 죽였어요. 여기서 ‘그들이 세례 요한을 죽이고 예수님도 죽였잖아요.’라고 반론을 제시하는데, 그들 입장에서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은 선지자가 아닙니다. 엘리야, 스가랴가 오면 절대 안 죽이고 귀를 기울여 들을 거라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조상들처럼 멸망 당하지 않기 위해서 선지자의 말을 듣겠다는 거지요. 이 태도 자체가 우상 숭배와 똑같은 마음이에요. 그러면 이 사고방식에서 누가 벗어날 수 있는가? 아무도 못 벗어나요. 그게 종말입니다. 종말에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자가 없어요.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둔다.’라는 말은 ‘누구도 천국 갈 자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누가 천국 가는가?’ 묻지 마세요. 묻는 이유가 뭔가 하면, 천국 가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인데, 그러면 알려주죠. ‘주님의 십자가 피 능력으로 천국간다.’ 이 말을 들으면, 또 ‘십자가 피 능력’을 믿어버리죠. 믿고 해석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해석하면서 머릿속에는 뭘 꿈꾸고 있어요? 내가 왕노릇하는 세상, 에덴동산을 꿈꾸고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참 복음을 듣고 싶어 하잖아요. 여기 모인 목사님들도 그렇죠? 참 복음을 듣고 싶어하는 목적을 잘 한번 따져보세요. 왜 듣고 싶어 하죠? 1)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듣고 싶다. 2) 예수님이 말씀하신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고 싶다. 몇 번입니까? 2번이죠. 죽고 싶어서 바른 복음을 듣기 원하는 인간은 없어요.
그럼 어떻게 가능한가? 주님이 사건 속으로 우리를 집어넣습니다. 십자가의 믹서기 속으로 우리를 내몰아버려요. 이건 지식으로 안 돼요. 왜냐? ‘지식은 교만케 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인간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로 주어진 것이 ‘지식’입니다.
철학자들이 재미있는 주장을 합니다. ‘신은 절대 지(知)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거예요. 요즘 AI(인공지능) 세계가 되었잖아요. 여러분, 크라우드 알죠? 정보 저장하는 곳. 혹시 그런데 저장했습니까? 하지 마세요. AI가 따 뽑아냅니다. 유튜브에 설교를 올리잖아요. 다 뽑아내요. 그러면 나의 생각, 감성 다 뽑아낼 수 있습니다. 본인보다 더 잘 뽑아내요.
인간은 한계성이 있어요. 우리가 분석을 100가지 한다면 AI는 50,000가지 이상을 합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크라우드 속에 우리의 사상과 모든 것을 다 집어넣으면 우리가 죽어도 우리의 생각은 남아 있다.’ 그 생각이 가상현실을 실현해 내는 겁니다. 가상현실 알죠? 지금 가상현실에서 죽은 사람을 살려서 산 사람과 만나서 악수도 하고 울고 하잖아요. 이런 세계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지식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가 하면, 호세아 선지자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라고 하니까 지식을 많이 채우면 안 망한다고 생각하고 지식을 채워요. 지식을 많이 채운 자가 누굽니까?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에요. 풍부한 지식으로 예수님을 죽여버리죠.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이런 겁니다. 말씀을 제대로 연구해서 알게 되면 주님을 알아볼 수 있고, 복음을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착각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들이 지식이 많아서 복음을 잘 전했습니까? 아니죠. 뭐라고 합니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행2:4)’ 말했고 나옵니다.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자기 고향에 가서 10여년 동안 성경을 연구했다’고.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자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했다’는 점을 배제하고 싶은 거예요. 그걸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젊은이들에게 꿈을 심어 주잖아요. ‘많이 준비한 자가 큰 일꾼이 된다.’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큰 일꾼은 빨리 죽는 거예요. 설교할 때 큰 일꾼을 거론하면서 ‘배고픔과 헐벗음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을 당한다’고 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죠. 대학생들 집회에 가서 목사님이 이런 식으로 설교합니까? ‘여러분들이 사도 바울처럼 잘 준비해서 큰 인물이 되세요.’라고 할 때, ‘큰 인물’이 어떤 개념입니까? 만물의 찌끼처럼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건 제대로 설교한 것입니다.
이런 설교가 아니죠?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성경을 읽을 때 영으로 못 읽기 때문에 그래요. 바울은 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그 정도로 똑똑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 베드로는? 무식한 어부니까 베드로전후서 밖에 못 섰다는 겁니다. 인간 세상은 십자가 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양의 많고 적음으로 따지는 세상입니다.
이처럼 지식이 중요하다고 여기니까 바울은 지식으로 가득찼어요. 성경(구약) 전문가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고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지요. 그런 자에게 십자가의 영이 임하면 어떻게 됩니까? 로마서, 갈라디아서 식으로 해석해 버리죠. 다 뒤바뀌어 버립니다. 연구해서 될 문제가 아니에요. 공부하고 연구하면 어떤 결론이 나오는가 하면, 바리새인적 해석밖에 안 나와요.
연구해서는 십자가가 나올 수 없어요. 왜냐? 십자가는 인간의 노력과 지혜를 부정해 버리기 때문이죠. 복음을 전할 때 육적인 요소가 개입된다는 것은 ‘육은 아니요’를 말하기 위함이에요. 선악과를 먹은 자들은 지식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요. 종교개혁 할 때 루터는 그런 마음이 아닐 수도 있는데, 교회에서 엉터리 교리를 가르치고 있으니까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럼 제대로 교리를 가르치면 구원 얻습니까? 아닙니다.
제대로 가르치면 어떤 일이 발생하죠? 십자가는 날려버리고 십자가 사건이 재현돼요. 구약을 모른채 신약을 알면 어떤 꼴이 나는가 하면, 구약은 무조건 말을 안 듣죠. 신약은 열심히 순종해요. ‘그럼 순종하는 게 옳습니까, 불순종하는 게 옳습니까?’라고 따지겠죠? 엉터리로 해석했으니까 구약적이고 우상 숭배자들이죠.
그럼 루터가 종교개혁 하면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신약적으로 가야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말씀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말씀으로 돌아가니까 십자가는 사라지고 십자가를 믿는 나만 남게 되는 겁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고 하니까 ‘믿으면 구원 얻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개혁 초기에는 단순한 시대였으니까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말이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말이나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기 자신을 모르죠.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했는데.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이 자체가 이미 유대인들이 다 했어요. 제가 창세기를 설교하면서 이런 말을 했어요. 마르다 이야기를 했는데, 마르다를 보면 정말 놀라워요. 왜냐? 예수님으로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았어요.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등등.
다 배웠어요. 그런데 그 지식이 사랑하는 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이건 어떤 의미인가 하면, 지식이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피가 나사로를 죽이고 살리는 거예요. 그들이 아무리 믿는다고 말해도 못 믿어요. 죽은 나사로를 살리려고 하니까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납니다.’라면서 예수님을 말려요.
누가 십자가 원수예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 그리고 ‘예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예수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십자가 원수가 됩니다.
마르다 사건이 공연히 기록된 것이 아니에요. 육의 속성을 정점까지 보여주는 겁니다. 육이 어디까지 따라갑니까? 예수님 말씀을 듣고 기억을 다 해요. 저같이 머리 나쁜 사람은 기억을 다 못하지만 머리 좋은 사람은 다 기억해요. 어떤 사람은 인터넷에 들어가서 자료를 다 정리해서 모아놓아요. 다 모아놓으면 자기 것이 되는 줄 아는데, 헛소고 한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머릿속에 AI 기계 넣으면 돼요. 예를 들어, 유튜브에 제 설교 800개가 올라가 있는데, 1분만에 다 정리해서 여러분의 말로 나오게 할 수도 있어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겁니까? 십자가 사건이 ‘사건’으로 다가오는 것을 놓치고 있죠. 왜냐?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지식밖에 몰라요.
그래서 제가 창세기를 설교하면서 말했어요. 아는 것이 아무 소용없다고. 체험을 백날 해도 소용이 없다니까요. 경험도 소용없어요.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면 뭐해요? 그때뿐인데. 그때는 성령을 못 받아서 그렇다고요? 맞아요. 그럼 성령 받으면 해결돼요? 안 되죠. 왜? 성령께서 인도해 나가야 되잖아요. ‘나는 아니요’ 잖아요.
처음부터 인간은 선악과를 먹었기에, 첫째 아담 속에 있기에 해석하려 하고, 해석 당할 마음은 꿈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해석하는 목적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면, 자기가 왕노릇 하고 싶은 거예요.
아히야 선지자가 옷을 찢어 10조각을 여로보암에서 주니까 냉큼 받았죠. 자기는 그것이 하나님 뜻인 줄 알죠. 선지자가 예언을 그렇게 했으니까 당연히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죠. 그런데 그것이 멸망 당하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의 해석 자체가 하나님이 예언을 주실 때와 그 주신 예언을 받을 때 해석하는 당사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에요. 항상 충돌이 일어납니다.
결국은 여로보암 왕이 해석 당하죠. ‘봐, 너 우상 숭배자잖아. 네가 백성을 생각해서 르호보암 왕에서 가서 백성의 짐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웃기지 마. 결국은 너를 위함이 아니냐.’라고 하나님이 예언을 주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을 해석해 버립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해당 당하면 돼요.
그럼 어떻게 해석 당합니까? 해석하면서 해석 당하면 돼요. 그러면 우리의 설교와 우리의 성경 해석은 엉터리라야 됩니까, 엉터리 아니어야 합니까? 엉터리가 되어야 해요. 목사님들이 복음을 전할 때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제대로 전하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여러분들이 메시아가 되세요.
성령을 주실 수 있고, 그들의 영혼을 지배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세요. 이만희처럼. 그들은 다 지식으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런데 성령은 십자가로 연결되어 있죠. 십자가는 모든 인간을 거부합니다. 부인시켜 버리죠. 십자가 사건 속에 그 사람들을 머무르게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십자가 사건 속으로 그들을 몰아넣죠.
복음을 전했는데 저들이 알아들었어요. 알아듣는 것을 보니까 내가 알게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알게 하셨다는 것을 그들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거죠. 원인과 결과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가 따로 있는 겁니다. 그것이 증인이에요. 증인은 ‘나는 아니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자꾸 오해하는 것은, 내가 목회를 하고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들이 이번에 [개혁 세미나]를 한다고 하는데, 백날 해보세요. 물론 복음 전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지만. 그것 한다고 사람들이 들을 마음 없습니다. 그러면 하지 말까요? 해야죠. 열심히. 왜? 사람의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해야 돼요.
그럼 목회하지 말까요? 열심히 해야 돼요. 왜? 주님의 백성은 주님이 친히 기르시는 것을 보기 위해서. 여기서 반론하는 분이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목사님, 주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해서 우리를 목자로 세우지 않았습니까?” 맞죠. 목사들을 목자로 세웠죠. 목자로 세웠는데 어떤 목자입니까? ‘나는 목자가 아니요.’라는 말을 하라고 목자를 세웠잖아요. 제가 잘못 말했습니까?
나는 참 목자가 아니고 참 목자는 따로 계시죠. 십자가 지신분이 따로 계시잖아요. 그분이 친히 일하고 계시잖아요. 이게 제 말이 아니고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은 병자를 고칠 때 사람들은 누가 고쳤다고 해요? 베드로와 요한이 한 것으로 알죠. 이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하면, ‘지금까지 당신이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고 복음 전한 것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하면 제대로 된 목사라면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성령을 받았다면 “맞습니다. 주께서 알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나오겠지만, 성령 못 받은 사람은 “훌륭한 목사님, 정말 겸손하시네요. 진짜 감사합니다. 목사님 덕분에 제가 복음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할 것이고, 이런 사람은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있음에도 왜 우리가 해석하지 해석 당할 마음이 없는가 하면, 우리가 육신이 있는 한 항상 신 행세를 하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주의 자리에 앉는 거지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을 ‘작은 예수’라고 합니다. 맞는 말이에요.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이기에 ‘작은 예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작은 예수의 특징은 자신을 양자로 여기고 맏아들이 따로 있는데 그분은 예수님이죠.
즉 성도(작은 예수)는 맏아들을 증거하기 위한 양자입니다. 그럼 나는 아들입니까, 아들 아닙니까? 아들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라고 아들로 만들었어요. 그것이 양자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야. 나 하나님의 아들이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러면 십자가는 어디로 가요?
십자가 증거하라고 양자 만들었고, 십자가 증거하라고 그리스도의 지체로 만들었죠.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니까 까불지 마. 나는 말씀대로 잘 살고 있어.’ 이러고 있어요. 성령이 오시게 되면 책망을 받죠? 성령 충만을 받게 되면 더 큰 책망이 오겠죠? 십자가가 눈앞에서 더 밝히 보이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없다 보니 성령도 제멋대로 해석하고, 십자가도 제멋대로 해석해요.
주께서 성령을 주신다면 성령 받은 자는 십자가 앞에서 해석 당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나름대로 말씀을 해석하고 여러 사항들을 해석하지만 결국은 이 해석조차 십자가 앞에서 해석 당하고 십자가 피만을 자랑케 하기 위한 주님의 초치임을 말씀을 통해서 알아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나를 위한 세상이 없었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주님을 위한 세상임을 잊지 않고 사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정석훈'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겨울수련회 1강 갈렙과 레위지파 (0) | 2022.01.14 |
---|---|
2021여름수련회 요약 (0) | 2021.08.03 |
방배동모임2 (0) | 2021.05.29 |
방배동모임1 (0) | 2021.05.29 |
십자가마을 수련회를 다녀와서 (0) | 2021.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