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4장 19절 (충돌지점) 201103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4장 16절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그렇게 되어있지요. 지난번에 예수님하고 누구하고 만났느냐 하면은 악마하고 만났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악마의 만남에서 여기서 악마가 예수님한테 공격한 것은 성경말씀을 가지고 공격했습니다.
성경말씀으로 공격했고 악마는 인간들이 사용하는 그 언어, 언어를 가지고 예수님을 공격했기 때문에 이거는 평소에 악마가 인간들을 지배할 때 뭘로 지배했느냐 하면은 언어로 지배한 거에요. 이게 뭐냐? 언어의 힘입니다.
언어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뭐냐 하면은 양심의 소리의 힘. 양심의 소리의 힘이라는 것은 너 그렇게 살아야 되겠니? 라고 스가랴 3장 1절에서 4절. 여호와 앞에서 악마가 여호수아한테 계속해서 지적하고 욥기 1장에서 계속 지적하는 거에요. 그리고 로마서 8장에서 계속 지적하는 것. 중재하는 거에요.
왜 말씀과 일치되지 못하느냐. 왜 말 따로고 행동 따로냐고 계속 추궁하는 것이 뭐냐 하면은 양심의 소리고 양심의 소리는 뭘로 구성되어 있느냐 하면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어요.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문장으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 양심 언어 문장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태어나면서부터 외부에서 주어진 거에요.
이 사회라는 곳에서. 가정이라는 사회 그리고 학교라는 사회, 교회라는 사회. 외부에서 끊임없이 언어 형식으로 들어와서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게 뭐냐 하면 양심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양심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조폭들도 양심 있잖아요. 조직폭력배들도. 환경에 따라서 그들이 들었던 게 있단 말이죠. 들었던 것이.
예를 들어서 조폭에서의 그 언어를 예를 들게 되면 선배 앞에서는 술을 마실 때 돌아서서 술을 마셔라. 이게 그들의 양심의 소리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냐? 술 취하지 말라에요. 달라요. 그쪽 동네에서 들었던 것은 체제가 이루어집니다.
자, 악마는 인간세계를 갖춤으로써 인간의 세계는 체제를 갖추었다. 인간체제의 궁극적인 죄의 체제가 커진 확정된 체제가 뭐냐 하면은 국가였으며 이건 다니엘에서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짐승이 되는 겁니다. 국가는 뭘로 구성되어 있느냐? 법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법으로. 법이란 언어로 되어있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악마라고 하는 것은 법의 힘, 이 법의 힘이 인간의 맘까지 여기서 마음까지 정리 정돈을 시켜버렸습니다. 정리 정돈을 시켜가지고 이 양심의 소리가 압박을 해야되는 겁니다. 뭐라고? 너 그렇게 살면 안되지. 너 그렇게 살면 안돼. 이렇게 지적을 하는데 너 그렇게 살면 안되지의 여기에 신약성경의 희생자들이 희생당한 자들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세리와 강도 그리고 창기들. 특히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는 얼굴을 못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바리새인은 자기 양심의 소리에 입각해서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도 내고 구제하고 뭐 좋은 거 다 했지요. 그러니까 주일낮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사적인 도덕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된다고 했지요 제가. 사적인, 만남에서 도덕적인 행사를 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우열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상대방에서 압박을 가할 수가 있어요. press를 가하는 거에요. 설교하는 사람과 설교하는 사람이 만나가지고 너 설교 그렇게 하면 안돼 그것과 똑같은 거죠. 너 그렇게 살아서는 안돼라고 압박을 가하는 겁니다. 여기에 세리와 강도, 창기, 이방 사람들, 나그네 이런 사람들이 여기 많은 피해를 봤습니다.
이렇게 너 그렇게 살아서는 안돼라고 했던 이것을 하나에 규합해보면 이거는 뭐냐 하면은 더러운 자이지요. 더러운 계층, 저주받은 계층. 이렇게 규정이 되는 겁니다. 이게 악마의 세계에요. 마태복음 19장에 청년이 한명 나오는데 그냥 청년이 아니고 부자청년이에요. 자, 부자청년이 어릴 때부터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은 어릴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되어있지요.
십계명을 다 지켰을 때 나오는 결과가 뭐냐? 부자. 그러면 이 부자를 무효로 돌리면 십계명 지켰다는 것도 무효가 되어버리잖아요. 부자가 가난하게 되게 되면 십계명 지켰다는 어떤 결과물을 내가 손에 쥘 수가 없는 거에요. 내가 이렇게 부자 된 것은 하나님 착하게 살아서 복받았기 때문에 부자 됐다고 자부해서 그래서 이 부자는 예수님을 찾아온 거에요. 마태복음 19장에서. 그게 뭐냐? 전부 다 양심의 소리요, 양심의 소리는 악마의 소리가 된다 이 말입니다. 언어의 힘이 되죠.
지금까지는 상당히 쉽습니다. 아마 오늘 강의가 지금까지 했던 강남강의에서 가장 난해한 강의가 되지 않을까 미리 엄포를 놓습니다. 미리. 악마가 이렇게 인간세계를 다루었으니까 그 식대로 예수님을 다루었을 때에 여기서 예수님께서 이제 악마와 만났다 헤어지고 활동하지잖아요. 활동에 나서게 되면 이것은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해석이 전개되기 시작해요. 예수님의 해석이.
악마는 뭡니까? 악마의 해석은 이미 여기 차고 넘쳤잖아요. 인간, 국가를 지배했기 때문에. 차고 넘쳤지요. 그러면 이 광야의 만남이 이게 일회적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십자가 갈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려면 여기서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은 충돌을 일으키는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의 활동은 악마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그것을 충돌지점을 만드는 작업, 이게 예수님의 일입니다. 의도적으로 악마의 해석과 충돌되는 지점을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유발시켜 나가는 것이 예수님의 활동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누가복음 4장 16절. 예수님도 말씀이고 악마도 성경말씀 가지고 그 당시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을 때 예수님 십자가 죽게 한 그 유대인들의 힘은 언어의 힘이죠. 그들이 해석한 성경해석의 힘이었습니다. 왜? 그 해석으로 온 민족이 하나로 결집이 되었기 때문에 그래요. 그리고 그 언어는 어디까지 온다고 했어요? 중요한 이야기인데 언어는 바깥에만 돌아다닙니까? 인간의 마음까지 옵니까? 마음까지 오지요.
그게 뭡니까? 양심의 소리라고 했지요. 양심의 소리가 되니까 그들의 마음이 일치단결된 거에요. 그들의 양심. 양심에 입각해서 예수님을 죽이는 겁니다. 양심에 입각해서. 순결한 양심의 소리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여기에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의도적으로 무슨 지점을 의도적으로 만드신 거에요? 충돌지점을 의도적으로 유도하신 거에요. 충돌지점.
예수님과 악마의 광야에서의 충돌지점이 이거는 개인적 사업이라면 개인적 사업을 확대시켜 나가는 겁니다. 전체로 확대시켜나가는 거에요. 그 확대 어디까지 확대해 가느냐? 우리의 양심의 자리가 충돌의 자리로 만드시는 거에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양심. 그것까지. 충돌지점으로 만들어요. 기본적으로 우리의 양심은 누구에 동의하느냐 하면은 악마의 그런 해석에 동의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해야 되는 것이 피조물의 도리라면 도리, 의무라면 그 말씀과 너의 행동이 일치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너 왜 그렇게 살아? 라고 지적질하는 그 악마의 지적에 대해서 우리가 반박이 되지가 않아요. 반박이. 반박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반박할 줄도 모르면서 어딜 가느냐 하면은 천국을 가요. 반박은 반박대로 못하는데 나중에 도착지점은 어디였다? 천국이었다. 천국이었다.
그러면 이 말은 반대로 하면 곧이곧대로 반박을 다 했는데 나중에 와보니까 어디였다? 지옥이었지요. 곧이곧대로 반박을 한다는 그것이 지금 제가 하는 강의 중에 제일 어렵다고 대목이 바로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들어나 봤습니까? 이 어려운 단어를. 변증법적 논리. 변증법적 논리. 내가 혼자 웃었는데 웃는 의도가 있어요.
변증법적 논리라는 게 이게 뭐냐 하면은 보통 정반합이라고 하잖아요. 정반합이라고 하면 너무 어려우니까 이렇게 하면 돼요. 정에서 반대, 반에서 정. 이게 변증법적이에요. 변증법적. 지적받고 회개하고 다시 지적받고 회개하고 이게 변증법이에요. 변증법. 이 변증법보다 더 어려운 단어를 여기에 쓰겠습니다. 할 수 없어요. 오늘 여러분. 특혜입니다.
새롭다와 생소의 차이. 새롭다는 것은 판은 그대로 두고 옛것에 없는 새로움을 그 미지의 계속 다가오는 판 위에다가 놓는 것. 새로운 거에요. 초밥집에 가서 초밥을 먹는데 초밥 세 개 있고 그 원,투, 쓰리와 다른 새로운 네 번째 다섯 번째. 거기 원,투, 쓰리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초밥들을 계속 만들어 낼 때 이게 변증법이에요. 새로운 거에요. 오! 새로운 초밥이다. 먹자. 오! 또 새로운 초밥이네. 먹자. 판은 안 건드려요. 판은 그대로 두는 겁니다.
이걸 악마적 해석 나오면 뭐냐 하면은 옛사람과 새사람의 관계입니다. 옛사람 다음에 새사람 온다. 새롭다. 그러니까 우리는 새사람을 입어야 된다.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변증법적으로 해석을 해요. 이걸 달리하면 악마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이 해석이. 생소하다는 말은 새롭다. 판은 그대로 두고 이 판에 적합한 전에 과거에 없던 것이 채워지는 새롭다라면 생소라고 하는 것은 판을 엎어버리는 거에요. 이 판을.
이 지루한 순종하고 순종 못해서 회개하고 또 회개했는데 영 또 성에 안차. 또 새롭게 또 순종하고. 순종하고 했는데 또 그 말씀 미흡해. 또 회개하고. 이걸 되풀이하는 것. 이거는 새사람을 한다 할 때 옛사람의 없던 옛사람이 모자랐다 여겼던 것을 보충해서 새사람으로 여기는 이 해석. 이 해석이 뭐냐 하면은 역사적 해석. 역사적 논리적인 변증, 변증법적 해석이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변증법적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나왔던 거에요. 옛날부터 나왔던 거에요. 해석은 뭐냐? 무엇을 토대로 하느냐 하면 역사는 흐른다. 역사는 그냥 가는데 다시 말해서 신앙년조는 가는데 갈수록 새사람 되야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변증법이에요. 갈수록 개선되고 진화되는 겁니다. 사람이 과거에 못된 것은 고치고 더욱더 못된 것이 점점 줄어들고 잘된 것만 넘쳐나는 넘쳐나면서 그 시간을 계속 줄곧 이어가는 그것. 그것이 변증법이에요. 역사는 그대로 가니까.
전에 수학 40점 하다가 50점, 70점 이것 변증법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얻어맞았을까요. 정반합, 정반합 이런 식으로 가는 변증법이에요. 그러나 생소한 것은 생뚱맞는 겁니다. 이거는 인간은 악마의 언어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더 낫게 진보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이미 인간이 익히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양심이 그걸 알겠습니까? 모르겠습니까? 양심이 이미 알고 있지요. 그 양심이 소용없게 만드는 생소. 생소함. 그런 양심조차. 양심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이런 거죠. 어디서 양심을 들이내밀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죽은 사람이 좋은 점이 딱 하나 있어요. 욕심이 없어요. 죽었는데 무슨 욕심이 있어요. 죽었는데 깨어나가지고 사장님 보너스 준단다. 죽은 사람은 보너스가 전혀 기쁘지를 않아요. 그 죽은 자는 욕심이 없다는 말을 바꾸겠습니다. 십자가만 알고 다른 것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는 욕심이 없습니다. 같은 말이에요. 같은 말이에요.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역사를 쪼개는 역사 자체를 쪼개버리는 거에요. 예상한 역사는 어디에도 용납하지 않는 것 그게 십자가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이미 악마가 인간 속에 인간이 천국갈 수 있는 방식을 악마가 장착을 다 시켜놓은 거에요. 변증법적으로 정반, 정반, 정반합, 정반합 갈수록 점점 진보하는 그것이 신과 언젠가는 approach 접촉하게 될 것이다라는 아이디어를 인간에게 다 심어줬다 이 말이죠. 따라서 거기에다가 백날 성경 만독, 천독 해도 판이 안 바뀌니까 판이 바뀌지를 않으니까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 이런 식이에요. 오늘 보다 더 나은 내일. 그럼 모레는? 더 나은 내일. 도대체 어디까지 나갈건데? 하늘의 별 딸 거에요? 달을 딸 겁니까? 달 따야 구원받습니까? 별 따야 구원받아요?
인간이 알고 있는 최고 경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가지고 병이 낫는다에요. 그리고 복을 받는다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작 주시는 것은 인간의 최고경지가 아니라 죄사함이에요. 너 죄인 맞잖아. 왜 아닌 척해? 너 죄인 맞으니까 내가 줄 수 있는 전부는 뭐냐? 죄사함이야. 속죄다 이 말이죠.
그럼 네 죄가 뭔 줄 알아? 모르겠는데요. 죄사함을 일단 받아. 죄사함을 일단 받아. 죄사함 받고 보면 뭐가 죄냐 하면 바로 내가 발전하는 이게 바로 나의 판을 깨지 않고 유지하면서 점점 더 내가 질적으로 나아지는 이것이 바로 죄사함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의 진수가 되는 거에요. 죄의 진수가. 참 그동안 교회장사 잘 해먹었지요?
사람들 급박, 협박해가지고 잘 해먹은 거에요. 당신이 사업이 안되고 가정이 우환이 있는 것은 당신이 나쁜 짓을 해서 그렇다는 거에요. 저 부자된 사람보다 진보가 덜 돼서 그렇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진보를 노려야죠. 성경필사를 하든지 무슨 대책이 새벽기도 나오든지 진보를 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움을 준다는 새로움.
또 어려운 단어 나와서 죄송한데 할 수 없어요. 새로움과 생소의 차이점. 그다음에 변증법적. 두 번째 어려운 것은 새로움과 생소의 차이. 세 번째는 이거에요. 새로움을 버리는 새로운 방식. 새로움은 사람들이 너무도 귀해서 그거는 귀한 자리에 딱 금고에 모셔놔요. 황금불상 이런 거. 집에 만약에 로또가 당첨됐다. 로또 50억 이런 거. 하여튼 새롭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반갑다 이거거든요. 더러운 오물을 새롭다 안하잖아요.
새롭다하는 것은 항상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는 그 무엇이에요. 새로운 것은 고이 간직하잖아요. 내가 나름대로의 고이 간직하고 싶은 양심의 소리, 다시 말해서 악마의 소리죠. 나를 지적하는 악마의 소리 이것을 통째로 버릴 수 있는 새로운 방식. 새로움은 족족 다 버리는 그런 새로운 방식. 어떻습니까? 이거 생소하지 않습니까?
귀하게 여긴 것을 오히려 귀하지 않게 볼 수 있는 안목. 참 그 정도 자신감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런 자신감. 처음 적었던 것이 변증법. 두번째가 뭐라고 했습니까? 새로움과 생소의 차이. 세번째는 새로움을 버리는 새로움. 이 세가지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흔들리지 않는 나에요. 흔들리지 않는 나. ‘흔들리지 않는 나’.
그렇다면 새로운 방식은 뭐냐 하면은 흔들리지 않는 나를 흔들어 버리는 방식이에요. 이게. 이걸 흔드는 거에요. “흔들리는~~” 뭐 그런 노래 있지요. 나 자신을 흔들어버리는 거에요. 나 자신을. 무당한테 가서 흔드는 그런 방법은 나는 모르겠는데. 나 자신을 고정화시키지 않는 방식이에요. 그러면 나 자신을 고정화시키지 않으면 고정적인 것은 누구만 고정이겠어요? 주님이 만든 충돌지점이 고정적이죠. 충돌지점. 왜? 주님은 활동하고 있으니까. 주님은 노시는 게 아니잖아요.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은 단독적으로 예수님과 악마가 만났다. 이해되시죠? 만났잖아요. 만남이 개인적인 만남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확대를 시켜요. 예수님의 해석과 악마의 해석이 대립되었다는 그 충돌되었다는 그 사실을 예수님이 활동한 곳마다 악마의 해석은 이렇게 해서 잘못되었어라고 드러내는 충돌지점을 유발시키는 식으로 주님께서는 공생애를 이어나가신 거에요.
그 충돌의 마지막 충돌은 뭡니까? 너는 너 갈 길을 나는 내 갈 길을. 그걸 달리하면 나는 하늘로 너희들은 땅에 그냥 있어라에요. 주님이 하늘로 감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가장 지독한 욕, 정말 너무나 악하고 악랄한 욕이 있다는 게 뭐냐 하면은 땅에서 잘 먹고 잘 살아라. 예수님 없는 곳에서 호강하고 살아라. 이게 굉장히 큰 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불신자 만나면 욕설을 하세요. 욕설을 할 때 다른 거 다 빼고 너무 기니까 빼고 그저 행복하세요 이러면 되는 거에요. 이 땅에서 행복하세요 그리고 갈 때는 그냥 가지 말고 잘 풀리는 거. 휴지 잘 풀리는 집 있잖아요. 그거 들고 가가지고 행복하소서. 건강하고 아이 잘 낳고 잘 키우고 행복하게 목회성공하시고 잘 계시기 바랍니다. 이것만큼 치욕스런 욕설이 없어요. 왜? 땅에 미련을 두고 있고 땅에 발목 잡혔거든요.
내가 양심에서 하는 해석에 자기가 발목이 잡혔어요. 고정적인 나를 잘되게 해주겠다는 그 유혹에 내가 발을 뺄 수가 없어요. 발을 뺄 수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우상이니까. 고정적인 내가 우상이니까. 세상은 흔들려도 나는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어느 가정교회가면 이런 거 하지요. 딸이나 아들이나 엄마 아빠를 괴롭혀도 엄마는 흔들려서는 안된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게 잘못이에요. 딸하고 아들하고 흔들리면 엄마가 더 흔들려버려요. 같이 흔들어버려요.
악마의 해석은 악마가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은 악마의 해석하지 않고 다 너를 위한거다. 네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하기 위해서 내가 이 말씀 전한다. 성경말씀 있잖아. 네가 행복하고 잘 되기 위한 말씀이야. 이게 악마의 소리에요. 그럼 우리는 넙죽 받지요. 왜? 모든 게 달라져도 모든 게 변해도 한결같아야 되고 영원해야 되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을 이미 악마가 인간 자아에 그런 구조로 이미 형성화시켜놨어요. 그게 선악구조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게 된 이유도 유혹받은 이유도 내가 영원한 신이 되기 위해, 내가 영원한 존재가 되기 위해 선악과 따먹은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는 영원한 존재되면 안돼라고 해서 추방한 거에요.
따라서 창세기 3장에서 굉장히 난해하지만 중요한 게 뭐냐? 영원함이란 오래 사는 게 영원한 게 아니고 에덴동산에서 살면 영원함이고 바깥에서 영원히 살면 영원함이 아니다. 이런 새로운 해석을 하나님이 해석을 내린 거에요. 지옥에서 사람이 죽어요? 안 죽어요? 지옥의 형벌은 영원함입니다. 영생 얻었네. 좋겠네. 지옥에서 영생 얻었네. 아니지요. 장소가 문제에요. 장소가. 생명이 있는 곳에서 영원한 것은 영원함이고 그렇지 않는 것은 그걸 생명의 반대말 저주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시간은 롤러처럼 전부다 돌돌 말아가지고 주님 앞에 나가면 시간은 사라져요. 시간 자체가 사라진다고요. 시간은 이 땅에 있을 때 시간이 흐르지요. 대구강의에서 이야기했지만 시간의 모든 흐름은 어디서 다 환원되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품속으로 다 와버려요.
애들 문방구에 파는 거 있잖아요. 호루라기 훅 불면 긴 종이 줄기가 쭉 나갔다가 도로록 말려가지고 다시 돌아오는 거 있지요. 시간이 그런 거에요.
시간이 나왔던 곳에서 다시 도로 돌아온다니까요.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역사였다 이 말입니다. 그 역사의 완료가 되었으니까 예수님이 도로 거두어들이시는 거에요. 그래서 옛날의 시간은 뭐냐? 구약의 시간은 제사지낼 때 제사가 정기적으로 시간 따라서 타이밍 맞춰서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신약에 히브리서에 보면 제사가 몇 번입니까? 단번에. 완료가 되어버린 거에요. 완료. 단번으로 효과 보는 겁니다. 단 한번으로 효과 보는 거에요.
주님은 한번으로 죄사함 주겠다고 이야기하고 우리인간들은 악마가 심어준 양심의 소리 때문에 보다 더 나은 내일을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고 바로 이 땅에서 살려면 이럴 수밖에 없다는 그게 바로 죄 아니고 뭡니까? 이게 죄거든요. 죄를 더욱 더 죄에서 못 벗어나게 죄에 박혀서 죄에 꼼짝달싹 못하게 죄에 못 벗어나도록 계속해서 성경말씀을 계속 알려주는 곳이 어디냐? 교회가 그렇게 되어있어요.
질색을 할 거 같아요. 질색을. 맨날 새로운 해석, 새로운 해석. 새로운 해석 내봐야 그거는 판은 그대로야 판은. 나 너 잘되라고 하는 새로운 해석. 들어보니까 기분 좋지만 만약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목사님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아닌 거 같아요. 그럼 아니면 뭔데? 옛사람과 새사람은 대결구조 아니에요? 너 그거 어디서 들었어요?
옛사람과 새사람은 대결구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새사람 나오니까 대결구조로 보지 않고 옛사람 그 다음에 새사람인줄 알고 있어요. 이미 지난간 것. 지나간 게 아니에요. 우리의 마음은 악마와 예수님과의 충돌해서 늘 충돌할 때마다 승리한다는 것을 되풀이 보여주는 하나의 영화 스크린이에요. 영화 상영관이에요. 우리 마음이. 현재 우리 마음이. 죽을 때까지 이 마음 계속 가야돼요. 옛사람 있어야 돼요.
네 번째 어려운 것. 점점 더 어려운 것. 옛사람이 현실입니다. 새사람은 현실이 아닙니다. 옛사람이 현실이에요. 옛사람이. 기억과 추억이 현실이에요. 기억과 추억이. 여러분이 공부했던 초등학교 가보세요. 초등학교 오랜만에 차타고 가던지 걸어서 옛날 추억 탐사한다고 한번 가보게 되면 그래 내가 초등학교 때 다 망상이었어. 이렇게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이 철봉에서 뛰어놀았고 내가 여기서 평행봉하다 떨어져가지고 내가 이주동안 기부스했고 또 6학년 때 짝궁 옆사람한테 서로 안 보여줄라고 싸우고 했던 것. 전부다 새록새록 기억이 나지요. 그 기록을 한번 모아보는 거에요. 기억을 다 모아보세요. 다 모아보면 그게 뭡니까? 망상이에요? 허상이에요? 있지도 않은 일입니까? 유일하게 있는 유일하게 내가 체험한 현실이에요. 현실은 옛사람에게만 현실이 있는 겁니다. 새사람한테는 현실이 없어요.
그러면 새사람은 뭡니까? 현실을 깨는 그 작업 그 자체. 현실을 깨는 작업 그 자체. 오늘 어렵다고 했지요. 자, 현실은 뭐냐? 두부입니다. 그럼 새사람은 뭐냐? 두부는 그대로 있어요. 두부를 쪼개고 하는 칼날, 그게 새사람이에요. 새사람을 붙들어버리면 안돼요. 왜? 새사람을 붙들어버리면 내일되면 추억이 되어버려요. 이게 현실이 되어버린다고.
내가 오년 전에 은혜 받았는데. 그 기도원에 한번 가보자. 그 기도원에서 은혜 받았는데 내가 이 자리에서 울어가지고 침이 흥건히 있었는데. 그래 그때 내가 은혜 받았어. 지금 그때처럼 은혜 한번 받았으면 좋겠다. 이 말은 뭡니까? 정. 은혜 받았다 정. 세상살이 한다고 떨어졌다 반. 다시 그 때보다 더 큰 은혜 받았다 합. 이게 아까 제가 이야기한 무슨 법이라고 했습니까? 변증법. 이건 나의 역사가 살아있잖아요.
우리의 현실은 전부 다 옛사람의 안목을 봤을 때 나타나는 모든 것이 현실입니다. 모든 것이 현실이에요. 만약에 한 오년만에 만나는 사촌 형님이 있다고 합시다. 오랜만에 누구 장례식이 있어가지고 오랜만에 그런 일 있어야 또 친척들 그때 보지 못 보거든요. 만났다고 칩시다. 사촌이 “어이 동생 오랜만이다. 오년만에 오랜만이네.” “누구시지요?” “얘 봐라. 현실감 떨어졌네. 너 사촌 형이잖아.” “망상입니다.” “너 요새 도 닦고 있나?”
망상이 아니에요. 옛사람의 현실이에요. 옛사람의 현실이라니까. 새사람은 찾지 마세요. 옛사람을 자르는 거에요. 자르는 것. 그러니까 새사람은 사실은 새사람은 뭐냐? 새사람은 이게 뭐냐 하면은 주의 해석이고 주의 일입니다. 새사람은 주님이 일으킨 충돌지점이에요. 그 충돌지점이 내 양심 안까지 들어와가지고 나의 옛사람을 매일같이 지적해야 됩니다.
네 해석은 악마의 해석이야. 내가 광야에서 악마한테 당했어. 너도 똑같이 지금 당하고 있는걸 알고 내가 그걸 그 현실을 허상으로 쪼개기 위해서 내가 너한테 투입했다. 너 좋아라 하는게 아니고 내가 살아있다. 네가 살아있는게 아니고 내가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네 안에 새로운 잣대, 새로운 기준, 새로운 해석이 들어온 겁니다.
주일날 설교대로 하면 새로운 1미터. 새로운 1미터. 죄사함이라는. 얼굴은 다르고 몸은 달라도 살아온 나이는 다 달라도 성도라면 동일하게 들어있는 게 뭐라고 했습니까? 죄사함. 그래서 성도의 만남은 무엇을 교환한다? 선물 교환할 때? 죄사함을 교환하는 거에요. 이거 한번 실습해보세요. 크리스마스 전날 모여가지고 너 선물 뭐 가지고 왔니? 이거 있지 죄사함. 쫓겨납니다. 에이 돈 쓰기 싫어가지고. 죄사함.
현실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어야 돼요. 옛날에 크리스마스 때 네가 홈쇼핑해가지고 인삼 받았으면 연결되거든요. 올해는 네가 나한테 그 정도 가격의 뭘 사줘야 되는데 죄사함~ 이러면 그거는 말이 안되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못 벗어납니까? 못 벗어나요. 두부 쪼개듯이 쪼갰던 것도 내일되면 하나의 나의 추억이 돼요. 그게 나의 옛사람으로 현실로 포함이 돼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뭐 5년 전에 구원받았으니까 이제는 나는 뭐 주께서 알아서 주님 나는 아직 괜찮습니다 이런 거 없어요. 그 자체가 변증법이고 그게 역사판이고. 새롭다 새롭다 새로운 것은 왜 그렇게 찾는데. 새로운 것은 잔뜩 모아놨는데 돌아보면 다 구닥다리. 한물간 것. 그 새로움을 새로움이라고 자랑질할려고 자기는 죽은 자, 기어이 죽은 자 안되고 오늘도 버젓이 살아있는 고정적인 살아있는 내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주님께서 끊임없이 성도로 하여금 흔들어버립니다. 흔드시는 이유는 우리 쪽에 흔들어 줘야 고정된 주님이 가리워지지 않아요. 맨날 뭘 할 때 글씨 쓸 때 누가 썼느냐? 내가. 밥을 먹어도 내가. 그럼 따지고 보면 밥 먹을 때 나하고 글씨 쓸 때 내가 딴 사람이에요. 왜?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그래요. 끊임없이 변화하고 흔들리는 겁니다.
이걸 물리학에서는 이걸 ‘브라운현상’이라고 해요. 브라운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분자들이 쉬지 않고 계속해서 흔들리는 것을 브라운현상이라고 해요. 분자만 그래요? 전자도 그렇죠. 전자 모든 입자 파동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거에요. 끊임없이. 그래서 목사님과 나의 만남은 입자와 입자의 만남, 상호파동이다. 두 개의 파가 겹친 거에요. 아시겠어요? 두 개의 파들이.
다시 말해서 고정된 내가 고정된 너를 만나는게 아니고 언제 딴소리할지 모르는 너를 언제 딴소리할지 모르는 내가 만난 것은 바로 성도들끼리 만난 것은 뭘 내어놓는다? 죄사함을 내놓는 거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그 현장이 바로 악마의 해석과 성도의 해석이 차이 나는 것을 보여주는 충돌지점이 되는 거에요. 충돌지점.
그래서 만날 때는 서로의 과거, 다른 말로 서로의 현실을 사정보지 않고 공격질을 해대야 되는 거에요. 공격하는 거에요. 얼굴 꼬라지하고는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이래도 죄사함 받았어 일단 콜 받고. 이래도 죄사함 받았어 하고는 그 다음부터는 어느 미장원에서 했느냐 또 싸워대고 그래도 나는 구원받았고 콜. 그게 즐거운 시간입니다.
서로 자랑질한다고 하지 말고 끊임없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내 양심 속에 있는 고정된 ‘나’라는 말은 고정된 해석체계를 내가 꽉 쥐고 있다는 뜻이거든요. “이것은 내 양심이야”라고 변하는 양심의 소리가 있어요. 그걸 예수님의 해석이 들어가 버리면 이것이 바로 변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 예가 바로 17절에 나오지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이게 어디 나오는 말씀이냐 하면은 이사야 61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자, 누가복음에서는 신이 임한 게 아니고 무엇이 임했습니까? 주의 성령이 임했지요. 여기는 구약에서는 주의 신이 임한 거에요. 신이 임한 것과 성령이 임한 것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은 성령은 안에 십자가의 완성의 의미가 포함되면 성령이고 아직 미완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면 성신입니다.
그러니까 다시하게 되면 주 여호와의 미완성, 완성을 향해 질주하는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을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를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것을 여기다가 적용시켜 봅시다. 적용시켜 보는 겁니다.
자, 두부 들어갑니다. 두부. 옛사람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여기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합니까? 자, 우리가 살아온 현실적 체험에서 가난한 자는 상대적으로 부자보다 못한 사람. 쉽게 말해서 돈이 없는 사람. 남 세끼 먹을 때 두끼 먹는 사람. 남 두끼 먹을 때 한끼 먹는 사람. 남 한끼 먹을 때 하나도 못 먹는 사람. 그 사람이 상대적인 가난한 사람이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가난한 사람이라고 이렇게 개념을 이렇게 잡는 것은 누구의 개념이냐 하면은 악마가 인간을 지배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하나님이 도와줘서 밥 먹고 살게 하라고 하나님의 해석을 그렇게 해석한 거에요. 변하지 않는 우리의 사람이 옛사람이거든요. 변하지 않는 양심의 소리.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그 부자청년이 했던 그러한 안목. 그게 그대로 우리한테는 같은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이라고 한다면 이건 누구나 동의할 수밖에 없는 공통적인 양심의 소리가 있다고요.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개인으로 태어났으나 가족이라는 집단의 언어의 폭력, 언어의 시달림을 받게 돼요. 그러면 인간의 마음은 자아라고 하는 것은 날라 오는 그들의 요구사항, 언어를 통해서 주어지는 요구사항을 내가 들어주면서 자아가 구체적으로 구체화 형성되는 겁니다. 그러나 가정이 문제고 학교는 더 많은 지식이 필요하고 지식을 요구하게 되고 3x8 그거 모르면 유급돼요. 3x8=24도 모르고.
사회 나가면 영어 못하고 컴퓨터 못하면 엑셀 못하고 이거 못하면 회사에서 쫓겨나는 거에요. 쫓겨난다고요. 그러니까 새로운 것을 계속 요구함으로서 우리는 뭘 익히느냐 하면은 기존의 사회가 하는 것이 진리다 이거에요. 다른 말로 하면 나를 밥 먹고 살게 만드는 것이 진리고 그게 현실이다라는 겁니다. 그게 두부 중에 순두부에요. 순두부라고요. 그것을 가지고 악마가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한 겁니다.
사람들 봐라. 현실해석 어떻게 하는가? 성경에 봐라. 뛰어내려라. 뛰어내리면 천사가 와서 받들어 안 다치게 한다. 뭐를 더 요상한 해석을 덧붙일 수 있으리요. 해석 안되지요? 말씀 그대로 하자 이 말이죠. 뛰어내리면 와서 받아준다. 그게 순두부. 그게 현실. 우리 마음으로 나온 해석 곧 악마의 해석. 악마의 해석으로 인간의 언어 안에서 악마로부터 우리는 꼼짝마라는 식으로 나의 갖고 있는 진리 체제에 굴복되어 있어요. 단단히 매여 있습니다.
만약에 여기서 잘못 해석하면 우리는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어 가지고 죽어서도 지옥갈 수 있다는 그러한 공포감을 조성받게 됩니다. 양심의 소리에 거스르면 우리는 사람도 아닌 것처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살았거든요. 사두개인들이.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요. 아무리 막돼먹은 사람이라도 심지어 화성연쇄살인사건 했던 그 사람도 이제 와서 하는 말이 유족들에게 미안하고 감사하고 나 대신 억울함 받은 사람에게 미안하다 이런다고요.
그러면 그 사람이 인간된 거에요? 아니면 변증법입니까? 변증법이죠. 어떤 인간도 반성하고 주님 받아들이면 구원받을 수 있다. 이거는 성당이나 교회에서 늘상 하는 소리잖아요. 제가 낮설교할 때 이런 소리했거든요. 목사님 그렇게 윤리, 도덕을 버리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할 때 제가 뭐라고 했어요? 우리가 위험할 군번입니까? 우리가? 태어난 게 위험해요.
우리가 태어난 것 자체가, 아담에게 태어난 것 자체가 위험이란 말을 나한테 붙이지 마라! 어디 뭐 위험할 게 있어야 처음부터 위험한데 뭘 새삼스럽게 위험해요. 죄사함이 없는게 위험한 겁니다. 죄사함이 없는 게 위험해요. 주님의 해석이 안 들어온 게 위험해요. 성신을 아직도 성신 기다리는 게 위험해요. 성신은 기다리는 것이고 성령은 이미 온 거에요. 온 사람에게는 성령이 되고 아직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성신일 뿐이에요.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줬으면 완료가 완료값을 해야 되지. 주님은 완료로 보내줬는데 받는 우리가 미완료입니다 이러면 이건 뭐가 되어버립니까. 주의 가오가 어떻게 돼요. 주님의 체면이 뭐가 됩니까. 이미 더 이상 필요한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한걸 줬는데 죄사함을 줬잖아요. 이미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줬다 이 말이죠. 주님의 해석을 줬잖아요. 주님의 해석을. 순두부를 칼로 자르는 해석을 줬잖아요. 내안에 예수님의 충돌지점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우리 자신을 똑바로 살아야 돼 할 필요 없어요. 똑바로 살면 안돼. 우리자신을 흔들어야 돼요. 똑바로 산다의 반대말이 흔들어 에요. 어느 CF 선전에 보니까 그냥 먹지 말고 흔들어 먹으라고 하는. 우리는 똑바로 살면 우상 돼요. 흔들어버리면 똑바로 계신 십자가만 보입니다. 나를 붙잡을려고 하지 마세요. 어떤 과학자가 독수리 머리에다가 참 그 독수리 애먹었어요. 독수리 머리에다가 카메라를 달았어요. 달고 아프리카에서 대서양 건너서 미국까지 건너오게 만들었어요.
그러면 그 독수리를 잡아가지고 뭐가 있겠어요? 안에 촬영한 게 있지요. 그걸 동물의 왕국같이 촬영한 겁니다. 독수리가 날 때 얼마나 신나게 나는가 라고 TV에 방송국에 팔아먹어가지고 제가 봤거든요. 독수리가 날 때 얼마나 신나겠는가? 보니까 멀미났어요. 너무 흔들려.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세상에 이런 자갈밭의 전세버스도 이럴 수는 없어요. 못합니다. 탈수가 없어요 이게. 천사들 애먹었겠어요. 옛날 동화책의 천사들. 멀미나겠어요 전부 다. 기류가 있으니까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흔들흔들 흔들흔들. 재미 하나도 없어요. 재미 하나도 없어.
이 땅에 재미없어요. 아무리 반듯하게 살고 싶어도 주님께서 사건 일으키게 되면 꼴아박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나는 꼭 무엇이고 싶다하는 그 고정적인 것은 이거는 마귀의 소리라고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해보겠습니다. 이사야에서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경제적 어려움은 다 천당가는 거에요? 아니지요. 이사야에서는 바로 이스라엘 약속의 땅. 약속의 땅은 가난한 자가 없게 하는 땅이 약속의 땅이에요. 가난한 자가 없는 땅이 약속의 땅인데 거기서 가난이 생겼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문제 있다는 이야기고 이 이스라엘을 갈아엎는 분이 어떤 분이 오시는데 그분은 성신으로 오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거에요. 가난한 자에게. 그러니까 이것을 현실적으로 설명해버리면 전부 다 누구 이야기냐? 이스라엘 이야기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야기가 뭡니까? 그 다음의 이야기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며”. 그 이야기는 10분 쉬고 합시다.
강남-누가복음 4장 19절 (충돌지점) 201103b-이근호 목사
세 번째 강의 어렵게 하지 않겠습니다. 세 번째 강의가 뭐냐 하면은 바로 마음이 상한 자라고 되어 있는데 이건 앞에 것과 연결되어 있어요. 약속의 땅에서 가난하게 되게 되면 마음이 상한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돈이 없는 거에요. 왜 하나님은 함께 계시다는데 저 사람은 잘 사는데 나는 왜 못 사느냐? 그 당시의 약속의 땅, 약속의 땅의 있는 이스라엘을 대상할 때에 고아와 과부들이 누구한테 하소연하겠어요?
하늘을 향하여 하소연을 하게 되면 출애굽기 22장에서 자비로운 하나님께서 가진 자의 것을 뺏어가지고 너희에게 줄게. 그게 뭐냐? 50년이에요. 4x4+1 희년. 누구야? 내 것 가지고 행세하는 인간 누구야? 이삭 줍는 룻에게 주는 것처럼 네가 자식이 없어? 걱정하지 마. 너 가족의 시동생이 있잖아. 어? 시동생이 다 죽었다. 그렇다면 걱정하지 마. 너한테 유력한 친척 보아스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해주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이게 뭐냐 하면은 보편성입니다. ‘보편성’.
보편성은 특수성을 드러내야 보편성이에요. 누구만 드러냅니까? 기름부은 자만 드러내기 위한 그분의 공로로만 형성되는 나라. 그게 천국. 명칭도 이름이 무슨 나라냐? 아들의 나라. ‘아들의 나라’.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기름부음이 되셔서 보편성을 이루는 거에요. 보편성은 본인들이 특수성이 아닌 본인들이 특수성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를 증거하든지 자기를 남한테 내세울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보편성 중에 일부이기 때문에.
그걸 대구강의에서는 이걸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이걸 이렇게 했지요. 1/n. 우리는 다 주님의 1/n 이에요. 눈이 눈보고 발이 발보고 쓸데없다 소리 못한다고 했지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그 표현 자체가 기존 교회에서 쓸 때 못마땅한 거에요 저는. 그리스도의 몸 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서 그냥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하자는 말이죠. 왜냐하면 몸이 그리스도 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해도 상관없는 거에요.
그러나 그리스도 몸이라고 할 때는 그리스도라고 할 때는 특수적인 그리스도를 말하는 게 아니고 보편적 그리스도를 가지고 그리스도라고 제가 말씀드리는 겁니다. 보편적인 것. 1/n. 그러니까 교인 수 이런 거는 신경 쓸 필요 있다? 없다? 별로 없지요. 전부 다 그리스도라면 그리스도 하나, 둘 이럴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몸이 왔구나 이러면 되지. 그리스도의 1/n x 1,2,3 이 왔구나 이러지 말란 말이죠. 그냥 그리스도가 왔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마음이 상했다는 말은 앞에 가난한 자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돈이 없다면 그 다음에 빚이 있겠지요. 빚이 있다면 어디 잡혀가겠습니까? 포로 잡히겠지요. 노예로 팔리겠지요. 노예로 팔리는 거에요. 노예로 팔리면 이게 뭐냐? 포로된 자에요. 그리고 갇힌 자. 그게 뭐냐 하면은 바로 어디서 풀려납니까? 희년에서. 희년에서 풀려나오는 거에요. 자, 다시 봅시다. 여기 누가복음 4장 봅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여기 눈 먼 자까지 있는데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여기 무슨 때입니까? “주의 은혜의 때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시면서 그 은혜의 때가 500년 후입니까? 2000년 후에요? 언제라고 합니까? 바로 이 순간. 바로 여기에. 이걸 가지고 21절에 보면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게 하였느니라.
지금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여기. 지금은 시간의 완료, 여기는 공간의 완료. 여기. 지금. 예수님이 이야기했거든요. 아까 첫째시간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어떻게 된다? 비현실이죠. 우리는 비현실이라는 단어에 즐거워해야 됩니다. 너는 들어나 봤나? 너희들은 현실에 속했고 우리는 비현실에 속했다. 어디 현실이 깝죽대고 비현실에 들어올라고 노력을 해. 뭐가 와야 돼요? 완료가 와야 돼요. 하나님의 성신도 안되고 성령을 받아야 돼요.
완료가 되게 되면 현실에서 어디로 옮긴다? 비현실로 옮기는 거에요. 비현실은 누가 기대하고 있습니까? 1/n 이니까 누가 기대하겠어요? 1 되시는 분, 주님이 기대하고 있는 거에요.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일 턱이 있어요. 비현실인데. 안 보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이런 말씀 있어요. “네가 보지 않고 믿으니 복이 있도다” 했잖아요.
이 말은 보는 것 믿는 인간은 쪼다다. 나 그거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겠다 이 말이에요. 예배당 큰 거 교인 수 많이 모이는 것 부흥됐다는 것 헌금 많이 나오는 것 이걸 가지고 하나님의 기적이요 은혜라고 여기는 사람한테는 너랑 안 논다 이 말입니다. 왜? 그거는 현실이니까 우리의 추억이니까요. 우리의 기억 속에 있으니까.
살아온 신앙의 년조, 교회라는 연륜 속에 이미 체험을 했잖아요. 교회 다니면서 여러분 어떤 체험했어요? 한 40년 50년 다녀보세요. 온갖 체험 다합니다. 저도 어릴 때 젊을 때 20대 때 교회 다녔는데 거기에 대구에서 다녔거든요. 거기에 서울에서 오는 예쁘장한 아가씨가 하나 왔는데 온 동네 은혜 받아서 그때 대구에서 서울말 쓰면 먹히거든요. 서울말 써가지고 했어요? 이렇게 해가지고 나중에 돈 다 빌려가지고 서울로 튀어버렸어. 돈 빌려가지고.
그게 바로 현실이에요. 그게 바로 현실이에요 현실. 그게 현실이라고요. 그 교회 당회장 사모님 돌아가시고 난 뒤에 그 뒤에 유력한 권사, 권사도 그냥 권사 아니지요. 항상 예쁜 권사. 항상 예쁜 권사 만나서 그 목사하고 결혼해가지고 아파트 다 빼먹고 완전 나중에 목사 아프니까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가고 말았어요. 그런 현실. 그런 현실.
그런데 뭐 새롭게 됐다고요? 참 나. 옛사람하고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요 옛사람하고 새사람 싸운다 하잖아요. 그건 거짓말이에요. 옛사람과 옛사람의 대결이에요. 옛사람과 옛사람의 대결. 새로움이라는 판 자체가 이거는 생소해서 악마가 준 언어로 설명이 안돼야 돼요. 모든 것은 언어 안에 담겨 있기 때문에 언어로 설명이 된다면 설득이 된다면 이건 문제 있는 거에요. 설명이 안돼요. 이건 인간의 해석으로 설명이 안돼요.
주님의 십자가로만 설명될 수밖에 없는 것. 그거는 뭐냐 하면은 가난하냐? 예 가난합니다. 죽어라. 십자가 믿고 죽어라. 이게 은혜의 때에요. 이게 설명이 됩니까? 네가 옥에 갇혀서 갇혔다가 복음 믿고 나 있는 비현실로 와. 이게 자유에요. 이게 자유라고요. 네가 장님이야? 눈감고 예수님 영접해. 그러면 너는 더 이상 아픔 없는 세계에 도달해 있을거야 죽으면. 이게 복음이에요 이게. 이게 은혜의 때에요.
구약에서의 은혜의 때라고 하는 것은 구약은 미완료이기 때문에 그 토대가 항상 인간들이 알고 있는 시공간이에요. 따라서 49년 다음에 50년. 그것만 생각하는 거에요.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이야기했잖아요. 몇 번 용서하면 됩니까? 7번 용서하면 됩니까? 카운트 1,2,3,4,5,6,7. 카운트를 해요. 카운트되는 것, 아까 여러분들이 첫째시간 공부했으니까 한번 봅시다.
1,2,3,4,5,6. 1번용서, 2번용서, 3번용서, 4번용서, 5번용서, 6번용서, 7번용서 했습니다. 여기서 뭐가 흘러갔습니다. 뭐가 흘러갔죠? 시간판. 이 자체가 베드로의 해석의 한계입니다. 7번할 때를 자기가 고대하고 있는 거에요. 카운트하는 거에요. 두번만 용서하면 되겠지. 주님께서 약을 올려버렸어요. 7번의 7번. 아마 악바리 같은 베드로가 7번의 70번, 490번을 하게 되면 주님 다 했습니다 하면 뭐라고 하겠어요? 7번의 700번.
판 자체를 엎어버려요. 판 자체를. 판 자체를 엎어버리면 판 자체를 엎을 때에 뭐로 사용했느냐 하면은 이 현실판, 순두부 현실판에서 가장 저주 받았다고 약속의 그 땅에서 소문난 자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누구냐? 세리와 창기와 강도였지요.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판을 엎어버린 거에요.
자, 한번 봅시다. 이게 예수님이 해석을 하실 때 그러한 역설을 개입하셨는데요. 제가 대구강의에서도 했어요. 없다고 할 때에 우리 이 세상에서는 0을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없다고 할 때는 제일 있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있음 중에서 있으나마나 제일 허접한 것을 없다로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하는 거에요. 전부 다 높은 곳을 추구하지요. 전부 다 높은 곳을 추구한다고요. 높은 곳을 추구하는 것은 다 어른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8장 대구강의에서 했잖아요. 제자들끼리 누가 높으냐 했지요. 주님께서는 이걸 지적하면서 제일 낮은 쪽을 선택해요. 그게 누구냐 하면은 너희가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 이 비슷한 이야기가 저번에 수련회할 때도 이야기했는데 없는 데서 하나님께서 배불리 먹여주는 것은 만나가 농사지은 겁니까? 답변해보세요. 만나가 농사지은 겁니까? 아니지요.
그럼 만나 어디서 왔어요? 만나서 어디서 왔습니까? 없음에서 왔지요. 없음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은 장차 올 선지자가 오시면 모세처럼 없는데서 만나를 내린다고 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없음을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은 어린아이 도시락으로 표현한 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도시락이 있네 라고 표현한다면 주님의 해석을 전혀 이해 못하는 거에요. 도시락이 있는게 아니고 도시락은 없는 거에요. 도시락은 없는 거에요.
물리적으로 말해서 이게 바늘이라면 얼마나 조용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바늘을 딱 떨어트려 보면 그러면 바늘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하다가 돼요. 그냥 조용~~~하다 이것보다도 바늘을 떨어트렸는데 불구하고 바늘 소리가 들릴 거 같으면 조용하다가 제대로 해석이 되겠지요.
주께서는 못난 놈, 가장 찌질이. 아이고 저거는 죽으면 지옥 갈 것이라고 했던 거지. 문둥병자. 문둥병자는 저주 받은 사람이니까. 이런 사람들 그런 사람 통해서 소위 가진 자, 잘난 자, 율법 해석자를 엎어버립니다. 그래서 이 낮은 자, 가난한 자의 극단이 뭐냐 하면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그냥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공개적으로 나를 죽여라 하는 사건을 크게 이벤트를 만들어버려요.
주목을 받을 만큼 주목을 받기 위해서 함부로 죽지 않아요. 높은데서 떠밀려고 해도 아~ 가만있어. 아직 때가 안됐어. 피해가 버려요. 동생들이 와서 지금쯤 예수님 드러내야 한다. 아니야 때가 안됐어. 초막절날 요한복음 7장에 나갈려고 할 때 아냐 아직 때가 안됐어 이러면서 또 이야기한다고요. 그래서 자꾸 욕조의 홀같은 거에요.
모든 물이 한 구멍으로 빠지듯이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것에는 어떤 원인이 되는 하나의 문제가 있다는 거에요. 하나의 문제. 그 문제점을 쪄서 나오는 해석이 온 현실을 부정하는 그러한 해석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그 욕조구멍을 빠져나오시고 그리고 성령이 올 때도 그 욕조구멍을 통해서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령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 두 개의 안목을 가지도록 하는 겁니다. 하나는 옛사람의 안목, 하나는 새사람 안목. 그런데 남들 보기에는 그들하고 사는 것과 전혀 다를 것 없는 밥 먹고 살고 평범하기 짝이 없고 그런 겁니다.
자, 그다음에 59+1 희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 다음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더 중요한 게 남았어요. 아주 중요한 게 남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지금 누가복음에 보면은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우리 마음에 오게 되면 이렇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보게 한다고 했지요. 눈 먼 자의 눈을 보게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자, 그렇게 되게 되면 그러면 묻기를 우리는 구원받았습니까? 하고 자기 개인 생각한다고요. 구원받았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의 특징은 뭐냐? 이사야 61장 있지요. 61장과 방금 완성된 게 누가복음 몇장 입니까? 누가복음 4장 17절에서 19절이죠. 17절에서 19절을 몽땅 바로 우리 안에 말씀으로서 집어넣는 거에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이 말씀이 통째로 우리 안에 들어온다니까요. 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니까. 보편적 그리스도니까. 구원을 받는 게 아니고 걸어다니는 말씀이 되게 하신다니까 이것이. 그러면 우리는 이사야에 나오는 현실과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비현실 두 개다 이사야에 나오는 옛사람,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새사람, 이 둘 다 우리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인생을 살면서 이건 정말 귀한 충고라고 생각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하나도 버리지 마세요. 하나도 버리지 말고 다 모으되 그걸 사적가치 나의 개인적 가치, 사적 가치 용도로 모으지 마시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이 말씀 성경말씀 집어넣기 위해서 우리 안에 모든 걸 집어넣었다고 생각하시고 버리지 마세요.
제가 아까 껌이 하나 있길래 제가 씹어버렸습니다. 오래된 껌인데. 껌을 하나 씹은 것도 껌이 하나 발견되서 껌 씹은 것도 버리지 마세요. 우리 안에 새사람, 옛사람, 현실과 비현실이 그것이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현장인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일어난 모든 일들이에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여러분들에게 당부했건만 그렇지 않고 아~ 이 일은 생각하기 싫어. 그때는 너무 수치스러웠어. 어찌 내가 인간이 돼서 그런 일을 하다니. 따로 버리지 마세요. 따로 버리게 되어 버리면 본인이 자기 의가 되어버려요. 자기 우상화된다고요.
그러면 그 자체가 옛사람 되어버려요. 악마의 해석이 되는 겁니다. 안돼 이거는 잊어야 돼. 잊어라 잊어라. 제가 주일날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크게 써야 돼요. 기억나지 않아도 잊혀지지 않아요. 지금 웃는 사람은 이 노래 알고 안 웃는 사람은 이 노래 모르고. 기억나지 않아도 잊혀지지 않아요 슬픔 뒤 밀려드는 그리움. 어느 권사님이 부른 노래인데 그때는 권사 아니지만 지금은 권사 됐어요.
아무리 잊을려고 해도 우리는 이미 발생된 일은 절대로 순두부 현실 속에 있습니다. 그 현실을 아니야 이걸 알면 나는 인간 조지는거야. 내 가치는 뭉개지는 거야. 저리가 저리가 하지 마시고 그대로 다 받아들이세요.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내가 우상 안돼요. 내가 우상시 안돼요. 모든 일어난 일은 곱게 곱게 모아놨다가 사적 가치용도로 쓰지 마시고 내가 잘났다 변명 쪽으로 하지 마시고 주님의 몸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어나야만 했던 일인 것을 그래야 내가 1/n이 되니까. 다 모아놓으세요.
범사에 감사할 것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것밖에. 그래서 이렇게 보게 되면 세상에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요. 겁나지 않고. 한 30년 만에 그때 초등학교 때 나를 그렇게 왕따했던 애를 만나도 무섭지 않아요. “아이고 이 코 찌질이 요새는 뭐해? 요새도 뭐 비리비리 살지?” 친구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것도 다 주의 일이니라.” 무슨 말인지 모르지 뭐. “다 그리스도 몸이 되기 위해서 주께서 일어난 일이야. 너무 귀해 안 버렸어 그 일. 네가 날 괴롭힌 거 절대 버리지 않아.”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야 하는 이 말은 바로 약속의 땅에 살지 못할 대상자에게는 성령이 안 옵니다. 이사야 61장에 보면 오직 성신은 약속의 땅에서 일어난 일을 겨냥해서 예언된 일이거든요. 약속의 땅, 약속의 땅이 어디입니까? 천국이지요. 천국에서 살지 못하는 사람한테는 절대로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없어요. 예수님의 충돌지점이 될 수가 없지요.
주님께서 우리 해석 내놓으라고 이야기한 적 없습니다. 주님의 해석 내놓으라고 이야기하지. 주님의 해석. 다 이루었다가 어디서 다 이루었다 했습니까? 십자가 내놓으란 말이에요. 십자가. 이제 죽어도 살았고 그거 내놓으면 돼요. 죽어도 살았고. 죄사함 받았다는 것. 영벌에서 어디로 옮긴다? 영벌에서 영생으로 옮겼다는 것은 죄사함이 나오게 되면 죄사함은 주님의 해석이에요.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일치되지 않아요.
아무리 바르게 살고 싶어도 또 숙제가 주어지는데 그 숙제를 이루지 못합니다. 죄사함은 한꺼번에 다 죄사하는 거에요. 이미 끝난 사항이에요. 끝난 사항을 우리가 뒤에 손가락 가지고 찝쩍댈 필요 없어요. 죄사함을 그대로 유지하세요. 자꾸 흠집내지 마시고. 같은 자식들에게 뭔가 엄마가 뭘 줘도 어떤 애는요 일주일째라도 그대로 있는 애가 있고 어떤 애는 다음날 되면 다 부서져 있는 애도 있어요. 너무 손을 함부로 놀려가지고.
주님께서 물론 성령께서 우리를 흠집 내도록 가만히 방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시 여기서 결론내려 봅시다. 방금 이 말씀입니다. 성령의 일은 뭐냐? 성령의 일은 주님의 완료를 흠집내게 방치하지 않는다. 흠집 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주의 일은. 그럼 흠집 낼라 치면 여기서 뭐가 주어지느냐? 징계가 주어지지요. 징계가. 주님의 성령의 징계라고 하는 것은 나를 징계 하는게 아니고 주님의 것이 온전함이 온전함으로 지켜주기 위해서 지켜주는 성령이에요.
그러니까 네가 안 해도 온전해 라는 사실을 지키기 위해서 징계를 주시는 겁니다. 왜 똑바로 안살아 그걸 하기 위해서 징계 하는게 아니에요. 그건 마귀가 하는 거에요. 네가 집안에 우환이 있는 것은 나쁜 짓해서 그렇잖아. 앞으로 하지 마. 이것은 변증법이에요 변증법. 그거는 진짜 언제까지 마귀한테 그렇게 속아 넘어갈라고 하는 겁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모든 일어난 일은 버리지 마시고 내 가치를 높이는 용도가 아니고 주님이 완성했다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일어나야만 할 일이란 말이죠. 그러면 그걸 그 모든 가치를 일을 벌이지 않을려면 어떻게 하면 되느냐? 버리지 말라고 해가지고 온 기억력 나쁜데 다 주워 넣어야 됩니까? 아니에요.
어떤 일을 할 때 미리 걱정하지 말고 그 현장에서 주님의 지시에 따르세요. 미리 걱정하지 말고. 벌벌벌 떨지 말고. 주님의 지시가 없으면 어떡하지? 그건 성령 안 받아서 그렇지. 그건 자기가 혼자 지시내리면 그건 자기 양심의 소리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그 현장에 주님의 지시대로 하면 되는 거에요. 너무 모호하면 구체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가수인데 너무 잘 나가요. 운동도 잘하고 예능도 잘하고 인기가 좋아요. 인기가 좋은데 군에 갈 때가 되었네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한테 물어보고 가겠습니다 해가지고 우리 아버지한테 인사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했어요. 나는 군대를 반드시 갑니다. 거짓말 아니고 반드시 갑니다. 그런데 마지막 작별인사만 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미국 건너가서 아버지한테 가서 시민권 얻어가지고 군대에 안 갔어요. 누가? 유승준이가.
전 국민에게 사기를 쳐버렸어요. 군에 가겠다고 인사만 하고 오겠다고 하고 왔는데 사기를 친거에요. 자, 그러면 그럴 일 없겠지만 그것도 장담 못하지만 유승준이 성령 받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유승준은 어느 대목에서 어떻게 생각을 해야 됩니까? 군에 가는 것이 주의 뜻이냐 아니냐를 자기는 장담하더라도 자기가 미국 가서 아버지한테 인사 드릴거냐 말거냐 부터 시작해서 주님의 지시를 받았느냐 이 말입니다.
미국 갔다 칩시다. 아버지 만났을 때 아버지 말대로 얘 너 인기라면 군에 안가도 몇 년 뒤에 가도 그대로 인기 있어 라는 아버지의 말대로 군에 안 갈거냐 갈거냐에 대해서 주님의 지시를 받았습니까? 아니지요. 주님의 지시가 없으면 만약의 성도라는 조건하에 성도라면 뭘 받겠습니까? 징계를 받겠지요. 그러면 유승준이 하는 모든 일이 누구 뜻대로 안됐어요? 내 뜻대로 안 되는 게 얼마나 성도라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자꾸 고소해서 한국에 뭐 있다고 자꾸 한국에 들어올라고.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지시를 받는데 잘 들으세요. 주님의 지시라는 것을 어찌 아느냐? 우리가 차후에 알아요. 차후. 차후에 안다는 말은 우리는 항상 결과물이 된다는 거에요. 결과물. 결과물로써 감사만 하면 돼요. 주여 내 뜻대로 안 해주신 것 너무나 감사합니다. 내가 주님의 지시를 오해해가지고 지시도 아닌걸 지시라고 여겼던 것을 뒤늦게라도 알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면 네가 그 지시를 모르는 게 나의 지시였었어 이렇게 되는 거에요. 복잡하지요. 결과물. 그런데 악마는 뭐냐? 네가 원인이라는 거에요. 네가 원인이 되야 된다는 거에요. 네가 지시를 따라야 되고 네가 순종만 하면 네 뜻대로 된다는 거에요. 주님의 지시를 그러면 성령이 왜 필요합니까? 성령이 왜 필요해요?
성령은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고발하는 기능이기 때문에 고발할 때 기준이 뭐냐 하면은 예수님이 다 해놓은 작품에 네가 티내지 말라 흠집 내지 말라고 고발하는 거에요. 주님의 심판이 심판이고 주님의 의가 의고 주님이 죄라면 죄인거야.
네가 아무리 착해도 관계없어. 주님의 의, 주님의 심판, 주님의 그 정죄 자체를 믿지 않는 게 죄가 돼요 그게. 그게 심판이 되고. 그게 바로 십자가에 오게 되게 되면 십자가 오게 되면 “다 이루었다” 그 한마디로 다 끝나버렸어요. 다 끝난 거에요. 이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이미 종결된 결과를 우리가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자, 그러면 지금까지 한걸 정리하게 되면 나를 위한 성경해석은 없다. 이거는 악마죠. 다 뭐다? 주님을 위한 성경해석이죠.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는 뭐냐 하면은 바로 우리의 옛사람에 비하면 현실이다? 현실 아니다? 비현실입니다.
여러분 이걸 감당해야 돼요. 우리는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것을 감당해야 돼요.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을 감당을 해야 된다고요. 그런데 막상 이렇게 해놓고 돌아서게 되면 눈에 보이는 게 전부에요. 현실이 전부고. 나만 손해냐 이런 식으로 그렇게 된다고요.
이런 말이 있는데 이런 말 여러분 누가 한번 해석해보세요. 암세포는 암세포 때문에 죽는다. 이 말이 돼요? 우리 몸에 암이 들어왔는데 암이 보니까 나중에 보니까 암이 죽었어요. 죽어서 건강하게 되었어요. 이유가 뭐냐? 암세포가 암에 걸려서 죽었어요. 이게 말이 돼요? 안돼요? 이게 말이 안되지요. 이게 뭐냐?
나의 해석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말이 안돼요. 나를 위한 해석이 나를 구원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을 받지 않은 사람은 나를 위한 해석 외에는 다른 해석을 해석이 없어요. 전부 다 나를 위한 해석이에요. 나를 지키기 위한 해석입니다. 나를 지키는 해석이라는 말은 현실을 지키기 위한 해석이라는 말이고 현실 지키는 해석이라는 말은 이 현실에서 이 눈에 보이는 땅에서 발 빼기 싫다는 해석이에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는 것은 뭐에요? 뭘 믿는 거에요? 떠난 주님 믿습니까? 살아계신 주님 믿습니까? 떠난 채로 오신 예수님을 믿어야지요. 그럼 예수님 믿는다는 말은 떠났다는 거잖아요. 십자가는 뭡니까? 떠났잖아요. 십자가 부활이 빠이빠이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뭘 믿어야 돼요? 빠이빠이를 믿어야지. 빠이빠이를.
자꾸 출근하는 아빠보고 아빠 힘내세요. 뽀뽀해. 이걸 왜 하느냐 하면은 저녁 되면 아빠 돌아오신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 날로 아빠가 딴살림 차린다면. 예가 좀 지저분하다. 그날로 아이 떼어놓고 딴 살림하면 아빠 힘내세요 해도 돌아오지 않아요. 주님은 딴 살림 차렸다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따라가야지요. 따라가지야. 발 빼야지요.
그러면 엄마가 너는 가서는 안돼. 나 아빠 따라 갈래. 엄마 손 놔. 차버려야지요. 해석이 이 해석. 이 땅을 차는 죽어도 좋아 상관없어 해석이 나와야 된다니까 해석이. 목사님이 성경을 설명할 때 해석이 여러분 이제 죽어도 좋지요? 이 내용하고 여러분 목숨하고 바꾼 겁니다. 바꿔도 괜찮지요? 그 해석이 그 설교가 나와야 된다고요. 그 설교.
설교 듣고 난 뒤에 더 살자, 단결하자, 우리 교회 부흥시키자 이런 해석이 나오면 안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죽는 게 얼마나 좋은데 이건 너무 큰 행운이에요. 죽는다는 게. 너무 큰 행운입니다. 왜 우리가 자살해서는 안 되느냐 하면은 아직까지라도 주의 말씀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옛사람, 새사람, 구약과 신약이 필요하기 때문에 완성해야 될 내용과 완성 됐던 내용 둘 다가 필요하기 때문에 안 죽는데 주님 봐서라도 안 데려가고 있는 거에요. 다 이거 다 끝나면 데려가실 거에요.
햇빛 알레르기 있다고 자기 엄마하고 같이 죽고. 엄마는 왜 죽는지 모르겠어. 엄마는 왜. 엄마는 햇빛 알레르기 없는 거 같은데. 박지선 말입니다. 내가 얼마나 좋아했다고. 뉴스에 코로나 이야기 나오지 말고 민주당 선거 서울시 후보 안낸다고 해놓고 투표하는 그런 뉴스 말고 박지선이 떠야 돼요. 박지선 자살. 그거 떠야 된다고요.
바로 그렇게 주께서 주변에 그런 현상 일어난 것 아까 우리가 배웠습니다. 어느 일어난 일도 모두 다 버리지 말고 다 해야 돼요. 하지만 이걸 나의 가치 나의 구원용도로는 절대 써먹지 마세요. 우리가 햇빛 알레르기 없는 것도 내가 착해서 없는 것도 아니고 그냥 1/n 의 역할이 또 다른 역할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은 우리는 죽습니다. 죽음은 현실이에요. 죽는다는 것은 비현실이 아니고 진짜 죽음입니다. 문제는 현실에서 죽잖아요. 그 다음?! 그 다음이 없어요. 그 다음이. 예수님이 길을 닦아놨는데 예수를 안 믿거든요. 예수는 비현실이라 안 보이기 때문에 예수님 다음에 뭡니까? 부활이 있잖아요. 그런데 이 세상은 부활을 인정을 하지 않아요. 과학적으로 부활이 말이 안 되니까.
예수 믿는다고 주어지는 게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다시 사는 게 부활이 아니고 부활은 무엇의 부활이냐 하면은 말씀의 부활이에요. 말씀의 부활. 말씀의 영원함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이 없으면 부활도 없어요. 죄사함도 없고 우리는 하나의 용도, 용기. 그릇이에요 그릇.
그릇 안에 말씀이 들어가야 돼요. 성령을 통해서. 그냥 말씀이 아니고 완성된 말씀. 죄사함이 다 된 말씀. 시간과 공간이 없어지고 단번에 끝난 말씀. 단번에 끝냈다는 내용이 우리 안에 있어줘야 된다 말이죠. 그래야 부활이 돼요. 왜? 예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이기 때문에. 나의 부활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과 동일한 속성과 성질을 가진 그 자에게 해당되는 부활이 예수님의 부활이고 그 다음에 그 다음 부활되고 그 다음 부활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희년이라는 것은 예수님 자체가 희년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구약 사람들은 카운트 한다고. 오늘 48년? 그럼 내년, 내년 다음에 희년. 이렇게 계산한다고요.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유월절 그 다음에 죽었다고요. 그 당시 유대인들은 유월절 지켰다고. 이미 왔는데. 어린양이 왔잖아요. 요한복음 1장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왔잖아요.
어린양이 왔는데 그 사람들은 카운트하고 있다고요. 어디서 양이 오나? 오늘은 어디서 양을 잡는가?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양고기 있죠 양고기. 양고기를 어디다 집어넣습니까? 그 양의 고기와 양의 피를 어디에다 집어넣었어요? 예수님한테 집어넣고 집어넣을 때 이것은 내 살이요 내 피라 했잖아요. 집어넣고 자기를 경유해서 토해내버린 거에요. 그게 예수님의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에게 영생이 없다는 말씀이에요.
그 당시 사람들은 이게 무슨 쇼를 하고 있나. 지금 교회 성만찬해도 쇼에요. 쇼. 성만찬할 때 살과 피가 중요한 게 아니고 사찰집사는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게 더 중요한 문제에요. 이건 목사만 해야 됩니까? 목사라도 부목사도 안 되고 당회장만 해야 됩니까? 당회장이라도 흠이 없는 사람만 해야 됩니까? 뭐 이러고 있단 말이죠.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이 없다는 그 말씀이 지키는 말씀이 아니고 내 안에 들어온 말씀이에요. 드루와. 드루와 하잖아요. 내 안에 들어온 말씀이여야 성령을 통해서 다 이루었다 들어온 말씀이라니까요. 들어온 말씀. 나를 위한 해석과 주님의 해석, 현실과 비현실이 우리 안에서 계속 충돌을 일으키는 일들을 우리 주변에 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일어난 일을 하나도 버리지 마세요. 다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걸 나를 위한 말씀으로 사적가치로 모아버리게 되면 내가 부끄러운 일은 버리게 되고 아~~나는 안 볼란다~ 버리게 되고 괜찮고 착한 일만 끌어모아서 그것으로서 천국 갈려고 부자청년처럼 들이밀게 되는데 그게 바로 악마의 일입니다. 부끄럽다 안 부끄럽다 내가 측정하지 마세요. 다 완성된 말씀이에요.
좀 뻔뻔 넘어 뻔뻔. 인간이 저렇게 뻔뻔할 수가 있나? 본인이 놀래야 돼요. 본인도 놀래요.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뻔뻔스러워야 됩니다. 배 째라. 그래 배 째라 이렇게 돼야 돼요. 여러분 그거 감당 못하면 사회 나가서 조그만 일하게 되면 그게 아파가지고 잠도 못 자게 돼요. 세상을 떠날 사람이 세상 일 때문에 잠도 못 잔다는 것은 이거는 볼모로 잡힌 거에요 그거는.
포로된 거에요. 포로된 자 해방한다는데 해방 안됐어. 포로잡힌 거에요. 포로잡힌 거. 자꾸 양심의 소리가 나를 포로잡는 거에요. 양심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피로써 죄사함이라는 말은 네 피가 아니고 예수님 피입니다. 무슨 형이에요? 죄송하지만 무슨 형이에요? AB형. AB형이라는 것은 과학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건 성격과 아무 상관없어요.
다시 말해서 우리 성격과 천당가는 것과 아무 상관없어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습니다. 어린양의 피죠. 어린양의 피가 말씀이 되어서 우리 안에 완성으로 들어오는 거에요. 옛날에 못살 때 미개인들이 축구공이 없으니까 돼지 오줌통으로 축구했다 하고 또 징기스탄 몽골군사들은 전쟁할 때 보급이 중요하거든요.
보급하기 위해서 말에다가 돼지 오줌통에다가 말고기랑 양고기 이런 것을 썰어가지고 말려가지고 돼지 오줌보를 들고 있다가 강물에 어디 가가지고 불에다가 오줌보에 있는 고기를 집어넣으면 그게 바로 샤브샤브의 원조지요. 그게 샤브샤브가 몽골에서 나온거에요. 샤브샤브는 원해 말고기, 양고기로 하는거지 소고기 아니에요. 그렇게 된 거에요. 무슨 이야기하다가?
우리 안에 완성된 것을 오줌보로 생각하고 완성된 것을 담아내는 거에요. 완성된 것을. 그러면 완성됐는지 안됐는지 완성된 것이 들었는지 안 그러면 내 욕심이 들었는지 어떻게 구분합니까 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주님과의 충돌지점이다. 그럼 어떤 사람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냐? 광야에서 예수님과 악마의 해석차이, 말씀을 두고 말씀 안 믿고가 아니라 말씀을 두고 말씀을 다 같이 인정하는데 해석의 차이를 보는 거에요.
한쪽은 무슨 해석이다? 미완료다. 한쪽은 무슨 해석입니까? 완료적 해석이 나오게 되면 성도고 미완료 해석이 나오면 그건 불신자고 그래요. 그냥 성화를 한다고 갈 때까지 가보자 최선을 다하면 되겠지 그거는 변증법이라니까요. 그런데 성령 받지 않은 사람한테는 완성을 이야기 해버리면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요. 악마가 있으니까.
그래서 교인들 잡을려면 할 수없이 뭐라고 합니까? 완성보다는 성화 쪽으로 가야되는 거에요. 착하면 복 받는다. 현실적으로 그런 간증집회. 맨날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주님 십자가 이야기 안하고 누가 기도해서 복 받았다 감사헌금해서 복 받았다 그 이야기를 늘어놓는 겁니다. 자꾸 보는 것으로 믿을려고 시도하는 거에요.
자, 그 다음에 그 다음 좀 봅시다. 19절 한번 봅시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사야에서 은혜의 해가 50번째 돌아오는 해입니다. 그러면 역사적으로 시간적으로 시간적으로 보게 되면 7x7=49+1은 뭐가 됩니까? 50이 되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진행방향이 뭡니까? 50년을 향해서 가잖아요. 그러면 50년이 오줌보라면 그 다음부터는 뭡니까?
이런 역사의 흐름이 필요 없이 그냥 함박눈이 내리듯이 완성이 눈 내리는 거에요. 누구한테? 이스라엘, 약속된 이스라엘. 눈 내려버리면 성도가 살아가는 모든 발자국이 어느 위에 내는 발자국이냐 하면은 다 이루심의 나의 더러운 발자국을 남기겠지요. 그러면 발자국을 남긴다는 이걸 더럽다고 하지 말고 상대적으로 무엇이라고 봐야 돼요?
다 이루심의 흰 것을 부각하기 위해서 밟아 보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죽을 때까지. 그래서 우리는 안 죽이는 거에요. 살아가면서 더러운 죄인의 괴수가 세상에 죽기 전에 이렇게 완성을 보다니. 희년을 보다니. 다 용서, 죄사함을 보다니. 기름부은 자의 나라, 메시아의 나라의 메시아만 가야될 그 나라. 희년의 공로자만 가야 될 그 나라가 그 기름부은 자가 혜택을 입혀줘가지고 우리는 주님이 누려야 될 그 모든 영광을 이 더러운 우리가 같이 누릴 수 있게 될 수 있다니 이것을 확인하는 작업이에요.
그래서 제가 주일날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우리의 결정적인 타이밍은 없고 결정된 것을 확인하는 타이밍만 있다고요 우리는. 매순간. 우리에게는 의가 안 나와요.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의는 안 나옵니다. 자꾸 의를 골라잡지 마세요. 일어난 모든 일은 주님께서 의롭다는 것을 확인해주러 온 거에요. 온갖 지저분한 게 있을 거에요. 그게 지저분한 일이 놀랍게도 네가 의인이다를 증명하기 위한 지저분한 일이라니까요.
이거 참 어느 교인이 알아듣겠어요. 어느 교인이 알아듣겠습니까? 목사님 잘됐다. 알겠습니다. 앞으로 사기 치겠습니다. 사기를 치지 말고 현장에서 치세요. 주님이 치셨다. 현장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사기인데 뭘 또 사기를 쳐요. 산다는 것 자체가 사기인데. 우리는 변합니다. 사기 치겠다는 것도 나중에 보면 사기 못 쳐요. 우리는 내 맘대로 안돼요. 어떤 변수가 생길지 누구나 장담 못하는 겁니다.
흔히 남자들이 여자한테 꼬실려고 하는 말이 사랑한다는데 그걸 믿는 여자가 바보고 남자는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 하는지 몰라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고정되었을 때 가능한 거에요. 그러면 사랑은 누구한테만 해당돼요? 아가서에 아가에 나오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에게만 사랑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이미 다윗 언약의 완성이잖아요.
옷을 보지 않아요. 있는 그대로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그런데 오빠는 자기 누이동생을 아주 무시하지요. 그러나 솔로몬 왕이 이쁘다는데 왜 다른 제 삼자의 이야기 들을 필요 없어요. 내가 이쁘다잖아 내가. 내가 너를 구원했다 이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해석이 다르기 때문에. 악마가 어떤 점에서는 고마워요. 악마의 해석을 받았기 때문에 사람은 착해야 선악체계에 의해서 착해야 복 받고 착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이미 장착이 된 상태에서 난데없는 생소한 해석이 들어와버린 거에요.
내가 네 죄를 처리했다는 생소한 해석이 와버렸으니까 그 무슨 죄를 처리했습니까? 살아보면 너는 알 거야. 어떤 게 죄인지. 너의 옛사람, 눈에 보이는 현실이 현실이라고 여기는 그게 바로 죄야. 모든 게. 모든 게 나 유리하게 하고 나 잘난 체 하려고 하는 이 모든 게 다 죄가 된다는 것. 이왕 눈 온 거 좀 발자국 밟아도 괜찮아요. 막 밟아도 괜찮단 말이죠. 강아지 하나 데리고. 눈이 이만큼 쌓였는데.
그런데 불신자들은 눈이 안보여. 경쟁자만 보여. 교회 가도 경쟁자만 보여요. 누가 기도 오래하고 누가 성경 많이 보고. 모든 세상이 교회나 세상이나 경쟁. 지기는 싫다. 그런 좀비들만 모인다고요. 좀비들만. 심지어 가족도. 형제간에 부모 자식 간에. 전부 다. 부모 자식도요 돈 없으면 원수죠. 돈 있어야 자식이고 돈 있어야 부모지 돈 없는 부모가 부모입니까?
뭐 1/n 이라도 남겨줄게 있어야 부모지. 그것도 없이 그냥 생까고 돌아가시면. 그것보다 더 미운 것은 맏이에게 다 줘버리고 둘째는 나 몰라라 하는 것. 원수죠 원수. 돈이 사람 원수 만든다고요. 그 말은 뭡니까? 나는 부모를 부모로 보지 않고 돈 주는 사람으로 봤다는 뜻 아닙니까. 돈 없다고 부모를 원수로 보는 것은 나는 부모를 부모로 보지 않고 돈으로 자기를 표시하는 대상으로 본거죠. 그래도 우리가 죄인 아니에요?
나만 고정적인 인간이 될려고 시도하는 것. 그게 오늘날 우리 모습인데 그런데 여기 보면 은혜의 해, 자유케하는 은혜의 해. 은혜가 뭡니까? 선물이에요. 선물로 주는 해석. 선물로서의 구원. 그냥 주신 이 비현실. 여러분 성령께서는 여러분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에요. 여러분들이 그 말씀을 여러분을 절대로 택한 백성, 성령께서 어떤 수를 써서라도 여러분들을 탈락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해석만 알았습니다. 그게 전부인 줄 알았고 선뜻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납득이 가는 해석이 십자가 사건을 유발했고 주님을 죽게 했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해석, 십자가만이 다 이루었다는 그런 해석의 장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